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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포럼] 풍납토성은 국사교과서다

    서울 송파구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에 관한 제1차 발굴보고서가 지난주 나왔다.1997년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식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보고서에서 문화재연구소는 ▲서기전 1세기부터 풍납토성 안에 대규모 주민집단이 정착했고 ▲‘특별한위상’을 지닌 초대형 주거지들이 확인됐으며 ▲기존에 알려진 한성백제(BC 18∼AD 475)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이곳에서 거의 다 출토됐다고 밝혔다.보고서는 “한성백제 유적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고,주거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위상으로 보아 주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성이인정된다”면서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결론지었다.학술적으로 신중하게 표현된 결론을 쉽게 풀어 쓰자면,풍납토성에는 서기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그 주거지 규모와 생활용품 수준에비춰볼 때 백제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이틀림없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 온조가 서기전18년 하남 위례성에 도읍했다는 기록이나온다.하남 위례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침해 백제개로왕을 참살하고 성내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이미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고,그 뒤 지금까지 학계는 서울·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과 멀리는 충남 직산까지를 후보지로 검토했다.그런점에서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확정짓게 된 것은 역사·고고학의 큰 성과다. 더 나아가 풍납토성이 갖는 실체적 진실은 ‘한 왕조의 수도 확인’이라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 고대사체계를다시 세우도록 요구할 만큼 넓고 깊다.불행히도 지금의 고대사는 일제 강점기 일본 관학자들이 세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일본 관학자들의 체계란 ▲단군의 실체는 신화일 뿐 역사가 아니므로 고조선도 사실상 믿기 어렵다(또는 무시해도 된다)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에 망해 한반도 중부 이북에 한사군이 들어선 것이 사실상 한국사의 시작이다 ▲특히 낙랑·대방은 4세기 초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중부에군림했고,백제·신라는 소국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3세기에 힘의 공백지대인 한반도 남부에 진출,식민지경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한국 침략은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는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이를주장하고자 일제 관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인한다.삼국사기는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은 뒤 주변소국을 차례로 정벌해 재위 13년에 벌써 영토를 동서로 서해에서 춘천까지,남북으로 안성천에서 예성강까지 넓혔다고기록했다. 그런데도 일제 관학자들은 백제가 3세기나 되어서야 제대로 국가 형태를 갖추므로 그 이전의 활동 기록은믿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같은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을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가지금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 그늘은 여전히 짙게 덮여 있다.예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역사교과서들은 “왜(倭)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6세기에야 상실했다”고 왜곡하고 있다.우리 고교 국사교과서도 “백제는 한강 유역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3세기 중엽 고이왕때에 이르러…중앙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다”(45∼46쪽)고 서술할 정도다. 풍납토성의 전체 규모는 성벽 밑면의 폭이 40m,높이 9∼15m,총길이 3.5㎞로 추정되며 공사에 동원된 노동력은 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계산된다.건국 초기에 이같은 성을 쌓은백제는 그만큼 강력한 국가였고 이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옳았음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서기전 1세기에서 3세기까지 민족사의 실체를 되찾은 것이다.또 풍납토성이 존재하게끔 그전에 축적된 우리 역사의 두터움도 입증한다.풍납토성은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다.이 시대 우리가풍납토성을 되살린 것은 기적이자 민족사의 축복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문화재硏 발굴 보고서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인근 몽촌토성보다3세기정도 앞서,기원전 1세기부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백제왕성임이 출토 유물뿐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확인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풍납토성에 대한 정식 발굴보고서는 이번이처음이다. 이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 이전 초기사가 말살·왜곡된 백제사의 전면 재검토가불가피해졌다.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한고대 삼국 중의 하나라고 기록돼 있으나 역사학계는 이를인정하지 않은 채 백제의 고대국가 형성 시기를 3세기쯤으로 늦춰 잡아왔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발굴 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보고서에 따르면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약500년간의 백제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평면 6각형 모양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한다.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 이 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중 가장 빠르다는 ‘몽촌1기’에 해당한다. 김주혁기자 jhkm@
  • 신간 맛보기

    ◆달콤한 인생(최인호 지음,문학동네 펴냄)=‘70년대 작가군의 선두주자’‘청년문화의 기수’로 불리며 새로운 감수성의 문학을 열어 보인 작가가 1982년 ‘위대한 유산’이후 20년만에 낸 소설집.‘최근에 탈고한 신작 ‘이별 없는 이별’과 ‘달콤한 인생’을 비롯해 ‘산문’‘몽유도원도’‘이상한 사람들’등 6편의 중단편이 실렸다.표제작인 중편‘달콤한 인생’은 파우스트 테마를 밑그림으로 인생유전의 드라마를 감싸는 작가의 종교적 시선이 두드러진 작품.또‘몽유도원도’는 백제 21대 개로왕이 꿈 속에서 절세 미인을 만난 삼국사기의 도미설화를 새롭게 풀어놓은 작품이다. 작가는 “문학의 향기가 저절로 옷깃에 스며 너울너울 사람을 따라오는 나비,그런 호접과 같은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8,000원.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민문홍 지음,아카넷 펴냄)=한국의 사회학 공동체는 지금까지 주로 막스 베버의 사회학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또한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중견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사회구성체론이라는 이름으로 마르크시즘을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전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은 구조기능주의의 기반을 제공한 보수적 사회학자 혹은 동양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서구중심적,보편적 사회학 이론을 추구한 사회학자로 자연스레 배척당했다.그러나 저자(기독교 사회과학연구소장)는 뒤르케임의 사회학은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현대성,탈현대성과 관련된 소중한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뒤르케임학파의 동양사회론’‘뒤르케임과 탈현대성논쟁’등 9장으로 이뤄졌다.2만원. ◆도자기와의 만남(전충진 지음,리수 펴냄)=우리 도자사를말하면서 피해갈 수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일본의 영원한영웅으로 추앙받는 오다 노부나가.그가 공을 세운 자에게영토 대신 도자기를 상으로 내리면서부터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극도로 궁핍해진 일본의 영주들은 ‘부의 원천’으로 인식된 도자기 제작을 위해 조선 도공 1,000여명을 납치해갔다.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치로부터 400여년간태평성대를 누리며 도자기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반면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전화로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도자기문화도 쇠멸의 길을 걸었다.그러나 ‘모방의나라’ 일본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우리 도자기의 정신임을 새삼 강조한다.1만3,000원. ◆모반의 역사(한국역사연구회 지음,세종서적 펴냄)=묘청은요설로 사람들을 현혹한 요승이었나,실패한 개혁자였나? 홍륜의 난에서 볼 수 있는 공민왕의 숨겨진 면모는? 우리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17명의 모반자들을 골라 그들의 꿈과 야망,좌절된 발자취를 파헤쳤다.‘대동사회’를 꿈꾸며 체제변혁을 이루려 했던 조선 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세도권력과 지역차별에 신음하는 농민들을 위해 열정을 불태운 저항 지식인 홍경래,“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며 부패한 정권에 경고장을 날린 허균,태조 이성계를 대신해 태종에게 화살을 겨눈 조사의,선덕여왕당시 여왕의 즉위를 문제 삼아 반역을 꾀한 비담 등이 이야기의 주인공.‘해석되고 굴절된’ 역사의 본모습을 추적,복원한다는 게 책의 의도다.1만원.
  • 첸 카이거 감독 “흥미로운 한국설화에 끌렸어요”

    최인호 원작의 한국영화 ‘몽유도원도’(제작 빅뱅크리에이티브)를 연출하기로 한 ‘패왕별희’의 중국감독 첸 카이거(陳凱歌·49)가 연출의 변을 밝히기 위해 13일 서울을찾았다. 그는 프라자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한국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앞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인삿말을 대신했다. 2003년 개봉예정으로 오는 11월 촬영에 들어갈 영화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설화’를 주요소재로 한 작품. 개로왕과 충신 도미,도미의 부인 아랑이 엮는 비극의 사랑이야기에,사라진 제국 한성백제의 비밀이 곁들여지는 대서사 드라마로 탄생될 예정이다.이룰 수 없는 사랑에 파멸해가는 개로왕 역에는 이정재가 캐스팅됐다. “이정재가 출연한 ‘태양은 없다’를 인상깊게 봤습니다. 어젯밤 처음 그를 만났는데 잘생긴 외모에 먼저 놀랐고,이야기를 하다보니 선악이 혼재하는 연기가 가능한 좋은 배우같아 무척 즐거웠어요.” 한국의 전통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연출하게 된 배경에 대해 그는 준비된 듯 명쾌한 대답을 했다. “1년전에 연출제의를 처음 받았습니다.소설 자체가 무척흥미로웠고요. 아시아의 영화인들이 힘을 합해 동양적 정서와 특색을 살린 영화를 세계무대에 선보이고 싶습니다.” 또 동양적 정서로 일관하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를 묻자 “사랑이야기 위주로 극을 이끌어갈것이며,요즘 관객들이 좋아하는 요소 즉 파격적 언어와 표현법 등을 과감히 가미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시대물의성격을 띠되 로맨스와 액션,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특수효과를 많이 가미해 속도감있는 영상을 만들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는 할리우드 진출작 ‘Killing mesoftly’의 연출 소감도 빠뜨리지 않았다.“스태프나 배우들이 철저히 프로의식을 갖고 촬영에 임하는 합리적인 태도는 인상적이었어요.우리들이 배울 점이었습니다.” 감독은 “‘몽유도원도’를 찍기 전까지 몇달동안 바이올린을 소재로 현대 중국인들의 모습과 애환을 담는 ‘북경바이올린’을 찍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약 80억원이 들어갈 영화는절반 정도가 중국에서 촬영될예정이다. 국내 배우들이 출연하며,시나리오는 ‘신용문객잔’‘황비홍’ 등을 쓴 중국작가 청탄(長炭)이 최종 수정작업한다. 황수정기자 sjh@
  • ‘패왕별희’中첸카이거 감독, 한국영화‘몽유도원도’연출

    ‘패왕별희’ 등을 찍은 중국의 영화감독 첸 카이거가 한국영화 ‘몽유도원도’를 연출한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빅뱅크리에이티브(대표 이주익)는 5일 “카이거 감독이 오는 13일 내한해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설화’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80억원을 투입,내년 3월부터 촬영이 시작된다.‘주노명베이커리’의 박헌수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신용문객잔’‘황비홍’ 등으로 유명한 중국작가 장탄(長炭)이 수정작업중이다. 황수정기자 sjh@
  •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민속연 제작 배무삼씨

    어렸을적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싶은 마음으로 누구나 한번쯤 날려봤을 연(鳶).옛날엔 정월 대보름날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란 글을 써서 연줄을 끊어 하늘높이 날려보내곤 했다. 연은 1,300여년 전인 신라 진덕여왕 원년(서기 647년)에김유신 장군이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후 고려말 최영 장군,세종대왕때 남이 장군,임진왜란때이순신 장군이 화공법이나 작전지시 수단으로 사용하다가영조대왕(1724년)때 궁중놀이인 연날리기를 민중에게 장려하면서 민간에 파고 들어갔다. 이런 내력을 지닌 연이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아직도 고집스레 매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부산민속연보존회 이사장 배무삼(裵武三·58)씨.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지금도 방 한칸을 작업장삼아 한지를 손질,문양을 그려넣고 대나무를 다듬어 붙여 명주실로 병잡기(무게중심잡기)를 하고 있다.하루 많이 만들면방패연으로 4∼5개. 그가 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주최한 부산국제친선연날리기대회에 출전한 74년.연만드는손재주를 당시 보존협회 어른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는 동구 초량동 집에서 동래구 온천동 보존협회까지 틈만 나면 걸어가 연만드는 법과 띄우는 법을 배웠다. 당시엔 동래가 민속연 만들기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6·25 전쟁으로 전국 피란민들이 모이면서 제작기법이 한단계높아졌기 때문.연 제작법과 날리기대회의 규칙 등도 이때전국적으로 표준화됐다. 연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배씨는 87년 부산공동어시장을그만뒀다.“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부인(53)의 만류도 뿌리쳤다.이후 연날리기대회도 별로 없고 연을 찾는사람도 없어 입에 풀칠조차 어렵게 됐다. 배씨가 제작한 방패연은 1만4,000원,가오리연 7,000원,얼레 1만5,000∼5만원이다. 그럼에도 평생 배운 기술을 묵히기 아깝고 연을 널리 보급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 아직 계속하고 있다.94년엔 부산민속연보존회도 만들었다.연 전시 박물관과 함께 항상 연을 날릴수 있는 공간확보가 여생의 꿈. “연은 단순한 듯하지만 자유자재로 조종이 가능한 비행물체이기 때문에정교한 과학”이라고 강조하는 배씨는 94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보류됐다.연락처 (051)554-6475. 글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김삼웅 칼럼] 언론공작문건과 괴문서정치

    우리 정치와 언론이 얼마나 저급한 수준인지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 온통 국정을 수렁에 빠뜨리는 ‘언론 공작문건’과 ‘괴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YS정부 이원종 수석이1997년 초에 만들었다는 언론 장악의 대선전략 문건이 월간 ‘말’지에 폭로됐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97년 문건 중 언론 장악 음모의 실상을 밝히라”고 주장하고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한마디로 ‘괴문서’라고 반박했다.지난 2월 여권 일각에서 만들었다는 ‘최근 언론논조 분석’이란 문건이 ‘시사저널’에보도되었을 때는 여야의 입장이 바뀌어 야당은 ‘언론 장악 음모’라고 비난하고,여당은 ‘괴문서’라고 일축했었다. 지난해에는 한나라당이 언론인을 우호적 언론과 적대적언론으로 나누고 적대적 언론인의 자료 축적을 제시하는‘언론문건’이 드러나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제16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 기자가 정치인에게 보낸 언론 관련 ‘괴문건’이 공개되어 정치권과 언론계에 큰 소란이 벌어지기도했다. 정치권이나 언론계뿐만 아니다.각계에서 ‘괴문서 소동’이 벌어진다.과거에는 주로 정치권이나 재계에서 심했던것이 최근에는 언론 관련의 문건 파동이 잦다.그만큼 언론이 권력화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우리 역사에서 ‘괴문서’사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건국 이후 파란곡절의 헌정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왕조시대에도 각종 비기(秘記)·위서(僞書)·참서(讖書)·괘서(掛書)가 끊이지 않았다.사회 혼란기나 왕조 교체기에 특히 심했다.부적(符籍)이나 참요(讖謠) 같은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또 그럴듯하게 파자(破字)를 만들어 민심을 현혹했다.이런 몹쓸 ‘전통’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사에 나타난 최초의 ‘괴문서’는 백제 의장왕 때이다.‘삼국사기’에는 의자왕 20년에 귀신이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백제는 망한다”고 외친 다음 땅 속으로 들어가므로 그 자리를 파보게 했더니 거북 한 마리가 있었는데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이오 신라는 초승달같다(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는 참요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둥근달은기울고 초승달은 가득찬다는 뜻으로 백제 패망,신라 흥국을 나타낸다. 신라측이 민심혼란용으로 조작했음직하다.요즘 인기리에방영된 TV사극으로 주목받은 왕건과 관련한 ‘괴문서’도많았다.지나가던 노인이 오래된 거울(古鏡)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거울 속에 ‘선조계 후압압(先操鷄 後押鴨)’즉계(鷄)는 계림 곧 신라이고, 압(鴨)은 압록강이므로 먼저신라를 장악한 다음 국경을 압록강까지 뻗쳐나간다는 뜻이다.왕건측의 조작일 터이다. 고려 인종때 이자겸은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즉 이씨가 왕이 된다는 요설을 퍼뜨려 반란을 기도하고,묘청 일파는 ‘개경기쇠 서경왕기(開京氣衰 西京王氣)’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를 도모하다가 토벌당했다. 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권신 이의민(李義旼)은 “고려왕조가 12대로 끝나고 이씨가 발흥하리라(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는 요언을 퍼뜨리며 반란군과 밀통하여 일을 꾸몄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때 군졸들을 시켜 ‘목자요(木子謠)’란 참요를 부르게 했다.내용은 ‘목자득국(木子得國)’의 네 글자다.이씨가 나라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제거할 때 이용된 “조(趙)씨가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의 파자를 통한 정적제거나 정여립의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득세한다”는 ‘목자망 존읍흥(木子亡 尊邑興)’의 참언,심지어 노태우씨측이 대통령 선거때 살포한 ‘두미재전(頭尾在田)’이란전단도 비슷한 유형이다.앞글자(頭)인 성과 뒷글자(尾)에‘田’이 들어 있는 사람이 미래 지도자가 된다는 뜻이었다.대통령 후보 중 성과 이름에 전(田)자가 들어 있는 사람은 노태우(盧泰愚)씨 한 사람뿐이었다.그쪽 진영의 소행이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서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공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떳떳하게 심판받는 자세를보여야 한다. 이제 정치권도 언론을 비판할 것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정책 경쟁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모습을보일 때 ‘괴문서’는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언론 공작문건이나 괴문서 따위로 이득을 보거나 언론을 장악하겠다는 발상부터 바꿔야 한다. 언론 또한 명확한 ‘제작자’도 밝히지 못하는 무책임한‘문건’이나 ‘괴문서’를 기사화하여 사회 혼란을 부채질하는 일이없어야 하겠다. 김삼웅 주필kimsu@
  • 美·日 한반도정책 숨은 뜻 찾기 ‘이제 미국이…‘

    지난 90년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아키히토 일황은궁중만찬회에서 “과거 한 시기의 불행했던 양국 관계를 생각하면 실로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한국은 일황의 사죄로 받아들였다. 이 말이 과연 사죄일까.일본에서 30년째 망명중인 통일운동가 정경모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역사를 살펴봤다.삼국사기 백제본기(제3)에는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요충지였는데,그것이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은 참으로 통석하기 이를 데 없다’는 아신왕의 발언 기록이 나온다.백제 영토를고구려에 빼앗겨 원통하다는 뜻이지,잘못을 사죄한다는 뜻은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문선’에는 ‘미지불수(美志不遂) 양가통석(良可通惜)’이란 말이 나온다.덕연이란 사람의 문재가 뛰어난데아름다운 저작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병들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다는 말이다.과오를 사과한다는 뜻은 담겨있지 않다.“일본이 20년만 더 조선을 지배했더라면 좋을뻔 했다.잘 하려고 노력했는데 전쟁에 졌기 때문에 노력이수포로 돌아가게 됐다”는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대표 다카스기 신이치의 말이 황국사관에 비춰보면 바로 미지불수양가통석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일황의 발언에 앞서 일본 정부는 서울로 특사를 파견,우리정부와 용어 선택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다.특사는 관동군참모를 지낸 세지마 류조였다. 정경모는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한겨레신문사)에서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정세와 북한에 대한 미국과일본의 정책을 해부하고 역사적 뿌리도 파헤친다.일본이 북한에 대해 왜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북한이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왜 겁없이 맞서는지,미국이 왜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북한은 지난 92년 국제원자력기구 사찰협정에 가입했으나그해에 미국이 팀스피리트훈련을 재개하고 국제원자력기구가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위협을 느껴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노동1호를 쏴올렸다고 저자는 분석한다.북한이1994년 제네바 북미합의에 건 진정한 기대는 경수로도, 50만t의 중유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데 있었으나 합의서에 명시된 경제제재 완화나 국교 정상화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재발에 대비해 60년대에 작성한 ‘작전계획 5027’을 94년재검토했으나 미군 사망자 5만2,000명, 한국군 사상자 49만명,민간인 사망자 100만명으로 피해가 추정되자 무력공격을포기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 당시 러스크 미 국무장관에게케넌이 제출한 한국 관련 정책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일본인의 영향력과 그들의 활동이 또다시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뻗어나가는 사태를 미국이 현실적으로 반대할 수 없게 될 날이 우리 생각보다 빨리 올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침투를 막을 수단이 이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재지배를획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 때 동행했던 저자는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40년간 비약한 뒤 40년간 전락했으나이제 제2의 비약이 똑같은 패턴으로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두려움에서이 글을 쓴다”고 말했다. 김주혁기자 jhkm@
  • 한국사 왜곡 백태/ (상)아시아 7개국 경우

    한국교육개발원이 세계 14개국의 교과서를 정밀 분석한결과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 및 잘못 게재 정도가 심각한것으로 드러났다.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들도 비슷할것으로 생각된다.교육개발원이 조사한 국가들을 아시아와유럽으로 나눠 우리 역사 왜곡사례를 시리즈로 살펴본다. ■중국 초·중 ‘중국역사’‘세계역사’교과서 모두 한국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최초의 국가가 고구려인 양 서술하고 있다. 상해판 등의‘역사’교과서는 공통적으로 ‘발해는 독립된 국가가 아닌 당왕조 내 하나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했다.고급 중학교 ‘세계 근대현대사’,상해판 ‘역사’교과서는 3·1운동의 발발 요인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닌 ‘고종의독살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처럼 왜곡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도 4개 출판사 ‘중국역사’교과서가 대체로 ‘항미원조전쟁은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주관적으로 적었다.‘중국역사’ 제4권 초급중학과본의 경우,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서술했다. ‘세계역사’제1권 초급중학과본(98년판)에서는 ‘조선인민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에 살고 있었다.기원전후 시기에걸쳐 조선반도 북부지역을 통치했던 것은 고구려 노예제국가이다(56쪽)’고 서술,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영토를차지했던 고구려를 언급하면서 조선반도 안의 작은 나라인것처럼 왜곡했다. 고구려를 조선반도 북부지역의 국가로 축소시킨 점은 상해판 초·중 ‘역사’,사천판 초·중 ‘세계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세계역사’에서는 또 ‘많은 학자들은 조선어를 연구하여 중국어와 결합시키면서 28개의 자모를 제정했다. (59쪽)’고 기술,세종대왕의 과학적·독창적인 한글 창제를 왜곡했다. ■태국 고교 3학년1학기 사회 교과서(98년판)에는 ‘일본은 불교·서예·젓가락 사용법·한자 등 중국의 문화를 한국을 경유해 받아들였다.(131쪽)’고 기술했다.한국은 단지 중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만 했다는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또 군부와는 관계없는 이승만 대통령을 ‘8·15 해방 이후 남한은 군부지도자를 최고 통치자로하는 체제를 채택했다(147쪽)’고기록했다. 교육부 학술과가 펴낸 중 2학년용 사회과 교재에서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의 두나라로분리된 사건은 1953년 7월27일 일어났다’고 한 내용 중 38도선은 45년 8월15일 직후이며 53년 7월27일은 남북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을 잘못 서술한 것이다. ■필리핀 아시아의 역사(98년판)에서는 일본의 식민사관인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인용, ‘신라의 금관에서 볼 수 있는 곡선 모양의 보석들은 일본 제국 상징의 흔적이었다(60쪽)’‘야마토 정권의 천왕은 정복자로서 한국에 왔었으며일본의 통치는 668년 한반도가 권력조직을 확립하기까지지속되었다(65쪽)’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의도를 고스란히담기도 했다.‘일본은 자유로운 새 질서를 수립함으로써위에 언급한 나라들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려 했다.(276쪽)’‘진보와 아시아 대륙 및 전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의 또다른 단계를 위한 최초의 발걸음일 뿐이다(281쪽)’ 등이 예이다.심지어 ‘이홍장은 1885년 이토 히로부미와의 협정 이후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02쪽)’는 등의 내용을 통해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였던 듯이설명했다.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에 대해 ‘북한의 주민들은 몽골혈통이기 때문에 키가 크고 건강하며 혈색이 창백하다.반면에 남한 주민들은 혼혈이며 키가 작고 혈색이 나쁘지 않다’는 엉뚱한 내용도 있다.북한은 몽골인종,남한은 남방계통으로 분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95년판)에서는 ‘1894년일본은 중국을 침공했다. 중국은 일본에 쉽게 항복했는데그 결과 중국은 대만과 코리아를 일본측에 넘겨줘야 했다’며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기록했다.고교 역사 1학년의경우, ‘당나라 (618∼907년)는 또한 한국·일본을 지배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러시아 동해는 한결같이 일본해로 기록하고 있다.우리나라를 극동의 신흥공업국이라고 할 정도로 단편적인 기술에머물렀다. 현대사 부분에는 ‘값싼 노동력은 국내·국제무대에서 남한 기업경영의 성공의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 집회 결사 및 단체협약 그리고 파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정부의 가혹한 반노동정책 등이 그 이유였다’는 등 부정적으로 썼다. ■말레이시아 중 3학년 지리 84쪽에서는 서울을 동해쪽으로 치우쳐 표기하고 있다.또 ‘일본·중국·한국·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 화산활동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지열자원이 생산되고 있다’며 화산지역으로 분류했다. ■인도 한국 중심으로 쓰여진 내용이 적다.‘세계 역사의조망’(옥스퍼드대학 출판·95년판)은 1875년 운요호사건과 관련,‘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한국은 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기록했다.민비시해사건과 관련,‘왕비를 제거하고 하옥했다.’라고 왜곡했다. 박홍기 이순녀 전영우기자 hkpark@. * 세계사속의 동해.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책에는 ‘동해’ 명칭이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많은 국가의 지도책·교과서에 아직도 ‘동해’를 ‘일본해’로적고 있는 것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는 비난받아마땅하다. 일본은 1870년 이후 출간된 지도에서 예외없이 ‘일본해’로 적고 있다.일본 정부가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 동해를일본해로 표기하도록 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간여했다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일본도 18세기 전후 발간된 권위있는 지도 중 많은 지도에서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했다.1810년 ‘신정(新訂)만국전도’,1838년 만국전도,1850년 지학정종도(地學正宗圖),1855년 지구만국전도,1870년 명치개정만국여지분도 등의 지도에서도 동해를 조선해로 썼다. 우리나라는 기원 전 59년 이래 문헌상에서 일본과 사이의바다를 동해로 불러왔다.광개토왕비(411년)를 비롯, 삼국사기(1145년)와 삼국유사(1284년)에서도 수없이 동해의 기록를 찾을 수 있다.현존하는 고지도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팔도총도에도 동해라고 명백히 적혀있다. 중국의 경우, 요·송·금·원·명·청 등 916∼1912년의여러 시기에도 동해로 표기됐다.러시아의 지도에는 1678년(동양해),1725년(동해),1734년(동해)에 나온 지도에는 동양해 또는 동해로 적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고지도에서도 마찬가지다.1615년 포르투갈에서 만든 지도,1674·1744·1752년의 영국 지도,1750년 파리에서 출간한 지도,1771년 대영백과사전 초판에도한국해(Sea of Corea)로 쓰였다. 박홍기기자
  •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KBS 31일 ‘역사스페셜’

    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읊었다는 포석정. 삼국사기에 의하면,937년 12월 신라 경애왕은 후백제 견훤이 이끄는 적군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이곳에서 궁녀들과 술판을 벌이다 살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동설한인 12월,그것도 견훤이 경주에서 25㎞밖에떨어지지 않은 영천까지 쳐들어온 위급한 상황에서 경애왕은 과연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인 것일까.삼국사기의 기록은혹시 신라 멸망과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려고 사실을왜곡한 것은 아니었을까. KBS-1TV ‘역사스페셜’은 31일 오후8시 방송하는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편에서 왕과 귀족들의 고급 연회장으로 알려진 포석정의 실체를 파헤친다. 제작진은 우선 포석정이 위치한 경주 남산이 신라의 4대성지중 하나로, 대신들이 큰일을 의논하고자 모인 장소라는데 주목한다. 포석정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박씨왕들의무덤으로 알려진 오릉, 천은사 등 신라의 성지에 둘러싸여있다. 또한 12월은 호국적 성격이 짙은 불교행사인 팔관회가 열리는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은 것은적의 침입을 막는 호국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지 술판을 벌이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제작진은 주장한다. 한편 학계에서 아직도 진위논쟁이 진행중인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祠)’라는 사당으로 기록하고 있다.삼한을 통합해 삼국사기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묘사된 인물 문노가 그곳에서 혼례를 치렀고 그후 그의 영정이 모셔졌다는 것이다.지난 98년에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발굴이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졌다.‘포석(砲石)’이라 쓰인 명문기와가 발견됐고,궁궐이나 대규모 절에나 쓰이는 와당류가 다량 출토됐다. 얼마전 KAIST 항공우주공학과팀이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실험한 결과도 재미있다. 수로의 벽면을 따라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渦流ㆍ회돌이)현상은 술잔이 계속 흘러가지 않고 사람 앞에서 멈춰서는 신비한 현상의 원인이자 고차원적인 과학기술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김정수PD는 “신라인들이 당시의 수리기술을 총동원해 포석정을 만든 것은 이곳이 호국제사의 성소였기 때문”이라면서 “포석정은 호국제사와 국가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중요시설이 들어 있던 곳이지 결코 왕들의 문란한 놀이터가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허윤주기자 rara@
  • 함석헌선생 탄신 100주년 ‘씨의 소리’ CD롬 제작

    사상가이자 종교가,민주화운동가인 함석헌(咸錫憲)선생의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가 창간한 잡지 ‘씨 의 소리’가디지털 버전으로 출시됐다. 지난 13일 오후 5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선생의 탄신100주념 및 기념사업 후원의 밤 행사에서 ‘씨 의 소리’CD롬 발표회가 있었다. 알려진대로 ‘씨 의 소리’는 함석헌 선생이 창간한 잡지로 70년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여타 대중매체들이 침묵으로일관하며 언론의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깨어있는목소리로 과감한 비판을 서슴지 않은 시대의 양심이었다.현대 한국의 사상·지성사에서 ‘씨 의 소리’를 빼지 않고꼭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980년 7월 정기간행물 정비때 동록이 취소되는 등 독재정권 하에서 무수한 탄압을 받았으나 지난 88년에 복간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번 CD롬 제작은 ‘삼국사기’ 등 고대 사서(史書)에서부터 ‘사상계’,‘창작과 비평’ 등 현대잡지까지를 망라한국학 전문 데이터베이스 개발전문업체인 동방미디어(대표 김용인)에서 맡았다.분량은 창간호(1970년4월호)부터 158호(2001년 1·2월호)까지를 수록했다.총 수록 권수는 158권,전체 글 편수는 2,976건이며,검열로 인한 삭제본 404건을 검열원고 그대로 살려 실었다.또 책 내용을 새로 입력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 데이터로 인쇄해 마치 원본책자를 읽는 듯한 느낌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다양한 인쇄기능 부여로 사고(社告)와 광고,표지까지 포함돼 있는 ‘씨 의 소리’를 원본 그대로 인쇄할 수 있도록 했다.구입문의:동방미디어 (02)7247-555. 정운현기자 jwh59@
  • 풍납토성서 캐낸 고대사의 진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했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정하고 백제를 세웠다(B.C. 18).…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이르러,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통치 조직을 갖춤으로써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다.’이는 교육부가 발행한 고교 국사 교과서 상권 45∼46쪽에 실린 초기 백제에 관한 설명이다.이 서술은 그러나 근본적인모순을 안고 있다.한국 고대사를 해석하는 상반된 두 흐름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고 양쪽을 뒤섞었기 때문이다. 한국 고대사는 ‘삼국사기’초기 기록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그 체계가 전혀 달라진다.삼국사기는 백제 건국 시기를 서기전 18년으로 못박고,시조인 온조 당대에 한반도 중부를 장악한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고 기록했다.반면 사학자·고고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기록을 부정하고 일제이래 일본 황국사가들이 만든 틀,곧 백제·신라는 서기 3∼4세기 가서야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로 성립된다는 학설에 묶여 있다. 하지만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풍납토성이 그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이 토성은 성벽만해도 폭 40m,높이 최대 15m,둘레 3.5㎞나 되는 아시아 최대규모임이 밝혀졌다.게다가 탄소연대측정 결과 성은 빠르면기원 전후,늦어도 서기 200년쯤 축조가 끝났음이 확인됐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시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음을 풍납토성은 웅변한 것이다. ‘풍납토성,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 펴냄)는 이처럼중요한 의미를 지닌 풍납토성에 관한 나무랄 데 없는 ‘보고서’다.저자는 연합뉴스의 문화재·학술 담당기자인 김태식씨.그는 발굴현장을 발로 뛰고 관련문헌을 샅샅이 뒤져 논문처럼 정교하고 소설처럼 재미있는 책을 엮어냈다.이 책을 읽고 나면 풍납토성이 왜 ‘한국의 트로이’고 꼭 보존해야 할유산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용원기자 ywyi@
  • 대가야 한자표기 ‘골치’

    대가야문화권개발에 나선 경북 고령군이 대가야의 한자 표기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대가야의 한자는 大加耶와 大伽倻,大伽耶 등 3가지로 지역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군은 96년 군정조정위원회를 열어 大伽倻로 쓰기로 의결,홍보물이나 표시판에 적어왔다. 그러나 대가야왕릉전시관 개관을 앞둔 지난해 6월 주보돈경북대교수 등 전시관 자문교수들이 군의 한자 표기에 의의를 제기했다.고대사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의 표기대로 大加耶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역사학회 소속 교수들도加耶에 ‘사람 인(人) 변’이 붙은 伽倻나 伽耶의 표기는 고려시대 이후 불교나 유교 등의 영향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고령군은 학계의 주장에 따르기로 내부 방침을정했다.하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다.가야산(伽倻山) 등지역의 유명 지명에는 모두 사람 인 변이 붙은 것을 사용하고 있는데다 최근 열린 의회 임시회에서 의원들이 大伽倻로사용하는 게 지역 정서에 맞다며 문제삼고 있어서다. 고령 한찬규기자 cghan@
  • KBS대하사극 ‘태조왕건’ 유명세

    종반부를 향해 치닫는 KBS1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요즘도 화제를 몰고 다닌다.그동안 좀처럼 다룬 적이 없던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해 난세의 세 영웅이 펼치는 호쾌한 대결은 45%가 넘는 시청률의 원동력이다.그런만큼 시끄럽다.우리국민 2명중 한명이 주말 밤에 눈귀를 고정하고 있다 보니 드라마 내용을 따지는 시청자 비평이 폭주한다.설상가상 ‘내홍’까지 겹쳤다.후백제 견훤왕 서인석이 극중 부하장수이자 후배연기자한테 맞아 갈비뼈가 금가는 불상사가 터졌다. 제작팀은 ‘다 인기가 죄’라는듯 싫지않은 표정.사실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다.이번 주말이면 93·94회.궁예왕의 최후가 멀지 않았다.‘시청률 50% 고지’를 앞두고 인기열풍을확산하는 데 골똘하다. ●역사냐 허구냐 왕건의 마진군이 서해에서 육지로 쳐들어가면서 ‘남동풍’을 이용해 견훤군을 물리친다는 설정이 발단이 됐다.인터넷 홈페이지엔 “서해에 상륙하려면 남동풍은맞바람”“한겨울 서해에 남동풍이 불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제작진은 인터넷을 통해 나름대로 해명했고 급기야공군기상관측대는 “목포 해역 압해도 인근을 관측한 결과 지난달 7일 남동풍이 불었다”(대한매일 2월16일자 21면 보도)며 유권해석을 내렸다.논란은 ‘삼국지 표절’로까지 번져 “기도를 해서 남동풍으로 바꾸는 게 삼국지 적벽대전과 너무흡사하다”“작가의 상상력 부재가 빚은 아류작”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이에 대해 안영동 책임 프로듀서는 “사극은역사의 기록물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드라마틱한 하극상 내분까지 가뜩이나 역사논쟁으로 시끄러운 판에 ‘하극상’파문까지 일었다.백제의 견훤왕 역의서인석이 지난주 극중 다혈질의 부하장수 추허조로 출연하는 강재일과 술자리 언쟁 끝에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KBS 드라마국은 처음에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다”며 소문을 애써 잠재우려 했지만 KBS극회가 “위계를 무시한 하극상”이라고 강재일의 출연정지를 추진하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추허조가 후백제군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갑작스럽게 퇴장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다.그러나 서인석이 KBS극회장을 역임한 적이있고 극회측 입장이 워낙 강경해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고 있다.다행히 가벼운 부상이라촬영일정에는 지장이 없다고. ●시청률 50% 돌파 대작전 ‘작가가 한번 대히트를 치면 병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용의 눈물’이후 ‘태조 왕건’을 집필하는 작가 이환경씨는 “잘 하겠다는 부담감 탓에‘글반 술반’으로 살다보니”건강이 많이 악화돼 고군분투중이다.그러나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왕건호’는 끄떡없다고 자신한다.이미 단단히 ‘중독’된 시청자들이 지켜보는눈은 큰 버팀목이 된다. 앞으로의 하이라이트는 궁예의 죽음.극의 인기가 뜨겁다 보니 궁예의 결말을 놓고도 논란이 분분했지만 ‘저자거리에서 백성의 돌에 맞아 죽는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내용과 달리 영웅답게 호쾌한 종말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왕건의반정에 밀린 궁예가 그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다 참패한 뒤,왕건과 단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그동안 의형제로 다져온 우정을 확인한다.“나는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하지만,아우는 덕이 있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왕건이 건넨 칼로 자결한다.시대가 낳은 한 영웅의 최후는 오는4월중순 110회 쯤 등장할 예정이다. 허윤주기자 rara@
  • ‘역주 경국대전’ CD롬 발간

    조선왕조 500년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한글로 완역하고 방대한 주석을 붙여 펴낸 ‘역주(譯註)경국대전’이 최근 CD롬으로 나왔다. 오늘날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세조 때 시작돼 성종16년(1485년)완성된 기본법전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자료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역사연구실은 1982년부터 이 분야 전공학자들로 구성된 연구진을 구성,‘경국대전’을 새롭게 번역·주석하여 86년 별도의 주석본을 펴냈다.이번에 선보인 ‘역주 경국대전’은 이미 출시된 ‘사마방목(司馬榜目)’‘역주(譯註)삼국사기’에 이어 정문연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국학 정보화사업의 결실 가운데 하나다. 이번에 CD롬으로 제작된 ‘역주 경국대전’은 정문연본(本)을 토대로 데이터베이스 구축과정에서 새롭게 편성하여 번역문과 3,748개의 상세한 주석,원전 이미지로 구성한 것이다. ‘역주 경국대전’작업에는 고 한우근(한양대)·송찬식(국민대)교수를 비롯해 이성무(정문연,현 국사편찬위원장)이태진(서울대)··민현구(고려대)·권오영(정문연)교수가 각각참여했다. 제작사인 동방미디어는 이번에 조선왕조의 전 법전을 망라한 ‘대전회통(大典會通)’(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편)의 CD롬도 함께 출시했다.구입문의 동방미디어 (02)7247-555∼6/www.dbmedia.co.kr. 정운현기자 jwh59@
  • [씨줄날줄] 풍납토성과 경주 보존

    경주 손곡동 일대 경마장 부지와 서울 풍납토성 안 재건축부지에 대한 보존결정은 민족문화 유산의 보존 차원에서 당연한 귀결이다.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서 자행돼온 문화재훼손 관행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좋은 선례라고 할 수 있다. 경주 경마장 건설 예정부지는 ‘숯가마’등 신라시대의 중요한 유구 및 유물들이 출토된 지역이다.신라 왕경내에 포함된 황성동 제철유적과 ‘신라인들이 밥을 지을 때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숯을 사용할 정도로 번성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연관시켜볼 때 이곳에서 숯을 생산해 왕경지역으로 공급했음이 입증된다.즉 이곳은 신라시대의 산업생산활동 및 생활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지역이다.때문에 지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건설계획이 발표될 때부터 반대여론이들끓었고 건설이 유보돼 온 것이다.서울 풍납토성은 지난해경당연립 부지의 유적훼손사건 이후 백제시대 문화층이 남아있는 단일 유적으로 확인됐다.이미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보상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웃에 25층짜리 아파트가 신축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문화재보존과 개발이라는 상충된 이해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새로운 과제를 안겨줬다.그동안해당지역 주민들은 발굴이 끝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등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때문에 개발예정지역에서 문화재가 발견되면 ‘재수없는 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경주 경마장의 경우 고속철도 우회결정과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시민들에게 큰 박탈감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은 지역주민의 경제적인 이해보다 역사 문화재 보존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경주 경마장은 주민 개개인에 대한 토지보상문제는 없지만 풍납토성은 보상을 위한 재원마련이 시급하다.이번에 보존지역으로 결정된 재건축부지 1만1,400여평을 보상하려면 1,500억원 이상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풍납토성의 경우 문제지역만 사적으로 보존결정이 내려져 보존지역 외의 토성 안쪽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똑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정부 당국은, 문화재는 그것대로 보존하면서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재원마련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박찬 논설위원 parkchan@
  • [대한광장] 삼각산과 북한산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본 것이 초등학교 때인가 싶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련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 때문이었다.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했다가 결국 청나라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김상헌(1579∼1652년)이 지은 시조이다.김상헌이 포박되어 끌려가면서,서울쪽을 돌아보며 비통한 심정을 읊은것이다. 서울에서 청나라로 가려면 지금의 무악재를 넘어 구파발을 거치고,통일로를 따라 임진강을 건너 북상해야 한다.이 길에서 돌아보는 서울쪽 삼각산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다.하늘을 찌를 듯 또떠받칠 듯 솟아 있는 세 봉우리.백운봉·인수봉·만경봉이 있었기에,우리의 선조들은 이 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다.곧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산 이름은 삼각산이었다.대부분의 서울 시민과 경기 일원 주민도 삼각산이라고 불렀다.70년대에는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되더니,80년대부터는 어느덧 북한산으로 통용된다.지금은어떤 등산객에게 물어도 ‘북한산 간다’하지 ‘삼각산 간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본명은 사라지고 별명 또는 일명이 본명이 되어 버린꼴이다. 이것은 1983년 삼각산과 도봉산을 함께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삼각산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도외시했거나,행정당국의 편의주의에 의해 산의 고유한 이름까지 달라진 결과를낳았다고 할 수 있다. 삼각산은 1,000여년 전인 고려 성종(993년)때에 이미‘삼각산’으로 정착되어 불렸다.그 이전 삼국시대에는 ‘부아악’이라고 했다.삼각산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문헌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다.‘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의 옛땅입니다’라고 서희가 고려 성종에게 아뢴 말에서이다.또 목종9년(1006년)기사에도 ‘목종이 숭교사에 있던 현종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 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뿐만아니라 고려 숙종때 만든 ‘삼각산 중흥사반자’명문,‘태고사 원증국사 탑비’의 비문,충혜왕5년(1344년)에 제조한‘중흥사청동누은향로’의 명문들에서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표기되어 있음을확인한다. 조선시대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확고부동하게 정착된다.‘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대동지지’등 역대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여러 선비의 문집과 기행문에서 모두 삼각산으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본명이 돼버린 ‘북한산’은 어떤 역사적 근거로하여 이름붙은 것일까.‘비류와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라는 ‘삼국사기’백제기사의‘한산’이 그 효시가 된다.그러나 이 한산은 특정한 산이름이 아니라,백제 건국 당시의 ‘한강유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이 여러 사학자들의 설명이다.따라서 북한산은 한강이북 지역으로,남한산은 한강이남 지역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역사지리 연구가 김윤우씨는 그의 ‘북한산 역사지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백제 건국초에 고구려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남하한 비류와 온조등의 백제 건국집단이 한강유역 일대를 ‘한산’이라 일컫기 시작한 것으로…엄밀히 말해서 삼국사기의 북한산은 곧 ‘한강이북의한산지역’이란 의미의 말이다.’ 서울시가 펴낸 ‘서울의 산’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한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등에 보이며,이는 한강·한수·한양·한성 등의 지명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서울의 옛이름은 한산·북한산·북한산성·북한성·한양등으로 기록되어 있다.북한산은 처음부터 산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서울지방 옛이름인 한산의 북쪽지역을 가리킨 지명에서 비롯된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정겹게 느껴진다.‘3개의 뿔로 된 산’이라는 뜻의 삼각산이,우리가 항상 바라보는 시각적 체험과 형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반면 ‘북한산’은 체험의 눈이 아닌 관념뿐이며,어딘가 사대주의적 냄새마저 풍긴다.도봉산에 등산하러 가면서도 ‘북한산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후세들이 행여 삼각산과 도봉산의 이름을 잃어버리지않을까 걱정된다. 이성부 시인
  • ‘삼국사기’ 진가 인정돼 복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 대학자뇌천(雷川)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2001년 1월의 문화인물로선정됐다고 문화관광부가 28일 발표했다. 경주가 본관인 김부식은 예종·인종 조에서 재상을 지내고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시인으로도 이름 높은 당대의 정치가·학자·문인이다.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해 고려왕조 안정에도 기여했다. 인종 때 신진관료 8명과 함께 ‘삼국사기’50권을 편찬해 한민족 고대사를 후세에 전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1925년 사론(史論)‘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을 발표,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독립사상 대 사대주의의 결전으로 해석한 이래 김부식은사대주의의 대표 격으로 비난받아 왔다.또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국가기원을 낮춰 잡느라 고의로 ‘삼국사기’를 믿지 못할 사서,김부식을 역사왜곡자로 매도해왔다. 그 결과 김부식은 오랫동안 사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최근 몇년새 ‘삼국사기’초기 기록이 인정되면서 김부식 자신도 새로조명을 받게 됐다.따라서 이번의 문화인물 선정은 일종의 ‘복권’이랄 수 있다.이와 관련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새해 1월19일 연구원 대강당에서 기념학술대회를 개최한다.경주 김씨 대종친회도 1월29일 세종호텔에서 학술대회를 열며 ‘김부식과 삼국사기’란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삼국사기 ‘진실’인가 ‘사기’인가…KBS1 ‘역사스페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진실인가,사기(詐欺)인가. 1145년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 등 11명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는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유일한 책.고대 삼국연구에 기초가 돼 ‘고대 역사로 들어가는 창’,‘고대사의 바이블’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내용이 틀린다’,‘편찬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이다’등의 비판을 받으며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8일 오후8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이같은 학계의 논란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보는 시간을 마련한다.국내 사학자들의논쟁은 바로 280년경 중국 사람 진수가 쓴 ‘삼국지 한전’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고대 삼국의 모습을 다르게 그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3세기 한반도는 70여개의 소국으로 나눠졌고 권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을 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묶여있었다.이것은 이제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통설이다.반면 ‘삼국사기’에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이미 1세기 후반에 여러 지역을 통합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어 정면 배치된다.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풍납토성의 탄소 동위원소를 통한 연대측정 실험결과가 기원전후로 밝혀지면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제와 신라가 3세기 이전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해 있었다’는‘삼국사기’초기 기록에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일본 역사계의 대부라 불리는 ‘츠다 소이치’씨.그가 논문을 낸 1919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천황 중심의 역사관이 정립되던 때이다.그는 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혹시 고대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 하기위한 포석은 아니었을까?제작팀은 이밖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식,월식 등 수많은 천문기록 조작주장에 대해 “최근 천문학계가 최첨단의 기술로 연구한 결과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보다 ‘삼국사기’에 적힌 천문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반론을 편다. 제작을 맡은 우종택PD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조선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책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허윤주기자 rara@
  • “남북통일 위해 러시아서도 힘쓸것”

    “기억에 남는 일이요?너무 많아서 선뜻 한가지를 고르기가 힘드네요” 오는 26일 5년 만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본국 외무부 한국과장으로귀국하는 러시아 대사관 발레리 수히닌(50)공사(부대사)는 러시아 정가와 관가에서 ‘한반도통’,‘가장 한국말 잘하는 러시아인’으로유명하다. 22년간 남·북한 오가며 생활“18살에 북한으로 유학,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 외교관,주한 러시아대사관 공사 등을 두루 거치고 보니 벌써 50살이 되었다”는 그는 한반도 역사의 산증인.22년이나 북한과 한국을 오가며 한반도 생활을하기도 했지만 탁월한 한국어 솜씨 때문에 그는 러시아와 남북한 정상들이 만나는 주요 회담자리에서 통역을 도맡아 왔다. 수히닌 공사는 지난 1984년과 1986년 김일성 북한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콘스탄틴 체르넨코,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만났을 때를 비롯,노태우-미하일 고르바초프(1990년),김영삼-보리스 옐친(1994년) 회담 등의 통역을 맡았다. 지난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김정일 국방 위원장과 회담을 가졌을 때도 한국에서 북경으로 다시 평양으로꼬박 24시간을 달려가 두 정상의 회담을 도왔다.하지만 그는 “주요정상 회담은 혼자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며 겸손해한다. ‘한반도통’ 수히닌 공사가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모스크바대학을 다니던 시절.교수들의 권유에 따라 한국어를 전공하게 된 그는 러시아 번역본 ‘삼국사기’‘춘향전’‘심청전’등을 읽고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그는 지금도 시간을 내 짧은 단편 소설들을 한국어로 읽는다.특히 1920∼30년대 한국의 단편소설을 즐겨읽는데 문장이 간결명료하고 한국인의 소박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기성 세대들이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보탰다. 서울·평양 대사관 또 오고싶어한국에서 한남동,청담동 등 4곳에서나 살아봤고 시간이 없어 동네 반상회에 참가 못해 본 것이 아쉽다는 그는 “한국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것이 똑같다”며 “남북한 통일을 위해 러시아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얘기했다. 수히닌 공사는 또 “아직 정년 퇴직까지 10년이나 남았으니 서울,평양의 대사관이나 부산,청진의 공사관에 또 오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진아기자 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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