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삼별초
    2026-05-27
    검색기록 지우기
  • 징역 23년
    2026-05-27
    검색기록 지우기
  • 청차우섬
    2026-05-27
    검색기록 지우기
  • 전차선
    2026-05-27
    검색기록 지우기
  • 임업인
    2026-05-2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3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안녕허우꽈? 왕 방 갑서!…국립제주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안녕허우꽈? 왕 방 갑서!…국립제주박물관

    “안녕하세요? 와서 보고 가세요!” 이제 제주는 예전 ‘놀멍쉬멍’ 걸어 다니던 90년도 추억의 올레길 풋풋한 섬마을이 아니다. 연간 관광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설 정도의 국제적인 휴양지이자 관광특화지역이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선정된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들, 세계 7대 자연경관 대표명소인 성산일출봉과 그 주변의 경관, CNN에 선정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섭지코지 등 각종의 대표 관광 명소에는 이미 365일 늘상 사람들의 발길이 차고 넘친다. 바로 이런 제주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방문지가 숨어 있다. 바로 탐라국에서 조선까지 제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국립제주박물관이다. 제주공항에서 자동차로 불과 20분, 약 7.5Km 거리에 있는 국립제주박물관은 의외로 관광객들이 뜸하다. 제주에 도착한 날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다시 뭍으로 나가는 날은 공항 라운지에서 아까운 시간 어슬렁대지 말고 시원스레 가까운 박물관 탐방도 좋다. 제주 여행의 뒷맛이 개운해진다. 국립제주박물관은 2001년 6월 5일에 개관하여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잇는 동북아시아지역 문화교류의 주요 거점으로서 제주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곳이다. 삼성(三姓) 신화와 함께하는 탐라시대 고유의 토착문화,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쟁, 그리고 제주목의 설치로 인한 조선시대의 제주문화, 그리고 현재까지 이르는 제주 역사의 전개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리 발굴 유적, 각종 패총과 분묘, 탐라국 당시 제주 고유 관련 유물, 삼별초 대몽 항쟁 유물, 제주읍성의 모형, 조선 제주목 관련 자료, 현재까지 이르는 제주의 생활 유물 등이 전시되었고, 야외에는 덕판배, 연자매, 돌하르방 등이 내륙과는 다른 제주 문화의 특성을 알려준다. 제주박물관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선사실, 탐라실, 고려실, 탐라순력실, 조선실, 기증실, 기획전시실 등 다채로운 공간이 있다. 우선 중앙홀에는 중앙홀에는 제주읍성 디오라마와 탐라의 개국신화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제작되어 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제주의 명산인 한라산탐라 개국신화인 삼성 신화, 삼다도(돌, 바람, 여자)를 표현하였다. 선사실에는 화산섬 제주의 탄생부터 첫 제주인의 정착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구석기시대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문화발전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 삼양동 유적의 복원모형을 통해 선사시대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탐라실에는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완성되고 꽃을 피웠던 탐라시대를 보여주며, 고려실에는 화려한 도자문화의 유입과 융성했던 불교문화, 아시아의 거국에 당당히 맞서 싸웠던 대몽항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탐라순력도실과 조선실에는 300년 전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해 둔 탐라순력도를 통해 조선시대 제주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외에도 기증실과 기획전시실에는 시기마다 다른 제주 문화의 특성을 알려주는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된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체험관이 마련되어 있어 어린 자녀와 함께 제주에 방문한 부모님들의 작은 휴식 공간(?)도 제공된다. 국립제주박물관은 2017년 3월 1일부터 기존 유물을 재배치한 상설전시실이 재개관되어 관광객들을 새로이 맞이하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제주를 떠나는 날, 비행기 출발이 한두 시간이 남는다면! 2. 누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3. 가는 방법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주동로-17 4. 감탄하는 점은? -제주에 산재한 자질구레하면서도(?) 수준 떨어지는 일부 사설 박물관들에 비해 확연히 느껴지는 국립박물관의 정제된 힘!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아직 명성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제주의 속내를 드러내는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탐라순력도실과 조선실.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전시물이 다채롭다.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2~3 시간 소요! 8. 홈페이지 주소는? -http://jeju.museum.go.kr/html/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제주민속박물관과 사라봉공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전시실 및 여타 공간은 훌륭함. 어린이 체험관 운영 관리에 좀 더 신경 써 주시길.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돼지국밥과 육개장

    [김경운 기자의 맛있는 스토리텔링] 돼지국밥과 육개장

    이젠 외국인들도 곰탕, 설렁탕, 삼계탕 등 우리 고유의 뜨끈한 탕반(장국밥) 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제법 즐긴다. 하지만 아직은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치는 게 돼지국밥과 육개장이다. 돼지국밥의 약간 비릿한 냄새, 육개장의 얼얼한 매운맛이 낯설 것이다. 돼지국밥은 돼지 뼈와 머릿고기 등으로 곤 육수에 내장 등 잡육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이며 밥을 토렴해 먹는다. 토렴이란 밥을 담은 그릇에 국물을 부었다 빼는 것을 반복하면서 탱글한 밥알에 국물이 배도록 하는 조리법이다. 국밥에는 삶은 잡육을 삼베 보자기에 싸서 누른 뒤 가지런히 썬 제육편육을 넣기도 한다. 여기에 새우젓, 부추, 양파 등을 곁들인다. 본래 순대를 넣으면 순대국밥이라고도 하지만 순대는 만들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부산 등 경남 지역에선 머릿고기와 오소리감투라는 별칭을 지닌 위장, 허파, 염통, 간, 곱창 등을 넣는다. 이를 또는 내장국밥이라고도 한다. 육개장은 본래 개고기와 대파, 고춧가루 등으로 땀을 흠뻑 내면서 즐기던 보양식이었다. 개고기는 식용을 하는 데 호불호가 갈리니까 조선 후기 궁중 등에서 소고기의 양지머리로 대체됐다. 마늘, 숙주, 부추, 고사리 등 약성이 강한 채소에 고춧가루와 고추장, 고추기름을 넣고 팔팔 끓인다. 오래전부터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주로 사육되던 돼지가 갑자기 남쪽인 부산에 나타나 돼지국밥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더 아래로 내려가 제주나 오키나와에 돼지가 등장했던 사연은 무엇일까. 우선 6·25전쟁 직후 부산엔 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남하한 피란민이 많았다. 돼지국밥이나 순대는 그들의 고유 음식이다. 부산에 밀집된 미군 부대에서 돼지고기의 안심, 등심 등 질 좋은 살코기를 제외한 뼈나 잡육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으로 재현했다. 1960~70년대엔 경제 부흥기를 맞은 일본에서 돼지고기의 등심과 안심으로 만드는 돈가스가 유행한 덕분에 김해 등지에 수출용 축산단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제주 북부의 삼성혈에는 선사 시대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3명의 신이 땅에서 솟구쳐 탐라왕국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을나’는 고구려의 고위 직함이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이고, 양씨는 양만춘 장군처럼 중국 요동 지방의 군벌 세력이다. 또 부씨는 평양의 지방 토호 세력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서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던 3개 집안의 어떤 이와 그 식솔이 제주에 느닷없이 등장한 것은 본국의 변란을 피해 망명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면 제주 북부에 닿는다. 이때 고향에서 즐기던 돼지고기가 함께 전해졌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돼지 불고기는 제주 등에 머물다가 추격을 피해 탈출한 몽골 저항군 삼별초의 후손들에 의해 개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소고기는 남하한 돼지고기와 달리 벼농사가 발달한 아시아 남방에서 북상했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선 소고기를 먹었으나, 평양 등에선 돼지고기를 즐겼다. 일제강점기 때 경북·대구에는 소 사육장이 많았다. 골목의 허름한 가게에서 손마디가 굽은 주인 할머니가 말없이 국자로 퍼주는 돼지국밥이나 육개장이 언젠가는 그 시대 주인공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겠지만, 음식 문명의 뿌리는 꼭 흔적을 남긴다. kkwoon@seoul.co.kr
  • [新국토기행] 전남 진도군

    [新국토기행] 전남 진도군

    보배 진(珍), 섬 도(道)가 지명인 전남 진도는 역사와 문화, 신비가 깃든 보배 섬이다. 진도는 국내 최초의 사장교로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진도대교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다. 다리의 아래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인 명량대첩지 울돌목이다. 해협의 폭은 좁고 절벽이 가팔라 물살이 거세고 용솟음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지와 고려 무인정권이 원나라에 대항해 용장성·남도진성 등을 쌓으면서 항쟁했던 삼별초 성지가 있는 호국의 지방이다.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진도개’와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린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 관광지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유가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이 있는 등 그림과 노래·민속이 살아 숨쉬는 지역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판소리 한 대목을 술술 해내는 곳이어서 ‘소리의 고장’으로 불린다. 진도에는 씻김굿 등 9가지 무형 문화재를 풀어내는 ‘예능 보유자’가 18명이나 된다. 금·토·일요일은 진도아리랑, 강강술래, 남도민요 등 공연을 체험할 수 있고, 우리 전통의 냄새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예술 공연 마당이 열리는 민속이 살아 숨쉬는 지역이다. ■역사와 낭만이 있는 볼거리 ●신비의 바닷길… 현대판 모세의 기적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도 신비의 바닷길은 매년 3~4월 초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가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린다. 조수 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질 때 바닷길이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40여m의 폭으로 똑같은 너비의 길이 바닷속에 만들어진다는 데 신비로움이 있다. 바닷길이 완전히 드러나는 시간은 1시간 정도다. 바닷길이 열리는 입구에는 뽕 할머니 사당과 동상이 있다. 뽕 할머니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매년 이 현상을 보고자 국내외 관광객 80여만명이 몰려온다. 전 세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을 보고자 가장 많은 인파가 찾아드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곳 진도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 요시미가 진도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 노래를 불러 히트를 치면서 일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진도군에서는 축제 기간 관광객들을 위해 민속예술인 강강술래,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상엿소리, 북놀이 등 전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해 해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축제는 오는 4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열린다. ●운림산방… 추사의 제자, 남화 대가 허유의 화실 국가지정 명승지 제80호로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허유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이다. 1856년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소치 허유가 작업실로 지은 운림산방은 집 앞쪽의 운치 있는 연못과 뒤쪽의 부드러운 산세를 자랑하는 첨찰산이 있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줬다. 작업실이었던 산방 뒤에는 허유의 사당인 운림사가 있다. 운림사 뒤쪽의 숲은 천연기념물 107호인 상록수림이 둘러 있어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준다. 이곳에서 허유는 미산 허형을 낳아 그림을 그리게 했으며, 허형과 의리로 맺은 동생인 허백련이 허형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유서 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미산(米山)-남농(南農)-임전(林田)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종화를 이어준 본거지이기도 하다. 최근 남도의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 등을 전시하고 경매하는 토요경매가 열려 주목받고 있다. 운림산방과 나란히 있는 진도역사관에서 열리는 토요경매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흥겨운 남도 국악소리와 함께 시작되는데 보통 30여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 등이 있다.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진도개테마파크… 위풍당당 명견과의 대화 진도의 트레이드마크인 진도개를 훈련해 공연을 하는 곳이다. 진도개 수영장, 공연장, 사육장, 운동장, 썰매장, 홍보관 등 진도개에 대한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여행지다. 공연은 한 마리가 15분 동안 사육사와 함께 여러 가지 묘기를 선보인다.늑대와 개의 차이부터 세계의 다양한 개 품종들과 세계의 명견들을 볼 수 있다. 진도개, 삽살개, 풍산개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개들의 생김새와 실물 모형들을 눈으로 비교하면서 확인할 수 있다. 대전에서 진도까지 걸어서 주인을 찾아온 진도개에 얽힌 유명한 일화를 다룬 영상도 감상할 수 있다. 개들의 아이큐 테스트도 해보고 진도개의 충성심에 얽힌 일화들도 살펴보면서 진도개가 얼마나 충성심이 강하고 똑똑한 개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삼별초 항쟁지… 13㎞ 둘레 ‘마지막 요새’ 용장성, 남도석성은 삼별초 항쟁의 성지로 고려시대 몽골에 대항한 항전과 저항의 흔적지다. 용장성(사적 제126호)은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가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강행하자 이에 불복해 대몽 항쟁의 결의를 다짐한 삼별초군이 남하해 근거지로 삼았던 호국의 성지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가 진도에 머문 10개월 동안 용장성을 구축하고, 이곳을 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 산성의 둘레는 13㎞에 이른다. 현재 삼별초의 흔적인 용장성은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마치 다랑논처럼 성벽이 계단식으로 축조돼 있다. 이곳에는 최근에 중건된 용장사가 있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이 경내에 있다. 남도진성(사적 제127호)은 삼별초가 진도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던 곳이다. 성의 길이는 610m, 높이 5.1m로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현재 관아와 내아, 객사를 복원했다. 앞으로 선소와 활터를 복원할 계획이다. 성의 외곽을 건너다니기 위해 축조한 쌍운교와 단운교는 편마암 자연석을 사용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형태로 알려져 있다.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과의 협상 장소로 이용한 벽파진도 있다. 명량대첩 때 충무공 이순신의 군대가 머물렀다. 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色다른 먹을거리 [白] 통발로 살포시 올려 흰살이 꽉찬 진도 꽃게 진도 서망항에는 7~8월 금어기를 제외하면 늘 꽃게가 난다. 연중 적조가 발생하지 않는 청정 해역인 데다 플랑크톤을 비롯한 먹이가 풍부하고, 갯바위 모래층이 형성돼 꽃게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진도군에서 2004년부터 바닷모래 채취를 금지하면서 꽃게 서식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진도에서는 통발로 꽃게를 잡는다. 그물로 잡을 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아 게 맛이 훨씬 좋다. 전국 꽃게 생산량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서망항에서는 해마다 진도꽃게축제가 열린다. 알이 통통하게 올라 미식가들의 식욕을 한껏 자극하는 진도 꽃게는 꽃게찜과 탕, 간장 게장 등으로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 중국 백화점에서 소금 게장 및 고가의 수산물 선물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중국에서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중국에서 진도 꽃게를 선호하는 이유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남방 꽃게(상하이 인근 해역에서 잡힘)와 맛, 색깔, 모양, 냄새 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紅] 지초뿌리로 담근 붉고 맑은 술 홍주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한 ‘2015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리큐르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진도홍주는 2010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리큐르 부문 우수상을 시작으로 2012년 리큐르 부문 장려상, 2013년과 2014년 일반증류주 부문 장려상을 받는 등 국내 전통주 품평회에서 수차례 입상했다. 지리적 표시제가 적용돼 진도 지역에서만 생산된다. 다른 소주와 달리 증류된 소주를 지초뿌리를 넣은 삼베주머니에 통과시키면서 선홍색 홍주가 만들어진다. 흔히 색이 붉어 홍주라고 하고, 지초를 통과한다 하여 지초주라고도 부른다. 산이나 들에서 잘 자라는 지초(일명 지치)의 뿌리로 담근 술이다. 뿌리는 굵고 자색을 띠는데, 이 지초 뿌리를 말려 사용한다. 증류된 술이 지초뿌리를 통과해 담홍색의 맑은 빛을 띤 홍주가 나온다. 40도 이상으로 도수가 높은 술임에도 목 넘김이 자극적이지 않고,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뿌리향이 강하게 느껴지고, 숙취가 없다. 빛깔이 워낙 곱기 때문에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黃] 땅속 황금빛 영양 덩어리 울금 땅속에 묻힌 황금빛 영양 덩어리로 불린다. 울금의 황금빛을 내는 색소인 ‘커큐민’은 숙취 해소에 탁월하다고 알려진 성분이다. 효능은 물론 독특한 맛과 향이 울금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울금은 몸에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해 생기는 증상인 어혈을 풀어주는 특효약으로,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에도 언급된 귀한 약재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으로 재배한다. 국내 울금의 70%가 진도에서 생산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양성 기후에 일조량이 풍부해 울금 성장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진도 울금은 2013년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간 기능 개선 식품으로 인정받고, 2014년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지리적 표시제에도 등록됐다. 울금이 인기를 끌면서 수입산 울금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국내산과 수입산은 ‘흙’과 ‘크기’로 구별된다. 울금의 크기는 국내산이 좀더 크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생울금은 흙이 묻어 있지만 수입산은 흙 없이 깨끗한 상태로 들어온다. [黑] 청와대 명절선물로 납품한 ‘진도 흑미’ 진도 흑미는 지난해 청와대 추석 선물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당시 15t을 납품하는 등 두 차례나 대통령 선물로 선정됐다. 지리적 표시제 제84호로 등록돼 있다. 강력한 항산화 작용으로 항암과 피부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는 안토시아닌이 다른 지역 검정쌀보다 월등히 높게 함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양성 기후 등 지역적 특색 덕분에 단백질, 아미노산 및 비타민 B1, B2, B3, 철, 칼슘, 아연, 망간 등의 미네랄 원소들이 일반 쌀의 5배 이상 함유돼 있다. 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명량’ 역사 한눈에

    ‘명량’ 역사 한눈에

    조류가 강한 험로임에도 옛날부터 수많은 선박들이 왕래했던 해상 지름길 ‘명량’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다음달 1일부터 내년 2월 14일까지 전남 목포시 용해동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전 ‘명량’(鳴梁)이다. 이번 특별전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실시한 진도 명량대첩로 수중문화재 발굴조사 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기획됐다. 명량해협 발굴조사 결과 명량대첩 당시의 흔적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토기부터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충무공 이순신이 1597년(선조 30) 명량대첩에서 사용했던 무기류 ‘소소승자총통’과 ‘석환’(돌포탄)을 비롯해 고려 절정기의 최고급 청자향로 등을 발견한 건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명량대첩로 발굴 조사에서 나온 주요 유물 250여점과 명량의 역사를 조명하는 유물과 자료 300여점이 전시된다. 1부 ‘기적의 바다, 명량’에선 진도 명량과 여천 해저에서 나온 ‘소소승자총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주요 화포인 ‘중완구’(보물 제858호), 1591년 선조가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전라좌수사 임명장 ‘사부유서’(보물 제1564-6호), 1597년 선조가 파직된 충무공에게 다시 내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 ‘기복수직교서’(보물 제1564-3호) 등을 볼 수 있다. 2부 ‘험로의 역사, 명량해협’에선 명량의 해양지리적 환경과 해난사고 흔적들을 소개한다. 3부 ‘성난 파도 속에서 피어난 꽃, 도자기’에선 명량에서 발견된 ‘청자 기린 모양 향로’ 등 최고급 청자부터 소박한 생활도자기 등을 만날 수 있다. 4부 ‘또 하나의 기억, 고려 삼별초’는 13세기 삼별초가 진도 명량 해역에 고려왕궁 ‘용장성’을 건설하고 몽골 침략에 항거했던 격동의 역사를 조명한다. 소재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내년부터 수중 문화재 발굴 조사를 다시 시작해 명량해협에 잠든 옛 침몰선과 문화재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인간을 닮은 神들의 고향, 제주

    인간을 닮은 神들의 고향, 제주

    제주는 신(神)들의 섬이다. 흔히 1만 8000여 신들이 있는 신들의 고향으로 통한다. 한데 제주의 신은 보통의 신, 종교적 신과는 좀 다르다. 세상의 질서를 정립하는 지배자이자 통치자, 절대자의 신이 아니다. 영웅적인 활동을 펼치는 신도 있지만 천상에서 쫓겨나거나 주변부로 밀려난, 그래서 질투와 시기,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신들이다. 신들은 인간들의 삶과 얽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제주는 숱한 이야기의 섬이 될 수밖에 없는 지역적 운명을 띠고 있다. 신들의 삶은 바다로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와 얽히며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되고 설화가 되었다. 12세기 초 탐라국은 스러졌지만, 그곳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보태지며 더욱 풍성해졌다. 그리스 신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의 원형이 넘쳐나는 공간이 됐다. 제주 출신 소설가이자 인문학술계간지 ‘본질과현상’ 발행인인 현길언(75) 전 한양대 교수의 사유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에 머물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 전 교수는 “석사학위 논문도, 전국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한 주제도 모두 제주 설화였다”면서 “다시 제주 설화로 돌아가게 된 것은, 아마 처음과 나중의 만남을 세계관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처지에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제주 설화와 주변부 사람들의 생존양식’(태학사)을 펴냈다. 제목 그대로 제주의 설화를 통해 절해고도 제주 사람들의 사유 방식을 고찰한 연구서다. 또한 ‘본질과현상’ 기획팀은 제주 설화 40여편을 현대언어, 표준어로 바꿔 풀어낸 ‘섬에 사는 거인의 꿈’도 함께 펴냈다. 제주의 신들은 제주 사람들의 욕망과 좌절, 또 다른 희망의 모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설화 속 제주는 본디 왕이 나는 땅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이 제주의 미녀를 데려다 후궁으로 삼았더니 커다란 알 다섯 개를 낳았고, 거기에서 나온 아이 500명은 날마다 장군놀이, 왕놀이를 한다. 제주의 왕 기운, 장군 기운을 끊기 위해 풍수사 고종달을 제주에 보내 인물이 날 만한 곳을 다니며 단맥(斷脈)시킨다. 대표적 설화 중 하나인 ‘고종달형 설화’다. 이는 역사 속 척박한 유배지로 각인된 지역에 대한 설화 속 합리화이자 인재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지역적 환기다. 풍수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별개로 자연환경 및 운명에 대한 극복 및 저항의 움직임을 설화에 투영시키기도 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장수’와 관련된 설화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변주되면서 전해져 왔다. 지배 이데올로기인 왕권에 역모를 꾀해 집안과 지역에 액운을 끼칠까 염려돼 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죽였다는 단출한 이야기에서부터, 실제로 삼별초 항쟁을 최후까지 이끈 김통정, 조선 말 제주 민란을 주도한 관노 이재수 등 실존인물이 등장한 설화까지 아기장수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다. 이런 제주 설화의 특수성은 육지 설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결국 주변부 문화, 즉 제주 문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구전된 설화는 집단창작의 전형이다. 향유자가 곧 유통자이고, 창작자가 된다. 제주에 현기영, 현길언, 고원정, 김수열, 고명철 등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가 유독 넘치는 이유도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바당밭 일구고 바당에 누인다

    바당밭 일구고 바당에 누인다

    제주 동북부의 구좌읍 김녕, 월정리 일대에 25일 새 걷기 코스가 열린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이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핵심마을 활성화사업’의 하나로, 지난 4월 선보인 산방산·용머리 지질트레일의 연장이다. 한데 테마는 다소 다르다. 산방산 쪽은 제주의 지질 역사에 초점이 맞춰졌다. 반면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제주인들의 삶의 원형을 엿보는 것에 방점이 찍혔다. 길 열림을 앞두고 미리 그 길을 걸었다. 왜 지질을 알아야 하는가. 섬의 역사뿐 아니라 섬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삶도 함께 새겨졌기 때문이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의 부제를 보자. ‘바당밭, 빌레왓을 일구는 동굴 위 사람들의 이야기길’이다. 길의 전체적인 성격이 축약된 표현이다. 생경한 단어들도 포함됐다. ‘바당’과 ‘빌레’다. 둘은 제주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설명하는 도구다. 이 둘의 의미를 알아야 지질트레일 위에 얹혀진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바당’은 바다를 일컫는다. 변변한 농토 하나 없던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는 밭이나 다름없었다. 뭍의 농민들이 밭에 애정을 쏟듯, 그렇게 바다를 일궈왔다. ‘빌레’는 너럭바위다. 용암이 흐르다 식은 흔적이다. 빌레의 두께는 다양하다. 용암이 흐를 당시의 여러 변수에 따라 수십㎝부터 1m를 훌쩍 넘게 쌓였다. 빌레 아래는 흙이다. 무엇이든 심어 먹거리로 쓰자면 먼저 빌레를 걷어내야 할 터. 호미 등의 농기구로 빌레를 잘게 쪼개 걷어내면 그제야 흙이 나온다. 그 위에 곡식을 심었다. 그렇게 등골 휘도록 만든 밭이 ‘빌레왓’이다. 땅 아래는 동굴이다. 세계지질공원 핵심 명소인 만장굴과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동굴들이 발 아래 얽혀 있다. 이들은 이름깨나 날리는 축에 속하고, 게웃샘굴 등 주민들만 아는 동굴도 있다. 요약하면, 동굴 위에 집을 짓고 뭍과 바다의 밭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의 삶을 이리저리 따라가는 길, 그게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이다. 트레일은 지역민과 전문가, 제주관광공사 등이 힘을 모아 조성했다. 길이는 14.6㎞. 지역민인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박자박 걸으면 6시간 남짓 걸린다. 들머리는 김녕어울림센터다. 예서 세기알해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세기알은 ‘성세기해변 아래’라는 뜻이다. 해안가에 원뿔 형태로 쌓아올린 검은 현무암 더미가 인상적인 자태로 서 있다. 김녕도대불이다. 밤에 조업 나간 어민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돕는 등대다. 해설사로 동행한 강정효(49) 제주대 강사는 “제주에 남아 있는 여러 형태의 도대불 가운데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도대불”이라며 “1972년 제주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등대불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설명했다. 해안엔 빌레가 넓게 형성돼 있다. 이른바 조간대다. 만조 때 바닷물에 잠기고 간조 때 드러난다. 물 빠진 빌레 위엔 ‘바릇잡이’(얕은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와 ‘고망낚시’(물 빠진 돌 구멍에서 물고기를 낚는 것)로 먹거리를 준비하는 주민들이 간간이 오간다. 빌레 밑엔 투수층이 발달돼 있다. 이 덕에 해안선 인근에서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난다. 청굴물도 그중 하나다. 이 일대 지명이 ‘청수동’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 강사는 청굴물을 “주민들이 물찜질하던 곳”이라 했다. 한라산 인근이나 제주 남쪽의 여러 폭포 주변에 사는 이들은 곧잘 폭포 아래서 물맞이를 즐긴다. 한데 폭포가 없는 제주 동북쪽 사람들은 청굴물 같은 용천수를 찾아 찜질을 즐겼다는 것이다. 청굴물은 바닷속 민물 목욕탕이다. 마을 앞 얕은 바다 위 두 곳에서 물이 솟는다. 물이 솟는 곳에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든 뒤 마을 쪽은 여자, ‘바당’ 쪽은 남자들이 썼다. 같은 시간대에 남녀가 함께 쓰는 경우도 있었을까. 외지인의 질문에 마을 할머니들은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일대엔 용암동굴이 많다. 동굴 위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해도 그리 틀리지 않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게웃샘굴이다. 두께가 1~2m 정도에 불과한 땅 아래 뚫린 동굴이다. 동굴 속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간다. 주민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던 샘물이다.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제주엔 섬 특유의 무속신앙도 발달했다. 당연히 섬기는 신도 많은데, 트레일을 걷는 동안 이와 관련된 시설들을 다수 엿볼 수 있다. 김녕본향당은 마을 전반을 수호하는 신을 모신 당, 귀네기동굴은 제주 지역에서 최초로 돼지를 제물로 삼은 돗제가 치러진 곳이다. 성세깃당은 ‘해녀마을’로 지칭되는 김녕리 해녀들이 잠수굿을 하는 곳이다. 성세깃당에서 ‘조른(짧은)빌레길’을 지나면 ‘김녕밭담길’이 시작된다. 빌레 위를 걷거나, 형태를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빌레와 밭의 높이 차는 들쭉날쭉이다. 불과 수㎝부터 1m가 넘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흙 위를 덮고 있는 돌들을 일일이 깨서 걷어내야 한다. 깬 돌은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는다. 그게 ‘제주 들녘을 휘감아 도는 검은 용’(黑龍萬里), 돌담이다. 그러니 돌담의 두께는 곧 제주 사람들 피와 땀의 높이라 해도 틀리지 않겠다. 돌담은 얼핏 엉성해 보인다. 틈이 많기 때문이다. 김녕 쪽 돌담이 특히 성긴 모양새다. 한데 이 비워진 공간이 바람을 찢는 역할을 한다. 돌담이 효과적인 바람막이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비움 덕이다. 기능뿐 아니라 모양도 빼어나다. 들녘을 휘휘 돌아가는 밭담 덕에 어지간한 관광지 뺨칠 만큼 서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김녕밭담길’ 초입에 주민들이 진(긴)빌레정을 세워뒀다. 정자에 오르면 ‘흑룡만리’ 밭담을 두 눈 가득 담을 수 있다. 강 강사는 “제주 안에서도 밭담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라고 전했다. ‘월정밭담길’ 구간은 산담을 관찰하기 적당하다. 산담은 무덤 주위에 둘러친 돌담이다. 망자의 집을 지키는 울타리인 셈. 신이 드나드는 ‘시문’과 무덤을 지키는 동자석도 이채롭다. 월정밭담길 아래는 저 유명한 용천동굴 호수와 당처물동굴이다. 하지만 출입은 불가다. 안내판에 새겨진 사진을 보며 발 아래 펼쳐져 있을 비경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반환점은 월정리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핫’(hot)한 제주 여행지로 꼽힌다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바당빌레길’이 펼쳐진다. 용암이 빚은 언덕 ‘투물러스’, 1270년 삼별초를 막기 위해 조간대에 쌓은 현무암 장벽 ‘환해장성’ 등 볼거리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덩개해안은 바다에 펼쳐진 빌레가 가장 인상적인 곳이다. 제주 5대산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 잠긴 두럭산이 이 해안에 있다. 두럭산은 1년에 딱 한 번, 음력 3월 보름에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일주동로를 따라 가다 김녕사거리에서 좌회전, 곧이어 만나는 마을길에서 우회전하면 왼쪽에 김녕어울림센터가 있다. →잘 곳 지오하우스 1호, 2호점이 25일 길 열림 행사 당일 문을 열 예정이다. 김녕과 월정 지역의 지질 구조와 문화 등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와 소품 등으로 장식한 소규모 숙박시설이다. 김녕어울림센터에도 소규모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다. →맛집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활용한 지오푸드(Geo-Food)도 첫선을 보인다. 우뭇가사리로 만든 ‘우미냉국’과 ‘톳주먹밥’, 돼지고기 삶은 물에 모자반과 조를 넣어 끓인 ‘몸죽’ 등을 맛볼 수 있다. 김녕리 부녀회 등에서 만든 양파즙, 우미, 한천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 이성계가 천천히 회군했다? 벽골제는 저수지? 방조제? 역사 속 9가지 전략전술

    이성계가 천천히 회군했다? 벽골제는 저수지? 방조제? 역사 속 9가지 전략전술

    전략전술의 한국사/이상훈 지음/푸른역사/364쪽/1만 8000원 조선 창업의 제1보라고 할 수 있는 위화도 회군의 핵심 전략은 ‘속도전’이었다. 역사서인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는 회군 당시 우왕과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일부러 천천히 남하했으며 우왕의 신료나 백성들도 이성계의 회군 병력을 마중나와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부리며 전투를 수행했고, 비교적 손쉽게 최영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은 위화도 회군이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천명에 따라 이뤄진 혁명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후대가 기록한 것이어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 이성계는 위화도로 진군할 때는 하루 평균 10㎞씩 나아갔지만 회군할 때는 하루 평균 40㎞나 되는 속도로 남하했다. 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사냥도 하면서 천천히 행군한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군했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그 당시 개경에 있는 최영의 군사력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최영 군의 일부는 양광도(지금의 경기 남부, 강원 일부, 충청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내려가 있었고 일부는 요동 정벌에 출전해 있었다. 최영의 군사가 약해져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이상훈씨가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 사례 9가지를 다룬 ‘전략전술의 한국사-국가전략에서 도하전까지’를 펴냈다. 4세기 평지에 3㎞가 넘는 대규모로 제방이 건설된 김제의 벽골제는 저수지인가 방조제(防潮堤)인가. 백제가 국가 존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대한 제방을 쌓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각종 사료들을 인용, 벽골제는 해수면이 상승하던 조축 당시에는 방조제 성격이 강조되다가 해수면이 하강하면서 점차 저수지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풀이한다. 작전권은 평시와 전시로 구분되는데 현재 평시 작전권은 한국군에, 전시 작전권은 미군에 각각 있다. 즉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대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주한 미국 사령관에게 부여돼 있다. 2010년 한·미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2015년 한국이 이양받기로 했으나 최근 다시 연기하기로 했다. 고려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와 몽골이 연합해 여·몽 연합군을 편성했다. 전시 작전권은 몽골이 가지고 있었고 고려군은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 과정에서 여·몽연합군의 작전 지휘권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고려군은 진도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제주도 삼별초를 진압할 때에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적극적인 군사 행동은 그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몽골로부터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사이사이에 ‘징검다리’라는 이름으로 해설을 붙여 무기의 개량, 군사 전략, 군율 등에 대한 이해를 도운 점이 눈에 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올 9급 국가직 과목별 특징과 난이도 보니

    올 9급 국가직 과목별 특징과 난이도 보니

    지난달 19일 전국 215개 시험장에서 치러진 2014년도 국가직 9급 공무원 공개경쟁 채용 필기시험을 놓고 수험가에서는 지난해 시험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 직렬 대상 필수과목인 국어, 영어, 한국사 과목이 난이도 측면에서 지난해와 전반적으로 유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 유형마저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단기’ 소속 강사들을 통해 올해 국가직 9급 필기시험 필수과목에서 나타난 주요 특징들을 짚어보고, 일부 선택과목에 대한 총평을 들어봤다. 올해 국어 과목은 현대시, 현대소설과 함께 고전문학이 지문으로 등장하는 등 문학 영역이 이전보다 강화된 점이 특징이다. 고전문학 지문으로는 ‘관동별곡’이 출제됐고, 관동별곡 본문 일부 표현의 문맥적 의미를 묻는 문제가 눈길을 끌었다(T책형 15번 문제·이하 T책형 기준). 또 품사를 구별하는 문제가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다. 품사 통용(낱말이 하나 이상의 문법적 성질을 가지는 것)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지 않았다면 풀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선재 강사는 “출제 경향을 섣불리 예단해 국가직 9급 필기시험에서는 고전문학 분야 문제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수험생들은 이번 시험을 통해 느낀 점이 많았을 것”이라면서 “앞으로는 국어 과목의 전 범위 학습을 통해 문법, 어휘 등 국어 지식을 축적하고 비문학 영역과 고전문학을 포함한 문학 영역에서 골고루 지문 분석 능력을 기르는 쪽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권장했다. 영어 과목에서는 지난해 시험에서 전무했던 독해 영역에서의 내용 일치 여부 파악 문제가 3개(10번, 13번, 14번 문제)나 나왔다. 지문 길이가 길어졌고, 유아의 언어 및 인지 발달 과정 등 추상적인 소재를 활용한 지문이 등장한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어휘 영역은 단순히 어휘의 의미를 묻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문맥에 맞는 어휘 사용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의 비중이 높아졌다. 조은정 강사는 “실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단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요구하던 흐름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어휘를 문맥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 문제 위주로 출제 경향이 바뀌고 있다”면서 “문법 영역 문제 역시 영어 문장 구조를 수험생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다양한 소재의 독해 지문을 마주하고, 단순 암기식 문법 공부를 지양할 것과 어휘 및 관용적 표현의 문맥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학습할 것을 추천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강민성 강사는 “이전 시험에서 보기 힘들었던 낯선 자료와 역사적 사실이 출제돼 겉보기에는 문제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면서도 “막상 자료를 읽다 보면 기본 개념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문제들로 구성됐다. 기본 개념 학습 및 자료 분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시험이었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삼별초’에 대한 지식을 물은 5번 문제, 조선의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재위 기간(1800~1834년)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물은 6번 문제는 매년 시험에서 단골손님으로 나온 자료들을 활용하지 않았다. 자료만 놓고 보면 처음에 문제를 풀 때 당혹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각각의 시대적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답을 고를 수 있었다는 것이 강 강사의 설명이다. 17~18세기 조선과 일본, 중국의 인구 변화 추세를 보여주는 자료가 등장한 3번 문제 역시 자료 자체는 낯설지만 해당 시기에 각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고 있었다면 순조롭게 풀 수 있었던 문제에 해당한다. 지난해 수학, 과학과 함께 9급 필기시험 선택과목으로 새롭게 편입돼 올해로 시행 2회째를 맞은 사회 과목의 경우 일부 까다로운 문제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문제 유형 및 난이도가 지난해와 비슷했다는 반응이다. 위종욱 강사는 “경제 영역 문제 중 일부가 수학적인 계산이 필요한 문제였고, 통계를 분석할 일도 많았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의외의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 문제 대부분이 수능형으로 출제됐다”면서 “앞으로 ‘법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는 수능 기출 문제를 풀면서 정답을 찾아내는 연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2)일연 ‘삼국유사’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2)일연 ‘삼국유사’

    동상이몽(同床異夢). 겉으로는 같은 편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가진 사이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동상이몽을 많이 경험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럼 지나간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만을 서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요즘 교육계를 시끄럽게 하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가 논란이 되는 것도 같은 사건에 대한 동상이몽 때문이다. 같은 현상에 대해 상반된 시각 차이를 보이는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대주의와 신라 정통론 입장에서 고대 삼국을 재편하거나 누락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신화나 기록들을 풍부하게 수집하고,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으로 쓰였다. 여기서 술이부작이란 기록은 하되 따로 꾸며서 넣지는 않는다는 실증적인 태도를 말한다. ‘유사’(遺事)란 말도 남겨진 일이란 뜻으로 삼국시대에 일어났던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을 적은 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국유사’에 쓰여 있는 단군신화 및 여러 건국신화들을 토대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정통성을 찾을 수 있고, 당시 고대인의 의식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술이부작의 원칙으로 쓰인 실증적인 역사서로만 본다면 그것은 삼국유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색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삼국유사’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선종 구산문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승려였던 일연(一然)이 1281년쯤에 편찬한 책이다. 그는 당시 승려로서 최고 직책인 국존(國尊)으로 책봉됐다. 책은 총 5권 9편으로 돼 있다.(도표) ‘삼국유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권1의 ‘왕력’과 ‘기이’편을 제외한 대부분은 모두 불교에 관한 사실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삼국유사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권1에 나온다. 책의 구성만으로 보았을 때 일연의 불교적 입장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연은 충렬왕 때 불교계의 최고 정점인 국존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일연은 몽골과의 항쟁이 마무리되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 들어선 개경정부의 절대적 후원에 힘입어 불교계에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는 권문세족과 원의 간섭이 심했던 때였다. 일연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민지(閔漬), ‘보각국존 일연 비문’(高麗國 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尊碑 幷序)에 보면 일연을 후원했던 인물은 박송비, 나유와 같은 무신과 이덕손, 민훤, 염승익 같은 문신으로 나뉜다. 여기서의 무신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뒤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진압, 동정군(東征軍)의 참여를 주도했던 사람들이고, 문신은 충렬왕이 원에서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에서 모시고 귀국한 부류이다. 이렇게 일연은 반무신정권세력과 친원세력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불교는 정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만큼 일연도 현실적인 정치권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입장이라면 일연은 왜 ‘기이’편을 맨 앞에 배치했을까. 삼국유사의 ‘기이’ 제1편의 서문을 보면 “대저 옛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에 대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 부명(符命)에 응하거나 도록(圖錄)을 받아 반드시 범인(凡人)과 다름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를 잡고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기이가 제 편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모두 그 뜻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 뒤 단군신화, 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등 신기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이한 세계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접근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이와 함께 일연의 삶을 기록한 위의 비문을 다시 살펴보자. “… 일연의 어머니는 이씨이고, 낙랑군 부인으로 봉해졌다. 처음에 둥근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어머니의 배에 내리쬐는 꿈을 3일 밤이나 꾸었는데, 마침내 태기가 있어 태화 병인년 6월 신유일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기사를 연결해 보면 일연의 출생 역시 비범한 인물은 신이한 과정에서 태어난다는 독특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는 신이함 자체를 불교적 경이로움과 연결시킨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 전반부에 ‘기이’를 배치해 후반부에 서술될 다양한 불교적 경이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키고, 불교의 세계 속에서 삼국의 역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편의 황룡사 관련 기사를 보면 이러한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황룡사는 호국불교의 구심점으로 국가적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던 절이었다. ‘탑상’편의 ‘가섭불 연좌석’이라는 기사에 황룡사 터는 옛날 가섭불이 연좌하여 제자 2만명을 제도했던 거룩한 곳이라고 나와 있으며 ‘탑상’편 ‘황룡사 장륙’에도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 불사를 세웠다고 하였고, 황룡사가 완공됐을 때에 장륙존상을 봉안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황룡사 구층탑’편을 보면 중국에 유학 갔던 자장 법사에게 9층탑의 건립을 명한 뒤 경덕왕 13년에 황룡사 대종이 만들어지는 것까지 황룡사 관련 문헌과 기사를 여러 차례 배치함으로써 부처님의 섭리에 의해 호국불교가 발전하고, 구심점이 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삼국유사의 방대한 기록들은 모두 정합적인 연결고리로 이어져 신라불교의 자취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다양한 모습의 승려들을 소개하여 민중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원효가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며, 나무아미타불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는 이야기(4권 ‘의해’, 원효불기)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같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한 목적지는 확실해 보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불교적 이상세계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연이 보여준 술이부작의 원칙이란 전해 내려오는 모든 사실을 수록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을 가지고 엄선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삼국유사의 술이부작은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사실을 선별해 기록하기 위해서 일연처럼 확고한 입장과 관점이 필요하다. 21세기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인터넷 세상이 또 다른 담론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다. 현대의 술이부작이란 시대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인정하는 자세에서 선별된 사실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으면 삼국유사 전체를 모두 읽어보자. 정민 교수의 ‘불국토를 꿈꾼 그들’(문학의 문학)과 정출헌 교수의 ‘김부식과 일연은 왜’(한겨레출판)를 참고하길 바란다.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인류 원형적 이야기 수록 … 역사서 이상의 가치

    일연은 22세에 승과에 응시, 장원급제했다. 고려가 몽고 침략을 당한 31세에 삼중대사의 승계를 받았고, 41세에 선사(禪師)에 제수됐다. 54세에 선종의 가장 높은 법계인 대선사(大禪師)가 됐다. 78세에 불교계 최고 자리인 국존(國尊)으로 책봉됐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 고려는 몽고와의 30년 전쟁, 무신의 난, 삼별초 항쟁, 민란, 몽고에 아부하는 세력의 등장 등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이때 고려 민족의 원류가 ‘단군’일 뿐 아니라 삼국의 뿌리가 모두 하늘과 연결된 태생이라고 강조한 ‘삼국유사’의 내용을 선택한 일연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전승되던 이야기 중 일연이 취사선택한 삼국유사 자체가 가진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 되겠다. 물론 삼국유사를 ‘역사서’로만 읽는 것은 이 책의 매력을 절반만 누리는 일과 같다. 신라 신문왕 시절 선대 문무왕이 보낸 대나무 피리 ‘만파식적’ 이야기나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킨 이야기 등을 읽다 보면 우리에게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담은 인류 원형적 이야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수많은 신화에 기초해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탄생시킨 것처럼 ‘삼국유사’ 속 이야기가 재탄생되지 말란 법이 없는 셈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1월의 오키나와, 눈 시린 쪽빛 풍경화

    노인들은 여전히 일본인이길 거부한다. 대신 이곳 사람임을 뜻하는 ‘우치난추’라는 말로 정체성을 세운다. 450년간 독립 왕국이었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또 30년 가까이 미 군정을 겪은 뒤 다시 일본에 반환된 곳. 원주민들과 무관한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20만명이 죽은 서글픈 역사가 서려 있다. 그러나 비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희석되고 있다. 우치난추뿐 아니라 한국인 위안부와 징용자들의 슬픈 넋까지 에메랄드 바다 빛에 가려진 땅 ‘아시아의 하와이’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는 1976년 일본의 한 현(縣)으로 편입됐지만 거리상으로는 한국이나 중국에 더 가깝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10분이면 겨울철 평균 최저기온이 섭씨 17.2도인 아열대 해양성 기후의 섬으로 피한(避寒)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한겨울에도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어 북방의 관광객들은 가벼운 차림에 카디건이나 바람막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도 오리털 파카를 입는다. 오키나와의 관문인 나하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키 작은 소철나무와 파인애플을 닮은 아당나무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미 군정에서 일본으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의 농업이 환금성 높은 사탕수수 경작으로 치우치면서 식량까지 바닥나자 현지인들은 ‘보릿고개’를 겪게 됐다. 그때 우치난추들의 배를 채워 준 것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아당 열매와 3일간 물에 담가 독을 뺀 뒤 삶은 소철나무 잎이었다. 독을 빼는 3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먹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나하공항이 있는 나하섬은 오키나와의 본섬으로 제주도의 4분의3 크기다. 여기에 슈리성, 추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 월드, 국제거리 등 주요 관광지가 밀집해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절경을 품은 나하섬 주변의 크고 작은 섬 160개(유인도 40여개)를 모두 합하면 제주도의 1.5배에 이른다. 그중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과 투명한 코발트 블루 물빛을 자랑한다. 특히 도카시키 섬 내 ‘아하렌 비치’는 세계적인 수준의 투명도를 갖고 있다. 배를 타면 수심 20m 아래까지도 훤히 보인다. 인근의 ‘도카시쿠 비치’도 투명한 물빛과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로 유명하다.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 해양스포츠의 메카다. 아하렌 비치와 도카시쿠 비치 모두 해변 가까이에 산호초가 넓게 자라고 있다. 산호초 사이로는 색색의 물고기들이 오가며 전 세계 스노클러들을 유혹하고 있다. 도카시키 섬 곳곳엔 전흔(戰痕)도 숨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본섬에 상륙하려는 미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도카시키 섬을 포함한 게라마제도에 함선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대규모 선단으로 게라마제도를 공격했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주민들과 함께 도카시키 섬 최북단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일본군은 민간인들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한다. 이날의 아픈 기억은 도카시키 섬 북부 ‘집단자결지’에 새겨져 있다. 본섬에서 오키나와의 독특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과거 류쿠왕국의 고도(古都) 슈리성이다.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슈리성은 1429년 쇼하시(尙巴志) 왕이 오키나와 본토를 통일하고 류쿠왕국을 세운 이후 450년간 역대 왕이 머물렀던 곳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대부분 파괴됐지만 성곽과 전각을 복원해 1992년 슈리성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중국과 류쿠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양식은 일본 본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1975년 세워진 추라우미수족관도 오키나와 관광에서 건너뛸 수 없는 곳이다. 7500t의 수압을 기둥 하나 없이 견뎌내는 세계 최대 수준의 수족관이 자랑이다. 대형 고래상어와 쥐가오리, 특이한 모양의 산호, 열대어들이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오키짱극장에서는 돌고래 쇼를 감상할 수도 있다. 오키나와의 해양성 기후는 남다른 야생미가 물씬 풍기는 자연풍경을 소성해 냈다. 이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포레스트 어드벤처’(www.forest-adventure.jp)는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다. 안전장치를 건 채 와이어를 타고 그물 다리를 건너 숲속을 탐험한다. 울창한 고사리 나무 숲을 걸으며 힐링을 하는 방법도 있다. 북부 ‘얌바루 이코이노 모리’ 휴양림에서는 ‘히카게헤고’라는 원시 고사리 나무 3000그루와 각종 식물을 감상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상처가 더 궁금하다면 평화기념공원을 찾아보자.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한국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다. 대한민국 각지에서 가져온 돌을 위령탑 앞에 쌓아 뒀다. 탑 앞에 선 비석은 충청도에서 가져온 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를 쓴 것이다. 한국, 한국인의 흔적도 여기저기 숨어 있다. 미야코지마에는 조선시대 홍길동 후손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슈리성 한켠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모셔둔’ 장경각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이곳까지 유입됐다는 얘기도 전한다. 국제거리와 마키시 공설시장에 가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뭘 즐기고 먹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본토 일본인과 묘하게 외모가 다른 우치난추들의 생김생김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도 재미다. 글 사진 오키나와(일본)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여행수첩 →진에어가 저비용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지난달 24일 인천~오키나와 정기편을 취항했다. 좀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오키나와를 다녀올 수 있게 됐다. 주 7회 운항하며 매일 오전 10시 35분 인천을 출발한다. 홈페이지(www.jinair.com) 참조. 1600-6200. →자유여행이라면 렌터카를 빌리는 게 편하다. 12시간 기준 5000엔 수준. 오키나와 중심부는 나하공항에서 슈리성까지 설치된 모노레일로 돌아볼 수 있다. →쇼핑은 오모로마치에 있는 DFS갤러리아 오키나와점과 대형 아웃렛몰인 아시비나가 유명하다. 특산물은 자색고구마로 만든 ‘베니이모타르트’다. →전통요리는 오이과의 채소 ‘고야’를 두부, 계란과 함께 볶은 ‘고야찬푸르’다. 해초의 일종인 ‘모즈쿠’도 일본 전역에서 소비될 정도로 유명하다. ‘오키나와 소바’는 강한 양념에 익숙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다. 오키나와 전통주인 아와모리와 오키나와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오리온 맥주, 오키나와 사탕수수 흑설탕을 이용한 도넛 ‘사타안다기’ 등도 맛있다. 일본 요리 뷔페인 ‘다이콘노 하나’ 등에 가면 다양한 오키나와 요리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 [25일 TV 하이라이트]

    ●역사스페셜(KBS1 밤 10시) 충남 해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마도 3호선은 발굴 사상 최초로 온전한 형태로 남은 고려 배다. 그런 마도 3호선의 맨 뒷부분에서 목간 하나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상어뼈가 들어 있던 상자와 함께 발견된 이 목간에는 기존 문헌에는 없었던 삼별초의 세부조직과 운영 실태를 말해주는 최초의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오감만족 세상은 맛있다(KBS2 밤 8시 20분) 세계 2위 쌀 수출국인 태국은 쌀 음식이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쌀 음식은 단연 쌀국수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새콤달콤한 맛이 강한 국물 쌀국수부터 아삭한 채소가 듬뿍 들어간 달콤한 볶음 쌀국수 팟타이까지. 암파와 수상시장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쌀국수의 맛의 향연에 빠져본다. ●불만제로 UP(MBC 밤 11시 40분) 에너지 음료를 마시면 정말 에너지가 생겨날까. 시중에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에너지 음료 3종류로 직접 실험해 봤다. 총 9명의 실험자가 3명씩 한 종류의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운동능력, 피로회복도를 검사해 본다. ‘고소한 실험’의 마스코트 사유리도 밤을 꼬박 새우며 참여한 에너지 효과 실험의 결과를 공개한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밤 8시 50분)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한 화가가 있다는 제보에 부산으로 달려간 제작진. 태어나 단 한 번도 그림을 배워 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직접 그린 그림이 벽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미술 도구를 꺼내는 할머니의 손길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한쪽 눈에 의안을 낀 상태였는데…. ●다문화 휴먼다큐 가족(EBS 밤 12시 5분) 2년 전, 한국에 먼저 시집 온 친구의 소개로 끼우짱은 지금의 남편 엄영철씨를 만나게 된다. 끼우짱에게 첫눈에 반한 영철씨의 적극적인 구애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두 사람. 아내를 위해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을 자처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금실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영철씨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소개한다. ●올리브(OBS 밤 11시 5분) 전원일기 속 복길 엄마로 친숙한 배우 김혜정.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에 복길 엄마로 사랑받기 시작한 탓에 그녀의 나이를 오해하는 때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복길 엄마 이미지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유쾌한 건강법도 공개한다. 하루 30분 꼭 지킨다는 그녀의 스트레칭 법과 일상생활에서의 올바른 스트레칭 법에 대해 알아본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고종 18년(1231) 음력 8월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고려의 재상은 9월에 무인정권의 집권자 최우(최이)의 집에서 의논해 삼군(三軍)을 출동시켰다. 삼군은 중군, 우군, 후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0월에 고려의 삼군이 북상해 청천강 하안의 안북성(안주)에 주둔했다. 몽골군이 도전해도 삼군은 성 밖으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군 지휘자 대집성이 나가서 싸우기를 강력히 요구하니 삼군이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하지만 정작 중군과 우군 지휘자는 나가지 않고 성에 올라 관망하다 대집성 역시 성으로 도로 들어왔다. 고려의 삼군은 고위급 지휘자도 없이 성 밖에 진을 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몽골군이 고려군을 추격해 무찌르자 고려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대집성이 삼군을 안북성 밖으로 나가게 해 싸우도록 만든 행위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몽골군은 기마병이 세계 역사상 가장 강했으니 그러한 몽골군의 주력과 성 밖의 벌판에서 전면전을 벌인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안북성을 지키면서 몽골군의 배후를 치거나 몰래 기습하는 전법을 구사했어야 했다. 대집성은 과부가 된 미모의 딸을 최우에게 보내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난다. 몽골군이 물밀듯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11월에 몽골군이 개경의 길목인 평주성을 도륙하더니 개경성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자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와 사위 김약선이 사병으로 자신을 지킨 반면 개경성을 지킨 자는 대개 노약 남녀였다. 12월에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최우가 몽골군에 화친을 요청했다. 몽골 사절단이 개경성으로 들어와 고려 임금 고종을 만나 화친이 성립되었는데 고려가 항복을 한 모양새였다. 고려의 재상이 고종 19년(1232) 2월 20일에 모여 도읍 옮기기를 의논했다. 5월 21일에 재상이 몽골 방어를 의논했고, 23일에도 재상과 4품 이상이 몽골방어 책략을 의논했다. 거의 모두가 개경성을 지켜 적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오직 재상 정무(鄭畝)와 대집성이 도읍을 옮겨 난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고종 19년 6월에 최우가 재상을 그 집에 모아 천도를 의논했다.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려 개경은 호(戶)가 10만에 이르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집이 서로 바라볼 정도로 번성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정서가 이 편안한 곳에 살고 싶어 천도를 어렵게 여겼지만 최우를 두려워해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이때 재상 유승단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이치이니 예(禮)로써 섬기고 신(信)으로써 외교하면 저(몽골) 역시 무슨 명분으로 매번 우리를 곤란하게 하리오. 성곽을 포기하고 종묘사직을 버리고 섬에 달아나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함으로써 장정을 적의 무기에 모조리 죽게 하고 노약자를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니오.” 유승단이 이처럼 과감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종 임금의 사부이기 때문이었다. 천도 예정지는 섬이 언급된 것을 보면 강화로 정해져 있었다. 고려 정부가 백성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유승단의 발언은 가슴을 울리지만 예의와 믿음으로 몽골을 사대(事大)하면 몽골이 고려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해결책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최우, 천도 반대 무관 베고 임금 협박… 수레 100개로 재산 운반 유승단의 발언으로 회의장이 술렁이는 사이에 야별초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최우에게 따졌다. “송경(개경)은 태조 이래로 지켜온 지 무릇 200여 년이라, 성(城)은 견고하고 무기와 식량은 풍족하니 힘을 다해 지켜 사직을 보위해야 마땅한데, 이를 포기하고 떠나 장차 어디에 도읍하려 하시오.” 야별초는 최우가 치안을 위해 만든 부대로 훗날 삼별초의 모태인데 그 중간급 지휘자가 용감하게 최우를 윽박지른 것이었다. 최우가 개경성을 지키는 책략을 묻자 김세충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집성이 최우에게 김세충이 감히 큰 의논을 저지하니 베어서 내외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무반을 대표하는 상장군도 대집성의 뜻에 맞추어 그렇게 하기를 요청했다. 이에 최우가 김세충을 끌어내 베게 했다. 김세충의 발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개경성 방어책을 대답하지 못한 데에서 드러나듯이 구체적이지 못했다. 개경성의 무기와 식량은 풍족했을지라도 개경성이 견고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다. 개경 나성(외성)은 현종 때 거란의 침략으로 개경이 불탄 다음에 축조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때때로 수리하기는 했지만 훼손이 진행되어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다. ●당시 수도 개경 성곽, 거란침입에 이미 훼손된 상태 인종 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의 서긍은 여행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왕성(도성)이 지형을 따라 모래와 자갈을 섞어 축조되었는데 호참(壕塹·해자)과 여장(女牆·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없고 그리 견고하지 않아 성의 낮은 곳은 적을 감당할 수 없어 지키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로 보아 개경 나성은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또한 개경 나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곽이라 수리하기도 벅찼고 병력이 많지 않으면 지키기도 어려웠다. 최우는 김세충을 죽이면서 강화로의 천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최우가 그날에 고종에게 아뢰어 속히 강화로 행차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임금은 미적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고종이 임금으로서 백성을 육지에 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작용했겠지만, 왕권을 무력화시켜 권력을 행사해 온 무인정권을 몽골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너뜨려 왕권을 회복하고 싶은 속내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우는 천도를 강행하고 수레 100개 정도를 동원해 자신의 재산을 강화로 운반하니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는 담당관청에 명령해 개경성 안에 방을 게시해 기한 내에 강화로 출발하지 못한 자는 군법으로 논한다고 했다. 또한 관원을 여러 도(道)에 파견해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이사시키도록 했다. 최우는 6월 16일에 임금에게 강화로 천도하도록 위협했고, 다음날에 2000명의 군인을 동원해 강화에 궁궐을 조영하도록 했다. 7월 6일에 임금도 어쩔 수 없이 개경을 출발해 승천부(강화도 북쪽 맞은편 고을)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인 7일에 바다를 건너 강화 객관에 들어갔다. 고려 임금과 정부가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7월 7석에 강화로 들어온 것이었다. 비가 열흘 넘게 내렸기 때문에 개경에서 강화로 가는 동안 사람과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지곤 했다. 높은 벼슬아치와 양가집 부녀 중에도 맨발에 짐을 이고 멘 자도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홀몸 노인이 길을 잃어 울부짖었다. 이렇게 강화 천도가 마무리됨으로써 약 38년 동안의 강도(江都) 시대가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이를 빌미로 고려에 대한 제2차 침략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몽골과의 전쟁 재개를 의미했다. 강화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의 동쪽과 동북쪽 해안을 따라 외성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 최항은 도성인 중성을 쌓아 방위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 강화도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거세고 갯벌이 발달해 배를 댈 만한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몽골군은 김포반도에 와서 강화도를 향해 소리만 지를 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몽골군이 고려군의 화살을 뚫고 강화도 연안에 진입한다고 해도 외성과 중성을 넘어야 하고 고려 최고 정예부대와 싸워야 했다. 강화도는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과 30년 동안이나 싸울 수 있었다. ●강화 거친 물살 덕에 ‘난공불락’… 방치된 육지 백성 삶은 참혹 대신에 본토에 남겨진 고려 백성은 무인정권이 간간이 보낸 지휘자와 병력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자신의 힘으로 고향을 지켜야 했다. 광주산성(남한산성) 전투, 용인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죽주(안성 죽산) 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몽골군은 30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집요하고 빈번하게 고려를 침략해 강산을 유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어갔다. 최우는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반면 백성을 육지에 방치해 온갖 참상을 겪게 만든 악당으로 비난받는다. 최우의 강화 천도는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강화로 천도했기 때문에 몽골과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고 그 항쟁을 인정받아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강화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랬다면 고려 백성의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고려국이 망해 몽골인이나 중국인으로 살아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몽골족 원과 만주족 청의 판도가 오늘날 중국의 판도에 거의 계승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최우의 선택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김창현 연구교수(고려대 한국사연구소)
  • [선택! 역사를 갈랐다] (4)이승휴와 이제현

    [선택! 역사를 갈랐다] (4)이승휴와 이제현

    13세기에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오랜 항전을 벌였다. 세계 최강의 몽골 기마군단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원 세조 쿠빌라이가 고려 태자를 만난 자리에서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이다. 옛날 당 태종이 친정했어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고려의 항전은 고대 동북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의 기억을 되살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역사상 최대의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의 싸움은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왕과 조정이 강화도로 옮긴 상태에서 육지의 항전을 지휘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 갔고,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다. “강화도 하나를 지킨다 한들 어떻게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항전을 멈추고 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최씨 정권이었다.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강화가 곧 정권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항전을 고집했다. 항전론과 강화론이 대립한 끝에 결국 최씨 정권이 무너졌고, 강화의 조건으로 태자가 몽골에 파견되어 쿠빌라이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태자는 쿠빌라이의 기쁨 대가로 앞으로 고려가 몽골 영토에 편입되지 않고 국가로서 유지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계속된 28년 항전의 결말은 이렇게 맺어졌고, 쿠빌라이의 이 약속은 뒷날 ‘세조구제’라고 불리었다. 이승휴(1224~1300)는 이처럼 긴박한 시대에 살았다. 전쟁의 피해를 누군들 피할 수 있었을까마는 이승휴의 경우는 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전쟁 중에 2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그 기쁨도 잠시, 고향인 삼척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몽골군 때문에 길이 막혀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10년 동안 발이 묶였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30대를 삼척에서 허송한 뒤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겨우 미관말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몇 해 뒤에 강화도에서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반란군에 사로잡혔다가 탈출하는 극적인 경험을 하기도 했다. ●몽골간섭기 이승휴 ‘제왕운기’ 단군신화 통해 역사의식 고취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관직이었음에도 이승휴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의에 맞서 싸웠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강화 이후 고려에는 몽골의 간섭이 미쳐 오는 가운데 외세와 결탁한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고, 이들에 의해 불법과 비리가 자행되었다. 관리 인사는 청탁으로 얼룩지고, 권세가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거대한 농장을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이승휴는 수차례 간쟁하여 비리를 고발했으나 결국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뒤 삼척에 은거하면서 국왕에 대한 충정을 담아 ‘제왕운기’를 지었다. 제왕운기에서 이승휴는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실렸는데, 바로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우리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시작부터 다르며 따라서 당시 고려가 몽골 영토에 포함되지 않고 국가로서 유지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제왕운기보다 5년 정도 앞선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단군신화가 수록되었으니, 대제국 몽골과 맞서 국가를 보존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국가의 유지와 바른 정치, 이 두 가지가 이승휴의 염원이었고, 이는 곧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다. 정치 개혁의 염원은 연소기예한 충선왕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듯했다. 충선왕은 부패한 권력층을 제거하고 정치를 일신하고자 했고, 삼척에 있던 이승휴도 부름을 받고 달려가 동참했다. 그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러나 곧 충선왕이 몽골에 의해 퇴위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승휴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삼척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승휴가 하고자 했던 일들은 그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과제로 남게 되었다. ●문생 이색 “이제현 선생은 법 고치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이 있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고려)뿐이다.” 1310년 몽골 황제 카이샨 카안이 보내온 국서에 나오는 말이다. 몽골제국 중심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왕국으로 존재한 나라. 이것이 당시 고려의 국제적 지위였고, 전쟁과 강화를 거치며 고려 사람들이 쏟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 지위가 저절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몽골의 위세는 더해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려를 없애고 몽골 영토로 편입해 들어가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려를 몽골의 지방기구인 행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이었다. 그것은 태조 이래 400년 넘게 이어져온 고려의 왕업을 단절하는 일이었으므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제현(1287~1367)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입성 반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제현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한 영재였다. 전도유망했던 이제현의 일생은 충선왕과의 만남을 통해 커다란 전환을 맞게 되었다. 쿠빌라이 카안의 외손자로서 몽골 정치에도 참여한 충선왕은 카이샨 카안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우고 몽골의 실력자가 되었다. 고려 왕위에 복위했지만 곧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몽골의 수도인 대도에 머물면서 그곳에 만권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중국의 유명한 성리학자들을 초빙했다. 이제현은 28세 때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만권당에 가서 공부했는데, 그 때문에 고려후기 성리학 수용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현이 몽골에 있을 때 마침 입성론이 제기되었다. 그는 고려 국가의 유지가 일찍이 쿠빌라이 카안이 약속한 ‘세조구제’에 따른 것이란 점을 역설하여 입성을 막는 데 성공했다. 쿠빌라이의 유훈이 존숭되는 몽골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였다. 이제현은 국내 정치에도 개입하여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정치 개혁을 주도하였다. 권세가들의 횡포를 막고 민생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제현의 대내외적 지향은 이승휴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시대의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개혁군주 공민왕의 등장으로 이제현의 위상은 급격히 흔들리게 된다. 공민왕은 몽골제국의 멸망을 예견했다. 그의 정책은 ‘세조구제’에 의지하여 국가를 유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몽골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356년에 공민왕은 기황후의 일족 등 친몽골 세력을 제거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쌍성총관부를 되찾았다. 몽골의 간섭을 받은 지 거의 100년 만에 자주성을 회복한 쾌거였다. 그런데 이제현은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다. 오랜 몽골 생활의 경험과 성리학자로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몽골에 대한 사대를 당연시했던 이제현으로서는 젊은 국왕의 정치적 모험에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제현의 나이 70세였다. 하지만 몽골제국은 생각보다 더 쇠약해 있었고, 공민왕의 모험은 성공으로 끝나고 고려의 새 시대가 열렸다. 국내 정치에서도 공민왕은 급격한 개혁을 추진했다. 몽골 간섭 아래서 왜곡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이 존경받는 원로대신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이제현은 여기에도 역시 소극적이었다. 몽골 간섭 시기의 오랜 관직생활을 통해 그 자신이 이미 보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현의 문생인 이색은 이제현에 대해서 “옛 법을 지키는 데 힘썼고, 법을 고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권세가들이 법을 어기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지만, 잘못된 제도를 고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이제현의 성품을 잘 표현한 말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을 위한 선택은 세속적인 연고가 없는 승려 신돈이었다. “유생들은 좌주니 문생이니 하면서 안팎으로 줄지어 서로 청탁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하는데, 이제현 같은 사람은 문생들이 문하에서 또 문생을 봄으로써 마침내 나라를 메운 도적이 되었습니다. 유생들의 폐해가 이와 같습니다.” 신돈은 이렇게 이제현을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좌주와 문생은 과거에서 시험관과 합격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이 학연을 매개로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고 서로 청탁하면서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보수파 이제현, 공민왕 도움 요청에 소극적 신돈의 개혁은 권세가들이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되돌리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신돈의 개혁이 한창일 때 이제현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세조구제’의 유지는 이미 낡은 구호가 돼 버렸고, 자신이 오히려 구시대의 인물로서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 기막힌 역전을 이제현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시대의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승휴와 이제현은 모두 이 점에 충실했고, 그래서 수백 년이 지나도록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은 더욱더 중요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시대의 과제 또한 변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 속에서 옳은 방향을 선택하고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제현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고, 변화를 모르는 사람을 역사는 선택하지 않았다. 옛날에도 그랬다. 이익주(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고려선박서 목간 발굴… 삼별초, 태안 앞바다서 깨어나다

    고려선박서 목간 발굴… 삼별초, 태안 앞바다서 깨어나다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렸던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馬島) 해역에서는 무수히 많은 배가 침몰했다. 마도 뱃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조세뿐 아니라 곡물을 나르는 배가 다니던 길이었기에 한국 고고학의 보물 터가 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6일 마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 중인 마도 3호선에서 인양된 287점의 유물을 소개했다. 그동안 마도 해역에서는 태안선, 마도 1호선, 마도 2호선의 발굴이 이루어져 완벽한 형태의 고려청자 매병이 발견되는 등 국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마도 3호선에서 나온 여러 유물 가운데 삼별초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목간(木簡·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물품 꼬리표)이 가장 눈길을 끈다.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는 그동안 별초의 지휘관이 7~8품의 하급 무반(武班)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마도3호선의 목간에서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이란 글이 발굴됐다. 이를 통해 삼별초가 좌·우 각 3번으로 나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와 별초의 지휘관이 4품의 시랑(장군과 같은 품계)도 맡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이란 평이 없지 않았던 삼별초가 장군을 맡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의 항쟁 의식이 더 빛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삼별초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라고 평가했다. 최충헌에서 시작한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한 김준(金俊)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도 포함돼 이채를 띤다. 목간 가운데 앞면에 ‘事審令公主宅上’, 뒷면에 ‘○○生四十合伍一缸玄禮’(○는 표기 불능 글자)라는 글자가 확인된다. ‘사심관인 김 영공 댁 앞으로 보내는 홍합 젓갈과 날 것 40항아리 합 51항아리. 현례’라는 뜻이다. 다른 수취인에 비해 수령할 화물이 압도적으로 많아 김 영공이 월등한 권력자임을 알 수 있다. ‘사심관 김 영공’은 바로 최씨 무신정권 60년에 종지부를 찍은 당시 무신정권 최고실력자 김준이다. 영공(令公)은 고려시대 왕실 제왕(諸王)에게만 붙이던 극존칭이며, 다른 목간에 보이는 ‘택상’(宅上), 즉 누구누구 댁 앞이라는 표기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택상’(主宅上)이라고 했다. ‘김 영공님 댁 앞으로 보내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당시 김준의 권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마도 3호선은 길이 12m에 너비 8m, 깊이 2.5m가량이며 현재까지 수중 발굴된 고려 선박 중에서는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 그동안 발굴된 적이 없는 배의 이물과 고물, 돛대와 이를 고정하는 구조 등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선박 구조의 전모도 밝힐 수 있게 됐다. 주요 화물은 젓갈, 말린 생선, 육포, 볍씨 등 먹을거리가 주를 이룬다. 말린 홍합, 생전복, 전복젓갈 등도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사어(沙魚)라고 적힌 목간이 있어 상어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홍합 털과 거대한 사슴뿔도 다량 나왔는데 지혈제 등 약재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47점의 장기돌. 현재 쓰는 초(楚)나 한(漢) 대신 장군(將軍)이라고 새겨진 장기돌과 차(車), 포(包), 졸(卒) 등이 뚜렷이 새겨진 검은색 조약돌은 고려 선원의 생활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자극한다. 마도 3호선의 발굴 조사는 이달 말까지 이루어질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농식품부 사무관들 우리술 전설을 읊다

    백약지장(百藥之長). 백 가지 약 중에 으뜸이라는 뜻이다. 천연효모로 빚은 술을 음식과 함께 반주로 먹으면 약이 된다는 의미다. 이처럼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식문화라는 인식 하에 농림수산식품부의 새내기들이 숨겨진 우리 술의 전설을 찾아나섰다. 농식품부는 10일 새내기 사무관 18명이 전국 각지의 12가지 술을 집중 취재해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제작한 우리 술 홍보 책자 ‘술래잡기’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책 제목인 ‘술래잡기’는 술래잡기 놀이처럼 신임 사무관들이 숨어 있는 우리 술에 얽힌 전설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다. 이들이 소개하는 한국의 12대 명주는 평창 감자술, 홍천 옥선주, 한산 소곡주, 면천 두견주, 전주 이강주, 고창 복분자주, 해남 진양주, 진도 홍주, 김천 과하주, 안동 소주, 제주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등이다. 책 속에 소개된 우리 술에는 갖가지 사연들이 있다. 맛과 향이 뛰어나 한번 맛을 보면 일어날 줄 모른다고 해 ‘앉은뱅이술’로 불리는 한산 소곡주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집집마다 빚고 있는 술이다. 소곡주는 백제 유민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려 만든 술이었다고 한다. 제주도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고소리술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대몽항쟁군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결국 100년 가까이 원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해진 술이다. 이 책은 총 3000부가 제작돼 전국 공공 및 주요 대학 도서관 등에 배포될 예정이며, 농식품부 자료실 홈페이지(library.mifaff.go.kr)에서 원문보기 서비스를 통해서도 열람할 수 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100大 사건을 추적하다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100大 사건을 추적하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로 시작되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유명한 동요가 있다. 동요가 인물로 한국사를 정리했다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이근호·박찬구 엮음, 청아출판사 펴냄)은 고조선과 한나라(중국) 전쟁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사건으로 한국사의 흐름을 관통한다. ●고조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또 하나의 교과서’ 역사적인 사건의 인과관계를 하나하나 추적해 나가다 보면 한국사는 딱딱한 책이 아니라 풍성한 이야기가 담긴 나무로 꽉 찬 거대한 숲처럼 여겨진다. 각각의 사건에 지도, 관련 사진, 더 알아보기 등 관련 자료를 추가 구성해 교과서처럼 명확한 이해를 돕는다. 엮은이 이근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은 “사건으로 역사에 접근한 책들도 있었지만 한국사 전체를 추적한 경우는 많지 않다.”며 “역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출해 한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100가지 사건은 연대순으로 선정됐다. 이 연구원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편년이 확정되지 않은 사건은 불가피하게 빠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책에서는 이를 보완하고자 해당 사건이 벌어진 시대의 주요 인물 및 얽힌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고,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는 도판까지 곁들였다. 관련 자료가 풍부해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한국사를 전공한 현직 기자가 쓴 글이기에 교과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금 벌어지는 사건을 글로 중계하는 듯한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사육신 사건은 “나리(세조)가 나라를 도둑질했다.”, “어떻게 공신으로서 배신을 할 수 있는가.”, “단종의 복귀를 위해 후일을 기약했을 뿐이다.”, “내가 내린 녹을 먹지 않았느냐.”, “나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다.”는 세조와 성삼문(사육신 가운데 한 명)의 피 튀기는 대화로 요약된다. ●학자·기자의 눈으로 중계하듯… 풍부한 자료·도판 100대 사건으로 꼽힌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권력 다툼, 살수대첩, 귀주대첩, 임진왜란 등을 통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한 우리 선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 이름도 생소한 고려 시대 만부교 사건과 강조의 정변, 나선 정벌, 암태도 소작 쟁의 등에서는 미처 몰랐거나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대, 고려, 조선에 그치지 않고, 8·15 광복 이후 다양한 민주화 운동까지 이어진다. 엮은이 박찬구 서울신문 기자는 “결국 역사는 사람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인과관계를 갖기 마련”이라며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지 알기 쉽게 서술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사는 삼별초 봉기나 아관파천처럼 생경한 단어를 외워야 하는 까다로운 과목이거나 각색된 TV 드라마로만 다가왔다. 하지만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을 통해 역사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로 여겨질 것이다. 2만 3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 진돗개/함혜리 논설위원

    지구상에는 혈통이 고정되어 공인 받은 견종이 약 800종 있다. 이 중 한국을 대표하는 토종개는 풍산개·삽살개·진돗개 3종. 아직까지 그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남 진도군 일대에서 우리 선조들이 오래 전부터 길러온 진돗개가 유일하다. 진돗개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 고유의 토착견이라는 설과 함께 삼국시대에 남송의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들어왔다는 설,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 때 진도에 주둔하던 몽고군의 군견이 남아 시조가 됐다는 설이 있다.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몽고군이 데리고 온 북방견과 진도의 토착견이 혼배하여 오늘날 진돗개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대륙과 격리된 채 천년 가까이 지나면서 순수한 형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자연적으로 혈통이 고정됐다.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문화재관리법과 한국진돗개보호육성법에 따라 철저하게 보호육성되고 있다.1995년에는 국제보호육성동물로 공인지정됐다. 진돗개는 털 빛깔과 무늬에 따라 황구·백구·재구·호구·네눈박이 등 다섯종류로 구분된다. 순종 진돗개는 머리와 얼굴이 정면에서 보아 8각형으로 귀는 앞으로 약간 기울어져 곧게 서 있다. 눈은 삼각형이며 짙은 갈색이나 대추색을 띤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귀밑선상에 맞아야 하고 앞니가 아랫니를 약간 덮고 있어야 한다. 목은 굵어서 다부지게 보이고 꼬리는 위로 말려 있어 힘차 보인다. 다리는 강건하고 길쭉해 전체적으로 강한 활동력과 탄력 있는 근육형이며 암수의 구분이 뚜렷하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대담하고 후각과 청각이 매우 예민해 사냥에 적합하다. 진돗개를 명견으로 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멀리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귀소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판이 자자하다. 해남 장터에서 대전으로 팔려 갔다가 300㎞를 달려 주인 곁으로 돌아온 백구의 이야기는 진돗개의 충성심과 귀소성을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다. 진도군 의신면 돈지마을에서는 백구와 박복단 할머니의 재회를 조각한 ‘돌아온 백구상’을 만들고 백구 지석묘도 세워 백구를 기리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이 한국의 진돗개를 데려가 경찰견으로 훈련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예민하고 용맹하고 충직한 한국의 명견 진돗개의 활약이 자못 기대된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테이크 아웃 여행] 호국의 달, 자녀 학습 위한 ‘애국여행’

    [테이크 아웃 여행] 호국의 달, 자녀 학습 위한 ‘애국여행’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애국여행’이라는 주제로 국내 이색 여행이 있어 눈길을 끈다.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호국선열들을 기리는 행사가 지역마다 늘어나고 있어 자녀를 갖고 있는 부모가 호국과 애국이라는 단어를 학습시키기 위해 여행 겸으로 현장을 찾고 있다.이는 요즘 아이들에게 호국, 애국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현충일과 6.25를 모르는 자녀에게 국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서다. 더불어 여행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애국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옥션숙박을 담당하는 양승재 팀장은 “애국여행은 여행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국가의 소중함도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경험이 될 것”이라며 “또한 주요 여행지의 경우 교과서 내용과도 연계가 되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애국 열사들의 흔적이 가득한 충남으로 떠나자충남은 항일열사를 비롯해 위인들 생가를 찾아볼 수 있는 충절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식민지 세월의 아픔과 독립열사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예산은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충의사가 있다. 윤봉길 기념관에는 그의 귀중한 유물 56점을 비롯해 짧은 삶을 볼 수 있는 영상이 준비돼 있다.아산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혼이 서린 현충사를 둘러 볼 수 있으며 홍성은 김좌진 장군 생가와 한용운 생가 등도 찾아볼 수 있다.특히 충남에는 리솜스파캐슬을 비롯해 온천수로 인정받는 덕산온천이 위치해 있어 가족여행의 피로를 풀 수 있다.이에 따라 옥션숙박에서는 ‘애국여행’ 후 피로를 풀 수 있는 숙박시설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최저 5만원(산울림팬션 등)부터 이용할 수 있으며 천안센트럴관광호텔의 경우 예약 시 생수, 목욕용품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호국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화도강화도는 외세와 맞선 항전의 유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으로 대몽항전의 상징인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배중손 장군이 항몽 근거지로 삼았던 용장산성과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이 있다. 이어 남도석성의 경우 조선시대 개축한 상태로 보존이 잘돼있는 곳이다.또 강화도에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전략적 요충지 초지진도 있다. 초지진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곳이다. 하지만 고종 8년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에게 처음으로 함락됐으며 그 후에는 일본과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맺어야 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이곳에는 아직도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떠오르게 하는 포탄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자녀들을 위한 역사 학습 체험 현장으로 좋은 곳이다.◆ 6.25 결사 항전지, 경상북도 칠곡칠곡군은 다가오는 6.25 전쟁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유적이 많다. 먼저 다부동전적기념관은 탱크모양으로 디자인돼 있어 외벽에는 6.25 당시의 격전 모습을 엿 볼 수 있다.이어 부근에는 6.25 전쟁을 기념해 6.25㎞로 조성한 탐사코스를 돌며 당시 상황을 체험할 수도 있다.또한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던 격전을 기념하여 건립된 곳이다. 6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당시 사용되던 무기류와 피복 등을 관람할 수 있다.호국의 다리는 대구와 부산의 함락을 막기 위해 폭파된 곳이며 철교의 형태로 다시 복원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파주 임진강변파주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각, 도라전망대가 있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적합하다.자유의 다리는 1953년 휴전협정 때 유엔군과 국군 포로를 교환하기 위해 건립한 임시 목교로 다리 끝 벽면엔 숱한 사람들의 통일 기원 메시지가 담긴 천조각과 종이, 셔츠 등이 걸려 있다.도라전망대는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북한의 소탈한 농촌 생활과 어린 소년들의 군사훈련을 관측할 수 있다. 또 평화 누리공원에서 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색적인 조형물들을 둘러 볼 수 있다.이에 옥션숙박에서는 파주에 위치한 헤이리, 평화누리공원 바람개비 동산 등을 최저 1만 9,900원부터 저렴하게 이용할 수 는 상품도 내놨다. 여행 상품은 헤이리 예술마을을 비롯해 프로방스 마을, 바람개비 공원 등을 방문한다.◆ 북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자녀의 꿈이 늠름한 군인이라면 태풍전망대를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다.지난 1991년 개관한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국군 전망대로 비끼산 최고봉인 수리봉에 자리 잡고 있다.전망대에서 휴전선까지 거리가 고작 800m에 불과해 맑은 날에는 망원경으로 개성 부근까지 볼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 2km 떨어진 필승교 부근에 위치한 전시관에서는 강으로 떠내려 온 북한 생활필수품, 일용품, 간첩의 침투장비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다.옥션숙박에서는 고성 부근의 콘도, 펜션 등을 저렴하게 제공한다. 특히 아이파크 콘도는 최저 3만 9000원부터 이용할 수 있으며, 고성 금강산콘도 객실 예약 시 커피, 햄버거, 주유권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사진=강화도 광성보, 강화도 광성보 용두돈대, 독립기념관, 평화누리공원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진도 ‘토요민속여행’ 남도 대표공연으로

    진도 ‘토요민속여행’ 남도 대표공연으로

    끈끈한 섬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전남 진도의 민속 공연이 남도 여행의 대표적 코스로 자리잡았다. 7일 진도군에 따르면 주말마다 향토문화회관에서 펼쳐지는 ‘토요민속여행’이 최근 제440회 공연을 끝으로 올해 행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봄 공연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4월 개막한 토요민속여행은 신종플루와 경기침체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올해 총 35회 1만 4500여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올해는 ‘장화홍련전’, 구국의 고려전사 ‘삼별초’ 등 특별공연에 이어 신안군 하의도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넋을 위로하는 ‘진도 씻김굿’을 펼치기도 했다. 토요민속여행은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 씻김굿,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4종과 북놀이, 만가, 남도잡가, 닻배 노래, 소포걸군 농악 등 도지정 무형문화재 5종이 시연된다. 토요민속여행은 1997년 시작한 이후 13년 동안 토요일 상설 공연을 이어왔으며 지금까지 모두 21만여명이 다녀갔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