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102년] 通했느냐?
물리적 성장과 의식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꽉 막힌 ‘대화 부재’,‘이해 불용’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여’와 ‘야’,‘노(勞)’와 ‘사(使)’,‘부(富)’와 ‘빈(貧)’,‘남’과 ‘여’,‘좌’와 ‘우’,‘남’과 ‘북’ 등 적대와 대결의 코드가 넘친다. 모두 자신의 생각과 이념 안에서만 작동하는 폐쇄적 혈관을 가진 결과이다. 소통이 단절된 곳에서 부조화와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어디에서든 ‘소통’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합의와 진전의 밑거름이 된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선수들끼리 부를 때 ‘형’ 등의 존칭을 생략하고 이름만 부르도록 했다. 숙소 배정도 ‘끼리끼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소통의 배려는 ‘월드컵 4강 신화’로 나타났다.‘막히면 고이고, 고이면 썩는다.’는 명제 역시 곱씹어 보면 소통 부재의 현실에 대한 역설의 논리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화약고로 지목되는 ‘양극화’도 들여다보면 한 사회 안에 양 극단이 서로 말할 통로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한 병증이 되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소통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이익의 양보와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제도화, 장기적으로는 의식운동과 문화·교육적 접근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이 ‘불통(不通)’의 병증은 서로의 생각과 인식을 퍼나를 ‘소통의 혈관’ 말고는 따로 치유책이 없다. 문제는 방법이다.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대립과 적대의 개체들 사이에 누가, 어떻게 시원한 소통의 혈관을 뚫을 것인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갈등의 코드를 이야기할 때 부모와 자녀 사이의 대립은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됐다. 가장 가까워야 할 한 핏줄의 가족들이 서로 말이 안 통한다며 돌아눕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한 어머니와 아들, 딸들에게 좌담 형식을 빌려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좌담에는 차성희(61·전주대 교수), 오현진(39·주부), 권혁률(21·한양대 영어영문 2년)씨가 참여했다.
#차 교수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던 딸이 결혼적령기가 되자 소통이 잘 안되더라. 결혼은 연애가 아니니 생활력을 보라고 했더니 딸이 부모의 기준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하며 싫어했다. 결국은 딸이 이겼다. 이렇게 부모와 소통이 안 된 적이 있나?
#권씨 부모님이 보수적인 성향이라 재수하는 것을 굉장히 반대했다. 재수생은 소수이고 모험을 하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쁜 짓도 아니고 공부를 1년 더 하겠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까지 반대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씨 남편이 아홉살 난 작은딸을 귀엽다고 끌어안는데 딸은 그걸 괴롭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또 아빠가 집에 와도 ‘다녀오셨어요.’라는 형식적인 인사도 안한다. 한번은 남편이 이 문제로 아이를 심하게 야단쳤고, 딸이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아빠도 날 괴롭히지 말라.’고 둘이 조약을 맺더라. 시간을 두고 기다렸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됐을 문제란 생각에 아쉽더라.
#차 교수 386세대가 어느새 ‘낀 세대’가 됐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보니 예전에 부모와의 관계는 어땠나?
#오씨 부모님은 과거부터 내려오는 고정관념이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서 대화를 해도 연예인, 스포츠 등 가벼운 주제만 이야기하게 됐다. 부모와 대화하지 못했으니 자녀와는 적극적으로 하려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 등 부모가 아니라도 대화할 상대가 너무 많다.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애써 배워 장문을 보내도 답은 간단하고 성의없이 돌아와 좌절하는 부모도 많다. 우리 세대를 받들 수 있는 마지막 세대, 받듦을 받을 수 없는 첫 세대라고 하지 않나.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생각하며 사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사는 첫세대인 것이다.
#차 교수 요즘에는 고령화가 되면서 노후문제와 결부돼 아이들한테 다 주지 말라고들 한다. 시어른을 모시고 살아서 자제하고 참다 보니 자녀들이 ‘엄마는 굴비도 싫어하고, 갈비도 싫어한다.’는 식의 편견을 갖더라. 그래서 딸에게는 맛있는 거 있으면 외손녀와 나눠서 똑같이 먹고 엄마도 좋아한다고 말해 주라고 한다.
#차 교수 남편이 의사인데 아들을 의대에 보내려 무진 애를 썼다. 재수 끝에 결국 포기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은 해골만 봐도 토할 것 같다고 하더라. 아버지가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아들이 해주기를 너무 요구한 것 같다.
#오씨 우리 세대가 그 역효과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용기가 없는지 이도 저도 아닌 비현실적인 입장을 보이곤 한다.
#권씨 부모의 역할은 방향을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로를 정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정도인 것 같다. 더 많이 살아온 선배로서 그게 왜 중요한지 일러 주고, 기회를 갖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차 교수 아이들이 성년이 되고 출가까지 하고 나니 가끔은 나 자신 속에 있는 불만과 어려움을 화를 내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부모도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녀 입장에선 어떤가?
#권씨 대화를 할 때에는 부모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아들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부모님은 자식의 이야기만 궁금하고 본인 이야기는 잘 안하려고 하신다. 마냥 애라고 생각하시지만, 나도 이만큼 컸으니 함께 대화하고 싶다.
#오씨 나이드신 분들은 본인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다 보니 자녀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 이래야 한다는 것은 없다. 두 딸은 아직 어려서 뭘 원하는 게 이르다고 생각한다. 다만 딸들이 어떤 경우에도 부모가 자기 편에 설 수 있는 백그라운드라는 사실을 알아 줬으면 좋겠다.
정리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