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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민주정치질서 구축 대전환기”/새해 정국을 전망한다/정담

    ◎신­구 보수­혁신 세대교체 공방 가열/지역할거 기승… 당분간은 혼돈 계속/「도덕성」 총선 쟁점 될것… 민주화 한층 성숙 기대 □참석자 이부영통합민주당최고위원 박재창숙명여대교수 김석준이화여대교수 새해는 제15대 총선이 있는 해이다.95년 노태우씨 비자금사건으로 비롯된 정치권 사정은 필연적인 정계 개편을 유도하고 있다.또한 세대교체론이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이 모든 「혁명」은 결국 유권자인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소수의 담합 또는 밀실정치로부터,다수의 투명하고 공개적인 정치로 가느냐 못가느냐 여부는 결국 국민들 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이부영통합민주당 최고위원·박재창숙명여대 교수·김석준이화여대 교수 등 전문가 3인의 정담을 통해 올해 정국을 전망 해본다. ▲이부영최고위원=해방 50주년이었던 지난해는 21세기 통일시대 준비,6·27 지방선거에서 부활된 「지역할거주의」 타파,노태우·전두환 두 전직대통령의 구속기소 등에 따른 부정부패의 고리 단절과 역사청산 등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박재창교수=지난 95년 우리나라 정치권의 특징은 리더십의 공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권력의 파편화라고나 할까요.우리정치권은 지난 한햇동안 세대교체 세력과 수평적 정권교체 세력간의 대결,지역등권론과 지역할거주의 배격론의 대칭,또 연말에 와서는 다시 개혁과 수구의 대결이라는 형식의 대칭적 관계가 이어졌습니다.그런 와중에서 우리의 정치는 리더십을 상실했고,나름대로 정치의 틀을 지배하던 기본질서가 깨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범인류적 현상이며,한국정치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기 위한 전 단계로 해석됩니다. ▲김석준교수=지난해의 지방선거는 민주화가 진전됐다는 긍정요인에도 불구하고 중앙정치까지 지역할거주의가 확대됐다는 부정적 요소를 보였습니다.두 전직대통령의 구속에 따른 정치권의 혼란은 재계는 물론 사회 각계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이런 가운데 세대교체가 하나의 명제로 등장했습니다. ▲이최고위원=크게 보면 지난날의 관행을 답습할 것인가,아니면 이를 극복하고 청산해 나갈 것이냐 하는 논쟁으로 시작될 것 같습니다.거기에 덧붙여 지역할거주의와 검은 돈의 거래,냉전시대의 이분법적 논리라는 지난날의 행태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세력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흐름간의 대결이 펼쳐질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정치틀 깨져 ▲박교수=올해 총선은 정치파괴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세계적인 조류를 보면 국가와 정치의 축소가 강요되고 있으며,과도한 정치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민주정치로 포장된 소수에 의한 음모정치,궁정정치,담합정치가 파괴될 것으로 봅니다.정치적 혼돈은 심화되는 양상을 띠는 가운데 새 정치질서와 체제를 모색하는 몸부림을 보일 것으로 봅니다.남북관계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갈등과 협조의 관계로 불거지면서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외형적으로는 법률·사회정의·부패척결 등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을 것이며,정치축소의 반작용으로 정치적 욕구를 수용하는 창구로서의 시민운동이 거세질 것으로 봅니다. ▲김교수=96년 역시 또다른 격동의 해가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30년을 넘게 계속되어온 구질서를 청산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당위와 현실정치 사이의 긴장과 갈등,정치권의 새로운 세력등장 등이 매우 다이내믹하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그러나 시각을 좀더 높고 멀리해서 보면 역사의 흐름이 바로잡히는 긍정적인 한해가 될 것입니다.따라서 정치권은 유망한 신인들을 유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이최고위원=이제 세대교체에 관해 말머리를 돌려봅시다.저는 하나의 시대어로 냉전·이념대결·특권·부정부패 등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세대교체가 아닌 「시대극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통일을 위해 북한 동포를 먹여 살릴 준비도 하기 힘든 마당에 지난 시대의 사고·행태에 눌러 앉아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의미에서,정치에도 이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야 하는 세대교체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교수=올해의 정치도 혼란을 거듭하겠지만,이는 비관적인 절망이 아니라 전향적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한국정치의 시대정신은 정치도덕성의 회복입니다.그러나 이를 구현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에 맡긴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막연한 일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세대교체를 실현할 것인가는 정치권 내부에서 이뤄질 것입니다.수평적 정권교체와 수직적 정권교체 세력이 다투게 될 것입니다.이 싸움의 결론에 따라 구체적인 세대교체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유망 신임 유입을 ▲김교수=세대교체의 개념에 대한 두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기존 정치인 가운데 물러날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스스로 교체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세대교체는 후진양성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여야는 이번 선거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세대교체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나 「화장만 고치는」 차원이어서는 곤란합니다.국민들이 원하는 새 세대는 자질·도덕성·능력·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며 진실로 국민들 편에서 필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세대교체에 나서는 정치신인들은 헌신과 봉사의 결단이 필요하고 이들은 사회단체 및각 분야의 전문직에서 나와야 합니다.이와 함께 새로운 사람을 담을 수 있는 제도와 틀이 필요하고 기성 정치인에게 유리한 틀은 깨져야 합니다. ▲이최고위원=총선결과를 예측함에 있어서,5·6공 비자금 문제와 5·18,12·12문제가 어떻게 낙착되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5·6공 비자금이 단순히 5·6공에만 그치지 않고,현 여권 또 야권 지도자들에게까지 흘러간 것으로 드러나면,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또 5·18과 12·12의 해결방향은 우리나라 정치 정통성의 무게중심이 과연 어디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김영삼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며 이런 문제를 처리하게 되면,정국은 심대한 변화를 겪을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김대통령이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근시안적으로 정략적 이익을 위해 이 문제를 다룬다면,오히려 그 여파가 부메랑처럼 김대통령에게 되돌아갈 것입니다.특히 총선에서 김대통령은 치명타를 입게될 것입니다.검은 돈과 지역분할구도에 근거한 세력들은 총선에서 어느 정도기반지역에서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남북관계 새 변수 ▲박교수=15대 총선은 역사청산과 단죄의 정국이 어떻게 결말이 나고 현 정국구도가 어떻게 재편될 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정계개편과 세대교체는 총선을 통해 이뤄질 것이나 새 세대가 중산·보수,안정을 희구하는 대다수 유권자층을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각 정당이 총선전에 대선 주자를 가시화시킬 것인지가 총선을 지배하는 변수로 등장할 것이나 역시 선거의 쟁점은 시대정신이 된 「정치의 도덕성」이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김교수=지난 6·27 지방선거를 돌이켜보면,당시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되고 주민들이 지방정부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오는 총선을 미시적으로 보면 어느 후보가 당선됐고,어느 당이 이겼다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민주적인 룰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거로 기록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박교수=총선이 끝나면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가 제기될 것으로 봅니다.그러나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은 그 동기가 불순합니다.내각책임제하에서는 재벌공화국,재벌이 보유하는 정치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오히려 내각책임제는 권력응집적이어서 전횡이 더 쉽습니다.행정부는 물론 입법부도 장악하기 때문입니다.대통령책임제는 기본적으로 권력분립형입니다.바꿔야 할 결정적 이유도 없으며 내각책임제로 돌아서면 한국정치의 내용이 바뀔 것이라는 논리는 어처구니 없는 것입니다. ○내각제 동기 불순 ▲이최고위원=지역할거와 좌우대립구도,정경유착 등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려는 세력들이 어쩌면 총선뒤에 권력구조의 개편을 시도할지도 모릅니다.대통령제 아래서는 권력에의 접근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역적인 연합을 통해 세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내각제 개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국내정치보다는 남북관계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국민의 일반적인 정서입니다.남북관계에 영향이 올지 모르는 내각제 개헌은 위기를 부를 수 있습니다.특히 내각제가 되면 2∼3개의 큰 재벌이 연합해서 정권을 창출해낼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박교수=이번 총선은 완전한 지자제 이후 첫 실시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현실정치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결론적으로 한국정치는 낙관적인 기대의 흐름이 있는 만큼 다소의 시행착오나 혼란이 있더라도 민주화와 성숙으로 다가갈 것으로 기대합니다.다만 병폐가 있다면 교과서적이 아닌 음모와 권모술수 등이 판치고 소수의 정치인이 정치를 독과점함으로써 시민들이 정치에서 소외돼왔습니다.그러나 이들은 총선과 97년의 대선을 거치면서 점차 강력한 시민의 권리를 얻게될 것으로 봅니다.정치파괴로 인한 정치저변의 변화로 생활정치가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합니다.한국정치의 미래는 밝습니다. ▲김교수=두 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앞으로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헌법소원도 나올 것입니다.대통령제의 초월적 초법적 관행은 우리가 민주질서를 회복하면서 최소화되고 있습니다.다만 오는 총선에서 많은 정치신인을 배출할 수 있도록 선거구를 중대선거구로 전환하고,선거연령도 19세로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봅니다.
  • 군포 쓰레기 소각장 부지 확정/산본동 170일대

    ◎환경평가 거쳐 97년초 착공 【군포=조덕현 기자】 마침내 군포시의 쓰레기 소각장 부지가 정해졌다.조원극 군포시장은 30일 소각장 부지를 산본동 170일대 6천여평으로 최종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당초 예정지인 산본동 166에서 수리산 쪽으로 9백여m쯤 올라간 곳이다.산본 신도시 한양아파트에서 1.4㎞,가야아파트로부터는 6백여m 떨어졌다.반경 2㎞에 2만4천9백52가구·8만1천2백11명이 살고 있다. 새해 초부터 이의신청과 그린벨트 행위허가,환경영향 평가 등을 거쳐 97년 초에 착공해 98년 말 완공할 계획이다. 군포시는 그 동안 새 소각장 후보지 7곳을 선정,의회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를 거쳐 이날 확정했다. 종무식 날 소각장 부지를 전격 발표하자 신도시 출신 시의원 5명이 시장실로 난입해 집기를 부수는 등 거칠게 항의했고 신도시 주민 1백여명도 시청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 뉴욕시립오페라단 이현자 이사(세계속의 한국인:6·끝)

    ◎링컨 센터 각종 공연 재정적 뒷받침/「신이 내린 목소리」 신영옥·도밍고 발굴 일조/허드슨리버 뮤지엄 등 6개 단체 이사도 역임 문화예술의 꽃은 이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정성어린 손끝에서 피어난다.뉴욕이 세계적 문화예술의 도시로 숨을 쉬는데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지원가들이 있기 때문이다.문화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 「거름」을 주는 일로 뉴욕에서 크게 주목받는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인도 끼어있다. 이현자씨(61).그는 국제적인 문화예술 지원가이다.뉴욕의 문화예술상징이며 종합무대예술센터인 링컨센터내에서 1년에 5개월가량 공연하는 유명한 뉴욕시립오페라단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최근에는 한국「예술의 전당」명예이사로도 위촉받았다.올해로 창설 51주년이 된 뉴욕시립오페라단에는 30여명의 이사가 있지만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족적」도 비교적 크다는게 이곳 문화예술계의 평이다.필하모니오케스트라,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링컨센터에서 그의 지원활동은남다르다.지원규모도 크지만 정성 또한 그에 못지 않다고 한다. ○「예술의 전당」 명예이사 이씨는 뉴욕시립오페라단 등 문화예술단체에 지원활동을 벌이는 한편 각종 사회단체에도 한동안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그가 최근까지 몸담은 사회단체만해도 허드슨리버 뮤지엄,리버데일 네이버후드,뉴욕 브롱크스 경노회관등 3군데나 된다.93년 봄까지 5년동안 브롱크스 소재의 허버트 리만 대학이사도 지냈다.특히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허드슨리버 뮤지엄에는 이사로 12년여동안 재직하면서 박물관의 창립모토인 「미국적 생활과 역사를 보존하자」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많을 때는 한꺼번에 6군데의 문화예술단체나 사회단체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에너지의 분산을 막고 싶고 문화예술지원가로서의 활동이 더 적성에 맞아 아쉽지만 사회단체활동을 정리했읍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만큼 바쁘게 생활해 온 이씨는 적성에 맞는 일을 하려 문화예술지원분야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이씨는 문화예술지원가의 역할이란 한마디로 실질적이며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3W(Wisdom/지혜,Wealth/부,Work/일)를 모두 바쳐야 한다고 강조한다.나름대로 확립한 문화예술지원에 대한 일종의 철학이다. 이씨는 뉴욕시립오페라단이 신인들의 발굴무대이자 젊은 아티스트들의 실험무대로 활용되는데 더욱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세계 각국에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 정통오페라만을 공연하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이씨는 「꿈나무」문화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질을 키우고 더 큰 공연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가는 것도 잊는다고 웃었다.세계적인 오페라가수 플라시도 도밍고,호제 칼레라스,세릴 밀네스,세미엘 라메이,헬렌 유,한국의 신영옥씨 등이 시립오페라단을 거쳐간 인물들이라고 자랑했다. ○지혜·부·일 「3W」 헌신 지난 8월 예술의 전당 명예이사로 뽑힌 배경에 대해 『연륜이 있고 이미 활성화된 기관인 뉴욕시립오페라단에서 쌓은 문화예술적 경험을 새로 태어난 예술의 전당에 접목시켜 달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 이씨는 한국 문화예술의 세계화에 일조할 생각에 부풀어 있다.이씨는 문화예술이 꽃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는 각종 지원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좌석을 파는 방법에서부터 기금모금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청사진을 펼쳤다.한국식이 좋은 것은 더욱 발전시키고, 미국식이 좋은 것은 과감하게 도입해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 문화예술 지원가로서의 소감도 덧붙였다. 이씨는 유럽의 문화예술은 전통을 지키는 면이 강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약한 반면 미국 것은 도전을 통해 약진을 하기 때문에 이 두가지를 잘 융합시켜 「완전」을 창조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설명했다.한국 문화예술의 경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단계에 있어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 가능성이 「완전」으로 실현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그는 특히 줄리아드 음대에 다니는 학생들중 한국학생들이 상당수에 이르며 뛰어난 재능으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한국인 예술인들이 많으면서도 한국에 이들이 설 「집」이 많지 않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자질을 발휘할 장소가 고국에적은 탓에 「집시」생활을 하는 유명 예술인들이 많은게 항상 부담이자 아쉬움이라고 했다. 지난 70년 미국에 온 이씨는 한국 국민들이나 재미 교포들이 음악 등 문화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늘리는데 미력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그는 문화예술의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예술의 전당같은 문화예술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한국의 문화예술기관이 난립하지 않고 한 구심점으로 통합됐으면 하는 희망도 제시했다. ○후원회 활성화 강조 그는 특히 한국에서 문화예술계의 후원회조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을 가장 큰 약점으로 들었다.링컨센터만 하더라도 멤버십이 잘 활용돼 다양한 재정적 뒷받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물론 멤버십이 제대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기금기여에 따른 이익이 내게 돌아온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한 뒤 이를 위해 한국의 조세정책 등 각종 정책이 문화예술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뉴욕의 일반 공연장만 하더라도 세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1천달러이상 기금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해 문화예술지원자가 「만원」상태라고 소개했다.미국에는 문화예술기관 등 비영리기관을 돕는 일은 납세와 똑같다는 인식이 국민사이에 심어져 있고 그만큼 후원자층이 두터운게 부럽다고 했다.문화예술의 뿌리가 제대로 내려져 세계적 일류 오페라가수인 파파로티가 곁에 있고 도밍고같은 세계적 오페라가수들의 목소리를 시즌때마다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되물으면서 「문화예술의 혜택」을 열거했다. 이씨가 문화예술지원가가 된 계기는 76년 변호사 겸 사회사업가인 미국인 남편 허버트 에이브론즈씨와 결혼하면서 마련됐다.당초 패션디자이너였던 그는 남편의 집안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문화예술지원에 눈을 떴다.남편 집안은 재단을 만들어 문화예술방면,특히 링컨센터에 수십년동안 도움을 줘왔다.이씨는 결혼이후 링컨센터내에서 공연하는 시립오페라단 크리스터퍼킨 단장의 재능이 아까워 그의 오페라단을 발벗고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벌써지원에 나선 지 15년이 됐고 92년부터는 이사로 선임돼 각종 행사에도 깊이 간여하게 됐다고 했다.리허설같은 작업공연을 한해 20번 넘게 보고 평가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바쁘게 보내고 있다.음악가족이 되다보니 남편도 푸치니의 튜란도트 오페라에 말한마디 없는 단역 농부로 출연하기도 했다는 이씨는 요즘 문화예술지원이 인생의 전부인양 착각될 때가 많다고 했다. ▷이현자씨 신상 메모◁ ▲34년 서울출생 ▲53년 이화여대 국문과 입학(3년 중퇴) ▲70년 도미 ▲82년­95년 9월 뉴욕 브롱크스경로회관 이사 ▲83년­95년 9월 허드슨리버박물관 이사 ▲88년­93년 3월 허버트 리만 대학(뉴욕 브롱크스 소재)이사 ▲89년 9월 뉴욕 한인봉사센터 이사 ▲89년­95년 9월 뉴욕 리버데일 네이버후드 하우스 이사 ▲92년­94년 뉴욕 한인봉사센터 이사장 ▲92년­현재,링컨센터내 뉴욕시립오페라단 이사 ▲95년 8월­현재,예술의 전당 명예이사
  • 대구·경북 도약주도 사회단체 구성 제안/지도급 인사 50명

    【대구=한찬규 기자】 경북대의 박찬석 총장을 비롯,김형기 교수,김영하 명예교수,권병태 변호사,김희석 목사,윤덕홍 대구대 총장 당선자,권기홍 영남대 교수,신현직 계명대 교수 등 대구의 지도급 인사 50여명은 27일 시내 중구 하서동 호텔 금호에서 모임을 갖고 대구·경북의 새로운 도약을 주도할 사회단체를 구성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과거에 얽매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낙후되고 있는 대구를 살리기 위해 구 TK를 청산하고 신 TK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단체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과거 역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큰 혼란을 빚고 있다』면서 『지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여론을 수렴하고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포철 “내년 초긴축경영”/“경기 불투명”판단…간접비용 대폭 감축

    ◎회장비서실 폐쇄… 연구비 동결/매출 0.3% 증액­순익 천억 줄어 내년에는 대학이나 사회단체 등이 포항제철로부터 「기부금」받을 생각을 말아야 할 것같다.경영환경 악화로 인해 「소금경영」을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포철은 내년도 경기가 불투명하다고 보고 생산·영업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간접비용을 대폭 줄이는 등 초긴축 경영을 골자로 하는 96년 경영계획을 26일 확정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내년도 조강의 생산과 판매는 올해보다 20만t과 13만t 증가하는데 그친 2천3백55만8천t과 2천2백96만t으로 각각 책정했다.매출목표는 8조2천2백55억원으로 올해 실적추정치보다 0.3% 늘려잡았다.순이익목표는 6천9백38억원으로 올해 실적추정치보다 1천억원 줄여 계상했다. 그러나 설비합리화와 신·증설사업 등을 포함한 내년도 총투자비는 올해보다 6천억원이 증가한 3조원으로 책정했다.내년중 판매구조조정에 따라 일부 판매부문이 출자회사로 이관되면서 1백47억원의 매출감소가 불가피한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따라 포철은 내년도 각종 기부금등 간접비 부문에서 2백48억원의 예산을 절감키로 했다.포철은 이를 위해 본사인력 4백여명을 포스코개발 등 출자회사로 전출시켜1백28억원의 예산을 절감하고 연구·개발부문에서 외부 위탁용역을 축소,최대한 자체연구로 전환해 연구비용을 올해수준으로 동결해 94억원을 절감키로 했다.포철은 회·사장 비서실을 폐지하고 회·사장 숙소 조리사를 생산·영업부서로 전환배치하며 포항지역 주재 임원과 출자회사 사장 숙소의 축소운영 등을 통해 1백73억원을 절감한다.
  • 5·16과 제4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9)

    ◎무력으로 장기정권 인수… 합법 권력장악 추진/민정이양선언 파기… 유신까지 18년 집권 1961년 5월16일 상오 3시,한강 쪽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온 그 순간을 기다린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나른한 봄밤을 깊은 잠으로 보내고 깨어났을 때 새벽에 바뀐 불행한 역사 현실을 알아차렸다.이날 상오 5시 KBS 첫 방송이 정규프로를 접어둔채 성공한 쿠데타 소식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 주역은 이날부터 18년을 독재권력 정상에 군림한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었다.그리고 해병대 사령관 김동하 소장과 김종필 중령등이 주체세력으로 떠오른 군사쿠데타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들러리를 섰다.장도영은 쿠데타가 성공한 첫 날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국민의 기본 권리를 묶어버린 혁명공약과 각종 포고문이 그의 이름으로 시간시간 전파를 탔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진압의사를 밝혔다.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매그루더의 쿠데타 저지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미 국무성도 군사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의 반공친미성향을 긍정적으로 주목했다.이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에서 미국의 이익과 엇갈리지 않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 박탈 군사혁명위는 쿠데타 첫날 포고령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이어 다음날은 장면정권을 정식 인수했다고 밝혔다.군사혁명위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최고회의는 6월6일 공포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따라 최고권력기구로 등장했다.이와는 별도로 5월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이 출범한데 이어 부정축재처리위원회와 혁명재판소,혁명검찰부가 설치되었다. 군사쿠데타는 군인들이 장악한 권력 그 자체보다 쿠데타 이후 군인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그 행동은 목적을 달성한 이후 병영으로 돌아가는 중재자형과 장기간 공공연히 정치에 간여하는 감독자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당시 한국의 군부도 초기에는 혁명과업을 2년내에 완수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주변의 소수 장교들은 군정하에서 장기집권 계획을 세웠다.그 계획의 하나가 최고회의 직속의 중앙정보부(중정) 창설로 나타났다.미국의 CIA를 표방한 것이라고 하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중정은 창설 초기부터 무소불위의 감독자 증후군을 다양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1961년 6월에 창설한 중정은 막강한 권부의 핵으로 민주공화당(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을 주도하는등 장기집권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공화당 창당은 19 61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2년내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발표한 이후 비밀스럽게 추진되었다.그 정당의 골격은 군사혁명 정부 2년간 통치에 이어 계속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패권정당이었다.그러니까 군부는 혁명과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군인이 예편한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군부는 이를 끝내 실현해냈다.군사혁명 포고령 제4호로이른바 구시대 정치인들의 발목을 모두 잡아두었던 군사정권은 그것도 공화당 사전 조직으로 먼저 뛰었다. 군사정부는 1962년 11월 민정이양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의결하고 이를 12월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12월12일 국민투표를 거친 개헌안을 정식 가결한 최고회의는 1963년 1월1일 포고령으로 묶었던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없애버렸다.1년7개월만에 정치활동이 재개된 것이다.그러나 오랫동안 휴면기를 살았던 기성 정치인들은 뒤늦게 스타트라인에 서야하는 불리한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63년 2월26일 김종필이 사전조직한 재건동지회를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그러면 군사정권의 정상 박정희 장군은 약속대로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물론 아니다.그는 1963년 2월18일 민정불참을 선언하고 선서식을 일단 갖기는 했다.그러나 1주일뒤 원주발언에서 자신의 민정불참 선서에 대해 부정시각을 드러냈다.이어 3월16일 현시국은 과도적 군정이 필요하기때문에 4년간 군정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그의 폭탄선언이 나왔다.그는 이 선언을 자신의 민정참여를 기정사실화 하는 계기로 삼아 4·8성명을 내놓았다. ○헌정 짓밟은 반역 기록 그해 5월27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박정희 장군은 8월13일 지포리에서 군복을 벗는 전역식을 가졌다.대장 계급장을 단 전역식에서 「나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지만 그 아류의 정치군인들도 뒷날 네 개의 별을 달고 나서 정권을 잡는 전철을 밟았다.그래서 5·16군사쿠데타 연결선상의 군사정권이 장장 30여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거니와 헌정질서를 뒤흔든 반역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떻든 박정희 장군은 1963년 10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범 재야세력의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겨우 15만표차로 누르고 신승했다.윤보선과 또 한차례 격돌을 벌인 대통령 박정희 장군은 1969년 9월14일 국회 변칙개헌으로 3선을 향해 줄달음쳤다.그리고 한 차례 더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나서 1972년 10월17일 영구집권으로 가는 유신을 선포했다.박정희 정권의 제4공화국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상용 문화부부차장 ▲김성호 문화부부기자 ▲김영중 조사부 기자 ◎「5·16성명」 미국무성 보고서/주한 미대표부 이한림 장군 충고로 쿠데타 반대/본국과 협의없어 “합법정부 지지” 표명/워싱턴 명령에 「간섭」 배제… 경비만 강화 한국에서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 군사쿠데타와 당시 미국의 관계를 확인하는 2건의 새로운 문서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에 의해 미 워싱턴 케네디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이들 문서는 1961년 5월16일 쿠데타 첫날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미국대표부 성명의 배경」과 11월28일 박정희 장군이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친서 등으로 되어있다.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 미국대표부 성명서의 배경」은 5·16당일 M 그린 주한미대사 대리와 C B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우선 거론했다.이들의 쿠데타 반대성명은 국무성과 사전협의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쿠데타 반대성명이 나온 배경을 설명했다.그 배경은 매그루더의 해명을 인용한 것으로,쿠데타 반대성명은 한반도 군사분계선 방위담당 지휘관인 한국군 1군사령관 이한림의 충고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주한미대리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의 성명에는 5·16 군사쿠데타를 직접 반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다만 「한국 국민의 선거에 의해 구성된 합법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담았을 뿐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되어있다.그 이후 매그루더는 명령에 따라 군사쿠데타에 간섭하지 않고 경비강화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서에 기록했다. 이밖에 또 다른 문서 박정희 장군의 친서에는 맥아더 원수에게 전하는 감사의 뜻을 담았다.1961년 11월14일∼25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보낸 것이다.뉴프론티어의 기수를 자처한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 등을 통해 한국 군사정부가 지지를 받기까지 미국의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역사청산과 나라 세우기/김석준 이대교수·정치행정학(서울광장)

    전두환·노태우씨의 구속기소로 잘못된 과거역사의 청산작업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지난 한세기동안 오욕의 역사는 일제식민통치와 더불어 시작되고 일제잔제의 청산이 없는 위에 분단국가수립과 동족상쟁,5·16,10·17,12·12,5·17 등 일련의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이처럼 외세와 정치군인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온 국민들의 여망을 바탕으로 문민정부는 과거청산작업을 추진해왔다.하나회 등 군사조직해체와 안가철거,안기부등 국가정보기관의 문민화,공직자 재산공개와 율곡비리등 부정부패 척결,전 조선총독부건물 철거,관권·금권·행정·흑색선거추방,지방자치 전면 실시,정치관계법·금융실명제·부동산실명제 등 제도개혁의 추진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이러한 정지작업위에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사건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이는 김영삼정부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한국병 치유」와 「신한국 창조」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청산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권위주의 질서가 형성되고 기득권세력이 지배세력으로 형성되지 않고는 아무리 잘못된 역사라도 유지될 수 없고 그것이 불법적·폭력적일수록 더욱 광범위하게 물리적·인적 통치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진민주국가들이 시민혁명이나 전쟁을 통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특히 우리처럼 여러차례의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왔던 권위주의체제는 그만큼 청산하기가 쉽지 않고 청산과정에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일부 정치·경제의 혼란과 불안은 너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역사청산의 핵심적인 과제는 인적·물적·제도적·문화적 청산작업이다.일제식민통치나 군사쿠데타의 핵심세력들이 정치·경제·사회 등 역사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물러나는 인적 청산이 가장 현실적인 과제이다.전·노씨의 구속기소뿐만이 아니라 5·16이후 12·12와 5·17군사쿠데타에 참여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청산이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물적·제도적 청산작업이다.정경유착의 구조적·제도적 관계를 와해시키고 통치자의 도구로 전락한 법과 검찰·경찰등 국가기구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일이다.야당과 사회일부에서 특별검사제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그리고 문화적 청산은 모든 국민의 의식·정신및 문화생활과 관련되기 때문에 가장 장기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조선총독부 건물과 쇠막대기 철거,일제지명 개칭 등이 일제 청산이라면 정치군인들이 심어온 잘못된 「군사문화」의 청산은 쿠데타역사의 문화청산문제이다. 이처럼 역사청산은 인적·물적·제도적·문화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각각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때 역사 바로세우기와 나라세우기가 성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국민과 각계가 나서야 한다.먼저 구세대의 정치인들이 물러나고 새롭고 능력있는 정치집단이 시민과 함께 정치를 주도하는 세대교체가 나라세우기의 우선 과제이다.여야를 불문하고 과거 잘못된 역사의 직·간접적인 책임을 정치지도자들이 지고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지역주의를더이상 정권장악의 볼모로 악용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새로 출범한 이수성내각과 김광일 청와대팀은 역사청산과 나라세우기라는 중요한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96년 총선과 97년 대선이라는 목전의 이해관계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나라 바로세우기작업을 기획하고 추진해야 한다.구질서와 기득권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국민과 역사를 위한 국가운영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과거청산의 소극적인 기능을 넘어 세계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라는 적극적인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무기력하기만 했던 여당도 이제 신한국당으로 거듭나서 나라세우기의 주체로 서야 한다.당내의 인적 청산과 신진대사를 통해 현시국의 주체적·능동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나아가 정부여당은 협력하여 역사청산과정에서 침체한 경제와 불안해하는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생활개혁작업을 본격적으로 과감히 추진하면서 역사 바로세우기작업을 실천해야 하겠다. 야당과 사회단체도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과업에 주체로 나서야한다.정략적·수단적인 문제보다도 역사적·목적가치문제를 우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국민과 언론도 보다 이성적·역사적 판단과 행동을 필요로 한다.가식과 위선,잘못된 의리나 단식행위와 같은 감성에의 호소,궤변과 사술을 통한 보혁갈등구도로의 왜곡,개혁작업의 폄하와 당리당략적인 비판,막무가내적인 증언거부와 진실호도,일부언론의 재벌기업 비호 등 역사 바로세우기의 장애물은 도처에 있다. 마지막으로 불편을 끼치는 입원환자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심정으로 전두환씨는 단식을 중단하고 떳떳이 병원이 아닌 교도소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최규하·노태우씨는 국민에게 진실을 밝혀 진실이 폭력보다 강하고 영원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세워야 한다.국민이 스스로 청치와 선거에 참여하고 감시·감독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다.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와 질서를 실현하는 나라세우기작업에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될때 정치인,경제인,언론인,검찰등 국가기구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범국민 부패추방운동 전개/국민연대회의 발족

    ◎정경유착·연고주의 청산 경실련,참여연대 등 2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부패추방범국민연대회의(공동대표 강문규 한국YMCA사무총장)는 21일 하오 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갖고 범국민적인 부패추방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연대회의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부패권력이 비자금사건, 삼풍백화점붕괴와 같은 대형참사를 일으켰다』며 『부패사슬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하려 한다』며 『권력형 부패에 대한 감시,규제 등 각종 제도개혁 과 연고주의 청산 등 부패사슬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연대회의는 부패추방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 방안으로 ▲정경유착근절 캠페인 등 7대 캠페인 전개 ▲부패추방 시민네트워크 구축 ▲부패추방의 날 행사 마련 ▲부패고발전화 운영 등을 마련했다.
  •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8)

    ◎과도정부­통치권 한계… 과거청산·개혁에 실패/제2공화국­시위 잇따라 사회 대혼란… 「5·16」 초래 1960년 봄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종말을 고한 제1공화국에 이어 과도정부가 탄생 했다.그러나 과도정부는 개헌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지만 국민들이 열망한 과거청산과 정치혁신을 실현하는데 실패 했다.그래서 약체 정권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군에 정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1960년 4월 21일 제1공화국의 운명이 황혼을 맞고 있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자신이 평소 신뢰감을 갖고 있던 전 서울시장 허정을 만났다.이승만은 정부의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도록 부탁 했다.당시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한 상태였다.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자연스럽게 대통령직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자유당 세력들도 특별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허정이 수반을 맡아주기를 사실상 희망하고 있었다. ○허정 내각제 개헌 추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날인 4월27일 대통령서리에 취임한 허정 외무부장관은 우선 내각제 개헌을 떠올렸다.이 내각제 개헌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였고 민주당의 오랜 강령이기도 했다.허정은 취임초 첫 기자회견에서도 이 내각책임제 개헌실현의지를 밝혔다.허정은 이 회견에서 내각제 개헌을 다짐하면서 개헌을 이루어낸 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약 했다.국회는 4월29일 민주·자유 양당 4명씩과 무소속 1명으로 개헌특위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에 개헌특위가 구성되면서 공법학회는 개헌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오기도 하고 개헌특위 주최로 공청회를 열어 각계의 의견도 들었다.마침내 개헌특위는 5월9일 개헌요강 작성에 대체로 합의한 뒤 6월10일 본회의에 상정했다.전문 103조로 돼 있던 제1공화국의 헌법중 무려 52개 조항을 고친 이 개헌안은 재적 2백11명중 찬성 2백8표,반대 3표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앞서 허정 과도정부는 5월2일 첫 국무회의를 열고 혼란상태의 정국 수습과 경제위기 타개책을 내놓았다.부정선거 관련자 엄중처벌및 경제사범 엄단,경제적 민주화 지향,중소기업 육성의 재정적 뒷받침,악질 세무관리 엄단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조직적 권력을 갖고있지 못했던 과도정부의 통치권에는 한계가 뒤따랐다.특히 군부의 부패 척결과 관련해 허정은 미국과 주한미군사령부의 견제 탓에 끝까지 숙군작업에 손을 대지 못했다.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는 허정에게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돼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숙군에 제동을 걸었다. 4·19가 요구한 문제점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선거부정의 주요 음모자로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를 3·15선거에서의 불법행위로 구속하는 것으로 그쳤다.이어 자유당에 선거자금을 불법 제공한 은행장들도 구속하고 정치·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정치깡패의 두목들도 우선 잡아들이기는 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과 연결돼 있었던 이들의 처리문제는 다음 정권과 군사정권으로 넘어갔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방침도거듭 밝히고 개인 18명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 때까지 아무것도 매듭지은 것이 없다.결국 당시의 정치구도나 법적 기본구조를 깨뜨릴 의지도,능력도 없었던 과도정부는 다음 정권에도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부정축재 84명 처벌못해 제4대 국회는 내각제 개헌을 끝으로 해산 했다.그리고 나서 새 헌법의 절차에 따라 19 60년 7월29일 실시한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일단 권력을 잡았다.민주당은 민의원 2백33석중 1백75석,참의원 58석중 31석을 차지했다.나머지 의석은 민의원의 경우 무소속 46석,사회대중당 4석,자유당 2석,한국사회당 1석 및 기타 군소정당 5석 순이었다.참의원의 경우는 무소속 20석,자유당 4석,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민족진보연맹이 각각 1석등이었다. 그러나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당 공천 탈락자이고 이들 중 다수가 국회개원과 동시에 민주당에 재입당 했다.민주당은 명실공히 실세가 됐다.하지만 선거과정에서 분당론까지 제기됐던 민주당 계파는 여전히 복잡했다.당선자 1백75명 가운데 장면 중심의 신파 78명,그에 반대하는 구파 83명,중도파 14명등 팽팽한 구도를 보이자 신·구파가 각각 당선자대회를 갖는등 치열한 집권경쟁을 벌였다. ○장면내각 민주신파 일색 우여곡절 끝에 8월19일 민의원에서 장면총리 인준투표가 실시됐다.결국 찬성 1백17표,반대 1백7표,기권 1표로 신파일색의 장면내각이 출범했다.장면총리는 구파측에 대해 5명 정도의 인선을 제의했지만 구파의 거절에 부닥쳐 8월23일 신파측 일색의 불안정한 새 내각이 출범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은 이전의 과도정부와 마찬가지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선 자유당 시절 부정부패의 원흉들을 처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집중적인 지탄을 받고있던 경찰에 먼저 화살을 돌려 81명의 경찰서장을 포함한 2천2백13명의 경찰관을 파면시켰다.그 결과 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의 기능을 상당기간 약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미국은 설상가상으로 61년 1월 한국정부에 대해 환율인상을 요구해왔다.장면 내각은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61년 1월 달러당 6백50환이었던 환율이 1천환으로 평가절하 됐다.이어 2월에 1천3백환으로 다시 평가절하된 판에 미국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고 나섰다.그 대가로 장면정권은 3천5백만달러의 원조를 받았지만 이 협정은 미국 원조자금이 전체예산의 52%를 차지하던 한국 정부예산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 행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한국주재 미국인 교육자와 기술자들도 모두 한국정부로부터 외교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미국은 이것 말고도 61년 1월 「외자도입촉진법」 제정을 채근했다.이 법은 국내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에 대해 연간 20%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이 투자회사들은 한국내의 보유자산에 대해 아무런 세금을 내지않도록 하는 것이었다.이에따라 미국자본의 한국진출이 러시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이무렵 「데모규제법」등의 제정을 추진했는데 1960년 7·29총선에서 참패한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대투쟁을 벌였다.이는 극도의 사회 혼란상을 초래 했다.그리고 국민의 기본적 의무보다 권리를 더 중시하는 각종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이와 맞물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5월13일 평화통일 구호를 내걸고 「남북학생회담 환영및 통일촉진대회」를 열었다. 1961년 시국위기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이 학생집회가 열린 것은 민주주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5월16일 군사 쿠데타 3일전의 일이었다.물론 제2공화국이 약세의 틈을 보여준 데서 비롯한 쿠데타로 평가되지만 국민들에게도 얼마간은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군사자문단 「국가팀 회의자료」/“미군철수땐 한반도 적화” 예측/북의 혼란책동 선전공세 면밀 분석/팸플릿 제작 등 심리전 대응책 제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장면정권 시절 주한미군의 대북 대응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회의자료를 미국 케네디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입수했다.이 자료는 19 60년 12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합동군사원조자문단(JMAAGK)의 국가반(Country Team)회의자료로 당시 혼란을 틈타 고조된 북한의 선전에 대처하기 위한 주한미군사령부의 대처방안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회의자료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는 일상적인 참석자 외에 주한미군 참모장인 에머리 워첼중장과 본드 장군등이 이례적으로 참석했다.회의주제는 「북한의 선전효과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가능한 대처방안 강구」.회의에서 주한미군측은 『북한측의 선전공세가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고 보고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정책 실패와 자신감 결여,혼란·판단불능 때문에 공산주의선전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판단했다.워첼장군은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이승만 정권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돼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남한의 군사적·경제적 소유물에 대해 통제를 해야한다』고까지 발언했다. 회의자료에는 미군이 철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전 한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한 대목도 들어있다.워첼장군은 『미군이 철수하면 전한반도를 공산주의자들이 석권할 수 있을 것인데 왜 북한인들이 자유선거 실시에 동의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도 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결국 미국공보원(USIS)의 전문가 팀이 대한민국 정부와 공동으로 북한의 선전위협에 대응하는데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다.자료에 따르면 미국공보원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가 함께 북한선전에 대응하는 팸플릿을 만들고 양국 정부가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특히 주한미군사령부는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원과 기구정비를 준비했는데 이는 한국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함축했다.
  • 시민·사회단체지도자 초청/시국관련 의견 교환/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은 15일 낮 청와대에서 서영훈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상임고문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지도자 5명과 오찬을 함께 하며 현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전두환·노태우 두전직대통령 구속기소등 최근 일련의 역사청산작업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설명하고 역사청산작업이 단순한 과거청산이 아닌 미래를 향한 창조작업이 될 수 있도록 사회지도층의 협조를 당부했다. 오찬에는 손봉호 시민단체협의회집행위원장,이세중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권태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강문규 한국YMCA연맹사무총장등이 참석했다.
  • 고속철 경주통과 건의/시민단체 “시가지 우회로 문화재훼손 안돼”

    【경주=이동구 기자】 「경부고속철도 경주 확정역사 사수 범시민단체협의회」(공동의장 최용환씨 등 3인)는 4일 청와대와 국회의장,정부의 각 부처 등 관계요로에 보낸 건의서에서 경부고속철도의 경주역사 및 노선을 당초 정부 원안대로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건의서에서 『경주역사 결정은 5년여의 충분한 검토를 거쳐 확정한 국책사업』이라며 『이제 와서 일부 문화계 이기주의자의 편견에 의해 바뀐다면 정부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문화계의 주장은 그동안 문화재보호에 최선을 다해온 경주시민의 명예를 모독하는 행위』라며 『고속철도 또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경주시가지를 통과하지 않으며,따라서 문화재가 훼손될 리 없다』고 반박했다. 이 건의서에는 대구·포항·경주·구미·경산·달성·안동·영주·김천·영천·울산상공회의소회장과 청년회의소소장·로터리클럽회장·라이온스클럽회장·와이즈맨클럽회장 등 사회단체장과 각종 번영회,새마을부녀회,지역의 청년회,각 은행 지점,호텔 등의 대표가 서명했다.
  • 정치권 중구난방 삼가야(사설)

    「5·18특별법」의 내용과 적용범위를 둘러싼 각계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27일 이 사건에 대한 평의를 갖고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정당한지 여부와 공소시효에 관한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했다.「헌재」가 불기소 처분을 취소하는 주문을 내릴 경우 검찰은 「5·18특별법」제정과 관계없이 즉각 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법률의 위헌 여부 심사와 헌법에 관한 최종적인 해석을 관장하는」 헌재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그 결과에 따라 「12·12」에서 「5·18」에 이르는 국권찬탈과정이 재조명되고 심판받는 길이 가장 옳은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헌재는 지금까지 8차례의 평의를 거쳐 내부적으로 의견을 정리한 단계이며 다음달초 최종결정을 짓고 선고를 해야 「5·18」에 대한 최종적인 법리적 판단이 내려져 법적인 효력을 갖게된다.더욱이 헌법재판소법에는 평의내용이 공표될수 없음에도 각계가 예단을 갖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그럼에도벌써부터 각 정파와 사회단체들이 특별법의 제정과 운영방법에 대해 저마다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일이 아닐 수 없다.헌재의 결정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섣부른 주장이나 집단행동은 사법부의 권위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민주제도의 근간인 법치주의의 기본틀을 어겨서는 어떠한 결과도 그 명분을 찾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5·18특별법 제정의 본질은 15년전 국헌문란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바로잡아 유혈폭압에 의한 국권찬탈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의 재발을 이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겠다는데 있는 것이다.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별법의 제정과 운영도 마땅히 헌재의 결정에 따라 이뤄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가 법의 테두리안에서 조명되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따라서 「5·18」의 사법적 해법에서도 이같은 원칙이 준수되기를 강조한다.
  • “국민뜻 전폭 수용” 환영/“「5·18특별법」제정” 각계의 반응

    ◎국민화합·군 명예회복 전기/역사의 응어리 푸는 계기로 24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민자당이 「5·18특별법」을 제정키로 한데 대해 사회 각 단체는 물론 대다수 국민들도 이를 크게 환영했다. 이러한 반응은 검찰이 「5·18사건」을 수사하고도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등 관련주동자들을 불기소처분해 이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다는 국민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종성(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연구실장)씨=정부의 결단이 한편으로 놀랍다.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5·17내란과 양민학살의 진상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책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로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안동일(변호사)씨=「소급입법」의 전례를 남기는 것은 좋지 않다.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여망에 따라 법률제정권을 가진 국회에서 제정하면 도리가 없다.특별법을 제정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헌법재판소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잘못됐다』는 결정을 내려줌으로써 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정진위(연세대 정외과교수)씨=어떤 식으로든 과거를 매듭짓겠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과거의 상처 때문에 언제까지 국력을 소비할 수는 없다.다만 특정 정당의 인기나 정략의 차원이 아닌 순수한 역사의식과 애국적 차원에서 특별법 제정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번 단안이 비자금문제로 비등한 국민감정을 달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 아니길 바란다.특별법안의 핵심은 특별검사제의 도입 및 공소시효 문제일텐데 5·6공과 결속된 현 검사들이 아닌 시민사회단체들로 이루어진 특별검사제도의 도입을 촉구한다. ▲김승현(고대신방과교수)씨=역사의 묵은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특별법을 이번 기회에 마련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입법해 역사의 응어리를 올바르게 청산하길 빈다. ▲정해숙(전교조위원장)씨=그동안 국민들의 5·18특별법제정요구에 대해 민자당이 이를 수용한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환영한다.그러나 정치적 계산에서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차원에서 5·18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문규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씨=5·18특별법이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주동자 처벌을 담보하려면 엄정한 수사를 위한 특별검사제가 도입돼야 한다.또 이번 결단이 비자금 문제로 빚어진 정부여당의 위기를 탈출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되지 말아야 한다. ▲지병륜(한국노총 조직국장)씨=노씨의 비자금파문이 계속되는데다 여당이 당명을 바꾸는 등 수세타개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결정이 나와 정치적 의도가 짙다는 느낌이 든다.그러나 늦게나마 5·18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 다행이다. ▲박원순(변호사)씨=이번 기회에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관련자를 사법처리해야 한다.특별검사제를 도입해 정계의 영향를 받지않고 독자적인 처리를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덕균(엑스포기념재단이사장)씨=특별법을 제정한 뒤에는 정치보복 및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균형있고 합리적으로 시행될 수 있도록 모든 국민이 지혜를 모아야 할때다. ▲조성권(사업·인천시 남구 관교동 동부아파트 101동 505호)씨=해방정국에서 친일파를 확실히 처벌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의 어두운 면이 되풀이 된 것을 거울 삼아 이번 만큼은 여야가 정치적 타협없이 특별법을 만들고 관련자들을 법대로 처리해주길 바란다. ▲류춘기(50·부산시 중구 동광동 부산데파트 2층 한성화랑 대표)씨=5·18은 언젠가는 청산돼야 할 과제이면서도 지금까지 처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와 국민화합을 해쳐왔다.특별법제정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군의 명예를 위해서나 국민화합을 위해서도 잘된 조치이다.
  • 서울신문 50년(외언내언)

    해방직후 광복의 환희와 함께 이 땅은 거대한 혼돈의 소용돌이였다.36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백가쟁명의 의견분출은 정당·사회단체의 난립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신문창간이 줄을 이었다.45년 11월까지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에 창간된 신문이 13종.언론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러나 이들 신문들은 거의 정당·사회단체의 대변지였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1945년11월22일 서울신문이 창간되었다.3·1독립운동 33인의 한 분인 민족주의자 오세창을 사장으로,꼿꼿한 기개의 항일 논객 이관구를 주간으로 서울신문은 민족정론지로 출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언론보도에 공정하고 적확할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걸음 나아가 민족총력의 집결,통일과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에 맞추어 단호히 매진하는 동시에…』창간사의 한 구절이다.언론의 중립성·공명성·정확성을 천명한 이 사설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대로 통하는 명제들이다. 창간이후 서울신문이 걸어온 반세기는 현대사의 격동기다.50년 연륜에서 서울신문은 우리언론발전에 신기원을 쌓아 올렸다. 우리나라 신문으로 최초의 조·석간제를 시행했고(49년 8·15)최초의 한글판 신문을 발행,한글문화의 선봉 역할을 다했다.(56년10·18∼60년4·19)6·25전쟁중에는 서울수복이후 포성울리는 서울에서 19일간 진중신문을 발행하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51년4·6∼4·24)신문제작의 혁명이라 할 CTS(컴퓨터제작방식)를 처음 도입,가장 먼저 납활자를 버린 것도(85년1·1)서울신문이다. 창간당시의 지향대로 서울신문은 민족 정론지로,민족역량을 집결하여 통일을 대비하는 신문으로 성장해 왔다.오늘 창간을 계기로 서울신문과 자매지 스포츠서울의 모든 기사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공급된다.21세기 세계 일류지로서의 서울신문,그 새로운 신화창조를 50주년의 이 아침에 새로이 다짐한다.
  • 「청학동 훈장」이 본 오늘의 세태

    ◎이정석씨,에세이집 「세상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 펴내/여유라곤 없는 도시문명의 야멸참 꼬집어/유교선 남존여비 아닌 역할 분담을 가르쳐/“움겨쥔 주먹·옹골찬 눈빛 풀고 서로 다독이자” 제의 전직 대통령이 수천억원의 뇌물을 챙기고,멀쩡한 백화점이 눈깜짝할 새 무너지는 혼탁한 세상에 샘물 같이 맑은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집이 나왔다. 지리산 청학동 훈장 이정석씨(42)가 최근 펴낸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가 그것(가리온 출판).이씨는 전남 낙안읍성에서 태어나 전국을 돌며 한학을 공부한 뒤 청학동으로부터 초청받아 1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과의 만남이 웃음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갓쓰고 한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른이건 아이건 웃기부터 한다는 것.심지어는 정신병자나 간첩일지 모른다는 신고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전통의복을 입었다고 해서 놀림거리가 되는 세태에 대해 이씨는 분개하지 않는다.다만 『세인소아 아소세­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고 혼자 읊을 뿐이다. 문명의 이기도 그가 보기에 결코 이롭지만은 않다.서울에서 전철을 처음 타던 때의 일.일행이 모두 내리고 자신의 차례가 되자 전철 문이 닫혔다.「갓쓴 체면에 경망스럽게 내릴 수 없었던」그는 기계적인 야멸참에 당혹감과 섭섭함을 느꼈다.사람이 평상걸음으로 내릴 여유를 주지 않는 문명의 이기,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그것은 끝내 크나큰 봉변을 안겨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청학동 훈장님」이 마냥 고리타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남녀관계에 대한 사고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그는 『남존여비는 사이비 전통』이라고 단정한다.비록 조선시대 유교 원리가 잘못 이해되고 사용돼 남자를 더 귀하게 여겼지만,선현들의 바른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남녀는 상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라고 강조 한다.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그는 『섹스는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며,삶의 소중한 보석』이라고 말한다.옛날에도섹스를 단순히 애낳기 위한 행위로 보는 선비와,그 즐거움을 적극 만끽하는 선비 가운데 후자를 더 도가 높게 쳤다는 것이다.그러나 「소중한 보석은 함부로 다루지 않듯 섹스도 함부로 대하면 복이 화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훈장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움켜진 주먹을 풀고,옹골찬 눈빛도 풀자』고 제의 한다.그리고 『우선 나를 사랑하고 때로는 다독거리고 덮어주고 그래서 오천년 살아온 그 멋따라 살자』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갓쓰고 한복입은 채 기업체·대학·사회단체들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도리를 일깨우고 있다.
  • “실업해소”여성단체 뭉쳤다(서정아기자 독일의 여성계 취재기:상)

    ◎통독·불경기로 실업 급증… 63%가 여성/여성센터등서 직업 훈련­재취업 알선 남녀평등 실천의 대표적 나라로 알려진 독일.명실공히 남녀평등을 규정한 법·제도의 발달에도 불구,독일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공장들이 대거 폐쇄하면서 가장 먼저 해고된 쪽은 여성이었다.이 때문에 한때 「독일통일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말이 대유행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여성들은 「실업에서 벗어나기」를 제1의 과제로 삼아 다시한번 강인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연방 및 지방정부,각종 여성단체들도 이에 합세했다.독일의 심각한 여성실업,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들끼리의 자구책,그리고 각종 조직에서 남성과 여성의 균형을 실현해나가려는 독일여성의 노력은 남다르다. 『일자리가 없어 노동청에 실업수당을 신청하러 갈때는 마치 구걸하는 기분이에요.물자가 풍부해진 것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파탄」상태입니다』 옛 동베를린지역에 사는 여성 브리지트 메이씨(52)는 독일통일 5년째인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동독지역 여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실업」이다.통일이전 동독여성들은 95%가까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여성의 취업은 너무나 당연했으며 육아를 비롯한 웬만한 가사노동은 사회가 해결해주었다.그러나 통일이후 새로운 경제체제로 인한 시장개편과 함께 동독지역 공장들이 경쟁력약화로 문을 닫자 1순위로 해고됐다. 지난 93년 현재 옛 동독지역의 실업률이 15·8%,이 실업률에는 취업을 위해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과 이른바 「강요된」가정주부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체감하는 실업률은 40∼50%에 이른다.전체 실업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63%다. 서독지역 여성들도 실업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그러나 이들은 취업이 생존인 동독여성들의 사정과는 좀 다르다.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독 여성은 파트타임 근무를 많이 하고 각종 사회단체에서 자원봉사로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여성과 정부측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전체를 휩쓴 실업태풍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다.이제 동독지역 여성은 통일초기 변화한 사회를 수용하지 못하던 충격상태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무조건적 남녀평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비로소 여성불평등 상황에 눈을 떠 「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손으로 해결한다」는 자각으로 취업대책에 적극적인 여성이 많다. 무엇보다 독일 각 지역에 있는 여성센터,여성카페와 재취업훈련기관이 여성실업문제 타개의 선봉역할을 한다.연방 노동청과 지방정부,유럽연합등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이들 단체에는 실업여성이 모여 대화로 서로의 심리적 압박을 치유하기도 하고 동독여성은 통일이후 새로 배워야 할 생존기술들(은행가는 일,관청서류 취급방법)을 배운다.또 취업을 위해 나이 든 여성도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갖기 훈련부터 기업에 자신을 알리는 이력서 작성기술이나 면접훈련,컴퓨터강습,조세·노동·사회연금법 등을 교육받는다. 여성문제중에는 이혼하거나 또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편모(싱글 패밀리)의 실업도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싱글패밀리는 독일 전체가정의 16%인 2백만가구로 보편화돼 이들의 이익단체가 지역마다 결성돼 취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이들은 세금감면 및 유치원비 삭감을 신청할 수 있으며 법에서 일반가정과 싱글패밀리의 차별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준비작업도 하고 있다. 여성들의 근본적인 취업대책은 경제활성화가 우선돼야 하겠지만 스스로를 돕는 독일여성의 노력은 앞으로 경제가 호전되는 대로 큰 빛을 발할 것 같다. ◎독일 노동총연맹 여성정치부 엘렌 부르크하르트/“통일후 여성계 최대 이슈는 실업” 『독일여성 노동계의 이슈는 역시 실업입니다.통일후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졌기 때문이죠』 엘렌 부르크하르트 독일 노동총연맹 여성정치부 담당자는 독일여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도 실업,노총 여성부의 당면과제도 실업이라고 말했다. ­독일연방정부의 실업개선책은? ▲연방 노동청에서는 우선적으로 3백40만여명의 실업자들을 위한 노동지원금을 확보하고 있다.이 지원금은 기업주와 노동자들이 내는 보험비로 충당된다.그리고 공공부문에서 고용을 창출하는 계획인 직업창출조치(ABM)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실업대책중 중점대상이 있다면. ▲장기실업자가 많은 동독지역이다.농업지대인 메클렌부르그주의 경우 실업자가 60%에 이른다.실업된지 2년이 지나면 실업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구제가 시급하다.더욱이 이 지역 여성들 문제는 위기상황이다.일자리가 나도 남성이 우선이며 특히 기혼여성은 아이봐줄 곳이 마땅치 않아 재취업하기가 너무 힘든 현실이다. ­여성의 노동권보장을 위해 최근 투쟁한 사례가 있는지. ▲지난 3월 한 여자 청소부가 병이 나 일을 못하는 동안 용역회사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해 총연맹에 상담을 의뢰했다.회사측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유럽연합 재판소에 여성 간접차별을 담은 위법이라고 제소해서 승소했다.그후 노동법이 개정돼 지금은 병이 났을 경우 6주까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 “노씨 처벌” 시위·서명 확산/시민단체·학생

    ◎“권력형 부패 전면 수사를”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한 시위·집회·성명발표·서명운동 등 국민적 공분 표현이 날로 거세어지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손봉호)과 「환경운동연합」(사무총장 최열)등 5개 시민·사회단체 회원 50여명은 30일 상오 11시30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앞에서 「노태우 전대통령 구속수사 및 대선자금 진상규명 촉구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노씨는 물론 과거 권력자들의 부패에 대해 이번 기회에 철저히 사실을 규명하고 사법처리해야 한다』며 『검찰은 노씨를 즉각 구속수사하는 한편 대통령선거자금 비리 등 5·6공의 권력형부패에 대해서도 전면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또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등 3개 재야단체 회원 10여명은 30일 낮 12시 서울 서대문 네거리 조흥은행 앞에서 5·18 특별법제정 및 비자금 관련자 구속촉구를 위한 서명운동과 선전활동을 했다. 이들은 『현 정권과 노태우 전대통령 사이의 정치적 타협을 경계한다』며 『노씨의 구속과 5·18 학살자 처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양측의 정치적 타협을 사전봉쇄하자는 뜻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게 됐다』고 밝혔다.이들은 오는 11월3일까지 서명운동을 계속할 방침이다. 한편 이날 하오 2시5분쯤 노씨집 부근 실로암 약국 앞에서는 한국대학원생 대표자협의회(상임의장 장재완) 소속 회원 8명이 『비리주범 노태우 구속』 등의 구호를 외치며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밖에 경실련은 경기·대전·청주·익산·춘천·강릉·전주 등 각 지역 조직별로 이날 시위·집회·서명운동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전북지역 40개 시민·사회단체도 이날 하오 전주시 완산구 동학혁명기념관에서 「5·18 특별법 제정 및 비자금 진상규명을 위한 전북지역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책임자 처벌 등을 촉구했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6공 비자금 파문­시민·사회단체 반응

    ◎“이번 기회 정경유착 고리 끊어야”/비자금 국고환수·국정조사권 필요/관련자 철저수사… 6공 청문회 열자 「6공 비자금」에 대한 검찰수사가 본격화된 23일 비자금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성명과 집회·시위가 잇따랐다. 이들은 『믿어달라』며 「보통사람」임을 강조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미 드러난 것만도 4백85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며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던 취임 직후의 약속과도 어긋나 국민들에게 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안겨주고 있으므로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계훈제·신창균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고문,김중배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 사회원로 38명은 이날 하오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노전대통령이 명백한 비자금을 「통치자금」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5·18을 통치권 행사 행위라고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며 『6공뿐만 아니라 5공의 비자금도 똑같이 추적해 범법사실이 드러나면 준엄히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소속 회원 1백여명은 이날 낮 12시 서울 여의도 중앙빌딩 앞에서 비자금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4천억 비자금 수사촉구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시민 탄압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의 정치자금이 드러나 온국민이 허탈과 분노에 빠져 있다』며 ▲노전대통령에 대한 세무조사 ▲비자금 국고환수 ▲국정조사권 발동 ▲6공청문회 개최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성명을 통해 『이번 사건은 아직도 우리사회에 남아 있는 정경유착의 명백한 증거』라며 『노전대통령측이 「통치자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부정한 정치자금 수수 사실을 감추고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경실련은 앞으로 이같은 비자금 조성을 막기 위해 ▲금융실명제 강화 ▲내부 고발자 보호를 위한 법률제정 ▲비실명계좌에 대한전면조사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은 『정부가 이번에도 축소수사를 통해 5·6공 세력을 비호한다면 문민정부의 정통성이 부정되는 것은 물론 통치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민주노조 총연맹준비위」도 『노전대통령 소유로 드러난 천문학적 거금은 재벌의 로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며 『자금조성 경위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도 성명을 내고 『민주화와 정의사회를 외치던 대통령과 주변인사들이 권력을 이용,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실망과 좌절을 느끼게 하는 끔찍한 사건』이라며 『정치적 타협에 의한 졸속처리가 아닌,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사결과를 내놓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혐의가 있으면 전직 대통령이라도 성역없이 조사하는 것만이 국민의 의혹을 푸는 길』이라며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한편 전남대·조선대 등 「남총련」소속 대학생 3백여명은 하오 4시30분쯤광주시 동구 금남로3가 광주은행 네거리 등 시내 곳곳에서 노전대통령의 사법처리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5·18 특별법 촉구/경실련 등 가두서명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과 환경운동연합·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등 「5·18 책임자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 소속 11개 시민·재야단체는 12일 하오 서울역 광장을 비롯,전국 1백여곳에서 5·18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가두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 연석회의는 『이번 가두서명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시민·사회단체가 5·18 특별법 제정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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