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삼촌
    2026-03-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289
  • [국악인]앞서가는 행복한 음악가 - 원장현 명인

    대금의 명인 원장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안국동의 멋진 3층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아들딸과 음악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아내와 걱정 없이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완철은 이미 최고 수준의 대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 연주단원이고 딸 나경 역시 서울 음대 졸업반이면서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석권할 만큼 뛰어난 해금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온 가족이 음악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할 만큼 실력 있는 개개인이어서 국악인이면 모두 부러워할 정도다. 음악만 해온 원장현이지만 자동차도 외제 볼보를 타고 로터리클럽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지나는 사람들이 집에 들르면 차 한 잔이라도 따뜻하게 대접할 만큼 여유 있게 산다. 1982년 서울에 올라와 83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 원장현은 처음 아쟁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 되었다. 그 후 거문고로 바꾸어 단원생활을 하다가 나중에야 자기 전공인 대금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대금을 전공했지만 국립국악원에서 대금 연주자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그가 왼손잡이여서 대금을 왼쪽으로 잡고 불기 때문이었다. 고수는 왼손잡이라도 상관없이 무대에 세우면서 대금만은 오랫동안 무대에 세우지 않았던 과거 편견 때문에 원장현은 아쟁과 거문고를 상당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가 되었다. 1950년 전남 담양 출생인 그는 아버지(光俊 : 대금) 삼촌(光浩 : 거문고의 인간문화재)이 모두 음악가인 음악 가문 출신이어서 중학생 때부터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김용기에게 처음 대금을 배웠고 김동식에게 대금산조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제일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한일섭이다. 민속악의 천재라 불리던 한일섭은 그분 생의 마지막 무렵에 원장현을 만나 본인이 생각하는 멋진 대금산조 가락을 구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한일섭은 대금 연주자가 아니었지만 한주환과 오랫동안 활동한 영향도 있고 하여 정말 멋진 대금산조 가락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전수받은 대금 가락을 실제 악기에 올려 연주한 것은 원장현이다. 그런데 85년 국립국악원의 무형문화재 제66회 공연 때 원장현은 바로 그 대금산조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 대금산조의 이전 연주자가 없기 때문에 ‘원장현류 대금산조’라고 발표했다. 원장현류 대금산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남들은 누구의 뒤에 자기를 세우려 난리를 치는 시대에 30대의 젊은 연주자가 떳떳하게 자기류의 작품이라고 발표했으니 그 생각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멋진 대금산조 작품의 창시자가 되었고 그 음악을 녹음한 음반은 엄청난 양이 팔려 나갔다. 뿐만 아니다. 93년 <원장현의 음악세계>와 98년 <날개>를 음반으로 냈는데 그 음반 역시 수억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많이 팔렸다. 2001년에 낸 <항아의 노래>도 계속 잘 팔리고 있는 음반이다. 이런 음반들의 음악은 모두 원장현이 직접 작곡하여 녹음한 것들이다. 악보로 그리는 작곡이 아니라 옛날 명인들처럼 그냥 본인의 구상대로 악기로 직접 연주하는 그런 작곡 방법이다. 딸 나경이 건반악기를 하기 때문에 함께 작업하면서 새 음악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런 민속 감성의 음악들을 음반으로 내놓아 큰돈을 번 것이 원장현이다. 한때 인사동 거리에서 판매한 적이 있는데 매일 200만 원 정도의 음반이 팔렸었다고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을 때도 음반 매장에서 음반을 가지러 온 직원을 볼 수 있었다. 원장현은 남을 앞서가는 생각을 하고 그런 것 여러 가지를 실천했기 때문에 지금 잘 사는 국악인이 되었다고 본다. 음반도 그런 예이지만 공연도 특별한 공연을 많이 했다. 93년에 시작한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이라는 공연은 중국의 음악가를 초청하여 공연하고 또 다음번에는 인도의 음악가를 초청하여 공연하는 식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 음악가를 초청하여 그 나라 음악과 한국음악을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음악회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음악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장현의 음악에 매료된 재일 교포 도쿠마루(德山 洪允茂) 씨가 적극 후원했기 때문인데 이후에는 원장현 스스로 이 음악회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생겨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후원자도 생기고 매표도 잘 되고 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원장현 가족은 모두 음악을 한다. 부인 조경주는 서울 음대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면서 고전무용도 솔로를 할 정도로 잘 춘다. 아들은 대금을 전공했고 딸은 해금을 전공했는데 원장현의 누이동생 원경애도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호주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일본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원경애 씨가 일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본 공연은 더 자주 하게 된다. 도쿄(2000년)에서도 했고 오사카(2005년)에서도 했다. 금년 가을에도 일본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원장현은 30대에 대금산조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제자도 많이 길러내었다. 부인과 함께 금현국악원을 88년에 설립하여 일반인 전공자 할것없이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그가 펴낸 대금산조의 악보가 3000부 이상 팔렸으니 그 숫자만 봐도 그의 음악을 하는 대금 인구가 많을 것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대학교수가 된 제자들만 따지더라도 서울대의 임재원, 수원대의 임진옥, 영남대의 안성우, 전북대의 이화동 등 여러 명이고 각 악단에서 활동하는 전문인이 수두룩하다. 이런 그의 활동이 널리 알려져 그의 고향 담양에서는 그의 대금 부는 실물 형상을 조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 금년 제4회째인 담양전국대나무악기경연대회를 만들어 하게도 했다. 대회의 일반부와 학생부 우승자에게는 원장현의 호를 딴 동려상(東呂賞)을 준다. 그가 태어난 고향이 그를 훨씬 높여주고 그의 예술을 많이 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원장현은 행복한 사람이다. 국악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국악만 하고 사는데 남들보다 잘 살고 남들에게 덕을 입히며 살고 있다. 지금 다섯 번째 음반을 구상하고 있다는데 좋은 음반 만들기 바라고 가을에 있을 가족들의 일본 공연도 잘하기 바란다.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삶과꿈 4월호
  • 해병대 58년만에 1000기 전역식

    “필승! 신고합니다. 해병대 1000기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귀신 잡는 해병’이 58년 만에 1000기 전역자들을 배출했다. 경북 포항의 해병대 1사단은 20일 사단 연병장에서 가족과 친지, 해병대 예비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병 1000기 전역식을 가졌다. 이날 주인공들은 2005년 6월21일 입소, 혹독한 훈련을 받은 뒤 2년여간 국방의 의무를 다한 해병 1000기 358명 중 96명이다. 다른 262명도 김포, 백령도, 연평도 등 모두 6곳에서 탈락자 없이 건강한 얼굴로 전역식에 참가했다. 특히 이들은 군 복무를 하는 동안 1000기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으로 평소보다 높은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빨간 명찰’을 달았다. 해병대 관계자는 “다른 기수보다 자부심과 전우애가 남달랐다.”고 전했다. 외할아버지와 친·외삼촌 등 가족 5명이 해병대 출신인 한국인(22) 병장은 “해병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뤄 기뻤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해 가슴 뿌듯하다.”면서 “사회에 나가서도 지난 2년간 동고동락한 해병 1000기 전우들과 함께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00명으로 1기를 탄생시킨 이후 이날 1000기를 탄생시켰다. 해병 예비역은 일반병 63만여명, 간부 20만여명 등 모두 83만여명이다. 현재는 1048기가 교육훈련단에 입소해 무적 해병이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있다.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中 40대 남성과 10대 소녀간 ‘사랑’의 종착역은?

    “나참, 딸 또래의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어이가 없네요.그것도 초혼도 아닌 이혼남인 주제에” 중국 대륙에 한 40대 남성이 딸 또래의 10대 소녀와 결혼하려다가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자, 격분한 나머지 소녀의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경악케 하고 있다. 지난 6일밤 중국 동중부 산둥(山東)성 웨이하이웨이(威海) 환추이(還翠)구에서 한 40대 남성은 자신과 사귀던 10대 소녀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며 헤어지라고 요구하는데 앙심을 품고 그녀를 무차별 난도질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주변 사람들이 충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북경일보(北京日報) 인터넷신문인 천룡(千龍)망이 15일 보도했다. 참극을 벌인 장본인은 올해 47살의 장충씨.중국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스(佳木斯) 출신의 그는 2년전 이곳 웨이하이웨이로 돈 벌러와 담비농장에 취직했으나,돈벌이가 신통찮아 ‘건달’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참극은 담비농장에 취직한 장이 그곳에서 일하던 소녀의 어머니 신류(辛柳)씨를 만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같은 농장 동료로서 관계가 아주 좋았다.이 때문에 신씨는 외지에서 고생하는 장을 자주 집으로 불러 밥을 대접하곤 했다.그러다보니 샤오리(小麗·19)양은 자연히 장과 가까워지게 됐고 친삼촌처럼 따르게 됐다. 그러던중 지난해 7월 샤오리양은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기분이 ‘꿀꿀’해졌다.그녀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장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며칠 지난 뒤 장은 갑자기 샤오리양에게 고향인 헤이룽장성 자무스에 좀 다녀와야겠다며 같이 가자고 권했다.마침 기분이 ‘꿀꿀’하던 차에 부모님을 설득해 같이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자무스에 도착한 당일밤 장은 샤오리양에게 자신의 애인이 돼 달라며 프로포즈했다.샤오리양은 너무 갑작스럽게 프로포즈해온 까닭에 한동안 우두망찰했다.특히 자기보다 무려 28살이 많은데다 이혼까지 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장은 이어 “나는 그동안 한푼 두푼 애써 모은 돈으로 고향에 공장을 세울 계획”이라며 “나와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고 유혹했다. 샤오리양은 이 말을 듣고 긴가민가하던 차에 장이 또다시 그와 같이 자무스로 가자고 청했다.이에 샤오리양이 그곳에 가보니 그가 말하던 공장 설립계획을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어 마음은 여전히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리양의 어머니가 이들의 결혼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다 이혼남인 남자와 같이 사느냐고….이후 샤오리양의 어머니와 장을 만나기만 하면 말다툼을 벌이는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지난달 초 어느날,샤오리양의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 장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며 달려왔다.샤오리양의 사촌 오빠가 장을 찾아가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우리 사촌동생과 결혼하려고 하느냐.”며 “지금 당장 사촌동생과 헤어져라.”고 엄중 경고한 탓이다. 화를 참지 못한 장은 샤오리양의 어머니에게 막말을 하자,이를 참지 못한 그녀가 그의 빰을 때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이때 마침 샤오리양이 집으로 돌아와 뜯어말리는 바람에 겨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분함을 삭이지 못한 장은 샤오리양의 어머니에게 보복하기 위해 샤오리양을 납치한 것처럼 속이고 산으로 유인해 살해하려고 했다.하지만 샤오리양이 간곡하게 말리는 바람에 할 수 없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샤오리양의 어머니와 장의 감정싸움이 너누룩해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됐다.지난 4일 장은 또다시 샤오리양의 어머니 신씨와 충돌했다.이때 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신씨의 뺨을 몇대 때렸다.이를 본 샤오링양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장에게 헤어질 것을 선언했다. 이에 장은 샤오리양에게 “나와 헤어지겠다면 너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욱대겼다.이 소식을 들은 샤오리양의 계부가 6일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했고,공안의 중재 아래 장과 샤오리양은 헤어지기로 했다.샤오리양의 어머니는 신씨는 장에게 차비조로 100위안(약 1만 3000원)을 건네줬다. 장은 그러나 마음 속으로 신씨에 앙심을 품었다.그날밤 샤오리양의 집을 찾아가 신씨를 칼로 무차별 난도질해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을 하는 엄청난 비극으로 끝났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양반 관료들은 고유 업무가 있었으므로 일생에 한번 사신으로 가기 어려웠다. 두 차례 이상 나갔던 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관들은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게 업무였으므로, 능력만 인정되면 몇 번이라도 나갔다. 외국에 많이 나갈수록 회화 솜씨가 느는 것이 당연했다. 가장 많이 나갔던 역관은 이상적(李尙迪·1803∼1865)과 그의 제자 오경석인데, 이상적은 27세 되던 1829년부터 환갑이 지난 1864년까지 열두 차례나 나갔다. 한번 왕복하는데 반년 넘게 걸리고 준비기간까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의 절반은 외국에서 머문 셈이다.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예가 있지만, 모두 일회성에 그쳤다. 이상적 같이 지속적으로 교유한 예는 없었다. ●9대에 걸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우봉(牛峰) 이씨는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세습 역관 집안이다. 증조부 이희인과 조부 이방화가 역관들의 교육기관인 교회청(敎誨廳) 훈상(訓上·정3품)을 지냈으며, 생부(生父) 이정직과 양부(養父) 이명유는 사역원 첨정(僉正·종4품)을 지냈다. 아우 상건, 사촌 상익, 조카 용준도 연행(燕行)의 수역관(首譯官)과 교회청 훈상을 지냈다. 손자 대에 이르러 태정, 태영, 태준이 모두 역관으로 중국에 드나들었다. 생부 이정직(1781∼1816)과 당숙 이정주(1778∼1853)는 송석원시사에 드나든 위항시인인데, 이상적은 이정주의 시집 ‘몽관시고(夢觀詩稿)’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 주었으며,“만당(晩唐)의 여러 시인을 닮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역관들을 가르쳤던 교회역관(敎誨譯官)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는데, 김양수 교수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교회역관 442명의 집안을 분석해본 결과 97씨족 가운데 우봉 김씨가 2위, 우봉(강음) 이씨가 8위라고 하였다. 이상적의 외가인 설성(雪城) 김씨도 역시 역관 집안이어서, 외조부 김상순, 외삼촌 김경수가 모두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문집을 북경에서 출판하다 이상적은 제8차 연행이었던 1847년, 북경 유리창에서 문집 ‘은송당집’을 간행하였다. 국내외에서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12권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표지의 제목과 서문, 찬(贊)을 모두 청나라 문인들이 짓고 써주어, 그의 교유 범위를 짐작케 한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해린척독(海隣尺牘)’이라는 10권 분량의 서한집을 편집했는데, 이 책은 출판되지 않고 호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필사되어 전해졌다. 해린(海隣)이라는 두 글자는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시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으리(海內存知己,天涯若比隣)”라는 구절에서 나왔다.“세상 모두가 이웃(海隣)”이라는 생각은 ‘논어’의 “천하가 다 형제(四海之內,皆兄弟也)”라는 구절에서 나왔는데, 이상적은 자신의 서재 이름을 ‘해린서옥’이라고 하여, 조선에서는 중인이라 차별대우를 받지만 하늘 저 끝에서는 이웃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을 나타냈다. 청나라 문인들에게서 받은 이 편지집은 규장각, 장서각, 고려대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과 일본 덴리대학 이마니시류(今西龍)문고,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다른 제목으로 소장되었는데, 필자가 옌칭도서관에서 발견하여 ‘출판저널’에 소개한 ‘화동창수집(華東倡酬集)’의 분량이 가장 많다.56명 148통의 편지가 실렸는데,‘은송당집’의 출판을 주선해준 오정진(吳廷)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상적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오정진은 원문 교정에서 종이 구입, 인쇄비 계산과 계약금 전달, 인쇄 및 배포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편지를 통해 업무를 추진했다. 서문은 이상적의 친필을 그대로 새겨서 찍자고 권하기도 했다. 목판은 북경 광성화포(廣成貨鋪)에 보관해 두었는데, 오정진도 20부를 추가로 인쇄해 친구들과 나눠 보았으며. 성리학자 주돈이(周敦)의 후손인 주달(周達)도 자기 돈을 들여 200부를 더 찍어 강남 일대에 전파시켰다. 이상적은 1859년에도 북경에서 속집(續集)을 간행하였다. 본집과 속집까지 합하여 24권 체제의 ‘은송당집’은 그 이후에도 조금씩 달라진 체제로 여러 차례 간행되어 국내외에 독자를 늘려갔다. 임금이 자신의 시를 읊어준 은혜에 감격하여 문집 이름을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 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을 정확히 보고하다 해마다 여러 차례 사신들이 중국에 다녀왔지만, 개인적인 교류는 별로 없었다.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청나라 문화에 관심이 깊었던 연암 박지원이라든가 담헌 홍대용 같은 실학자들이 사신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면서 청나라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자에 익숙했지만 중국어 회화는 못했기 때문에 붓으로 글씨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이들이 필담(筆談)을 통해 청나라 문인들과 학문을 논하고 신간 서적을 구입해 오자, 조정에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조 10년(1786) 1월 22일에 대사간 심풍지가 “연경에 가는 사신은 사행(使行)에 관한 일 이외에, 그쪽 인사들을 방문하여 필담을 나누거나 서찰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소서.”라고 아뢰자, 정조가 그대로 따랐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역관 문인들이 능숙한 중국어 회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역관이 바로 이상적이다. 한 차례 연경에 다녀오면서 수완이 뛰어난 역관은 이듬해에도 선발되어 다녀왔는데, 이상적은 열두 차례나 선발되었다. 임무가 없었던 자제군관과는 달리, 수역(首譯)에게는 “청나라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라.”는 왕명이 주어졌다. 이상적이 1859년 제10차 연행에서 돌아와 올린 견문사건(見聞事件)을 한 구절만 읽어 보자.“경술년(1850) 선황(先皇)이 붕어하자 광동 서쪽지역에서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바닷물이 평지에 솟구치며, 벌레와 모래가 먼지 속에 묻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록 황하 이북으로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지만 장강 남쪽에서는 아직도 횡행하여 고을의 성곽을 빼앗았다 잃었다 변화가 무쌍하니, 나라와 개인의 축적이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줄임) 도적이 요사한 천주교의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니, 나라가 망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신 일행은 북경을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양자강 남쪽의 사태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상적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유를 통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정확하게 보고하였다. 조정의 장수들이 군자금을 빼돌리고, 영국 오랑캐가 이 틈을 타서 약탈을 감행하며 천진(天津)을 개방하라는 압력까지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라고 의지했지만, 이상적은 청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것이다. ●오경석과 오세창으로 이어진 역관 제자들 역과 응시자가 많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과거공부를 시켰다. 일단 역과에 합격해야만 대를 이어 역관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역관이 되더라도 통역 실력이 뛰어나야만 자주 북경에 가서 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름난 역관 가문 가운데 하나가 해주(海州) 오씨인데, 이상적과 함께 역과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한 오응현은 동기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이상적을 자기 아들 오경석의 스승으로 모셨다. 이상적은 오경석을 비롯한 역관 자제들에게 역과 시험문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린서옥(海隣書屋)에 소장한 골동 서화를 보여주며 서화(書畵)에 관한 지식도 가르쳤다. 뒷날 오경석이 귀중한 골동서화를 많이 수집한 것도 이상적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북경에 13차례나 다녀오면서 서구세력의 침략과 청나라의 몰락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나서게 된 것도 이상적의 국제적인 안목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경석은 자신의 아들 오세창이 8세가 되자 집안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역관 수업을 시켰으며,16세가 되던 1879년 5월 역과에 합격하자 가숙을 철거하였다. 역관이자 서예가로 활동하던 오세창은 뒷날 삼일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이후 서울신문사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에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되어 9년 동안 외롭게 살았는데, 추사에게 시(詩)·서(書)·화(畵)를 배운 이상적은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책과 중국 문인들의 편지를 가지고 스승을 찾아가 전달하였다.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추사가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인데, 세한(歲寒)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한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 그림에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고 썼는데,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제7차 사행을 마친 1845년 1월 13일에 오정진이 북경 우원(寓園)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상적은 이 자리에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 18명으로부터 시와 발문을 받았다. 추사로부터 이상적을 거쳐 오경석과 오세창으로 이어진 중인 문화를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40대 남성과 10대 소녀간 ‘사랑’의 종착역은?

    “나참,딸 또래의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어이가 없네요.그것도 초혼도 아닌 이혼남인 주제에” 중국 대륙에 한 40대 남성이 딸 또래의 10대 소녀와 결혼하려다가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자,격분한 나머지 소녀의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경악케 하고 있다. 지난 6일밤 중국 동중부 산둥(山東)성 웨이하이웨이(威海) 환추이(還翠)구에서 한 40대 남성은 자신과 사귀던 10대 소녀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며 헤어지라고 요구하는데 앙심을 품고 그녀를 무차별 난도질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주변 사람들이 충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북경일보(北京日報) 인터넷신문인 천룡(千龍)망이 15일 보도했다. 참극을 벌인 장본인은 올해 47살의 장충씨.중국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스(佳木斯) 출신의 그는 2년전 이곳 웨이하이웨이로 돈 벌러와 담비농장에 취직했으나,돈벌이가 신통찮아 ‘건달’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참극은 담비농장에 취직한 장이 그곳에서 일하던 소녀의 어머니 신류(辛柳)씨를 만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같은 농장 동료로서 관계가 아주 좋았다.이 때문에 신씨는 외지에서 고생하는 장을 자주 집으로 불러 밥을 대접하곤 했다.그러다보니 샤오리(小麗·19)양은 자연히 장과 가까워지게 됐고 친삼촌처럼 따르게 됐다. 그러던중 지난해 7월 샤오리양은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기분이 ‘꿀꿀’해졌다.그녀의 이런 모습이 오히려 장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며칠 지난 뒤 장은 갑자기 샤오리양에게 고향인 헤이룽장성 자무스에 좀 다녀와야겠다며 같이 가자고 권했다.마침 기분이 ‘꿀꿀’하던 차에 부모님을 설득해 같이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자무스에 도착한 당일밤 장은 샤오리양에게 자신의 애인이 돼 달라며 프로포즈했다.샤오리양은 너무 갑작스럽게 프로포즈해온 까닭에 한동안 우두망찰했다.특히 자기보다 무려 28살이 많은데다 이혼까지 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장은 이어 “나는 그동안 한푼 두푼 애써 모은 돈으로 고향에 공장을 세울 계획”이라며 “나와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고 유혹했다. 샤오리양은 이 말을 듣고 긴가민가하던 차에 장이 또다시 그와 같이 자무스로 가자고 청했다.이에 샤오리양이 그곳에 가보니 그가 말하던 공장 설립계획을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어 마음은 여전히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리양의 어머니가 이들의 결혼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다 이혼남인 남자와 같이 사느냐고….이후 샤오리양의 어머니와 장을 만나기만 하면 말다툼을 벌이는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지난달 초 어느날,샤오리양의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 장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며 달려왔다.샤오리양의 사촌 오빠가 장을 찾아가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우리 사촌동생과 결혼하려고 하느냐.”며 “지금 당장 사촌동생과 헤어져라.”고 엄중 경고한 탓이다. 화를 참지 못한 장은 샤오리양의 어머니에게 막말을 하자,이를 참지 못한 그녀가 그의 빰을 때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이때 마침 샤오리양이 집으로 돌아와 뜯어말리는 바람에 겨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분함을 삭이지 못한 장은 샤오리양의 어머니에게 보복하기 위해 샤오리양을 납치한 것처럼 속이고 산으로 유인해 살해하려고 했다.하지만 샤오리양이 간곡하게 말리는 바람에 할 수 없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샤오리양의 어머니와 장의 감정싸움이 너누룩해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됐다.지난 4일 장은 또다시 샤오리양의 어머니 신씨와 충돌했다.이때 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신씨의 뺨을 몇대 때렸다.이를 본 샤오링양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장에게 헤어질 것을 선언했다. 이에 장은 샤오리양에게 “나와 헤어지겠다면 너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욱대겼다.이 소식을 들은 샤오리양의 계부가 6일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했고,공안의 중재 아래 장과 샤오리양은 헤어지기로 했다.샤오리양의 어머니는 신씨는 장에게 차비조로 100위안(약 1만 3000원)을 건네줬다. 장은 그러나 마음 속으로 신씨에 앙심을 품었다.그날밤 샤오리양의 집을 찾아가 신씨를 칼로 무차별 난도질해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을 하는 엄청난 비극으로 끝났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약발라 주며 상습 성매수

    가출한 여중생을 6개월 동안 모텔에 감금하고 성매매를 강요한 20대 남녀 3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전북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4일 미성년자 약취 유인 등의 혐의로 진모(여·20)씨와 진씨의 남자친구 김모(20)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친구 사이인 진씨 등은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 22일까지 6개월간 A(14·중3)양을 광주시 치평동 모 모텔에 감금하고 남성 1000여명을 상대로 성매매를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정으로 된 아이디를 이용, 인터넷 채팅게시판에 성매매를 암시하는 글을 올려 성매수 남자들을 유인한 것으로 드러났다.A양과 안면이 있던 진씨 등은 A양이 지난해 10월 어머니와의 불화로 가출한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A양에게 매회 10만∼20만원의 화대를 받고 하루에 5차례 이상 성매매를 강요했으며 화대로 받은 1억 2000여만원 모두를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A양은 이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지난달 22일 모텔에서 도망쳐 전주의 삼촌집으로 찾아왔고, 진씨 일당은 전주로 A양을 잡으러 왔다가 신고를 받고 잠복 중인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사를 통해 A양과 성매매를 한 남자 1000여명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성매수남 가운데는 대학교수, 의사, 약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교수 2명은 A양이 납치돼 몸을 파는 것을 알면서도 구출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단골손님’이었던 한 약사는 10여차례 관계를 가질 때마다 폭행을 당해 상처를 입은 부위에 약을 가져다 발라주기도 했다.A양은 현재 전주시내 모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시인과 고향]향수는 시인을 놓아주지 않는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강연 주제인 ‘시인과 고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앞서 저가 생각하는 시에 대해 나름대로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시와 눈 저는 시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할 것도 없이 눈이 보배입니다. 그 보배는 반짝이는 보배입니다. 보석과 같은 눈이 바로 시인의 빛나는 눈입니다. 시인은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그것. 눈을 뜨고 눈 속 깊이 감춰 둔 그것, 그것이 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시의 눈도 하나의 풍경입니다. 시인의 눈은 풍경을 창조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시가 풍경이요 나아가서는 시인 자신도 풍경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보는 것을 배우고 익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시는 내면의 뒤집기”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면의 뒤집기’는 시의 또 다른 하나의 눈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눈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시는 눈이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한자어의 관음(觀音), 문향(聞香)이란 말에서 시를 보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볼 觀, 소리 音, 소리를 본다는 것. 그리고 들을 聞, 향기 香, 향기를 듣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시가 없는 곳에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한 줌의 햇빛을 사냥하기 위해 언어 하나하나를 낚아챕니다. 그리고 말을 갈고 닦습니다. 그래야만 말의 빛을 더하게 되지요 .말의 빛은 바로 시의 빛입니다. 반짝입니다. 靑馬와 大餘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고향이 있습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고향은 그리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예술가에게는 고향이 예술입니다. 시입니다. 미술입니다. 음악입니다.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지만 청마 유치환 선생과 대여 김춘수 선생은 경남 통영이 고향입니다. 청마 선생은 1908년, 대여 선생은 1922년에 태어났습니다. 두 분의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대여 선생의 시에 청마 선생이 종종 등장합니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 우리 고향의 선창 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기빨처럼 다정하고 /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 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 / 소리 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 그 길을 찾아가면 / 우리 집은 유 약국 / 행이 불언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덧 /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이 시는 청마 선생의 <歸故>라는 작품 전문입니다. 고향 통영을 소재로 한 초기시입니다. 통영의 냄새가 물씬 나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향수> 등 고향을 노래한 작품이 있습니다. ‘깃발’을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향수는 영원한 것입니다. 향수에는 시가 깃들어 있습니다. 시와 사투리 우리 현대시의 큰 획을 그은 김춘수 선생의 시는 고차원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상 풍경입니다. 어떤 이는 고급 장식품이라고도 했습니다. 선생의 풍경 속에는 고향이 보입니다. 대여 선생은 언어의 예술가입니다. ‘긴장된 말놀이’를 즐기는 고수의 테크니션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시는 그림이 있는 지적인 기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트릭도 지척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대여 선생은 고향을 소재로 한 시를 만년에 많이 남겼습니다. <통영> <귀> <앵오리> <귀향> <명정리> <고향으로 가는 길> <나의 생가> <방풍>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밖에 초기시와 대표작인 <처용 단장>에도 고향이 전면에 선명하게, 혹은 배경에 보일 듯 말 듯 아득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의 기억들이 시속에 배어 있습니다. 기억은 소중한 것입니다. 시인은 기억을 시로 승화시킵니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고치라고 한다. /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 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 / 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 / 폴이라고 한다. / 코를 케라고 한다. /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 멍게를 우렁싱이라고 하고 똥구멍을 / 미자발이라고 한다. /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통영을 퇴영이라고 하셨고 동경을 / 딩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 까치는 까치라고 하셨고 까치는 / 깩깩 운다고 하셨다. 그러나 / 남망산은 / 난방산이라고 하셨다. /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 내 또래의 외삼촌이 / 오매 오매 하고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시는 <앵오리>의 전문입니다. 시에서 보다시피 통영의 사투리가 많이 나옵니다. 사투리는 바로 향수입니다. 향수는 시인을 그냥 놓아주지 않습니다. 선생의 시에는 사투리뿐만이 아니라 통영의 산과 바다와 섬이 자주 나옵니다. 고향은 햇빛도 바람도 생선맛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또 갯바람은 어머니의 젓내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대여 선생은 전혁림 화백과 윤이상 음악가와도 친교가 깊었습니다. 세 분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동향인이기도 하지만 같은 빛깔을 갖고 있는데 그 빛깔이 바로 코발트 블루이지요. 통영의 바다 빛깔입니다. 작곡가는 가락에, 화가는 색채에, 시인은 언어에 그 빛깔이 숨쉬고 따라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입니다. 언어가, 색채가, 가락이 쪽빛 파도를 친다고 할까요. 기막힌 해후 대여 선생은 80년대 초 서베를린에서 죽마 고우 윤이상 작곡가를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얼싸안았다고 합니다.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 기막힌 해후. 그때 윤 선생은 “춘수야, 나 고향 좀 데려가 줘…”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곤 눈물범벅이 되었다는 후일담입니다. 그때 눈물은 얼마나 진하고 뜨거웠을까요. 향수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그날 그때의 눈물이 통영 앞바다의 얼룩진 코발트 불루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윤이상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때 윤이상의 일시 귀국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안타깝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합니까. 대여 선생은 ‘서베를린서의 만남’을 그 뒤에 <귀>라는 시에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982년 / 서백림(西伯林) 윤이상의 집이다. / 앉았단 섰다 또 앉다가 / 막 피어나는 앵초꽃 너머로 / 본다. / 귓속에 귀가 있다. / 누군들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 테레사 할머니, / 우리들의 고향은 통영입니다. / 앵초꽃 피는 / 그때가 4월 초순 / 귓속에서 물새가 운다 쉬었다가 울고 /쉬었다가 또 운다. / 귓속에 귀가 있다. / 한려수도 아득히 트인 / 귀가 귓속에도 귀가 있는, 귓속에도 눈물이 고이는, 눈물도 울림이 뜨거운 ‘귓속의 귀’가 찡하지 않습니까. 두 분의 귓속의 귀에서 고향 통영이 보이고 물새가 우는 소리와 한려수도가 물결치지요. 시인에게도 고향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고향은 지구상의 한정된 한 지역이 아니고 전 우주가 고향입니다. 시인은 한 방울의 이슬에서도 우주를 보고, 그리고 대화를 나눕니다. 햇빛 속에서 우주의 빛을 보고, 바람 속에서 우주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특히 청마 선생의 시에서 우주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오묘한 사유의 깊이는 물론 그 넓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청마 선생과 대여 선생을 기리며 쓴 저의 졸시 <靑馬, 그리고 大餘>를 낭독하겠습니다. 이는 통영 시민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안합니다 / 통영 시민 여러분/ 간밤에 바다를 훔쳤습니다 / 머리맡에 두고 꿈도 꾸었습니다/ 발치에 섬들이 보채곤 했습니다 / VOU, 수평선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 청마의 깃발이 하늘 깊게 나부꼈습니다/ 전혁림 화백의 빛부신 코발트 블루 위로/ 대여의 꽁지 하얀 새가 날아올랐습니다 / VOU, 수평선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 바다를 택배로 다시 보냈습니다 / 파도 소리만 가슴 깊이 감추고 / 바람은 더 푸르게 물결쳤습니다/ 통영 시민 여러분, / 감사합니다/ 유치환 선생과 김춘수 선생은 가셨지만 시는 살아 있습니다. 시 속의 고향도 살아 있습니다. 시의 행간행간에 통영 앞바다가 파도칩니다. 아! 눈부신 코발트 블루, 지금 이 시간에도 한려수도에서 바람이 부네요. 꽁지 하이얀 새가 쪽빛 바다를 물고 날아갑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원고는 통영문인협회 초청으로 강연한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일부는 계간 시지 《다층》에 발표한 것과도 중복됩니다.
  • ‘납북·월북’ 설전 접고 화해의 건배

    금강산에서 열리고 있는 제15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10일 이산가족들은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삼일포 관광 등을 통해 친밀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혈육의 정을 나눴다. 남측의 이동덕(88) 할머니는 1968년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납북된 아들 김홍균(62)씨와 북녘 며느리 고순희(56)씨를 만나 “이렇게 아들과 며느리를 만나니 정말 좋다.”고 말했다. 김씨의 동생 강균(54)씨는 “오늘 개별상봉에서 편안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서로 많이 이해하게 됐고, 그동안 살아온 얘기도 할 수 있었다.”며 “이번에 처음 만난 형수님은 좋은 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강균씨는 또 “형님이 북에서 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형님이 둘째인 제가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어 한시름 놓는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며느리 고씨는 이날 공동중식에서 시어머니와 시동생의 접시에 음식을 계속 놓으며 남녘에서 온 가족을 각별하게 챙겼다. 고씨는 “우리 둘째 아들이 삼촌과 꼭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 이씨도 이날 차멀미로 몸이 불편한 며느리 고씨에게 약을 먹이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등 뜨거운 가족의 정을 나눴다. 다른 납북자·국군포로 등 특수 이산가족들도 전날보다 한층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했다. 남측 정혁진(72)씨는 전날 형 정용진씨의 행방불명 이유를 놓고 ‘월북이냐, 납북이냐.’며 북녘 조카들과 설전을 벌였지만 이날은 조카들과 ‘화해의 건배’를 나눴다. 조카 철민(43)·철성(39)씨는 차례로 삼촌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건배를 제의했고 정씨도 흔쾌히 잔을 부딪쳤다. 형 이중우씨가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다는 북녘 형수 조은현(69)씨의 주장에 말을 잇지 못했던 이양우(75)씨 역시 이날 형수와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눴다. 두 시간에 걸친 개별상봉과 공동중식을 마친 이산가족들은 함께 삼일포를 방문, 나들이를 하며 수십년 만에 이뤄진 상봉의 감격을 더욱 깊이 새겼다. 남측 가족들은 11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한 시간에 걸쳐 작별상봉을 한 뒤 오후 육로를 통해 돌아올 예정이다. 북측 100가족의 상봉신청에 응해 금강산으로 향하는 2차 남측 상봉단 442명은 11일 속초에 모인 뒤 12∼14일 온정각휴게소 등에서 상봉행사를 갖는다. 금강산 공동취재단·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루니, 링까지 챔프벨트 옮긴다고?

    박지성(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팀동료인 웨인 루니(22)가 다음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영국 복서 리키 해튼(29)의 세계타이틀매치 때 챔피언 벨트를 링에까지 옮겨주는 허드렛일을 맡기로 했다. 42승(32KO) 무패 행진으로 국제복싱기구(I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에 오른 해튼은 다음달 24일 라스베이거스의 토머스앤드맥 센터에서 호세 루이 카스티요(34·멕시코)와 타이틀 1차 방어전을 벌이는데 루니가 라이언 긱스, 웨스 브라운, 존 오셔 등과 함께 해튼의 원정응원을 떠난다고 로이터통신이 9일 전했다. 영국의 열혈 복싱팬 8000명도 동행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루니가 맨유의 더비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의 ‘광팬’으로 알려진 해튼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챔피언 벨트를 링 사이드까지 옮겨주기로 한 것. 해튼은 런던에서 기자들과 만나 “다른 맨유 선수들은 그 일을 꺼렸지만 루니는 아주 기뻐하며 기꺼이 맡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루니는 아버지 웨인 시니어가 젊은 시절 아마추어 복서였고 삼촌 리치도 해튼과 한때 영국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복서 가문 출신. 루니도 삼촌이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드린 적이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장사익, 美人 곁으로

    장사익, 美人 곁으로

    1997년쯤으로 기억된다. 지인으로부터 한 장의 앨범을 선물받았다. 바로 장사익(58)의 1집 앨범 ‘하늘 가는 길’이다. 당시 그 앨범에 수록된 ‘찔레꽃’을 들으며 느꼈던 가슴 뻐근한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사익의 소리가 그렇다. 흥이 나는 대로, 감정이 영그는 대로 자연스레 소리에 맺힌다. 노래로 풀어내는 놀이라 할까. 그의 소리를 듣다 보면 절로 가슴이 움직여지고, 어느샌가 행복해진다. 일상의 애사(哀思)가 신명으로 해체되는 듯하다. 오는 6월 미국 공연을 앞둔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을 찾았다. 북한산의 끝자락이자 인왕산의 첫자락인 곳이다. 애써 가꾸지 않은 정원에 민들레며 냉이 등 야생화들이 흙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1995년 46살 나던 해에 늦깎이로 가객(歌客)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팔자라는 생각이 들어. 집착해서 찾은 게 아녀. 다른 길을 어렵게 돌고 돌아 찾은 거지. 가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잠시 접어뒀던 거지. 이러구러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엔가 꽃이 피는 삶이 생기더군.” 충청도 태생답게 특유의 억양으로 느릿느릿, 조근조근 말할 때면 ‘웃음 반 말 반’, 사람 좋은 인상이 묻어나온다.25년간 월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무역회사 직원 등 10여개의 직장을 전전했다. 데뷔 전 마지막 직업은 카센터 직원. 주차대행 등 온갖 허드렛일이 그의 몫이었다. “내 이름이 생각 사(思), 날개 익(翼)이잖어. 생각이 날라댕겨. 이상과 현실이 평행선을 달리니께 직장에서도 정착을 못했지. 그러던 어느 날엔가 딱 3년만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 1993년 1월1일. 마침내 그는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날라리(태평소)’를 잡게 된다. ‘장구잽이’와 ‘날라리’로 충남 광천 쪽에서 명자깨나 날린 아버지와 삼촌 등의 피가 고스란히 그에게로 전해진 때문이었다. 이미 안배된 그의 길이었던 셈이다. 소리꾼으로 방향을 잡은 이후로는 ‘구름 위를 떠가는 듯한’ 생활이 계속됐다. “날라리를 불다 보니께 노래도 저절로 튀어나오는 겨. 그래서 94년에 앨범을 냈지. 노래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여. 가수를 먼저 시작했다면 깨지고 뒹구는 질그릇 같은 삶의 모습을 온전히 노래에 담아내지 못했을런지도 몰러. 난 참 행복한 사람이여.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탯줄 잡듯, 노래를 탯줄 삼아 살고 있잖어. 평생에 좋은 노래 하나 만들어 봤으면 좋겄어. 더 이상은 욕심이지.” 그는 6월9일부터 워싱턴과 LA 등 미국 대륙을 동서로 주유하며 소리판을 벌인다. 이번 공연에는 사물놀이, 해금 연주자는 물론, 피아노·트럼펫 등 재즈 연주자와 아카펠라, 코러스팀 등 10여년 동안 사귀어 온 25명의 ‘친구들’이 동행한다. 애초 의도는 노래를 부를 힘이 조금이라도 남았을 때 교포들과 신명이 나는 놀이판을 열어보고자 했던 것. 하지만 ‘버지니아 총기 사건´의 희생자 넋을 위로하는 일도 해야 할 것 같다. 공연 형식이야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어차피 그의 소리의 끝자락은 진혼(鎭魂)에 가닿지 않던가. 그는 오는 5월1일에는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KBS 교향악단과 협연도 벌인다. 질그릇 같은 그의 목소리와 교향악단 선율이 언뜻 어색한 조합처럼 생각되지만, 이전 공연에서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다는 것이 공연기획 관계자의 전언이다. 충무아트홀 (02)2230-6624∼6.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스포츠 라운지] 여자배구 KT&G 새 사령탑 박삼용

    [스포츠 라운지] 여자배구 KT&G 새 사령탑 박삼용

    ‘삼용이’가 돌아왔다. 여자 프로배구 지난 시즌 도중 “성적을 내지 못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면서 GS칼텍스의 지휘봉을 스스로 반납한 지 꼭 16개월 만이다. 새로 튼 둥지는 KT&G. 농구판에서야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배구가 프로로 출범한 이후 팀을 바꿔 사령탑에 앉은 사람은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어서다. 그러나 사실 그가 가진 굵직한 경력이라고 해봐야 90년대를 풍미한 고려증권 멤버였다는 정도다. 그런데 여자코트가 그를 또 부른 이유는 뭘까. ●카리스마가 뭐예요? 박삼용(39) 감독을 영입한 KT&G 최규형 부단장은 “물론 2년째 침체에 빠진 팀 분위기 쇄신은 물론,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있지만 소박하고 친근한 친오빠, 친삼촌 같은 성격이 여자 코트에 꼭 들어맞는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열흘 전 처음 충남 신탄진 체육관을 찾아 선수들과 상견례를 나눈 박 감독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발견했다.“평균 연령이 다른 팀보다 높은 데다 부상병동이라는 말이 딱 맞더군요.” 그가 본 선수들은 원년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린 그들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 팀을 새로 맡았을 때도 그랬는데 굳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면서 “차라리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지도 스타일은 특별하다. 시청팀 시절부터 고려증권에서 선수 생활을 끝낼 때까지 바늘로 찌르는 말은 한 마디도 못했지만, 원칙과 규범만큼은 목숨처럼 지키며 리더십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한 차례 쓴 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도 보약인 만큼 새 둥지에서 날개를 활짝 펴게 될 것이라는 게 주위의 말이다. ●“여자배구는 특별하다” 경북 상주 출신인 박 감독은 부산 금강초교 5년 때부터 백구를 잡아 보수초교로 옮겨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부산 동성고 시절 청소년국가대표를 거쳐 서울 시립대(시청팀)에서 뛸 당시 ‘서·박·어(서남원·박삼용·어창선) 트리오’로 명성을 날렸지만 두각을 제대로 나타낸 건 고려증권 시절이었다.2년 뒤 고려증권의 해체와 함께 ‘선수 박삼용’도 사라졌다.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신탄진 팀 숙소 앞에 선 그는 말을 이어갔다.“당장 눈앞의 성과를 드러내기엔 선수들이나 감독이나 아직 부족합니다. 하지만 기다려 보렵니다. 당대 최고의 팀이 되기보단 절망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으로 팬들을 즐겁게 하는 팀을 만들겠습니다.” 그는 또 “옛날 몸담았던 고려증권도 처음엔 쭉정이들만 모였던 ‘헝그리 구단’이었지만 결국 최고의 팀으로 거듭났다.”면서 “그만큼 감독의 역할은 크다.”고 각오를 다졌다. “남자배구에 밀려 아직 빛은 보지 못하지만 여자배구엔 뭔가 특별한 게 있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고려증권 박삼용’은 이제 없습니다.KT&G 감독 박삼용일 뿐입니다.” 글 사진 신탄진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출생 1968년 6월7일 경북 상주생 ■ 체격 190㎝,95㎏ ■ 학교 부산 보수초-거성중-동성고-서울시립대-경원대 대학원 ■ 가족 부인 김명숙씨와 1녀2남 ■ 경력 배구청소년대표(1986∼87), 서울시청(1987∼91), 고려증권(1991∼98), 국가대표(1987∼94), 여자대표팀 코치(1999∼2001),GS칼텍스 코치(2000∼02),GS칼텍스 감독(2003∼06),KT&G 감독(현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쇼핑/이윤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쇼핑/이윤택

    눈총 튀는 밤 청과물시장 개새끼 한 마리 없는 삼촌 점포 슬쩍 지나며 짧은 휘파람으로 건져 올리는 사과알 아름다운 ‘있음’을 사랑하고 저 아낙 살찐 욕설 훔칠까 지금 양파꾸러미 옆에서 뭘 빼냈어 삿대질 한 단 값은 얼마?
  • 7살짜리 초능력인? 포커 패 꿰뚫어보는 소년

    7살짜리 초능력인? 포커 패 꿰뚫어보는 소년

    “뭐요,남의 포커 패를 마치 자신의 패처럼 꿰뚫어 본다구요? 그것도 7살짜리 소년이!” 중국 대륙에 마치 자신의 패를 들여다보듯 남의 포커 패를 투시해 꿰뚫어보는 신비의 초능력 소년이 등장,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초능력 소년은 중국 중부 후베이(湖北)성 샤오간(孝感)시 한촨(漢川)에 살고 있는 위줘취안(余卓泉·7)군.그는 얼마전부터 남의 포커 패는 말할 것도 없고 마작의 패까지 투시해 꿰뚫어보는 신비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고 초천도시보(楚天都市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위군은 외모상으로는 여느 어린이처럼 정신이 해맑고 천친난만한 모습 그대로다.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면 옆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인다고. 그가 초능력을 보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어릴 때부터 자폐증을 앓아 다른 어린이들과 별로 어울리지 못했다.이 때문에 늘 혼자 집에서 블록놀이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던 중 삼촌이 포커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본 위군이 자신은 멀리서도 삼촌이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를 알아맞힐 수 있다고 말해 ‘초능력’의 일단을 드러내보였다. 원래 자폐증을 앓은 어린이들이 보통의 어린이들보다 집중력이 높아 가끔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던 삼촌이었지만 조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삼촌은 3m쯤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를 시험해본 결과,하나도 틀리지 않고 위군이 모두 알아맞히는 신통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위군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중국 전역에서 초능력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TV방송국,마술협회 회장,의학박사,인체과학연구원…. 지난달 14일 오후 우한(武漢)시의 셰허(協和)의원의 소회의실 초능력 시험장.기자 등 방송국 관계자,마술사,의사,연구원 등 20여명의 관람객들은 숨을 죽이고 위군의 초능력을 지켜보고 있었다.마술협회 리강(李鋼) 회장이 마술을 부리지 않은채 포커를 현란하게 섞은 뒤 위군에게 알아맞히도록 했다. “4 스페이드,7 하트,A 다이아몬드….” 리 회장이 카드를 뽑아들자마자 위군은 지체없이 그 카드가 무엇인지를 한치의 착오도 없이 알아맞혔다.이를 지켜본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초능력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모두 알아맞힐 수 있나.”라고 혀를 내둘렀다. 위군의 아버지는 “샤오취안(小泉)이 어릴 때부터 자폐증을 심하게 앓아 다른 어린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놀아 많이 신경이 쓰였다.”며 “어느날 갑자기 초능력을 보여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그는 이어 “초능력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다.”며 “무엇보다 자폐증이 나아 건강한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학교선 日침략 안가르쳐” “日의 역사왜곡 창피한 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중·일간 새로운 관계 설정 여부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과연 양국의 청소년들은 동북아의 숙적으로 살아온 상대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국 BBC 방송은 12일 베이징과 도쿄에 살고 있는 10대 학생 5명의 인터뷰를 통해 두 나라 관계의 현재·미래를 그려봤다. 초점은 역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둘러싼 과거사 문제. 베이징의 첸야징(15·여)은 “역사책을 왜곡하고, 사실 관계마저 부인하는 일본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의 만화와 호러 무비, 훌륭한 제품 기술은 좋아하기 때문에, 일본을 미워할지 좋아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도쿄의 이시무라 준키(13·남)는 먼저 학교에 있는 중국인 동료생들의 반항적 기질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국에 대한 감정을 살짝 드러냈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 일부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잔인한 행동을 한 것도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누가 옳았는지 나빴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서 “그저 전쟁은 인류에게 나쁜 것이며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만 배웠다.”고 말했다. 중학교 이후론 양국의 무역 관계를 주로 배웠다고 했다. 이시무라는 “중국인들이 역사 문제로 일본에 대해 앙금을 갖고 있다는 것도 뉴스를 통해 알지만, 이젠 일본과 미국의 관계처럼 중·일 관계도 점점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의 즈훙 티아니(12)는 “‘일본’ 하면 중국 침략과 난징 대학살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특히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게 싫다.”면서 “일본은 옛날엔 중국 문화제도와 유사하다고 했다가 최근엔 서방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른 이들에게서 장점을 취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슬램 덩크 같은 만화는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나라”라고 밝힌 도쿄의 고지마 가쓰미(15·여)는 “중국인들이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사 때문”이라며 하나 하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옛날 교과서는 일본은 좋은 나라, 다른 나라는 나쁜 나라로 가르쳤고, 북한이 나쁜 나라여서 일본이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식으로 가르쳤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정확한 정보를 구할 수 있게 됐다면서 정치인들이 서로 싸우더라도 나머지 사람은 서로 방문하면서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왕훙양(14·여)은 “삼촌·고모가 도쿄에서 공부했지만 일본인들은 참 친절히 대했다.”면서 끔찍한 과거 역사와 일본 개인을 연결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문제는 왜곡된 역사 교과서로,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이 괜히 일본에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서 “역사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과거를 부인하고 진지하게 행동하지 않을 경우 양국이 더 이상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세상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을 갖춘 일본의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탈북 청소년 3명 중국거쳐 라오스 도착 뒤 체포

    |워싱턴 이도운·베이징 이지운특파원·서울 안동환기자|“다른 계산은 하지 말고 사람을 살려달라. 그들은 우리를 살려서가 아니라 죽여서 북한으로 데려가려 한다.”(17세 탈북 소녀 최향미양의 편지 내용) 탈북 청소년 3명이 중국을 거쳐 약 3200㎞ 이상을 달아난 끝에 라오스에 도착했지만 라오스 당국에 의해 감금됐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11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세 탈북 청소년들의 비극을 크게 보도했다. 현재 라오스에 감금된 탈북 청소년은 최혁(12)군과 누나 최향(13)양 남매와 최향미(17)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청소년은 탈출 과정에서 붙잡힌 다른 수천명의 북한 주민들처럼 강제 북송될 위기에 처해있으며 인권단체들이 석방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 탈북난민 생명기금(Life Funds for NKR)은 라오스 관리들에게 3000달러의 돈을 건네지 않으면 이들 청소년이 북한 외교관들에게 인도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혁군은 지난 6일 “북한으로 끌려가 투옥되거나 처형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버리겠다.”고 쓴 편지를 난민기금측에 전달했다. 최향미양도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의 공안 관계자들로부터 조사를 받았으며, 그들은 세 사람을 북한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 최양은 “이것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제발 석방의 대가로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통해 호소했다. 최양은 탈북 과정에서 어머니가 중국의 인신매매단에게 팔려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으며, 남동생은 실종됐다. 이들을 라오스에서 직접 면담한 난민기금 히로시 가토는 “아이들은 굶주림뿐 아니라 부모와 친척들의 죽음으로 살기 위해 탈출했고 중국에서는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단체 리사 콜라쿠르시오는 현재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탈북 난민들을 미국과 한국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한편 중국 신화통신은 최근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가려던 탈북 여성 6명이 최근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의 중국∼라오스 국경지대에서 경찰에 체포됐다고 10일 전했다. 신화통신은 한국으로 데려가려던 한국인 1명도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중국측에 인도됐다고 전했다. 중국 동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공안국 산하 출입국관리국은 지난 1일 윈난성의 유명 관광지인 시솽반나(西雙版納) 태족자치주 징훙(景洪)시에서 탈북 여성들을 체포했다. dawn@seoul.co.kr
  •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상대 사칭사기 극성

    경기 남양주시 마석읍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 A(32)씨는 지난 20일 경찰관을 사칭한 남자로부터 황당한 사기를 당했다. 키 175㎝ 정도의 몸집 큰 한국인 남자가 무전기를 들고 공장에 찾아와 “경찰관이다. 외국인등록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4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 불법체류자가 된 A씨는 깜짝 놀라 황급히 지갑을 건넸고 그 남자는 A씨의 현금카드를 꺼내 비밀번호를 물은 뒤 급히 사라졌다. 이날 A씨의 통장에서는 8차례에 걸쳐 365만여원이 출금됐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기 남양주경찰서는 “사기범이 A씨의 카드와 다른 사람의 카드를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돈을 가로챘다.”면서 “A씨 외에도 여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당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법체류 외국인 상대 사칭사기 극성 불법체류 등 신분이 불안정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경찰관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 등을 사칭한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불법 체류 사실이 탄로날까봐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기 김포시의 한 제조공장에 다니는 인도인 불법체류자 B(37)씨도 최근 비슷한 사기를 당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을 사칭한 이 남자는 “강제추방 시키겠다.”고 위협한 뒤 “봐줄테니 보증금으로 200만원을 내놔라.”고 요구했다.B씨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 두려워 이 사기범에게 신분증 제시도 한번 요구하지 못한 채 200만원을 속수무책으로 뜯기고 말았다. 경기 이천시의 한 건축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네팔인 C(35)씨도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의 친척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피해를 입었다.10년 전 입국해 불법체류 신분인 C씨에게 접근한 이 남자는 “삼촌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인데 3년 체류 비자를 만들어주겠다.”면서 접근했다. 이 남자는 C씨에게 직접 삼촌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시켜주기도 했다. 결국 C씨는 4차례에 걸쳐 360만원을 지불했지만 이 남자는 어느날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피해 당해도 불법체류 탄로날까 신고 못해 외국인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은 불법 체류자들이 강제 출국에 대한 두려움없이 범죄나 인권 피해 사실을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김기돈 상담팀장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경찰서가 인권이나 범죄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기관이라기보다는 단속하고 잡아넣는 기관으로만 인식하고 있어 이런 사칭 사기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서 “불법체류 신분이라도 범죄 피해자라면 단속과 관계없이 피해 사실을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양주시 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 이영 신부는 “신분이 불안정한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유없는 폭행이나 절도 사건이 자주 센터에 접수되고 있다.”면서 “전문적인 범죄꾼들을 방지할 대책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골프장사장 납치 변호사가 주도”

    경기도 H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은 부장검사 출신인 김모(41) 변호사가 총괄적으로 기획·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사건 수사 책임자는 19일 “그동안 골프장 사장의 외삼촌인 윤모씨 또는 M&A회사 대표인 정모(39)씨가 범행을 제안하고 김 변호사는 납치현장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 변호사가 범행을 윤씨에게 제의하고 모든 것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가 사건 시나리오를 짜고 인천공항에서 납치현장을 지휘했을 뿐 아니라 납치 후 감금장소인 강원도 펜션에서도 행동대원들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김모(32·경호업체 팀장)씨 등 행동대원을 정씨에게 소개해 포섭토록 하고, 김씨를 해외로 도피시킨 것도 김 변호사다. 정씨는 윤씨에게 ‘골프장을 빼앗으면 1500억원을 달라.’고 제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납치에 가담하면 김 변호사가 내가 추진하고 있는 풍력발전소를 30억원에 매도하도록 알선해 주겠다고 해 가담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은 정씨로부터 거짓말탐지기 사용에 대한 동의를 얻었으나, 김 변호사는 거짓말탐지기 사용을 거부하고 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미래 잃은 이라크 아이들

    미래 잃은 이라크 아이들

    패자만 있고 승자없는 전쟁. 그러나 분명한 최대 희생자는 어른들의 전쟁에 연약한 몸과 정신을 고스란히 앗긴 이라크 어린이들. 미국의 이라크전 침공 4주년을 이틀 앞둔 18일(현지시간) CNN방송은 ‘전쟁과 어린이들’이란 제목의 기획물을 보도했다. 사드르시 시아파 난민촌 황폐한 길거리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고함소리. 그들은 하나같이 장난감 총을 들고 ‘무장세력 죽이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를 코너에 몰아넣고 “죽여!”를 외친다. 저항세력을 붙잡은 미군의 모습 그대로다. 이라크 인구 2600만명의 절반이 18살 이하다. 지난 4년간 어린이들은 고아가 되고, 길거리에서 혹은 시장통에서 학교에서 폭탄테러와 미군의 공습을 받아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난 2월 말 라마디의 한 공원에서 축구공을 차던 소년 18명이 차량 폭탄테러로 숨졌다. 폭발음과 폭력, 납치, 피의 보복전은 그들에겐 일상의 게임처럼 비쳐지고 있다. 난민촌에서 땀을 흘리며 ‘저항세력 죽이기 게임’을 하던 무스티카 하림(8살 정도)은 “미군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며 “가장 좋아하는 놀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이 수니파 무장단체에 의해 자신의 눈앞에서 살해당한 모습을 설명하던 무스티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의 정신과 의사인 사이더 알 하시미 박사는 “이라크의 어린이 특히 바그다드 시내 어린이들은 대부분 평생 장애로 남을 충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CNN이 소개한 어린이들의 심리 상태는 충격적이다. 여덟살 된 자하는 이웃집에 폭탄이 터진 뒤 발작증세에 시달리고 있고, 열세살 소녀 키타는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엄마를 때리는 증세를 보인다. 열여섯살 소녀 사만의 상황은 심각하다. 최근 학교앞에서 무장 단체에 9일 동안 납치됐다가 풀려났다. 사만은 함께 납치된 20명의 소녀들과 창문없는 방에서 지냈다. 사만은,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친구 시체 옆에서 잠을 자야 했다. 부모는 거액을 주고 사만을 구했다. 그 뒤 사만은 밤마다 울부짖고 고함을 친다.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의 BBC는 얼마 전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바드다드 시내의 아이들, 텅빈 놀이터의 그네를 통해 이라크 어린이들의 실상을 보여줬다. 아침밥을 먹다가 졸지에 폭탄세례를 받고 병원으로 실려간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도 소개했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울부짖었다. 지난 20년 동안 이라크는 세차례 전쟁을 치렀다.1980년대 이란과의 8년 전쟁,1991년 걸프전, 그리고 4년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걸프전 이후 계속된 12년간의 유엔경제제재 희생자들도 역시 어린이들이었다. 지금 이라크 어린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5세 이하 어린이 25%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8분의 1이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다.’(유엔아동기금)는 통계를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 탈출할 능력이 없이 인간사의 가장 추악한 전쟁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들. 그들의 희망과 이라크의 미래는 폭탄 소리가 한번 터질 때마다 파괴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골프장 사장 납치’ 정씨 긴급체포

    경기도 H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모(38)씨가 16일 경찰에 검거되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사건의 진상에 의문이 생기고 있다. 인천공항경찰대는 이날 오전 2시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H호텔에서 정씨를 체포했다. 정씨는 도피중에도 고급 호텔과 룸살롱을 드나드는등 기이한 행태를 보였다. 정씨는 경찰조사에서 납치에 개입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사건을 주도한 것은 윤씨와 김 변호사”라고 강조했다. 구속된 골프장 사장 외삼촌 윤씨와 부장검사 출신의 김 변호사는 그동안 사건의 주된 책임을 정씨에게 미뤄왔다. 김 변호사는 “정씨가 요구해 가짜 체포영장을 만들어줬고, 사건 전후로 정씨에게서 각종 협박을 받았다.”며 정씨가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사건 관련자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성향을 감안할 때 정씨 이야기도 믿을 수는 없어 경찰은 아직까지 이 사건의 주모자를 단정짓지 못하고 있다. 정씨는 또 “납치의 대가로 윤씨로부터 1500억원을 받기로 했다.”는 경찰 발표를 전면 부인했다. 김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받는 조건으로 가담했다는 것이다. 금전적 보상없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주장을 믿기 어렵지만,1500억원은 납치의 대가치고는 천문학적 액수여서 경찰의 발표도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설의 근거는 ‘정XX 1500억원’이라고 쓰여진 윤씨의 메모가 전부일 뿐 관련자들의 구체적 진술은 없다. 납치극을 누가 제의했는지도 오리무중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6일전 윤씨와 김 변호사, 정씨 등이 음식점에서 만나 공모했다.”고 밝혔다. 이는 자연스럽게 골프장 분쟁 당사자인 윤씨가 납치를 제의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김 변호사나 정씨가 조카와 골프장 문제로 다툼을 벌이고 있는 윤씨에게 역으로 제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변호사와 정씨는 지난해 여름 김 변호사 선배 소개로 알게 돼 술자리와 골프를 함께 하며 친해졌다.김 변호사는 또 2001년 수원지검 평택지청에 근무할 때 사건 참고인인 윤씨를 알게 돼 친분을 쌓았다. 윤씨와 정씨 중심에 김 변호사가 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김 변호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 있는 말을 하기도 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정·김 관계 미스터리?

    정·김 관계 미스터리?

    지난달 발생한 골프장 사장 일행 납치사건에 전직 부장판사 출신의 김모(40·구속) 변호사와 3공화국 ‘의문의 여인’ 정인숙(당시 26세)의 친아들 정모(39·수배)씨 등 의외의 인물들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의문이 커지고 있다. 특히 H골프장 강모(56) 사장 납치를 위해 강씨의 외삼촌 윤모(66·구속)씨와 범행을 함께 모의한 것으로 전해진 김 변호사가 오히려 정씨로부터 협박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사건에 대한 의혹도 끊이지 않고 있다. ●납치범 정씨,3∼4개의 가명 사용 14일 인천공항경찰대와 수배 중인 정씨 주변 인물에 따르면 정씨는 전과 3범으로 3∼4개의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평소 자신이 정인숙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으며, 이 때문에 만나는 사람에 따라 3∼4개의 다른 이름과 대포폰을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정씨의 소재 파악에 애를 먹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정씨는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91년 6월 고위 공무원을 지낸 유력인사를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가 1개월만에 취하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인천공항경찰대 수사본부 관계자는 “정씨의 연고지와 배회처를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정씨가 자신 명의의 휴대전화를 모두 꺼놓은 상태여서 검거에 애를 먹고 있다.”고 밝혔다. ●범행 가담 인물 일본어로 대화 경찰은 김 변호사와 정씨가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이번 사건을 모의했다고 보고 있지만 김 변호사 측은 “김 변호사는 결코 정씨와 범행을 모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김 변호사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정씨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의 한 측근은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김 변호사는 지난해 정씨가 벌이고 있던 풍력발전소 사업 내용을 확인한 뒤 ‘정씨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다.”면서 “특히 납치사건 전부터 정씨로부터 ‘만약 이번 사건에 당신을 통해 내 이름이 거론되면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을 수차례 해와 고민이 많았다.”고 밝혔다. 또 납치 당일인 지난달 26일 납치 차량 안에서 정씨와 납치된 강 사장이 짤막하게 일본어로 대화했다는 점도 김 변호사측이 정씨를 강하게 의심하는 대목 중 하나다.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정씨와 강 사장이 일본어를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강 사장이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우리 말보다 일본어가 더 편하다.”면서 “당시 대화 내용도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정도의 단순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범행을 모의할 당시 강 사장을 납치한 뒤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가 지난달 20일 서울의 한 일식집에서 윤씨와 김 변호사 등과 납치 계획을 논의하던 중 “강씨를 살해하겠다. 가급적 발견되지 않도록 일본에서 수장시켜라.”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이 실행으로 옮기려고 했는지 여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정씨 등을 붙잡아 조사해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