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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6) 남한산성 수어장대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6) 남한산성 수어장대

    병자호란(1636∼1637년)의 역사적 현장인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은 성남쪽에서 남문으로 들어서든, 광주쪽에서 동문으로 들어서든 본격적으로 산성을 일주할 생각이 아니라면 일단 수어장대를 목적지로 삼기 마련입니다. 장대(將臺)란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 설치한 장수의 지휘소이지요.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는 후금에 등을 돌리는 외교정책을 펴면서 전운이 짙어지자 남한산성을 새로 쌓다시피하면서 동서남북에 하나씩 4개의 장대를 세웠습니다. 서장대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곧 수어장대(守禦將臺)입니다. 남한산성과 일대를 지키는 수어청의 우두머리인 수어사가 지휘하는 곳이어서 이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해발 453m의 일장산 꼭대기에 세워진 수어장대에 오르면 장쾌한 전망에, 왜 이곳을 총 지휘본부로 삼았는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수어장대는 다른 장대와 마찬가지로 단층이었지만, 영조 27년(1751년) 중층의 누각형태로 지어집니다. 영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한 치욕을 씻겠다며 북벌(北伐)을 추진한 효종이 묻힌 여주 영릉(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수어장대에 올랐습니다. 수어장대 2층 누각의 내부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을 내걸었던 것도 영조가 이곳에서 느꼈던 감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겠지요. 조선은 호란에 따른 이른바 정축화약(丁丑和約)에 성을 개축하거나 신축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인조 16년(1638년) 곧바로 남한산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조 17년(1638년) 청의 사신 세 사람이 남한산성을 살펴보고는 크게 화를 냈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사신들은 “산성을 고치고 네 곳이나 곡식을 쌓아두었으며, 포루(砲樓)도 개설하였으니 어떤 간계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산성을 허물어버린 다음 우리가 국경을 넘어가기 전까지 보고하라.”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비를 보고싶다고 할 때 마다 멀지 않은 남한산성까지 찾아갈까봐 갖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따돌리게 되지요. 호란 직후 남한산성을 수리한 사실은 ‘남장대 옹성 무인비’가 자세히 알려주고 있는데, 비석을 발견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1996년 국립민속박물관장이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과 전보삼 신구대 교수, 조병로 경기대 교수, 세상을 떠난 장철수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등은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남사모)’을 만들었습니다. 남사모는 4월28일 첫번째 답사에서 남한외성의 하나인 봉암성을 신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봉암신성 병인 마애비’를 찾아냈습니다. 두번째 답사인 5월26일에는 남장대터 옹성(甕城)에서 새로운 비문을 발견했는데, 바로 인조 16년 1월26일부터 성을 새로 쌓기 시작하여 7월에 완성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사모는 6월30일 세번째 답사에서도 수어장대에서 가까운 병풍바위에서 역시 ‘남성신수기(南城新修記)’를 찾았습니다. 정조 3년(1779년) ‘허물어져 한 곳도 온전한 데가 없어 성을 고쳐 쌓았다.’는 내용이었지요. 세 차례 답사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남사모는 이후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사단법인으로 확대되어 현재도 활발하게 남한산성 보호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1896년에 재건된 현재의 수어장대는 조선시대 국방건축의 일단을 보여주는 당당한 모습이지요. 나아가 호란 이후 오늘날까지 불행했던 역사를 극복하겠다는 노력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평가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습니다. dcsuh@seoul.co.kr
  • 女회사원 2명 납치·살해 용의자 3명 검거

    女회사원 2명 납치·살해 용의자 3명 검거

    20대 여성 회사원 2명을 납치·살해한 용의자들은 택시 강도로 돈을 모아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8일 실종된 뒤 숨진 채 발견된 임모(25·여)씨와 김모(24·여)씨 살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용산경찰서는 30일 새벽 서울 송파구 삼전동 오피스텔에서 택시 운전기사 박모(35)씨와 송모(38)씨, 이모(30)씨 등 3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로, 지난 20일에도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김모(27·여)씨를 같은 택시로 납치·살해하는 등 추가 범죄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지난 17일 밤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앞에서 귀가하던 임씨와 김씨 등 2명을 자신의 영업용 택시에 태웠다. 미리 짜고 렌터카를 몰던 송씨 등 2명은 택시를 뒤따라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갑자기 택시 뒷좌석으로 옮겨타 흉기로 임씨 등을 위협한 뒤 납치했다. 임씨 등은 박씨 등에게 끌려다니다 18일 새벽 범인들 몰래 휴대전화로 112에 신고했으나 이를 눈치챈 범인들의 제지로 1초만에 끊겨버렸다. 박씨 등은 임씨 등의 카드로 송파구 석촌동 편의점 현금인출기에서 100만원을 인출한 뒤 임씨 등을 경기 파주시 근처로 데리고 가 성폭행하고 가양대교 인근에서 손으로 목졸라 살해했다. 임씨의 시신은 22일 경기 고양시 한강변에서, 김씨는 23일 경기 김포시 한강변에서 각각 발견됐다. 박씨 등은 범행 이틀 뒤인 지난 20일 오전 2시쯤에도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또다른 김모씨를 같은 수법으로 납치해 경기 구리시 팔당댐 근처에서 운동화 끈으로 목 졸라 살해하고 강변북로에서 시체를 버렸다. 이들은 택시강도로 3000만원을 모아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 등은 지난 12일 범행 계획을 세웠으며, 홍익대 근처를 범행 대상으로 물색해 왔다. 이들은 사건 당일 택시를 타는 피해자들을 무작위로 골라 납치·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통신사로부터 넘겨받은 이들의 통화 내역과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 현금인출기에서 확보한 폐쇄회로(CC)TV 화면 분석, 탐문조사 등으로 신원을 확인한 뒤 이들을 붙잡았다. 경찰은 박씨 등이 범행에 사용한 택시와 흉기, 모자와 인출한 100만원 중 사용하고 남은 70만원 등을 물증으로 확보했다. 또 이산포 나들목 근처 풀숲에서 임씨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전화를 찾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했다. 경찰은 이들의 여죄를 집중 추궁하는 한편 이들에 대해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오래된 아파트 용산구 ‘최다’

    서울에서 오래된 아파트가 많은 지역은 용산구로 나타났다. 13일 닥터아파트가 서울시내 25개구 아파트의 노후도를 조사한 결과 용산구 아파트는 평균 18.1년으로 가장 오래됐다. 서울지역 전체 아파트의 평균 나이는 10.5년이다. 용산구에 이어 서대문구(14.8년), 중구(14.4년), 영등포구(14.3년), 종로구(12.4년), 강남구(11.5년)의 순이었다. 동별로 보면 용산구 이촌동의 아파트가 23.6년으로 가장 오래됐다. 이어 후암동(20.1년), 한강로 1가(19.5년), 보광동(18.7년) 등이 뒤를 이었다. 이촌동은 40개 단지 중 24개가 1970년대에 입주했다. 개별 아파트 중에서도 용산구 한남동 한성, 효창동 효창맨션은 1968년 입주해 서울시 전체 단지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꼽혔다. 이촌동의 시범, 중산, 삼각아파트 등도 1970년에 입주했다. 서대문구에서는 미근동(35년), 충정로(26.3년), 대현동(23.5년), 북아현동(22.3년) 등 순으로 건축연도가 오래됐다. 미근동에서는 1972년 입주한 서소문 아파트가 가장 오래됐다. 중구는 회현동(30년), 묵정동(25.5년), 장충동(20년) 등 순이다. 회현동의 제2시민, 삼풍, 평화 아파트는 1970년대 입주했다. 강남구에서는 압구정동에 노후 아파트가 많은 편이다. 압구정동 아파트는 평균 26.4년 됐다. 일원동 아파트는 평균 20.4년으로 나타났다. 송파구는 10.6년, 서초구는 10.3년이다. 송파구의 삼전동(18년), 오륜동(18년), 신천동(16.7년), 서초구는 반포동(16.1년), 잠원동(15.7년) 등 순으로 오래된 아파트가 많았다. 반면 강동구(9.3년), 성동구(9.2년), 강서구(8.5년), 양천구(8.1년) 등은 서울 평균 미만이다. 근래 새 아파트 입주가 많았던 동대문구는 평균 7.1년으로 건축연도가 가장 가까웠다.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제2 롯데월드 무산 불똥 송파 아파트값 내림세로

    잠실 제2롯데월드 건립 계획이 무산되면서 최근 ‘나홀로’ 단기 급등 양상을 보이던 서울 송파구 일대 아파트값이 내림세로 돌아섰다. 롯데그룹의 대응 방향에 따라 다시 오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 하락세가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7일 부동산114에 따르면 국무조정실 행정협의조정위원회가 26일 제2롯데월드의 높이를 555m가 아닌 203m 수준으로 제한하는 등 사실상 제2롯데월드 건립을 무산시킴에 따라 잠실주공 5단지 아파트값이 이날 하루 사이 5000만원이나 빠지는 등 이 일대 아파트 값이 하락세로 반전했다. 잠실주공 5단지 112.39㎡(34평형)의 경우 올 들어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집값이 지난 5월 말 이후 반전된 뒤 6월 말에는 전달보다 1억원 이상 오른 12억 5500만원까지 치솟았으나 12억 500만원으로 5000만원 빠졌다. 신천동 장미, 잠실 우성아파트와 인근 삼전동, 송파동, 잠실본동, 석촌동 등의 단독주택, 빌라 등도 지난 6월 한 달간 호가가 낮게는 1000만원, 높게는 2억원 가까이 뛰었다가 행정협의조정위의 최종 결정으로 하락세로 돌아섰다. 잠실주공 5단지 근처에 있는 V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지난달 말 건축허가 결정이 유보됐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비관적이진 않았는데 막상 이런 결과가 나오자 집을 팔아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집주인들이 많다.”면서 “당분간 매물이 증가하겠지만 거래가 끊겨 집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 롯데그룹측은 “제2롯데월드 건립이 무산되자 행정소송 제기설, 주상복합 건축설,203m 높이의 롯데월드 건립설 등 여러가지 설이 나돌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룹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바 없고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검토해봐야 안다.”고 말했다.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순간이었다.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하여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의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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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인적자원부 ◇서기관△교육혁신위원회 김보엽△교육인적자원부 서병재△광주시교육청 박두상△〃 기획관리국장 김용흘△전남도교육청 〃 정현석△경북도교육청 〃 예병윤△경남도교육청 〃 도봉섭△대구광역시교육청 강병구△경기도교육청 이현준△부산대 설세훈△서울대 신재홍 박철수△전북대 김삼전△충남대 장현준△경상대 전제상△제주대 김대규△한국교원대 조영택△안동대 지영욱△창원대 이명칠△국사편찬위원회 총무과장 이형인△서울대 최정희△부경대 이재화■ 관세청 (과장급 전보)△총무과장 朴昌彦△종합심사〃 鄭淳悅△조사총괄〃 朴天萬△감사담당관 李台永△천안세관장 金喆秀△거제〃 李鍾甲△평택〃 趙瑞浩△포항〃 李燦基△부산세관 통관국장 朴載豪■ 근로복지공단 ◇승진 (부장)△창원 김기오△양산 이재근△통영 배대현△구미 이상칠△익산 최진철△목포 김현길△여수 서의창◇전보 (본부장)△기획조정본부 고양배△서울본부 공희송△경인본부 류용하△대전본부 홍천기(본부 국장)△재활사업국 홍성진△복지사업국 신태식(지사장)△서울강남 김병석△서울동부 고근호△안산 이장로△청주 송기남△천안 윤재인△유성 김영두(본부 팀장)△고객만족경영 신종인△교육연수프로젝트 양이석△정보개발 최창식△직업재활 박창근△산재심사실 문우동△복지진흥 정규환△감사1 이석렬(지사 부장)△서울본부 김병일 강성수△서울동부 배희수△서울서부 윤영근△서울북부 이상호△춘천 김영수△강릉 이성기△부산본부 오기환 홍경선△창원 권태충△양산 이정수△대구서부 신기창△경인본부 김정현 김창식△수원 이재길△부천 전호동 최종걸△안양 김형래△안산 이홍길△고양 이명수△성남 양승국△광주본부 박인규△전주 오상록△제주 박종관△대전본부 유제영△천안 강희주△충주 어순영△보령 이영근■ 한국산업안전공단 ◇임명 △산업안전교육원장 金鎭杰◇전보△경기남부산업안전기술지도원장 劉基湖(7.1)■ 농수산물유통공사(aT) △기획실장 李光雨△경영지원팀장 윤정인△수출전략〃 尹長根△유통조성〃 李東赫△aT센터운영본부장 許勳茂△정보서비스〃 金元泰△유통연구실장 裵孝天△대구경북지사장 孫永舜△경영지원팀 인재개발부장 申賢坤△FTA기금팀장 崔根院△자금지원〃 沈正根△해외마케팅팀 시장개척부장 金浩銅△유통조성팀 도매시장〃 崔大日△식량관리팀장 金鍾午△대전충남지사장 金基弘■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부서장급△철도시스템연구본부장 兪元熙△철도종합안전기술개발사업단장 趙淵玉△차세대고속철도기술개발〃 金錡煥△연구시설건설〃 李晟赫◇팀장급△철도시스템연구본부 시스템인터페이스연구팀장 南聖源△대차연구〃 具東會△차량구조연구〃 具炳春△철도종합안전기술개발사업단 안전SE〃 金相岩△안전기술연구〃 王鍾培△차세대고속철도기술개발사업단 시운전시험〃 睦鎭龍△신뢰성평가〃 朴春洙■ 대한상공회의소 ◇재선임△한국유통물류진흥원장 김승식 ◇전보△IT지원팀장 구본철△노사인력팀장 김기태△구미협력팀장 김호균△아주협력팀장 이종성△인증서비스팀장 전무■ 건설공제조합 ◇승진·전보 (1급)△진주지점장 鄭太鉉(2급)△기획부(전주지점 차장에 보함) 蘇相國◇전보△통영지점장 崔澯一△부천〃 韓基炯△성남〃 尹重源■ 언론중재위원회 ◇전보 △조정심의본부 조사분석팀장 박재선△민간언론피해상담센터 홍보팀장 조남태△운영본부 총무팀장 류석창△전북사무소장 강현석■ 단국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張武煥△의과대학장 朴錫健△병원장 朴遇盛△병원 부원장 白基淸■ 한국산업기술대 △산업기술·경영대학장 白洛基△홍보실장 金容才△학생지원팀장 金錫基△학생복지〃 鄭光鎭■ 한국산업대 △공과대학장 정광섭△자연생명과학〃 양재근△조형〃 박선우■ 국민일보 △편집국장 鄭秉德(7.1)■ 동양매직 ◇승진△상무보 이건주■ 알리안츠생명△진주지점장 白珖基△통영〃 梁鉉文
  • [서울광장] 아직도 ‘타는 목마름’ 인가/구본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아직도 ‘타는 목마름’ 인가/구본영 논설위원

    삼전도의 치욕을 앞둔 산성에서도 ‘말의 성찬(盛饌)’은 일상사였나 보다. 작가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이를 “말(言)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고 표현했다. 백성들은 배를 곯고 있는데, 왕과 중신들은 척화론이니, 주화론이니 끝없는 설전만 벌이지 않았던가. 청 태종 앞에서 인조가 세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아홉번 찧는 수모를 당하기 직전까지도 말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판의 험구(險口)싸움이 점입가경이다. 청와대, 여야가 뒤엉켜 피아조차 가리기 어렵다. 오죽하면 고은 시인이 “입만 있고, 귀는 없다.”고 대선정국을 개탄했을까.‘말 먼지’ 자욱한 난전의 최전선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 있다. 노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명박 박근혜 등 야권 주자뿐만 아니라 범여권 주자들도 겨냥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그 서슬에 놀란 듯 고건 정운찬 김근태는 벌써 ‘낙마’했다. 100년 정당이 될 거라고 큰소리 치던 열린우리당이 헤쳐모여 방식을 놓고 해체파와 사수파로 나뉘어 막가는 설전을 이어가고 있다. 참모들끼리 ‘살생부 공방’을 벌였던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두 대선주자 진영간 설전도 가관이다. 한쪽이 후보검증문제로 여권과의 내통 의혹을 제기하면 다른 쪽에서 “미쳐 날뛴다.”고 치받는다. 정치는 본시 말로 이뤄지는 게 본질적 속성이긴 하다. 문제는 독설과 야유만 난무할 뿐 책임지려는 정치 주체는 없다는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주 원광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자리에서 “참여정부 실패론은 중상모략”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민중을 속이는 데 앞장서고 있다.”며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참여정부와 국정 책임을 공유해야 할 열린우리당이 여권 지지도가 바닥에 이르자 통합신당을 명분으로 간판을 내리겠단다. 하지만 책임을 피하려는 위장폐업임은 국민들이 모를 리 없다. 헌신과 희생이 없이 ‘네탓’만 하는 정치에 누가 감동하겠는가. 이명박 박근혜 두 주자도 ‘좌파 정권 10년 종식’을 외치지만, 그것만으로 유권자들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왜 야권이 두 차례나 패배했는지에 대한 성찰, 부패했던 보수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지 않는 한 현 지지율도 거품일 수 있다. 두 주자 모두 지지율이 범여권 주자들의 그것을 합친 것보다 높은 데도 정작 후보캠프에선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게 그 방증이다. 혹자는 말한다. 할 말·안 할 말이 마구 분출되는 것, 그 자체가 권위주의가 퇴조한 증좌라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 학자들은 “이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안착 단계”라고 주장한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이미 정착됐고, 문제가 있다면 일부 정치 주체들의 빗나간 정치 행위일 뿐이란 얘기다. 과연 그럴까. 정치무대의 주역들이 책임없는, 비타협적 자기 주장만 하는 한 교과서적 민주주의의 갈 길은 멀다는 생각이다.6월 항쟁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넥타이 부대’를 비롯한 시민이었다. 그 수혜를 입고 기득권자가 된 일부 386세력이 작금의 국정난맥에 대해 언제 ‘내탓이오’를 외쳤던가. 70년대, 시인 김지하는 민주화를 향한 애끓는 갈망을 ‘타는 목마름으로’ 절규했다. 그의 시구에서처럼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도, 돌을 던지면 최루탄으로 막는 독재정권도 이젠 없다. 하지만, 책임정치와 타협의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 한 이 땅에서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일 뿐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남한산성’ 한국소설 중흥 신호탄?

    소설가 김훈씨의 역사장편소설 ‘남한산성’이 출간 한 달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벌써 1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문단은 당연히 반색이다. 한국소설의 위기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요즈음 ‘남한산성’이 한국소설 중흥의 단초를 제공하길 바라고 있다.●대형 작가들 신간·연재물 잇따라 분위기 ´고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대형작가들이 잇따라 신간을 발표하고 있는데다, 신문이나 문예지 연재물들도 많아 파도를 타듯 한국소설의 인기가 지속될 물적 토대는 갖춰져 있는 셈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란간 조선 왕조의 47일간의 치욕적인 기록을 담은 ‘남한산성’은 한때 한국소설을 떠났던 남성 독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조를 사이에 두고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김상헌이 벌이는 논쟁, 그리고 이들의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는 영의정 김류의 좌고우면, 전쟁과는 무관하게 조정이 떠나기만을 바라는 궁안마을 백성들의 바람, 인조가 칸 앞에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치욕 등은 남성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동안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치욕의 역사를 다룬 것도 독자들로서는 뜻밖이었다.●지난해 9월 이후 한국소설 첫 쾌거 그럼 과연 `남한산성´의 인기는 한국소설 중흥의 계기가 될 것인가. 한국소설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지난해 9월 공지영씨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후 거의 9개월 만이다. 그동안 한국소설은 아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중간에 김원일씨의 ‘전갈’, 조정래씨의 `오 하느님´, 김영현씨의 ‘낯선 사람들’ 등 대형작가들의 장편들이 잇따라 나왔지만 독자들은 일본소설만 찾을 뿐 우리 소설을 외면해 왔다. 문학평론가인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하위계급의 남성 및 여성 독자와 상층계급의 남성 독자는 소설로부터 이탈했다.”면서 “남은 건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를 소비하는 남성 중간계급 일부와 여성 중간계급뿐이다.”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우리 소설이 중간계급의 전유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떠났던 상위 계급 남성독자 발길 되돌려 헌데 그렇게 떠난 상층계급의 남성 독자들이 ‘남한산성’을 계기로 돌아왔다. 여기에 탄탄한 서사와 맛깔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형작가 신경숙씨가 최근 장편 ‘리진’을 발표했다. 조선말 프랑스 외교관을 따라 파리로 떠났다 돌아온 궁중무희의 사랑과 비극적인 삶을 소설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신문연재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었다. 여기에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씨도 자신의 가족사를 다룬 ‘즐거운 우리집’을 일간신문에 연재하고 있는데다 ‘객주’의 작가 김주영씨도 새로운 장편 ‘붉은 단추-최근에 있었던 옛날 이야기’를 현대문학 6월호부터 연재하기 시작해 이들의 작품이 완성돼 나올 내년 초까지 한국소설 붐이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떠났던 독자들의 눈길을 되돌릴 수 있는 한국소설의 저력이 되살아날지 문단 안팎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주목하고 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김훈 ‘남한산성’ 답사… 해설·퀴즈·깜짝 공연 곁들여

    작가와 독자의 교류가 활발하다. 낭송회, 사인회 등 기존의 교류와는 차원이 다르다. 작가와 독자가 직접 작품의 배경이 된 현장이나 고향을 방문해 그곳에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씨는 자신의 최근작 ‘남한산성’의 무대인 남한산성을 독자들과 찾아간다. 29일과 다음달 9일 두 차례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서는 삼전도비를 비롯해 남문-종로-숭렬전-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문-행궁 등으로 이어지는 주요 유적지를 답사한다. 작가가 직접 해설자로 나서며 답사 중간중간 퀴즈대회, 작가와의 질의응답, 배우들의 깜짝공연이 펼쳐진다. 한차례 70명씩으로 참가 인원을 제한했지만 독자와 작가가 현장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출판사 학고재측은 밝혔다. 인터넷서점 ‘예스24’ 홈페이지(www.yes24.com)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이에 앞서 소설가 신경숙씨는 지난 12일 독자 300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자신의 고향인 전북 정읍을 찾아가면서 ‘문학적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 문학사랑이 주최한 ‘문화기차여행’의 일환. 기차에서 전북 부안의 내소사 등이 배경으로 나오는 단편 ‘달의 물’을 낭송하고, 문학입문의 배경 등을 직접 설명한 신씨는 독자들과 함께 정읍에서 내려 내소사, 채석강 등을 둘러본 뒤 서울로 돌아왔다. 주최측은 문화기차여행을 두 달에 한번꼴로 진행할 예정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릉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웃한 효종릉은 차분하기만 하지요. 세종릉과 남한강 건너 신륵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예종 원년(1469년) 지금의 서울 대모산 기슭에서 여주로 옮겨진 뒤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 되었으니까요. 효종의 영릉 또한 여주군청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대로사(위 사진·大老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효종릉이 현종 14년(1673년) 여주로 천장(遷葬)되지 않았다면 대로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아래·1607∼1689)의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지요.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효종이 종종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입니다.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습니다. 그의 존명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하는데,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합니다.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요.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여주의 세종릉 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반대파인 남인들이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입니다. 우암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습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입니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02일 TV 하이라이트]

    ●인간극장(KBS2 오후 7시30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의 인사를 하고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챙기려고 하는 태용씨의 배려는 손님으로 찾아 간 가게와 음식점에서조차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궂은 날이나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언제나 맑음을 외치는 태용씨는 오늘도 행복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클로즈업(YTN 낮 12시35분) 4·25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당선된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를 만나본다. 이번 대선구도는 한나라당과 범여권, 제3의 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국민중심당은 범여권이나 한나라당으로부터의 러브콜 속에 캐스팅보트를 쥐는 상황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관한 의견을 들어본다.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EBS 오후 5시50분) 우리 가족을 위해 안전지킴이 아빠가 떴다. 아들의 교통사고 이후 아들의 초등학교 앞 건널목을 10년 동안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김광일 아저씨. 늦은 밤 우리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똘똘 뭉친 서초 삼전 초등학교 아빠 안전지킴이단.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나선 아빠들을 만나본다.   ●뉴스추적(SBS 오후 11시5분)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전화사기는 경찰에 신고된 것만 2400여건에 피해액은 178억원, 그러나 신고되지 않은 피해자들을 감안하면 피해자와 피해 규모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화사기의 수법을 집중 분석하고 경찰과 함께 전화 사기범들을 직접 추적, 그들의 조직을 파헤쳐 본다.   ●거침없이 하이킥(MBC 오후 8시20분) 케이블 TV에서 유미 엄마가 노래부르는 모습을 본 순재는 뭐 저런 노래가 다 있냐며 눈살을 찌푸린다. 다른 식구들이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흥얼거리자 순재는 화를 내며 앞으로 집에서 그 노래는 부르지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불량 학생에게 돈을 빼앗긴 민호는 윤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수요기획(KBS1 오후 11시30분) 은둔형 외톨이란 사회활동을 거부한 채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이 방안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는 말없고 양순한 모습을 보이지만, 은둔 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그 화살은 대부분 부모에게 돌아간다. 무엇이 그들을 스스로 방에 가두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가.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 석촌동 삼전도비 훼손

    서울 송파경찰서는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훼손됐다는 송파구청의 수사 의뢰서를 받아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다. 훼손된 삼전도비에는 붉은 페인트로 앞면에 ‘철 370’, 뒷면에 ‘거 병자’라고 씌어 있었으며 둔기 등을 때려 망가진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2일 밤 순찰 때 아무 이상이 없다가 5일 오전 9시30분쯤 페인트 칠이 발견됐다는 비 관리사무소측의 진술에 따라 훼손 행위가 지난 주말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목격자를 찾고 있다. 삼전도비는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당한 굴욕사를 담은 비석으로 서울시는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 1983년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일고 있는 반 중국 감정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는지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서울신문·서울시의회 의정모니터… 이색제안 10선

    서울신문·서울시의회 의정모니터… 이색제안 10선

    서울시의회와 서울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의정모니터제를 통해 이달에 제시된 아이디어는 모두 95건이었다. 새해가 시작된 때문인지 지적사항보다는 제안이 많았다는 게 1월 의정모니터의 특징이다. 이 중에서 잠수교에 안전한 자전거 도로 설치, 도로 확장시 노점상·불법주차 등 철저한 사후관리, 공원·산책로 등에 바른 운동표지판 설치, 취학전 아동의 지하철 무임승차권 발행 등 다양한 분야의 우수의견(표) 19건이 3차례에 걸친 심사를 통해 30일 선정됐다. (1) 안전한 자전거 도로를 송예선(63·은평구 역촌2동)씨는 교통 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지만 잠수교를 지날 때는 위험천만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자전거 도로에 안정도를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강 바로 옆을 지나는 스릴과 함께 안전도 보장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2) 불광천변에 간이화장실을 정금주(53·은평구 역촌1동)씨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불광천변에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면서 간이화장실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예쁜 디자인의 화장실을 만들면 미관 효과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3)교사와 학생 급식 똑같이 학교급식 위생점검을 한 경험이 있는 김명숙(52·강북구 번동)씨는 교사와 학생의 급식 수준을 똑같이 맞춰 위생과 영양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식단가는 조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질적인 차이가 커 학부모로서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4) 거리에 공용 쓰레기 봉투 한명자(44·은평구 갈현동)씨는 ‘내 집 앞 눈 치우기’ 조례처럼 쓰레기 치우기 조례도 만들어 깨끗한 생활 환경을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용 쓰레기 봉투도 설치해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도록 하고, 봉투 관리는 지역 통·반장의 업무 협조로 진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5) 공원에 올바른 운동법 소개 김기선(53·동대문구 답십리4동)씨는 운동 삼아 공원이나 산책로를 찾은 사람들을 위해 올바른 운동법, 칼로리 소모량, 간단한 건강정보 등을 담은 알림판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다. (6) 노점상 단속 철저하게 넓히고 정비한 도로는 편리하지만 어느새 불법 주차장이 되고 노점상이 늘어나 다니기 불편해진다. 도인채(56·동작구 대방동)씨는 남대문, 상도동 숭실대 정문, 대방동 숭의여고 등을 예로 들며 처음 시작단계에서 제대로 된 단속을 하고 철저하게 사후관리를 해야 불법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7) 취학전 아동에 무임승차권을 정유경(36·성북구 삼선동)씨는 표를 구입하지 않아도 되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아이를 개찰구 밑으로 출입시켜야 하는 것이 불쾌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회전식 개찰구는 아이가 기어나가야 하므로 경로승차권처럼 무임승차권을 주어 당당히 통과하도록 하는 등 통과 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8) 주택가 도로 턱을 낮추자 강영심(43·송파구 삼전동)씨는 주택가 도로 턱을 초등학생·노약자·자전거 이용자 등이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는 높이로 낮추고, 모서리를 부드럽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이들이 넘어져 다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9) 새벽 1~2시에는 조명 끄자 김명세(43·은평구 구산동)씨는 서울 번화가를 뒤덮는 조명의 점등·소등시간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조명시설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주지만 전력낭비, 밤문화 발전으로 인한 청소년문제 등을 낳는다. 따라서 저녁 8시에 점등해 새벽 1∼2시에는 조명을 끄고, 너무 밝은 조명보다는 테마가 있고 아기자기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0) 전동차문 닫을 때 경고음을 강한충(27·강동구 둔촌동)씨는 지하철 전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올 때 경고음이 방송 되듯 전동차 문이 닫히기 전에도 10초 전부터 경고음을 알리자는 제안을 했다. 기관사의 육성 방송은 위험성을 느끼기 어렵고, 연속 방송이 되지 않아 승객이 제대로 듣지 못해 사고가 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특별하區 ★나區] 캠퍼스 분위기 물씬 ‘실버들의 아지트’

    요즘 들어 자꾸만 노년이 기다려진다. 어이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정말 그렇다. 되돌릴 수 없는 청춘의 한 때를 그리워하는 대신 앞으로 다가올 제2의 황금기를 멋지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송파구 삼전동의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 첫발을 내디딘 그 순간부터 난 은발의 멋진 신사를 동경하게 됐다. 노인들의 사랑방을 예상했던 내게 시끌벅적 활기 넘치는 복지관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깔끔한 강의실에서는 다양한 강좌가 진행되고, 각종 스터디 그룹과 동아리 회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유창한 회화실력을 뽐내는 외국어교실 수강생들, 춤 삼매경에 푹 빠진 춤사랑동아리 회원들, 어르신 컴퓨터 경진대회를 대비해 막바지 연습에 들어간 컴퓨터교실 멤버들…. 대학 캠퍼스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모습이었다. 특히 3층 홀에 놓인 당구대를 사이에 두고 큐를 잡고 빙 둘러선 60∼70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한 모습이었다. 포켓볼을 가르치는 강사 역시 75세의 할아버지였으니…. 젊은 시절 미8군에서 군복무를 하며 배운 포켓볼로 지금은 멋진 노년을 보낸다는 할아버지 강사님의 시원스러운 샷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깊게 패인 주름살만 아니라면 누가 그들을 노인이라 부를까. 현재 송파노인종합복지관에서 운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스포츠댄스·차밍디스코 등 건강프로그램과 컴퓨터·외국어·문학 등 교양프로그램, 판소리·클래식기타 등 총 82개다. 여기에 영화상영·문화공연·동아리축제 등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각종 문화 행사는 복지관 어르신들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도 큰 인기다. 5000∼1만원의 재료비가 드는 심화학습반을 제외하고는 전 강좌가 무료이다.65세 이상이라는 연령 조건과 점심값, 차비만 있으면 이곳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은퇴 후 자원봉사로 참여한 강사들도 많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 모두가 친구다. 그야말로 이곳은 ‘실버들의 아지트’다. 늙으면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이 그리워진다는데, 대문만 열면 수많은 친구와 신나는 하루가 기다리는 이곳이 있으니 나는 이미 즐거운 노후를 보낼 최고의 공간을 확보한 셈이다. 내가 꿈꾸는 실버 라이프(silver life). 그 날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노년을 기다린다.
  • [인사]

    ■ 국무조정실 ◇일반직 고위공무원 파견 △서남권 등 낙후지역 투자촉진단 부단장 柳甲永◇부이사관 승진△총괄심의관실 혁신팀장 鄭顯溶△서남권 등 낙후지역 투자촉진단 기획법무팀장 朴章鎬■ 국무총리비서실 ◇과장급 전보 △의전비서관실 文紀雄 ■ 교육인적자원부 △미국 APEC 사무국(고용휴직) 이근우■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상임이사 신규임명△연금관리본부장 裵興秀△사업운영〃 金洛中■ 한국환경자원공사 △사업관리실장 박창수△폐기물시설설치〃 박석현△서울지사장 안종익■ 한국가스안전공사 ◇1급 (승진)△홍보실장 김성수△장치진단본부장 김성문△울산지역〃 이창수(전보)△감사실장 오원희△기획조정〃 안일근△기술지도처장 박기동△사고점검〃 홍지룡△공정연구팀장 박교식△교육연수실장 이기연△공정진단본부장 강태연△부산지역본부장 이호천△광주전남지역〃 김치원△강원지역〃 김문택◇2급 (지사장 전보)△서울서부 장기문△서울남부 김상강△서울동부 김동률△부산북부 왕성인△전남동부 원유현△전남서부 김규용△충남북부 정연학△경기북부 장기섭△경기동부 장현동△강원영동 박재복△경남서부 이팔구(승진)△ISO인증본부 품질인증팀장 박경연△경기지역본부 교육홍보팀장 이상무◇3급 (승진)△연구원 신뢰성평가연구팀장 김영섭△교수실 서비스교육〃 정강철△공정진단본부 공정진단2〃 김기회△서울동부지사 시설진단〃 이문호△부산지역본부 검사2〃 정무철△전남동부지사 검사〃 정행원◇2-3급 (실·팀장 전보)△비서실장 신희수△일반감사팀장 김인찬△전략감사〃 정성만△경영혁신〃 강봉구△총무〃 손찬호△인력개발〃 장석봉△노무복지〃 강석영△홍보〃 서준연△국제협력〃 장재경△신규사업〃 양해명■ 한국도로공사 ◇전보 (본사)△경영혁신팀장 전성학△사업개발〃 김시환△물류사업〃 김동희△비상계획〃 박기철△본사이전기획단 사옥건립〃 문광식△감사총괄〃 최경석△청렴감찰〃 이석남△예산〃 윤경종△재무개선〃 박문규△정보계획〃 김명하△경영정보〃 김준정△건설정보〃 민경숙△인력개발〃 엄창용△총무〃 이동준△고객지원〃 구정회△인사〃 채철표△복지후생〃 문기봉△영업계획〃 김정효△시설영업부장 강태구△방재총괄〃 진규동△도로포장팀장 박성태△도로개량〃 김정열△교통안전〃 노승렬△교통기계팀 부장 이중로△교통기계팀 〃 유한상△전기팀장 한재웅△설비〃 윤철욱△ITS사업〃 임한무△네트워크사업〃 강용구△건설관리〃 김진광△건설기술〃 조남훈△기술심의〃 권오철△설계VE〃 이명훈△설계기준〃 임근용△구조설계〃 이의준(1.29)△도로교통기술원 팀장 배종환△교통정보센터 교통정보통합팀장 조용하△〃 운영〃 최성동△연수원장 현병업(건설사업소)△대전당진건설사업소 품질관리팀장 박명득△〃 공사2〃 손용민△익산장수〃 공사1〃 박정희 황대성△목포광양〃 품질관리〃 김관민△현풍김천〃 품질관리〃 류병철△부산울산〃 품질관리〃 김석출△수도권〃 관리〃 윤일현△〃 공사2〃 강문식△〃 품질관리〃 최훈석△강원〃 용지〃 배명열△음성충주〃 품질관리〃 김동수△무안광주〃 공사〃 강만기△〃 고창장성분소장 최영천△남원광양건설사업소 공사팀장 신용석△서수원평택〃 관리〃 손진식(지역본부)△경기지역본부 공사팀장 서성필△〃 도로〃 김운태△〃 정비사업〃 이영배△〃 경안지사 고객지원〃 이상욱△〃 이천지사 고객지원〃 서상하△〃 서울영업소장 심재춘△〃 구리영업소장 김웅호△강원지역본부 고객팀장 한진부△〃 용지〃 노재두△〃 시설〃 이상표△〃 충주지사 고객지원〃 정락진△〃 대관령지사 고객지원〃 김종인△〃 원주영업소장 허규남△충청지역본부 도로영업팀장 이병훈△〃 천안지사 고객지원〃 정재현△〃 대전지사 〃 이성희△〃 논산지사 〃 최재옥△〃 무주지사 〃 이용운△〃 당진지사 〃 김흥태△호남지역본부 기획관리팀장 김민수△〃 도로영업〃 심우섭△〃 고객〃 김성진△〃 전주지사 고객지원〃 김진섭△경북지역본부 도로〃 황의수△〃 고객〃 구남준△〃 영주지사 고객지원〃 양인성△〃 북대구영업소장 김종수△경남지역본부 공사팀장 조을제△〃 시설〃 정원부△〃 양산지사 고객지원〃 이용운△〃 부산영업소장 정팔모△서울대 교육파견 팀장 윤재신 서병진 박홍진◇승진 (본사)△사업개발실 팀장 노한성△〃 비서팀장 류종득△〃 e러닝기술벤처팀장 조규성△〃 하이패스구축전담팀(T/F)장 정문식△KDI 교육파견 팀장 강순규 김영강 김주성 최인구(건설사업소)△익산장수건설사업소 관리팀장 정승모△목포광양〃 공사2〃 김낙륭△현풍김천〃 관리〃 이은성△부산울산〃 관리〃 김훈△무안광주〃 관리〃 박재은△전주남원〃 관리〃 박해웅(지역본부)△경기지역본부 고객팀장 김장환△〃 시흥지사 고객지원〃 박양흠△강원지역본부 도로영업〃 이종득△충청지역본부 교통정보〃 박종건△〃 대전영업소장 김영기△호남지역본부 도로팀장 이창봉△〃 시설〃 박병철△〃 광주지사 고객지원〃 안병표△〃 부안지사 〃 이영건△〃 공사팀장 이재인△〃 팀장 심보선△경북지역본부 재무팀장 서유남△〃 교통정보〃 이원만△〃 정비사업〃 조준환△〃 군위지사 고객지원〃 나병찬△〃 서대구영업소장 김용수△경남지역본부 고객팀장 하태근△〃 도로〃 배상복△〃 도로영업〃 김석진△〃 울산지사 고객지원〃 정영윤△〃 창녕지사 〃 봉영채△〃 창원지사 〃 방창식△〃 진주지사 〃 김도환△〃 산청지사 〃 이용구△〃 북부산영업소장 김영문■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 발행인 송필호△부발행인ㆍ주필 문창극△CRM본부장 이사 이성훈◇임원 선임△마케팅본부장 이사대우 이재영△광고영업담당 〃 김신원△광고기획담당 〃 손병기△파트너실장 〃 한상진△재무담당 〃 임광호△CRM사업개발실장 〃 이상묵■ 중앙m&b㈜ △대표이사 길정우△제작담당 이사대우 김수근△마케팅 겸 경영지원담당 조인원△신규사업담당 이사대우 김종수■ 이데일리 (편집국) △시장부장 安根模△산업〃 金秀憲■ 하나은행 ◇지점장△상해 裵範圭△삼전동 徐一豪△강남기업센터 李昌植 ◇지점장 겸 기업금융전담역(RM)△용산전자상가 신보성△상공회의소 鄭春植 ◇기업금융전담역(RM)△대기업금융1본부 白盛旭■ 한국씨티은행 ◇영업점장△강서중앙 金忠坤△개포동 河泰淳△계산동 李駿憙△과천 金昌宣△관악 李載哲△광화문 金知亨△구월동 宋大烈△대우센터 金重植△동두천 劉成根△동아솔레시티 李鍾周△둔산 琴東美△목동 郭成權△문정동 朴漢勝△미아동 朴鼎圭△백궁 金富子△분당중앙 全昌烈△산본 全松鍾△서여의도 李鍾和△서초동기업금융 田昇德△송림동 金旭鎭△송탄 金星煥△수원정자동 李京東△수지신봉 崔震甲△신곡 崔文植△신기 朴基洪△신림동 張昇進△양재 李永雨△오산 李星勳△옥수동 鄭國采△원효로 具珖會△을지로 金相宇△일원역 申世炫△정자동 朴之祥△제주 玄勝元△중부 李哲煥△청담역 金雄柱△테헤란로기업금융 朴泰榮△평택 李光烈△포이동 李愚卨△해운대씨티골드 金沃洙△해운대 李榮鐸■ PCA투신운용 (승진)△마케팅본부장 전무 김영수△리테일영업1팀 이사 이근해△리테일영업2팀 부장 김장호△리서치팀 〃 이재원 (전보)△주식운용1팀장 이규홍■ SK증권 (본부장)△2지역본부장 직무대행 심재경 (지점장)△대치역지점 노승국△명동〃 김병욱△압구정〃 박봉용△종로〃 김일봉△삼성자산관리〃 서정규△역삼역〃 김순영△중동〃 진상준△서초〃 이영식△등촌〃 이병희△성남〃 공평근△안산〃 홍성기△방배역〃 김종성△수원〃 김도균△남원〃 김영표△광주〃 안성규△상무〃 김무석△부산〃 이정호△구서〃 엄재술△마산〃 백영수△왜관〃 김정하△포항〃 허윤△대구서〃 지병근△창원〃 임우택△영천〃 차찬우△성서〃 김인숙△양주〃 허강규△파주〃 이근찬△영업부 박영수 (팀장)△고객행복센터 이태훈△AM사업지원팀 박진응△부동산상품팀 이재완△기업금융1팀 유진국△IPO팀 김정열△M&A팀 손원민△정보시스템팀 박용△업무〃 이상희△전략기획팀 조수범△Global사업추진팀 오성남△인력관리팀 이원선△인력개발팀 원은희△컴플라이언스팀 조상동△감사팀 최용훈△SKMS실천지원팀 조성구■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 리서치헤드 윤창배■ 솔로몬저축은행 ◇신임△해외사업본부 본부장(전무이사) 서옥석△종합금융팀장(이사대우) 오선근 ◇전보△테헤란로 지점장(이사) 조종길△본점 영업부장 박영민■ 하이마트 (하이마트) ◇전무△지원본부장 박철균△상품〃 김효주◇상무△중부사업부장 박동근△서부〃 이성수◇상무보△강서지사장 박흥제△강남〃 조인석△인천〃 권택중△성남〃 전우탁△동대구〃 이채오△재경담당 김상기△인사교육담당 한종국(하이마트쇼핑몰)△대표 홍정표(HM투어)△대표 차달
  • 송파구 신년인사회 개최

    송파구(구청장 김영순 오른쪽)는 11일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2007년 신년인사회’를 가졌다. 국회의원, 시·구의원, 지역내 단체 대표, 주민 등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인사회는 서울 조이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다과회 순으로 진행됐다. 김영순 구청장은 이날 신년사에서 “인간 중심의 환경 친화적인 푸른도시, 문화가 살아 있는 최고의 도시를 만들겠다.”면서 “이를 위해 구민 모두가 더욱 화합하고 단결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 [바로잡습니다]

    ●바로잡습니다 11일자 1면에 ‘10만 포로의 눈물’제하로 보도된 병자호란 다시 읽기 기사 가운데 청 태종 송덕비 소재지는 서울 송파구내 삼전동이 아니라 석촌동으로 바로 잡습니다.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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