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사회 불안정
    2026-04-12
    검색기록 지우기
  • 출국금지
    2026-04-12
    검색기록 지우기
  • 서울 자치구
    2026-04-12
    검색기록 지우기
  • 국방장관
    2026-04-12
    검색기록 지우기
  • 공공주택
    2026-04-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057
  • 이란 ‘석유 무기화’ 거세진다

    TEXT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각료로 지명한 21명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알리 사이드루(53) 석유장관 지명자가 의회의 인준 투표를 통과하지 못해 이란 정국에 파란이 일고 있다. 사이드루의 인준 실패는 지난 6일 취임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게 강경파 일색의 내각과 함께 핵 협상 등 난제를 돌파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겼다. 동시에 세계 4위이자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가운데 2위의 산유국인 이란의 석유 정책을 더욱 강력한 인물이 지휘해야 한다는 것이 의회의 뜻이어서 국제 석유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사이드루는 24일 인준 투표에서 284명의 마즐리스(의회) 의원 가운데 101명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교육, 협력, 사회복지 장관 지명자도 인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3개월 안에 새로운 후보를 지명해야 한다. 골람알리 하다다델 의회 의장은 사이드루 지명자가 국가 핵심 부처를 통솔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해 부결됐다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사이드루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테헤란 시장으로 일할 때 부시장을 지낸 인물이며 아마디네자드가 대선에 출마한 지난 6월 이후에는 시장 대행을 맡는 등 ‘그림자’ 역을 자임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의원들은 핵협상에서 이란의 유일무이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석유의 무기화’를 성취하기에는 사이드루의 역량과 뚝심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이드루는 나흘간의 인준 토론에서 자질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의원들의 질타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심지어 테헤란 부시장 시절인 2003년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것도 문제가 됐다. 반미 정서가 강한 의원들은 서방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상당수 의원들은 핵협상에서 유럽을 압박할 때 석유를 지렛대로 삼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하려면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석유장관이 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석유장관에 더욱 강경한 인사를 임명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새 지명자가 인준을 통과하기 전에는 당국이 추진해온 외국 자본의 국내 유전개발 참여도 보류될 전망이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시론]우리술 산업 육성 이렇게/정헌배 중앙대 경영학 교수

    [시론]우리술 산업 육성 이렇게/정헌배 중앙대 경영학 교수

    우리 전통 민속주 산업, 특히 우리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주류산업을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우리 사회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지난 세월 우리 술 업계의 생존 노력 역시 눈물겨울 정도로 처절했다. 그러나 시장에 자리잡은 우리 술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류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 등과 같은 선진국은 그렇다 치자. 이웃나라 중국은 문화 유산으로서 주류 발굴을 11회나 실시하여 유명한 술인 마오타이주 등을 개발, 세계 각지에 출시하고 있다. 일본 역시 지난 1980년도부터 시작한 위스키 국산화 전략에 성공하여 이미 세계 100대 위스키에 자국산 브랜드 7개를 진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술 소비국가인 우리나라는 세계화된 술 육성은 커녕 수십조원이 넘는 국내 시장마저도 수입 양주를 중심으로 한 수입 의존형 대중주에 거의 모든 자리를 빼앗긴 참담한 실정이다. 88서울올림픽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표주종이던 탁주의 주세(酒稅)가 현재는 연간 수십억원에 불과하여 전체 국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1960년 이후부터 양곡사용 금지 조치로 인해 우리의 대표적인 명주(銘酒)인 약주 제조가 중단되었다. 약 40년간의 신규제조면허 불허와 읍 소재지마다 있었던 재래식 소주를 통폐합해 고유의 소주도 몰락시켰다. 결국 우리나라 주류산업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과도한 진입규제, 주세율 차등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왜곡으로 전통주류가 사라지고 국가 대표 주종이 없어졌다는 점과 대중 주류일수록 대형업체에 의한 과점적 공급구조를 갖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주류 제조원료마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고급 완제품 주류의 수입이 급증하는 현상 역시 문제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고유 술의 산업 경쟁력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이제 우리 주류산업에도 선진국형 정책도입이 절실하다. 제조업체에 대한 일회성 자금지원이나 면허부여 조건 완화 등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제품 생산과 마케팅 기술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전략적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연간 생산량을 기준으로 발효주의 경우 5㎘ 미만, 증류주는 2㎘ 미만인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주세를 전면 면제하거나 연간 100㎘ 미만의 우리 술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영세율을 적용하여 주세를 50% 감면하는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 우리 술의 품격을 다양화할 수 있도록 주류제조 방법에 있어서 식품위생법규상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제외한 일체의 식품첨가 물료는 신고만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 술의 최대 약점인 제조 기술적 취약성으로 인한 제품 품격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도 실천적인 교육기관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 술의 경우 생산시설, 생산기술, 영업능력 등 모든 사업적 역량이 영세하고 취약해 우수한 제품 제조가 원천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정부는 생산자단체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품질관리, 제품수준 공인, 공동브랜드 개발, 공동 마케팅, 공동 유통망 관리 등이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판매력을 갖춘 종합주류도매업체, 슈퍼체인중앙회 등 도매업체의 주문자상표 또는 공동상표사용을 허용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현실이나 주류시장의 구조, 그리고 우리 술 제조업자의 의식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술을 살리는 길은 멀고도 험한 역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 농업이 처해진 상황이나 주류시장의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술은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 하루바삐 육성해야 할 분야이다.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 교수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의 저자들 중에도 비교적 낯선 인물이 있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계 역시 조선시대엔 상당히 유명한 예언가였다. 서계가 살던 16세기는 우리 역사상 별들의 시대였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거장들이 일시에 배출되어, 성리(性理)를 궁구했다. 노수신·백인걸·유희춘임억령 등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이도 많았고, 최경창·백광훈·이달 등 시문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 등은 신선의 세계를 드나들어 이채를 띠었다. 불가(佛家)에도 서산대사 같은 거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16세기의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우선 토정과 북창이 그렇고, 격암과 서산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서계도 이 부류에 속한다. 서계는 유학자인 동시에, 역술가요 음악가였다. 그가 지었다는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臧訣)은 현재 ‘정감록’의 일부로 되어 있다. 서계는 누구였는가? 그의 저술로 알려진 ‘서계이선생가장결’은 또 어떤 책인가? 그리고 서계가 살던 16세기가 ‘예언가들의 전성시대’로 불릴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서계 이득윤이란 예언가 서계는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를 많이 했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진사(進士)가 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서계는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밝았다. 당시 역술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방문해 수준 높은 토론을 펼쳤다 하며, 이를 계기로 역학의 대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우주자연의 생성과 운행원리에 관한 전문가였다. 쉽게 말해, 서계는 주역 점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런 덕택이었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서계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처음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밖에 한두 가지 벼슬을 더 지냈다. 그러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조정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이 서계의 고향이었다. 그는 낙향 직후인 광해1년(1609) 미원면 일대 9곳에 이른바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정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푸젠성 무이산에 머물며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묻혀 지낸 사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서계는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만경대(萬景臺), 후운정(後雲亭), 어암(漁巖), 옥화대(玉華臺), 천경대(天鏡臺), 오담(鰲潭), 인풍정(引風亭) 및 봉황대(鳳凰臺)를 두었다. 옥화구곡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구곡 가운데서 서계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제4곡 옥화대였다. 옥화란 옥구슬이 떨어지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옥화대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원면 옥화리엔 서계가 지은 추월정(秋月亭)도 남아 있다. 서계처럼 ‘구곡’을 정해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는 태도는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같은 이도 ‘고산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서계는 옥화구곡에 칩거했다. 이 때 그는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통해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되듯, 일평생 서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역학이었다. 그에겐 또 하나 전문분야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정두원(鄭斗源)을 상대로 거문고에 관한 지식을 교류했는데, 나중에 서계는 한국의 역대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만들었다. 일종의 거문고 악보였고, 이를 통해 서계는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남겼다. 서계가 못마땅하게 여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관직에 복귀했다.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충청도 괴산 군수에 임명됐다. 바로 그 때의 일이다.‘실록’에 보면, 서계는 서울에 올라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는 길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서계가 이렇게 말했다.“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맞았다며 그의 예언능력에 감탄했다. 예언가 서계는 매우 유능한 지방관이기도 해 통치 실적이 당대 최고였다 한다(실록, 인조8년 5월28일 정미). 요컨대, 서계는 주역(周易)의 대가로 출세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었고 정묘호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예언가 서계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주역 실력에 기인했다. 뒷날 서계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들은 서계를 주역의 대가로서보다는 성리학자의 전형으로 기렸다. 이것은 예언가 서계에 관한 일반 민중들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의 내막 서계가 남겼다는 예언서의 제목엔 ‘가장결’이란 용어가 포함돼 있다. 말 그대로라면 집안에 보존되어 오던 비결이어야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후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서계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였다. 그런데 그 ‘가장결’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서계의 집안에 전승된 비결은 아니었다. “선생이 사기막(沙器幕)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 와서 여쭸다. 임진(壬辰)의 화는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뒤엔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선생이 그럼 네게 말해줄까 라고 대답했다.”(서계이선생가장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문제의 예언서는 서계 집안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서계의 제자로 추측되는 최씨가 애써 부탁해서 얻은 예언서였던 만큼 그 전승과정에서도 최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최씨는 서계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까? 우선 당장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예언서가 ‘정감록’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적호(赤虎):이인(異人)이 남쪽으로부터 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倭人)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중략) 청계(靑鷄):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뉘니 어찌할 것인가.(중략) 흑룡·현사(黑龍·玄蛇): 푸른 옷과 흰옷이 함께 동쪽과 남쪽에서 나온다.”(‘서계이선생’) 위에 인용한 내용은 말세의 시운을 말하는 것인데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말세엔 이인 또는 진인이 등장한다. 둘째, 국토가 분단된다. 셋째,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해, 인용문에 나오는 ‘적호’와 ‘청계’ 같은 것은 60갑자를 이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청계’의 ‘청’은 갑(甲)과 을(乙),‘계’는 유(酉)를 가리킨다. 청계는 곧 을유년이다.‘서계이선생은’ 을유년에 천리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3국 분국설은 18세기 이래 정감록의 골자를 이뤘다.‘서계이선생’은 그 전통에 충실한 예언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이 바로 을유년이었다. 예언서의 내용과는 달리 나라는 셋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해에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적호(병인)에 이인이 나와 화친을 주장한다는 내용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고종 3년의 병인양요(1866)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흑룡(임진) 현사(계사) 연간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고 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병인양요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면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창작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서계이선생’은 일단 1860∼187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계이선생’의 저술연대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첫째,‘서계이선생’이 19세기 후반에 저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 근거는 예언서에서 발견된다.“이상하도다, 세상의 재난이여! 병란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로다. 가뭄이 아니면 수재요, 흉년이 아니면 역병이다.”(‘서계이선생’) 여기서 보듯, 이 예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조짐은 외침이나 내전을 비롯한 전쟁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연재해와 전염병이었다. 인플루엔자와 장티푸스, 콜레라가 한국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에 ‘서계이선생’은 쓰여졌다고 본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민중을 몹시 괴롭히던 때 ‘서계 이선생’을 빙자한 말세의 예언이 나왔다고 추정된다. 그 때는 다름 아닌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갑오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 같은 대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병인년(1866) 이후 갑오년(1894) 이전에 저술됐다는 이야기다. 둘째,19세기 후반 창작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도 ‘서계이선생’에서 발견된다. 문제의 예언서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기회에 ‘서계이선생’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서계이선생가장결’의 특징 이 예언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말세의 징후를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정감록’은 대체로 전쟁의 발발을 말세의 시작으로 본다. 둘째, 피란지를 충청도, 그것도 주로 충청북도에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이 주요한 길지로 부각된다. 충청남도의 경우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도 거론된다. 길지로 선정된 지역이 충청북도에 많고, 특히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서계 이득윤의 고향이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연치 않은 것 같다. 설사 말세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서계의 붓끝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지에 관한 언급은 서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서계와 동시대의 인물이던 격암 남사고가 그랬듯, 서계도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길지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셋째, 이 예언서엔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 나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돼 있다.“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 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농사일에 진력하면 난세를 이겨낸다고 주장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여느 예언서와는 다른 점이다. 간혹 ‘정감록’에 밭(田) 또는 개활지에 살길이 있다고 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서계이선생’처럼 뚜렷하게 독농(篤農)을 주장한 경우는 없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계이선생’은 힘써 농사짓기를 거듭 강조한다. 이런 대목은 생전에 훌륭한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계의 진심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계이선생’엔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지 싶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서계가 작고한지 300년가량 지난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 ●16세기는 예언가들의 전성시대 신기하게도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문화계에 많은 별들이 등장했다. 특히 그 가운데 이름난 예언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것은 내 억단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이유를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한다. 첫째, 당시 사회가 무척 불안정했다는 점이다.16세기에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길흉화복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런 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선비들도 생겨났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쟁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왜적이 침략해 사회는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16세기에 활동한 기인(奇人)과 이승(異僧)의 언행에서 예언을 발견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됐다. 둘째,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계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 시기엔 성리학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두해 자웅을 겨뤘다. 하지만 조선의 사상계는 아직 그다지 경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 이단으로 지목한 불교, 도교 및 음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학계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격암 남사고의 경우처럼 역학 또는 음양학의 대가들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 번호의 주인공 서계 이득윤 역시 그러했다. 셋째, 한국역사상 드물게 지방문화가 융성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급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수도에서만 가능했다. 그 시대엔 지방에 고급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편차는 조선시대에 들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창안된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전해지면서 지역개발 붐이 일어났고, 새 시대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전원문화(田園文化)가 고급문화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16세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가 경제적인 면에서 골고루 개발됐고, 그 문화적 수준도 서울과 비등하였다. 각지에 고급문화의 거점이 들어섬으로써 성리학이든 역술이든 대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예컨대 남사고는 경상도 출신이며, 이지함과 이득윤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도 사회적 불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더욱 심해졌다고까지 하겠다. 지방의 문화적 수준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비해 서울과의 문화적 편차는 더욱 커졌다. 사상적인 면에선 어떠했나? 이른바 ‘이단’(異端)이 공식적인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쳤다. 지배층이 내세운 이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멀쩡한 성리학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되었다. 이처럼 사회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새 예언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예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더욱 늘었지만 누구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가로 행세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이라 16세기를 수놓은 예언가들의 화려한 이름은 계속 도용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래 예언가로 정평이 나있던 토정이나 서계의 이름을 빌려 새 예언서가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해묵은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동거는 필수… 결혼은 선택”

    “동거는 필수… 결혼은 선택”

    서른살 동갑인 제나와 세바스찬은 10년째 함께 살고 있지만 아직 결혼할 계획은 없다.2년반 동안 동거해온 32살 동갑내기 킴과 트래비스는 최근에야 내년 3월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결혼 및 가정 ‘지형’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결혼보다 동거를 택하는 미국인 커플들이 늘고 있다. 미국의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성인 남녀 100쌍 중 8쌍은 동거 커플이다. 북유럽, 특히 스웨덴을 닮아가고 있다. 결혼 대신 동거하는 커플이 늘면서 세계에서 이혼율이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인 미국에서 최근 들어 이혼이 줄고 있다고 미국 럿거스대학 부설 ‘전미결혼프로젝트’가 1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 연구소의 데이비드 포페노 교수는 그러나 동거 커플이 결혼한 부부보다 갈라설 가능성이 훨씬 높고, 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자녀를 두고 있어 동거의 증가는 이혼율 증가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美, 지난해 결혼율 1970년대 이후 최저 지난해 이혼율은 결혼한 미국 여성 1000명당 17.7로 2000년의 18.8과 1980년의 22.6보다 크게 떨어졌다. 반면 결혼율도 급감했다.1970년 미혼 여성 1000명당 결혼한 비율은 76.5였으나 지난해에는 39.9로 거의 50% 낮아졌다. ●동거 커플 급증 지난해 미국의 동거 커플은 500만쌍을 넘어섰다. 이는 전체 미국 가구수(이성간 결합)의 8.1%에 해당한다.1960년 43만 9000쌍과 비교할 때 거의 10배나 급증했다. 결혼 적령기의 20∼30대 남녀에게 동거는 경제적 또는 감정적 이유에서 보편화돼 가고 있다. 결혼한 미국인 중 절반 이상은 결혼 전 동거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거 커플이 늘면서 이들 사이에서 출생하는 아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신생아의 35%가 미혼모에게서 태어났고, 이 가운데 40%는 동거 커플의 자녀였다. ●동거가 이혼보다 큰 문제 될 수도 동거하는 커플이 느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의 경우 결혼한 커플보다 헤어질 가능성이 2배나 높고, 자녀를 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또 결혼한 부부라도 이전에 동거한 적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이혼할 확률이 더 높다고 바버라 화이트헤드 박사는 지적했다. 포페노 교수는 “한 사회가 결혼에서 동거로 (남녀간 결합 형태가) 옮겨갈 경우 가정의 불안정이 커지게 된다.”며 부작용을 지적했다. 비록 이혼율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이혼하는 부부가 많고 동거했다가 헤어지는 커플까지 늘면서 친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서구 국가들 중에서 아이들이 친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이 63%로 가장 낮다. 이는 높은 동거비율에도 불구하고 이혼율은 낮고, 아이들이 친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 ‘안정적인 가정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유럽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데스크시각] 新유목민시대의 명암/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인류 미래의 대안을 노마드(유목민)에서 찾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노마드적 삶의 양식에 주목한다. 그가 말하는 노마드란 물론 광활한 초원에서 소나 양떼를 키우는 소박한 의미의 유목민이 아니다. 직업이나 주거, 가정을 수시로 바꾸는 불안정한 ‘도시 유목민’ 내지 첨단 정보기술로 무장하고 사이버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마드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현대에 들어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의 의미는 점차 확장되고 있다. 공간적인 이동뿐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까지 그 범주에 든다. 직업을 따라 유랑하는 잡(job) 노마드의 등장 또한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세계화와 디지털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흐름 속에 기존의 정착생활 방식을 바꿔놓고 있는 이들은 사이버 제국의 시민이다. 사이버 공간의 분신인 복제이미지가 그들의 일상을 대신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마셜 맥루언의 지적대로 미래의 세계는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 지구 곳곳을 떠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가득차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현대판 노마드의 삶이 그 유연함만큼이나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하다.X세대,N세대 등을 통해 이어져온 신(新)노마드족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중시한다. 때문에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 같은 것은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사이버상에서 알게 된 아이와 연락을 갖는 ‘사이버아줌마’니 ‘임대아이’니 하는 말은 그런 정황을 잘 설명해 준다. 최근 새로운 사회병리 현상으로 떠오른 이른바 ‘리셋 증후군’도 노마드적 충동이란 관점에서 다룰 만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존의 일이나 인간관계를 일거에 뒤집어보려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유목민’의 부정적 양상이 아닐 수 없다. 기자는 이 지점에서 최근 몽골 여행을 통해 느낀 진정한 유목의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신석기시대 이래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인들에게 유목은 운명과 같은 것이다.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그것은 견원지간인 중국인들과 벌이는 그들의 논쟁을 통해서도 어렵잖게 확인된다. 중국의 내몽골과 신장 지역 260개 현에는 4000만명의 몽골족 후손들이 대부분 정착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쪽의 농경민(중국인)들은 유목민들을 가축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집 하나 제대로 없는 괴상한 인간들이라고 비웃는다. 반면 몽골인들은 남쪽 농경민들을 땅바닥에 늘 엎드려 하늘이 얼마나 높고 신비한지도 모르는 잡초벌레라고 조롱한다. 몽골어로 ‘계속해서 한 곳에 거주하다.’라는 뜻을 지닌 ‘코르고다크’라는 동사는 몽골인들에게는 가장 경멸적인 표현에 속한다. 그러니 몽골 정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추진하고 있는 토지사유화와 정주정책에 유목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유목민적 덕목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유목민 특유의 수평적 사고와 협동의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만년 가까이 농경 정착민으로 살아온 우리로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대목이기도 하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유훈이 새겨진 비문이 있다.“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이를 오늘의 현실에 대입하면 정착민의 닫힌 사회, 수직적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몽골 사람들은 종종 “떼를 지은 까치는 혼자서 가는 호랑이보다 힘이 있다.”라는 속담을 들먹인다. 그 뜻 역시 곰곰 새겨볼 만하다. 휴대전화와 노트북이 사이버 유목전사들을 양산해 내는 요즘이기에 원시 노마드의 청신한 기풍은 더욱 요구된다. 몽골 초원에서 만난 유목민들은 결코 야만과 무지의 화신이 아니었다. 유목민에 대한 상(像)은 그동안 정착민적 사관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돼 왔다. 몽골 유목민은 기자에게 인류의 문명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 일종의 정면(正面)교사였다. 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 中 ‘美석유기업 유노콜 사냥’ 외교전쟁 비화

    中 ‘美석유기업 유노콜 사냥’ 외교전쟁 비화

    중국의 미국‘기업인수·합병(M&A)’ 불똥이 중·미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중국해양석유공사(CNOOC)의 미국 석유업체 유노콜의 인수 추진에 미국 의회가 국가안보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행정부의 인수 저지 조치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어떤 정치적 개입도 없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반면 미국 의회는 석유같은 전략 산업을 중국에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돈과 정보력 등 정부의 뒷받침속에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중국의 해외기업 사들이기가 국제적인 외교마찰과 ‘평지풍파’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 의회의 제동 공화당 등 미국 상·하원의원 40여명은 23일 CNOOC의 유노콜 인수 시도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면서 제동을 걸었다.“유노콜이 넘어가도록 방치할 경우 국가 안보는 물론 경제전반에도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 의회는 “에너지 같은 전략 부문을 중국에 넘기면 앞으로 미국안보에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CNOOC는 중국정부 직속의 국영기업이어서 유사시 미국에 천연가스와 유류 공급을 끊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앞서 CNOOC가 처음 인수 의향을 밝혔을 때도 부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견제를 촉구했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 자국 석유회사를 중국 국영기업에 넘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민감한 외국투자나 기업 인수합병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는다. 국무·국방·국토안보부 및 백악관 관계자들로 구성된 ‘외국투자위원회’를 열어 승인 여부를 검토하고 대통령이 이를 토대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경제계의 불안 미 의회의 이같은 반응은 경제계 등 미국사회 전반의 중국에 대한 우려와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해마다 8%이상의 경제성장을 보이며 약진하고 있는 중국이 최근들어 6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앞세워 미국기업 인수에 전례없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조만간 중국에 따라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들 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경제계는 중국이 M&A를 통해 핵심기술에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경계하는 분위기다. 기업을 사들여 미국과의 기술력 격차를 쉽게 따라 잡겠다는 전략으로 풀이하고 있다. ●중국의 끼어들기 미국인들은 CNOOC의 끼어들기에 더욱 불쾌한 표정이다. 기존 매수 희망자이자 매수 가계약자인 셰브론 텍사코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유노콜에 ‘러브 콜’을 보내며 중간에 끼어들기를 했기 때문이다.CNOOC는 지난 23일 현금지급 조건으로 185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2위 석유회사 셰브론 텍사코가 지난 4월 주식교환과 현금지급의 혼합방식으로 합의한 166억 5000만달러보다 많다. 또 셰브론에 대한 위약금 5억달러와 유노콜 부채 16억달러를 떠안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중국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는 중국 국영기업들이 자국 기업을 밀쳐내고 또다른 자국 기업을 사가려하는 것을 보고 편치않음을 표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유노콜의 향방 당사자 유노콜은 자국 기업인 셰브론텍사코와 중국의 CNOOC, 두 ‘구애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유노콜측은 29일 오는 8월10일 주주총회를 열어 두 회사의 인수 제안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유노콜측은 몸값을 최고로 치러주는 기업이면 국적에 관계없이 몸을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과는 또 다르다.AFP통신은 “유노콜 주주 입장에서는 단연코 CNOOC 조건에 호감이 갈 것”이라며 “주주들은 CNOOC가 미 당국을 어떻게 설득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기다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월가에선 외형적인 조건은 CNOOC가 좋지만 미국내 반중 분위기와 중국 국영기업의 불투명성 등을 감안 할때 셰브론으로 대세가 기울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도 미국의 대외 석유의존 심화란 요소를 고려할 때 정치적 변수가 경제적 손익계산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신용평가기관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도 지난 23일 중국 정부가 71%의 지분을 가진 CNOOC가 유노콜을 인수할 경우 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했다. ●거부권 행사? 유노콜이 CNOOC를 선택할 경우 부시 대통령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올 5월 중국 거대 전자업체인 레노보가 미국 IBM의 PC사업 부문을 인수했을 때의 사례에 미뤄보면 ‘외국투자위원회’ 개최는 거의 확실하다. 존 스노 미 재무장관도 지난 23일 의회 청문회에 출석, 유노콜과 관련된 질문받고 “유노콜과 CNOOC간에 인수·합병이 합의될 경우 당국이 승인 여부를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과정은 대개 두달 이상이 걸린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中글로벌전략 ‘세계가 긴장’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발 (M&A)태풍이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외자유치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이 세계경제의 심장부 미국을 향해 ‘바이 아메리카(미국 기업 사들이기)’를 선언했다. 막대한 달러 보유고를 지렛대로 중국은 미국 이외에도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등의 ‘알짜기업 사냥’에 착수,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미국기업 사냥’ 분야는 IT와 에너지 등 국가 안보에 민감한 분야에 집중돼 있다. 중국의 간판급 가전 업체인 하이얼(海爾)지난 21일 미국 5위의 가전업체 메이택을 인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제시 인수 금액은 12억 8000만달러. 하이얼의 최종 인수 여부는 실사가 끝나는 6∼8주 이후에 결정된다. 하이얼은 메이택 인수를 계기로 미국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경쟁국인 한국과 타이완·인도 등에 상대적으로 뒤진 첨단 기술력을 만회하겠다는 복안이다. 중국의 미국기업 사냥은 에너지 부분으로 확대 중이다.CNOOC의 유노콜의 인수 의사도 이런 분위기속에서 이뤄졌다. ●공격적인 기업 사냥 중국은 지난해 중국 PC 업체인 레노보가 미국 IBM의 PC 사업 부문을 17억 5000만달러에 인수, 첫 ‘미국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인수를 계기로 본사를 베이징(北京)에서 뉴욕으로 옮긴 레노보는 델,HP에 이어 세계 3대 PC 메이커로 부상했다. 중국 국영 자동차업체인 치루이는 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자동차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이외에도 중국의 전자업체인 TCL은 지난해 7월 프랑스 톰슨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세계 최대의 TV 메이커로 떠올랐다. 지난해 10월 상하이 자동차그룹(SAIC)이 한국의 쌍용차를 인수했다. 중국 제2의 석유업체인 중국석유화공(中國石油化工·시노펙)도 캐나다 석유업체 인수를 추진 중이며, 중신(中信)그룹 산하의 중신자원(中信資源)도 태국 기업 인수에 뛰어들었다. ●속도높이는 글로벌화 전략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이른바 ‘저우추취(走出去)’로 불리는 중국당국의 해외 투자전략에 따른 것이다. 상무부 국제무역 경제연구소 허마오춘(何茂春) 박사는 “중국의 해외진출은 중국 경제의 ‘글로벌화’와 국제경쟁력 강화가 주요 목표”라고 지적했다. 중국 해외투자는 종전에는 기업별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단계다. 최근 중앙·지방 정부가 주도적으로 중국기업의 해외진출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적으로 외환보유고를 적절하게 분산, 인민폐 평가절상 압력을 완화하는 동시에 신시장 개척과 신기술을 도입하겠다는 전략이다. 신흥 민영 기업들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불안정성을 감안,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꾀하는 상황이다. 중국의 해외 투자가 당분간 ‘봇물’을 이룰 수밖에 없는 정치·경제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종일 코트라 베이징관장은 “시장과 기술을 바꾼다는 것이 중국의 외자유치 전략”이라며 “중국은 이제 최고의 기술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외에 투자할 의지와 여력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말 현재 중국 대외투자 누적 총액은 370억달러로 160개국에 걸쳐 829개 기업에 달한다. 올해 추진되고 있는 인수합병이 성공리에 끝날 경우 중국의 해외투자는 500억달러가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 91년 3억 7000만달러의 해외투자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oilman@seoul.co.kr
  • 빈곤층 70~80% 4대연금 ‘사각’

    우리나라 빈곤층의 70∼80%가 국민·공무원·군인·사학연금 등 4대 연금에서 배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생활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후 생계대책 또한 속수무책인 상황이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3일 발간한 보건복지포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502만 3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전체 인구 4829만 4000명을 기준으로 할 때 9.62명당 1명 꼴이다. 이같은 빈곤층은 최저생계비(올해 4인가족 기준 월 113만 6000원) 이하 소득 가구와 실업·고용불안정·가정해체로 생활이 위협받고 있는 가구 구성원을 합산해 산출한 것이다. 빈곤층 가운데 4대 연금에 가입돼 있는 비율도 극히 낮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전체 93만여명) 가운데 79.2%, 차상위계층(전체 39만여명) 중 71.2%가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연금에서 배제돼 있다. 국민연금을 제외한 공무원·군인·사학연금 가입자는 0.3% 수준에 불과하다.고용보험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수급자(전체 32만여명) 가운데 86.9%가, 차상위계층(20만여명) 중 75.3%가 미가입 상태이고, 산재보험에도 절반 이상이 가입돼 있지 않는 등 생활의 안정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특히 빈곤층의 4분의1 정도인 122만 8000명이 빈곤아동들로 이들 중 33.1%는 수업료나 결식아동 급식비, 보육료 등 정부의 공적 급여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빈곤의 고통이 아동들에게 가해지고 있으나 정부가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집값 폭등 ‘全지구화’

    집값 폭등 ‘全지구화’

    주택가격의 급등 현상이 전 지구촌으로 확산되고 있다. 30년 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미국과 서유럽의 집값마저 10∼20%가량의 오름세를 보이면서 부동산 열풍에 휩싸여 있다. 뉴욕 타임스(NYT)는 12일(현지시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의 집값이 2003년 3·4분기부터 1년 동안 6.7∼17.2% 뛰어올랐다고 전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이들 지역의 평균 오름세가 1.3∼3.6%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급등 현상이라 할 만하다. 이는 미국 등 전세계적으로 낮은 금리와 주식 시장의 불안정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부동자금들이 부동산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규제 장벽 완화로 자금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 투기 자금들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집값 등 부동산 가격을 올려놓고 있어서다. 특히 뉴욕, 런던, 파리, 상하이 등 국제도시와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시드니, 밴쿠버 등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집중적으로 올랐다. 스페인은 해안 관광도시의 상승세가 두드러졌고, 홍콩 집값은 1년 새 31.2%나 폭등했다. NYT는 “맨해튼에서 방 2개짜리 아파트가 100만달러(10억원)에 달하는 것은 뉴욕만의 사정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라고 강조했다.“세계적인 주택가격 상승 현상은 ‘세계화의 부산물’”이라며 “대출을 통해 주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금융 시장이 더욱 개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에 대해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 오름세는 실수요가 많아졌다기보다는 투기에 따른 거품 현상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AFP통신은 최근 “지난해 팔린 미국 내 주택의 23%가 투기자본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영국 리딩 대학 경제전문가의 말을 인용,“오름세가 계속될 수는 없다. 곧 절정에 다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또 워싱턴 국제경제연구소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의 말을 빌려 “국제유가의 급등 등 다른 경제적 충격과 맞물려 주택시장의 거품이 터질 경우 세계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업계의 부동산 담보대출 비율이 높아진 상태에서 부동산가격 폭락은 금융 부실화로 이어지고 결국 소비 및 투자 위축으로 연결돼 경제를 늪에 빠지게 할 것이란 분석이다. 느긋하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집값의 거품 붕괴를 우려하면서 금리를 조금씩 올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부동산 투기로 인해 경기가 과열되고 거품 붕괴의 우려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난 1일부터 새로운 부동산정책을 시행 중이다. 부동산거래 실명제, 미등기 전매금지, 단기 전매시 양도소득세 부과 등이 골자다. 집값 상승의 지속 여부에 대한 이론 속에서도 현재와 같은 각 국의 저금리 정책과 주식시장의 부진이 지속될 경우 상승세가 꾸준히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우리부처 이렇게 바뀐다] 이남훈 여성부 혁신인사담당관

    [우리부처 이렇게 바뀐다] 이남훈 여성부 혁신인사담당관

    “작은 조직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변화를 주도하겠습니다.” 오는 6월 여성가족부로 거듭나는 여성부의 이남훈(39) 혁신인사담당관은 혁신의 방향을 “여성부만의 맞춤식 프로그램으로 업무 효율을 높일 것”이라며 이렇게 강조했다. 생긴지 몇년 안된 부처이다 보니 직원 수도 적고, 이동도 잦지만 그만큼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자신의 대표업무 정해 온라인 기록 여성부의 직원은 150명. 다른 부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 4년이라는 짧은 역사 때문인지 업무 조정이 잦아 다른 부처에 비해 직원 이동도 많은 편이다. 지난해에만 전체 직원의 18%에 해당하는 23명이 새로 여성부에 둥지를 틀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분위기가 산만하거나 불안정할 법도 하지만 그는 “변화에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다른 부처에 비해 역동적이고, 새로운 업무 시스템 도입 등의 변화에 저항감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여성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혁신 방향은 두 가지. 안정적으로 업무를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과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브랜드 프로젝트 시스템’은 안정적인 업무를 위한 여성부만의 자랑거리다. 간부에서부터 7급까지 110명의 직원이 자신의 대표업무를 지정, 기획단계에서부터 관리, 결과 분석 등 모든 과정을 온라인으로 기록한다. 마케팅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잦은 직원이동에 따라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했다. ●모든 직원 연간 105시간 교육 공부하는 분위기는 전문성을 높이고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다. 다른 부처·기관에서 온 직원들의 제각각 다른 업무방식을 하나로 통일해 시너지 효과를 내려면 교육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올해 목표는 모든 직원이 연간 105시간의 교육을 받는 것. 지난해 1인당 평균 56시간과 비교하면 갑절 가까이 늘었다. 이 담당관은 “비록 역사는 짧지만 교육훈련을 통해 다양한 직원들의 역량을 모아 공직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나가겠다.”면서 “어떻게 달라질지 지켜봐 달라.”며 자신감을 표시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Doctor & Disease]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하규섭 박사

    [Doctor & Disease]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하규섭 박사

    “상태가 좋은 경우 2년이면 완치되는 게 조울병인데, 정부에서는 무관심하지, 의사는 우울증으로 진단하지, 가족들은 쉬쉬하며 병을 숨기거나 치료를 기피하지, 이렇게 병을 키워 ‘자살 왕국’이 된 것 아닙니까.” 의료계에서 ‘조울병 박사’로 통하는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하규섭(44) 박사. 그는 ‘이제 더는 숨기지 말고 진실을 말하자.’며 이렇게 역설했다.“치료가 필요한 조울병 환자가 전 국민의 3∼5%입니다. 대가족 구성원 중 1명은 환자라는 뜻인데, 이걸 ‘정신병’이라며 자꾸 쉬쉬하니까 낙인이 되는 겁니다. 모두 내놓고 치료받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태가 그렇게 심각한가. -심각하다. 조울병과 우울증에 대한 대책없이 자꾸 자살 예방하자고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특히 조울병의 경우 우울증과 달리 사전 예고나 징후없이 치명적인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자살하지 말자는 말이 들리겠는가. 그게 정상인의 자살이 아니라 병에 끌려 죽는 건데…. 조울병은 어떤 질환인가. -학술적으로는 기분의 양극단, 즉 아주 좋은 상태(조증)와 아주 나쁜 상태(우울증)를 오간다고 해서 양극성 장애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기분이 방방 뜨는 조증과 우울증이 교차하면서 나타나는 기분조절장애를 말한다. 그 병이 왜 문제가 되는가. -조울병의 우울증은 개별 질환인 우울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비정상적으로 들뜨는 조증이 더해져 정상적인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병에 의한 자살도 문제다. 예컨대 조증 상태에서 앞뒤 안가리고 왕창 카드 긁었다가 못 견디니까 자살을 택하는 식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마니아(mania)’라는 말이 조증의 영어식 표기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발병 원인은 무엇인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노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 등이 감소하면 우울증, 증가하면 조증을 보인다. 당뇨병이 췌장 기능의 문제이듯 이 병은 뇌의 기분조절 회로에 고장이 생긴 병이다. 세간에 조울병 발병을 두고 ‘날궂이’라고도 말하는데 근거는 있나. -날궂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근거는 있다. 조울증 환자는 특히 호르몬 변화에 민감한데, 봄에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줄면 조증을 보이다가 가을에 분비량이 늘면 우울로 돌아선다. 여성은 호르몬 양이 변하는 생리, 임신, 출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유형도 따로 구분하나. -조울병 1·2형과 기분장애 3형으로 나누는데,1형은 정도가 심해 입원치료가 필요한 단계,2형은 기분변화의 폭이 1형보다 작아 우울증으로 오진하기 쉬운 단계,3형은 기분의 불안정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유병률과 최근 발병추세는 어떤가.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핵가족화에 따른 정서적 완충구조의 해체 등이 영향을 미쳐 전체 유병률이 3∼5%, 전국적으로는 100만∼200만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향은, 이전보다 환자 수는 늘어난 반면 정도는 덜하다. 조기발견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치료에 대해서 묻자 하 박사는 완치를 특히 강조했다.“이건 틀림없이 완치되는 병입니다. 치료 예후는 고혈압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확실히 치료하지 않으면 자주 재발하는 게 문제지요. 재발할 때마다 뇌가 손상을 입는데, 환자는 증상이 조금만 좋아지면 치료 안 받으려고 하고, 의사들은 조울병을 자꾸 우울증으로 진단해 병을 키웁니다. 현재의 우울증 환자 절반이 조울병 환자라는 예측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과 첫 시도로 치료를 끝내야 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만성화되니까요.” 치료는 어떻게 하나. -조울병은 어떤 경우라도 환자 개인의 의지로는 치료되지 않으며, 리튬 등 기분조절제와 올란자핀 등 비전형 항정신병 약물, 항우울제 등을 적절하게 투여해야만 한다. 치료 효과와 현실적인 치료의 한계를 설명해 달라. -약물을 2∼3주 투여하면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해 2∼3개월 후면 많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다. 계속 6∼9개월을 투여하면 다 나은 것 같은데 여기가 치료의 함정이다. 환자들이 이 상태에서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대부분 재발해 몸이 망가지고 치료만 어렵게 한다. 하 박사에게 자가진단법에 대해 물었다.“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주일이 넘도록, 그것도 온종일 좋기는 쉽지 않으며, 우울도 2주 이상 계속되기는 어려운데, 이처럼 주위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된다면 조울병을 의심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유의할 점은 우울증은 잘 드러나지만 조증은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간과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오진도 많고요.” 하 박사는 특히 조울병을 보는 정부의 시각과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구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따르면 사회적 부담이 가장 큰 질환은 우울증이고 조울병은 5위에 올라있는데, 정책입안자들은 이를 일부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보호자가 감추고, 정부는 모르는 척하는 사이 우리 가족들이 복구불능의 상태로 망가지고 있습니다. 자살 예방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조울병과 자살을 따로 떼어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제 모두가 진지해야 합니다. 누구나 이 병을 앓는 사람은 ‘나 지금 우울해서 치료가 필요해.’라거나 ‘걱정마. 치료받고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완치된 환자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자살증가율 1위의 이면에는 이처럼 진실을 한사코 묻으려고만 하는 개인과 정부, 진지하지 못한 의사들이 있다.”며 “이제 정말 내놓고 얘기 좀 하자.”고 호소했다. ■ 하규섭 박사는 ▲서울대의대 및 대학원(박사)▲용인정신병원 정신과장▲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프란시스코의대 정신과 객원교수▲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전산화 인지기능검사실·우울증클리닉·조울병클리닉 담당교수▲현, 분당서울대병원 교수 겸 기획조정실장 및 전자의무기록개발팀장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사설] 10개월만에 이뤄지는 南北대화

    남북당국간 대화가 끊긴 지 10개월만에 남북 차관급회담을 열게 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반가운 일이다. 북핵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남북이 만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도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북한이 먼저 대화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긍정적인 변화라고 보여진다. 남북대화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반도 상공에 드리운 북핵위기의 먹구름을 걷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북한이 남북대화를 요청한 것은 시급한 비료지원과 국제사회의 강경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민족공조를 내세워 한·미관계 등 남한의 처지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렇더라도 남북대화를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는 회담에서 남북관계 정상화 및 북핵, 비료지원 문제 등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그동안 남북대화에서는 북핵문제를 다루는 것은 피해왔다. 비료 등 인도적 지원문제는 정부도 준비하고 있던 사안이어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북핵이다. 북한이 회피하더라도 남한이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6자회담 복귀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마침 뉴욕에서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미 국무부 간부와 전화접촉을 가졌다는 소식도 있었다. 대결국면을 타개하는 데는 대화보다 좋은 수단은 없다. 하지만 북핵문제는 북한의 희망처럼 북·미대화만으로 풀 수 없고 결국 주변국들이 함께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남북대화를 재개했다고 해서 한꺼번에 현안들이 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는 현안과 더불어 장관급회담 등 당국간 회담을 정례화하는 문제도 심도있게 다뤄야 할 것이다. 북한도 툭하면 핑계를 대고 남북대화를 깨는 불안정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대화가 북핵해결과 한반도 안정에 필수라는 점을 남북 공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정감록’이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730년대였다. 그것도 차별의 땅 서북지방에서였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고해 조야(朝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인데, 금지령 속에서도 재빨리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누가, 왜 정감록을 퍼뜨렸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번 호에선 18세기 황해도 출신 술사(術士)인 박서집을 만나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하려고 한다.1731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 한글본 정감록을 읽었다. 나중엔 예언에 빠져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홀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782년 정감록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사람이다. 박서집과의 대화는 물론 가상 대담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가 여러 종류의 역사자료를 읽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술사 박서집 정감록을 발견하다 백: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이 남부지방에 전파된 것은 대강 언제쯤이었을까요? 박: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알겠어요. 하지만 내 경우엔 이랬어요. 난 사실 어렸을 때 집에서 정감록을 읽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라도 선친께서 까막눈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한문에 능통하셨단 얘긴 아니고 그저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동네 서당에서 배우셨지요. 이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 집엔 정감록이 있었어요. 백:술사님이 태어난 해가 1731년(영조 7년)이었다지요. 그렇다면 아홉 살 되던 1739년(영조 1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정감록이 문제가 됐습니다. 술사님은 그때 벌써 정감록을 읽으셨나요? 박:아니지요. 열두 살 때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아주 선명해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니까 글은 제때 배운 셈이지요. 읍내 서당에서 ‘사서’(四書)도 좀 읽고 해서 문리는 제법 나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한문 책 읽기는 늘 까다롭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그해 한여름에 설사가 심해 집에서 쉬다 심심해서 벽장을 뒤졌어요. 벽장 깊이 감춰둔 정감록을 발견했어요. 한글로 된 필사본이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너무 재밌어 그 뒤에도 가끔씩 꺼내 읽었어요. 백:첫눈에 정감록에 반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술사님을 그렇게 매료시켰나요? 박:아까부터 자꾸만 ‘술사, 술사’ 하고 부르는데 듣기에 별로 안 좋아요. 그건 나를 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기왕이면 도사(道士)라든가 거사(居士) 같은 칭호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실은 못하는 것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땅도 좀 볼 줄 알아서 지관(地官)이라고 대접하는 이들도 많았고 점도 칠 줄 알거든요. 백:죄송합니다. 그럼 거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사람들은 거사님이 살던 18세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당에 다닌 사람들은 유교 경전만 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박:틀린 생각이지요. 서당에선 천문이나 풍수에 관한 책을 전혀 가르치지 않지요.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훈장님들도 실은 의술이나 풍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자문에 자주 응하곤 했어요. 나도 한때는 훈장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지만 말예요. 백:몰라 뵈었습니다. 훈장님! 그러면 훈장님은 주리론(主理論)이니 주기설(主氣說)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성리철학을 훤히 다 아시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박:솔직히 말해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관심도 별로 없고, 실상 배운 적도 없어요. 내 특기라면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잡학이었어요. 대개 시골훈장들이 다들 그랬어요. 백:아마도 평민 출신 훈장님이라서 더욱 잡학에 강했다는 말씀인가 보군요. 그런데 훈장님은 52세 되던 1782년(정조 6년) 정감록 사건 때 충청도 진천에서 체포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서북의 술사들 남쪽으로 향하다 박:그때 그 이야길 여기서 꼭 해야 되나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군요. 당시 난 관가에 불려가서 아주 경을 쳤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본업이야 잡술(雜術)을 파는 사람이었지 어디 점잖은 훈장이라 할 수 있나요. 날 훈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거사라고 불러 주시오. 백:그래요, 거사님. 그런데 거사님은 왜 정든 고향을 떠나셨지요? 박:솔직히 말해 나와 같이 먹물 든 사람이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어요? 속이 답답해 절대 안 되지요. 그렇다고 내 처지에 과거에 급제해 무슨 벼슬이라도 하겠어요? 그 역시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서북지방 그것도 평민 출신인 나로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답답한 이야기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나이 스물을 넘기자 난 점점 노골적으로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게 됐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지만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고 봐요. 차별이 심한 세상에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백: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요.20세기의 일입니다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백인들의 가혹한 차별정책에 맞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며 소수자의 꿈과 희망을 부르짖었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서 철저히 소외됐던 특정 지역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똑같은 맥락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누구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서면 절망하기 십상이겠지요. 박:고통스러운 내 삶에 희망을 안겨 준 것이 정감록이었지요.‘양반 놈들의 조선’이 끝나야 뭐가 돼도 제대로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처음에 난 황해도 평안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마흔 살 무렵엔 아예 남쪽지방으로 이주했어요. 정감록이 약속한 구원의 땅은 남쪽에 주로 많았거든요. 난 계룡산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삼남지방의 십승지며 수많은 길지를 찾아 일일이 답사했지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더군요. 백:거사님이 남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요. 거사님이 남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혹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나요? 박:그러니까 1770년대였어요. 정감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바로 내가 관련된 1782년 12월의 정감록 사건만 해도 실은 그 증표가 아닐까 해요.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어요. 예컨대 반역죄로 죽은 문인방 선생님만 해도 평안도 양덕 출신이었지요. 함께 죽은 문 선생님의 제자 백천식도 참 불쌍해요. 문 선생님은 천문과 점술의 대가였어요. 우린 모두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감록이 예언한 새날이 곧 밝아올 줄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시기상조였던가 봐요. 백:1782년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문인방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하는 걸로 보아 거사님도 그 부하가 분명하군요? 박:문 선생님은 당시 충청도 진천의 산골에 머물렀어요. 진천은 마침 계룡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다가 그곳이 십승지로도 손꼽히는 길지랍니다. 특히 목천이 아주 좋아요. 뿐더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진천이야말로 살기에 가장 좋단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잉태된 곳이라지요. 그 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 문 선생님과 제자들은 진천 땅에 머물렀던 거지요. 백:정리하면 문인방과 거사님은 서북 출신으로 정감록을 충청도에 퍼뜨린 전도사였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박:우리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지관을 업으로 삼았던 권택인이란 친구가 마침 기억나는군요. 그 친구는 신형하란 젊은이와 친했는데 정감록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대요. 한데 이 신형하란 친구가 1780년대 초반엔 이미 전라도로 내려와서 활동 중이었지요. 나나 문 선생님과 함께 연결이 돼 있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삼남지방에 처음 내려갔을 적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정감록이란 이름만 들었지 내용은 다들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정감록이 차츰 퍼져나갔어요. 우린 길지도 살필 겸 직업이 풍수와 점술이라 각지를 떠돌며 돈도 벌 겸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단 말이 있잖아요. 전국의 길지를 배회하며 정감록을 선전하는 우리에게 혐의를 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린 마침내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문 선생님이나 나나 굴비 두름처럼 한데 묶여 역모죄로 엄한 처벌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뜻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역량이 부족해 무엇 하나 변변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한데도 반역자란 누명을 쓴 채 관헌에 붙들려가 죽게 됐으니 참 기막힌 노릇이었지요. 백:참 딱한 말씀이네요. 어쨌거나 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네요. 요컨대 거사님을 비롯한 서북 출신 술사들이 정감록을 전국 각지에 유행시킨 주인공이었단 점은 틀림없군요. ●유랑 지식인들의 사회적 생리와 정감록 박: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랑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혀를 놀려서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 늘 떠돌아 다녔어요. 이런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하나의 사회세력을 이룬 것은 역시 18세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몰락한 양반이었지요. 그러나 대다수는 서얼이나 평민이었다고 봐요. 문인방 선생님이나 나는 틀림없는 평민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난한 하급지식인으로서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당과 같은, 이를테면 사설 교육기관이 전국 어디나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훈장 목숨은 파리 목숨 같았어요. 요새 말로 고용이 불안정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고요. 백: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18∼19세기 한국사회에 서당이 많이 늘어난 것을 냉소적으로 기술한 적이 있더군요.“군현에는 각 면마다 수십 개 마을이 있고, 대략 네댓 마을에 반드시 서당 한 개 씩은 있다. 서당마다 한 훈장이 앉아 있는데 글을 잘못 가르치는 시골의 무식한 훈장인 주제에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거느린다.”라고 했어요. 박:정약용의 말이 좀 지나친 감은 있어요. 그래도 전국 어디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맞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돼 평민이나 서얼 출신의 중하급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됐던 거지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단 이야긴데 우리들은 애초부터 과거에 붙기도 어려웠고, 요행으로 시험에 붙었댔자 벼슬길에 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었죠. 신분과 지역이란 이중의 벽을 좀체 넘어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사정이 그렇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연해 유랑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아주 많았지요.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식인들이라서 현실 비판적이었고 자연히 정감록을 애호하는 핵심적인 부류가 됐어요. 백:그렇군요. 남부지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정감록을 퍼뜨린 문인방이나 거사님이야말로 18세기에 등장한 유랑 지식인의 전형이었군요. 자력으로는 당면한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님과 같은 분들은 정치적 예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거죠. ●정감록 사건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조치 박:정감록을 빌미로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기만 하면 조정은 잔뜩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정감록을 모두 압수해 불태워 버리자든가 정감록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백:그러나 미봉책을 편 것도 사실이었어요.1739년 정감록이 처음 나왔을 때도 국왕 영조는 함경도 경성에 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한직에 등용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는데도 초야에 묻혀 있던 한두 명의 선비를 발탁한다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박:아마 국왕은 민간에 퍼져 있던 정감록을 모두 거둬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정감록을 유포한 장본인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공연히 소란을 피웠댔자 민심만 자극될 테니 어떻게 하겠어요? 차라리 미봉책을 펴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한 걸 테죠. 백:그 말씀이 그럴 듯하군요. 거사님이 처벌 받은 지 한 해 뒤 해주에서 또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사님의 고향 해주에서 말이죠. 그런데 국왕 정조의 처분은 매우 관대했어요.“‘정감록’이 안필복의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집사람들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큰 죄는 아니다.”라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어요. 예언서라는 게 허무맹랑한 내용뿐이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박:그러나 국왕 정조는 정감록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황해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죠. 국왕은 정감록을 이용해 왕조에 대한 반역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도 ‘정감록’을 빙자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 않아요. 백:해주 사건이 터진 지 2년 지나서였죠.1785년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인사들이 두루 가담한 이른바 이율과 양형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겠지만 같은 해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의 윤장(允藏) 스님은 절간에 ‘정감록’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발돼 흑산도로 유배됐어요. 그렇게 본다면 1783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 안필복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로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박:1785년 이후에도 ‘정감록’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요.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요. 백: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정감록의 유행을 차단하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늦어도 1780년대엔 ‘정감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게 틀림없어요. 정감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유랑 지식인들 특히 서북 출신 술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거사님은 바로 그 주역이지요. 박:내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 회포를 풀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어요. 이젠 정말 편히 잠들겠어요. 나라의 평안을 축수합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가족’ 한국어출간 재미작가 이창래씨

    ‘가족’ 한국어출간 재미작가 이창래씨

    “물질문명의 발달로 전통적인 대화의 통로가 좁아지고, 그에 따라 구성원 개개인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불안정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미 교포작가 이창래(사진 왼쪽·40)씨가 장편소설 ‘가족’(전2권·랜덤하우스중앙 펴냄)의 한국어 출간에 맞춰 내한했다.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뉴욕에 거주하는 50대 후반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장이 주인공이지만 전세계 어느 가족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전작 ‘제스처 라이프’도 이번에 새롭게 출간됐다. 지난해 발표된 그의 세번째 소설 ‘가족(원제 Aloft)’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 3월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훌륭한 책 6권’의 하나로 선정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소설은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안정적이고 여유롭게 평생을 살아온 제리 베틀이 은퇴 후 갑자기 해일처럼 몰아닥친 가족의 위기로 갈등하고, 회의하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렸다. 한인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95년), 일제하 종군위안부를 다룬 ‘제스처 라이프’(99년) 등 전작과 달리 ‘가족’은 미국 사회에서 주류로 편입된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화자로 택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이전까지 한국계 작가라는 남다른 위치로 주목받는 면이 컸는데 이 소설을 계기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작가(national writer)로 인정받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소설 속엔 그의 개인적인 가족사와 경험이 알게 모르게 녹아 있다. 뉴욕 외곽 부유층 마을에 거주하는 제리 베틀처럼 그도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내, 두 딸과 함께 뉴욕 인근 뉴저지주에서 살고 있다. 현재 일주일에 이틀씩 프린스턴대에서 창작과정을 강의하는 그는 차기작으로 한국전쟁 전후에 관한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미국에 건너온 고아 난민소녀, 참전군인, 구호 자원봉사자 등이 주인공이다.2년 내 출간할 계획. 세살 때 미국으로 이민간 이씨는 예일대 영문과와 오리건대 대학원 창작과정을 나왔다.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과 ‘제스처 라이프’로 헤밍웨이재단상, 펜문학상, 아니스필드-볼프 도서상 등 각종 상을 휩쓸며 미국 문단의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방한 기간중 서강대(28일)와 서울대(29일)에서 문학강연을 한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동독출신 젊은 화가, 시대를 붓질하다

    세계 미술계에서 구상회화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1970∼80년대 독일 ‘라이프치히 젊은 작가들’에게 쏠리는 관심은 각별하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의 중심에 선 화가는 네오 라우흐. 그래픽과 사진, 북아트 등을 가르치는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2002년 빈센트 반 고흐 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알버티나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전시를 열기도 했다. 올해 마흔다섯 살의 네오 라우흐. 이 젊은 작가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콜드 하츠(Cold Hearts)’전에 걸린 라우흐의 작품 ‘늪’에 눈길을 돌려보자. 낭만주의 화풍을 계승한 듯한 배경의 풍경 묘사, 화면 하단에 불타고 있는 차량, 동굴에서 올라온 듯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 술병을 꺼내고 있는 사람, 포를 메고 숲으로 향하는 남자, 지상에 붕 떠있는 공연장 같은 건물을 배회하는 부랑자….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화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작품에는 독일 통일이후 세태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겼다. 숨돌릴 사이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림속 인물들처럼 무심한 듯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옛 동독 출신 주민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불안정한 심리를 반영한다. 라우흐의 부인 로자 로이 역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다. 화염이 치솟는 건물 옆에 위치한 붉은색 비행기와 두 명의 여자 조종사를 묘사한 그녀의 그림 또한 파괴적이면서도 생산적인 이미지를 통해 남성중심의 사회를 여성중심으로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는 라우흐와 로이 부부 외에 틸로 바움가르텔, 크리스토프 루크해베를레, 다비트 슈넬, 마티아스 바이셔, 율리아 슈미트 등 라이프치히에서 활동 중인 30∼40대 작가 9명의 작품 70점이 나와 있다.6월26일까지.(041)551-5100.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대] 새 교황 과제와 전망

    |파리 함혜리특파원·서울 임병선기자|베네딕토 16세는 전임 교황보다 훨씬 빠른 4차 투표끝에 교황좌에 앉게 됐지만 그가 맞닥뜨리게 될 도전은 훨씬 복잡하고도 강력하며 위험할 것이 분명하다. ‘교회 황태자’로 불리는 추기경단이 보수적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한 것은 교리 해석에 있어 전임 교황이 걸었던 정통 노선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안팎에서 터져나오는 개혁과 변화의 목소리를 수용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전환기에 교회 내부를 가장 잘 아는, 준비된 교황을 지목한 것도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교황청의 영적 설계자’ 구실을 해온 새 교황이 전임자가 해결못한 숱한 난제들을 얼마나 신축적으로 수렴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타종교와의 대화 통해 교회 통합 새 교황은 우선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세계를 영적으로 이끌고 통합해야 할 책무에 직면해 있다. 종교간 대화는 물론, 냉전체제 와해 이후 가속화하고 있는 국지적 갈등에 새 교황의 따듯한 시선이 요구된다고 USA투데이는 지적했다. 다이애나 에크 하버드대 교수는 요한 바오로 2세가 50회 이상 이슬람 지도자와 만나 그들의 신앙에 존경을 표하며 코란에 입을 맞춘 것을 “평화구축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톨릭 안에서, 특히 고국 독일에서의 가톨릭과 루터교 화해 노력을 저지한 전력이 있는 새 교황이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설지는 여전히 의문이다.11억 가톨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 아프리카와 남미 등이 ‘세계화의 덫’에 걸려 궁핍에 신음하는 상황을 여하히 극복해나갈 것인가도 쉽지 않은 문제다. ●신도 이탈, 성직자 부족 해소도 과제 베네딕토 16세를 더 본질적으로 괴롭힐 문제는 교회 안에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회의 위기 양상을 “사방에서 물이 새어들어오는 난파 직전의 배”라고 묘사하며 “이를 개혁하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다음 교황이 이를 맡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 2000년 동안 교회의 중심이었던 유럽에서 신도들이 이탈하고 북미대륙에선 사제 지원자가 줄어 일요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가 나타나고 있다. 북미에서 사제 수는 신도 1300명당 1명꼴이며 남미에선 7000명당 1명이 될 만큼 극심한 사제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전임 교황 재직기간중 신도 수가 40%가량 늘었다는 평가에도 불구,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이같은 상황이 빚어졌다는 비판을 베네딕토 16세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 교황이 해방신학이나 종교적 다원주의, 개신교와의 합동 예배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점을 고려하면 성직자 결혼이나 여성 사제 허용과 같은 개혁 목소리를 담아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새 교황이 18일 콘클라베에 앞서 열린 특별미사에서 “상대주의라는 독재에 맞서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의 재임기간 변화가 있더라도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생명공학 윤리 등 과제 산적 지난 15일 콘클라베를 앞둔 준비회의에서 집단 지도체제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콘클라베 결과는 결국 분권을 주장하는 많은 주교들보다 권력 집중을 주장하는 교황청 운영기구 ‘쿠리아’가 교회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외부에 노출시킨 것이다. 따라서 교황청과 지역 주교들의 파워게임을 조정하고 평신도와 사제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등의 문제로 새 교황의 머리는 무거워질 것이다. 또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동성애와 이혼, 낙태, 혼전 성관계 등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거부해왔는데 이를 어떻게 조정할지도 관심거리다.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콘돔을 허용하는 문제, 재혼자에 신도 자격을 부여하는 문제, 생명공학 윤리 등도 교회안의 보수와 진보 양쪽을 동시에 아울러야 하는 새 교황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lotus@seoul.co.kr
  • 핑크에 중독되다

    핑크에 중독되다

    사회학자들은 21세기를 여성의 시대, 혹은 핑크컬러 시대라고 말했다. 여성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핑크컬러 시대는 아직 갈길이 멀다. 하지만 확실히 핑크 유행은 패션뿐 아니라 가전제품 등 젊은이들의 상품으로 확산되고 있다. ‘색으로 말하는 성공심리’(기노시타 요리코)에 따르면 핑크는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색이다. 싸움 없는 평화로운 상황을 지향하거나, 무엇인가를 동경할 때 나타나는 이상적인 색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하듯 패션계뿐만 아니라 메이크업, 인테리어, 전자제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핑크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커리어 여성들의 옷차림에서도 핑크는 더이상 금기의 색상이 아닐뿐 아니라, 개성적인 남성을 표현하는 더없이 매력적인 컬러로도 안착했다. ●패션의 메인 컬러, 핑크 보통 핑크는 여자아이와 여성의 패션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어주는 포인트 컬러로 활용된 색상. 올해는 이런 핑크가 주연으로 일어섰다. 셔츠, 재킷, 카디건 등 의류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갑, 모자, 시계, 벨트 등 다양한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핑크의 변신은 눈부시다. 핑크 본연의 색을 담은 트루핑크, 연한 라이트핑크, 살짝 보라색과 결합한 퍼플핑크, 눈부신 핫핑크까지 다양한 색감으로 무장했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과장은 “우리나라의 컬러 트렌드 주기는 일반적으로 10년을 정점으로 순환하고 있다.”며 “지난 1998년 블랙·회색 등 무채색이 크게 인기를 끈 이후 점점 밝아지던 컬러가 올해에 핑크 컬러로 그 정점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남성과 여성에 공존하는 핑크 바비인형, 신데렐라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핑크. 하지만 요즘은 핑크 컬러 코디를 시도해도 좋을 만큼 남성복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여성들이 로맨틱한 데이트 상대로 꼽았던 ‘핑크 폴로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에 도전해도 눈치보이지 않을 절호의 기회다. 남성들의 핑크도 셔츠뿐만 아니라 핑크 카디건, 봄 스웨터, 재킷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변신했다. 특히 핑크컬러 타이는 너무 튀지 않게 핑크 코디를 소화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 인기가 높다. 로가디스 화이트라벨의 이현정 디자인 실장은 “지난 가을·겨울부터 조금씩 사용돼 온 핑크는 올 봄 최절정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며 “상의를 핑크로 택하고 하얀색 바지나, 청바지와 함께 연출하면 세련된 코디를 완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핑크 퍼레이드 가장 무난하게 핑크 무드를 소화할 수 있는 패션 소품과 액세서리에서 핑크 바람은 더욱 강하다. 빈폴 액세서리는 핑크로 중무장한 ‘핑크 라인’을 선보였다. 핑크 느낌을 그대로 전하는 ‘해피 피크닉’을 주제로 가방, 지갑, 모자, 헤어 액세서리 등 전 소품에 핑크 컬러를 사용했다. 프랑스 액세서리 아가타는 핑크를 중심 색상으로 한 파스텔 컬러의 귀고리, 목걸이, 브로치 등을 내놓아 핑크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전자제품에도 핑크 무드가 흐르며 패션 액세서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삼보컴퓨터의 신제품 ‘에버라텍 4200’과 초소형 노트북 ‘에버라텍 1000’은 블루, 레드, 그린, 핑크 등 다양한 색상을 커버에 적용했다. 앞서 애플이 선보인 2세대 신형 아이팟미니도 핑크, 실버, 블루, 그린의 네 가지 색상으로 준비돼 패션 아이템의 느낌을 살린다. 소니코리아가 신제품으로 내놓은 목걸이형 이어폰 MDR-NQ1도 블랙, 실버의 기본 컬러뿐만 아니라 블루, 핑크 등 화사한 색상도 출시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백문일 기자의 국제경제 읽기] 풍문보다 기업 내재가치 주목을

    증시에 “재료가 우선한다.”는 말이 있다. 갖가지 소문 속에서도 주가를 결정하는 요인은‘기업의 내재가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재료보다 시장의 주변 분위기에 더욱 휘둘리는 듯하다. 미국 증시에 이어 한국과 일본 증시가 18일 폭락했다. 고유가에 대한 우려와 선도주들의 1·4분기 실적이 악화돼서다. 선진 서방7개국(G7) 재무장관들이 지난주 워싱턴에서 달러화의 불안정성과 금리인상의 지속성을 거론한 것도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하지만 이같은 ‘악재’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지난달만 해도 세계 증시는 ‘위험’을 즐기는 듯했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해도 금리를 올리려는 방편이거니 했다. 제너럴 모터스(GM)와 포드의 실적전망 악화도 해당 주가에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같은 자신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제는 ‘생물’이라 했던가. 알던 내용이라도 자꾸 거론되자 투자자들은 불안해졌다. 시장은 기업 발행 채권에 추가로 요구하는 ‘가산금리’를 높여 기업의 생산 및 금융활동에 부담을 줬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50달러선으로 진정된 것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다짐해서가 아니라 세계경제가 냉각돼 수요가 줄어서라는 식으로 해석했다.‘동전의 양면’을 놓고 어두운 쪽만 가리키는 형국이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이나 씨티그룹의 실적호전 발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시아에서는 삼성전자의 실적악화가 시장을 흔들었다. 혼다와 소니 등의 수출부진 전망도 악재로 작용했다. 중국에서의 반일시위가 동북아 질서를 교란시킬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 세계경제의 ‘성장엔진’이 꺼지고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등장했다. 물론 실적악화만큼 증시에 해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1등 기업의 실적악화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2등,3등 기업마저 나쁘라는 법은 없다.2003년 세계경제에 대한 ‘더블 딥’ 우려가 불거질 때의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빴지만 세계 증시는 일시적인 변수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내생력을 키웠다. 하버드대가 과거 50년에 걸쳐 전쟁과 경기변동, 기업실적 등 온갖 변수를 감안한 모의투자를 벌인 적이 있다. 우승자는 주당순이익(PER)만 보고 투자한 학생이 차지했다고 한다. 골이 깊으면 봉우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버블경제가 아닌 한 지금은 기업의 가치를 감안한 투자의 변별력을 높일 때다. mip@seoul.co.kr
  • [씨줄날줄] 中 반일시위/이목희 논설위원

    역사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중국내 반일(反日)시위가 집회 및 일제상품 불매운동을 넘어 폭력 양상으로 번졌다. 중국 민족주의가 일본에 못지않음을 보여준다. 민족주의 폭발은 중국에 양날의 검이다. 고구려사 왜곡처럼 정부의 프로그램에 따라 추진되는 ‘대국(大國) 민족주의’는 국가통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완전히 통제되지 못한 군중시위는 다민족 국가인 중국을 불안정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옛 중국에서는 근대유럽식 민족주의가 없었다. 혈통·지연보다는 문화우월주의에 바탕한 중화(中華)사상이 있었을 뿐이다. 세계를 천자(天子)의 도덕정치가 미치는 중화와 금수같은 이민족이 사는 사방(四方)으로 구분했다. 사방 오랑캐는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 불렀다.19세기 중반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중화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꺾인 뒤에야 민족주의가 태동했다.20세기 들어서는 오랑캐였던 일본도 침략대열에 합류했다.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중국에서는 5·4운동이라고 불리는 반일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제와 투쟁하는 ‘저항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했고, 결국 대륙을 차지했다.‘저항 민족주의’ 기치는 공산주의와 공화주의, 한족(漢族)과 소수민족, 연안과 내륙 개발차, 그리고 빈부격차의 갈등을 잊게 한다. 중국 지도부는 민족주의 강화가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주의 통합체제 이완을 보완하는 역할에 그치길 바랄 것이다. 중국 정부가 최근 반일시위를 은근히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는 배경이 된다. 문제는 현 상황이 5·4운동 때와 다르다는 점이다. 중국의 신장된 국력은 ‘저항 민족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중국의 민족주의 강화는 일본처럼 팽창적일 수밖에 없다. 밖으로 분출하지 못할 경우 소수민족 독립요구, 엘리트층 민주화요구, 빈민층 반기 등 역작용으로 표출될 위험성이 크다. 반일시위 수위를 놓고 중국 정부의 고민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국도 예민하긴 마찬가지다. 중국의 반일시위가 당장 일본에 압력이 되니 흐뭇한 면이 있다. 그러나 중화사상과 결합한 중국 민족주의는 한층 위협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중·일의 ‘팽창 민족주의’ 사이에서 국익찾기가 굉장한 미로게임이 되고 있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中·日 관계악화’ 국제사회 촉각

    중·일 관계 악화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관계 악화의 불똥이 어디까지 미칠지에 대한 우려와 관심 때문이다. 경제 영역에서부터 안보 및 전략적인 차원까지 이해당사국들은 관계 악화의 파급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이해 득실 따지기에 분주하다. 1차적으론 동북아의 두 거인인 중·일 관계가 더 악화될 경우 역내 경제 성장 및 무역량 증가세의 둔화가 이어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경제전문 통신사 블룸버그 뉴스는 11일 “두 지역 강대국의 긴장으로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무역 성장이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자본·기술과 중국의 노동력 및 시장 결합으로 지역 및 세계경제의 동력을 제공해오던 동북아 경제의 활력이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또 동북아지역의 불안정이 더욱 부각되면서 외국인 투자의 위축과 역내 교류 저하 등의 현상도 우려된다. 안보적 측면에선 북핵 문제의 해결, 동북아 다자 안보협력기구 신설 등 주요 현안에 대한 협력문제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중재자이자 주최국이고 일본은 참가국 중 하나다. 일본을 아시아지역의 협력 축으로 삼고 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은 예상을 뛰어넘는 중국의 격렬한 반일시위에 놀라는 모습이다. 자칫 중·일간의 신냉전으로 동북아지역의 안정적 관리가 어렵게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는 하지만 고립시켜 호전적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미국 보수우익 성향의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AWSJ)은 11일 사설에서 “중국이 60여년 전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떠드는 것은 정부 실책에 대한 분노를 피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국민 불만을 키워 ‘피해자 병리학’을 조장하고 문제를 만드는 동시에 장차 더 큰 문제를 축적하는 것”이라고 중국 때리기를 노골화했다. 반면 뉴욕 타임스는 11일 “일본은 최근 들어 더욱 자기 주장이 강한 외교정책을 채택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관계도 역시 악화돼 왔다.”면서 “따라서 중국과의 분쟁으로 인해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독일 일간 디 벨트도 이날 “일본의 많은 역사 교과서들은 전쟁범죄를 언급하지 않고 엉터리로 역사를 묘사한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독도 관련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 등을 비판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논술이 술술]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논술이 술술]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1932년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미래 사회에 대한 가상적 제시를 통해 인간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이끌고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1914년 미국의 헨리 포드는 미시간주 디어본에 위치한 자신의 공장에 자동화된 자동차 조립라인을 만들었는데,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이 조립라인은 생산되는 제품을 표준화할 뿐만 아니라 일하는 과정도 표준화하는 것이었다. 포드가 도입한 이러한 일관작업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표준화된 동질적인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량 생산된 상품은 그에 걸맞은 대량 소비를 필요로 했는데,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과거에 비해 높은 임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이를 해결하였다. 노동자들이 대량 생산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대규모 유효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드는 대량 생산과 대중적인 소비 문화의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대중사회 출현의 길을 열었으며, 이러한 생산 방식을 ‘포드주의(Fordism)’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곧 포드주의는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낳은 사회구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헉슬리는 독특한 연도 표기와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포드의 신격화에 대한 묘사를 통해 ‘포드주의 비판’이라는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 또 그가 그리고 있는 ‘멋진 신세계’의 모습은 포드주의의 특징들과 직접 결합돼 있다. 이처럼 헉슬리가 나타내고 있는 ‘멋진 신세계’의 섬뜩한 사회 현실은 가상의 미래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던 ‘포드주의’의 변동 안에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 가능성의 묘사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생산의 효율성에만 감탄하고 있을 때, 헉슬리는 그 안에 담긴 위험을 날카롭게 찾아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발표된 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헉슬리의 경고에 비추어 어떠한지를 평가하고 반성해 보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점점 더 작품 속의 ‘존’이 절망에 빠졌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그의 ‘경고’는 끔찍하게도 ‘예측’으로 실현되고 있다. ‘유전자’로 상징되는 최근의 과학 발달은 인간에 대한 도구적 기계적 인식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정보화’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서의 불안정성을 키우며 사회의 계층적 양극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세계화’라는 말로 특징이 표현되는 사회의 변동은 ‘소비주의’에 기초한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전 지구의 인간들을 더욱더 표준화하고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급속히 파괴하고 있다. 게다가 범람하는 대중 문화와 매체들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새로운 ‘쾌락’을 상품으로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형태와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어느덧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자화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