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먼, 판사가 되다/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많은 사람들은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박빙의 대결을 벌인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고어 두 후보. 백악관의 주인은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에 따라 결정날 상황이다. 재개표 여부를 두고 여러 차례 법정절차가 이어진다. 국정 공백으로 야기될 혼란에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가운데 연방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나선다.‘더 이상 재검표를 진행하지 말라. 부시의 당선 확정이다. 고어는 승복한다. 만약 그가 승복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일은 미국에선 상상할 수 없다. 옳든 그르든 대법원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국 국민 자격이 없다. 연방대법원엔 아홉명의 종신 판사가 재직한다. 그래서 판사 한 자리의 임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요란한 것이다.‘아홉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망치기도, 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 대법원 판사의 행적에 대한 국민 관심은 지대하다.
‘블랙먼, 판사가 되다’(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기순 옮김, 청림출판 펴냄)는 1973년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Roe v.Wade) 판결의 판결문을 썼던 해리 블랙먼(1908∼1999)의 첫번째 전기이다. 흔히 ‘낙태 판사’로 알려진 블랙먼의 법조 인생과 사법철학을 조명한 저술.
●美 연방대법원 종신판사로 24년간 재직
저자는 뉴욕타임스 연방대법원 출입기자 출신으로, 지난 1988년 대법원 취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블랙먼이 소장했던 엄청난 분량의 문서에 접근했던 최초의 기자였던 그는 이같은 자료와 블랙먼의 구술을 바탕으로 블랙먼의 삶과 대법원 재임 중 일어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엮어냈다.
특히 법률 사건 뒤에 가려진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낙태, 소수민족 우대정책, 사형, 성차별 등과 같은 논쟁에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판사로서의 블랙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방대법원은 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홉명의 판사들이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다른 판사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설득한다. 특히 블랙먼이 판사석에서 보냈던 24년 동안, 그들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두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일을 거듭했다. 국방부 문서사건, 로 대(對) 웨이드 사건, 닉슨 도청테이프 사건, 바크 대 캘리포니아 대학 이사회 사건,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사건 등이 결렬한 논쟁을 거쳤다.
●보수성향에서 진보의 최전선으로
특히 대법원 판사 지명때마다 진보냐 보수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이를 가르는 한 획이 ‘낙태’와 ‘사형제도’에 대한 지명자들의 태도나 성향이다. 해리 블랙먼 또한 리처드 닉슨이 지명할 당시 미국 중서부 출신의 온건한 보수주의자라는 평이 나왔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블랙먼은 나이 예순에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보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책은 블랙먼이 닉슨 대통령에게 지명된 1970년부터 24년간 대법관을 지내면서 그가 참여한 중요한 판결의 논의과정을 블랙먼의 눈과 글을 통해 조명했다.
1973년 블랙먼이 판결문을 작성한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는 그 이전 100년간 낙태를 범죄로 간주한 미국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그래서 이 판례엔 항상 ‘그 유명한’,‘역사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다. 평생 불려온 ‘낙태판사’라는 별명도 이때 얻었다.
저자는 지명 당시 보수파로 분류됐던 블랙먼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 새로운 생각을 향해 마음을 열었고, 자연스럽게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진보주의자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로 대 웨이드´ 계기로 여성권리 위해 투쟁
이 과정에서 자신을 대법관으로 추천했던 친구 워렌 버거 대법원장과 가깝고도 불편한 관계를 그린 부분은 인간 드라마로서의 흥미를 돋운다. 블랙먼은 인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코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블랙먼을 중심으로, 우리와는 다른 미국 사법체계가 움직이는 원리, 사법체계의 정점에 있는 연방대법원의 일상을 유명 대법관들이 등장하는 일화와 함께 풀어놓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