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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대혁명 선구자 대회」 29일 개최(북녁 뉴스라인)

    【내외】 북한은 오는 29일부터 이틀간 평양에서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선구자대회」를 개최할 예정인 것으로 중앙방송이 23일 보도했다. 이번 대회에는 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한 각 기관의 3대혁명기수들과 당정기관 및 행정경제기관,근로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3대혁명붉은기 쟁취운동 전개 과정에서의 성과와 경험을 총화하고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이 운동을 더욱 심화발전시키기 위한 과업과 방도를 토의하게 된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평양시 「제3인민병원」 22일 개원 【내외】 북한은 평양 광복거리에 「평양시 제3인민병원」을 건립하고 22일 개원식을 가졌다. 연건평 1만7천㎡,7층건물에 5백여개의 병상을 가진 이 병원은 종합병원 규모로 『입원병동과 외래병동을 비롯하여 약무 및 후방시설을 훌륭히 갖추고 있다』고 중앙방송이 23일 보도했다. 이 병원에는 또한 37개의 임상부문 전문과와 5개의 양호부문 전문과들이 있으며 『만능수술대,복부초음파진단기,복강경,위내시경 등 40여종·1백여대의 의료설비들과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묘향산 단군신앙소 복원 【내외】 북한은 최근 묘향산에 위치한 단군교들의 집단신앙처소인 「단군사」를 복원했다고 중앙방송이 17일 보도했다. 이 방송에 따르면 「단군사」는 묘향산 향로봉 남쪽 능선 중턱 8백60m에 위치한 천연바위굴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한은 이곳을 『우리 민족의 건국시조인 단군을 숭상해서 선조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단군교도들의 단군신앙처소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갈수기 화전보수 부심 【내외】 북한은 최근 겨울철 갈수기가 다가옴에 따라 전력생산의 차질을 우려해 화력발전소의 시설보수 및 정비에 부심하고 있다. 정무원 전력공업부 부부장 주동일은 최근 중앙방송과의 회견을 통해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주의 내나라 내조국을 굳건히 지키고 빛내나가는 길』이라면서 각지의 화력발전소 관계자들에 대해 설비관리 및 시설보수를 위한 각종 기술적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 남·북 GNP격차 작년 17.8대1

    ◎1인 GNP도 9.2대1… 경제력차 더 커질듯/북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 마이너스 성장 계속 남북간 국민총생산(GNP) 규모의 격차가 분단 직후인 지난 46년의 1.8대 1에서 94년 현재 17.8대 1로 크게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남북한 1인당 GNP격차도 94년말 기준으로 9.2대 1이라는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결과는 24일 통일원 교육홍보국이 펴낸 「통일속보」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46년 무렵만 해도 북한이 1인당 GNP에서 다소 높게 평가됐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실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당시 남한의 1인당 GNP는 65달러인 반면 북한은 75달러 수준이었다. 이후 남북한은 지난 61년 한때 GNP규모가 20억달러로 비슷한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하지만 이후 우리측이 고도성장 가도를 줄달음친데 비해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이 심화됨으로써 남북간 GNP규모 격차가 심화되었다.분단 50년기간중 남한은 연평균 8% 수준의 고도성장을 기록한데 비해 북한은 남한의 절반수준인 연평균 4% 수준에 그친 것이다. 50년대까지는 호조를 보이던 북한경제가 기울기 시작한 때는 지난 60년대 후반부터.이때 이후 중·소의 경제기술원조가 중단되기 시작한데다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우선정책과 폐쇄적 자립노선이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북한경제의 구조적 모순은 80년대말부터 극명하게 드러났다.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노선의 장기화에 따른 근로의욕 감퇴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대외무역 여건이 악화되면서 북한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90년 이후 5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90∼94년 기간중 남한이 연평균 7.3%의 고도성장을 기록한 반면 북한은 미이너스 4.5% 성장으로 오히려 뒷걸음친 것이다. 통일원측은 이 보고서를 통해 경제성장의 「남고북저」현상은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남한은 기술의 고도화,경제활동의 자율성제고 등을 통해 안정적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되나 북한은 기존의 불합리한 정책노선을 청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권력교체기라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북한이 김일성의 이른바 「유훈통치」에 기댄채 과감한 개혁·개방을 못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는 것이다.때문에 북한이 요행히 마이너스 성장추세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성장속도는 연평균 2∼3%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 「반인류 범죄」 처벌에 시효없다/과거청산 외국선 어떻게 했나

    ◎유럽/나치전범 86년까지 6,479명 단죄­독일/2차대전 유태인 학살 투비에 종신형­프랑스 집단학살등의 반인류 범죄를 처벌하는데는 시한이 없다.특히 2차대전당시 인류를 학살하고 괴롭힌 전범들에 대해서는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 곳곳에서 단죄를 받고 있다. 반인류범 처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미·영·불·소 등 4개국이 2차대전 전범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지난 45년 11월20일 개설한 이 특별법정은 지난 20일로 개설 50주년을 맞았다. 뉘른베르크법정이 열리자 히틀러의 측근인 헤스를 비롯해 24명의 나치 지도급인사를 처벌됐으며 46년 10월1일까지 1년 가까이 4백8명의 전범들이 법정에 서야만 했다. 독일은 특히 56년부터 루드스비히에 나치전범연구소를 세워 전쟁자료를 추적,구체적 죄목을 입증해 전범을 꾸준히 처벌해왔다.이에따라 86년까지 모두 6천4백79명이 날카로운 법의 심판을 받았고 이중 12명이 사형이 선고됐고 1백60명은 종신형,나머지 6천1백9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7천5백명 정도의 나치전범이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등지에 불안에 떨면서 숨어지내고 있다.그러나 이들을 찾아내 처벌하려는 노력은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어 시한이 걸리기는 해도 법의 심판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유엔은 반인류범을 집단학살은 물론이고 정치·종교·인종적인 이유에서 학대하거나 약탈행위·암살·포로나 인질을 괴롭히는 등의 행위로 규정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도 이같은 반인류범을 시한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있다.프랑스는 64년12월 반인류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치 않는다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지난해엔 형법을 개정해 집단학살범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폴 투비에.투비에는 리옹 등지에서 나치 비밀경찰에 협조해 유태인 추방과 학살등에 관여한 혐의로 45년9월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잠적해 버렸다.사면을 받는 등 우역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89년 붙잡혀 지난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 유태인 어린이50여명을 학살한 클라우스 바르비도 반인류적인 행위자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리옹지역의 게슈타포 지휘자였던 바르비는 52년 궐석재판을 받았다가 지난 83년 붙잡혀 4년뒤 종신형을 받았다. 스페인도 15년 동안의 작업 끝에 최근 인권 학대 등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뉘른베르크 특별법정 이후에도 반인류범을 처벌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유엔은 93년 결의안 808조에 따라 유고내전에 대한 특별법정을 헤이그에 설치,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을 처벌하고 있다.또 르완다내전에 대한 국제법정이 지난해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설치돼 집단학살의 책임자들에 단죄를 가하고 있다. 이런 법정들은 특정사안을 다루는 특별법정이지만 항구적인 법정도 있다.유엔 사법재판소는 45년 헤이그에 설치된 항구법정이고 유럽연합(EU)은 51년 룩셈부르크에 사법재판소를 두고 있다.EU는 이것도 모자라 59년 스트라스부르에 인권법정을 마련해 반인류범에 대한 강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회,67년 군부행위 쿠데타 규정 특별재판서 주모자들 무죄징역 그리스의 쿠데타주모자 처벌은 비교적 순조롭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2차대전 종전과 함께 부활된 왕정을 무너뜨리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것은 67년.쿠데타 주역은 예오리오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영관급장교 24명.이들은 콘스탄틴 2세를 폐위시킨 뒤 68년 독재헌법을 마련,7년간의 군사정권이 계속됐다. 74년 키프로스사태가 군사정권 몰락에 크게 작용했다.키프로스공화국내 터키계 주민과 그리스계 주민 사이에 주도권 쟁탈을 놓고 벌어진 유혈사태에 그리스군을 파병하기 위해 군정실권자들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그동안의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일부 군장성과 민간정치인들도 합세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명목상 군정대통령을 맡고 있던 기지키스 장군이 7월22일 야당지도자들과 민선 이양에 합의했다.당황한 군정측은 군대를 동원,아테네시를 포위하는 무력위협에 나섰고 시내 의사당 앞에 군정에 반대하는 수십만 시민이 모여 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연출했다.결국 대세에 굴복한 군정측이 3일만에 손을 들었고 7월24일 파리에 망명했던 야당지도자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금의환양했다. 그해 11월 총리직에 오른 카라만리스는 곧바로 67년 쿠데타주역들을 재판에 회부했다.75년초 의회는 67년 군부행위를 쿠데타로 규정하는 결의안 채택과 함께 특별법을 제정했다.군정기간중 60여명이 독재에 항거하다 숨졌고 수천명이 부상당했음이 재판을 통해 밝혀졌다.같은해 8월 끝난 특별재판에서 쿠데타주모자인 파파도풀로스와 마카레조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여타 주모자들에게 최고 사형에서 최하 2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이후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쿠데타주역들은 지금도 복역중이다. ◎남미/쿠데타 집권 전대통령 등 법정에­아르헨/인권탄압자 사면조건 범죄고백 받아­칠레 ▷아르헨티나◁ 76년4월 이자벨리타 페론 대통령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라울 알폰신 민선대통령이 취임하는 83년12월에 이르기까지 최소 1만3천여명의 동족을 좌파타도의 슬로건 아래 납치·살해(실종 9천여명 포함)했다.알폰신 대통령은 취임 즉시 군 최고지도층 절반을 은퇴시키는 군개혁을 실시한 뒤 군부가 민정이양 4개월전 제정한 과거 10년간 군·경의 정치범죄에 대한 소급 사면법을 폐기,쿠데타주도의 혁명평의회 장군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쿠데타 장군들의 재판은 85년4월 시작돼 12월 혁명후 첫대통령 비델라 장군과 마세라 제독(종신형) 등 5명이 형을 받았고 4명은 석방됐다.포클랜드전쟁(82년) 당시의 갈티에리 대통령 등 3인혁명위원에 대한 재판은 따로 열려 갈티에리는 12년형을 받았다.그러나 알폰신정부는 87년 부분사면법을 통과시켜 인권침해 혐의로 기소된 3백70명의 군·경중 40명의 고위직을 제외한 나머지를 석방했다. 89년7월 취임한 카를로스 메넴 새 대통령은 이전 페론당으로서 군부에게 학대를 받기도 했지만 군부집권시의 좌파대상 「추악한 전쟁」이나 민정 이후 쿠데타기도에 연루된 2백10명의 장교·하사관들을 89년10월 사면했다.그리고 90년12월 2차 대통령사면령을 통해 군부정권 1,2번째 대통령인 비델라,비올라 장군및 마세라제독 등 군부지도자들을 「국민화합」을 이유로 석방했다. 당시 「추악한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 두명이 올 2월과 4월에 약물에 마취된 좌파인사들을 비행기에서 바다로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고 최초로 고백하기도 했으나 1만여 동포살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칠레◁ 세계최초의 민선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아옌데를 살해하고 73년9월 정권을 잡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국민투표 신임미달(43%)로 90년3월 파트리시오 아일윈 민선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했으나 자신이 오는 97년까지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할 수 있도록 했다.앞서 군부는 80년 헌법개정을 통해 자신들의 73∼78년 좌파대상 정치범죄를 일괄사면시켰으며 민정이양하면서 상원의 5분의1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지난 17년간의 군부독재 아래서 자행된 인권탄압 범죄를 법적으로 처리할 힘이 부족한 민선정부는 90년4월 「진실과 화해 전국위원회」를 구성,가해자에게 사면을 조건으로 범죄고백을 받고,모든 피해를 확인·적시하는 문서작성에 들어갔다.91년3월 아일윈대통령은 2천2백79명의 정치박해 사망자에 관한 1천쪽 분량의 보고서 완성을 TV방송을 통해 발표하면서 「국민화합」을 강조했다.여기서 피해자는 인적사항을 명확히 기록했으나 가해자는 이름 대신 소속기관을 거명하는데 그쳤다.칠레의 이같은 과거청산 방식은 동유럽,남미,남아공 등 14개국이 모방하는 세계적 모델로 예시되곤 한다. 한편 76년 미 워싱턴에서 전외무장관을 살해한 범죄는 군부의 사면법에서도 제외되었는데 92년11월 장기조사 결과 군부의 정치탄압 실행기관인 국가정보국 소행으로 밝혀졌고 당시 국장인 콘트레라스 퇴임장군과 참모장 에스피노사 현준장은 각각 7,6년형을 선고받았다.이 선고는 올 5월 최고법원에서 확정되었지만 피노체트 장군과 장교들은 콘트레라스 장군을 해군병원으로 피신시켜 에스피노사 준장만 현재 수감중이다. ◎남아공/「진실 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 창설/과거 인종차별 범죄행위 조사키로 지난 7월20일 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은 「진실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를 창설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만델라는 이 위원회가 흑백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숱한 인권탄압 등 국가의 주도 아래 벌어진 범죄들을 조사·단죄하기 위해 창설되며 창설 후 18개월간의 한시적 활동을 통해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모든 범죄행위들을 철저히 조사,남아공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공국민들은 대부분 이 위원회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인종차별정책에 따른 피해가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현재 남아공의 연정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나 국민당도 모두 겉으로는 이 위원회의 취지에 찬성하고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이들 정치인들이 이 위원회의 활동을 전폭 지지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과거의 범죄행위들이 정말로 철저히 파헤쳐지면 과거의 백인 소수정부를 이끌었던 데 클레르크 부통령의 국민당측은 물론 만델라 대통령의 ANC측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일부 관측통들은과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가져올 정치적 대가가 도덕적인 사기 앙양에 비해 훨씬 클 것이라며 과거의 범죄행위가 어디까지 파헤쳐질 수 있을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범죄가 밝혀지더라도 처벌에 있어 어떤 예외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만델라 대통령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며 과거의 범죄행위를 밝혀내는데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 러 록음악계 스타 빅토르 최 앨범 출시

    ◎타이틀곡 「변화」 외 「별」·「전쟁」 등 수록 한인 3세로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적 존재로 추앙받는 빅토르 최의 두번째 앨범 「변화」가 출시됐다. 옛 소련체제하의 암울했던 민중의식을 대변하는 저항의 음유시인인 그의 이번 두번째 앨범에는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의 개인적 애창곡이자 범국민적 노래였던 타이틀 곡 「변화」를 비롯,답답한 사회주의 현실의 타개를 토로한 「여름」「별」「자아성찰」「전쟁」「혈액형」등 그의 대표곡들이 수록돼 첫 앨범 「마지막 영웅」의 아쉬움을 채워주고 있다. 일반적인 록밴드와는 달리 복잡하지 않으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록음악을 사용해 흐느끼듯 절규하는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는 빅토르 최의 매력을 이번 앨범을 통해 다시한번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CD자켓의 표지를 빅토르 최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으로 장식해 눈길을 끈다.
  • 동구 공산세력 부활하는가/고실업률·빈부격차로 민심이반 심각

    ◎「러」도 집권 유력… 신좌파행진 지속될듯 공산당 출신 대통령의 탄생으로 폴란드에서는 정부와 의회 모두를 옛공산세력이 차지하게 됐다.10년 싸움 끝에 지난 89년에 얻어낸 탈공산화를 자기들 손으로 스스로 거두어들인 셈이다.하지만 이런 현상은 폴란드가 처음은 아니다.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지 6년여만에 옛동구국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세력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권력전면으로 되돌아오고있다.지난 92년 옛소연방 국가인 리투아니아 총선에서 사회주의 연합이 압승을 거둔 이래 헝가리,체코,슬로베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그리고 옛공산주의 종주국인 러시아까지 사회주의 열기는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92년 11월 총선에서 좌파세력연합이 의회전체의석의 35%를 차지했고 그해말을 전후해 슬로베니아,불가리아,리투아니아에서 모두 좌파들이 의회를 장악했다.93년 12월 소비예트 강제해산 직후 치러진 러시아총선에서도 러국민들은 공산당,농민당등 좌파세력과 우익민족주의 세력에 몰표를 주어 의회 다수의석을 차지하게 했다.94년 4월과 5월 우크라이나,헝가리 총선에서도 사회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6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러시아에서도 공산세력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어 신좌파행진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이런 추세 뒤에는 각국 모두 공통적인 배경요인들을 갖고 있다.첫째는 공산당 몰락 뒤 집권한 소위 민주개혁세력의 실정이다.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서구자본주의를 모델로 한 급진적인 시장경제화를 무리하게 추진해 고실업률,생산하락,빈부격차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이 민심이반의 첫째 요인이었다.둘째로는 공산당 세력들이 스스로 과거의 이념적인 경직성에서 벗어나 경제실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등 실용적인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이다.이들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사회주의적)자본주의의 실현」이라는 기치아래 사회보장제의 확충등을 내걸고 노약자,연금생활자등 개혁와중에 파생된 소외계층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민주세력들의 부정부패,권력다툼,무능,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등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도 공산세력의득세에 좋은 토양이 됐다.소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발트해 3국의 민주세력들 역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하나같이 버림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물론 이런 추세가 전통적인 공산주의의 부활로 연결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으로 분석한다.국민들이 오랜 공산압정 끝에 얻은 자유의 귀중함을 이미 맛보았고 좌파세력 스스로가 현실적인 대안제시 등으로 체질개선을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외교에서 그동안 고수해온 친서방 일변도 노선의 수정이나 국가기업에 대한 민영화정책의 속도조절등 정책면에서는 적지않은 노선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란 예상이다.공산당 몰락 이후 또 한번 미지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사노맹 호남위원회 재건기도 13명 구속

    【광주=최치봉 기자】 전남경찰청은 21일 광주·전남지역에서 반국가단체인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조직을 재건하려 한 진보연합 부위원장 심우춘씨(30),대우캐리어 노조위원장 김상진씨(31) 등 PD(민중민주주의) 계열 운동권 조직인 진보연합 소속 1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구속했다. 경찰은 『이들이 지난해부터 광주·전남지역 노동단체와 재야단체 회원들을 중심으로 사노맹 호남위원회를 재건하기 위해 활동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며 『구체적인 혐의사실은 수사기밀상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 바웬사는 죽었는가/임춘웅 논설위원(서울논단)

    19일 실시된 폴란드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유폴란드의 영웅」 레흐 바웬사 현직대통령이 패배하고 전 공산정권의 각료출신이자 공산당 후신인 민주좌파연합(SLD)의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 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있다. 그것은 폴란드뿐 아니라 80년대말 동유럽의 자유화에 크게 공헌했던 바웬사란 한 역사적 인물의 좌절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지만 좀더 본질적으로는 동유럽의 자유화가 퇴보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뉴스의 초점은 크바스니에프스키의 승리보다 바웬사의 패배쪽에 맞춰져있다.역사가인 브로니슬라프게레멕은 『크바스니에프스키가 얻은것 보다 바웬사가 잃은게 더많다』고 논평하고있다. ○자유화 후퇴 아니다 바웬사가 왜 패배했는가 하는데는 별다른 이론이 없는것 같다.그가 더이상 폴란드인들의 희망과 욕구를 충족시킬수 없었다는 것이다.그는 90년 집권하자 솔리대리티(자유노조)의 절대적인 지지 기반위에 자유시장경제체제로의 대전환을 시도했다.그러나 집권 5년이 지난 지금 폴란드 국민들은 더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고 실업률이 급격히 늘어갔다.최근에는 생활필수품 마저 달리는 상태가 됐다. ○실용주의 선택일뿐 바웬사는 국민들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지만 국민들을 더이상 인내하게 하지는 못했던것 같다.폴란드사람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살아가기에 불편함을 줄여줄 효율적이고 평범한 전문가를 찾았던 것이다.크바스니에프스키는 급진적 개혁 대신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지지하며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란 공약을 내세웠었다. 폴란드인들은 공산주의 아닌 크바스니에프스키가 표방한 실용주의적 정책노선을 선택한 것이다.크바스니에프스키는 이념적으로 좌파사회주의에 기초를 둔 온건개혁정책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개혁의 보폭을 현실적으로 조정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요한 부분은 최근 동유럽에 불고있는 좌경화 바람이다.이번 폴란드의 좌경화에 앞서 헝가리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슬로베니아 5개국이 최근 좌파대통령을 선출했다.러시아에서도공산당이 다음 선거전에서 선전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좌경화가 공산주의로의 전면 복귀가 아니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있다.급격한 자유화의 부작용에 따른 반동이란 분석이다.그것은 최근 좌파 대통령을 뽑은 나라들이 구체적으로 공산화정책을 내놓은 예가 없다는 데서도 확인할수 있다. 폴란드의 크바스니에프스키도 서방의 NATO와 EU(유럽연합)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던 바웬사 정권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히고있다.현실적으로 크바스니에프스키는 좌파의 지지만으로 폴란드를 이끌어갈수 없다.48%나 되는 바웬사 지지세력을 외면할수도 없으려니와 이번 선거에서 바웬사에게 등을 돌렸던 인구의 95%에 이르는 가톨릭세력은 기본적으로 우파지지 세력인 것이다. 이런 판세로 해서 바웬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폴란드의 우파리더로 건재하리란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보다 본질적으로는 현재 세력을 확대하고있는 동유럽의 좌파정치세력들중 볼셰비키정치노선을 표방하고 있는 정당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그들 대부분은 「과거와의 단절」을 표방하고 있으며 좌파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하고있다. ○혁명적 변화의 한계 동유럽에 불고있는 좌경화를 공산화로 보는 것은 오류다.그것은 급격한 변화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고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어려운 경제생활에 대한 불만이다.변화의 시대에도 혁명적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바웬사의 좌절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있다. 그러나 역사는 비록 서서히 움직이긴 하지만 역사의 향방은 바뀌지 않는다.바웬사는 죽지 않았다.
  • 해외동포 어디에 얼마나(서울신문 50돌 특집)

    ◎그들의 위상은 어떠한가/6대주 142국에 520만명 근면·성실로 기반 확고히/2년새 5.7% 증가… 중국에 최고 194만 거주/미 180만·일 69만·중앙아시아 46만명 생활/최근 취업·유학·투자이민 급증/망국·가난의 한 딛고 현지 빠른 적응/정·관·재·교육계서 활약 숱한 인재 배출/한민족 동질성 유지가 최대의 과제로 구한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주로부터 시작된 한국이민사가 90여년에 이르면서 해외교민수가 5백만명을 넘어서고 있다.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그리 길지않은 역사이지만 한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어느 나라에 얼마나 살고 있으며 그들의 현재 위상은 어떤가를 알아본다. ▷교민현황◁ 94년12월31일을 기준으로 외무부가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해외교포는 모두 5백22만8천36명이다. 지역별로는 아시아에 2백72만,미주에 1백96만,유럽에 52만,중동에 9천2백,아프리카에 3천2백명이 분포하고 있다. 국가별로 볼 때는 중국에 1백93만명으로 가장 많다.이어 미국에 1백53만,일본에 71만,러시아를포함한 독립국가연합에 46만명이 거주중이다. 전세계 1백92개국 가운데 우리동포가 살고 있는 나라는 무려 1백42개국이나 된다.중국이나 미국·일본등처럼 역사적인 이유로 우리 민족이 옮겨간 경우도 있다.그러나 우리동포의 분포가 이처럼 넓어진 것은 최근 늘어난 선교이민과 태권도교관의 파견 때문이라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2년마다 해외교포의 현황을 파악하는 외무부가 92년12월31일자로 파악한 해외교포는 4백94만3천5백90명이다.해외교포는 지난 2년동안 5.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해외교포가 증가한 것은 교포의 2세·3세·4세가 태어났고,해외경제활동의 증가로 우리 기업등의 파견원이 많이 진출하기 때문이다. 해외교포 가운데 95%인 4백70만명은 거주국의 국적을 갖고 있거나 거주국에서의 영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나머지 5%는 상거래나 취업·유학등으로 체류중이다. ▷중국 교민◁ 중국에 한국인이 건너간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이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부터 전쟁포로나 인질·공녀등의 형태로 한국인의 이주가 시작됐다.그러나 중국에 2백만의 교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하면서부터다.외무부에 따르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민의 중국이주가 급격히 증가,1907년에 7만1천명,1910년에 10만9천명,1916년에 20만명,1921년에 30만7천명이 조국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방이후 80만명 귀국 1945년 이전까지 약 2백16만명의 한국인이 만주지역에 거주했으며,해방과 더불어 80만명이 귀국하고 나머지가 잔류했다. 현재 우리교민은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2번째 규모다.전체의 약 97%인 1백87만명이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등 동북 3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특히 길림성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2만명이 밀집해 살고 있다. 중국 교민들은 해방후부터 냉전시대까지 남한과는 별다른 접촉을 가질 수가 없었다.따라서 정부도 이들에 대해 특별한 정책을 세울 수 없었다. 지난 88년부터 우리정부가 사회주의권 교민의 자유로운 모국 방문을 허용함으로써 중국동포와의 교류가 본격화됐다. ○동북 3성에 집단촌 그러나중국교민들의 모국 방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교민들이 경제수준이 월등한 모국에서 돈벌이를 하고자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밀입국,불법취업,취업사기,절도·강도등의 사건이 잇따랐다. 정부는 이에 따라 중국교민들에 대한 사증발급 심사를 강화하고,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중국내에서 교민들은 한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또 중국 교민들은 스스로를 한국인 혹은 북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조선족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미국 교민◁ 한미우호통상조약에 따라 1903년 한국인 1백21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나면서 미국 이민사가 시작됐다. 이후 1961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래 지난해까지 모두 62만6천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이 기간 동안의 총 해외이주자 79만2천명 가운데 미국이민 비율이 79%를 차지하고 있다. 재미교민의 상당수는 한국내의 중산층,식자층 출신이며 자녀의 교육문제,경제적 이해관계,혹은 한국사회에서의 불만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이다. ○구한말 하와이로 나가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물론 언어장벽과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아직 미국사회의 주류에 진출하는데는 한계를 보이지만,최근들어 의사·변호사등 전문직 진출자가 늘어나고 있다.캘리포니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씨가 대표적인 한국교민의 성공사례이다. 교민 1.5세와 2세 이후세대는 현지에서 교육,성장해 비교적 빠르게 현지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 또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교민 사회에 북한과의 교류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과거 음성적으로 활동해오던 친북인사의 활동도 표면화하고 있다고 외무부 당국자는 밝혔다. ▷일본 교민◁ 일본에 거주하는 교민들은 다른 지역의 교민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태평양전쟁 발발후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강제적으로 징용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강제 징용자의 숫자는 19 45년 당시 2백10만명에 달했으나,해방후인 46년 이후 65만명이 잔류하고 있다. 재일교민들은 오사카를 필두로 나고야·고베등지에 밀집해 거주하고 있으며,주로 상업 제조업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본교민들은 본국에서의 좌·우익 대립을 그대로 답습,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그러나 최근에는 남북간의 국력차이가 워낙 커져서,민단과 조총련이 특별히 경쟁하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교민1세들은 우리국적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일본에 귀화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민 2세이후부터는 모국과의 연대의식이 희박해지고 있으며,이에 따라 일본에 귀화하는 사람이 늘고있다.지난 50년 이래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은 모두 20만명 정도다.특히 교민 2,3세들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선호해 91년 결혼한 사람 가운데 82.5%가 일본인 배우자를 맞이했다. ▷독립국가연합지역 교민◁ 현재 옛 소련 지역내에는 러시아에 11만명,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카자흐스탄에 10만명,우크라이나에 9만명등 모두 46만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이들은 대부분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된 우리 교민의 2,3세들이다.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 이들은 자연적으로 그곳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따라서 우리말과 문화적 전통을 많이 잃은 상태고,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교민들 말고는 우리말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도 적다. 그러나 이들은 국제고려인단체연합회등 31개의 교민단체를 조직,모범적으로 혈연의식을 이어가고 있다.또 이를 바탕으로 각종 문화단체 활동,출판물 발간활동과 함께 대학교수,영농지도자를 다수 배출했다.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각 공화국은 우리교민의 근면성,높은 교육수준과 사회기여도를 평가하고 있다. ○사회기여도 평가 받아 이 지역에 대해서 정부는 물론 민간기업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우리업체와 현지 교민들간의 고용과 취업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내각 안에 「민족문제 및 지역정책부」가 설치돼 소수민족과의 화합 및 육성지원 정책을 마련한다고 표방하고있으나 체첸 공화국 사태에서 보듯이 러시아의 범위를 이탈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교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민족의식과 민족적 일체감을 고양하기 위해 한글교육,전통문화 재생,학술·체육 교류를 중심으로 지원책을 마련해가고 있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4만명의 교민들 가운데 1세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는 문제는 한·러·일간의 현안으로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주추이◁ 우리나라의 최근 해외이주자 추이를 보면,80년 3만3천3백명에서 83년에 2만3천3백명으로 하강세를 보이다,86년 3만7천80명으로 다시 늘었다.이후 다시 감소해 93년에는 1만4천4백명으로 매우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그러나 사업과 취업이주는 지난 10여년동안 꾸준히 증가했다.이는 그동안의 연고초청 이주,즉 막연한 동기의 해외이주보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주형태가 늘어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민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역이민도 늘어나고 있다.80년 역이주자수는 1천49명으로 그해 이민자의 2.8%였다.86년에는 역이민자의 비율이 7%를 차지했다가 89년 25%로 급증했으며,91년 40%,92년 50%를 기록한 뒤 93년에는 60.65%를 차지,이민자의 반이상이 되돌아오는 현상을 보였다. 역이주자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우리국민의 소득수준이 향상돼 국내에서도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외무부는 설명하고 있다.같은 이유로 해외이주자수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외무부는 밝혔다. 최근 국내외에서 해외교민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의 하나로 해외동포에 대한 이중국적을 허용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해외교민에게 이중국적을 부여, 국내 왕래를 자유롭게 하고 각종 할동 및 재산권 행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교민의 권익을 크게 신장할 수 있는 방안이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점을 수반한다. 우선 교민들이 국적을 가진 두나라로부터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게 되고, 범죄가 발생할 경우 자국민 불인도 원칙을 고수, 외교적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또 납세·병역 등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과 비교할 때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의 형평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국민들과 위화감이 조성될 우려가 크다.
  • 중국 경구철도 개통 의의(해외사설)

    경구철도공사(북경∼홍콩 구룡반도에 접한 심천까지구간)가 3년간의 총력끝에 8·5기간(8차5개년계획) 막바지에 완성됐다.경구철도는 중화민족의 「세기적 꿈」이다.손중산(손문)선생도 「건국방략」에서 구강에 대교를 건설,남북철도의 한 중심이 되게 할것을 구상한바 있다. 신중국성립직후인 58년도에도 「소경구」(북경∼구강)건설방안이 제기된때부터 91년 4월 「대경구」(구룡반도까지)가 국가 8·5계획에 포함될때까지 32년의 세월이 흘렀다.이번 건설로 남북수송선의 획기적인 변화가 기대된다.하북성중부 대별산,정강산 강서성 남부등 오랜 혁명근거지가 빈곤에서 벗어나고 홍콩·마카오지역의 안정번영등 조국통일대업 촉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래 97년 홍콩주권회복때 개통예정이던 경구철도는 철도운수의 병목해소를 통한 국민경제발전 촉진을 위해 연20만의 인력과 자금을 집중투자,앞당겨 이루어졌다.경구철도의 조기완성은 개혁의 또하나의 성공이다.국무원이 제시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중앙과 지방이 결합,각 부분 별도 책임아래 건설한다는 방침」,「투자만큼 수익을 가져오는 원칙」등 철도투자 체제의 개혁을 보여주었다. 경구철도는 투자범위를 합리적으로 구획하고 중앙투자를 위주로 지방자금과 외자차관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중앙과 지방이 함께 건설한 것이다.건설관리체제개혁측면에서 구간별 도급과 시공자의 책임제등 경쟁메커니즘을 확립했다.시공을 담당한 10개 주체들이 모두 입찰과정을 통한 우수한 참여자였다.각 시공단위는 항목 경리책임제를 시행,독립자주적인 생산요소의 합리적 배치와 생산원가 채산을 행하였다. 또 전 구간의 엄격한 공사건설 감리제도가 시행됐다.건설단위가 제3자를 선정,공사의 건설투자,품질·공사기간에 대한 효율적 감독을 시행했다.이런 모두가 개혁을 견지하는것이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성공을 확보하는 기본요인임을 힘있게 입증한다.건설기간동안 보여준 참여자들의 창업정신,백절불굴의 정신,진취정신등 경구건설정신은 애국주의 집단주의 사회주의 각오의 구현이며 주요한 자산이다.
  • “개혁 지지부진”국민들 반감/파 대선 바웬사 대통령 패배의 의미

    ◎급진 시장경제 시도… 고실업률·인플레 야기/“점진 개혁 선택” 동구 공산계 재기 추세 반영 폴란드 대통령선거에서 바웬사 대통령이 패배한 것은 한마디로 지지부진한 개혁정책,사분오열된 민주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낳은 결과로 풀이된다.바웬사는 유권자들의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무기로 공산당에 대한 국민들의 해묵은 「증오심」에 다시 불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새 대통령에 당선된 크바스니예프스키는 공산당 각료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바웬사정권이 개혁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각종 후유증인 실업,인플레,빈부격차,정파간 불화들을 치유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약속해 지지를 얻어냈다.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쟁보다 피부에 와닿는 청사진으로 도전해 성공을 거둔 것이다.「미래를 선택하자」는 그의 선거슬로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웬사의 패배는 그의 재임기간중 계속 악화돼온 국내사정으로 볼때 어느정도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그는 누가 뭐래도 반석같던 공산정권과 싸워 이겨낸 불굴의 투사였다.하지만 지난 89년 공산정권 몰락이후 그의 인기는 하락을 거듭,선거직전 10%까지 떨어졌다.15%에 육박하는 실업률,특히 독단적인 통치스타일이 가져온 개혁진영의 내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감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결과는 국외적인 추세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러시아를 비롯한 엣소련지역 국가들과 불가리아,루마니아등 옛동구권지역 곳곳에서 공산당 이름을 내건 좌파세력이 권력전면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공산당 몰락직후 한때 이들 나라에서는 너나없이 서구식 자본주의를 모델로 한 쇼크요법식 시장경제개혁에 착수했다.그러나 이 방식은 대부분 높은 인플레,실업률,빈부간 격차만 넓혀놓은 채 국민들의 불만만 가중시켜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폴란드대선은 냉전종식이후 이들 동구권이 1단계인 급진개혁시대를 마감하고 좌파 민주주주의라는 새로운 실험을 본격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물론 이 실험의 기본방향은 전체주의로의 복귀가 아니라 경제정책면에서 보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개혁을 도입하고 사회보장 측면을 보강하겠다는 것이다.바웬사는 이 시대적 변화를 간과하고 너무 이념적 이분법에 집착하다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셈이다. ◎폴란드 차기 대통령 크바스니에프스키/“미래 선택” 구호 지방서 큰 인기/현실 적응력 뛰어난 서구형 사회주의자 19일의 결선투표에서 바웬사를 물리치고 차기 폴란드 대통령 당선된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41)는 현실적응 능력이 뛰어난 서구형 사회주의자로 통한다. 이같은 성향은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집단인 민주좌익동맹(SLD)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폴란드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교육수준이 비교적 높은 정치가답게 이번 대선에서 버스로 전국 80여개 도시를 돌면서 유권자를 직접 상대하는 선진국형 유세방법을 도입했다.크바스니에프스키의 한 선거참모는 이를 위해 지난해 여름 미국에 가서 선거운동 기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과거 공산정권에서 체육장관을 지낸 경력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선택하자」는 구호를 외쳐 시장개혁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지방 도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이러한 점 때문에 그에게는 「냉소적 기회주의자」라는 달갑잖은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54년 폴란드 북부 도시 비알로가르드에서 출생,그다니스크대학에서 무역학을 공부하다 23살때 공산당원이 됐고 30살이던 84년 폴란드 사상 최연소 장관(체육장관)에 올랐다. 영어와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하며 수영 스키 테니스 등을 즐긴다. 현재 바르샤바 교외의 부촌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부인 졸란타,14살 짜리 딸과 함께 살고 있다.
  • “실업해소”여성단체 뭉쳤다(서정아기자 독일의 여성계 취재기:상)

    ◎통독·불경기로 실업 급증… 63%가 여성/여성센터등서 직업 훈련­재취업 알선 남녀평등 실천의 대표적 나라로 알려진 독일.명실공히 남녀평등을 규정한 법·제도의 발달에도 불구,독일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공장들이 대거 폐쇄하면서 가장 먼저 해고된 쪽은 여성이었다.이 때문에 한때 「독일통일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말이 대유행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여성들은 「실업에서 벗어나기」를 제1의 과제로 삼아 다시한번 강인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연방 및 지방정부,각종 여성단체들도 이에 합세했다.독일의 심각한 여성실업,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들끼리의 자구책,그리고 각종 조직에서 남성과 여성의 균형을 실현해나가려는 독일여성의 노력은 남다르다. 『일자리가 없어 노동청에 실업수당을 신청하러 갈때는 마치 구걸하는 기분이에요.물자가 풍부해진 것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파탄」상태입니다』 옛 동베를린지역에 사는 여성 브리지트 메이씨(52)는 독일통일 5년째인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동독지역 여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실업」이다.통일이전 동독여성들은 95%가까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여성의 취업은 너무나 당연했으며 육아를 비롯한 웬만한 가사노동은 사회가 해결해주었다.그러나 통일이후 새로운 경제체제로 인한 시장개편과 함께 동독지역 공장들이 경쟁력약화로 문을 닫자 1순위로 해고됐다. 지난 93년 현재 옛 동독지역의 실업률이 15·8%,이 실업률에는 취업을 위해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과 이른바 「강요된」가정주부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체감하는 실업률은 40∼50%에 이른다.전체 실업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63%다. 서독지역 여성들도 실업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그러나 이들은 취업이 생존인 동독여성들의 사정과는 좀 다르다.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독 여성은 파트타임 근무를 많이 하고 각종 사회단체에서 자원봉사로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여성과 정부측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전체를 휩쓴 실업태풍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다.이제 동독지역 여성은 통일초기 변화한 사회를 수용하지 못하던 충격상태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무조건적 남녀평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비로소 여성불평등 상황에 눈을 떠 「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손으로 해결한다」는 자각으로 취업대책에 적극적인 여성이 많다. 무엇보다 독일 각 지역에 있는 여성센터,여성카페와 재취업훈련기관이 여성실업문제 타개의 선봉역할을 한다.연방 노동청과 지방정부,유럽연합등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이들 단체에는 실업여성이 모여 대화로 서로의 심리적 압박을 치유하기도 하고 동독여성은 통일이후 새로 배워야 할 생존기술들(은행가는 일,관청서류 취급방법)을 배운다.또 취업을 위해 나이 든 여성도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갖기 훈련부터 기업에 자신을 알리는 이력서 작성기술이나 면접훈련,컴퓨터강습,조세·노동·사회연금법 등을 교육받는다. 여성문제중에는 이혼하거나 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편모(싱글 패밀리)의 실업도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싱글패밀리는 독일 전체가정의 16%인 2백만가구로 보편화돼 이들의 이익단체가 지역마다 결성돼 취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이들은 세금감면 및 유치원비 삭감을 신청할 수 있으며 법에서 일반가정과 싱글패밀리의 차별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준비작업도 하고 있다. 여성들의 근본적인 취업대책은 경제활성화가 우선돼야 하겠지만 스스로를 돕는 독일여성의 노력은 앞으로 경제가 호전되는 대로 큰 빛을 발할 것 같다. ◎독일 노동총연맹 여성정치부 엘렌 부르크하르트/“통일후 여성계 최대 이슈는 실업” 『독일여성 노동계의 이슈는 역시 실업입니다.통일후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졌기 때문이죠』 엘렌 부르크하르트 독일 노동총연맹 여성정치부 담당자는 독일여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도 실업,노총 여성부의 당면과제도 실업이라고 말했다. ­독일연방정부의 실업개선책은? ▲연방 노동청에서는 우선적으로 3백40만여명의 실업자들을 위한 노동지원금을 확보하고 있다.이 지원금은 기업주와 노동자들이 내는 보험비로 충당된다.그리고 공공부문에서 고용을 창출하는 계획인 직업창출조치(ABM)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실업대책중 중점대상이 있다면. ▲장기실업자가 많은 동독지역이다.농업지대인 메클렌부르그주의 경우 실업자가 60%에 이른다.실업된지 2년이 지나면 실업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구제가 시급하다.더욱이 이 지역 여성들 문제는 위기상황이다.일자리가 나도 남성이 우선이며 특히 기혼여성은 아이봐줄 곳이 마땅치 않아 재취업하기가 너무 힘든 현실이다. ­여성의 노동권보장을 위해 최근 투쟁한 사례가 있는지. ▲지난 3월 한 여자 청소부가 병이 나 일을 못하는 동안 용역회사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해 총연맹에 상담을 의뢰했다.회사측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유럽연합 재판소에 여성 간접차별을 담은 위법이라고 제소해서 승소했다.그후 노동법이 개정돼 지금은 병이 났을 경우 6주까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 백두산 산삼(압록강 2천리:13)

    너도나도 「방산」… 사라지는 산삼/“한뿌리만 캐도 가난 벗는다”… 이젠 전설로/집안 「신개하홍삼」 한때 고려인삼과 버금/인삼값 폭락… 꽃사슴 사육으로 대체 『화승총 메고 다닌 사람티고 범 잡디않은 사람 없고,홍실 가디고 산판 헤맨 사람티고 산삼 못캔 사람 없디요.그만큼 딤승이 우글대고 삼이 많았다 이겁네다』 노인들은 산 이야기만 나오면 으레 신바람이났다.얼핏 허풍스러워 보이나 백두산 자락을 깔고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깔려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장백현지」와 같은 기록에도 백두산 산삼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최근 기록을 보면 지난 1979∼85년까지 국가가 장백현에서 거두어들인 산삼은 1백9·6량(5천4백80g)으로 되어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산삼을 백초 가운데 으뜸(백초지왕)으로쳤다.그리고 만리장성 동쪽을 말하는 관동의 세가지 보물의 하나로 꼽은 명산물이 백두산 산삼이었다.질병을 없애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산삼 한뿌리만 캐면 가난뱅이도 금방 부자가 되었다.청나라 연호로 함풍연간(1851∼61년)에 어떤 촌민은 산삼 여덟뿌리를 캐서 황제에게 바쳐 오품지부의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산삼 진상… 벼슬 얻기도 산삼 캐는 일을 방산이라고 부른다.옛날에는 전적으로 삼만을 캐러다니는 직업 방산자들이 있었다.이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산삼의 생장과정까지 지켜볼 정도로 산삼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산삼이 자라는 자생지를 훤히 꿰뚫었다.산삼은 여간한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처음 산삼을 발견하면 먼저 『봉추요』라고 소리를 친다.그러면 옆에서 『뭐요?』라고 묻는다.발견자는 몇잎이라고 일러주고 즉시 홍실로 뿌리 위쪽을 묶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집안시 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창철(36)씨는 지금 향정부에서 민족사무조리로 일하는 조선족 청년이다.그런데 부친 송병계(62)노인때부터 산삼을 캐러 다닌 터여서 한때는 방산에 나섰던 경험이 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방산에는 삼매경같은 무아의 경지가 뒤따르는 모양이다. 『초막에서 밤새 모기에 물리는 고초를 겪지만 날이 밝아 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듭데다.시원한 실개천에 세수를 하고 그 물에 밥을 디어먹고 산을 타디요.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매다 늦게 점심요기를 할 요량으로 자리를 잡았댔습네다.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빨간 꽃이 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거이 산삼이었디요.밥 보자기를 밀쳐놓고 봉추라는 소리를 냅다 지를 수 밖에….횡재를 만나서리 늦은 점심도 아예 굶고 정성들여 캤디요.세잎 짜리였는데,장사꾼한테 4천원을 받았습네다』 그 깊고 넓은 백두산 자락에는 산삼의 열매를 따 먹는 새가 분명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부리 아래가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새다.이 새를 쫓아 가면 반드시 산삼을 만난다고 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방초새나 산삼새라고 부르는데,백두산 인근 사람들이 흉내낸 새소리는 「왕간가­이오­」다.북송때 백두산에 산삼을 캐러갔다가 굶어죽은 산동성 기수현 사람인 왕간가와 이오의 울음이라는 전설이있다. ○초막 짓고 산에서 생활 한대의 약학서인 「신농본초경」을 보면 산삼의 약효는 대단하다.그래서 백초지왕이라 했고다른 약재에 비해 값도 엄청 높아 여늬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옛날에는 장백현이나 집안현에서 산삼을 캐면 안동이나 영구 같은 도시에 내다 약재상들에게 팔았다.요즘은 사정이 달라 중국을 찾는 한국인이 단골이 되었다.그래도 값이 싸다면서 닥치는 대로 사는 바람에 판로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두산 산삼이 도라지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점점 희귀해지고 있다.세월이 좀 더 흘러가면 백두산 산삼은 전설로만 남아있을지 모른다. 산삼씨앗을 따서 산에 뿌린 이산삼과 또 산삼씨를 뜰에 뿌려 재배한 원삼의 대를 이어 청나라 강희원년인 1662년에 압록강유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특히 집안시는 중국의 중요한 인삼재배지가 되었다. ○막차 탄 인삼농가 많아 오늘날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인삼은 「신개하홍삼」이다.그 질이나 약효가 고려인삼에 버금간다고 집안 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2만8천2백50장이었다가 1959년 집체화 시기에는 재배량이 11만2천1백8장으로 늘었다.그리고 1983년 개체화 시기로 넘어가면서는 더 늘어 57만1천1백12장이나 되었다.총 수확량은 74만2천2백88㎏으로 2천1백66만원어치를 생산했다. 그러나 요즘와서 인삼은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다.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명철(41)씨는 지난 19 88년부터 인삼을 재배했다.당시 1등품 인삼 1근에 37원8전을 홋가해서 인삼재배자들이 큰 돈을 벌 때였다.그래서 1만원을 대부받아 인삼재배를 시작했는데,재수 없는 사람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깨는 격이 되고 말았다.인삼값이 해마다 38%씩 내려가 4년동안 일만 죽도록 하고 대부금을 모두 날렸다. 『작년에 삼값이 얼마했는지 아십네까? 한근에 5원을 했으니 안망할 턱이 없디요.국가에서 안사니끼리 거간꾼들이 날도둑하듯 뜯어먹은 것입네다.개체사회에서 살라면 더 배와야디요.돈놓고 돈먹을 줄 알아야 농사도 짓는 세상이 됐지않나 합네다』 오랜 세월을 사회주의에 순치한 사람들인지라 시장경제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일하고 입에 풀칠을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그런속에서도 시장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에따라 전업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벌고 있다.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의 김학준(60)씨는 시류를 잘 탄 농민이라 할 수 있다. 『인삼 경기가 좋다니까 너도나도 대들었디요.이러다는 인삼이 내리막질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네다.그동안 내래 인삼농사로 수만원 벌어놓은 처지고 해서 인삼농사에서 손을 떼었디요.대신 꽃사슴 두 마리를 샀지 않았갔시요』 그는 1만원을 들여 꽃사슴 2마리를 사서 지금은 12마리로 늘렸다.지난해 수놈 5마리의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 본전 1만원은 이미 건졌다.압록강 연안에도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경쟁사회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 노씨 구속­육사서 구치소까지

    ◎「2인자 처신」 성공후 「탐욕의 추락」/9사단장때 「12·12」 가담… 권력 전면에/올림픽 조직위장→민정대표→대통령으로 팔공산 기슭.꿈많던 피리부는 소년 노태우는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었던 꿈은 이제 한낫 물거품이 됐다. 현재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차디찬 감방.만인지상으로 일국을 호령했던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되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또 온 국민들의 가슴속에 참담한 상처를 남기게 됐다. 꿈많던 소년시절,명예를 존중했던 육사시절,화려했던 군생활,세계에 올림픽개막을 선언하던 당당한 대통령의 모습은 이제 과거사가 됐다.가난한 시골 면서기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또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죄인으로까지 그는 전락했다.노씨가 예순넷 평생을 걸어온 길은 한 인간이 얼마만큼 화려하게 변신할수 있는가,또 얼마만큼 비참해 질수 있는까 하는 점을 극한적으로 보여준다. ○51년 육사11기 입학 그는 1932년12월4일 팔공산 기슭인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룡리(현재 대구시 동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7살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뒤 삼촌의 도움으로 공산국민학교를 거쳐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대구공업중학교 4학년때 경북중학에 편입해 졸업한뒤인 51년 육사 11기로 입학하면서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육사는 그의 인생항로를 크게 뒤바꿔놓았다.노씨는 육사에서 동기생인 전두환전대통령,김복동자민련부총재 등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전전대통령과는 군요직과 대통령직을 주고받는 동지로,후계자로 인연을 맺게 된다.김씨와는 59년 김씨의 여동생 옥숙씨와 결혼해 처남 매부지간이 됐다. 노씨는 대위로 서울대사대 ROTC교관으로 지내던 중 5·16을 맞았으며 전두환대위와 함께 하나회를 이끌며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계기를 마련한다.이후 67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68년에는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70년에는 대령진급을 했다.74년 장군에 진급해서는 전씨의 뒤를 이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78년 소장으로 진급해 9사단장을 맡았다.그는 9사단장 시절 자신의 병력을 12·12군사쿠데타에 동원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이미 그때부터 그의 영광과 오욕의 운명이 예고되었을지도 모른다. 노씨는 12·12거사의 주모자였던 전두환보안사령관과 함께 하극상에 성공함으로써 권력의 길을 걷는다.12·12 다음 날인 79년 12월13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옮겼고 다음해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기용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또 그해 8월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는등 권력의 핵심인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했다.마침내 81년 7월 대장계급을 달고 29년 6개월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전국구로 국회 진출 그는 정무장관,초대 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을 거쳐 올림픽조직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을 맡는 등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85년 2·12총선에서는 민정당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초선이며 전국구인 그는 전대통령의 후광으로 민정당대표위원에 올라 본격적인 차기대권수업에 나섰다.이때 그는 최고권력자에게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2인자의 처신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전전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잃지 않았다.친구였던 전씨에게 사석에서도 반말은 커녕 다리를 꼬고 앉지도 않았다.마침내 그는 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전씨로부터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는 87년 12월 대선에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세우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와 대결해 유신이후 16년만에 직선제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됐다.이에 앞서 그는 재집권 시나리오의 하나인 직선제 개헌수용등을 「6·29선언」으로 묶어 자신의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88년 4월26일 13대총선은 여소야대로 나타나 정국운영에는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됐다.과거청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는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전씨를 국회증언대에 세우고 백담사에 유배시키는 등 평생동지의 관계가 돌이킬수 없는 원한관계로 돌아섰다.전씨의 형과 동생,처남 등 친인척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전씨측 사람들은 이를두고 노씨를 배은망덕하다느니,배신자라는 소리가 나왔으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비난에 묻혀버렸다. ○외교치적 긍정 평가 노씨는 재임시 「물태우」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에 무난한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특히 북방외교를 통해 소련과 중국등 구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를 하면서 우리의 외교적 지평을 넓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여세를 몰아 모두 8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이나 남북유엔동시가입을 성취해 내는등 외교적인 치적에는 상당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93년 2월 퇴임후 밝은 얼굴로 연희동 사저로 돌아갔다.그는 한때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이웃의 환영을 받은 전직대통령이었다.전씨와 화해를 한 것도 사저로 돌아간 뒤였다.그러나 퇴임후 불과 얼마 안돼 과거정권의 비리설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측근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 6공시절 장관들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에게도 거액의 정치자금 은닉설이 공공연히 떠돌았고 급기야 금융실명제의 위세는 그를 더 이상 보통사람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역사적 책임」 망각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망각했다.국책사업과 관련한 이권개입,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비자금 착복은 그가 역사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의 불행은 대한민국 역사의 불행이라는 점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그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그는 대통령후보가 됐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 사는 길이라면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나는 대장이 되고자하는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지만 우연히 대장이 됐고,장관을 꿈꾸지 않았는 데도 3부장관을 지냈고,민자당대표나 대권후보를 목표로 하지 않았는데도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내 운명은 기구하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도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만 남은」지금의 처지에 까지 이를 정도로 기구한 운명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 한·중 역사의 새 지평 열다/서울 정상회담의 의의

    ◎경협기반 바탕 정치·외교 동반관계 격상/정전협정 유효 확인… 북에 “대화” 간접촉구 서울에서의 한·중 정상회담은 그 내용에 앞서 열렸다는 자체가 반만년의 양국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 진다. 중국국가원수가 서울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게다가 강택민 주석은 북한이 마지막으로 의존하고 있는 중국의 최고실권자다.김영삼 대통령과 강주석의 대좌 자체가 회담결과에 못지 않게 정치·외교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은 양국간 심화되고 있는 경제관계를 정치·외교분야까지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지난 92년 수교당시 경제협력이라는 제한된 범위에서 출발했던 양국관계가 정치·외교분야까지 폭을 넓혀 「동반자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수교 이후 3년만에 한국과 중국은 무역과 인적 교류에서 2배,투자부분에 있어서는 4배가 늘 정도로 급속히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있다.지난해 이붕총리가 방한할때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대동,경제협력의 고속도로를 닦기시작했고 강주석의 방한은 그의 준공을 선언하는 의식이라고 볼수 있다. 특히 단순한 교류증진이 아니고 중형항공기,원전,러시아가스전 공동개발 등 첨단분야에서의 협력에 합의했다.우리의 기술과 중국의 거대 시장이 어우러지면 무서운 경제세력권이 이룩될 수 있다. 이번 회담의 초점은 역시 두 정상의 신뢰관계와 동북아안정을 위한 양국간 협력기반 구축이다. 두 정상은 한반도문제는 주변국의 이해와 협력아래 남북당사자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중국이 우리측이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해온 대화를 통한 남북당사자 해결원칙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한 셈이다.또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기전까지 정전협정이 유효하다는 점도 재확인되었다.강주석은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 사람끼리 인내력을 갖고 장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우정어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과거 북한과의 「혈맹」이라는 특수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한반도정책을 펼쳐나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남북문제를 놓고 우리와 대화를 거부한채 미국·일본과의 접촉을 추구하고 있는 북한의 자세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도 풀이된다. 양국 정상은 유엔 및 아·태경제협력체(APEC) 등 국제무대에서의 공동보조방안도 폭넓게 협의했다.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됐다.중국은 아시아 유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앞으로 두나라가 유엔에서 아시아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긴밀한 공조체제를 확립하는게 필요하다는데 두 정상의 인식이 일치했다. 강주석이 정상회담뒤 국회에서 연설한 것도 뜻깊다.강주석이 외국 의회에서 연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사회주의 국가 정상이 우리 국회에서 연설한 것 역시 처음이다.강주석은 이례적인 행사를 통해 한·중협력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 국회연설 전문

    ◎한반도 안정은 세계평화의 큰 버팀목/한국과 기초과학·첨단기술 협력 희망 본인은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귀국을 국빈방문하게 된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우선 본인은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한국국민에 중국인민의 따뜻한 인사와 훌륭한 축원을 전해드리는 바입니다. 중·한 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나라입니다.우리 양국사이의 우호왕래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우리 양국인민은 2천여년전부터 벌써 왕래하기 시작했습니다.중국의 고대문화는 귀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귀국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님이 쓰신 계원필경)과 17세기에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중국은 11세기에 활자인쇄술을 발명하는가 하면 한국은 13세기에 동활자를 발명했습니다.우리 양국은 동양은 물론 세계의 문명에도 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한바 있습니다.세월이 흘러가고 세기도 교체되었습니다. ○개혁·개방정책 성공 오늘 이 강단에 선 본인은 저절로 우리 양국인민우호왕래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우리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본인은 이 자리에서 중국개혁개방의 정황과 중·한관계발전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우리는 심각한 사회변혁과 대규모의 경제건설을 실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지난 1970년대말기에 이르러 경제건설을 중심과제로 확정하면서 개혁개방의 위대한 실천을 시작한 우리는 중국의 실정에 맞는 발전의 길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 입니다. 지난 17년동안의 노력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개혁은 위대한 성공을 이룩하였으며 일련의 중대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우리는 농촌에서 가정도급제를 실시하며 향진기업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우리는 국민경제의 공유제의 유일화구도를 변경시켜 공유제를 주체로 하되 국가소유·집단·개인·사영·외자경제를 비롯한 여러가지 경제성분이 같이 발전하는 새 국면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계획경제체제를 점진적으로 개변하면서사회주의시장 경제체제의 기본 기틀을 형성시켰습니다.산업구조를 개선하는데 우리는 1차산업을 강화하고 2차산업을 조정제고시키며 3차산업을 힘있게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방식의 차원에서 우리는 조방형의 방식을 집약형으로 전변(전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외개방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연해로부터 내륙에로,1차·2차산업으로부터 3차산업에로의 전방위,다차원,다형식의 개방구조가 마련되었습니다.정치체계 차원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민주와 법제도건설을 큰 힘으로 강화하고 있으며 인민대표대회제도와 중국공산당 영도하의 다당협조와 정치협상제도를 보완하고 완벽화하고 있습니다. 개혁과 개방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크게 추진시켰습니다.79년부터 94년까지 우리나라의 국민 총생산이 연평균 9.8%의 속도로 성장했고 국민생활이 현저히 개선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주민의 수입이 연평균 6.3%로 늘어났습니다.94년에 우리나라의 수출입 총액이 2천3백67억달러에 달했고 95년 9월 현재 재중국실지투자의 외국자금이 누계 1천54억달러가 되었으며 지금 우리의 외화예비도 7백억달러를 넘었습니다. 우리는 국민경제의 제9차 5개년계획과 2010년까지의 장기발전목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2000년에 가면 우리나라 인구가 1980년보다 3억정도나 늘어날 것이지만 우리는 1인당 국민총생산을 80년보다 4배로 늘리며 인민생활의 중류수준을 실현할것입니다.2010년에 가면 우리의 국민총생산이 2000년보다 2배로 더 늘어나고 인민생활수준이 더 한층 향상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개혁개방은 국제사회로부터 광범한 칭찬과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중국정국과 개혁개방정책의 장기적안정 여부에 대하여 걱정하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중국이 강대해지면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으로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인사도 있습니다.본인은 이자리에서 본인의 견해를 말씀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린우호정책 견지 우리나라의 정치안정과 정책의 지속성은 충분한 담보가 있습니다.등소평 선생님께서 창시하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 이론은 이미 우리 전국인민의 현대화 건설의 지도사상으로 되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실지에도 맞고 실효있는 일련의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습니다.지난 17년간의 개혁개방은 우리나라의 경제건설을 힘있게 추동시켰으며 인민에 확실한 실지이익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인민들로부터 진심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우리 당은 지난 몇십년의 분투과정에서 튼튼한 지도단체가 형성되고 지금 2세대 중앙지도단체로부터 3세대 중앙지도단체에로의 이양도 이미 순조롭게 실현되었습니다.우리는 경험과 교훈을 언제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전진도중의 모순과 문제를 제때에 발견하고 해결했으며 특히 개혁과 발전,안정 3자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는데 주의를 돌렸습니다.이 모든 것이 충분히 증명한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정치안정과 정책의 지속성이 튼튼한 기초와 믿을만한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강대해지면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으로 될 수 있다는 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중국경제가 빨리 발전하고 있지만 중국의 인구가 많고 기초가 약하며 1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면 아직도 수입이 낮은 개도국에 속합니다.중국은 중등발전수준에 도달하고 더나아가서 현대화를 실현하자면 몇세대에 걸친 간고한 노력이 필요하며 장기적으로 안정된 평화적 국제환경이 필요합니다.우리는 독립자주의평화적인 외교정책을 시종일관하게 실시하고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세계 각국과 우호적으로 지낼 것을 원하며 특히 이웃 나라들과의 선린우호관계의 발전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중국 교훈에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강들로부터 장기간의 압박과 농락을 당해왔던 중국은 독립과 평화의 소중함을 잘알고 있습니다.중국은 평화공존 5원칙의 발기국의 하나이며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를 단호히 반대하여 왔습니다.중국은 어찌 자기가 당했던 고통을 남에게 강요하고 어찌 자기가 용인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의 군사력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입니다.중국이 대국으로서 군비의 현대화수준과 군사비 지출이 의연히 낮은 수준에 있고 군사비예산이 국민총생산의 1·5%에 불과하며 세계 대다수 국가보다 낮은 편에 있습니다. 중국은 1985년에 이미 1백만명의 병력을축감하였습니다.우리는 많은 군수업체를 민수업체로 전환시켰으며 지금 있는 군수업체의 총생산의 76%는 민수제품입니다. 우리가 거듭 천명한바와 같이 중국은 영원히 군비경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확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패권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세계의 식견 높으신 분들은 중국의 발전이 세계의 안정에 유리하고 중국의 강대가 평화역량의 성장으로 된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우리는 유엔 창건 50주년을 경축하였습니다.21세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평화와 발전은 여전히 세계의 기본 과제로 되어있습니다.보다 더 아름다운 새 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인류사회는 세계평화를 수호하고 공동발전을 도모하는데 반드시 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태지역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활기에 차 있으며 국제적인 영향력도 날로 확대되고 있습니다.중·한 양국이 위치하고 있는 동북아지역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국제에서도 광범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지역의 장기안정을 진심으로 바라며 역내 모든국가가 화목하게 지내고 번창할 것을 충심으로 희망합니다.중국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이며 언제나 남의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고 남의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으며 어떠한 사리도 추구하지 않습니다.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이 반도문제를 취급하는 데의 기본준칙입니다. 한반도의 긴장 정세를 완화하고 반도문제를 적당하게 해결하는 것은 남북 쌍방인민들의 공동이익에 부합되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도 유리합니다.한반도의 가까운 이웃으로서 중국은 반도 남북쌍방이 접촉과 대화를 통하여 신뢰를 점차적으로 증진하고 관계를 개선하며 나중에는 민족의 화해와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할 것을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경젱무역 교류 증대 우리 양국은 인접하고 있는 지리적 우세와 유사하고 유구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습니다.우리 양국은 외래 침략과 농락을 당한 같은 역사적 운명이 있고 50년전에 있은 세계 반파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제나름대로의 공헌을 하였습니다.우리 양국은 오늘 다같이 중요한 발전시기에 처해있고 경제 고속성장의 강한 추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중·한 수교후의 3년 남짓한 동안에 정치·경제·과학기술·문화등 여러분야에서의 양국간의 우호협력관계가 빨리 발전하며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양국간의 경제무역협력의 정세는 좋고 교역량이 매해 50%가량의 속도로 늘어나며 금년도 양국의 교역량은 1백5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양국은 서로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해외투자대상국으로 되었습니다.경제발전의 성장기에 처해있는 우리나라는 투자와 소비의 수요가 많으며 12억 인구의 커다란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다년간에 고속성장해온 한국경제는 기타 국가와 평등하게 경쟁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기초과학과 첨단기술등 영역의 연구와 응용,개발에서 우리양국은 제각기의 장점을 갖고 있고 양국경제는 매우 강한 보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중·한 쌍방은 「평등호혜·우세보완·성심협력·공동발전」의 원칙에 따라 양국의 경제무역협력을 강화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많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양국 경제의 번영과 선린우호관계를 밀고나가는 강한 추동역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사상가인 공자가 『도덕이 있는 사람은 동반자가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본인은 중·한 쌍방이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신임을 앞세우고 서로 진심으로 대하면 반드시 선린우호와 호혜협력관계를 부단히 발전확대시켜 양국인민에게 복지를 가져오고 아·태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감사합니다.
  • 북,산림보호·육성에 뒤늦게 열올려

    ◎올 물난리가 직접적 계기… 산림산업 법적 근거 확충/「산 이용반 조직」 부녀자들 나무심기 동원/산불감시원들 배치… 야산개간 감독 강화 북한당국이 올하반기 들어 산림자원 보호와 육성에 눈을 돌리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는 지난 7,8월의 집중호우로 인한 수재가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사상최대의 물난리로 혼쭐이 난 뒤 산림보전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정무원 기관지 민주조선 최근호가 공업림경영소의 산림보호원들에게 산림조성 및 활용방안 강구를 촉구하고 있는데서도 북한당국의 이같은 기류가 감지된다.북측은 올여름 대홍수 이후 「정무원 결정」을 채택,산립보호사업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위한 법적 근거를 확충한 바 있다. 그 일환으로 북한당국은 최근 산림보호를 위해 「산림보호원」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이당위원회와 연계해 산불방지를 위해 산불감시원을 곳곳에 배치하는 한편 산간지역 주민들의 벌채와 야산 개간에 대한 감독 활동을 늘리고 있다는 북한 방송들의 보도가 이를 말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당국은 최근 광산지역등의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산 이용반」을 조직해 산림자원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즉 각군 산림경영소에서 각 광산에 담당림을 할당해 부녀자들을 동원,나무심기와 가꾸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북한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산림보전보다는 경지면적 확대에 주력해 왔다. 이에 따라 우리측이 60∼70년대에 걸쳐 집중적인 식목사업을 벌이는 동안 북한은 야산 개간등에 주력했던 것이다. 특히 지난 70년대부터 북한은 산비탈의 나무를 베어내고 다락밭을 만들어 옥수수를 심는 「새땅찾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왔다.50∼60년대 모택동 치하의 중국이 이른바 「대약진」운동을 벌이면서 대대적인 수목 벌채로 산야를 황폐화시킨 전철을 재연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회주의체제의 대규모 벌채가 무모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특히 이른바 「자연개조 5대방침」에 따른 북한의 무리한 경지확대는 산사태와 산지의 토사유실이라는 큰 부작용을 초래했다.이로 인한 토사가 강바닥에 쌓이면서 북한의 하천들은 대수롭지 않은 비에도 범람할 수밖에 없게 됐고 올여름 집중호우 때 그 부작용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 결혼조건 경제력이 최우선(북한 이모저모)

    ◎북 젊은이들 출신성분 위주서 크게 변화/귀순자들이 증언 ○…북한 젊은이들의 결혼관이 변하고 있어 눈길.귀순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결혼 상대자의 최우선 조건이 출신 성분에서 경제력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같은 의식변화는 하루 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생활속에서 극히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 결혼을 찌든 생활의 탈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총각들은 경제력 있는 집안의 여성을 찾고 있으며,이같은 조건을 갖춘 상대자(여성)로는 상점의 판매원이나 식당 종업원이 최고로 꼽히고 있다.이와함께 돈 많은 화교나 북송교포들도 결혼 상대자로 선호되고 있다. 여성들도 역시 남성을 고를때 경제력을 최우선 결혼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외화벌이업체 종사자들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을 최고로 치고 있다는것. ◎금연운동 활발히 전개 ○…세계적인 골초국가의 하나인 북한에서도 최근들어 금연운동(북한서는 담배끊기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화제. 내외통신이 귀순자들의증언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 금연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주민들의 건강문제를 염려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요에 비해 절대 부족한 공급으로 인해 나온 것. ◎배설물 제초제 사용권장 ○…북한은 최근 농작물 보호를 위해 농촌주민에게 돼지의 배설물로 만든 제초제 사용을 적극 권장. 북한 사로청(사회주의 노동청년연맹)기관지 노동청년 최근호에 따르면 이 제초제의 원리는 돼지배설물에 들어 있는 「저급지방산」성분이 빛을 받아 생선된 활성산소가 잡초의 세포벽을 파괴해 말라죽게 한다는 것인데 돼지배설물로 제초제를 만들면 종전보다 3분의1정도의 원가절감 효과가 있다는 것.
  • 김일성 1인체제 구축(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4)

    ◎전후 복구­외교정책 싸고 소련파­연안파 대립/56년 「8월 종파사건」 계기 본격 숙청… 59년 완료 북한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노동당 내 경쟁 파벌들을 차례대로 숙청,50년대 말쯤에는 일인 집권체제를 구축했다.주체이론으로 무장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는 북한을 세계에서 유례없는 공산독재 국가로 만들었다.이는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도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계승돼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북한 노동당에는 원래 김일성이 이끄는 빨치산파를 비롯,국내파(남로당계)·소련파·연안파 등 주요 파벌이 넷 있었다.이 가운데 박헌영·이승엽 등으로 구성된 국내파는 한국전쟁 말기 이미 숙청돼 휴전 직후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따라서 전후 김일성이 권력강화를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는 소련파와 연안파가 남았다. 노동당내 권력투쟁은 1955년에 접어들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여기에는 김일성의 권력욕이 물론 주요 동기였지만 전후 경제복구와 외교정책을 둘러싼 파벌간 노선 갈등도 적잖게 작용했다.김일성은 한국전이 끝나자 먼저 경제건설에 주력했다.김일성은 휴전협정 조인 다음날인 1953년 7월28일 라디오방송에서 『전쟁은 조선인민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한 다음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들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의 「3개년 경제 계획」과 농업 집단화 등 경제개발에 한동안 힘을 쏟았다.또 소련·중국·몽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 형제국」들을 순방하며 경제원조를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그러나 연안파와 소련파는 중공업 우선,농업집단화를 앞세운 경제복구가 북한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소련은 또 농업집단화가 중국의 인민공사제도를 흉내낸 잘못된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 무렵 스탈린 사망­흐루시초프 등장에 따라 기존의 국제관계에 변화가 일어난 점도 파벌 대립을 재촉했다.중국에 등을 대고 있는 연안파는 연안파대로,소련과 밀접한 소련파는 소련파대로 변화를 자기 파벌에 유리하게 작용시키려고 애썼다. 당연히 김일성과 반대파 사이에는 어느쪽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제대로 따르는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김일성은 이즈음 방어논리로 주체이론을 새로 내놓는다.1955년 4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구체적 상황에 연결해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을 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이에 대해 정치학자인 단국대 김학준 이사장은 『주체이론의 싹을 1940년대 말에 찾을 수도 있지만 늦어도 이 때 김일성 연설에서는 충분히 발견된다』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다. ○스탈린 사후 위기몰려 김일성은 이같은 이론을 무기로 먼저 연안파인 박일우(초대 내무상이자 당시 체신상)와 방호산(한국전 때 군단장)을 숙청했다.그해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겸 조직위원인 소련파 김열의 죄상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는 한편 같은 파 지도자인 박창옥(부수상겸 국가계획 위원장)에게도 칼날을 겨누었다.김열은 비록 황해도당위원장 재직시 비리가 문제됐지만 결국은 개인비리를 숙청무기로 사용한 것이었다. 19 56년 김일성은 중대한 도전을 받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오히려 권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2월 14∼2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격하운동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했다.더불어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나섰다.이는 일인독재를 추구하면서 그 바탕을 「반미」에 두고 있는 김일성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흐름이었다. 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가 열렸다.이 자리에 소련에서는 정치국 정위원이자 서기국 서기인 브레즈네프가 참석,흐루시초프가 제시한 새 노선을 북한이 충실하게 따를 것을 촉구했다.김일성은 이를 받아들이지도,그렇다고 소련의 비위를 거슬리지도 않은 어중간한 연설을 했다. 그해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는 힘을 합쳐 김일성에게 도전했다.연안파 최창익(부수상겸 재무상)이 중공업우선 정책은 주민에게 고통만을 준다며 먼저 비판의 포문을 연데 이어 상업상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난했다.박창옥 등 소련파들도 나서 김일성 1인독재를 비판하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김두봉 57년 직위박탈 그러나 북한 노동당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부르는 이 사태는 김일성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김일성이 노동당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대부분을 이미 친위세력으로 바꾼 상황에서 윤공흠 등 연안파는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체포됐다.사건은 곧 국제문제로 비화한다.윤공흠 등이 감시소홀을 틈타 중국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중국과 소련은 즉각 개입해 김일성에게 압력을 가했다.김일성은 죄지은 연안파·소련파 지도자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일단 굽히고 들어가 원래 직책에 복귀시켰다.그러나 김일성은 이들을 끝내 숙청하고 말았다. 「8월 종파사건」은 아직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일부 연구자들은 연안파가 김일성제거 계획을 조직적으로 세웠다고 주장한다.무혈쿠데타를 노렸다는 것이다.윤공흠 등이 김일성을 전원회의에서 비판한 뒤 그 죄과를 들어 기소하기로 했지만 김일성측에게 이 정보가 새나가 오히려 역습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힘을 잃은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일은 절차만 남았을 뿐이었다.연안파의 우두머리 김두봉은 북한의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리를 19 57년 9월 박탈당했다. 이들의 운명은 그뒤 어떻게 됐을까.김두봉은 쫓겨날 때 68세였다.1년가량 사상개조 교육을 받았지만 「개전의 정이 없어」다시 산골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그는 1960년 또는 61년에 숨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인은 병사와 피살설이 있다. 김일성은 이어 공산당원 한집이 네집을 감시하는 이른바 「5호담당제」를 1958년 7월부터 실시했다.곧이어 12월부터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또 김일성의 빨치산운동을 항일독립운동에서 유일한 정통으로 내세운 역사조작에 손댄 것은 1959년의 일이다.이로써 30년 넘게 계속돼온 김일성독재체제가 완결된 것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발굴­노동당 중앙위회의 결정서/소련파 거물 김열 부패로 몰아 숙청/김일성의 정적 제거하는과정 보여줘/북 노동당 간부… 6·25때 대민착취 극심 북한 김일성이 한국전쟁후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정적을 숙청한 과정을 보여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12월 전원회의 결정서」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모스크바에서 입수했다.1955년 12월에 열린 이 회의 결정서는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 문서는 12월 2∼3일 진행된 전원회의에서 위원장 임해의 보고와 이에 따른 토론에서 내린 결정을 당 중앙위원회가 「절대비밀」로 분류,그달 25일 고위직 인사들에게 한정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내용은 황해도당위원장을 지낸 당 중앙위원겸 조직위원 김열의 부패한 생활상을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김열은 김일성에 맞선 소련파의 유력한 인물이다.그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당위원장을 지내면서 직위를 이용,방탕과 사치가 극에 이를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그는 강제·억압·기만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성 30여명의 정조를 유린한 것으로 기록됐다.그 가운데는 여중생까지 포함됐다. 이와 함께 갖은 명목으로 크고작은 잔치를 벌였던 김열은 당의 시설물들을 향락에 이용했다는 사실도 폭로됐다.이를 위해 횡령도 서슴지 않았다고 이 문서는 덧붙였다.그는 후방에서 거둬 전선으로 보내는 성금 2백53만여원을 비롯 1천여만원을 불법 조성해 모두 탕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김열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를 비판하는 당 간부들에게 구실을 붙여 강등시키거나 쫓아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만을 중용했다고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비판했다. 김열에 대한 노동당의 단죄에 정적 숙청의 의미가 없지 않더라도 자료에서 드러난 노동당 간부의 부패상은 북한 사회의 또다른 면을 보여줬다.한국전 당시 남한에서도 후방의 퇴폐 분위기가 문제된 것처럼 북한의 권력층도 전쟁을 틈타 백성에게 갖은 횡포를 부렸음이 밝혀진 것이다.북한이 남한보다 더욱 획일적인 사회임을 감안하면 그 정도 역시 훨씬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북,신흥·웅상지구 개발추진/암스테르담 세미나

    ◎나진·선봉지구내에 위치 【브뤼셀 연합】 북한은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안에 있는 신흥·웅상 지구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북한관계자들이 10일 말했다. 대한무역진흥공사 암스테르담 무역관에 따르면 이같은 사실은 1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북한 세미나」에 참석한 프랑스 파리주재 북한대표부 관계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슬라이드를 통해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 관해 설명하고 부포리 신공항건설과 항구의 확장계획을 소개하는 한편 신흥,웅상 등지의 개발방침을 밝혔다. 한편 장성호 경제담당 참사관은 「북한에서의 경제·통상활동 가능성」에 관해 연설하는 가운데 북한의 경제개방이 가속화하면서 최근 수개월간 대북 투자와 경제 등을 살펴보기 위해 미국,일본 등지에서 약 2백여 조사단이 방문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대미관계와 관련,연락대표부의 상호 설치에 관한 기본 합의서가 서명되고 한국전에서 숨진 미군유해가 송환되는 등 우호적 관계가 증진되고 있다면서 대외관계가 일부 루머와는 달리 상당히 견실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지난 94년 3.4%의 경제성장을 보였고 구 사회주의권 국가로 부터의 62억달러를 비롯,모두 79억달러의 대외채무를 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강체제」의 기반(한·중 새 시대:2)

    ◎산동성군맥·상해방 관료 강택민 주석 받치는 두 기둥/장성 7할 차지… 9월 친강파 대거 부상­산동파/오방국·황국 등 테크노 그룹 실세 구축­상해방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0월18일,모 해군기지를 시찰한뒤 함정에 올라,대규모 해상 군사훈련을 참관했다.이 자리에는 정치국 상무위원겸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위)부주석 유화청,중앙군위 부주석겸 총참모장 장만년,중앙군위 부주석 장진,지호전 국방부장,총정치주임 우영파,총후근부 부장 전전유등 중국인민해방군의 수뇌 전부가 배석했다. 이날 행사는 지난 83년 등소평이 보수파를 밀어내고 실권 장악뒤 중앙군위 주석신분으로 화북지방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참관,군 최고통수권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한것과 비교됐다.이날 강택민은 당 총서기,국가주석,중앙군위 주석의 신분으로 모든 군실력자들을 이끌고 군 최고통수권자임을 과시했다. 강택민이 주요 당직자로 중앙무대에 오른것은 13기 정치국위원겸 상해서기로 선출된 87년11월.정치국원이 된지 2년만에 상무위원을 거치지도 않고 몇단계 건너뛰어 실질적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총서기겸 상무위원으로 등용된것은 파격이었다. 최고실권자 등소평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강택민은 총서기가 된뒤 5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군 최고실권자인 군사위 주석이 됐고 93년초 군부의 원로인 양상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유례없는 주요 공직의 겸임에도 군부와 북경 중앙무대에 기반및 경험이 없는 기술관료출신이란 점때문에 「과도기적 인물」이란 평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강은 국무원에서 이붕총리의 역할을 존중하는등 주위세력을 포용하는 원만한 방법으로 6년동안 강택민­이붕체제를 무난히 끌어왔다.특히 강은 92년 당대회에서 군부내 양상곤·양백빙 추종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지난 9월에는 자신의 군부내 기반인 장만년 총참모장,지호 전국방부장,왕서림 총정치부부주임겸 등소평 관공실주임을 군사위 부주석으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하는등 군부내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했다. 왕서림,지호전,장만년 세사람은 모두 등소평직계인물이자 산동성출신의 군부실력자다.중국인민해방군 장성의 7할을 차지하는 산동성 출신의 장성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는 점은 체제안정 요인으로 꼽힌다.정부 각 요직에 상해시,절강성,강소성,안휘성등 화동지역 출신의 상해그룹(상해방)으로 불리는 친강적인 기술관료그룹도 현 체제의 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 이때문에 산동성 출신의 군부와 상해지역 출신의 기술관료들의 결합·연합이 현 체제를 지탱해가고 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특히 지난 9월 왕서림의 정치 무대로의 전면등장은 산동성출신 군사인맥과 강택민등의 상해출신의 기술관료의 결합을 더욱 단단하게 한것으로 풀이된다. 상해출신의 관료들은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로 승진한 오방국,지난해말 정치국원겸 서기처서기로 진출한 황국등을 비롯,전진을 계속하고 있다.오는 안휘성 태생으로 상해시당서기를 지냈고 황국은 절강성 태생으로 상해시 시장을 지냈다. 중국경제의 사령탑이자 차기 총리물망에 오르는 주용기 부총리는 호남성 태생이지만 강택민이 물려준 상해시장과 상해시 당서기직을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했다.교석전인대의장과 전기침 부총리겸외교부장은 강택민과 상해에서 학생운동을 지휘하던 인연이 있다.교는 절강성,전은 강소성 태생이다. 정관근 선전부장겸 수석 정치국원은 강소성출신으로 강택민과 같은 상해교통대학을 나왔다.정부장은 등소평의 최고 측근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이번에 강주석을 수행하고 한국에 가는 회경홍중공중앙위 판공실주임도 상해시부서기 등을 지낸 상해그룹의 일원이다. 이밖에도 강택민이 기술관료로서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맺은 인맥은 체제안정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여풍당조직부장,파충염 무장경찰대사령관,유길 사회과학원부원장,주서금 인민일보 부총편집인등도 강택민의 상해시절 측근들로서 각계에서 체제의 안정을 떠받드는 상해그룹의 일원이다. 이러한 상해그룹은 출생지뿐 아니라 함께 근무한 근무경력등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간다는데 특징이 있다.상해그룹은 대만­중국관계를 전담하는 해협양안관계협회 왕도함 회장과 단군의전중앙고문위원회 상무위원등 원로들이 후견인이 되어 당과 군의 원로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안정세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강주석 한국특파원과 일문일답/건설·기계 분야 한국기업 진출 환영/내년 전면 핵금 선포되면 중도 이행 강택민 주석은 13일 중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공식방문을 앞두고 인민대회당에서 북경주재 한국특파원들과 40여분간의 회견을 가졌다.다음은 일문일답.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주요 의제는. ▲두나라의 협력은 수교이래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현재 특별한 현안은 없다.김영삼대통령과 두나라 관계 심화·확대및 공통적인 국제관심사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양국의 관계발전은 두나라 이익과 국민의 염원에 부합될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발전에도 유리하다.본인은 이번 방한이 이런 측면에서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정·평화유지를 위해 두나라 국방장관 상호방문등 군사교류추진 의사는. ▲두나라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고 각 부문간 교류발전도 고루 활발하다.각계의 수요및 특성에 따라 교류의 활발성의 차별,선후의 차별이 있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러시아는 북한과 우호협조및 상호원조조약 가운데 전쟁발발시 자동군사개입조항을 삭제키로 했다.중국과 북한사이에 체결된 우호협력및 상호원조조약이 내년으로 만료된다.그후의 조치는. ▲이 조약들은 쌍방이 각 분야에서의 협조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특별히 어느 특정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중·조양국의 우호협조관계 유지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에 유리하다. ­한국등 아시아국가들은 중국의 핵실험이 북한 핵무기개발및 일본의 핵개발의도를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데. ▲중국이 갖고 있는 소량의 핵무기는 자위용이며 동북아등 그 어느나라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96년 핵실험 전면금지조약이 선포되면 그것을 따를 것이다.중국은 핵무기 전면금지조약의 체결을 통해 핵전쟁의 위험을 뿌리로부터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등소평선생의 건강은 어떠한가.그리고 강주석을 중심으로 확립된 중국 제3세대 지도체제는 앞으로 국정추진에 어떤 구상과 목표를 갖고 있으며 개혁·개방은 계속될 것인가. ▲등소평 동지는 지난8월 91세 생일을 유쾌하게 지내셨다.지금 아주 건강하다.등소평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제2세대 지도집단이 이룩해 놓은 개혁·개방과 건설의 길을 우리세대의 제3세대 영도집단은 계속 추진해 나가고 있다.우리는 이것을 확고부동하게 지켜나갈 것이다.개혁의 심화,안정유지,개방확대,발전촉진등의 목표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에 입각,현대화를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다.개혁·개방없이 지속발전도 없다는 것은 중앙지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오는 2000년까지 진행되는 9·5계획기간중 한국기업의 중국내 참여를 보다 확대시킬 방안은 무엇인가. ▲한국기업들의 건설·기계·화학·플랜트·환경 및 기간산업 분야에서의 참여를 환영한다.또 새로운 에너지개발,자원공동개발 분야의 협력도 긍정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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