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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체첸자치공 “끝없는 승강이”(특파원 코너)

    ◎연방내 범죄단 운영… 항공기 납치 비난/러시아/“두다예프의 독립정책 저지에 혈안”/체첸공 경제난,각종 범죄등 산적한 국내문제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옐친행정부가 이번에는 중앙정부의 권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인정치 않는 체첸공화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러시아는 지난 1일 정부성명을 통해 『체첸공화국이 러시아국경쪽에서 무력도발을 계속하고 있다』며 국경수비병력을 동원해 이를 즉각 응징하겠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선 지난달 30일에는 세르게이 필라토프 대통령행정실장이 체첸공화국이 현지에서 활동중인 러시아정보요원 3명을 참수해 그 시신을 수도 그로즈니광장에 공개했다며 이를 『체첸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혹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남부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있는 체첸공화국은 인구 1백10만명의 소민족공화국으로 주민 대부분은 회교도인 체첸인들이다.지난 90년 소련방해체 기운이 한창일때 독립을 선포하고 91년10월 소련공군장성출신의 조하르 두다예프 현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그동안 연방정부의 지시를 자주 무시해 왔다. 옐친정부가 체첸을 눈엣가시로 여겨온 데는 정치적인 이유말고도 몇가지 이유가 더 있다.우선 체첸인들이 러시아내 범죄조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특히 코카서스산맥을 넘나드는 체첸 밀수조직은 러시아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한다.지난달 29일 수류탄 폭발로 5명의 사망자를 낸 인질극을 비롯,최근 3개월 사이에 무려 5건의 항공기납치극이 체첸땅에서 일어났는데 러시아정부는 이같은 항공기납치극의 배후에 체첸이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체첸측은 러시아의 이런 주장들을 『독립정책을 추구하는 두다예프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날조극』이라며 맞섰다.비행기납치극도 모두 두다예프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키기 위해 러시아정부가 치밀하게 꾸민 사건들이라고 주장한다.게다가 참수당한 러시아정보요원 사진도 날조된 것이고 『한마디로 러시아가 두다예프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킬 구실을 만들고 있다』고 공격했다. 체첸공화국은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러시아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더라도 사실 효과적인 작전을펴기 힘든 곳이다.그래서 볼썽사나운 설전만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보다 심각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중앙정부와 연방내 21개 민족공화국의 관계가 대부분 체첸의 경우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그래서 일각에서는 러시아연방도 결국 소연방과 같은 해체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컬럼비아 빙하만(“빙하의 대륙” 알래스카:상)

    ◎나윤도 특파원 심방기/만년설 덮인 수십m 얼음 절벽에 탄성/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빙벽모습 “장관”/서울의 1.5배면적에 1만년전 신비 그대로 시원한 바람과 얼음에 대한 갈망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 무더위가 한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여름에도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도 있다. 파손되지 않은 자연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미알래스카가 그곳이다. 알래스카의 관광및 환경보존 실태를 앵커리지를 찾은 나윤도특파원(뉴욕상주)이 소개한다. 글래시어 퀸호가 컬럼비아빙하만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갑판위에서 따가운 태양을 즐기던 반라의 관광객들은 파카를 걸치기에 바빴다.만 입구에 떠도는 수많은 유빙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조각공원을 연상케 했다.불독·탱크·오리모양 등 끝없이 널려있는 기기묘묘한 조각들을 헤쳐 만 깊숙이 들어가자 만년설을 머리에 인 거대한 얼음절벽군이 나타났다. ○빙하 10만개 떠돌아 이글거리던 태양은 이미 폭염의 위력을 잃었다.어마어마한 빙벽의 위용에 잠시 취해 있다보면 어느새 살갗으로 파고드는 한기가 몸을 움츠리게 한다.이따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리는 수십m의 빙벽은 천지창조의 신비마저 느끼게 해준다. 끝없는 모험의 대륙,알래스카의 여름은 이렇게 어느 곳이나 겨울이 함께 하고 있어 더욱 신비롭고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반도의 7배가 되는 1백52만㎦의 땅덩이에 어우러져 있는 3천개의 강,3백만개의 호수,10만개의 빙하와 높은 산,그리고 수많은 섬은 사시사철 매혹적인 모습으로 천혜의 관광지를 이루고 있다.6천m가 넘는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봉을 비롯,북미의 20개 고산중 17개가 알래스카에 있을 정도로 알래스카는 많은 산악지대로 이뤄져 있다. 앵커리지에서 손쉽게 가볼수 있는 포르테지빙하 등 여러 빙하중 압권은 컬럼비아빙하.앵커리지 동쪽으로 펼쳐진 미국내 두번째로 큰 산림공원 「추가치 내셔널 포리스트」에서 가장 큰 것으로 1만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3천∼4천m 연봉에 펼쳐져 있는 빙원에서 70㎞에 걸친 1천㎦의 면적으로 서울의 한배반 크기에 달한다. 알래스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발데즈항에서 위티어항까지 알래스카 남부의 내해인 「프린스 윌리엄 해협」을 가로지르는 여섯시간의 뱃길은 중간에 수많은 빙하로 연결되는 피오르드와 절경의 섬들로 잠시도 눈을 쉴수가 없다.그래서 이 지역은 알래스카 10경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2차대전중 일본이 알류샨열도를 침공해 왔을때 알래스카 주둔 연합군의 병참기지로 개발된 이 해협은 주변해안의 길이가 4천3백㎞,전체면적은 2만㎦가 넘고 북태평양의 거센 바다를 몬타규섬,힌치브룩섬 등 수많은 섬들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매우 잔잔하다. ○알래스카 10경으로 이 뱃길의 가장자리에는 이름난 빙하만 30여개가 늘어서 있다.재미있는 것은 이들 빙하의 이름.대분분이 발견자의 이름 또는 생긴 모양,주변의 지명 등을 따서 명명되는 것과는 달리 이 지역은 유난히 대학이름이 많다.최대의 빙하를 컬럼비아라고 한것을 비롯,칼리지 피오르드의 양쪽으로 늘어선 10여개의 빙하는 하버드·예일·다트머스·볼티모어 등등 유명대학의 이름들이다. 이들 빙하의 이름은 이 지역에 대해 본격적으로 학술조사가 이뤄진 1899년 무렵에 명명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당시 철도재벌 에드워드 해리만이 스폰서가 되어 각 분야별로 많은 학자들을 파견했으며 그들이 새로 발견한 빙하들에 자신들의 출신학교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의 여행은 빙하의 장관 뿐 아니라 수많은 진귀한 동물들과의 만남이 있어 재미를 더해준다.가장 자주 만날수 있는 것은 바다수달.수염으로 뒤덮인 천진스런 얼굴을 바다 위로 내밀고 배영을 즐기며 배주위를 왔다갔다 하며 재롱을 편다. 덩치가 큰 바다사자들은 수영조차 귀찮다는 듯 항로표지물이나 등대등 바다에 떠있는 구조물에 여러마리씩 몸을 비비대며 누워 있다.그들은 배가 잠시 정지하자 왜 수면을 방해하느냐는 듯 곱지 않은 표정으로 배를 노려본다. 이따금 바닷가 바위에 큰 덩치를 내밀었다 감췄다하는 해마(해마)는 바다사자와 덩치가 비슷하다.상아 비슷하게 길게 뻗어내린 송곳니를 잘 안보여주려는 듯이 고개만 삐죽삐죽 내밀 뿐 좀처럼 바위에 올라 앉지를 않는다. ○진귀한 동물도 만나 그러나뭐니뭐니 해도 사운드의 왕자는 고래.이따금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가 뒤흔들릴 정도로 파도가 오면 그것은 고래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다.가장 자주 보이는 것은 길이 10m 내외의 킬러고래와 보다 덩치가 큰 험프백고래.검은빛의 험프백은 꼬리부분만 내밀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몸체를 보기는 어렵다.그러나 킬러는 돌고래처럼 물위로 솟구쳐 눈에 잘띈다.검은 등에 배쪽은 하얀색으로 날렵하고 귀여워 보이나 사실은 해협내의 무법자로 통한다.여러마리씩 떼지어 다니며 다른 바다동물들은 물론 같은 고래까지 잡아 먹는다는 것. 한편 해협의 하늘을 지배하는 것은 대머리독수리.머리부분의 털색깔이 하얗고 부리는 노란 이 새는 해협항해 시작부터 줄곧 배위를 맴돌았다.이들의 주식은 연어.강어귀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는 배를 채운다.또 갈매기의 일종인 키티웨이크는 위티어항 가까운 절벽에 수천마리가 빽빽이 둥지를 틀고 있어 또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2백여종의 갖가지 새들이 하늘에서 제각기 펼치는 날개짓과 울음소리를 갑판에 누워 감상하는 것도 해협항해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최초로 원폭 만든곳… 첨단무기의 메카(로스 알라모스에 가다:상)

    ◎미국의 핵무기 생산기지/반세기의 영광과 좌절/연구직원 1만명… 연10억불 투입/최근 군비감축으로 핵실험등 중단/「첨단기술 산업기지」로 변신 서둘러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사회의 주요관심사가 되고 있는 지금 미국은 최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제조지였으며 지난 반세기동안 줄곧 미국의 유일한 핵무기생산기지인 뉴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를 외국특파원들에게 공개했다.공개라고 해야 극히 제한된 것이긴 했지만 미국에 나와 있는 외국특파원들에게 4일간 핵시설을 공개한 「뉴 멕시코 프로그램」에는 로스 알라모스 외에도 앨버커키의 국립국방연구소인 샌디아연구소,미공군의 레이저및 특수위성연구 기구인 필립연구소,화이트 샌드소재 미사일발사실험장등이 포함돼 있었다.이들지역은 미국의 최첨단무기들을 연구개발하고 생산하며 실험하는 지극히 민감한 지역들로 80년대까지만 해도 외부의 접근이 불가능했었다.로스 알라모스 방문기를 3회에걸쳐 연재한다. 1943년 3월,38세의 젊은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일단의 과학자들이 뉴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에 도착했다.로스 알라모스는 황량하기 이를데 없는 사막으로 이루어진 뉴 멕시코주의 북부에 자리잡은 보기드문 산악지대다. 미국이 당시로서는 극비중의 극비작전이었던 원폭개발을 위한 비밀장소로 로스 알라모스를 택한것은 그곳이 미국에서는 오지중의 오지라는 지리적 고립성 때문이었다고 한다.여기서 오지라는 뜻은 사람의 접근이 어렵다기보다 사막이어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따라서 비밀유지가 용이하고 핵실험피해를 최소화할수 있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 일행은 이 메마르고 거친 산중턱에 임시로 세운 몇개의 바라크와 콘센트 생활을 하면서 「맨해턴 계획Y」란 인류 최초의 원폭제조연구를 시작했다.오펜하이머는 처음 원폭을 만들게 될 때까지는 로스 알라모스 인구가 약6백명선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1945년 7월16일 뉴 멕시코에서 실시된 원자폭탄 첫폭발실험에 성공했을때 이곳의 인구는 이미 5천여명에 이르러 있었고 2년여동안 투입된 정부예산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었던 7백50만 달러나 됐다. 이곳의 보안은 가위 「철통」이었다고 한다.한때는 보안요원수가 과학자들보다 많았고 외부로 발송되는 모든 우편물은 검색됐으며 장거리전화도 모두 도청됐다.이 타운을 일반인이 방문할수 있게된 것은 1957년에 이르러서였다. 미국은 45년 8월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폭을 성공적으로 투하한 이래 원폭이나 수소폭탄 할것없이 미국이 만든 모든 핵무기를 이곳에서 연구개발하고 생산했다.로스 알라모스는 그만큼 군사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지역이다.따라서 로스 알라모스는 미국의 숨겨진 도시였던 것이다. 로스 알라모스는 현재 인구1만9천명의 쾌적한 도시로 성장해있다.그중 핵물리학자를 포함한 연구소요원이 7천4백여명,연구소와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이 3천여명이다.건물이 2천여개에 이르고 93년의 경우만 해도 이곳에 투입된 연예산이 11억달러나 됐다. 로스 알라모스의 기적을 미국사람들은 「한시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과학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이타운은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로스 알라모스는 현대과학은 무엇이든 할수있음을 보여주었던 한시대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곳의 과학자들은 할일을 잃고 말았다.기자들이 로스 알라모스의 브래드버리 과학박물관에 처음 도착했을때 브리핑을 담당했던 데니스 저슨이라는 핵물리학자는 『우리는 더이상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으며 실험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이곳을 방문했었다.그는 정부예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연구활동을 하고있는 이곳 과학자들에게 대단히 정중하고 은근한 표현을 구사하긴 했으나 분명히 『나의 최우선 과제는 예산적자를 줄이는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세계가 이제 새로운 경쟁의 시대에 직면해 있으며 새로운 시대는 군사기술을 평화적인 사업에 전용할 준비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동안 정부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던 이곳 연구개발비의 상당부분이 앞으로는 민간부문투자로 대체돼야 할것이라고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했다.미국정부는 군비예산의 감축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그동안 운영해오던 국방관련산업의전환을 위해 향후 5년동안 2백억달러를 투입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냉전시대 군비경쟁이 절정을 이뤘던 85년(레이건 행정부때)에 비해 이미 29%가 줄어든 상태다.그런데 클린턴의 민주당정부는 97년까지 17%를 추가로 감축할 계획이다.군비예산을 줄이려면 연구개발비부터 손을 대는게 예산의 생리다. 이런 구조속에서 로스 알라모스를 포함한 뉴 멕시코,캘리포니아주 일대의 각종 국립군과학연구소의 존립이 어려워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로스 알라모스는 40년대에 「한시대의 시작」을 고했지만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선 「한시대의 종언」과 함께 또다른 새시대의 개막을 알려 주고있다.
  • 게릴라 교도소 습격/죄수 천명 탈옥시켜/알제리

    【카이로 연합】 알제리에서 가장 삼엄한 교도소에서 최근 집단 탈옥사건이 발생,정부의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고 카이로에서 입수된 보도들이 전했다. 21일 이집트판 영자주간 미들 이스트 타임스지에 따르면 지난10일 1백여 게릴라들이 동부 바트나지역의 람베세 교도소를 습격,수감중인 복역수 약1천명을 무더기탈옥시켰다. 정부 당국은 즉각 광범위한 수색작전을 전개,79명의 탈옥수를 체포했으며 24명을 사살했다고 이 주간지는 밝혔다. 게릴라들은 교도소내 경비원들과 복역수들이 라마단 첫 식사를 기다리고있던 초저녁시간을 택해 공격을 개시,수감자 3천여명중 1천명을 인근 아우레사 산악지대로 도피시키는데 성공했다.
  • 제2의 「6·25」 이렇게 터진다/영지보도 「북남침 시나리오」

    ◎동부전선 기습… 시선 끈뒤 서울 공격/미사일·야포 동원 수도권 산업시설 파괴/경제 붕괴 직면… 장기전 치를 능력은 없어/방대한 군사력 지탱 어려워 핵보유에 집착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보유하려는 것은 그들의 경제력에 비춰 방대한 병력의 군대를 더이상 지탱할 수 없어 「최후의 억지력」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영국의 한 군사정보전문지가 밝혔다. 22일 발행된 제인스 인텔리전스 리뷰지 4월호는 세계 최대병력규모를 자랑하는 1백10만명의 북한인민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서울과 한국경제를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전을 치를 수는 없다』고 분석했다. 「북한­잠재적 시한폭탄」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는 북한이 러시아등 중요우방들을 모두 잃고 경제가 붕괴에 직면하자 최후의 억지력이 필요해졌다면서 그들의 정치적 불안정성에 비춰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몇편의 「전쟁시나리오」를 소개했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제럴드 시걸연구원은 북한이 8천여 야포와 로켓발사장치를 휴전선일대에 배치하고 있음을 지적,『병력을 휴전선 너머로 남진시키지 않고도 서울과 주변 산업및 거주지역을 크게 파손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그는 『한국이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도 북한은 러시아나 중국의 지원없이 서울의 방대한 지역과 한국경제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미버지니아주 국방전문분석법인인 스펙트럼 어소시에이츠의 케네스 브라워 소장은 한국이 「삽시간에」 압도당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북한이 전쟁초기에 신속히 행동함으로써 한미양국이 첨단기능의 육·해·공군력을 동원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지적했다.그의 시나리오는 서울 동부 산악지대에 대한 북한측 기습을 상정,상대방을 현혹시키면서 전투를 질질끌다 갑자기 서울도심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브라워씨는 『동부전선의 한국군 진지가 붕괴되면 북한군은 서울을 포위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한반도의 여타지역도 제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의 군사전문가 조셉 버뮤데즈2세도 『현재 북한이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두개 핵무기가 군사적으로 큰 가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그러나 『북한이 궁지에 몰릴수록 북한의 지도층이 더욱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며 전쟁의 발발가능성을 경고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시걸연구원은 서방측이 궁지에 몰린 북한정권과 군사적 대결위협을 무릅쓸 가치가 있느냐는 의문이 있으며 바로 이같은 의문이 서방측의 정책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는 서방 관계국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따라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특히 어렵다』고 말했다.
  • 북한/경제봉쇄 돌입땐 회복불능 대타격/국제제재 얼마나 버틸수있을까

    ◎GNP 7% 연14억∼15억불 손실/원유·식량비축 3개월분… 중국향배가 변수/외화80% 조총련 송금… 완벽한 차단 어려워 대화와 사찰을 통한 북한핵문제 해결노력이 벽에 부딪치면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이와 관련,북한이 만일 경제제재를 받게 되면 이를 감내할 수 있는 한계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아울러 이같은 경제제재가 과연 북한을 사찰수용 등 정상궤도로 복귀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미 버클리대의 피터 헤이즈교수는 최근 그의 논문에서 북한이 경제제재를 받게 될 경우 국민총생산(GNP)의 7∼8%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연간 14억∼15억달러에 상당하는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분석이 들어맞는다고 할 때 전면적인 경제제재가 취해질 경우 이미 바닥권에 이른 북한경제가 장기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여러가지 변수로 보아 완벽한 대북 경제봉쇄는 사실상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때문에 경제제재를 북한이 어느 정도 견뎌낼 것인지에 대해선 정부내 북한전문가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북한은 대외의존도가 11.9% 밖에 안될 정도의 폐쇄적 자급경제체제이기 때문에 경제제재가 별로 실효가 없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그러나 석유·코크스(역청탄)·식량·농수산물 등 필수 전략물자의 수입량이 전체 수입의 6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고 그나마 중국·일본·러시아 등에 편중되어 있어 이들 품목에 대한 통제가 완벽히 가해질 경우 심대한 타격이 예상된다.특히 석유공급이 차질을 빚을 경우 군사기동력의 약화는 물론 그렇지 않아도 에너지난으로 공장가동률이 40%를 밑도는 제조업이 치명타를 입어 북한경제의 악순환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관측이다.북한은 92년의 경우 외화부족으로 1백52만t 가량의 원유를 도입하는 데 그쳐 3∼4개월치인 1백32만t 가량 밖에 비축하지 못하고 있을 것으로 관계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국제적 경제제재가 구체화되면 중동지역에서 무기수출 대가로 얻어지는 원유는 해상봉쇄 등으로 막히게 된다.따라서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되는 중국산 원유공급의 중단여부가 제재의 성패의 관건이 된다. 북한이 해외에서 유치하는 자본의 80%가 조총련계 자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이 조총련의 대북 송금을 차단할 수 있느냐도 경제제재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변수이다. 북한은 매년 1백만t 이상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게다가 지난해는 평년작보다 15∼20%나 감수되는 흉작을 기록,식량금수 조치가 취해지면 어려운 상황을 맞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통일원이 추정하는 북한의 식량비축분은 1백20만t으로 1인당 6백g을 지급할 경우 3개월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산악지대인 북한에선 예전부터 식량부족 현상이 다반사였는 데다 북한당국의 철저한 외부정보 차단으로 주민들의 내핍능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얘기도 있다.최악의 경우 북한은 현재 일부 지역에서 시행하고 있는 하루 두끼먹기운동을 전역으로 확산시키며 오래 버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제재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차피 시행하기 까지는 몇달간의 시간이 소요된다.따라서그 이전에 북한이 유화자세로 돌아설 경우 경제제재는 대북 경고메시지로 그칠 가능성도 있다.
  • 스위스,「횡단금지」 왜 법제화 했나(현장 세계경제)

    ◎알프스 넘는 화물트럭 사라진다/매연 추방 환경보호… 「그린 알프스」 선언/통행료 수입 포기·주변국 보복도 감수 2천여년전 코끼리를 탄 딴나라의 위대한 장군에 의해 첫길이 열렸던 스위스의 알프스지만 이젠 힘이 제아무리 좋아도 외국트럭이면 스위스령 알프스를 넘기는 커녕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됐다. 매년 20여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 중요국사를 처리하는 스위스인들이 지난달 말 외국트럭의 알프스횡단 금지안을 통과시켰다.지난 90년 10만명이 서명,국민투표안건으로 상정돼 이번에 52%의 찬성률로 법제화에 성공한 외국트럭 통행금지안은 국제화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쇄국정책인양 느껴진다.사실 스위스 정부는 국제법에 어긋나는 이 통금안이 통과될 경우 당연히 가해질 주변국의 보복제재가 걱정돼 국민투표에 반대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었다. 그러나 스위스 사람들은 통행료수입및 교역증가 예상치보다는 화물트럭의 통행증가가 야기한 알프스의 오염도에 더 마음이 씌어 이웃나라들과의 관계악화을 무릅쓰고 통금안에 찬성표를 던졌다.해외교역량 세계제일(국민1인당)이란 기록과 전통에 대해 많은 스위스인들이 녹색반기를 든 셈이다. 그러나 별다른 부존자원 없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민소득을 올릴 만큼 꽤바른 스위스인들이 무턱대고 「그린 알프스」를 외친 것은 아니다. 북부유럽과 남부유럽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인 알프스는 동서 1천2백㎞로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 7개국에 걸쳐있으나 알프스 통과 국경이동 교통량의 80%가 스위스로 몰려든다.해안선이 전무한 내륙국가로서 수출입 물동량이 알프스를 횡단해야 하는 스위스는 자국령 알프스를 경유하는 외국화물로부터 챙기는 통행료수입에 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그후 알프스횡단의 교통편으로서 철도아닌 일반도로의 비중이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수백개의 철도터널을 뚫어 남부 알프스 산악지대와 북부 평원지역을 연결시킨 스위스는 총연장 5천㎞의 전 노선을 전철화해 매연에 의한 공기·환경오염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러나 일반도로가 속속 개설되자 알프스의 오염문제가 심각해졌는데 특히 대형 화물트럭이 내뿜는 매연은 환경주의자들의 분노의 표적이 됐다.화물트럭의 스위스알프스 환경오염과 관련돼 집중 거론되는 도로가 장크트 고타르트 고속도로이다. 스위스알프스의 최초이자 최단도로로 13세기부터 길이 닦여진 고타르트 고개길은 이곳에 1882년 첫 철도터널이 개설되면서 철도교통의 막을 열었다.그리고 백년뒤쯤인 지난80년 철도터널 바로 옆에 일반도로용 쌍둥이터널이 뚫렸는데 길이가 16.3㎞로 철도아닌 도로용 터널로서는 세계최장을 자랑하며 꼬불꼬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터널은 80년 개통당시 80대에 불과했던 1일 터널통행 화물트럭 수가 현재 2천5백대로 불어났으며 5년뒤엔 6천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이 트럭들이 뿜어댈 매연을 우려한 결과로 만들어진 스위스의 외국트럭 통금법은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한 합리성과 함께 과감한 결단력의 양면을 지닌다. 우선 10년간 점진적 단계를 거쳐 외국트럭의 통금을 완료하고 트럭대신 잘 구비된 스위스 철도를 이용,화물을 운송해달라는 주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통금법은 「28t이하 외국트럭의알프스횡단을 2004년까지 무제한 허용」하기로 EU(유럽연합)와 맺었던 쌍무조약을 2년만에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것이다.북부유럽의 수많은 화물트럭들이 4백㎞를 더돌아 스위스령이 아닌 프랑스및 오스트리아 도로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야 한다.EU및 주변국들의 보복이 눈에 선하다. 이웃 오스트리아가 EU 가입조건으로 알프스도로의 외국트럭통행 허용권을 곧 포기하기로 서약한 것과는 아주 대조된다.
  • 백제인의 도교사상(백제를 다시본다:6)

    ◎금동향로에 「불로장생의 신선관」 재현/풍요로운 경제생활… 느긋한 심성반영/궁남지섬을 신선 사는 방장산에 비유/“불종율령” 무령왕릉 지석은 웅진시대 도교신앙 입증하는 귀중자료 백제인의 성정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지형적,지리적 입지조건이다.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산악지대를 터전으로 하여 자라난 나라가 아니었다.삼국 중 백제는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었고 또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은 중국을 향해 거의 무방비상태로 개방되어 있었다.백제가 농업생산력이나 대외교역면에서 선두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이것은 백제 역사의 전개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짐승과 화초 길러 백제인의 느긋한 심성은 결국 여유있는 경제생활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시대 유적이나 미술품을 대하면서 우리들이 한결같이 감명을 받는 것은 그들이 진정 풍류와 멋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사비도성의 진산인 부소산성 동쪽 산봉우리에는 영일루가 있었는데 왕과 신하들이 멀리 계룡산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실로 이곳에서는 계룡산 연천봉과 남쪽으로 가림산성(성흥산성),구룡평야 등 훌륭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또한 백제 지배층은 부소산성 바로 밑을 흐르는 금강을 마치 하나의 내해,호수쯤으로 생각하여 이곳에서 북과 거문고를 타며 연유를 즐겼다. 백제인의 풍류와 멋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궁원문화이다.「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왕궁에 연못을 파서 즐긴 것은 한성시대인 진사왕7년(391년)의 일이었다.이때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서 인공산을 만들어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고 한다.그뒤 웅진시대인 동성왕22년(500년)봄에도 궁성 동쪽에 높이가 다섯 발이나 되는 임류각을 세우고 못을 파서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현재 부여에 남아 있는 궁남지는 사비시대의 전성기였던 무왕35년(634년)3월에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만든 것이었다.기록에 의하면 못언덕에는 사방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한다.뒤에 못가에 망해루를 지어 궁중 연회장소로 이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백제에 도교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증언해 준다.고대 중국의 도가사상에서는 특히 불로장생설이 유행하여 동해(우리의 서해)의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선이 사는 세개의 산이 바로 방장산과 봉래산,그리고 영주산이다.그러니까 궁남지에 만든 인공섬을 방장선산으로 여겼다는 것은 도교사상의 영향임에 틀림없다.사실 도교사상은 비교적 일찍부터 백제에 들어온 듯하다. 한성시대의 근소고왕은 남쪽으로는 마한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황해도방면에서 고구려군대를 크게 무찌른 일세의 정복군주였다.근초고왕 24년(369년)장군 막고해는 승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마침 수곡성(황해도 신계)북쪽에 이르렀을 때 태자 근구수에게 더 이상의 추격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막고해는 태자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지금 얻은 것이 많은데 어찌 다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이로 미루어 볼때 당시 백제의 지배층 사이에서는 노자의 「도덕경」이 읽혀졌던 것 같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은 웅진시대 백제의 도교사상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즉 무령왕비의 지석 끝에 음각된 매지문에는 「불종율령」(율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란 문구가 있는데 이는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때 마지막 대목에 으레 따라붙은 「급급여율령」이란 구절을 백제식으로 고친 것으로 짐작된다.하긴 도교 용어가 보인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도교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일지도 모른다.학계 일각에서는 이 매지권의 사상적 근거를 유교사상에서 찾고 있다. ○도교제도를 제정 그렇지만 지석과 함께 출토된 두개의 구리거울,즉 의자손수대경과 방격규구신수경의 명문에 「상유선인 불지로」(위에 선인이 있어 늙음을 모른다는 뜻)라는 문구가 있는 점을 아울러 고려할때 역시 「불종율령」이란 문구는 6세기초 도교신앙의 실태를 엿볼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본래 도교는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나온 종교이다.거기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신선사상,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노장의 은둔사상등 갖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다.그것이 남북조시대인 5세기경에 불교의 자극을 받아 경전과 사원(도관)이 만들어지고 전문 사제직으로 도사제도가 제정되면서 정식 도교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백제에 도교의 요소는 침투해 들어왔다고 생각된다.장군 막고해가 「도덕경」을 인용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불로장생과 현세에서의 부귀와 향락을 추구하는 도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널리 유포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때였으므로 도교는 불교와는 다른 측면에서 백성들에게 안심립명의 위안을 주는 심리적 효과가 컸을 터이다. 도교사상은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를 즐긴 백제인의 기질에 잘 들어맞는 점이 있었다.더욱이 지배층이나 일반국민은 가릴것 없이 장기간의 전란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던 만큼 장생불사하면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도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 유토피아사상에 다름 아니었다.사비시대에 불교와 더불어 도교가 크게 융성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그리하여 그것은 의장이나 제작 기법으로 볼때 도교적 요소가 짙은 궁남지와 같은 정원문화를 창출하게 되고 또한 독자적인 조형미술을 꽃피우게 했다. ○조형미술 꽃피워 오래 전에 부여군 규암에서 발견된 이른바 산경무늬 벽돌만 해도 품자형의 세 봉우리가 중첩하고 산 밑에는 암석이 돌기,산 위에는 수목이 총립,한 가운데는 집 한채,오른쪽에는 도사로 짐작되는 한 사람이 새겨져 있다.이는 분명히 삼신산과 도관,도사를 표현한 것으로 그자체 유현한 도교적 세계관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지난해 연말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사비시대 백제의 도교신앙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이 향로의 몸체를 덮고 있는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때기에 앉아있거나 날아가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바로 도교의 삼신산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향로를 명명함에 있어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을 부가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실로 이 금동제향로는 사비시대 도교의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적 표현주의가 한껏 발휘된 최고의 명품이 아닐수 없다. ◎6세기 고구려에 처음 들어와/삼국유사에 기록… 한때 유교·불교보다 우위 도교의 본바탕은 신선사상이다.거기에 노장사상과 유교·불교와 함께 민속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수용하여 종교로 발전한다. 신선사상은 기원전 3세기쯤 중국에서 생겨났다.산악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신선사상은 결국 도가사상으로 태어난다.이 도가사상은 도교가 종교형태를 띠고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래서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조절한 주요 사상이기는 하나 본래부터 도교가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도교는 5세기 쯤에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비로소 종교형태를 갖춘다.도교가 추구하는 궁국적인 목적은 불로장생이다.특히 그 원류가 신선사상에 연결되어 건강관리를 중시하게 되었다.결국은 질병치료에서 불로장생에 이르는 도교의학을 성립하는데,그 극치가 이른바 김단이다.특히 금단에서 이끌어낸 물리화학적 방술의 단학을 도법 수련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온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AD624년(영류왕7년)에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파견,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케 함으로써 영류왕이 나라사람들과 같이 들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그 뒤에 AD640년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로부터 도사 8인과 「도덕경」을 다시 구해와 도교를 유교와 불교보다 우위의 종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 가운데 백제에 대한 도교유입기록은 거의 없다.백제의 경우 도교적 정황이 약간은 풍겨왔다.그런 가운데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 도교의 실상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는 주요자료로 부상했다. 어떻든 도교는 삼국과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평정과 건강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 공단없는 섬진강 “그나마 깨끗”/5대강중 유일하게 오염 안된 강

    ◎상류 80㎞까지는 1급수 유지/임실·남원 폐수 유입… 일시 악화/하류 보성강 합류하며 다시 1급수로… 보전 시급 섬진강에서는 은어가 낚일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우리나라 5대강중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는 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이렇듯 맑고 깨끗한 섬진강이지만 그러나 얼마전부터 늘어가는 생활하수와 축산폐수,그리고 과수원등에서 흘러드는 농약과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등으로 오염의 위기를 맞고있다. 섬진강이 낙동강이나 한강과는 달리 그나마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고 있는것은 환경당국의 철저하고 완벽한 관리감독보다는 강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끼고돌아 대도시와 공장,평야지대등 오염원을 접하지 않기 때문인듯 하다. ○대부분 산악지대 소백산맥의 한 자락인 전북 진안군 봉황산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지리산의 협곡을 따라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까지 2백50㎞를 돌고 또 돌아 광양만 망덕포구로 흐른다.전남·북과 경남등 3개도 20여개 시·군 1백여만명에게 연간 2천6백만t의 식수와 9백80여㎦의 옥토에 8억3천4백만t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젖줄이다. 발원지로부터 80㎞까지의 섬진강댐 상류는 어느 장소를 측정해봐도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가 1급수기준치인 1.0㎛이하로 나타나 「손으로 떠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그러나 상류의 이 물은 섬진강댐에서 30㎞쯤 더 내려가 임실·남원시·군에서 나오는 생활오수와 폐수를 만나면서 더렵혀지기 시작한다.페놀이나 벤젠등 유독성물질을 내뱉는 변변한 공장 하나 없지만 일반가정과 식당·숙박업소등에서 무심코 버린 생활하수와 곳곳에 산재한 축산폐수,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로 물이 탁해지고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염의 주범은 역시 「생활하수」와 「축산폐수」. 이곳의 수질은 BOD가 2.6㎛으로 올라가 3급수(BOD 3㎛이하)로 뚝 떨어진다.섬진강 전수계에서 오염이 가장 심한 곳이다. ○축산폐수 2천t 남원시에서 거슬러 16㎞ 상류에 위치한 폭 10여m의 오수천에는 쓰다버린 냉장고를 비롯해 폐타이어,신발짝등이 여기저기 뒹굴면서 흙탕물과 뒤범벅이 돼 있다.심지어는 병원에서 쓰는 링거주사병과 농약병,기름통이 내팽개쳐져 한치 물속을 들여다 볼수 없을 정도이다. 남원시의 생활하수가 정수 처리되지 않고 흘러드는 곳에서는 BOD가 공업용수로도 부적합한 9㎛을 웃돌고 있으며 요즘처럼 갈수기에서는 무려 20㎛을 넘어 코를 막지 않고는 지나기가 힘든 형편이다.더욱이 임실·남원의 영세한 축산농가에서 자체적인 분뇨정화시설을 갖추지 않고 기르는 20여만마리에 달하는 소와 돼지의 축산폐수가 하루 2천여t씩의 축산폐수를 그대로 흘려 보내 오염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오는95년 남원하수종말처리장이 완공되면 이곳의 오염을 어느정도 줄일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원·임실의 생활하수와 축산폐수등 각종 이물질로 오염된 섬진강은 보성강과 합류하는 압록에 이르러서 한숨을 돌린다.여수·순천지역과 여천공단에 하루 33만t의 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용량 4억5천만t의 주암댐이 초당 2백t의 물을 방류,강의 자체정화기능을 상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주암댐에서 방류되는 물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압록에서의 BOD가 0.9㎛으로 나타나 이를 반증하고 있다. ○하수처리장 건설 이곳부터 전남 구례·광양군과 경남 하동을 사이에 두고 구불구불 흐르는 섬진강 물은 푸르름을 자랑한다. 섬진강 전수계를 통틀어 하루 발생하는 생활 오·폐수는 10여만t으로 섬진강 전체 오염부하량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지방환경청 김덕우계획과장(45)은 『95년말 하루 5만t처리용량의 남원하수종말처리장이 완공되면 생활하수를 어느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섬진강은 지금의 수질을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위해 지도·단속을 강화하고 주민계도를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 약수서 신종전염성균 검출/서울근교 10여곳

    ◎고열 유발 여시니아균 나와 최근 낙동강 식수오염파동으로 생수·약수를 찾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 근교 약수터의 약수에서 고열·복통,심지어 신장질환 유발 전염성균으로 일본·러시아등의 산악지대에서만 발견됐던 「가결핵성 여시니아균」이 다량 검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인제의대 부설 상계 백병원 임상병리학과장 백인기교수(46) 연구팀이 지난해 이 병원을 찾은 어린이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인근 약수터 물을 먹고 고열등의 증세를 일으킨 사실을 중시,지난해 5월부터 8개월여동안 북한·도봉·수락·불암산등의 저지대 약수터 10여군데의 약수를 표본 추출,성분검사를 한 결과 밝혀졌다. 백교수는 『서울 도봉구와 노원구만 해도 이 균에 감염된 환자가 수백명에 이르며 표본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대부분의 다른 약수터에도 이 균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아무런 대책없이 약수를 먹을 경우 올봄에도 이로 인한 환자가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백교수는 『특히 어린이들은 약수를 먹어서는안되며 부득이 먹을 경우에는반드시 끓여 먹여야 이 균에 감염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마약과의 전쟁” 아르헨정부 골치(세계의 사회면)

    ◎볼리비아서 밀반입… 가공후 밀수출/적발 매년 급증… 국경·항만 단속 강화 콜롬비아에 이어 아르헨티나가 중남미 마약거래의 거점국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아르헨티나가 이처럼 「각광」을 받게된 것은 무엇보다 가공과 정제비용이 적게 먹히기 때문이다.또 항구가 많아 가공후 미국이나 유럽쪽으로 밀반출하기가 용이한 점도 아르헨티나가 거점국가화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최근들어 국경과 항만에 대한 감시를 강화,마약밀매루트 차단에 나서고 있으나 워낙 거래수법이 교묘한 탓에 단속에 애를 먹고 있다. ○정제비용 적게 들어 현재 아르헨티나로 가장 많은 코카인을 밀반입시키고 있는 나라는 볼리비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아르헨티나와 장장 1천4백50㎞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까닭에 감시만 잘 피하면 육로를 이용한 원료의 밀반입은 언제라도 가능한 형편이다. 반입된 코카인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아르헨티나의 에테르와 아세톤에 의해 분말로 정제된 뒤 미국·캐나다 등 주소비국으로 수출된다.이때남대서양을 따라 잘 발달된 아르헨티나 항구는 다시 좋은 반출통로가 된다. ○20개 비밀루트 파악 밀반입 지역은 대부분 밀림과 산악지대에 흩어져 있어 감시의 눈길이 거의 닿지 않고있다. 아르헨티나의 마약당국은 현재 볼리비아 전체 코카인 생산량의 20%가 아르헨티나로 흘러들어와 가공된 뒤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금까지 마약당국이 파악한 비밀루트는 20여곳. 반입수법도 여간 다양하지가 않다. 그가운데 국경지대에서 주로 관광객으로 위장,물건을 팔고 사는 척하며 밀거래를 하는게 가장 고전적인 수법에 속한다.미성년자나 청소년들도 다수 동원되고 있다는게 수사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밀거래장소는 주로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 국경지역 상점이나 국경을 잇는 다리가 이용되고 있다.평일 찾아오는 관광객이 고작 3천여명에 불과한 이 지역에 주말이면 주로 위장관광객들이 대부분인 1만여명의 인파가 몰려드는통에 검색이고 뭐고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 ○압수량 1년새 4배 당국의 한 통계는 지난 91년 아르헨티나 마약당국이 압수한 코카인은 1백38㎏이었으나 1년뒤인 92년엔 무려 3배가 늘어난 3백38㎏이 당국에 적발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올들어서는 그 양이 더욱 급증,상반기에만 벌써 6백㎏을 넘어섰다고 한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관측통들은 이렇게 나가다가는 아르헨티나도 멀지않아 「마약과의 전쟁」을 한판 단단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 중국·일본(세계의 우주로켓발사기지:4)

    ◎전용발사장 중 3곳·일 2곳 보유/70년 「장왕1호」 첫 성공… 5번째 자체발사국/중국/소형 H­1로켓 주류… 3단분리형까지 개발/일본 아시아에 있어서 두 우주개발맹주는 중국과 일본을 꼽을 수 있다.중국은 자국전용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3개 발사장을,일본 또한 2개의 발사장을 갖추고 있다.뿐만아니라 우주진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중국과 일본의 우주발사무대를 가본다. ▷중국◁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항공기공업을 거쳐 우주사업을 시작하는 예를 깨고 로켓개발을 먼저했다.중국의 로켓개발은 미 칼텍의 본카만교수밑에서 훈련을 받은 쳰 슈 에센등이 중심이었다.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 활동한 이들은 55년 중국의 로켓개발에 기여했다.초기 중국의 로켓개발은 소련의 SS­3 유도탄을 개조,설계한 것으로 일본보다 두달 늦은 1970년4월14일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인공위성을 자체발사한 다섯번째 국가였다.사용된 발사체는 「장정1호」라는 3단액체추진로켓이며 쏘아올린 인공위성은 1백73㎏에 고도 4백39∼2천3백84㎞의타원지구궤도이고 1백14분에 한번씩 지구를 돈다. ○84년 통신위성 첫 발사 중국은 LM(Long March·대장정)발사체로 우주진출의 꿈을 모두 실현시키고 있다.이 LM발사체를 위해 3군데의 발사장소를 가지고 있다.시창(서창)우주발사센터(XSLC)·즈추안우주발사센터(JSLC)·타이위안(태원)우주발사센터(TSLC)등. 이 가운데 XSLC는 1984년 중국 최초의 통신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이 XSLC는 사천성의 시창시의 북서쪽 64㎞에 위치한 산악지대다.이 발사장은 해발 1,800m에 있다.동경 1백2도,북위 28.2도. XSLC의 기후는 아열대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이 섭씨 16도이고 여름에 가장 더울 때의 평균기온은 섭씨 25도를 웃돈다.겨울에 가장 추울 때의 평균기온이 섭씨 2도가량 된다.그리고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짧고 건조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이상적인 기상조건을 갖춘 곳이다.우기는 6월에서 9월까지 계속된다. XSLC는 교통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먼저 시창교외 북쪽에 있는 시창공항은 보잉 747여객기 등이 자유자재로 이·착륙할 수 있다.또한 철도와 고속도로망이 이곳을 통과하도록 설계돼 있어 덕분에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특히 철도와 고속도로분지선은 발사장소로 곧장 인도되도록 설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철도의 최대경사각은 3도이하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속도로 또한 최대경사각 5·6도이하로 시공하는 등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다. XSLC는 발사체와 탑재물의 검사와 점검을 실시하는 기술센터를 비롯해 발사체검사빌딩·탑재물준비빌딩·위험과정검사빌딩 등으로 구성돼 있다. LM발사체는 기차편으로 발사장소에 운반된다.발사체는 발사장소인 약 2.2㎞ 북쪽으로 분해된 상태로 트럭으로 운반되기 전에 점검을 위해 발사체점검 격납고안에서 수평상태로 약 5주정도 머문다. 탑재물준비빌딩에서는 우주선의 완성과 시험조작이 진행된다.필요할 경우 상공에서의 실험도 실시한다.이 건물은 최소한 2대의 우주선을 조립할 수 있을만큼 넓고 검사홀의 청정도는 10만이내의 청결도를 유지한다.우주선조립실은 이보다 열배나 깨끗한 청정도 1만이하다. 위험과정검사빌딩에서는 우주선추진연료 및 압축고체연료 제작,전력추진장치의 설치,탑재물의 스핀균형등을 잡는 일이 이루어진다. XSLC에서 우주행 로켓등이 발사되는 동안 발사장주변 6㎦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완전히 집을 비우고 발사장 밖으로 대피해 있어야 한다.주민들이 마음놓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시각은 발사완료 10분뒤.주민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고 있다. 또한 JSLC는 원래 서구 자유진영에 솬 청 쥬로 알려진 중국의 유명한 발사장이다.대부분의 중국산 위성이 그곳에서 발사되었다. JSLC는 북경에서 서쪽으로 약 1천6백㎞에 위치하고 있다.고비사막의 가장자리인 만리장성의 변두리에 있다.위치는 동경 1백도,북위 40.7도. 해발 약 1,000m를 기록하는 이곳은 궤도진입을 시도할 때 몽고와 소련의 영공침범을 피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발사하고 있다.발사폭은 56.9도에서 69.9도로 매우 좁은 편이다.JSLC에서 출발하는 우주행 화물들은 자원탐사위성과 정찰위성이 대부분이다. 이곳의 교통사정 역시 완벽하다.발사장의 남쪽에 있는 공항은 철도로 연결돼 있어 기술센터와 발사장 교통이 원활한 편이다. 그리고 TSLC는 북경 남서쪽 5백㎞지점에 위치한다.산시성의 한복판에 있는 이 발사장은 바위투성이 위에 세워져 있다.이 발사장에서는 발사체를 우주 남쪽으로 출가시켜 극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데 이용된다.1988년9월 중국 최초의 기상위성을 우주로 파견할 때 이 발사장을 이용하였다. ○다네가시마 취대규모 ▷일본◁ 최대인공위성발사장은 다네가시마(종자도) 우주센터로 섬인 다네가시마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다네가시마는 인구 4만3천명,섬길이 약 58㎞인 작은 섬으로 일본열도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에서도 남쪽으로 약 80㎞ 더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위치는 동경 1백30도58분,북위 30도24분. 발사장에는 소형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와 H­1로켓과 H­2로켓을 발사하는 전용발사대가 있다. 이 센터안에는 마쓰다 추적및 자료수신소,노기 우쓰가오카 레이다기지,그리고 3개의 광학추적 스테이션이 있다. 이 센터의 넓이는 8.64㎦.이곳에는 고체와 액체로켓엔진의 연소실험을 할 수 있는시설도 있다.이 센터는 로켓을 조립하고 발사하며 제어와 추적을 하는 일이 주임무다.발사방향은 동쪽. 단점이라면 인근에 어장이 있다는 것.로켓발사 때마다 소음과 어장피해우려로 인해 어부들이 항의, 마찰을 빚고 있다.따라서 어부들의 강경한 항의 때문에 매년 1월15일부터 2월말까지,그리고 8월1일부터 9월15일까지로 발사기간이 극히 제한돼 있다. 또한 가고시마(녹예도)우주공간관측소(KSC)가 있다.위치는 동경 1백31도04분,북위 31도15분.다네가시마우주센터의 4분의 1에도 못미치는 2㎦로 간단한 발사장이다. 일본의 우주과학연구기관(ISAS)이 관리,운영하고 있다.1989년2월 현재 16차례의 인공위성용 로켓이 발사되었다.이 센터는 소형로켓과 바루소로켓이 발사의 주류를 이룬다. 한편 오사카지역에는 H­1발사를 돕기 위한 여러가지 시설들이 있다.여기에는 2개의 연료주입관과 연료공급탑이 있다.로켓을 발사하기 위한 발사대는 길이 6.4m,너비 12m이며 무게는 17t에 이른다.2개의 마스트에서 발사직전까지 여러개의 관을 통해 발사체에 주입한다.1번마스트의 크기는 높이 35m,너비 3.5m이고,2번마스트는 높이 49m,너비 4m다.연료공급탑은 발사체의 조립과 점검,발사준비에 사용되며 모든 발사준비가 완료되면 1백m 정도의 레일위를 이동하게 된다.연료공급탑은 높이 67m,너비 26m,무게 2백80t이다.이 센터는 추진체저장실과 공급실,지상발전소 수력시설등 비행보조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로켓조립공장에서는 H­1로켓의 1,2단계 엔진을 조립하고 점검하며 발사대에 설치하기 전에 조정하는 일을 한다.고체모터 테스트빌딩에서는 보조부스터와 3단계 고체로켓의 점검과 점화,조립등을 실시한다.스핀 테스트빌딩에서는 H­1로켓의 3단계 모터와 위성체가 조립되고 점검되며 분리장치가 제대로 결합되었나를 살핀다. 일본의 우주개발역사는 195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이해 도쿄대 히데오 이토가와교수가 대기중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연필로켓」제작팀을 구성한 것이 그 효시다.그러나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이토가와교수의 로켓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인공위성을 통해 중계방송한 미국의 통신위성이 계기가 되었다.일본 과학기술청은 부랴부랴 우주개발에 참여하기 위해 국립우주개발센터를 발족시켰다.이 센터는 1969년 NASDA로 명칭을 바꾸었다.그리고 같은 해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와 델타발사체의 기술이전과 N자형 발사체의 개발을 내용으로 한 협의서를 체결했다.1977년 대형로켓연구계획이 수립돼 H형로켓개발이 시작되었다.H형시리즈는 1986년이후 줄곧 성공을 거두었다.그해 8월13일 2단 로켓발사를 수행했고 8월27일 3단 로켓발사를 끝냈다.3단 H­1로켓은 5백50㎏의 무게를 정지궤도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1992년까지 모두 9대의 H­1로켓이 발사되었다.일본은 1990년대의 주력사업으로 H­2로켓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는 NASDA이외에 일본우주개발연구소(ISAS)등 2개의 기관에서 우주산업에 몰두하고 있다.NASDA가 통신위성 등 응용부분의 우주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반면에 ISAS는 천체관측용 위성등 연구용 인공위성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 중­인,국경 감시기구 설립(지구촌단신)

    【뉴델리 로이터 연합】 인도와 중국은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양국 국경지역을 공동으로 감시하기 위해 양국의 외교관과 군사전문가로 구성된 공동감시기구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인도의 PTI 통신이 2일 보도했다.
  • 전 전대통령 대 국민 발표 전문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새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계신 이때,제가 새삼 재임중의 일에 관해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게 된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 일기가 불순하여 농사마저 어려워져서 농민 뿐만아니라 많은 국민의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터에,그동안 정부가 두번이나 바뀐 6∼7년전의 일이 또 다시 시비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대해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평화의 댐 건설은 제가 현직에 있을때 대통령으로서 정책판단을 하고 결정했던 일입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난 수년간 국회의 본회의와 관련 상임위원회,특히 1988∼89년의 국회특별위원회 등에서 되풀이 다루어졌고 더러는 일부 정당차원에서의 조사도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평화의 댐 축조에 관계했던 공무원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고있으며,저 자신도 1989년 12월의 국회증언에서 말슴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정치권과 언론등에 의해 다시 평화의 댐에 관한 의혹들이 잇따라 제기되었고,저 스스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결과 많은 사실들이 왜곡인식되고 있으며,이것이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현상을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른척 할 수 만은 없고,또 그것이 저와 관계된 사안인 만큼,이 기회에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하게 된 경위와 배경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역사를 돌아볼때,조선왕조 선조임금때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고,율곡 이이선생이 10만양병을 제창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비록 국고가 다소 축이 나고 민생이 어려워졌을는지는 몰라도 왜적의 침입을 받아 수년간 전국토와 백성이 유린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파적 입장때문에 『침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잘못 보고한 통신부사의 말을 따른 결과 엄청난 국난을 자초한 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10만의 군사를 길러 대비했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침략을 당했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영세중립국도 군대는 갖고 있고,수 백년간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나라들도 만일의 외침 가능성에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53년 휴전이래 북한의 전면남침이 없었다고 해서 40년동안 매년 국가예산의 3분의1을 방위비에 투입하여,북한의 전면전도발에 대비하도록 한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판단이 단순히 「세금의 낭비」를 가져왔다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한나절 싸움에 이기기 위해 1천일에 걸쳐 군사를 기른다』(양병천일 용어일일)고 했는데,9백99일동안은 전투가 없었다고 해서 공연한 정성과 시간을 투입했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국방문제는 본질상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이 금강산주변의 산악지대에 길을 닦고 도수터널 공사를 하는 등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국내외 관계기관으로부터 처음 입수한 것은 1986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어 같은해 4월에는 북한의 방송이 금강산 발전소계획을 확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뒤 저들이 댐 공사의 착수를 공식 발표한 10월까지 수개월동안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면밀히 주시,분석한 결과 금강산댐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드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첫째 그들이 전력과 산업용수 확보를 위해 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화력발전소를 만들거나 다른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전력생산단위가 3∼4배 높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댐이 완공되면 그들 주장대로 산업용수 확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댐 건설로 인해 금강군등의 농경지가 수몰되어 22만t 정도의 미곡감산이 예상되는 바,이것은 채산성이 안맞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경제성도 채산성도 없는 댐을 만들기 위해 그 험준한 지역에 인민무력부 주도 아래 수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해서 난공사를 강행하는 뜻은 분명히 군사적 목적 때문이며,그것은 우리에게 곧 수공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10만 병력의 상호감축을 제의했는데,이것도 감축된 병력을 댐공사에 투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으며,실제 그들은 5만명을 초기공사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가 하는 사실과,또 그들이 우리에게 기상천외 하고 악랄한 도발과 위협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 해 왔는가 하는 점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일입니다. 6·25는 물론 1·21사태,남침용땅굴,아웅산 암살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 등 전쟁광이나 할 수 있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바로 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전과가 있는 북한이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인다면,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 따져보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위에 열거한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기는 커녕,모두가 우리의 자작극이라고 덮어 씌워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서둘러 착공한 금강산댐이 인위적으로 폭파되거나 사고로 무너질 경우 한강수계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그들의 선의를 믿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설혹 「수공의도가 전혀 없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1백% 확실한 것이 아니고,다만 1%의 의심이라도 남는다면,그리고 그 1%가 우리의 생존권에 위협이 된다면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대응책을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는 북한공산집단이 방송등 그들의 선전매체를 통해 『서울올림픽을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되풀이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고위당국자들이 「금강산댐을 만들어서 비상시에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시내에서 물에 잠기지 않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다」「남조선 것들이 올림픽한다고 우쭐대지만 금강산댐만 만들어 놓는 날에는 서울이 물바다가 될것」이라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귀순한 북한관리들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10여일 전에 귀순했다는 북한군 장교도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이 인민무력부에 대해 인민군의 전투 준비완성에 큰 몫을 할 금강산댐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귀순한 것은 제가 이미 퇴임하고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권안보를 위해 금강산댐의 수공가능성을 조작했다」고 비난 받는 저를 변명해주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에 와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여러 이점들을 지난 몇년간 헛되이 흘려 보냈다는 반성이 있지만,어쨌든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선진국 도약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울올림픽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 우리의 시대적 과제요 국민적 합의였습니다.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1986년에서 올림픽 때까지의 그 엄청났던 민족적 열의와 고조된분위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그라져 버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그때 우리는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연달아 반쪽 올림픽으로 치른 국제올림픽 관계자들도 혹시나 서울올림픽마저 북한의 방해때문에 실패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불안해 했습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가 붕괴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북한의 호전적이고 경직된 자세는 변함이 없지만,1986∼87년 당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이라는 찬사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던 우리와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열세에 몰린 나머지 극도의 초조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운이 뻗어 오르던 그 소중한 시기에,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침략기도를 사전에 봉쇄하지 못해서 전쟁이 일어날까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안보를 확고히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최악의 상황,있을 수 있는 모든 위협의 가능성까지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부가금강산댐에 관해 처음 발표할때 2백억t이라고 한 것은 정보입수 초기에 댐건설 현장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지형자료등을 토대로 계측한 그 지역의 용적의 최대치라고 이해했으며,나중에 외국전문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와도 일치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북한이 겉으로 내세우는 건설목적과 규모야 어쨌든 일방적 댐건설이 공유하천이용에 관한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일인 만큼 정부로서는 공사를 중단하라고 여러차례 촉구하였습니다. 금강산댐이 그들 주장대로 전력과 산업용수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우리 쪽에서 전력을 공급하는등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는 대안도 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우방 여러나라는 물론 국제연합과 세계 대댐 학회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일방적이고 무모한 댐건설을 중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제의를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하였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을 각오하고 금강산댐 공사현장을 폭격할수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피하게 정부는 대응댐의 축조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측이 공사에 관한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있어서 그 시점에서는 댐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등을 모두 추정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따라서 우리측도 대응댐에 관해 실무자사이에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응댐 공사를 2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자는 데는 쉽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1단계로는 우선 북한이 3억t 정도 가물막이 공사를 끝냈을때의 위력에 대비하는 규모로 댐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984년 홍수때의 수량 9.4억t과 북한의 가물막이댐 3억t을 합쳐 12.4억t 정도의 수량이 될 것인바,이에 대응하는데에는 평화의 댐 5.9억t과 화천댐등 기존댐의 수위조절 저수량 7억t을 합친 12.9억t으로서 최소한의 응급책은 된다고 계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단계공사는 금강산댐의 최종적인 규모를 확인해가면서 그들의 공사 진도에 맞추어 추가하여 순차적으로 추진할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1단계 공사가 끝난 상태로 있는 평화의 댐이 물을 담고있지 않은 모습으로 있어서,일부에서는 「막대한 국민성금을 삼긴채 쓸모없이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라고 비판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만,덩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것 자체가 평화의 댐의 본래의 「쓸모」인 것입니다. 발전을 하거나 산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라 유사시 북으로부터의 수공을 막는 일종의 「방벽」의 성격이 그 1차적 기능인 만큼 일반적인 댐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 대전 엑스포 현장에서도 몇시간의 호우로 인해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었고,서울의 한강변은 몇년에 한번씩 홍수가 져 큰 물난리를 겪는것이 우리 실정인 것입니다. 1984년 홍수때에는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소양댐이 범람하고 파괴되더라도 수문을 열지않고 버텨야 하느냐,아니면 서울이 물바다가 되더라도 수문을 열어야 하느냐하는 심각한 기로에 섰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2백억t이 아니라 수억t만 더 쏟아져내려와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으로부터 2백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70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서울이 마비될 정도의 피해를 입게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단계 공사를 조기에 착공한 것은 북한이 초기에는 5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1986년 가을에는 15만명의 투입을 결정하는등 공사를 급히 서두르는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동향은 단기적 군사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곧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를 갖게 한 것입니다. 당국의 분석으로는 3억t 정도의 저수량인 가물막이 댐은 북한이 5개월 안에 만들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따라서 정부로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우기이전에 최소한 10억t 안팎의 수공만이라도 막을 수 있는 5.9억t 규모의 1단계 댐을 조기착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 잘못 알려져 있듯이 공사를 하다가 흐지부지 중단된 것이 아니고,예정했던 1단계 공사는 당초 계획대로 1988년 6월에 완공된 것이며,현재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북한쪽의 공사진도에 따라서는 2단계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이 서 있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화천댐등 우리의 기존댐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평화의 댐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그것은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수공에 대비해서 우리의 댐들을 모두 비워놓고 있어야 하는데,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은 평화의 댐을 만드는 비용보다 더 많을 뿐 아니라 화천댐은 수공을 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지질학적 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듣기로는 지난해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금강산댐에 관한 교시를 발표하고 건설사령관인 인민무력부장에게 군병력의 집중투입을 지시하는등 직접 공사를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강산댐과 수공위협의 가능성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댐이 지금은 우리의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서,또 평화의 댐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에 와서는 실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때의 일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지난 일을 오늘의 상황과 기준에 서서 따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단임의 실현으로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부이양을 이룩하는 것이 저에게 부하된 최대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에서 지켜왔고 또 실천하였습니다. 평화의 댐 건설을 착공할 당시 저로서는 잔여 임기를 불과 1년 남짓 앞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시국이 다소 어려웠다고 하더라도,있지도 않은 북한의 위협을 날조해가면서까지 1년 남은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고 부도덕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저는 믿고 있고 또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6·25때 「맥아더」원수가 막료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일도 있듯이,최고결정권자는 국가의 이익과 백년대계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부분적 진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의 판단에 구애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사항도,모든 정보보고와 판단자료를 제가 검토하고 심사숙고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지시한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간절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1988년과 1989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기회에도 호소한 바 있습니다만,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은 모두 저에게 물어 주시고,이제는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미래를 지향하면서,보다 살기 좋고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데 매진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재임중 과오도 많았고 부덕하고 불민한 이 사람이지만 그 점만은 국민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성도 없는 금강산댐을 빨리 만들라고 오늘도 인민무력부장을 다그치고 있는 김일성 부자가 그 대응댐을 만든 전직 대통령의 「저의」를 거듭거듭 따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안타깝고 답답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덧붙여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제가 재임중에 정부와 공직자가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입안되어 어떻게 실행되었든,그것은 최종보고받고 결정하고 지시한 것은 대통령이었던 저였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비록 퇴임한 후인 지금에 와서도 모두 저에게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보고,건의와는 다른 내용의 결정을 내린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두환씨 감사원 회신(전문) 1,본인은 1993년 8월16일자 귀원의 「평화의 댐 감사관련 질문서를」를 받고 본인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대응방법에 대하여 원로들과도 의견을 교환한 바 있습니다.그런데 법률적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준 분들은 대통령 소속하에 있는 감사원이 대통령의 정책결정의 배경·경위와 타당성에 대하여 직무감찰을 하는 것은 헌법 제97조와 감사원법 제24조의 규정내용에 비추어 볼때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헌정사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선례가 된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귀하도주지하고 계시겠지만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행하여 지는 것이 원칙이며 평화의 댐에 관련된 정책결정 역시 관련 부처에서 작성된 문서로써 행하여 졌습니다. 따라서 귀원의 감찰활동상 필요한 자료와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보관중인 관련문서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는 지난 수년간 국회차원에서도 다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 또다시 세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칫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대통령으로서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한 배경과 경위에 대하여 모든 국민에게 아는대로 설명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별첨한 「평화의 댐에 관하여」는 이러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북한 식량부족 한해 2백만t/「폭등설」등 심각한 내부사정을 보면

    ◎기술·농약 모자라 해마다 생산량 격감/외화바닥… 러·중서 수입도 거의 못해/사료용 곡물을 식용으로 전환하기도 최근 외신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지금까지 외부에 피상적으로 알려진 것 이상으로 절박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미국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는 19일 북한에서 식량폭동과 내부반란 징후 등 북한 내부사정이 심상찮다고 보도했고 미국무부도 이를 확인했다. 식량난으로 인한 폭동설등은 현시점에서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다.이경재 청와대대변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보도다』라고 유보적 입장을 표시했다.북한사회는 불리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주민들 내부에 유포되는 것조차 철저히 차단하는 「폐쇄회로」사회이기 때문이다.다만 통일원·한국은행·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등 북한의 경제동향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관계기관에서는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객관적 수치로 추계하여 심각도를 확인하고 있다. 정부는 북한의 92년도 곡물생산량을 쌀 1백53만1천t을 포함,총 4백27만t(정곡기준)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는 인구 2천2백만명을 기준으로 책정한 북한의 91년도 식량수요량 6백40만t에 턱없이 못미치는 생산량이다. 더욱이 북한의 식량생산량이 90년 4백81만t,91년 4백42만t,92년 4백27만t 등으로 최근 수년간 하향곡선을 그어왔다.이같은 북한의 식량난은 생산면에서 볼 때 북한은 산악지대가 많아 벼농사가 적합지 않은데다 이윤동기가 없어 생산성이 낮은 사회주의적 경작방식 및 농약부족과 최근의 병충해 피해 등 악재가 겹쳐 파생되고 있다. 식량수급의 어려움을 부채질하고 있는것은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외화부족 사태이다.KOTRA가 해외조직망을 통해 각국의 무역통계로부터 역산해 추정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91년 한해만 해도 1백13만t 이상의 곡물을 도입하는 등 식량부족분의 상당부분을 수입으로 메우고 있다.그러나 주식량수입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경화결제를 요구해옴에 따라 수급 자체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같은 외화난때문에 북한은 올6월 신용구입을 판매조건으로 내세운 태국으로 수입선을바꾸기도 했으나 싸라기쌀 5만t과 백미 10만t을 수입하는데 그쳐 수요를 충당치 못하고 있다.북한의 93년도 식량수요량을 6백58만t으로 잡는다 해도 무려 2백31만t의 식량부족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북한의 일부지역에서부터 「1일2식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배급식량은 노동자가 1일 7백g,그나마 직장이 없는 노인과 가정주부에게는 3백g이 지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북한당국이 최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풀먹는 짐승기르기」운동도 따지고 보면 사료용 곡물을 식량으로 전환한데 따른 고육지책인 셈이다.이같은 정황을 종합할 경우 최근 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식량폭동설 등은 상당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북한당국은 올해 한반도 전체에 몰아친 냉해등 이상기후로 식량난이 더욱 가중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도 아직 한번도 이에대한 공개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 강수량/년평균 1,100㎜… 남쪽·산악지대 집중(북한백과)

    ◎58년 신의주에 하루 최고 587㎜내려 ○…북한지역의 연간 평균강수량은 1천∼1천2백㎜다.해방이후 지금까지의 1일 최고강수량은 58년8월4일 평북 신의주에 내린 5백87.1㎜가 기록이다. 북한지역의 강수량은 북쪽보다는 남쪽이,해안가보다는 고산지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는 ▲청천강과 대동강상류지역(1천2백∼1천3백㎜) ▲금강산과 강원도 중부산악지대(1천2백∼1천3백㎜)등이 꼽히고 있다.강수량이 적은 지역은 개마고원을 비롯한 북부내륙의 고산지대(5백∼6백㎜)와 대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평남및 황해도 일부지역(7백∼8백㎜)이다. 지금까지 연간 강수량으로는 54년 강원도 고성군 장전지방의 3천1백30.3㎜가 최고기록이며 월간 강수량은 66년 황해도 해주지방의 8백67.8㎜가 최고다.1일 최고적설량은 69년2월15일 강원도 고성지방에 내린 1백60㎝가 최고로 기록돼 있다. 북한에서도 매년 7월초순부터 8월하순 사이에 장마가 있어 많은 비피해를 입고 있다.북한은 모자라는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해 매년 여름이면 각급 협동농장과 주민들을 동원,논둑보강·물길손질·도랑치기등으로 농작물피해를 줄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 국제여론 환기… 터케 “죄기”/쿠르드족,왜 서방공관 습격하나

    ◎탄압 따른 자체분열에 위기감/2천3백만면 산악 유랑 탈피 겨냥 24일 유럽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쿠르드주의 터키공관 등에 대한 기습난입및 인질사건은 한계에 달한 자신들의 분리독립운동을 국제문제화하려는 의도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번 난동의 주범은 터키로부터의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 노동자당(PKK).PKK는 현재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압둘라 오칼란이 앙카라대학에 재학중이던 지난 78년 터키 남부에 쿠르드족만의 독립국가를 만들 목적으로 창설한 지하조직이다. PKK 창설이래 지난 9년간의 싸움에서만 6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이들은 그간 터키정부를 상대로 줄기찬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터키정부의 강경정책과 여기서 파생된 자체 분열로 위기의식을 느껴온 나머지 마침내 이번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같은 해석은 이번 사건이 서유럽 6개국 20여개 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났으나 최장 14시간을 넘기지 않았으며 사상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서 출발한다.또한 이번 사건의 반이상이 유럽의 중심국인 독일에 집중된 점과 터키정부의 쿠르드족 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요구한 뒤 바로 투항하는 형식으로 마무리된 것도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하는 대목들이다. 특히 스위스 베른에서는 터키대사관측의 발포로 비무장 쿠르드족 1명이 사망,터키정부도 국제적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베른의 쿠르드족들은 돌과 화염병 외에 별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스위스 경찰조사결과 밝혀졌다.이에 대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스위스당국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사관측의 면책특권을 인정치 않을 수도 있다고 밝혀 사건의 파장이 의외로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 현재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국경에 걸친 산악지대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모두 2천3백만명을 헤아린다.이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반세기 가까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며 살아왔다.이중 1천2백만명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터키 남부의 쿠르드족이다. 이번 사건은 터키내 쿠르드족들이 10만 이상 터키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극한상황에 처한 나머지 투쟁의 범위를 터키 역외로 넓혀가는 시발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 일으켜 유럽을 포함,터키공관을 갖고 있는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 미,“유고인종청소 막기” 고육책/클린턴의 무력개입 논의 안팎

    ◎내전확산 방지 수순·타이밍재는듯/국민적 합의없고 동맹국 꺼려 문제 클린턴 미대통령이 오랜동안의 「세미나」끝에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방침을 정하고 수순과 타이밍을 재고 있다. 클린턴은 지난 1일(한국시간 2일) 국가안보관련 고위참모들과 수시간의 회합끝에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기지에 대한 공중폭격등을 포함한 군사개입의 정책방향을 결정했다. 미국인들의 상당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클린턴행정부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조치 방침을 세우긴 했지만 이를 집행하기 위한 동맹국들과의 협력등 정지작업이 필요,군사작전의 D데이는 당분간 계속 유보상태로 남겨두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동맹국들과의 「군사작전」조율을 위해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현재 영국등을 순방하고는 있지만 군사조치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 순탄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러시아와 프랑스는 여전히 본격적인 무력사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영국도 경제제재강화쪽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설령 영국,프랑스등과 군사개입에 대한 의견일치가이뤄진다해도 곧바로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작전이 시작되지는 않을 전망이다.왜냐하면 작전개시의 시기는 지금 아테네에서 세르비아계 대표가 「밴스·오웬」의 평화안을 수락,서명했기 때문에 이 안이 보스니아내 세르비아의회에서 인준을 받을 경우 군사작전은 필요없게 되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같이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결정한 이유는 세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는 미국의 세계지도력 유지라고 할 수 있다.냉전종식후 인종간의 분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가운데 무력으로 국경을 확정하는 관행이 용인되는 경우 세계평화가 정착될수 없으며 세계 유일강대국으로서 미국이 이를 방치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둘째,보스니아내전을 방치할 경우 그리스 터키 알바니아 마케도니아까지 발칸전쟁이 확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셋째는 미국의 TV등에 연일 비쳐지는 세르비아의 회교도에 대한 소위 「인종청소」의 잔학상에 대한 인도주의적 고려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조치의 정책선택은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안고 있다.무엇보다 보스니아사태와 미국 국익과의 분명한 관계설정이 없기 때문에 국민적 컨센서스(합의)가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또 미지상군의 파견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산악지대에 대한 공습효과도 의문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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