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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을 파고드는, 파괴하는 마약…우리가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

    일상을 파고드는, 파괴하는 마약…우리가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

    버닝썬이라는 서울 강남의 한 클럽에서 흘러나온 작은 파열음이, 온 나라를 벌집 쑤신 듯 헤집은 요 며칠이었다. 몇몇 연예인들의 추악한 민낯도 드러났다. 세간의 인식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한 갈래는 더 윗선에 무언가 더 큰 것이 있는데도 대중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연예인들로 덮으려 한다는 사람들이고, 다른 갈래는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사람들이다. 버닝썬 사태로 마약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는데, 한편에서는 마약 청정국이라는 그간의 공표가 허언임이 증명됐다. 평범한 직장인들도 돈 조금 벌자고 일명 ‘물뽕’으로 불리는 마약을 사고파는 시대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마약의 역사를 더듬어, 그것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마약은 한국 사회의 여러 금기 가운데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책은 마약이 무엇이며, 왜 금지되고 어떻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지를 밝히면서도, 마약을 ‘좋다’ 혹은 ‘나쁘다’의 개념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약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고, 일정 부분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민속식물학자 테런스 매케나는 고대 인류가 버섯에서 채취한 ‘실로시빈’이라는 환각물질을 ‘빨고서’ 급속도로 진화했다는, 일명 ‘마약 원숭이’(stuned ape)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는 실제로 마약성 식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류 조상들이 마약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것은 명확한 셈이다. 이를 ‘마약’이라는 이름으로 금기한 것은 서구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이며,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된 것은 남용과 중독에 따른 사고가 넘쳐나기 시작한 19세기 들어서다. 저자는 마약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권한다. 마약 사용자를 범죄자로 낙인찍는 일은 그들을 음지로 숨게 만들며, 결국에는 범죄 조직의 배만 불린다.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정책을 편 나라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마약중독에 의한 사망보다 주사기를 돌려쓰다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인지하고 주사기를 무상으로 교체해 주고, 마약의 불량 여부를 출장 감별해 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마약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과 영국보다 마약으로 인한 손실이 줄어들었다. 유럽 몇 나라들이 네덜란드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추세다. “효율을 위해 도덕성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효율이 아니라 인권을 중시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일이라고 정리한다.저자는 마약이 ‘법적 개념’임을 강조한다. 같은 물질이라도 어느 나라에서는 마약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마약이 아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합성마약, 즉 히로뽕(필로폰), LSD, 엑스터시 등이 일반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명됐다는 점이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약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오해는 하지 말자. 저자뿐 아니라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약은 안전하다’ 혹은 ‘마약은 개인의 자유’라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저자 주장의 핵심이다. 버닝썬 사태에서 보듯, 마약은 이제 급속도로 삶의 현장과 가까워졌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책 제목과는 달리 마약을 알아야만 현명한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가습기살균제증후군이라는 질병 인정을”

    “정부의 개별 질병에 대한 인정 여부를 가칭 ‘가습기살균제증후군’(HDS)으로 정의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회적참사 특조위)의 의뢰를 받아 가습기 살균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한국역학회는 14일 피해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정부가 인정하는 피해질환과 실제로 피해자들이 진단받은 질환 간 차이가 너무 커 ‘가습기살균제증후군’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폭넓게 피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역학회는 가습기 살균제로 여러 가지 병을 앓는 피해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 구축’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가습기살균제질환 치료연구 통합센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비슷한 증상이 반복돼 입원할 때가 많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 성인 피해자의 40.2%, 아동 피해자의 67.1%가 한 차례 이상 병원 입원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정신건강 서비스와 개인회복프로그램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증 울분 집단 피해자들은 과거의 사고를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 발생 뒤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이 일은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별법에 따라 마련된 기금 지원에 따른 배·보상이 미비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와 기업이 운영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특별구제계정 금액은 1250억원(최대 2000억원 한도)이 모였다. 그러나 이는 치료비 본인부담금과 간병비용 등을 합친 실제 피해의 극히 일부만을 보전할 수 있다. 한국역학회는 가습기 살균제 물질과 발생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는 ‘피해보상 프레임’을 피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직접 증명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낙인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들은 한국역학회와의 인터뷰에서 “피해보상 프레임은 고립과 간과, 배제 같은 추가적 정신 피해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문 대통령 “색깔론은 친일 잔재” 3.1절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 나경원 반박

    문 대통령 “색깔론은 친일 잔재” 3.1절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 나경원 반박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에 대해 “색깔론을 친일과 등치시킨 것은 역(逆)색깔론”이라고 비판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1일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문 대통령이 3·1절 경축사에서 색깔론을 제기하면서 이를 친일 잔재라고 했다”면서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세력에 입도 벙긋하지 못 하게 족쇄를 채우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단한 역색깔론이다”라고 규정했다. 이어 “사회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던 세력을 모두 사면하고, ‘백두칭송위원회’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버젓이 활동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문재인 정부이니 당연한 수순인가보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문 대통령은 “아직도 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면서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 잔재”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좌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면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면서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빨갱이’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낙인 찍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빨갱이라는 말은) 해방 후에도 친일 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다”면서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규정되어 희생됐고, 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문 대통령 “친일잔재 청산 너무 오래 미뤄…이념 적대 지워야 100년 시작”(종합)

    문 대통령 “친일잔재 청산 너무 오래 미뤄…이념 적대 지워야 100년 시작”(종합)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 오래 미룬 숙제, 공정한 나라의 시작”3·1절 기념사서 북미관계도 언급 “북미대화 완전타결 반드시 성사”“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새 경제협력공동체 열 것”문재인 대통령은 1일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며 “잘못된 과거를 성찰해야 함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이라며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되고 새로운 100년도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후손들이 떳떳할 수 있는 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친일은 반성해야 하고,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친일잔재 청산”이라며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아직도 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며 이를 변형된 색깔론으로 꼬집고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잔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면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빨갱이는 모든 독립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다면서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규정되어 희생됐고,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이를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이라고 규정하고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되고 새로운 100년도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거나 이웃 나라와의 외교에서 갈등 요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친일잔재 청산도, 외교도 미래 지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체제의 청사진도 함께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의 한결같은 의지와 긴밀한 한미공조, 북미대화의 타결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했다. 이어 “신한반도체제는 이념과 진영의 시대를 끝낸, 새로운 경제협력공동체”라면서 “한반도에서 ‘평화경제’의 시대를 열기 위해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방안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군사적 적대행위 종식과 함께 남북이 합의한 ‘군사공동위원회’를 언급하면서 “비핵화가 진전되면 남북 간 경제공동위원회를 구성, 남북이 혜택을 누리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관계의 정상화와 북일관계 정상화로 연결되고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평화안보 질서로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3·1 독립운동의 정신과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신한반도체제를 일궈 나가겠다”며 “한반도 평화는 남북을 넘어 동북아와 아세안, 유라시아를 포괄하는 새로운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노이 담판 결렬에 대해 “더 높은 합의로 가는 과정”이라며 “우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많은 고비를 넘어야 확고해질 것”이라며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정상회담도 장시간 대화를 나누고 상호이해와 신뢰를 높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두 정상 사이에 연락사무소 설치까지 논의가 이뤄진 것은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성과였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지속적인 대화 의지와 낙관적인 전망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하늘·땅·바다에서 총성이 사라졌다”며 “이제 곧 비무장지대는 국민의 것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또 “우리는 그곳에서 평화공원을 만들든, 국제평화기구를 유치하든, 생태평화 관광을 하든, 순례길을 걷든, 자연을 보존하면서도 남북한 국민의 행복을 위해 공동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문 대통령은 “그것은 우리 국민의 자유롭고 안전한 북한 여행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단순한 상봉을 넘어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 친지를 만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문 대통령은 아울러 “통일도 먼 곳에 있지 않다”며 “차이를 인정하며 마음을 통합하고 호혜적 관계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짚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0년 우리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 나라를 향해 걸어왔다”며 “새로운 100년은 진정한 국민의 국가를 완성하고, 과거 이념에 끌려다니지 않고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통합하는 100년”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신한반도체제는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로, 새로운 100년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100년이 될 것”이라면서 “국민 모두의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낙태는 범죄가 아닌 보건서비스” 가톨릭의 나라가 전한 여성인권

    “낙태는 범죄가 아닌 보건서비스” 가톨릭의 나라가 전한 여성인권

    사회적 논란 부담 갖던 아일랜드 정치권 남성·종교인 등 다양한 사회집단 나서 ‘낙태죄 폐지’ 국민투표 66% 찬성 견인 낙태죄의 유무는 여성인권 수준 지표“과거 아일랜드에 낙태금지법이 있었던 건 여성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죠. 낙태는 범죄가 아닌 보건서비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그레이스 월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낙태죄 비범죄화 캠페인·조사 담당관은 지난 21일 대면, 23일 서면으로 이뤄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회에서 낙태죄의 유무는 사회 내 여성의 인권 수준과 직결한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 방문 기간 동안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포럼 등에서 한국 내 낙태죄 폐지 논의 상황을 살펴보고, 아일랜드에서의 경험을 공유했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지난해 5월 국민투표에서 66.4%의 찬성으로 낙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하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올해 1월부터 임신 12주까지는 여성의 요청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낙태 의료 시술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월렌츠 담당관은 “아일랜드 내 변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돼 온 일”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적으로 낙태죄가 첨예한 문제인 만큼 아일랜드도 여느 정부와 마찬가지로 정치권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계, 법조계, 노동계 등 다양한 사회 집단이 힘을 모아 장기적으로 벌인 낙태 합법화 캠페인이 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부정되고 방해받아 왔던 합의가 결국 압도적인 득표 결과로 확인됐다”면서 “정치인들이 (시민들이 낙태죄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손에 쥐었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입장을 바꾸는지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아일랜드 내 80%가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동의와 남성의 참여도 변화에 큰 몫을 했다. 2015년 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에서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낙태에 대한 입장 간의 상관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종교인의 82%는 자신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답했다. 56%는 낙태를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국민투표에서는 남성도 과반 이상이 찬성 의견을 냈다. 월렌츠 담당관은 “아일랜드의 국민투표 결과는 낙태에 대한 접근권 확대 이상의 의미”라고 힘주어 말했다. 과거 아일랜드도 국가와 종교기관에서 낙태죄 처벌과 함께 ‘사회적인 낙인찍기’가 횡행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국민이 낙태 금지 조항 폐지를 찬성하며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분명하게 목소리를 낸 것”이라면서 “그 사회는 존엄과 존중, 연민, 평등에 기반해 대우받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는 낙태 비범죄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낙태 서비스에 접근할 여성의 권리는 유엔 인권전문기구들에 의해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다”면서 “다만 국가는 양질의 성교육과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등 낙태의 근본적인 원인인 원치 않는 임신을 줄여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낙태는 범죄가 아닌 의료서비스” 국제엠네스티 아일랜드 조사관

    “낙태는 범죄가 아닌 의료서비스” 국제엠네스티 아일랜드 조사관

    그레이스 월렌츠 국제엠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조사담당관 인터뷰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 지난해 5월 낙태 금지법 개정하기로“존엄, 존중, 연민, 평등에 기반해 대우 받을 수 있는 사회 희망”“과거 아일랜드에 ‘낙태금지’라는 법이 있었던 건 여성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죠. 낙태는 범죄가 아닌 보건서비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청으로 방한한 그레이스 월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낙태죄 비범죄화 캠페인·조사 담당관은 지난 21일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회에서의 낙태죄의 유무는 사회 내 여성의 인권 수준과 직결한다는 의미다. 월렌츠 담당관은 한국 내 낙태죄 논의를 살펴보고, 아일랜드에서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지난 21~22일 한국을 찾았다. 월렌츠 담당관은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황희석 법무부 인권국장 등을 면담해 국제적으로 낙태죄를 바라보는 비범죄적 시선에 대해 논했다. 또 국내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포럼과 집회 등에도 참여했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는 지난해 5월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하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 올해 1월부터 임신 12주까지는 여성의 요청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낙태 의료 시술을 할 수 있다. 서울신문은 지난 21일과 23일 현장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월렌츠 담당관에게 아일랜드에서 낙태죄를 폐지한 배경과 시사점 등을 물었다. 그는 “낙태죄와 무관하지 않은 세계 각국이 아일랜드의 변화를 목격한 것이 의미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 내 변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돼 온 일”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적으로 낙태죄가 첨예한 문제인 만큼 아일랜드도 정치권의 의지가 강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계, 법조계, 노동계 등 다양한 사회집단이 힘을 모아 장기적으로 벌인 낙태 합법화 캠페인이 원동력이 됐다. 그는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부정되고 방해받아 왔던 합의가 결국 압도적인 득표 결과로 확인됐다”면서 “아일랜드 정치인들이 (시민들이 낙태죄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손에 쥐었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입장을 바꾸는지도 봤다”고 전했다. 특히 이런 변화에는 아일랜드 내 80%가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동의와 남성의 참여도 큰 몫을 했다. 그는 “흥미롭게도 시민 조사 결과 종교가 낙태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2015년 아일랜드지부에서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낙태에 대한 입장 간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종교인의 82%는 “자신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56%는 “낙태를 인권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도 응답했다. 지난해 국민의 66.4%가 찬성한 낙태죄 폐지 투표에서는 남성도 과반 이상이 찬성 의견을 냈다. 그는 방한 일정 중 포럼에서 “아일랜드에서 낙태죄에 대한 국민투표는 낙태에 대한 접근권 확대 이상의 의미”라고 강조했다. 과거 아일랜드도 국가와 종교기관에서 여성에 대해선 처벌을 동반한 ‘낙인찍기’가 있던 사회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국민이 낙태 금지 조항 폐지를 찬성하며 어두운 역사를 단절하고,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분명하게 목소리를 낸 것”이라면서 “그런 사회는 존엄과 존중, 연민, 평등에 기반해 대우 받는 사회”라고 말했다. 낙태 비범죄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낙태 서비스에 접근할 여성과 소녀들의 권리는 유엔 인권전문기구들에 의해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다”면서 “반면 태아의 권리에 대해서는 국제 인권 규정에서 명시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국가는 낙태의 근본적인 원인인 원치 않는 임신을 줄여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양질의 성교육과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내부고발자 안 죽는다’ 끝까지 버텨 보여주겠다

    ‘내부고발자 안 죽는다’ 끝까지 버텨 보여주겠다

    살아남은 자, 박창진(48). 대한항공의 잘나가는 서비스맨이었던 박창진 전 사무장은 스스로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았을 뿐 사회적으로는 죽임당한 존재”라고 했다. 5년 전 오너일가 장녀(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부당행위에 맞서면서 시작된 일이다. 잘못된 조직문화에 균열을 낸 공익제보자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제 직원’으로 낙인찍혔다. 그는 이후 버티는 삶을 살고 있다. 사무장에서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됐지만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투사로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진다. 최근 세상을 떠난 태안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와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잇따라 찾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가 같은 어려움을 겪어 온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 행위였다. ‘땅콩회항’ 사태 이후 삶의 항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박 전 사무장이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플라이 백’(Fly back·회항이라는 뜻)을 내놓고 돌아왔다. 그는 “이제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혼자 아파하는 대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지난해 5월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백태가 잇달아 폭로된 뒤 조직된 직원연대노조에서 지부장을 맡은 것이 첫걸음이다. 지난 14일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삶에 대해 들었다.-최근 김복동 할머님과 김용균씨 등 사회적 약자 또는 피해자의 빈소를 조문하셨는데요. “그게 제가 그분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돌아가신 이후지만 연대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제 일(땅콩회항)을 겪은 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다짐했거든요. (언론 등의 주목을 받았던) 그 쇼는 제가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원치 않게 무대에 올라야 했고, 발가벗겨진 채 조명을 받았죠. 쇼가 끝났을 때 불 꺼진 무대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힘든 기억이 강하게 남았어요.” -용균씨 빈소에서 “용균씨와 내가 겪은 일들이 닮았다”고 하셨죠. “영정사진을 봤어요. ‘교복 입은 건가?’ 싶었죠. 너무 앳되더라고요. 참담했어요. 순진한 청년이 사회를 믿고 나왔는데 사회는 착취만 한 겁니다. 허용된 착취였죠. 결국 목숨을 잃었고요. 저도 한때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용균씨처럼 복종하면 사회가 저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순진했죠. 전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았을 뿐 사회적으론 살해당했어요.” -회사(대한항공)뿐 아니라 매도했던 동료들이나 여론, 언론에 대한 원망도 느껴지는데 여전히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나요. “가족들이 큰 힘이 돼요. 제가 꽤 여러 번 극단적 시도를 했었어요. 그때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등 가족들이 붙잡아 줬죠. 복직 이후엔 오기로 버텼어요. 일부 동료들은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하고 제 앞에서 저를 험담하는 카톡을 돌려보면서 낄낄댔어요. ‘이거 봐, 박창진 옛날 사진이래’ 하는 식으로요. 처음엔 억울하더라고요. ‘내 폭로로 회사 내부에 긍정적 변화도 있었는데 나한테 왜 이러지’ 하는 마음이 들었죠.” -상처를 많이 받았겠는데요. “오기가 생겼어요.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죠. 사건 이후에도 5년째 이 조직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건 ‘어? 내부고발한 박창진도 안 죽고 잘 사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예요. 누군가 이를 보고 용기 내길 바라기 때문이죠. ‘불의에 항거해도 살아남을 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학습시켜 주고 싶어요.” -국내 미투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와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서 검사는 사건 이후 알아보는 시선이 두려워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던데. “지난주에도 만났어요. 그때도 마스크를 쓰셨더라고요. 서 검사님께 말씀드렸어요. ‘현실에서 자꾸 나를 가두고 회피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내가 발 딛고 있는 건 결국 이 현실이고 현재다. 환경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헤쳐나가야 한다’고요. 저 역시 극복하는 중이지만 서 검사님이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도울 거예요. 요즘 검사님도 제 응원에 힘입어 조금씩 인터뷰도 하고 목소리를 내셔요. 그게 바로 연대의 힘이죠.” -요즘 개인적 일상은 어떤가요. “물론 저도 위축될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갔는데 우연히 지인을 마주쳤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뒤에서 ‘박창진은 TV에 나와서 불쌍한 척 다하더니 백화점이나 돌아다니더라. 언론사에 제보해야겠어’라는 말을 하고 다녔더라고요. 너무 놀랐어요. ‘난 이제 평생 집 밖에 나가면 안 되나? 추레하게만 입어야 하나?’ 싶었죠. 사회가 우리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요. 전 삶에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고 싶거든요.”-승무원 일을 계속하시는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항상 웃어야 하는 서비스직이잖아요. “지금도 가식적으로 웃잖아요(웃음). 전 좋은 서비스맨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훈련했고 승무원이 됐어요. 그런데 ‘땅콩회항’ 사건 이후 핸디캡이 되더라고요. ‘멀쩡하시네요?’ 하고 의아해하는 승객 분도 있어요. 속상하죠. 실은 아직 공황장애에 시달려요. 사건 이후 누가 저를 공격하는 것에 트라우마가 좀 생겨서요. 한 예로 기내에서 누가 갑자기 옷깃 등을 잡아당기면 크게 놀라요. 그래도 제 일이니 티 안 내려고 해요.” -그래도 대한항공 내 ‘직원연대’를 조직하면서 동지들도 많아졌지요. “동료들에게 연대가 무엇인지, 용기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보여 주고 싶어요. 사건 이후에 오기가 생기고, 스스로 각성하고 그 단계를 넘어서 ‘내가 돕는 자의 입장이 돼야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전 경험해 봤으니까 조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씩 해나가고 있어요.” -하지만 한때 500여명이던 조합원 수가 300여명으로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대한항공 오너 일가 갑질 사건이 이슈가 됐을 땐 호응이 컸었는데요. “실망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요즘 ‘직원연대 덕분에 현장에서의 변화가 느껴진다’는 얘기도 들어요. 슬프게도 (대한항공) 직원들은 동료끼리 감시하고 회사에 밀고해야 했던 경험이 있어요. 우리 모두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인 거죠. 희망의 씨앗은 뿌려졌으니 싹이 잘 자라나도록 보호막 역할을 하고 싶어서 지부장으로 있는 거예요.” -2016년 3월 복직했을 때 회사에서 버티는 마지노선을 처음엔 한 달, 그다음엔 3년으로 늘리셨습니다. “사실 전 지금도 많이 힘들어요.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죠. 직장에서 쌓아 온 지위는 온데간데없이 저연차 때 했던 일들을 반복해서 하고 있어요. 지난해 11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해서 조양호 회장 등을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는 주장을 한 이후에 비행 스케줄이 타이트하게 잡힌다거나 기피 노선에 배정되는 일이 잦아졌어요. 제 손발을 꺾으려는 시도가 여전히 은밀히 이뤄지고 있죠. 제가 두 손 드는 게 그들이 원하는 일일 테니까 버티는 것이죠. 다만 직원연대에 제가 필요하지 않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제 역할을 대신 훌륭하게 해 줘도 좋고 다 함께 뭉쳐서 더 큰 힘을 내주면 더 좋고요.” -그런 측면에서 직원연대의 유튜브에 직접 출연하는 두 승무원 후배(편선화·정지은씨)가 참 고맙겠어요. “저희 조직 대부분이 여성 승무원이잖아요. 특히 여직원들이 가면 속에 갇히지 않고 용기 내주길 바랐어요. 여승무원들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어요. ‘예뻐야 한다’는 등의 편견에 여전히 시달리죠. 회사는 그걸 홍보 수단으로 이용해요. 심지어 직원연대가 생기기 전까지 생리휴가도 사유서 내고 허가받아야 했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불합리한 조직에 대항해 얼굴을 드러낸다는 게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두 후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대한항공에 원래 있던 일반노조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최근 일반노조 측에서 소속 조합원들이 직원연대로 이동하는 걸 막으려고 온라인에 명단을 공표했어요. 복수노조가 법으로 인정되는 시대에 왜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는 행동을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지금 직원연대는 노조 지위 인정받으려고 회사와 협의하려고 하는데 회사는 슬그머니 빠지고 ‘거대 노조와 합의하라’는 식으로 나오고 있어요. 노노(勞勞) 갈등을 부추기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일반노조가 회사의 대리인 같다는 제 생각이 착각이길 바라요.” -‘박창진 개인’의 목표와 ‘사회적 박창진’의 목표는 각각 무엇인가요. “‘개인 박창진’이라고 하니 좀 울컥하네요. 전 원래 미술관이나 전시회 가는 걸 좋아하고 서점에서 책 보는 것도 좋아해요. 흥이 많은 사람이죠. 그런데 사건 이후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시간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시선 때문에 행동이 위축되기도 해요. 이젠 평온하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동시에 계속 목소리를 낼 거예요. 제가 나서서 얘기하는 게 효과적이라면 기꺼이 할 거고요. 저 같은 피해자는 없어야죠.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인터뷰 당일 늦은 밤, 박 전 사무장이 메시지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의 한국어와 영어 시험 성적을 공유하는 이메일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한 직원이 우연히 자신에게 잘못 수신된 메일을 받았고 이 사실을 박 전 사무장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그는 “제 방송 낭독 점수를 임원들끼리 수시로 돌려 보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 같습니다. 왜 우연인 것처럼 아무 상관없는 일반 회사 사람들에게도 흘리는 걸까요. 이런 게 광범위한 의미의 직장 내 괴롭힘이자 2차 가해 아닐까요”라며 반문했다. 박 전 사무장은 이날도 갑자기 변경된 바로 다음날의 비행 스케줄을 통보받았다. 승무원 박창진의 일상에는 한 번도 견디기 힘든 우연들이 여전히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미투 1년]“보복 고소·여론전 된 미투…잊혀질까 두려워 오늘도 싸웁니다”

    [미투 1년]“보복 고소·여론전 된 미투…잊혀질까 두려워 오늘도 싸웁니다”

    제자 “2015년 H교수, 강제 입맞춤·사과” 폭로하 교수 즉각 명예훼손 맞고소… 여과없이 보도커뮤니티·댓글선 피해자 겨냥 “꽃뱀” 마녀사냥인권위 “교수 지위 이용해 강제추행” 수사 의뢰檢 9개월 만에 기소… 학교측 ‘직위해제’ 처분만피해자, 무료 법률지원 다 소진… 소송비용 걱정첫 재판 앞둬… “지난한 싸움 했는데 이제 시작”“정의가 승리했다.” 지난 23일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징역 2년형 선고 소식을 듣고 내놓은 일성이다. 그는 수년 전 안 전 국장으로부터 성추행당했음을 지난해 1월 29일 검찰 게시판을 통해 폭로했다. 국내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법조계와 학계·문화계·종교계 등에서 “나도 피해자”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고발자 대부분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마음을 졸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관심도 시들해졌다. ‘동덕여대 H교수 사건’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3월 ‘H’가 하일지라는 유명 소설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주목을 받은 것도 잠시뿐. 학생들은 유명인이자 교수인 피고인과의 법적 공방은 물론 2차 가해와도 싸우고 있다. 이들이 버텨낸 지난 1년은 어땠을까.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질까, 학내에서조차 잊힐까, 앞으로 기사로 다뤄줄까… 이 모든 게 사실 두려워요.” ‘동덕여대 H교수 제자 성추행 사건’은 2018년 봄을 뜨겁게 달군 이슈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방은 핑퐁 게임처럼 전개되며 매일 생중계됐다. 그러나 이후 잇단 고소로 확전된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약 9개월 만인 지난달에야 경찰·검찰의 수사가 모두 마무리됐고 이제 겨우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지난 1년간 피해자와 함께해 온 사람들은 학생 10여명으로 꾸려진 연대체다. ‘동덕여대 H교수 사건 비상대책위원회’ 문아영 공동의장은 지난 시간이 “힘겨운 공방이 오간 지난한 싸움이었다”면서도 “그런데도 이제야 시작이라는 게 참…”이라며 한숨지었다. ●10여명 연대체 꾸려 대응… “관심 없어질까 불안” 사건의 단초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두고 벌어진 설전이었다. 지난해 3월 14일 동덕여대 익명 게시판에는 고발성 글이 하나 게시됐다. 이날 문예창작학과 수업에서 하 교수가 ‘안희정 사건’ 피해자 김지은씨와 관련해 “결혼해 준다고 했으면 안 그랬을 것. 질투심 때문”이라면서 “피해자가 알고 보니 이혼녀더라. 이혼녀도 욕망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소설) 동백꽃은 처녀가 순진한 총각을 성폭행한 내용인데 얘도 미투 해야겠네”라는 하 교수의 말도 언급됐다. 하 교수의 발언은 교내에서 ‘미투 폄훼’ 논란을 일으켰다. 폭로는 이튿날 터져 나왔다. 이 대학 학생인 A씨는 대학 커뮤니티를 통해 ‘2015년 12월 H교수가 자신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서 사과했다’며 교수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여론은 들끓었고, A씨의 용기에 대한 지지가 잇따랐다. 교수의 대응은 빨랐다. 4일 만인 같은 달 19일 기자회견에 나서 “미투라는 이름으로 무례하고 비이성적인 고발이 자행되고 있다”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그리고 피해자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및 상습협박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여론은 변했다. 대중은 직접 카메라 앞에 서 제자와 주고받은 애정 어린 이메일을 공개한 하 교수에게 힘을 실어줬다. 당당하니 고소까지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문 공동의장은 “피해자를 공격하는 가해자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 적은 데다 심지어 단독 인터뷰를 내보낸 매체들은 해당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피해자에게 묻지 않았다”면서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취재 시도조차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때부터 A씨는 교수를 갈취하려 한 ‘꽃뱀’이 됐다. 비인격적 표현이 피해자와 그와 연대하는 학생들에게 쏟아졌다. 댓글창과 커뮤니티는 마녀사냥의 장이 됐다. 4월 20일 A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후 수사당국과 인권위는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지난 7월 가해 교수가 피해자를 고소한 명예훼손 사건에 대해 ‘혐의 없음’이라고 결론 내렸다. 검찰도 지난 12월 피해자를 불기소 처분했다. 한편,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는 지난 7월 검찰총장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서울신문이 비대위를 통해 입수한 인권위 결정문에 따르면 인권위는 “대학교수라는 업무관계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학생인 진정인에게 육체적, 성적 언동을 한 행위는 성희롱 행위에 해당한다”면서 “피진정인의 키스 행위가 강제추행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북부지검은 지난달 13일 하 교수를 강제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강한 반발에 피해자 숨기도… 일상 다 바쳐야 하는 싸움” 그러나 이 같은 진행 상황을 아는 사람도,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억은 교수의 반박 기자회견과 고소, 그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학교도 적극적이지 않다. 해당 교수가 사임 의사를 표했지만 학교는 “사법당국의 판단을 지켜본 후 결정하겠다”며 직위해제에서 처분을 멈췄다. 그 사이 가해는 계속됐다. 피해자를 꽃뱀으로 규정한 프레임 속에서 피해자는 고소당한 ‘가짜 미투자’로 낙인찍혔다. 한 시인은 공개적으로 하 교수를 ‘가짜 미투’의 피해자라고 옹호하며 피해자의 얼굴과 실명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했다. 어려운 싸움 끝에 이들은 가해자에 대한 기소 처분을 받아냈고 허위사실 유포 혐의도 벗었다. 문 공동의장은 “그나마 이 사건은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대학가의 다른 사건은 상황이 너무 어렵더라”면서 “미투 운동 때 나온 피해자가 분명 다수였는데 법적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적었고, 소송을 행동에 옮긴 사람은 더 소수였다”고 전했다. 실제로 수많은 대학가 미투가 잊혀지고 있다. 여러 대학은 가해 교수에게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 ‘정직 3개월’은 대학본부가 학내 성폭력에 대응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였다. 강력한 백래시(반발)에 피해자가 다시 수면 아래로 숨어버리기도 했다. 문 공동의장은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했지만 백래시가 너무 컸다”고 돌아봤다. 그는 “피해자가 사실을 말하고 당사자를 고소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보복성 고소와 여론전까지 더해지면 정말 견딜 수 없어진다”면서 “피해자가 온 일상을 다 바쳐야 하는 게 이 싸움”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은 대학가만 겪는 일이 아니다. 한때 뜨거웠던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은 야속할 만큼 식어버렸다. 안희정·이윤택 사건 등 유명인 사건 정도만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유명세가 덜한 가해자들은 하나둘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또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익명 폭로가 상당수였기 때문에 폭로가 사실로 드러났더라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일지 성폭력 사건은 10개월이 지났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사건 재판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2심을 거쳐 3심까지 가며 기나긴 법정 다툼을 이어가야 할 수도 있고, 피해자를 겨냥한 또 다른 고소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피해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A씨는 이미 국가로부터 받는 무료법률지원도 제한된 횟수만큼 다 써버려 소송 비용도 걱정이다. 하지만 이들은 진실이 언젠가 명명백백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문 공동의장은 “전엔 ‘나마저 꽃뱀으로 여겨질까’ 우려해 목소리 내지 못했던 여성들이 이젠 ‘네가 꽃뱀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잘못된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수그러드는 관심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지만,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피해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틴다”고 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공권력의 피해자들] “전향 안 한다고 찍힌거죠… 고문한 수사관도 배상책임 지게 해야”

    [공권력의 피해자들] “전향 안 한다고 찍힌거죠… 고문한 수사관도 배상책임 지게 해야”

    남들 다하는 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들 다하는 보안관찰 신고를 하지 않은 강용주(56)씨는 어떤 사람일까. ‘심지가 굳다’, ‘고집이 세다’, ‘악바리다’ 이런 말이 떠올랐다. 강씨는 스스로를 “몸이 편한 것보다는 마음이 편한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강씨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을 복역했다. 강씨는 감옥에 있을 때, 특별사면으로 출소할 때, 출소하고 나서도 남들과 다르게 살아 왔다.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두 번째로 기소된 사건에서 지난해 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자리한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강씨는 “나는 늘 싸움을 피해 다녔다”며 “보안관찰법 위반 소송도, 그전에 국가보안법 위반 재판도 내가 건 적은 한번도 없었고 그들이 나를 재판이라는 링 위에 올리길래 싸웠을 뿐”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강씨는 2012년 8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맡아 5·18 피해자와 유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했다. →법무부가 지난달 보안관찰처분 면제 결정을 내렸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보안관찰이랑 싸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감옥에서 산 14년보다 더 길게 싸워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출소하고 19년을 보안관찰과 싸웠네요. 국가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 우리 사회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징역 3년 이상 받거나 형법상 내란죄나 반란죄로 징역 3년 이상 받으면 보안관찰 대상이에요. 그런데 12·12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왜 아닌가요.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행위를 합법화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까지 됐잖아요.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말로 명백하게 재범의 우려가 있는 거 아닌가요. 저처럼 착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을 잡아넣을 게 아니라 전두환을 보안관찰 대상에 집어넣어야죠. 저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서 ‘넘버4’로 기소됐어요. ‘넘버1’부터 ‘넘버3’까지는 모두 면제하면서 나만 보안관찰 대상인 이유는 딱 하나죠. 재범 우려는 핑계고 그냥 국가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감옥에서부터 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거부했으니까요. 한마디로 찍힌 거죠.→남들처럼 전향서나 준법서약서에 사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향하면 몸은 편하겠지만 제 마음은 불편하죠. 그냥 내가 편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어서 전향하지 않았어요. 사건 이름이 ‘구미유학생간첩단´이고, ‘구미’(歐美)는 유럽이랑 미국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미국, 유럽은 물론 북한도 안 가 본 사람이에요. 사건이 벌어진 1985년에는 광주에서만 살던 사람이었어요. 전향할 내용이 없어요. 조작한 것에 내가 굴복할 수 없죠. 안기부에서 한 달 넘게 고문받고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거기 출연해서 안기부가 시킨 대로 주절거렸어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만약 전향을 하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강기정 정무수석이 저와 전남대 82학번 동기예요. 강 의원이 2016년 필리버스터 연설 때 ‘지금처럼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으면 폭력의원이라고 낙인 찍히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울었잖아요. 저도 전두환이 저를 고문한 뒤 조작해서 사형을 구형하지 않았다면 전향을 거부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간첩단 사건 대부분이 재심을 청구해서 무죄를 받았는데 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나요. -재심을 한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해요. 남산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던 순간으로요. 트라우마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거죠. 과거의 기억을 다 일깨워야 돼요. 어떻게 잡혔다가 어떻게 고문당했고 그런 일 모두를요. 트라우마를 재경험한다는 건 정말 힘들어요.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죠. 제가 광주 사람인데 서울에서 개업했잖아요. 광주에서 도망 나오고 싶어서예요. 게다가 한창 다들 재심을 신청할 때 저는 인턴, 레지던트여서 시간이 정말 없었어요. 최근 들어서는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기소돼서 시간적, 감정적 여력이 없었죠. 근본적으로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하는 건 개별적 구제가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어떻게 맡으셨나요. -2008년 6월 전문의를 땄는데 한국에서 과거사 진실규명 관련 재심 등이 많이 진행되던 상황이었어요. 기념관을 짓거나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경우는 많은데 정작 고통당한 인간의 내면과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소홀하더라고요. 한국의 과거 청산은 물신주의적 과거청산이에요. 고통당한 피해자의 아픔이 도외시된 과거 청산이죠. 인권활동가와 인권변호사들 권유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문요한씨와 강남 봉은사에서 고문피해자치유모임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고문피해자지원센터를 만든다고 광주시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 분야를 알거나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와 달라고요. 당시에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개인병원을 하고 있어서 못 간다고 했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5·18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광주에서 도망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광주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결국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의대 다니고, 전문의 따고, 개원해서 통증 전문으로 일한 것이 결국 국가폭력 피해자, 고문 피해자를 만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광주로 가게 됐죠. 나는 결국 광주와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어떤 일을 하나요. -5·18을 비롯한 국가폭력 생존자와 가족들을 치유하는 기관이에요. 단순 치유뿐만 아니라 이분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재활 사업도 해요. 결과적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인권옹호 활동도 하고요. 단순한 의료기관하고는 달라요. ‘전두환이 민주주의 아버지다´는 망언을 듣거나 육군사관학교 사열을 받는 걸 보면 트라우마적 상황이 다시 옵니다. 전두환이 군인을 이용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했는데, 군인을 양성하는 육사에서 사열을 받는 모습을 보고 ‘세상이 변하지 않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럼 트라우마센터를 찾아오는 거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트라우마센터에서 응급지원팀을 꾸려서 상담을 해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진실규명이에요. 어떻게 죽었고, 왜 죽었냐는 거죠. 5·18도 진실이 다 드러나지 않았어요. 전두환과 노태우가 5·18로 처벌받지 않았잖아요. 첫 번째가 진실규명이라면 다음으로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죠. 그래야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죠. 정의가 실현된 뒤에는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이 이뤄져야 하고요. 그걸로만 끝나면 그런 일이 또 생길 수 있으니까. 국가가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 해요.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고문한 수사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하잖아요. 국가에서 수십억원을 배상하는데 정작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책임을 안 져요. 고문한 수사관도 공동배상해야 돼요. 나쁜 짓 해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당연히 되풀이되죠. →본인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이겨 냈나요. -트라우마는 이겨 내는 게 아니에요. 극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넘어져서 무릎 까지면 상처가 아물어도 흉이 남잖아요. 그냥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바윗돌 같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작아지거든요. 서로 상처를 보듬고 껴안고 살아가는 거죠. 그걸 어떻게 이기고 극복하고 살 수 있겠어요. 저는 광주트라우마센터에 가서 다른 분들을 치유하면서 도리어 제가 치유받는 경험을 했어요. 제 상처가 둥글둥글해지더라고요. 아픔도 조금 작아지고요. 그게 저한테는 치유였던 것 같아요.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1971년 8월 그날 생존권 외친 죄…반백년을 폭도로 낙인찍혔다

    1971년 8월 그날 생존권 외친 죄…반백년을 폭도로 낙인찍혔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며 ‘데모꾼’으로 몰렸습니다. 성남시에서 관심을 갖고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1971년 8월 10일 경기 광주대단지(현재 성남시 중원·수정구) 주민 5만여명이 정부의 불도저식 도시정책에 반발해 생존권을 걸고 일으킨 최초의 도시 빈민투쟁으로 불리는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광주대단지 사건은 전매 입주자들의 재산권 투쟁이기도 했다. ‘관선’ 서울시는 ‘선 입주 후 개발’ 정책으로 도시 기반시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광주대단지에 서울 도심의 철거민들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덩달아 이주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와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울시가 토지 분양대금 확보를 위한 분양지 전매 금지조치를 내리는 한편 경기도가 과도한 취득세를 부과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시위는 6시간이나 이어졌다. 마침내 서울시가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광주대단지 주민 전체가 난동과 폭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며 사회적 차별이 심했고, 18~20세 꽃다운 청소년들의 아픔은 4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이 고향인 송상복(66)씨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마장동 뚝방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새벽에 일어난 화재로 무허가 주택 200여채가 잿더미로 바뀌었다. 끝내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채 그날 대한통운 화물차 1대에 3~4가구씩 타고 맨몸으로 대한적십자사에서 주는 생활용품만 가지고 광주대단지로 이사를 떠났다. 당시 열여덟 소년이었던 송씨는 “사건 당일 집회 장소에 모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나갔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시위대가 서울로 가자고 시영버스를 타고 내려오기에 같이 합류해 현재 수정구 관할인 수진리 고개까지 올라가 전투경찰들과 마주쳐 돌팔매질 몇 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낮에 집앞에서 친구들이랑 만화책을 보다가 형사 두 명한테 체포돼 신흥동 성남파출소로 가서 엄청 얻어맞고 온갖 고문을 다 당했다”고 회고했다. 다음날 광주경찰서로 옮겨 가서도 고문을 많이 당하고 10여일 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송치됐다. 그 당시 고문으로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다. 10여차례 국선변호인의 도움으로 재판을 받고 다음해 1월 말쯤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송씨는 또 “전과자 낙인이 찍혀 취직도 못하게 돼 막노동으로 연명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억울한 심경을 밝혔다. 금세 눈물도 내비쳤다. 송씨는 “지금 5명의 동지하고만 연락이 된다. 죽은 사람도 서너 명 있다. 지난해 11월 은수미 성남시장과 면담도 했다. 앞으로 명예회복을 위해 신경을 써 주신다니 고맙다. 48년이나 지났고 잊혀졌지만, 이제라도 하루빨리 명예회복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2세 청년이었던 박기연(70)씨는 부모님이 서울시에서 일자리를 주고 20평 주택 분양권을 준다고 하기에 억지로 이주를 했다. 그는 “처음 왔을 땐 허허벌판이었다. 덜렁 언덕배기만 보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24인용 군용 텐트를 반으로 잘라서 잠자리를 깔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씨는 “사건 당일 아무것도 모른 채 집회 장소에 모이라고 해서 동료들과 갔다 왔다. 아침에 잠을 자고 있는데 광주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끌고가 고문을 해댔다. 우리가 하지도 않았는데 증인이 있다면서 죄를 덮어씌웠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고 데모 주동자로 변질됐다”면서 “구속 6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직장을 잡으려 해도 데모꾼 낙인 탓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시에서 명예회복을 위해 애써 준다니 매우 감사하다”며 살짝 웃었다. 인천에 살다가 고등학생 때 부모님을 따라 광주대단지로 둥지를 옮긴 김기철(68)씨는 당시 20세였다. 사건 당일 친구들과 시위에 참가했다가 다음날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김씨는 “집행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난 후에도 정보과 형사들에게 쫓겨다니며 감시를 받아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직장 문턱도 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고생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성남시의 관심과 명예회복 노력에 감사하다. 먹고살 수 있도록 일이나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20세였던 이세묵(68)씨는 충남 공주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형들과 광주 송평동 판잣집으로 옮겨 왔다. 그는 “현재 중원구에 속한 모란동에서 형이 다과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집회를 한다고 해서 수진리 고개로 올라가 보니 전경과 시위대가 새카맣게 모여 대치를 하고 있었다. 시위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경찰들이 몰려들어 모란파출소로 붙잡혀 갔다”며 “누군가 시위대에 끼어들어 빨간 인주를 몸에 묻혔는데 옷에 인주가 묻은 사람들을 무조건 체포했다”고 증언했다. 광주경찰서로 2~3명이 함께 끌려가 엄청 얻어맞고 실토하라고 고문을 당했다. 그는 또 “뒤늦게라도 진상이 밝혀지고 억울한 한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성남문화원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인 윤종준 박사는 “반세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2년 뒤면 50주년이다. 사건 당사자들이 70대 노인이 됐다. 일부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생존해 있을 때 진상규명과 권리회복, 명예회복이란 숙원을 이뤄 사건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있었다. 성남문화원에서도 2003년 학술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도시 등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힘들었다. 윤 소장은 “사건을 촉발한 원인을 규명하는 게 사건의 성격을 바로잡을 수 있는 단초일 것이다. 국가의 주먹구구식 ‘선 입주 후 개발’ 신도시정책 탓에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활동 공간조차 전무했다. 집도 없는 곳에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 극한 상황을 만들었다”면서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는 보고서나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진상규명·명예회복위원회를 꾸리고, 사건 현장에 기념비라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피해자 식별 안 돼도 처벌해야… 포르노 합법화는 논리적 비약”

    [나는 너의 야동이 아니다] “피해자 식별 안 돼도 처벌해야… 포르노 합법화는 논리적 비약”

    서울신문이 5회에 걸쳐 ‘난 너의 야동이 아니다’를 연재한 건 변화를 촉구하고 싶어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의 신음소리는 깊지만, 자성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가해자들의 재범 비율과 촬영물의 유포 비율은 늘어만 간다.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는 피해자가 적지 않지만 이들을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서울신문은 김현아 법무법인 GL 변호사,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 대표와 함께 해법을 모색했다. 임주형 탐사기획부 기자가 좌담을 진행했다.고통 →피해자들이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유는. 윤김 교수 우리 사회엔 남성 중심적이고 이중적인 성규범이 존재한다. 남성에게 성경험은 우월함을 뜻하지만 여성에게 성경험은 순결과 온전성이 박탈된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사회는 ‘○○녀’ 등 온갖 낙인을 붙이고 손가락질을 한다. 이 때문에 디지털 성범죄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피해자들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탓한다. 때론 내가 사라지면 끝날 일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서 대표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이 되레 피해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한 피해자도 있다. 이런 사회적 낙인 때문에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경제적 고립까지 겪으며 고통이 배가된다. 김 변호사 촬영 피해자들은 누군가가 내 영상을 가지고 있고 언제 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살아간다. 실제 유포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 역시 촬영물이 유포된 피해자만큼이나 극심하다. 신고 →피해자들의 경찰 신고 비율이 낮은 이유는. 서 대표 증거가 충분해도 삭제만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가족이나 직장 동료에게 알려질까 두려워서다. 자칫 문란한 여성이란 낙인으로 사회에서 격리될 거란 공포심 때문이다. 김 변호사 불법 촬영물의 존재가 피해자가 신고하지 못하게 하거나 재판 과정에서 합의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이 된다. 불법 촬영물이 존재하면 언제든 재유포가 가능하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압수수색을 한다고 해도 어디에 어떻게 숨겨뒀을지 모르는 일이다. 법원이 피해 영상물 삭제 명령을 할 수 있게 법 개정을 해야 한다. 법원이 삭제 명령을 했는데도 영상이 발견되거나 재유포를 하면 바로 처벌이 가능하다. 소송에서도 피해자가 유리하다. 윤김 교수 가해자 처벌이 너무 약하다.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는 징역이 선고되는 비율도 낮고, 벌금형도 300만원 이하가 대부분이다.처벌 →성폭력 처벌법 14조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 개정에 대한 평가는. 서 대표 일부 형량이 강화됐고, 피해자 스스로 촬영했어도 동의 없이 유포한 경우에 처벌할 수 있게 한 것 등은 긍정적이다. 다만 피해 촬영물을 방치한 유통 플랫폼 처벌 조항이 명시되지 않은 게 아쉽다. 불법 유통 시장을 없애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 변호사 유포 범죄의 형량이 더 강화됐어야 한다. 피해 촬영물은 언제든 재유포될 수 있고, 한 번 퍼지면 완벽한 피해 복구는 불가능에 가깝다. 벌금형을 없애고 무조건 징역형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프로필 사진에 음란물을 합성하고 편집하는 속칭 지인능욕을 처벌할 조항도 필요하다. 윤김 교수 얼굴 식별이 안 돼도 피해자가 자신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처벌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최근 일간베스트 저장소에 여자친구의 몸 사진을 올리는 일명 여친 인증 사건이 있었지만 처벌은 못하는 형국이다. 최 과장 웹하드나 음란사이트 운영자를 처벌할 때 구체적 피해상황이 나오지 않으면 강한 처벌이 어렵다. 그래서 성폭력 처벌법 대신 보통 정보통신망법상 음란물 유포 혐의가 적용된다. 이러면 형량이 ‘1년 이하 징역 혹은 1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너무 낮다. 긴급체포 요건도 아니고 대부분 구속조차 안 된다. 이렇다 보니 수사 중에도 사이트 운영을 이어 가며 수익을 내는 가해자도 많다. 벌금형을 받고 재범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형량을 높여야 한다.해법 →범람하는 불법 촬영물과 웹하드 카르텔 문제의 해법은. 최 과장 경찰이 지난해 특별 단속을 통해 웹하드 40개 업체 운영자 53명을 검거하고 6명을 구속했다. 올해도 관계 부처들과 함께 2차 집중 단속을 벌이고 있다. 형사 처벌뿐만 아니라 웹하드 과태료 부과와 등록 취소 등 행정제재, 불법 음란물 삭제 통보, 불법 수입에 대한 세금 징수 등 종합적 제재가 가능할 것이다. 서 대표 웹하드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면 관계 부처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웹하드의 생살여탈권을 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그간 자신의 역할을 방기해 왔다. 모바일 웹하드는 아예 사각지대다. 빨리 모바일에도 필터링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3년 전에 나왔지만 업계 반발 등을 이유로 지금까지 미뤄 왔다. 윤김 교수 필터링 업체가 웹하드 업체와 결탁돼 있다는 의혹도 계속해서 나왔다. 제대로 필터링하지 않은 회사는 이익을 환수할 수 있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본다. 김 변호사 웹하드 카르텔 문제는 이미 미국에서도 문제가 됐다. 필터링 업자가 불법사이트를 운영하다 걸렸고, 운영자에게는 징역 18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무리 음란물을 뿌려도 법정형이 최대 5년밖에 안 된다. 처벌 강화가 절실하다.피해 →다양한 채널을 통해 퍼지는 피해 영상물을 줄이려면. 김 변호사 삭제가 가장 어려운 건 국내법 적용이 안 되는 해외에 서버를 둔 음란 사이트다. 하지만 최근 경찰이 해외 공조수사를 강화해 적극적으로 단속을 하고 있다. 최 과장 미국 국토안보부 수사국(HSI)과 협력해 미국에 서버를 둔 한국 음란 사이트 84곳의 운영자 인적 정보를 받을 예정이다. 통상 운영자가 검거되면 대부분은 사이트를 폐쇄한다. 하지만 검거 이후에도 사이트가 계속 운영된다면 아예 접속 자체를 막는 방식을 쓰고 있다. 물론 우회 접속할 수도 있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사람들의 접속이 줄어 범죄 수익이 줄면 사이트 운영이 어려워지지 않겠나. 윤김 교수 시민단체인 한사성이 초국가적 피해 촬영물 삭제를 위한 국제연대체 구축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미국에서도 음란사이트 운영자 처벌이 가능하도록 현지 피해자 지원 단체와 교류 중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왜 정작 정부 차원의 노력은 없을까. 예컨대 피해 영상물을 원천 봉쇄하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일부 국가가 아닌 전 세계가 공유해야 실효성이 높아질 것이다. 서 대표 언론에서도 풍선효과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마치 불법 촬영물이 영영 사라지지 않고 욕망이 옮겨 가는 방식으로 유지된다는 가해자들의 주장을 공고하게 만드는 위험한 단어다. 삭제 작업을 해 보면 영상이 단속에 따라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 간다기보다 이미 모든 플랫폼에 퍼져 있었던 경우가 많다. 초기에 집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풍선효과처럼 비쳐질 뿐이다. 윤김 교수 일각에서 풍선효과로 내세우는 주장 중 하나가 상업 음란물(포르노) 합법화다. 포르노를 불법으로 막으니 풍선효과로 불법 촬영물 등이 판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 비약이다. 불법 촬영물을 보는 사람들은 포르노는 조작이지만 불법 촬영물은 실제이고 희소성도 있다고 말한다. 결국 포르노가 합법화돼도 불법 촬영물 수요는 줄지 않을 것이다. 삐뚤어진 욕망을 사회적으로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지원 →피해자 어떻게 지원해야 하나. 김 변호사 지금까지 피해자들이 디지털 장의사 등 사설 업체에 큰돈을 들여 영상을 직접 삭제해 왔지만 폐단이 너무 많다. 정부와 시민단체 중심의 삭제 지원이 중요하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산하에 피해 촬영물 삭제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생겼다. 하지만 전담 인력이 16명으로 너무 적다. 예산 확보와 인력 충원이 절실한데도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해 책정됐던 26억 4500만원의 예산이 국회에서 통째로 삭감됐다. 매우 유감스럽다. 심각한 상황을 국회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도우려는 의지는 있는지 의문이다. 서 대표 정부의 삭제 작업에서 간소화됐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청소년 피해자의 경우 부모의 확인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선이 필요하다. 최 과장 피해자 지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유포된 촬영물의 빠른 삭제와 차단이다. 사이트 운영자가 삭제 요청을 무시하면 경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심의를 요청하고 방심위 결정에 따라 방통위가 삭제 명령을 내린다. 이 과정을 빠르게 하기 위해 최근 실시간으로 경찰과 방심위가 심의 요청을 하고 결과를 받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복귀 →피해자들이 어떻게 하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까. 윤김 교수 결국 여성이 피해를 입었어도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폭력 특례법 14조 1항의 처벌 근거 중 하나가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줬는지 여부다. 하지만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이 됐을 때 피해자는 부끄러움에 숨는 존재가 된다. 피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은 수치심이 아니라 성적 불쾌감이다. 그럴 때 피해자들은 거리로 나가서 싸우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김 변호사 윤김 교수 말처럼 피해자의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가해 행위 자체가 침해 행위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구속 요건도 그렇게 변화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성폭력 문제를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수치심이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이런 가해 행위가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사회 전반적인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피해자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다. 최 과장 가해자로부터 지속적인 유포 협박을 당하거나 고소 이후 보복 가해에 대한 공포심으로 외부로 나서지 못하는 피해자도 많다. 경찰은 피해자들이 신변 불안을 호소하면 스마트워치를 제공하고 순찰 실시, 필요한 경우 동행하는 등 피해자가 안정적으로 사회에 복귀하도록 더 노력할 것이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 영화감독 출신 골키퍼, 경제학도 야구선수… 한국에선 안 될까?

    영화감독 출신 골키퍼, 경제학도 야구선수… 한국에선 안 될까?

    ‘10명 중 1명꼴만 선택받는 구직 시장.’ 지난해 국내 프로야구 드래프트(신인 지명 회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인 지명에 참가한 고교·대학 졸업반 학생(1072명·일부 해외파 선수 포함) 가운데 단 110명만 10개 프로야구단의 선택을 받았다. 지명됐다 해도 5년 이상 리그에서 살아남아 밥벌이하는 선수는 더 드물다. 축구·농구 등 프로리그가 있는 다른 스포츠나 아마 종목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전체 학생의 약 1%(7만명)인 초·중·고·대학 학생 선수(운동부 학생)들은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중이다. 전쟁 같은 구직난이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탓에 심각성이 덜 느껴질 수 있지만 선수들은 10대와 20대 초반 삶을 훈련에 ‘올인’했기에 대열에서 낙오되는 게 더 두렵다. 과열 경쟁은 인권침해라는 부작용을 부른다. 전국대회 입상을 위해 운동에만 몰입하다 보니 수업받을 권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고, 심심치 않게 구타·성폭력 사건도 터진다. 엘리트 체육인을 꿈꾸는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과 인권 침해 실태와 해법을 살펴봤다.●“운동만 잘하면 돈·명예·대학졸업장까지” “7교시 중 5교시까진 들어요. 학교에서 하라니까…. 코치님들이 좋아하진 않죠.” 경기도의 한 고교 투기(鬪技) 종목 운동부 소속 김모(18)군은 요즘 학교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지난해부터 학생 선수 학사관리 기준이 강화돼 예전처럼 수업을 빈번히 빠지긴 어려워졌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느낀다고 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고3 때 수업일 190일 중 182일을 결석하고도 학교장 승인하에 대부분 ‘공결’(출석 인정 결석) 처리됐고 체육특기생(승마)으로 이화여대에 입학했다. 김군은 “교실에 앉아 있긴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운동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수업 땐 잤다”고 말했다.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 침해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난제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2년 도입된 대학 체육특기자 선발제도가 단초가 됐다. 당시엔 ‘올림픽·아시안게임 메달수=국력’이라는 인식이 컸기에 정부가 엘리트 선수를 키우기 위해 강력한 유인책을 내놓은 것이다. 임용석(39) 충북대 체육교육학과 교수는 “학생 선수나 지도자, 학부모들이 ‘운동만 하면 돈과 명예, 유명대학 졸업장까지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이후 올림픽 입상자 등에 대한 군 면제 혜택, 국군체육부대(상무) 창설 등은 ‘운동부 학생은 운동만 하면 된다’는 통념을 공고히 했다. 학창 시절 운동부 소속이었던 박모(38)씨는 “운동부 선수가 공부에 신경 쓰려 하면 주변에선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했다”고 전했다. ‘출석부에 이름만 있는 유령 같은 존재’. 과거 운동부 학생들에 대해 일반 학생들이 가졌던 인식이다. 합숙 등 훈련에 매몰돼 수업을 거의 듣지 못한 탓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8년 전국 중·고교 운동부 학생 113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학생 선수들은 비시합철엔 수업을 평균 4.48시간만 듣고 운동은 4.5시간 했다. 시합철엔 수업 듣는 시간이 1.9시간으로 크게 줄고 대신 운동 시간이 5.4시간으로 급증했다. 운동부에서 연간 합숙훈련한 날은 평균 23일이나 됐다. 문제는 수만 명의 학생 선수 중 직업 선수로 안착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데 있다. 한태룡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연구실장은 “연구 결과 고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이나 대학 저학년 때 운동을 그만두는 학생 선수 비율이 약 50%쯤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실력으로는 앞이 안 보인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선수들이 많은데 어느 순간 부상 등 외적 요인이 겹치면 결국 그만두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엘리트 선수라는 ‘외길’에서 이탈한 학생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엄청나다. 한때 프로 농구 선수를 꿈꿨던 임 교수는 “학생 선수들은 모든 관계를 운동부 안에서만 만들었기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면 백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서 “사회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부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입은 부상 탓에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면서 진로를 바꿨고, 이른 나이에 국립대 전임교원이 됐다. 하지만 현실에선 임 교수 같은 성공 사례를 찾기 힘들다. ●정부 “공부 안 하면 체육특기자 못 간다” 공부할 틈 없이 운동에만 전념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 선수들은 구타, 언어폭력, 성폭력 등에 시달린다. 어린 시절부터 코치에게 폭행당했음을 폭로한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 사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상범 중앙대 체육과학대학 교수는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운동부 내 폭력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초·중·고교 운동부 학생이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접수한 폭력 신고·상담은 2014년 151건에서 2018년 255건으로 68.9% 늘었다. 성폭력 신고·상담도 같은 기간 57건에서 93건으로 증가했다. 인권위의 2008년 조사에서는 응답 대상 학생 선수 중 78.8%가 ‘운동부에서 훈련 태도 등을 이유로 맞거나 욕을 듣거나 기합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신고라도 할 수 있으면 상황이 낫다. 운동 이외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제한된 학생 선수들은 폭력·성폭력 등 인권 침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기 일쑤다. 운동부를 세상의 전부로 알고 지내온 학생들에게 지도자는 갑(甲) 중 갑이다. 또 ‘운동선수는 조금 맞으면서 배워도 된다’는 인식에 둔감해지기도 한다. 김 교수는 “감독·코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려면 선수 생활을 접는다는 각오로 해야 한다”면서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성공해도 낙인찍혀 향후 운동선수로 생활하기 어렵게 되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교육당국도 이러한 현실을 안다. 정유라 사건을 계기로 학생 선수들도 기본적인 교과 공부는 하도록 정책 시도를 하고 있다. 예컨대 대회·훈련 참가 등을 이유로 한 공결 처리 일수를 전체 수업일의 3분의1로 제한했다. 또 최저학력기준(고교생의 경우 주요 과목 기준 학년 평균 성적의 30%)을 달성하지 못한 학생은 시합 출전을 못하도록 했다. 대회 참가 등으로 빠진 수업의 내용은 온라인으로 듣게 하는 ‘이스쿨’ 시스템도 도입했다. 또 운동을 잘해도 최소한의 교과 성적이 되지 않으면 상급 학교 진학을 어렵게 하는 정책도 추진 중이다. 현 고2가 치를 2020학년도 대입 때부터는 체육특기자 전형요소에 내신과 출·결석을 의무 반영하도록 했고, 중1이 치를 2021학년도 고입 체육특기자 선발 때도 중학교 내신 성적을 꼭 보도록 했다. 정책 효과는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1 학생 선수 중 최저학력 미도달 비율은 2015년 26.7%에서 2016년 24.3%, 2017년 21.6%, 2018년에는 16.8%까지 매년 낮아졌다. 하지만 일부 학년의 최저학력 미달비율은 여전히 높다. 초등학교 4학년 때 2.3% 수준이던 최저학력 기준 미달률은 학년이 쌓일수록 점점 높아져 중2 때 21.2%, 중3 때 28.9%까지 치솟는다. ●美·日처럼 즐기는 운동서 진로 선택 기회를 전문가들은 ‘공부하는 학생 선수’ 육성이라는 정책 방향에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도 한계도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학업성취도를 끌어올리려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운동부 아이들에게 ‘빼앗긴 일상’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츠평론가인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는 “학생들에게 학업 점수보다 더 중요한 건 학교 공동체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교해 교실에서 고립된 섬처럼 지내게 할 게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 수다도 떨고, 잠도 깨워 주고, 수학여행도 가는 문화적 접점을 생활 속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도 “최저학력 미달 때 대회 출전을 제한한 정책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이 공부와 운동 성적을 모두 잡도록 하는 이중고 정책이 될 수도 있다”면서 “학생 본인이 필요성을 느껴 공부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이나 종목별 학생 선수들을 정밀하게 도우려면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에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인권 등을 챙기는 독립 부서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명선 이화여대 보건관리학과 교수는 “운동부 학생들을 위한 진로상담기구를 운영하고 정기적으로 진로 연수를 벌여 운동 외에도 다양한 진로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선수 육성 체계가 미국·일본처럼 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모든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운동을 즐기고 이 가운데 실력과 의지가 있는 이들이 운동선수로 진로를 택하게 하는 방식이다. 또 2018년 러시아월드컵 때 아이슬란드 대표팀 구성이 보여 줬던 것처럼 직업 선수와 다른 진로를 병행할 수 있도록 학창 시절 때부터 균형 잡힌 교육을 하려는 목표도 있다. 인구가 35만명인 아이슬란드 팀의 당시 감독은 시골 치과의사였고 아르헨티나전에서 리오넬 메시의 페널티킥을 막아선 골키퍼는 영화감독 출신이었다. 소금공장 노동자인 수비수도 있었다. 국내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로 뛰었던 미국·도미니카공화국 선수들 중에는 명문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거나 영화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수 육성 때 ‘선택과 집중’을 포기한다면 당장 국제대회 메달수는 크게 줄 우려가 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때 ‘아름다운 패자’로 불린 태권도 선수 이대훈을 예로 들며 말했다. “세계랭킹 2위인 이 선수가 40위 선수한테 8강에서 지고도 진심어린 축하를 건넸어요. 예전 같으면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질타 대신 박수를 보냅니다. 운동은 즐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이미 자리잡혔다고 봅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서울신문은 운동부 학생들에게 발생하는 폭행, 성폭력, 언어폭력 등 인권 침해 실태를 집중 취재하고 있습니다. 관련 사례를 경험하셨거나 목격하셨다면 제보(dynamic@seoul.co.kr)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 유족 “임교수, 한때 우울증… 정신질환자 낙인 없는 치료 원할 것”

    유족 “임교수, 한때 우울증… 정신질환자 낙인 없는 치료 원할 것”

    범인, 미리 흉기 준비… ‘계획범죄’ 무게 법원 “구속 필요성 인정” 영장 발부 “아들 살린 은인에게 날벼락” 조문 행렬 정부·의료계 ‘임세원법’ 제정 추진 나서지난달 3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임세원 교수가 가해자를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간호사들을 먼저 피신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임 교수를 향한 애도의 물결도 커지고 있다. 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피의자 박모(30)씨는 사건 당일 오후 5시 44분 신경정신과 상담실에서 임 교수와 진료 상담을 하던 도중 임 교수를 흉기로 찔렀다. 임 교수는 중상을 입은 채 도망치며 간호사들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이어 간호사가 잘 피했는지 확인한 뒤 박씨가 쫓아오자 다시 달아났다. 하지만 임 교수는 3층 진료 접수실 근처 복도에서 박씨에게 붙잡혀 다시 흉기에 찔렸다. 임 교수는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과다 출혈 등으로 끝내 숨졌다. 경찰 관계자는 “임 교수가 간호사를 대피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담겼다”면서 “자신이 흉기에 찔렸는데도 간호사가 잘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가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박씨는 범행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박씨는 조울증으로 불리는 양극성 장애를 앓아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박씨가 흉기를 미리 준비한 점을 토대로 ‘계획범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이언학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구속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박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임 교수의 여동생 세희씨는 이날 빈소가 마련된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 안전과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임 교수가 자신의 우울증 극복기를 책으로 낸 사실을 거론하며 “사랑했던 환자를 위해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라면서 “오빠가 직업에 소명의식이 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임 교수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와 가족들은 이날 빈소를 찾아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10년간 아들의 우울증 치료를 임 교수에게 맡긴 정모(55)씨는 “임 교수는 우울증약을 끊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까지 보였던 아들에게 새 삶을 선물한 은인인데, 이런 날벼락이 어딨느냐”라며 울먹였다. 조문을 마친 동료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너무 갑작스러워 경황이 없다”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임세원법’ 제정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학회 관계자는 “위급상황 시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대피할 수 있는 뒷문을 만드는 등의 안전장치를 두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진료실 내 대피통로 마련, 비상벨 설치, 보안요원 배치, 폐쇄병동 내 적정 간호 인력 유지 등 진료 현장의 안전실태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유족 “임세원 교수도 한때 우울증…고통받는 이들 낙인 없는 치료 원해”

    유족 “임세원 교수도 한때 우울증…고통받는 이들 낙인 없는 치료 원해”

    중상 입고 간호사 대피 노력 CCTV 찍혀 범인, 미리 흉기 준비… ‘계획범죄’ 무게 범행동기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않아 정부, 진료환경 안전 개선안 마련키로 외래치료명령제 활성화 법안도 협의지난달 31일 강북삼성병원에서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임세원 교수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간호사들을 먼저 피신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임 교수를 향한 애도의 물결도 커지고 있다. 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피의자 박모(30)씨는 지난달 31일 오후 5시 44분 신경정신과 상담실에서 임 교수와 진료 상담을 하던 도중 임 교수를 흉기로 찔렀다. 임 교수는 중상을 입은 채 도망치며 간호사들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이어 간호사가 피했는지 확인한 뒤 박씨가 쫓아오자 다시 달아났다. 하지만 임 교수는 3층 진료 접수실 근처 복도에서 박씨에게 붙잡혀 다시 흉기에 찔렸다. 임 교수는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과다 출혈 등으로 끝내 숨졌다. 경찰 관계자는 “임 교수가 간호사를 대피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담겼다”면서 “자신이 흉기에 찔렸는데도 간호사가 잘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은 박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일절 답하지 않았다. 박씨는 조울증으로 불리는 양극성 장애를 앓아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박씨가 흉기를 미리 준비한 점을 토대로 ‘계획범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임 교수의 여동생 임세희씨는 이날 임 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 안전과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임 교수가 자신의 우울증 극복기를 책으로 낸 사실을 거론하며 “사랑했던 환자를 위해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오빠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이 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받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오빠는 효자였다. 굉장히 바쁜 사람인데도 2주에 한 번씩은 멀리서 부모님과 식사했고,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고인은 생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걱정하고 치유 과정을 함께 하면서 평소 환자를 위해 성실히 진료에 임했다”면서 “지난 1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회의를 갖고 의료인의 안전한 진료환경을 위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우선 진료실 내 대피통로(후문) 마련과 비상벨 설치, 보안요원 배치, 폐쇄병동 내 적정 간호인력 유지 등 진료현장 안전실태 조사를 추진한다. 또 비자의 입원 환자에 대해 퇴원 조건으로 1년간 외래치료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외래치료명령제’ 활성화 법안도 국회와 적극 협의하기로 했다. 퇴원 정신질환자 정보 연계 관련 법안은 현재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복지부는 다만 “이번 사건이 ‘정신질환자가 위험하다’는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고 임세원 교수 유족 “고인도 한때 우울증 환자였다”

    고 임세원 교수 유족 “고인도 한때 우울증 환자였다”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서울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 유족이 의료진 안전을 보장하고, 정신질환자가 편히 치료받을 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임 교수 여동생 임세희 씨는 2일 임 교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가족의 자랑이었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 안전과,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임씨는 “오빠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분은 진료권 보장을 많이 걱정하지만, 환자들이 인격적으로 대우받기를 동시에 원한다”며 “그분들이 현명한 해법을 내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그는 임 교수가 자신의 우울증 극복기를 책으로 낸 사실을 거론하며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낙인이 없는 의사조차 고통받을 수 있음을 알리면서 사랑했던 환자를 위해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라 생각한다”며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오빠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소명의식이 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 없이 치료받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유족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위협했을 때 오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으면 좋았을 텐데, (오빠는) 두 번이나 멈칫하면서 뒤를 돌아보며 도망쳐 112에 신고했다”며 “영상을 평생 기억할 것 같다”고 했다. 임 교수는 앞서 지난해 12월31일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자신에게 진료 상담을 받던 박 모(30) 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박씨는 조울증을 앓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시론] 현재의 상태를 무너뜨리는/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시론] 현재의 상태를 무너뜨리는/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록앤롤’은 체코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시간적 배경은 1968년 ‘프라하의 봄’부터 1989년 ‘벨벳혁명’까지다. ‘프라하의 봄’은 화무십일홍처럼 붉게 피었다가 짧게 져 버린 체코의 민주화 시절을, ‘벨벳혁명’은 우리의 촛불혁명처럼 유혈사태 없이 융단처럼 부드럽게 진행되었던 체코의 민주화 혁명을 의미한다.그런데 왜 제목이 ‘록앤롤’일까. 일단 작품에는 체코의 그룹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부터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핑크 플로이드, 시드 베럿, 그레이트풀 데드, 비치보이스, 유투, 건스 앤드 로지스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록그룹들의 음악이 삽입돼 있다. 그러나 단지 음악 때문에 저런 제목이 붙은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는 체코의 혁명과 관계가 깊다.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는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했던 1968년 9월에 결성됐다. 이 그룹에는 체코의 반체제 인사였던 시인 이반 이로스가 예술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어 늘 정부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체코 정부로부터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혀 감시와 검열, 제재를 받았다. 그러던 1976년. 그들은 ‘조직적 평화 방해죄’로 체포됐다. 이들의 구속은 이 연극의 주인공에게 자각의 기회가 된다. 또한 이들의 구속이 체코의 지식인, 예술가들이 연대해 ‘77헌장’을 발표하는 기화가 된다. 훗날 체코의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이 77선언의 발기인이었다. ‘록앤롤’과 결은 다르나 지난 7일 사흘간 공연의 막을 내린 연극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도 비슷한 맥락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연극은 한국과 홍콩, 일본 3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공동 제작한 공연으로, 각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사변적인 고민부터 사회적인 고민까지, 다양한 고민이 몇 개의 키워드 아래 진행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혁명’이었다. 우리의 예술가들은, 물론 촛불혁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홍콩 예술가들은 최근 있었던 홍콩 민주화시위 ‘우산혁명’을 소개했다. 우산혁명은 홍콩의 시민들이 홍콩의 행정장관을 자신들의 손으로 뽑을 직선제를 요구하며 2014년 9월 벌였던 민주화 시위를 일컫는다. 당시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다. 우산혁명은 이를 막고자 시민들이 우산을 썼던 데에서 붙은 별칭이다. 결국 혁명에 앞장선 학생 운동가가 체포되고 시위대가 해산되며 혁명은 미완에 그쳤지만, 이 시위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다음으로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로 기록되며, 중국 민주화에 또 하나의 흔적을 남겼다.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에 출연한 홍콩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소개하며, 록그룹 비욘드(BEYOND)의 해활천공(海闊天空)을 노래한다. 당시 시위현장에서 시민들이 불렀던 노래다. 해석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거칠게 이렇게 한 줄 요약할 수 있겠다. 사람들의 냉대와 냉소를 받더라도 이상을 잃지 않겠다. 비록 혼자가 되더라도 자유를 향한 투쟁을 이어가겠다. 이처럼 혁명을 이야기할 때, 로큰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다. 바로 극장이다.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은 ‘연극의 해부’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극장은 현재의 상태를 무너뜨리는 기관”이다. 달리 표현해, 극장은 혁명의 공간이다. 이를 체제 전복으로 읽는다면, 좁은 의미의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극장’의 자리에 ‘연극’을 가져다 놓아도 울림에 변함은 없을 것이다. 에슬린은 이렇게 덧붙인다. “극장이란 곳은…공개적으로 반성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모든 종류의 문제들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 및 성 도덕에 관한 태도, 그리고 그 국가의 정치적 분위기들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풍습 및 기타의 것들이 변화함으로써 종국에 가서는 바로 그 정치적 기질도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극장은, 연극은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풍습, 상식, 성적 윤리 등 모든 ‘현재의 상태를 무너뜨리는’ 혁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극장은, 음악은 과연 무엇을 반성하고 무너뜨려 변화시키고 있는가. 더해 조금 비약하자면, 저런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큼 담대한 문화예술계 행정 관료들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 “성매매 아닌 ‘성착취’”…보호받지 못하는 피해 청소년들

    “성매매 아닌 ‘성착취’”…보호받지 못하는 피해 청소년들

    “나에게 항상 욕을 퍼붓던 아빠와 별로 관심이 없었던 엄마, 그리고 친하지 않은 오빠와 동생은 점점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나를 배신해 학교에서도 심하게 왕따를 당했다. 나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고, 길거리를 지날 때면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보였다.” A(19)양은 자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A양을 신경쓰지 않았던 가족들은 그 사실조차 알 리 없었다. A양이 따돌림 문제로 학교 가는 것이 두렵다고 어렵게 털어놨지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이었다. 그 후로 A양은 집도 무서워졌다. 일상이 두려웠던 A양은 대화가 필요했다. 익명 채팅이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앱)에 친구가 돼달라는 글을 올린 지 1분 만에 20개 쪽지가 쏟아졌다. 그러나 하나같이 A양에게 성관계를 요구할 뿐이었다. “이렇게라도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주는 게 혼자 있는 것보다는 덜 무서웠다.” 원치 않으나 A양이 생존을 위해 참아야했던 또 다른 폭력, 이것을 ‘동의’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압력 아래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지난 4일 십대여성인권센터와 다시함께상담센터,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 단체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개정안은 성매매 피해를 당한 아동·청소년도 ‘피해아동·청소년’ 규정에 포함시킬 것과 이들에게 적용되는 보호처분 조항을 삭제할 것, 그리고 성매매 피해 아동·청소년들을 발굴·지원할 수 있는 통합지원센터를 별도로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A양처럼 취약한 환경에 놓인 여성 아동·청소년을 노린 성매수 범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체계는 아직 미숙한 게 현실이다.7일 경찰청의 ‘범죄 발생 및 검거 현황 통계’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하거나 이를 위해 아동·청소년을 유인한 행위 등의 범죄 발생건수는 확인된 것만 2012년 288건에서 지난해 523건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익명성을 보장받는 스마트폰 채팅앱이 많아지면서 피해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이런 앱들은 회원가입은 물론 성인인증 절차가 없는 곳이 많고, 대화 내용도 저장되지 않아도 돼 성매수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기 일쑤다. 김민영 다시함께상담센터 소장은 “성매수를 하고자 하는 쪽과 취약한 상황에 놓인 아동·청소년이 원활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진화시키고, 한 기업에서 유사한 종류의 앱을 여러 개 운영하면서 수사망을 분산시키는 온라인 서비스 운영자들이야말로 아동·청소년 성매매 카르텔의 중심에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행법은 성매수를 당한 아동·청소년을 범죄 피해자로 보지 않고 성매수자와 똑같이 죄를 저지른 대상, 성매매 범죄에 가담한 대상으로 규정한다. 아청법은 ‘피해아동·청소년’과 ‘대상아동·청소년’을 따로 정의하고 있다. ‘피해아동·청소년’은 강간, 강제추행, 강간 등 살인·치사,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등의 범죄 피해자가 된 아동·청소년을 가리킨다. 이 범주에 성매수 범죄 피해는 빠져 있다. 성매수 범죄의 상대방이 된 아동·청소년은 강력범죄를 저지른 아동·청소년과 동일한 보호처분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아동·청소년들은 피해를 당하고도 성매수자와 성매매 알선자들부터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 친구들에게 알리겠다’는 협박까지 시달리고 있다. 아동·청소년의 피해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김혜진 십대여성인권센터 활동가는 “알선자의 꼬임으로 가출을 한 후 강간과 성매매를 당했던 한 피해 학생이 있었다. 알선자의 협박으로 경찰에게 자신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고 진술했고, 그 결과 이 학생은 가정법원으로 송치돼 보호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왜 가출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로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도 물어보지도, 관심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지금도 이 아이는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이라는 오명으로 자신을 꽁꽁 숨기며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아동·청소년 성매매 환경 및 인권 실태조사’를 통해 성매수를 당한 아동·청소년 응답자 103명을 대상으로 조사(복수응답 허용)한 결과 87명(84.5%)이 가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가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는 응답이 63.2%로 가장 많았다. ‘가족 간 불화·폭력·폭언 때문에’(58.6%)가 두 번째로 높았다. 하지만 조사를 진행한 연구팀은 “가출을 한 아동·청소년들에게 가출 원인을 물었을 때 흔히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대화를 했을 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표면적인 답변 이면에는 가족 간의 불화와 폭력, 경제적 빈곤, 학교에서의 따돌림, 성폭력 등 수많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패스트푸드점을 “유일한 내 집”이라고 말하는 B(18)양도 가정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B양의 부모는 어느 날 B양을 방에 가두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어 B양의 손발을 묶어 침대에 눕힌 뒤 3시간 동안 B양의 명치와 배를 수차례 때렸다. B양은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가출을 결심했다. 그러나 갈 곳도, 돈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찾아간 곳에선 부모의 동의를 요구했다. B양도 결국 스마트폰 채팅앱을 찾았다. B양은 “무서웠지만 길거리에서 자는 것보단 나았다”고 했다. “생각보다 많은 남자들이 쪽지를 보내와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잘 곳과 먹을 것이 해결됐다. 하지만 점점 내 몸이 더럽게 느껴져 괴로웠다. 여러 차례 그만두려고 했지만 추운 겨울에 공원 벤치나 놀이터에서 잠을 자고 굶은 것보단 그대로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가 10대 여성들이 극단에 다다랐을 때 찾게 되는 ‘생계수단’일 수 있지만, 이렇게 아동·청소년들이 성매수 범죄로 유입되는 복합적인 과정은 생략된 채 단지 ‘네가 결정했잖아’라면서 비난하고 낙인을 찍는 게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시민단체들이 조속한 처리를 촉구한 아청법 개정안은 지난 19대 국회 때 발의됐지만 폐기됐다가 이번 20대 국회 들어 지난 2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를 어렵게 통과했다. 하지만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국회 본희의 통과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단체들은 “유엔은 ‘타인으로부터의 금전적, 사회적, 경제적 이득을 포함해 기타 성적 목적을 위해 취약성, 힘의 차이, 신뢰 상태에서 이뤄지는 학대 또는 그런 행위의 시도’를 ‘성착취’로 정의하고 있으며, 특히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면서 “성착취 피해 대상이 된 청소년을 보호라는 명분 아래 사실상 처벌하는 법 규정을 이제는 시급히 바꿔야 한다. 아동·청소년들의 피해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들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ECC 대산갤러리에서는 십대여성인권센터 주최로 ‘오늘’이라는 이름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어디서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들의 목소리가 풍경화, 가면, 인형 등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피해 아동·청소년들이 쉽지 않은 심리치유 과정을 거치며 만든 작품 30여점은 오는 9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글·사진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김 경 서울시의원 “학교 밖 청소년 기본수당, 지급대상 기준과 형평성에 문제 있어”

    서울특별시의회 교육위원회 김 경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은 2019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 심사에서 “여성가족부의 학교 밖 청소년에 관한 지원사업과 교육청의 학교 밖 청소년 지원사업이 중복되고, ‘학교밖청소년 기본수당’ 지급 기준 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교육청은 2019년도 예산안에 200명의 학생에게 매월 20만원씩 청소년기본수당이라는 명목으로 4억 8천만원을 편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서울시 전체 학생 437,924명 중 학업중단학생은 11,281명(2.6%)이고 질병‧유학‧해외출국을 제외한 부적응 학업중단 학생은 4,383명으로 학업중단학생의 38.9%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중 10.4%가 의무교육단계(초·중)에서 학업을 중단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 의원은 “여가부의 경우 ‘내일이룸학교’ 10개소를 통해 출석의 성실도 등을 종합하여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으나, 교육청은 단지‘친구랑’에 등록한 학생만을 대상으로 학교 밖 청소년 기본수당을 지원하려 한다”며 “이것은 지원대상의 기준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책을 결정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수렴 조차 하지 않아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 조차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 밖 청소년에게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최소한의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교육청은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고, 우선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을 통해서 ‘학교밖청소년 기본수당’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목적 외 사용을 금지하는 클린카드로 운영하는 등 시범사업을 실시한 후 기본수당 지원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충분히 보완해 나갈 것”이라며 “또한 학교 밖 청소년이 왜곡된 시각으로 낙인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대주택 사는 걔, ‘캐슬’ 사는 우리 애랑 같은 길로 못 다녀”

    “임대주택 사는 걔, ‘캐슬’ 사는 우리 애랑 같은 길로 못 다녀”

    “아빠, 저 아파트는 4억원 넘게 올랐대. 우리 집은 얼마나 올랐어?” 경기 광교 신도시의 한 아파트에 사는 직장인 김진욱(가명·42)씨는 초등학생 아들이 이렇게 물어올 때면 숨이 턱 막힌다고 했다. 김씨가 사는 집은 시세가 따로 없는 ‘공공임대’ 아파트인 까닭이다. 어린 아들에게 “우리 집도 많이 올랐겠지 뭐”라고 말꼬리를 흐리고 나면 김씨의 가슴은 더 쓰라리다. 5년 뒤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될 때 시세가 일반 아파트에 맞춰 산정되는데, 김씨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면서 “아들에게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지 매일 물어보는 것도 넌더리가 난다”고 말했다.●“아파트라고 다 같은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디에’ 사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대다.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다 똑같은 아파트가 아니다. 아파트는 입주·거주 방식에 따라 민간 분양과 공공 분양, 민간 임대와 공공 임대, 국민 임대 등으로 나뉜다. 또 똑같은 민간 분양 아파트라고 해도 ‘건설사 브랜드’와 평수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주거지 형태와 크기가 빈부 서열을 나누는 척도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아파트 사회’에서는 차별이 일상화됐다. 일부 부모들이 자녀에게 “어디 아파트 몇 동에 사는 친구와는 가까이 지내지 마라”고 주의를 줄 정도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이른바 ‘신(新)주택 계급사회’가 도래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25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따르면 LH가 공급한 국내 첫 공공 임대 아파트는 1971년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지은 13평짜리 주공 아파트다. 당초 이 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로 공급됐지만 135만원에 이르는 높은 분양가와 부동산 경기 불황으로 미분양이 속출했다. 이에 LH는 이듬해 4월 아파트를 ‘분양’에서 ‘임대’로 전환했다.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6100~6800원을 받는 조건을 내걸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50가구 입주자를 추첨하는 날 3339명이 모여들었다. 13.4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입주자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며 환호했다. 당시만 해도 ‘주공 아파트’라고 하면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지금, LH에서 공급한 임대 아파트는 109만 3000가구로 1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집값이 미친 듯이 치솟는 가운데 LH 임대 아파트에라도 들어가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하지만 임대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 같지 않다. 일부 ‘자가 주택 소유자’들 사이의 ‘우월주의적’ 태도로 인해 주공 아파트가 ‘저소득층’이 사는 곳이란 인식이 번진 탓이다. 한국주택공사(LH 전신)는 2006년 주공아파트에 새로운 브랜드명을 도입했지만, 이를 비하하는 표현이 생겨났다. 결국 이 브랜드도 5년을 못 버티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됐다. 2009년 당시 이지송 LH 사장조차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로 낙인찍혔다”며 탄식할 정도였다. 현재는 ‘LH’라는 브랜드로 통일됐다.●분양 주민 ‘상류층’… 임대 주민은 ‘하류층’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만지지 마.” 올해 초 경기의 한 주공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아이가 층 버튼을 누르려 하자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을 쳤다는 사실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려졌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던 사람의 제보였다. 이 제보자는 “그들이 방문객으로 보였다”면서 “내 아이가 커서 이 얘기를 들으면 상처를 받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LH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다. 지난해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 반에서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A군과 자가 아파트에 사는 B군이 주먹다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A군이 임대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을 B군이 친구들에게 소문을 내며 놀린 게 발단이 됐다. 주부 박모(45)씨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부모 중에 맞벌이인 경우가 많아 낮에 자녀가 집에 방치되고, 나쁜 짓도 많이 한다는 얘기를 엄마들 사이에 종종 한다”면서 “어른들의 잘못된 편견이 아이들을 갈라 놓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2015년 1월 경북 안동의 한 초등학교는 신입생 예비소집 때 임대 아파트에 사는 학생과 분양 아파트에 사는 학생을 따로 분류했다가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3월 거주 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법안을 검토한 국회운영위원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 등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이 법안은 19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같은 내용의 법안이 재발의되지 않고 있다. ●‘소셜믹스’ 정책에 분양 주민 펜스까지 쳐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 단지는 1개 동만 임대 아파트고, 나머지 동은 분양·매매된 아파트로 돼 있다. 이 단지에는 출입구가 두 개다. 분양 주민이 주로 다니는 정문과 임대 주민만 다니는 통로로 나뉘어져 있다. 분양 주민들이 400만원을 들여 분양동과 임대동 사이 주차장에 철제 펜스를 설치하면서 임대 주민들의 차량은 정문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임대 주민들은 오전 7시에서 오후 9시 30분 사이에만 철제 펜스를 통해 드나들 수 있다. 이 아파트 관리소 관계자는 “메인 출입구를 개방하면 임대 아파트 방문 차량이 분양 주민들이 이용하는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고, 통행량이 많아 안전사고의 위험도 커진다”면서 “임대 주민들은 별도 출입구를 통해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관악구의 한 아파트에도 분양동과 임대동 사이에 약 1.5m 높이의 철조망이 처져 있다. 임대 주민인 정모(59)씨는 “분양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고 아예 막아버렸다”면서 “그쪽으로 지나다닐 일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서울시가 2003년 임대 아파트가 슬럼화되는 것을 막고, 입주민의 소외·단절 현상을 차단하고자 임대 주택과 분양 주택을 섞는 ‘소셜믹스’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 또한 갈등의 도화선이 돼버린 것이다. 지금도 혼합주택단지 내 부대·복지 시설 이용과 입주민 대표회의, 관리 운영에 따른 수입 처리 문제 등을 놓고 분양 주민과 임대 주민 간 사사건건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2015년 8월 서울 7개 혼합주택단지의 분양 주민 185명과, 임대 주민 243명을 대상으로 소셜믹스 정책에 대한 인식 조사를 진행한 결과, 분양·임대 주민 모두 부정적인 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분양 주민(45.4%)이 임대 주민(31.7%)보다 더 부정적이었다. 오정석 SH공사 수석연구원은 “같은 아파트 단지라 해도 분양과 임대 주택에 대한 법이 각각 별도로 있다 보니 갈등이 발생해도 조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민간임대 “공공 입주자랑 셔틀 같이 못 타” 더구나 임대 아파트도 ‘민간’이냐 ‘공공’이냐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간’ 임대 아파트 주민이 LH의 ‘공공’ 임대 아파트 주민보다 더 부의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의 한 민간 임대 아파트 주민들은 한동네에 있는 유치원의 통학 차량을 매번 두 차례씩 운행하도록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신의 자녀가 공공 임대 아파트에 사는 자녀와 한 통학 차량에 타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공공임대 주택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SH공사가 2015년 12월 서울시민 1만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공공임대 주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응답률이 성인 자녀를 둔 가정은 80.0%에 달했지만,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정은 57.1%에 불과했다. 대상을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에 사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여성으로 더 좁히면 응답률은 37.5%로 더 떨어졌다. 심지어 민간 분양 아파트도 등급이 나뉜다고 한다. 삼성물산(래미안)·현대건설(힐스테이트)·대림산업(e편한세상·아크로비스타)·대우건설(푸르지오)·GS건설(자이)·포스코건설(더샵)·롯데건설(롯데캐슬) 등 ‘1군 건설사’가 시공한 아파트의 브랜드를 앞세워 과시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는 ‘아크로비스타에 사는 아이’,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이’, ‘래미안에 사는 아이’ 등이 그룹으로 나뉘어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교우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형편이 비슷한 가정의 자녀와 서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 가난한 가정의 자녀와는 어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책을 낸 손낙구(전 민주노총 대변인) 박사는 “임대 아파트 공급에 제약이 있다 보니 지원 대상을 저소득층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임대 주민=저소득층’이란 공식을 낳게 했다”면서 “네덜란드 등 서구 국가들처럼 임대 아파트 공급을 더 확대해 중산층까지 포섭하면 인식이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가가 소득과 자산을 임대 아파트의 입주 조건으로 정하면서 주민 간에 서로 차별하도록 지표를 만들어 준 셈”이라면서 “누구나 원하면 임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순번을 정해 입주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서울광장] ‘작지만 큰’ 절망/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서울광장] ‘작지만 큰’ 절망/송한수 부국장·사회2부장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키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최승자 ‘네게로’)죽도록 무엇을 간절히 바란 경험을 누구나 지녔을 듯하다. 말 그대로 애끊는, 그리도 극적인 것이다. 목숨을 걸었다는 말만큼 더한 게 있을까.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는 제목이 달린 소설을 떠올린다. 속으로만 앓는 아린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그토록 아끼는 이에게 췌장암이 덮쳤다면. “차라리 날 데려가라”고 외칠 터이다. 어디나, 언제나 크고 작은 아픔은 존재하는 법이다. 도리어 가까운 사람을 아낄 줄 모르기 쉽다. 그러니까 사람이다. 역설을 극복하니 본받을 만한 것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장을 잇달아 만났다. 두루두루 어렵다고 쓴입을 다셨다. 몇몇 이야기가 아직껏 머리를 맴돈다. 사실이지만 굳이 되뇌지 않으려 한다는 대목이다. 어느 단체장은 22일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모은 마을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주민 모두를 통틀어 기운을 흩뜨리고 만단다. 단체장으로서 주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야 할 책임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부끄러이 여기거나 감추려는 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군사정권 때 개발 정책으로 불도저에 떠밀린 철거민 정착촌을 가리킨다. 참 지독한 사연을 얹었다. 해마다 요맘때면 외부에서 더러 찾아와 시끌벅적 흐뭇한(?) 장면을 연출한다. 릴레이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펼쳤다며, 관청에 홍보자료를 보낼 즈음이면 절정을 이룬다. 아무리 예쁘게 여기려고 해도 ‘인증샷’ 찍기 바쁜 것 같다. 그것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겐 도무지 끝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고맙다고 반기는 마음을 싹 가시게 만든다. ‘낙인효과’ 때문이다. 단체장은 그런 게 싫다고 했다. 그야말로 ‘복장 터질’ 노릇이다. 결코 없어야 좋을 못된 효과다. 이런 주거지는 전국에 숱하게 많다. 그러나 이른바 ‘희망촌’, ‘희망복지관’에 희망은 없었다. 코스프레, 장식을 넘어 왼손 모르게 자활을 도울 일이다. 재정 경쟁력을 갖춘 지자체라 해도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다. 기자와 만난 단체장들은 모름지기 뜻을 모았다. “외부 고객인 주민들이나,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내부 고객인 직원들을 대신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합창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친 지방시대 민선 단체장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며 주변에선 활짝 웃었다. 다른 단체장은 “청렴도 조사에서 늘 피해를 입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도맡은 분야다. 하위권에서 게걸음을 거듭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땀흘려 일한 직원들에게서 힘을 빼앗는 셈이라 어딜 가더라도 입을 떼지 못했다고 되돌아봤다. 그나마 부쩍 애쓴 끝에 요사이 한결 나아졌다며 살짝 웃었다. 다른 부문도 아니고 부패방지 정도를 측정한 결과여서 주민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던 마당에 겨우 체면을 살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만족할 만하진 않았다. 조사 방법에 이의를 충분히 제기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이쯤이면 설령 1등을 차지해도 내로라하기 쉽잖게 생겼다. 단체장이 뇌물 수수, 공금 횡령, 친인척 취업 청탁비리 혐의로 구속됐는데도 내부청렴도와 종합청렴도 모두 최상위권을 꿰찬 사례도 나타났다. 주민들에게 좋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업무량이 많아져 불만을 품는 공무원의 입김을 반영하거나, 그 반대로 작용하는 내부청렴도 조사를 제외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전문가들로부터 받는다. 개선을 건의하기도 힘들었다. “성적이 바닥을 친 주제에 무슨…”이란 핀잔을 들을 게 뻔해서다. 그런데도 제도를 고치지 않는 것은 ‘우리 일에 딴지를 걸지 말고 그냥 따르라’는 트집일 따름이다. 이제 2018년을 서른 날 남짓 남긴 오늘,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생채기를 떠안게 될까.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조금 더 높은 쪽에서 먼저 참말로 베풀 일이다. 더군다나 지도자라면 늘 눈에서 떼지 말아야 한다. 작게 보여도 은근히 짓누르는, 그늘에서 느끼는 절망이 더 사무치고 서러운 법이다. 관심을 덜 받을 터이므로. 바싹 뒤쫓아 온 ‘황금돼지’의 해를 기대한다. oneko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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