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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술이 술술] 교실 밖 국사 여행/글쓴이 국사학 연구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까닭은 단지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을 넓히려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과거 삶의 기록인 역사는 바로 현재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삶을 좀더 폭넓게 이해하고, 나아가 그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 교육은 대체로 현실은 무시한 채 죽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데 치우쳤다. 가까운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를 강조하고, 과거의 치욕과 잘못보다는 민족의 우수성과 영화를 찬양하기에 급급했던 역사 교육이 그렇다. 그저 역사적 사실들을 달달 외우도록 했을 뿐 이로부터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는 힘을 기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요즘에는 아예 모든 학문의 실용성만을 강조하다 보니 역사 교육은 더욱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지 지나간 옛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중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책들을 찾기 어려운 우리 현실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원시·고대, 남북국, 고려, 조선 전기, 조선 후기, 한말, 일제, 해방 후의 여덟 시기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그리고 각 시기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주제를 잡아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역사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게다가 국사 교과서에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근·현대사를 자세하게 풀이, 역사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 책을 만든 역사학연구소는 민족 통일의 올바른 방향을 잡기 위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모임이다. 특히 역사 연구의 성과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애를 써 왔는데, 그러한 노력으로 ‘바로 보는 우리 역사’,‘우리 나라 지방자치제의 역사’’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중1∼고1 -관련 교과:국사, 한국근현대사 -함께 읽어 볼 책’이야기 한국사(이이화), 삼국유사(일연), 삼국사기(김부식) -기출 논제(면접구술)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왜곡된 삶의 태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서울대) △독도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반박하시오.(서울대) △만약 당신이 조선 중기의 왕이고 당파싸움 등으로 국력이 쇠약해 있을때 강대국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자. 응전을 할 경우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당신은 어떠한 방법으로 대처하겠는가.(연세대 법학) △역사적으로 쿠데타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 근거를 들어 주장해 보라.(서울대 경제학부) △20세기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가톨릭대 법경학부)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고려대 정경학부) ■생각해보기 -신라의 삼국 통일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일까. -광해군의 자주적 실리 외교 정책이 어떤 교훈을 주는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를 예를 들어 써 보자. -1894년 농민 전쟁의 성격과 의의는 무엇이며, 농민 전쟁에서 ‘동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애국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의 성격과 한계를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해방 후에도 아직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해방 후 친일파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까닭과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4·19 혁명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자.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과거사 청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 보자.
  • ‘잃어버린 천년의 소리’ 되살려

    ‘잃어버린 천년의 소리’ 되살려

    “잃어버린 우리의 음악 원형을 찾아 연주합니다.” 국립국악원은 우리 고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악기를 처음으로 복원·제작해 오는 20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시연회를 갖는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악기, 악보를 바탕으로 복원 연주회를 개최해왔으나 우리나라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복원 연주회를 위해 국악계와 고고학자 등 관련 전문가들과 악기 제작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1년여 가까이 철저한 고증작업을 벌인 결실이다. 이번에 복원·제작된 악기들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삼국사기 악지’의 고대 현악기와 관련된 문헌이 바탕이 됐다. 고대악기 시연회에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로 추정되는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10현금(絃琴) 연주회가 눈길을 끈다. 1997년 발굴된 이 목제 현악기는 구멍이 6개로 왼편이 반쯤 부서진 상태인데 형태로 보아 10현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일본 관련 학자들의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거친 결과 이 악기는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독자적인 현악기로 재확인됐다. 또 대전 월평동 유적 현악기(8현금·AD 6세기 추정), 하남 이성산성 유적 타악기(요고·AD 6세기 추정)도 복원·제작돼 선보인다. 국립국악원 주재근 학예연구사는 “이번 시연회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문제 등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한·중·일 역사에서 고대 한반도 이남 지역에 독자적인 음악문화가 존재했음을 밝히고, 한국의 고대문화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Zoom in 서울] 산은 하나인데…

    서울 강북구가 우리나라 대표 명산 ‘북한산’의 명칭을 ‘삼각산’으로 바꾸자며 강력하게 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 국립공원과 인수봉 등 3개 주봉(主峰) 영역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는 “졸속 명칭변경은 안된다.”며 제동을 걸고 있다. ●강북구 지난 2003년 북한산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봉우리 일원 27만 3000㎡를 환경부에서 ‘삼각산 명승지’로 지정받고 산 명칭 변경을 추진해 왔다. 당시 강북구는 ‘서울 삼각산 명승지’ 지정을 희망했으나 “삼각산(북한산)이 왜 서울 산이냐.”는 고양시의 반발로 서울 명칭 삽입은 무산됐다. 강북구는 시민 서명운동과 함께 지난달 18일 북한산국립공원(78.45㎢)이 관내에 걸쳐 있는 경기도 양주·의정부·고양과 서울의 은평·종로·성북·강북·도봉 등 9개 자치단체가 참가한 포럼도 열었다. 이 포럼에서 강북구는 “북한산은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려왔다가 일제때 ‘창지개명’(創地改名)에 따라 북한산으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 독도영유권 문제로 격앙된 국민정서를 업고 고양시장을 제외한 타 시·구 자치단체장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강북구가 이처럼 ‘삼각산’에 집착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배경이다.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관광자원화해 지역개발에 활용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지역주민들의 입장료 징수 등 마찰을 이유로 공원관리권을 장기적으로 이관받으려는 포석이다. 여타 자치단체들도 공원관리권 이관에는 강북구와 의견이 일치한다. ●고양시 ‘북한산’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강북구 주장을 부인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도 삼국시대부터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돼 온 것으로 나타나고, 최근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찾아낸 조선조 숙종때의 ‘북한지’에도 북한산군(郡)이란 명칭이 나온다는 것이다. ‘북한지’는 백제 개로왕때인 서기 132년 최초로 축성된 북한산성을 1711년 재축성하고 이때 북한산과 관련한 문화·역사·지리를 상세하게 정리한 문헌이다. 정 위원은 “‘북한산’이 ‘삼각산’에 비해 산성(山城)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더 쓰인건 사실이지만 일제의 잔재는 분명 아니다.”고 말했다. 고양시는 또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중 고양시 땅이 가장 많고, 봉우리가 서로 삼각뿔 모양을 하고 있어 ‘삼각산’의 유래가 된 세 봉우리중 백운대·인수봉 정상이 고양땅이고 만경대는 강북구와 경계인 점을 들어 강북구의 일방적 명칭 변경을 반대한다. 삼각산 명승지 면적 27만 3000여㎡ 중 92%는 고양시에 속해 있다. 세 봉우리의 지번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1의 1’로 시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등산객들이 서울쪽에 입장료를 내고도 북한산 정상에 서면 고양쪽을 향해 “야호”를 외치고 쓰레기와 환경문제를 야기하면서 이름을 삼각산으로 하겠다는 건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산 기슭에는 서울쪽에도 주거지가 일부 있으나, 산속에서 사는 500여명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주민들이다. 혼란을 야기할 북한산 명칭변경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양시는 강북구의 지명 변경 시도가 다시 재연돼도 강력히 반대의견을 낸다는 입장이어서 단위면적당 등산객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아 기네스북에 오른 우리나라 대표 명산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儒林(33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3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를 태운 가마는 우쭐우쭐 죽령고개 기슭에 닿아 있었다. 때는 10월이라 만산은 홍엽으로 추색이 완연하였다. 죽령은 높이 689m로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대재이다. 예부터 죽령은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의 가파른 고갯길. 죽령의 고갯마루는 충청도와 경상도가 서로 손을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죽령고개는 단양 땅의 역원인 용부원과 경상도 순흥 땅의 역원인 남원을 사이에 두고 예로부터 길손과 선비들이 넘나들던 길이었으며, 아흔아홉 굽이의 고갯길은 각종 곡물과 상품을 수송하는 통로로도 긴요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죽령은 문경새재와 추풍령과 마찬가지로 백두대간에 나란히 자리하여 영남과 호서지방을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였으나 모든 면에서 단연 맏형격이었다. 특히 죽령은 이들 고갯길 중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개설되었던 길로 삼국사기의 신라 제5대왕 아달라(阿達羅)왕 5년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고 있다.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 죽령을 열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죽령을 연 사람은 죽죽(竹竹). 죽죽은 이 길을 여는 데 지쳐 순사하고 고갯마루에는 그를 기리는 죽죽사(竹竹祠)란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죽령이란 이름이 생긴 것은 죽령에 대나무가 많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갯길을 개통한 죽죽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붙인 때문이다. 원래는 신라의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서기 470년경) 무렵. 그 40년 뒤인 영양왕 때는 고구려의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죽령이 역사적으로 군사상의 요충지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일행은 죽령 어귀에 위치한 용부원에서 가마를 내리고 가마꾼을 돌려보냈다. 원래 용부원은 길손들이 높고 험준한 죽령을 넘기 전에 하룻밤을 쉬면서 짚신을 고쳐 신고 말에 물을 먹이던 마방이 있는 곳. 따라서 객고를 달래주던 주막거리도 번창하여 있었고, 역원도 있던 분기점이었다. 역원이란 여행을 하던 관원들이 묵어가는 역로에 있던 관사로, 퇴계는 이곳에 이르자 짐을 메고 가는 종자 하나와 마부 한 사람만을 남기고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퇴계는 말 위에 올라 천천히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죽령고개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퇴계는 꼬박 하룻길 죽령고개를 넘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50평생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기 위해서 번거로운 일행들을 추려서 돌려보내고 단신이 되었던 것이다. 죽령고개. 특히 죽령은 퇴계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퇴계가 이 고개를 처음으로 넘은 것은 중종 29년(1534년). 퇴계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었다. 젊어서부터 퇴계는 학문에만 정진하였을 뿐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벼슬길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퇴계의 마음은 아들 준에게 준 다음과 같은 편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미관말직으로 벼슬에 있어봐야 공사간에 이익 될 게 별로 없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고생만 할 것이다. 내가 매양 너를 벼슬살이를 하지 말라고 원하지 않았더냐.”
  • [드라마세트장 유치 열풍(上)] 유치과열에 제작사 소품비도 떠넘겨

    일부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자치단체들은 50억원이 넘는 예산을 세트장 건립비로 선뜻 드라마제작사에 내놓고 있다. 갈수록 지원금은 커지고 있다. 이들은 거액의 예산으로 세트장을 유치하고도 관리를 소홀히 해 세트장을 망가지게 하는 등 적지 않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2회에 걸쳐 이를 짚어본다 자치단체들이 과열양상까지 보이자 드라마제작사들도 세트장 건립비용은 물론 소품비까지 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충남 부여군은 지난달 29일 SBS자회사인 SBS아트텍과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 유치 협약을 체결했다. 부여군에서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드라마에 쓰이는 각종 소품 구입비까지 포함돼 있다. ●50억원은 보통 부여군은 세트장 부지인 충화면 가화리 덕용저수지 주변 1만평을 매입하고 전기와 수도 등 기반시설을 갖춰주기 위해 10억원을 더 들일 계획이다. 모두 60억원의 예산을 쓰는 셈이다. 올해 군예산이 2227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37분의 1이 넘는다. 세트장은 낙화암 등 백제유적이 있는 읍내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다. 부여군과 세트장 유치전을 벌였던 전북 익산시는 20억∼25억원을 들여 서동(무왕)의 유년시절을 그릴 세트장을 유치했다. 당초 익산시는 전체 세트를 유치하기 위해 95억원을 제시했었다. 두 자치단체가 서동요 세트장 건립비로 들이는 돈은 90억원 정도로 150억∼200억원으로 추정되는 드라마 제작비의 절반 안팎에 이르고 있다. 이 드라마는 ‘대장금’을 연출한 이병훈PD가 50부작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전남 나주시는 MBC드라마 ‘삼한지’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키로 잠정 결정했다. 시는 전남도에 25억원 지원을 요청했다.70부작으로 제작될 이 드라마 세트는 공산면 신곡리 영산강변 건축물폐기장에 지어진다. 독도와 관련, 인기가 더 높아진 KBS의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 건립비로 전북도와 부안군은 50억원을 지원했다. 세트는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 영상랜드(왜관거리), 변산면 격포리 궁항과 격포항에 각각 전라좌수영과 군선세트 등 3곳에 설치돼 있다. 전남도와 완도군도 KBS드라마 ‘해신’의 세트장 건립비로 50억원을 지원했다. 강원도 횡성군은 SBS ‘토지’ 세트장을 건립하는 등 우천면 두곡리에 군비 39억원과 민자 30억원을 들여 횡성테마랜드를 조성했다. ●‘원조논쟁’까지 불러온 유치전 부여군과 익산시는 세트장유치 과정에서 ‘서동원조’ 논쟁까지 벌였다. 부여군은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백제의 수도 부여에 살았다.”고 주장했고, 익산시는 “무왕은 익산에서 태어났고, 왕이 됐을 때 천도를 해서 익산에서 살았다.”고 맞섰다. 익산시는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적 서술을 근거로 들이댄 뒤 “호족들에 의해 왕이 된 무왕은 서자로 힘이 없자 수도를 익산으로 이전해 정사를 폈다.”고 반박하면서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제작사측은 두 지자체 관내에 세트를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부안군도 ‘불멸‘ 세트장을 유치하기 위해 전남 여수시, 경남 통영군 등과 치열하게 다퉜다. 카메라 앵글잡기가 좋다는 이유로 부안군이 이겼지만 방송가에서는 서울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엇갈리는 주민반응 한창 방영중인 ‘불멸‘과 ‘해신’ 세트장에는 평일 수천명에서 주말에 1만∼2만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주말이면 읍내 숙박업소가 동나고 식당과 전복, 미역, 다시마 등을 파는 해조류 판매점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해신’ 세트장 주변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우길광(50)씨는 “해신 촬영후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가족단위 손님이 눈에 띄게 불어나면서 매출도 덩달아 늘어났다.”며 좋아했다. 반면 ‘토지’ 세트장이 있는 강원도 횡성군 주민 최모(57·농업)씨는 “일회성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드라마를 위해 재정도 열악한 군에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스러워했다. 부여군 부여읍에 사는 조모(54)씨는 “소년소녀가장이 얼마나 많은데 재정도 열악한 군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방송사에 세트장까지 지어 주느냐.”면서 “장소도 백제역사재현단지 등 읍내에 얼마든지 좋은 곳도 많은데 산골짜기까지 가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세트장 보수·관리비는 얼마나 들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정리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제작사에 사기당한 대구시 유독 영화나 TV드라마와는 인연이 없었던 대구시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한 영화제작사에 사기를 당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지난 2001년 6월 이 제작사는 대구에 유명배우들을 데리고 나타나 영화 ‘나티’의 제작발표회를 갖고 대구시에 협조를 요청했다. 대구의 섬유업계에서 개발된 신소재 섬유를 탈취하려는 일본측 산업스파이와 이를 막으려는 한국 비밀 요원간의 대결을 그린 첩보액션물을 대구에서 만들겠다는 것. 특히 대구의 패션1번가인 동성로를 비롯 팔공산, 동화사, 대구월드컵종합경기장, 대구EXCO, 국채보상기념공원 등 영화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촬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구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며 대구를 알리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인 것으로 판단,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 제작사는 대구EXCO와 국채보상공원에서 곧 바로 촬영에 들어갔고 대구시는 촬영장소를 제공하고 촬영현장에 간부공무원을 보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며칠간 영화를 찍는 흉내를 냈던 이 제작사는 그후 대구시민 등 전국에서 투자자 300여명으로 100여억원을 끌어 모은 뒤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대구시 관계자는 “자치제 실시 이후 자치단체마다 경쟁적으로 홍보에 매달리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사기행각에 대구시가 당한 것”이라며 “기억조차 하기 싫다.”고 말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조선시대 장애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장애인 차별이나 편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생뚱맞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지금도 이렇거늘 옛날에 장애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하지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창권 지음, 문학동네 펴냄)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같은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예전의 장애인의 생활과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당시의 국가 정책 등을 생생히 복원, 이를 친근한 이야기체로 재구성해 들려준다.‘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뿐만 아리라 야사류, 판소리, 가면극, 개인 일기와 시조, 가사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장애인의 모습을 토대로 했다. 책에 따르면 전통시대 장애인은 사회에서 일반인과 어울려 생활하며 능력에 따라 직업을 갖고 자립적 삶을 살았다. 양반은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예술적 업적을 남긴 장애인도 많았다. 국가에서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구휼활동을 펼치는 등 복지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주자학 일변도의 사회가 되면서 장애인은 체제 바깥으로 배척되기 시작했고, 근대 이후엔 경쟁력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천대도 겪는다.1만 5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고구려碑/이용원 논설위원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그림을 말하는데,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역사서를 비롯한 문헌사료는 대개가 후대에 정리된 데다(예컨대 ‘삼국사기’는 고려가 재통일한 뒤 200여년 지나 나옴) 왕조의 변동 등에 따른 사실관계의 왜곡, 편찬자·집필자의 취사선택 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금석문은 당대의 사람이 직접 새겨넣은 것이라서 정확성·진실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3국시대의 금석문 가운데 유명한 것이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 백제의 무령왕릉 묘지석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문 등이다. 일본이 소장한 칠지도와 스다하치만(隅田八幡)동경에도 각각 명문(銘文)이 있는데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한국·일본·중국 3국의 학자들이 전체 문맥은 물론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이다. 일본은 이 비문을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한국 학자들은 한반도에 침입한 왜를 고구려가 즉시 토멸한 기록이라고 본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고구려 군대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복속시킨 내용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금석문 중에서는 역시 비에 새긴 비문이 으뜸이랄 수 있는데,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비(壁碑)가 최근 발굴돼 14일 경기도 분당 한국토지공사 내 토지박물관에서 막 올린 ‘공사 설립 30주년 특별전’에 공개됐다.290여 글자가 새겨진 이 벽비에는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 11년(서기 237년)이라는 연대가 들어 있어 제작연대를 가늠케 해준다. 만약 이 벽비가 진품 판정을 받으면 현존하는 고구려 비 20여기를 포함해 국내에 남아 있는 모든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리잡게 된다. 게다가 그 내용이 위(魏) 관구검의 침입과 이를 격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어서 당시의 고구려와,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갑자기 출현한 이 벽비를 놓고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진위 판단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조급히 판정을 내릴 이유는 없다. 지금껏 사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은 거꾸로 진품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씨줄날줄] 황사/우득정 논설위원

    지난 7일 서울의 하늘은 황토물을 끼얹은 듯 종일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올 들어 가장 강한 황사가 내습했다는 것이다. 잠깐 외출했는데도 눈이 얼얼하고 목이 칼칼하다. 머리카락은 사흘정도 감지 않은 것처럼 서걱거린다. 옷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몽고의 사막 및 사막화지대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1970년대 11회 28일,80년대 17회 39일,90년대 29회 77일 등 갈수록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에 흙가루가 비처럼 내린다는 의미로 우토(雨土), 토우(土雨)라는 기록이 나온다. 황사라는 용어는 1954년부터 사용됐으며, 북한에서는 ‘흙비’로 표현된다. 국제적으로는 ‘Asian Dust’로 명명돼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Saharan Dust’ 또는 ‘Harmattan’으로 불린다. 발원지에서 황사가 발생하려면 직경 20㎛ 이하의 많은 모래 먼지, 강풍, 그리고 강한 햇볕 등 3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만주의 커얼친(科爾沁) 사막에서 발생한 황사는 우리나라에 도달하는데 1∼3일,2000㎞ 떨어진 고비사막의 황사는 3∼5일,5000㎞ 떨어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황사는 4∼8일이 걸린다. 2001년 말 기준으로 중국의 사막화된 토지는 남한의 17배에 해당하는 174만 3100㎢, 몽골은 국토의 90% 이상이 사막화되고 있다. 중국의 사막화는 과도한 개간, 무분별한 방목, 땔감 벌목, 식용식물 채취, 수자원 낭비 등 ‘오람(五濫)’ 때문이다. 중국은 2002년부터 사막화방지법을 제정,‘녹색 만리장성’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사막화 개선면적보다 사막화 진행면적이 30%가량 많을 정도로 역부족인 상황이다. 황사는 지구온난화를 억제하고 토양과 호수의 산성화를 방지하는가 하면,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아마존지역도 원래 척박한 땅이었으나 사하라 황토가 수천년 동안 쌓이면서 밀림이 무성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3년 전 이틀에 걸친 황사로 인한 건강 피해비용이 17조원으로 추정되는 등 건강과 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월등히 크다.1995∼98년 황사가 발생한 날의 사망률은 평소보다 1.7%, 특히 호흡기와 심질환 사망률은 4.1% 증가했다는 보고서가 나왔을 정도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씨줄날줄] 대방군(帶方郡)/이용원 논설위원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예상대로 한·일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새로 삽입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대방군(帶方郡)을 ‘중국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 서울 근처’라고 기술한 대목이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일찌감치 한의 군현이 자리잡아 그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됐다는 인상을 주려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한국 고대사에서 대방군이 갖는 위치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방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이래 우리 역사서에서 산견된다. 이를 정리하면 대방은 우선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의 하나는 아니었다. 처음엔 임둔(또는 진번)에 속한 현(縣)이었는데, 낙랑을 제외한 세 군(郡)이 바로 흐지부지되자 낙랑군으로 편입되었다. 서기 200년 전후해 대방군으로서 독립한다. 위치는 황해도 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다산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서’ 지리지 기록을 근거로 임진강 하류 일대로 추정했고, 실제로 봉산의 양동리 3·5호 고분을 발굴한 결과 전형적인 중국계 전축분(塼築墳)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에도 남쪽의 백제·마한,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공격 받는 기록들이 등장한다. 대방군의 위상은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 따라 자주 바뀌었지만 중국 왕조가 태수를 파견해 직접 다스린 기간은 짧았다. 지배세력은 토착화해 소 왕국 노릇을 했다. 그런데도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존속한 까닭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백제가 직접 맞붙기 전에는 황해도 일대가 힘의 공백지역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군이 수행한 무역기지 역할이다. 대방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중국 문물을 들여오는 전진기지 구실을 했다. 특히 중국-가야-왜를 잇는 중간기지로서 중요했다. 따라서 4세기 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대방군이 서울 근처에 있었다는 후소샤 교과서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최근의 풍납토성 발굴 성과에서 보듯 대방군이 존재한 기간에 서울 일대에는 이미 강력한 국가인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일본 극우세력의 어거지라면 다음 개정판에서는 풍납토성이 대방군의 치소(治所)였다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3)세계지도서 사라진 이름 ‘동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3)세계지도서 사라진 이름 ‘동해’

    세계지도의 90% 이상이 동해(East Sea) 대신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고 있다.‘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불러왔는데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지금 한국의 관심은 온통 독도로만 쏠려있을 뿐, 정작 동해에 관해서는 독도에 쏟는 관심의 1할도 주지 않는다. 이런 작금의 상황을 냉철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이전의 대다수 외국지도는 ‘동해’‘한국해’‘조선해’‘오리엔탈해’ 등으로 표기했다. 문제는 1929년에 발간된 국제수로기구(IHO: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의 ‘해양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에 일본해로 등재되면서 발생했다. 몇십 쪽에 불과한 얇은 책자가 동해의 운명을 바꿔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지도 90%이상 일본해 표기 국제수로기구는 국제간 수로 부문 협력체제를 모색하고, 수로 관계자료의 국제적 조정을 수행하는 기구. 바다 지명에 관한 건도 수로기구 관할이다.1921년 설립된 이래 74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한국은 1957년, 북한은 1987년에 가입했다.‘해양의 경계’는 세계 해양지명의 표준화 교본으로 지명에 관한 한 ‘바이블’과 같다. 이 책에 기초하여 세계 각국이 자체 해도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관광지도·특수지도 등 2차 지도들을 만들어 낸다. 이 영향력은 교과서는 물론 신문·방송에까지 확대된다.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 뜻과 무관하게 여기에 ‘일본해’로 등재됐고, 그 명칭이 전 세계에 유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전에도 16세기 이래 일본을 찾은 서구인들에 의해 일본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한국해, 동해 등과 혼용됐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쓰는 일본해 명칭은 국제기구의 공인을 받아 이전과는 격이 다른 차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식민지의 또 다른 아픔이다. 일제는 물리적인 영토 탈취에 머물지 않고 지명에까지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반도 곳곳에서 창씨개명이 자행돼 마을, 도읍, 거리 이름이 모조리 바뀌어 오늘날까지 잔재를 남기고 있으니 일본해의 세계화도 제국주의 음험한 유산에 다름 아니다. ‘해양의 경계’는 1929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3판이 1953년, 그리고 거의 반백년 만인 2007년에 개정판이 나올 예정이다. 문제는 3판까지 전부 일본해로 명기되어 있다는 점. 주권을 강점한 일본이 제국의 힘으로 이를 관철시켰으며,1953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3판을 밀어붙였다. 제국주의가 힘으로 관철시킨 명백한 과오이다. 당시 세계수로국을 지배하던 영국, 러시아,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열강의 입김이 책자 곳곳에 강하게 배어 있다. 문제는 냉엄한 국제법의 현실이다.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수천년간 동해로 불러왔다고 아무리 증거물을 내밀어도 제국주의적 패권에 의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 국제적 힘의 질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2007년 개정판 동해 부분 ‘공란’ 고구려 호태왕 비문에 동해가 분명히 적시되어 있으니, 이것만 해도 서기 414년의 일이며, 삼국사기에는 이미 BC 37년에 동해가 등장한다. 우리 옛 지도나 외국인이 그린 옛 지도에 등장하는 무수한 증거들, 그리고 풍부한 서지학적 증거들이 속속 제시되고 있으나 현실은 여전히 1929년의 표준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제 아비를 아비라 못 부르는’ 현실이 바로 국제 해양질서다. 우리끼리야 영구히 동해로 부를 것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일본해가 공용화되다시피 하고 있으니 ‘식민의 바다’는 아직도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통상적인 한국인들의 정서와 국제질서 사이에는 극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아직도 바다는 제1세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동해 표기는 1965년의 한·일어업협정에서도 문제가 됐다. 한국측에서 ‘수준 낮은’ 협상단이 파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을 빚은 끝에 각자 명칭으로 쓰기로 합의하였다. 이때에도 동해표기는 합의를 보지 못한 어정쩡한 단계로 남아 지금의 분란을 예고했다. 한국 정부는 1992년에 동해 영문표기를 ‘East Sea’로 결정하고, 국제사회에 대해 단일명칭으로 합의할 때까지 ‘동해/일본해’의 병기를 요구하고, 그 해 유엔지명표준회의 및 97년 제15차 IHO총회에서 동해 표기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2007년판 ‘해양의 경계’ 를 준비하면서 2002년에 초판본을 회람시켰는데 한·일간에 이견이 팽팽하자 동해 부분은 아예 백지인쇄를 했다. 즉, 국제법상 동해 표기문제는 아직도 미완의 장인 셈이다. 우리의 입장은 당연히 동해 단독 표기이다. 그러나 국제기구에서는 양국간에 논란이 있는 지명에 관해서는 병기를 권장한다. 가령 영국명으로만 표기되다가 프랑스에서 논란을 제기한 영국해협(English Channel)을 ‘La Manche’로 병기하여 해결한 사례도 있다. 동해 단독표기가 정답임은 분명하지만 지명 분규에 관한 양국의 협의가 이루어지기까지 잠정적으로 ‘동해/일본해’ 병기를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일본이다. 일본은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일본해’를 전 세계에 강요하고 있다. 병기는커녕 오로지 일본해 단독표기만을 고수한다. 독도의 예에서 보이는 염치 없고, 전례도 없는 후안무치한 밀어붙이기를 동해 명칭에서도 자행하는 중이다. 일본학 석학으로 지난해 영면한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같은 이도 ‘일본’이라는 명칭 자체가 가상의 전제로부터 출발했음을 비판하면서, 일본해 따위의 명칭이 성립할 수 없음을 역설하지 않았던가. 일본해 명칭은 마테오 리치가 16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 ‘Mappamondo’에 처음 등장한다. 한국인들이 동일 해역을 동해라 부른 지 1600년 후에야 사용한 이름이다. 세계 지리학계에서는 ‘역사성과 대표성’을 지명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일본은 2000년 이상을 사용해 온 동해를 밀어내고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로 밀어붙여 일본해를 세계 만방에 선전하는 중이다.17세기에서 19세기 후반 사이에 일본에서도 조선해라는 명칭이 다수 쓰였다. 일인 학자 카스노의 ‘일본해연구’(1975)에 의하면 1815년 경부터 서양인들이 일본해를 많이 썼으며,19세기까지 일본서해, 타라해, 조선해 등 다양한 이름이 존재했다고 밝힌 바 있다. ●1602년 세계지도 일본해 첫 등장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어떤가. 국제적 외교야 외교통상부 관할이지만 동해 연구·조사자료의 축적과 실제적으로 국제수로기구를 상대하는 중추는 해수부 해양조사원이다. 이곳 곽인섭 원장은 “쉽게 해결될 싸움이 아니므로 체계 있고 일관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한다. 국제분쟁 현장에서 뛰어온 오순복 과장도 “경험으로 미뤄 일본의 대응은 전 세계적이며 국제사회 로비도 엄청나다.”며 고개를 젓는다. 동해 표기 해도를 만들어 전 세계에 뿌리내리게 하는 이들이야말로 한·일간 새로운 영토싸움의 주역들이다. 길거리에서 고함 지르고 일장기 태운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싸움판의 예산이 얼마냐고 물으니 연간 1억원 내외란다. 고작 1억원! 세금은 제대로 쓸 데 써야하지 않을까. 독도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자료축적도 돼 있고 이론적 기반도 갖춰 가지만 동해는 참으로 고난의 연속이다. 작금의 시마네현 폭거로 빚어진 독도에 대한 열정의 반의 반이라도 동해에 쏟아야 한다. 독도와 동해문제는 별개이지만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지니며, 일본의 해양침탈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양자는 불가분이다. 동북공정이 문제되니 고구려재단을 만들고, 독도 문제가 불거졌다고 대뜸 독도특별법이니, 독도재단 만들기 따위의 단말마적 대응이 이어지는 현실을 보노라면 도대체 동네싸움을 하려는 것인지, 원대한 국가정책적 대응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일본의 논리는 어떨까. 일본측은 일본해 명칭이 일본의 확장주의와 식민화의 결과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한국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한 사안을 두고 강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한반도를 강점한 가운데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일본의 일처리 방식은 이렇듯 식민지배에 관한 뉘우침이나 반성 없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상생의 사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北 ‘조선해’ 주장… 남북공동대응 필요 이 문제가 불거지면 일본은 예의 1602년판 마테오리치 지도 등을 증거로 제시한다.‘일본해/동해’ 병기 주장도 세계 해양명칭의 혼란을 이유로 거부하는 그들 아닌가. 관계국의 합의를 얻을 때까지 과거의 합의를 답습해야 하므로 일본해 명칭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론은 계속된다. 동해는 한반도의 남해, 서해, 동해의 연속선상에 있는 방향 표시이므로 국제 명칭으로 부적당하다는 주장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황해를 ‘West Sea’로, 동중국해를 ‘South Sea’로 변경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일본해만 문제 삼아 ‘East Sea’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만을 고의로 ‘표적삼았다.’는 의문을 갖게 한다고도 말하는 그들이다. 희망은 없는가. 우리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일관되게 ‘조선해’나 ‘조선 동해’를 주장해 온 북한의 줄기찬 노력도 평가해야 한다. 남북 공동대응이야말로 둘이 아니라 셋도 되고 넷도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간의 힘이다. 전 세계 사이버 전장에서 동해되찾기, 독도영유권, 역사교과서 왜곡시정 등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사이버 독립군’ 반크(www.prkorea.com) 같은 존재가 유독 빛나 보인다. 일본해만 쓰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동해 병기로 돌아선 것도 이들의 공로다. 사재를 털어 동해표기 옛 지도를 전 세계에서 수집해 온 이들의 희생도 기려야 한다. 일본의 국가팽창주의가 아무리 힘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시민의 힘을 꺾을 수는 없는 일. 갈등이 심해지면서 불행하게도 강화될 수밖에 없는 국가주의의 병폐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양국의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을사늑약 100주년에 과거 반성은커녕 해묵은 갈등이 동해에서 재연되고 있으니 한·일 양국의 선량한 백성에게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번 시마네현 폭거를 계기로 독도뿐 아니라 동해표기, 나아가서 예상되는 중국과의 갈등까지 먼 바다를 내다보는 대응책으로 해양전략의 차원을 끌어올릴 것을 국가 및 우리사회에 다시 한번 촉구한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 (63)

    守節終身(수절종신) 儒林 295에는 守節終身(지킬 수/절개 절/마칠 종/몸 신)이 나오는데, 이 말은 ‘貞節(정절)을 지키며 일생을 마감함’을 뜻한다.守는 ‘ (집 면)’과,‘ ’(팔꿈치 주)의 本字인 ‘寸(주)’가 결합된 글자이다.用例(용례)에는 ‘守口如甁(수구여병:입을 병마개 막듯이 꼭 막아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함),守錢奴(수전노:돈을 모을 줄만 알아 한번 손에 들어간 것은 도무지 쓰지 않는 사람)’ 등이 있다. 節자의 竹(대 죽)은 ‘대나무’,卽(곧 즉)은 ‘음식이 담긴 그릇’과 ‘꿇어앉은 자세로 음식 앞으로 다가가는 사람’의 상형으로 본뜻은 ‘나아가다’이다.‘節上生枝(절상생지:가지에 또 가지가 나듯 지엽에 치우쳐 근본을 상실함),節義(절의:절개와 의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등에 쓰인다. 終의 본 글자는 ‘冬’으로, 실의 양끝을 묶은 형태를 본떠 ‘끝맺음’을 나타낸 象形字(상형자)다.用例로 ‘終南捷徑(종남첩경:출세와 영달의 지름길),始終一貫(시종일관:일 따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함)’이 있다. ‘身’자는 ‘배 나온 사람의 상형’이란 설과 ‘사람의 몸에서 배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만든 指事字(지사자)’라는 설이 있다.用例로 ‘身邊(신변:몸과 몸의 주위),身熱(신열:병으로 인하여 오르는 몸의 열)’이 있다. 烈女(열녀)란 定婚者(정혼자)나 男便(남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음으로써 强暴者(강포자)에 항거하는 여인을 말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苦難(고난)과 싸우며 수절(守節)한 婦女子(부녀자)도 물론 여기에 속한다. 흔히 烈女를 조선시대의 儒敎的(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時代의 産物(산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도 烈女에 관한 記錄(기록)을 볼 수 있다. 新羅(신라) 眞平王(진평왕) 때의 薛氏女(설씨녀)는 가실이라는 사람과 定婚(정혼)을 하고 연로한 丈人(장인)을 대신하여 軍役(군역)에 나갔다.3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자 가실과의 정혼을 破棄(파기)하자는 주장이 優勢(우세)하였다.迂餘曲折(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6년을 기다려 가실과 婚約(혼약)을 하였다. 百濟(백제) 蓋婁王(개루왕) 때의 都彌(도미)의 부인은 美貌(미모)와 貞淑(정숙)함을 兼備(겸비)했다는 소문이 播多(파다)하였다. 왕은 그녀의 절개를 시험하기 위해 도미를 拘束(구속)하고 신하를 왕이라고 속여 도미의 집에 보냈다. 갖은 구실을 붙여 同寢(동침)을 요구하자, 그녀는 丹粧(단장)을 하고 들어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여종을 대신 들여보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大怒(대로)하여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고 배에 태워 바다에 버리고는 또 동침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몸을 씻고 오겠다며 밖으로 빠져 나와 강가에 이르렀다. 이때 불현듯 나타난 조각배를 타고 泉城島(천성도)라는 곳에 이르니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 있어 함께 高句麗(고구려)로 가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守節에 얽힌 悲話(비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가운데 ‘望門寡(망문과)’라는 것이 있다.婚前(혼전)에 定婚者(정혼자)가 죽어 神主(신주)와 함께 혼인식을 거행한 뒤 新房(신방)에서 한 평생을 守節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연간 離婚(이혼) 夫婦(부부)가 20만 쌍을 넘어선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納得(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뿐이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日 독도주권 침해] 역사속의 독도

    [日 독도주권 침해] 역사속의 독도

    역사적으로 독도를 거론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서기 500∼514) 13년조에 보인다.‘…우산국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는 이 기록이 독도를 분명하게 지칭하고 있지는 않으나, 독도의 존재가 통상 우산국(울릉도)과 함께 취급돼 왔다는 점에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때 신라에서는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을 아우르고 왕토(王土)로 삼았으니, 이 해가 512년임을 감안하면 벌써 1500년 전부터 독도는 우리 영토로 존재해온 것이다. 이렇게 우산국과 함께 우리 영토에 귀속된 독도는 고려시대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땅으로 인식돼 왔다. 고려사 태조 13년조와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 등에는 ‘…신라 때 우산국이라 불렀는데, 무릉 또는 우릉이라 하며… 신라 지증왕 13년에 항복해왔다. 우산, 무릉 두 섬은 거리가 가까워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적어 지리적으로 근접해 우산국과 세트로 인식된 독도가 분명히 우리 땅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후 고려 현종 때까지 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는 지배체제가 정비되면서 덕종 원년부터 우릉으로 불렸으며, 이곳 성주가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고 적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에 대한 역사적 지배권의 향배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인종, 의종, 고종조에도 울릉도의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많은데, 특히 고종조에는 원주민 외에 별도의 주민들을 육지에서 이주시켜 살도록 하려다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면서 무산된 사실을 기록해 울릉도가 신라 지증왕대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의 통치권 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울릉도에 대한 통치기조는 민간의 거주를 막는 ‘공도(空島)정책’으로 바뀌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태종조에 부역과 납세를 면탈하기 위해 이 섬으로 도망친 자들을 붙잡아 오도록 했다(공도화)는 기록이 전한다. 세종·세조 연간에도 이런 문제로 조정의 논의가 많았는데, 특히 세조 때에는 중추부사를 지낸 유수강이 우산과 무릉, 즉 울릉도와 독도에 현읍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다스리자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우산과 무릉에 현읍을 설치할 경우 수로가 험하고 왕래가 어려워 지키기 어려우니, 배가 오가기 좋은 날을 골라 이곳에 거주하는 강원도의 주민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게 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주민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도록 했다.’는 이른바 조선조의 공도정책.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 섬이 무인도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공도정책은 유인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책’이라며 일본측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있다. 이후 공도정책으로 이곳에 왜구가 들끓자 숙종 23년(1697)에 왜구를 축출하기 위해 수토제(搜討制)를 정례화했으며, 영조는 이곳 특산물인 산삼의 밀거래를 막기 위해 지방관아에 체계적인 채삼(採蔘)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는 고종이 1900년 10월 대한제국 황제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편하고, 그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하는 직제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는 일본정부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는 무인도로 타국이 점령 지배하고 있지 않으므로 일본령으로 삼는다.’는 억지 주장을 편 것보다 5년이나 앞서 있었던 사실(史實)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삼국·고려시대 무예의 모든 것

    ‘당나라 사신이 신라의 쇠뇌 기술자를 데리고 가 나무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 나갔다. 당나라 황제가 “내가 듣기에 너희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이냐?”하고 묻자 “재료가 좋지 못한 때문이니, 만일 목재를 본국에서 가져오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신라본기6(문무왕 9년)에 나오는 기록으로 당시 신라의 쇠뇌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케 해준다. 한국의 무예와 무기, 전술 등은 이처럼 신라본기 등 우리 문헌은 물론 중국, 일본의 문헌에도 상당량 언급되어 있는데,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들을 발췌해 정리하는 작업에 나서 최근 ‘한국무예사료총서’를 냈다. 1차로 발간된 것은 총서1 ‘삼국시대편’과 총서Ⅱ ‘고려시대편’ 2권. 삼국시대편은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 한국의 문헌 6책, 사기·한서·후한서 등 중국 문헌 32책, 일본서기 등 일본문헌 7책 등 총 45책에서 무예와 관련된 사료를 발췌해 번역했다. 고려시대편은 한국문헌(22책)을 중심으로 총 31책에서 관련 자료를 발췌 정리했다. 책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무치주의(武治主義) 이념과 상무적인 정신을 강조하면서 실전에 대비한 전투기술을 권장했다. 궁술을 비롯한 기마술, 검술, 창술, 부월술, 노술(弩術), 수박(手搏), 각저(角抵), 축국(蹴鞠) 등의 다양한 무예가 크게 발달했다. 특히 고구려는 기마술과 맥궁(貊弓)을 기반으로 주변민족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숙신의 단궁(檀弓), 말갈의 각궁(角弓) 등을 흡수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궁술을 구사하게 되었다. 또한 기병전술과 보병전술을 혼합하여 싸우는 전술체제가 발전했으며, 검술과 창술이 무예에서 분리되어 춤으로 발전한 사례도 확인된다. 고려의 통일로 한국무예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후삼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고려왕조는 대내적인 안정을 위해 유교이념을 받아들이고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종래의 무치주의를 문치주의로 전환시켜 나갔다. 발해의 멸망으로 북방민족과 국경을 맞닿게 됨으로써 무예와 전술 또한 이에 대비해 성곽이나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적을 방어하기 위한 궁술과 노술이 발달된다. 이때 수질노, 팔우노 등 다양한 노의 종류가 등장하고, 궁술로 관리를 뽑는 궁과(弓科)도 등장한다. 각희(角戱), 각력(角力) 등으로 기록된 씨름이 군사훈련으로 시행되고, 민간 놀이로 분화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총서 발간작업을 주관한 심승구(한국체대 교수) 한국무예연구소장은 “한국 무예는 한민족의 출발과 그 궤를 같이한다.”며 “그동안 관련 문헌이 워낙 다양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어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는데 이번 총서 발간으로 한국 무예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古천문학/이용원 논설위원

    1990년대 초 한국 고대사 체계를 뿌리부터 흔들 만한 논문이 한 학자에게서 잇따라 나왔다.“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중심지는 중국 대륙이다.”“고조선을 기록한 ‘단기고사’‘단군세기’의 내용은 정확하다.”는 주장이었다. 발표한 이는 역사학자가 아닌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현 고등과학원 교수).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우주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역사서에 등장하는 천문 현상을 첨단기법으로 시뮬레이션해 이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박 교수는 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이 중국·일본 사서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뒤 이를 토대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일식 기록을 분석해 천문 관측처(수도)가 중국 대륙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고조선 역대 단군(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단기고사’‘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오성취루(五星聚婁)’가 BC 1734년 실제 있었던 천문현상이며, 그 발생과 사서의 기록에는 1년의 오차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오성취루’는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다섯 행성이 한 별자리 부근에 모이는 현상이다. 박 교수의 연구방법이 전문적인 데다 내용이 갖는 폭발성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아직은 이를 비판하거나 뒷받침하는 후속 연구성과는 나오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를 계기로 ‘고천문학(古天文學)’이 별도의 학문 분야로 인정받았고 연구자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천문 현상을 ‘하늘의 뜻’으로 여겨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일일이 기록했다. 따라서 멀리는 고조선, 가깝게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에 이르는 수천년의 천문 기록을 가진 우리 문화는 고천문학의 보고이다. 그뿐이 아니다. 세계에서 고인돌을 가장 많이 보유한 우리 땅에서 고인돌에 새긴 별자리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 별자리 기록의 역사는 몇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현대 천문학으로도 풀지 못한 ‘물병자리’ 변광성(變光星)의 비밀을 ‘고려사’와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분석해 밝혀냈다는 보도가 어제 있었다. 고천문학이 올린 또 하나의 개가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고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성, 높은 과학 수준은 계속 입증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역사속의 을유년] 60년전 한반도엔 ‘희망의 물결’

    [역사속의 을유년] 60년전 한반도엔 ‘희망의 물결’

    을유년(乙酉年)은 ‘희망의 해’다.60년 전 35년간의 일제 강점을 털어내고 광복을 맞은 것이 서력(西曆) 이후 서른두번째의 을유년이었고, 오늘 맞은 새해는 바로 서른세번째 을유년이다.60년 전 을유년에 온 나라 구석구석 넘실댔던 기쁨과 희망의 물결만 생각해도 새해 아침은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 이전에 지나간 서른한번의 을유년을 돌이켜보건대, 우리 선조들도 비교적 평화로운 한해를 보냈던 것으로 보아 새해는 커다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시작해봄직하다. 세계적으로도 2차대전 종결 및 니케아종교회의 등 희망적인 해가 많았다. 을유년에 일어났던 역사적 주요 사건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325년 로마제국 니케아종교회의 기독교는 로마시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출발했다. 예수는 스스로 ‘하느님의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온 메시아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초기의 은 생애동안 성공했을 뿐 곧 혁명가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후 예수의 추종자들은 갖은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의 몇몇 도시들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신앙관용령(밀라노칙령)을 선포한 데 이어,325년 니케아에서 모든 교회 대표자들이 모인 최초의 전 기독교 회의를 열어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조직이 발달했다. ●1225년 최우, 정방 설치 고려 무신정권 수장이었던 최우가 고려 고종때 자신의 집에 ‘정방’이란 관청을 설치했다. 무신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지만 국가의 행정실무를 무신만으로 처리할 수 없어 정방을 두고 젊은 문사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 이곳에선 문무백관의 인사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는데, 인사 명부와 함께 고과를 매겨 왕에게 올리면 왕은 그것을 결재할 뿐이었다. 이를 통해 최씨 정권은 문무백관을 실제로 장악할 수 있었다. 최씨 정권 몰락후 정방은 궁중으로 옮겨져 국가기관이 되었다. ●1285년 일연, 삼국유사 완성 충렬왕 11년,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일연은 1277년 이후 청도 운문사에 머물 때 삼국유사를 편찬하기 시작해 5권2책으로 완성했다. 삼국유사는 왕명으로 편찬한 기전체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달리 자유로운 형식으로 단군신화에서 후삼국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 외에 서민들의 생활상을 비롯해, 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은 귀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일연은 나름대로 철저히 사실을 고증해 책을 편찬했다고 한다. ●1645년 소현세자 죽음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로 병자호란때 볼모로 청에 끌려갔다. 청에 9년간 머물며 청과 조선 외교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귀국할 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 등을 갖고 왔다. 귀국하자 반청파들은 그를 친청적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가져온 서양서적도 불태워버렸다. 인조 23년 4월 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오랑캐의 것이라도 배울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화가 난 인조가 던진 벼루에 맞아 앓다가 나흘만에 죽었다. 이때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고, 피를 쏟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 독살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소현세자 빈도 인조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듬해 사약을 받았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막내만 살아남았다. ●1885년 거문도사건 발생 갑신정변(1884년) 이후 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에선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여 청·일 양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러시아도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조선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의 남방 진출을 막는다는 구실로 그해 3월 선제공격을 감행, 거문도를 점령했다.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를 잇는 바닷길의 중간에 있어서 러시아 동양함대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결국 조선을 제외한 러시아·청·영 3국이 교섭을 벌여 러시아는 조선의 어떠한 영토도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1887년 2월 영국함대는 철수했다. 그해 8월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식 중고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했으며, 한성전보국이 개국(서울∼인천간 전신 개통)했고 대원군이 청에서 귀국했다. ●1885년 인도국민회의 결성 영국에 의한 식민정부에 의해 교육받은 인도인들이 구성했다. 후일 간디의 지도아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영국과 전국적으로 싸우며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한국 광복 8월15일 일본 왕의 항복선언과 함께 2차대전이 종결되고 한민족도 광복을 맞았다. 이에 앞서 5월2일엔 베를린이 연합군에 점령당했고,5월8일 독일이 항복했다. 9월2일 맥아더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책을 발표했으며,9월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언됐다.9월7일엔 미 극동사령부가 군정을 선포하고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됐다.11월10일 미군정이 인민공화국을 비난했다는 것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매일신보’가 정간됐다가 11월25일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속간되었다. 조선일보(11.23), 동아일보(12.21)도 복간됐다.12월30일 송진우가 피살되고,31일부터 신탁통치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메뚜기 떼/이기동 논설위원

    메뚜기만큼 여러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곤충도 흔치 않을 것이다. 채신머리없고, 정서불안에다 행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개구리와 함께 메뚜기를 먼저 떠올린다.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원작의 Grasshopper는 메뚜기)’에 등장하는 메뚜기는 더 한심하다. 여름 내내 춤과 노래로 허송세월하다 추운 겨울이 오자, 개미를 찾아가 자비를 구하는 몰골은 대책 없고, 자존심까지 내팽개친 무능한 인간의 표상이다. 시대 따라 메뚜기 이야기도 약간씩 버전을 달리해 등장한다. 기원전 6세기 이래 오리지널 버전은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최선이라는 가르침이다.20세기 들어 미국에서는 빈곤층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개미의 따뜻한 마음씨를 부각시키는 각색본이 나돌았다. 메뚜기를 배려하는 개미의 마음씨에 초점을 맞춰, 풍요속에서 소비자들이 빈곤층에 대해 갖는 양심의 일단을 반영한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에서는 분배를 강조하는 민주당정권을 비아냥대는 버전이 나돌았다. 겨울이 오자 메뚜기들이 기자회견을 자청, 왜 개미만 잘 먹고 잘 사느냐고 항의했다. 메뚜기를 동정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클린턴 대통령이 나서서 메뚜기를 구하기 위해 모든 정책을 동원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개미가 메뚜기를 착취, 부당한 부를 일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민주당의원들까지 등장하는 버전이다. 중동, 아프리카 중서부 일대가 메뚜기떼의 공격으로 대재앙을 맞고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의 벼메뚜기와는 구분되는데 수십억 마리가 몰려다니며, 지나간 자리는 몇분만에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실은 남극·북극을 제외하고 전세계에 메뚜기떼가 쓸고 다니지 않는 곳은 없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뚜기떼의 습격, 펄벅의 ‘대지’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메뚜기떼는 이들의 횡포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메뚜기떼의 번성 이유를 기후 온난화 탓으로 돌린다. 특히 겨울같지 않은 겨울이 첫째 이유다. 메뚜기들은 곡식만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극심한 악취, 호흡기질환을 일으켜 인명까지 앗아간다. 경작지가 크게 줄어든 탓인지 우리는 이들의 무서움을 모르고 지낸다. 메뚜기가 사는 무공해 논의 쌀임을 내세워 수입을 올리는 지방자치단체들까지 생겨났다. 메뚜기의 이미지를 해치는 외신 보도로, 이들이 수입에 지장을 받지나 않을지 걱정되기도 한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논술이 술술] 삼국유사/일연지음

    [논술이 술술] 삼국유사/일연지음

    얼마 전 우리 나라의 IT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V3라는 바이러스 백신의 개발자로 유명한 안철수씨가 자사 연구소 직원들에게 전한 ‘우리는 진정한 인터넷 강국인가?’라는 글이 화제가 되었다. 이 글에서 안씨는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외국 기업의 지배에 종속되어 있는 기술적 수준과 사용자의 이용 행태의 문제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가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며 IT산업의 현실과 전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현대 경제는 ‘문화 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적 주체성과 다양성의 실현이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분신사마’,‘여고괴담’ 등의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귀신의 모습도 자신의 한을 풀어주기를 기원하던 전통의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며, 신화와 전설의 배경들도 각종 ‘팬터지’소설이나 게임, 만화 등에서 나타나듯이 서양 중세의 마법사들과 요정이 판치는 공간들로 바뀐 지 오래이다. 이미 초등학생들까지 내려간 ‘빼빼로데이’,‘화이트데이’ 등 각종 정체 불명의 ‘데이’들도 심각성을 더해준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꿈과 상상, 정서뿐 아니라, 영원한 회귀의 고향인 ‘신화’와 ‘전설’의 무대까지도 ‘서양’과 ‘일본’에 점령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논리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정체성 상실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한 길에 나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가장 훌륭한 안내자로서 놓여 있는 책이 바로 ‘삼국유사’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몽고에 침략을 받던 절박한 시대에 살았던 일연은 뚜렷한 목적 의식으로 ‘삼국유사’를 써서, 민족의 자주성과 우리 문화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었다. 만일 ‘삼국유사’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삼국 이전의 옛 역사에 대해서 중국의 사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삼국유사’에 실린 다양한 신화와 설화, 그리고 향가와 같은 문학 작품들은 고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특징들을 가장 원형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보물 창고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후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들과 예술 작품들의 모태로 작용해 왔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서 관련된 내용을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삼국유사’가 어떤 책인지는 자세히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삼국유사’를 읽으며 우리는 우리 민족의 상상과 꿈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적 창조의 계기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 (unidream.co.kr) ■생각해보기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효선’편에서 드러난 고려시대 ‘효’ 의식의 특징에 대해 써보자. ▲‘가락국기’ 설화 속에서 나타난 ‘구지가’의 문학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설화를 통해 나타나는 고대인들의 의식과 언어관의 특징에 대해 적어보자. ■독서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중1∼고3 -관련 교과:국사, 고등 사회, 윤리와 사상, 사회문화 -함께 읽어 볼 책:삼국사기(김부식), 이야기 한국사(이이화) -기출논제:1996학년도 서강대 논술
  • 쌀쌀한 날엔 ‘어머니맛 청국장’

    쌀쌀한 날엔 ‘어머니맛 청국장’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면서 따끈한 청국장 찌개가 그립다. 다소 거칠고 질박한 맛이 나는 청국장은 구수한듯 퀴퀴하다.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청국장은 고향의 냄새이자 어머니의 냄새이다. 어릴 적 코를 싸쥐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의 음식’이다. 그래서 냄새없는 청국장은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면, 추억의 소중함을 아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국장은 추억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싸구려 음식으로 청국장이라면 손사래를 치게도 한다. ■ 쌀쌀할땐 어머니맛 청국장 요즘 청국장이 건강식품으로서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청국장 전도사’ 김한복(호서대 생물정보학과) 교수는 “청국장은 인체에 유익한 균이 무척 많이 들어있어 약보다 효능이 우수한 식품이다.”라고 예찬했다. 콩 단백질을 98%까지 흡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슬로푸드’인데다 건강을 지키는 신토불이 웰빙식품으로 주목받는 까닭이다. 비만과 당뇨 등의 성인병을 다스리기 위해 생청국장을 먹는 사람도 많다. 처음엔 여간 비위가 강하지 않으면 먹기 힘들다. 하얀 실이 끈적끈적하는데다 오동통한 콩알은 퍼석거린다. 씹어보면 미끌거리면서 특유의 냄새가 강한 까닭이다. 생청국장을 말려 믹서기 등으로 갈아 요구르트나 우유 등에 타서 마시는 사람도 많다. 건강도 지키면서 맛을 챙길 수 있는 청국장은 우리 민족이 1400년 이상 먹어왔던 음식이다. 한반도가 콩의 원산지이자 콩 농사의 종주국이다. 기마생활을 했던 선조들은 콩을 삶아 말안장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먹었다고 하는데 말의 체온에 의해 삶은 콩이 자연 발효된 것이 청국장의 원조라는 것. 삼국사기엔 청국장이 ‘시()’로 등장하다 조선시대엔 ‘전쟁이 났을 때 빨리 먹을 수 있는 장’이란 뜻으로 전국장(戰國醬)이 쓰였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부르는 청국장(淸國醬)이란 용어는 아직까지 한·중·일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국장이 발음이 변하면서 청국장으로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하튼 한민족에겐 청국장을 즐기는 유전자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역사가 유구한 청국장은 실크로드를 따라 네팔, 인도네시아 등으로 퍼져갔다. 일본의 낫토도 청국장의 일종이다. 요리 연구가 우영희씨는 “청국장 하면 찌개를 떠올리는데 비빔밥이나 샐러드 등으로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며 “청국장 발효기기가 좋아 요즘엔 집에서 얼마든지 청국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방배동 요리 전문학원 벨라쿠치나에서 서양요리 연구가 임종현(36)·오경옥(35)씨에게 청국장 샐러드와 카나페 등 요리 몇가지를 지도했다. 이에 임씨는 청국장을 갈아 수프를 만들거나 이탈리아식 만두인 라비올리도 될 듯하다고 제안했다. 우씨는 청국장 찌개를 끓일 때 요즘은 무가 달고 맛있다며 무를 넣거나 묵은 김치를 넣어도 좋다고 제안했다. 청국장은 찌개가 끓을 때 한소끔 끓은 다음 넣어야 영양을 살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청국장 좀 하는 집 ●진주청국장(785-6918)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맞은 편 한국신용평가건물 지하 1층의 진주청국장은 한정식집을 연상케 하는 깔끔한 인상처럼 그다지 냄새가 강하지 않다. 그러나 뻑뻑하면서 부드러운 것은 청국장 본래의 맛이다. 뚝배기에 담아낸 청국장 찌개(6000원)에는 통콩이나 콩조각 등 알갱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청국장을 모두 절구에 빻아 넣기 때문이란다.‘띠포리’로 불리는 밴댕이를 넣고 끓인 국물에 바지락·붉은 고추·호박·두부 등을 넣어 팔팔 끓여 냈다. 저녁에는 정찬(1만원)를 권할만 하다. 돼지보쌈·야채쌈·오색나물·모둠전·생선찜 등이 나온다. 여기에 한우석쇠불고기와 홍어회무침 등이 추가되는 상찬코스는 1만 8000원. 청국장만 포장 판매도 한다.(2인분·3000원) ●사직분식(736-0598) 서울 사직공원옆 사직파출소 맞은편에 있는 사직분식은 문턱을 넘는 순간, 청국장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릇에 담아낸 청국장 찌개(4000원)는 절구에 찧지 않고 통째로 넣어 끊인 탓에 누르죽죽한 국물에 두쪽 난 콩이 가득하다. 풋고추와 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별궁식당(736-2176) 서울 안국동 풍문여고 뒤쪽 골목에 있지만 눈보다 코를 킁킁거리며 찾은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청국장집이다. 청국장은 초가집이 어울릴 법하지만 깔끔한 한옥집인데도 분위기가 괜찮다. 뚝배기에 내오는 청국장 찌개(5000원)의 냄새가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다. 느타리버섯·팽이버섯·호박·두부·파 등을 넣고 하얗게 보글보글 끓여냈다. 청국장 콩알은 토실토실한데 급히 먹으면 입을 델 정도로 뜨겁다. 이외에도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 뒤쪽 하나로식당(733-0678)에서 가정식백반(5000원)을 주문하면 무·배추를 듬뿍 넣은 청국장 찌개가 나온다. 묽은 듯 담백하다. 동교동 제일은행 뒤쪽의 전주식당(334-8500)은 한식 전문이지만 바지락과 두부 호박을 넣은 청국장 찌개(4500원)가 개운하다. 필동 고향식당(2264-0240)의 청국장 찌개(4000원)는 묵은 우거지를 삶아 썰어넣고 돼지고기 사태 몇점과 매운 고추를 넣고 한소끔 더 끓여 낸 것으로 맛이 깊다. ■ 도전!!! 청국장 만들기 (1) 콩고르기:대두를 주로 쓴다. 수입콩보다 국산콩이 발효가 잘 된다. (2) 불리기:콩을 깨끗이 씻어 물에 불린다. 물은 콩의 3배 이상이며 12시간가량 불리면 된다. (3) 삶기:불린 콩을 솥에서 끓인 다음 은은한 불에서 연한 갈색이 날 때까지 3∼4시간가량 푹 삶는다. (4) 균 접종:소쿠리에 밭쳐 물기를 빼며 60℃까지 식힌다. 안전한 종균이 없으면 깨끗한 볏짚을 잘라 콩 사이에 넣는다. 냉동 청국장이 있다면 조금만 물에 풀어 삶은 콩에 뿌려도 좋다. (5) 발효:40℃에서 80%의 습도를 유지해 2∼3일 둔다. 용기는 면이나 삼베 등 공기가 통하는 천으로 봉해야 한다. 랩을 씌울 경우 5㎝간격으로 작은 구멍을 내 준다. 콩 표면의 갈색이 진해지고 하얀 실이 생기면 발효가 잘 된 것이다. 너무 오래 발효하면 암모니아 냄새가 심해진다. (6) 가공:발효가 끝난 청국장을 나무 주걱으로 고루 섞고 절구에서 찧는다. 이때 소금·마늘·고추장 등으로 양념하면 된다. 생으로 먹을 경우 양념을 안해도 좋다. 발효기계를 이용해도 방법은 비슷하다. 시간을 맞춰 주기 때문에 숙성 시간이 짧아지고, 냄새도 덜 난다. 종균을 따로 팔기도 한다. 하비비의 종균은 1봉지에 1만 5000원. ●청국장 비빔밥 재료 밥 1공기, 콩나물·시금치나물·고사리나물·도라지나물 적당량씩, 청국장 (½)컵, 비빔고추장 적당량,나물 양념(다진 파·깨소금 4큰술씩, 다진 마늘·참기름 2큰술씩, 소금·통깨 적당량씩) 만드는 법(1) 콩나물은 다듬어서 냄비에 담고 물을 조금만 부어 소금과 다진 마늘을 넣고 익힌다. 콩나물만 건져서 한 김 식으면 다진 파·참기름·깨소금을 넣어 무친다.(2) 도라지 나물은 도라지를 길게 채를 썰어 찬물에 다듬어서 냄비에 담고 물을 조금만 부어 소금과 다진 마늘을 넣고 뚜껑을 덮어 익힌다. 도라지만 건져 다진 파·참기름·깨소금을 넣어 무친다.(3) 고사리는 억센 줄기는 잘라내고 너무 길지 않게 잘라 다듬는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뜨거워지면 다진 마늘을 볶다가 고사리를 넣고 볶으면서 국 간장으로 간을 하고, 참기름·다진 파를 넣어 무르게 볶는다.(4) 시금치는 다듬어서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살짝 데쳐서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짠 다음 다진 파·다진 마늘·소금·참기름·깨소금을 넣어 무친다.(5) 따뜻한 밥에 (1)∼(4)의 나물을 적당량씩 올리고 그 위에 잘 뜬 청국장을 올린 다음 비빔 고추장을 올려낸다. 달걀이 있으면 황·백 지단으로 나눠 부쳐 올려내도 좋다. 팁 비빔밥은 숟가락보다 젓가락으로 비비면 고루 잘 섞인다. 또 밥알도 으깨지지 않아 더 맛있다. ●청국장 멸치볶음 재료 꽈리고추 100g, 지리멸 1컵, 청국장 1컵, 다진 마늘 1큰술, 통깨 약간, 홍고추 1개, 식용유 적당량,소스(간장·맛술·청주 2큰술씩, 설탕·물엿 1큰술씩) 조리법 (1)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멸치를 넣고 함께 볶는다.(2) 꽈리고추를 넣고 2∼3분간 뚜껑을 덮어준다.(3) 소스를 넣고 저어주면서 조리듯이 볶는다.(4) 준비된 청국장을 넣고 홍고추를 채썰어 넣어 마무리한다.(5) 완성된 접시에 담고 통깨를 뿌려낸다. ●청국장 카나페 재료 식빵 또는 시퐁케이크 6∼8조각, 마요네즈 1컵, 다진 땅콩·건포도 2큰술씩, 모차렐라 치즈(또는 파마산 치즈) 약간, 청국장 1컵 조리법 (1) 준비된 빵을 2㎝ 두께로 잘라 지름 5㎝의 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만든다.(2) 청국장에 다진 땅콩을 넣어 버무린다.(3) 빵위에 마요네즈를 바른다.(4) 모차렐라 치즈를 얹고 그 위에 청국장과 땅콩 버무린 것을 보기 좋게 올린 다음 건포도로 장식한다. ■ 우영희의 청국장 요리조리 ●요리연구가 우영희씨는 홍대 미대 공예과를 다니다 그만두고 1983년 도미, 중국요리와 케이크 데커레이션 과정을 마쳤고, 그후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땄다. 각종 문화센터와 TV프로그램에 출연했고, 현재 푸드채널에서 ‘우영희의 아름부엌’을 진행하고 있다. 우씨는 “좋은 음식은 가족끼리 먹을 것이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들을 초대해 나를 알리는 기회로 삼자.”고 주부들에게 역설했다. ●청국장 샐러드 재료청국장 1컵, 양상추 (¼)통, 오이 (⅓)개, 파프리카 1개,드레싱(올리브 오일 (½)컵, 다진 마늘 1큰술, 소금 (½)큰술, 설탕·식초 2큰술씩) 만드는 법 (1) 야채는 깨끗이 씻어 찬물에 담갔다가 건진다. 양상추는 한입 크기로 손으로 뜯어둔다. 파프리카와 오이는 한 입크기로 둥글게 썬다.(2) 드레싱 재료를 그릇에 담아 저어 잘 섞는다.(3) 넓은 야채 접시에 (1)의 손질한 야채를 보기 좋게 담고 그 위에 잘 뜬 청국장을 올린 다음 드레싱을 뿌려낸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이종원·강성남기자 jongwon@seoul.co.kr
  • [씨줄날줄] 지진 공포/오풍연 논설위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이탈리아 나폴리.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폼페이에 도착한다. 과거 로마시대엔 어떤 도시보다 부유층의 리조트로서 인기가 높았다. 호화로운 별장에 수도, 포장로, 상점 등 기반시설도 완벽했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 인구는 2만명. 그런 도시에 큰 재앙이 닥쳤다.AD 63년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79년 8월24일엔 베수비오산이 대폭발했다. 이 거대한 도시는 지구상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1748년 한 농부에 의해 청동과 대리석 조각이 발견되면서 신화속의 도시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이처럼 지진은 전체 도시를 삼키기도 한다. 사상자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20세기 이전에 일어난 지진은 피해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20년 중국 간쑤성(甘肅省)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23만명이 숨졌다. 당시 진도는 8.5였다.1923년에는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 진도 7의 대지진이 발생했다.9만여명이 사망하고 행방불명된 사람도 4만여명에 이르렀다. 그후 1931년부터 1980년까지 50년 동안 전세계에서 일어난 진도 7.0 이상의 지진은 490여 차례나 된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지구촌 곳곳을 강타했다.5대양 6대주에 지진 안전지대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안전한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1800회 가까운 서술이 있지만 지각의 특성을 밝히는 등 연구를 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평가다. 우리나라엔 1905년 인천에 처음 지진계가 설치됐다.1936년 7월4일 지리산 쌍계사 지진과 1978년 10월7일 홍성 지진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물론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활발한 지진활동이 있었으므로 낙관은 금물일 것이다. 일본 열도가 지난 23일 오후 발생한 ‘니가타 지진’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일본인들은 20여명 사망,2200여명 부상이라는 사상자 숫자보다 신칸센(新幹線) 탈선에 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고속열차가 개통 40년만에 처음 탈선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1명도 없었다. 지난 1995년 고베 지진 이후 설치한 강제 제동장치 덕분이라고 한다.KTX를 운행 중인 우리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방재훈의 PSAT특강] 김부식이 인종에 올린 표문

    이번에는 문학 문제를 다뤄본다. 알려졌다시피 언어논리영역의 출제범위가 넓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문학’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문제로 내기에는 고대작품이 좋다. 분량도 적당하고 문맥 파악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현대 시·소설도 출제될 수 있다. 이 때 나올 수 있는 문제로는 등장인물의 심리파악, 작품의 분위기, 인물들 사이의 관계 등이다. 수험생들의 대비법은 ‘부담없이, 평소에, 틈틈이, 그러나 꾸준히’ 문학작품을 섭렵하는 것이다. 언어논리영역은 시험 직전 벼락치기로는 점수를 결코 얻을 수 없고 평소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야 한다. ●문제(외시 1차) 다음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왕에게 올린 글이다. 이 글에 드러나는 역사 의식과 편찬 배경을 바르게 묶은 것은? 우리 동방 삼국은 역사가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서책(書冊)에 기록해야 할 것이므로 늙은 신(臣)에게 명하여 편수케 하셨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함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성상 폐하께서 (중략) 말씀하시기를,“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오경(五經)ㆍ제자(諸子)의 책이라든지 진한(秦漢) 역대의 역사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 더구나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삼국이 정립(鼎立)하여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교통했기에 범엽(范曄)의 한서(後漢書)라든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史書)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싣지 않았다. 또 삼국의 고기(古記)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누락된 것이 많으므로 임금의 선악(善惡)이나 신하의 충사(忠邪), 나라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후세에 권계(勸戒)를 보이지 못한다. 마땅히 삼장(三長)의 재(才)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완성하고, 이를 만세에 물려주어 해와 별처럼 빛나게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중략) 한껏 정력을 다하여 겨우 책을 만들었으나 결국 보잘것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성상 폐하께옵서 이 엉성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녕되이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ㄱ. 역사책을 새롭게 편찬하는 일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ㄴ. 당시 사람들은 역사가 후세의 교훈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ㄷ. 삼국에 관한 역사 기록이 없었던 점이 (삼국사기)편찬의 직접적 동기였다. ㄹ. 지식인들이 중국사보다 자기 역사를 잘 모르는 것이 문제점으로 인식되었다. (1)ㄱ,ㄴ (2)ㄱ,ㄷ (3)ㄴ,ㄷ (4)ㄴ,ㄹ (5)ㄷ,ㄹ ●풀이 및 정답 ㄱ은 대표적인 오답형식으로 제시문에 진술 자체가 없다.PSAT의 언어논리는 직독직해가 가능해야 하므로 만일, 제시문을 모두 소화해 내지 못하면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다.ㄴ은 ‘임금의 선악(善惡)이나 신하의 충사(忠邪), 나라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후세에 권계(勸戒)를 보이지 못한다.’는 대목이 있다.‘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싣지 않았다. 또 삼국의 고기(古記)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누락된 것이 많다.’는 본문의 내용에 비춰볼 때 기록이 없었다기보다는 부실하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따라서 ㄷ은 아니다.‘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오경(五經)ㆍ제자(諸子)의 책이라든지 진한(秦漢) 역대의 역사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는 진술에 따라 ㄹ은 적합하다. 따라서 정답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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