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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명학원 이사장에 이승한 회장

    숙명학원 이사장에 이승한 회장

    숙명여대의 학교법인인 숙명학원 이사장에 이승한 넥스트앤파트너스(N&P)그룹 회장이 선임됐다고 숙명여대가 6일 밝혔다. 임기는 내년 6월까지다. 이 신임 이사장은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를 거쳐 삼성테스코를 창립한 뒤 홈플러스그룹 대표이사와 회장을 지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을 기획하고 영종도 신공항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추진한 바 있다. 금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백장, 영국 왕실의 대영제국 지휘관(CBE) 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경영자상, 대한민국 창조경영인대상 등을 수상했다.
  • 김명신 덕산문화재단 이사장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김명신 덕산문화재단 이사장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 고승학·왼쪽)는 김명신(오른쪽·79) 덕산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0일 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해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고 22일 밝혔다. 제주에서 64번째, 전국에서 1456번째 회원이다.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이사장은 학창 시절 수업료가 없어 신문 배달을 하는 등 학비를 벌면서 어렵게 공부해야 했다. 고교 졸업 후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기업에 들어가 경영을 배웠고 1974년 대동케미칼, 1976년 대림화학을 창립했다. 덕산문화재단을 세워 지금까지 9억 2600여만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김 회장은 재외제주도민회 총연합회장, 제주국제협의회 고문, 제주상의 고문 등을 지냈고 대림화학을 성장시킨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 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 삼정그린코아, 수성구 불우이웃돕기 성금 전달

    삼정그린코아, 수성구 불우이웃돕기 성금 전달

    삼정기업이 지난 19일 오후2시 수성구청 접견실에서 이진훈 구청장에게 수성구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전달했다. 이날 성금은 지난해 12월 22일부터 23일 이틀간 ‘만촌 삼정그린코아 에듀파크’계약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견본주택 인테리어 소품 바자회의 수익금을 전달했다. 이 날 이진훈 수성구청장은“지역에서 단순히 분양사업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눔의 실천에 앞장서는 삼정기업에 감사드린다. 지역의 꼭 필요하신 분들에게 전하겠다”며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삼정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펼치고 있다. 수년 전부터 견본주택에 설치된 주방가구(싱크대, 가스레인지, 후드 등)를 저소득층 가정에 지원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으며 박정오 회장이 부산주택건설협회장을 맡으면서 부산주택건설협회 회원사 전체 사업으로 확대, 전국에서 처음으로 '행복주방 나눔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저소득층의 불량주택 수리와 도배 교체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2015년 박정오 회장은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청년희망펀드'에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 주택건설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평소 사회공헌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박회장은 2015년에는 부산 아너스소사이어티 클럽에 67번째 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한편 삼정기업은 지난해 시행사업으로 김해 센텀 두산 위브더제니스 3,435세대, 창원 진동 삼정그린코아 골드코스트 892세대, 대구 만촌 삼정그린코아 에듀파크 774세대 등을 성공적으로 분양했으며 올해는 대구 신매동 사업을 비롯, 경쟁력을 확보한 우수한 입지에 제품력을 강화한 사업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부동산 시장의 파고를 넘을 계획이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전경환씨 서훈 부적격 27년 만에 취소 ‘논란’

    전경환씨 서훈 부적격 27년 만에 취소 ‘논란’

    ‘정재계 눈치보기’ 비판 속 정부 “77만명 파악 곤란” 토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가 받은 국가 훈장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지 27년 만에 뒤늦게 취소되면서 정부가 부적격자에 대한 서훈 취소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4일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달 14일 전씨 등 39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하고 같은 달 30일 이를 관보에 게재했다. 전씨 외에도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 강신성일 전 국회의원 등이 포함됐다. 상훈법 제8조에 따르면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경우 서훈을 취소하게 돼 있다. 전씨는 1987년 새마을훈장자립장을 받고 2년 뒤인 1989년 횡령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부적격 기간이 27년이나 된다. 정태수 회장도 금탑산업훈장(1982년)과 체육훈장맹호장(1986년), 체육훈장청룡장(1989년)을 받았지만 1991년 뇌물공여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취소 사유가 발생했다. 이번 조치는 지난해 감사원이 행자부를 감사하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살인범이나 성폭행 범죄자도 훈포장을 박탈하지 않는 등 대상자 관리에 허점이 많다”고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감사원은 8개 훈포장을 받은 민간인 2만 6162명을 표본으로 범죄 경력을 조회한 결과 중대한 형사처벌을 받았음에도 서훈을 유지하는 수상자가 40명(49건)이라고 밝혔다. 감사원 지적이 아니더라도 서훈 대상자 관리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 왔지만 그간 정부는 이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훈 취소자 상당수가 속해 있는 정재계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77만명이나 되는 서훈자 전체를 조사할 수 없어 현황 파악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정영준 행자부 상훈담당관은 “일선 부처에서 (전씨 등에 대한) 서훈 취소 요구가 올라오지 않았을 뿐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한 적은 없다”면서 “최근 관련법 개정을 통해 서훈자에 대한 범죄 전력 조회가 가능해진 만큼 앞으로는 1년에 한 번씩 이들을 조사해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서울시의회 신건택 의원, 전태일 기념관 건립 예산 확보로 올바른 노동의 가치 확대

    서울시의회 신건택 의원, 전태일 기념관 건립 예산 확보로 올바른 노동의 가치 확대

    서울특별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 신건택 시의원(새누리당, 비례)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제271회 서울시의회 정례회 예산심사를 통해 2017년도 서울시 예산안 심사에서 전태일 기념관 등이 포함된 노동복합시설 조성 예산 190억원을 확보했다. 노동복합시설은 한국노동사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인 전태일 기념관과 취약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권익센터 그리고 청년활동지원시설인 도심권 무중력지대 등이 포함된 청년-노동 관련 복합 콤플렉스로 평화시장 근방인 종로구 관수동에서 2018년 3월에 개관될 예정이며 서울시는 향후 전태일 기념관을 중심으로 청계천과 전태일 다리를 연계하여 노동 관련 역사문화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신건택 의원은 “1970년대 경제성장에 매몰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대하여 전사회적으로 경종을 울렸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최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생명을 잃은 19세 청년 등을 비롯하여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며 “전태일 기념관의 건립을 통하여 올바른 노동의 가치에 대한 교육과 공론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밝혔다. 신건택 의원은 노동계 대표로 선출된 비례대표 출신으로 LG유플러스 노동조합 위원장, 새누리당 서울특별시당 노동위원장에 재임하고 있으며 그동안 서울시 생활임금위원회 위원으로 생활임금 확대 등 노동자의 권익보호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지난 12월 16일에는 상생 노사문화 정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의원 최초로 정부훈장인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두원공과대 설립 鐵山 김찬두 선생 5주기 추도식-흉상 제막식

    두원공과대 설립 鐵山 김찬두 선생 5주기 추도식-흉상 제막식

    지난 27일 두원공과대학교는 유족과 학교임직원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설립자 철산(鐵山) 김찬두 선생의 5주기 추도식 및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1930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출생한 철산 김찬두 선생은 부산상업고등학교, 국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한국디젤기기(현 두원그룹)를 세우는 등 한국자동차 산업발전에 일생을 헌신했다. 또 기업 활동으로 얻어진 이윤을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평소의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1990년 사재를 출연해 학교법인 두원학원을 세우고, 1991년 두원공업고등학교, 1994년 두원공과대학교를 설립해 21년간 두원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과 나눔의 실천을 해왔다. 한편 철산 선생은 생전에 두원그룹회장, 제14대 국회의원, 전경련이사, 대한탁구협회장, 부산상고총동문회장,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총동문회장 등을 지냈으며, 한국자동차산업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으로 1982년 동탑산업훈장, 1988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시의회 신건택의원 정부훈장 ‘철탑산업훈장’ 시의원 첫 수상

    서울시의회 신건택의원 정부훈장 ‘철탑산업훈장’ 시의원 첫 수상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 신건택 의원(새누리당, 비례)은 15일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12층 그랜드볼룸에서 고용노동부 주최로 개최된 ‘2016년 노사문화유공 정부포상 시상식’에서 노사문화 안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현직 서울시의원이 정부 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 의원은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판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 LG유플러스 노동조합위원장 및 새누리당 서울시당 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전문가이다. 정부는 신 의원이 그동안 선진 노사모델 수립을 통해 상생의 노사문화 정착에 기여하고 일자리 창출 및 경제성장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철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신 의원은 이날 수상소감을 통해 “안정적인 노사관계야말로 위기에 처한 국내 경제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통해 상생의 노사관계 모델이 서울시와 산하기관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사문화 유공자 67명 포상…금탑산업훈장에 허정우씨

    고용노동부는 15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2016년 노사문화 유공자 시상식’을 갖고 67명에게 포상했다. 금탑산업훈장은 허정우(48) SK하이닉스 이천 노조위원장이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입사 후 노조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협력적 노사관계를 구축, 창사 이래 30년간 무분규 사업장을 유지했다. 은탑산업훈장은 박동기(58) 롯데월드 대표이사, 동탑산업훈장은 송상호(48) LG 이노텍 상무이사에게 돌아갔다. ‘지역 노사민정 협력 경진대회’ 우수 자치단체 대상은 경기도, 광주광역시, 창원시, 수원시 등 4곳이 선정됐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가품질경영대회 437점 포상

    국가품질경영대회 437점 포상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주최, 한국표준협회 주관 ‘제42회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훈·포장 7점, 대통령 표창 24점, 국무총리 표창 15점 등 437점에 대한 포상이 이뤄졌다. 24일 표준협회는 전날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시상식에 수상 기업 임직원 등 품질 관계자 1800여명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올해 개인 유공자 표창 중 43%를 중소·중견기업 소속 임직원이 수상했다. 개인 유공자 부문에서 황원제 풍산 전무와 정창길 한국중부발전 대표가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단체 부문에선 한국전력기술 등 총 13개 단체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풍산 황원제·중부발전 정창길씨 ‘품질경영대회’ 은탑산업훈장

    풍산 황원제·중부발전 정창길씨 ‘품질경영대회’ 은탑산업훈장

    황원제(왼쪽) 풍산 전무와 정창길(오른쪽) 한국중부발전 사장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제42회 국가품질경영대회’를 열고 유공자 437명(단체 포함)에 대해 포상했다. 황 전무는 동, 소전(액면가 등이 없는 원형 상태의 동전) 등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풍산은 세계 최대의 주화용 소전 생산업체로 이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위다. 정 사장은 국내 최초로 1000㎿급 화력발전 기술을 개발하고 핵심 부품의 국산화에 성공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단체 부문에서는 한국전력기술 등 13곳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건설기능인의 날’ 기념식 김학수씨 철탑산업훈장

    올해 ‘건설기능인의 날’ 기념식이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공동 주최로 22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철탑산업훈장은 48년간 중동 등 국내외 건설현장을 누빈 김학수(72)씨에게 돌아갔다. 고령에도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고, 작업반장으로 일하며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전수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산업포장은 32년간 아파트, 호텔 등의 건설현장에서 미장공으로 활동한 이상모(56)씨가 받았다. 그는 휴일에 고아원, 경로당을 방문해 시설보수를 해 주는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재능을 기부해 왔다. 문기섭 고용부 고용정책실장은 “어려운 여건에도 건설 근로자들이 국가 기간산업인 건설업 발전을 위해 소임을 다해 왔다”며 “건설근로자법 개정과 제3차 건설근로자 고용개선 기본계획 추진을 통해 건설업 종사자들의 고용복지를 향상시키겠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신상문 LG디스플레이 전무 전기안전대상 은탑산업훈장

    신상문 LG디스플레이 전무 전기안전대상 은탑산업훈장

    신상문 LG디스플레이 생산기술센터장(전무)이 9일 ‘대한민국 전기안전대상’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신 전무는 30년 동안 정보기술(IT) 핵심 부품인 디스플레이 업계에 종사하며 대규모 산업체 전기재해 무사고 환경을 구축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15만 4000V의 특고압 설비에 대해 부분방전, 가스 압력, 절연유 성분 분석 시스템 등을 적용해 실시간으로 설비 이상 여부를 감시한다. 이상 발생에 대비한 실전 훈련도 주 1회씩 실시한다. 또 설비점검, 근로자 안전 확보를 위한 설비개선 활동과 전기기술 소양 향상을 위해 전문기관 위탁교육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신 전무는 “앞으로 전기안전을 위한 기준 재정립과 관리 강화를 통해 안전사고 예방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제품안전의 날’ 46점 포상 구기도 대표 동탑산업훈장

    ‘제품안전의 날’ 46점 포상 구기도 대표 동탑산업훈장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6 제품안전의 날’ 행사에서 구기도 아하정보통신 대표에게 최고상인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구 대표는 세계 최초로 ‘메탈 메시’ 전극 소재를 적용해 전자파 발생을 최소화한 초대형 전자칠판용 터치센서를 개발한 공을 인정받았다. 전자칠판은 눈부심 방지 처리를 통해 사용자의 시력을 보호하고 화면이 파손되더라도 잘게 부서지도록 만들어 2차 상해를 입지 않도록 설계됐다. 김명득 LG하우시스 부사장은 무독성 신소재를 사용해 불에 잘 타지 않고 유해 물질이 적게 생기는 바닥재와 단열재 등을 개발해 산업포장을 받았다. 단체 부문에서는 방수 콘센트를 개발해 누전 및 감전사고 예방에 크게 기여한 일신전기가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2008년에 지정된 제품안전의 날은 생활제품 안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공로를 격려하기 위해 해마다 열린다. 이날 총 46점의 정부포상이 수여됐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해외건설·플랜트의 날 기념식

    국토교통부와 해외건설협회는 1일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에서 해외건설·플랜트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해외건설협회와 한국플랜트정보기술협회가 주최한 이날 기념식에는 김경환 국토부 1차관과 건설업계 관계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에서는 김헌탁 두산중공업 부사장이 금탑산업훈장, 이혜주 현대건설 전무가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영후 대우건설 상무는 동탑산업훈장, 김진태 GS건설 상무는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해외건설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47명이 정부포상과 장관표창을 받았다. 김 차관은 축사에서 “고부가가치 해외건설·플랜트 수출로 현재의 해외건설 위기를 극복하자”면서 “정부도 투자개발형 해외사업 지원을 강화하고 스마트시티 수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정도현 LG 사장 금탑산업훈장

    정도현 LG 사장 금탑산업훈장

    LG전자 대표이사 정도현 사장이 26일 제11회 전자 IT의 날을 맞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83년 LG 기획조정실에 입사해 2009년부터 LG전자 CFO(최고재무책임자)를 역임하며 신기술 개발과 신성장사업 육성, 국내 생산·연구개발(R&D)단지 조성 등을 위해 최근 5년간 약 27조원의 투자를 주도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협력사와의 상생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 ‘2016 친환경대전’ 오늘 개막…유공자 시상·박람회 등 다양

    녹색제품과 친환경생활의 확산을 위한 ‘2016 대한민국 친환경대전’이 18일부터 21일까지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다. 올해는 ‘내가 그린 건강한 세상’을 주제로 친환경생활을 통해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지혜를 공유한다. 환경대전에서는 개막식에 이어 녹색생활·녹색소비 실천 유공자 시상식, 환경산업 일자리 박람회가 진행되며 부대행사로 녹색화학 정책 국제세미나와 환경라벨링 국제세미나 등이 진행된다. 친환경 유공자 시상식에서는 온실가스인 과불화탄소(PFCs)를 처리할 수 있는 대용량 집진기(스크러버) 시스템을 개발·상용화한 윤성진 ㈜에코프로 사장이 동탑산업훈장을 받는다. 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녹색구매 조례를 제정하는 데 기여한 유미화 안산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과 2016년 정부합동평가에서 전국 17개 시·도 중 부산이 녹색제품 구매율 1위를 달성한 데 기여한 박남식 부산시 사무관이 각각 포장을 수상한다. 세종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23일 별세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23일 별세

    샘표식품 박승복(94) 회장이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은 아들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7일 오전 7시다.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샘표식품 창업주인 선친 박규회 회장의 장남이다. 함흥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 전신)에서 25년간 근무했으며 1965년부터 재무부 기획관리실장,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을 역임하며 주민등록번호 제도 도입, 소양강댐 준공, 세종문화회관 설립, 한국민속촌 민자유치 건립승인 등 1960∼70년대 정부의 주요 업무를 추진했다. 1976년 공직생활을 끝내고 선친의 뒤를 이어 55세에 샘표식품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내 식구들이 먹지 못하는 음식은 만들지도 말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경영 활동을 펼쳤다. 박 회장은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원리원칙을 지키는 데 철저했던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평소 직원 경조사를 직접 챙기고 아픈 직원을 병문안하는 등 직원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고 한다.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면서 달력 뒷면과 이면지를 메모지로 활용하고, 자신이 타던 10년 된 자동차를 장남에게 물려줘 40만㎞를 타고서야 바꿨다는 일화도 있다. 박 회장은 하루 세 번 식후에 식초를 마시는 특별한 습관 때문에 ‘식초 전도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누구나 일상에서 손쉽게 식초를 활용할 수 있도록 흑초음료 ‘백년동안’을 개발하기도 했다. 40여년을 경영 일선에 있었던 박 회장은 한국상장회사 협의회 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 중견기업 및 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회장은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목련장,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상, 한국의 경영자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7년 식품 외길 ‘오뚝이’ 회장님

    47년 식품 외길 ‘오뚝이’ 회장님

    조회마다 애국가 4절까지 불러 1969년 출시 첫 카레 1위 고수 작년 시식사원 정규직 고용 화제 “숫자는 현재를 알리고 미래를 보여준다. 숫자로 관리하고 숫자로 문제를 찾고 숫자로 결과를 얻어라. 모든 경영은 숫자의 경영이다.” ‘숫자경영’을 유독 강조했던 오뚜기의 창업주 함태호 명예회장이 12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함 명예회장은 1969년 오뚜기식품공업(현 오뚜기)을 설립한 이후 47년간 ‘식품 외길’을 걸었다. 준법정신을 강조하며 근검절약한 생활을 해 온 고인은 월남한 기업인답게 남다른 애국심을 보였다. 1979년 오뚜기의 사가(社歌)를 제정했을 때 사가는 3절까지 부르고 애국가를 1절까지 부른다는 것은 국민 된 도리가 아니라면서 지금까지 매월 모든 조회와 모든 행사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게 하고 있다. 1969년 5월 국내 최초로 카레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1981년 개발된 ‘3분 카레’는 국내 최초의 레토르트(즉석식품) 제품으로 출시 첫해 400만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함 명예회장은 토마토 케첩과 마요네즈를 각각 1971년과 1972년에 국내 출시해 판매를 시작했다. 특히 마요네즈는 오뚜기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됐다. 오뚜기는 지금까지도 분말 카레 시장과 케첩 시장에서 점유율 80%(지난해 기준)를 유지하며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시식사원 1800여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함 명예회장은 2010년 장남인 함영준 오뚜기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고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났으나 사회공헌 활동은 꾸준히 이어 왔다. 1992년 결연을 맺은 한국심장재단을 통해 지난 7월까지 모두 4242명의 어린이에게 심장 수술비를 지원했다. 1996년에는 사재를 출연해 오뚜기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687명의 대학생 및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난해 말에는 315억원 상당의 개인 주식 3만주를 기부해 화제가 됐다. 2005년 해외 신시장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 2011년에는 국민 식생활 개선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상을 각각 받았다. 부인 고 박보옥 여사와의 사이에 1남(함영준 오뚜기 회장) 2녀를 두고 있다. 큰딸 영림씨는 이화여대 음악대학장, 둘째 딸 영혜씨는 주부이다. 정연현 풍림푸드 사장, 정세장 면사랑 사장이 사위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6시 30분이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삼성 송지오 국장, 은탑산업훈장

    삼성 송지오 국장, 은탑산업훈장

    고용노동부는 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엘타워에서 ‘제20회 직업능력의 달 기념식’을 갖고 송지오(69) 삼성전자 삼성기능올림픽 사무국장에게 은탑산업훈장을 수여하는 등 유공자 97명을 포상했다. 송 국장은 삼성전자의 전국기능경기대회 후원 협약 체결을 주도해 우수 기능인력 1만 7345명을 육성하고, 우리나라의 국제기능올림픽 5회 연속 우승을 견인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동탑산업훈장은 30년간 기계정비 업무를 수행하며 기능장 4종목과 기사 12종목의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한 박진현(56) 포스코 기술교육그룹 총괄이 받았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그의 웃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좌절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더 커지고 짙어진 것일까. 소박하게 꾸며진 사장실 문을 열면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적힌 액자가 첫눈에 들어온다. 사무실과 공장을 겸하고 있는 경기 일산 본사에서 지난 17일 만난 김원길(55) 바이네르 사장에게서 “힘들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며 넘어지고 일어나 달려온 40년을 들어봤다. -옷가지 몇 벌이 든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는 영등포역에 내렸다. 처음 밟은 서울 땅.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녔더라면 고2 새 학기의 시작에 들떠 있었을 1978년의 봄이었다. 당시 영등포는 사람과 상점, 공장, 유흥가로 지금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목이 탔다.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시간은 오후 4시. 자, 이제부터 한 집 한 집 내가 있을 곳을 찾아나서 보자. “제가 구두 만드는 기술이 있는데요, 저 좀 써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땅거미가 내리고 전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와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퇴짜를 맞은 집이 스무 곳 가까이 되어갈 즈음, 문래동 쪽 허름한 구둣방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월급은 없이 하숙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하는 조건이었지만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내 솜씨를 본 구둣방 주인은 좀 놀라는 눈치였다. 열일곱 살 먹은 ‘충청도 촌놈’치고는 실력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이 되자 주인이 불렀다. “장마철이라 물건이 너무 안 팔린다. 더이상 널 먹이고 재워 줄 능력이 안 된다.” 말하자면 정리해고였다. -“구둣방에서 잘렸어요.” 몇 달 동안 하숙하며 친해진 룸메이트 형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내가 강원도 양양 출신이어서 잘 아는데, 설악산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야.”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다음날 새벽같이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갔다. 그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도착한 설악산. 몇 달 전 영등포 역전에서처럼 상점과 산장의 문을 한 집 한 집 두드렸다. 하지만 하숙집 형의 말과 현실은 달랐다. 서울로 돌아갈 차비는커녕 김밥 하나 사먹을 돈도 없는데 서늘한 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할 요량으로 찾아간 산장에서 “방 청소하고 손님들 가방 들어 주면 한 달에 5만원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당시 설악산은 신혼여행이 피크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 주자 팁이란 걸 주는데, 한 번에 2000~3000원은 기본이었다. 새로운 삶의 희망에 들뜬 신혼부부들은 일반 등산객들보다 손이 컸다. 지배인이 보는 데서 받은 팁은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팁은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팁에 맛을 들인 나는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다.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해야 더 많은 팁을, 그리고 지배인이 안 보는 데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갔다. 한 달이 지나자 다락방에 몰래 감추고 벽돌로 눌러놓았던 팁이 50만원으로 불어났다. 월급의 10배였다. 그 돈을 들고 나는 미련 없이 설악산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1961년 충남 당진에서 5남 2녀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족이 의지할 거라곤 손바닥만 한 논 몇 마지기가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허약한 형을 대신해 풀 베고, 땔감 구하고, 논에서 피 뽑는 노동의 무게를 다 짊어져야 했다. 그 보상일까. 초등학교까지만 보낸 형, 누나와 달리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넣어주셨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동안 수시로 학업 중단의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 저…학교에서…100원만 가져오래요.” 집안 사정 뻔한데 차마 말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진작에 얘기했으면 좀 더 일찍 알아봤을 것 아니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머니의 긴긴밤 잠 못 드는 괴로움만 더 깊어졌을 거란 사실을. 풀이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집을 나서곤 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1977년 2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중학교 3년이 나에게 보장된 최후의 학업이란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 진학 얘기는 아버지도 나도 꺼내지 않았다. “원길이는 내 밑에서 구두 기술 배워라.” 서산 읍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가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 지게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조카의 손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작은아버지였다. 하지만 ‘좁은 곳’에서 평생을 ‘족(足)쟁이’로 썩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넓은 곳’을 찾아 경기 고양군 지축면(현재의 지축동)의 분재농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한 달 1만원을 받아서는 내 한 몸 먹고 자기에도 빠듯했다. 슬슬 염증이 났다. -“돈 번다고 올라가더니 사는 게 그리 만만하더냐.” 그해 9월 추석에 집에 와서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 가게로 와라. 이 기술 하나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 -서산 구둣방에서 처음 배운 것은 가죽과 밑창이 단단히 붙도록 망치질을 하고, 접착면에 ‘뻬빠질’(사포질)을 하는 일이었다. “역시, 원길이 손재주는 대단하구나.” 남들이 1년을 해도 떼지 못한다는 남성용 구두 제작 전 공정을 나는 5개월 만에 마쳤다. “그 재주로 시골에 있긴 아깝다. 서울 가서 서울 기술 배우거라.” 동료 아저씨들의 말이 몇 번 반복되자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고민을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쥐여주신 차비를 들고 나는 1978년 그 봄에 영등포역 가는 기차를 탔던 것이다. -설악산에서 번 55만원으로 경기 성남 상대원동에 월셋집을 얻고 서울 중곡동 어린이대공원 근처 구두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제화업계의 판도는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케리부룩의 순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케리부룩에 납품하던 참스제화였다. 본격적으로 여성용 구두 만들기를 익혔는데, 얼마 후 나는 참스제화 안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됐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즈음 케리부룩에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1983년 9월 스물두 살 때였다. -‘생산라인에 있으면 신발을 20켤레 만들 수 있지만 관리자가 되면 2000켤레, 2만 켤레의 생산을 직접 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늘 ‘더 큰 것’, ‘더 높은 곳’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나를 믿고 부른 케리부룩 김정현 사장님에게 ‘생산직’이 아닌 ‘관리직’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사장님은 원했지만 주변에서 말들이 나왔다. ‘생산관리를 고작 중졸 출신에게 맡기다니’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관리직의 문들 두드렸고, 얼마 후 포장반에 배치됐다. 구두에 상표를 붙여 사각 박스에 담는 단순노동을 하는 곳이었지만, 그나마 관리직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는 부서였다. 생산라인에 있을 때 100만원이던 월급이 포장반으로 오니 20만원으로 깎였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산은 적중했다. 몇 달 후 완제품을 최종 검사하는 검수반으로 옮겼다. ‘완벽한 제품’을 강조하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깐깐하게 검사를 했다. 어느 날 공장 기술자 100여명이 “우리를 괴롭히는 김원길을 자르라”고 대놓고 사장님에게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사장님은 나를 지지했다.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그걸 마다할 사장이 어디 있겠나. 나는 ‘시키지 않은 짓’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 시장 조사였는데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등 경쟁제품 중에 잘 팔리는 건 어떤 게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분석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1989년 인천백화점에서 우리 케리부룩 매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내가 영업관리를 하며 어렵게 입점을 성사시킨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월 매출이 600만원으로 다른 업체의 5분의1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백화점에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했다. ‘저 많은 걸 나 혼자선 절대로 못 판다. 고객의 입소문을 통해 팔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반값 특가 세일과 동시에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여러분, 케리부룩 CM송 부르시면 구두를 그냥 드립니다.” 당시 ‘허리를 미끈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뻗으면~ 케리부룩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라는 우리 TV CM송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 매출이 1억 1000만원으로 거의 20배가 됐다. 그걸 계기로 뉴코아, 롯데, 신세계 등 서울 시내 백화점에 속속 입점을 했고 나는 ‘영업의 달인’으로 통하게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 대한 시기와 모함도 커져 갔다. ‘사장이 되려고 한다’, ‘회삿돈을 제 맘대로 쓴다’ 악성 루머가 사내에 돌았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고 분노를 하니 더이상은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1990년 사표를 던졌다. 언젠가는 예정됐던 일, 그게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케리부룩 퇴직금 280만원과 사장님이 별도로 챙겨주신 200만원을 밑천으로 서울 용산에 선심(구두의 앞코에 들어가는 부속) 제조회사를 차렸다. 간판은 ‘원길’로 내걸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는데 돈이 안 들어왔다. 못 받은 외상값이 2000만원이 넘어갔고, 빚이 쌓여 갔다. 답답한 마음에 전에 거래했던 롯데백화점 명동 본점의 바이어를 만났다. “아이고, 김 대리 회사 관두고 나서 케리부룩 엉망 됐어요.” 케리부룩 김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롯데백화점에 물건 한 트럭 보내주세요. 제가 팔아볼게요.” 매출의 10%가 내 몫이었다. -“사장님, 제가 직접 구두 만들어서 케리부룩 상표 붙여 팔겠습니다.” 다시 기세가 오른 나는 케리부룩에 로열티를 주고 하청공장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는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1993년 케리부룩 대표가 된 전문경영인이 케리부룩 상품권을 헐값에 불법 발행해 구속이 됐고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상품권들은 휴지조각이 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구두와 빚더미에 거리로 나앉을 판이 됐다. 불면의 날이 이어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하지만, 20대 때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씩씩하게 출근을 했던 나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어떤 고마운 분이 급전을 융통해 줘서 최종 도산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을 ‘안토니’로 바꾸고 그럭저럭 구두회사를 꾸려가고 있던 1994년 뜻하지 않은 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구두 박람회 ‘미캄’에 갔는데 바이네르의 컴포트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나와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맺자”고 했다. 당시 바이네르는 하루 1만 2000켤레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였다. 한국 수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렵사리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국내에서 바이네르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이탈리아 현지에 주문을 넣고 제품을 받기까지 무려 석 달이나 소요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직접 생산이 절실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구두 기술자다. 바이네르 상표를 붙여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 팔면 안 되겠나. 바이네르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들을 꼬박 6개월을 설득했다. 나의 한결같은 노력은 바이네르 회장을 감동시켰고, 결국 나는 일산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하루 50켤레씩 컴포트화 생산을 시작했다. -바이네르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 나를 아껴주었던 이탈리아 본사 회장이 돌아가시고 그 분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회계사 출신인 그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한국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데, 로얄티를 이 정도 밖에 안 내나.’, ‘이탈리아 본사에서 수입해 가는 물량을 더 늘려라.’ 아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바이네르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광고도 바이네르의 비중을 줄이고 우리 자체 브랜드인 안토니에 집중했다. 그런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대표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특히 충격이 컸다. 거기에서 바이네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바이네르는 당시 유럽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 나는 이탈리아로 가서 아들을 만났다. “너희들 자금난이 심각하다는데, 내가 지원을 해줄 테니 바이네르 브랜드를 나에게 팔아라.” 그들은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이탈리아에 바이네르 공장이 10군데 정도 있는데 그들이 쓰는 브랜드 상표권은 내가 갖고 있다. -바이네르 신발이 편안한 비결이 뭐냐고 많은 사람이 묻는다. 그러면 나는 “고객의 마음은 당신이 그 질문을 하는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일러준다. 고객은 항상 더 예쁘고, 더 편안한 구두를 찾는다. 그걸 떠올리면 절대로 연구개발(R&D)을 게을리하거나, 맘 놓고 쉴 수가 없다. 고객은 혹시 한 번은 몰라도 절대로 두 번은 봐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발이 편안한 신발을 뜻하는 ‘컴포트화’를 통해 연간 5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업계 3위 바이네르의 최고경영자(CEO)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구두 분야의 장인(匠人)으로, 특히 ‘중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바이네르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국 60여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가난으로 배움을 다하지 못했던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골프 꿈나무에게 연간 2억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수도권의 독거노인을 초청해 효도잔치를 열고 있다. 박애원, 벧엘의집 등 수많은 복지시설에 물품을 보내고 있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의 급여를 보장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다양한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61년 충남 당진 출생 ▲당진 도성초등학교, 미호중학교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 수상 ▲1994년 안토니 설립 ▲2008년 국무총리 표창, 2012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2012년 철탑산업훈장, 2013년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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