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선거 원년으로]‘공약=세금청구서’ 약속어음식 공약 경계해야
대선 후보들은 선거 공약에서 저마다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청사진은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청구서’나 마찬가지다. 공약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이 재원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약을 예산의 관점에서 주의깊게 접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도어음으로 끝나는 약속어음 공약
예산의 뒷받침이 없는 공약도 좋지 않지만, 사업의 구체성이 결여된 채 예산만 배정하는 공약은 더 나쁘다. 사업이 꼭 필요하다면 정치력을 통해 재원을 확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구체성을 결여한 채 사업을 시작하다 보면 더 큰 예산 낭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약속어음’ 형식의 공약은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내놓은 공약부터 등장했다. 전체 예산 비중에서 과학기술예산을 5%로 늘리고 문화예산을 1% 이상으로 확대하며, 교육 재정을 국민총생산(GNP) 대비 5% 수준으로 늘린다고 약속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서 연구개발(R&D) 투자를 GNP의 5%로 약속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농업예산을 전체 예산의 10% 수준으로 높이고 사회복지 지출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13.5%까지 상향조정하며, 교육재정을 GDP의 6%까지 확충하겠다고 했다.
과학·농업·복지·문화 등 사각지대에 있는 분야에 대한 획기적인 예산 증액을 약속하고 있으나, 이는 공약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사업내용은 제시되지 않은 채 해당 분야의 유권자를 패키지로 포섭하겠다는 선거전략이다. 이런 공약은 결국 ‘부도어음´으로 끝나기 쉽다.
●이익집단 겨냥한 보증수표식 공약
특정 이익집단에 대해서는 ‘보증수표’ 방식의 공약을 내놓기도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노총의 장학기금을 300억원으로 확대 ▲농지구입 자금의 저리융자를 위한 2000억원 규모의 기금 설치 등을 약속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중소기업공제사업 기금 6000억원 이상으로 확대 ▲농어업의 연구개발비 1998년까지 2000억원으로 확대 등을 내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음보험기금 5000억원 조성 ▲중복장애인 생계보조수단 10만원 인상 등의 공약을 내놨다. 노무현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금액을 제시하는 보증수표 방식은 상대적으로 자제했다.
이런 공약이 지켜졌는지를 검증하려면 자금 배정 여부를 따지면 된다. 그러나 선거 과정의 혼돈기에 표를 의식한 예산 약속이 재정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익집단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겠지만 국민적 관점에서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예산배정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
●불확실한 백지수표식 공약
공약을 예산의 관점에서 분석할 때 검증이 가장 힘든 것은 백지수표 방식으로 제시되는 공약이다. 사업의 물량만 제시돼 향후 얼마만큼의 재정이 소요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경우와 정치적 의지만 제시돼 집행이 불확실한 경우로 나뉜다.
사업의 물량만 제시된 경우는 국도 완전 포장 및 모든 도로 포장률 77% 상향 조정(노태우 전 대통령),98년까지 4500㎞의 하천을 개수하되 기방하천은 개수 완료하고 준용하천 개수율은 69%까지 높임(김영삼 전 대통령), 수도권의 도시철도 연장을 1000㎞로 확대(김대중 전 대통령), 현재 10%의 공공의료를 30% 이상으로 확대(노무현 대통령) 등이다.
이런 공약은 물량은 제시됐으나 어느 정도의 재정이 소요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예산 소요액이 없기 때문에 향후 재정 투입이 제대로 되지 못하거나 한 번 시작한 다음에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재정이 투입될 우려가 있다.
한편 의지만 내세워 예산 수반이 불확실한 경우로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적극 개발(노태우 전 대통령), 남북협력기금 크게 확충(김영삼 전 대통령), 저소득층과 주부에게도 기초연금 제공(김대중 전 대통령), 장애아 및 영아를 위한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노무현 대통령) 등이 해당된다. 어느 정도의 사업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성·국민 전체 향유 가능성 따져야
공약을 예산 기준으로 유형화하면 두 가지 축으로 구분된다(표 참조). 하나는 소요 규모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느냐다. 그리고 특정 집단을 위한 지출인가, 국민 전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지출인가로 대별된다.
사회간접자본의 경우 사업 규모만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문화나 복지는 제시되는 양식이 매우 다양하다. 구체적인 특정 집단과 연계될 때에는 구체적인 금액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제도를 형성할 때는 사업 규모만 제시되거나 의지만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유형은 결국 공약의 집행률과 관련 있기 때문에 후보자는 형식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하고, 유권자는 실현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분석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노총 장학기금 300억원 확충 공약은 특정집단에 대한 지향성과 구체성이 모두 매우 강하다. 반대로 노 전 대통령의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공약은 특정집단 지향성과 구체성이 모두 약하다.
대표집필 이원희 한경대 교수
■ 역대 대통령의 정책선호도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직전 대선에서 내놓은 공약을 예산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각 정부의 정책 선호가 읽혀진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회간접자본(SOC), 김영삼 전 대통령은 농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중기 지원과 복지 정책의 초석 다지기, 노무현 대통령은 공약을 망라하는 가운데 복지를 특히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개발→농촌→중소기업→복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전히 개발시대 정부 역할에 충실해야 했고, 건설 공화국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동해안과 청주의 국제공항, 합천·주암·임하를 비롯한 각종 다목적 댐 건설이 제시됐다. 다만 노인,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단편적인 사업이었고, 제도 형성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농촌공약 대통령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앞두고 농촌에 대한 피해의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를 공약에 반영했다.10년간 42조원을 투자, 농어촌 구조개선을 하겠다는 공약이 특징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였기 때문에 직접 자금이 소요되는 예산 공약을 자제했다. 대신 제도 개선에 관한 공약이 지배적이다. 다만 신용보증기금 확대, 중소기업공제사업기금 5000억원 확충 등 중기 지원 관련 예산 공약이 많은 게 특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도 개선에 관한 다양한 공약을 제시했으며, 재정사업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공약을 내놓았다. 특히 사회복지 지출을 국내총생산대비 10%에서 13.5%까지 확대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해 매우 다양한 복지 공약을 제시했다.5대 암 정기검진 서비스를 전 국민에게 확대하고, 만 5세아 무상 보육 실시 등 공격적인 복지 공약도 나왔다.
●총재정 규모 제시 필요
대선 후보들이 어떤 정책을 선호하느냐를 떠나 공약이 유권자의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려면 우선 개별 사업의 소요예산 규모를 밝혀야 한다. 그리고 조세 정책의 변화에 따른 세입 변화를 밝혀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총재정 규모가 확대, 유지, 축소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반드시 제시돼야 한다.
올해 대선에서는 예전과 달리 총재정 규모에 대한 후보자들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전망이다. 후보들은 공약에 총재정 규모를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후보자에게 표를 던지는 순간 유권자는 세금 청구서에 동의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