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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과 맛 어우러진 일 「정원도시」/시코쿠섬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200여년전 조성된 사누키우동의 본고장/세계 최장의 철도겸용 세토대교도 유명 동경,교오도,나라,벳부 등 일본의 유명 관광지를 한번 둘러본 사람이라면 중소도시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다.다람쥐 쳇바퀴돌듯 명승지를 둘러봐야 한다는 부담감없이 발길 닿는대로 사람들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묘미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시코쿠섬 가가와현의 현청소재지인 다카마쓰시.인구 33만명의 중소도시로 휴양과 관광을 겸한 여정에는 알맞은 곳이다.다듬고 깎는 일본인들의 손길이 도시 전체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깨끗하고 정갈하다.이국적인 체취도 별로 없어 마치 우리나라 시골에 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주변에 볼거리도 많아 적적하지 않다. 시내에 있는 리쓰린(율림)공원은 전형적인 일본 공원이다.밤나무(율)숲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소나무가 대부분이다.100여년간 다듬어져 1745년 완성된 이 공원은 시운산자락의 녹지에 6개의 연못과 13곳의 언덕으로 구성돼 있다.매화,벗꽃,목련,철쭉,창꽃 등 사시사철 피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학,거북모양을 한 소나무 분재를 만나게 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맛볼수 있다.산책로 중간에 있는 다실 기쿠게쓰데이에서는 차를 들며 섬세한 정원기술과 절묘한 공간배치를 음미할수 있다.산책로는 남쪽코스와 북쪽코스 두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1시간30분정도 걸린다.북쪽호수 언덕에서는 공원전체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어 사진촬영장소로 적격이다. 가가와현은 옛부터 사누키우동이라는 먹거리로 유명하다.중력밀가루와 소금의 절묘한 배분으로 빚어지는 사누키우동은 쫄깃쫄깃하고 차진 맛으로 일품이다.우동의 본고장답게 우동집,우동학교가 1천500여개나 된다.특히 우동학교에서는 손수 우동을 만드는 체험관광을 할수 있다.기술자의 지시에 따라 우동을 직접 제조하고 자신이 만든 우동을 끓여 먹을수 있다. 다카마쓰시의 또하나의 명물은 세토대교.다카마쓰시는 일찌기 일본 본토와 시코쿠섬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해왔는데 지난 88년 이 다리가 개통됨으로써 두 지역은 해로를 거치지 않고 육로로 연결됐다.상층부에는 4차선의도로가,하층부에는 복선식 철로가 있는 이 다리는 길이가 9.4㎞로 도로와 철도 겸용대교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사장교,트러스교,적교 등 6개의 다리로 구성돼 있으며 건설비만 1조1천200억엔이 들었다. 다리 중앙에는 세토대교 기념관이 있어 세토대교 건설과 관련된 내력을 알수 있다.세토대교 주변을 순항하는 유람선도 운행되고 있어 선상 관광을 즐길수 있다. 자녀를 동반한 관광객은 레오마파크를 찾는 것도 좋다.서울랜드처럼 어린이나 어른이 함께 즐길수 있는 놀이공원으로 공간배치도 넉넉하게 돼 있어 여유있게 즐길수 있다.69만㎡의 광대한 지역에 유람버스,우주여행을 체험할수 있는 제트 코스터,회전목마 등의 놀이시설과 이슬람사원,태국의 사원,네팔 왕국의 사원 등 아시아 각국의 유적이 실물 크기로 전시돼 있다. 가가와현 야마모토 토시히로 관광진흥과장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항과 시오노에 온천 등 관광지에 한글로 된 관광안내 책자를 비치해 놓았다』며 『특히 가가와현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정이많기로 널리 알려져 외국인 관광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과 다카마쓰까지는 비행기로 90분이 걸린다.아시아나가 주 3회 운항한다.국내에서는 온누리여행사가 패키지 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 「매맞는 아내」의 절규/김경운 사회부 기자(현장)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하라” 눈물로 호소 『아이야 어디로 가니.…험난한 산자락 휘휘 돌아 나비가 되려느냐』 21일 낮 12시.서울 여의도 신한국당사 앞에서는 한국여성의 전화(회장 신혜수) 등 여성단체 회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매맞아 죽은 여성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일부 피해자들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구타 흔적을 담은 사진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려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적셨다. 특히 지난달 29일 남편의 구타로 숨진 이판순씨(45)에 대한 한풀이 춤이 시작되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씨는 지난해 국무총리 효부상을 받은 현모양처였다.30여년 동안 시부모와 노환으로 누워있는 시조모를 지극히 모셨다. 고된 시집살이를 「팔자」로 돌리고 꾹 참았다.그러나 남편이 최근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툭하면 손찌검을 하는 남편의 횡포를 참을수 없었다.이를 따지던 이씨가 남편에게 매를 맞아 숨진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91년이후 남편의 구타로 목숨을 잃은 여성은 모두 27명.사인이 불분명해묻혀버리는 사건까지 합치면 가정폭력의 폐해는 심각하다는 것이 여성단체들의 지적이다. 이날 서울 관악구 신림1동의 주부 윤모씨(37)는 18년간 계속된 남편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여성계는 지난해 10월 국회에 가정폭력방지법의 제정을 청원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한국여성의 전화 정춘숙 인권부장은 『수많은 여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매를 맞고 있으며,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며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 기행문학 거장 서하객의 강음(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8)

    ◎기인의 거룻배 드나들던 선착장엔 물이끼만/험산심곡 떠돌며 쓴 「서하객유기」 실록문학의 백미/황산자락 전쟁유물에 처절한 비명소리 들리는듯 세상에는 닮은 꼴도 많다.나라의 넓이나 지역의 대소를 막론하고 남북의 대치가 아니면 동서의 갈등이 있다.땅덩이가 클수록 그 예는 더욱 심각하다. 중국에는 양자강을 두고 강남과 강북의 차가 현저하다.같은 강소임에도 남북의 차별은 심했다.소남사람은 소북사람을 깔보며 소북사람은 소남사람을 매끄럽다 흉을 본다. 소남사람들은 자기들이 중국에서 제일 잘 산다고 뽐을 낸다.그도 그럴것이 최근의 소득조사에서 중국 최부의 농촌으로 강소의 강음과 무석이 올랐는데 그 모두가 강남이다.그중에도 강음의 화서촌은 그 소득이 전국 최고,「강남제일촌」으로 불리는데 세대당 1년 저축고가 인민폐로 10만원대(한화 1백만원상당)라고 한다. 무석에서 정북으로 한시간쯤 달렸을때 오랜만에 산이 보였다.강음박물관을 돌아보고 바로 뒷산을 올랐다.황산이란다.황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산,동쪽에 마안산,동남쪽에아산….모두가 양자강 남쪽 기슭에 물막이로 선 야산들.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오나라의 강토를 지키는 요새로서 그동안 태평천국,신해혁명,국공전쟁 등 근대사에 승패를 가름하던 격전지였다.지금도 황산의 정상에는 철근 콘크리트 9층의 망강루가 우뚝 솟았고,망강루 북녘 기슭에는 일찌기 아편전쟁때 영국함대를 노리던 포대가 남아있고,남쪽 산자락에는 국공전쟁때 홍군이 전공을 올린 기념으로 「해방군도강기념비」가 오벨리스크모양의 높다란 첨탑으로 서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필자는 망강루를 올랐다.굽이치는 양자강이 망강루를 허리삼아 휘감았다.포대 서원으로 강북의 정강을 잇는 장강대교의 공사가 한창인데 휘 한바퀴 돌아보는 안막에는 누런 황금 벌.과연 옥토 낙원으로 김이 무럭무럭한 느낌이었다.불현듯 아까 강음박물관에서 보았던 대상의 하얀 이빨,그 화석이 생각났다.2만∼3만년전의 그 화석이 글쎄 여기서 멀지않은 저쪽 청양땅에서 출토되었다니 이 땅의 속살은 얼마나 까맣게 익었을까? 나그네는 서둘러 강음을 떠났다.강음에서 다시 무석으로 돌아가는 길가 마진이란 마을이 가고 싶어서였다.겨우 20분쯤 달렸을때,왼쪽 노변에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안내판이 우람하게 서있다. 「서하객고향­마진」이라고. 또 한번 필자의 본병이 도진 것이다.그것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 병 말이다.그 사람,서하객(1587∼1641)은 필자보다 몇곱절 역마살을 타고난데다 여행기는 물론 암석·고산·하천·화산등의 자연관찰을 통한 지리학 연구에 세상이 놀랄만큼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굉조,호가 하객이다.바로 마진고을 침당하옆에 있는 남양지라는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중국문학사에서 유기의 지위는 대단했다.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선비가 여행기를 통해 정치·사회를 관찰하는가 하면 자연지리를 기록함으로써 자기의 포부를 펴거나 우주의 섭리를 터득했다.그래서 시인 묵객치고 유기 한편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평생을 두고 벼슬길에 기웃거리지 않았다.스물두살때부터 시작해서 쉰다섯살,그가 죽을 때까지 꼭 34년동안,그는 단 한개의 지팡이와 한장의 이불을 메고 강소·절강·안휘·산동은 물론 멀리 섬서·호남·광동·광서·귀주,운남 등 16개성,더구나 험산심곡을 헤맨 산새요,원숭이요,물고기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기인이었다.가만 앉아있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을만큼 넉넉한 살림임에도 그 따뜻한 집과 어진 아내를 마다한 채 한닢 거룻배를 타고 물길 닿는대로 강남과 영남을 떠돌더니 기암과 괴석에다 화산과 지진이 불시로 천지를 폭발하고 천지를 갈라버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서남지역의 험산준령을 밟았다. 우리나라 김정호 비슷하게 탐험적 떠돌이였던 그는 40여만자의 「서하객유기」를 남겼는데 아깝게도 원저는 2백만자가 훨씬 넘는 대작이었다.일기체로 기록된 그 유기는 인간의 극한을 그린 실록문학으로서 최고봉임은 물론 암석학·지질학·지도학의 기초를 닦은 과학서로도 그 의의는 파격적이다.특히 그는 유기에서 석회암의 침식현상인 캐스트(cast)를 발견했고,양자강의 원류를 곤륜산 남쪽인 금사강으로 단정한 것은 모두 지리학적인 발견으로 학술사에 기록된다. 무엇보다 그의 유기는 생동한 묘사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들 수 있다.광서·운남등지에 산재한 동굴이나 동굴속의 종유석,그 핍진한 소묘는 문학가의 상상과 과학자의 투시를 융합 성공한 것이다. 그는 동굴속의 종유석을 이렇게 기록했다. 「정측홀도수일엽,평기반공,외여당문,주적대,상하빙허,각수십장,권서현철,박제선시,엽간분개공대,야안지결지(여유일기이에서) (천장에서 갑자기 커다란 잎새 한장 거꾸로 달랑거렸다.반공에 달린 시렁이 밖으로는 문과 기둥을 마주 본 채 위 아래로 각각 수십길을 서로 기대더니 엷은 매미의 날개처럼 그렇게 널찍히 매달려 있고,잎새 사이마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은 마치 동그란 눈동자같았다.) 남양지는 들녘 복판에 있는 작은 부락.서하객의 고택은 물론 최근에 복구한 것이지만 기품이 당당했다.입 구자 네모꼴 가택이 200평은 족히 넘을 법한 민가.그는 여기서 낳고 여기서 성장했다.그의 34년에 걸친 탐험의 베이스 캠프도 바로 여기였다.그 탐험의 떠돌이는 갔지만 그의 손때가 묻고 그의 족적이 찍힌 두가지가 필자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하나는 그집 뜨락에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고 있는 한그루 나한송과 또 하나는 그 집 대문밖 동쪽 100여m쯤 침당하옆으로 지금도 고색 창연하게 남아있는 선착장과 진솔 단출한 공수식 돌다리였다.하객이 평생토록 타고 다녔던 거룻배,그 배가 정박하고 출항하던 곳이 지금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희한했다. 그 두가지는 그 집 대문 서쪽 100여m쯤에 대궐처럼 높은 까만 기와 담장에 에워싸인 그의 무덤,「명 고사하객서공지묘」라는 묘갈에 큼직한 봉분,계화의 향기로 전중 단아한 묘역보다 더욱 눈길을 끌었다.
  • 부처님 오신날 아침에/조오현 백담사 회주·시인(특별기고)

    ◎청정한 지혜등불 밝히자 백담사 산문의 새벽은 좀 늦이감치 찾아옵니다.동해의 해돋이를 맨 먼저 내려다보는 설악이기는 하나,해뜨는 반대쪽 산자락이라 더욱 그렇습니다.그리고 워낙 골이 깊은지라,먼 아랫마을에서 홰를 치며 울어댈 닭 울음소리도 듣지 못한채 새벽을 맞고는 합니다.그럼에도 새 잎들이 피어난 연녹색 숲이 마치 햇살이라도 받은양 안개구름 사이로 눈부신 새벽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이라서 산문의 새벽이 더욱 싱그러운지도 모릅니다.2541년전 불타가 고타마 시다르타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날입니다.태어나면서 오른 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렸다고 합니다.며칠전 전파가 가물가물 날아온 산골 텔레비전에서 서울 시청앞에 세워 놓은 그 탄생불을 보았습니다.고타마 시다르타는 대강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서 세간 사람들 틈에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 때에 갓난아기 시다르타는 「하늘 위 아래서 나 홀로 우뚝하다.(천상천하유아독존)」는 말로 첫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불타의 전기격인 「서응경」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그 한마디는 바로 모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한 자유선언입니다.또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의지를 드러낸 외로운 인간선언이기도 했습니다.시다르타의 자유선언에서 자유는 19세기 서양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이들이 주창한 자유와는 사뭇 다릅니다.이는 형이상학의 자유인데,불가에서는 자재라고도 말합니다.그 자유를 얻은 이상은 시다르타가 서른 다섯살을 먹던 해에 생각하는 고행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고행 6년만의 깨달음,곧 정각에 이어 해탈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유롭고 막힌데가 없는 자재무애한 길에 접어드셨습니다.고타마 시다르타는 드디어 깨달은 이를 일컫는 불타(부다)가 된 것입니다.그런데 올해 「부처님 오신날」에 바라본 사바의 세상은 막힌 데가 너무 많습니다.그래서 만화방창한 계절을 뒷걸음질 쳐 어두운 그림자만 던져주고 있습니다.그야말로 삼 가닥이 뒤엉키듯 비리가 난마를 이루고 있습니다.국정마저도 넉 달째 표류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체험했습니다.곳곳이 막혔으니,필연적 현상일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울 리가 없고,신바람이 날리 만무합니다.즐거움이 없는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이를 불락이라고 합니다.범어로 나라카,곧 지옥을 뜻하는 말입니다.「삼계 모두가 고통인데,어찌 즐거워할수 있을까」라는 구절이 불타의 전기에 나옵니다.그렇듯 불타의 시대에도 고통과 어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바세계 어두운 그림자만 그가 히말라야 산록 작은 왕국 카필라성을 떠나 고행을 자초하고 나선 것도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그가 태어나면서 약속한 다른 또 하나의 말이 있습니다.「이 생애에서 인천을 이롭게 하리라」는 말이 그것입니다.인간을 하늘보다 더 여긴 인간주의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민주주의 시대가 아니어서 가만히만 앉아 있어도 왕위를 물려 받을 세습왕국의 태자 시다르타는 그런 마음으로 왕국을 떠났습니다. ○비리,권력과 돈에서 연유 그러니까 시다르타는 용기있는 자유인이었던 것입니다.오늘의 세태를 보면 자유로워야 할 부분 우선 몇가지를꼽을수 있습니다.권력과 명예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우선 생각해 봅니다.그리고 돈을 많이 챙기려는 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하룻밤을 자고 나면 날마다 터지는 비리는 모두 권력과 돈에 연유하고 있음을 익히 보았습니다. 지금 고도경제사회에서 무소유의 삶을 강조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입니다.그러나 넘치는 욕심은 금물이 분명합니다.우리는 지금 있고(유) 없음(무)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행법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오늘 등불을 밝힐 불자들이시여! 그 봉축 등에다 과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극히 청정한 지혜의 불을 댕기시기 바랍니다.
  • 진보문학단체 「기사」의 무대 송강(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7)

    ◎항청투쟁 불지른 저항시인의 한맺힌 절규…/소곤산 자락끝 하윤이부자 무덤 비석 외로이/“항청복국” 부르짖던 옥중시 4백편 그날을 증언 들 넓고 물 많은 땅에 배 따뜻하면 무슨 근심이겠냐고 하지만 꼭 그런 법만은 아니다.명말때 문학의 실용성과 현실성,그리고 반만청의 혁명에 참여,장렬하게 희생당했던 「복사」나 「기사」 등의 문학단체들은 바로 상해를 중심한 남북근교,곧 태창·곤산·송강 등지의 시인이었고,뒷날 반만청과 반봉건을 주창했던 문학의 진보단체 「남사」가 또한 소주와 오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그곳들은 일망무진의 평원이라서 풍요로운 곡창이요,바다가 가까워서 근대화의 전진기지였다. 그중에도 「기사」의 성원들인 진자룡(1608∼1647),하윤이(1596∼1645),하완순(1631∼1647) 등은 모두 송강 사람이요,따라서 기사의 무대는 송강인 것이다. 상해시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벗어나는 곳,송강은 옛날 화정·운간·곡수·송릉·입택 등으로 불리웠는데 모두 시정이 물씬하다.상해의 근교라서 근대의 문물을 타고 중국 최초의 천문대와 중국 최대의 성당으로 사산 천주당이 있는가하면 서진때의 유명한 평론가 육기와 명나라때 서예가 동기창이 모두 여기 사람인데다 중화민국국부였던 손문이 그의 혁명단체 「동맹회」의 전국총회를 소집했던 곳도 바로 송강시내에 있는 명청대의 원림 취백지의 설해당이었다. 송강의 문단 맥락이나 산수 경개도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1934년 편찬한 「중국문학가사전」에 수록된 송강 출신의 문인이 90명이요,「중국미술가인명사전」에 수록된 미술가가 586명이라는 통계만으로도 문학예술의 맥을 알겠거니와 송강에는 봉황산,육보산,사산·소곤산 등 9봉이 있고,원림이 상기한 취백지말고 강남의 으뜸이라는 방탑원이 있다. 그럼에도 숭정초(1628∼) 이 고장에서 발족된 「기사),그 주요시인은 한결같이 장렬하게 순국했다.태창·곤산지역에서 먼저 발족된 「복사」처럼 명나라 초엽 소위 「전후7자」의 복고운동을 계승한 동인이다.그를 「기사」로 일컬음은 바로 「끊겨진 학문을 재기하는 기틀(기)」이란 뜻이었다.그러나 그들은 진보적이었다.정치의 진화를 강조하면서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다.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데 문학의 족쇄를 풀었고 만청에 항거하여 순국의 시를 쓰다가 그 저항은 강희연간까지 불길을 지폈다. 「기사」의 맏형격인 하윤이는 한때 복건의 장락지현을 살았건만 기사를 창립,청병이 침노하자 울분끝에 투신 자살했고,「복사」의 후기수령인 진자룡은 「기사」를 창설 주도하고 그의 웅혼하면서도 창량한 시를 무기로 항청 투쟁에 참여했다.그는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강남 각지를 전전하면서 의병 투쟁을 벌이다 소주에서 피체,남경으로 압송 도중,하윤이처럼 강물에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하윤이의 아들 하완순은 나이 겨우 13살로 진자룡의 의병을 따르다가 청군에게 피체,열여섯 꽃같은 나이로 처형당했는데 그는 법정에서 최후까지 오랑캐들의 만행을 규탄했다. 더욱 놀랄 일은 하완순이 어린 나이임에도 영웅열사를 가송하거나 항청복국을 절규하는 옥중시를 4백편이나 남겼는데 그가 청군에게 압송될 때 그의 향리를 마지막 작별하면서 썼던 「운간을 이별하며」는 천고의 절창이다.「삼연기여객,금일우남관. 무한산하누,수언천지관. 이지천노근,욕별고향난. 의백귀래일,영기공제간.」 「3년을 타관 떠돌다가/이제는 또 한번 옥 살이. 저 산하가 모두 눈물인걸/누가 이 천지를 넓다하랴! 이제 가면 황천길이지만/고향 떠나기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이 젊음,넋으로 돌아오는 날/하늘가에 가물거릴 혼령의 깃발이여!」 참으로 장렬했다.한낱 열여섯살 소년 시인의 목숨이 이토록 아름답게 메아리 칠 줄이야. 그들 부자는 나란히 묻혔다.송강서 서북쪽 13㎞쯤 소곤산 낮은 산자락 저 끄트머리 양지쪽 탕만촌뒤에 쓸쓸히 묻혔다.비록 그 동남쪽에 수수라는 작은 시내가 굽이 돌았지만 그들의 넋을 위로할만한 여울이 들리거나 솔바람 소리조차 스쳐가지 않았다.쓸쓸한건 하윤이 부자의 무덤만 아니다.서진때의 대시인이요,대평론가였던 육기와 그 아우 육운이 여기 소곤산 양지쪽에 살았다는데 아무런 자취도 찾을 길이 없다. 진자룡의 무덤은 훨씬 화려했다.역시 송강에서 서북쪽으로 10여㎞쯤 진산 못미쳐 왼쪽으로 광부림이라는 마을,그 동쪽 평지에 동향으로 앉았는데 그는 청나라 건융때 충유라는 시호를 얻은데다 묘비에 묘전,묘정등 세가지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 「기사」의 장렬했던 시인들,그 무덤들을 순례하고 다시 송강으로 돌아왔다.그 유명한 방탑원과 취백지를 한바퀴 돌아야만 했다.어쩌면 「기사」들의 족적이 거기에 남았을지도 몰라서였다. 송강시 중산동로에 자리한 방탑원은 중국 강남에서 손꼽는 원림이다.그 안에는 북송,1068년에서 1094년 사이에 세운 높이 42.5m,누각형 9층의 전목을 함께 쓴 방탑을 비롯,명나라 홍무 3년(1370),방탑의 북쪽에 세운 도교의 부조로 새긴 조벽,그리고 방탑의 3층에 그려진 송대의 불상화와 송교 등이 있다. 필자는 무엇보다 날씬한 몸매에 펄럭이는 치마 모양의 방탑,더구나 서북쪽으로 약간 기우뚱하여 언젠가 피사의 탑을 닮을지 모를 방탑과 용의 대가리에 사자의 꼬리,소의 몸통에 사슴의 발톱에 기린의 비늘을 지닌 탐이라는 괴수가 세상의 보배를 지니고도 모자라 하늘의 해를 삼키려 쫓다가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마는 그 부조가 인상적이다.그런가하면 단 한장 널찍한 화강석으로 덮개를 삼은 송교와 찰랑하게 물이 찬 연당을 살짝 덮도록 가설된 널찍한 부석교는 고전미와 현대미를 융합했다. 청대 초엽,당시의 부호 고대신이란 사람이 백낙천을 흠모하는 뜻으로 시공했다는 또 하나의 원림인 「취백지」도 운취가 그윽했는데 이러한 경개가 시인을 기르고 「기사」를 형성했는지도 몰랐다.
  • 사랑의 회초리(외언내언)

    아련한 그 시절.초등학교 4학년 어느 화창한 봄날로 기억된다.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 해질때까지 전쟁놀이를 하다 집에 돌아온 뒤 그냥 잠들어 숙제를 못하고 등교했다가 담임선생님에게 회초리로 맞고 눈물 흘리던 이야기다.교단에 올라서서 바지를 걷고 다섯대를 맞은뒤 주신 선생님의 말씀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작은 일에 소홀한 사람은 나중에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내용.얼마나 걱정하시고 때리시면서도 아파하시던 지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마음을 읽을수 있을 것 같았다.「사랑의 회초리」였다. 한국가정교육상담소가 펼치고 있는 「사랑의 회초리를 듭시다」라는 구호의 캠페인이 시민들의 폭넓은 호응을 얻으며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장원소장은 『자녀가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회초리의 순기능을 잊지말자』며 지리산자락에서 직접 채취한 길이 40㎝,지름 1㎝안팎의 1년생 싸리나무를 보급하고 있다.지난해 5월부터 무료로 나눠주다 올해부터는 1천원씩 받는다.벌써 3만5천개나 나갔으며 지금도 주문이 쇄도한다.「회초리 수칙」도 함께 일러준다.▲자기 자신을 때리는 마음으로 ▲흥분을 자제하고 ▲바른 자세로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용할 것 등이다. 지난 2월부터 「사랑의 매」보급에 나선 충남 보령시 미산면 노인회의 「자녀교육 십계훈」도 같은 내용이다.「웃어른을 공경하자」「남의 것을 훔치지 말자」「약속을 지키자」「거짓말을 하지 말자」 등 우리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평범한 덕목들이다.이를 어겼을 경우에만 매를 들라며 길이 60㎝,지름 1㎝정도의 무궁화 나무와 쥐똥나무가지를 나눠주고 있다. 전국이 들썩했던 어린이 날이 지나갔다.가는 곳마다 북새통이었고 차·사람들로 국토가 몸살을 앓았다.과연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날이었는지,어른들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그 난리를 친 날이었는지 반성해야할 것 같다. 반성해야할 일은 어린이 날의 어른들 행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최근 끝난 한보청문회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나.거짓말과 뻔뻔스러움,쓸데없는 호통과 어처구니없는 눈물…. 가정,학교,사회할 것 없이 우리는 지금 따끔한 「사랑의회초리」가 절실한 때에 살고 있다.
  • 전겸익·증박의 상숙(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7)

    ◎청의 말발굽에 굴절한 목재의 회한 가슴저미고/공자의 수제자 자유·개혁주도한 증박의 숨결도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두시간쯤 달리면 양자강 건너기 앞서 황소처럼 누워 있는 육중한 산을 만난다.제주도 모양의 그 산더미,이름하여 우산,9㎞의 길이에 260m의 높이.이만한 산도 장강 하류에서는 「지상대장군」이다. 북으로 남통,남으로 소주,서로 무석과 연접한 요충지.역사적으로 춘추때 오문화의 발상지,경제적으로 강남의 옥답.지금도 전국 10대농공단지의 하나,이름 그대로 「곡식이 늘 익는 곳(상숙)」이다. 산을 보면 신이 났다.한바퀴 돌 작정인데 웬걸 70리 순환도로는 2천500년이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상숙시는 우산 동쪽에 펼쳐 있기에 우산의 순례 코스로 먼저 우산공원을 기점 삼았다.거기서 잠시 달려 오른편을 보면 우산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스카이웨이의 입구.그 입구를 지나 고개를 산쪽으로 돌리면 거기 언덕배기 파란 상록수.숲속으로 석계와 석물이 층층이 뵈는데 무덤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공자의 제자 72인중 그중에도 열손가락에 꼽히는 십철의 한분인 자유(BC506∼443 성은 언,이름은 언)의 묘,「언자묘」로 불린다.우산 동쪽 그 반산에 있는 언자묘는 그 묘도나 묘갈,묘표,묘각 등 모두가 창연하고 숙연했다.비록 2천400년이상의 세월이 흘러 그 실체가 한가닥 바람이나 한줌의 흙이 되었을지라도 남송때부터 설단한 묘비와 그 석물들,특히 높이 4.6m,너비 9.7m의 세칸 방문,그 정면에 씌어진 「언자묘도」를 비롯,청나라 건융황제가 남순때 세운 석정이나 어서정 등 자유를 기리는 뜻이 역력했다.자유의 뛰어난 언행에 특히 예악을 강조,이 고장을 현가의 고을로 만들고 줄곧 「남방부자」로 추앙받았던 그 지체를 실감케했다. 언자묘 건너편으론 상숙서 제일 가는 우산관광호텔.그 호텔서 약간 동쪽으로 남송 건염4년(1130)에 세워진 높이 67m의 4면 누각형 9층탑­방탑이 훤칠한 용모로 하늘에 치켜 서 있다. 다시 순환도로의 남단을 돌아 북으로 한참 달리다 차를 멈추었다.오른쪽으로 우산 산정을 보면 하얀 바위들이 엎치락뒤치락 모임을 이루고 그 옆으로 추녀가 날개치는 누각이 아스라히보였다.그게 검각이요,검문기석이라 했다.전설로는 오왕 부차가 그 보검을 시험키 위해 산을 한번 쪼갠 것이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순환도로에서 필자를 안내하던 상숙박물관 학예관 장웨이꿔(장위국)는 도로 서켠으로 내려 서서 필자를 귤밭 건너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필자가 오랫동안 연민하던 전겸익(호 목재 1582∼1664)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언제나 그렇듯이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만날 때면 살포시 흥분할 수 밖에.그는 여기서 낳아 명말청초의 시단을 이끌었던 「동남문종」이요,「우산시파」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었지만 그의 말년은 힐난과 조소로 추락의 비운을 겪었었다. 그 힐난이란 그가 명말에 예부상서의 높은 벼슬을 누린데다 「초학집」 「유학집」 등의 저서에 「두시전주」나 「열조시집」 등의 편주서를 남겼고,더구나 애국우민과 요산요수의 명시를 남겨 동남 제일의 선비였건만 청병이 남하하자 그 말굽에 눌려 그만 반년쯤 예부우시랑이란 감투를 둘러쓰므로서 굴절하고만 것이다. 그 조소란 그가 명말때 당쟁에 휘말려 잠시 은퇴,「명사」를 저술할 무렵,당시 오강」땅 명기였던 유여시(1618∼1664),글쎄 아무리 시재에 뛰어나고 미색이 수려하지만 서른여섯살 아래의 기생에게 홀딱 반해 그를 소첩으로 맞고 「백두홍분지기」의 러브스토리를 남긴 것이다. 유여시는 목재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목재는 이를 듣지 않고 다만 칭병끝에 청조의 벼슬을 내던지고 물러났지만 그 굴절을 참회하면서 아프게 살았다.그 일단이 「낙엽」이란 시에 담겨 있다. 추로종산만목희, 조상총속겁진비. 부지옥로양풍급, 지도김능왕기비. 의월소아도유수, 이상청여정무의. 화림참담여사막, 만이한공일안귀. (만추의 자금산에 나무마다 우수수,영락은 본시 억겁의 순환일세. 이슬 방울이 하늬바람에 지는 까닭을 모른채,사람들은 금릉땅 왕기가 쇠진했다하네. 당나라 명황은 가더라도 달속에 소아와 계수나무만 남았고,서리 밟던 여인네는 옷조차 없구려. 궁중의 비원은 모랫벌처럼 참담한데,만리 추운 하늘로 기러기 한마리.) 필자는 그토록 아프게 참회하면서 세상을 등진 목재의 무덤앞에 한참 섰었다.우산으로부터 줄기차게 뻗은 지맥의 한자락을 잡은지라 그 품위도 당당했다.그 묘갈 또한 「명증광록대부궁보례부상서경행전공지묘」청나라의 작록은 한자도 올리지 않았다. 목재의 무덤 서남쪽 30m.열평남짓의 좁은 묘역에 잡초가 무성한 무덤.이것이 350년전,강남의 명기요 전목재시인의 소첩이었던 유여시의 묘,무덤앞 석비에는 「하동군지묘」,하동군은 그녀의 아호였다.목재옆에 나란히 누울수 없었지만 목재와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 숨은듯 누운 작은 무덤앞에서 필자는 왠지 축축함을 느꼈다.그러나 이 고을 화원촌이란 이름은 우연치 않았다. 화원촌에서 다시 북상,십분쯤 달렸을때 바른편 산자락에 청말 4대 견책소설가의 하나로 꼽히는 증박(1872∼1935)의 무덤이 있다.그는 동아병부의 필명으로 청말의 부패사회와 관료를 폭로하고 국제경험을 썼던 장편 「얼해화」를 발표하여 봉건 타파와 정치 개혁에 공헌하였다. 증박의 무덤에서 다시 10분쯤 북상,우산의 북단쯤 길가에 우뚝 선 「원고사황대치선생묘도」란 방문,옳지! 원대 4대화가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화가 황공망의 무덤.그의 쓸쓸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를 끔찍히 좋아했던 필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수년에 걸쳐 긴긴 두루마리의 산수화 「부춘산거도」가 자꾸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2011년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주요내용

    ◎도시고속도로 4배 늘려 600㎞로/도시가스 공급률 90%이상까지 높여/주택 연7만채 건설… 보급률 85%로/한강변 특별관리·공원녹지 대폭 확충 서울시가 18일 확정한 「2011년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은 인간중심의 살고싶은 도시를 만드는 것을 기본틀로 하고 있다.주요내용을 요약한다. ▷공간구조 개편◁ 서울의 중심지 체계를 1도심과 4부도심(청량리­왕십리 영등포 영동 용산)·11개 지역중심·54개 지구중심으로 세분화했다.2011년 이후에는 수색을 부도심으로 추가한다.용산 부도심은 국제업무 지구로 특화한다.왕십리­청량리 부도심은 동북권역의 중심지로 개발한다.영등포는 서남권역의 중심지로,영동은 동남권역의 중심으로 각각 개발한다. 11개 지역중심은 동북권역(미아·상계·망우),서북권역(연신내·신촌·공덕),동남권역(잠실·천호 및 길동·사당 및 남현),서남권역(목동·대림) 등 4대권역으로 나눠진다. 54개 지구중심은 구단위 생활권중심으로 설정됐다. 용도지역별 기본 개발방향은 도심·부도심은 중심·일반상업지역으로,지역중심은 일반및 근린상업지역으로,지구중심은 일반상업 및 준주거지역으로 각각 지정된다. ▷토지이용의 기본원칙◁ 산자락과 구릉지는 저층·저밀도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역세권 등 기반시설이 갖춰진 곳은 고층·고밀도로,나머지 지역은 중층·중밀도 개발을 유도한다. 또 주거지역을 전용주거지역과 1∼3종 주거지역 등 4종으로 새분한다. 전용주거 지역은 2층 이하(건폐율 50%·용적률 100%),1종 주거지역은 4층 이하(건폐율 60%·용적률200%),2종은 10층 이하(건폐율 60%,용적률 250%),3종은 11층 이상(건폐율 60%,용적률 300%)으로 층수와 용적률 등 밀도를 규제한다. ▷교통◁ 3기지하철 132㎞(9호선 연장 방화∼김포간 12㎞ 포함)와 경전철 등 신교통 100㎞를 완공한다. 도시고속도로도 145㎞에서 600㎞로 4배 이상 늘어나며 간선도로망도 현재의 380㎞에서 800㎞로 확충한다. 3기 지하철 완공 이후에도 대중교통의 사각지역으로 남는 신림∼삼양∼평창동지역,관악∼동작지역,영등포∼강서구지역 등에 100㎞의 경전철 10여개 노선을 건설,기존 지하철과 연결한다.▷환경◁ 도시가스 사용을 의무화한다.아황산 가스를 줄이기 위해서다.도시가스 공급률을 54%에서 2011년까지 90% 이상으로 올린다.상수도 원수의 수질관리를 위해 한강상류 및 팔당호 유역의 상수원 보호구역을 확대 지정한다. 대기오염 상태를 시민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대기오염 측정망을 서울 중심지로 이전한다. ▷사회복지·문화◁ 고령화시대에 대비한 노인복지 향상과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노인정 및 탁아소 사업에 3천5백억원을 투자하고 아동복지를 위해 보육시설에만 계획기간동안 4천8백억원을 추가 투입한다. 학교시설을 대폭 확충하여 학급당 학생수를 30∼35명 수준으로 줄인다.도서관은 5만명당 1개 목표로 240개를 갖출 계획이다.역사 문화공간을 관광산업과 연계하여 발전시키고 문화의 거리도 조성해 나간다. ▷경관·공원녹지◁ 시민생활과 밀착된 공원녹지를 대폭 확충한다.시설공원 면적을 현재의 105㎢에서 2011년까지 120㎢로 늘린다.주요 문화재나 한강변을 특별경관관리구역으로 지정한다.특히 한강 연안의 구간별 특화계획을수립,친수녹지를 최대한 유지·보전하여 지속적으로 자연생태계를 복구한다. ▷주택◁ 현재 69.5%인 주택보급률을 2011년까지 85.2%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이를 위해 해마다 7∼8만채씩 주택을 보급한다.시는 서울의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경기도와 인구 및 도시기능을 분담하기 위한 광역계획을 수립한다.특히 주거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저 주거수준을 설정해 최저 수준 이하의 가구를 현재의 20% 수준에서 2011년까지 5%이하로 낮춘다. 소득대비 주거비의 비율이 25%가 넘는 가구에 대해서는 차액만큼 시가 임대료를 보조해준다.특히 노인주택 수요에 대한 노인형 아파트 공급과 실버타운 개발 등의 사업에 대한 세금감면 등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 제주·여수·하동·구례·사천만/남녘 꽃소식 봄마중 재촉

    ◎노란 유채향기에 신혼여행의 추억을­제주/꽃봉우리째 반기는 동백­여수/매화구름에 신선이 된듯­하동/무리져 피는 산수유 참맛­구례/하늘 가리는 벚꽃 황홀경­사천만 봄바람을 타고 꽃소식이 올라온다.남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하루하루 꽃소식을 북으로 밀어올린다.제주에는 이미 들판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노오란 꽃밭에서 노니는 신혼부부들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남해안 절벽 바위벼랑마다 동백꽃이 선홍빛으로 화사한 매무새를 자랑한다.지리산 자락에는 샛노랗게 피어난 산수유가 별천지를 이루고 섬진강가에는 매화가 황홀경을 연출한다.봄철 꽃놀이의 대표격인 벚꽃도 평년보다 1주일 가량 빨리 필 것이라는 소식이다.이미 제주 서귀포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은 벚꽃축제로 유명한 진해에서 이달말쯤 만개해 4월8일쯤 서울까지 북상할 것이란다.한번쯤 일상의 때를 훌훌 털어버리고 꽃소식을 따라서 봄마중을 나가 봄직도 하다.꽃향기를 만끽할 만한 곳 몇군데를 소개해본다. ○일출봉서 보면 진경 ◇제주 유채꽃=제주의 봄은 유채꽃에서 시작된다.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유채꽃은 3월 초순에 남제주에서 피기 시작해 5월 초순까지 이어진다.유채꽃은 배추 유채꽃과 토종 유채꽃 두 종류가 있는데 배추 유채꽃은 3월에 피어나지만 토종 유채꽃은 4월 하순에 만개한다.남제주군 송악산·산방산 주변과 성산 일출봉 진입로 일대가 군락지로 유명하다.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유난히 더 노랗고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성산 일출봉에 올라가면 아래쪽의 꽃밭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좋다. ◇여수 동백꽃=반도 남단의 미항 여수에서 7백여m의 다리를 지나 오동도에 이르러 산마루에 서면 여수시의 전경과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잎 한잎 지지 않고 꽃봉오리째 뚝뚝 떨어지는 동백이 봄나그네를 반긴다.오동도는 절개를 지켜 바다 바위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어부 아내의 순정이 전해져 오는 곳.섬 둘레로 2㎞에 이르는 산책로는 동백과 해송,대나무 등으로 뒤덮여 아늑한 멋을 풍긴다.오동도 동백은 연등할머니가 승천하는 날인 음력 2월20일쯤 만개해 4월 초순까지 절정을 이룬다.해삼 우럭 등 해산물도 제철을 만나 입맛을 돋구어준다. ◇하동 매화=경남 하동군 섬진강가 섬진마을과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라 일대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매화의 별천지를 이룬다.이 동네에 매화가 과연 몇그루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그저 매화가 피면 또 한해 봄이 왔구나 생각하고 꽃이 지면 봄이 가는구나 생각한다.매화가 활짝 피는 때는 3월 하순 열흘 가량에 불과해 꽃을 즐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은게 아쉽다.섬진마을 매화는 마치 뭉게구름을 산자락에 깔아놓은듯 하다. ○4월초까지 꽃세상 ◇구례 산수유=옛부터 「산수유의 땅」으로 이름난 전남 구례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는 온통 샛노랗게 피어난 산수유로 그야말로 「꽃세상」을 이룬다.우리나라 산수유 열매 생산량의 60%가 이곳에서 나며 구례 지방 생산량의 85%가 지리산 만복대 기슭에 자리잡은 산동면에서 나올 정도로 산수유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산수유가 이 지방 특산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200여년전 쯤부터.지리산 험산준령에 둘러싸여 논이 적고 밭이 척박해 산수유 나무를 심어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산수유의 아름다움은 무리지어 피어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꽃잎 길이가 2㎜ 정도로 매우 작아 꽃송이 하나 하나의 모습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수백 그루씩 무리지어 자란 산수유나무가 한꺼번에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장관을 이룬다. ○3면이 바다로 트여 ◇사천만 벚꽃=벚꽃 하면 우선 진해 군항제를 떠올리지만 사람이 너무 많은게 흠이다.그러나 남해 사천만 선진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아 벚꽃을 한가로이 즐길수 있다.이 공원은 평소에는 한적한 곳이지만 해마다 벚꽃이 만개하면 하늘을 가리는 황홀경을 연출하는 이색지대이다.공원안에만 700여 그루의 벚꽃나무가 있어 「꽃에 가려 하늘이 안보일 정도」이다.공원입구에서 53계단을 오르면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탁트인 공간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 이태백의 당도시(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

    ◎취라산 강변공원 곳곳에 시선기린 유적이…/달 잡으러 몸던진 채석강물에 태백의 환상 어리고/청산아래 외로운 무덤 묘포엔 「시인」아닌 「명현」으로 새 기획연재물 허세욱 교수(고려대 중국문학)의 「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가 오늘부터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을 통해 독자들을 만난다.이 시리즈는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만년을 보내고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송나라 문호 소동파,「수호전」의 저자 시내암,송나라 시인 백낙천,중국현대문학의 비조 노신 등이 태어나고 작품활동을 벌인 위대한 중국문학의 산실인 양자강 하류의 어제와 오늘을 필자의 깊이있는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해나게 된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의 동요처럼 당나라 시선 이태백은 살아서 달에 놀았지만 죽어서 땅에 묻혔다.그 묻힌 땅을 찾아서 가는 길이다. 그는 천재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심지어 한국의 어린이조차 남의 나라 시인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친숙했던 시인이건만 낳아서 묻힐 때까지 기구한 구름나그네였다. 이태백은 기원 701년,무역상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역의 쇄엽,그러니까 지금의 키르기스공화국 토크마크부근에서 출생,다섯살때 고향인 사천성 강유현 청련향으로 귀국했다.고향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출향관,중국의 강남·강북 많은 땅을 떠돌다가 예순한살되던 761년 섣달,당도의 현령으로 있던 족숙 이양빙 집에 기식하다가 이듬해 11월,끝내 늑막염으로 병사했다.당도의 동북교외에 위치한 용산 동록에 매장됐다 다시 58년 뒤인 기원 820년,역시 용산 건너편 청산의 서쪽 산자락에 이장,오늘에 이른 것이다. 혈통에 대한 이설도 분분했다.부조의 오랜 외유때문에 혼혈일 가능성 외에도,심지어 이족으로 보는 호인설도 있지만 그의 자작시나 행장·묘비의 기록에 따라 한족,그것도 장상의 후예로 보인다. 이백과 당도의 인연은 깊었다.중·만년에 방랑점으로 삼은 선성·금릉(지금의 남경)·광릉(지금의 양주)등지를 연결하는 중간점인 데다 그가 숭모하던 남조의 시인 사조(464∼499)가 태수를 지낸 곳,그래서 한동안 선성서 살면서도 일곱번이나 당도를 출입했다.지금 태백이 영구지지로 묻힌 곳도 사조의 고택이 있던 청산 그 산자락이었다. 당도시에서 북쪽으로 10㎞도 안되는 마안산시,서남쪽에 양자강 강줄기를 치마처럼 휘감고 우뚝 선 해발 130m의 취라산은 전체가 이태백기념관이랄 만큼 그를 기리는 유적으로 널려 있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시주화월에 미쳐서 강호를 떠돌던 이태백은 인생이 몽땅 저물어버린 기원 756년,나이 56세에 당나라 현종의 열여섯째 아들인 영왕이 형인 숙종과 벌인 친위쿠데타에 연루,심양에서의 옥고과와 야랑으로의 유배를 겪다가 나이 59세에 석방된다.그러니까 그의 만년 6년은 반란에 옥고,가난에 병고,끝없는 시련에 꺾이고 만 것이다.그가 친위쿠데타에 끼어든 것은 당시 장안을 협공한 안록산의 반군,그 무도한 발굽에 무력해진 정부군을 돕겠다는 비분강개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절필로 알려진 「임종의 노래(임종가)」엔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 있다. 「대붕이 난다,사방을 떨치며, 중천서 날개를 꺾이자 건널 힘이 없어라. 바람에 사무치고,저 해솟는 나무에 노닐었지만 옷소매가 걸렸어라. 뒷날 누가 알랴! 공자가 가버린 뒤라 슬퍼할 이 없거늘」 대붕비혜진팔예 중천추혜력부제 여풍격혜만세 유결상혜괘좌결 중니망혜수위출체 필자는 이 절필이 씌어진 현장에서 이를 암송하면서 이태백 최후의 땅을 밟았다.그의 문학을 사랑한 지 40여년,그가 객사한지 1천2백34년만에. 남경에서 서남쪽으로 한시간남짓,마안산 시계에 접어들자 하늘을 뚫는 굴뚝에 까만 연기.마안산 속스러운 거리를 뚫고 계속 남하했다.이윽고 오른편에 신록의 작은 산이 보였다.그 모양이 파란 고동 같다 하여 「취라산」.하지만 우리에겐 「채석산」이 다정하여라.작은 돌다리를 지나 「채석진」이란 방문을 지나자 채석산 강변공원의 경내에 들어섰다.신록이 옹알대는 오솔길을 걷자 뜻밖에 누런 기와의 대웅전이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바로 「태백루」다.그 지붕,그 기둥,그 처마.과연 건물의 웅장함에 표일한 이태백의 기상이 넘쳐 흘렀다.당나라 원화연간에 창건했지만 여러번 병화에 소진,지금 이 3층누각은 청나라 광서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간 양쪽에 웅크리고 있는 돌사자로부터 정루앞의 굽이굽이 병풍,정루 2∼3층마다 바람인 듯 표표하게 유랑하는 이태백의 유람도에 쇠탈한 조각상,거기다 그를 기리는 비명들.과연 「태백루」는 저 동정호의 「악양루」,무창의 「황학루」와 함께 중국 3대누각으로 칠 만했다. 하지만 필자는 어서 이 엄숙한 전당을 벗어나고 싶었다.저 산꼭지에는 비록 전설이지만 이태백의 최후를 증언하는 현장이 지금도 채석강 맞바람에 천리장강을 굽어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거기서 엉망진창으로 취한채 저 채석강의 달을 잡으려 풍덩 투신해버리는 그 미치광이의 환상을 잡고 싶어서였다. 채석산 정상은 과연 가슴이 후련했다.장강이 아찔하게 굽어뵈는 벼랑위로 넓은 반석위에 「연벽대」란 큼직한 글씨.그러니까 옥을 꿰어놓은 관망대라는 뜻이지만 어디 천년전부터 전설로 불리던 「착월대」만큼 친숙하랴! 착월대서 조망하는 장강의 도도함이나 착월대서 굽어보는 천인단애의 「채석기」는 분명 절경이었다.그래서 이태백은 여기서 「우저에 배를 매고 (야박우저회고)」란 명시를 썼고,송나라 시인 매요신은 이태백의 투강설화를 시에 옮겼다.그뿐만 아니었다.현대의 요절시인 주상(1904∼1933)은 이태백이 투신했다는 채석기 밑에서 1933년12월5일 새벽,상해서 남경으로 가는 연락선에서 투신자살했다.지금은 착월대옆에 붕조처럼 두팔을 활짝 벌리고 훨훨 비상하는 이태백조상을 세웠고,그 위로는 이태백의 투강자살을 기념하는 의관총이 있다. 채석산을 내려와 당도시 동남쪽 청산 아래 당도현 하동향 태백촌에 있는 이태백의 무덤으로 발을 옮겼다.말하자면 전설의 현장에서 사실의 현장으로. 청산은 해발 200m에 가까운 낮은 산.하지만 평지에 있는 이태백의 묘는 초행자가 인가로 알고 지나치기 일쑤다. 건너편 용산에서 이장한 이 묘는 그의 고향 사천 강유로부턴 만리타관이었다.이태백 생전의 친구이던 범작의 아들 범전정이 이 지방 관찰사로 있을때 이태백의 두 손녀 청에 따라 이장을 결정한 것이다. 묘역은 상당히 넓었다.공원을 방불케 다양한 관상수,초입엔 장중한 「태백사」,당나라 헌종때 세웠다지만 여러 차례 중건한 듯새로웠고,열몇개의 비,그중에 「임종의 노래」가 새겨져 가슴을 뭉클케 했다. 무덤은 묘각안에 있었다.다섯겹의 두레석에 둘러싸인 무덤,2m높이의 운석 묘표엔 「당명현이태백지묘」가 이국나그네를 어리둥절케 했다.그의 호방한 일생에 비추어 한낱 시인으로 묘비를 달지 않고,하필이면 그가 혐오하던 도덕군자인 명현으로 받들었을까. 이태백 스스로는 어이없게 찡그리고 있을지 몰랐다.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시인 이태백」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당나라의 명시인 가도는 여기 이백묘를 참배타가 객사하지 않았던가?
  • 파키스탄 탁티바이(세계 문화유산 순례:23)

    ◎가파른 바위산 벼랑끝 성채같은 가람이… 간다라(Gandhara)는 아주 일찍 역사에 등장했다.아키메네스왕조때(BC559∼330년) 페르시아의 속주로 처음 역사에 기록되었다.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변경주 페샤와르현에 해당하는 지역이 옛 간다라 땅이다.역사속에 명멸한 정복자들의 말발굽 소리가 그칠날 없이 이어진 지역이기도 했다.그래도 간다라에서는 불교와 불교미술이 오랫동안 꽃피었다. ○대평원 한복판 우뚝/망망대해 등대인듯 그 간다라에는 불교유적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대표적 유적의 하나가 탁티바이(Takht-i-Bahi)다.가람유적인 탁티바이는 페샤와르현 마르단에 있다.페샤와르시에서 탁티바이까지는 꽤 멀었다.난마처럼 얽힌 카불강과 스와트강줄기를 몇차례 건너서 간다라 첫 수도 차르사다를 지나쳤다.논스톱으로 두시간을 좀 넘게 달렸을까,대평원 한복판에 우뚝한 산자락 하나가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탁티바이산이다.산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 같았다.오랜 세월을 두고 탁발로 유랑한 당시 구도승들에게 산은 실제 등대 노릇을 했을것이다.풀 한포기도 눈에 띄지않는 바위너설의 악산인데,가람은 매달린듯 벼랑에 붙어있다.아래서 저만큼 올려다 본 가람 탁티바이는 성채 그것이었다.그많은 정복자들의 난리를 피해서 부러 가파른 바위산을 택했으리라.오르는 길이 무척이나 험했다. 가람 입구에 다다랐을때 기다리던 경비원이 거수경례로 맞아주었다.긴 치마자락처럼 정강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온 고유의상 카미즈 차림의 경비원은 허리에 넓은 가죽벨트를 맸다.벨트에 권총을 매달지 않았을 뿐,어떤 제복같은 느낌이 와닿았다.유적 경비원을 따라 여러개의 수투파(불탑)가 있는 뜰을 지나서,경내에 단 한그루 밖에 없는 보리수나무 그늘에서 우선 한숨을 돌렸다. 탁티바이 가람유적은 기원전(BC)100년쯤부터 터를 잡아나갔다.그리고 나서 기원후(AD)6세기까지 모두 4단계에 걸쳐 가람을 조성하는 동안도 파괴와 건설이 거듭되었다.탁티바이산은 산자체가 돌산이다.그래서 가람의 모든 건조물은 산에 널린 운모편암을 자재로 축조했다.가람은 층서관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블럭을 가늠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간다라 불교유적지 성한불상 하나없어 유적의 단면은 대체로 요꼴을 이루었다.그런 단면을 기반으로 불교의 기본 건축물인 수투파와 불당,승원을 지었다.수투파는 네모꼴 기단위에 탑 몸체를 쌓아올리는 형식이었는데,애석하게도 기단만 남아있다.승원의 경우에는 가운데 뜰 중정을 가운데 두고 둘레에 승방을 가지런히 배치했다.이같은 승원축조양식은 간다라지방에서 처음 나타나 인도 내륙으로 전파되었다. 가람 입구를 들어서면 수투파 기단들이 늘어선 좁은 뜰이 나왔다.요꼴 단면에서 보이는 오목한 부분이 바로 뜰이다.그 뜰이 시작되는 오른쪽(북쪽)으로 불상을 봉안했던 닫집(감실)들이 바싹 다가왔다.모두 12개나 되는 닫집을 지나쳤지만,불상 한 두어 구가 겨우 눈에 띄었다.그나마 머리가 아니면 팔이 떨어져 나간 불상 뿐이다.가람 어디에서도 몸이 성한 불상을 만나지 못했다. 간다라 불교유적은 일찍 파괴되었다.당나라 승려 현장의 구도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보면 7세기 전반의 건태국,즉 간다라 이야기가 나온다.현장은 이책에다 「승가람은 1천여군데에 있으나,모두 부서진채 방치되었다」고 적었다.동서 1천리,남북 800리의 간다라를 여행하면서 적었다는 현장의 기록에서 탁티바이의 퇴락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식민제국 박트리아의 왕 맨안더(재위 BC155∼130년)의 후광을 업고,또 쿠산왕조의 카니쉬칸(재위 AD78∼128년)을 후원자로 전성기를 맞았던 탁티바이.겨우 600여년을 가람답게 지켰다.지금 탁티바이는 적막했다.탁티바이는 「바위속의 샘」이라는 뜻이다.그래서인지 유적 경비원에게 청해서 얻어마신 양재기 물맛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정복자 말발굽에 파괴­건설 600년 이 가람의 대탑 메인 수투파는 입구에서 곧바로 만난 뜰 왼쪽(남쪽)에 있었다.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메인 수투파가 있는 마당 가장자리에다 여러 칸의 닫집을 ㄷ자꼴로 앉혔다.닫집의 지붕은 독특했다.네모꼴 지붕을 돌로 올리면서 모서리를 차츰 죄어가는 방식으로 둥글게 쌓았다.그리고 지붕 한가운데에 원심의 구조물을 도드라지게 덧쌓았다.역시 이들 닫집안에서도 불상이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이 머물렀던 승원은 이 가람 북쪽 블럭에 있다.메인 수투파가 있는 마당을 내려와 입구 뜰을 건너서 계단을 올랐다.마당 중간을 비워두고 ㅁ자형으로 빙 둘러지은 승방들이 촘촘히 박혀있다.경전을 외는 소리가 두런두런 했을 승방은 지붕조차 없다.지난 먼 옛날 불교를 그토록 보호했던 왕조 모두가 역사속에 묻혔으니,누가 중창을 하랴.지금 유네스코(UNESCO)가 나서 더 허물어지지 않게 보살피고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불교가 존재않는 불교의 유적지 구도승들의 고행현장은 정오가 가까운 한낮에 찾았다.가람 입구에서 시작한 뜰을 거쳐 서쪽 마당끝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을때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왔다.돌을 맞조려 쌓은 천정이 아치꼴을 이룬 터널은 꽤 길었다.터널 오른쪽으로 작은 방들이 붙어있다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 알아차렸다.인공의 토굴이었던 것이다. 토굴의 환경은 감방보다 열악했다.승려들이 고행과 명상으로 은둔했을 토굴에는 박쥐떼만 득시글거렸다.세월이 무상했다.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에 집착하지 않은 탓일까,파키스탄에서 불교가 사라진지는 오래다.제대로 된 불상 하나를 만나지 못하고 탁티바이를 돌아서야 했던 까닭도 불교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유적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가이드/숙박은 페샤와르서/국내선 하루 2∼4편 운항 탁티바이는 페샤와르에서 80㎞ 거리다.페샤와르에서 택시를 타면 90∼100달러가 든다.페샤와르를 거점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페샤와르에서 하는 것이 좋다.숙박시설은 딘스호텔,펄콘티넨털호텔 등이 있다. 교통편은 라왈핀디나 라호르에서 오는 파키스탄 국내항공이 하루 2∼4편 정도 운항한다.그리고 이슬라마바드에서 육로를 택할 경우 4시간이 걸린다.페샤와르는 실크로드시대부터 발달한 도시라서 아랍풍의 문물관광도 즐길수 있다.인더스 가이드(92­42­872975)같은 여행사 안내도 고려할만한 일이다.
  • 산불 조심(외언내언)

    우리는 해마다 엄청난 산불피해를 보고 있다.지난해의 산불피해면적은 5천368㏊.서울 남산만한 크기의 숲이 18개나 불에타 잿더미가 됐다.올들어서도 지난 14일 현재 61건의 산불이 발생,151㏊의 숲이 사라졌다.많은 묘목을 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귀중한 산림자원을 산불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난 15일부터 5월31일까지를 「산불예방특별기간」으로 정하고 이기간동안 전국 18개 국립공원 213개 등산로 가운데 121곳의 출입을 통제키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이 조치에 불만을 터뜨리는 등산객도 많겠지만 우리의 산림자원을 우리 스스로 보호한다는 뜻에서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산은 극심한 겨울가뭄으로 바싹 메말라 있다.기상청은 봄철에도 가뭄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보하고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건조주의보를 발령했다.지난해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나뭇가지가 어깨를 비비고 있는 요즘 산자락에 작은 불씨만 떨어져도 불길은 순식간에 산전체로 번지게 마련이다.산불은 대부분 사소한 부주의에서 발생한다.산림청 분석에 따르면 등산·행락·성묘객이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일어난 산불이 48%나 된다.90년부터 5년동안 경찰청이 살펴본 산불발생원인도 등산객실화 47%,논·밭두렁실화 23%,어린이불장난 5% 등으로 나타났다.한마디로 기초질서 위반이 산불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국민의 산행질서를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효율적인 진화대책 마련도 시급하다.산불이 일어났을때 조기진화할 수 있는 전문요원을 대폭 늘려야 하고 헬리콥터와 동력펌프 등 장비현대화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선진외국과 같이 산불전문소방대의 창설도 검토 해야 한다. 산림은 우리 모두의 귀중한 자산이다.이자산을 잿더미로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산불조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대만 란위도/핵폐기물 저장 10년… 「죽음의 섬」 변모

    ◎서울신문 김규환 특파원 대만 란위도를 가다/어린이 6% 선천성 저능아… 임산부 유산 급증/처리장 주변 개천 서식 물고기 90%가 기형어 북한으로 반입될 대만의 핵(방사성)폐기물 저장소는 란위섬에 있는 마을로부터 5㎞쯤 떨어진 외진 용문촌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정문 오른쪽의 야트막한 담장에는 「난서저존장(란위저장소)」이라는 돌 팻말이 큼지막하게 내걸려 있었다. 핵폐기물 저장소를 둘러싼 아름다운 풍광과는 달리 정문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20여명의 직원들과 경비원들이 2일 한국 국회의원과 최렬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환경운동가들로 구성된 우리 민간대표단을 막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경비원에게 들어가볼수 있느냐고 묻자 『한국기자와 대표단들은 절대로 들여보낼 수 없다』며 결사적으로 저지했다.경비원들은 여러가지를 질문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한국 대표단들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저장소 책임자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그러나 일본기자들의 출입은 허용했다.내부를 둘러본 일본경제신문 진중웅 홍콩특파원은 『단층짜리 흰색 콘크리트건물 3개동과 사무실로 이뤄진 핵폐기물 처리장에는 북한으로 반출될 노란 핵폐기물 드럼통을 땅에 묻고 시멘트로 밀봉한 다음 보관하고 있다』고 전한다. 긴장감속에서 정문을 통해 저장소를 들여다보니 왼쪽으로 사무실 건물이 있고 차고가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오른편의 해안쪽과 사무실 건물 뒤쪽으로는 녹색지붕으로 덮인 핵폐기물 저장창고들이 자리하고 있다.저장소에 보관돼 있는 핵폐기물은 모두 9만7천600드럼.지난 78년부터 가동된 금산·석문 원자력발전소 등 3곳의 핵발전소 6기에서 배출한 작업복,장갑,공구류 등 소모품과 이온교환수지,폐필터 등 저준위 핵폐기물이 보관돼 있다. 핵폐기물 저장소와 함께 2천8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있는 란위섬에는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도로변 곳곳에 있는 도로표지판에는 「서사반핵(반핵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섬뜩한 내용의 문구가 스프레이로 뿌려져 핵오염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핵폐기물 처분장이 세워진지 10여년이 지나면서저장시설이 낡아 핵오염물질이 흘러나오고 관리자들의 실수로 핵폐기물에 오염된 흙을 바다에 버려 「죽음의 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핵폐기물의 방사능 누출로 오염돼 란위섬에는 저능아 출생률이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대만 환경보호단체에 따르면 란위섬의 미취학 어린이 900여명중 무려 6%정도인 50여명은 선천성 저능아라는 것.왕순리 야유 초등학교 교사(40)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중 학교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습 지진아가 10명중 1명꼴』이라고 말했다. 핵폐기물 오염은 주민들의 생업인 조개양식업과 도미 등 고기잡이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원래 조개양식업으로 유명한 이 섬은 핵폐기물 처리장이 생긴 뒤 핵오염으로 조개가 죽거나 사라지는 바람에 조개양식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야유촌의 진무남씨(55)씨는 『3∼4년전보다 어획량이 절반으로 떨어졌다』며 핵폐기물에 오염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등뼈가 휘거나 몸에 반점이 생긴 흉물스런 물고기 사진을 내보였다. 암사망률도 높아져 핵오염에 따른 후유증일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동청촌에서 만난 장해서씨(35)는 젊은이들이 주로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임신부들의 유산이 크게 늘어나는 것도 핵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선 이후 나타난 징후라고 말한다.
  • 서울시 발표 올 주요업무 계획

    ◎공원 확충비 2천8백억… 「환경 서울시」 조성/매립가스 소각처리 등 난지도 활용/탄천 하수처리장 복개 체육공원화/녹지 20% 넘는 환경주택단지 설립/17년 넘은 한강교 1등급 성능 개선/일반용 도서관 1구1곳 구비 “박차”/한국형 납골묘 개발… 7월부터 보급 조순 서울시장이 22일 발표한 「주요 업무 계획」은 공원확충 등 민선2기를 맞아 본격 추진할 주요 업무를 망라하고 있다.내용을 요약한다. ▷공원 확충◁ 올해 2천8백31억여원으로 공장이적지 등 4곳을 공원화한다. 영등포 OB맥주 공장부지 1만9천591평에 연못,산책로,잔디광장을 조성,서남부지역의 명소로 가꾼다.강동구 천호동360 파이롯트 공장이적지 8천90평은 광나루유원지·올림픽공원 등 녹지체계와 연결하는 공원으로 꾸민다.성동구 성수동2가302 삼익악기 공장부지 1천575평과 동대문구 답십리3동471 4천600평 등도 올해 말까지 공원을 조성한다. ○공장이적지 4곳 개발 이밖에 먼지가 많이 발생해온 공해 사업장으로 이전예정인 강서구 등촌동610 성진유리 부지를 29억여원에 매입,오는 98년 말까지 공원을 만든다.중랑구 망우동506 아주산업 부지의 공원조성 계획은 중랑구의 상세계획 결과에 따라 추진한다. 중랑구 면목동 용마자연공원,금천구 시흥동 관악산자연공원,강동구 명일동 샛마을근린공원 등 나대지로 방치된 3개공원은 「주제공원」으로 조성한다. 도시계획결정 이후 20년이상 방치돼온 곳 중 궁동근린공원 등 23곳 12만700평을 8백35억원으로 우선 보상하고 답십리공원 등 7곳은 공원을 조성한다. ▷난지도 매립지 안정화◁ 지난 78년부터 15년간 9천2백만㎥의 폐기물이 비위생적으로 매립된 난지도를 20∼30년 후 활용하기에 앞서 안정화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매립지 상부 식생층화 우선 매립지의 높이가 94∼98m인 난지도의 사면경사를 완만하게 한다.윗부분에는 빗물의 침투를 막고 1.5m 안팎으로 흙을 덮어 식생층을 조성한다.매립가스 처리를 위해 고밀도 비닐천막으로 매립지 윗부분을 완전히 덮고 직경 60㎝,깊이 40∼60m의 대형 가스추출정 106개를 설치한다.1만3천250m의 가스관을 묻고 이 관을 통해 가스를 한곳으로 모아소각처리한다. 매립지 주변에는 6천235m의 차수벽을 지하암반까지 설치,침출수가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다.매립지 하부에는 생태공원 및 종합체육공원을,경사면에는 식물적응시험을 위해 경관녹지를 조성한다. ▷성수대교 복구◁ 개통지난 94년 10월21일 붕괴된 성수대교가 2년8개월만인 오는 7월1일 재개통된다.4차선으로 폭 19.4m,길이 1천160m이다.공사비 7백33억원이 들었다.트러스 부재의 두께를 30% 두껍게 한 반면 상판무게를 줄여 총중량 43.2t 차량까지 통행할 수 있는 1등급 다리로 다시 태어난다. 오는 2002년까지 기존 다리 상하류에 각각 3차선씩 확장한다. ▷한강교량 신설·확장 및 성능개선◁ 서울시 구역안의 한강다리는 최근 개통한 서강대교 등 17개이며 청담·가양대교 등 2개의 다리가 현재 건설중이다.80년 이전에 건설된 다리는 총중량 32t 이상의 차량이 건널수 없는 2등급다리여서 성능개선이 필요하다. ○청담대교 내년말 완공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잇는 청담대교는 오는 98년 말 완공예정이다.복층다리로 1층은 전철용,2층은 일반용이다.마포구 상암동과 강서구 등촌동을 연결하는 가양대교는 99년 6월말 준공예정이다. 광진교를 오는 2000년 8월까지 4차선으로 확장하며 한남대교도 다리 하류쪽에 폭 25.5m,길이 915m의 6차선 1등급 다리를 놓은 뒤 기존 다리도 1등급으로 개선한다.다리 남단에 경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바로 연결하는 고가도로를 건설,교통체증을 해소한다.2004년 완공예정.마포대교도 교량 하류쪽에 5차선 1등급 다리를 신설한다.이어 기존 다리를 완전철거하고 신교와 같은 규모로 개량한다.잠실대교와 양화대교 역시 2000년 말까지 1등급으로 성능을 개선한다. ○용미리 150기 시범보급 ▷한국형 납골묘 보급◁ 해마다 여의도 면적의 3배인 2백70만평의 국토가 묘지로 잠식되고 있는 점을 감안,장묘제도를 개선토록 한다.망우리 등 3개 시립묘지는 이미 만장됐고 용미리묘지도 24개월 후면 더이상 매장할 수 없게 된 실정이어서 서울시는 화장후 유골을 매장할 수 있는 「한국형 납골묘」를 개발,7월부터 일반에 보급한다.전통적인 국민들의 매장선호의식을 감안한 것이다.이를 위해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에 한국형 가족납골묘 단지를 조성,150기를 시범보급한다.특징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봉분식 납골묘로 6평규모의 1기에 12위의 납골봉안이 가능해 가족묘로 활용토록 한다.가격은 7백만원대로 1위당 58만원 안팎이다.1구당 2평 기준 1백60만원인 일반묘지보다 훨씬 경제적이다.벽제화장장과 용미리,망우리 묘지에 견본을 공개중이다. ○농수산물 도매시장 개장 ▷구리 농수산물도매시장 개장◁ 84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을 개장한데 이어 5월에 구리시 인창동 117에 「동북권 농수산물 도매시장」을 개장한다. ▷1구 1도서관 건립◁ 서울시내에는 모두 1천242개의 도서관이 있으나 초중고교 도서관과 전문·특수 도서관을 빼면 일반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은 30개에 불과하다.25개 자치구 가운데 관악구 등 10개구는 도서관이 하나도 없다.시 전체적으로 인구 1백만명당 도서관이 2.8개꼴로 도쿄 23.8개,뉴욕 28.7개,파리 29.7개,런던 56개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 ○시립극단 객원출연제이에따라 관악·성동·중랑·강북·성북·광진구 등의 6개 도서관은 지난 해까지 토지매입을 마쳐 오는 98년까지 완공한다. 은평·서초·중구·금천구는 올 해안에 토지매입을 마치고 98년에 착공,99년까지 마무리해 도서관없는 구를 완전 해소토록 한다.연면적은 3천∼5천㎡로 지하2층,지상5층 열람석 800∼1천200석 규모로 짓는다.평균 사업비 1백억원중 40억∼60억원을 시비로 지원한다. 강동구 암사동 510에 짓고 있는 지하1층,지상4층 연건평 280평의 점자도서관을 오는 2월중 개관한다. ▷시립극단 창단◁ 시민들의 분출하는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단키로 한 시립극단을 내실있게 운영한다.전속단원을 11명으로 최소화해 경비를 절감하는 대신 작품별로 출연계약을 맺는 「객원출연제」를 도입한다.연극관련 전문가로 평가위원회를 구성,운영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올 하반기에 창단공연을 갖는다. ▷환경친화적 주거단지 시범조성◁ 양천구 신정동 726과 761일대 남부순환도로 변의 서부화물터미널 주변의 7만9천평에 환경친화적인 시범주거단지를 조성한다.신정동 726 일대 신정1지구 3만6천평,신정동 761 일대 신정2지구 4만3천평을 택지로 개발,오는 2000년까지 모두 3천가구를 짓는다.2000년 입주예정이다. 산자락과 녹지를 보존하여 기존 택지개발지구의 10∼12%보다 훨씬 많은 20%이상의 녹지공간을 확보토록 한다.경직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콘크리트 울타리 대신 나무 울타리를 설치한다.도로 등으로 단절된 구간에는 동물이동 통로를 설치한다.야생조류가 좋아하는 수목을 심어 동식물의 서식공간도 확보한다.환경오염을 막을수 있도록 지역난방을 도입하고 수도관에서 가정으로 바로 연결되는 「직결급수체계」를 갖춘다.단지안에 쓰레기의 퇴비화 설비를 갖춘다. 주차장은 100% 지하화하는 대신 지상에는 꽃길,휴게소,산책로와 자전거도로를 조성한다.콘크리트 옹벽 대신 녹생토나 자역석을 쌓는다. ○중랑·가양 처리장도 추진 ▷탄천하수처리장의 복개 공원화◁ 냄새때문에 혐오시설로 인식돼온 하수처리장 윗부분을 복개해 체육 및 주민휴식 공간으로 활용한다.우선 강남구 일원동의 탄천처리장을 강남구와 협의해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3천400평을 2층으로 복개,1층은 주차장으로 쓰고 2층은 테니스장과 배드민턴장,체력단련장 등 체육 및 공원으로 활용한다.중랑·가양 하수처리장도 단계적으로 복개한다. ▷여의도 샛강 자연생태공원 조성◁ 한강 본류의 파천으로 홍수때를 제외하고는 물이 흐르지 않고 저습지 상태인 여의도 샛강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한다.공원 조성지역은 63빌딩 부근에서 국회의사당 옆까지 4.6㎞로 상반기까지 마무리한다. 지하철 배출수를 이용해 계단식 폭포를 만들고 자전거도로도 신설한다.습지에는 나무로 마루통로를 만들어 관찰로로 활용한다.참새·비둘기·흰뺨검둥오리 등이 서식할 수 있는 「야생조류원」도 만든다.
  • 서울 수도권 중심지 자투리 땅/초고급 호화 빌라건설 붐

    ◎별장형 설계… 전망·교통 좋은곳 많아/최고품 자재… 수억원대도 분양 잘돼 대형 주택건설업체들이 서울과 수도권 중심지역의 자투리 땅을 이용,수억원대의 초고급 빌라형 대형주택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다. 주택업체들은 그동안 재개발,재건축,대규모 아파트 건설사업 등을 벌이면서 공사기간 연장과 미분양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그러나 부유층을 겨냥한 초화화 주택은 공급량은 적지만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고 자투리땅 활용 등 주택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분양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따라서 자투리땅을 이용,고부가가치형 틈새시장을 노리는 도심형 타운하우스 건설은 주택업체들 사이에 또 다른 주택유형으로 붐을 일으킬 전망이다. 현대건설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139의 21∼22일대 552평에 88평형(전용74평) 19가구를 건설 중이다.오는 11월말 준공 예정인 이 주택은 5월부터 분양하게 된다. 가구별로 주차장에는 자동차 3대를 주차시킬수 있다.빌라 뒤쪽에는 북한산,앞쪽에는 인왕산을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넓게 설계된 집앞 정원과 1층 중간 부분의 넓은 피로티는 조경화단과 조경용 목재마루 등으로 장식된다.북한산이 바라 보이는 주인욕실은 월풀(Whirl Pool)욕조가 설치된다.분양가는 미정.746­2664. 대우건설은 올해에는 주택사업 유형을 다각화·차별화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도심형 고급주택을 짓기로 전략을 세우고 서울 서초동 430평 부지에 90∼100평형 10가구,방배동 310평 부지에 90∼100평형 6∼7가구,청담동 730평 부지에 90∼100평형 15∼20가구 등 모두 21∼27가구를 지을 계획이다. 분양은 서초동 빌라를 오는 2월,방배동과 청담동 빌라를 6월에 각각 실시할 예정이다. 서초와 방배빌라는 수요층을 세분화,평면구성을 달리하고 빌라 외관을 일본 후쿠오카의 넥사스 월드처럼 색다르게 꾸민다.청담동 빌라트는 아파트와 빌라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겸비한 주거공간으로 계획 중이다.259­3868. LG건설은 서울 청담동에 100평형 11가구(복층형 2가구 포함)를 건설한다.지하 1층,지상 7층 규모인 LG빌라는 이달에 착공,98년 4월에입주예정이다.분양은 4월부터 실시할 계획. 주택구조는 1층 한가구 공간을 홀(Hall) 및 정원으로 꾸미고 출입구를 호텔로비로 만든다.소음차단용 마감재를 사용해 현관에서 각 실에 대한 프라이버시가 완전히 보장된다.실별로는 마스터 존(Master Zone)과 자녀들의 공간 사이를 구분,가족끼리의 프라이버시 보장도 고려한다.거실은 최대한 늘려 입주자들이 많은 손님을 초대해도 불편이 없도록 꾸밀 계획이다.728­2176∼7. 현대산업개발은 분당 오리역부근 불곡산자락에 타운하우스 현대빌라(110평형 단독형 복층빌라) 12가구를 분양 중이다.분양가는 9억7천만원선이며 98년 5월초에 입주가 가능하다. 이 빌라는 1층과 2층을 터놓은 복층형 구조로 3가구가 한집에 살아도 불편이 없도록 설계됐다.가구별로는 35평 크기의 전용정원도 마련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 특징이다.(0342)712­1936. 한일건설도 분당 전람주택단지에 86∼88평형 한일인텔빌라 13가구와 인텔하우스 단독 1가구(별장식)를 분양 중이다.분양가는 평형에 따라 평당 7백만∼8백만원대. 이 빌라는 한일건설이 「1세기 주택」을 짓는다는 기업정신을 담아 쾌적한 자연환경과 첨단 주거문화를 조화시키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0342)708­8809.
  • 일 나라현 법륭사(세계 문화유산 순례:19)

    ◎한민족혼 숨쉬는 세계최고 목조가람/7세기 아스카시대 불교건축문화의 정수/국보·문화재 190종 2천3백여점 집결/금당 석가삼존상 등 한반도 도래인이 제작/지붕·벽 우리의 옛날집 모습 그대로 일본 나라현 호류지(법륭사)는 일본 문화가 자라나온 모태였다.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서 지난 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류지는 「나무의 문화」인 일본 건축문화의 정수이자 일본 불교문화의 원형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가람이다. ○5만7천평 동·서원으로 분리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 너른 들판 끝 산자락에 위치한 이 절의 18만7천㎡의 경내는 서원과 동원으로 나뉘어져 있다.서원은 산문인 남대문,중문,오중탑,금당,회랑,경장 등으로 이뤄져 있고 동원은 몽전(몽전:유메도노)불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190종 2천3백여점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서원의 대보장전에는 백제관음상,유메치가이(몽위)관음상,다마무시노즈시 등 일본 문화의 정수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1천300년전인 7세기 아스카시대에 지어진 이 절이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끄는 것은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오중탑,금당,중문,회랑,경당은 물론 15세기에 재건된 남대문을 보노라면 마치 고향집에 돌아온 듯 아늑한 느낌을 준다.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지붕과 벽의 단정한 처리가 우리의 옛날 집들 그대로다.불교는 고분문화시대에서 「문명시대」인 아스카시대로 넘어오는 6세기중엽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전래됐다.고대 시대 일본의 교육은 대부분 승려들에 의해 이뤄졌다.절은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 문화를 한반도 도래인들이 지도했던 것이다. 오노 겐묘(대야현묘)집사장은 『당시 한반도에서 기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의 문화를 지도했다』면서 『호류지에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금당의 석가삼존상 뿐이지만 삼존상 제작자인 도리 불사도 할아버지가 도래인이었다』라고 말한다. 호류지는 서기 607년 스이코왕과 쇼토쿠세자가 건립했다.그러나 일본서기에는 670년 4월 30일 호류지가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됐다고 기술하고 있다.아직도 이 부분은의문에 싸여있다.발굴조사등에 의하면 완전소실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재건·비재건 논쟁에 관계없이 이 절의 주요 부분들이 7세기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산문인 남대문을 지나면 바로 중문.깊숙히 덮인 처마,그 처마 밑에 정교하게 새겨진 공포,그리고 신전의 기둥과 비슷하게 엔타시스 양식으로 다듬어진 기둥 등 아스카시대 건축의 정수를 한데 모은 건물이다. 오중탑은 호류지의 말사로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포함된 호키지(법기사)의 3중탑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위로 오르면서 점차 줄어드는 처마의 비례가 그지없이 아름답다. 지난 81년 호류지 5중탑과 비슷한 규모의 나라현 야쿠시지(약사사) 서탑을 재건한 미야다이쿠(궁대공:도목수) 야마모토 가쓰미(산본극사)씨는 『도다이지 대불당 하나 짓는데만 연인원 2백60만명이 동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81년 서탑 재건에는 2천만달러가 들었다』면서 『호류지 건축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권력,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과 문화가 어우러져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금당벽화 소실… 모사품 걸려 금당은 5중탑과 함께 호류지의 눈동자이다.금당의 벽화는 1949년 실화로 소실되거나 그을려 지금은 수액 처리돼 보관돼 있고 현재는 모사품이 걸려 있다.벽화의 제작자는 모른다.고구려승 담징이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적다고 한다.오노 겐묘집사장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면 150세이상을 살아 활동했다는 말이 되므로 무리가 있다』면서도 『벽화에 고구려적인 특성이 짙은 것으로 미뤄 일본에 붓과 물감을 전한 담징의 제자들이 벽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추론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회랑의 서쪽편에는 경장이 있다.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천문 지리학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백제학승 관륵승정의 상으로 전해지는 좌상이 안치돼 있다.오노집사장은 『관륵승정은 초대 주지였다』라고 말한다.이어 『지금도 호류지의 주지로 취임하면 관륵상 앞에서 취임식을 갖는다.그때만 경장의 문을 연다』고 말한다. 호류지가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천년을 넘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나라지역이 지진 등 자연재해가 적고 호류지가 나라의 중심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전화 등 재난을 피할수 있었던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다음은 끊임없는 재건과 보수작업 덕분.썩기 쉬운 기둥의 곳곳에는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새 나무를 끼워넣은 흔적이 수다하다. 호류지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다카다 료신(고전양신)스님은 「세계문화유산 호류지」에서 『창건후 200년이 지나면서 호류지는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면서 『그러나 쇼토쿠세자시절 호류지에 하사된 오미 가와치 세쓰 등의 영지에서 재원을 조달할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가 가능했다』라고 말한다.료신스님은 재원을 모으기 위해 스님들이 분주했다고 말한다.영지 농민들의 땀이 호류지를 지킨 거름이 된 셈이다. ○창건·보수 민중의 땀으로 호류지는 지을 때부터 보수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땀으로 쌓아올려진 문화재였다.만요수(만엽집)의 빈궁문답가는 아스카시대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삶을 전해준다.「해초와 같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무너지는 집에 짚을 깔고 앉았다.부모는 머리쪽에 처자는 다리쪽에 웅크리고 있다.부뚜막에는 거미가 줄을 치고 이장은 채찍을 들고 세를 받으러 와 불러댄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까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까」라고.호류지는 그 시대 백성들의 땀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여행 가이드/오사카서 근철로 15분거리… 인근 고분군 둘러볼만 한국에서 나라 호류지로 접근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루트는 세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첫째는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들어가 공항에서 나라로 들어가는 공항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나라까지 95분 소요된다.둘째로는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시내를 거쳐 호류지로 가는것.오사카시내 텐노지(천왕사)역에서 긴테쓰(근철)노선으로 호류지로 간다.텐노지역에서 15분만에 호류지역까지 도착이 가능하므로 가장 이용하기에 편리하다.한국에서 항공편이 닿는 나고야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나고야에서는 JR 또는 긴테쓰선을 이용해 교토를 경유하거나 직접 나라로 향할 수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오사카에서 나라행 노선을 이용할 경우 호류지역에 도착,왼편 출구로 나가면 20분정도 걸어 호류지에 닿을 수 있으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오른편 출구로 나가면 된다. 호류지 인근에는 호키지,후지노키 고분 등이 산재해 있다.역사기행에 알맞으므로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나라시내로 발을 옮기면 도다이지,야쿠시지,하세데라 등 수많은 명찰들이 반기게 된다.
  • 이광수가 밝힌 침투명령서 생포까지

    ◎9월13일 정찰국장이 직접 침투명령/충성 맹세뒤 연회… 14일 새벽5시 출항/분계선 5마일전서 해저 60∼70m 잠수/15일밤 강릉앞바다 도착… 정찰조 상륙/17일 악천후속 후진접안 시키다 좌초/안내조 2명과 식량 구하러 일행 이탈/산속 헤매다 심한 허기… 민가접근 피체 생포된 무장공비 이광수씨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남침투명령하달에서 출항·좌초·도주·생포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소상히 털어놓았다.이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생포까지의 과정이다. 함경남도 낙원(옛 퇴조)항에 기지를 둔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22전대 2편대 소속 1호 잠수함에 대남침투명령이 하달된 것은 9월13일 저녁.정찰국장 김대식 상장(별셋)이 직접 방문,김동원 해상처장(대좌) 및 부처장(상좌)과 조타수 이씨를 비롯한 승조원 21명 전원(안내조원 2명 포함)등 23명을 모아놓고 비상세포총회(당원모임)를 주재했다. 이들은 『우리는 김정일 최고사령관동지의 적후정찰임무를 피끓는 가슴마다에 받아 안았다.장군님께서 주신 명령을 관철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고 살 권리도 없다.장군님의 안녕은 우리의 소원이며 다함 없는 마음을 담아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삼가 축원한다』는 내용의 「충성의 맹세문」을 함께 낭독하고 서명했다. 정찰국장이 마련한 연회를 가진 뒤 이들은 다음날인 14일 상오5시 낙원항을 떠났다.출항전 비밀임무를 띤 정찰조 3명이 합류했다.총탑승인원 26명.이례적으로 정찰국장이 직접 나와 일일이 악수를 하며 격려했다. 군사분계선 북방 5마일까지 잠망경을 올리고 전속력으로 남하한 이들은 이쯤부터 수중공기관과 잠망경을 내리고 해저 60∼70m 깊이에서 항진을 계속,군사분계선을 넘어들었다. 항해도중 승조원과 정찰조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대화가 일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이번 정찰조가 이미 세번정도 남파경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눈게 전부였다.밥도 따로 먹고 휴식도 다른 방에서 취했다. 강릉에서 5마일정도 떨어진 지점부터는 잠수함을 부상시켜 잠망경으로 위치를 확인해가며 강릉쪽으로 접근,15일 하오7시쯤 강릉시 안인진리 앞 300∼400m 해상에 도착했다.이어 하오10시쯤 정찰조 3명과 안내조원 2명을 상륙시켰다. 16일 하오8시30분쯤.같은 지점에서 공작원을 잠수함에 태워 귀환시키려 했으나 기상이 좋지 않아 실패했다.계속 복귀를 시도하던 중 17일 하오8시30분쯤 『파도가 세니 해안 가까이 접안하라』는 안내조장의 무전지시가 떨어졌다.잠수함은 후진으로 해안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파도에 휩쓸리면서 좌초했다. 이들은 하오11시50분쯤 잠수함내 주요기물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이때 공작원 3명이 먼저 해안을 떠나 도주했고 18일 상오 1시30분즘 이씨는 안내조장·조원 등 2명과 함께 『밥을 구해오겠다』며 상륙했다.이씨는 잠수복을 입고 있던 안내조원이 잠수복을 벗어 땅에 묻는 것을 도와준 뒤 함께 괘방산쪽으로 달아났다.잠수함 항해 때 흔히 나타나는 소화불량 등 증세로 밥을 거의 먹지 못한 이씨는 물론 안내조원도 크게 지쳐 있었다.쉬다 가다를 반복하다가 이씨는 「죽을 바에야 북으로 올라가면서 죽자」는 생각으로 지친 안내조원을 떠나 혼자서 활로를 찾기로 하고 이들로부터 이탈했다.산봉우리를 다섯번 넘어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허기에 지친 이씨는 뭐든지 먹고 보자는 생각에 산자락 아래 강동면 모전리 민가에 내려왔다가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김태균 기자〉
  • 파키스탄 탁실라:상(세계 문화유산 순례:10)

    ◎ADI세기 간다라미술 태동지/BC2세기 도시 「시르캅」 주인 5차례 바뀌어/실크로드서 인도가는 길목 이민족 침략 찾아/초기불교 불상대신 불탑 실내에 위치… 규모 작아/「쌍두취불탑」 기단장식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풍 오늘의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을 선점한 종교는 불교다.그러나 지금 파키스탄에는 불교가 종교로 존재하지 않았다.다만 불교의 흔적들이 거대한 유적군으로 여기저기 남아있을 뿐이다.불교미술사의 첫머리를 찬란하게 장식한 이들 유적은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하나가 펀자브주 라발핀디지방의 탁실라(Taxila)다.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 승용차가 채 한시간을 못달려 도착했다.탁실라박물관으로부터 탁실라 전역이 유네스코가 선포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설명을 듣고나서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그러니까 유네스코는 탁실라를 온통 한 덩어리로 싸잡아 대단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한 것이다. 산악이 동·서·북을 감싸고 돌아가다 남쪽을 터놓아 마치 삼태기처럼 생긴 고원지대에 자리한 탁실라.동쪽 사르다산과 북쪽 자울리안산 사이 계곡에서 발원한 개울물이 제법 깊었다.그 산자락과 계곡 어디 하나 이름붙지 않은 곳이 없다.그리고 비르마운드를 비롯,자울리안,모라모라드,시루스크,잔디알,시르캅,사르아이코라,다르마지카,기리 같은 숱한 유적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서깊은 탁실라의 역사를 후세에 증명한 유적은 시르캅(Sirkap)이다.기원전(BC)2세기쯤에 건설되어 기원후까지 존속한 이 도시유적은 탁실라 제2의 도시였다.이보다 훨씬 앞선 도시유적 비르마운드가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역사를 뒷받침하기에는 좀 미흡했다.그러나 시르캅은 영국인 고고학자였던 존 마샬경이 옛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땅속에서 찾아내는 고고학 발굴조사에서 도시의 주인이 적어도 다섯 차례이상 바뀐 사실을 밝혀냈다. 시르캅은 탁실라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자두 과수원을 낀 마을길을 얼마간 달려 시르캅에 다달았다.두어 사람 어른키를 재려하는 성곽이 길을 막았다.오늘날도 출입구로 사용하는 성문은 서쪽에 나 있다.그래서 성안의 간선도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결되었다.어림잡아 너비가 20여m나 되어 보이는 도로가 시원하게 도시유적 한복판을 지나갔다. 이 도시를 처음 세웠던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다.오늘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쪽의 박트리아왕국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그리스인들이 BC 2세기 전기에 건설했다.도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었다.지금도 계속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시르캅의 도시규모를 당장은 정확히 알 수 없다.현재 드러난 도시규모는 대략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1.7㎞이나 발굴구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도시유적 한복판 간선도로 양쪽엔 네모 반듯반듯하게 돌을 쌓아올려 지었던 집터가 즐비했다.규모가 좀 작은 일반시민들의 주거용 집자리 사이로 터를 보다 넓게 잡은 차이티야당(Caitya당)자리가 보였다.초기불교에서는 수투파(불탑)는 예배의 대상이었다.그래서 예배장소에 수투파를 안치했다.그런 탓에 차이티야당은 넓을 수 밖에 없었다.도시유적안의 수투파는 다른 야외수투파처럼 크지 않았다.그저 자그마하게 만들어 앙징스러운 유적으로 남아있다. 시르캅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머리 두개의 독수리가 있는 쌍두취불탑이다.이 불탑의 기단은 중앙계단을 사이에 두고 좌우 정면에 코린트식 둥근기둥이나 네모기둥을 세워 벽 공간을 각각 세등분한 형태를 취했다.그리고 좌우 양쪽 세공간에다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시아풍 건물출입구 모양의 감을 만들어 장식해놓았다.두 머리를 가진 쌍두독수리는 서아시아풍의 출입구문위에 조각되었다. 그러고 보면 쌍두취불탑에는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시아라는 모티브가 서로 다른 문화가 혼재한 것이다.이들 세 지역의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쌍두취불탑은 불분명했던 탁실라역사를 그런대로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특히 쌍두독수리는 스키타이의 일족인 샤카족의 심벌이었다.그래서 쌍두취불탑을 세운 시기는 샤카족시대 후기부터 파르티아족시대 전기로 추정되었다.대개 기원후(AD)1세기 전기로부터 중기에 이르는 시기다. AD1세기는 탁실라를 답사하는 동안 매우 주목할만한 시기였다.불교미술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바로 1세기였던 것이다.이전에는 수투파가예배대상이었기 때문에 불교미술,더 나아가 불상은 전혀 조성되지 않았다.그것은 아마 경전에 근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장아함경」이 기록한 「이 몸이 명을 다한 뒤에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불상조성을 가로 막았을 것이다. 어떻든 불교미술이 탁실라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이른바 간다라(Gandarah)미술이 출현하는 것이다.간다라미술은 파키스탄 북부 일대와 아프가니스탄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 중심축을 이루었다.이들 지역은 실크로드에서 인도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라서 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박트리아족과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침략,샤카족 지배와 파르티아족시대,쿠산왕조시대가 번갈아 거쳐갔다. 그런데 불교미술은 헬레니즘 양식을 짙게 받아들였다.불교미술이 출현은 했지만 불상이 곧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부처가 없는 불교미술로 출발한 것이다.이를테면 시르캅 도시유적 출토 릴리프 「헌화공양도」는 꽃을 받을 대상이 없는 가운데 연꽃다발을 든 사람들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 부처가 대중들과 더불어 불전도에 등장했지만 부처의 차별화는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졌다.부처의 키를 대중들보다 크게한다든가,자리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릴리프들이 시르캅유적 땅속에서 나오고 있다.
  • 공비 유림 사살순간/장병 4인 증언

    ◎새벽 낙엽소리… 10m 앞 M16 든 공비 발견/아군매복 눈치채고 도주… 생포포기 사격 28일 무장공비 유림(39·잠수함 부함장)을 사살한 육군 일출부대 소속 우성제 대위(28)와 휘하 병사 3명은 10일이상 계속된 수색과 매복의 피로를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이겨내 수훈을 세울 수 있었다. 28일 상오 6시35분쯤.우대위와 노극래 병장(25)·박정훈 병장(23)·정철환 상병(23) 등 4명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해발 250m 야산 정상부근에 참호를 파고 매복작전을 펴고 있었다.전날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이 절로 감겼지만 언제 공비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갑자기 「버석버석」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모두 긴장했다.이어 얼룩무뉘 위장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남자가 총구를 밑으로 한 채 조심스럽게 산길을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10여m 전방. 모두 숨이 멎는 듯했다.우대위는 『일단 생포해야 한다』는 생각에 수신호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6m 앞까지 다가온 공비는 그러나 아군의 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탕 탕」 두발의 총성이 태백산맥의 차가운 새벽공기를 갈랐다.노병장이 쏜 두 발의 총알에 등과 옆구리를 맞은 공비 유림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우대위 등이 다가갔을 때 유림은 이미 숨져 있었다.군 수색대로서는 지난 22일 함장 정용구 등을 사살한지 7일만에 거둔 전과였다. 노병장은 『철모도 쓰지 않은 채 아군으로 위장한 남자가 혼자 산자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무장공비라는 직감이 들었다』면서 『생포하려 했으나 갑자기 도망가 조준사격을 했다』고 말했다.
  • 칠성산 주민 30분마다 서로 안부전화/무장공비­격전지 주변 르포

    ◎「공포의밤」 6일째… 해지면 문 걸어잠가/3개 마을 긴급회의… 안전수칙 등 논의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23일로 6일째 계속되고 있는 강릉시 강동면 칠성산일대 주민은 피를 말리는 듯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낮에도 공비로 오인받을까 문밖 출입을 가능한 한 삼간다.밤이면 벼락치는 듯한 총소리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일쑤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5명의 공비가 사살되고 아군 3명이 전사할 만큼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칠성산주변에는 강동면 단경골,구정면 구정리,왕산면 목계리 등의 부락이 있다. 특히 23일 상오 칠성산에 송이를 채취하러 갔던 안상영씨(56·구정면 구정4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은 극도의 불안상태를 보이고 있다. 구정면사무소는 이날 긴급이장회의를 소집,통행금지와 입산금지조치를 철저히 지키도록 당부했다. 다른 지역의 통행금지시간이 완화된 것과는 달리 이일대는 종전처럼 하오7시부터 다음날 상오6시까지다. 군당국은 그러나 요즘이 이 지역 주민의 큰 소득원인 송이버섯 채취시기인점을 감안,특별한 상황이 없는 「안전지대」에 대해서는 입산을 허용하고 있다.그러나 산에 들어가려면 당국이 나누어준 빨간모자를 써야 한다. 해발 9백50여m인 칠성산에는 아직도 공비잔당이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특전사와 특공연대 병사가 대거투입돼 작전을 펴고 있다. 칠성산자락의 강동면 언별1리 단경골.현재 5가구에 주민 6명이 살고 있다. 요즘 이들에게는 시계가 필요 없다.해가 뜨면 움직이고 해가 떨어지면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절정에 이른 송이버섯채취는 엄두도 못낸다.군이 허용한다 하더라도 무섭기 때문이다. 주민 황기남씨(49)는 『새벽까지 들리는 총성에 온갖 생각이 다든다』며 『문을 꼭 걸어잠근 채 30분단위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텔레비전만 켜놓고 속보방송에 귀를 귀울일 뿐이다. 단경골 초입에 있는 언별1리 2∼3반 60가구 주민도 마찬가지다.칠성산에서 6㎞ 떨어진 곳이지만 해가 지면 꼼짝할 수 없다.산에 오르지 말라는 마을방송을 하루에도 수없이 듣는다. 지난 18일 무장공비 11명이 집단피살시체로 발견된 강동면 임곡1리 주민도 처지는 같다.주민 김천록씨(50)는 『23일 아침에 송이를 따러 산에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금방 내려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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