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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 아내·두딸 살해한 30대 사형선고 재심리 요구

    대법원 형사2부(주심 鄭貴鎬대법관)는 17일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김모(37·무직)피고인에 대한 상고심에서 “범행수법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성급했다”며 원심을 파기,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피고인이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온순하게 대해왔고 범행을 미리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면서 “범행의 참혹함과 반인륜성에 치우친 나머지 양형자료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는 상태에서 사형이 선고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학자에게 전문적인 정신감정을 받게 하는 등 깊이 있는 심리를 하라”고 주문했다. 김 피고인은 지난해 3월 부부간의 성생활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세살배기 딸을 세탁기에 넣어 익사시키고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살해한 뒤 갓 태어난 둘째딸마저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임병선기자
  • 천주교 2000년 대희년맞이 세미나

    신부와 승려,목사 등 성직자들과 학자,법조인 등이 한자리에 모여 “인간존엄성을 위해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서울 광진구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석희) 주최의‘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2000년 대희년(大禧年)맞이 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첫번째 주제발표에 나선 한인섭 서울대 법학부 교수는 각종 사례와 범죄발생률 통계를 들어 사형 존치론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사형의 오판가능성,사건에 대한 법적 평가의 시기별 차이,사형 집행자의 인권침해 등을 감안할때 사형제도를 즉각적으로 폐지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아직은 사형폐지론이 대세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형제도의 전면 폐지 이전에라도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때까지 단계적으로 사형선고와 집행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법률상 사형규정을 고의살인을포함한 범죄에 국한할 것 ▲법원은 사형선고를 극히 신중하게 하는동시에사형을 선고하지 않음을 양형상의 기본원칙으로 삼을 것 ▲법무부장관은 사형집행에 서명하지 않고 집행을 유예함으로써 사형미집행의 관행을 쌓아갈것을 제안했다. 두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정우 신부(대구 효성가톨릭대)는 “아무리 잔인하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괴했더라도 범죄는 결코 최종적이라거나 돌이킬 수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기에 인간은 살아있는 한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신부는 “범죄자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돌아오라는 부름을 듣고있는 피조물이며 하느님만이 홀로 심판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서 “보복과복수,형벌과 처벌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통해 범죄자들에게 새롭게 시작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역설했다.토론자로 참석한 자비사 박삼중 스님,기독교인권위원회 부위원장 문장식 목사,사형제도폐지운동협의회장 이상혁 변호사,새정치국민회의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노인수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박찬운 변호사 등도 사형제도의 폐지를위해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나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박찬기자 parkchan@
  • [사설] 국민정부의 矯導행정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것은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실패지만,정부 차원에서는 교정행정의 실패”라며 교도행정의 목표가 재소자의 교화·교정을 통해 재범을 방지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했다.19일 대한매일신보사·한국방송공사·법무부가 선정한 교정대상 수상자와 교정기관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김대통령은 교정시설의 초과밀(超過密)수용 현실과 관련,2002년까지 17개교도소 시설의 확장계획과 교도행정의 민간교도소 부분 위탁 등 교도행정 현대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교도행정에 관한 김대통령의 이같이 높은 관심은 그 스스로 75년 ‘3·1구국선언사건’과 80년 전두환(全斗煥)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사건’으로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체험이 바탕이 된 듯하다.날조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된 뒤 다시 형집행정지로 출옥할 때까지 그는 국가의형벌권과 교도행정에 대해 깊은 사색과 관찰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교도행정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있다.가족과의 자유스런 면회와 전화통화,집필허용 등은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뿐만 아니라 일부 교도소에서는 모범수들의 자치제가 실시되고 있는가 하면,천안교도소에서는 모범수들이 교도관의 감시없이 자율적으로 외부 통근을 하고 있다.법무부는 지방교정청별로 1개 교도소씩 이 제도를시범 실시해본 뒤 성과가 좋으면 올 하반기부터 모든 교도소에 확대적용할계획이다.또한 다음달부터는 모범수와 장기수에게 외박을 허용하기로 했다. 재소자들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함으로써 훌륭한 사회인으로 나오게 하는 데 교도행정의 목적이 있다는 대통령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근대 행형(行刑)의 기본원리는 ‘교육형’에 있다.그러나 우리 교도행정에는 일제시대 ‘응보형’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교도행정의 기본틀이 교육형으로 바뀌자면 교도관의 의식이 인권존중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도소가 재소자들을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발전의 기회를 주려면 먼저교도관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당부도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정부의교도행정이 본래의 목적을 제대로 이룩하자면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도관들의 처우가 대폭 개선돼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이 점에 대해서도 정부의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 독자의 소리-全前대통령은 ‘죄인 신분’ 잊지말길

    전두환 전대통령은 군형법상 반란죄,형법상 내란죄와 뇌물수수죄의 죄목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대법원 판결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그후 복역중 사면조치로 석방됐지만 특별사면됐다는 사실은 형의 집행이 면제됐다는 것 이상은 아니다.또 복권됐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형 선고 효력의상실 또는 정지된 자격 회복에 불과한 것임을 그는 분명 알아야 한다. 이런 그가 특별한 전직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다.문민정부때 죄인이었던 그가 국민의 정부 밑에서는 동서화합 운운하면서 ‘주막강아지론’을 펴고 다닌다.진정 그의 과오에 대한 참회는 여론무마용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부디 바라건대 전두환씨는 엄동설한에 백담사에서 은거하던 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참회의 수양을 쌓기 바란다.그를 부추기는정치세력 또한 국민을 무참하게 학대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역사의 아픔을 다시 재발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규환 [경기 안산시 고잔동]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 기증 최병순할머니 육필수기(6)

    재심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사형수든 무기수든 가족이 찾아와 변호사에게 착수금으로 2,000원을 내고 재심 신청만 하면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전쟁통에 이루어진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알 수 있다. 나도 재심을 신청했지만 돈도 변호사도 없다 보니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공주형무소로 이감돼 1년을 살다가 형기 만기를 4년정도 남기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왔다. 나는 감옥에서도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눈썰미가 좋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척척 일을 해냈다.한번은 형무소에 스웨터를 짜는 기계가 들어왔는데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혀 사흘만에 기계를 다루자 간수장은 내게 총책임을 맡겼다.광목에 물감을 들여 옷을 만들어 간수들과 주변에 나눠주기도했다.인기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나는 손에 못이 박히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만기 2년을 남기고 비보가 날아들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왜 2년을 못 기다리시느냐”며 땅을 치고 울었다.“그 고초를 다 겪고 살아남았는데,아버지를 못뵈다니….” 얼마 안있어 작은 아버지와 삼촌이 면회를 왔다.10년이란 세월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61년 7월17일.잊을 수 없는 날이다.10년 형기를 채우고 서울 서대문 101번지 서울구치소의 붉은 담을 등지고 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이젠 살아보겠다”는 희망이 있었다.내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인사동에서 내로라 하고 살던 옛적이 아니었다.집은 어디론가 사라졌다.청량리에 있던 삼촌댁에 가보니 다섯식구가 방 한칸에서 지내고 있었다.잠시 그곳에서 기거하기로 했다.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양파장사를 했다.한 포대를 100원에 받아와 종로로 청량리로 장바닥을 돌아다녔다.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돈을 모으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식모자리라도 알아보기 위해 예전에 알던 사람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천대를 받았다.‘빨갱이’로 10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사람을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세상이 박해졌다고 한탄했다.자유를 찾았지만정말 비참했다.사기도 당했다.옛날부터 함께 바느질을 하던 친구를 찾아갔더니 같이 살자고했다.삯바느질도 하고,옷장사를 하던 작은 아버지에게서 옷감을 가져다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내 몫을 모두 가로챘다. 어렵사리 남대문의 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함께 일하는 할머니가 사장집 식모자리를 알선해 주었다.약수동에 있는 사장집에 갔더니 “곱고 얌전하게 생겼는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색을 했다.“일을 잘 할테니 써달라”고 애원했다.사장의 노모가 다른 식모를 구하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부엌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다.쌀을 고르려 키질을 했더니 사장 부인이 보고는 칭찬했다.합격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일을 시작했다.옷을 빨고,장작불로 목욕물을 데우고,설거지에 청소까지.2∼3시간쯤 눈을 붙이고 이른 새벽부터 다시 장작불로 물을 끓이고,초·중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가정교사의 도시락 다섯개를 쌌다.아이들과는 별도로 주인 내외와 시어머니의 밥상을 따로 차려냈다. 일을 시작한 8월18일은 내 생일이었다.
  • [굄돌]-생체적 관점에서 본 우리 사회구조

    정치권에 ‘젊은 피 수혈’과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다.다음달 초에 행해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소위 386세대의 대표격인 젊은 인물을 후보로 발탁하면서 ‘젊은 피 수혈’ 문제가 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요즈음 적십자사 헌혈차량을 찾는 사람보다는 정치권에 줄선 젊은이들의 ‘헌혈행렬’이 더 길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린다.하지만 내가 지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이런 현상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연령과 능력의 함수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이다.이를테면 생체적 시각에서 본 우리사회의 병리구조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의 인력 구조를 보면 마치 팽이 모양을 연상시킨다.국회의원들의 연령을 보면 60대에서부터 50대,40대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30대와 20대로 내려오면 가뭄에 콩 나듯 몇 명 되지 않는다.이를테면 하체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을텐데,우리 국회가 민생문제는 제쳐두고 파벌싸움으로 날을 새며 허구한 날 헛도는(空轉) 것도 이렇듯 고령화하고 보수화한 팽이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제대로 활동하는 듬직한 국회가 되려면그 연령구조가 팽이 모양이 아니라 항아리 모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년퇴직 문제에도 ‘항아리 모양’ 논리를 제안하고 싶다.요즈음 정년퇴직 문제로 초·중등 교원들과 공무원 사회가 동요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칼로 무우 자르듯 일정한 연령에서 강제로 잘라버리는 정년퇴직제도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물론 퇴직금 누증이나 인력수급 정체 등 또다른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겠으나,한참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한평생 공들여 닦아온 자신의 일터로부터 갑자기 축출당한다는 것은 노동의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사형선고일 수 있다.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역시 항아리형 인력고용의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항아리형 인력고용은 사람의 생체적·사회적 활동능력의 정점을 50세쯤에두고,그 연령이 넘으면 위계(位階)는 존중하되 급여는 줄여나가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70세 노인의 업무능력과 그가 받는 대우는 20대 젊은이의 그것과 동등하게 된다.나는 이것이 생체적 관점에서의 전인적 능력개발일 뿐 아니라,공동체적 사회건강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임진택[연극 연출가]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 [오늘의 눈]오풍연/제명당한 ‘소신파’ 의원

    국회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으로 불린다.개인이면서도 법률안을 발의하고,심의·표결의 전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의회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의원 각자에게 부여된 ‘권한’과 ‘기능’도 ‘당론’이라는 거대한 복병(伏兵)을 만나면 번번이 무릎을 꿇고 만다.정치적 소신 또한 ‘당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여도 그렇고,야도 그렇다.‘소신파’는 거의 매번 이단자(異端者)로 취급당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이수인(李壽仁·전국구)의원의 제명처분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이의원은 지난주 당론을 어기고 노사정위법안을 다룬 국회 환경노동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3일 당기위원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다.노사문제가 심각히 우려되는 상황에서 평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정치적으로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제명이라는 중형(重刑)을 선고받은 것이다. 여기에 이의원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秋毫)도 없다.당인이 ‘당론’을 어겼을 경우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다.또 그에 따른 책임을지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다중(多衆)의 힘을 내세워 소수인 당사자의 말은 도외시 한 채 일방적으로 매도(罵倒)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한나라당 주요 당직자를 비롯한 대다수 동료의원들은 차마 ‘공인’으로서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말들을 무수히 쏟아냈다.심지어 어제까지한솥밥을 먹던 식구를 ‘탕아(蕩兒)’,‘잡조(雜鳥)’라는 극단적인 언사로몰아붙였다.당을 팔아넘기려 한 불충이라도 저지른 듯한 공격이었다. 이의원은 정치권의 흉물스런 행태에 염증을 느낀 듯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작전을 폈다.한나라당이 취한 ‘제명’이라는 징계조치를 ‘영광의 훈장’으로 받아들였다.그러면서 “당원 자격보다는 국회의원의 자격이 앞서고,당과 국회의원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이 앞선다”고 강조했다.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설파하면서 정치권 모두에게 고언(苦言)을 던진 셈이다. 비록 당의 뜻에 어긋나는 ‘소신’을 편 의원이라도 너그럽게 포용하는 정치권의 유연성을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poongynn@
  • [金三雄칼럼] 이땅 어머니들에 헌사

    인간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대상 가운데 한가지만 고른다면 무엇일까. 자유·평등·박애·정의·진리·평화·인권·행복·종교·조국…? 모두 좋은언어이고 문자다.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이고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어머니’란 말(문자)만큼 인간의 원초적이고 불변의사랑과 가치는 다시 없을 것이다.“인간의 출생에 있어서 지리적 장소가 고향이라면 생명적 정신적 고향은 어머니의 뱃속·젖가슴·그 품이라 할 수 있다.이곳은 모든 이의 영원한 고향일 뿐만 아니라 안식처요,낙원이다.”(김진섭·母頌論) 가정의 달 5월에 이 땅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고난의 역사와 함께 여성이란 이유로 겹고통을 겪으며 이 핏줄,이 겨레를 지켜온 어머니들이다.국난에처할 때마다 여성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고려시대에는 원(元)나라의 침략으로 ‘사위국’이 되어 2,000여명의 여성이 공녀(貢女)로 끌려가고,조선시대에는 청(淸)나라에 굴복하면서 수천명 여성이 잡혀가고 귀환해서는 ‘화냥년’ 소리를 들어야 했다.일제시대 일본군강제위안부로 끌려가 성노리개가 된 우리 여성은 무릇 기하뇨. 보리도 익어야 거두지 어두운 밤에 처녀를 찾으니 나비도 잘 보는데 봉오리 앉기도 전에 나무가지 꺾네. 고려시대 몽고군이 어린 소녀들까지 공녀로 끌어간 데 대한 민요의 하나다. 조선조와 일제시대에도 비슷한 민요가 회자됐다.시대마다 굽이마다 이 땅의여성들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궈 오늘에 이르렀다.지금은 또 IMF 환란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이,어머니들이고통을 겪고 있는가. 빈말이 아니다.단군의 어머니 웅녀,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가락국 시조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 등 개국시조에서부터 여성(어머니)은 이 땅을 열고 지키는 모태가 됐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수의(壽衣)를 만들며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는 없기로 하자.네가 혹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훈계’했다. 치하포에서 일본 중위 쓰치타를 죽이고 15년형을 선고받은 아들 김구를 서대문감옥으로 면회 간 곽낙원 여사는 “이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아들을 격려하며 옥바라지를 했다.어찌‘그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가벼운 한마디로 그치랴.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졌다.독립국가·민주화가 되면서 여권도 크게 신장됐다.가족법 개정으로 재산분할권이 인정되고 ‘성희롱’이 범죄로 다스려진다. 남편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나 종속적 위치가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적·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현격하다.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나 하며 사는 전통적 어머니가 아닌 직업인·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IMF시대를 맞아 많은 어머니들이 모성을 포기하는 극단의 행태를 보인다.가난을 견디지 못해서,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가정을 포기하거나 이혼과 가출이 급증한다.어린 자식,병든 남편을 버린 여성이 많으며 환락에 빠져 가정을 파탄시킨 어머니들도 적지 않다.‘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맞사모)이 구성될 만큼 여권이 신장된 반면 성적타락·가정해체·모성상실이라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비극’적 현상이 급증하고 있다.물론 아직도 수많은 여성·어머니들이 남성들의 권위주의,폭력·생활고와 낡은 인습,범죄와 유혹에 시달린다.‘빗나간 자식사랑’‘일류병’‘과보호’ 현상도 뒤따른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라도 모성만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한다.양처는 아니라도현모의 전통을 이으면서 ‘원초적이고 불변의 가치’인 영원한 고향 ‘어머니’라는 언어와 그 존재의 자리만은 지켰으면 한다.겹고통 속에서도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가정의 달에 드리는 헌사다.
  • 오늘 尹奉吉의사 의거 67주년…유해봉환사진등 첫공개

    오늘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67주년.윤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白川) 일본군 대장 일행을 폭살시키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5월 25일 상하이 주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일본으로 호송돼 그 해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인근 공병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윤의사의 유해는 인근 쓰레기매립장에 가매장됐다가 해방 이듬해 5월 초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씨 등 재일교포들에 의해 발굴,봉환됐다. 다음 사진들은 윤의사 의거 67주년을 맞아 백범 차남 김신(金信) 전 교통부장관의 개인소장 사진첩에서 단독입수,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검찰-피고인 ‘4세 증언’ 항소

    서울지검 공판부(鄭振昊부장검사)는 21일 이웃집 주부를 살해한 뒤 강도사건으로 꾸민 이모(35)씨에 대해 법원이 사건 당시 현장을 본 피살자의 여섯살짜리 딸 김모(사건 때 4세)양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항소키로 했다. 검찰은 “이피고인이 흉악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아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항소이유를 설명했다.이피고인은“네살짜리의 증언을 증거로 인정한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박홍기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6)혁신계의 浮沈/4·19이전의 상황

    4월혁명후 새 세상이 열렸다고 믿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혁신계다.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 동안 철저히 탄압받은 혁신계 인사들은 ‘4월혁명이 완수해야 할 과업이야말로 혁신세력이 책임진 역사적 과업의 주요한 일부’라고 판단했다.그리고 4월혁명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에 그들의 활동무대도포함된다고 확신했다. 이 무렵 혁신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혁신계’로 규정된 제(諸)정치세력의 노선·뿌리가 다양한데다,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정당으로서 맥을이어온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조봉암(曺奉岩)이라는,카리스마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잃은 점도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4월혁명 후 혁신정당 창당은 명망가들의 이합집산에 좌우됐다.첫 단계로 이들은 4월30일 부산에 모여 ‘한국혁신세력집결촉진회’를 구성한다. 이어 통합신당인 ‘사회대중당’을 결성키로 하고 5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갖춘다.민주혁신당의 서상일(徐相日)이 대표를 맡고 진보당계의 김달호(金達鎬) 윤길중(尹吉重)과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張建相) 이동화(李東華) 정화암(鄭華岩) 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통합을 주장하던 혁신세력은 곧 핵분열을 한다.사회대중당이 창당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을 만들어 갈라서는가 하면 전진한(錢鎭漢) 김철(金哲)의 한국사회당,고정훈(高貞勳)의 사회혁신당 등 군소 혁신계 정당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같은 분열이 이념이나 정강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장건상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혁신계가 통일되지 못하고 분산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파벌에 의한 것”이었다. 4월혁명을 맞아 혁신계가 창당을 서두른 까닭은 그해 7월29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해 제도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그런데도혁신계는 통합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된 채 후보를 내는 바람에 후보자가 233개 선거구에서 156명에 달했다.혁신정당 후보가 2명 이상 출마해 서로 다툰선거구도 24곳에 이르렀다. 혁신정당에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참여한 점도 각 당이 나름대로 자신을 가진 요인이 됐다.예컨대 사회대중당은 창당준비 단계인데도 대구 5개 선거구모두에 ‘반(反)이승만독재 투쟁’으로 유명한 인사들을 공천했다. 제헌의원을 지낸 혁신계의 대표주자 서상일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혁신계 원로인 이동화,대구매일신문사 주필 최석채(崔錫采),월간 ‘사상계’ 편집위원 출신인 양호민(梁好民),훗날 국회의장을 지내는 김수한(金守漢) 등이 그들이다.부산에서도 역시 독립운동가에 혁신계 원로인 장건상이 혁신동지총연맹 공천으로 출마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사회대중당 공천자 121명 중에서 서상일·윤길중(강원도 원성)·박권희(朴權熙,경남 밀양)·박환생(朴煥生,전북 남원) 등 4명이,한국사회당 공천자 18명 가운데 김성숙(金成淑,남제주)만이 원내에 진출했다.이 5명을 제외한 나머지 혁신계 후보는 전멸한다. 함께 치른 참의원 선거에도 58명이 나서 사회대중당의 이훈구(李勳求,충남)와 혁신동지회의 정상구(鄭相九,경남) 2명만 당선됐다. 혁신계는 이처럼 선거에서 참패한 까닭을 ▲유권자들이 아직도 금력·권력에 영향받는 상태였고(申相楚 주장) ▲혁신계를 공산주의자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반면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는 저서에서 “국민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독재적인 지배를 거부한 것이지 반공·보수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지도부 거의 전원이 원내 진출에 실패함에 따라 혁신계는 원외 세력으로 남아 장외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그 와중에서 혁신계는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과 다름없는 주도권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먼저 혁신정당 통합을 목표로 창당을 준비하던 사회대중당은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진보당계만으로 축소 형성됐다.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방조직을 선점(先占)하는 데 성공한 진보당계는 사회대중당 창당을 진보당의 재건으로 여겼다. 이에 반발해 서상일·윤길중·이동화·정화암 등 비(非)진보당계는 김성숙·고정훈과 손잡고 통일사회당을 형성한다.사회대중당은 60년 11월24일,통일사회당은 61년 1월20일 정식 출범한다. 사회대중당과 통일사회당은 혁신정당의 두 기둥으로 떠오르지만 그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다.사회대중당이 급진적인 반면 통일사회당은 온건한 서구의민주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사회대중당은 61년 들어 일선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을 만든 뒤 통일과 한·미관계를 이슈로 대대적인 실력행사를 벌인다.‘민자통’의 통일론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며 북한과의 무조건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이에 견줘 통일사회당은 민자통의 경쟁세력인 ‘중립화통일연맹(中立統聯)’을 지지했다.중립통련은 남북한 전역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해 통일을 이루고,통일된 한국에는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장면(張勉)정부가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는 61년 3월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연다. 오후 2시에 시작된 시위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난동으로 변했고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서울시가를 누볐다. 횃불시위는 제2공화국 최후의 대규모 시위였다.장면 정부는 곧바로 김달호·고정훈 등 주요 혁신계인사들을 체포한다. 장면 정부하에서 혁신계는 국회 진출에 실패해 장외 세력으로 남게 된다.그들은 급진적인 학생들과 일부 소외계층의 지원을 받아 거리투쟁에 나서지만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16쿠데타를 맞아 다시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 - 4·19이전의 상황-曺奉岩 중심 진보당 두각 대한민국 출범후 국내 정치무대에서 ‘혁신계’는 항상 소수파 또는 이단이었다.남북에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서 ‘6·25전쟁’까지 치른 뒤 이 땅에는‘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우익 정당 아니고는 발붙이기 힘든 것이현실이었다.따라서 이에 속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조합주의를 따르는 노동운동가 들을 구분짓지 않고 통틀어 혁신계라고 불렀다. 4월혁명 이전 혁신계를 대표한 지도자는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다.조선공산당 창당멤버인 조봉암은 1946년 박헌영(朴憲永)을 비판한 서신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신문에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다. 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며 이승만(李承晩)정권에는초대 농림장관으로 참여한다.이어 2대 국회에서 부의장이 된 조봉암은 52년대통령선거에 진보적인 강령을 내걸고 출마해 79만표를 얻는다.비록 이승만의 523만표에는 크게 못미쳤지만 그로서는 정치적 입지를 굳힌 계기가 됐다. 55년 통합야당(민주당) 결성 움직임이 일자 조봉암은 참여를 강력하게 희망하지만 신익희(申翼熙) 장면(張勉) 등으로부터 거부당한다.이에 서상일(徐相日)계와 합쳐 혁신정당인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55년 12월22일의 창당준비위원회에는 조봉암·서상일 말고도 이동화(李東華) 박기출(朴己出) 윤길중(尹吉重) 등이 동참한다. 진보당은 창당에 앞선 56년 3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선출한다.이들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장면과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이지만 두차례 만에 결렬된다.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는 조건으로 ▲부통령 후보를 진보당에 양보하고 ▲집권시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진보당 강령 일부를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56년 3대 대통령선거는 신익희가 급서한 가운데 이승만과 조봉암의 싸움으로 진행됐다.결과는 이승만 504만표,조봉암 216만표로 나타났다.이후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게 실재(實在)하는 위협이 된다. 한편 정·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서상일계가 진보당에서 이탈한다.노선상의차이보다는 대통령후보 선출 당시의 주도권싸움 탓이었다.서상일이 후보로추대받기를 원한 반면 조봉암은 투표로 뽑을 것을 주장했고 선출 결과 부통령후보로 지명된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이 대신 후보가 된 것이었다. 진보당은 56년 11월10일 창당대회를 열어 조봉암을 위원장으로,박기출 김달호(金達鎬)를 부위원장으로,윤길중을 간사장으로 각각 선출했다.정치강령으로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특히 ‘공산독재를 배격한다’고 강조했다.서상일계도 57년 10월15일 민주혁신당을 창당해 독립한다.58년 5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그해 1월13일경찰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등의혐의로 검거했다. 아울러 자유당 정권은 2월25일 진보당을 등록취소한다.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북한 지령에 호응해 진보당을 결성하고 10여차례 자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이었다.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한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진보당과 비슷한 정강정책을 내건 서상일계의 민주혁신당이 어떤 규제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보당 사건’의 성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조봉암의 죽음으로 혁신계는 치명타를 입어 4월혁명까지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3)분출하는 욕구(上) /사형수 편지

    ‘혁명은 독한 술과 같다’던가. 4월혁명 후 한국사회는 용광로처럼 들끓었다.李承晩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시민은 제각각 품고 있던 기대와 욕구를 마음껏 뿜어냈다.남자나 여자,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시위에 나서 목청을 높였다.그것은 어쩌면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자의 권리행사였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고들 말한 張勉정부 8개월여.그때일어난 데모 중에는 지금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례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 반대’를 내세워,또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 하라’고 요구하며 각각 데모하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의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벌였다.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논산훈련소에서는정훈부 사병들이 “宋모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기의 데모가 모두 무절제하고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많은 부분은 자유당 독재정권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6·25 때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대표적인 예다. 1960년 5월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주민 70여명이 朴모씨를 불태워죽이는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다.51년 이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있었는데 당시 면장이던 朴씨가 주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유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사건발생 후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곳곳에서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달라는 요구가빗발쳤고 이에 따라 국회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직접 조사에 나섰다.그결과 신원면에서는 51년 봄 3개 부락 주민 600여명이 빨갱이로 몰려 金宗元이 지휘하는 화랑부대에게 학살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국회조사반이 파악한 6·25 당시의 양민 피살자는 경남 2,892명,경북2,200명,전남 524명,전북 1,028명,제주 1,878명 등이었다. 張勉정부 하에서의 가장 충격적인 시위사태는 60년 10월11일 발생했다.‘4월혁명유족회’회원을 비롯한 시민·학생 수천명이 민의원에 난입한 것이다. 그 원인은 4·19 때의 발포자,3·15 부정선거 관련자,정치깡패 등 4월혁명을 불러 일으킨 범죄자들에 대한 법원 판결이 너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는 피고인들에게 1심 형량을 선고했다.발포건과관련해서는 柳忠烈 당시 서울시경국장에게만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언도했을 뿐 역시 사형이 구형된 洪璡基내무장관에게는 징역 9월이,郭永周 대통령경호관에게는 징역 3년이 각각 떨어졌다.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무죄 또는 징역 8월∼5년이 언도됐다. 민심은 크게 격앙했다.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재판부를 규탄하는 데모가 잇따르다가 급기야는 10월11일 내각책임제 권력의심장부인 민의원을 강타한 것이다. 국회 난입에는 환자복에 목발을 짚은 4·19 부상자 50여명이 앞장섰다.이들은 본회의장으로 몰려가 의사진행을 중단시켰다.그들은 “하루빨리 혁명입법을 완성하라”고 요구했으며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신·구파가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고 강요했다.이에 구파의 金度演과 신파의 林文碩,구파의 徐範錫과 신파의 李哲承이 억지로 악수를 나누는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郭尙勳 민의원의장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부상학생의 위세가 당당하여 마치 부상학생들의 천하와 같은 감이들었고 아무도 감히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정권을 우리가 주었는데’하는 생각은 ‘부상학생 천하제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국회에 경호권을발동하여 한번 크게 호령을 해줄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그들의 항의방법이너무도 졸렬하여 그만 자신을 잃어버렸다”거듭되는 데모로 사회는 불안정하고 정부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진 듯한 이같은 상태,훗날 ‘무능하다’는 비판의 근거로 제시된 이 상황을 張勉정부는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을까. 張勉의 뜻은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번 주어보자”는 데 있었다(회고록에서 인용).그는 “오랫동안 자유당정권 하에서 억눌렸던 국민이 자유가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쩔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작용했음도 물론이다.張勉은 “귀와 입으로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는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었다.결국 張勉은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혐오를 느낄 때 비로소 진실한 자유를 얻는다”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었다. 張총리 의전비서관을 지낸 李泓烈(77)은 4·19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한사건 직후 비서관들이 “비상대책기구를 구성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건의했다고 기억했다.자신을 비롯해 宋元英공보비서관,정보담당인 해군尹대령 등이 시국을 걱정하다 張총리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별도기구를 직속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에 자신이 비서진을 대표해 말했더니 張총리가 “泓烈군,무슨 소리야.민주적인 행정을 하자고 투쟁을 해서 총리가 된 것 아닌가.비상수단을 꼭 써야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라고 안색을 바꾸며 꾸짖더라는 것. 張勉과 그의 정부가 믿은 것은 시간이었다.세월이 지나 혁명의 흥분이 가라앉으면국민은 무절제한 자유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깨닫겠지,그리고그 자각(自覺)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필 것이라고 기대했다.실제로 1961년에 접어들자 데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5·16의 총성이 울려퍼지기전까지 張勉정부의 교과서적인 민주주의는 꽃망울을 맺어가고 있었다. - 張勉 저격 共謀 사형수 편지 첫 공개 張勉의 인품과 인간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편지 2통이 8일 공개됐다.그의맏아들인 張震 서강대 명예교수 부부가 최근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 편지들은 한때 그의 목숨을 노린 崔勳이 1965∼66년에 걸쳐 보낸 것이다. 崔勳은 1956년 9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벌어진 ‘張勉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3명 가운데 하나이다.현장에서 張勉에게 직접 권총을 쏜 金相鵬과,金에게 권총을 마련해준 李德信(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 사이를 연결해준 것이 崔勳이었다. 65년 7월27일자 소인이 찍힌 첫 편지에서 崔는 張勉에의 존경심과 고마움을 절절히 토해냈다.그는 “진작 편지를 올릴 마음 간절하였으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박사님의 쓰라린 상처를 위로해드리는 일일 것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은혜를 못잊어 조석으로 박사님을위해 기원하는 한 생명이 이 땅 지붕 아래 살고 있다는 점만은 알려드리고싶었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張勉총리가 60년 10월1일 감형을 해줘 사형을 면한 일,그해 12월에는 직접 교도소를 방문해 털내의를 건네준 덕에 따뜻하게 겨울을 난 일들을 기억했다. 崔는 “박사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상을 시범하신 사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 “박사님이 ‘그대의 죄를 전부 사해주노라’라는 말씀을 친히 들려주실 날이 오기를 간망(懇望)한다”고 기원했다. 張勉은 崔勳에게 바로 답장해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여러차례 오갔고,그 편지에서 張勉은 가톨릭에 귀의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남아 있는 두번째 편지(66년 1월9일자 소인)에 이를 알려주는 구절들이 나온다. 새해인사를 겸해보낸 이 서신에서 崔勳은 “박사님의 편지를 받은 후 반년 이상이나 신중히 생각한 결과로 근방의 주임신부님을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가톨릭에 입문할 결심임을 알렸다.이어 “영세를 받기까지는 자주 편지를 올리지 못하더라도 오해 마시기 바라며 그러는 것이 박사님의 심경에 위로를 드리는 것이라는 졸렬한 생각에서”라고 밝혔다. 張勉과 崔勳 사이에 오간 편지는 이 두 통밖에 남아 있지 않다.둘 다 우편봉함엽서이며,‘대구시 삼덕동 82의 1’에 사는 崔勳이 서울 명륜동 張勉의자택으로 보낸 것이다. 崔勳이 편지를 보낸 시점은 張勉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당한 지 4년이 지난 때였다.張勉이 정계에서 완전 은퇴해 자택에서 가톨릭 서적을 번역하는 데 몰두한 시절이다.따라서 崔勳의 편지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존경심과 그리움을 담고 있을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국무총리로서 국정의 최고책임을 맡았던 정치가,한때 그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던 사형수.역사의 현장에서 벗어나 둘만이 나눈 대화는 張勉을 가까이서‘모신’ 어느 누구의 증언보다도 張勉의 인간적인 면모를 진솔하게 들려준다.그 귀한 ‘증언’이 가족도 모르게 30여년을 숨어지내다 올해 ‘張勉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張勉에게 총을 쏜 金相鵬은 복역을 마치고 나와 목사가 되었다.金목사는 지난 87년 張勉의 셋째아들인 張益주교(춘천교구장)를 만나 ‘위대한 인격자 張勉’을 함께 회고했다. 李容遠
  • 우용각씨 북송 인도적 차원서 해결을/2.25 특별사면 이모저모

    25일 오전 10시 형집행정지 등으로 사면돼 교도소를 나온 禹用珏씨(71) 등미전향 장기수 17명의 표정은 비교적 밝고 건강해 보였다. ▒41년동안 복역한 禹씨는 검정색 바지와 점퍼차림에 뿔테안경을 쓰고 대전교도소를 나왔다.교도소 정문에는 오전 8시쯤부터 민가협 회원과 대학생 100여명이 나와 禹씨 등의 출소를 반겼다. 禹씨는 감정이 벅차오른 듯 눈물을 비치기도 했으며 “북송문제는 개인적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이어 “변화한 사회환경에 적응해나가며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며 생활하고 싶다.미력하나마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78년 재일 조총련 간첩단사건으로 21년동안 복역한 趙相綠씨(53)도경북 안동교도소를 나와 가족의 품에 안겼다.趙씨는 남파간첩 이외의 최장기 복역수였다.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의 姜용주씨(37)의 어머니(74)는 “준법서약서를 거부하는 아들을 말릴 수 없어 늘 가슴을 졸인 채 지켜만 봤다”며 눈시울을붉혔다.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난 高永復 전 서울대교수(71)는 “독방의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기쁘다.건강이 허락하는 한 학계에 끼친 피해를 회복하는데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입소 7개월만에 공주치료감호소를 나온 朴正熙 전 대통령의 아들 志晩씨(41)는 당초 예정시간보다 2시간 빠른 오전 8시 치료감호소를 퇴원했다.李世宗감호소장(55)은 퇴원전 志晩씨가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志晩씨는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는 삼양산업 직원이 몰고 온 회색 BMW 승용차를 타고 감호소를 빠져나갔다. 志晩씨의 누나인 朴槿惠 한나라당 부총재(47)는 24일 오후 4시30분쯤 志晩씨를 30분동안 면회했다고 감호소 관계자가 전했다. ▒대전교소소 출소자 중에는 92년 3월 경기도 성남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용의자로 체포돼 93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파키스탄인 무하마드 아자르씨(38)와 아미르 자밀씨(31)가 포함됐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끈질긴 석방 노력으로 특사에 포함된 아자르씨와 자밀씨는 출소 직후 金壽煥 추기경과 金大中 대통령을 연호하며 사면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마중나온 천주교인권위 吳昌翼사무국장(34)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따로 있다고 판단한 인권위는 두 사람의 석방 탄원을 계속,오늘과 같은 기적을 이뤘다”며 “이들은 오늘 저녁 8시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오잘란 신병처리 딜레마…터키, 어떻게 할까

    터키 마르마라해의 임랄리 교도소에 구금된 쿠르드 반군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신병처리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오잘란의 죄명은 반역 및 살인죄.쿠르드족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반역을꾀하고 이 과정에서 14년간 3만5,000명 이상의 터키인들이 희생됐다는 게 터키의 주장이다.법정에서 테러혐의가 확정되면 사형을 받을수 있다. 따라서 오잘란이 사형판결을 받을 것이 확실하지만 집행될 공산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터키정부가 사형집행 가능성을배제하고 있는 데다 국제사회의 여론도 공정한 재판을 거쳐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뷜렌트 에제비트 터키총리는 17일 터키가 지난 15년간 단 1건의 사형도 집행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특히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1,200만명의 쿠르드족의 저항을 무릅쓰고 처형하기는 쉽지 않은 점도 작용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여론도 극형을 피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오잘란이 공정한 대우와 적법한 절차를 받아야 한다”고밝혔다.유럽연합(EU) 등도 오잘란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옵서버들이 재판을 참관하도록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극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다.터키는 오잘란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고 사법처리 절차를 감시토록 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일축했다.에제비트 터키총리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자신하고 예언할수 없다”며 복선을 깔았다.‘뜨거운 감자’ 오잘란을 둘러싸고 터키와 국제사회가 한바탕 힘겨루기기 이뤄질 전망이다. 金奎煥 khkim@
  • 민주개혁 국민연합 羅炳湜상임집행위원장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누구나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개혁을 추진해나갈 주체세력이 없습니다.이제는 개혁세력을 총 결집,대대적인 국민운동을펼쳐나가야 할 때입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민주개혁 국민연합 羅炳湜 상임집행위원장(49)은 15일사회·시민단체들이 정부에 개혁을 촉구하거나 비판하는데 머무를게 아니라개혁의 주체세력으로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羅위원장은 “국민의 정부조차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사회는 가치관의 공황사태를 불러 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보수세력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거세지기 전에 가시적인 개혁 성과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개혁 국민연합은 개혁추진의 첫 행동으로 최근 경제청문회 감시단을 발족했다.경제난국을 초래한 IMF 주범을 분명히 밝히고 책임을 묻기 위해 10여명에 이르는 감시단을 조직,청문회에 대비하고 있다. 또 실업문제 극복을 위해 해외취업을 알선하고,해외취업박람회를 개최키로하는 등 8개 부문조직과 16개 지역조직별로 세부활동계획도 세워 놓았다. 羅위원장은 “현재 활동중인 사회·시민단체가 1만여개에 이르는데도 이해관계에 얽혀 대동단결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파와 조직의이해관계를 넘어 80년대에 보였던 민중의 힘을 회복하자”고 제안했다. 민주개혁 국민연합은 과거 민주화 운동세력을 결집,민족민주운동의 전통을계승하면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국민운동을 전개해 나가려는 국민운동단체이다. 羅위원장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뒤 유신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74년민청학련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등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왔다.79년부터 풀빛출판사를 꾸려 나가면서 민주대개혁국민위원회 정치연합 등에 참여했다.李鍾洛 jrlee@
  • 민족일보 조용수(金三雄 칼럼)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다이모니온을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 타락케 한 혐의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독배를 들기에 앞서 최후진술에서 “클리톤이여,아스크레피오스 신에게 닭 한마리 빚진 것을 갚아다오”라는 유언을 남긴채 권력의 제물로 사라졌다. 2,000여년이 지난후 한 청년이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이며 민족일보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데 썼는데,갚아주지 못하고 가게돼 미안하다”는,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의 유언이 그것이다. 1961년 12월2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조용수는 32세의 짧은 생애를 접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억울함’과 친구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한 ‘미안함’을 유언으로 남겼다. 건국 이래 수 많은 언론인이 정치적 수난을 겪었지만 순수한 언론활동을 이유로 극형을 당한 사람은 조용수 사장이 처음이다. ○박정권의 이념적 희생양 친일언론인 출신으로 해방후 평화일보·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정국은은 재일 조총련계의 국제공산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54년 2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월간 ‘청맥’과 관련한 김질락의 경우 간첩혐의로 박정희정권에 의해 72년 7월 처형되었다. 정국은과 김질락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첩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수 사장의 경우는 크게 다르다. 친일과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사상적 콤플렉스에서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고 마침내 유망한 젊은 언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조사장은 61년 2월 4월혁명 공간에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고,부정부패를 고발하며,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한다는 사시 아래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진보세력을 대변하다가 5·16 쿠데타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확인절차로 형이 집행되었다. 군사정부는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언론인을 처형하는 잔인성을 보였다.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나왔다는 혐의와 북한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선동하여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조총련계 자금유입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평화통일론이 극형의 죄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가 유일한 ‘물증’으로 내세운 이영근씨는 민단계통의 인물이었으며,노태우정부는 1990년 그가 일본에서 사망하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이유로 국민훈장을 추서하여 간첩이 아님이 입증됐다. 또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역대 정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더러는 정부가 훈장을 줌으로써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사장의 37주기에 즈음하여 지난 20일 낮 남한산성에 있는 묘소에서 추도식과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 발족식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검찰이 자료공개를 거부해온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국회에서 특별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기념사업을 통해 평화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뜻이 모아졌다.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당시 검찰,재판관 등 생존자들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계도 건국 이래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한 언론지도자의 억울함을 밝히고 신원(伸寃)하는데 뜻을 모았으면 한다.
  • 金 대통령 傳記 美서 출간

    ◎학생용 위인전 시리즈… 112쪽 1만부 초쇄 金大中 대통령의 전기가 미국내 초·중·고교에서 위인전 시리즈로 읽히는 영문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지난 66년 설립된 미 뉴욕의 대형출판사인 첼시아 하우스가 이달초 ‘세계의 지도자,과거와 현재’라는 제하의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112쪽 분량의 金대통령 전기를 1만부 출간했다고 청와대 공보수석실이 20일 밝혔다.이 전기는 현재 AP통신 기자로 활동중인 럼 골드스타인씨가 집필했으며,내년 1월부터 출판사 자체 보급망을 통해 미국내 학교와 도서관에 보급될 예정이다. 전기에는 50년만에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당선된 金대통령을 경제난국과 남북관계를 해결해 나가는 유능한 지도자로 소개하면서 30여장의 사진도 함께 실었다.일대기는 유년기와 학창시절에서부터 정치입문 및 민주화 투쟁과정,투옥·망명생활,도쿄 납치사건과 사형선고,미국의 구명운동,정계은퇴 및 복귀,대통령 당선,성공적인 미국방문 등의 순으로 구성됐다.
  • 美,64년만에 사형수 탈옥/20代 총탄 세례 피해 담장 넘어

    【오스틴 AFP 연합】 미국에서 64년 만에 처음으로 사형수 탈옥사건이 발생했다.탈옥자는 지난 92년 서해안 코퍼스크리스티시에서 레스토랑 주인 등 두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이던 마틴 거룰(29).휴스턴 북서쪽 130㎞ 지점의 헌츠빌 교도소의 철저한 보안시스템을 따돌리고 달아난 것은 지난 26일 자정쯤. 거룰은 동료 죄수 6명과 함께 취침점호를 마친 뒤 담요와 종이로 만든 큰 인형을 자기 침대에 뉘워놓고 레크리에이션 방으로 숨어 들었다. 이어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 담장을 통해 탈출했다.이 과정에서 동료 죄수 6명은 붙잡혔으나 거룰은 총탄세례를 피해 담장 2개를 넘은 뒤 소나무 숲으로 사라졌다. 이 사건은 지난 34년 ‘보니­클라이드’갱단이 사형선고를 받은 조직원 3명을 탈옥시킨 뒤 처음.당시 탈옥수 1명은 5개월 후 경찰과 총격전 중에 사망했으며 나머지 2명도 체포돼 전기의자에서 처형됐다.관계당국은 헬기와 보트,적외선 열탐지기를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고 있지만 거룰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다.
  • 全斗煥 前 대통령 목포 보현정사 법회 안팎

    ◎영·호남신도 4,500명 ‘국난극복’ 합장/金 대통령 “불교계 동서화합 앞장 감사” 메시지/全 前 대통령 “효율적 환란수습” DJ치적 역설 29일 全斗煥 전 대통령의 목포 보현정사(普賢精寺) 국난극복 법회 참석은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현 정부로서 상징적인 ‘정치·사회적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 사람들은 ‘5·18내란’ 혐의를 씌워 金대통령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전직대통령을 용서와 화해로써 맞았다.영·호남지역 신도들은 열린 마음으로 ‘국난극복’을 주제로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동서화합(東西和合)의 물꼬를 텄다. ▲金대통령은 韓和甲 국민회의총무가 대독한 ‘민족대화합 기원메시지’에서 “속초에서 목포에 이르기까지 8차례에 걸친 대법회는 국민적 역량을 재결집하고 국민화합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서 “국민대화합을 이룸으로써 21세기를 향한 새 도약과 민족통일을 앞당길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불교계가 앞장서서 부처님의 원력으로 국가 과제인동서화합의 물꼬를 열어준 데 감사한다”고 불교계를 치켜세웠다. ▲全전대통령은 오후 1시 張世東 전 안기부장 등과 함께 보현정사에 도착했다. 全전대통령은 오찬을 전후해 동교동계인 韓和甲·金玉斗,민주계 徐錫宰 의원 등과 날씨,법회 등을 화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소감을 묻자 “반갑고 기분이 좋다. 국난극복 법회에 오니 더욱 의의가 있지 않느냐”고 대답. 全전대통령은 내년 망월동 방문 여부,5·18 사과문제를 묻자 “내년 일은 내년에 가봐야 알 것”이라면서 정치적 발언을 자제했다. ▲법회에서 全전대통령은 기원사를 낭독,“정부가 金大中 대통령의 지도 아래 능률적인 응급대책으로 환란을 수습했으며 이제 환율 등 여러 지표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며 金대통령의 ‘치적’을 거론했다. 全전대통령 일행이 차량편으로 목포공항과 법회장을 오가는 동안 대학생과 5·18유족으로 보이는 6∼7명으로부터 계란세례를 받았으나 맞지는 않았고 전체적으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법회에는 영남지역 신도 1,500여명과 호남지역 신도 3,000여명이 참석했다. 全전대통령측 인사로는 張世東·安賢泰·許三守·李元洪·高明昇·金振永·崔永喆·李亮雨씨 등 거의 모든 측근들이 참석. 여당 인사로는 국민회의 韓총무와 金玉斗·李榮一·權正達·徐錫宰·裵鍾茂,자민련 朴哲彦의원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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