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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중국 국방장관의 방한

    츠하오톈(遲浩田) 중국 국방부장(장관)이 중국군 수뇌로서는 처음으로 오늘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지난해 8월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의 중국 방문에 이은 츠 부장의 방한은 한·중 군사협력의 기틀을 다지고 한반도 냉전구도의 해체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츠 부장은 방한중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예방하여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와 21세기 한·중관계 발전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20일에는조장관과 한·중 국방장관회담을 갖고 합참의장 및 각군 총장 등 군수뇌부의 상호방문을 포함한 양국간 군사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두 나라 장관은 조장관의 중국 방문때 가졌던 첫번째 만남에서 한·중군사협력에 이미 상당한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이번 회담에서는보다 진전된 합의가 있을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한·중 국방장관의 상호방문 성사는 한반도 안보정세와 관련,큰 의미를 가진다.정부는 그동안 미국과 일본,러시아,중국 등 한반도 주변 4대국과의 이른바 ‘4강외교’를 통해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에대해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을 얻었다.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탈북자 가족 7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유감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4강외교’는 여전히 성공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츠 국방부장의 이번 방한은 4강과의 외교적 공조에 이어 군사협력체제까지갖추게 됐음을 의미한다.지난 92년 한·중수교 이후 정치·외교·경제·문화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은 급증했던데 비해 군사분야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었다.물론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었다.이런 점에서 한·중간의 군사협력 증진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실질적인 효과 못지않게 상징적인 의미도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츠 부장의 방한은 북한에도 의미있는 메시지와 함께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줄 것이 분명하다.북한의 혈맹이며 실질적인 군사지원국인 중국이 한국과 군사협력을 확대해나갈 경우 북한이 받을 부담은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더욱이 한·중 국방회담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저지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주변 4대국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하다.외교적인 공조체제와 함께 군사적인 협력도 필수적이다.한·중 국방장관의 상호방문이 두 나라간의 군사협력관계를 다지는 것은 물론 4강과의 군사외교를 더욱 강화해 나가는 계기가되기를 기대한다.이를 위해 4대국과의 국방장관회담을 연례화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 遲浩田 中국방부장 19일 첫 공식방한

    중국 츠하오톈(遲浩田) 국방부장 등 한·중 국방장관회담의 중국측대표단17명이 19일부터 23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중국 국방부장의 ‘국방부장 자격’ 방한은 북한을 포함해 처음이다. 11일 국방부에 따르면 츠 국방부장은 방한 첫날인 19일 청와대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예방하고 20일 국방부에서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과 국방장관회담을 갖는다. 양국 국방장관은 회담을 통해 우리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등 한반도 및 동북아정세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대량살상무기 확산 금지와 북한의 미사일 재발사 반대 등 군사전략적 공동 관심사에 대해 교감을 나눌 것으로 기대된다. 츠 부장은 또 홍순영(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과 만나 한·중 우호협력 관계 발전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해군 및 공군 부대와 삼성전자를 시찰할계획이다. 방한단에는 츠 부장의 부인 장칭핑(姜靑萍) 여사를 비롯,수에이밍타이(隋明太·중장) 제2포병 정치위원,쩡션시아(鄭申俠·중장) 공군 참모장,짱원칭(臧文淸·중장) 북경군구 부사령원,왕^^민(王建民·소장) 심양군구 참모장,루오빈(羅斌·소장) 국방부 외사주임,왕위청(王玉成·소장) 해군 부참모장 등 중국군 핵심 장교 15명이 포함돼 있다. 노주석기자 joo@
  • 中 국방부장 첫 방한 의미

    츠하오톈(遲浩田) 국방부장의 방한은 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 정상화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한국전쟁의 교전국으로서 가장 껄끄러웠던 군사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상징하는 동시에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의 ‘기폭제’로서의 의의를 지닌 탓이다. 더욱이 북한의 유일한 ‘혈맹’인 중국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한·중 군사외교 강화는 한반도 평화구축에 더욱 탄력성을 부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츠 국방부장의 이번 방한은 지난해 8월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 방중의 답방 형식을 띤 것이다.이번 상호 방문의 성사로 포용정책의 기조 위에서 추진했던 미·일·중·러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국방장관 회담 연례화가 완결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이다.정부 당국자는 “정치·경제분야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양국 관계가 군사·외교 부문으로 확대되면서 4강외교의 절정을이뤘다”고 밝혔다. 오는 20일 예정된 한·중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한반도 긴장 완화,대량 살상무기 확산방지,북한 미사일 재발사 저지 등을 협의하고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중국 군부의 적극적 지지를 요청할 계획이다. 특히 지난해 조 장관 방중시 중국측에 제의한 각군 총참모장 등 군장성 및함정의 교환 방문,공동해상구조 훈련,육·해·공군 대학 교환 교육,군사연구기관간 정기교류 등에서 상당한 진전이 예상된다. 한·중 군사외교 강화는 ‘21세기 동반자 관계’를 한층 성숙케 하는 의의도 갖는다.지난 5일 새해 첫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정직한 중개자 역할’을 중국측에 요청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중국의 남북한 등거리 외교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대북 외교노력을 촉구한 것이다.그만큼 한·중 외교 관계가 정상화됐다는 방증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현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 비유됐던 북·중 관계의 한계를 드러낸 동시에 미·일 관계개선을 통한 고립탈피와 모험적 군사·외교노선의 위축 등의 전략 수정도 불가피해졌다는 지적이다. 오일만기자 oilman@
  • 안보회의 논의 통일안보정책 틀과 의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주재한 올 첫 국가안전보장회의는 21세기 남북관계의 기본 틀과 방향을 정한 자리였다고 볼 수 있다.올해 안보 및 대북정책의 기본방향을 ‘안정된 평화정착의 원년’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그러한뜻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지난 2년동안 추진해온 대북 포용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20세기 냉전구도 속에 더 이상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부가 이날 올 안보정책 기본방향으로 확고한 안보태세 유지,남북경제공동체 건설,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외교 강화 등 세가지를 제시한 것도 이를반증한다.이는 ‘튼튼한 안보 속에 대북 포용정책 추진’이라는 지난해 안보정책의 기본구상과 달리 한단계 발전된 평화정착 의지와 미래지향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확고한 안보태세 확립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안보정책의 첫번째 방향이다.김대통령은 회의에서 ‘민·관·군 통합방위체제’를 포함한 위기대응능력 및 체제를 강화하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한 대응방안을 강구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는 남북경제공동체 건설과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외교강화라는 두개의 축을 통해 일궈내겠다는 구상이다.특히 경제공동체가 남한의 기술과 자본,북한의 토지와 노동력을 결합한,즉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인 남북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협력관계의 기본 틀을 상정한다고 볼 수 있다. 김대통령이 조건없는 당국자간 대화를 촉구한 것도 설악산-금강산 연계관광사업,서해안 공단사업 등 민간차원의 교류를 평화정착의 기본구도로 삼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다른 축은 유리한 안보 및 평화정착 환경조성이다.경제공동체가 남북 당사자간 추진과제라면,외교적 노력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이는 한반도 주변 4강외교의 성공과 지난해 북한 금창리 지하 의혹시설과 미사일 재발사 문제가 페리보고서를 통해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양승현기자 yangbak@
  • 金대통령 “조건없는 南北대화 추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5일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본격 추진해 ‘안정된 평화정착의 원년’으로 기록하는 것을 올 안보정책의 목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올 첫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한자리에서 이같이 말하고 ▲확고한 안보태세 유지 ▲남북경제공동체 건설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외교 강화를 기본방향으로 제시했다. 김대통령은 “민간차원의 남북한 교류와 협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고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당국자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조건없는 남북당국자간 대화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경제공동체 건설과 관련,김대통령은 “3일 신년사에서 제안한 ‘국책연구기관간 협의’에 북한이 긍정적으로 호응해 오길 기대한다”고 말하고 “정부는 상호보완적·호혜협력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 경수로 본공사 추진,설악산-금강산 연계 관광사업,서해안 공단사업 등을 중점적으로 지원할 것”을다짐했다. 특히 “만남의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비공식적인 이산가족 접촉을 늘려야한다”고 말하고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간 이산가족들이 많이 만날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관계부처에 지시했다. 또 “통일은 지금 시점에서 가능하지 않고 양쪽에도 득이 안된다”고 전제하고 “경제뿐 아니라 문화,스포츠,종교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이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무력도발에는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며 “북한의 핵·화학·생물학 무기 및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아울러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해 99년에 마련한 ‘포괄적 접근방안’이 올해 적극 추진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한반도와 동북아의평화와 안정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하는 차원에서 동북아 다자안보대화협의체 구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은 ‘남북경제공동체’를 위한 국책연구소선정문제와 관련,“주관연구소를 제외하고는 주제별로 민간연구소에도 아웃소싱방식으로 연구과제를 주어 장기적으로 연구·추진시키는 방안이 좋을 것이며 주관연구소는 이를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정부는 이산가족의 생사확인과 상봉을 위해 현재 이산가족 생사확인에 1인당 40만원,상봉에 80만원씩 지원하던 것을 최고 2배까지 늘리는 방안을 고려중이다. 이와함께 정부는 올해 4,000만달러수준이던 북한에 대한 정부차원의 인도적지원을 늘려나가기로 했으며 민간차원의 인도적 지원의 확대를 위해 각종 행정적 지원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회의에는 박 통일·홍순영(洪淳瑛) 외교통상·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과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한광옥(韓光玉) 청와대 비서실장 및 안보회의 사무처장인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조영길(曺永吉) 합참의장 등이 참석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안보회의 주요내용 요약

    5일 열린 올해 첫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안보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대북 교류확대와 조건없는 남북대화 추진,냉전종식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으로 요약된다.회의는 지난해 분야별 안보정책 추진실적과 새해 정책방향에 대한 부처별 보고로 진행됐다.다음은 주요내용의 요약. ?2000년도 안보정책의 추진방향=한반도 냉전구조 해체과정을 본격적으로 추진,‘안정된 평화정착의 원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올해 안보정책의 목표다.세가지 기본방향은 확고한 안보태세의 유지,남북경제공동체 건설,냉전종식을 위한 외교강화다. 첫째,튼튼한 안보태세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 남북화해협력을 촉진한다.북한의 핵·화학·생물학무기 및 미사일 등 대량 살상무기 위협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 둘째,남북경제공동체의 건설과 관련,민간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교류를 다변화함으로써 남북간의 실질 협력관계를 증대시켜 나간다.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인 협력관계로 남북경협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이를 위해 경수로 본공사,설악산·금강산 연계관광사업,서해안 공단사업 등을 중점 지원한다.민간차원의 남북교류·협력을 효율적으로 촉진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면 당국간대화가 필요하다.조건없는 남북 당국간 대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셋째,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외교강화.북한이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반면 당국간 대화를 기피하려는 북한을 우방국들과 함께 설득해 나갈 것이다.북한이 국제규범에 가입하고 이를 준수하게 하는 지난해의 ‘포괄적 접근방안’이 구체화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외교 다변화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의 평화·안정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해 나가는데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동북아 다자 안보대화 협의체 구성을 시도하고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한·중·일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식 강화에도 진력해 나간다.포용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며 안보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초당적인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 ?99년도 안보정책 실적 평가=지난해는 안보태세를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대북 포용정책을 자신감있게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한 해였다. 북한의 미사일 재발사문제 등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교류협력도 획기적으로 증대됐다.16만명이 금강산을 다녀왔고 99년 한해 동안 5,500여명이 북한을 방문했다.남북교역규모는 3억4,000만달러로 기록을 경신했다.남북이 공존공영하는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초석을 쌓은것으로 평가된다.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 주변 4강의 지지도 얻었다.포용정책에 기초한 대북포괄적 접근방안을 마련,한반도 냉전구조 해체과정에 진입할 수 있었다.이같은 변화들은 한반도 평화·안정과 남북관계 개선에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평가된다. 이석우기자 swlee@
  • [신년 대담]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 전망과 南北韓관계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안겨주었던 20세기의 한반도.21세기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어떻게 상생(相生)의 관계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까.통일부총리를 지낸 한완상(韓完相) 상지대 총장과 김달중(金達中) 세종연구소장의 대담을 통해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 가능성과 통일 방향 등을 점검해본다. ●김소장 지난해 북한은 신중하지만 대외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미사일 시험발사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관련,파국으로 치닫던 북·미갈등이 대화국면으로 선회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북한의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중국방문 등 북·중간정상외교의 복원과 12월 초 일본 초당파의원들의 방북과 관계정상화 협상의 진전도 두드러진 변화지요.북·러 관계도 정상화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이같은 변화는 한반도 긴장완화와 안정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봅니다. ●한총장 장기적으로 북·미,북·일관계 정상화는 교차승인과 동북아에서의‘다자간 안보·경제협력체제’ 구성으로 발전될 수있을 것입니다.미·일과 북한의 국교수립은 남북한과 주변국가의 교차승인을 완성하고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교차승인은 동북아국가간의 안보협력 과정의 시작입니다.남북한과 미·중·러·일 등 6개국간의 다자간 안보 및 경제협력체가 형성되면 한반도의 냉전체제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동서독의 통일은 유럽안보협력체제 속에서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교류협력을 강화해나간 결과입니다.동북아 협력기구가 생긴다면 같은 결과를 기대할수 있을 것입니다. ●김소장 2000년 11월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북한으로 하여금 더욱 신중한 대미 접근을 취하게 하고 있습니다.공화당은 보수 표를 의식,더욱 강경한 대북정책을 주창하겠지만 근본적인 정책변화는 생각하기 어렵지요.북한은 무엇을 결정하고 타결짓기보다는 미국의 권력변동과 정책변화에 주시하면서 신중한 탐색전을 벌일 것으로 보입니다.체제유지란 측면에서 북·미간의 극적인 돌파구나 비약적인 관계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지요.북한은 미국과의 ‘빅딜’을 통한 본격적인 개혁 개방이나 관계발전을 해나가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물론 대화와 타협과정에서 실리를 얻어내려는 시도는 계속하겠지만요. ●한총장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는 대북정책의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북한은 대미관계와 관련,일단 관망태세인 듯합니다.그러나 대미 관계개선 노력은 북한의 변화노력을 상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요.북한은 헌법을 고치고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했고 자본주의 경영학습을 위해 110명이나 되는 간부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냈습니다.전방위적으로 대외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지요.이런 변화속에 두드러진 것은 정치·군사면에 ‘선군정치(先軍政治)를 강조하면서 실리추구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는 위기상황을 무력이나 무력시위로 극복해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의 체제존립을 위협하는 강경책을 쓴다면 북한은 사력을 다해 ‘총의 위력’에 의지할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전쟁 위협은 어느때보다도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위기를 의식할수록 냉전적인 현상유지세력이강해지지 않겠습니까.북한이 강경하게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봉쇄정책은 과거 역사가 실효성이 없었음을 증명했습니다.‘선의의 무관심정책’(benign reglect)은 남북이 서로 너무 많은 사안들로 얽혀 있어 무관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효성은 회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소장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미·일관계 개선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한반도의 대표자는 북조선”이란 논리는 여전히 북을 지탱하고 남측정부를 상대하지 않는 근거입니다.이런 논리 아래 북한주민들을 격리시키고대민접촉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경협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냉전구조는 북한의 체제존립의 기반이며 이 점에서 본격적인 남북 당국자간의 대화는 어려움이 있다고 봅니다. ●한총장 “상대방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란 냉전세력의 ‘불변신화’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가로막는 근본 이유중 하나입니다.그래서 이같은 ‘불변신화’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안목이 필요하지요.정부는 포용정책에 대한 평양당국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도록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군부 등 북한실세들은 냉전체제를 재생산해야 위기관리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그들은 모두 한반도 냉전유지란 현상유지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남측이나 미국에서나 냉전적 현상유지 세력들은 존재하고 이들은 서로 ‘적대적 공생관계’속에서 의존하며 냉전을 확대재생산하려 하고 있습니다. ●김소장 2000년에도 북한은 체제유지 보장 속에서 실리획득 노력을 전개할것입니다.이를 위해 강성대국과 군사주의를 동시에 추구하겠지만 서해사건에서 보았듯 군사적 모험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북한은 올 상반기엔 민간교류 확대에 중점을 두고 하반기엔 국제적인 신뢰획득을 위해 당국간 대화제의에 응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북한은 일단 ‘생존불안’에선 벗어났다고 보여집니다.외부세계와의 교류도 이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추진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성급한 효과를 기대해선 안될 것이다.정부의 일관성있는 정책추진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한총장 북한은 체제가 위협받지 않는 차원에서 전방위적인 대외관계 개선에 나서겠지만당국과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펼 것입니다.일정한 시점이 돼서야 대화에 나서지 않나 싶어요.국제적인 고립을 탈피하면서경제적인 실리추구를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김소장 북한은 국민 통제와 체제유지를 위해 기존의 냉전구조를 이용하고있습니다.한편 미국은 동북아지역의 정치·군사적 우위유지를 위해 현상유지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 할 수 있지요.반면 한국은 햇볕정책 등으로 한반도냉전구조의 해체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현상타파 노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에서 포괄적 접근과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는 쉽지만은 않을 것이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당분간 현안문제를 둘러싼 탐색전이계속될 것입니다.그러나 탈냉전은 세계사적 추세며 한국의 포용정책은 지속적으로 진전되리라 봅니다. ●한총장 포괄적 접근은 우리정부의 인정 아래 미국정부가 북한에 대해 이라크식의 무력공격을 하는 대신,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자는 ‘한반도식 해결방식’이라 할 수 있지요.북한이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보급을 중지하는 대신북의 안전과 체제,주권인정을 포괄적으로 해주고 그에 따른 경제적인 협력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이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적지않은 것같습니다.상호 불신의 해소가 정책 진전에 필요하지만 2000년에는 북한의 대미정책의 관망태세가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소장 포용정책은 한반도의 긴장고조를 막고 위기의 안정적 관리에 기여했습니다.IMF 상황에서 경제위기 극복과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투자분위기와 신뢰를 높이는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남북간 경협 활성화와 교류확대에도 기여했습니다.그러면서 우리는 미·일과의 대북 공조체제의 기틀도 닦았지요.그러나 초기에 개념에 대한 혼동과 논란으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했고 추진과정에서 정부 부처간 혼선이 있었던 점은 아쉽습니다. ●한총장 포용·햇볕정책은 남북한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인식한 기초 위에세워진 유일한 대안이라 봅니다.국내적으로 일관성을 평가받았고 4강국 등국제적인 호응도 받고 있는게 사실입니다.‘국민의 정부’ 이후 방북인사는9,000명으로 지난 9년간 2,400명을 크게 웃돌고 있습니다.이산가족의 제3국상봉도 200명을 넘어섰고 700여건의 생사확인도 이뤄졌습니다.임가공 교역의급증 등 경협의 활성화도 성과중 하나로 봅니다. 그러나 당국간 대화에 정경분리를 적용하지 않고 상호주의를 내세운 점 등은 아쉽습니다. ●김소장 북한은 ‘점 분산형’ 발전방식,즉 제한된 지역·분야에서의 고립된 개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인민과 외부세계를 차단하고 개방지역을 여기저기 분산시켜 하나씩 개혁 개방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극히 제한된 개방이란 점에서 중국식의 점진적 전면개방과는 다르지요.그러나 앞으로 당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형 개발독재로 나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총장 현재 남북한은 힘의 비대칭성이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국민총생산량은 25배,무역총량은 150배나 차이가 납니다.이같은 차이는 평화적인 남북관계나,통일을 위해서나 모두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북한 경제개발과 관련,북한의 인프라 구축에 우리 대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으면 합니다.대기업의 인프라 참여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방안이 될 것입니다.북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사양길에 접어든 우리의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안도 모색돼야 합니다.북한 주민에게 많은 취업기회를 주고 남측 산업발전도 기할 수 있는 함께 사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후 유럽의 마셜프랜과 같은 가칭 ‘한반도 경제부흥 프로젝트’를 남북 당국자들이 합의하고 국제적인 컨소시엄을 구성,북한경제개발에참여하는 방안도 장기적으로 구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이는 한반도의 안정과 남측의 사양산업을 살리는 방안도 될 것입니다.평화는 전쟁없는 상태가아니라 진정한 상호공존을 향한 협력입니다.통신 핫 라인,인적 핫 라인도 없는 현 상황은 남북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가를 보여줍니다.상호 과잉반응과 돌발적인 사고와 관련,오판과 위기를 막을 수 있는 물밑 대화채널과 방지체제의 마련이 시급합니다. ●김소장 북·중 두 나라는 2000년에도 복원된 정상외교를 바탕으로 관계발전에 나설 것입니다.그러나 북·일관계는 그리빨리 진전될 것 같지 않습니다.일본의 일반적인 대북인식,대일 배상청구권 문제 등 넘어설 산이 많기 때문입니다.북·일수교는 미·일관계,일본의 기존 동북아 전략의 상당한 수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본도 서두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북한도 지나치게 빠른 돈과 기술의 유입은 체제붕괴를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는점에서 급격한 관계발전은 피할 것 같습니다.다만 인도적 지원과 경제적 교류의 폭은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내년 초 러시아와 북한은 동맹조약을 일반적인 우호관계로 전환할 것으로예상됩니다.동맹조약의 자동개입규정은 폐기되는 것이지요.이는 남북한이 주변국가와 맺은 쌍무적 군사동맹 관계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장기적으로 한·미동맹,미·일동맹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동북아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총장 김대중 정부가 일관성있게 포용정책을 추진해 나간다면 북한의 호응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다음 정권에서도 현 대북정책을 계승·발전시키게 될 것입니다. ◎김달중세종연구소장▲연세대 정외과 졸업▲미국 터프트대학 국제정치학 박사▲전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장▲전 연세대 행정대학원장▲전 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한완상 상지대 총장▲서울대 사회학과 졸업▲미국 에모리대학 사회학박사▲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전 한국방송통신대학 총장▲전 부총리겸 통일원 장관정리 이석우 기자 swlee@
  • 北 신년사로 본 남북관계

    북한의 올 정책지표를 담은 신년사는 ‘경제건설’과 ‘총대(군사력) 중시’의 강조를 통한 대외적 실리추구로 요약된다. 남북관계에 대해선 별다른 긍정적인 조치의 언급이 없었다.기존 틀을 유지하며 변화상황을 주시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통일부는 “북측이 정경분리원칙에 편승,당분간 민간교류를 앞세우는 ‘선민후관(先民後官)전략을 구사하며 실리를 챙기려 할 것”으로 내다봤다. ?경제건설 강조=과학기술 중시와 산업분야에서 철저한 실리보장 강조가 두드러진다.“우리가 더욱 큰 힘을 넣어야 할 전선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이라고 강조했다.강성대국 건설을 주창하면서 ‘사상·총대’와 함께 과학기술을 중요한 3대 기둥이라고 지적했다.“경제형편은 의연히 어렵다”고 신년사에서 처음 자인한 것도 경제발전을 위해 전면적인 노력동원도 불사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농업문제·에너지난 해결에 대한 강조도 두드러져 이 부문의북한내 필요성을 반증하고 있다. ?총대 중시와 실리추구=군대는 체제유지와 대외협상을 위한 북한의 사실상유일한 수단이다.이 점에서 ‘총대 중시’의도는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배치를 미국 등 대서방 관계개선 및 보상획득의 지렛대로 활용해나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대내적인 체제유지를 위해서도 군에 힘을 실어나갈 계획임을 공언한 것이다. ?기존 대남정책 유지=올해를 통일의 역사적인 전환의 해로 설정했으나 ‘조국통일 3대헌장’에 입각한 통일론 등 기존입장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그러나 예년과 달리 ‘통일부·국정원 해체’,‘국가보안법 폐지’ 등의구호는 빠져 있다.대내외 관계의 전환기 속에 상황변화를 관망하고 있다는평이다.당국간 접촉과 대화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민족대단결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민간차원의 접촉·교류는 확대될 전망이 크다. ?대미·대일 비난 자제 97년에는 미·일 두 나라를,지난해에는 미국을 지칭하며 비난했지만 “제국주의자들의 평화와 인도주의에 속지 말 것”을 강조하는 선에서 그쳤다.관련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의도를 읽을 수 있다.이는 한편 비정부기구(NGO) 회원 등 국제사회와의 접촉증가에따른 자본주의 풍조유입과 부작용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 지배체제 강화=사상과 노동당의 역할·위치를 강조,내부적인 지배체제 안정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우리식 정치체제·경제구조·생활양식’을 강조한 것도 체제안정 차원에서다. 이석우기자 swlee@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기고] 과학과 정치의 불균형

    1999년이 저물어간다.우리가 살고있는 오늘은 세기말의 끝이며 동시에 천년의 끝이다.지금 유럽에서는 세기말을 상징하는 검은 색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백년 전에도 마찬가지로 검은 색이 길거리를 뒤덮었다고 한다.지금과 백년 전의 사회분위기가 옷 색깔이 어두워질 정도의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보다 천년 전인 서기 999년경의 유럽의 분위기는 지금은 잘 상상할수 없을정도로 긴박했을 것 같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성서의 예언대로 신이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가진 돈을 교회에 다 바치고 면죄부를 얻으려는 사람들과 쾌락과 사치로 몽땅 탕진하는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나올 정도로 세기말이 가져다준 불안감은 강력했던 것 같다.그때로부터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은 인간세상을 파멸시키지 않고 있다.그 대신 지난 20세기는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파멸시킬수 있다는 것을 잘 알려준 시기였다. 20세기를 집약해 표현하는데 전쟁과 과학이라는 두 마디 단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것 같다.지난 백년동안 1억2,000만명이 130여건의 전쟁에서 죽어갔다.20세기는 그야말로 살상의 시대였던 셈이다.이 숫자는 20세기 이전의 인류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를 훨씬 넘는 규모다.냉전시기의 전쟁에서만 188만명이 희생당했다.냉전은 이런 점에서도 인류가 20세기에 가장 잘 던져버린 유산이다.그의 조국 러시아에서의 냉랭한 평가와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르바초프를 20세기 최고의 인물로 꼽는 것은 이때문이다. 20세기는 또 과학의 세기였다.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의 90%는 지난 30년간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났고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백년전 세계일주를 하려면 2개월이상 걸리던 것이 지금은 24시간이면 가능하게 되었다.인터넷을 통해 지구상의 어떤 사람과도 같은 시간에 대화를 나눌수 있다.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과연 인간을 파멸로부터 건져낼수 있을까.전망은 아직 어둡다.지구 곳곳에서 대규모환경파괴가 진행되고 있다.냉전이 끝났다고 하나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민족문제나 종교문제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막대한 자금과 기술이 살상무기를 만드는 일에 투여되고 있다.20세기의 어두운 유산을 짊어진 채 우리는 21세기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얼마전 타계한 닉슨 전 미국대통령은 자서전에서 21세기 최대의 불행은 과학의 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형이라고 말한 바 있다.과학과 정치의 불균형은 과학을 인간사회의 평화를 파괴하는 힘으로 변하게 하였다.정치가 진보하지 않는한 과학은 인간을 소멸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것이다.과학이 발명한 핵기술을 인간이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우리는 금세기의 중반에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멸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지금 우리에게 완벽한 해답은 없다.그러나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재앙을 막을 가장 튼튼한 방파제는 인간이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의 위험을 정확히 알고,그 지식을 만인이 공유하는 데 있다.인터넷을 필두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진보는 평화를 위한 정보와 지식을 전 인류가 공유하는 시스템을 가능케 하고 있다.그러나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있느냐는 문제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다.정치가 아직도 오래된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21세기에도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정치를 바꾸지 않으면,우리는 19세기형의 정치가 21세기의 과학을 악용하는 끔찍한 그림을 보게 될 지 모른다.그런 의미에서 21세기에 우리가 풀어야할 가장 큰 화두는 의외로 ‘정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金武坤 동국대교수·신문방송학]
  • ‘21세기 남북관계’ 심포지엄 주제발표 요지

    통일연구원은 오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8주년을 앞두고 7일 프레스센터에서 ‘21세기 남북관계발전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갖는다.통일부 후원으로 열리는 심포지엄에서 이종석(李鍾奭)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대북포용정책 추진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의의’를 주제로,허문영(許文寧)통일연구원 통일정책실장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남북기본합의서실천방안’을 주제로 발표한다. 다음은 주제발표의 주요내용. 李鍾奭 세종硏 연구위원 대북포용정책 추진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의의 남북기본합의서는 92년 2월 발효됨으로써 남북한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을 명시한 장전으로 공인됐다. 그러나 민간교류를 포함한 광범위한 남북교류협력과 화해의 바탕 위에서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남북 당국의 정치적 결단으로 체결돼 험난한 내외환경에 영향을 받아왔다. 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전략 방향의 첫 걸음은 ‘보다많은 대화와 접촉’을 통해 기본합의서를 사실상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이바탕위에 정부간 상설대화를 회복하고 합의서 체제를 부분적으로 복원해야한다.최종적으로는 합의서의 전면 이행 단계로 나가자는 것이다. 포용정책은 북한체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아니다.북한이 우리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관계·평화공존을 이룩하자는 것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 또 남북관계가 북한 내부체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를 최소화하고 남북 관계개선이 가져다줄 이익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본합의서 실천을 위한 우리사회 내부 준비도 중요하다.우리 사회의 ‘공존 문화’ 확립은 남북공존을 위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소다. 許 文 寧 통일硏 통일정책실장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남북기본합의서 실천방안 김대중(金大中)정부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관련,5대 과제를 제시한 바있다.적대관계 해소,북한의 대미·대일관계 정상화,북한의 변화와 개방여건조성,한반도 내에서 대량 살상무기 제거 및 군비통제,정전체제의 평화체제전환 등이 그것이다. 냉전구조 해체와 관련,북한은 구체적인 방안을제시한 적이 없다.체제유지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주장했을 뿐이다.북한은 실리적인 차원에서 대남정책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갈등적 공존관계에서 경쟁적공존관계로 전술적 전환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또 경제협력 사업 보완을위해 조건부로 남북 당국간 회담 개최 가능성도 있다.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남북기본합의서 실천을 위해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기반 조성,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반관반민’ 대화의 적극적인 추진등이다. 특히 남북간 교류·협력분야에서 ‘한국형 마셜플랜’을 수립,북한의 자주적 체제발전을 지원하고 북돋울 협력 노선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또 남북기본합의서 체제로의 복귀를 위해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지속하되 에너지및 농업분야 지원을 기본합의서 틀내에서 시범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다. 대북한 전력사업을 민관협조 원칙아래 정부주도의 민간베이스 정책사업으로 추진,남북경협을 활성화해야 한다. 정리 이석우기자
  • [사설] 코언장관의 고엽제 발언

    비무장지대(DMZ)고엽제 살포문제와 관련,미국엔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한 윌리엄 코언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신중치 못했다는생각이 든다. 고엽제문제가 불거진 이래 한국 국방부와 미국 국방부는 서로간 다소 다른입장을 보여왔다.과연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양쪽에 공동 책임이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또 한국 정부가 피해 신고를 받고는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가 얼마나 있었는지 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때다. 다시 말하면 누구의 책임 운운할 계제(階梯)가 아닌 것이다.그런데 코언 장관이 불쑥,그것도 상대인 한국의 국방장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해버린 것은 예의도 예의려니와 아무래도 성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문제에는 북한까지 끼여들어 일이 더욱 복잡해질 개연성마저 없지 않다. 북한은 지난 24일‘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등 14개 단체 명의로 공동성명을 내고 미국은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살포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군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의 이런 주장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엽제를‘살상용 독해(극)물’로 해석할 경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은 책임 여부를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한·미 두 나라는 무엇보다 먼저 피해상황부터 파악해 나가야 할 것이다.아울러 양국의 관련 기관들은 관련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책임과 보상문제는 다음 다음의 문제다.예를 들어 피해자가 안 나타난다면책임이나 보상문제가 제기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피해자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고엽제에 의한 피해인지도 가려야 할 것이다.또 고엽제가 살포된 60년대 후반까지는 고엽제 피해가 확인되기 전의 일이므로 적어도 도덕적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미 양국 간에는 그렇지 않아도 노근리 양민학살사건,미사일 사거리 줄다리기,주둔군지위협정(SOFA)개정문제 등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많은터에 고엽제문제까지 터져나와 자칫하면 국민감정을 건드릴 소지마저 없지않다.이런 때 미국의 국방장관이 나서서 우리는 아니니 너희들끼리 알아서하라는 식이 되면 사리에도 맞지 않고 모양새도 좋지 않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런 일들로 해서 두 나라간의 기본적인 우호 협력관계에 금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점이다.그러자면 일 처리가 책임 회피식이 돼서는 안된다.어디까지나 진상규명이 먼저다.
  • [발언대] 고엽제·노근리문제등 철저히 밝혀 문책을

    미군이 휴전선 부근에 고엽제 140만리터 드럼통으로 7,000개 분량을 살포했다고 한다.이는 통일 후 휴전선 부근을 환경보존지역으로 정하고 한반도의평화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만들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을 우롱한 것이다.더욱심각한 것은 단 1g으로 성인 2만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고엽제를 1,658에이커에 걸쳐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고엽제에 들어있는 다이옥신은 잘 알려진 대로 인체에 흡수되면 배출되지않고 이에 감염된 생물은 먹이사슬을 통해 인체에 축척될 수밖에 없다.고엽제 피해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2대 이상 기형과 신체뒤틀림 등의 고통을 안겨준다. 더욱 가증스러운 건 이 사실을 30년 넘게 비밀에 부쳐왔다는 것이다.이 것이 알려진 것도 당시 한 주한 미군이 미정부를 상대로 보훈혜택을 받아내는과정에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주한미군의 보고서를 입수함으로써 외부에 알려졌다.미국은 이전까지 월남전 이외에는 고엽제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뻔뻔스럽게 이야기했다. 미국이 이외에도 한반도에 자행한 만행은끔직하다.노근리학살,수많은 미군범죄,한국전의 세균전 의혹들.20세기를 50일 남긴 지금,지난 세기 강대국에의해 저질러진 만행은 반드시 진실이 알려지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또다시강대국에 의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종속되어서는 안된다.이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통일을 통한 민족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이다. 68년 고엽제 관련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보상이 이뤄져야 하며,이외에 미국이 감추고 있는 치부를 밝혀내야 한다.이는 고엽제 피해자만의 문제가아니라,나라의 주권문제이자 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김정환[경원대학교 사학과 2학년]
  • [의열 독립투쟁](12)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28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남대문로 2가)과 동양척식회사(을지로 2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공격 대상이 토지를 장악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집중되던 일제의 기관이었으니 조선인들로선 그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씻어주는 쾌거였다.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나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1세에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였다.15세에 고향 마을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해신학문을 배우고,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養山學校)를 다녔다.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 의사를‘제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나 의사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고자맹세하고 1913년 21세때 1차 망명길에 올랐다.만주로 건너간 그는 북간도를거쳐 이동휘(李東輝)가 개설한 나자구(羅子溝)의 무관학교에 입학,군 간부로 성장하였다.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사리원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한 그는 결국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말았다.훗날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게 된 것은 이 일이 한 계기가 됐다.3·1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겸이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미곡상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1920년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을 계획하였다.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한 후 일경에 쫓기던 그는 마침내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마련을 위해 중국으로 제2차 망명길에 올랐다.상해로 간 나 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백범 김구 밑에서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 드는 밀정을 찾아내 박멸하고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특히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의 경찰과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 의사가 소속된 경무국 경호원들은 정보수집과경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들어 김구·여운형(呂運亨) 등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이는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 양성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1922년 10월 조직한 것이 한국노병회다.정부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하니 한 사람이라도 군사훈련을받아 군사요원이 되고 또 노동자가 돼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 출전하는 계획이었다.즉 한 사람이‘노동자’요‘병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군간부 양성을 위해 요원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나 의사는 첫 요원으로 파견된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3년 초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교,사관훈련을 받고 이듬해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그는 국내 침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세가지구도 위에 전개되고 있었다.임시정부와 한국노병회를 대표해 김구,제2차 유림단의거를 진행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그리고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金元鳳)이라는 세 세력의 협조에 의해 나 의사를 비롯한 요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는 투쟁이었다.즉 김구가 키운 군사 간부로서,김창숙이 국내 유림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원으로서 국내로침투하는 것이다.목표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5년 중국인으로부터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국내로 잠입하고자 하였다.그 과정을 보여주는 나 의사의 서신(금년 6월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 4권에 실림)을 보면 그가 천진에서 이승춘(李承春) 한봉근(韓鳳根)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내 침투용 선박 구입자금을 준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계획이 연기되다가 끝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변경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고,실행은 1926년으로 연기되었다.마침 1926년(병인년) 1월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조직됐다.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가 정체현상을 보이자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나 의사는 여기에 가입한 후 국내 침투계획을 재추진,1926년 12월26일 단독으로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마중덕(馬中德)이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갖고 들어왔다. 이틀 뒤인 12월28일 오후 2시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불발이었다.곧바로 인근 동양척식회사로 이동한 나 의사는 일본 경찰과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 불발이었다.거사 준비과정이 너무길다보니 폭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나 의사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자 마침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나의사는 숨지기 전 본인의 이름과 의열단 소속이란 것만 밝혔을 뿐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순국하였다./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나석주 의사 후손과 추모사업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대치 끝에 권총으로 자결,순국한 후 장남 응섭(應燮)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순국 직후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당시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무런 표식이나 봉분도 만들 수 없었는데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수 없다.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나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다.장남은 일찍 사망하고 장녀 응서(應瑞·1918년생)는 9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현재 나 의사는 직계 후손이 절손된 상태다. 지난 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나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당시동양척식회사 본점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 터)에서 나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추모 단체로는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으며 동상 건립도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결과다. 나 의사는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 표정으로 읽는 한국인의 모습/황규호저 ‘한국인 얼굴 이야기’

    ‘벽화에 등장한 인물들이 말을 탔다.모두가 발걸이를 밟고 곧추선 자세를했다.말을 탄 인물들은 힘이 넘친다.그래서 시위를 당긴 활이 부러질 듯 휘었다.…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위용이 가득하다’ 새 책 ‘한국인 얼굴 이야기’(주류성 펴냄)는 고구려 벽화고분 ‘무용총 수렵도’중의 ‘기마인물상’ 모습을 이같이 설명한다.책은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의 구석기인 얼굴에서부터 백제토기의 인물상,키다리 나무장승등 한국인의 얼굴을 사진을 곁들여 150여가지로 나눠 보여준다. 아울러 미술사 고고학 민속학 등을 활용해 당시의 풍속이나 시대상황을 설명한다. 지난 94년부터 98년까지 5년간 대한매일의 전신인 서울신문에 시리즈로 연재됐던 것을 당시 취재기자 황규호 전 서울신문 부국장이 보완해 책으로 펴냈다.값 1만3,000원. 13부로 구성된 글에서 저자는 ‘원시사회의 선사인’과 ‘불상과 보살상에나타난 얼굴표정’,‘조선시대 풍속화에서 그려진 사람들’,‘탈속에 숨겨진얼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저자는 이에 대해 “불상과 보살의상호(相好)는 자비로움을 넘어 아기얼굴같은 평화를 주며, 풍속화는 야하고 질퍽한 남정네와 여인의 춘흥(春興)을,괴기망칙한 탈모양의 얼굴은 탈의 힘을 빌린 민중들의 양반을 향한 걸쭉한질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불상에서 아기얼굴을 찾게된 계기와 관련,“경주 남산 선방사곡 본존불 돌부처의 상호를 보는 순간 첫 외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밝힌다. 오랫동안 종교 기자로 일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던 저자로서 자비(慈悲)의 불심을 찰나에 깨달았다고나 할까. 저자는 한국인의 얼굴을 단순하게 예찬하는 데서 한발 나아간다.뒤안에 숨겨진 사유나 사상 따위의 내면적 정신문화를 끄집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테면 흙을 아무렇게나 빚어 뭉뚱그린 것처럼 보이는 신라의 흙인형인토우(土偶)에서 사랑의 표정을 읽고 그 의미를 부여한다.토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의 지모(地母)’이다.젖가슴과 성기가 유난히 눈에 띄는 전라의 여인은 단추구멍처럼 길고 가느다란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 본다.여인은 무릎을 꿇고 배를 쓰다듬고 있다.토우는 한마디로 탄생과창조의 섭리를 터득한 신라인의 모습인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많은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환상을 받는다.쉽고 아름다운 저자의 격조있는 글이 독자를 삼매경 비슷한 경지로 빠져들게 하는것이다.물질문명의 고도화로 갈수록 심성이 메말라가는 요즘,우리의 고유한얼굴형상과 그안에 스며있는 정신적 유산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의 정서에 듬뿍 풍요로움을 담아주기에 충분하다. 정기홍기자 hong@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 평생 감기에 안걸리는 백신

    어느새 11월이다.광화문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몸 단장을 하고 사람들도제법 두툼하게 옷을 입고 다닌다.요즘처럼 환절기가 되면 항상 유행하는 것이 감기다. 어떤 사람은 매년 때만 되면 감기에 걸려 고생하기도 한다.얼마전 뉴스에한번 접종으로 평생 감기에 걸리지 않는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꼭 1년전이다.그때 우리나라는 참으로 지독한 감기,아니 독감에 걸려 몸살을 앓고 있었다.당시 나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있었는데 거의 밤잠을자지 못한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금창리 지하시설문제로 나라 안팎이 온통 떠들썩했다.미국와 일본 의회 일부에서는 북한에 대해 ‘나쁜 아이’는 혼을 내주어야 한다면서 이라크와 같이 공습 등초강경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그리고 이것은 ‘한반도 위기설’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 독감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그 중에서도 IMF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신인도를 높이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 나는 대통령을 뵈었다.대통령은 “이러다가 나라 전체가 큰일나겠다”“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문제는 물론 한반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방안을 마련해야겠다”면서 나에게 구체적인 방안마련을 지시했다.해열진통제가 아니라 근본원인 치료제 투약을 지시하신 것이다. 문제는 약을 처방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약을 우리만이 아니라 북한은 물론미국과 일본 등 이웃나라들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얼마후 나는 ‘당면 위협의 해소와 함께 근본문제 해결을 병행’해 나가자는 포괄적 접근구상을 마련,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그리고 우리의 처방을 제시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미국과 일본은 우리의 처방에 적극 공감을 표시하였다.특히한 미국인은 “한국인이 스스로 문제를 풀어 나가기 위해 처음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 11월이 왔다.감기는 또 올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는 이제 걱정하지 않는다.다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근본원인 치료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평생 감기에 안걸리는 백신과 같이 이번 포괄적 접근이라는 치료제로 한반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林東源 통일부장관
  • [기고] 양민학살 규명과 역사 재정립

    지난 9월말 AP통신에서 미군이 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비전투원인 민간인 300∼400여명을 무차별 사격하여 학살하였다고 보도하여 전세계에 알려졌고,이제 한·미 양국에 의하여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노근리 주민들의 처절한 투쟁이 세계의 양심을 움직여 겨우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정부도 마지못해 이에 응하는 꼴이 되기는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이전에 이미 거창양민학살사건,제주4·3사건,여·순양민학살사건,함평양민학살사건,보도연맹사건 등에 대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터이지만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전쟁기에 도처에서 자행된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사실이 하나둘씩 증언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경남 사천,충북 단양,경남 의령,경북 의성,낙동강 왜관교와 덕숭교 폭파사건 등이 그것이고 앞으로 더욱 밝혀질 것이다. 전쟁과 냉전의 와중에서 죄없는 민간인이 공권력에 희생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엄청나게 자행되었다. 가까운 동아시아 지역만 하더라도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면서 15만여명의 민간인이 총알받이로 희생되었다.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원폭 투하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이에 대하여 패전국인일본정부는 원호법으로 배상조치를 취하였다. 대만에서는 47년 대만을 점령한 국민당군에 의하여 2만여명의 양민이 ‘빨갱이’로 몰려 희생당하는 이른바 ‘2·28사건’이 발생하였다.50년대에는백색테러가 자행되어,5,000여명이 총살당하였다.그러나 92년 대만정부는 ‘2·28사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하고 진상규명과 배상조치를 취하여 명예를 회복시켰으며,백색테러에 대해서도 최근 배상과 명예회복 조치를취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아직까지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오히려 그 진상을 규명하려고 하면 불온시하여 탄압을 해왔던 것이 실상이다.범죄자의 자기방어행위인가. 제주4·3사건은 비전시기에 무려 3만여명이상의 양민이 학살된,동아시아최대의 양민학살사건이다.그리고 그것은 미군정기에(47년 3·1절사건) 시작하여 한국전쟁 때까지 지속된,장시간에 걸친 사건으로 이는 미군이 한국의경찰력과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자행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반세기가 지났으나 아직도 명예회복이나 보상조치는커녕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한국에서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을 은폐 또는 왜곡시켜 왔는가.국민을 보호할 책무를 갖고 있는 정부가 어찌하여 반국민적인 입장에서 과거사를 취급하여 왔는가.진실을 밝힐 의무가 있는 학계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가.한국의 언론은 미국의 AP통신의보도에 접하고서야 겨우 이를 문제로 삼는 것인가.우리의 인권관과 역사의식은 과연 어떠한 수준인가.이 나라가 야만의 땅은 아닌지 묻고 싶다. 국제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협약,48년 9월)과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49년 8월) 등을 통하여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민간인 집단학살과 비전투원인 민간인에대한 살상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이를 반인륜적인 행위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죄를 지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그 죄를 대상화하여 철저히 반성할 때 사죄받을 수 있다.과거의 잘못을 밝히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노근리 학살에 가담했던 미국인 병사는 고백과 사죄를 통해 ‘자기해방’을 실천하고 있다.미국정부도 노근리사건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전향적으로 진상규명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적 정의의 실현인가,아니면 정치적인 쇼인가.아직 단정하기에는 시기상조이지만 어쨌든 우리로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지경이다.우리정부도 역사 재정립 차원에서 하루빨리 전문가들로 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구성,진상규명과 역사바로잡기에 나서기를 바란다. 강창일 배재대교수,제주4·3연구소장
  • ‘호미 든 관음상’ 선다

    최근 조계종의 분규가 재연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불교 신자들이 종단의 화합과 안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호미 든 관음상’을 세워 눈길을 끈다. 사단법인 대한불교 전국신도회(회장 선진규)는 ‘호미든 관음보살상’을 제작,오는 3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화산 정토원에서 봉불식(奉佛式)을 갖는다. ‘호미든 관음상’은 관음보살이 한 손엔 약병을,한손엔 호미를 들고 있는12m 높이의 유리섬유재 입상으로 영구보존이 가능하다. 전국신도회가 이번 불사를 추진한 것은 지난 1959년 청년 불자들이 불심을모아 시멘트로 세웠던 ‘호미든 관음상’이 붕괴될 상태에 놓인 데 따른 것. 자유당 시절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민들이 보리고개에 허덕이던 때 동국대 학생회장이던 선진규 회장 등 대학생 불자 31명이 4m높이의 ‘호미든 관음상’을 세웠다.당시 학생들은 비구 대처승간의 갈등으로 불교계의 위신이 땅에떨어지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관음상이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파손위기에 빠지자 당시 보살상제작에나섰던 불자를 중심으로 보살상을 다시 조성하게 된 것.그때 보살상을 제작했던 조각가 박일헌씨가 이번에도 직접 제작을 맡는다. ‘호미든 관음보살상’은 원래의 보살상이 서있던 자리에 봉안되며,기존 보살상은 새 보살상 앞에 함께 세워진다. 선진규 전국신도회장은 “새 천년을 앞두고 욕심과 분란으로 얼룩진 불교계에 조금이나마 자숙의 뜻을 전하고 신도들에게 새희망과 활력을 주기위해 보살상을 조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 [기고] 美 ‘포괄 核禁’ 부결 의미

    지난 13일 미국 상원은 2년여 동안 계류중이던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을빌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부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으로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CTBT는 클린턴 미 행정부 주도로 96년 9월 유엔총회에서 결의안 형식으로채택됐으며 미국이 첫번째 서명국이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기울여온 대량살상무기 추방 노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결과를 빚게 됐다. 미 의회의 CTBT 비준동의안 부결이 국제비확산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우선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먼저 CTBT 자체에 관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미국의 비준 거부가 조약 자체의 발효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조약은 북한·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 핵능력을 보유했거나 개발중인 것으로 알려진 나라들을 포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명한 전세계 44개국(의무가입국)이 가입해야 발효되게 돼 있기 때문에 이 나라들이 가까운장래에 가입할 가능성이 적은 현재로서는 조약 자체의 발효에 미치는 영향은별로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탈냉전 이후 국제적인 핵비확산 노력 전반에 걸쳐 미국이 지도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핵물질 수출통제 등을 비롯한 관련 국제체제에 큰 주름살을 드리우게 됐다.유엔과 제네바 군축회의(CD)에서 논의중인 ‘핵분열성물질 생산금지협정’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와 협의중인 제3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Ⅲ)도 당분간 어렵게 됐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94년 제네바 북·미 핵합의 이후 우여곡절 끝에지켜져 오고 있는 북한의 핵 동결과 관련,‘과거의 핵’ 규명작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른바 특별사찰을 둘러싸고 북한이 엉뚱한 주장을 들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95년 5월 유엔에서 핵비확산체제의 기본 틀인 핵확산금지조약(NPT)의무기한 연장안이 통과될 때 비핵국들은 CTBT 조기체결과 함께 핵보유국들의핵군비 감축 노력을 명기했기 때문이다. 미 의회가 대통령이 서명한 국제조약에 대해 비준을 거부한 것은 1920년 1차대전 종전후 당시 윌슨 대통령이 산파역을 한 베르사유강화조약 비준 부결이후처음 있는 일이다. 이 강화조약의 핵심내용중 하나는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LN)을 창설하자는 것이었는데 당시 전쟁에 식상한 의회의 고립주의 지향 분위기의 벽을뛰어넘지 못했다. 강대국 미국이 가입하지 않은 국제연맹 체제는 결국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16년 만에 사실상 해체됐던 역사적 경험이 있다. 이번 CTBT 비준 부결은 공화당 지배의 의회와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들을 포함한 일부 보수적 성향 인사들의 안보논리가 작용한 것 같다. 아무튼 내년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클린턴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과 맞물려 향후 파장의 귀추가 주목된다.미국은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고도이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연맹체제’ 자체를 약화시킨 적이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이르게 됐던 과거의 경험에비춰 미국은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시현해 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김경수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20세기 문명기행] 4. 대량학살과 세계대전

    “1917년 육군에 입대한 나는 1차대전중 프랑스 육군에 배속됐다.우리가 속한 807 파이어니어 보병대원은 350여명이었다.파이어니어 보병대는 전투부대가 아니고 교량부설이 주임무였다.그런데도 귀국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12명 뿐이었다”(뉴스위크지에 실린 미국인 참전용사 허버트 영 회상 중에서). 1차대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흉탄으로 어처구니 없이 시작됐으나 9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희생자수가 19세기 최대의 국제전이었던 보(普)·불(佛)전쟁의 15만명보다 무려 60배나 많다.1차대전이 20세기 ‘대량살상의 시대’를 연 셈이다. 대량살상의 시대를 여는 데는 과학기술도 ‘한몫’을 했다.독일군의 독가스,영국군의 탱크가 처음 등장함으로써 대량살상을 부추긴 것이다.대량살상 신무기는 지상에만 있지 않았다.독일군은 당시 혁명적 교통수단이었던 비행기를 폭격에 동원,영국을 초토화시켰고 U보트(잠수함)로 연합국 전투함을 수장시켰다. 30년대말부터 히틀러의 광기로 세계는 초토화됐다.반(反)공산주의 및 인종차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나치즘은 악의 뿌리인 소련지역까지 영토를 확장,독일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유대인을 배척하자고 주장했다.이 때문에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고 2차대전이라는 극단으로 몰고 갔다.히틀러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촉발된 2차 대전은 6년간의 전쟁으로 6,500만명의 생명이빼앗긴 인류 최악의 전쟁이었다.전쟁이 끝날 무렵 등장한 원자폭탄은 대량살상 무기발전의 ‘절정’을 이뤘다. 2차대전이 끝나자,또다른 불행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세계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유럽을 원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자,소련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진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냉전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한데 이어,중국마저 공산화됨으로써 공산주의는 전세계 인구의 30%를 지배하게 됐다.50년대 벽두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들로 시작됐다.소련과 중국,두 거대 공산국가는 2월15일 ‘중소동맹’결성을 발표,공산주의 연합전선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냉전의 ‘유탄’은 은둔의 나라 한반도로 튀었다.북한군이 6월25일 새벽 전격남침하자 미군과 유엔군이 급파됐고,소련에 이어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동서냉전이 열전으로 바뀌었다.3년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한민족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채 ‘미완의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250만명의 한국인과 100만명의 중국인,5만여명의 미국인 등 4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서진영이 맞붙은 두번째 결전장인 베트남전쟁은 ‘무적함대’ 미국에 첫패배를 안겼다.동남아지역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50만명 이상의 미군을 투입하고 폭탄을 무차별 쏟아부었으나 결국 쫓겨났다.5만5,000명의 미국인과 100만명 이상의 목숨을 바치고서야수렁에서 빠져나왔다. 냉전의 악순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프랑스 유학중 공산주의에 심취한폴 포트(98년4월 사망)가 무장투쟁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지식인 등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어린이까지 닥치는대로 학살했다.인구의 4분의 1인 200만명이 희생돼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만들었다. 소련의 개방·개혁정책을 실시로 냉전에 종지부를 찍자마자 민족 분규로 대량학살이 자행됐다.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는 ‘인종청소’가 그치지 않고 르완다 등 아프리카에서도 무차별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다.그러나 동티모르가오랜 내전을 딛고 독립을 쟁취했고,북아일랜드는 신·구교도간의 유혈분쟁을종식시켰다.새천년을 앞둔 세계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김규환기자 khkim@ *인류의 공포 核무기 사라질까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뒤 지구촌은 핵무기의 악몽에 시달려왔다. 미국과 옛 소련은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해 핵경쟁을 시작,전인류를 수십번죽이고도 남을 양의 핵무기를 생산,배치했다.여기에 19세기의 강자 영국과프랑스가 뛰어들었고 중국도 뒤질세라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46년부터 96년 말까지 50년간 이들 5개 핵강국들은 무려 2,045회의 핵실험을 실시했다.이중 미국이 1,030회로 가장 많고 러시아(715회),프랑스(210회),영국 및 중국(각각 45회)의 순이었다.지하핵실험이 1,517회였다. 핵강국들은 이같은 핵실험을 거쳐 다량의 핵무기를 생산,배치했다.96년 말현재 모두 3만9,047개나 된다.실전배치한 것과 비축분,폐기대기중인 것을 다합한 것이다. 러시아가 2만5,000개로 가장 많다.미국은 1만2,937개로 미국과 러시아가 전세계 핵탄두의 97%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핵실험과 무기는 인류복지 증진에 쓰였을 돈을 투입함으로써 가능했다.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40년부터 96년까지 핵무기 개발과 생산 등에 5조5,0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이는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 총매출과 맞먹는 돈으로 미국인 한사람이 2만2,000달러를 부담한 꼴이라는 계산이다.옛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경쟁 패배로 해체됐으나 ‘핵유산’은 여전히 옛 소련의 자식들인 동구국가들에 이어지고 있다. 전세계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을 통해 추가 핵실험과 핵무기 확산을 막으려 하지만 실효성은 없다는 지적이다.그나마 미 의회의 비준 거부는업친데 덮친격이 되고 있다. 더우기 미국은 2008년까지 매년 36억달러 이상을 핵실험과 운반수단의 개발 등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인도,파키스탄,북한 등 제3세계 22개 국가들은핵프로그램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때문에 새천년에도 핵무기가 전인류의 최대 악몽으로 남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희준기자 p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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