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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생활 28년 마치고 24년간 육림사업 정시환씨(인터뷰)

    ◎“깨끗한 산하 가꾸는게 나라 바로 세우는 길”/남덕유산 2백만평 20년만에 울창한 숲 변신 뿌듯 환경의 달과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은 독림가 정시환(73)씨의 감회는 남다르다. 경찰생활 28년,촌부생활 24년. 이름을 떨치던 경찰관에서 국토사랑·나무사랑을 몸소 실천한 독림가로서 특이한 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남덕유자연농원회장.현재의 직함이다. 73년 퇴직한 뒤 못다한 학문에 열중하는 가운데 틈틈이 고향에 내려가 나무를 심던 정씨는 재산을 정리,경남 남덕유산 한자락을 매입했다. 『산막과 천막을 마련한 뒤 잡목을 베고 땅을 파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석유등을 벗삼아 조림·육림·농사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으며 마을사람과 손잡고 녹색사업을 펼쳤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골짜기 2백여만평이 무공해지대로 조성됐고 산은 울창한 밀림으로 바뀌었다.농약과 비료 안쓰기운동을 벌인 결과다. 『고독하고 힘든 긴 세월이었지만 울창한 산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도로를 포장하고 다리를 놓고 가로등과 공중전화를 설치하는 등 마을 현대화에 앞장선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그를 원로경찰로만 기억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 경남 거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 해방 뒤의 무질서한 사회를 보고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질서유지가 중요하다고 판단,45년 22살 때 경찰대학의 전신인 조선경찰학교에 입학했다. 두달만에 교육을 마치고 일선에 나왔을 때는 나라살림이 어려워 정복을 지급받지 못했다.경찰이라고 쓴 완장을 두르고 업무를 보았다. 6·25까지는 공비토벌에 나섰고 전쟁이 나자 경감계급장 대신 대위계급장을 달고 미국 7사단에 배속돼 중대장으로 백두산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경찰관으로서 드믈게 무공금성·충무은성·무공훈장 등 훈장 30여개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뒤 서울과 부산 중부경찰서장 등 6곳에서 서장으로 활약했다.특히 재직중에 석사학위를 3개나 받았고 은퇴 뒤에는 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나라 바로세우기로 경찰에 투신했듯이 깨끗한 산하를 후손에 물려주는 것이 조국을 바로세우는 것이라고 판단,산촌에 뛰어들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굵은 손마디를 빼고는 전쟁 등 각종 격변속에서 인생을 헤쳐온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온화한 표정과 품위 있는 말솜씨가 제자들과 평생을 지낸 노학자를 연상시킨다.자연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변화하는 밀수루트(압록강 2천리:31)

    ◎고기잡이배 위장 강상서 물물교환/강물 길어오는척 하며 물동이 바꿔치기도/연변조선족 국경세관 매수… 북건너가 “장사”/연길∼장백 버스승객 절반이 보다리 장사… 짐져주고 푼돈받기도 압록강 양안에는 10개소의 국경세관이 있다.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장백∼혜산,임강∼중강,집안∼만포,관전∼초산,단동∼신의주가 마주한 가운데 세관을 두었다.일요일을 제외한 평일 낮이면 중국쪽 세관에는 북한땅으로 장사를 떠나려는 사람이 늘 웅성댔다.그중에서 산더미만큼이나 짐을 꾸린 사람과 말을 걸어보면 모두가 연변사람이다. 연변사람이 두만강유역을 마다하고 압록강유역으로 몰려든 까닭은 무엇인가.두만강유역 세관을 통관하기보다 압록강유역 세관을 빠져나가기가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압록강유역 사람에 비해 일찍 개방의 물결을 탄 연변사람이 북한을 상대로 하는 장사에서 단맛을 보고 너도나도 두만강을 건너다니며 세관원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데서 비롯되었다.이쪽저쪽 세관원한테 경쟁이라도 하듯 뇌물을 찔러 여간한 물건이나 돈을 주고는 매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보따리장수가 압록강유역으로 몰려들었다.매일 한 차례씩 연길∼장백을 연결하는 버스손님 가운데 절반이상이 연변의 장사꾼이다.이들은 코밑의 두만강 건너 북한땅에 가기 위해 압록강으로 돌아 우회하고 있는 것이다.요령성 단동시에 사는 친구 황윤삼의 집에 묵을 때 그의 어머니가 푸념삼아 무심코 흘려보내던 말을 귀담아들었다. ○세관마다 무장 경비병 『연변사람 때문에 우리가 골탕을 먹는다꾸마.뇌물 찡궈주는 버릇을 해놔소리 여기 사람들 푼전벌이도 막았지비.젠장 양쪽 세관들에 뜯기고 친척들 만나 농가주고 나면 아무일도 아이되지 않겠슴등.연변사람들 골치아프다이』 압록강연안은 깊은 산지가 많은 데다 개방시기도 연변보다 늦었다.따라서 조선족의 생활이나 의식도 연변에 뒤떨어졌다.그들의 국경 나들이 단독장사는 주머니형편이 좋지 않아 엄두도 못낸다.자기 짐에 연변장사꾼이나 북한에 사는 중국화교의 짐을 덤으로 더 져다주고 몇푼씩 뒷돈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돈이 있으면 제 장사를 하는데 뼛골빠지는 힘을 들여 남의 장사만 해주는 꼴이 되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 탁창린(52)도 그런 조선족이다. 『중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조선의 친척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볼 수 있디요.또 조선에서는 중국에 사는 친척을 3년에 한번은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다고 기래요.기래서리 나는 매년 신의주에 사는 누님집을 찾아가디요.쌀과 옷가지,술 따위를 갖고 가서 주는데 갈 때면 의례히 남의 짐이 더 많습네다.커다란 보따리 하나 건네주면 3백원을 받디 뭔네가.통이 큰 장사꾼들은 원체 짐이 많아서리 통과를 못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 부려먹는 겁네다.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합네다만 노자라도 덜자는 심산에서 짐을 지디요』 오염된 두만강물이 맑은 압록강물을 흐려놓는 꼴이기는 하지만 연변 장사꾼이 거상은 아니다.어디까지나 보따리장사꾼일 뿐이다.비록 남의 등을 빌렸을지라도 세관을 거쳐 들어가니까 절반은 합법이라고 할까.양쪽 세관을 그렁저렁 이용하는 보따리장사꾼은 약과고 밀수도 성행하고 있다.세관마다에 총을 멘 경비병이 있고2천리 국경선 안정구간에 무장경찰대가 물론 보초를 선다.불법월경범은 구류와 함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담배 한보루에 동 1㎏ 그러나 국경에는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겨울이면 강 한복판 얼음에 구멍을 뚫어 양안 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터라 아낙들이 서로 물동이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으로 거래하는 경우도 있다.여름에 물이 불면 헤엄을 쳐서 국경을 넘나들기 일쑤다.강폭이 넓은 하류에서는 고기잡이를 하는 척 뱃머리를 서로 대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바꾸어온다는 것이다.국경선을 넘나드는 시기는 얼음이 어는 겨울도 꽤 선호되었다. 요령성 관전현 장전향 나고소촌은 북한의 삭주군 수풍리와 마주한 작은 마을이다.그러나 수풍발전소가 있는 마을이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2백여가구가 사는 마을 전체를 6개 소조로 나누었는데 조선족 13가구는 제4조에 소속했다.이들 소조의 조선족은 소수임에도 요즘 잘 살고 있다.소조의 소조장 부인 손금숙(38)아주머니의 말에는 희떠운 구석도 있었으나 꽤 재미를 보는 듯싶었다. 『우리 조선족은 논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 살았디요.근래는 밀수덕에 돈푼이나 쥐게 됐습네다.싸구려 담배 한보루에 동 1키로를 바꾸는데 륙원 벌이는 거뜬하단 말입네다.배를 타고 강에 나가 고기그물을 늘여놓다가 기회만 다면 슬쩍 바꿔치기를 하니 귀신인들 알겠습네까.어떤 때는 한족들의 통역을 해주고 수고비를 챙기디요.통역은 되도록 여자들을 써서리 우리 조선족 여자들이 돈을 잘 벌디요.강건너 사람들도 여자가 나가면 별 의심하지 않고 쉽게 접촉하네까…』 거래는 모두가 물물교환이다.조무래기밀수도 그러하지만 여법한 무역 역시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지난 1994년께만 해도 계약한 물건을 북한에 보내주고 필요한 물건을 뒤에 받았지만 지금은 맞바꿈하는 동시교역방법을 채택하고 있다.엄청난 금액의 물건을 보내주고 맞먹는 물건을 받지 못해 파산한 업체가 많아 동시교역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를 중국쪽에서만 보는 것은 아니다.양쪽이 피장파장이어서 북한쪽에서 물건을 못받는 경우도 있다.지난해 7월 신의주에서 단동의 어느 업체로물건값을 받으러 왔다가 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빚을 진 단동의 업체는 융숭한 대접으로 빚을 얼버무릴 요량을 대고 신의주에서 온 사람에게 주연을 베풀고 잠자리에 아가씨를 넣어주었다.그런데 경찰의 단속에 걸려 신의주 사람은 강제추방되고 아가씨는 벌금 8천원도 모자라 매음죄로 구류를 살았다.술집주인은 아가씨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5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배고파 국경넘기도 밀수나 무역은 돈을 벌기 위한 짓이다.이와는 달리 헐벗어 춥고 못 먹어서 배가 고프기 때문에 국경선을 넘는 일도 은밀히 이루어졌다.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길림성 장백현 14도구진의 조선족은 기막힌 사연 하나를 털어놓았다. 『지난해 겨울이었댔는데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디.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가 하고 막 불을 죽인 참이어서 다시 불을 켰수다.문을 열었더니 강건너 사는 사촌이 불쑥 나타납데다.그 추운 설한인데 핫바디에 양말도 안 신고 머리를 수건으로 싸맨 꼴은 정말 딱해 못볼 지경이었수다.뒷골방에 숨어 꼭 일주일을 묵었디요.떠나던 날 밤에 쌀 한포대와 밀가루 한포대,부식을 챙겨주었댔습네다.짐보따리를 새끼줄에 묶어 얼음판이 된 강을 건너는 것이 멀리 보입데다.자세히 건너다보니까 식구들이 다 나와 반기는데 울음이 왈칵 치밀었디요』 압록강유역 조선족의 인정은 아직도 메마르지 않았다.그래서 북한의 친척이 얼음이 풀리고 나서도 건널지 모를 압록강 물길을 걱정했다.
  • 민족문화 보존의 현장(압록강 2천리:29)

    ◎심양 금싸라기땅에 「한글서점」 한곳 의연히…/“음식점·가라오케 차리자”… 온갖 유혹 거절/“서점은 민족문화의 샘터” 자부심으로 지켜/단동조선족문화관도 농악 등 보급에 앞장 요령성 심양시 서탑거리는 조선족이 많이 몰려서 사는 조선족 집거구다.광복 전에는 너와집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고층건물이 촘촘히 자리잡았다.조선족기독교회관과 고려호텔이 우뚝 솟았는가 하면 조선족 상점과 한국식 전문음식점,나이트클럽,가라오케,사우나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 호사스러운 거리에서 정말 신기한 상점 하나를 발견했다.조선어문,그러니까 한글판 책을 파는 서점이었는데 비좁기 한량없었다.빌딩가를 비집고 끼어들 듯했으니 전봇대에 매미 붙은 꼴이었다.서점 안을 들어섰을 때 점원 셋에 손님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조선어문 서점이기는 했으나 3분지2는 한어문 책들이 서가를 메웠다.1백여종에 불과한 조선어문 책들은 그나마 나온지가 오래된 고서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조선족 출판사들의 위기가 서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출판시장은 여느 시장과 다르다.인간의 심성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서점의 책이거니와 지식시장이 바로 출판시장인 것이다. 우리 말로 된 책과 한어문 도서의 비례는 수천대 1이 되고도 남는다.이를 조선족의 독서율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차이가 난다.한어문 도서를 보는 사람들도 많겠지 하는 자위를 해보았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조선문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조선족인데도 한어문 도서를 사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문화수준이 가장 높다는 조선족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조선어문 책 100여종 그 서점에서 점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 시간여를 머물렀을까,마침 중년의 손님 한 분이 들어왔다.그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을 이것저것 골랐다.「국어대사전」에서 소설,시집 등을 한 무더기 골라놓고 선뜻 돈을 치렀다.점원들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나도 덩달아 반가워 웬 책을 그리 많이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출판사와 무관하지 않은터라 자연히 관심이 쏠렸다. 그는 서관시에서 심양으로 출장오는 길에 서점을 찾았다고 했다.서관시에도 조선족이 3만2천명이 살지만 조선어문 서점이 없다는 것과 모처럼 출장을 오면 한 보따리씩 책을 산다는 것이었다.물론 한어문 서적을 보긴 해도 우리 민족의 말로 쓴 서적처럼 정감이 우러나지 않는다면서 책을 가져가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책에 보푸라기가 일 정도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의 직업은 교원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손님의 이야기 줄거리는 대강 그러했는데,사투리 말의 억양이 너무 강하다고 느꼈다.심양이나 연변에는 한국 바람이 불고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아 사투리가 상당히 순화된 것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었다.이를테면 출장을 「툴당」이라고 한다든가,책을 「택」,정감을 「덩감」이라고 서슴지않고 표현했다.우리 민족문화에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울컥 일었다.심양이나 연변 사람들은 그런대로 민족문화를 곁에 두고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그 고마움을 못 느끼고 사는지도 모른다.우리가 살아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공기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심양시 관할구역에 사는 조선족은 9만명에 이른다.또 요령성 전체에는 14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그런데 조선어문 서점은 달랑 하나밖에 없다.조선족 숫자로만 보아서는 이 서점의 책들은 벌써 동이 났어야 한다.가라오케나 나이트클럽에서 수백원,수천원씩 날리고 몇 백원 하는 한국화장품을 얼굴에 칠하면서도 몇원에 불과한 책은 비싸다고 도리질을 한다.하루에 한 권을 못파는 날도 더러 있다는 것이 서점 책임점원의 말이다. ○조선족 14만명 거주 『우리 서점은 심양시의 금싸라기 땅입네다.이런 자리라면 무얼해도 장사가 되디요.건물을 빌려 술집이나 복장점 차리겠다는 조선족 장사꾼이나 한국 사람들의 협상이 자주 오디요.이 서점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문화진지인데 그럴 수야 있습네까.진지를 버린 군인은 도주병이라 하디요.우리는 절대 도주병이 안될 겁네다』 그렇듯 장사가 안되는 서점을 민족문화의 진지로 여기고 고수하는 그 사람들에게 존경이 갔다.조선족문화사업은 돈을 죽이는 사업이다.그래서 돈을 벌지 않고는 문화사업을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문화사업을 하는 이들도 있다.안동시 조선족 문화관 윤희봉 관장이 그런 사람이다.요령성 봉성현 대보진 진장으로 있다가 문화관장을 자청해온 그는 젊은 정열을 문화사업을 위해 불사르고 있는 참이다. 『봉성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한족 학생들과 씨름을 해서리 내가 이긴 적이 있수다래.그러자 뭐라고 한지 아십네까.너희 조선족들은 술 잘 먹고 싸움 잘 하는줄만 알았는데 씨름도 잘 하는구나라고 합데다.그때는 약이 오르더니만 곰곰이 생각하니끼리 일리가 있더란 말입네다.민족에게는 어떤 자질이 있는 것이라고….그래서리 민족의 자질이나 문화전통을 지켜야한다는 결심을 했수다.연변대학 조선어학과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디요.문화사업을 하기 위해 진장 자리를 버리고 문화관장을 원해서 왔습네다만 어려운 일도 많았다 이겁네다』 그가 관장으로 취임했을 무렵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국가에서 주는 돈으로는 21명의 문화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도 벅찼다.그러지않아도 비좁은 사무실 방 한칸을 도서실로 쓰고 나면 관원들이 한꺼번에 앉을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그는 우선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문화관 이름으로 음식점과 무역회사를 꾸렸다.그리고 수입금에 대부금을 보내 단동시 교외에 농장을 만들었다. ○음악·미술반 등 운영 돼지 1백마리와 소 40마리로 시작한 농장은 번창했다.당시 64만원을 들여 만든 농장에서 나오는 돈으로 지금은 각종 문화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단동시 조선족학교를 중심으로 음악·미술·무용반을 운영하는 이외에 관전현 석초구향 보산촌 퉁소대,의권향 은가촌 농악대를 육성했다.그리고 봉성현 대보진 조선족학교 악대편성을 도왔다.특히 조선족 민속활동을 크게 후원하여 지난해 5월 단동시가 대규모로 주최한 「동방 비단의 길 절」행사에 참가한 조선족팀이 큰 인기를 끌었다. 세상이 어떻게 꼬여가든 민족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그들이 있는 한 조선족은 압록강 유역 주체 민족의 하나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어린 생각을 해보았다.
  • 독립운동가 양세봉 장군(압록강 2천리:27)

    ◎재만조선군 총사령… 20년대 항일전 주도/노구대전투 등 승리 이끌어… 군관학교도 설립/해방직후 평야서 유해모셔… 서울선 훈장 추서/조선족은 요령성 신빈현에 흉상 건립해 추모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향 조선족학교 운동장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양세봉(1896∼1934년)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석상은 지난 1989년8월29일 낙성되었다.신빈현과 왕청문 지방정부,북경과 동북3성의 50여개 단체대표 5백여명이 낙성식에 참석했다.중국 인민대표대회 대표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전 40집단군 정위였던 정순주소장,중국 공안부 심계실장 서세명의 아들 서철 등 굵직굵직한 조선족 인사들이 나왔다. 장군의 동상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큰 뜻을 지닌다.석상 건립을 발기한 사람은 신빈현문화관 전정혁(41)씨인데,그는 자전거를 타고 장군의 활동무대였던 옛 흥경땅 신빈현 일대를 모두 누볐다.석상건립을 제의하면서 장군의 항일운동사료도 함께 수집했다.그 결과 신빈현 당위원회 전 부서기 최선죽(63)선생 같은 조선족이 발벗고 나섰다.요령조선문신문,길림신문,국가민족사무위원회,연변대학,연변조선족사학회,흑룡강조선말방송,민족출판사가 후원을 자청했다. 조선족의 의견이 집약되자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노년층 조선족이 주동이 되어 모금운동에 뛰어들었다.동북3성은 물론이려니와 북경 천진 등지를 메주 밟듯 누볐다.침대차 한번 타지않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대합실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신빈현 조선족문화관 전 관장 김순화 선생이 무순시 제1조선족중학교에서 양세봉장군의 독립투쟁업적을 강연하고 돌아온 이후 학생들이 2천8백87원을 모아 보냈다.중국 전역의 50여개 조선족단체와 1천4백여명의 개인들이 석상 건립비로 맡겨온 돈도 10만원에 달했다. ○3·1운동직후 독립군 투신 중국의 조선족 뿐 아니라 중국에 와 있는 한국인도 성금을 내놓았다.중국에 주재한 한국한화집단 북경판사처(대표 신영수)와 동북농업대학 초빙교사(교환교수)인 한국 사진작가 유은규선생과 그의 일본인 부인 도타이쿠코여사도 동참했다.그럭저럭 모두17만5천원이 모금되어 심양 노신미술학원 조각학부 주임 전금택선생에게 조각을 맡겼다.그래서 기단을 포함한 높이 5·4m의 양세봉장군 흉상이 제막되었던 것이다. 양세봉장군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서봉,윤봉이라고도 불렀는데 호는 벽해다.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 천마산을 근거로 한 천마산대 독립군에 첫발을 들여놓았다.다음해 압록강을 건너가 광복군총영을 거쳐 1923년 육군주만참의부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1929년 재만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조직했을 때는 국민부 소속 독립군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그리고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총사령이 되어 일본군이 차지한 영릉가성과 흥경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노구대전투와 쾌대모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1932년 일본경찰의 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두도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끝에 전사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해방이후 북한 당국이 평양으로 데려갔다.한국에서는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고 한다.장군의 직계 가족들은 평양으로 갔지만 동생 양시봉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 요령성 청원현 북삼가촌에 살고 있다.양시봉의 부인이자 장군의 계수인 김화실(85)할머니는 시숙 양세봉의 행적을 어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똑똑히 기억해냈다.열세살 나던 1924년에 양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할머니는 아직도 총기가 대단했다. ○일 밀정 계략에 빠져 전사 『흥경 진코우츠로 시집을 왔디요.위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에다 청춘과부가 된 시숙모가 아들 둘을 데리고 얹혀 삽데다.그리고 시숙 양세봉장군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에 계시지 않고 큰 형님만 함께 사셨디요.거기에 둘째 시숙 내외·시누이·우리 내외를 합해 열두 식솔이 우굴댔단 말입네다.강지주네 밭 닷새갈이를 소각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바빴디요.그 잘난 살림에 독립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들락거렸으니 사는게 말이 아니었습네다』 양씨 일가의 집은 당시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비밀숙박처였고,믿음직한 후방 기지였다.독립군이 묵는 날이면 없는 살림에 한 끼니라도 더 따뜻하게 대접할 요량을 대고 삼동서가 애를 썼다.맏시숙 양세봉은 모처럼 집을 찾을 때면 의레 걸레 같은 양말을 한짐씩 가지고 왔다.며칠을 몇밤을 새워 꼬매 다시 보내곤 했다.매년 겨울철에는 반입한 무기를 산골짝에 감추었다가 해동하면 독립군부대로 보내는 일도 양씨 일가가 맡았다. 그런 어느 날 양세봉이 느닷없이 집에 들렀다.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2년 일이었는데,가족이 여러패로 나누어 빨리 피신하라고 재촉했다.양세봉이 편지를 써주어 청원현 소산성에 사는 이영준을 찾았다.그의 도움으로 소산성에 자리를 잡았으나 그해 양세봉장군은 전사했다.전사 소식을 들은 동생 양시봉은 명주 20자를 사가지고 흥경으로 가서 형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기슭에 고이 묻었다.일본군이 장군의 아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또 눈에 쌍심지를 켜 양씨 일가는 40원에 소를 팔아 종손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군 묘파고 시신 목잘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양세봉장군의 시신을 모셨을 당시 정황을 기억하는 노인한분이 아직도 생존해있다.신빈현 왕청문향 고려산촌의 김효순 할머니가 그분이다.독립운동가 김두선의 딸인데 아버지는 양세봉장군의 휘하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독립군 연락을 자주 다녔디요.양세봉장군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되어 일본놈들이 들이닥치더구만.그놈들은 아버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장군의 묘소를 대라고 족쳤디요.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끼리 어머니한테도 매를 댔수다.결국은 알아내어 묘를 파서 장군의 시신을 끄잡아 냈습네다.기리고 아버지더러 도끼로 시신의 목을 치라고 다그칩데다.아버지는 막무가내를 댔디요.하는 수 없는지 놈들이 제손으로 목을 쳐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 가면서 아버지에게 총질을 했지 뭡네까.아버지도 비명에 돌아가셨디요』 양세 봉장군의 유해는 지금 고려촌 고려산성 기슭을 떠났다.해방 이후 북한에서 모시겠다고 파갔다.김효순 할머니 증언대로 두개골이 없는 유해였다고 한다.이제 양세봉 장군의 살아 생전 모습을 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손가락 몇개를 꼽을정도가 되었다.얼마전 개주시 쌍천안촌에서 만났던 양세봉장군의 비서 박윤걸 노인도 이번 여행길에서는 만나지 못했다.그토록 출간을 기다렸던 「양세봉 장군 회고록」을 손에 쥐지 못한채 지난 91년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 시인 신경림(작가를 찾아:3)

    ◎“시는 약자를 위안하는 노래죠”/뜨내기 몰리는 광산촌서 자라 팔도민요 친숙/민요기행지역 흑룡강성까지 넓힐 생각/같은 일 되풀이 않게 문화계도 과거청산 해야 「돌아다니면서 내가 분명하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 편하게 살기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지난 90년 민요기행시집 「길」후기에다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92년 나온 웅진출판의 신경림 문학앨범에는 인상적인 흑백사진 한장이 실려있다.고향마을을 찾은 신씨가 만면에 반가움의 웃음을 피워올린 채 길에서 마주친 촌로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신씨를 모르는 이라면 한손에 장바구니를 꿰어 든 오척단구의 이 사내가 사진의 배경을 이룬 추레한 시골마을의 터줏대감중 한사람이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을 것이다. 남한강변 농투성이들의 고달픈 사연을 유장한 가락에 담아온 신씨는 민중의 정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민중시인의 하나로 상찬받아왔다.하지만 이같은 평가는 한장의사진 만큼도 신씨를 알려주지 않는다.주름살 고랑마다 애기보살같은 웃음이 가득 괸 순한 얼굴.사람들이 편하게 해주는 이를 좋아한다는 그의 글이 맞다면 사진속 신씨는 누구라도 곁으로 끌어들일 소탈함과 친근함으로 넘친다. 2월도 거의 이울무렵 신씨가 잘가는 인사동 찻집에서 따끈한 유자차 한잔을 놓고 그와 만났다.동장군의 늦기승으로 바깥바람은 맵싸했지만 신씨가 뿜어내는 친화감 때문에 대화의 자리는 차라리 후끈거렸다.신씨는 고서점을 둘러보러 한주에 두어번씩은 인사동에 나온다고 했다. ○소탈·친근감 넘쳐 『70년대까지만 해도 동대문,청계천 부근에 고서점이 참 많았죠.잘만 뒤지면 값비싼 책들을 휴지값에 구할수 있었어요.내가 하도 서점 돌아다니길 좋아하니까 60년대말 있던 출판사에선 아예 고서점에서 좋은 책 구해오는 일만 전문으로 맡겼지요.서점에서 몇번씩 마주쳐 친해진 이들도 있어요』 큰 노다지광을 낀 농촌마을에서 광산 한귀퉁이를 불하받아 사람을 부리던 아버지 밑에 자란 어린시절,책탐 많은 삼촌과 당숙들 덕에 집엔얼마든지 책이 있었다.이를 넘보며 신씨는 자연스레 문학과 친해졌다고 했다. 『국민학교 때 벌써 이광수며 이태준을 봤으니 조숙했지요.시에 빠진 것은 백석을 통해서구요.하지만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 고장엔 항상 얘기며 노랫가락이 넘쳤어요.서울가려면 꼭 거쳐야할 길목이었던 데다 광산이 문을 열면 함경도부터 전라도 남단까지 각곳에서 뜨내기들이 일을 찾아 흘러왔거든요.장날 돼지 잡아놓고 둘러앉은 이들이 한가락씩만 뽑아도 팔도곳곳의 민요를 다 들어볼수 있었던 거지요』 이때 들었던 노래들은 오래도록 귓전에 남아 훗날 그를 민요기행길로 내몰기도 했다.「겨울밤」「파장」「목계장터」「어허 달구」 등 그의 많은 시들이 다 쓰러져가는 농촌 삶의 구접스런 모습을 민요조에 결합시켜 실감을 더한 작품들.「새재」「남한강」「쇠무지벌」 등 장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도 모두 민요가락에서 나왔다. 『먼젓번엔 중국갈 계획까지 세웠다가 딴일로 미뤘죠.흑룡강성 어딘가에 경상도 영천 사람 몇백명이 이주,1백년전 우리 민요를 보존하며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답디다.이런데를 찾아 국외로도 민요기행 지역을 넓혀보려 해요』 이처럼 떠돌이로 거침없이 흘러온 그가 지난해엔 「한국문학포럼」에 초대돼 프랑스에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이 행사에 대해 시인은 퍽 인상깊더라고 말한다. 『파업이 한창이라 구경은 잘 못 다녔지만 그들이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든 말은 빈말이 아닙디다.그 교통지옥의 와중에도 어떻게들 알았는지 행사장마다 독자들이 가득 찼지요.또한 아무리 자그만 서점에 가도 장서가 풍부하고 사람들로 붐비는데 놀랐어요.갈리마르에서 나온 내 불역 시선집 「쓰러진 자의 꿈」도 몇군데선가 꽂혀 있는걸 봤지요.올해가 「문학의 해」라는데 우리도 외국작가를 불러 이같은 행사를 추진해보면 유익할것 같아요』 「문학의 해」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성과를 거두려면 문화계에서도 5·6공 청산이 앞서야 한다는 신씨.「문학도 정화돼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시에서처럼 나지막하지만 그래서 더 흔들림이 없다. ○프랑스 여행 인상적 그러나 신씨가 말하는 청산은 근본적으로는 문학외적인 것에 대해서다. 『내 얘기는 구정권에 협력한 문인들을 죄 쓸어버리자는게 아닙니다.좋은 작품은 작가의 행적과는 별도로 평가돼야겠지요.하지만 역사적 과오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알려지고 경계돼야 후일 같은 행적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수 있어요』 민중문학이 휩쓸던 지난 80년대 신씨의 시를 너무 복고적이라거나 과학적 무장이 덜 됐다고 비판하던 후배들도 있었다.그러나 90년대 들어 그 과격한 문학의 구호들이 한줌 남김없이 사그라졌을 때 밑바닥살이들의 고달픈 심사를 달래주던 신씨의 위안의 노래는 한결같이 읽히고 사랑받았다. 『민중문학이 일도 많이 했지만 말도 안되는 관념론에다 제대로 안된 글도 많이 썼지요.5월만 노래하면 그대로 시가 되는 때가 있었으니까요.일종의 「거품민중의식」이었다고나 할까.하지만 서슬퍼렇던 그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들은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소설·동화도 쓸 계획 지난 93년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낸 그는 올가을쯤 일곱번째 시집을 묶고 앞으로 소설과 동화도 한편씩 써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뒀다.최근엔 「다산 문학선」을 읽고 대학자로 재미없는 사람인줄만 알았던 다산에게서 타고난 시인기질과 풍류를 발견,흠뻑 매료됐다. 『시가 모든 일을 다할수야 없겠지요그러나 삶이 팍팍하고 가파를 때 시와 노래가 없으면 무슨수로 버티겠어요.아무튼 나는 시라는 것이 약자,뒤처진 자를 위한 위안의 노래여야 한다고 믿어요』 ▷약력◁ ▲1935년 충북 충주군(현 중원군)노은면 연안리에서 태어남 ▲노은국민학교를 거쳐 충주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풍금을 못쳐 졸업을 못함.충주고 졸업,동국대 영문과 입학(55년) ▲56년 「문학예술」지에 「낮달」「갈대」「석상」 등 시가 추천돼 등단.이후 농사·막노동·장사·광산일 등으로 떠돌며 10여년간 절필 ▲대학졸업(67년) ▲시집 「농무」(73년)「새재」(79년)「달넘세」(85년)「남한강」(87년)「가난한 사랑노래」(88년)「길」(90년)「쓰러진 자의 꿈」(93년) ▲평론집 「문학과 민중」(77년)「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83년)「우리 시의이해」(86년) 등,산문집 「민요기행」1(85년)2(89년) 등 ▲만해문학상(74년)이산문학상(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민족예술인 총연합회 의장 등 지냄 ▲현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중국화 되는 한인촌(압록강 2천리:15)

    ◎보산촌 1백여가구중 초가는 1채뿐/높은담·철대문·온돌방 없는 벽돌집으로/닭장·돼지우리까지 복 비는 주련 써 붙여/설 인사조차 재물일기 바라는 “공희발재”로 변해 압록강유역의 중국땅에서 조선식 초가를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연변 조선족 마을에서 보는 풍경과 사뭇 달라 조선족 제2의 개척지 보산촌도 예외가 아니었다.조선족 1백27가구가 사는 못자리판속에 조선식 초가집은 단 1채에 불과했다.평안도 초가였는데,중국식 가옥으로 짓기 위해 자재를 다 준비한 터여서 그나마 없어질 운명을 맞고 있다. 보산촌에 와서 며칠을 묵은 문영빈 당서기의 집은 전형적인 중국식 벽돌집이라서 담이 유난히 높았다.그리고 철판으로 대문을 달아 열릴 때마다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온돌방도 둘이었지만 방에 봉당이 달려있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드나들었다.조선족 생활 흔적이라고는 부엌에 걸어놓은 수입품 알루미늄 솥 하나 뿐이었다.그러나 옆에 걸린 철갑모처럼 생긴 중국식 솥들이 조선식 알루미늄 솥을 압도해버렸다. 문영빈 서기의 부인 최철순씨는 중국식 집에 사는 것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조선족의 주거문화를 소에 비유한 그녀는 연변 조선족 토박이로 살다가 압록강쪽으로 시집을 와서인지 중국식 집에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이었다는 것이다. ○공중변소서 신년인사 『처음 시집 왔을 때는 중국집이 안좋더구마.온돌이 봉당에 빼앗겨 좁으니까 추워서 솜옷을 입었지비.신발을 신고 드나들어 위생이 말도 아니고….친정 어머니가 딸네집에 왔다가 춥다고 이내 돌아갔지 믿둥.조선사람은 소마냥 쉴라면 앉고 누워야 편한데 중국식 온돌은 앉아도 걸터 앉지비』 사람들의 심성도 변하는 것일까.문영빈서기의 집에는 길하고 복되기를 기원하는 온갖 주련이 대문으로 부터 집안까지 가득 붙어있다.그것은 중국의 풍속인데,닭장과 돼지우리에도 주련을 써서 붙였다.주련은 한족의 음력 정월풍속으로 붉은색 종이에 금색 글씨를 가로 넉자,세로로 일곱자씩 대련으로 써 넣었다.주거용도에 따라 주련의 뜻도 물론 달라 별별 내용이 다 들어 있다. 대문에 가로 글씨는 부자로일어나 재물이 생기라고 「발부생재를 적었다.그리고 침실문의 대련 한 줄을 들여다 보았더니 재물을 불러들여와 더욱 늘어나라는 내용의 「영재내재가재보」라고 되어있다.더욱 웃으운 것은 닭장이나 돼지우리의 주련이다.돼지우리에 써 붙인 주련은 작은 돼지가 달마다 늘고(소저월월증),큰 돼지는 해마다 새끼를 나라(대저년년생)는 내용이다. 이 주련을 보고 상을 찌푸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모두가 박장대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주련은 다 재물과 연계되었다.옛날 중국에서 식탁이 비었던 시절 설날에 함께 변을 보는 사람과 나눈 인사는 『식사를 했는가?』였다.왜 하필이면 변소가 신년인사 자리가 되느냐고 의아하게 여길지 모르나,중국에서는 거의가 칸막이 없는 대형 공중변소를 사용하고 있다.어떻든 중국 12억인구를 먹여살리자면 한국돈으로 하루 3조원이 필요했으니까,먹고 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가 풀렸다.중국에서는 지금 돈이 많고 적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절이 되어설인사가 「삼가 재물이 일어 기쁘기를 바란다」(공희발재)는 식의 내용으로 바뀌었다.그러고 보면 중국식 주련은 멋이 아니다.한 푼의 돈이라도 모아 담장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 들어있을 것이다.실제 그런 생활로 돈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한족이다. ○푼돈벌이도 마다 않아 단동시에서 만난 중년의 한족은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자주 드나든다고 했다.북한에 사는 한족 화교들에게 장사물건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다.별 스러운 돈도 안되고 양쪽의 까다로운 해관(세관)검사가 번거롭지만,한 푼이라고 더 벌어보겠다는 생각에서 부부가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혼자 가면 35원을 받는데,아내를 데리고 가면 두 몫을 운반해서 70원을 받는다고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나라의 땅덩이를 솥에 비유한다면 구 소련 다음으로 중국처럼 큰 가마솥은 없다.그만큼 담을 것도 많고 끓는 속도도 더디다.그래서 푼돈 벌이도 마다하지 않는 한족은 그렇다고 솥을 서둘러 채우는 일도 없다.솥을 채우지 않고 불을 지피는 일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임어당이 일찍 중국문화를 가리켜 「울타리문화」라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 있지않나 하는 것이다. 나라는 장성을 쌓고 집은 담장을 높였다.그속에 사는 사람들도 역시 마음을 쉽사리 열지않는 가운데 나름대고 문을 닫았다.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엉큼하다」는 말을 서슴지않지만 사실은 「웅숭깊다」는 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높은 담벼락안에서 하는 일을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한족을 재평가하면 경망스럽지 않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령성 단동시 관전민족자치현 석호구향의 보산촌 사람들은 중국의 발전모델을 채택한 조선족이다. 요령성에 흩어져 사는 25만 조선족 가운데 극소수인 5백여명이 모여 잘사는 마을을 이룩했음에도 지금까지 소리소문을 내지 않았다.15년이나 바깥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원인은 매스컴의 무관심에도 있다.그러나 더큰 원인은 먼저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조선족 습성에서 해탈한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5백여명이 부촌 일궈 한족의 심성을 헤아릴 만한 글귀는 닭장에도 있다.금닭이 가득한 우리라는 뜻의 「금계만권」이라는 주련은 그저 그러려니 했으나,「은단송국가」라는 주련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은빛의 달걀을 나라에 바친다는 뜻을 담은 이 주련은 얼핏 허풍스러운 애국표어 처럼 보인다.그러나 한족의 깊은 속마음을 알고보면 누구나 수궁할 것이다. 한족은 전통적으로 나라와 집은 조화로운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해왔다.나라(국)와 가정(가)을 합쳐 국가라는 말을 만들어 낸 속뜻도 헤아릴만하다. 이는 집이 잘되면 나라가 부강해질 뿐 아니라 따라서 집도 넉넉해진다는 것이다.그래서 보산촌 사람들이 닭장에 붙여놓은 주련내용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맛이났다.
  • 제2개척지 보산촌(압록강 2천리:14)

    ◎1인당 연소득 8백원… “조선족 부자마을”/20년간 65만평 개간… 곡물 연32만근 수확/137가구 482명 거주,교육열 높아 석학 많아/노인퉁소대 등 문화예술단 조직… 민속전통 보존 압록강유역의 길림성과 요령성에는 조선족자치현이 1군데,자치향이나 진이 16군데가 있다.자치현은 길림성 장백현이 유일하고 진은 길림성 집안시에 1곳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요령성에 분포돼 있다.그렇다고 해서 자치지역에 조선족만 사는 것은 아니다.한족과 만족·몽골족이 함께 살아가는 잡거지인 것이다. 그런데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에 속하는 석호구향의 보산촌은 조선족 못자리판이다.비록 만족의 자치현이기는 하나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쌀의 뉘」와 같은 미미한 존재다.조선족이 1백37가구 4백82명인 데 비해 한족과 만족은 10가구 39명에 불과했다.모두가 파란데 하나가 붉다는 만록청중일점홍과 같은 조선족 마을이라고나 할까.보기드문 현상이었다. 보산촌은 망보산 자락 비산비야 지대에 자리잡은 오붓한 마을이다.관전만족자치현성과는 10리가채 못되었다.보산촌 당서기 문영빈(47)씨 집에 짐을 풀고 촌장 배일명(47)씨를 만났다.탱크부대 훈련단장을 지낸 그는 마을현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경작면적이 1.5㎦라는 것과 지난 1981년 현정부가 각지의 조선족을 이주시켜 마을을 만들었다는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평야지대의 보금자리 조선족의 마을 보산촌을 일구어낸 주인공 김창영(66)선생은 지금 요령성 단동시에 살고 있다.단동시 조선족노인협 부회장직을 맡아 만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1975년부터 관전만족자치현 상무(상임)현장을 역임하는 동안 보산촌을 세웠다.그는 일찍 보산촌지역에 욕심을 냈다.당시 보산촌일대는 군의 훈련장과 군량미 자급을 위해 개간한 수전지대가 있는 군사지역이었다. 그러나 논농사경험이 없는 군이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버려둔 상태였기 때문에 눈독을 들일 만했다.김부현장(김창영)은 부대장을 찾아가 훈련장과 논을 지방정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한 끝에 이를 실현시켰다.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 8월1일을 상징한 8·1저수지라는 용수원까지 갖춘 군사지역은심양군구의 비준을 받아 결국 지방정부에 이양되었던 것이다. ○군지역 불하받이 정착 이에 따라 단동시는 1981년 봄 군사지역의 논을 조선족에게 풀어주는 일을 착수했다.조선족에게 땅이 돌아가기까지는 조선족의 벼농사기술과 소수민족 우대정책이 맞물렸다.보산으로 이주하는 조선족은 의무적으로 국가에 바치는 징구량을 3년간 면제받는 한편 농업세 역시 면제되었다.그리고 1무(3백평)를 개간하면 50원의 장려금을 대주었다.그리고 성정부에서 2년에 걸쳐 27만원을 들여 도로와 전기·수도 등을 건설했다. 그러니까 보산촌은 선조들의 서북간도 개척에 이은 제2의 개척지다.그 개척의 기수는 물론 당시 부현장이었던 김창영선생이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도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에게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다. 『저는 세살을 먹던 해에 부친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왔디요.고향은 평안북도 초산입네다.관전에 사는 조선족들은 거개가 평북 초산·벽동·창성에서 이주한 사람들였디요.50년대말까지도 많이들 모여 살아서리 그런대로 생활이 편리했댔는데 지금은 그렇디가 않아요.문화혁명 이후 한 마을에 몇 가구씩 끼어사는 신세가 되어 한족에게 급속히 동화하고 말았다 이 말입네다.조선족학교가 엉망이라 말과 글을 제대로 못 배우고,짝 찾아 시집·장가가기도 어려워졌디요.그래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방법을 강구했댔습네다』 지금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군훈련장에 붙어살던 사람들이다.조선족의 이주는 1981년 31가구가 보산촌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요령성과 관전현 이외지역 거주자는 이주할 수 없도록 원칙을 세웠으나 연줄을 대고 찾아와 죽치는 바람에 외지인 13가구도 결국 받아들였다.조선족끼리 살고 싶어서 찾아온 핏줄을 문전박대하지 못한 인심이 가상스러웠다. 내가 보산촌에 와서 머무르던 집주인인 당서기 문영빈씨는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보산촌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조선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는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는 이야기를 후회삼아 슬슬 풀어놓았다. 『한국과 민족만 사는 태평소현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조선말을 할 턱이 없었디요.1971년 연변 안도현 북흥촌으로 선보러 갔을 때 중매쟁이가 통역을 했디 뭡네까.나는 한족말만 하고 처가식구들은 조선말 말고는 못하니까 별도리가 없데요.우리 애들도 여기 오기 전에는 조선말 못했디요.이자 나나 애들이나 조선말 유창한 걸 보면 보산촌은 그 자체가 커다란 조선족 학교입네다』 ○비닐공장 등 개설 운영 고생인들 오죽했을까만 보산촌 사람은 모두가 잘 살고 있다.농토가 2천1백73무에 곡물수확량이 32만근에 이르는 부자마을이다.그리고 비닐제공장을 포함한 2개의 공장을 경영하여 36만원의 농공업총생산량을 기록했다.1인당 연간소득이 8백원(한화8만원)이고 학교경영비와 각종 세금을 공장경영이익에서 충당하고 있다.보산촌 소학교 출신 10명이 대학과 전문학교를 나와 2명이 석사학위를 받았다.현재 대학생도 6명이나 된다. 보산촌은 현이 지정한 조선족민족문화촌이다.조선족 고유민속 발굴과 보존은 물론 노인퉁소대와 같은 문화예술공연단체도 조직되었다.요즘은 연변을 통해 백두산을 구경한 한국의 관광단이 압록강을 따라 보산촌을찾고 있다. 그래서 보산촌 사람의 춤과 소리를 구경하고 함께 어울려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는 한국관광객을 곧잘 만나게 되었다. 지난 6월20일에는 보산촌을 들른 한국평생교육회가 보산촌노인협회에 중국 인민폐 1만원을 내놓았다.그 돈으로 노인들은 사과나무를 심고 밭머리에 「중·한노인친선사과원」이라는 푯말을 세웠다.사과나무는 3년이 지나면 혈육의 정이 담긴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나서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며 보산촌 노인퉁소대가 「우리의 소원」을 또 연주할 것이다.
  • 송이버섯(외언내언)

    우리산촌 최대 소득원인 송이버섯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까.산림청은 최근 송이버섯 생산량과 품질을 상당히 높일 수 있는 농법을 발표했다.송이버섯 발생기인 9월에 물주기를 제대로 하고 낙엽부식층을 제때 제거하면 발생량을 현재보다 5∼20배 많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우리 송이버섯은 국내서도 귀한 대접을 받지만 일본 시장에서는 단연 세계 제일 상등품으로 평가되고 있다.한해 생산량 3백∼1천3백t 중 90%를 일본에 수출하여 1년 4천만달러의 외화를 벌어 왔다.그런데 최근 일본은 그 수요를 한국산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게 되자 세계 각국으로 수입선을 넓히고 있다.우리 산촌 외화소득 시장을 크게 잠식당할 위기에 있는 것이다. 송이버섯이 생산되는 지역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등 주로 적송림이 울창한 산지로 알려졌으나 80년대이후 미국 캐나다 모로코도 일본에 송이버섯 수출을 시작했고 요즘에는 히말라야 산지국가 부탄이 상당량의 송이를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일본이 한해 소비하는 송이버섯량은 지난해의 경우 3천7백t이었다고 한다.이중에서 자국산은 3%뿐이라서 97%를 수입하고 있는데 북한과 중국산이 상당물량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한국 적송송이를 고가품으로 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송이버섯 발생량은 85년이후 약간씩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솔잎혹파리 피해로 인한 송이발생림의 활력감소,소나무지대에 잡목림이 우거지고 지표에 과도한 유기물층이 형성되어 송이균이 퇴화하고 있기 때문이란 추측이다.임업연구원에 따르면 송이균은 소나무 뿌리 중에서도 끝부분인 세근에 붙어 살며 소나무로부터 탄수화물을 공급받고 땅속 무기양분을 흡수하여 그 일부를 소나무에 공급하기도 하며 버섯체를 만든다. 송이균을 인공배지에서 자라게 할수는 있으나 아직까지 표고처럼 인공적으로 재배할 수는 없다.송이버섯 증산은 적송가꾸기에 달렸다.
  • 유종호 교수「인문주의 평론」40년 결산/회갑맞아 비평집 5권펴내

    ◎“품위·스타일 감춰야 참된 작가”/「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뒤늦게 시인으로 데뷔 『문학이란 언어로 된 예술입니다.아무나 쉽게 흉내낼순 없어요』 회갑을 맞아 자신의 비평세계를 아우르는 전집을 민음사에서 펴낸 중진문학평론가 유종호씨(60·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자타가 공인하는 인문주의자답게 그는 문학은 「품위」있어야 한다는 돈독한 믿음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 평단에서 그의 이름이 일으키는 공명은 크다.지난 57년 첫 평론을 선보인 이후 약 40년간 그는 무게있으면서도 매끄러운 문장으로 한국 평론계의 전범이 돼왔다.그 평론의 너비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친절하면서도 따끔한 개론강의에서부터 작가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듯 자유자재한 작품론,그리고 인문주의 입장을 정연한 논리로 강화하는 문학론 등에 이른다. 전집은 이같은 평론가의 정통비평집 다섯권으로 돼있다.1권「비순수의 선언」,2권「동시대의 시와 진실」,3권「사회역사적 상상력」,4권「문학이란 무엇인가」,5권「문학의 즐거움」등.이중 1∼4권은 나왔던책을 다시 묶은 것이다.이번에 새로 묶은 「문학의 즐거움」은 그의 천의무봉한 붓끝을 엿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이 책에는 우선 미당,정지용,이태준,신경림,정현종,김지하,김승옥,이문구,이문열 등의 작품론이 실려있다.『스타일이 있는 작가를 좋아합니다.스타일없이 얘기만 있는 작가는 매력이 없어요』라는게 이들 작가를 선호하는 이유다. 이밖에 즐김으로서의 문학을 옹호하고 고전과 언어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문학의 즐거움」「우리에게 고전은 무엇인가」「인문주의의 허와 실」 등의 문학론,전쟁·산과 산촌 등의 소재가 한국문학속에서 어떻게 변모돼 왔는지에 대한 정리,브레히트·하우저 등 좌파 문인에게서 오히려 사고의 탄력과 균형감각회복을 주창할 예를 찾아내는 문명비평 등이 실렸다. 하지만 비평가의 매력은 견고한 입장이나 박학이 아니라 그의 글 자체에 가장 잘 드러난다.담시로 유명한 김지하에게서 탁월한 서정시를 더 사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이 살아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상처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문학의 효험에 대한 확신과 맞물려 문장에 힘을 싣고 있다.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열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도 데뷔한 그는 『내가 본 6·25를 객관적으로 그려낼 장편소설도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라고 말했다.
  • 뗏목꾼/하루 1백리 물길…목돈벌이에 목숨걸고(압록강 2천리:5)

    ◎일,1887년이후 수로개척… 뗏목 본격 운송/위험한 작업에 상놈 취급·혼인거절 예사/1905년 중·일 목식공사 발족… 주변 임산물 수탈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현 이도강촌에는 도망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한 일본인들의 산판이었는데,압록강 목재 운송의 기점이었다.그렇다고 도망골에서부터 뗏목을 맨 것이 아니라 벌채한 통나무를 우선 떠내려 보냈다.일본인들이 벌목인부들을 소나 말 처럼 혹사하기가 예사여서 도망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그래서 마을 이름이 도망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 도망골도 그저 한적한 산골마을에 불과했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압록강유역의 대대적인 임목벌채는 물론 뗏목이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이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압록강에 뗏목이 떴다.1953년 4월20일에는 중국과 북한이 심양에서 평등호리원칙에 따라 「압록강·두만강 유벌협정」을 맺었다.이어 1977년4월13일 평양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에서의 목재운송에 대한 협정서」를 교환했다. ○문혁이후왕래중단 이들 두 협정에는 벌목 인력의 월경작업과 뗏목의 규격,벌목 노동자의 상호지원 및 구호 등을 규정한 조항이 들어있다.그리고 자연재해와 특수사정에 따라서는 상대국 대안에 뗏목을 붙이고 등록만 마치면 상륙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실제 중국과 북한의 시와 현(군)급에서 서로 대표를 파견하여 벌목상의 문제점을 토의했다.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왕래가 중단되었다.그 여파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 수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청나라 정부가 목세국을 설치한 1887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고 나서 1902년에는 안동의 상신과 동변도관부가 합작으로 안동목식공사를 세우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한해 1만여장의 뗏목을 띄웠다.또 1905년에는 일제가 중일목식공사를 설립했다.이는 압록강 연안 임산자원의 수탈을 본격화한 신호였다. 길림성 집안시 양수향에서 만난 손복상(70)노인은 젊어서 압록강 물길을 누빈 뗏목꾼이다.상류에서 떠내려 보낸 통나무를 떼로 묶어 놓으면 하류의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것은 뗏목꾼의 임무다.그러니까 해방 이후 부터 뗏목을 탔다. 『임업국시절이 아닌 이화공사시절이니 끼리 스물두살에 뗏목에 올랐디요.압록강에서도 타고 송화강·흑룡강에서도 뗏목꾼으로 일했수다.서른댓살이 되어 그만 두었댔디요.압록강에서는 임강에서 타가지고 서리 양수향 해관촌에서 내렸습네다.우리 조상은 집안시에 사는 여사신이라는 사람인데,쉰살은 돼보이는 조선족이었디요.그 분은 일제 때부터 뗏목을 탔다고 기래요』 뗏목의 단위는 장이다.1장의 크기는 목재 1백50㎡ 안팎인데 너비 20m,길이 6m 정도가 보통이다.뗏목 1장에 2사람씩 오르고 5장을 1개조로 떠 내려간다.뗏목이 흐르기 시작하면 조장이 선창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화답으로 맞 받았다.그 뗏목소리는 대강 「파도를 헤쳐가자/물에 떠서 가자/노를 잡아라/잡았다네/힘을 내라/헤에야/잘도 간다/헤에야/갈구기 걸어라/헤에야…」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수입은 그래도 낳은 편 압록강 뗏목은 하루 낮에 1백리를 간다.북한땅 중강진 위쪽 건너편에 해당하는 중국 땅 임강에서 아침에 떠나면저녁나절 삼도구 맞은 편 조선족 강마을에 닿는다.거기서 숙식을 하는데 값은 광목천으로 치렀다.다음날 해관촌에 이르면 다음 뗏목꾼에 인계하고 걸어서 임강으로 돌아왔다.도보가 아니면 집안으로 가서 임강으로 오는 기차를 타기도 했다.봄부터 가을까지 뗏목을 타면 잡비를 떼고도 7백원쯤 벌어 겨울은 그냥 놀고 먹었다는 것이다. 뗏목꾼은 사자밥을 지고 다닌다고 했다.그 만큼 위험이 뒤따랐다.게다가 상놈 취급받기 일쑤였다.딸 과부 만들지 않으려면 물길 다니는 놈 사위 삼지 말라고 했다.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봄만 되면 또 뗏목에 올랐다.누군들 위태로운줄 몰라서 물길을 택했으랴.그래서 뗏목꾼들이 탄식하는 소리도 있다.「뗏목꾼 서럽네/고생이 막심하네/마소처럼 일하건만/상하고 죽으면 그만이네/강가에 버린 시체는 승냥이가 먹고/물속에 버리면/고기밥 신세지」 물길을 다니는 사람은 뗏목꾼 뿐이 아니다.뱃사람들도 압록강 물길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지금은 거의가 통통배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힘들게 노를 젓고 재수가 좋아야 돛을달만한 바람을 만났다.뱃사람들에게도 물길이 고달프고 위험하기는 뗏목꾼과 마찬가지였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서 찾아본 김택로(60)씨는 오랜 뱃사람이었다. 『삼십오륙년 전에만 해도 배를 탔디요.수풍발던(전)소에서 딥안(집안)까지 오갔시요.벼라별 딤을 다 싣고 다녔다 이겁네다.일이 고되니끼리 파에 된당(된장)띠ㄱ찍어 강냉이밥도 게눈 감추듯 했디요.물이야 똥물 먹고….배 위에서 배설하고 그 물을 먹는거디요.어떤 때 뱃머리에 뭐가 걸려 떠들어 보면 시테(시체)디….그걸 보면 내 신세로구나 하고 슬퍼디는 마음입데다』 ○수풍까지 한달 걸려 그가 탄 배는 바닥 너비가 3m,길이가 12m의 일엽편주였다.그래도 3발7자의 돛을 달았다.쌀·석탄·목재 등 짐을 닥치는 대로 실었다.조짚이나 볏짚을 실으면 짐이 높아져 아차하면 뒤집히기 십상이었다.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손에 못이 박히도록 노를 저었다.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가에 올라 밧줄로 끌어야했다.그래서 수풍에서 집안을 오가자면 한 달이 실히 걸렸다. 나는 압록강 뱃사람들의 소리 한 수를 또 들었다.「백두산 천지 울음의 천지/뱃놀이 구룡포에 정을 하건만/내 친구 옆에 서서 백마산 바라보니/의주 통곡동이 홀로 섰구나」라는 내용이다.여기 나오는 통곡동은 전설의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통군동이다.전설에 담긴 통곡동 사연은 애달프기까지 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선의 임금 선조가 의주 통군동으로 피란했는데 명나라 원군이 압록강가에 둔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임금은 어떤 신하가 권고하는 대로 독을 쓰고 통곡을 했다.그 울음소리에 이여송이 감동한 나머지 군사를 움직여 출병한 뒤 군사가 통과했대서 통군동이 되었다.이에 임금의 울음을 곁들여 통곡동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 기이한 북한방문/경남 함양 이종근씨 체험

    ◎두만강 「풀섬」 건너다 급류에 조난/북 주민에 구조돼 치료받고 귀한 외무부는 16일 중국을 방문했던 우리측 주민이 본의아닌 「사고」로 북한을 방문한뒤 2주만에 귀환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외무부에 따르면 경남 함양에서 양조업을 하는 이종근씨(54)가 지난달 31일 낮 친척을 만나기 위해 방문중이던 중국 길림성 화룡현에서 두만강 강물 한가운데 있는 「풀섬」으로 건너 가려다 급류에 휘말려 북한땅으로 넘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씨는 당초 연길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았던 형 종진씨(64)를 만나기 위해 사촌동생 종욱씨(47)와 함께 지난달 23일 중국을 방문했었다.그러나 막상 연길에 도착해보니 종진씨는 함경북도 무안의 광산촌에서 고생하며 살고 있었다. 이에 이씨는 연길의 조선족들을 통해 형의 가족들과 연락,31일 두만강 가운데 있는 중국령인 조그만 풀섬에서 형 종진씨의 아들 일남씨를 만나기로 하고 물을 건너던중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다 북한 주민들에 구조돼 북한땅으로 가게 됐다는 것이다. 사고직후 동행했던 사촌동생 종욱씨가 한국대사관에 사고의 자초지종을 신고했으며,대사관측은 중국 정부와 길림성 당국에 송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국 당국이 북한측과 접촉을 벌였으며 북한측은 입북 2주일만인 지난 14일 종근씨를 중국측에 돌려보냈다.입북했던 한국인을 북한이 순순히 내보내 준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국당국은 이씨를 넘겨받아 이틀간 조사한뒤 16일 정오 우리측에 신병을 인도했다. 이씨가 북한에서 무엇을 했는지,형 종진씨를 만났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북한측은 이씨가 급류에 상처를 입어 치료해 돌려보내느라고 2주일이 걸렸다고 밝히고 있다. 형 종진씨는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6·25가 일어나 학도병으로 입대했다가 북으로 갔다고 한다.
  • “남원 춘향제 등 지역 축전”/김동기(공직자의 소리)

    ◎“세계적 이벤트로 키우자” 34년만에 주민의 손으로 뽑힌 자치단체장이 주민앞에 선서를 하고 자치 단체를 대표하여 지역살림을 시작한지 1개월이 지났다. 지난 1개월 동안 지역 이기주의의 대명사인 광역 쓰레기장 건설계획의 전면 백지화가 검토되는 등 우려되는 대목도 있었지만 자치의 앞날을 밝게 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지방의 자율성과 함께 능률성의 조화를 통한 지역과 국가발전이 기대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지방자치를 단체장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치과정으로 보려는 경향도 적지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방자치란 본질적으로 경제·사회·문화 등 지역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지방화·분권화·민주화를 의미한다.다르게 말하면 생활자치이다.주연급 배우격인 단체장의 활동과 함께 자치단체 구성원 모두가 맡은 소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지역발전과 지역화합을 이끌어 내는 총체적인 모습이 강조되어야 한다. 지역경제를 보자.지금까지 주로 국가정책의 흐름위주로 운용되었으나 이제는 달라진다.재정형편을 포함한 탄탄한 지역경제의 뒷받침이 없는 지방자치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많은 민선단체장이 해외 세일즈맨을 자청하고 지방행정에 경영개념의 도입을 외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역여건을 십분 살려 특화사업을 육성하고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차별전략에서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장인정신도 자치시대에 더욱 요구되고 있다. 사회·문화적 측면의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열린 사회·문화적인 청사진과 함께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지역의 각종 행사가 지역차원을 넘어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이벤트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문화·예술행사도 굴뚝없는 유망한 지역사업이다. 춘향제와 같은 지역축전이 세계인이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발전되어야 한다.일본의 어느 산촌 자치단체는 일본에서 제일 긴 3천3백33개의 돌계단을 만드는 등 새로운 관광명소로 개발하여 많은 관관객 유치를 하고 있다. 각종 국제행사나 세미나 등도 지역에 유치하여 외화 획득과 함께 국위선양에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모두 단체장보다는 자치단체 구성원이 주연급 배우가 되어야 할 부문이다.막 꽃피우기 시작한 지방차치가 우리의 토양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주민 자치단체,중앙정부의 지속적이고 특 별한 노력의 경주가 필요하다. 지방차치는 스스로의 피고 지는 야생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땀과 인내로 가꾸어져야 하는 화초인 것이다.지방화,세계화라는 새로운 도전은 우리에게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방적으로 행동하는 발전 지향적이고 미래 지항적 자세를 요청하고 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입학정원 2%·학과 10%내 선발/농어촌학생 특별전형 내용

    ◎58개대 학과따라 최저학력기준 설정/제학기간 본인·부모 읍면거주자 국한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4일 각 대학별 정원내역을 발표한 농어촌학생 특별전형이란 도시에 비해 교육여건이 떨어지는 농어촌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정원외 특별전형제도다. 이는 농어촌 학생의 진학 등 교육환경을 장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교육정책 차원에서 도입됐다.지금까지 교육환경의 차이 등으로 농어촌출신 학생들이 도시출신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학진학 기회가 적었으며 이는 농어촌 인구의 도시이탈 현상을 부채질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이의 시행을 추진한 배경이다. 외교관자녀등에 대한 특례입학정원이 총입학정원의 2%인 점을 감안,농어촌학생 특별정원 역시 입학정원의 2%,학과정원의 10%이내 범위에서 정원외로 선발하게 했고 과학·외국어·예술·체육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은 제외시켰다. 한편 교육부는 도시민빈·광산촌 학생 등 소외계층과 효행상 수상학생,이산가족자녀,낙도교사자녀들에게도 이를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전형방법◁ 특별전형제도는 정원외 전형으로 사실상 증원이 되는 셈이어서 대학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많은 대학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전형방법은 일반전형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내신 40%,수능 60%의 반영비율을 적용하고 있으나 일반전형에서 대학별고사를 실시하는 대학 중 이화여대·부산대 등 5개 대학은 일반전형과 동일하게 대학별고사를 실시한다. 특히 중부대는 면접고사 성적만으로 선발하며 연세대·고려대 등 17개 대학은 면접고사성적을 일부 반영한다. 또 경기대 대전대 숭실대 한남대 등 8개 대학은 일부계열 및 학과에서 시험없이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하는 획기적인 제도를 체택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외국어대 건국대 경상대 등 9개 대학은 동일계진학자 영농후계자 국가기술자격보유자 외국어·수학·과학 경시대회 수상자 등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다. ▷최저학력기준◁ 학과에 따라 수학에 필요한 최저학력기준을 설정한 대학은 58개 대학에 이른다.이중 수학능력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하는 대학이 한국외국어대 아주대 등 18개,내신성적을 기준으로 하는 대학이 연세대 고려대 등 17개,내신성적 또는 수능시험 성적을 모두 고려하는 대학은 이화여대 서강대 부산대 전북대 등 8개 대학에 이른다. ▷응시자격◁ 대상자는 읍·면에 있는 고등학교의 전교육과정을 마쳤거나 재학중인 학생으로 재학기간 중 본인과 부모가 모두 읍·면에 거주한 경우라야 하며 부모의 사망·실종·이혼 등으로 읍·면 거주기간을 부모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을때는 부모의 한쪽이나 학생만을 기준으로 거주기간을 산출하도록 했다. 한편 이번 특례입학조치로 자녀의 대학 진학을 겨냥한 농어촌 역류현상도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이에 따라 일부학무보들이 자녀들을 농어촌으로 위장전입시키는 등의 편법을 차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도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국경지역 북 경비병 대폭 증강/중국서 본 북한의 움직임

    ◎탈북자 검거·밀수단속 강화 추측/이달들어 중­북 인·물적 교류 감소/북 “김 추모위해 7월엔 관광객 안받아” 김일성사망 1주기를 맞는 요즘 중국·북한 국경지역은 평온속에 여름을 맞고 있다. 6월부터 시작된 「백두산참관」길에 나선 한국관광객들이 단동과 도문시등 중·조 접경지대에 몰려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7월들어 두나라간 인적 왕래는 크게 줄고 있다.중국인 대상의 북한관광이 중단됐고 국경무역에 대해서도 북한세관의 조사가 엄격해져 외면적으론 인적·물적왕래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다. 북경·심양·단동등의 여행사들은 요즘 북한사정을 묻는 전화에 『북한측이 8일 김일성주석 1주기 추모를 위해 7월 한달동안은 여행객을 받지 않겠다고 전해왔다』고 밝혔다.단동시 관광국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 단동을 통해 3천여명에 가까운 중국인들이 신의주를 거쳐 평양∼개성∼묘향산∼판문점등을 여행하고 왔지만 이번 달에는 단체관광이 없다』고 말했다. 3박4일에 2천1백위안(20여만원상당),6박7일에 3천4백위안(32만원상당)의 비용중 상당부분을 얻는 북한이지만 아직은 외화보다는 추도행사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이 관계자는 토를 달았다. 단동시 보산촌 조선족 집성촌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은 『북조선에서 오는 친척방문은 거의 끊어졌다』고 지적했다.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연길시 주민들도 『최근 북에서 오는 친척방문은 찾아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대신 국경지역에 북한 경비병의 수가 부쩍 증가했으며 대규모 군대이동도 눈에 띄고 있다고 한다.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탈출자들이 끊이지 않은데다 밀수 단속을 위해 이같이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들 주민들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북경과 동북지역 조선족 사회가 북한과 멀어졌냐하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현재 연길에는 평양 만수대 예술단이 와 있고 인민예술가들의 작품이 연길시 하남지역 문연 미술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또 지난 6월에는 중앙음악가동맹위원회가 발표회를 갖는 등 외면적인 왕래감소에도 불구,실제적인 교류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면적인 한국열풍에도 불구,북한에 대한 정서적인 친근감과 연대의식도 여전한 모습이다.중국의 조선족사회는 일부 친한·친북의 편이 갈리면서도 대부분은 무역·교류의 거간꾼 역할을 하기위해 양쪽을 오가며 남북의 화해물결을 기다리면서 한 건을 준비하고 있다.이들 조선족기업들은 김일성사망 1주기를 맞아 기업및 개인이름으로 된 화환을 준비해 북경의 북한대사관과 심양영사관등에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유례없이 활발한 남북「무역일꾼」들의 물밑접촉도 「중·조」국경지역의 외면적인 왕래 감소와는 또다른 김일성사후 1년간의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평할 수 있다.북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물론 각 지방 무역총국의 무역일꾼들도 예전과 달리 중국내 「남조선」기업사무실에 먼저 전화를 하거나 찾아와 임가공이야기와 투자문제등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지난해 등 예전과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이같은 접촉을 통해 요즘 평양에서는 주택난등을 이유로 직장별로 10만명가량이 평양밖으로 이주됐고 앞으로도 대대적인 이주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평양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단동시의 한 관계자는 『신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압록강변 개발구에 최근 아파트단지가 세워지고 급속히 개발되고 있는 것도 올 7월이 지나면 북한이 많이 변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측과 무관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 전국 유명산 29곳/산림경영단지 조성/산림청

    ◎벌목­가공­휴양사업 연계 육성 산림청은 7일 지리산·덕유산 등 전국 27개 산 29개소(77만7천㏊)를 「산별 산림경영 단지」로 지정,종합적인 지역 임업경제권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산별 산림경영단지는 전국 16개 산 71만2천㏊의 국유림 및 민유림 경영단지가 포함된 지역을 조림 등 산림관리사업의 추진과 자연휴양림 조성 등을 통해 종합개발하는 한편,이들 단지를 연결하는 간선 임도망을 구축,임업 경영시설 및 지역경제개발의 기반시설로 활용된다. 산림청은 이에 따라 이들 단지 내에 간벌(솎아베기) 등 산림가꾸기 사업과 형질이 나쁜 임지에 대한 수종 경신작업 등을 통해 우선적으로 산림자원을 늘리기로 했다.단지 안의 목재집하장 설치 및 임산물 가공공장도 유치할 계획이다. 현재 51개소인 휴양림을 오는 2004년까지 1백개소로 늘리고 산림의 수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산림관리사업 등을 집중 실시할 방침이다. 이밖에 경영단지내 산촌지역을 주변 거점도시와 연계해 임업경제권의 중심마을로 육성하기로 했다.
  • 풍토병/5∼10년주기 극산병 번져 수백명 희생(두만강 7백리:9)

    ◎1904년 화룡현 일대 1백여명 참변/여우우는 새벽엔 으례 사람 죽어나가/오염된 두만강물 타고 북한쪽 전염병도 확산 화룡에서 숭선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차안은 떠들썩했다.술잔을 얼근히 걸친 한 50대 남자는 유난히 큰 소리를 쳤다.그 취객에 입에서 콜레라라는 말이 연신 튀어나왔다. ○한국서 약품지원 제의 『맨 처음에는 감기인줄 알았지 뭡네까.열이 나고 메스꺼워 토역질도 하고….그래서리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지만 차도를 안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제야 쥐병(출혈열)이라는 예감이 들어 병원을 찾았디요.웬걸,병원에서 검사를 하더니 다짜고짜 격리시키고 중앙에 보고를 한다 뭣을 한다 난리를 칩데다.알고보니 호열자(콜레라)였는데,숭선에만 환자가 셋이라고 기래요』 숭선행 버스에서 주어들은 이야기는 함경도에 돈다던 콜레라가 두만강을 건넜다는 것이다.그리고 북한에 콜레라가 너무 심해서 한국이 약품지원을 제의했다는 말까지 나왔다.또 두만강물은 병을 옮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북한땅 대홍단군 전분공장이 감자썩은 물을 마구 흘려버리고 무선철광이 쏟아붓는 폐수도 합류한 두만강물을 더 이상 마실수 없다고 열을 올렸다. 연변의 화룡지역은 역사이래로 지방풍토병이 유행하여 재난이 심했다.그것은 극산병,또는 지방성 심근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청나라 기록에는 「누런물을 토하는 병이 유행했다」는 내용이 보인다.19 04년 화룡현 와룡호 한 곳에서만도 개척민 1백명이 죽어나갔다.그래서 이 일대를 「시체골」이라 했고 타령조 노래까지 구전될 정도였다. 밤에 여우가 캥캥 울어대는 날 새벽에는 으레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했다.여자들이 더 많이 목숨을 잃었다.부동골에서는 한해 겨울을 났더니 젊은 아낙들이 40여명이나 죽었다는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물을 토해내다가는 밤을 넘기지 못하기가 일쑤였다.매일 밤마다 여우가 울어대고 사람이 죽어나가자 성한 사람들도 실성거렸다.성황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병을 잡지는 못했다. ○손톱부터 죽어가는 병 극산병은 5∼10년 주기로 고봉으로 닥쳐 무려 천여명씩의 목숨을 앗아갔다.19 44년 오늘의 화룡시 덕화진 고산촌 우복동 60여호 2백여명 중 1백8명이 세상을 떴다.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인 19 57년 전후에는 극산병과 함께 천연두와 홍진이 겹쳐 찾아왔다.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 김봉용(72)노인이 회고하는 극산병은 무서운 병임에 틀림 없었다. 『내 옥석에 있을때 일입네다.소문을 듣고 가보니 금방 시집을 온 새각시가 배를 붙들고 죽는다고 고아대고 있었다.남편은 먼데,나가 안오고 시부모들과 같이 있는데 노인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합데다.그때 침깨나 놓는 의원이라구는 시만 상촌에 한분이 있어서 달려가서 모셔왔디요.의원은 극산병이라면서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습데다.환자는 애고대고 죽는다고 광기를 쓰는데 이거 야단이 아닙네까.손톱이 하나씩 색이 죽는데 바른 손이 끝나니 왼 손으로넘어 가더라 이겁네다.명색이 의원인데 보고만 있을수 있냐고 하니 한다는 소리가 엉뚱하기라니….듣자니 극산병은 하신에서 온다는데 젊은 아낙을 벗겨 볼수도 없지 않느냐고 대듭데다.물에 빠진 사람 짚오리도 잡는다고 하신을 보이고도 완쾌된다면 대수냐고 내가 주동해서 아낙을 짓누르고 다짜고짜 치마를 들추고 반쓰(팬티)를 벗겨 내렸디요.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하신을 벌려보니 음질속에 좁쌀알만큼씩한 것이 잔뜩 돋아 있습데다.의원이 침으로 마구 쪼았디요.달거리 때처럼 피가 흘러나옵데다.소랭이(대야)를 대고 피를 받았디요.사람이 죽은듯 늘어지기를 한 시간쯤이 지났나….환자가 물을 찾습데다.한 바가지 물을 들이키더니만 언제 앓았더냐 싶게 일어나 앉는 걸 봤디요.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여자들은 배만 아프다하면 속곳들을 훌렁 벗었디요.내 평생 마누라말고 다른 여자 살을 섞은 적은 없어도 웬간한 바람쟁이보다는 여자 하신 구경은 더 했수다』 ○미역훔쳐 삶아 먹어 극산병은 여지껏 병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토질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가난이 근원이라는 말도 들린다.지방마다 치료 방법이 조금씩 달랐다.그러다가 1957년께 극산병이 돌 때에는 인민공사시절이었는데 귀동냥으로 병의 원인을 대강 알게되었다.극산병은 수토병으로 혈액순환이 안되면 죽게된다는설명을 현의사로부터 전해 들었던 것이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 두만강에서 사는 조선족들의 생각으로는 미역이 혈액순환에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그러나 인민공사시절이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판국에 미역을 어디서 구하랴.궁리 끝에 한밤중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 함북 무산의 수산사업소를 쳐들어갔다.죽는 사람들 살리고 보자는 일념에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수산사업소에서는 조선족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쌀여섯되와 미역 몇잎을 얻어왔다. 그리고 나서는 간덩이들이 부어 감옥소 갈 작정을 하고 무산에 가서 창고를 털었다.수레에 싣고 와서 집집에 나누어 주었다.마을 전체가 한군데서 해먹고 사는 집체식당 때라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경을 치는 시절이었지만 그날 만큼은 집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북한에서 수산물을 몰래 가져오다 변방부대(국경수비대)에 들켰다.마침 부대연장(중대장)이 조선족이어서 『내가 눈감아 줄테니 위에서 물어오면 딱 잡아 떼라』고 일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밀수조사를 나왔다.이경화 구장도 모르쇠를 댔다.그래서 그해 겨울을 그럭저럭 무사히 보낼 수 있었고 캥캥대던 여우 울음소리도 뜸해졌다.해산물이 명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쥐처럼 먹고 소처럼 일했던 당시 조선족들에게 해산물은 명약 구실을 했을 것이다.당시 여우가 울어대던 시절에 유행했다는 타령 한가락을 떠올리면서 수성진에 다시 콜레라가 돈다는 사실이 끝내 못마땅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극산병 열이 걸리면 아홉이 숨 지나니 주검은 산과 들에 쌓이고 일가 식솔 영 이별한다네 황폐한 옥토 풀이 무성하고 가난한 농사꾼 애간장 다 타네 한 많은 우리 살림 언제 펴날고 따사로운 해볕 쪼일 그 날을 고대하네』
  • 곽만섭 청장에 듣는 산림정책(국정 어떻게 돼 갑니까)

    ◎지리산 등 16개산 올해 집중 조림/가공품 생산·산림 관광자원 활용 역점/상속세 공제액 높여 사유림 투자 촉진/2040년까지 해외조림지 확대… 목재 자급률 60%로 □대담=정종석 경제부차장 5일은 제50회 식목일이다. 요즘은 전국 어디에도 헐벗어 볼썽사나운 민둥산은 찾기가 힘들다.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푸르름만큼 쓸만한 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심는 정성에 비해 가꾸고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한 탓도 있다. 서울신문 경제부 정종석 차장이 나무심는 기간(3월21일∼4월20일)을 맞아 곽만섭 산림청장을 만났다. ­심는 정성보다 가꾸거나 보살피는 정성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지금까지는 심는 일이 급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60년대부터 시작한 녹화사업으로 산림이 제법 울창해졌으므로 앞으로는 간벌과 풀베기·가지치기 및 비료주기 등의 육림사업을 적극 펼쳐 쓸모있는 경제림을 조성하는 등 산지를 자원화하는 데 역점을 둘 계획입니다. ○예산 효율성 극대화 ­임업은 앞으론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된다고 봅니까.▲지금은 나무를 심어서 목재를 생산하는 1차산업으로만 보는데,바로 이런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2,3차산업으로 키워야 한다는 얘기입니다.국토의 67%가 산지인 핀란드는 임산물의 수출이 전체수출액의 37%나 되며,국민 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이상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65%가 산지이면서도 임산물소득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미만입니다.나무로 부가가치가 높은 다양한 가공품을 만들고,산림을 관광휴양자원으로 활용하는 등 국민경제에 기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임도 등 생산기반이 취약하고,예산도 빈약하지 않습니까. ▲산림청의 올 예산은 1개 군의 예산과 비슷한 3천7백억원으로,관리하는 면적에 비해 아주 적습니다.앞으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의 모든 산림을 대상으로 산발적으로 지원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특정산을 중심으로 조림과 육림 및 간벌을 할 계획입니다.올해에는 강원도 원주의 유명산과 강릉의 봉룡산,경북 안동의 장군봉,충남 공주의 오성산,전북 남원의 지리산 및 덕유산 등 전국의 16개 산에 집중투자하기로했습니다. ­아직은 산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지요. ▲그동안 산지가 국민경제에 미친 기여도는 작았습니다.산지를 국가발전의 밑바탕이나 삶의 터전이라는 폭넓은 차원에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그래서 나무만 다루지 않고 산지와 산촌을 함께 다루는 종합적인 행정을 펴나갈 생각입니다. ­연평균 8천㏊가량의 산지가 골프장이나 공장용지 등의 비농업용으로 전용되는데,너무 개발에 치우치는 것 아닙니까. ○연 물1백80t 저장 ▲도시화 및 산업화가 진전되면 토지의 공급원으로서 산지에 대한 수요가 늘게 마련입니다.때문에 자연경관을 보존해야 하는 지역은 전용제한구역으로 지정,엄격하게 관리하는 반면 그 이외에는 개발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경사도에 따라 보전 및 준보전임지로 나뉜 현체계를 위치와 형태 및 이용목적에 따라 생산·공익·산업임지로 바꿔 국토종합개발계획과 연계시킴으로써 보존과 개발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습니다.상반기중 관계부처와 협의해 6백40만㏊의 산지를 이렇게 다시 고시할 계획입니다.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산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요. ▲산림은 산사태를 예방하고 맑은 공기와 물을 공급하는 등의 공익적인 기능이 엄청납니다.화폐가치로 평가하면 GNP의 12%가량인 28조원이나 됩니다.예컨대 산림의 연간 물 저장능력은 1백80억t으로,국내 7개 다목적댐의 최대저수량의 2배입니다.거대한 「녹색댐」이지요. 맑은 물을 공급하는 데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도록 올해부터 5개년 사업으로 5대강유역의 수종을 참나무 등의 활엽수로 바꾸는 등 환경림도 조성할 계획입니다. 또 10년쯤 자란 나무를 산에서 솎아내 도심이나 공단으로 옮겨심어 산의 나무도 잘 자라도록 하고 도시도 녹화하는 2중의 효과를 거둘 계획입니다. ­국토의 65%가 산지인데도 목재의 자급도는 13%밖에 안되지요. ▲녹화가 제법 이뤄졌다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87%가 30년생이하의 어린 나무들이기 때문입니다.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입니다.목재로 쓰려면 최소한 50년생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2040년 목재의 자급률을 60%까지 높이기 위해 호주와 칠레·베트남 및 미얀마 등에 70만㏊의 조림지를 확보할 계획입니다.93년부터 이 사업을 시작,지금까지 2천㏊의 해외조림지를 개척했습니다. 무역을 환경문제와 연계하는 그린라운드에 대비,목재의 수입선도 동남아 위주에서 남미와 러시아 등으로 다변화하고 현지에 가공공장도 만들어 합판 등의 반제품을 들여올 계획입니다. ­우리나라 산지의 71%가 사유림인데,산주들이 대부분 영세한데다 수익성도 낮아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경향입니다. ○영세 산주 지원 확대 ▲작년말에 산지의 상속세 공제한도를 9만평에서 30만평으로 늘렸고,공제액도 1억원에서 3억원까지 높이는 등의 투자촉진책을 마련했습니다.전체산주의 96%를 차지하는 10㏊미만의 영세산주로 하여금 협업체를 만들어 조림사업을 함께 펴도록 하고,자금지원도 늘릴 계획입니다. ­요즈음은 산불도 자주 일어나고 규모까지 커지고 있어 걱정입니다. ▲진화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동력펌프 등의 지상장비 말고도 헬기 18대를 전국의 산불취약지역에 배치했습니다.금년에 5대를 더 들여와 97년까지 1개 도에 3대씩 배치할 계획입니다. ­솔잎혹파리의 피해가 크다지요. ▲전체 소나무숲의 11%인 21만2천㏊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나무에 주사를 하면 효과가 가장 크지만 인력 및 예산상 솔잎혹파리의 천적인 목좀벌레라는 익충을 피해가 심한 지역에 푸는 방제법을 쓸 계획입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이자 식목일도 50회인데 예년과 다른 행사가 있습니까. ▲전국 2만4천㏊에 6천2백만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 이외에 남산 소나무의 복원사업 및 비무장지대(DMZ)의 생태계를 조사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행정고시 6회에 합격한 곽청장은 창원과 울산시장 및 부산부시장 등을 역임한 내무관료다.지난해 9월 부임한 그는 직원들에게 목재만 생산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말고 다양한 소득원을 개발하는 등 임업을 산업화하는 데 앞장서라고 강조한다. ◎정부의 조림 5년계획을 보면/5대강 유역 활엽수림 조성/뿌리길고 낙엽쌓여 물저장 뛰어나/33만㏊ 대상… 올 1만5천㏊ 작업/벌채나무 목재이용·도심지역 옮겨 앞으로 5년 뒤 한강 등 우리나라 5대강 유역의 산림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대종을 이루는 소나무·잣나무 등 침엽수림이 상수리나무·자작나무 같은 활엽수림으로 크게 바뀐다.올해부터 오는 99년까지 5년 동안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다.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산림이 목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 만은 아니다.거대한 「녹색댐」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우리나라 국토의 65%를 차지하는 산림이 연간 물을 저장하는 능력은 1백80억t이다.7개 다목적 댐의 최대 저수량인 98억t의 갑절 가까이나 된다. 민둥산에 비가 오면 대부분 강으로 바로 흘러가고 만다.그러나 숲이 우거지면 뿌리나 줄기 등에 수분이 흡수됐다가 서서히 강이나 땅 속으로 흘러 들어가며,지하수가 되기도 한다. 일종의 댐 역할을 하는 셈이다.우리나라의 연간 강수량은 1천2백67억t이지만 22% 가량인 2백86억t만 이용된다.오는 20 01년에는 이용량이 3백30억t이 돼야 한다.산림의 녹색 댐 역할은 더욱 요구된다.5대강 유역의 숲을 침엽수 대신 활엽수림으로 바꾸려는 것은 활엽수림의 물 저장 능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침엽수림에 비해 뿌리의 길이가 더 길다.낙엽이 지면 나무 아래의 땅이 햇볕을 많이 받게 돼 다른 식물도 잘 자란다.물을 더 저장하는 효과를 얻는다. 5대강 유역의 산림은 전체 산림면적의 68%인 4백40만㏊이다.산림청은 이 중 7.6% 가량인 33만4천㏊를 활엽수림으로 바꿔 심을 계획이다.5대강으로 합류하는 지류 주변의 3백42개 취수장을 중심으로 반경 5∼10㎞ 이내가 대상이다. 올해에는 5백4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33만4천㏊중 1만5천㏊에서 작업을 펼 계획이다.솎아내거나 벌채하는 침엽수림은 목재로 쓰거나 10년짜리 이하이면 도심지역으로 옮겨 심는다.산의 경사도가 36도 이상으로 가파른 지역은 벌채로 인한 산사태를 막기 위해 제한적으로만 활엽수로 바꿔 심고,침엽수림이라도 천연림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나무는 그대로 놔둔다. 바꿔 심는 수종은 활엽수 중에서도 갈참나무와 굴참나무·상수리나무·자작나무·고로쇠나무 등 물의 저장 능력이 뛰어난 나무들이다.산림청 자원조성과 정수봉 계장은 『5대강 유역의 상수원 오염 및 물부족 현상을 막기 위해 중요한 생태적 기능을 하는 산림의 대체 조성사업을 펴기로 했다』며 『이 사업이 끝나면 산림에서 천연 여과과정을 거친 1급수 식수를 원활히 공급하게 되며,아울러 쾌적한 휴식공간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통일영화 「이도백화」(이 영화)

    ◎연변 이산가족의 휴먼스토리/민족 대화합·조선족 생활상 묘사/백두산의 절경·문화유적도 볼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비경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생활상,광활한 중국대륙의 전경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우리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백두산과 중국 동북3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도백화」(감독 강상룡)가 최근 갖가지 화제속에 현지촬영을 끝내고 개봉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도백화」는 민족분단으로 중국 연변에 흩어져 살고있는 가족들의 눈물겨운 재회과정을 통해 이산의 아픔을 그린 일종의 「통일영화」.민족의 대화합,곧 통일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동안 여러차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분단극복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에 눌려 경직된 이데올로기 영화의 틀을 벗지 못했다.하지만 이 영화는 이성에 매달리는 직접적인 주제전달 방식 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역사성이 가미된 휴먼드라마를 지향하고 있어 기존의 이념영화와는 일단 차별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8년간 기획… 제작비 10억 8년의 기획기간(총제작비10억원)을 거쳐 작년 7월부터 올해 10월까지 10여차례 중국을 오가며 촬영한 만큼 「이도백화」에는 놓치고 싶지 않은 볼거리들이 풍성하다.중국 동북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2천6백91m의 백운봉을 비롯한 기암절벽들,거울처럼 고요하던 천지가 비구름에 덮이며 이내 성난 바다로 변하는 모습,은하수가 기울어지는가 싶도록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장백폭포의 물줄기,천지용궁의 다섯마리 교룡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백두산의 승사하,고도차이에 따라 천태만상의 변화를 보이는 백두산의 수직경관대,백두산 아래 첫마을인 내두산촌의 풍정 등…. ○항일기지 내두산촌 담아 이 가운데 특히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옮겨와 일군 마을로 알려지고 있는 내두산촌의 모습을 필름에 담은 것은 여러모로 뜻깊다.제작팀에 따르면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호의 조선족들이 단오놀이 등 우리민족 고유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살아가고 있으며 일제 당시 항일유격대가 묵었던 타원형 석굴과 병원자리 등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 ○중국서 헬기 지원 받아 현지로케 기간중 무엇보다 제작팀을 애타게 한 것은 겨울 백두산 촬영과 투명한 천지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 일이었다.외국인에 대한 촬영제한은 고사하고 폭설이 내리는 9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백두산 입산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천지의 경우에는 기후변화가 심해 1년중 7,8월에만 그것도 사흘에 한번 꼴로 맑은 천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중국에서 세번째로 큰 메이저 영화사인 장춘영화사와 연변 TV방송국 사람들,그리고 조선족 동포들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려 헬기항공촬영 지원을 받아내는 등 「007 첩보전」을 벌였기에 그나마 가능했다는 것이 제작 후일담이다. ○내년 2월 개봉 예정 20여년 동안 조명전문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메가폰을 잡은 강상룡 감독(50)은 이 작품이 생각하는 고통을 요구하는 영화인 만큼 흥행문제를 의식한듯 『「이도백화」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각 문화유적지를 훑어가는 로드무비 성격의 「재미있는」영화』라며 『민족분단이 강요한 이산의 한을 안고 사는 이땅의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싶다』고 비장한 감독데뷔의 소감을 밝혔다. 주인공 고진하 박사 역에는 정계진출로 영화계를 비웠던 이대엽 전의원이 16년만에 출연,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을 한달음에 오르는 등 열연을 보여 영화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 2월께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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