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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반성문/주병철 논설위원

    종교적 의미의 고해성사는 용서와 참회다. 여기에는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다. 최초의 신분 증명 명부도 1215년 ‘고해성사 증명서’에서 비롯됐다. 모든 신도가 최소한 1년에 한번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받도록 통제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했는데, 명부와 고해성사 증명서를 대조해 의식을 실천하지 않은 자는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대판 반성문이 유래한 배경이라고 한다. 사전은 반성문의 뜻을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을 돌이켜보며 쓴 글’이라고 적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반성문을 쓴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선생님은 똑같은 반성문을 열 번이나 쓰게 했다(중략)/열 장의 반성문을 쓰게 한 이유를 처음에는 몰랐다/어느날,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나는 늘 같은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중략)” 연탄길의 저자 이철환의 산문집 ‘반성문’이다. 무수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우리의 마음을 콕 집어내는 듯하다. ‘반성은 해도 후회는 하지 마라.’는 경구를 일깨워준다. 김도연의 신작 소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은 삼십년 전의 반성을 삼십년 후 풀어놓은 소설가의 자기 고백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중학교 2학년 때 학생잡지의 어느 내용을 보고 교내 백일장에 그대로 옮겼다가 담임선생님한테 들켰다. 선생님은 혼내는 대신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반성문을 쓰게 한다. 끝내 쓰지 못하다 삼십년이 지난 시점에 장문의 반성문을 쓰면서 과거를 돌아본다. 어찌 보면 반성문은 인간에겐 업보이자 숙명이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진행형이다.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 등은 반성문을 아무리 써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얼마 전 한나라당 초선 의원이 대정부 질문 대신 ‘18대 국회 반성문’을 써 눈길을 끌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경찰의 조폭 난투극 방관, 장례식장과 유착 등 잇단 악재에 “안타깝고 할 말이 없다.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반성문(?)을 썼다. 반성문은 어제 썼다고 오늘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잘못됐다면 반성문은 써야 한다. 다만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반성은 눈속임이다. 공허한 자기 메아리에 불과하다. 경찰은 지금 눈앞의 잿밥(수사권 조정)에만 맘이 있다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염불(자기 정화)에 공력을 들여야 한다. 조 청장의 발언이 말장난인지, 진심 어린 반성문인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부고] 문단 ‘큰 어른’ 김규동 시인

    [부고] 문단 ‘큰 어른’ 김규동 시인

    한국 시단의 ‘큰 어른’인 김규동 시인이 28일 오후 2시 50분 폐렴과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이남으로 내려왔다.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던 초기에는 모더니즘을 표방하며 야만적인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현실비판적인 시를 주로 썼다. 고인은 ‘나비와 광장’ ‘죽음 속의 영웅’ ‘오늘밤 기러기떼는’ ‘길은 멀어도’ ‘느릅나무에게’ 등 시집 9권과 ‘새로운 시론’ 등 평론집, ‘지폐와 피아노’ 등 산문집을 펴냈다. 지난 2월에는 문학 활동을 집약한 ‘김규동 시선집’을 내기도 했다. 시선집에는 60여 년간 지은 시 432편을 담았다. 이어 3월에는 자전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를 출간했다. 당시 거동이 불편했던 시인은 구술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서전을 완성했다. 고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등을 지냈으며 은관문화훈장과 만해문학상 등을 받았다. 지난 6월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수상자로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춘영 여사와 3남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0월 1일 오전 8시다.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없다’ 이원규 시인

    [저자와 차 한 잔]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없다’ 이원규 시인

    “벌교장터의 국밥집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국수조차 3000원은 줘야 먹는 세상에 국밥 한 그릇에 2000원을 받으면서도 미안해하는 분입니다.” 그는 그 할머니의 ‘밥은 묵고 댕기냐?’는 걱정 어린 한마디에 울컥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하동군·함양군 등 3개 도 5개 시·군에 너른 품을 펼치고 있는 지리산. 크고 작은 골이 아흔아홉개라고 하니 그 안에 품은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리랴. 나무·바위·짐승·바람…. 거기에 사람이 빠질 리 없다. 산문집 ‘멀리 나는 새는 집이 없다’(오픈하우스 펴냄)를 낸 이원규 시인도 14년째 지리산에 깃들어 살고 있다. 이원규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낙장불입 시인’ 하면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공지영씨가 쓴 ‘지리산 행복학교’의 주인공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이 시인을 만나 책과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책 소개부터 해 달라는 말에 그는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쓴 책”이라며 껄껄 웃는다. “모처럼 혼자 바깥나들이를 다녔습니다. 장터든 오지마을이든 사람 사는 향기가 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지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멀리 나는 새는 집이 없다’는 그렇게 떠돌아 다니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강가에 구르는 돌처럼 평범한 우리의 이웃, 구두수선공·대장간 주인·시골 이발사·다문화 가정의 ‘동네가수’ 소녀 등이 등장한다. “벌교장터의 국밥집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국수조차 3000원은 줘야 먹는 세상에 국밥 한 그릇에 2000원을 받으면서도 미안해하는 분입니다.” 그는 그 할머니의 ‘밥은 묵고 댕기냐?’는 걱정 어린 한마디에 울컥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시인이 10년 동안 살던 서울을 떠나 지리산으로 간 까닭은 세상과의 불화와 환멸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시인이자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였다. 그리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삶은 살얼음을 디딘 듯 늘 위태로웠다. “촌놈이라 그런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습니다.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걸려 그러지도 못하고…. IMF가 터진 1997년 1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제게는 기회였지요.” 결심을 굳히기까지 곡절이 얼마나 많았으랴. “IMF를 맞이하니까 직장에서는 좋은 사람부터 밀려나더군요. 그러던 차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도 당하고…. 그런 꼴을 보느니 산짐승처럼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주머니에는 50만원이 남아 있었다. 그걸로 중고 모터사이클을 사서 타고 지리산을 떠돌아다녔다. 그가 14년 동안 지리산에서 살면서 시만 쓴 것은 아니다. 아니, 더 큰 공을 들인 게 ‘생명평화운동’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3년을 놀고 나니까 세상에 미안해지더라고요. 그때, 댐 건설로 지리산 칠선계곡과 실상사가 잠길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례인생의 시작이었다. 산과 강을 살리겠다고 수경·도법스님 등의 길동무가 되어 걷고 또 걸었다. 지리산·낙동강·새만금을 위해 걷다 보니 10년이 넘고, ‘대운하’를 막겠다고 풍찬노숙하다 보니 11년이 됐다. 그렇게 걸은 게 줄잡아 3만 리. 그는 요즘 은근히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공지영씨의 책에 소개된 뒤 치르는 유명세 때문이다. “엄청나게 찾아와요. 대개는 빈집을 구해 달라고 오지요. 덕분에 집값이 뛰다 보니 돈 없는 제가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그의 얼굴엔 별 걱정이 없다. “철새에게 따로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날마다 도착하는 곳이 집이지요.” 이호준 편집위원 sagang@seoul.co.kr
  • 소설 쓰는 ‘날것의 은희경’ 오롯이

    소설 쓰는 ‘날것의 은희경’ 오롯이

    아무리 늦깎이 등단이었대도 15년의 시간 동안 벌써 열 권의 소설책이 늘어선 작가의 이력에 산문집 한 권이 없었다. 스스로 자신은 산문을 못 쓴다며, 가능하면 산문을 쓰지 않겠다며 이리 빼고 저리 빼온 시절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던 소설가 은희경(52)이 ‘난데없이’ 등단 이후 첫 산문집을 냈다. 그것도 여기저기 신문, 잡지에 쓴 글들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소설 창작-특히 ‘소년은 외로워’를 매일 연재하는 기간에 집중된다-의 과정 속에서 길거나 혹은 짧게 스쳐갔던 감정을 내밀하게 풀어낸 산문집이다. 일종의 창작 노트와도 같다. ‘생각의 일요일들’(달 펴냄)을 따라 읽다 보면 문득 컴퓨터 앞에 앉은 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은희경을 만날 수 있다. 12㎝ 킬힐을 신고 기우뚱거리며 힙합 공연장에서 소리지르는 은희경, 해발 400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침낭 안에 누워 소설이 쓰고 싶어 안달이 난 은희경, 새벽녘이 될 때까지 작품 속 소년과 소녀의 첫 키스 장면을 쓰며 덩달아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은희경….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드러낸 채 콧잔등 찌푸려가며 활짝 웃는 모습이 절로 떠오르는 ‘날것의 은희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소설가의 사생활이 꽤 낱낱이 드러난다. 남의 사생활을 너무 들여다보는 것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 정도로 글은 형식도, 내용도 솔직하고 자유분방하다. 인터넷 연재하며 팬들과 댓글 놀이 하며 나눴던 얘기, 뒤늦게 트위터의 매력에 홀딱 빠져 거기서 주고받았던 길지 않은 말들, 장편을 탈고한 뒤 나른한 몸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적은 글 등 대부분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시작해 경기 일산의 작업실, 강원 원주 토지문학관, 미국 시애틀을 전전하며 쓴 것들이라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은희경이 영혼을 자유롭게 놀렸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긴 시간 창작의 산고에 시달리는 소설가의 마음을 슬쩍 짐작해볼 수 있는 경험 또한 재미난 덤이다. 그가 이 산문집을 통해 연신 강조하는 명제가 있다. ‘소설가는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야 소설을 잘 쓴다.’는 것. 이 명제를 되새기며 그의 첫 산문집의 모태가 되어준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 ‘아하, 이 대목이 그렇게 쓰여졌구나.’하며 무릎을 치면서 배시시 웃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쓴 소설은 독자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

    작은 사진기에 흑백필름을 넣어 어깨에 둘러메고 1950년 중반부터 조국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사진기를 들이댔을 때 조리개를 통해 들어온 피사체는 다름 아닌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호옥’ 하고 숨 한 번 쉬고 국숫발을 빨아 올리는 어린 여자 아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중삼중 뼈 휘는 노동을 해야 하는 여인, 조국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하루 종일 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다가 해 질 녘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자선을 바라는 눈먼 걸인, 굵은 주름이 이마를 덮은 지친 노동자….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83)씨가 쓴 사진 산문집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러한 슬픈 모습들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가슴을 두드리는 멍으로 전해져 왔기에 최씨는 단 한 번도 ‘인간, 가난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하여 그가 찍은 사진에는 50여 년 동안 우리나라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를 주제로 그동안 펴낸 사진집만 14권에 달하고 사진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사진 에세이집을 8권이나 발간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곧 9권째 사진 에세이집 ‘생각이 머무는 곳에 인생이 있다’를 출간할 예정이며 오는 10월 15권째 사진집을 발간하기 위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팔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어떻게 이런 열정이 나올 수 있을까.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28일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대연동 어디로 오라고 했다. 잠시 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렸다. 까만색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둘러맨 노() 사진작가가 시내 거리를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걸어온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피사체를 찾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이 지역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휴먼터치’라고 있어. 젊은이에서 칠순까지 모두 25명 정도 돼. 월 1회 모여서 사진 작업한 내용들을 평가하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야. 나는 자문 역할을 해주고 있어. 거기 막 갔다 오는 길이야.” 노 작가는 그러면서 “여기서 한 100m쯤 가면 우리 집인데 그리로 가지 뭐. 옛날 집이라 누추하지만.”이라고 했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시선은 습관처럼 지나가는 피사체를 응시한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한다. 이어 작은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과일가게 아저씨, 떡방앗간 주인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시장 골목에 내리는 비는 다른 곳보다 정겨웠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대선배의 모습을 카메라에 분주히 담았다. 잠시 후 노 작가의 자택에 도착했다. 흔히 시내 변두리 골목에서 보았음 직한 아담하고 작은 1층 단독주택이었다. 노 작가의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베토벤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가 그렸을까. 노 작가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내가 직접 그렸지. 먹화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그가 2년 동안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베토벤 그림 옆에는 세계적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옮기자 노 작가는 잠시 번스타인이 지휘했던 음악을 틀면서 “사진만 한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야. 음악도 알아야 하고 미술도 알아야 하고.”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서재(노 작가는 창고라고 했다)에 있는 책들을 잠시 살폈다. 철학, 미학, 사회학, 세계 각국의 사진집 등 정치와 경제 분야만 빼놓고 모든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 책들을 다 읽었을까. “5년 전에 국가기록원과 약속을 했어. 내가 죽은 후에 이 책들을, 아니 이 창고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기록원에 기증하기로 말야. 내 눈과 손이 안 닿았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들 애지중지 여기는 것들이지. 내가 즐겨 들었던 귀한 클래식 엘피판만 해도 1000장이 넘어. 50년 넘게 휴머니티만 찍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알기로는 역대 대통령이나 추기경 외에 일반 개인의 자료가 기록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처음이야.” 2000년에 받은 옥관문화훈장이 새삼 돋보였다. 서재에 있는 각종 서적은 1만여 권에 이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을 주제로 한 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 창고 때문에 우리 집사람이 사는 공간이 좁아졌지.”라며 웃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노 작가의 눈동자가 나이에 비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눈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 그래서 비결을 물었다. “눈이 아직도 밝아. 5m 밖의 피사체는 선명하게 보이지. 간판의 전화번호, 사람의 표정까지 다 읽을 수 있어. 내 나이가 84살이거든, 동료들은 다 갔어. 다들 사진을 못 찍어.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났나 봐.(웃음)” 별도로 운동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저 시간만 되면 사진 찍고 원고 쓰고 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요즘에는 카메라 메고 어디로 다닐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다. 주변 산동네, 자갈치 시장, 부전시장 등을 비롯해 밀양, 언양, 청도까지 가서 시장과 농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 가까운 곳은 혼자 걷고, 먼 곳은 가끔 후배들과 함께 버스나 기차를 타고 동행한다. “그냥 가난한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은 아니야. 체험이 있어야 해. 아니면 책을 읽어서 간접 체험이라도 쌓아야 해. 또 역사를 알아야 하고…. 사진은 리얼리즘이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음으로 찍어야 해. 요즘에는 이런 것들을 외면한 채 그저 출품만 염두에 두고 쉽게 만들 생각만 하고 있지. 포토샵만 가르치고….” 이런 연유에서 노 작가는 지금도 대학 강단은 물론 도서관과 구청문화원 등에서 사진 예술과 기법, 마음의 자세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를 한다. 틈틈이 지방 출장을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달 25일에는 동강사진미술관에서 강의할 예정이다. 노 작가에게 왜 50여 년 동안 가난한 사람만 찍었느냐고 물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인 아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야.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했어.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적 의미보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기도 해.”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의무라고 생각한 데서 출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의 경험도 깔려 있다. 12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자 어린 최민식은 직접 소작농일까지 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온 그는 품팔이, 공장생활, 지게꾼을 비롯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전전하다가 6·25전쟁 때 참전한 뒤 1955년 평소의 꿈인 화가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에 있는 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진집 ‘인간 가족’을 발견했다. 이 사진집은 2차대전 때 해군장교로 활약했던 사진작가이자 미술관 기획자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편집한 것으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사랑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미술 공부를 포기하고 사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57년 가을 그는 중고 카메라 세 대와 부속품, 수십 권의 사진집을 구입해 밀항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몇 달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자선회에서 사진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가 실기 테스트에 합격했다. 이후 사진의 주제를 ‘가난한 사람’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휴머니즘’에 천착해 왔다. 고충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때는 ‘가난한 사람’을 사진에 담는다고 해서 여러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지금의 노 작가에겐 어떤 꿈이 있을까. 아프리카 우간다 난민촌에 가서 그들의 아픔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이 일을 하고자 얼마 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 찾아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아 섭섭한 마음으로 그냥 돌아서야 했다. 유니세프라는 완장이 있으면 안전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 생전 어떻게 해서든 우간다 난민촌에서 가서 그들의 모습을 기필코 담겠다고 강조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사진작가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남 진남포 군수공장 기능자 양성소에서 공부하며 공장 일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에서 식당 일과 넝마주이, 지게꾼 생활을 했다. 6·25전쟁 때에는 참전해 청진까지 북진했다. 1955년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했다. 1957년 귀국한 후 독학으로 사진 연구에 몰두하면서 인간을 소재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62년 대만국제사진전에서 처음으로 입선한 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20여 개국 사진 공모전에서 220점이 입상 및 입선됐다. 아울러 1970년부터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7개국에서 15회 이상 개인 초청전을 가지며 해외에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 1집을 낸 후 지금까지 14집을 냈다. 사진집 외에 산문집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 사진 에세이집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를 펴냈다. 이 밖에 ‘리얼리즘 사진의 사상’ ‘작품 사진 연구’ ‘세계 걸작 사진 연구’ 등 다수가 있다. 주요 수상으로 부산시 문화상(1967), 예술문화대상(1987), 옥관문화훈장(2000), 동강사진상(2005), 국민포장(2008), 부산문화대상(2009) 등 1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 ‘불온한 작가’ 中 옌롄커의 자기 고백

    ‘불온한 작가’ 中 옌롄커의 자기 고백

    그는 돈 10위안(약 1500원)이 아까워 병석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영화 ‘소림사’를 보여드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무의식 속에 병든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랐다고 털어놓는다. 젊은 시절 몰래 훔친 면도기를 아버지에게 선물이라며 드렸고, 이를 평생에 걸쳐 애지중지 쓰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다고 토설한다. 쓰는 작품마다 출판 금지, 판매 금지 등 중국 정부 당국과 끝없이 불화해온 ‘불온한 작가’ 옌롄커(閻連科·53)의 자전적 산문집 ‘나와 아버지’(김태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는 위악적인 자기 고백과 28년 전 폐부종으로 숨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앞세워 숨가쁘게 변해가는 중국이 애써 잊고 사는 가난과 고통의 한 시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낸다. 한동안 중국 독자들에게도 잊혔던 옌롄커를 다시 열광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출간하자마자 30만 부가 넘게 팔렸다.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방한한 옌롄커는 지난 23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중국 문단에서 고아와 같은 존재였던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면서 “나의 성장기와 아버지, 가족의 이야기를 진솔히 풀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문화대혁명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바링허우 세대’(1980년 이후 태어난 세대)들이 감동받고 눈물을 흘렸다.”면서 “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살아온 세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지내온 유소년과 청년 시절의 삶은 1949년 사회주의 중국 수립 이후 3년 대기근,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힘겨운 중국 현대사와 씨줄날줄로 얽혀 있다. 옌롄커는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농촌의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채 군대로 떠났고, 문학의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중국작가협회 소속 작가 7000여명을 비롯해 문학에 관련된 이라면 모두 꿈꾸는 위치인 ‘1급 작가’가 됐고 루쉰 문학상, 라오서 문학상 등 중국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장편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딩씨 마을의 꿈’ 등 작품을 실을 곳을 찾지 못해 홍콩, 유럽 등을 전전해야 했고, 어렵사리 출간되더라도 중국에서는 판매 금지되기 일쑤였다. 마오쩌둥 주석에 대한 모욕, 중국의 에이즈 실태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바깥에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으며 열광하지만, 중국 안에서는 독자들과의 접점 자체를 찾지 못하던 차에 이번 산문집으로 자신의 문학적 시원 및 창작의 배경을 내밀히 고백하고 소통하게 된 셈이다. “서구에서 좋아하는 소재인 티베트 등을 다루는 작품을 쓰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글쓰기는 저와 진실과의 대면입니다. 무슨 상, 돈, 권력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쓸 수는 없죠.”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명랑수녀님 귀여운 춤사위에 앙코르 쏟아지다

    명랑수녀님 귀여운 춤사위에 앙코르 쏟아지다

    누구도 그를 4년째 암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에 올라 얼굴 가득 눈웃음 지으며 얘기했다. 노래에 맞춰 고운 손동작 만들어가며 춤도 췄다. 삶을 힘겨워하는 이들의 고단함을 듣고 다독거려주는 위로의 말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했다. 2008년 직장암 진단을 받은 뒤 오히려 행복 지수가 높아졌다는, 그래서 4년째 ‘명랑 투병’하고 있다는 이해인(66) 수녀다. 그가 최근 내놓은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샘터 펴냄)는 두 달 만에 10만부가 팔렸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광화문 KT 드림홀에서 열린 이해인 수녀의 북콘서트는 200석 객석이 가득 찬 가운데 진행됐다. ‘책의 노래 서율(書律)’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밴드가 이해인 수녀의 시로 만든 노래를 불렀고, 배우 소유진씨가 수녀의 시 ‘6월의 장미’를 낭송했다. 오랜 지인(知人) 강지원 변호사도 예정에 없던 시(‘잎사귀 명상’) 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50~60대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객석에는 젊은 남성들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객석과의 대화. “얼마 전 친한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할지 모르겠어요.” 한 젊은 남성의 간절한 고백에 객석은 순간 숙연해졌다. 너무 ‘진지 모드’였다고 판단했는지, 남성은 재빨리 “기도하는 것 말고요. 기도는 이미 하고 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이내 쏟아진 폭소. 더불어 웃던 이해인 수녀는 “나, 기도하라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라고 능청스럽게 응수한 뒤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들이 제게 보내준 편지를 모두 모아 (친구의) 남은 가족들에게 보내”줬단다. 그 친구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 장영희 서강대 교수, 법정 스님, 박완서 소설가가 포함돼 있다. 가까운 벗들을 최근 몇 년 새 잇달아 떠나보내야 했던 그다. “친구가 생전에 좌절했거나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그것을 대신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슬픔 자체에 빠져 그리워하는 것도 치유의 한 과정이죠.” 그래도 못내 마음이 쓰였는지 수녀는 “이메일을 보내 주면 더 깊이 생각해 답하겠노라.”고 했다. 결혼하라는 성화에 너무 시달리다보니 가족조차 싫어진다는 한 여성의 하소연에는 “상상이별을 해보라.”고 했다. “매 순간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용서 못할 게 없다.”는 게 이해인 수녀의 얘기다. 올해 입사했다는 한 여성 신입사원은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릴 때 수녀원에 들어와 교과서 같은 말만 들으면서 평생 살아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 어떡하나.”라는 수녀의 재치 있는 응수에 객석은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 수녀는 이내 정색한 뒤 “매일 새로운 기회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기회를 잘 찾으세요. 본받고 싶은 이의 전기를 찾아 읽는 것도 좋은 일이죠.”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콘서트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율동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요란한 박수와 함께 객석에서 터져나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은 표정으로 무대 위에 선 이해인 수녀는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로 시작하는 ‘사랑의 송가’를 온몸으로 불렀다. 수녀복을 살짝살짝 들어올려 고운 선을 만들고, 고개 들어 허공을 쳐다보는가 하면 손가락도 살짝살짝 비틀었다.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는 사람, 앙코르를 연신 외쳐대는 사람,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 시쳇말로 객석은 ‘뒤집어’졌다. ‘명랑소녀 이해인’은 사양하는 법을 몰랐다. 동요 ‘동구 밖 과수원길’을 진지한 표정으로 부르며 다시 한 번 열심히 춤을 췄다. 환하게 웃는 얼굴 어디에도 암세포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렇게 독자들을 만나니 병도 잊을 수 있고, 더 행복하다.”는 이해인 수녀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 글 쓰고 희망을 나누고 싶다.”고 말하며 콘서트장을 떠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저자와 차 한잔] 프랑스 소재 에세이 나란히 펴낸 이중수·강문정 시인 부부

    [저자와 차 한잔] 프랑스 소재 에세이 나란히 펴낸 이중수·강문정 시인 부부

    프랑스 파리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시인 부부가 나란히 책을 냈다. 남편 이중수(48)씨는 ‘그녀가 사랑한 파리’를, 아내 강문정(49)씨는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라는 제목이다. 샘터사 기획으로 나왔다. 남편의 책은 파리의 랜드마크 22곳에 담긴 이야기를 서정적인 수채화와 함께 소개한 여행 산문집이다. 아내의 책은 프랑스문화의 진수라고 하는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문화에세이다. ●파리에서 20년째 생활… 함께 머리 맞대고 기획 책 출간을 위해 일시 귀국했던 부부를 지난달 19일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처음 만나 1995년 결혼했다는 이-강 부부. 살짝 들뜬 사춘기 소년 같은 남편, 문학소녀 같은 아내. 왠지 아직 아이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며 물었다. 역시. 아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결혼할 때 아이는 낳지 말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그리고 좋은 책을 많이 낳고 살자고 했습니다. 이번 책은 우리 부부가 낳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부가 기획 출판으로 함께 책을 내기는 처음이다. 남편 이씨는 비교문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로 많는 시집과 산문집,번역서를 펴냈다.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아내 강씨는 2002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해 첫 시집으로 ‘양철가슴’을 펴낸 바 있다. 책의 내용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부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획을 하고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며 쓴 자식 같은 책이니만큼 네 책, 내 책이 없었다. ●랜드마크 22곳·베르사유궁 역사 인물 이야기 이씨는 아내의 책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처럼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역사를 서사로 풀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면서 “초반은 문화에세이지만 3분의2가 역사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강씨는 3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쓴 이 책에서 프랑스 왕조변천사에서부터 위대한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거쳐간 역사 속 인물들의 삶과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분야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루이 14세, 사치와 허영에 들뜬 여인으로 치부되며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슬픈 운명의 주인공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를 흠모했던 페르젠백작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쉽고 생생하게 풀어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베르사유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과 조각, 유물들을 곁들여 다채롭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씨는 “단순하게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랑한 파리’는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나 다름없다. 남편이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골라 그 역사와 배경을 문학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바스티유 광장과 생마르탱 운하 등. 조용히 미소 짓고 있던 부인 강씨는 “지금까지 나왔던 수많은 파리 관련 도서와는 전혀 다른 감성과 매력을 선사할 것”이라고 남편의 책을 평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제19회 공초문학상] “시는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 가질 수 있죠”

    [제19회 공초문학상] “시는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 가질 수 있죠”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1970~80년대였다. 분노의 언어는 분명히 적의 심장에 날아가 꽂혔건만 가슴이 아리고 피 흘린 쪽은 외려 자신이었다. 엄정한 과학의 언어는 체계적이었지만 이념의 틀 안에서 쉬 헤어나지 못한 채 바싹바싹 메말라 갔다. 공중에 한 뼘쯤 떠 있는 듯한 관념의 언어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정박하지 못한 채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 시절은 그랬다. 그때 정호승(61) 시인의 시(詩) 속 언어들은 더욱 빛났다. 갈갈이 찢긴 시대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고 조심스레 이어 붙였다. 다치고 서러운 마음을 가만히 쓸어 주고 위로해 줬다. 투쟁을 들먹이지 않으며 투쟁을 버팅기게 했고,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 너머를 꿈꾸게 했다. 모든 가치의 밑바닥에는 사랑이 있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잘 더듬어 찾아보자고 노래했다. ‘서울의 예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등 내놓는 시집마다 모두 그랬다. 시대의 아픔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이율적으로 사랑을 얘기한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지난 30일 만난 시인은 정색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제 이미지가 너무 고정됐나 봐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사랑의 시인’이라며 남녀상열지사나 얘기하는 시인처럼 바라보더라고요. 저, 젊은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데이트 한 번 변변히 못한 사람이에요.” 그렇다. 그는, 그의 시는 많이 변했다. 1972년 등단했으니 벌써 40년 차 시인이다.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는 세월이다. 그는 “시대가 변하고 삶이 변하는데 그 변화의 마디마디가 없을 수 없다.”면서 “시대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내 눈물 닦기도 버겁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내 시를 읽고 공감과 위로를 받고 스스로 눈물을 닦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시는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는 만큼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을 가질 수 있죠. 시대는 지나가지만 시는 영원하잖아요.” 정호승 시인이 제19회 공초문학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점점 선명해진다. 수상작은 지난해 말 내놓은 열 번째 시집 ‘밥값’(창비 펴냄)에 들어 있는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이다. 시가 품은 성찰과 자성, 관조가 두드러지고 시어는 더욱 넉넉해졌다. 그리고 수상작 속에서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라고 표현했듯 스스로 더욱 엄격해졌다. 얼핏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공초 오상순’과 ‘정호승’의 접점이 널찍해지는 지점이다. 그는 “1968년 대학(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 공초 선생은 이미 돌아가신 뒤라 뵌 적이 없었다.”면서도 “그 이름으로 남긴 문학상을 받게 된다니 오랜 시간 시를 버리지도, 시로부터 버림받지도 않았음을 감사할 따름”이라고 기쁨을 표현했다. ‘나는 아직’ 외에도 시집 ‘밥값’에 깔린 전체적인 심상은 죽음, 특히 스스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삶에 대한 집착, 욕망에 대한 거리두기를 꾀하는 초월의 지향도 함께 밝힌다. “죽음도 인간의 본질임을 인식하며 더욱 천착하게 되네요. 나이 탓인가…. 삶의 본질로서 사랑과 죽음이 품고 있는 무게감이 똑같지 않으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의 또 다른 형태겠죠. 더욱 성찰하고 시대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어요.” 역시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랑의 시인’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정호승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 10권의 시집과 ‘항아리’, ‘연인’ 등 동화집, ‘정호승의 위안’ 등 산문집 출간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지리산문학상 등 수상
  • 한·중 작가회의에서 만난 문학적 동지 장웨이·이현수

    한·중 작가회의에서 만난 문학적 동지 장웨이·이현수

    “이 선생 작품 번역 원고 출력해서 오늘 갖고 왔는데, 참 면밀하고 섬세하게 쓰여졌어요. 담담하고 애잔한 느낌이 좋았어요. 그런데 문체가 약간 밋밋하더라고요.”(소설가 장웨이) “어, 그렇게 솔직히 말씀하시다니…(웃음). 제 작품이 중국에 잘 번역, 소개될 수 있도록 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저랑 장 선생은 서로 메일 주고받으며 작품 읽어주고 평가했죠.”(소설가 이현수) 한국의 소설가 이현수(52)가 중국의 소설가 장웨이(張煒·55·산둥성작가협회 주석)와 반갑게 손을 마주잡았다. 꼬박 4년 만이다. 요란스레 손을 흔들거나 껴안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서 부러 반가운 척하지도 않았다. 그저 낮은 목소리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서로 부끄러운 듯 애써 눈빛을 피했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현수는 “5년 전 한·중작가회의 하기 전에 번역됐던 장웨이 선생의 작품을 감명깊게 읽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더욱 반갑더라고요.”라면서 인연의 묵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장웨이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장편소설 ‘구촨’(古船·국내 번역본 제목 ‘새벽강은 아침을 기다린다’) 얘기였다. ‘구촨’은 중국 평론가들이 뽑은 ‘100년 동안의 100편 소설’에 뽑혔고,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소개됐다. 장웨이는 “사실 그 작품이 한국에 번역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저와는 아무 얘기도 없이 번역된 불법 해적판이었거든요.”라고 답했다. 그는 “사정이야 어쨌든 부랴부랴 번역본 내용을 확인해 봤어요. 그런데 번역 과정에서 많이 삭제되거나 문단을 통째로 바꾸는 등 문제가 많았고, 번역 자체가 참신하지 않았어요.”라고 덧붙였다. 얼굴 붉혀야 할 민감한 얘기를 아무 일 아니란 듯 풀어냈다. 다행히도 올해 안에 문학과지성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구추안’이 완역돼 나오는 덕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이현수의 도움이 컸다. 게다가 장웨이의 산문집도 국내에서 추가로 번역 출간된다. 장웨이는 제나라 문화 얘기는 물론 한국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게 소개된다고 살짝 언급했다. 1991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현수는 최근 중국 내 한국드라마 중 시청률 1위를 놓지 않고 있는 ‘신기생전’의 원작자다. 한류의 또 다른 주역인 셈이다. 그 역시 장웨이의 도움을 받아 소설집 ‘토란’을 중국에 번역 출간했다. 조만간 또 번역 소개되는 단편소설 ‘장미나무 식기장’에 대한 장웨이의 관심은 이현수 못지 않게 지대하다. 둘은 2007년 처음으로 열린 ‘한·중 작가회의’에서 만나 서로를 문학적 벗으로 삼았다. 굳이 얼굴 마주하지 않아도, 남녀의 차이도, 언어의 불편함도 문인의 사귐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4년 동안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작품 보여주고, 양쪽 문단과 독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도록 발벗고 애썼다. 이메일만으로 풀 수 없었던, 정이 뚝뚝 묻어나는 얘기는 계속됐다. 이현수가 주로 묻고, 장웨이는 대답하는 식이었다. 비슷한 50대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1975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1980년부터 소설을 써온 장웨이가 한참 선배인 셈이다. 이현수가 “그런데 방언을 작품에 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즐겨 쓰시는지, 혹시 다른 지역 독자들에게 거부감 같은 것은 없는지 궁금하네요.”라고 물었다. 장웨이는 “그때그때 다르죠. 예컨대 ‘구촨’은 방언을 거의 쓰지 않았어요. 대신 ‘축행과 낭만’에서는 방언을 많이 썼죠. 독특하고 미묘한 맛을 품은 방언을 소설 속에 쓰는 것은 작가의 또 다른 번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방언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있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죠.”라고 대답했다. 이현수는 “작품 창작 과정에서 고민스러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라고 다시 물었다. 21년 차 소설가가 던진 겸손하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이다. 장웨이는 “50대가 되면서 사실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껴요. 문학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반성해야 할 것들을 절감하고, 긴박하다는 느낌도 받지요. 이제부터 다시 새로운 문학세계를 개척하려 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일반 단행본 39권 분량의 대하장편소설 ‘당신이 고원에 있다’를 탈고했다. 무려 22년 동안 진행해 왔던 대역사(大役事)를 마무리했기에 ‘제2의 문학인생’에 대한 희망을 가꿔올 수 있는 터다. 5년 차로 접어드는 한·중 작가들의 만남이 맺은, 작지만 소중한 결실이다. 문학이 보여준 언어의 차이와 국경을 무색하게 만드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 시안(중국)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동네 칼국수 먹을 때면…눈에 선한 나의 벗아”

    “동네 칼국수 먹을 때면…눈에 선한 나의 벗아”

    누군가는 그를 노동시인, 민중시인이라고 불렀다. ‘노동 서시’ 등 대표적인 시편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먹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시를 틀어쥔 채 노동자들 틈바구니로 들어갔던 그이기에 붙여진 이름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생래적 서정시인’이라고 했다. 시인 백무산은 ‘자신이 가야 할 미래는 민중이라고 하면서도 극렬한 저항시를 쓰지 않은 시인’이라고 평했다. 시인 박영근(1958~2006)이다. 안치환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자이다. 2006년 5월 11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뒤 꼬박 5년이 흘렀다. 그를 추모하는 ‘제5주기 박영근 시인 추모제-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7일 한국작가회의·리얼리스트100 등의 주최로 열린다. 장소는 서울 홍익대 앞 ‘두리반’. 공간적 상징성이 크다. ‘제2의 용산’으로 불리는 두리반은 강제 철거에 맞서 1년 반 가까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건설 자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들의 절박함이 배어 있다. 여기에서 절묘하게 박영근의 삶과 시가 겹쳐 투영된다. 박영근의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박영근은 1997년 어느 봄날 서울 종로에서 동료 시인들과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다 말고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그리고 고향 부안까지 내처 달린다. 어미 품처럼 따뜻한 마을, 소년의 시정(詩情)을 늘 출렁이게 한 수평선을 보고 싶었지만 푸르스름한 새벽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괴물처럼 자리 잡은 방조제뿐이었다. 바닷물을 막아선 새만금의 건설자본 앞에 무기력해진 고향 모습에 절망한 박영근은 ‘…/ 수평선 자락에서부터 눈 시리게 출렁이던 물이랑을 지우고/ 물길을 끊어버린 방조제 공사장을 나는 바라본다/ 뻘길은 평지가 되고 한 도시가 들어서겠지/ 보상금에 조생이 자루를 놓아버린 조개미 아짐은 또 취했나 보다/’(‘해창에서2’ 중)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노래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박영근이건만 그의 시는 여전히 회자되고, 박영근에 대한 그리움 또한 여러 시인들에 의해 여전히 노래되고 있다. 시인 박라연은 새만금 방조제를 찾은 뒤 ‘…/ 평등한 밥을 위해/ 평생을 바쳤을/ 시인 박영근, 그의 영정 사진 속/ 해맑은 웃음이 새만금까지 흘러넘쳐/ 철썩이는 것 보았지만/…/ 너무 공평 평등해서 심심한, 곳으로/ 가는 그를 붙잡고 싶지만’(‘우연히 들른’)이라고 썼다. 시인 박철은 ‘동네 분식집에서 혼자 김치칼국수를 먹는데/ 갑자기 붉은 국물 위로 박영근 시인 생각이 나는 거라/ 그는 지금쯤 어딜 가고 있을까/’(‘박영근 생각’)라고 20년 우정을 나눴던 벗과의 한때를 시로 추억했다. 7일 추모 행사에서는 이은봉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이 추모사를 낭독한다. 두리반에서 재개발 반대 농성을 벌이는 소설가 유채림씨와 시인 서홍관씨 등이 고인을 추모하는 영상을 상영하고 추모시를 헌정한다. 시인 김일영, 박일환, 황규관의 시 낭송도 예정돼 있다. 박영근은 1981년 ‘반시’(反詩) 제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등 여섯 권의 시집과 산문집 ‘공장 옥상에 올라’ 등을 남겼다. 신동엽창작기금(1994)과 백석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그가 떠난 뒤 돌이켜보니 그의 시야말로 가장 민중적인 것이 가장 서정적임을, 혹은 그 반대 명제가 성립될 수 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고통·갈등속에서 희망 찾는 시인의 삶

    고통·갈등속에서 희망 찾는 시인의 삶

    시인에게 글(시)쓰기란 천형((天刑)이요, 축복이라 한다. 그 천형은 뼈를 깎는 고통의 감내이고 축복은 처절한 산고 끝의 결실일 것이다. 물론 그 천형과 축복은 삶을 향한 옹골찬 진정성과 성찰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주 구도자며 수도자의 반열에 놓이기도 한다. 흔히 ‘과작의 시인’이란 수식이 따라붙는 천양희(69). 고희를 앞둔 시인 천양희에게도 글쓰기란 예외없는 천형이요, 축복이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지 어언 반세기. 비록 시집 4권의 많지 않은 결실에도 불구하고 그 ‘이룸’은 알알이 치열한 삶과 성찰의 궤적이다. 최근 세상에 내놓은 산문집 ‘내일을 사는 마음에게’(열림원 펴냄)는 천양희 시인의 삶이 차라리 구도자의 과정이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기 고백의 연속이다. “나를 시인으로 만들고 키운 건 순전히 아버지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박두진 시인”이라는 천양희. 70평생 어쩔 수 없는 시인의 자리를 지키게 한 그 세 사람의 존재는 뺄 수 없는 삶의 기둥이다. 그리고 세상의 아픔과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죽음까지를 염두에 두고 불쑥 찾아갔던 내변산의 직소폭포는 견뎌내야만 하는 삶에의 극적인 반전 처. 그래서 그 반전의 장소는 13년 만에 축복의 결실인 대표시 ‘직소포에 들다’로 맺어진다. 어릴 적 이발소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시인의 삶을 여전히 든든하게 받쳐주는 좌우명과도 같은 지침. 그중에서도 “오늘이 비참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삶”이라는 구절은 회의와 실의 속에서도 그를 번번이 시인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천둥과도 같은 울림이라고 한다. 산문집을 관통하는 반복의 메시지는 역시 ‘시인이란 무엇인가’이다. “시란 갈등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의 고리를 잡는 것 이상의 것이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이 세상이 싫을 뿐” “시에는 불혹이 없다.언제나 혹하는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시인들에게 때로는 따끔한 매로, 때로는 가슴 시린 사랑의 손길로 다가오는 고백의 성사들. 그저 시인에게만 파고드는 수사로 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원고지를 대하면 원고지 사각형의 모서리가 절벽처럼 느껴져서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는 천 시인. 그 치열한 글쓰기와 살아냄은 “오늘은 여생의 첫날”이고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이라는 희망과 내일에의 기대로부터 나오는 게 아닐까.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치유되더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치유되더라…

    문학은 간절한 구원의 몸짓이다. 상처가 없이는 문학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느냐, 비스듬히 비켜서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는 개인에게도, 집단에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이남희와 김별아가 나란히 책을 냈다. 소설 또는 수필로 형식은 달리했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구원의 글쓰기, 치유의 글쓰기를 펼쳐낸 점은 한 가지 모습이다. [친구와 그 옆 사람] 이남희 지음 실천문학 펴냄 모든 문학은 ‘치유하는 글쓰기’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쉬 극복하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왔던 콤플렉스는 역설적으로 열등감과 결핍감을 메워주는 무한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또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대충 반창고로 가려두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름의 끝이 어디인지 아예 손가락 집어넣어 후벼파는 것으로 치유의 방법을 삼을 수도 있다. ●페미니즘 영 역서 새 소설 세계 구축 중견소설가 이남희(53)의 새 소설집 ‘친구와 그 옆 사람’(실천문학 펴냄)은 과감히 상처를 직면하고 헤집는 편을 택하고 있다. 한 편의 중편과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소설집은 1980~1990년대 리얼리즘으로 세상과 맞서던 이남희가 페미니즘의 영역 안에서 새롭게 자신의 소설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증명시킨다. 모든 작품의 화자는 여성이다. 표제작인 중편소설 ‘친구와 그 옆 사람’은 이남희 소설 세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징검다리와 같은 작품이다. 리얼리즘을 틀어쥐고 소설과 대면해 오던 이남희는 이제 실체조차 의심되는, 상실된 1980년대 혁명의 꿈을 되새기는 한편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려봤던 소박한 행복,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부질없음을 혼자 사는 여자 ‘영우’를 통해 발화하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연하남 김환에게 사랑을 구걸하듯 얽매이는 처지는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남희의 모습과 다름없다. ●불안·혼돈의 심리 세밀하게 묘사 단편에서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세 번째 여자’의 은정이, ‘낯선 이들의 집’의 정남이, ‘빛의 제국’의 그녀 등은 모두 이혼한 채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지만 다양한 이유의 상처로 인해 거듭 배신당하고, 더 큰 상처를 안은 채 스스로 갈무리짓고 만다. 유년 시절 아버지, 이웃의 남자 등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은 ‘어두운 층계 위’나 ‘거미집’에서 정밀히 묘사된다. 읽는 이, 아니 그보다 쓰는 이의 불편함이 더욱 크겠지만 고개를 외로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낯선 이들의 집’ 등을 통해 남녀의 우정 또는 동성애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관계의 또 다른 형태를 모색한다. 꿈을 잃어버린, 깊은 상처를 가진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자잘한 곳까지 마음 쓰는 이남희의 문체와 언어가 제격이다. 규정짓기 어려운 불안과 혼돈의 심리도, 스쳐 지날 법한 찰나의 상황조차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만 숨이 막힐 정도로 스스로를 가둬놓는 여리고 섬세한 언어나, 전편에 걸쳐 태연한 표정으로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인물들의 상황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허나 어쩌랴. 그것 또한 치유의 방법이니 말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이또한 지나가리라!] 김별아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 학창시절 10년 동안 줄곧 반장을 지내는 등 모두가 부러워하는 ‘엄친딸’이었지만 사실 일기장에는 ‘죽음과 죽임’만을 반복해서 적었던 ‘소아 우울증’이었음을 뒤늦게 확인하고 고백한다. 또한 살과 피와 뼈를 내줬고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아이를 길러줬건만 ‘감히’ 대들거나 숫제 투명인간 취급받기 일쑤인 어미임을 아파한다. 늘 지혜롭고 완벽하기를 추구했던 성격은 또 다른 결핍과 욕망을 불러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지형 인간’의 백두대간 산행기 ‘평지형 인간’을 자처하는 소설가 김별아(42)가 쓴 산문집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코의서재 펴냄)는 굳이 분류하자면 일종의 산행기다.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의 아이들, 학부모들과 함께 백두대간 동아리에 들어가 격주로 백두대간의 한 구간씩 오르내리며 느끼고 겪은 부분을 기록한 글이다. 한번 산을 타면 열 시간 안팎의 시간에 15~20㎞씩 가야 한다. 이렇게 무려 40곳을 지나야 비로소 백두대간 완주가 된다. 지난해 3월 13일 전북 남원에서 대간꾼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뒤 모두 열여섯 구간을 진행한 김별아가 남긴 중간보고서 격의 산행기다. 암벽을 네발로 기어오르며 말로만 떠들던 죽음의 공포를 실제로 느끼기도 하고, 헤드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강풍에 후들거리며 마루금을 걷고,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어가며 산을 오르는 얘기는 함께 주먹을 꽉 쥐게 만들고 허벅지 근육을 팽팽하게 만든다. 하지만 김별아가 정작 하고자 하는 얘기는 ‘상처의 치유’에 있다. 그는 산을 타는 이야기만큼이나, 그보다 훨씬 공을 들여 오랜 시간 자신 안에 품어왔던 상처와 콤플렉스를 털어놓는다. 산을 타기 전에 자신 안에 쌓여 있고 자신을 움직였던 에너지의 원천이 분노와 집착, 증오, 결백임을 확인하는 순간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진배없다. ●진정한 사랑에 터잡은 구원·치유의 글 김별아는 “이 책은 산으로부터 받은 위로의 이야기”라고 적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서 받은 상처는 결국 자연이 치유해 준다.”고 덧붙였다. 문득 괜한 걱정이 든다. 김별아가 너무 편안해지는 것은 아닌가. 김별아 안의 결핍과 상처, 불안, 긴장, 슬픔, 질투, 증오,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내면의 불 같은 갈등이 없이도 소설이 터져나올 수 있을까.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온화하게 나를 이해하고, 남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착한 소설’만 쏟아지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진정한 이해와 사랑에 터를 잡으면 치유의 글쓰기도, 문학을 통한 또 다른 구원도 나올 터다. 접어야 할 쓸데없는 걱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해인 수녀 신작 출간] 사랑하는 知人 떠나 보낸 아픔 절절히

    [이해인 수녀 신작 출간] 사랑하는 知人 떠나 보낸 아픔 절절히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 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기소서.” 소설가 고(故) 박완서씨가 지난해 4월 이해인(66) 수녀가 있는 부산의 수녀원에 이틀간 머물고 가며 남긴 편지다. 고인이 느꼈던 것처럼 이해인 수녀의 시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 속에 당산나무와 같은 지주다. 2008년 여름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치유와 희망의 메신저’가 된 이해인 수녀가 더욱 섬세하고 깊어진 마음결을 드러낸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샘터 펴냄)를 냈다. 산문집으로는 2006년 ‘풀꽃 단상’ 이후 5년여 만이다. 암 투병과 동시에 피천득 작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 김점선 화가, 장영희 교수, 법정 스님, 이태석 신부, 박완서 작가 등 사랑하는 지인들을 잇달아 떠나보낸 아픔의 시간이 절절히 담겨 있다. 2008년 서울 성모병원에서 옆방에 같이 입원하게 된 김수환 추기경은 이해인 수녀에게 “수녀도 그럼 항암이라는 걸 하나?”라고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항암만 합니까, 방사선도 하는데.”라고 대답했던 이해인 수녀는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참으라는 추기경의 말씀을 예상했지만, 김 추기경은 연민의 눈빛을 담아 “그래? 대단하다, 수녀.”라고 한마디 위로를 남겼다고 한다. 몸이 너무 아플 때는 문병 오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기도에도 거부감이 들었던 수녀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위로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썼다. 덕이 깊은 사람일수록 인간적인 말을 하는 것을 깨닫고 힘든 치료를 하는 사람에게 “대단하세요, 정말!” 하며 추기경의 표현을 흉내 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꽃이 지고 나면’에는 그동안 신문, 잡지에 썼던 산문과 기도 일기, 수도원 일기 등이 판화 작가 황규백의 따뜻한 그림과 함께 담겼다. 책을 읽노라면 하늘의 구름과 같고 바다처럼 느껴졌던 수녀의 의외의 명랑함과 유머감각에 “수녀님, 너무 귀여우세요!”란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서 그의 투병 생활에 진심 어린 마음을 담은 응원을 보내게 된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프로방스서 전해온 감성·사유

    너나없이 쓸 수 있는 일기 또는 여행기다. 하지만 이 평범한 형식의 산문은 예술의 공간과 인물을 넘나들며 금세 몸을 뒤튼다. 알베르 카뮈의 글과 흔적과 접속하며 문학의 향기를 잔뜩 피워내나 싶더니 빈센트 반 고흐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서는 빛과 색의 만찬을 한상 가득 차려낸다. 본업인 사회학적 사유 역시 빠질 수 없다. 경계짓기에서 자유로운 산문이 예술의 일부분이자 학문의 영역에 속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문학동네 펴냄)은 재불 사회학자이자 ‘전문 산책자’를 지향하는 정수복(57)이 발걸음을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로 옮겼다. 프랑스의 공간에 대해 쓴 세 번째 책이다. 정수복은 198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1990년대 환경운동연합, 사회운동연구소 등에서 시민운동을 했다. 그리고 2002년 ‘정신적 망명객’으로서 프랑스로 터전을 옮겨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를 지냈다. 그는 2005년 여름 꼬박 한달 동안 프로방스 지역의 몇몇 작고 한적한 마을들에 머물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여행자가 아닌 정주자(定住者)가 돼 느릿하고 단조롭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햇빛과 바람, 문학과 미술을 만끽하며 가진 성찰과 사유를 매일 기록으로 남겼다. 일기 중간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예술로서 사회학적 사유’의 글들이 들어 있다. 이는 ‘정수복식 글쓰기’를 완성케 하는 대목이자 그의 책이 단순한 여행기 또는 산문집을 넘어 예술과 교감하는 인문학적 산문집으로 자리매김되는 이유이다. 카뮈가 마지막에 살았던 루르마랭,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의 무대가 된 뤼베롱 산, 고흐가 말년을 지낸 아를 등의 기억은 이미 전작(前作) ‘파리를 생각한다-도시 걷기의 인문학’과 ‘파리의 장소들-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과 또 다른 감성을 건넨다. 파리에서의 치열했던 지성이 조금 누그러진 느낌이다.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프로방스는 완전한 휴식의 시간과 공간이니까. 그는 “한국은 빨리빨리 병으로 인해 획일화됐고 그런 모습들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삶에 대한 영감을 메마르게 한다.”면서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느림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사람 아끼고 존중하는 게 최고 가치”

    고종주(63)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8일 부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이는 흔히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지 못하면 일찌감치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해온 관례를 깬 것으로 상당히 드문 일이다. 고 판사의 이력도 그만큼 특이하다. 경남 남해 출신인 고 판사는 1974년 부산대 법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행정고시에 합격, 당시 문교부 산하 행정기관에서 5년 2개월간 근무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업무를 계속 맡게 되자 사법시험에 도전, 1980년 사시 22회로 합격해 28년 6개월간 부산과 마산, 대구, 울산 등에서 법관으로 근무했다.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후배 법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온 고 판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판결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9년 2월 성전환자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처음으로 유죄를 인정했고, 그해 1월에는 ‘부부강간죄’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3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고 판사는 2004년 첫 시집 ‘우리 것이 아닌 사랑’을 발간했고, 200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를 내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30년 가까운 법관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기억에 남는 판결과 소회, 합리적인 판결을 위한 제언 등을 담은 415쪽짜리 산문집 ‘재판의 법리와 현실’을 발간했다. 고 판사는 6일 “인생 60년 세월을 통해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이 인생사 최고의 가치’라는 사실”이라면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이윤기 유고 소설·산문집 함께 출간… “63년 삶… 이런걸 배웠소”

    이윤기 유고 소설·산문집 함께 출간… “63년 삶… 이런걸 배웠소”

    번역가이자 소설가, 신화 연구가였던 이윤기는 지난해 8월 63세로 타계했다. 그의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민음사 펴냄)가 유고 산문집 ‘위대한 침묵’과 함께 출간됐다. ‘유리 그림자’에는 4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모두 ‘올바른 인간’에 대한 작은 이야기들이다. 문학평론가 백지은씨는 “사람은 완전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배울 게 있다는 것이 이윤기의 지론”이라고 설명했다. 눈이 마주친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먹을거리에 식격(食格)을 부여하는, 자연 발생적인 한 경지’에 이른 중학생 아들(‘네눈이’)부터, 금방 불날 것 같은 긴급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처하는 아내(‘소리와 하리’), ‘가히 ‘항심’(恒心·항상 평정한 마음)의 경지’에 이른 개, 새들의 죽음을 막아 주는 유리창에 붙은 송홧가루에 이르기까지 그가 삶의 이치를 배우는 대상에는 한정이 없다. 백씨는 대부분의 이윤기 소설은 “자,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인생, 세상, 사람) 공부를 좀 하게 되었다, 이것을 한번 들어 보아라.”란 근본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평했다. 유고 소설집에서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 미국에서 공부한 이야기, 학창 시절, 친구와 후배들 이야기 등 이윤기의 삶이 곳곳에서 녹아난다. 특히 소설집의 표제작인 1인칭 소설 ‘유리 그림자’에서 화자인 ‘베트남 아저씨’는 자신이 깨달은 ‘사물은 그림자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깨달음을 여자 친구 딸에게 결혼식장에서 직접 들려준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계몽과는 거리가 멀다. 남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자기를 설득한 인생의 진실이 남에게도 전이될 것임을 믿을 뿐이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베트남 아저씨’와 같은 화자는 자기가 이해한 바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 남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까지 이야기하진 않는다. 집에서 키운 진돗개가 여자 친구의 개를 물어 죽이자 진돗개를 ‘처분’할 것을 요구하는 아들에게도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나는 아들을 논리로서 설득하지 않았다. 아들의 논리를 그럴 듯한 논거로 논파하지도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고 할 뿐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산 없는 아이들이 우산을 보면 훔치고 싶을 것이므로 우산을 벽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읽게 한다. 겸허하게 인생의 진실을 들려주는 이윤기의 소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책꽂이]

    ●우등생 자기주도 학습법(백종화 지음, 아주좋은날 펴냄) 엷은 귀로 조바심내는 부모는 무관심한 부모만 못하다. 아동학 박사인 저자는 아이를 땅속에서 성장하다가 4년이 지나서야 죽순으로 삐죽 솟는 대나무에 비유하면서 꾸준하게 즐기며 공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부모 스스로 갖출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이와 신뢰관계 갖기, 좌절하지 않도록 도움주기, 효과적으로 칭찬하기 등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습관을 갖도록 도울 수 있는 ‘자기주도 학습 5단계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만 2000원. ●인도, 끓다(이재강 지음, 지식의숲 펴냄) 여행과 명상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인도의 정치사회적 실체를 보여준다. 뭄바이 테러, 칸다말 학살 등을 직접 취재한 생생한 기록이 담겼다. 정치적 대립, 종교 갈등, 카스트제 차별 등 신비한 영적 이미지 안에 들어 있는 인도의 생생한 실체를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다. 인도가 신의 나라만이 아닌, 사람이 사는 나라임을 확인시켜준다. 1만 3500원. ●구글 완전 활용법(강재욱·김응석·신호승·양재봉 지음, 이지스퍼블리싱 펴냄) 외국어를 못해도 일본, 러시아, 중국, 미국의 사업 파트너와 번역 로봇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사내 인트라넷도 무료로 만들 수 있다. 웹사이트 만들기도 클릭 네번이면 충분하다. 외국 사이트 검색 기능도 척척이다. 제목 그대로 구글을 제대로 쓰는 법에 대한 설명서다. 1만 6000원. ●가위이야기(최정아 지음, 고즈윈 펴냄) 20년 동안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져온 이가 쓴 산문집이다. 오랜 시간 한 직업에 천착한 이가 보여줄 수 있는 핍진함이 문장마다 서려 있다. 때로는 미용 가위의 입을 빌려, 때로는 매만져지는 머리카락을 빌려 삶과 사랑, 유년의 기억과 가족의 얘기를 풀어간다. 소박한 생활의 아름다움이 잔잔히 전달된다. 9500원. ●사랑을 디자인하다(김희성 지음, 금빛날개 펴냄) 군산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이며 한국디자인산업 1세대인 저자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청춘 시절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여러 형태를 자신과 주변 이야기를 버무려 풀어간다. 40대에 문득 찾아온 사랑, 육촌 동생에게 품었던 연심, 교수와 제자의 사랑, 마도로스와의 사랑 등이 풋풋함과 금기의 영역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1만 5000원.
  • “방치된 한국르포 제 역할 찾기를…”

    “방치된 한국르포 제 역할 찾기를…”

    “한국 문단에서 사실상 방치되다시피한 장르인 르포가 다시 제 역할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설가 김곰치(41)가 자신의 두 번째 르포·산문집 ‘지하철을 탄 개미’(산지니 펴냄)를 내놓았다. 물론 본업은 소설가 맞다. 하지만 199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소설가로서의 가시적 성과물은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1999), ‘빛’(2008) 두 권이 전부다. 최근에는 본업보다 르포 글쓰기에 심취해있다. 2005년 첫 번째 르포·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에서 새만금, 천성산 등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중심에 놓은 르포를 썼다. 두 번째 르포·산문집인 ‘지하철’에는 녹색평론과 국가인권위 기관지 ‘인권’ 등에 주로 썼던 르포 12편과 산문 13편을 담았다. 2005년 숨진 원폭 2세 환우 김형율씨 이야기 등을 담은 르포는 새롭게 읽힌다. 반핵 평화운동가였지만 일본과 한국 정부의 냉대는 물론, 원폭 1세, 2세로부터도 돈키호테 취급 받은 그의 불우한 삶과 고민 등을 폭넓은 취재에 바탕해 담담한 필치로 풀어냈다. 이 밖에 뉴타운 지구 내 단독주택 마을인 한양주택 르포는 주거 형태와 개인의 행복의 관계를 잔잔히 살피게 한다. 또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를 겪은 태안 르포 등 약자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옹호의 시선으로 쓴 글들도 담겼다. 그는 “취재과정부터 글을 쓰기까지 보람과 사회적인 효용가치도 크다.”며 “단편소설보다 르포를 훨씬 더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많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세월이 지나도 가치 있는 문학성을 담은 르포를 쓰기 위한 고민이 많다.”고 덧붙였다. 김곰치의 르포 예찬은 이어졌다. “겸손하지 않으면 르포 글쓰기는 불가능합니다. 무지랭이 노인들의 얘기도 정중히 듣고 글쓰기에 고스란히 반영해야하는 것이 르포죠. 소설가의 삶에 익숙한 이들은 쓰고 싶어도 못 쓸 거예요.”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소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꿈틀댄다. 그는 “사실 나도 르포 작가라는 호칭보다 여전히 소설가라는 호칭이 더욱 듣기 좋다.”면서도 “과거 사실주의 문학 등에서 담았던 사회정치 영역의 소재와 주제는 르포문학에 넘겨주는 것이 더욱 커다란 울림을 가질 수 있으며, 기존의 문학 장르는 인간 내면의 탐구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빛’ 이후 3부작으로서 ‘말’, ‘소리’를 완성시키는 것이 그의 평생의 과업이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설득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내년초쯤 800장 짜리 경장편 소설을 내놓을 예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작가 공지영 “7년간 3번 이혼, 다신 재혼 안해”

    작가 공지영 “7년간 3번 이혼, 다신 재혼 안해”

    인기 작가 공지영(48)이 9일 밤 방송된 MBC ‘황금어장’ 1부 ‘무릎팍 도사’ 에서 세 번이나 이혼한 사실과 그 배경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뒤 오히려 통쾌함을 가졌다고 밝혔다. 공지영은 “과거에 친한 기자에게 ‘내가 지금 성이 다른 세 친구를 키우고 있다’고 우연히 말했는데 ‘세 번 결혼, 세 번 이혼, 세명의 아이’라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나더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신문보도 후 한편으로는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간 대중의 손가락이 무서워 이혼 사실을 숨긴채 숨죽이고 살았는데 ‘이제는 나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기사가 나가자 아버지가 전화를 해 ‘난 네가 세 번 이혼한 거 정말 싫다. 하지만 네가 불행한 건 더 싫다. 알아서 잘 하거라’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이혼 배경에 대해선 “소설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요구해 함께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서로 안 맞았던 것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재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공지영은 또 “어렸을 때 부유하게 자랐지만 살아오면서 빈부 격차가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다.”면서 “내가 그렇게 자랐던 것은 내 선택이 아닌 단지 운명일뿐이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원초적인 미안함이 글을 쓰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자신의 작품 3권이 한꺼번에 베스트셀러에 올라 ‘공지영 신드롬’을 부른 것에 대해선 “평론가들이 왈가왈부 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지만 나와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들이 나에게 ‘얼굴로 책판다’, ‘작가치고 예쁘다’ 등 내 작품이 아닌 외모에 관해 평가를 내렸을 때는 너무 큰 상처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었다.”는 고백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은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한편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공지영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한 네티즌은 “간접 경험에 의해 느끼고 그걸 토대로 글을 쓴 것 같다.”면서 “부유한 것은 내탓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아 이사람은 모든 걸 참 쉽게 생각하는 구나’라고 느꼈다.”고 썼다.  다른 네티즌은 “공지영 작가가 가난을 겪지 않았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방송에서도 처음부터 부유한 사람으로 태어나 멋 모르고 자랐지만 대학시절에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고 스스로 고민하고 되돌아 봤다고 말했는데 이보다 어떻게 더 솔직하냐.”고 두둔했다.   이날 ‘무릎팍도사’의 시청률은 AGB닐슨 조사 결과, 평소보다 높은 17.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공지영은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중편소설 ‘동 트는 새벽’이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첫 장편소설은 89년 나온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있다. 소설집은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등이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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