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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고구려 성까지 만리장성으로 덮어씌워서야…”

    “고구려 성까지 만리장성으로 덮어씌워서야…”

    중국이 6000㎞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2만㎞에 이르는 삼만리장성으로 확대했다는 소식에 학계는 술렁이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7일 김운회 동양대 교수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김 교수는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역사의아침 펴냄), ‘대쥬신을 찾아서 1·2’(해냄 펴냄), ‘삼국지 바로 읽기’(삼인 펴냄) 등을 내면서 국수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고대사를 연구해 왔다는 평을 받아 왔다. ●“한반도까지 중국땅이라 말하려 무리수” →먼저 만리장성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가. -대개 진시황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명나라 때인 15~16세기에 대대적으로 고쳐진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의 건국이념이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의 부흥을 이룩한다.”(驅逐胡虜恢復中華)였다. 한나라 이후 북방유목민의 지배를 받다가 이제야 한족 정권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런 명나라가 만리장성에 손댔기 때문에 당연히 만리장성은 한족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네 땅이다. 일부는 기존 만리장성을 고치고, 여기다 험한 산세나 암벽을 이용해 장책(長柵), 변장(邊牆), 변문(邊門)을 추가로 만들었다. 이는 기존 만리장성에다 현재의 랴오닝성(遼寧省)을 연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족은 만리장성 이남과 요동반도 정도만 자기네 땅이라고 본 것이다. →만리장성이 삼만리장성으로 불어나는 과정은 어떠했나. -2000년대 중반까지 만리장성의 총길이가 6000㎞이고 동쪽 끝은 베이징 인근 산해관(山海關)이라는 데 아무 이의가 없었다. 근거를 들라면 사기(史記)를 비롯해 수많은 자료가 있다. 그런데 중국은 2009년 랴오닝성 단둥지역, 그러니까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泊灼城)을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둔갑시켰다. 이 성은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648년 당 태종의 침입에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성쌓기 방식이나 출토유물이나 고구려식 우물 등으로 봐서도 분명히 고구려성이었다. 그런데 2004년부터 호산장성을 복구한답시고 고구려 유물을 훼손하고 고구려산성 위에다 중국식 만리장성을 덮어씌워 버렸다. 거기다 한족의 조상인 황제 동상까지 세웠다. 정말 웃기는 것은 중국은 이 성이 명나라 때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우기는데, 실제 성의 구조를 보면 각종 수비시설이 남쪽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여진족을 견제하려고 했다면 북쪽에 수비시설이 몰려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것은 요동반도를 넘어 만주, 압록강 일대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모두 자기네들 땅이라 말하고 싶어서다. ●“개라 부르더니… 중화민족이라 우겨” →우리 고대 사학계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사실 중국보다 우리 책임이 더 크다. 한족이 북방유목민을 분열시키기 위해 지어낸 주장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령 삼국사기를 보면 말갈족이 지금의 서울·경기지역에 거주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갈하면 무슨 미개한 북방 오랑캐 취급을 한다. 조선시대 소중화에서 벗어나질 못해서다. 우리 고대사는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유목민의 역사다. 서쪽으로는 전연과 북위, 동쪽으론 고구려와 백제, 신라까지 모두 이어진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싸움은 점점 어려워진다. →중국도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왜 이러는 건가. -만리장성의 강력한 상징성을 활용해 현재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번 되돌이켜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한족과 사이(四夷)를 구분한 뒤 물과 기름 같다는 둥, 절대 융합될 수 없다는 둥 해온 것은 그들 자신이다. 한족은 한국인을 아예 예맥(濊貊)이라 불렀다. 똥고양이다. 다른 민족들도 개, 돼지, 승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개, 돼지, 승냥이도 중화민족이라고 우긴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동북아재단, 북방사 연구자 위주 개편을” →대응방법이 있을까. -동북공정이라고 법석을 떨지만 사실 이 문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됐다. 당시 중국 중등 교과서를 보면 타이완, 한국, 필리핀을 회복해야 할 영토로 명시해 뒀다. 이제 비로소 그 실체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동북아역사재단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일본과의 문제가 독도 문제 정도라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 역사 자체를 말살하는 작업이다. 어느 것이 더 시급한가. 북방사 연구자 중심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여기다 중국의 역사전쟁은 한국뿐 아니라 주변 민족 모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과의 연합같은 것도 고려해 봐야 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천년고찰·매실의 고장 경남 양산

    천년고찰·매실의 고장 경남 양산

    울산과 부산, 두 광역시 중간에 있는 양산시는 경상남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위성도시의 역할을 하며 도민들에게 편리한 생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동시에 천혜의 자연경관을 고이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EBS 한국기행은 5~8일 매일 밤 9시 30분에 산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천년고찰과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 도시와 시골이 공존하는 경남 양산으로 떠난다. 5일엔 원동면 주민들이 품앗이로 하는 첫 매실 수확 풍경을 방영한다. 원동면 주민들에게 매실은 곱게 키운 자식이나 다름없다. 원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매실 재배지이며 그 역사는 백년을 자랑한다. 이렇게 역사 깊은 매실의 고장인 만큼 먹는 방법도 독특하다. 이른바 ‘검은 매실’로 불리는 약재 ‘오매’. 이는 약국이나 병원 하나 변변치 않던 시절 어머니들이 아픈 자식을 위해 약 대용으로 먹이던 것이었다. 6일에는 세상의 번뇌를 잊을 수 있는 곳, 통도사를 소개한다. 영축산 자락에 있는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1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합천의 해인사, 순천의 송광사와 더불어 국내 3대 사찰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천년고찰 통도사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 계단이 있어 이에 의지해 마음을 닦고자 찾아오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7일에는 낙동간 주변의 오래된 전통인 ‘가양진 용신제’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4개의 강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낙동강의 가야진 용신제다. 바쁜 농번기, 만사를 제쳐 놓고 한데 모여 낙동강 용왕님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양산 사람들에게 용신제를 이어 오는 자부심과 낙동강의 의미를 들어본다. 8일 방송에선 누구에게나 다정함, 그리움,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주는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머니의 품처럼 떠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아릿해 오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양산은 ‘고향의 봄’을 작사한 이원수 선생의 고향이자 ‘국민 테너’ 엄정행 선생의 고향이다. 엄정행 선생과 함께 내 고향의 넉넉하고 부드러운 품을 그리며 찾아간 그곳 양산은 그가 살았던 60년 전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야마다 피어나는 산야초를 이용해 효소를 만드는 마을 할머니들의 고향 이야기를 함께 듣고 울긋불긋하게 열매 대궐을 차린 산딸기까지 맛보며 옛 고향 추억을 더듬어 본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열린세상] 애완동물 무단방사 위험하다/방상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열린세상] 애완동물 무단방사 위험하다/방상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얼마 전 문화재청이 경주개 동경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겠다고 예고했다. 멸종위기에 처해져 자칫 우리의 후세들에게 전해주지 못할 뻔한 동경이를 이제부터 복원하고 국가의 문화재로 보전한다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고유의 토종견인 동경이는 삼국사기와 같은 옛 문헌에 자주 나오고 신라고분에서는 토우로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우리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동물을 가까이 두고 기르는 애완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애완동물은 기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사람에게 정서적인 안정감과 평안함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특수병원에서는 애완동물을 보조치료사 또는 호스피스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근래에는 자신의 벗으로서의 동물이란 의미로 애완동물보다는 반려동물이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할 정도이니 애완동물에 대한 사회적 대접과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애완동물이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1977년 일본의 후지TV가 미국너구리를 주인공으로 한 아동 애니메이션을 방송하였다. 이후 주인공이었던 미국너구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애완동물로 기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약 5만 마리의 미국너구리가 일본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몸집이 크고 식성이 좋은 미국너구리는 사육비용이 많이 들고, 성체로 성장한 개체의 분뇨를 가정에서 처리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가정에서의 사육을 포기하는 대신에 야생 생태계로 풀어 놓아주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전체 47개 현 중에서 42개 현의 야생 생태계에서 미국너구리가 정착하게 되었고, 월등한 등반 능력과 왕성한 식성으로 인하여 심각한 생태계 피해를 끼쳤다. 현재 일본 정부는 미국너구리를 제거하기 위한 퇴치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외래 애완용 동물인 늑대거북 또한 일본에서 골칫거리이다. 늑대거북은 주로 서반구가 원산지로서 보통의 거북보다 목을 순간적으로 길게 빼어 먹이를 낚아채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따라서 사육자가 잠시 부주의할 경우에는 순식간에 사육자의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또한 성체로 다 자라면 특유의 체취를 발산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사육하기가 어려워져서 야생생태계로 풀어 놓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늑대거북은 다른 거북의 능력을 능가하여 수중생태계의 강자로 토종어류와 곤충들을 잡아먹는 등의 생태적·경제적 피해를 끼치고 있어 일본정부가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는 애완동물이다. 이러한 일부의 애완동물에 의한 피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북한산과 제주도에는 주인이 버린 애완견들이 몇 세대를 거치면서 들개로 야생화하여, 산 주변에서 서식하며 주민이나 등산객을 위협하고 가축을 잡아먹는 등의 피해를 끼치고 있다. 또한 1980년대에 애완동물로 수입한 붉은귀거북의 경우에도 이를 기르던 사람들이 야생생태계로 무단 방사하면서 국내 수중생태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우리나라의 많은 호소와 하천에서 토종생태계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이렇듯 일부의 애완동물은 우리에게 큰 피해를 끼친다. 그러나 애완동물로 인한 피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애완동물에게 있기보다는 무단으로 야생생태계로 풀어 놓아준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애완동물은 야생동물과 달리 애초부터 인간의 적정한 관리를 필요로 하도록 길들여진 생명체이고 사육자는 이들 애완동물의 생애주기 전반에 대한 관리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기르던 애완동물을 더 이상 기르지 못할 경우에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야생생태계로 무단 방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단 방사된 애완동물로 인하여 토종생태계가 심각한 교란을 일으킬 수 있고 더불어 우리나라의 토종 야생동물의 보전에 있어서도 큰 위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애완동물의 복지를 감안할 때에도 거친 야생생태계에서 생존하기를 바라며 무단 방사하는 것은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 ‘경주개 동경이’ 천연기념물 된다

    ‘경주개 동경이’ 천연기념물 된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토종개인 ‘경주개 동경이’(東京狗)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4일 밝혔다. ‘경주개 동경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경잡기(東京雜記) 등 옛 문헌을 통해 경주에서 널리 사육됐던 개로 알려졌고, 신라 고분에서 토우(土偶)로 발굴되는 등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 현재 경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경주개 동경이는 단미(短尾·꼬리가 짧음), 무미(無尾·꼬리가 없음)를 특징으로 하는 문헌 기록과 일치하고,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한국경주개동경이보존협회는 품종 고정화 작업을 거친 동경이 30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으며, 자체 사양관리 규정에 따라 체계적인 이력·질병·번식·혈통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한국 토종개는 ‘진도의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와 ‘경산의 삽살개’(천연기념물 제368호)가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통일신라때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있었다?

    통일신라때 제사용 우물서 ‘인신공양’ 있었다?

    신라와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경북 경주는 땅만 파면 골동품이 나온다고 했다. 1998~2000년 경주국립박물관 부지 내에 건물 간 지하 연결통로를 짓기 위해 땅을 파 들어갈 때도 그랬다. 갑자기 지하에서 돌무덤이 나온 것이다. 돌무덤을 위로부터 발굴해 들어가기 시작하자 우물이 나왔다. 그렇게 8~9세기에 폐쇄된 우물 2개를 발굴했다. ‘우물 1’에서는 놀랍게도 작은 인골이 나왔다. 경주박물관 학예사들은 잔뜩 긴장했다. 키 130㎝에 다소 기골이 큰 7~10세의 소년(녀)으로 추정되는 인골이었다. 이 우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 소년(녀)은 우물에서 사고사를 당한 것일까? 혹 인신공양은 아니었을까? 만약 인신공양이었다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오는 5월 6일까지 8~9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우물과 그 우물 속의 유물을 통해 궁금증을 풀어준다. ‘타임캡슐을 열다-색다른 고대 탐험’ 특별전이다. 통일신라인들의 속살거리는 이야기를 듣는다고나 할까. ‘우물1’에서는10살로 추정되는 소년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 등 동물뼈와 물고기뼈 등 2200여점이 출토됐다. 동물 뼈로는 소와 말, 사슴, 멧돼지, 토끼, 두더지, 쥐 등의 포유류뿐만 아니라 오리나 까마귀, 꿩, 매 등의 뼈도 출토됐다. 물고기 뼈로는 상어, 잉어, 복어, 대구, 숭어 등이 나왔다. 이들 동물과 물고기 뼈를 통해 통일신라인들이 무엇을 키우고, 먹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두더지와 쥐, 개구리, 뱀과 같은 뼈도 나왔지만, 이것은 애초 우물에 넣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간 ‘이물질’로 추정됐다. 주둥이가 깨진 토기와 복숭아씨도 다량으로 나왔다. 우물 1, 2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현희 국박 학예연구사는 “우물 주변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물, 물고기 뼈 등은 제물로 보이고, 7~10세 추정의 소년(녀)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우물의 위치가 경주 월성(통일신라시대 왕궁으로 추정)의 남쪽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소년(녀)이 사고사를 당했다면 왕족이거나 귀족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소년(녀)이 사고사를 당했더라도 우물 속에 둔 채 폐쇄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소년(녀)을 즉시 꺼내 매장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년(녀)은 제의적 희생물일 가능성이 크고, 신분도 하층민일 것으로 추정된다. 송의정 국박 고고역사부장은 “신라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만들 때 아이를 공양했다는 설화를 보건대 당시에 인신공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학예사는 “이들 우물은 식수를 제공하던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특수한 성격의 우물”이라고 했다. 이런 유추는 ‘우물 2’에서 ‘용왕’(龍王)이 새겨진 목간이 나오면서 힘을 얻었다. 우물 앞에서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제사용 특수 우물의 존재는 경주 월성 서남쪽에 있는 전 인용사지 유적의 우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우물에서도 다량의 동물뼈와 깨진 토기, 복숭아씨가 출토됐다. 깨진 토기와 복숭아씨는 옛날부터 나쁜 것을 물리치는 용도로 사용됐다. 따라서 8~9세기 극심한 기근이 자주 발생하고, 역병도 자주 돌았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사료에 비춰볼 때 왕실 차원에서 대규모 우물 제사가 이뤄졌을 것이란 얘기다. ‘타임캡슐~’ 특별전으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남 창녕 말흘리에서 발굴된 ‘손잡이 향로’다. 2003년 창녕군은 도로공사를 하던 중 고려·조선시대 건물터를 발견하자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을 요청했다. 발굴단은 놀랍게도 신라시대 때 땅에 묻은 쇠솥(퇴장유구 쇠솥)을 발견했다. 쇠솥에서는 금장을 두른 손잡이 향로 등 500여점의 금속공예품이 나왔다. 송 고고역사부장은 “손잡이 향로는 불교 공양도구로 성덕대왕 신종의 조각이나 석굴암 십대제자상에서 주로 확인됐지만, 실물이 없었다.”면서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로 확인된 유물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의 손잡이 향로가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흘리 유적 덕분에 한반도에서 기술을 전수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중국산으로 추정되던 삼성미술관 리움의 손잡이 향로도 한국유적으로 국적이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 선덕여왕과 김춘추

    [선택! 역사를 갈랐다] (1) 선덕여왕과 김춘추

    ■ 여왕의 즉위 632년 정월,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딸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선덕여왕이다. 덕만이 왕위에 오른 그 자체가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즉위에는 ‘남자 성골이 없어서’라는 명분이 내세워졌다. 그러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반드시 성골만 가능했던 것일까? 성골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골인 김춘추는 진평왕이 죽었을 당시에는 과연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었던 것일까? 이점을 좀 더 따져보는 것이 선덕여왕의 즉위가 어느 정도 정치적 사건인지를 가늠하기 쉬울 것이다. 먼저 김춘추의 가계를 살펴보자.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바로 진지왕이었다. 진지왕은 정복군주로 유명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 동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의 뒤를 둘째 사륜이 잇게 된 것이다. 물론 동륜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동생에게 왕위가 이어진 것이 그리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진지왕의 즉위 이후에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진지왕은 정사가 문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그 뒤를 이어 동륜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평왕이다. 혹 동륜계와 사륜계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정황으로 볼 때에는 진지왕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이 직접적인 요인인 듯하다. 오히려 진평왕은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둘째딸 천명과 용춘을 결혼시켰다. 용춘과 천명부인의 아들이 바로 김춘추였다. 즉 김춘추는 할아버지가 진지왕이었고, 외할아버지가 진평왕이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혈통을 갖춘 셈이다. 가계 혈통만 본다면 김춘추는 진평왕이 죽은 후 첫 번째 남성 왕위계승권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왜 기록에는 당시 남자 성골이 없다고 하였을까? 김춘추의 혈통이 어디가 어때서 성골이 될 수 없었을까? 이 점에서 아마도 성골이란 ‘진종(眞種)설화’로 대표되듯이 곧 진평왕의 직계에만 해당하는 신성한 가계(家系)의식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진평왕이 재위 내내 추진한 왕권 신성화의 최종 결과였다. 이렇듯 성골은 사실상 관념의 문제이고, 왕위계승은 현실 정치의 문제이다. 표방된 관념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현실 정치를 읽어내지 못하면 선덕왕에서 김춘추의 즉위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 똑똑한 여왕 여기서 ‘삼국사기’ 등에서 전해지는 선덕여왕의 또 다른 표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덕여왕 하면 ‘지기삼사’(知幾三事)의 고사가 우선 떠오르게 된다. 즉, 여왕이 얼마나 지혜로운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3가지 이야기이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간단하게 언급하자면, 당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모란에 향기가 없음을 알아맞혔다는 이야기, 그리고 연못에 두꺼비가 모인 것을 보고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해 있음을 알고 이를 격퇴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죽을 때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면서 낭산에 능을 쓰라고 하였는데, 후일 낭산 아래 사천왕사가 창건되면서 결국 선덕왕릉이 도리천에 위치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과장된 것으로 볼 필요는 없겠다. 실제 선덕여왕은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만, 유독 선덕여왕의 경우에만 이런 신이한 능력이 강조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비록 여자이지만, 이렇게 현명한 인물이니 왕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뒤집어 보면 여성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도 비정상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여왕의 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현실 정치판도로 다시 눈을 돌려야겠다. 그 정치판도의 핵심은 역시 김춘추였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춘추는 그 혈통이나 왕실 내의 위치로 볼 때 유일한, 그리고 가장 유력한 남자 왕위계승권자였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곧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을 폐위시킨 세력과 연결될 수 있음은 쉬이 짐작된다.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이지만 아직 반대세력을 제압할 힘이 없는 김춘추, 그리고 김춘추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다른 대안이 없는 반대 세력, 이 양자가 당장 충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협으로 선택한 것이 여왕의 즉위라고 보인다. 즉, 선덕여왕은 당시 정치판도에 의해 선택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선덕여왕이 누구인가? 앞서 세 고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현명한 품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비록 왕위에 오를 때에는 선택당하는 입장이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으로서 자신의 길을 독자적으로 걸어갔다. 따지고 보면 ‘지기삼사’라는 이야기도 여왕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선덕여왕 자신의 기획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상징화하고 이미지화할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선덕여왕은 불교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유명한 황룡사 9층 탑도 선덕왕의 작품이다. 어쩌면 서라벌 도성을 압도하는 위용으로 서 있는 9층탑에 자신의 권위를 동시에 담고자 했을 것이다. ‘하늘의 뜻’, 즉 천문을 관측하는 첨성대를 세운 의도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물론 실제 권력의 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부왕인 진평왕 아래에서 왕이 되기 위한 수업도 충분히 받았다. 그래서 부왕과 마찬가지로 같은 왕실인 김춘추의 세력을 키워주면서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그리고 가야계 세력인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을 자신이 직접 승인함으로써 김춘추의 든든한 우익을 만들어 준 바 있다. 실제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덕만이 여왕으로 즉위하는 데 든든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 김춘추의 새로운 선택 하지만, 선덕여왕 재위기간 내내 여왕으로서의 정치적 한계는 여전하였다. 상징과 이미지를 통한 권위만으로는 현실 권력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모든 권력은 현실 정치의 지향이 구체적일 때 힘을 얻기 마련이다. 반대세력들은 선덕 이후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김춘추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불안해진 반대 세력이 역전을 기도하였으니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이다.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아직 왕위에 오르기에는 힘에 부쳤다. 다시 ‘성골’이라는 명분으로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는 좀 더 시간을 벌려는 김춘추의 의도로 보인다. 대신 김춘추는 선덕여왕과는 다른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성’ 관념이 아닌 현실 제도 시스템을 통한 왕권 강화였다. 즉, 새롭게 유교 정치이념을 내세워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운용을 시도한 것이다. 그의 이런 면모는 아들들에게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이라는 유교적인 이름을 붙인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체제를 향한 개혁의 길이 곧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간파하였다. 권력은 힘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 모순을 바로잡을 올바른 지향을 제시할 때 비로소 정당성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진덕여왕 2년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신라의 숙원이었던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나당군사동맹을 실현하였다. 이때 당태종은 김춘추의 늠름하고 잘생긴 풍모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당태종은 몇 년 전에 구원을 청하는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다스리니 이웃나라가 얕보는 거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다. 그런 당태종이 김춘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김춘추는 그런 당태종에게 자신이 신라의 왕다운 인물임을 은연중에 과시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상상도 해봄직하다. 귀국한 김춘추는 곧바로 중화(中華)정책을 시도한다. 관복을 당의 의관제로 바꾸고, 독자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기타 여러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유교에 기반한 정치체제 운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내정 개혁은 당의 신뢰를 얻는 데에도 기여하였겠지만, 무엇보다 신라사회의 기존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데 유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덕여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것도 덥석 왕위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여러 신하가 김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는 유교적 방식으로 새로운 왕자(王者)로서의 풍모를 과시하며 왕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신라 사회를 개혁하는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그 결과 우리 역사 최초로 천하관과 안민(安民)의식, 관료제 등으로 정비되고 유교 통치 이념이 구현된 신라 중대(中代)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임기환 교수(서울교육대학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서동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서동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국경과 신분을 뛰어넘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동설화’다. 그런데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국민 설화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15일 오후 10시부터 50분간 KBS 1TV에서 방영되는 역사스페셜은 서동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현장을 집중 조명한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을 위한 7년간의 해체 작업 중 국보급 유물들이 탑의 중심부에서 발견됐다. 백제 문화의 화려함을 보여 주는 걸작 중 학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단연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이 적힌 금제사리봉안기였다. 사리봉안기의 해석으로 서동이 백제의 왕이 되고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지었다는 ‘서동설화’의 사실 여부에 대해 학계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서동설화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존의 통설인 서동 ‘무왕설’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됐다. 풀리지 않는 서동설화의 미스터리, 진짜 서동은 누구일까. 백제 역사상 신라와 가장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무왕. 계속되는 전쟁 중에 신라 공주와의 혼인과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 건축이 가능했을까. 백제사를 연구하는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는 무강왕(무왕)이 백제 부흥을 일으킨 ‘무령왕’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무강왕의 ‘康’(편안 강)은 ‘’(편안할 령)과 뜻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의 기해(己亥)년 명문은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도 해당된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이 신라 고위관료의 딸과 혼인한 기록이 등장한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은 동성왕.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모대(牟大), 모도(牟都)로 서동(薯童)의 우리말 음인 ‘맛동’과 흡사해 또 다른 서동으로 거론된다. 서동설화의 고장 익산. 백제의 익산천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무왕에게 익산은 국가경영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최근 국립김해박물관의 박중환 학예실장은 웅진 시기에 이미 동성왕의 익산 경영이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익산 출토의 파문수막새가 공주 공산성의 파문수막새와 거의 같은 양식이라는 것. 제작진은 동성왕과 익산이 어떤 인연이 있는지 조명해 본다.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 연대는 완공시기일 뿐 정확한 건립 시작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양한 백제의 유적들이 발굴되는 가운데 7세기 무왕대에 맞춘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 백제사 연구의 현장을 조명한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왜 요하공정에 침묵하나…진짜 고구려 써내겠다”

    “왜 요하공정에 침묵하나…진짜 고구려 써내겠다”

    그는 자신이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가장 글을 빨리 쓰고 영어를 잘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3월 ‘고구려’(새움 펴냄) 1, 2권, 4월에 3권, 이달에 4권을 내놓은 김진명(53) 작가의 이야기다. 총 13권으로 예정된 ‘고구려’는 앞으로 2년 안에 완간될 예정이다. “힘들다. 나는 ‘고구려’를 정말 쓰기 싫었다. 13권이나 쓰고 나면 혼백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을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고구려 역사는 아무도 써 놓지 않아 내가 쓰는 것이 유일하다. 내 소설을 읽고 사람들이 그 시대를 이해할 것이며 이게 역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굉장히 정확하게 써야 한다.” 9일 만난 작가는 부담감이 커 보였다. 고구려는 700년이나 유지된 나라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거의 유일한 자료인데다 그 내용도 합쳐봐야 한 페이지 분량이 될까 말까 하단다. 고구려를 역사 소설로 쓰기로 한 것은 소년 시절부터 가진 안타까움에 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는 중국의 역사왜곡 때문이었다.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우리 학계나 문화계는 대응을 못하고 있다. 대가들은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나 잔뜩 번역하고 있다. 과거에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뺏어가려 했다면 요즘은 더 나아가 ‘요하공정’으로 우리를 중국인의 자손으로 만들어 버리려 한다.” 절박한 마음에 ‘고구려’를 집필하게 됐다는 작가가 언급한 중국의 요하공정이란 흔히 ‘요하문명론’으로 표현된다. 중국이 황하 문명과는 무관한, 단군조선의 역사인 요하문명을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는 의도를 말한다. 김 작가의 데뷔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500만부 이상 팔린 초대박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무궁화’의 마지막 3권을 열흘 만에 완성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남북이 힘을 합쳐 핵폭탄을 일본에 쏘는 등의 내용 때문에 민족주의자, 국수주의자란 말도 듣게 됐다. “난 습작 시기도 없었고 누구의 문하생도 아니었으며 어떤 기존의 채널을 통하지 않고 소설을 썼다. 그런데 나온 것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다. 글공부하는 좁은 틈에서 글로 잘하고 싶은데 되지 않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움이 있을 것이다. 친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박정희를 죽였다는 주장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같은 소설로 일본이 명성황후를 능욕했다고 하니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안티 김진명’이 된다. 내 소설은 역사를 일깨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아마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면 많은 사람이 내 사상에 동조했을 것이다.” 쉽게 잘 읽히고 재미를 표방하는 문체로 ‘문단’의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작가생활 초기에 한국 소설 안 읽는다고 한 게 그네들 가슴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다. 처음 데뷔해서는 문단 식구들과 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쓰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 문제다. 우리 경제와 역사를 쓰는 데 복잡하고 어렵게 쓸 이유가 뭐냐. 많은 사람이 쉽고 재밌게 읽고 머리에 꽝 오는 게 좋은 방식이다.”라고 생각을 밝혔다. 소설 ‘고구려’는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여섯 왕의 이야기를 다룬 ‘왕의 연대기’다. 요즘 인기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 ‘고구려’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출판사가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드라마 제작지원에 참여한 탓이다. 출판사 측은 드라마 간접광고가 영세한 출판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었지만, ‘드라마 속 출판사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출판인으로서의 자존심’ 등의 이유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고구려’ 1~3권은 이미 50만권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 작가 김진명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는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고구려 역사에 더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을 잘게(작고 좀스럽게) 만드는 사회다. 사회정의가 안 서 있고 남자의 피를 끓게 하는 거대한 주제가 없다. 다 연애에나 빠지고 엉망이다.” 당신은 이제 ‘무궁화 김진명’이 아니라 ‘고구려 김진명’이라 불릴 것이란 독자의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는 작가는 서둘러 충북 제천의 작업실로 향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공산성 출토 황칠갑옷, 백제 아닌 中장수의 것”

    “공산성 출토 황칠갑옷, 백제 아닌 中장수의 것”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백제의 갑옷 ‘명광개’(明光鎧)가 백제 장수가 아닌 당나라 장수가 입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17일 “갑옷 비늘에 중국 당나라 연호가 보이고,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 이름이 확인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 장수가 사용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명광개’는 황금빛으로 적의 눈을 부시게 했다는 전설적인 백제의 가죽 갑옷으로, 지난 12일부터 충남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성안 마을 유적에서 고급스럽고 화려한 옻칠이 양호한 상태로 발굴됐었다. 저수시설 바닥이 인접한 곳에서 출토된 가죽 갑옷은 검게 옻칠이 되어 있으며 붉은색 글씨가 쓰여 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이란 글씨를 통해 645년(당 태종 정관 19년)이란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 밖에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등의 글자가 확인됐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갑옷 비늘의 ‘정관’(貞觀)은 중국 연호로, 백제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6~7세기 백제에서는 연호 자체를 사용한 일이 없다.”며 “갑옷에서 ‘李○銀’과 같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인명도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당나라군이 공산성 출토 갑옷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했다. 갑옷에 새겨진 ‘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은 645년 4월 21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지금의 랴오닝성 심양 부근에 있는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인 1만명을 생포했다. 이때 당 태종의 군대가 확보한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같은 해 6월 안시성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고구려군 15만명의 병력을 격파하고 나서 확보한 전리품 가운데는 ‘명광개’ 1만벌이 있었다. 따라서 이 교수는 고구려군도 명광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나라군이 개모성을 함락하고서 확보한 전리품 가운데 명광개가 포함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책부원구’에 따르면 당 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황칠을 채취해 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 황칠로 만든 명광개를 착용한 당나라 장군이 백제 침공에 나섰다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주둔한 공산성에 어떤 연유로 명광개를 떨어뜨리고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주대학교 박물관의 이현숙 학예연구사는 “명광개 특유의 빛나는 단추 모양 장식이 없어 명광개는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며 “백제의 뛰어난 공예기술로 보아 백제 장수의 갑옷으로 추정될 뿐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백제시대 황칠갑옷 첫 출토

    백제시대 황칠갑옷 첫 출토

    충남 공주시 공산성 내 성안마을에서 645년에 제작됐다고 명시된 옷칠한 가죽 갑옷 ‘명광개’가 출토됐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백제시대의 황칠 갑옷이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주대박물관은 공주 공산성 안 마을에 대한 올해 제4차 발굴조사 결과 저수시설 마무리 조사에서 서기 645년을 가리키는 명문 ‘정관 19년’(貞觀十九年)이라는 글자가 적힌 찰갑(비늘 모양 갑옷) 1령을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수습했다고 12일 밝혔다. 갑옷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정관십구년사월이십일일)’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이○은○)’ 등의 붉은색 글씨가 적혀 있다. (○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다.) 조사단은 특히 이 중에서도 ‘○○행정관십구년사월이십일일’이라는 기록을 통해 당 태종 정관 19년, 즉 645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전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이며 645년은 백제 의자왕 재위 5년째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갑옷은 옷칠이 돼 있다는 점에서 삼국사기 등의 옛 문헌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갑옷인 ‘명광개’임이 확실하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명광개란 황칠(黃漆·옷칠)을 해 그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했다는 갑옷이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은 “이는 우리 고대사회에서 확인한 가죽 갑옷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 형태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의 갑옷”이라면서 “특히 갑옷의 제작 및 사용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645년(정관 19년)이라는 기록은 함께 출토된 화살촉과 더불어 백제 멸망기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고 평가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군위 ‘삼국유사 단지’ 유럽 벤치마킹

    군위 ‘삼국유사 단지’ 유럽 벤치마킹

    경북 군위군이 ‘삼국유사 가온누리(중심 세상)’ 조성 사업의 본격적인 추진을 앞두고 유럽 선진지 견학을 실시했다. 군위군은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장욱 군수를 단장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유럽 선진지를 견학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견학에서는 이들 지역 주요 관광지의 조성·운영과 관련한 성공 및 실패 사례 등에 대한 견학과 자료 수집이 이뤄졌다. 특히 군은 견학에서 노르웨이 오슬로의 비겔란 조각공원(32만여㎡)과 덴마크 코펜하겐의 티볼리정원을 중점 벤치마킹했다.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 190여점이 전시돼 있는 비겔란 조각공원은 연간 국내외 관광객 2000만명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세계 최초의 현대식 공원인 티볼리정원은 롤러코스터, 번지드롭, 매직 카펫 등의 각종 놀이기구와 보트 등의 다양한 위락 시설을 갖췄다. 군은 이달 말쯤 이번 견학 내용을 반영한 ‘삼국유사 가온누리’ 사업 중간용역 보고회를 가질 계획이다. ‘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 사업은 오는 2016년까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인 군위 인각사 인근 부지 93만㎡에 국비 등 총 1374억원을 들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화, 문학, 설화, 놀이, 장소 등 다양한 콘텐츠와 문화산업을 접목한 문화관광단지로 조성하는 것. 개발 컨셉트는 ▲삼국유사의 영혼을 담은 ‘으뜸누리’ ▲삼국유사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얼쑤누리’ ▲삼국유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아름누리’ 등 3개의 공간으로 잡았다. 장욱 군수는 “이번 해외 선진지 견학은 국내외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관광 단지를 조성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면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가진 야사(野史)인 삼국유사를 통해 한국 신화를 재발견하고 문화·관광산업과 접목해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대표적 문화 관광단지로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14개 섬 유배객의 궤적

    중국 당대 선승 임제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에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등장한다. 언제 어디 있든지 내가 주인이고,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라는 이 일갈은 불교에서 개개인의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로 회자된다. 삶에서 끊임없이 부닥치게 되는 시련과 고통을 꿋꿋한 마음가짐으로 이기고 넘어서자는 경계. 이젠 일반인도 자주 새기는 경구 중 하나이다. ‘험한 곳일수록 나를 챙겨 진여(眞如)를 보라’는 이 교훈은 피할 수 없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더 빛이 난다.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들과, 유배지를 새로운 삶의 반전 기회로 삼은 사람들의 대비는 그 마음가짐의 편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이종묵·안대회 지음, 북스코프 펴냄)는 그 수처작주의 마음가짐을 유배지에 연결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이란 부제를 붙였듯이 거제도, 교동도, 진도, 제주도, 흑산도, 남해도를 비롯한 14개의 유배 섬에 서린 유배객들의 궤적을 생생하게 들춰낸다. 유배라 함은 주로 권력싸움의 패배에서 맞게 되는 죽음과도 같은 격리의 극형이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전할 만큼 이 땅에서도 그 유배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정쟁의 회오리가 거셌던 조선시대엔 유배자도 늘어나 15∼16세기 무렵엔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했다는 조사결과가 전한다. 형벌의 정도도 가혹해져 처음엔 유배자를 한양과 가까운 곳으로 보냈다가 점차 살기조차 힘든 절해고도의 궁벽한 곳으로 격리시켜 갔다. 제목의 위리안치 역시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그 안에 유배객을 유폐시킨 형벌이다. 책은 그 위리안치에 감금당한 유배자의 삶의 차이를 들춰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권력 다툼의 와중에 신하들에게 쫓겨난 두 왕 연산군과 광해군이 한탄하며 살다가 숨을 거둔 교동도는 절망과 한의 유배지다. 정쟁의 피바람속에 이건명이 두 아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던 나로도,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적국 땅으로 유배돼 최후를 맞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의 대마도 역시 비운과 한의 섬. 그런가 하면 유배기간 ‘현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흑산도며 70세의 나이에 유배돼 ‘백령도지’를 낳은 이대기의 백령도, 유배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사씨남정기’를 남긴 김만중의 남해는 기회와 진여 찾기의 땅으로 부각된다. 유배객이 아니었다면 이름조차 생소했을 절해고도. 그곳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냈던 이들의 흔적이 그저 가벼운 이야기 거리만은 아닌 듯싶다. 1만 8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 처음 풀어낸 이생강 명인

    [김문이 만난사람]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 처음 풀어낸 이생강 명인

    조용히 눈을 감는다. 춤의 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하던 가슴을 후벼 판다. 전신을 휘감아 돈다. 귀신을 일으키고 거친 바다를 잠재운다. 하여 신적(神笛)이다. 신라시대 설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한 대나무가 있었다.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가 됐다. 이때 용이 나타났다.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신기한 대나무는 곧 피리로 만들어졌다. 소리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흩어졌던 민심은 이 소리를 듣고 하나가 되고, 다들 안정이 됐다. 피리는 국보가 됐고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악지에 ‘악기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바람과 파도가 잔다.’는 기록이 남게 된 배경이다. 이후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笒), 단소, 퉁소 등의 악기로 무궁하게 이어졌다. 세월을 뛰어넘는다. 조선 후기 진도의 세습무 출신 박종기(1879~1939) 명인이 대금산조를 창시했다. 이때부터 무속음악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우리의 전통춤 무대에서 90% 이상 배경음악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자리잡았다. 원래 대금의 종류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다.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이나 양반들의 풍류음악을 연주하려고 만든 악기로 다른 악기와 합주할 때 적합하다. 관이 길게 돼 있는 것도 다른 악기와의 음정을 고려한 이유이다. 그런데 정악대금은 취구(吹口)가 작고, 손가락을 짚는 지공이 넓어서 다루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호흡 또한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산조대금과 같은 꺾기나 깊은 농음(音), 다루치기(순간적인 지공의 개방을 통해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하는 기술)가 어렵다. 반면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가락이 많아 손동작을 원활하게 하려고 정악대금보다 짧게 만들어져 손 움직임을 편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정악대금으로 산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박종기 명인은 당시 산조를 연주할 때 대금의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악대금으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대금산조 이생강(75·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명인은 박종기 이후 최초로 정악대금으로 산조 한바탕을 최근에 풀어내고 ‘이생강 원형 대금산조’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냈다. 나이도 나이지만 대금인생 70년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을 던지며 만들어냈다고 했다. 우리 국악사에 큰 획을 긋는 일임이 분명하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이 명인을 만났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고등학생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 “너무 (대금을) 흔들면 안 돼.” “네.” “호흡을 길게” “…” 제주도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연습이 끝나자 이 명인은 괄괄한 목소리에다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가며 거침없이 말을 이어간다. “강원 신철원에서 제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 다시 물었다. “우리 아들(이광훈)이 제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중·고 학생들이지요.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철원에 있는 초등학생 700여명에게 단소를 가르쳐 주고 있지요. 학교에서 우리 국악을 하면 아름다운 교육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을까. 이 명인은 지난해 강원 정동진에서 열린 전국 초등학교 교장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대나무의 소리 하나로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더니 감동을 받은 일부 교장 선생의 뜻에 따라 시골 학교에서 조금씩 국악 붐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소로 했지요. 원하는 학교에는 제가 단소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대금으로 교체해 줄 때가 됐지요. 자금조달은 어떻게 하냐고요. 제가 공연을 하잖아요. 그걸로 담양에서 대나무를 사고 아는 사람한테 찾아가 수공비만 받고 싸게 대금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육용으로 만든 180여 가지 CD와 DVD 등도 보내주고 있지요. 아들은 제주에서 가르치고 저는 틈이 나는 대로 강원 지역에 가서 지도를 해줍니다. 요즘에는 유아용 ‘병아리 단소’도 만들어 어릴 적부터 국악과 친해지도록 권장하고 있지요. 어린애들이 단소를 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명인은 신철원과 제주에서 시작된 단소 불기 운동이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만날 때 멋진 공연을 할 것이라며 웃는다. 잠시 얘기를 멈추는 사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음반을 낸 원형(原形) 대금산조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 국악에서 원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살아 있을 때 원형 대금산조를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1937년생입니다. 일흔이 넘었고 대나무 소리를 낸 지도 70년이 됐습니다. 살아 있을 때 남겨둬야 합니다. 원형 대금산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 스승(한주환)의 스승(박종기)이 했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그걸 음반으로 제작했지요. 그래야 후배들이나 국악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나무 소리인생 70년을 맞아 정악대금으로 풀어낸 ‘원형 대금산조’ 음반에는 전체 63분 23초 길이에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시나위’ ‘자진모리’를 순서대로 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정악(正樂)은 ‘인쇄체’요, 산조(散調)는 ‘필기체’라는 것. 손가락을 잘 떼서 매끄럽게만 불면 되는 정악대금에 비해 산조대금은 개성 있는 꼴바꿈이 가능하며 선율이 다채롭고 인간 세계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고 덧붙인다. 국악계의 한 평론가는 이번 음반을 낸 것과 관련해 “박종기의 탁월한 예술성을 한주환이 극복하며 대금산조의 중시조로 등극했듯이 한주환의 천재성을 극복한 유일한 재비가 이생강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라고 평했다. 이 명인은 반주악기로만 사용돼 온 대금으로 첫 독주를 시도했던 일화를 공개했다. “1960년 4·19 직후 에어프랑스 비행기가 서울에 왔습니다. 거기에 한국민속예술단 소속 무용수와 악사 등 33명이 타고 프랑스 파리에 갔지요. 춘향전을 무용극한 내용으로 공연을 하는데 주인공 안나영씨가 급히 맹장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대타로 제가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대금을 들고 무대에 섰지요. 아이러니하게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민속악기 독주회를 처음 갖게 됐습니다. 우리 민속악기는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참가공연을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아 50여개국 순회공연을 갖게 된다. 그의 대금에 대한 사랑과 의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가 낸 음반의 종류만 해도 500여 가지. ‘동백아가씨’ ‘목포의 눈물’ 등은 물론이고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웬만한 노래는 죄다 대금으로 풀어냈다. 얼마 전에는 한국 전통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을 한꺼번에 내놔 국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산조춤, 화관무, 부채춤, 살풀이, 승무, 농악 등이 총망라된 우리 전통 무용음악의 100년사를 담은 ‘백과사전’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단지 대나무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일진대 청아하고 신기에 가까운 뻐꾸기 소리 등을 마구 뱉어내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을 감게 만든다. ‘이생강이 아니면 과연 누가 할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앞으로 태교, 명상, 추억, 회상 음악 쪽에 방향을 맞춰 꾸준히 일상으로 파고드는 작업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아리랑’을 현대감각에 맞게 작곡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악의 원형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 명인은 다섯 살 때부터 소금을 배웠다. 이후 11세 되던 1947년, 스승 한주환을 만나면서 대금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6·25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란 온 당대 국악의 대가들과 자주 접한 것도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욕심이 커서 어떤 때는 하루 동안 열심히 뛰어 대가들에게 찾아가 ‘한수, 한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일취월장,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양의 7음계를 우리 5음계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다. ‘대니 보이’(Danny Boy),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등의 팝송과 재즈를 넘나들며 대금의 음역을 계속 넓혀 나갔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는 악보도 없이 ‘눈물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 우리의 전통가요까지 자유자재로 불 수 있게 됐다. 아버지에게 단소와 피리를 배우는 것을 시작해 대금의 한주환, 퉁소의 전추산, 피리의 오진석·임동석, 태평소시나위의 김문일 등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서 스스로 ‘이생강류’라는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전통과 현대를 크로스오버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온 명인의 열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이생강 명인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후 부산에 정착해 살았다. 다섯 살때 아버지에게 단소를 배웠고 이후 이덕희, 지영희, 전추산, 오진석, 방태진, 한주환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피리, 단소, 퉁소, 소금, 태평소, 대금 등을 익혔다. 1959년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대금반주을 했으며 196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세계민속예술제 참가공연 때 처음으로 대금독주를 했다. 1977년 국내에서 첫 대금산조 개인 발표회를 가졌으며 이때 원형 대금산조를 처음 연주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등 크고 작은 무대에서 20여 차례 개인발표회를 가지며 독특한 ‘이생강류’의 대금음악을 만들어오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폐회식 때 대금독주로 주목을 받았고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2007년 6월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을 제작한 데 이어 지난달 최초로 정악대금으로 ‘원형 대금산조’를 풀어낸 음반을 냈다. 현재 죽향대금산조원형보존회를 운영하면서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전주 대사습대회 장원(1978), 신라문화재 대통령상(1984년), KBS국악대상(1984년), 서울시 자랑스러운 시민상(1994), 대한민국 국민상(1997), 한국국악대상(2002년) 등이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8)평창 약수리 느릅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8)평창 약수리 느릅나무

    북유럽 신화 속 최초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오딘은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가 있는 신비의 숲에서 인간을 만들었다. 오딘은 물푸레나무의 밑동에 숨결을 불어넣어 남자를, 곁에 서 있는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어 냈다. 인류 최초의 남자와 여자다. 느릅나무가 서양 문화권에서 여성성의 상징으로 이용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의 현대 작가 유진 오닐이 그의 대표적 희곡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물질을 향한 탐욕에 대비하여 음울한 여성성과 본능적 모성, 혹은 열정과 감성을 상징하기 위해 거대한 느릅나무를 배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느티나무와 자칫 혼동하는 느릅나무 “군청 사람들이 알려줘서 알았지, 처음엔 그저 느티나무인 줄 알았죠. 이제 와서 생뚱맞게 바꾸긴 뭘요? 왜 식당 이름을 잘못 지었냐 하면 그냥 웃고 말죠.” 강원도 평창군 약수리의 국도 31호선 가장자리에서 하늘을 이고 서 있는 느릅나무 앞의 식당 ‘느티나무 가든’의 주인 강태일(58)씨 이야기다. 도로가 개통되기 전 이 나무 앞에 있던 옛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강씨는 옛 어른들도 모두 이 나무를 느티나무로 알았다고 한다. 느릅나무와 느티나무는 모두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가까운 친척 관계의 나무로, 널리 퍼지는 품이나 오래 자라는 생명력이 서로 닮았다. 물론 꼼꼼히 짚어 보면 잎 모양이나 줄기 껍질 생김새 등에서 적잖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연구자들의 몫이다. 정작 나무에 삶을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나무 이름 정도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강씨의 말대로 나무 이름이 틀렸다 하면 그저 한번 웃으면 그뿐이다. 분명한 옛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느릅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살아왔다. 이를테면 ‘삼국사기’에는 느릅나무를 좋은 건축재로 여기고, 일정 수준의 벼슬을 하지 않은 백성이 느릅나무로 집 짓는 걸 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목재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흔치 않은 까닭에 이를 아끼려 했던 조치였지 싶다. 실제로 오래된 느릅나무는 느티나무에 비해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느릅나무는 현재 58그루에 불과하다. 그중 34그루가 강원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느릅나무가 익숙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무려 5300그루가 넘는 느티나무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다. ●마을의 평화를 지켜온 700년 된 나무 “단오 때 저 나무에 쌍그네를 매고 사람들이 놀면 한 해 동안 마을에 평화가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어요. 그래서 한 십년 전까지만 해도 단오 때만 되면 어김없이 그네를 맸지요.” 그 사이에 느릅나무 주변의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강씨가 자라던 어린 시절만 해도 나무 앞으로 조붓한 흙길이 있었고, 강씨가 살던 집은 읍내 장터에 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주막이었다. 강씨는 이 주막집에서 느릅나무를 바라보며 태어나고 자랐다. 나무 앞을 흐르는 평창강을 스쳐온 강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만, 강변에는 꽤 높은 강둑이 쌓아 올려졌다. 흙먼지 날리던 길은 번듯한 국도로 포장됐고, 사람들을 태우고 장터로 이끌던 소달구지 대신 온갖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친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지만, 이곳에 살던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다. 그네를 매고 즐길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쌍그네를 매고 놀던 일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은 부분에서 줄기가 둘로 나뉘며 솟아오른 약수리 느릅나무는 키가 25m, 줄기 둘레도 5.5m나 된다.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느릅나무 가운데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느릅나무로 봐도 틀리지 않는다. 포장된 도로가 바로 곁으로 나는 바람에 생육 공간이 넉넉지는 않으나 아직 건강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다. “보호수 안내판에는 455살이라고 돼 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700살은 훨씬 넘은 나무로 알고 있어요. 저 나무가 옥황상제가 보낸 세 아들 가운데 하나거든요. 옥황상제는 나무의 모습으로 세 아들을 우리 마을에 보내면서, 모두가 잘 살면 마을이 잘될 거라고 했는데, 그중의 한 그루가 죽었어요. 그 바람에 마을에 그리 잘되는 집안이 없다고들 하죠.” 강씨가 말하는 다른 한 그루는 마을 안쪽의 들판을 거느리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지만 강변의 느릅나무만큼 크지는 않다. “어떻게 돼야 잘되는 집안이냐.”는 질문에 강씨는 “요즘 같은 시절에야 부자 되는 거죠.”라고 한다. ●온 누리의 평화를 지켜줄 큰 나무 “땅값이나 좀 오를까? 그래 봐야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진부 쪽에 해당하는 이야기겠지요. 여기는 좀 외져서 별다른 영향은 없을 거예요.”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 평창은 뉴스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평창 주민의 생활에는 아직 별다른 변화가 없다. 큰 도로 주변에 나부끼는 ‘축하’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공공기관에서 붙인 축하 포스터를 빼면 달라진 게 없다. 굽이굽이 굽어 도는 평창강을 따라 평창읍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약수리 역시 아직은 예전 그대로다. 평창 약수리는 옥황상제가 세 아들을 보낼 곳으로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를 짚어볼 수 있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변 마을이다. 쌍그네를 띄우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질 견고한 평화다. 천년의 평화를 지켜온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늘의 위엄을 간직한 채 이곳을 찾을 낯선 외국인들과 함께 온 누리의 평화를 지키는 큰 나무로 남기 위해 기지개를 켠다. 장맛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나뭇가지를 휘감아 돈다. 글 사진 평창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씨줄날줄] 척당불기(倜儻不羈)/이춘규 논설위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편에는 ‘광개토왕의 휘(諱)는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씩씩하고 당당한, 영웅스러운 위엄을 갖추었으며 척당(倜儻)의 뜻을 품고 있었다(生而雄偉 有倜儻之志).’라며 ‘고국양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춘추 겨우 29세에 백제를 쳤다.’라고 적혀 있다.  척당(倜儻). 이에 대해 한(漢)나라 허신(許愼)이 작성한 설문(說文)에는 “척당은 불기(不羈)다.”라고 했다. 사기(史記)에서는 “불기(不羈)란 재주와 지식이 높고 원대하여 가히 묶어둘 수 없음을 말한다(不羈言才識髙遠不可羈係).”라고 했다. 송나라 때 정탁(丁度) 등이 수정한 집운(集韻) 권 8에는 “척당은 큰 뜻을 말하며 혹은 희망이라고도 한다(倜儻大志一曰希望也).”라고 했다. 지금은 척당불기(倜儻不羈) 로 쓰인다. 기개 있을 척, 빼어날 당, 아니 불, 굴레 기 자를 쓴다.  결국 척당은 “남보다 뛰어나고 원대한 의지나 자세”를 뜻했다. 광개토대왕이 품었던 척당지지(倜儻之志)는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져 온 천손사상을 이어받아 주몽이 꿈꾸었던 다물(多勿·옛땅을 되찾음)을 실천해 하늘의 규범인 홍익인간, 제세이화(濟世理化·세상의 어지러움, 어려움에서 구하여 다스리다) 이념을 세상에 펼쳐 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만주 벌판에 태평성대를 완성하고자 했던 광개토대왕의 웅혼한 뜻이 엿보인다.  척당불기는 일본 에도바쿠후에서도 교육사상으로 유행했다. 메이지유신의 기초를 닦은 사카모토 료마를 포함한 변혁가, 교육자, 정치가들이 이 정신을 강조했다. 정치인·종교인으로 일본 도시샤대 설립자인 니이지마 조(1843~1890)는 유언을 통해 척당불기를 주문했다. 확고한 신념을 갖고 스스로의 책임 아래 독립해 권력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고 말했다. 현재도 도시샤대는 척당불기를 중시한다. 1996년 타계한 인기작가 시바 료타로도 척당불기를 예찬했다.  우리나라의 다수 정치인들은 새해나 중요한 시기에 4자성어로 각오를 다진다. 홍준표 한나라당 새 대표는 ‘척당불기’ 정신을 강조한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굽히지 않는 정신이라고 한다. 그는 당 대표 당선 첫 기자회견에서도 “당의 위기를 척당불기 정신으로 헤쳐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의원회관 사무실 액자에도 걸어놓고, 새해 등 필요할 때마다 척당불기를 강조하는 홍 대표. 청와대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나설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씨줄날줄] 순장조(殉葬組)/박대출 논설위원

    인도에 사티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뒤를 따랐다. 몸을 불태워 남편과 함께 묻혔다. 1829년 법으로 금지됐다. 순장(殉葬)이란 풍습이다.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처첩, 신하, 노비를 곁에 묻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국, 인도, 오세아니아 등에서 순장 유골들이 출토됐다. 고대 갈리아, 아일랜드, 불가리아, 슬라브에서도 나왔다. 한국과 일본에도 순장이 있었다. 삼국사기엔 신라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죽으면 황궁에 곡소리가 퍼졌다. 수십명의 후궁들이 따라 죽을 운명이 서글퍼서 울었다. 자발적인 순장은 자진(自盡)이다. 이때는 순사(殉死)다. 반면 강제 내지 타살도 있다. 경북 경산 일대 무덤에서 나온 순장 두개골은 함몰돼 있다. 둔기에 맞아 숨졌다는 얘기다. 사람은 노동력이자, 군사력이었다. 이를 묻었으니 국력 낭비였다. 잔인하고 비인륜적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인형으로 바꿨다. 흙을 빚어 토용(土俑)을 만들었다. 공자는 이마저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진시황릉은 아이러니다. 살아 있는 병사를 대신해 병마용(兵馬俑)을 만들었다. 규모가 세계 8대 불가사의다. 그런데도 순장을 했고, 규모 역시 사상 최대다. 한서(漢書) 36권에는 “궁녀들과 능묘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을 산 채로 묻었으니 수만을 헤아렸다.”고 적혀 있다. 청와대 개편이 단행됐다. 김효재 정무수석, 김두우 홍보수석 등이 기용됐다. 김두우 수석은 ‘순장 4인방’으로 꼽힌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나머지 3인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이동관 언론특보, 박형준 사회특보 등이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김효재 수석은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순장조에 편입된 셈이다. 순장조엔 희생(犧牲) 사자수호(死者守護) 개념이 깔려 있다. 구차하게 내세(世)를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예든, 영화(榮華)든 누린 게 작지는 않다. 영(榮)을 얻었으니 욕(辱)을 감내하는 게 책임정치다. 순장조는 국가 경영에 핵심으로 참여했다. 값비싼 경륜이자 자산이다. 순장되면 묻힌다. 우리 정치는 늘 소모적이다. 순장조를 별로 중용하지 않는다. 5년마다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본인이 그 현실을 깨려고 하면 무리다. 무모한 도전이나 과욕이다. 영화만 좇는 속물이 된다. 내세에서 찾아 쓰기를 기다려야 할 일이다. 머잖아 갈림길에 선다. 희생조냐, 회생조냐. 하나 더 있다. 자발적 순사냐, 타살적 순장이냐. 그동안 뭘 하느냐에 달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기고] ‘롯데백제월드’를 위하여/임영진 전남대 교수·전 호남고고학회 회장

    [기고] ‘롯데백제월드’를 위하여/임영진 전남대 교수·전 호남고고학회 회장

    제2롯데월드 건축이 허가됐다. 지하 5층, 지상 123층, 높이 555m로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여년 전 롯데월드 공사 광경이 떠오른다. 당시 필자는 백제 한성시대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호분을 비롯한 백제 고분들을 조사하려고 수년간 석촌동 고분군을 왕래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목격하였다. 한성백제시대의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고분로 확장 공사 탓에 1983년부터 조사가 시작되어 1987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석촌호수(백제호수) 옆에 거대한 롯데월드의 위용이 드러나고 있었다. 롯데월드를 몇 차례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 그때마다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족,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점에 놀랐다. 이제 5년 뒤에는 기존의 롯데월드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의 초고층 제2롯데월드가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건물이 완공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지상 555m의 꼭대기층에 올라 젊은 시절 땀 흘리며 발굴하였던 석촌동 고분군을 조망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 높이에서는 석촌동 고분군뿐만 아니라 여러 해 동안 필자가 발굴하였던 몽촌토성과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풍납토성도 훤히 내려다보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몽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현재의 삼각산으로 추정되는 부아악에 올라 국가를 세울 만한 땅을 살펴보는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성백제 도읍을 구성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석촌동 고분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중간지점에 그렇게 높게 지어진다면, 한성백제 도읍지를 조망해 보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중국·일본 관광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백제의 하남 위례성(한성왕궁)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이 일본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처럼 발굴·정비되고, 제2롯데월드 전망대에서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조망할 수 있다면 이는 꽤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차제에 제2롯데월드와 같은 기계적인 명칭을 버리고 고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하였던 백제를 반영하는 명칭을 쓴다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롯데백제월드’라 하면 어떨까? 롯데는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서 창업한 세계적인 기업이고, 백제는 일본에서 ‘구다라’로 읽히면서 ‘진짜’라는 의미로 통용될 만큼 경쟁력을 가진 명칭이었으니 상당한 시너지 효과와 함께 세계인들에게 더욱 인상적인 테마파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현재 ‘롯데백제월드’에서 가까운 올림픽공원에는 백제 한성시대를 주제로 한 한성백제박물관이 건립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인근에 있는 한성백제의 대표 유적인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 등을 인근의 지하철역에 반영시켜 ‘백제왕성역’, ‘백제왕릉역’ 등으로 부른다면 서울은 명실공히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인 역사도시로 깊이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물로 만나는 토끼이야기

    유물로 만나는 토끼이야기

    2011년은 신묘(辛卯)년, 토끼띠의 해다. 토끼는 귀여운 생김새와 영특함으로 인간과 친근한 관계를 맺어왔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토끼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6대 대조왕 25년(기원후 77년)이다. 그해 10월에 부여국에서 온 사신이 뿔 3개가 있는 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고, 왕은 이들이 상서로운 짐승이라 해서 죄수들을 풀어주는 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묘년을 맞아 서울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띠 전시 ‘토끼 이야기’가 새해 2월 14일까지 열린다. 1999년 기묘년부터 해마다 띠에 맞춰 열리는 전시로 올해 12년이 돼 다시 토끼전을 열게 됐다. 전시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됐다. ‘토끼, 토(兎)와 묘(卯)’에서는 동물로서의 토끼와 십이간지에서 상징하는 토끼로 구분해 유물을 선보인다. 토 부문에선 토끼를 그린 영모화, 토끼 모양 노리개, 토끼털 목도리 등이 전시된다. 묘 부문에는 십이간지의 네 번째 지지로서 묘신에 관련된 유물을 모았다. 간지에서 묘는 방위로는 정동(正東)을, 시간으로는 오전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를 뜻한다. 그 이유는 토끼가 무덤에서 방위수호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토끼의 상징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달 속의 토끼’ 연관 유물도 따로 모았다. 중국 당·한대의 여러 문헌 기록에 나오는 옛 설화에 따르면 토끼와 두꺼비는 달의 정령이며, 계수나무는 불사목(不死木)이다. 옛 사람들이 계수나무 아래서 불로장생의 약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을 그리며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이상세계를 꿈꾸어 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된다. ‘꾀 많은 토끼’ 코너는 불리한 상황을 꾀로 벗어나는 토끼 이야기를 보여준다. 구토(龜兎) 설화가 최초로 등장하는 삼국사기와 수궁가, 별주부전 등의 문헌과 이야기책에 사용됐던 삽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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