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과 결단의 역정40년… “정치거산”/김영삼후보가 걸어온 길
◎한번 만나면 “내사람”… 뛰어난 친화력/반독재투쟁 선봉… 숱한 박해 받기도/요즘도 아침조깅으로 건강다지고 경제공부에 열중
김영삼대표는 이제 출발점에 섰다.
「불굴」과 「좌절」이 교차됐던 기나긴 영욕의 정치터널을 지나 이제 명실상부한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로 우뚝 선것이다.
긴세월,대권을 향한 「김영삼집념」은 이제 실현됐다.
그가 집권여당의 대권후보로 거듭나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역사는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사실,또 내부적으로 극적인 반전효과를 지닌다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중학시절 하숙방에 써 붙였다는 대망대로 그는 꾸준히 걸어왔다.특유의 뚝심으로 목표를 향해 밀어붙였다.
따라서 그는 격변하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출발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목표와 그를 분리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물론 집권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다고 해서 곧바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유리한 고지에서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이자리에 이르기까지는 핍박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단단해졌고 또 그의 표현대로 『결과에 승리가 있을뿐 패배를 생각해본적 없다』는 자기 암시가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40대기수 김영삼」「독재타도 김영삼」「군정종식 김영삼」「문민정치 김영삼」「큰정치 김영삼」.
그의 40년 정치역정을 대표하는 수사들이다.
「40대 기수론」도 그가 제창했던 구호였다.
또 반독재투쟁을 벌이면서 여러차례의 가택연금,23일간의 단식,국회의원직 제명,야당총재 직무정지등 숱한 고난을 겪었다.심지어는 가택연금중 자신의 장남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인간적인 비애도 감수해야 했었다.
집권여당 대표로 변신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내부의 경쟁자들과 싸워왔고 이제 승리자로 남겨졌다.
그의 정치적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타고난 감(감)의 정치인」「뛰어난 결단의 승부사」라는 그의 별칭에 그 기원을 둘수 있다.
또 40년 정치역정중 남달랐던 친화력을 꼽을수 있다.
여야로 나뉘어상대방 헐뜯기에 열중하던 시절,야당총재이던 YS를 남보다 앞서 비난했던 한 여권인사는 『가까이에서 보니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그의 정치적 투쟁과 소신이 새삼 돋보였다』고 지지로 돌아선 배경을 밝혔다.
무엇보다도 그의 화려했던 정치경력은 그가 정치 거목이었음을 입증한다.
의정사상 최연소인 26세로 3대국회의원 당선(54년 경남 거제)이후 5·6·7·8·9·10·13·14대 당선 기록은 현존하는 정치인중 최다선이다.
그의 정당생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화려하다.의정단상에 오른뒤 원내총무 5회,대변인 2회,4차례의 야당당수,13대대통령후보,여권의 2인자 등을 거치면서 「최연소 의원」「최장수 원내총무」「최연소 당수」등 거듭 신기록을 경신했다.
야당시절 투쟁경력도 그의 무게를 뒷받침하고 있다.
유신반대,80년이후 두차례에 걸쳐 2년간 가택연금,83년 5월18일부터 6월9일까지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87년 6월항쟁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 대표적인 투쟁이다.
그가 당시 인용했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말은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과 함께 지식인들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화려했던 야당시절,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전과 87년 대통령선거 낙선,88년 4월총선 패배등 뼈아픈 좌절의 시기를 맞기도 했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했던 그는 후보경선 전날밤 승리를 낙관,후보수락 연설문을 다듬다가 마지막까지 대의원 포섭을 벌였던 김대중씨에게 2차결선투표에서 역전패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또 87년 대선에서 후보단일화 실패후 대통령선거에서도 낙선했고 뒤이은 총선에서도 제1야당의 자리마저 평민당에 넘겨주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는 결국 민정·평민·민주·공화등 4당구조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아래 3당통합을 결행,집권당 2인자 자리를 확보했다.
지난 89년 6월 당시 민주당총재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한데 이어 90년 3당통합후 민자당대표자격으로 미수교국이었던 소련을 다시찾아 고르바초프대통령을 면담,한소수교의 물꼬를 트는등 정당외교사에 새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듣기도했다.
그는 여당으로 변신한후 「감각과 이론」을 겸비한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경제전문가들로부터 거의 매일 경제강의를 받는등 국가의 경제활력제고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27년 12월20일생으로 금년 65세인 그는 요즘도 새벽 5시30분부터 6시30분까지 상도동자택 인근 야산에 올라 4㎞씩 조깅을 하며 건강을 다지고 있는데 조깅을 시작한지 25년동안 비가오나 눈이오나 해외출장중일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하고 있어 그의 끈질긴 승부근성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늘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지만 그는 유신직후 가택연금을 당하자 양주 두병의 주량과 하루 서너갑씩이나 피우던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을만큼 「독기」도 있다.
김대표는 6남매중 외아들로 부인 손명순여사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두고 있으며 마산에 거주하는 부친 김홍조옹(81세)에게 매일 아침저녁 문안전화를 드리는등 극진한 효자로도 알려져 있다.
아무튼 김대표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과거도 현재도 중요하다.그러나 어제보다 오늘,오늘보다는내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더 중요한 내일을 위한 출발인 것이다.
○김영삼후보 연보
▲54∼58년 제3대 민의원
▲60∼61년 제5대 민의원
▲63년 신민당 부산시 당위원장
▲63∼67년 제6대 국회의원,민정당 선전부장,민중당 원내총무겸 대변인
▲67∼72년 제7대 국회의원,신민당 원내총무,정무위원
▲71∼72년 제8대 국회의원,한국문제연구소 소장
▲73∼79년 제9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총재,정무회의 부의장,총재겸 지도위원회 의장,정무회의 의장
▲74년 미타우슨 주립대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76년 신민당고문
▲79∼80년 제10대 국회의원,신민당총재
▲79년 총재직무집행 가처분,의원직제명
▲80년 정치활동규제
▲81년 민주산악회 결성 고문
▲82∼83년 2년동안 가택연금
▲83년 단식투쟁(23일간)
▲84∼87년 민추협 공동의장
▲85년 민족문제연구소 고문
▲86∼87년 신민당 상임고문
▲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
▲87년 통일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87∼88년 통일민주당 총재,대통령후보
▲88년 제13대국회의원
▲88∼90년 통일민주당 총재
▲90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91년 윤봉길의사 의거 제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장
▲92년 제14대 국회의원
40대 기수론(71년)
정직과 진실이 승리하는 사회(87년)
민주화 구국의 길(87년)
나의 결단(87년)
지도자의 길(몽고메리저)
생을 뜻있게 보내려면(윌리엄 J 래이리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