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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원 선임기자 디카로 보는 한양] (2) 작명가 정도전과 유교

    [이종원 선임기자 디카로 보는 한양] (2) 작명가 정도전과 유교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첫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이름 한 자(字) 한 자에 고유의 뜻과 기운이 담겨 있어서 작명하는 순간부터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어 왔다. 때문에 선조들은 아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웬만한 건물 하나 하나에도 공을 들여서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최측근 정도전에게 수도의 건설과 지어질 건축물의 이름을 짓는 ‘주요 사업’을 명했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조선의 지도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데 가장 앞장 섰던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왕명을 수행해 갔다. 한양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으로 제시한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소지문(昭智門·후에 肅靖門이라 함)이 그것이다. 이상배(47)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은 “인(仁)을 일으키고, 의(義)를 두터이 하며, 예(禮)를 받들고, 지(智)를 환히 밝힌다는 유교의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고종 때 한양의 한가운데에 둔 종루(鐘樓)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으로 바꾸어 비로소 ‘인의예지신’ 오상이 모두 이름에 올랐다. 이 전임연구원은 “보신각 종이 울리는데 맞추어 4대문이 열리고 닫혔는데, 이는 믿음(信)이 인의예지를 주재한다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백성을 깨워 일하게 만드는 새벽 종소리. 그 믿음의 출발점은 바로 임금이다. 이 전임연구원은 “믿음이 서야 백성을 부릴 수 있다(信以後勞其民)는 논어(語)의 가르침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명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 그는 군주와 관료와 백성이 삼위일체가 되는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꿈꾸었다. 개국 초기 유교는 도덕의 기본이고 조선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서구화되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조선의 유교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유교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전임연구원은 “유교문화는 우리의 전통문화로서 일부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든 소중한 역사문화의 한 축”이라며 그 역사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는 조선 왕조 500여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근간이념이었다. 조상들은 건축물의 이름 하나를 지을 때도 성리학적인 세계관을 부여하며 이념적 성취를 도모하려 했다. 선조들이 남겨준 소중한 유교 문화의 유산을 보고 느끼면서 급격한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유교적 인본주의의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jongwon@seoul.co.kr
  • [현장 행정] 광진구 건강테마 보행벨트

    [현장 행정] 광진구 건강테마 보행벨트

    주말인 지난 22일 광진구 아차산길. 형형색색 등산복차림의 행락객들로 가득하다. 고갯길이 이어졌지만 힘든 기색 없이 모두 만면에 웃음이 넘친다. 촘촘한 화강암 보도는 틈새가 3㎜ 안팎이라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도 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맞붙은 초록색 전용 보행로도 탄성재질로 만들어 흡사 양탄자를 밟고 지나가는 것 같다. 주민 장성민(39·중곡동)씨는 “아이를 데리고 유모차를 끌고 나와도 손쉽게 산을 오를 수 있어 편리하다.”고 말했다. 광진구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건강테마 보행벨트’ 사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제 모습을 찾고 있다. 건강테마 보행벨트는 북으로 아차산(285m)과 용마산(328m), 남동으론 한강, 서쪽으로 중랑천을 끼고 도는 총구간 13.3㎞의 ‘환상형 보행길’이다. 서쪽 능동로 5.3㎞ 구간과 남동쪽 한강변길 4.7㎞ 구간은 이미 완성됐다. 3.3㎞의 천호대로 구간이 완공되는 2012년이면 한강과 중랑천, 아차산을 걸어서 일주하는 ‘건강보행벨트’가 완성된다. 뚝섬권역 ‘한강르네상스’와 능동의 ‘디자인서울거리’를 포함해 명실상부한 문화·건강벨트로 떠오를 전망이다. ●산, 들, 강이 어우러진 보행길 보행벨트 조성은 도로환경을 전략적으로 개선하는 일종의 리모델링 사업이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일조할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천호대로 구간 공사에만 1년간 20억원이 든다. 완공 때까지 연인원 2만 5000여명, 매월 500~600여명의 건설인력이 투입될 예정이다. 보행벨트는 벌써부터 곳곳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아차산과 한강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렸다. 산, 들, 강을 자연스럽게 잇는 만큼 걷고, 머물고, 즐기도록 했다. 어린이대공원 정문 광장에선 목재데크로 이뤄진 보행길이 등장한다. 수변공원을 감상하며 산책하는 여유를 즐기도록 했다. 젊음의 거리에선 세종대가 담장을 허물었다. 담장 대신 소나무를 심고 보도블록 대신 목재데크를 깔아 탁 트인 조망을 확보했다. 또 차량진출입로 옆 보행로에는 턱을 없앴다. 차량 진입을 막는 볼라드는 탄성재질로 바꿔 보행자의 안전까지 고려했다. 민병기 광진구 도로과 주임은 “기존 가로수를 살린 채 디자인을 더한 보행길과 화단을 조성해 비용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주민 김미정(42·능동)씨는 “가을에는 능동 대학문화 거리에서 광진광장, 어린이대공원, 디자인거리, 가구의 거리를 끼고 아차산 생태공원까지 형형색색 가을 낙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로를 주민에게 돌려주기 보행벨트는 구의·자양지구, 건대입구, 군자역, 구의정수장 등 동서남북 4개 거점을 묶는다. 이곳들은 광진구가 행정복합단지, 고품격주거단지, 연구개발(R&D)단지 유치를 구상 중인 핵심 축들이다. 기업 최고경영자 출신 구청장의 복심(腹心)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건강테마 보행벨트 조성은 애초 넉넉지 않은 구 재정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경제 구청장’을 자임한 정송학 구청장은 2006년 취임과 동시에 광역 환상형 보행벨트 구상을 밝혔다. 그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됐던 도로의 원래 주인인 보행자들에게 길을 돌려주는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조성사업은 2006년 7월 첫발을 뗐다. 이듬해 3월 외부 용역과 자문을 거쳐 구체적 계획이 수립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대한민국 극&극] 미니 학교 충북 보은 회남초교vs최대 학교 서울 강서 신정초교

    누구나 가슴 한편에 초등학교 시절 애틋한 추억 한자락을 품고 있으리라. 회초리를 든 호랑이 선생님, 쳐다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예쁜 짝궁, 함께 벌을 서면서도 연방 키득거렸던 단짝…. 지난해 말 전국 초등학교 수는 모두 5700여개. 이 중 서울 강서구와 충북 보은군에는 각각 70여년 역사를 간직한 남다른 초등학교가 있다. 강서구에 자리한 전국 최대 규모 초등학교 학생수는 무려 2852명. 반면 충북의 한 농촌학교 학생수는 17명뿐이다. 산업화시대 도시화가 빚어낸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농촌 인구 감소 탓이다. ‘극과 극’은 상통한다고 했던가. 사는 곳과 학교 크기는 제각기 달라도 학생들이 저마다 한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은 닮았다. 한 학교에 다니면서 서로 얼굴도 모를 만큼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서울 신정초등학교. 나름의 체계화된 학습관리와 생활지도로 ‘규모의 교육’을 달성했다. 103명에 이르는 선생님들은 학년부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다양한 방과후 활동은 학생들의 끼를 극대화, 21세기형 인재를 길러내는 밑거름이 된다. 반면 한 학년 학생수가 1~6명에 불과한 충북 회남초등학교는 가족처럼 오붓한 분위기다. 함께 울고 웃으며 진정한 ‘전인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학습 프로그램과 시설도 결코 대도시 학교에 뒤지지 않는다. 예쁘고 아담하게 꾸며진 컴퓨터실, 도서실 등은 17명 학생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열린 공간이다. 서울신문 취재진이 최대·최소 규모의 서울 신정초등학교와 충북 회남초등학교를 찾았다. ■ 미니학교 회남초교 - 형과 동생 합반중 충북 청원~경북 상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다 회인톨게이트로 빠져나와 대전 방향으로 5분여를 달리면 보은군 회남면 거교리의 회남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옆으로 대청호가 자리잡아 주변 경치만큼은 한마디로 ‘짱’이다. 그림같은 회남초등학교의 전교생 숫자는 겨우 17명뿐. 1학년 2명, 2학년 1명, 3학년 3명, 4학년 2명, 5학년 3명, 6학년 6명이다. 교사는 김금자 교장과 박종순 교감을 포함해 모두 7명이다. ● 한 반에 3명 중 반장 선거가 치열 ‘하늘이 두쪽 나도 1개면에 초등학교 1곳은 있어야 한다.’는 충북도교육청의 지침만 없었다면, 이 학교는 벌써 분교로 격하되고도 남았다. 회남면에는 주민 743명이 모여 살고 있다. 이 학교에는 6학년까지 있지만 학급은 모두 4개다. 1·2학년과 3·4학년이 복식학급으로 각 교실 1곳을 사용하고 5학년과 6학년이 ‘전용 교실’을 쓴다. 1학년생 관우와 효석이, 2학년생 현석이 등 3명이 같은 반이다. 이 반에서 며칠전 반장 선거를 했는데 관우와 효석이가 모두 출마했다. 현석이의 표심에 따라 반장이 결정되는 셈인데 현석이는 효석이의 친형. 결국 피는 물보다 진했다. 현석이가 친동생을 반장으로 지지하면서 관우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3명은 투표가 끝나자 평소처럼 왁자지껄 떠들며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이 학교의 하루는 6학년 담임 배홍열(35) 교사가 시작한다. 배 교사는 아침일찍 출근해 오전 7시30분 학교에서 출발하는 스쿨버스를 타고 전교생들의 등교 지도를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회남면 분저리에서 예진이(3학년)를 시작으로 초곡리, 거교리, 금곡리, 신추리, 신곡리를 돌며 10명을 태우고 학교로 돌아온다. 꼬마 손님을 1차로 학교에 내려준 뒤 다른 방향인 신곡리로 출발해 성규(6학년)를 시작으로 법수리, 남대문리, 죽암리를 돌며 총 7명을 태우고 돌아오면 아침임무가 끝났다. 점심 때가 되면 급식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스쿨버스를 타고 인근의 회인초등학교에 간다. 급식용 밥과 반찬을 가져오기 위해서다. 이 학교의 급식소는 ‘먹기만 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아침조회도 하고, 졸업식과 입학식, 전교생 발표회도 치르는 소중한 곳이다. ● 화장실 1곳뿐이지만 교사부임 경쟁 치열 학교 규모가 작으니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뒤따른다. 일반 교실은 3개뿐이고 나머지 교실 1곳을 쪼개 도서실과 과학교실로 활용한다. 화장실은 한 곳뿐이어서 교사와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운동장의 크기는 4125㎡(1250평)로 7명이 가까스로 축구를 할 정도다. 보건실은 있지만 보건교사가 없기에 학생들이 아프면 인근 회인초 보건교사가 급히 출장을 오거나 회남면사무소 보건지소의 신세를 진다. 미니 학교라 좋은 점도 있다. 김 교장은 “1학년생들이 2학년 형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니까, 머리가 똘똘한 1학년생은 곁눈질로 2학년 때 배우게 될 공부를 선행학습하는 효과가 있다.”고 자랑했다. 박 교감은 “벽지학교라 교사들이 인사가점을 받기 위해 서로 부임하려 한다.”면서 “경쟁을 뚫고 부임한 실력있는 교사는 개인교습을 하듯 꼼꼼하게 가르친다.”고 김 교장을 거들었다. 점심 때 배식 시간은 단 5분이면 끝이고 쓰레기도 2주일에 한차례 수거업자를 불러 치우면 그만이다. 글 사진 보은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최대학교 신정초교 - 식판수만 3000개 서울 강서구 화곡2동 다세대·연립 주택이 주변을 빼곡히 둘러싼 곳에 흡사 서양의 고성(古城)을 방불케 하는 큰 건물이 우뚝 서있다. 주황색 벽돌로 지은 6층짜리 3개 동이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학생수가 가장 많은 신정초등학교다. 지난 20일 오전 8시40분쯤 삼삼오오 등교하는 학생들이 주변 골목에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마치 개미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3월 현재 학생수는 2852명. 교사 103명을 포함, 교직원만 146명이 근무한다. 특수반 2학급을 포함해 모두 82개반이 있다. ● 교실 134개, 양변기 388개, 급식쌀 160㎏ 1933년 양천공립보통학교 신정분교로 출발한 이 학교는 76년 동안 무려 2만 970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생수가 가장 많았던 1981년에는 학생 9319명이 118학급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당시는 교실에 책상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 복도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1972년부터 인근에 양동초등학교 등 6개 학교가 잇따라 생기면서 학생수는 3000명 안팎으로 줄었다. 이 학교의 건물 연면적은 2만 361㎡(약 6159평)로, 축구장 4개를 합친 크기만 하다. 그 안에 교실 82개, 음악실, 행정실 등 134개의 크고작은 공간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이 학교에 새로 전근을 온 교사는 보건실, 방송실, 실습실, 복사실, 도서실 등을 찾아 헤매기 일쑤라고 한다. 또 누가 동료 교사이고, 학부모인지 제대로 구분도 못한단다. 다만 한가지 노하우가 있다면 ‘복도에서 슬리퍼를 신고 있으면 동료 교사이고, 구두를 신고 있으면 학부모로 간주하면 된다.’는 말이 전해온다. 또 어린 학생들이 점심 한 끼에 먹어치우는 쌀은 160㎏ 정도. 학생들이 식사를 마치고 내놓는 식판만 3000개로 두 사람이 오후 내내 닦아도 버거울 정도다. 학교 화장실은 모두 58곳이다. 남녀 양변기는 388개, 소변기는 145개다. 분리 수거를 거쳐도 일주일 동안 쏟아져 나오는 폐지는 2.5t 트럭의 한대 분량이라고 한다. ● 학생 많아도 체계적 관리에 무사고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누구나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하루종일 공부하고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기 마련이다. 김유석 교무주임은 “학생관리나 생활지도를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고 매뉴얼을 만들어 시스템화했다.”면서 “예를 들어 교장, 교감, 학년부장이 우선 매일 아침 회의를 한 뒤 학년부장이 각 담임교사들에게 전달하는 대기업 시스템을 갖췄다.”고 했다. 오후 회의나 종례의 내용도 단계를 밟아 전 학생들에게 순식간에 전달된다. 학생수가 많으니 여러가지 사고도 빈발할 가능성이 높지만 체계적 학교관리 덕분에 꼭 그렇지도 않다. 학교안전공제회(단체 상해보험 처리)의 집계에 따르면 신정초등학교의 교내 사고율은 전국에서 하위권이다. 아울러 방과후 운동동아리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해 전국소년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체전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땄다. 이는 웬만한 시·도교육청의 전체 집계보다 신정초등학교 한 곳이 더 많은 메달을 획득한 셈이다. 이순권 교장은 “학생수가 많기는 하지만 교사 1인당 담당하는 학생수는 여느 학교와 비슷한 수준”이면서 “학생관리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면서 영어, 수영, 축구 등 다양한 방과후 활동도 펼쳐 세계에서 가장 크면서도 가장 좋은 명문학교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가기] 한국 WBC 첫 결승 진출… “日이든 美든 덤벼라” 헤지펀드 경영자의 피자 배달 10대 4명 동거녀 암매장 도로서 돈 줍는 미국인 경찰, 장자연 소속사 ‘뒷북 수색’
  • ‘Korea 브랜드’ 15위로 높인다

    ‘Korea 브랜드’ 15위로 높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세계 33위인 우리나라의 국가브랜드 가치와 관련, “앞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4만달러가 되더라도 다른 나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국민이나 국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가장 두렵다.”며 “한국이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면서 어두운 면도 좀 있지만 이것을 걷어내기 시작하면 이른 시간 내 좋은 국가 이미지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브랜드위원회(위원장 어윤대) 1차 보고대회에 참석,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극복 후 새로운 시기에 대한민국의 위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뒤 “경제적 위치에 걸맞은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위원회의 역할을 당부했다. 이에 따라 국가브랜드위는 이날 우리나라의 국가브랜드 순위를 현행 세계 33위에서 오는 2013년까지 15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위원회는 회의에서 ‘국민과 함께 배려하고 사랑받는 대한민국 만들기’를 비전으로 채택했다. ▲국제사회 기여도 제고 ▲첨단기술·제품 확대 ▲문화·관광산업 육성 ▲다문화 가정·외국인 배려 확대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 등 5대 분야, 10대 과제를 중점 추진키로 했다. 10대 과제 가운데에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성공사례를 개발도상국에 전파함으로써 이른바 ‘경제한류’를 확산시키자는 전략이 포함됐다. ‘글로벌 코리아 스칼라십’ 프로그램을 도입해 한국에 우호적인 인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아시아 대학생 교류를 위한 ‘캠퍼스 아시아’ 프로그램도 개발키로 했다. 또 연간 3000명의 정부 파견 해외봉사단 사업을 단일 브랜드로 통합하기로 하고 다음달 중 통합 브랜드인 ‘코리안 서포터스’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한편 국가브랜드위가 지난달 월드리서치와 공동으로 상사 주재원과 유학생, 다문화가정 등 주한 외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 이미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국가브랜드 저평가 이유로 응답자의 48.4%(복수응답)가 북한과의 대치상황을 꼽았다. 국제사회 기여 미흡(44.1%), 정치·사회적 불안(41.5%), 이민·관광지로서 매력 부족(38.8%), 해외여행시 낮은 세계 시민의식(37.5%) 등의 순이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씨줄날줄] 황사의 공습/노주석 논설위원

    삼국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황사현상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서기 174년의 일이다. 흙이 비처럼 내린다고 하여 ‘우토(雨土)’라고 표기했다. 고려시대 기록에도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더니 조선왕조실록에는 ‘토우(土雨)’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었다. 흙비다. 황사(黃沙)는 일제시대이후 쓰였다. 황사는 한때 남쪽에서 올라오는 ‘봄의 전령’ 꽃소식과 더불어 북쪽에서 전해지는 또 다른 ‘봄의 불청객’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경유지 중국이 ‘세계의 굴뚝’으로 산업화하면서 단순한 모래먼지에서 온갖 오염물질로 코팅된 불량 먼지입자로 변했다. 한번 발생하면 동아시아 상공에 떠도는 미세먼지의 규모는 약 100만t이고, 그 중 한 반도에 쌓이는 양은 15t짜리 덤프트럭 4000∼5000대 분량이라고 한다. 유·무형의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7조 3000억여원에 이른다는 관련기관의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지구온난화로 발원지의 사막화가 가속화되면서 한반도와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 발원지의 면적은 사막이 48만㎢, 황토고원 30만㎢로 한반도 면적의 4배 어림이다. 가깝게는 만주벌판에서 멀게는 5000㎞ 떨어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피어오른 모래먼지가 편서풍을 타고 높이 솟았다가 대기중에 퍼진다. ‘황사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쓴 이와사카 야스노부 가나자와대학 교수는 475㎞ 상공까지 부유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황사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비를 내리는 씨앗이 되기도 하고, 바닷속 플랑크톤의 먹이가 된다고도 한다. 최근에는 지구의 기온을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일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와 주목받는다. 하늘 높이 떠있는 황사는 엷은 막을 형성하여 구름과 마찬가지로 태양에너지를 반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구온난화 억제에 기여하는 셈이다. 초대형 황사가 어제 한반도를 공습했다. 전국에 황사예비특보가 발령됐다. 올 들어 3번째다. 시민들은 황사마스크로 무장하거나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다. 전대미문의 경제빙하기에 멍든 시민들의 마음을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더 뿌옇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대중가요에 스민 시대정신 엿본다

    힙합에 심취하던 젊은이도 사랑에 실패하고 나면 여지없이 대중 유행가에 상처입은 가슴을 흘려보낸다. 일제 강점기부터 산업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의 아픔을 대변하거나, 때론 위로한 대중가요에 대한 본격 연구서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이 책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은이가 김장실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기 때문. 김 차관은 2007년 7월 민음사와 ‘한국 대중가요에 스며있는 정치·사회적 배경’(가제)의 출판 계약을 맺고 원고도 이미 완성해 놓았다. 하지만 지난해 새 정부 출범 이후 차관에 오른 뒤 “공무와 다소 거리가 있는 출판으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출판을 일단 뒤로 미뤄뒀다.김 차관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대중가요는 모두 13곡. 1920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 1930년대 진방남의 ‘꽃마차’, 1940년대 이인권의 ‘귀국선’, 1950년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1960년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1970년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등이다.김 차관은 “거시적으로 하나의 대중가요가 서민들 가슴에 울림을 만들어내기까지 정치·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보고, 미시적으로 곡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 음반제작자 사이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테면 1969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는 중동건설과 월남전으로 가족을 남겨두고 해외로 돈벌이를 떠나는 가장들의 아픔을 담은 노래였다.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조기유학이 유행하게 되자 홀로 남은 아버지를 기러기 아빠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김 차관이 대중가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9년 하와이대학 정치학 박사 과정 시절. 동료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1920년에서 1970년까지 대중가요 몇 곡을 선정하고, 노래에 깔려 있는 정치·사회적 배경을 설명했다. 한 시간짜리 세미나에서 그는 직접 몇 곡을 불렀고, 몇 곡은 음반으로 들려줬다고 한다. 세미나에서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1992년 돌아온 김 차관은 이후 주말이면 도서관을 뒤지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대중가요에 얽힌 사연을 수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자료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15년 동안에 걸친 연구 덕분에 그는 술자리에서는 노래 한자락을 꺼낼 때면 그 노래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설명한다. 너무나 학술적으로 대중가요를 분석하는 바람에 좌중은 입을 딱 벌릴 지경이다. 지난 1월말 대통령과 장·차관 연석회의에서도 자신의 장기로 앙코르를 받았다고 한다. 민음사측은 “대중가요만큼 시대정신과 서민의 정서를 표현한 교과서가 없는데 이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연구가 없다는 것은 문제”라면서 “관료가 아니라 학자로서 정면승부해도 충분한 연구자료다.”라고 평가했다는 후문이다.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강석진 칼럼] 경제 살리기와 ‘아편’ 끊기

    [강석진 칼럼] 경제 살리기와 ‘아편’ 끊기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였던 분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시위에 참여한 동기는?” “쿠데타도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 “윤보선과 박정희가 붙었던 1967년 대선 때 윤보선을 지지하셨겠네요.” “아니.박정희 찍었어.” 그는 덧붙였다. “우리 경제는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어.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 살림을 펴겠다.’고 말했지.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어.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찍을 수밖에 없었어.” ‘두 개의 한국’ 저자인 돈 오버도퍼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해 “1961~79년 경제개발 계획의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한국이 자동차, 조선, 전자 산업 부문에서 비약적인 성공을 거두는 토대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당연히 한국의 발전 모델은 타이완 등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 박정희 모델이 도마에 올랐다. 경제위기 때문이다. 타임지는 3월9일자에서 박정희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을 받아들인 아시아 발전모델이 경제위기를 맞아 실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소비가 수년, 길게는 수십년 동안 회복되기 어려울 전망이라면서 박정희 성장전략은 폰지게임을 닮았다고 혹평했다. 대미수출 위주의 전략을 아시아 역내교역 증대 그리고 내수부양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젖을 떼라는 것이다. 경제의 근본 틀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는 무성하다. 뉴욕 타임스 2월1일자 D 레온하트의 ‘빅 픽스’라는 기사도 환골탈태를 역설한다. 그는 경제학자 M 올슨의 이론틀을 끌어들인다. 올슨은 “성공적인 사회에서는 이익 그룹이 형성되며, 이들이 영향력을 키우다가 힘이 충분해지면 법과 정책을 유리하게 바꾸고,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이익을 취한다. 마침내 사회 전체의 성장마저 갉아먹으며 위기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광부노조, 금융, 농업 등이 그러한 그룹이었다고 보고 있다. 레온하트는 미국에서는 주택건설업자, 제약업계, 의사와 함께 월스트리트(미국 금융계)만큼 올슨의 주장에 잘 들어 맞는 그룹도 없다고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소비 경제’를 ‘투자 경제’로 환골탈태시켜야 일자리 만들기와 장기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고이즈미 전 총리는 후임 총리들에 비해 아직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개혁이었다.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건설족이니,우정족이니 하는 이익 그룹을 일거에 혁파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장기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디일까? 건설업계? 금융권? 아니면 우리 경제의 수출 의존 체질? 그밖에도 지목함 직한 곳은 꽤 있다. 근본적인 개혁은 아편을 끊는 것만큼 혹독한 금단현상을 동반한다. 하지만 위기는 평온할 때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명박 정부가 이익 그룹에 매몰돼 땜질처방만 남발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하는 자들의 마음조차 움직였던 박정희처럼 새 패러다임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30조원 규모의 이번 추경예산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여하튼 올해의 정치, 경제를 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이 구체화될 수 있을지 여부가 될 것이다. 강석진 수석논설위원 sckang@seoul.co.kr
  • 미네르바 옥중보고서…‘유동성 함정’이 걱정

    ‘미네르바’가 옥중에서 다시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서 ‘미네르바’란 필명으로 활약하다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돼 17일 첫 공판을 앞두고 있는 박대성(31) 씨가 변호인을 통해 한국 경제를 전망하는 19쪽 짜리 글을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인터넷한겨레가 11일 보도했다.  박씨는 최근 며칠치 신문과 하루 1시간씩만 시청할 수 있는 텔레비전 방송을 참 고해 공책에 이 글을 썼으며 변호인이 타이핑해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한국경제 진단 글이 공개된 것은 지난 1월 검찰에 검거된 직후에 이어 두 번째.  박씨는 글에서 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전지구적 달러 강세 속에서 환율불안 피해를 계속 입을 가능성이 높고,기준금리를 낮춰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의 징후들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했다.그는 “실질소득 감소에 따른 소비구매 여력은 과연 정부가 어떤 식으로 상쇄시켜 주느냐에 따라 경기 회복속도가 2009년 연내일지 2011년으로 대폭 장기침체로 빠지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재정지출을 통한 가시적인 효과가 나오는 2009년 3/4분기와 맞물려 국내 경기 리싸이클의 회복 속도가 결정된다.”며 “그에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 경기방어전략이 달라진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박씨는 이 글과 함께 자신에게 적용된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1항에 대한 위헌심판제청 신청서를 함께 제출했다.  다음은 ‘보고서’란 제목으로 법원에 제출된 글의 전문.    미네르바 ‘옥중 보고서’  현재 글로벌 경제 위기에 따른 한국 경제의 위기라는 걸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1997년 제 1차 IMF 사태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 하는데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지금의 한국 경제 상황이라는 것은 1997년 제 1차 IMF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IMF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그 후의 한국에서의 IMF사태, 그리고 현재 동유럽 사태에 대한 상호 연관성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 IMF 탄생 배경  1997년 하반기 한국경제는 IMF 사태라는 특수한 경제 위기 상황을 겪게 된다. 그래서 한국 국내에서는 IMF사태라는 것이 일종의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상황의 뿌리와 그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IMF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 진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때는 1929년 미국 대공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1930년대 대공황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간의 통제 받지 않는 무제한적인 자본의 상호 이동이 가능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런 상호 자본 이동에 제한이 없을 때에만 비로소 그에 따른 시장이윤 창출이 극대화 될 수 있다는 것이 종교적 신앙처럼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의 모태가 되는 케인즈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초토화 된 유럽에 투하된 자본이 당시 무역 흑자국이던 미국에서 →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유럽에서 → 미국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실물경제 재건에 사용되어야 할 자본이 미국시장으로 역류하게 되는데 이를 케인즈는 투기자본이라고 불렀다.    이런 문제점들을 지켜보면서 1944년 미국 뉴햄프셔에서 소위 브레튼우즈 체제라는 것이 만들어 지게 된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은 모든 회원국들의 통화는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로 정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막대한 유동성 자본에 대한 족쇄로 제약과 통제가 따랐지만, 이것은 자본왕래에 따른 이윤 창출의 제한이 엄청난 성장률을 보이는 국제 상품 무역으로 보완이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로 인하여 파생된 보완장치 성격의 기관이 IMF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것이다. 즉 케인스가 유도하고자 하였던 국제 자본 유동성에 따른 폐해를 고정 환율의 안정적인 통화시스템 하에서 상품교역으로 보완하고, 이 과정에서 IMF(국제통화기금)는 대규모 무역적자와 국제 수지적자를 겪는 나라에 다시 신용대출을 해 줌으로써 무역 당사자간 국제 무역 수지의 불균형 밸런스를 조정하는 완충기구로써 만들어진 기구였다.    이로써 이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25년간 G7내의 주요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 ~ 4%대를 육박하고 경제 규모는 3배 이상 확장하게 된다.    그래서 1953년 전후 한국경제가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기 시점까지 폭발적인 수출 신장세와 고도의 경제 성장률을 구가할 수 있었던 뿌리가 시스템적 관점에서 브레튼우즈 체제로 인한 유동성 자본 규제에 따른 상품교역의 보완이라는 측면이 적용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GATT체제 하에서 이른바 개도국 특권에 따라서 한국, 대만과 같은 나라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구가하게 되는데, 이는 1995년 WTO 체제 이후 그 성격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 모델에 기반한 아시아적 모델을 가리키는 말로 재포장되어 불리게 된다.    ▶ 체제의 붕괴  1969년 베트남 전쟁의 발발로 인한 막대한 전비지출의 필요성으로 미국 중앙은행은 결국 전비 지출을 위해서 대대적인 발권력을 동원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전 세계적으로 달러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잉 통화 유동성으로 미국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킴과 동시에 달러 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은행은 유럽 내 주요 기업에 싼 이자로 달러를 빌려주게 되었고, 기업은 고정환율로 달러 → 마르크를 교환했다. 그 결과 독일의 마르크, 프랑을 비롯한 유럽 내 주요국 통화는 달러 대비 통화 절상 압력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 당시 서독 연방은행은 계속 마르크로 달러를 사들여 달러 대비 마르크화의 통화 절상 압력을 상쇄시키려고 했으나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 압박요인과 재정적 지원을 더 이상 충당하기 불가능해지게 되는 단계가 오자,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는 공식 파기 된다.    그 당시 서독 중앙은행 차원에서는 인플레이션 상승 부담 때문에도 파기가 불가피했다. 전통적으로 독일은 1920년에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피해를 당한 당사국이기 때문에 서독 중앙은행 차원에서의 제1차 정책목표가 물가 안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위기의 시작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그 전까지 제한을 받던 유동성 자본이 수면위로 올라오게 된다. 기존 금융권 내에 있던 은행, 보험, 펀드를 포함한 최일선 기업들까지 총망라한 모든 경제 주체들에 대한 외환, 채권지대의 제약이 전면 해제되었다.    그로인하여 1998년 기준으로 채권거래는 1973년 대비 230배가 증가한 20조~24조 달러, 외환거래는 1일 기준 1조 2천억 달러의 유동성 자본으로, 금융산업 분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구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 1973년 ~ 1982년 사이에 총 1조 달러를 넘는 해외 대출이 발생하게 된다. 이중 전체 포지션의 50%가 남미로 가게 되는데 이를 기반으로 산업화 플랜을 단행하게 된다.    하지만 1982년 문제가 터지게 되는데 당시 1982년 미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 금리를 20% 이상 올리게 된다. 그 이유는 제 ‘2차 오일쇼크’의 여파에 따른 비용증가, 인플레이션을 상쇄시키기 위한 조치로 이 조치로 인하여 해외 대출이 투입된 남미를 포함한 이머징마켓은 일대 타격을 받고 경기 후퇴를 하게 된다.    이러한 고이자율 정책은 주요 달러 채무국들의 이자비용을 3배 이상 증가 시켰는데 미국의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주요 유동성 화폐 자산이 투입된 곳은 기존 통화 포지션이 달러로 교체된다.    그 결과 1980년대 초반 미국 달러 통화는 G7내 주요국 통화대비 평균 35% 절상된다. 동일기간 멕시코 폐소화는 반년만에 -60% 폭락하게 된다.    결국 남미 부채위기의 핵심 원인은 80년대 초반 미국 통화정책의 고이자율로 3배 이상 커진 이자 부담과 달러포지션 변경에 따른 자본의 해외 도피 → 그로 인한 미국 통화의 급격한 환율 인하에 기인한다.    1982년 당시 미국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미 재무부는 미국 국내은행의 남미 크레딧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서 발생한 멕시코 사태 수습을 위한 즉각적인 재정 투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산 집행에는 반드시 미 의회의 사전승인 없이는 불가능해지자 IMF를 간접 이용하여 브리지론(Bridge Loan)이라는 IMF 고유기능을 IMF 가맹국이 아닌 범위로 확장을 통해 지원 프로그램을 하게 된 배경이 이것이다.    원래 IMF의 기존 역할은 창설시 가맹국에 공여하는 브리지론 (Bridge Loan)을 중재하는 것이었으나, 고정 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바뀌면서 브리지론 중재 필요성은 상실 되었다. 그 후 멕시코 사태가 터지면서 브리지론의 필요성이 미국 FRB와 미 재무부의 필요에 따라 상황에 맞게 용도가 리모델링이 되어 변경된 것이다.    문제는 멕시코에 IMF 지원을 해주면서다. 멕시코의 자본시장 국유화, 국영기업 민영화, 국내시장 개방 → 국가 지출의 극단적인 삭감 → 변동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달러보다 폐소화에 투자하는 것이 이익이 될 정도로 폐소화의 이자율 상승, 결국 이러한 극단적인 이자율 상승은 국내 산업 붕괴와 은행 시스템 붕괴를 동반하면서 독자적인 자본시장 형성이 불가능해졌고, 고이자율에 따른 → 해외자본유입 = 해외 자본 종속으로, 결론적으로 경제 발전은 정체되고 부채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1980년대 이후 많은 남미, 아프리카 국가들이 IMF 지원 프로그램을 받게 되는데 미국은 IMF를 이용하여 자본의 접근 통로를 장악하고 IMF의 영향력 확대를 노릴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사회 간접 자본(SOC) 건설을 위해서는 해외 차관이나 개발원조금은 IMF 조건과 연계시키면서 승인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 통제력으로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IMF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IMF 구제 금융을 통한 IMF 체제에 있을 경우 해외자본을 유지하려면 차관 제공자는 상대국가와의 계약체결에 앞서서 반드시 IMF나 세계은행의 사전 승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부 차관』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2008년 하반기 IMF 지원을 한국 먼저 받으라는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 국채 보유국의 달러 국채 물량이 시장에 나오는 걸 사전에 막기 위해서는 FRB 달러 스왑 국가가 아닌 나라도 임시 달러 스왑 지정국으로 지정해서 각 보유 국가의 달러 국채 보유 물량 비용 대비로 인출을 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00억, 500억 달러도 아닌 300억 달러인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인 것이다.    ▶ 아시아 위기  한국이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아시아 이머징마켓들은 높은 수입 관세를 통해 국낸 산업을 보호 육성하고 외국과의 자본지대는 무역을 위한 결제에만 국한 시켰다 국가가 직접 개입해서 조달한 차관을 배당하고 대기업을 육성하면서 폭발적인 성장률을 구가하게 되었다.    1994년 한국은 OECD 가입을 통해서 유럽, 일본, 북미 시장에 쉽게 진입을 하려 했으나 일반 무역 통상 부분 이외에 금융시장 부분은 정부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다.    이는 국내 저축된 재원만으로도 산업개발을 위한 재원 도달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김영삼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그 당시 대통령 본인이 OECD 가입을 기정사실처럼 떠들고 다녔다.    그 후에는 OECD내에서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금융시장 개방 부분의 문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해외 차관 수용과 유가증권의 거래 등에 대한 국가 통제는 붕괴된다.    그로 인하여 1994년 3/4분기 이후부터 3개월 만기 달러차관 도입을 허용하게 되는데 한국의 높은 경제 성장률상 그로인해 수반되는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에 대해서 한국의 중앙은행은 통화 긴축 정책을 유지해서 인플레이션을 통제 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게 된다. 높은 이자율에 도달되고 통제 받던 원화 크레딧보다 그 당시 달러 크레딧이 역으로 더 싸지면서 (조달비용 = 원화 크레딧>달러 크레딧)인 상황에서 그 당시 유럽에서의 조달비용에 0.3% ~ 0.5%미만의 가산 금리로 계속 달러 크레딧을 기업에 제공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 단기 차관을 기업들은 대규모 시설 투자가 동반되는 5년 ~ 10년 만기의 장기리스 산업에 단기차입금으로 동원하게 된다.    왜냐하면 1997년까지는 국내에 있는 단기 달러 차입금은 매달 규칙적으로 롤오버가 되면서 만기 연장도래가 있었고 이미 국내에 충분히 많은 달러가 돌고 있었던 상황에서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 때 태국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한국,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이머징마켓들은 자국의 수출 경쟁력을 유지, 확보하기 위해서 태국의 바트화 공격으로 인한 환율 폭락 즉시 주변국가의 자국 통화 절하 압력을 받게 된다.    이는 달러 채무에 대한 금융비용이 극단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한국을 포함한 신흥 국가들이 달러 크레딧 가운데 60%정도가 단기 채무였다. 이 경우 크레딧 라인(신용한도)철회시 달러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부 차원에서 IMF에서 달러 크레딧을 조달해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IMF는 82년 멕시코 사태의 경우와 똑같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그 중 하나가 고이자율 정책이었다. 결국 각국 중앙은행의 국내 이자율은 20% 이상 유지되었다.    이것은 IMF의 의도대로 신규달러 차입을 유도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기업과 은행 파산을 동반하면서 내수 시장 붕괴에 따른 대대적인 경기 침체를 불러오게 된다.    대량해고와 투자 설비, 소비재 판매가 수직하강하게 된다. IMF는 고이자율과 국영기업 민영화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 참여 제한 철폐,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를 포함한 모든 규제 철폐, 특히 자본투자자들에 대한 규제철폐가 핵심이었다.    이것이 현재 한국 시장이 이머징 마켓 중에서 가장 외국인 자본거래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다.    문제는 대외 시장 변수에 국내 경제가 연동된다는 것이다. 태국과 멕시코,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IMF지원 프로그램의 문제점이 노출되던 상황에서 그 의심스런 처방은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 즉 한마디로 알고 했다는 것이다.    그 후는 모두 알고 있는 IMF프로그램이라 불리는 고통스러운 진행과정이 진행되게 된다. 한국 국내의 만기 달러 차관의 상환은 미국 FRB와 미재무부의 중재를 통해서 3년 이상 상환이 연장되게 된다.    그 당시 IMF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에 지원프로그램이 발표될 당시 한국의 경우는 510억 달러의 크레딧 원조를 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 금액을 모두 지원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표면상의 발표수치이고 일본+독일 중앙은행이 그 후 즉시 한국에 100억 달러의 유동성 자금을 공급하고 미국은 만기연장만 해 주면 자동으로 끝날 일이었다. 극히 간단한 일이였다.    그 후 환율에 따른 수출도 들어온 달러와 외국은행들이 신용 대출금 회수를 중단하면서 위기는 종식이 되었다. 이때 채권은행들은 만기 연장된 모든 신용 대출에 대해 국가 보증을 요구하면서 추가 이자 부담요구안이 나오게 된다.    3년 기한의 상환 연장의 경우는 리보 +2.7 ~ 3%가산 금리의 이자 부담을 지게 되면서 저렴하게 차입된 단기 달러 채무가 고금리의 3년 기한 미만으로 롤오버 되면서 연장된다. 이것은 매력적인 장사가 되었다.    그 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가 채무를 갚기 위해서는 달러나 엔화를 계속 차입해 와서 채무를 갚는 길 뿐이었다. 이를 위해서 남은 마지막 수단은 그 동안 수십년 동안 산업화 과정을 통해 조성한 국내 자본재를 해외 기업이나 투자자들한테 파는 길 뿐이었다. 그에 따른 세금 인하를 포함한 모든 특혜조치들이 이루어 졌다.    그로 인하여 산업계와 금융계를 포함한 은행, 보험 쪽을 비롯해서 외국인 투자 제한 철폐를 통한 싼 매물 수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결국 한국 국내에서는 글로벌 스탠다드로 포장되고, 미국 상무부와 월스트리트에서는 10년 동안의 수익을 단 1년 안에 한국에서 뽑았다느니, 아시아 외환위기는 평생 한번 올까 말까한 포트폴리오 투자 기회라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S&P나 무디스나 한국 국내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국가 신용등급에 맞추어 조정을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과거에 학습된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IMF사태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정책적 실패로 합리화되고 잊혀 지면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똑같거나 유사한 일이 순환 반복이 된다.    결국 1997년 제1차 IMF 사태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뿌리는 OECD가입 당시부터였다. 한창 민감한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 부분협상을 할 경우 마지막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발언으로 OECD가입을 지정 사실화 시키는 바람에 최종 협상은 거기서 끝이 난 것이다. 그 후 과정을 거치면서 IMF단계를 거치게 되고 IMF는 82년 멕시코 사태부터 그 IMF 고유 기능의 변화와 확정을 거치면서 97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거쳐 한국으로 전이되면서 유동 자본에 따른 이윤 극대화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 동유럽 사태의 발생  동유럽에 대해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동유럽의 전략적 중요성은 과거 냉전체체 하에서의 군사적 측면에서의 나토 군사 안보적 측면에서의 대립을 통한 동.서방간의 유럽지역내의 완충지역이라는 성격에서 이제는 석유, 가스송유관의 중간 경유지로써의 경제적 관점으로 그 포커스가 옮겨지게 된다.    현재 유럽 연합내 서유럽에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가스의 90%가까이 소비가 되는 상황이며 2020년까지 50%이상 증가추세 속에서 유럽연합은 중동지역내의 에너지 의존도 축소와 북해에서 생산되는 원유.가스 생산량의 감소분을 메워줄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다.    에너지 접근권에 대한 전략적 문제에서 동유럽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은 곧바로 서유럽의 경제적 타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속적인 EU 편입노력과 그에 따른 차관제공을 통해 동유럽의 경제적, 전략적 가치는 올라가게 된다.    2006년 현재 러시아는 유럽에서 소비하는 가스의 25%, 2020년까지 70% 가스를 공급해 주는 주요공급원이기 때문이다.    총 조달 수요의 80%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슬로바키아 - 체코 - EU공급라인(드 루바 라인), 20% = 러시아 - 벨로루시 - 폴란드- EU공급라인으로 통행료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추가적인 복합적인 요소들과 맞물려 동유럽은 서유럽 자본의 대거 유입으로 연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3/4분기 이후 제 1차 금융위기가 진행이 된다. 2007년 4,010억 달러의 자본유입액이 2008년에 오면서 670억 달러로 축소되면서 유가 폭락이 겹치면서 동유럽 주주의 주요통화 가치는 50% 이상 폭락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일반외환자금으로 대출을 받았던, 가계의 부채로 직결되면서 금융시스템이 붕괴하면서 IMF에 헝가리, 우크라이나, 라트비아가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폴란드와 체코가 검토에 들어가게 된다.    문제는 동유럽에 대출된 1조 5천억 달러가 서유럽 내 주요은행에서 대출이 된 구조가 최대 40배까지의 레버리지(Leverage: 대출금/자본금)를 높여서 대출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대규모 부도 리스크 압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에 대규모 구제자금을 쏟아 부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유로론 내의 독일내의 금융시장 안정화, 은행 국유화가 검토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 은행의 총 부채 규모는 1조 5천억 달러 이상의 90%가 서유럽과 해외자본으로 구성된 상황에서 달러 대비 유로화 하락 압력은 유럽내 동시하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선진국 증시를 거쳐 신흥시장으로 전이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현재 2008년 9월 기준 한국의 총 외채의 60%가 유럽계 은행 포지션이다. 이 상황에서 동유럽에서 막대한 손실을 볼 경우 한국론이 만기연장에 문제가 생기거나 추가 가산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또한 대규모 선박 금융 제공을 하고 있는 유럽계 은행들이 자금압박을 받게 되면 자금 압박으로 인한 선박 주문 취소와 대금지급 지연에 따른 만기 환율 하락요인이 발생한다. 또한 동유럽에 대한 한국의 수출 비중이 7~8% 내외인 상황에서 수출감소로 이어지는 상황이며 동유럽에 한국직접투자 FDI 비중이 90% 내외인 상황에서 동유럽내의 환율변동에 환차손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CDS 프리미엄의 상승과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단기 채권으로의 집중현상과 국내 미청산 엔케리 청산 압박으로 인한 자본유출로 환율의 추가 상승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달러는 대규모 재정지출을 위해서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 내면 다른 준기축 통화인 엔화나, 유로화, 금 가격에 연동을 하여 달러 약세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정상적인 시장 작동 상황에서만 그렇다.    극히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계의 주요 경제 권역인 미주, 일본, 유럽연합의 통화 경제권에서 한쪽 경제권이 침체기거나 통화 정책 조정으로 통화 약세일 경우는 달러 약세 ↔ 엔화 강세가 성립이 되지만 미국, 일본, 유럽의 주요 경제란이 동시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는 상황에서는 기축 통화인 달러가 안전 자산으로 달러강세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2008년 3/4분기 이후 제1차 금융위기 당시 달러를 찍어 낼 때는 미국 경제에 대비해 일본 경제와 유로론은 상대적으로 경제 펀더맨탈이 견고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달러 발권력 동원에 따른 달러 약세는 당연하였으나, 2009년으로 바뀌면서 유로론의 동유럽 사태와 일본의 경제 성장률 하락과 1조엔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금과 달러가 안전자산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은 인플레이션 방어성격의 자산이지만 현재 경제 성장률이 3대 경제권의 동시 다발적인 마이너스 성장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압력이 달러를 찍어내면서 달러 화폐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상쇄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금값이 올라가면서 달러강세가 지속되는 원인 중 하나가 이것이다.    결국 시장불안으로 인하여 안전 자산인 금과 미 국채로 자금 수요가 집중이 되는 상황에서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지속적인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현재의 엔화 변동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1995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995년 당시 엔화는 79엔의 달러 대비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본 재무성 차관인 사카키 바라 에이스케는 미국에 가서 미국 달러 국채 매각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1달러=85엔대 밑으로 떨어질 경우 일본 은행들은 신용 대출 결손으로 타격을 받는 구조였다.    이 상황에서 시장에 미국 국채 매물이 나올 경우 미국 국채 가격은 떨어지면서 채권가격 하각은 이자율 상승을 동반하게 된다. 그러면 미국 전체 자본 시장의 이자율이 올라가면서 미국 경제에 타격을 입히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일본, 유럽 중앙은행들의 공조하에 대규모의 달러 매입을 통한 환율 조정의 노력으로 1달러 = 100엔이 그해 4/4분기 이후 돌파되었고, 97년 까지 -60% 엔화가 평가 절하 되었다.    이는 2003년으로 넘어가면서 반전하게 된다. 장기간의 무역흑자에 따른 주적으로 엔화가치가 급등하면서 2002년 130엔 → 2004년105엔 대로 급상승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35조~40조엔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달러 매수를 하여 엔화를 평가절하시킨다. 이때 매수한 달러가 미국 국채에 그대로 재투자 되었으며 2002년 - 2004년까지 매입한 미국 국채가 3,500억 ~ 4,000억 달러 수준으로 이때부터 일본에서 미국 국채를 사 모은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현재 5,800억 달러 상당의 미 국채 보유량의 상당부분을 사 모은 이유가 이것이다.    현재 80엔대에 육박하는 엔화가 97엔대 후반으로 절하되는 이유중 하나가 일본 경제 자체에도 있지만 현재 2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채물량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간 공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미 주무장관인 힐러리가 일본 방문시 이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가 이것이다.    이는 향후 두가지 변수에 따라 작용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기간에 맞춘 추가 엔화 평가 절하와 미국 GM-크라이슬러의 자동차 구조조정에 따른 미국 국내 자동차 노조의 압력에 따른 추가 엔화 절하 타이밍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티모시 가이트너 미재무장관이 취임전부터 ?강한달러?를 떠들고 다닌 이유가 이것이다. 그것은 1995년 당시 미 재무장관이 로버트 루빈이 취한 액션과 똑같은 것이다. 강한 달러의 달러 강세를 만드는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봐야한다.    국제공조와 통제가 가능한 일본과는 다르게 달러 약세와 그로인한 달러대비 자산손실이라는 측면이 중국에서 심각하게 제기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총외환보유고는 1조 9천억 달러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중국에서는 닥치는대로 달러자산에서 실물자산으로 옮기는 이른바 자원외교도로 불리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반드시 자원확보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천연자원을 싼 값에 확보하고 글로벌경기회복에 따른 차익기대측면도 있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미 부채 등 달러자산에 편중된 외환보유고 투자의 다변화가 핵심이다.    현재의 천문학적인 미 국채발행의 압력으로 미 국채수익률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달러약세로 달러표시 자산의 폭락은 중국입장에서는 재앙이다. 그래서 최소한 2009년도에 관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달러강세기조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배경을 깔고 단기 달러강세가 기정사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경제에 새로운 도전으로 작용하게 된다. 달러강세에 따른 국제원자재가격의 하향안정세는 단기적으로는 물가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부담요인을 덜어준다. 그래서 한국은행에서 금리를 2%대까지 끌어내릴 수 있었던 핵심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지만 달러강세 기조 속에 2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국채발행과 중국, 일본의 자국경기부양을 위한 추가 국채발행은 한국을 포함한 주요 이미 이머징 마켓에 외환달러자금유동성에 심각한 제약을 가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80%에 육박하는 무역의존도와 IMF로 인한 높은 대외 개방도로 인하여 외국인 투자감소와 자금이탈과 무역금융 감소에 따른 수출부진과 무역위축과 그에 따른 환율불안 등의 피해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추가로 금리를 내려서 유동성을 증가시키겠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생각이다.    이 경우는 CP 매입을 통한 개입이나 회사채매입을 통해서 개입을 하는 선에서 조정이 되어야지, 이 상황에서 추가 금리인하는 환율상승의 추가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미 지금 상황은 통화정책으로는 소비와 투자 활성화를 기대하기는 무리인 부분적으로 유동성 함정의 리스크 징후들이 보이기 때이다.    금리를 내리면서 CP금리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우량회사채를 제외한 회사채 금리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와 더불어 금리인하에 따른 생산과 투자위축은 금리정책의 한계가 왔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일반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을 시도하게 되는데 국채를 발행해서 재원을 조달할 경우 금리를 내려 원화유동성을 늘린 화폐 유통량이 국채발행을 통해서 유동성이 다시 역으로 흡수가 돼버린다.    그러면 회사채발행에 따른 기업운영자금 조달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부가 대규모 국채들 발행하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높은 회사채 불량은 시장에서 소화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래서 중앙은행의 국채직접매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부차적인 최소한 부작용을 최소화시켜준다.    우량회사채의 발행물량은 시장에서 소화가 되지만 비유량회사채의 경우는 매수세가 몰리지 않으면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을 통해서 자금조달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환율급등에 따른 일방적 납품단가 인하요구와 발주취소, 납품업체변경 등을 통한 피해 부분에 대해서도 소규모기업은 열외대상이며 고용보험료 연체에 따른 소액압류가 있어도 사실상 대출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결국 구조조정 지연을 통해서 2008넌 3/4분기 ~ 4/4분기에 걸린 3개월 ~ 6개월의 시간 소요를 통해서 선제대응 타이밍이 늦어짐에 따라 은행 자체적인 구조조정에 따른 대손충당금과 경기하강에 따른 기업, 개인연체율 상승에 따른 BIS비율하락에 대비한 자본적립을 통해 자금시장이 사실상 경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금리를 추가로 낮추어도 자금이 돌지 않는 유동성함정에 빠질 공간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미 국채발행과 그로 인한 미국경제 경기부양을 통한 달러강세는 최소 2009년 하반기 ~ 2010년 1/4분기까지는 재원도달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피한 상황이며 단기적으로 이와 연등하여 동유럽 리스크로 인한 달러 조달 금리 상승압력과 환율상승압력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금리는 동결, 금리 추가 하락시 환율상승압박요인에 따른 자산포트폴리오의 부분적 변경으로 방어하는 전략이 유효하며 현재 한국 경제는 미국,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 방어성격의 통화정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점은 각별히 주의해야한다.    미국, 일본, 중국은 디플레이션 초기 대응전략으로 기조가 가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디플레이션이 아닌 디스인플레이션이라는 상황적 인식하에 경기하강과 -2% ~ -4%이하의 성장률을 겪는 이색적인 체험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소득 감소에 따른 소비구매 여력은 과연 정부가 어떤 식으로 상쇄시켜 주느냐에 따라 경기 회복속도가 2009년 연내일지 2011년으로 대폭장기침체로 빠지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재정지출을 통한 가시적인 효과가 나오는 2009년 3/4분기와 맞물려 국내 경기 리싸이클의 회복 속도가 결정된다. 그에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 경기방어전략이 달라진다.    중국의 경우도 경기부양자금으로 800조원이 풀렸다. 그로 인하여 중국증시가 올라가는 이른 바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서 유동성장세에 따른 증시부양이라는 착시현상이 벌어졌다. 중국 역시 수출이 총 GDP의 40%를 차지하고 상당기업의 60%가 영업이익 적자를 통한 적자기업이었음에도 2009년 1월 기준 수출(전년대비): -17%, 수입: -43%로 수입감소량 ≫ 수출감소량을 능가하면서 대규모 무역흑자구조가 나는 것은 한국과 동일하다. 이는 결국 수입감소율이 증가한다는 것은 결국 소비가 급감하면서 내수가 망가지고 있다는 징후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앞으로 어떤 생존플랜이 나오면서 개개인이 준비를 해 나갈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지방시대] 농지감소 막게 농공단지는 구릉지에/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지방시대] 농지감소 막게 농공단지는 구릉지에/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작금의 우리 농촌은 빠른 두 흐름 속에 빠져 있다. 그 하나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화 현상이다. 지난해 농가의 고령화율은 33.3%로 농업인 3명 중 1명은 65세 이상으로 사상 최고치였다. 농업에 종사하는 경영주 가운데 65세 이상의 고령농은 48.1%에 이르며, 농업 후계자를 확보한 농가는 겨우 3.5%였다. 또 다른 흐름은 하루가 다르게 주는 농지면적이다. 1968년부터 2005년 사이 개간이나 간척에 의한 증가면적보다 개발을 위한 전용으로 농지의 순감소는 52만㏊이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는 지난해 우리의 총경지면적인 178만㏊의 29.2%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다. 전쟁시 공격부대의 너무 빠른 진격은 병참선이 길어져 후속지원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농촌의 빠른 변화 역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농지문제는 기계화나 화학화로 어느 정도 대체 가능한 노동력 문제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이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줄면서 각국이 취한 식량정책을 살펴보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곡물 주요 생산국에서의 한발과 태풍 등으로 작황이 나빠지자 곡물수출 자체를 금지하는 나라와 수출세 부과를 높이거나 수출을 제한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베트남은 기존 계약이나 정부계약을 제외하고는 2006년부터 2년간, 캄보디아는 2008년 3월부터, 인도네시아와 이집트는 2008년 4월부터 각각 쌀 수출 금지, 카자흐스탄은 2008년 4월부터 밀 수출금지 조치를 내렸다. 한편 곡물수출 규제 국가로는 러시아가 밀과 보리에 대한 10% 및 30%의 수출부과세를 2008년 1월부터 40%로 인상했다. 또 중국은 2008년 1월부터 쌀·밀·옥수수·콩 등에 부가가치세의 수출환부 취소와 5~25%의 수출세 부과 등 수출규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곡물작황에 따라 식량 자국우선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는 우리가 해외에 식량기지를 개발한다 해도 유사시에 여기에서 생산된 곡물을 우리 뜻대로 처리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게다가 개도국의 대폭적 인구증가, 바이오 연료의 대폭 증산 등으로 세계 식량문제는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가 우리보다 경제력이 우위인 나라와의 식량쟁탈전이 발생하면 우리의 식료수입 감소와 가격폭등에 따른 사회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세계의 곡물 재고율은 2000년 30.4%에서 2007년 15.0%로 안전곡물재고율인 17~18%를 밑돈다. 국제 곡물가격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2007년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곡물수입국으로 약 120억달러어치를 사들인다. 사료를 포함한 곡물 자급도는 28%로 매우 낮다. 이런 상황을 예측해 곡물 비축, 곡물수입선 다변화, 해외 선물시장의 활용확대, 곡물 확보를 위한 조기경보 관리 시스템의 운영 등을 준비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생산 기반의 확대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농지 감소를 막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개발은 평지의 농경지에서 많이 행해졌으나, 이러한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강원 춘천시의 거두 농공단지를 평야지가 아닌 낮은 구릉지에 개발한 것은 농공병진의 좋은 사례다. 산지가 많은 남유럽이나 북유럽의 마을이 농공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어떨까. 그 어떠한 정책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처럼 식량확보를 전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전운성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 [내 책을 말한다] 문화사적 시각으로 본 자장면의 시대

    장안에서 로마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연결하는 1만 2000㎞에 이르는 교역로를 실크로드라고 명명한 이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리히트호펜(1833~1905)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교역품은 비단에 그치지 않았다. 향신료, 도자기 등과 함께 국수도 교역품 목록의 하나였다. 실크로드가 누들로드(Noodle Road)이기도 한 까닭이다. 최근 한 공중파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는 이 길을 동서로 넘나들며 국수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자장면이 지난 세기 이 땅에서 이룬 성공 신화는 누들로드의 영광스러운 한 장면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할 터이다. 자장면 한 그릇 안에 한국과 중국의 중국음식, 화교와 차이나타운, 근현대 한중교류사와 생활문화사 같은 재료들이 먹기 좋게 어울린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었던 까닭이다.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부터 채무로 여겨오던 일이었다. 자장면은 베이징과 산둥 지역에서 삶은 면에 볶은 면장과 각종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전형적인 가정식 요리다. 중국에서 수많은 국수 가운데 한 가지, 그것도 가장 간편하고 값싼 국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전통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던 19세기 말, 자장면은 해 뜨는 방향으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어떤 이의 주목도 받지 못한 조용한 귀화였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반세기 남짓 암중모색을 거치고 난 뒤 자장면의 검은 유혹은 마침내 한국인을 사로잡았다.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와 더불어 외식문화가 대중화되어 가던 무렵 한국인들이 찾은 곳은 중국식당이었고, 주문한 음식은 자장면이었다. 자장면은 그 이국적인 풍미로 외식문화의 꽃으로 군림하였고, 배달 문화가 가져다준 편리함으로 산업화 전장의 전투식량으로 사랑 받았다. 자장면은 문화관광부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문화를 선정한 ‘한국 100대 민족 문화 상징’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인의 정서가 각인된 오브제로 영화, 다큐멘터리, 소설, 동화, 수필, 시, 연극, 만화, 노래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1992년 한·중 국교 수립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을 따라 자장면은 이번에는 해 저무는 방향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 대륙에 상륙하였다. 미시사 또는 생활사라고 불리는 영역의 책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커피나 와인, 차를 소재로 한 책은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고 감자, 담배, 설탕, 초콜릿, 소금, 연필, 의자, 튤립, 화장실을 다룬 책들도 선을 보였다. 번역서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국내 저자들의 책도 간간이 출간되고 있다. 이제 자장면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자장면과 그의 시대를 문화사의 시각으로 조명하는 일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근현대 생활문화사의 복원을 위해서도, 고단했던 지난 세기 한국인과 동고동락했던 자장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터이다. 양세욱 한양대 연구 교수
  • [진보에 길을 묻다 8] 채진원 “진보정당 설계부터 잘못

    [진보에 길을 묻다 8] 채진원 “진보정당 설계부터 잘못

     민주노총은 내우외환에 빠져 있고 민주노동당은 ‘입법 전쟁’의 와중에 존재감이 엷다.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희망을 품었던 이들에게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왜 이렇게 됐을까..  국민승리 21부터 민주노동당 창당과 감격적인 원내 진입,그리고 그 뒤의 내리막길을 줄곧 지켜본 채진원(40) 전 민주노동당 의정정책실장은 애초의 정당 설계가 잘못됐다고 단언한다.채 전 실장은 10여년 민주노동당의 부침을 지켜본 경험을 녹여내 지난 1월 심사를 통과한 박사학위 논문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정당모델의 적실성’을 통해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중정당 모델을 따라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를 물적 기반으로 삼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화,탈이념화 상황에선 파편화된 노동자나 서민 대중을 대변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짚었다.  ’진보에 길을 묻다’ 8회 주인공으로 3일 만난 채 전 실장은 “민주노총을 토대로 손쉽게 창당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민주노총 이외에 다수의 비정규직,서민에 확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민주노동당 퇴조의 원인을 짚었다.2004년 원내 진입한 민주노동당은 이듬해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충격의 참패를 기록한 뒤 당내 헤게모니가 정파 대표에서 원내 의원에게로 옮겨졌는데 채 전 실장은 이런 흐름에서 원내정당 모델이 더욱 적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이를 이번 논문에 담아낸 것이다.  그가 구상하는 원내정당 모델은 “국민과 소통능력이 있고 정책개발 능력이 있는 원내 의원이 시민사회와 연계해 수평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생활정치적 요구들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이념과 계급,정파가 줄어드는 대신,서민들의 요구와 필요를 캐치할 수 있는 반응성과 이 과정에서 드러난 욕구를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해진다.  민주노동당이 안팎에 과시했던 진성당원제가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파 대표들에 의해 포획돼 사실 투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발언권이 폭넓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도 극복될 수 있다고 했다.그는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역동성과 네트워크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정당들이 시민들의 요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의회민주주의의 무덤’이라고 개탄했던 상황을 면밀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드러난 “다성악적인 진보를 구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당 모델은 원내 의원들이 시민사회와 네트워크하면서 토의가 강조되는 원내정당 모델”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개혁을 이루려면 물적 기반으로 삼는 조직된 노동자,정규직만을 더이상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이나 서민 대중을 위해 기득권을 버릴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정한 환골탈태란 주문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사학위 논문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녹여든 것 같다.  당 활동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한계에 봉착했다.시민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어졌다.어떤 정책과 이슈,쟁점 등에 대해 시민들을 설득할 만큼 잘 알지도 못했고, 전문성도 떨어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2004년 원내진출 이후 높아진 기대에 견줘 당내 정파싸움,민주노총의 권력 다툼과 부패 등을 보면서 당의 지지기반인 비정규직이 당에서 떠나는 것을 보면서 당의 전망과 집권 가능성을 회의하게 됐지만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했다.공부를 시작하고 여러 가지를 검토한 결과,지도부의 무능이나 이기심,오류 때문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른 변화를 당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지구화 정보화 탈냉전이란 거대한 변화에 맞는 정당모델,정치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80년대식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당의 한계나 오류를 극복해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의정정책실장 등을 맡으면서 당내 갈등을 피부로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2004년 제1 정책위원회 정책국장,2005년 3월부터 의정실장을 맡으면서 정파 지도부와 원내 의원들의 갈등을 목격했다.갈등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당의 문제점을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했다.  당시 당에선 대중정당 모델을 철저히 추종했고 원내정당화 모델을 철저히 반대했다.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죽했으면 국회의원이 당 지도부가 될 수 없게 제도까지 만들었겠는가.중앙당 지도부는 의원들을 통제하려 했는데 현실은 국민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의원들을 먼저 바라보았다.의원들이 많은 역할을 하기 위해선 자율권이 필요했는데 중앙당에선 통제하고 싶어했던 거다.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중앙당 지도부가 손을 들었다.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당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국민들이 바라보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정파 대표가 아니라 의원들이었던 것이다.따라서 당의 헤게모니 자체가 점차적으로 원내 의원들 중심으로 넘어갔고 당의 구조도 조금씩 바뀌게 됐다.    ●민주노동당 10년의 공과를 정리하면.  정당 사상 최초로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가 창당한 노동자계급정당,사회주의적 이념정당,진보적 대중정당으로서 독점적이고 편향적인 기득권층과 보수세력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서민들의 이익을 다양하게 대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고, 그 가능성을 2004년 원내진출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공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또는 지구화,정보화,후기산업화,탈이념화 등의 달라진 시대상황은 과거 단일한 노동자 계급과 조직으로 뭉칠 수 있었던 정당에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화이트 칼라와 블루칼라,정규직과 비정규직,노동조합원과 비노동조합원으로 파편화되고,노동자의 이익이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노동조합도 당도 유연한 네트워크 조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그 변화의 시대에 하나의 이념과 단일한 위계조직을 강조하는 운동권 모델을 고집함으로써 더 많은 비정규직과 서민들의 복잡한 이익에 반응하지 못했다.결국 대기업 소속과 정규직,조합원으로 표현되는 상층노동계의 이익만을 대변하게 되면서 다수의 비정규직과 약자들이 이탈하게 된 것은 그 한계라 할 수 있다.그 문제가 집약돼 나타난 것이 2005년 울산 북구 재선거 패배였다.  다시 말해 민주노총이 시대착오적인 계급환원주의 노선과 사회주의적 계급정당노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은 산업화시대에 유행했던 조직논리,이념논리,정당논리,이른바 대중정당모델에 집착했던 것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울산 북구 패배 이후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같은 잘못이 되풀이된 이유는.  많은 불만과 문제 제기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당모델까지 검토하지 못한 것은 당이 민주노총이란 조직된 노동자를 모태로 출범한 한계라고 생각한다.민주노총을 토대로 상대적으로 쉽게 창당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지기반을 민주노총 이외에 다수의 비정규직,서민에 확대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흔히 민주노동당의 두 가지 성역이 있다고 했는데 민주노총과 북한이란 성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당모델을 원내정당 모델로 바꿨으면 오늘날의 위기가 없었을까,이런 역질문이 가능할 것 같은데.  원내정당화 모델을 생각한 것은 당의 헤게모니가 원내 의원 중심으로 넘어가는 국면과 맞물려서였다.울산 북구 패배 이후 당의 총체적 위기가 확인됐다.지지율이 18%에서 5% 이하로 바닥을 쳤다.울산은 노동자 밀집지역이어서 대중정당 모델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곳이었는데 패배를 했고 그 패배의 원인이 비정규직의 외면과 이탈 속에서 당이 망가진 것이었다.그 늪을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 그나마 국민들로부터 소통능력과 정책능력을 인정받은 의원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확인이 됐는데도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진 못했다.민주노동당은 대단히 위계적인 조직이다.그 조직에 아직까지도 민주노총의 헤게모니가 작용하고 있다.30%의 할당제가 관철되고 있다.국민적 차원에서 개방,분권적인 개혁,다양한 이념을 수용해야 한다는 전략 등이 철저히 가로막힌다.  2007년 대선 후보를 경선해야 한다는 안팎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본선 경쟁력이 있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내세웠다.개방형 경선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확인하고도 폐쇄적인 당원 직선제로 지분이 큰 정파들은 국민들이 원하는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내세웠고 선거 패배를 자초했다.  민주노총의 한계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확대하지 못한 자업자득이었다.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지 않는 한 민주노동당의 앞날은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의 변화가 감지되나.  18대 총선 이후 많은 노력을 했다고 본다.하지만 미진한 것은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여전히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당을 개방화,분권화,네트워크화해야 하는데 민주노총의 기득권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4월 재보선에서 국민경선 대신 민중경선 으로 후보를 선출하려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이탈을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선거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논문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구체화하면.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정당으로 대중정당 모델이냐 원내정당 모델이냐는 학계 논쟁이 있었다.최장집 교수 등이 얘기한 대중정당 모델이 시대적인 적실성이 있다고 보았다.원내진출 이후 당 생활을 해보니 한계가 많이 드러났다.사회 변화에 적응 못한 정당 모델을 추구한 결과라고 보았다.  대중정당 모델의 쇠퇴는 당지도부의 리더십과 운영상의 오류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배경 때문이었다.시대에 뒤처진 대중정당모델을 고집했을 때 이념과 정파의 편향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더 많은 비정규직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선 대중정당 모델을 포기하고 대안이 되는 모델을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고 본다.  당의 위기가 닥쳤을 때 결국엔 의원들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의정 활동을 지켜보면서 이를 대중정당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것이 대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런 얘기들을 분당 이전부터 해온 것으로 아는데 반응들은 어땠는지.  비정규직을 더 많이 대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원인을 따질 때 그들은 사람의 문제,성품의 문제 이런 쪽으로 봤다.더 좋은 사람이 비정규직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정당모델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론이다.    ●진보신당은 원내정당 모델에 부합한다고 보는지.  분당 이후 반작용으로 신규 당원이 입당하고 민주노총 같은 조직적 기반이 없이 출발했다는 점에서,노회찬과 심상정이란 두 전직 의원의 지지층이 흡수된 측면이 있어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현역 의원이 없어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중정당모델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  산업화 시대의 대중은 노동자 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후기 산업화 사회에선 대중이라 함은 비정규직,비노조원,화이트칼라처럼 어느 곳에 소속될 수 없는,유동성이 큰 사람들이다.비조직된 대중이 더 많다.위계적인 조직 구도가 아닌 네트워크화된 대중만이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유연성이 대중의 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동과 사회’ 지난해 12월호에 기고한 ‘노조원들은 시민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란 제목의 글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웠다.선진 노동자들이 왜 다양성을 잃고 기득권층으로 고착됐는지.  개인과 조직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위계적인 조직에 속하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면 개성이나 끼를 발산할 수 있다.계급환원적인 생각,집단을 궁극선(善)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전체주의적 사고로 고착화된다.특정한 사안에 대한 집단행동을 이끌어낼 땐 유리하지만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처음 창당 때는 진성당원제라는 당원들의 참여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있겠다는 기대를 했는데 이념적으로 편향된 당내 정파 지도자들이 당을 포획해놓고 있었다.다수의 당원은 말을 사실상 제대로 못하고 기껏해야 투표하는 것이고 발언권이라든가 소통이 보장되지 않고 당내 민주주의에서 소외되고 자존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페이퍼 당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참여민주주의란 이상이 당을 장악한 정파 엘리트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하니까 이탈할 수밖에 없게 되고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의원들이 당에 묶여 있으면 정파가 시키는 대로 당의 눈치를 봐야 한다.소신있게 큰 이득을 위해 국민과 소통할 수 없고 당내 정파구도가 약화되고 의원들에 권력이 넘어가면 소통능력과 정책능력이 검증된 의원들이 국민들과 소통할 공간이 열렸다는 의미가 된다.    ●꿈꾸는 진보정당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진보라는 개념부터 시작하자.보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것이 진보의 논리지만 진보만이 진리라는 역편향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단성악(單聲樂)적인 구도가 있다.그러나 다양성과 복잡성 및 유동성이 커지는 시대에는 다성악(多聲樂)적인 진보가 필요하다고 본다.즉,진보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다성악(多聲樂)적인 세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진보라는 시각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의견 중에 하나의 의견정도로,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잠정적인 결론 수준에서 존재하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저는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공존방식으로서의 진보, 다양성 속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둘째. 다성악적인 진보를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로서 원내 의원들이 시민사회와 네트워크 하면서 토의가 강조되는 원내정당모델이라고 믿는다.    ●그런 내용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보다 어떤 점에서 진전됐느냐 묻는다면.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역동성과 네트워크가 하나의 답이 된다고 본다.정당들이 시민들의 요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지 않나.최장집 교수도 그런 점에서 지적당했다.촛불시위 때 시민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에 반응하지 못했던 정당들의 한계를 봤다.이게 핵심이다.시민들의 생활정치에 대한 욕구에 반응하는 정당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념과 계급 정파가 줄어들더라도 서민들의 욕구와 필요를 캐치할 수 있는 반응성이 있어야 한다.소통 속에서 발견된 욕구를 정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 생산능력이 담보될 때 정당으로서 생존할 수 있다.원내정당 모델이 바로 그런 것이다.    ●두 당과 무엇이 달라지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대중정당 모델에선 당의 이념과 게급,정파,조직이 강조되는데 이것이 약화될 것이다.당이 원내 의원 중심으로 가져가면서 유권자,시민사회와의 연계 부분이 강조된다.당원 중심을 벗어나 일반 유권자,지지자들도 당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시민사회의 요구가 전달되고 이것들이 의회에서 토의를 통해 합의되고 정책 결정이 되고 국민에게 성과물로 다가온다.    ●명칭은 원내정당 모델이지만 정당은 조그맣고도 시민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은 엘리트가 강조되는 게 당연하다.다만 행위자가 정파냐 아니면 국민들의 이익이나 선호에 접근할 수 있는 원내 의원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만큼 물적 기반이 없어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고정된 지지기반이 없어 불안정할 수있다.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잘 되고 있느냐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민주노총이란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과거 지지기반으로 갈 수 있겠는가.간다면 상층 노동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금 더 좁아진 정당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연성이 큰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데 느슨한 수준의 네트워크를 가능케하는 것은 정책능력과 소통능력 뿐이다.그때그때 이슈가 터지고 시민들의 요구가 터져나올 때 생활상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원내정당 모델이 대안이라고 본다.  원내정당 모델이 현실에서 나타날 때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하지만 대중정당 모델보다 낫다는 생각이다.원내정당 모델을 현실에서 구현할 때 당내 의사결정 구조를 어떻게 분산화하고 개방화할 것인가가 중요하다.진보신당의 지못미 당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새 이슈를 개발하고 정책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진보정당 통합이나 반(反)MB 전선에 참여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점증할 것이란 지적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이명박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을 수 있다.진보진영내에서 힘이 약하면, 함께 뭉쳐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소수의 의견이 배제당할 가능성이 있다.진보정당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 합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채진원씨가 걸어온 길  늦깎이 초보 연구자라고 자신을 낮춘 채진원(40) 전 민주노동당 의정정책실장은 국민승리 21에 1998년 입당해 지난해 진보신당과 분당하기 전까지 민주노동당의 10년을 고스란히 지켜본 인물.단국대 사학과 88학번인 채 연구원은 민주노동당에서 경험한 희로애락과 한계를 바탕으로 2005년 경희대 정치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했고 지난 1월에야 어렵사리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  2004년 원내 진출 전까지 민주노동당의 대표적인 민생 법안인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정치개혁의 대표 법안으로 손꼽히는 ‘1인 2표 정당명부비례대표 도입’에 관여했던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창당 이후 정책위원회 제1정책조정위원회 정책국장으로 정치관계법을 담당했으며 이후 의정정책실장으로 의원들의 의정활동과 정책 지원을 담당했다.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부인의 외조를 위해 중앙당을 사직한 뒤 평당원으로 남아있다가 지난해 3월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제안한 혁신안 ‘생활속의 진보’가 부결되자 탈당했다.현재 어느 당에도 몸담고 있지 않다.  전문연구자의 길을 걷는 한편 기회가 닿으면 의정활동이나 입법을 돕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근대화 상징, 장항의 변신 기대하세요

    근대화 상징, 장항의 변신 기대하세요

    장항제련소의 거대한 굴뚝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근대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충남 장항이 생태관광도시로 바뀐다. 1일 서천군에 따르면 국토해양부는 최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에 대한 건축설계 현상공모 최우수작(조감도)을 발표했다. 밀물과 썰물을 형상화한 이 시설은 장항읍 송림리 일대 32만 5000㎡에 건립돼 오는 2013년 문을 연다. 국비 1213억원이 투입되며 해양생물자원연구동, 보호종배양동 등이 지어진다. 민자로 아쿠아리움도 만든다. 2011년에는 국립생태원이 장항과 접경한 마서면 덕암리 등 99만 8000㎡에 자리를 잡는다. 방죽과 습지를 이용한 야외 생태체험시설이 건립되고, 열대식물관과 멸종위기동식물관 등이 들어선다. 오는 7월쯤 착공되며 모두 3400억원의 국비가 투입된다. 이 시설들은 2007년 6월 정부와 서천군의 협약에 따라 장항국가산업단지를 축소하는 대신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산단도 276만㎡에 조성된다. 생태시설과 잘 어울리는 생명과학과 첨단기술 등 친환경 기업이 입주한다. 아울러 서천군은 옛 장항역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198억원을 들여 생태교육공간과 전망대 등을 만들기로 했다. 금강하류 맞은편 전북 군산을 오가는 도선(渡船)이 운행돼 관광상품 가치도 있다. 또 2012년부터 신 장항역~생태원~구 장항역~해양생물자원관을 잇는 관광열차도 운행된다. 편도 7㎞ 거리로 정거장은 4곳이다. 군 관계자는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가 지난 89년 장항제련소(1936년 건립)의 가동이 중단되고 토양 등 환경오염이 유발되면서 침체일로를 걷던 장항이 미래 지향적인 생태·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있다.”고 자랑했다. 서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사설] 90돌 3·1절에 나라의 장래 다시 생각한다

    해마다 3월이 오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자주독립을 외친 3·1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올해는 3·1절 90돌이어서 감회가 한결 새롭다. 하지만 뜻깊은 경축일을 앞두고 우리는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등 세계 만방 피압박민족에게 등불이 됐던 것처럼 우리가 수십년 동안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제3세계 국가의 모범이 돼 왔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지난해 말부터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투자위축, 환율 폭등, 취업난, 실질 소득 감소 등으로 인한 고통은 국민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 주고 있고 양극화로 인한 고통이 중·하 계층에 집중되면서 지역간, 세대간, 노사간, 계층간 갈등은 일촉즉발의 상태다. 사회발전의 비전과 방법론은 제시되지 않은 채 보혁갈등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은 갈등을 수습하기보다는 갈등에 안주하고, 갈등으로 먹고살면서 실망과 분노를 자아 내고 있다. 새로운 편가르기와 편중인사로 국민 통합의 기회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남북한이 힘을 모아 분단을 극복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북은 오히려 대결과 긴장의 길로 치닫고 있다. 북은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 움직임으로 주변국의 우려를 사고 있으며 매일 같이 남측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남에서도 북에 대해 따뜻한 손길을 더 뻗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거니와 종교적, 이념적 차이를 넘어 독립선언을 외쳤던 90년 전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남북이 대화의 테이블로 돌아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90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과 새 출발의 힘찬 나팔을 불었다. 우리도 바로 지금 절망과 비탄의 사슬을 끊고 단결과 위기극복의 북소리를 힘차게 울릴 때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층이 도덕과 법을 지키는 데 솔선수범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도 집단의 논리만 되풀이하지 말고 국민 단합의 자세로 갈등과 위기의 골을 넘어서야 한다. 90돌 3·1절-나라의 장래를 깊이 성찰하면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 한국 뇌 연구원 대구 유치 총력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은 26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대구지역 대학병원들과 한국뇌연구원 유치를 위한 상호협력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경북대병원, 영남대병원, 계명대 동산병원, 대구가톨릭대병원 등 4개 병원이 참여했다. 뇌연구원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세계 최고의 뇌융합 연구중심기관 구축과 원천기술 개발을 통한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총사업비 3786억원을 투입해 부지 9만 4000㎡에 건물 3만 3000㎡, 인력 200여명 규모로 지어질 예정이다. 현재 대전시와 인천시가 지자체, 대학, 병원, 산업체와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뇌연구원 유치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이들 병원은 뇌의학연구센터 등 뇌의학 관련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어 향후 DGIST의 핵심 정보기술(IT)과 연계해 뇌 융합공학 상용화 기술 개발, 뇌과학 분야 산업화에 역할을 하게 된다. DGIST는 다음달 초 뇌 융합분야 연구기관인 상하이 신경과학연구소, 일본 이화학연구소 BSI와도 공동 연구를 위한 MOU 체결을 추진하고 세계적인 석학을 초빙해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할 계획이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찰나의 순간, 거장들이 살아 숨쉰다

    찰나의 순간, 거장들이 살아 숨쉰다

    “쉬! 지금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는가?”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세계적인 인물 사진 작가 유섭 카시(Yousuf Karsh·1908~2002)가 찍은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의 사진을 전시할 때의 일화다. 카잘스가 첼로를 켜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한 노신사가 매일 매일 오래오래 지켜 보고 있었다. 결국 호기심에 가득 찬 큐레이터가 어느날 참지 못하고 “선생님, 왜 이 사진 앞에 매일 서 계시는 건가요?”라고 묻었다. 노신사의 대답이 이처럼 걸작이었다. 카시는 카잘스를 만나 그의 바흐 연주에 감동해 사진 찍는 일도 잊었다고 하니, 아마도 보스턴 미술관에서 흐르던 연주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캐나다 출신의 사진작가 유섭 카시의 전시회가 다음달 4일부터 5월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카시란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어도 윈스턴 처칠이 지팡이를 집은 채 왼손을 허리춤에 얹어 놓고 살짝 찌푸린 채 노려 보는 위엄있는 모습, 스웨터 차림의 덥수룩한 턱수염의 소박한 헤밍웨이 등의 흑백 사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미 카시의 사진을 만나본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유명인사들의 흑백사진은 대부분 카시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카시가 1930년부터 1990년까지 찍은 4000여장의 사진에서 70점을 엄선한 것으로, 오드리 헵번, 윈스턴 처칠, 헬렌 켈러, 파블로 피카소, 마더 데레사 등 20세기 역사적인 인물의 다양한 초상 사진이 준비됐다. 1950년대 산업화하는 캐나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공개된다. 이 전시는 카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08년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의 시작한 순회전이다. 특히 공개되는 사진은 디지털 프린팅이 아닌 오리지널 빈티지 필름이다. 카시가 인물 작가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를 찍은 사진이 사진전문지인 ‘라이프’에 발표되면서부터다. 제목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였다고. 카시는 당시 후원자였던 매킨지 킹의 주선으로 캐나다를 방문한 처칠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조명을 다 준비해 놓은 국회의 대기실에서 처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시가를 내려 놓지 않은 것이다. 카시는 처칠의 입에서 시가를 뽑아냈다. 처질의 살짝 찌푸린 얼굴 표정에도 불구하고 셔터는 눌려졌다. 그 후 1943년 캐나다 정부의 요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조지 6세를 비롯해 정치가, 과학자, 군인, 예술가, 성직자 등 42명의 초상을 찍었고, 1945년부터는 ‘라이프’지의 요청으로 세계 명사들의 초상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시는 2002년 작고할 때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카시는 당시의 유행이었던 스튜디오가 아닌 그 인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사진을 감상할 때 인물의 표정 자체만 감상할 것이 아니라, 인물이 입은 의상이나 사진 찍힌 장소, 몸짓과 손짓, 조명이 비춰진 상태 등도 고려해야 한다. 카시는 한 사람의 내면이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치켜 뜬 눈썹이나 놀란 표정과 같은 무의식적 행동에서 드러난다고 믿었고, 사진에 고스란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카시는 또한 인물의 머리 뒤에서 비추는 태양광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백라이트 조명을 사용했다. 후광효과로 인물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인다. 한국 인물 사진작가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의 작품 20여점도 함께 볼 수 있다. 안익태, 장욱진, 서정주, 안성기, 김희애, 전도연, 코넬 카파, 백남준, 피천득 등의 초상이다. 특히 임영균이 찍은 유섭 카시의 초상이 흥미롭다. 성인 8000원, 청소년 7000원, 초등학생 6000원. (02)1544-1681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우리들의 바보’ 잠들다] 이명박 대통령 추도사

    오늘 우리는 이 나라를 지탱해 온 큰 기둥이셨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신 큰 어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고 합니다. 추기경님의 선종을 온 국민과 함께 깊이 애도합니다. 작년 성탄절 날 저희 부부가 찾아뵙고 여러 말씀을 나눌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습니다. 힘들어 찾아뵐 때마다 기도해 주시고 용기와 격려를 불어넣어 주신 추기경님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가톨릭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서 항상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와 함께하셨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소외된 노동자들 편에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 정의를 말씀하고 행동하셨고, 민주화시대에는 국민의 편에서 권위주의에 맞서 정권의 압박을 온몸으로 막아내셨습니다. ‘네 편 아니면 내 편’이라는 이분법이 팽배한 요즘에는 타인을 존중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할 것을 가르치셨고, 그러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오만해지거나 부패할 때에는 준엄히 꾸짖으셨고, 시류에 휩쓸려 흔들릴 때에는 가야 할 바른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소중한 분을 데려가시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변화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추기경님이 남기고 간 뜻을 받들어 서로 사랑합시다.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기고] 사회안전망 사각지대의 농촌노인/이동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고] 사회안전망 사각지대의 농촌노인/이동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할머니는 평생 농사일에 파묻혀 살아온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있다. 여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어 다니며 콩밭을 매고, 풀을 베면서 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한다. 깡마른 다리에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잃은 눈길에는 평생 고단한 농사꾼으로 살아온 인생의 허탈함과 쓸쓸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개봉 한 달 만에 7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워낭소리’의 주요 장면들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소와 할아버지가 배려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농약을 치지 않고 손으로 농사를 짓는 우직한 농사 방법에 감명을 받고, 혹은 머잖아 사라져 버릴 풍경, 어릴 적 고향 생각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울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시장질서와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이라는데 늙고 병들어 도무지 세태를 따라갈 능력이 없는 늙은 소와 노인의 삶이 이토록 가슴 울리는 이유는 그것뿐일까? 대부분의 농촌 노인들은 해방 전후의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농사 짓고 자식 키우는 데 헌신한 사람들이다. 6·25전쟁 때는 나라를 지키고, 산림녹화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국민을 먹여 살린 일꾼이지만 오늘날 이들의 생활은 암담하기조차 하다. 비료·농약 값은 천장 높은 줄 모르게 뛰고 값비싼 농기계는 구입할 엄두도 못 내는데, 그렇다고 평생을 지켜온 농토를 팔 수도 없다. 경제가 어려우니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쉽지 않다. 영화에서 그렇게 타박을 주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더라도 도시의 자식들한테는 가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넋두리가 농촌 노인의 막막한 신세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2005년 농업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65세 이상 가구가 55만호, 가구원은 120만명 정도인데, 주인공 또래인 75살이 넘은 가구도 12만 3979호에 25만 5219명이나 된다. 문제는 이들을 방치해 두고서는 농업구조개선도, 선진복지국가 건설도 어렵다는 점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나 경영이양직불제도, 농업인 국민연금보험료 지원 등의 사회안전망이 있지만, 그나마 농지라는 재산이 있다고 적용대상에서 제외되기 십상이라니 실제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빈곤인구 대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인구는 대도시가 93.5%, 중소도시는 66.3%인 데 비해 농어촌은 48.6%로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나이 들어 농사 짓는 것이 힘들어도 다른 수입원이 없으니, 부득이 농사를 움켜쥐고 있을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규모 확대를 통한 농업의 경쟁력 강화는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2·3차 산업과 결합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조개선에서 탈락하는 중소농, 고령화된 농업인에게 보람과 긍지, 그리고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역농협이 나서서 힘든 일을 대행해 준다든지, 임대주택을 지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경영이양직불제도 등 기왕의 사회보장제도와 지원책을 더욱 정비한다면 보다 단단한 고령 농업인의 복지대책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워낭소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 가정과 국가 발전에 헌신적으로 기여해온 농촌 노인들을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이다. 농촌에 노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식량안보와 국토보전 이상의 의미, 즉 노인복지와 일자리 창출, 나아가 효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 아닌가? 이동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녹색성장을 말한다] “이산화탄소 감축, (주)대한민국 위축 없도록 하겠다”

    [녹색성장을 말한다] “이산화탄소 감축, (주)대한민국 위축 없도록 하겠다”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의 목표는 강력한 ‘주식회사 한국’ 만들기입니다.” 녹색성장위원회의 김형국 위원장은 18일 서울신문과의 회견에서 “이산화탄소 감축 정책도 국가경제와 기업활동에 절대 타격을 주지 않도록 우선순위를 잘 조절해 나가겠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16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첫 회의를 갖고 공식 출범한 녹색성장위원회는 한승수 국무총리와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출신인 김 위원장이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20%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 이상으로 늘린다는 이른바 20-20-20 정책을 발표했다. 우리도 이처럼 명확한 정책 목표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까. -유럽 등의 그런 목표를 유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자동차도 팔아야 하고 하니까. 그러나 유럽과 우리는 산업구조가 다르다. 유럽은 이미 탈제조업 사회에 도달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제조업 사회의 최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우리의 대책이 너무 앞서나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가 국제경쟁에서 생존(survive)할 수 있는 선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신·재생에너지 수출산업화 연구해야 →저탄소 녹색 성장 법안에 예고된 이산화탄소 배출량 할당 및 거래(Cap and Trade) 제도는 생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다고 기업들은 주장하는데. -기준을 따르지 않고는 우리(국가 전체)가 생존할 수가 없다. 예전에 GM의 이익은 미국이란 말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업의 이익은 ‘주식회사 한국’의 이익이다. 정부나 위원회는 절대 기업에 해가 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Cap and Trade 제도는 도입되는가. -Cap and Trade가 됐든지, 다른 방안이 됐든지, 불가피하게 갈 수밖에 없다. 특히 외국과의 협상에서 이것을 많이 요구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협상카드로 열어두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달라. →우리나라의 신·재생에너지 자원은 충분한가. -우리 여건에 풍력과 태양광 발전은 어렵다는 것이 지식경제부 등의 실무자들 생각이다. 일본이 신·재생에너지에 대해 약간 소극적인 생각을 한다는 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독일은 태양빛이 약한데도 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태양광 산업이 100배 이상 성장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열심히 연구는 해야 한다. 안 하고 가만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직접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느냐 하는 것은 두고 봐야 한다. 왜냐면 그렇게 하려면 많은 보조금이 필요하고 국가 재정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의 큐셀(Q-Cells)처럼 수출산업화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는 해볼 만한 저력을 갖고 있다. →발전차액지원금은 증액할 생각이 있나. -산업 초기 단계에서 선의의 이용자에게는 보조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포스코처럼 보조금을 악용하는 사례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대기업으로서 도덕성이 없는 행동이다. (포스코는 최근 철강제조 과정에서 나온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전기를 비싼 가격에 한전에 되팔아 논란이 됐다.) 정책의 원칙은 시장 메커니즘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을 정부 시설에 먼저 할 수도 있다. 정부는 리스크를 감당하는 역할도 하니까. ●대운하는 하고 싶어도 물리적 불가능 →녹색성장 정책에 환경 정책 쪽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환경 오염에는 수질오염, 토질오염, 대기오염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저탄소 녹색성장은 기본적으로 대기오염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기후변화의 요인이 온실가스 배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질오염에 대한 대책이 바로 4대강 살리기다. →4대강 살리기가 대운하를 추진하는 전단계라는 시각도 여전하다. -제가 (이명박)대통령이 발언하는 것도 여러번 직접 들었다. 생태복원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운하든 뭐든 강의 적극적 이용은 이 정부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다음 정권의 선택이 될 수는 있다. →청와대에서 소득에 대한 세금(Earnning Tax)을 탄소배출에 대한 세금(Burning Tax)으로 바꾼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능할까. -합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세제상의 큰 변혁이기 때문에 많이 검토돼야 할 사안이다. →탄소세 도입은 어떻게 생각하나. -세원 포착이 가능하기는 하다. 기업의 생산량을 역산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 계산 가능하니까 기업에 대해서는 적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에 이중규제가 되지는 않도록 하겠다. →녹색성장은 여러 부처와 관련이 있다.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을텐데. -정부 조직도 생물체 같아서 영토 넓히기가 치열한 것은 잘 알고 있다. 임기응변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임사응변, 즉 일에 따라서 각 부처들에 힘을 실어주는 식으로 조정해보겠다. ●北과 녹색협력 땐 큰 성공 거둘 것 →녹색성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너무 어렵다고 한다. 국민이 쉽게 이해하도록 홍보나 교육하는 방안은. -우리나라의 물값과 전기값은 세계적으로 싸다. 그래서 낭비도 많다. 지금 아끼지 않으면 상승요인이 빨리 다가온다는 식으로 접근했으면 한다. 교육은 가장 좋은 것이 가정교육이다. 특히 주부들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녹색성장이 교육 과정에도 반영되고 있다. 또 초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교재도 만들고 있다. →북한과 녹색성장 분야에서 협력하는 방안은. -꼭 해야겠는데 그런 장치를 어떻게 해서 들어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을 일으킨 것보다 산림녹화를 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제1차 녹색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본다. 이도운기자 dawn@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李대통령 “김 추기경 선종 국가적 손실”

    이명박 대통령은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과 관련, “이 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비마다 국가 원로로 큰 역할을 해 오셨던 추기경님을 잃은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조문 여부에 대해 “아직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직접 빈소를 찾아 조문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현대사 고비마다 버팀목으로… 한국 민주화 큰 횃불

    [김수환 추기경 선종] 현대사 고비마다 버팀목으로… 한국 민주화 큰 횃불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안의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긴 ‘큰 횃불’로 인정받는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를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양심의 울림과 행동을 끈질기게 이어갔던 투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 비판 시국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이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삼도직물 사건부터. 당시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불거진 이 사건을 놓고 추기경은 주교단 공동성명을 통해 교회가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정당함을 전격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 차원에서 낸 최초의 성명서로 기록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인권에 개입하기 시작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긴급조치 등 독재와 부정부패가 극성일 무렵 성탄절 미사를 통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고 나선 것은 유명하다. 당시 KBS를 통해 방송된 미사 강론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인가.”라고 비판했으니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1971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시절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한 데에 이어 이듬해 ‘평화의 날’을 맞아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선포, “불의와 부정부패, 부조리, 인권탄압, 독재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인독재체제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그 유명한 시국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72년 8월이었다. “인권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선 정치적 민주화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을 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정치”를 거듭 촉구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이다.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1974년 구속된 사건은 유신체제하 독재정부와 천주교회의 대립 차원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마다 추기경은 “우리 민족이 처한 아픔이자 교회의 아픔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직선제 주장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국가권력과의 대립을 거듭해야만 했다.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의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달아 구속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 부산의 미 문화원 사건,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언론통제 등 군부독재에서 빚어진 사회문제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1986년 군사정권에 개헌실시를 촉구한 데 이어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비판,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주장했다. 그 끝에 나온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실시는 결국 문민정부를 등장시킨 큰 발판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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