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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 전승 도운 척후장… 왜군 포로 됐다가 탈출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전승 도운 척후장… 왜군 포로 됐다가 탈출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의 5개 수군진 가운데 사도진과 방답진은 종3품의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거진(巨鎭), 곧 핵심 수군기지였다. 오늘날의 여수 돌산도에 있었던 방답진이 좌수영을 방어하는 역할이라면 사도진은 여도진·발포진·녹도진을 거느리고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흥반도를 지켰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선수군의 첫 번째 승전인 옥포해전부터 척후장으로 출전해 왜적의 위치와 선단의 규모를 기선(旗船)에 알리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이순신 수군이 전승을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완은 훗날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포로가 돼 일본에 끌려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사도진의 옛터는 이제 한적한 시골 어항(漁港)이 됐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이다.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고기잡이배들만 한가롭다. 전라좌수영의 대표적 수군기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진성(鎭城)도 있었다지만 자취는 간데없다. 마을 보건지소 앞에 있는 첨절제사 선정비가 유일한 흔적인데 이것조차 비바람에 깎여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 다만 금사리(錦蛇里)라는 마을 이름이 사도진(蛇渡鎭)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최근 ‘사도진해안길’이라는 길 이름이 붙여지면서 사도진 터를 찾아가기가 쉬워졌고 역사도 조금은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전라좌수영 대표 기지·진성 흔적 없어 그런 만큼 옛 사도진의 복원 작업에 시동이 걸린다면 새로운 역사관광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리호 발사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나로우주센터가 가깝고, 총길이 3462m에 이르는 해창만방조제는 바로 금사리에서 시작한다. 방조제 둑에는 오토캠핑장, 야외 공연장, 산책로로 이루어진 해창만간척지공원이 조성됐으니 나로우주센터와 짝을 이루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간척지 둑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바다, 뒤로는 담수호가 펼쳐져 있어 낚시인들도 즐겨 찾는다. 사도첨사 김완(金浣·1546~1607)은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1554~1611)과 품계는 같고 나이는 8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사도첨사 김완이 아닌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좌수영 5개 수군진의 선임을 맡겼다. 충무공이 좌수사에 부임하고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사도첨사 김완을 그리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진년 2월 충무공의 관내 순시는 휘하 지휘관의 전쟁 준비 태세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충무공은 25일자 ‘난중일기’에 ‘여러 가지 전쟁 준비와 관련해 (사도진에) 결함이 많이 보여 군관과 관리들에게 벌을 주었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고 적었다. 교수(敎授)는 향교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지방관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사도진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못하건만 관찰사가 표창하는 공문서를 올렸기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3월 20일자 일기에도 김완에 대한 불신은 이어졌다. 충무공은 관내를 돌아보라는 명령을 제 기한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천부 책임자들을 벌주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사도첨사 김완은 혼자서 수색했다면서 반나절 동안 나로도 안팎과 대평도 및 소평도를 모두 수색하고 그날로 포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엉뚱한 거짓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흥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문의하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적었다. 그리고 ‘몸이 몹시 안 좋아 일찍 들어왔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광(1541~1607)이다. 왜란 개전 이후 4만의 전라도 군사를 근왕병으로 이끌고 북상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소수 왜적의 기습을 받고 패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1589년 전라도관찰사에 한번 올랐다가 파직되고 159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됐다. 1589년이라면 김완이 사도진첨절제사에 임명된 시기이기도 하다. 김완과 이광 사이에는 기록에 남지 않은 무언가 끈끈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 할 일을 태만히 하는 부하를 가장 싫어하는 충무공이다. 게다가 태만의 배경에 상급자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도첨사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김완 쪽에서 봐도 충무공은 적극적으로 모시기에는 떨떠름한 상관이 아닐 수 없었다. 김완이 종3품 사도첨사에 제수된 그해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이었다. 충무공은 일찌감치 1580~1582년 전라좌수영에서 18개월 동안 종4품 발포만호를 지냈으니 10년 가까이 지난 이후 전라좌수사에 오른 것을 ‘벼락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김완이 느꼈을 갈등은 오늘날에도 흔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공은 ‘난중일기’ 앞쪽에서는 좀처럼 김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년 9월 이후가 되면 권준이나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에 버금가게 김완과 활을 쏘거나 술을 마셨다는 언급이 잦아진다. 1594년(갑인년) 어느 날 일기에는 ‘경수(景受·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발포만호 황정록, 사도첨사 김완과 함께 사인암에 올라 하루 종일 취해서 이야기하다 돌아왔다’는 내용도 보인다. 충무공과 깊이 교감하는 참모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다.●1595년 충무공 장계, 조방장으로 승진 김완은 전쟁 준비 기간 신뢰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전장(戰場)에서 바꿀 수 있었다. 충무공과의 관계 개선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순신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뒤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 이런 대목이 있다. ‘5월 7일 새벽 출정해 천성, 가덕으로 가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이 났음을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덤벙대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라”고 엄하게 명령하고는 대열을 갖추어 일제히 나아갔습니다.’ 이어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의 공로를 나열하면서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했다’고 했다. 김완이 척후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선을 공격해 작지 않은 전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당파(撞破)는 포격을 가해 적선을 분쇄한 것을 뜻한다. 김완은 이어진 한산도대첩과 부산포해전을 비롯해 이순신의 주요 해전에서 척후장으로 활약했고 159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로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했다. 조방장이란 통제사나 절도사를 보좌해 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역할을 하는 장수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7년에는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伏兵都將)을 맡아 도장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하기도 했다. 복병도장은 적이 지나는 길목에 포진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해상 게릴라부대 총대장을 뜻하는 듯하다. 거제도와 북쪽 칠천도 사이에서 벌어진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15일에 벌어졌다. 선조실록은 ‘원균을 비롯해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라는 기사에서 ‘칠천량해전의 수군 장수들은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이라면서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뿐’이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발언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 김완이 분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김완은 왜적과 싸우며 수세에 몰리자 자결하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포로가 됐다. 김완은 전후의 이야기를 ‘용사일록’(龍蛇日錄)이라는 일기체 회고담에 담았는데,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日岐島), 낭고야(浪古也)를 거쳐 곡고라(曲高羅)의 감시인 집에 감금됐다고 했다. 낭고야와 곡고라는 나고야(名護屋)와 고쿠라(小倉)의 음차 표기다. 그는 1598년 1월 일본에서 탈출한 뒤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고,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해 군수 박응창이 순찰사에게 보고하니 선조에게 상세한 내용의 장계가 올라갔다. 선조는 ‘동방의 소무’라는 뜻으로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쓴 어필과 함안군수 벼슬을 내렸다. 소무(蘇武)는 중국 전한시대 흉노에 붙잡혀 복속을 강요당했으나 굴하지 않아 바이칼호 주변에 19년 동안 유폐됐다 돌아온 인물이라고 한다. ‘용사일록’의 내용은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도 담겼다. 무덤은 고향인 경북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 있다.
  • 칠천량해전 홀로 분전, 포로되어 끌려간 일본에서 탈출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칠천량해전 홀로 분전, 포로되어 끌려간 일본에서 탈출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의 5개 수군진 가운데 사도진과 방답진은 종3품의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거진(巨鎭), 곧 핵심 수군기지였다. 오늘날의 여수 돌산도에 있었던 방답진이 좌수영을 방어하는 역할이라면 사도진은 여도진·발포진·녹도진을 거느리고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흥반도를 지켰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선수군이 첫번째 승전인 옥포해전부터 척후장으로 출전해 왜적의 위치와 선단의 규모를 기선(旗船)에 알리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이순신 수군이 전승을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완은 훗날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사도진의 옛터는 이제 한적한 시골 어항(漁港)이 됐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이다.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고기잡이배들만 한가롭다. 전라좌수영의 대표적 수군기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진성(鎭城)도 있었다지만 자취는 간데 없다. 마을 보건지소 앞에 있는 첨절제사 선정비가 유일한 흔적인데 이것조차 비바람에 깎여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 다만 금사리(錦蛇里)라는 마을이름이 사도진(蛇渡鎭)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최근 ‘사도진해안길’이라는 길이름이 붙여지면서 사도진 터를 찾아가기가 쉬워졌고 역사도 조금은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만큼 옛 사도진의 복원 작업에 시동이 걸린다면 새로운 역사관광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리호 발사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나로우주센터가 가깝고, 총길이 3462m에 이르는 해창만방조제는 바로 금사리에서 시작한다. 방조제 둑에는 오토캠핑장, 야외 공연장, 산책로로 이루어진 해창만간척지공원이 조성됐으니 나로우주센터와 짝을 이루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간척지 둑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바다, 뒤로는 담수호가 펼쳐져 있어 낚시인들도 즐겨 찾는다.  사도첨사 김완(金浣·1546~1607)은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1554~1611)과 품계는 같고 나이는 8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사도첨사 김완이 아닌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좌수영 5개 수군진의 선임을 맡겼다. 충무공이 좌수사에 부임하고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사도첨사 김완을 그리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진년 2월 충무공의 관내 순시는 휘하 지휘관의 전쟁 준비 태세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충무공은 25일자 ‘난중일기’에 ‘여러가지 전쟁 준비와 관련해 (사도진에) 결함이 많이 보여 군관과 관리들에게 벌을 주었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고 적었다. 교수(敎授)는 향교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지방관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사도진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못하건만 관찰사가 표창하는 공문서를 올렸기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3월 20일자 일기에도 김완에 대한 불신은 이어졌다. 충무공은 관내를 돌아보라는 명령을 제 기한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천부 책임자들을 벌주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도첨사 김완은 혼자서 수색했다면서 반나절동안 나로도 안팎과 대평도 및 소평도를 모두 수색하고 그날로 포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엉뚱한 거짓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흥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문의하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몸이 몹시 안좋아 일찍 들어왔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광(1541~1607)이다. 왜란 개전 이후 4만의 전라도 군사를 근왕병으로 이끌고 북상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소수 왜적의 기습을 받고 패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1589년 전라도관찰사에 한번 올랐다가 파직되고 159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됐다. 1589년이라면 김완이 사도진첨절제사에 임명된 시기이기도 하다. 김완과 이광 사이에는 기록에 남지 않은 무언가 끈끈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 할 일을 태만히 하는 부하를 가장 싫어하는 충무공이다. 게다가 태만의 배경에 상급자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도첨사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김완 쪽에서 봐도 충무공은 적극적으로 모시기에는 떨떠름한 상관이 아닐 수 없었다. 김완이 종3품 사도첨사에 제수된 그해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이었다. 충무공은 일찌감치 1580~1582년 전라좌수영에서 18개월동안 종4품 발포만호를 지냈으니 10년 가까이 지난 이후 전라좌수사에 오른 것을 ‘벼락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김완이 느꼈을 갈등은 오늘날에도 흔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공은 ‘난중일기’ 앞쪽에서는 좀처럼 김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년 9월 이후가 되면 권준이나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에 버금가게 김완과 활을 쏘거니 술을 마셨다는 언급이 잦아진다. 1594년(갑인년) 어느 날 일기에는 ‘경수(景受·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발포만호 황정록, 사도첨사 김완과 함께 사인암에 올라 하루 종일 취해서 이야기하다 돌아왔다’는 내용도 보인다. 충무공과 깊이 교감하는 참모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완은 전쟁 준비기간 신뢰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전장(戰場)에서 바꿀 수 있었다. 충무공과 관계 개선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순신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뒤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 이런 대목이 있다. ‘5월 7일 새벽 출정해 천성, 가덕으로 가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이 났음을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덤벙대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라”하고 엄하게 명령하고는 대열을 갖추어 일제히 나아갔습니다.’ 이어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의 공로를 나열하면서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했다’고 했다. 김완이 척후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선을 공격해 작지 않은 전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당파(撞破)는 포격을 가해 적선을 분쇄한 것을 뜻한다. 김완은 이어진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을 비롯해 이순신의 주요 해전에서 척후장으로 활약했고, 159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로 조방장으로 승진했다. 조방장(助防將)이란 통제사나 절도사를 보좌해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장수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7년에는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을 맡아 도장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하기도 했다. 복병도장(伏兵都將)은 적이 지나는 길목에 포진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해상 게릴라부대 총대장을 뜻하는 듯하다.  거제도와 북쪽 칠천도 사이에서 벌어진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15일에 벌어졌다. 선조실록은 ‘원균을 비롯해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는 기사에서 ‘칠천량패전의 수군 장수들은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이라면서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 뿐’이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발언 내용이 실려있다. 당시 김완이 분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김완은 왜적과 싸우며 수세에 몰리자 자결하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포로가 됐다. 김완은 전후의 이야기를 ‘용사일록’(龍蛇日錄)이라는 일기체 회고담에 담았는데,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日岐島), 낭고야(浪古也)를 거쳐 곡고라(曲高羅)의 감시인 집에 감금됐다고 했다. 낭고야와 곡고라는 나고야(名護屋)와 고쿠라(小倉)의 음차 표기다. 그는 1598년 1월 일본에서 탈출한 뒤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고,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해 군수 박응창이 순찰사에게 보고하니 선조에게 상세한 내용의 장계가 올라갔다. 선조는 ‘동방의 소무’라는 뜻으로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쓴 어필과 함안군수 벼슬을 내렸다. 소무(蘇武)는 중국 전한시대 흉노에 붙잡혀 복속을 강요당했으나 굴하지 않아 바이칼호 주변에 19년동안 유폐됐다 돌아온 인물이라고 한다. ‘용사일록’의 내용은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도 담겼다. 무덤은 고향인 경북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 있다.
  • 홍준표 “곧 광복절…MB·이재용 등 정재계 인사들 사면해야”

    홍준표 “곧 광복절…MB·이재용 등 정재계 인사들 사면해야”

    홍준표 대구시장은 11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명박(MB)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을 사면할 것을 청했다. 홍 시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곧 8·15 광복절이 다가온다”며 “옛날 왕조시대에도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국정 쇄신과 국민 통합을 위해 대사면을 실시해 옥문을 열어 죄인을 방면했고 한다”고 적었다. 그는 “돌아오는 광복절에는 국민 대통합을 위해 이 전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권 인사를 대대적으로 사면하고 경제 대도약을 위해 이 부회장을 비롯해 경제계 인사를 대사면 해 국민통합과 경제 대도약의 계기로 삼도록 윤 대통령께 요청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검찰총장이 아닌 대통령이다”라며 “정치력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십시오. 아울러 코로나로 인해 몰린 서민들에 대한 신용 대사면도 검토해 주십시오. 치솟는 물가와 민생고로 서민 생활이 피폐해져 간다”고 덧붙였다.
  •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게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임기 초 긴장관계 빠른 시간에 극복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 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 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아홉 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 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 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 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참모장으로 충무공 출정명령 하달 그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의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하다.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 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9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 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 하다.  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쫒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LH, 11일부터 청년·신혼부부 등 행복주택 1780가구 공급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오는 11일부터 전국 8곳에서 행복주택 1780가구를 공급한다고 4일 밝혔다. 행복주택은 대학생·청년·신혼부부 등 젊은 층에 시세의 60~80% 수준으로 저렴하게 공급되는 임대주택이다. 행복주택이 공급되는 곳은 경기 시흥 장현, 화성 동탄2 신도시, 수원 당수지구 등 수도권 4곳 1594가구와 충북 청주 수곡, 제주 삼도이동 등 지방권 4곳 186가구 등이다. 수도권에서는 신혼희망타운과 중소기업근로자 행복주택, 청년·신혼부부와 고령자 등을 위한 일반형 행복주택 등이 나온다. 지방에서는 일반형 행복주택만 공급된다. 시흥장현 신혼희망타운 행복주택(410가구)은 서해선 시흥능곡역, 시흥시청역이 가깝고 광역 버스를 이용해 서울 및 수도권 주요 지역으로 접근 가능하다. 월판선 장곡역(2025년 예정), 신안산선(2024년 예정) 개통으로 대중교통 접근성 또한 높아질 예정이다. 화성 동탄2 신도시(700가구) 행복주택은 중소기업 근로자의 주거비 부담을 낮추고자 공급하는 중소기업 근로자전용 행복주택이다. 경부고속도로,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쉽다. 11일부터 20일까지 LH청약센터(apply.lh.or.kr)와 모바일 앱 ‘LH청약센터’에서 청약할 수 있다.
  • [자치광장] 청년정책, 과유불급은 없다/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

    [자치광장] 청년정책, 과유불급은 없다/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 중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지나치면 부족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대부분 세상사에 이 말을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겠으나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라면 ‘지나쳐도 좋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리고 내 소신을 굽힐 생각은 없다. 청년세대가 행복하지 않으면 공동체 모두의 미래가 어둡기 때문이다. 시급한 청년정책을 꼽으라면 좋은 일자리와 좋은 주거환경 정책이다. 이 두 가지 정책은 결혼, 비출산, 보육 등 다방면으로 청년 삶의 질 개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관악구는 청년 가구 비율이 타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다. 그래서 4년 전 관악구청장으로 처음 취임했을 때 전국 구 단위 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청년정책과를 신설하고 청년정책 강화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4년 동안 다양한 청년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했는데 특히 청년의 안전, 취업, 주택, 금융, 활동 공간 등을 지원하고 확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감사하게도 주민들께서 이런 노력과 성과를 인정해 준 덕분에 4년 더 관악구 발전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앞으로의 4년 역시 ‘청년문화도시 조성’을 첫 번째 약속으로 내세운 만큼 전국 지자체에서 우리 구 정책을 청년정책 표준으로 삼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민선 8기에는 기존 청년정책과를 포함하는 ‘청년문화국’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취업, 창업, 주거, 복지, 문화 등 청년 문제의 전 분야를 포괄하는 정책이 더 체계적 운영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관악구 강감찬대로에 지하 1층~지상 7층 규모로 짓고 있는 ‘관악 청년청’ 건물 완공도 임박했다. 이 또한 타 자치구를 선도하는 정책인 만큼 공유공간, 창업 보육, 커뮤니티, 지식 축적, 네트워크 등 청년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도록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통적 청년지원정책인 좋은 일자리 기회 확대, 주거 안정 및 환경 개선, 금융지원(으뜸관악 청년통장), 문화 및 활동 공간 확장, 청년 공동체 활성화 등도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행정력을 집중할 것이다. 특히 중앙정부가 벤처촉진지구로 지정한 ‘관악S밸리’를 청년 스타트업과 벤처 창업을 위한 수도권 최대 산실이자 정보기술(IT)의 성지로 발전시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과제다. 관악구에서 실행 중이거나 새로 추진하고 있는, 또는 계획 중인 청년특화정책을 거론하자면 이 지면 전체로도 부족하겠지만 말보다 중요한 것이 실천이다. 청년들에게 약속한 정책들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현실이 되도록 ‘과유불급은 없다’는 정신으로 심혈을 기울일 것을 약속한다. 왜냐? 청년이 우리의 미래니까!
  • 주거 이전비 등 반영…새달 분양가 4% 인상

    주거 이전비 등 반영…새달 분양가 4% 인상

    정부가 ‘6·21 부동산 대책’ 후속 조치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임대차 시장 안정 방안으로 내놓은 고가주택 전세대출 보증 연장을 대책 발표 시점 이후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건까지 소급 적용한다는 방침을 27일 발표했다. 국토교통부는 분양가상한제 개선안 관련 법령 정비에 나섰다. 금융위는 이날 고가주택 전세대출 보증 연장과 관련해 “이달 21일 이후 전세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 건부터 개선 내용이 즉시 적용돼 전세대출 보증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정책 발표 당시 올해 3분기라고 밝혔던 시행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다. 같은 날 국토부는 ‘공동주택 분양가격의 산정 등에 관한 규칙’ 개정안과 ‘정비사업 등 필수 발생비용 산정기준’ 제정안을 다음달 11일까지 각각 입법예고·행정예고했다. 개정안은 현재 비정기 조정의 기준으로 삼는 자재 4개 항목에서 PHC 파일과 동관을 빼는 대신 기본형 건축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창호유리와 강화합판 마루, 알루미늄 거푸집 등 3개를 추가해 기존의 레미콘, 철근과 함께 총 5개 자재를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또 ‘단일품목 15% 상승’ 조건뿐 아니라 비중 상위 2개 자재(레미콘·철근) 가격의 상승률 합이 15% 이상 오르거나 비중 하위 3개 자재(창호유리·강화합판 마루·알루미늄 거푸집) 가격의 상승률 합이 30% 이상이면 정기 고시 후 3개월 이내에도 건축비를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제정안에는 재건축·재개발 사업을 벌이는 데 들어가는 필수 비용도 분양가 산정에 반영하는 내용을 담았다. 주거 이전비, 이사비, 영업손실 보상비, 명도 소송비, 이주비 금융비(이자), 총회 운영비 등도 분양가 산정의 필수 소요 경비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재개발 아파트 분양가는 4% 정도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주거 이전비는 세입자는 가구당 4개월 가계지출비(4인 기준통상 2100만원)를, 현금청산 소유자는 가구당 2개월분의 가계지출비를 반영해 준다. 영업손실 보상비는 휴업의 경우 4개월 이내 영업이익과 이전 비용 및 이전에 따른 영업이익 감소액을, 폐업은 2년분 영업이익과 영업용 고정자산 등의 매각손실액을 각각 반영한다. 명도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수임료와 법인 인지대 등도 필요경비로 인정한다.
  • 다음 달부터 분양가 오른다···관련 규칙 입법·행정예고

    다음 달부터 분양가 오른다···관련 규칙 입법·행정예고

    정부가 ‘6·21 부동산 대책’의 후속조치로 분양가상한제 개선안을 다음 달 내놓는다. 국토교통부는 ‘공동주택 분양가격의 산정 등에 관한 규칙’ 개정안과 ‘정비사업 등 필수 발생 비용 산정기준’ 제정안을 다음 달 11일까지 각각 입법예고·행정예고 한다고 27일 밝혔다. 개정안은 분양가 산정의 기준이 되는 기본형 건축비 산정 방식과 산정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토부는 현재 비정기 조정의 기준으로 삼는 자재 4개 항목에서 PHC 파일과 동관을 빼는 대신 기본형 건축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창호유리와 강화합판 마루, 알루미늄 거푸집 등 3개를 추가해 기존의 레미콘, 철근과 함께 총 5개 자재를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또 ‘단일품목 15% 상승’ 조건뿐 아니라 비중 상위 2개 자재(레미콘·철근) 가격의 상승률 합이 15% 이상 오르거나 비중 하위 3개 자재(창호유리·강화합판 마루·알루미늄 거푸집) 가격의 상승률 합이 30% 이상이면 정기 고시 후 3개월이 지나지 않아도 건축비를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제정안은 재건축·재개발사업을 벌이는 데 들어가는 필수 비용도 분양가 산정에 반영하는 내용을 담았다. 주거 이전비·이사비·영업손실 보상비·명도 소송비·이주비 금융비(이자)·총회 운영비 등도 분양가 산정의 필수 소요 경비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주거 이전비는 세입자는 가구당 4개월 가계지출비(4인 기준통상 2100만원)를, 현금청산 소유자는 가구당 2개월분의 가계지출비를 반영해준다. 영업손실 보상비는 휴업의 경우 4개월 이내 영업이익과 이전 비용 및 이전에 따른 영업이익 감소액을, 폐업은 2년분 영업이익과 영업용 고정자산 등의 매각손실액을 각각 반영한다. 명도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수임료와 법인 인지대 등도 필요경비로 인정한다. 이주비 대출 이자 반영은 분양가의 급격한 상승을 막도록 표준 셈식으로 상한을 설정한다. 표준 셈식은 ‘종전 자산가×해당 사업장 소재지 주택담보대출비율(LTV)×대출 기간×한은 예금은행 가중평균 주택담보대출 금리’ 공식을 적용한다. 조합 운영비도 총사업비의 0.3%를 정액으로 반영한다. 김영한 국토부 주택정책관은 “이번 개정으로 분양가 산정에 실제 투입되는 필수 비용을 합리적으로 반영해 분양가를 둘러싼 분쟁을 줄이고 도심 주택 공급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이순신의 연승 이끈 ‘싸움 길잡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이순신의 연승 이끈 ‘싸움 길잡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1532~1594)은 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미 환갑 나이였다. 종6품 현감(縣監)은 조선시대 지방수령으로서는 품계가 가장 낮은 외관직이다. 과거 합격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방목(榜目)에 따르면 그는 1564년(명종 19) 갑자 식년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급제 이전에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진 여도의 종4품의 만호를 이미 지냈다. 어영담은 30년 안팎이나 서·남해안 일대에서 수군 지휘관과 고을 수령 자리를 이어 간 것이다. 어영담이 광양현감에 임명된 것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인 1591년 3월이다. 60세에 왜적의 대규모 침략이 기정사실이었던 시기 군사와 행정을 겸해야 하는 남해안 최전선 고을 수령 자리에 앉은 것이다. 오랜 수군 경력으로 남해안 물길을 훤히 알고 있었던 전라좌수영의 맏형 어영담은 왜수군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길잡이이자 선봉장이었다.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 어영담을 두고 ‘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을 지내며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면서 “호남이 보전될 수 있었던 데는 이 사람이 한몫을 했다’고 적었다. 어영담을 다룬 역사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광양문화원에서 ‘광양 어영담 현감 사료조사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지만, 여전히 ‘어영담의 일생’은 완전히 재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방목에 거주지가 함안으로 돼 있는 만큼 고향은 같을 것으로 보지만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영담 스토리’를 제법 길게 소개한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원 출신의 조경남은 13세 때인 1582년 12월 난리를 예견하고 매일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610년까지 이어진 기록은 인조시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데도 크게 참고가 됐다. 그럼에도 이 기록의 기본적 속성은 야사(野史)다. 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 남원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게 변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당대 보통사람들의 시각이 투영된 사료라는 뜻이다.‘난중잡록’은 어영담을 1592년 5월 20일자에 다루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으로 처음 출정해 왜수군을 궤멸시킨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은 물론 5월 29일~6월 5일 사천·당포·당항포의 대승 소식도 전하고 있다. 조경남이 기록을 그날그날 정리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난중잡록’은 다른 기록들과 달리 경상좌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에도 출정을 주저하던 이순신의 결심을 이끌어 낸 인물로 어영담을 지목한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팔뚝을 걷어올리고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 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기 직전 전라좌수영 참모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5월 1일자에는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義士)들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신뢰한 전라좌수영의 핵심참모들이 한결같이 울분을 곱씹으며 사령관에게 출정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역시 결심이 확고했다는 사실은 이튿날 일기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오정 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출정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히 목을 베겠다는 뜻이다. 낙안군수 신호는 하지만 첫 출전에서부터 전라좌수군의 좌부장으로 나서 이순신이 승리를 알리는 장계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릴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난중일기’는 5월 3일 정운의 진언이 출정 명령으로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난중잡록’은 어영담을 출정 결정을 이끈 최대 공로자로 부각시킨다. 당연히 어영담도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나가 왜적과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참모의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팩트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전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당시 사람들에게 어영담은 매우 영웅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난중잡록’은 수군의 연승을 두고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다. 어영담을 ‘물길 귀신’으로 부르는 근거가 됐다. ‘어영담은 무과 급제 이후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바다의 얕고 깊음과 섬 지역의 험하고 수월함,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가슴속에 그려 두어 수군 함대가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3년 12월 19일 선조가 비변사 및 삼사와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류성룡은 ‘어영담은 수로(水路)에 익숙한 사람이니 일을 위임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어영담은 공인된 ‘물길 전문가’였다. 그에 대한 ‘난중잡록’의 서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수군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공신이 되지 못해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마지막까지 애정이 담겨 있다. 이순신의 모든 해전에서 공을 세운 어영담이지만 1593년 10월 광양현감에서 파직된다. 명나라 주둔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는 독운어사(督運御使) 임발영이 광양현에서 장부보다 600석 많은 양곡을 보관하고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어영담은 독운어사가 양곡을 임검할 때 바다에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현감 업무를 대신한 유위장(留衛將)에 있다. 또 약간의 과실이 있더라도 국가적 위기에 의로움을 떨치고 있는 장수를 잃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파직을 막지는 못했다. 전라좌수영은 5개의 수군진과 5개의 연해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답 첨사진, 사도 첨사진, 녹도 만호진, 발포 만호진, 여도 만호진과 순천도호부, 보성군, 낙안군, 흥양현, 광양현 등이다. 연해 고을을 수군에 편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병력 충원과 군량미 보급, 전선(戰船) 건조 때문이다. 그러니 연해 고을 수령은 수군진 지휘관보다 더욱 어려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수군 소속 고을 수령이 전투에 나설 수군의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난중일기’에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휘하 군사나 관원을 군율로 처단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런 이순신이 어영담을 감싼 것은 개인적 비리가 아니었다는 방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임발영은 임발영대로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 군영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기도 했으니 광양현의 ‘장부외(外) 양곡’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어영담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의 잇따른 상소로 1594년 2월 전라도 주사조방장으로 복귀한다. 주사(舟師)는 수군을 가리키는 조선시대 용어다. 하지만 다음달의 제2차 당항포해전은 어영담의 마지막 싸움이 됐다. 수군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어영담의 병세가 악화했고 결국 4월 9일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이 날짜 ‘난중일기’에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라고 했다.
  • 남해안 ‘물길 귀신’ 이순신 함대를 인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남해안 ‘물길 귀신’ 이순신 함대를 인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1532~1594)은 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미 환갑 나이였다. 종6품 현감(縣監)은 조선시대 지방수령으로서는 품계가 가장 낮은 외관직이다. 과거 합격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방목(榜目)에 따르면 그는 1564년(명종 19) 갑자 식년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급제 이전에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진 여도의 종4품의 만호를 이미 지냈다. 어영담은 30년 안팎이나 서·남해안 일대에서 수군 지휘관과 고을 수령 자리를 이어간 것이다. 어영담이 광양현감에 임명된 것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인 1591년 3월이다. 60세에 왜적의 대규모 침략이 기정사실이었던 시기 군사와 행정을 겸해야 하는 남해안 최전선 고을 수령 자리에 앉은 것이다. 전라좌수영의 맏형이자 오랜 수군 경력으로 남해안 물길을 훤히 알고 있었던 어영담은 왜수군과 싸움에서 언제나 길잡이자 선봉장이었다.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 어영담을 두고 ‘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을 지내며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면서 “호남이 보전될 수 있었던 데는 이 사람이 한몫을 했다’고 적었다.  어영담을 다룬 역사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광양문화원에서 ‘광양 어영담 현감 사료조사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지만, 여전히 ‘어영담의 일생’은 완전히 재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방목에 거주지가 함안으로 되어 있는 만큼 고향은 같을 것으로 보지만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영담 스토리’를 제법 길게 소개한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원 출신의 조경남은 13세 때인 1582년 12월 난리를 예견하고 매일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610년까지 이어진 기록은 인조시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데도 크게 참고가 됐다. 그럼에도 이 기록의 기본적 속성은 야사(野史)다. 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 남원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게 변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당대 보통사람들의 시각이 투영된 사료라는 뜻이다.  ‘난중잡록’은 어영담을 1592년 5월 20일자에 다루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으로 처음 출정해 왜수군을 궤멸시킨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은 물론 5월 29~6월 5일 사천·당포 ·당항포의 대승 소식도 전하고 있다. 조경남이 기록을 그날그날 정리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난중잡록’은 다른 기록들과 달리 경상좌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에도 출정을 주저하던 이순신의 결심을 이끌어 낸 인물로 어영담을 지목한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팔뚝을 걷어올리고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경상도해역으로 출정하기 직전 전라좌수영 참모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5월 1일자에는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 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義士)들이라 할 만 하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신뢰한 전라좌수영의 핵심참모들이 한곁같이 울분을 곱씹으며 사령관에게 출정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역시 결심이 확고했다는 사실은 이튿날 일기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오정 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출정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히 목을 베겠다는 뜻이다. 낙안군수 신호는 하지만 첫 출전에서부터 전라좌수군의 좌부장으로 나서 이순신이 승리를 알리는 장계에 이름을 첫번째로 올릴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난중일기’는 5월 3일 정운의 진언이 출정 명령으로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난중잡록’은 어영담을 출정 결정을 이끈 최대 공로자로 부각시킨다. 당연히 어영담도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나가 왜적과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참모의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팩트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전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당시 사람들에게 어영담은 매우 영웅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난중잡록’은 수군의 연승을 두고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다. 어영담을 ‘물길 귀신’으로 부르는 근거가 됐다. ‘어영담은 무과 급제 이후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바다의 얕고 깊음과 섬 지역의 험하고 수월함,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가슴 속에 그려 두어 수군 함대가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3년 12월 19일 선조가 비변사 및 삼사와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류성룡은 ‘어영담은 수로(水路)에 익숙한 사람이니 일을 위임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어영담은 공인된 ‘물길 전문가’였다. 그에 대한 ‘난중잡록’의 서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수군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공신이 되지 못해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마지막까지 애정이 담겨있다.  이순신의 모든 해전에서 공을 세운 어영담이지만 1593년 10월 광양현감에서 파직된다. 명나라 주둔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는 독운어사(督運御使) 임발영이 광양현이 장부보다 600석 많은 양곡을 보관하고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어영담은 독운어사가 양곡을 임검할 때 바다에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현감 업무를 대신한 유위장(留衛將)에 있다. 또 약간의 과실이 있더라도 국가적 위기에 의로움을 떨치고 있는 장수를 잃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파직을 막지는 못했다. 전라좌수영은 5개의 수군진과 5개의 연해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답 첨사진, 사도 첨사진, 녹도 만호진, 발포 만호진, 여도 만호진과 순천도호부, 보성군, 낙안군, 흥양현, 광양현이다. 연해 고을을 수군에 편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병력 충원과 군량미 보급, 전선(戰船) 건조 때문이다. 그러니 연해 고을 수령은 수군진 지휘관보다 더욱 어려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수군 소속 고을 수령이 전투에 나설 수군의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난중일기’에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휘하 군사나 관원을 군율로 처단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런 이순신이 어영담을 감싼 것은 개인적 비리가 아니었다는 반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임발영은 임발영대로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 군영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기도 했으니 광양현의 ‘장부외(外) 양곡’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어영담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의 잇따른 상소로 1594년 2월 전라도 주사조방장으로 복귀한다. 주사(舟師)는 수군을 가리키는 조선시대 용어다. 하지만 다음달의 제2차 당항포해전은 어영담의 마지막 싸움이 됐다. 수군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어영담의 병세가 악화했고 결국 4월 9일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이 날짜 ‘난중일기’에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라고 했다.  
  • [단독] 직접 보완수사권 ‘경찰→검찰’ 변경 검토… 檢 장악력 커지나

    [단독] 직접 보완수사권 ‘경찰→검찰’ 변경 검토… 檢 장악력 커지나

    尹 공약 ‘책임수사제’ 도입 의제로수사준칙 바꿔 검사 자체 조사 확대경찰 종결 사건 ‘송치 요구권’ 논의‘검수완박’ 방향 바꿔 警 반발 예상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대응책 등을 논의하는 검경 협의체가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검경 책임수사제’ 도입을 핵심 의제로 검토 중인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책임수사제를 도입하면 검찰의 ‘직접 보완수사’가 확대되는 등 검찰의 장악력이 커질 수 있어 경찰의 반발이 예상된다. 검경 협의체는 오는 9월 시행되는 개정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관련 대책과 더불어 책임수사제 도입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30일로 예정된 실무협의회 첫 회의<서울신문 6월 20일자 보도>에서 의제를 정리한 뒤 이후 매주 한 차례씩 모여 본격적으로 검경 간 의견을 조율한다. 책임수사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단계에서부터 검경 협의체의 주요 의제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책임성 있게 수사를 하되 미비점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검사가 직접 보완수사를 한다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검찰이 경찰에 재차 보완수사를 요구하는 등 ‘핑퐁’ 과정에서 수사 기간이 길어져 국민이 피해를 입는 경우를 줄이자는 취지다. 현행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수사준칙)은 미비점이 있을 경우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검경이 합의점을 찾는다면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를 원칙으로 삼도록 관련 규정을 손볼 것으로 보인다. 또 추후 검경 협의체에서는 제도의 실제 운영 방안과 예상되는 문제점, 상호 협의 사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준칙은 대통령령으로 국회 법 개정이 필요 없다. 다만 경찰에서는 기준이 명확히지 않으면 검찰의 직접 보완수사가 남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마다 검찰이 보완에 나서면 검찰 수사가 ‘본게임’으로 인식돼 경찰 수사는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이 불송치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송치 요구권’ 문제도 검경 협의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이 형사사건 종결권을 갖게 된 이후 검찰은 경찰 처분의 타당성을 재차 확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현행 수사준칙에서는 검찰의 재수사 요구에도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바꾸지 않으면 검사는 3가지 경우(법리 위반, 채증법칙 위반, 공소시효·소추요건 오류)에 한해 송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에서는 ‘범죄 혐의가 있는 것으로 의심될 때’에도 검찰의 송치 요구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경찰은 이 부분은 형사소송법 개정 사안으로 검경 협의체에서 논의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 준칙을 통해서 검사의 수사 범위를 늘리겠다고 나선 것은 9월 시행을 앞둔 검수완박법의 입법 방향과 상충할 우려가 있다”면서 “상호 수평적 협력 체계를 만들려는 입법 취지에 반하는 논의가 진행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단독] 검·경 협의체 ‘책임수사제’ 논의 전망...檢 장악력 커질 듯

    [단독] 검·경 협의체 ‘책임수사제’ 논의 전망...檢 장악력 커질 듯

    尹 국정과제 ‘책임수사제’ 검토 전망檢 직접 보완수사·송치 요구권 확대檢 수사 장악력 확대 ‘경찰 반발’ 예상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대응책 등을 논의하는 검·경 협의체가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사항인 ‘검경 책임수사제’ 도입을 핵심 의제로 검토 중인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책임수사제를 도입하면 검찰의 ‘직접 보완수사’가 확대되는 등 검찰의 장악력이 커질 수 있어 경찰의 반발이 예상된다. 검경협의체는 오는 9월 시행되는 개정 형사소송법·검찰청법 관련 대책과 더불어 책임수사제 도입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 30일로 예정된 실무협의회 첫 회의(서울신문 6월 20일자 보도)에서 의제를 정리한 뒤 이후 매주 한 차례씩 모여 본격적으로 검경 간 의견을 조율한다. 책임수사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단계에서부터 검경 협의체의 주요 의제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책임성 있게 수사를 하되 미비점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검사가 직접 보완수사를 한다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검찰이 경찰에 재차 보완 수사를 요구하는 등 ‘핑퐁’ 과정에서 수사 기간이 길어져 국민이 피해를 입는 경우를 줄이자는 취지다.현행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수사준칙)은 미비점이 있을 경우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검경이 합의점을 찾는다면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를 원칙으로 삼도록 관련 규정을 손볼 것으로 보인다. 또 추후 검경 협의체에서는 제도의 실제 운영 방안과 예상되는 문제점, 상호 협의 사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준칙은 대통령령으로 국회 법 개정이 필요 없다. 다만 경찰에서는 기준이 명확히지 않으면 검찰의 직접 보완수사가 남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마다 검찰이 직접 보완에 나서면 검찰 수사가 ‘본 게임’으로 인식돼 경찰 수사는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이 불송치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송치 요구권’ 문제도 검경협의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이 형사사건 종결권을 갖게 된 이후 검찰은 경찰 처분의 타당성을 재차 확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현행 수사준칙에서는 검찰의 재수사 요구에도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바꾸지 않으면 검사는 3가지 경우(법리 위반, 채증법칙 위반, 공소시효·소추요건 오류)에 한해 송치를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에서는 ‘범죄 혐의가 있는 것으로 의심될 때’에도 검찰의 송치 요구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반면 경찰은 이 부분은 형사소송법 개정 사안으로 검경 협의체에서 논의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 준칙을 통해서 검사의 수사 범위를 늘리겠다고 나선 것은 9월 시행을 앞둔 검수완박법의 입법 방향과 상충할 우려가 있다”면서 “상호 수평적 협력 체계를 만들려는 입법 취지에 반하는 논의가 진행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극심 가뭄 속 간절한 모심기

    극심 가뭄 속 간절한 모심기

    한 농민이 16일 오전 광주 광산구 삼도동 논에서 이앙기로 모를 심고 있다. 가뭄이 계속돼 농민들이 모내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정부는 장마가 본격화되는 다음달이 돼야 가뭄이 해소될 것으로 전망했다. 광주 뉴시스
  • 육지로 도망치려는 원균에 항거하고 이순신 출전·해상 장악 뒷받침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육지로 도망치려는 원균에 항거하고 이순신 출전·해상 장악 뒷받침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인물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순신이 이끈 수군(水軍)의 역할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불과 4척의 판옥선과 그 부속선인 2척의 협선만 남은 경상우수군과 함께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에서 거둔 승리는 꺼져 가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전라도수군이 엄격했던 관할 경계를 넘어 경상도수군 해역에서 왜군에 잇따라 궤멸적 패배를 안길 수 있었던 배경에 옥포만호 이운룡의 역할이 있었다.●여진족 전투 땐 이순신의 휘하 이운룡(李雲龍·1562~1610)은 1585년 무과에 급제하고 1589년 옥포 만호에 임명됐다. 수군만호는 변경의 해안 군진을 지휘하는 종4품의 수군 장수다. 무과에 급제해 연차가 차면 만호 자리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다지만, 이운룡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최전선인 옥포의 만호에 오른 것은 이례적이다. 앞서 그는 1587년 8월 함경도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조산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던 이순신 휘하에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때 쌓은 이순신과의 친분이 왜란 과정에서 연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첫 번째 승전지인 옥포라는 땅이름에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거제도 옥포에는 잘 알려진 대로 대우조선해양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과 함께 우리나라를 조선 강국으로 만든 2대 성지(聖地)의 하나다. 지금 옥포진성의 흔적은 석축 일부로만 남아 있다. 진성이 있던 자리는 상업지역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수군의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옥포항은 여전히 고기잡이 포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왜란 당시 수군은 ‘진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해당 지역을 지키고 적과 싸우도록 하는 것으로 다른 진의 도움을 의뢰해서는 안 된다’는 작전 원칙을 적용받았다. 각각의 수영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독립적 군사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왜적이 침범한 상황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태세를 갖추고도 당장 달려갈 수 없었던 것도 전쟁 수역이 경상좌·우수영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옥포는 경상우수영 진관 가운데 하나다. 이운룡의 옥포진 전선들도 당연히 원균의 소집 명령에 따라 경상우수영 함대에 합류했다. ‘난중잡록’은 개전 초기 경상우수군의 행적을 두고 ‘원균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수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부산 앞바다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왔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이 흩어져 가버렸다’고 했다.이운룡의 이야기는 그다음에 나온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했으나, 옥포 만호 이운룡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했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쫓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여기서는 원균이 이운룡을 이순신에게 보낸 것으로 썼지만,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청하러 보낸 인물을 소비포권관 이영남으로 적고 있다. 이운룡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려는 원균에게 항거하면서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을 설득하는 장면은 택당 이식(1584~1647)이 ‘식성군이공묘비명’(息城君李公墓碑銘)에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운룡은 원균에게 ‘우수사는 국가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의리로 볼 때 관할 지역을 사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지역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요충이니, 무너지면 호남과 호서가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고, 또 호남의 수군은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군대를 정돈한 다음 견내량을 차단하여 적이 거제를 지나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면,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지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라고 했다. 식성은 이운룡의 관향으로 황해도 재령의 옛이름이다. 이운룡은 왜란이 끝난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식성군에 봉해졌다. 경상우수사에 부임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원균은 휘하를 장악하지 못했던 듯싶다. 떠나지 않은 장수는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뿐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요지부동이었던 것 같다. ‘징비록’은 ‘원균이 처음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낸 이후 대여섯 차례 더 원군을 청했다’고 적었다. 경상우수군의 요청이 이어지고 녹도만호 정운 등 전라좌수영 내부에서도 강청의 목소리가 나오자 이순신도 출전을 결심한 듯하다. 조정에서도 원균과 합세해 적을 치라는 유서를 내렸다. 전라좌수군이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출진한 것이 5월 4일 새벽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이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대파시키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다시 노량진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선봉은 물길을 잘 아는 경상우수군 장수들이었다. 특히 옥포의 왜적을 공격하는 데 누구보다 현지를 잘 아는 이운룡을 앞세운 것은 이순신 특유의 합리적 결정이다. 이후 경상도 해역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도 이운룡과 우치적은 선봉장이었다.●‘충무, 3군에 으뜸가는 대우’ 이운룡은 1596년 경상좌수사, 160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1595년 4도 도체찰사 오리 이원익은 이순신에게 “공이 후임을 천거한다면 누구를 추천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순신의 대답은 “이억기와 이순신(李純信) 그리고 이운룡”이었다고 한다. 이억기는 왕실 종친이고, 이순신(李純信)은 개전 초기 전라좌수영 방답진첨사로 훗날 경상우수사에 오른 인물이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에 임명될 당시 남해 수군 진용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34세의 이운룡이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이다. 택당은 이운룡의 공로를 두 가지로 들었다. 첫 번째는 이운룡만이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서 공정한 마음가짐으로 처신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두 사람도 그를 중히 여겼고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균이 참모로 곁을 지키던 이운룡의 계책을 귀담아 들었을 때는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는데, 이운룡이 좌수사로 옮기고 나자 마침내 패몰(敗沒)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로 승진해 원균 휘하를 떠난 것이 개인에게는 광영이지만 조선수군이 무너진 칠천량 패전의 원인(遠因)이 됐다는 뜻이다. 택당은 그런 만큼 ‘이운룡의 공로는 양수(兩帥) 아래 있지 않다’고 했다. 곧 이순신과 원균 못지않다는 뜻이다. 이운룡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뒤 조정의 명을 받아 통영에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를 지었다. 위당 정인보는 충렬사 마당에 세워진 이운룡 기적비(紀蹟碑)에 ‘당신은 충무에게 바다를 제압하는 위업을 마련해 드렸고, 충무는 당신에게 3군에 으뜸가는 대우를 하였더라’고 적었다. ‘충무’는 말할 것도 없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이운룡은 옥포전투 현장에도 이순신을 기리는 또 하나의 사당을 지었다. 정조실록은 ‘거제 유묘’(巨濟 遺廟)라고 적었다. 이운룡과 이순신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한다. 유묘는 이제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 원균의 장수, 이순신 출전 이끌어 내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원균의 장수, 이순신 출전 이끌어 내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인물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순신이 이끈 수군(水軍)의 역할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불과 4척의 판옥선과 그 부속선인 2척의 협선만 남은 경상우수군과 함께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에서 거둔 승리는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다. 전라도수군이 엄격했던 관할 경계를 넘어 경상도수군 해역에서 왜군에 잇따라 궤멸적 패배를 안길 수 있었던 배경에 옥포만호 이운룡의 역할이 있었다.   이운룡(李雲龍·1562-1610)은 1585년 무과에 급제하고 1589년 옥포 만호에 임명됐다. 수군만호는 변경의 해안 군진을 지휘하는 종4품의 수군 장수다. 무과에 급제해 연차가 차면 만호 자리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다지만, 이운룡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최전선인 옥포의 만호에 오른 것은 이례적이다. 앞서 그는 1587년 8월 함경도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조산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던 이순신 휘하에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 때 쌓은 이순신과의 친분이 왜란 과정에서 연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첫번째 승전지인 옥포라는 땅이름은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거제도 옥포에는 잘 알려진대로 대우조선해양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과 함께 우리나라를 조선강국으로 만든 2대 성지(聖地)의 하나다. 지금 옥포진성의 흔적은 석축 일부로만 남아있다. 진성이 있던 자리는 상업지역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수군의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옥포항은 여전히 고기잡이 포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왜란 당시 수군은 ‘진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해당 지역을 지키고 적과 싸우도록 하는 것으로 다른 진의 도움을 의뢰해서는 안된다’는 작전 원칙을 적용받았다. 각각의 수영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독립적 군사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왜적이 침범한 상황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투태세를 갖추고도 당장 달려갈 수 없었던 것도 전쟁 수역이 경상좌·우수영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옥포는 경상우수영 진관 가운데 하나다. 이운룡의 옥포진 전선들도 당연히 원균의 소집 명령에 따라 경상우수영 함대에 합류했다. ‘난중잡록’은 개전 초기 경상우수군의 행적을 두고 ‘원균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수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부산 앞바다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왔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이 흩어져 가버렸다’고 했다.  이운룡의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온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했으나, 옥포 만호 이운룡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했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쫒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여기서는 원균이 이운룡을 이순신에게 보낸 것으로 썼지만,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청하러 보낸 인물을 소비포권관 이영남으로 적고 있다.  이운룡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려는 원균에 항거하면서 이순신에 지원을 요청할 것을 설득하는 장면은 택당 이식(1584~1647)이 ‘식성군이공묘비명’(息城君李公墓碑銘)에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운룡은 원균에게 ‘우수사는 국가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의리로 볼 때 관할지역을 사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지역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요충이니, 무너지면 호남과 호서가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고, 또 호남의 수군은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군대를 정돈한 다음 견내량을 차단하여 적이 거제를 지나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면,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남아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지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라고 했다. 식성은 이운룡의 관향으로 황해도 재령의 옛이름이다. 이운룡은 왜란이 끝난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식성군에 봉해졌다. 경상우수사에 부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원균은 휘하를 장악하지 못했다. 떠나지 않은 장수는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 뿐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요지부동이었던 듯싶다. ‘징비록’은 ‘원균이 처음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낸 이후 대여섯차례 더 원군을 청했다’고 적었다. 경상우수군의 요청이 이어지고 녹도만호 정운 등 전라좌수영 내부에서도 강청의 목소리가 나오자 이순신도 출전을 결심한 듯하다. 조정에서도 원균과 합세해 적을 치라는 유서를 내렸다.  전라좌수군이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출진한 것이 5월 4일 새벽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이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대파시키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다시 노량진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선봉은 물길을 잘 아는 경상우수군 장수들이었다. 특히 옥포의 왜적을 공격하는데 누구보다 현지를 잘 아는 이운룡을 앞세운 것은 이순신 특유의 합리적 결정이다. 이후 경상도 해역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도 이운룡과 우치적은 선봉장이었다. 이운룡은 1596년 경상좌수사, 160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1595년 4도 도체찰사 오리 이원익은 이순신에게 “공이 후임을 천거한다면 누구를 추천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이순신의 대답은 “이억기와 이순신(李純信), 그리고 이운룡”이었다고 한다. 이억기는 왕실 종친이고, 이순신(李純信)은 개전 초기 전라좌수영 방답진첨사로 훗날 경상우수사에 오른 인물이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에 임명될 당시 남해 수군 진용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34세의 이운룡이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이다.  택당은 이운룡의 공로를 두 가지로 들었다. 첫번째는 이운룡만이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서 공정한 마음가짐으로 처신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두 사람도 그를 중히 여겼고 싸운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원균이 참모로 곁을 지키던 이운룡의 계책을 귀담아 들었을 때는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는데, 이운룡이 좌수사로 옮기고 나자 마침내 패몰(敗沒)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로 승진해 원균 휘하를 떠난 것이 개인에게는 광영이지만 조선수군이 무너진 칠천량 패전의 원인(遠因)이 됐다는 뜻이다. 택당은 그런만큼 ‘이운룡의 공로는 양수(兩帥) 아래 있지 않다’고 했다. 곧 이순신과 원균 못지 않다는 뜻이다. 이운룡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뒤 조정의 명을 받아 통영에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를 지었다. 위당 정인보는 충렬사 마당에 세워진 이운룡 기적비(紀蹟碑)에 ‘당신은 충무에게 바다를 제압하는 위업을 마련해 드렸고, 충무는 당신에게 3군에 으뜸가는 대우를 하였더라’고 적었다. ‘충무’는 말할 것도 없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이운룡은 옥포전투 현장에도 이순신을 기리는 또 하나의 사당을 지었다. 정조실록은 ‘거제 유묘’(巨濟 遺廟)라고 적었다. 이운룡과 이순신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한다. 유묘는 이제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 中, 코로나 충격 속 사실상 기준금리 0.15% 포인트 인하

    中, 코로나 충격 속 사실상 기준금리 0.15% 포인트 인하

    중국에서 코로나19 경제 충격이 확산하자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20일 사실상 기준금리인 대출우대금리(LPR)를 인하했다. 이날 인민은행은 “(주택담보대출 금리 기준이 되는) 5년 만기 LPR가 전달 4.6%보다 0.15% 포인트 낮은 4.45%로 집계됐다”고 20일 발표했다. 다만 일반적인 대출 금리에 영향을 주는 1년 만기 LPR는 전달과 같은 3.7%를 유지했다. 시장에서는 중국이 1년 만기 LPR와 5년 만기 LPR를 모두 0.05∼0.10% 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실제 인하는 장기물인 5년 만기 LPR에 국한됐다. 미국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중국이 거꾸로 금리를 내리면 중국 국채 등 매력이 떨어져 외자 유출이 본격화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금융당국의 기준금리 인하는 지난해 12월 이후 세 번째다. 당시에는 1년 만기 LPR만 0.05% 인하했고, 올해 1월에는 1년 만기 LPR과 5년 만기 LPR를 각각 0.1% 포인트, 0.05% 포인트 내렸다. 중국은 유명무실하던 LPR 제도를 개편해 2019년 8월부터 전 금융기관이 대출 업무의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이 때문에 인민은행이 매달 20일 발표하는 LPR가 사실상의 대출 기준금리 역할을 한다. 인민은행은 여러 통화정책 도구와 정책 지도 기능을 활용해 LPR에 영향을 준다. 이 때문에 시중에서는 사실상 중앙은행이 LPR를 결정한다고 이해한다. 인민은행이 5년 만기 LPR만 큰 폭으로 내린 것은 정부가 코로나19 경제 충격을 완화하고자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을 살리는 데 초점이 맞췄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서 한 가족이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 가구와 가전제품 등을 바꾸는 사례가 많다. 이참에 자동차를 새로 사기도 한다. 신혼부부는 반드시 신규 주택에 입주해 살림을 차려야 결혼 생활이 평탄하다는 속설도 강하게 통용된다. 이 때문에 중국의 부동산 산업은 연관 분야까지 포함하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최근 수 년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대대적인 부동산 시장 압박에 나섰다. 그러자 중국 아파트 시장 1~2위를 다투던 헝다그룹이 사실상 파산하는 등 여러 부작용이 속출했다. ‘중국 공산당은 능히 시장을 이길 수 있다’는 오판이 낳은 결과다. 결국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의 성장률이 빠르게 꺾였고 당국은 지난해 말부터 부동산 규제 강도를 서서히 늦췄다. 급기야 올해 들어서는 주택 구매 자격 제한 완화, 금리 인하 유도,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상향 등 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한 번 꺾인 심리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올해 1∼4월 중국의 부동산 판매금액은 작년 동기보다 29.5% 줄었고 주택 가격도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시장의 예상과 달리 1년 만기 LPR을 내리지 못한 것은 세계 통화정책 흐름을 거스르는 인민은행의 ‘나홀로 행보’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지난 3월부터 기준금리 인상에 돌입했지만, 중국은 4월 지준율도 0.25% 포인트 인하해 100조원 규모의 장기 유동성을 공급하는 등 독자 노선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는 미·중 국고채 금리 역전 현상을 불러일으켰고 급속한 외자 유출과 위안화 가치 하락 등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당국이 목표로 하는 5.5%는 고사하고 우한 사태가 벌어진 2020년의 2.3%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말많고 탈많은 재밋섬 매입… 문화예술공간 변신 도민 품으로

    말많고 탈많은 재밋섬 매입… 문화예술공간 변신 도민 품으로

    탈 많고 말 많았던 제주시 삼도2동 ‘재밋섬(구 아카데미극장)’ 건물을 활용한 제주아트플랫폼 조성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은 2018년 재밋섬파크와 체결한 재밋섬 건물의 부동산 매입 잔금을 지급하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했다고 18일 밝혔다. 그동안 재단은 문체부와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사업 의지를 불태워왔다. 처음엔 현재 재단이 들어선 건물이 너무 낙후돼 생활하기 힘들어 사무실 이전을 계획해 왔다. 2018년 들어서는 재밋섬을 활용해 제주에 부족한 공공 공연연습장 등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도민과 문화예술인들의 활동거점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하게 됐다. 당시 문체부에서 지원하는 공공공연 연습 조성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때마침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져 지원했지만, 전국에서 제주와 대전만 지원 못 받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결정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매입과 관련한 계약금 지불과 연관이 있다. 통상적으로 100억원의 매입금액에서 계약금의 10%인 10억원만 내도 되는 상황에서 계약 파기를 우려해 무리하게 20억원을 걸었던 게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온갖 억측이 난무했고, 4년동안 맞을 매는 다 맞았다고 재단측은 설명했다. 재단의 한 관계자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H극장을 인수하려다 극장측이 안팔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산된 경험이 있어 재밋섬파크와의 계약파기가 안 되도록 20억원을 준 것인데 도감사위원회 감사와 검찰 조사, 타당성 조사 등 4년동안 안받은 조사가 없을 정도였다”며 “결국 다 털었고 다 털렸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결론 났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재단은 아트센터를 감정가 그대로 매입한 경우도 있는데 제주문화예술재단은 현재 재밋섬 감정가 165억원보다 싸게 매입했다는 배경도 언급했다. 재단은 지난 4월 아트플랫폼 추진에 따른 행정절차가 완료 됨에 따라 최근 이사회를 열고 제주아트플랫폼 조성에 따른 기본재산운용계획 변경과 특별회계 편성에 대한 심의의결을 받았다. 또한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됨에 따라 올해 안으로 제주아트플랫폼 조성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국비를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 국비 신청 후 지원을 받고 내년 예산에 반영돼 본격적인 리모델링 사업을 하는 것과는 별도로 현재 재단은 사업 조성 전 건물 안전진단을 실시해 활용가능한 공간에 대해 도민과 문화예술인들이 우선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할 예정이다. 일부 재밋섬 앞 건물인 옛 제주대병원 건물을 활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그 공간은 지하실을 개조해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사진, 그림, 조각 등 시각예술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다”며 “재밋섬이 공연예술 공간으로 변신하면 오히려 시너지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예술인들의 커뮤니티 공공 공간으로 자리잡으면 도시재생사업을 한 구도심인 삼도동 문화의 거리도 더 살아날 수 있어 일석삼조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이번 취득한 건물은 5∼8층에 6개의 영화상영관을 갖추고 있어 소규모 공연 및 공연 연습장으로 활용이 가능하고, 1, 2층도 전시, 공연 등에 사용하므로 운영 준비가 마무리되는 대로 도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승택 이사장은 “제주아트플랫폼 조성사업이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본격 추진되는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조성될 수 있도록 도민들의 많은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면서 “기본계획 수립과정에서 제시되는 의견들을 반영해 도민에게 사랑받는 플랫폼을 구축해 나갈 예정이므로 향후 시설 운영방안 등에 대한 많은 의견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 금융당국 ‘루나 사태’ 동향 점검…디지털자산기본법 속도

    금융당국 ‘루나 사태’ 동향 점검…디지털자산기본법 속도

    한국산 가상화폐 루나·테라USD(UST)가 연일 폭락하면서 전세계 가상화폐 시장에 영향을 끼치자 금융당국이 긴급 동향 점검에 나섰다. 금융당국은 이런 사태가 국내서도 발생하지 않도록 소비자 보호를 담은 ‘디지털자산 기본법’을 오는 2023년 제정한 후 2024년에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가상화폐 업계·관련 부처는 15일 가상자산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주체로 루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 동향 점검에 나섰다고 밝혔다. 또한 주요국들의 가상화폐 규제 법률에 대한 제정 추이를 지켜보며 관련 법 제정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테라 플랫폼에 자료를 요구하거나 검사·감독할 권한이 없어 직접적인 조치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금융 소비자들이 가상자산 투자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계기로 삼도록 하는 데 노력할 계획이다. 가상화폐 업계에서 한국산 코인으로 분류되는 스테이블 코인 테라와 자매 코인 루나가 최근 연일 폭락해 가상화폐 시장 뇌관으로 떠올랐다.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 등 법정통화에 연동하도록 설계된 가상화폐다. 테라는 코인 1개당 가치가 1달러에 연동되도록 설계됐다. 루나는 디파이(탈중앙화 금융) 등에 쓰이는 테라 가치를 뒷받침하는 용도로 발행됐다. 그러나 테라가 최근 1달러 밑으로 추락하면서 루나도 동반 폭락했다. 이는 가상화폐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언론에 “루나 사태 관련해 전체적인 상황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동향 점검을 하고 있으나 당장 정부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며 “코인 거래는 민간 자율에 맡겨져 있어 정부가 개입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코인 거래의 자금세탁 방지 관련해 감독 권한이 있지만 이번 가격 폭락 사태 관련해서는 개입 근거가 없다”며 “향후 국회 입법 논의 과정에서 이번 사태가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여수‘ 삼도수군통제영’ 국가 문화재 지정 촉구

    여수‘ 삼도수군통제영’ 국가 문화재 지정 촉구

    임진왜란 당시 전남 여수에 최초로 설치됐던 해상방어 총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29일 전라좌수영 겸 최초 3도수군통제영 국가 문화재 지정 추진위원회는 28일 진남문예회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7주년기념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세미나는 노기욱 교수(호남의병연구소장)의 ‘국가지정문화재 여수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 사적 지정을 위한 제언’ 주제발표와 정현창 박사(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의 ‘여수는 최초 3도수군통제영이었다’ 주제발표로 시작됐다. 이어 박정명 여수진남거북선축제보존회 이사장, 조미선 한국국학진흥원 사료조사원의 토론이 펼쳐졌다. 세미나 참가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경상·전라·충청 등 3도 수군을 지휘했던 여수 진남관 등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데 한목소리를 냈다. 주제발표는 최초 1대 이순신, 2대는 원균, 3대 다시 이순신, 이순신 전사 후 4대는 이시언 등 모두 여수가 본영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1593년부터 1601년 통제영이 경남으로 이전하기까지 8년여 동안 여수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세미나와 동시에 정치권에 최초 3도수군통제영 동헌 등 부속건물 복원과 통제영의 국가 문화재 사적 지정을 위한 건의에 나섰다. 고효주 추진위원장은 “우리 지역의 국방 유적지인 삼도수군통제영 국가 문화재 사적(史蹟) 지정 추진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범시민운동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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