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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부끄러운 이주노동자 혐오

    “한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을 구했다고 떠들썩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감정이 좋아질 것 같아 걱정이다. 그들은 범죄를 일으키고 일자리를 빼앗는 암적인 존재들이다.”(아이디 HUGH)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사망자 40명 가운데 이주노동자는 14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인터넷에는 이주노동자를 위로하기보다 비난하는 글이 쇄도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국제토론방에는 13일 현재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는 게시글 7개가 ‘추천 베스트’ 목록에 올라와 있다.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석원정 소장은 “여수 참사, 이천 참사와 같은 사건이 터지면 개인 감정에 머물렀던 외국인 혐오증이 집단 표출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는 단순히 외국인 혐오증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혐오의 방향이 조선족이나 동남아에서 온 미등록 노동자에게 맞춰져 있어 극단적인 ‘인종차별’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양대 임지현 사학과 교수는 “미국에서 온 영어 강사를 동경하면서도 동남아나 조선족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는 정반대의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엄연한 인종차별”이라고 말했다. 일부 누리꾼이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 근거는 ‘범죄율이 높고,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다.그러나 지난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펴낸 ‘외국인 범죄의 실태와 전망’에 따르면 한국거주 외국인 10만명당 범죄 건수는 개발도상국보다 선진국 출신이 훨씬 많다.‘외국인 노동자의 집’ 김상헌 사무국장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이 꺼리는 업종에서 대신 일하고 있는데도 혐오 방향이 이들로 향해 있다.”고 밝혔다.임 교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범죄나 일자리와 같은 사회·경제적 이유가 아닌 인종차별이 근본 원인”이라면서 “서양중심의 세계사를 손질하는 등 교육과 미디어의 총체적 변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이경원 장형우기자 leekw@seoul.co.kr
  • “3년반 원없이 터지고 원없이 일하다 갑니다”

    “3년반 원없이 터지고 원없이 일하다 갑니다”

    “3년 반 동안 원없이 일하고, 원없이 터지다가 갑니다. 그래도 문화재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들에게는 비판받지 않은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10일 국립고궁박물관 카페테리아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참여 정부의 임기가 한달 이상 남은 상황에서 그의 조금 이른 듯한 ‘고별 간담회’는 일찍 마음을 정리하고 ‘제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원각사탑 중앙박물관으로 옮길 계획”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스타 미술사학자로 떠오른 그가 문화재청장에 임명된 것은 2004년 9월1일. 그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충남 서산마애불의 보호각을 최근 철거한 것을 언급하며 “그것 한 가지 하는데 임기를 모두 보낸 것 같다.”며 문화재 행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유 청장은 “야외에 석조문화재를 노출시키는 것이 어떻게 보호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탑골공원의 원각사터십층석탑처럼 유리벽으로 싸놓으면 제대로 보호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앞으로 원각사탑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탑골공원에는 복제품을 세우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밝혔다. ●“대통령 취임식 근정전에서 해도 좋을 듯” 유 청장은 이날 “광화문으로 청장을 시작하여, 광화문으로 청장을 끝내는 것 같다.”고 광화문 복원에 대한 애정을 다시한번 표현했다. 그는 “새 정부에서는 여의도가 아닌 광화문 광장에서 취임식을 갖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하고는 “경복궁의 근정전은 어떨지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반도 대운하로 화제가 이어지자 유 청장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운하가 지나는 곳의 문화재 지표조사는 문화재청이 맡도록 특별법에 넣고, 발굴도 국책발굴단을 만들어 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극적으로 ‘운하 추진 대책’을 마련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대운하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질문에는 “(문화재청장을 물러난) 2월26일에 대답하겠다.”면서 웃었다. 유 청장은 퇴임하면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돌아간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세계화’ 민족주의 논쟁에 어떤 고민 던지는가

    ‘세계화’ 민족주의 논쟁에 어떤 고민 던지는가

    최근 학계의 가장 첨예한 논쟁 가운데 하나는 민족주의 논쟁이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논쟁 리스트 앞머리엔 늘 민족주의-탈민족주의 논쟁이 자리한다. 가속 페달을 밟는 지구화·세계화가 논쟁을 현재화·미래화하는 매개변수다. 세계화는 ‘친일´ 대 ‘반일´, ‘식민지근대화론´ 대 ‘자본주의맹아론´으로 대표되던 기존 민족주의 논쟁에 ‘배타적 민족주의´ 대 ‘국제적 탈민족주의´ 논쟁을 가세시켰다. 세계화는 ‘미완의 친일청산 완성론´ 대 ‘자학적 친일청산 비판론´이란 진보-보수간 논쟁구도에 ‘역사바로세우기´ 대 ‘생존 위한 선진화´란 논쟁을 껴입혔고, ‘저항적 민족주의 유효론´ 대 ‘배타적 민족주의 극복론´으로 진보진영 내부를 분화시켰다. 비판사회학회가 11,12일 ‘지구화시대-탈국가적 상상력’이란 주제로 숙명여대에서 여는 심포지엄은 세계화가 민족주의 논쟁에 어떤 고민을 던지는지 잘 보여준다. 심포지엄은 단일 국가 경계 내에서 인식·실천론을 발전시켜 온 사회과학이 지구화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연구방법을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하는 절박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세계화·지구화와 공명할 때 민족주의 논쟁은 더 이상 먹물들의 한가한 말다툼 차원을 넘어선다. 투자자-국가소송제 도입을 명문화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만 해도 ‘탈국가-탈민족적 협정’ 대 ‘국민국가 주권침해’라는 관점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다. 심포지엄의 민족주의 논쟁엔 대표적인 탈민족주의 역사학자 중 한 명인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와 분단이 개인 삶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가 나선다. 임 교수 발표문(‘아래로부터의 지구화와 탈민족적 상상력’)에서 국경으로 상징되는 현 시기 민족주의는 분쟁의 상징이다. 한·일간 독도-다케시마 분쟁, 한·중간의 동북공정 분쟁, 중·일간의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분쟁, 러·일간 쿠릴열도 분쟁 등 국경을 전제로 한 국가 관계는 ‘지뢰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우리 고유의 영토라는 관념이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지배하는 한 민족주의라는 규율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배타적 민족주의를 구성해온 국사(國史) 해체’를 주장한다. 국사가 자국에만 유리한 기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일본의 ‘새역사교과서’는 적대적 공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나라의 일방적 국사 해체가 아니라 동시다발적 국사 해체를 통해 동아시아 차원의 상호비판과 자기성찰적 연대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반면 김 교수 발표문(‘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중적 민족주의’)은 민족주의가 여전히 낡은 것일 수 없다는 입장에 선다. 그는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면서 “지구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데 수많은 제약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사해동포주의를 갖도록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전술적 수준에서 민족주의는 활용할 만하다.”고 강조한다. 해외동포와 라이따이한, 외국인 노동자, 국제결혼 여성 등의 문제를 소수자 인권이 아닌 민족 문제와 결부해 풀 때 구체적 실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1630년(인조 8) 8월, 비변사는 총융사 휘하의 경포수와 어영군을 평안병사 유림(柳琳)에게 배속시키고 도내의 정예병을 안주, 정주, 구성 등지에 배치하여 유흥치 일당의 노략질에 대비할 것을 청했다. ●가도 정벌 시도의 후유증 1630년 8월 유흥치는 차관 이매(李梅)를 서울로 보내, 조선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까닭을 힐문하려 했다. 인조는 처음에는 그와의 면담을 회피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토벌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유흥치는 9월에도 차관 이현(李見)을 보내왔다. 그는 먼저 ‘정충신이 가도 사람들이 배 만들고 숯 굽는 것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정충신이 토벌에 나섰을 때 유흥치의 정탐꾼들을 체포하고 한인들을 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유흥치는 이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양곡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인조는 이현에게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인조는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을 가도로 보냈다. 유흥치는 ‘기공대첩(奇功大捷)’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워놓고 정유성을 만났다. 그는 정유성에게 자신이 섬 안의 훼방꾼들을 제거했는데 조선이 자신을 왜 공격하느냐고 힐문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천조(天朝)를 범하는 오랑캐는 토벌하지 않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향해 군사를 들이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정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정유성에게 유흥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섬 안에 군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그것을 공급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흥치에게 약점을 잡혀 코가 꿰인 셈이었다. 유흥치는 정유성을 만난 직후, 평안도 일대에 부하들을 보내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했다. 그들은 조선 관민들에게 수천 석의 군량을 빨리 운반하라고 독촉했다. 유흥치는, 압록강이 얼기 전에 군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군사들을 평안도에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유흥치가 가도로 돌아온 뒤 조선에 보낸 게첩(揭帖)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김상헌이 회답서를 썼는데, 유흥치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노여워할까 우려하여 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은 인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김상헌은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맞섰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인조의 태도도 유흥치의 작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유흥치의 수탈이 격화되다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명 조정은 가도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서 토색질을 벌였다. 조선의 관민들 가운데는 한인들의 작폐에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1630년 12월,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는 노략질을 일삼는 한인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다. 조정 일각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양덕위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평안감사 민성휘의 의견은 달랐다. 양덕위를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한인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난동을 피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관민들의 ‘자구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같은 해 12월에는 황주의 백성들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한인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가 난 한인들은 황주 관아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작폐에 대한 조선 관인들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을 절감한 유흥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서울 등지에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정탐꾼들은 사대부가와 여염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정을 파악하려고 골몰했다.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과 후금의 왕래 상황이었다. 정탐꾼들을 통해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유흥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1630년 11월, 전국해(錢國海)라는 자가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차관이라 칭하며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에서 군량 2만석과 전마 3000필을 얻어 유흥치에게 공급한다.’고 떠벌렸다. 가도에서 그를 만났던 조선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은 ‘조선에서는 전마를 키우지 않고 평안도는 이미 황폐화되어 군량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다.’고 조선행을 만류했다. 전국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국해는 본래 유흥치의 부하였다. 유흥치는 그에게 위조한 자문(咨文)을 주었다. 자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명 조정은 이제 유흥치를 용서했다. 감격한 유흥치는 공을 세우고 싶지만 식량과 전마가 부족하여 이웃에 의지해야만 한다. 듣건대 조선이 후금을 돕고 한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 부득이하게 후금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곡식과 전마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 전마 2000필을 가도로 보내고 한인들을 핍박하지 말라’. 조선이 후금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빌미로 군량과 전마를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전국해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부터 등래 군문(軍門)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량과 전마를 청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해는 인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손원화가 보내서 온 차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인조는 양곡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비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가도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과 역관들이 가도에 들어가 무역하는 것을 엄격히 제재하자고 했다. 그들을 통해 조선 사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조선과 유흥치 사이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도의 변란 1631년(인조 9) 1월, 가도로 들어간 조선 문안관을 만났을 때 유흥치는 다시 길길이 뛰었다. 그는 한인들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여 자신에게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풀어 자신이 직접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유흥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 본토로부터 군량 공급이 여의치 않은 데다 조선 또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흥치는 결국 1631년 3월, 부하 장도(張濤)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피살되었다.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심세괴 등의 반발을 사서 죽은 것이다. 모문룡과 원숭환이 죽은 뒤,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가도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가도에서 다시 일어난 변란의 불똥은 조선으로 튀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가도 정벌’을 다시 운운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도 정벌’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1631년 5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이 보낸 방물(方物)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굶주린 유흥치가 자신에게 귀순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식량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귀순을 거부했다.’고 따졌다. 그는 조선이 이후에도 가도에 식량을 대주면 병력을 의주로 보내 차단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원조가 없으면 가도는 쉽사리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협박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이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한, 후금과의 관계는 안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락가락했던 인조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의 가도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후금과의 원한을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파국이 다가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것, 바로 거기에 조선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내 책을 말한다] 폭군? 미치광이? ‘궁예 보고서’

    우리가 기억하는 궁예는 어떤 인물일까. 보통의 독자들이라면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전제정치를 행하다가 신하들의 정변으로 축출된 군주를 떠올릴 것이다.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미륵관심법을 터득하였다고 내세우면서 죄 없는 신하들을 반역죄로 처단하고, 간통 혐의를 걸어 자신의 왕비를 불에 달군 쇠뭉치로 쳐 죽인 폭군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궁예는 과연 폭군,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이 책은 궁예와 그가 세운 정권에 대한 종합적 연구이다. 궁예는 901년 고려를 건국하였고,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고,911년에는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는데, 마지막 국호를 따 태봉의 궁예정권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신라 제51대 진성왕 3년(889) 중앙정부의 세금 독촉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봉기는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자칭하는 호족들이 성을 근거로 사병을 지휘하며 자신의 영역과 그곳에 사는 농민들을 보호하면서 각 지방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견훤은 900년 백제를 세웠고, 이어 궁예도 건국하였다. 마치 삼국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신라 말 고려 초는 후삼국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것은 태봉이었다. 대략 910년 무렵에는 전국의 3분의2를 궁예가 차지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신라 말에는 말세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세달사 승려 출신이었던 궁예는 미륵불이 이 세상에 와서 말세에 사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농민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호족들과도 손을 잡았다. 평산 박씨 가문과 같이 본래 신라의 국경 수비를 담당하였던 패강진의 군사조직을 기반으로 대두하였던 패서 지역의 호족들이나 해상 무역으로 크게 부를 쌓았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을 포섭하였다. 궁예는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그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차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나중에는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국왕이자 부처로서 성속의 권력과 권위를 오로지하였다. 미륵관심법은 그가 신정적 전제주의를 좇았다.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수단이었다. 궁예는 몰락한 진골귀족 가문 출신으로 진골귀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집착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그였기에 권력을 잡게 되자 점차 가난한 농민들을 돌보거나 권력을 호족들과 나누는데 인색하게 되었을 것이다. 궁예는 기반으로 삼았던 농민들과 호족들이 등을 돌림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계운궁(啓運宮) 상례(喪禮) 논란 병자호란을 겪을 때까지 인조 정권은 안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주된 까닭은 인조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등극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신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인조는 늘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신료들과 갈등을 빚었다. 정통성 확보와 관련된 첫 현안은 인조의 생부모(生父母)를 왕실의 종통 속에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왕실의 법통상 조부인 선조를 계승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1580∼1619)과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具氏,1578∼1626)를 사친(私親)으로 대접할 것인지, 아니면 인조의 왕통 속으로 끌어들여 ‘왕’과 ‘왕비’로 대접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정원군과 구씨를 사친의 예에 따라 대접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1626년 1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이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계운궁을 위해 몇 년 상을 치러야 하는지가 당장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신들과 예조판서는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멸사봉공의 입장에서 사적인 예는 축소해야 한다.’며 3년 상에 반대했다. 그들은 1년 상을 치르되 ‘상주가 지팡이를 짚지 않는(不杖期)’ 상례를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귀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이 선조의 대통을 계승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워 3년 상을 치러도 무방하다며 인조에게 영합했다. 대신들과 예조는 인조가 상주(喪主)가 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인조는 왕통으로 볼 때 이미 선조에게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생모를 위해 상주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이 상주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신료들의 공론을 무시했다. 예조판서를 비롯한 반대하는 신료들은 사직을 요청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상주가 되려 하고 사친을 위해 국상(國喪)을 고집하는 것은 참월할 뿐 아니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인조는 결국 신료들의 반발에 밀려 상주 역할을 동생 능원군(綾原君)에게 넘겼다. ●신료들 “인조 아버지는 선조” 인조가 상기(喪期)와 상주 문제를 놓고 신료들과 논란을 빚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계운궁의 상례를 ‘왕비’의 예로써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실제로 5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成殯),6일 만에 상복을 입고자(成服)했는데 예조는 그것이 ‘왕비의 예’라며 반대했다. 신료들은 3일에 ‘성빈’하고 4일에 ‘성복’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자신의 명을 듣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신료들을 위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끌면 어차피 자신의 의도대로 5일 ‘성빈’,6일 ‘성복’을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운궁의 상례와 관련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계운궁의 관을 궁궐 안에 두는 문제, 반혼(返魂) 의식을 궁궐에서 하는 문제, 인조가 산소까지 따라가는 문제 등도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명명했다.‘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료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인조는 더 나아가 작고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신료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반발했고 당연히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추숭을 둘러싼 논란은 정원군과 인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예학(禮學)의 권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왕통으로 볼 때 인조의 아버지(考)는 선조’라고 못박았다. 왕통은 사적인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원군을 ‘아버지’로 대접하려는 인조의 의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하면 정원군과 인조는 형제가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김장생의 의견에 반대했다. 대다수 신료들이 ‘왕통은 사적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김장생의 의견에 동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귀와 박지계(朴知誡) 등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여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인조에게 철저히 영합했던 것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논의는 1624년경에 제기되었다가 정묘호란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 8월,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다시 제기했다. 그는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인조는 그의 의견이 반가웠지만 대다수 신료들은 반발했다.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이귀는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귀는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이원익, 김류, 오윤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대신들은 모든 대소 신료들을 이끌고 인조를 압박했고, 성균관 생도들까지 나서 인조에게 ‘공론을 따르고, 비례(非禮)’에 집착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정치판은 바야흐로 인조, 이귀, 박지계, 최명길 등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들과 대다수의 ‘반대론자’들로 나뉘어졌다.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집권 이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한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 이귀는 그 과정에서 솔선해서 ‘총대를 멨다.’그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추숭을 주장하다가, 반대하는 신료가 있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성토하고 모욕을 주었다. 인조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숭 문제를 놓고 신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결국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이어 5월에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원종과 계운궁을 모신 산소는 장릉(章陵)으로 승격되고,1635년에는 그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데도 성공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야의 공론을 모조리 무시하고 밀어붙여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 조선은 가도의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려 시도했고, 유흥치는 곧 심세괴(沈世魁)에게 피살되는 등 서북 변경 상황이 몹시 심각했다. 후금 또한 조선에 대해 이런 저런 경제적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역시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을 통해 왕권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지만 물경 10년 가까이 계속된 ‘추숭 논란’은 신료들 사이에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추스르고 국방력을 제고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Local] 경산, 삼국유사 포럼 운영

    삼성현(三聖賢:원효·설총·일연)의 고장 경북 경산시는 내년 1월부터 1년 동안 삼국유사 포럼을 운영한다고 27일 밝혔다. 이 포럼은 영남대 국사학과 김정숙 교수의 책임 지도 아래 학계와 문화계 등 전문가 18명이 강사로 나서 매주 금요일 오후 7시부터 2시간씩 총 44회의 강좌와 2회의 유적 탐방으로 이루어진다. 이 포럼의 참가 신청은 경산시민이나 지역 대학생 등이면 누구나 가능하며 수강료는 무료다. 참여 희망자는 31일까지 경산시청 행정지원과(행정혁신담당 810-6053) 또는 읍면사무소, 동 주민센터에 신청하면 된다. 시는 내년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원효와 설총, 압독국 관련 포럼도 개설·운영할 계획이다. 경산시 도상균 행정지원과장은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를 통해 그 내용과 가치 및 의의 등을 파악하고 경산에서 출생하거나 자란 삼성현의 삶과 혁신 정신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이 포럼을 운영하게 됐다.”고 말했다.경산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이명박 시대] 재계 학맥 누가 있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포항 동지상고와 고려대 경영학과(61학번)를 졸업했다. 이에 따라 재계·금융계에 있는 동지상고와 고려대, 특히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기태 동신여객자동차 대표는 이 당선자와 동지상고 동기다. 황대봉 대아그룹 명예회장, 손기락 LG산전 고문, 황인찬(황대봉 명예회장의 장남) 대아고속해운 회장, 이장우 이메이션코리아 대표, 하인국 푸른2상호저축은행 대표, 박성욱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 석경오 현대중공업 전무, 장지활 SC제일은행 상무, 이휴원 신한은행 부행장 등도 동지상고를 나왔다. 재계에서 고려대 경영학과 인맥은 매우 화려하다. 현역으로 있는 경영학과 출신의 맏형급은 김승유 하나금융지주회사 회장이다. 김 회장은 이 당선자와 가까운 경영학과 동기동창이다. 재벌가 2·3세중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 많다. 특히 범(汎) LG가(家)에 많은 편이다.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은 이 당선자의 4년 후배로 고(故)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3남이다. 허 명예회장은 LG그룹 공동창업주인 고 허준구 명예회장의 형이다. LG그룹에서 분가(分家)한 GS그룹에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 많다. 허창수 GS그룹 회장, 허정수 GS네오텍 사장, 허진수 GS칼텍스 사장도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역시 LG그룹에서 분가한 LS그룹의 구자열 LS전선 부회장과 구자용 E1 사장도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도 경영학과를 나왔다. 구자훈 LIG 손해보험 회장도 경영학과 출신이다. 범 현대가에도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들이 많다. 정몽규(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외아들) 현대산업개발 회장, 정의선(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외아들) 기아차 사장, 정몽진(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장남) KCC 회장, 정몽익(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차남) KCC 사장 등이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경영학과를 다녔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박문덕 하이트맥주 회장은 경영학과 71학번 동기다. 두산가의 4세인 박정원(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장남) 두산건설 부회장, 김준 경방 사장, 김윤 삼양사 회장도 동문이다. 최근 금융쪽에서 급성장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경영학과 출신이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장남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도 동문이다. 재벌 오너가 아닌 최고경영자(CEO) 중 경영학과 출신으로는 이학수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김인 삼성SDS 사장, 황태선 삼성화재 사장, 김갑렬 GS건설 사장, 김우평 SK증권 사장도 동문이다. 경영학과 출신은 아니지만 최태원 SK그룹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고려대를 나온 주요재벌 총수다. 김징완(사학과) 삼성중공업 사장, 이상대(정치외교학과) 삼성물산 사장은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 통한다. 안미현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년 9월, 원숭환(袁崇煥)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것은 명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홍타이지, 명의 허를 찌르다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그 같은 사태는 원숭환이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산해관을 제외한 장성 외곽지역의 방어 태세가 몹시 취약하다는 것, 후금이 몽골을 회유하여 쳐들어 올 경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10월26일, 후금군은 황성(皇城) 코앞의 경기(京畿) 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영원성에 머물던 중에 홍타이지의 공격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당황했다. 그는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직후 참장(參將) 조솔교(趙率敎)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준화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11월4일, 후금군은 준화성 공격에 나섰다. 왕원아(王元雅)가 이끄는 명군은 힘껏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성안에서 후금군에게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화를 향해 달려오던 조솔교는 중간에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성 함락 후 준화에서는 후금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준화 함락과 대학살 소식에 북경은 전율했다. 11월17일,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온 원숭환은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이르렀다. 병사와 말 모두 굶주림도 잊고 휴식도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부총병 주문욱(周文旭)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상황을 보아 북경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원숭환은 듣지 않았다. 황성이 포위되려는 마당에 휴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1월20일, 원숭환의 명군은 광거문 앞에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6시간 이상 벌어진 10여차례의 사투 끝에 후금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리한 행군과 굶주림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얻은 승리였다. ●홍타이지 원숭환에 패해 후퇴하다 11월23일, 후금군을 물리친 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장거리 행군과 전투, 그리고 노숙에 지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숭환이 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후금군이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원숭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 휘하의 병력은 엄동에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1월27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원숭환은 후금군을 격파했다. 원숭환이 있는 한 북경을 도모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병력을 북경 외곽의 남해자(南海子)란 곳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북경에서 물러나면서 숭정제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이후 북경의 상황을 관망하면서 북경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후금군은 영평(永平), 준화, 난주( 州), 천안(遷安) 등지의 성과 촌들을 마구잡이로 겁략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사람과 가축,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저항하는 인원들을 도륙했다. 황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명군은, 후금군이 외곽 지역에서 벌이고 있던 약탈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후금군은 통주(通州) 등지에서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웠다.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후금군 병사 한 사람에게 1필씩 돌아갈 만큼의 우마를 획득했다. 잔혹한 학살과 방화, 그리고 약탈 속에서 북경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비록 황성은 어렵사리 지켜냈지만 명은 심장부가 유린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또 다른 명의 장성(長城)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뜨리게 된다. 그 ‘장성’이란 다름 아닌 원숭환이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귀중한 포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 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이 두 사람의 포로를 활용하여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시킬 수 있는 반간계를 구상했다. 양춘과 왕성덕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은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겨우 벽 하나로 나뉘어진 옆 방에서 환관 두 사람은 고홍중과 포승선의 밀담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타이지와 후금군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11월29일,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고홍중과 포승선은 태감 두 사람을 고의로 풀어주었다. 자금성으로 달려온 두 환관은 숭정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기습한 직후부터 명 조정에 있던 엄당(奄黨)의 잔당들은 원숭환을 제거할 함정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원숭환이 오랑캐를 일부러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다.’는 참소가 주된 내용이었다. 또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의 통주에 다다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번도 접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떠돌고 있었다. ●원숭환, 하옥되다 당시 19세에 불과한 데다, 대국(大局)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숭정제는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1629년 12월1일, 황제는 원숭환을 황성으로 불렀다. 명목은 ‘군량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원숭환이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믿었던 숭정제는 혹시라도 원숭환이 낌새를 채고 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운운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황성 앞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오랑캐’에게 북경 주변이 포위된 계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대신 성 위에서 밧줄에 달린 바구니가 내려왔다. 당시 계요총독(遼總督)이자 병부상서 직책을 갖고 있던 원숭환은 바구니에 실린 채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황성으로 들어선 직후 원숭환은 금의위(錦衣衛)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반면에 그와 동행했던 총병 만계(滿桂)와 흑운룡(黑雲龍) 등은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고 승진했다.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애써 숭정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에게 복수하기로 작심했던 엄당의 신료들은 원숭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환은 동림당 계열의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죄’를 물고 늘어지면 동림당 계열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반간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성을 공격하여 선전포고했던 이래 후금군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 승승장구에 제동을 걸고 끝내 누르하치를 비명횡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원숭환이었다. 그가 영원성과 산해관을 막아서는 한, 아니 그가 존재하는 한 중원 정복이라는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원숭환은 바로 명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그 ‘장성’이 반간계 한 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컨대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숭정제는 암우(暗愚)했다. 지도자의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과학터치] (8) 고려대 바이오유체연구실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심·뇌 혈관계질환은 자각증상없이 발병하며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인류 사망원인의 첫 번째로 꼽히고 있다. 2005년 현재 미국내 전체 사망자 중 49%가 심·뇌 혈관계질환이 직접적인 사인이며 한국 역시 23%로 암(26%)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심혈관질환의 위험성이 알려져 있음에도 비중이 감소하지 않는 큰 이유는 심혈관질환의 발병 및 진행과 관련된 각종 요인들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혈관질환 사망자 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비롯한 화학적 검사결과가 정상인 경우가 무려 50%에 달하며, 높은 콜레스테롤의 혈액이 혈관을 순환하면서도 특정 부위에만 동맥경화가 발생하는 원인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또 바이오칩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심혈관질환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되지 않고 있다.‘혈액유변정보’는 심혈관질환 치료 및 진단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으로 각광받고 있다. 혈액 유변정보는 ‘혈액이 얼마나 끈적끈적한지’ 또는 ‘얼마나 혈관을 잘 흐를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동맥경화나 심근경색 등의 심혈관질환 환자에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의 혈액점도가 측정되며, 당뇨성 혈관합병증 환자 대부분에서는 혈구의 변형성이 매우 감퇴해 자신보다 작은 미세혈관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경화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 때문에 비정상적인 혈액유변정보는 혈관질환의 초기단계부터 발견되며, 혈관질환의 발달에 매우 밀접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결국 혈액유변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게 관측하고 해석할 수 있느냐가 심혈관질환을 정복하는 지름길인 셈이다. 고려대 바이오유체연구실 신세현 교수팀은 기계공학의 유체역학 전문그룹으로, 혈액에 대한 유동현상 및 물리적 특성을 진료현장에서 측정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신 교수팀은 03년도에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고, 현재는 혈액유변특성 계측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최근 개발한 바이오칩은 혈액 한방울로 혈구변형능과 응집성을 1분 이내에 측정할 수 있다. 이같은 성과는 공동연구자인 경북대학교병원 진단검사학과 서장수 교수팀과의 긴밀한 협동연구를 통해 임상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이 이미 검증됐다. 혈구변형능 검사를 통한 당뇨성 미세혈관합병증 조기진단 기술은 완성단계에 있으며, 혈구응집성을 이용한 심혈관질환에 대한 조기진단 유효성 검증 실험이 현재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신 교수는 “미국내에서만 연간 6000만명이 심혈관질환, 관상심혈관질환, 심근경색, 뇌경색, 협심증 등의 순환기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개발된 진료현장용 측정기술은 연간 170억달러에 달하는 기존 혈당계 시장에서 10% 이상의 점유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韓日通史) /정재영 지음

    하타(秦)씨는 가야계 신라 도래인 집단으로, 야마토노 아야(東漢)씨와 더불어 도래계 씨족의 최대세력이었다. 하타씨가 사가노(嵯峨野)지역에 정착한 것은 5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하타씨는 토목기술이 뛰어나 오늘날 교토(京都)의 중심부인 헤이안쿄(平安京)를 축조했다.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622년 창건된 고류지(廣隆寺)는 하타씨의 원찰이기도 했다. 고류지라는 절 이름도 창건자의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의 실제 이름인 고류(廣隆)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 도시는 교토~쓰시마~부산 왜관~서울~북경으로 이어지는 ‘은의 길(실버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일본의 은화인 경장정은(慶長丁銀)은 조선을 비롯한 대외무역에서 지불수단으로 쓰였는데, 특히 17세기 말에는 왜관에서 조선상인과 거래하는 은화가 나가사키에서 중국상인과 거래하는 양의 7배가 넘었다.‘은의 길’은 중국의 생사나 견직물을 수입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는데, 교토는 결국 ‘은의 길’의 출발점이자 비단길(실크로드)의 종착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韓日通史)’(정재영 지음, 효형출판 펴냄)는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한반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교토라는 창으로 한·일관계의 역사를 펼쳐놓은 역저이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인 및 일본인과 일본을 돌아보는 역사기행을 이끌었고,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일본어로 두 나라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지은이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와 나라는 개인과 개인의 경우와는 달라서 아무리 사이가 나쁘더라도 짐을 싸들고 이사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함께 생존하고 번영하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며,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1995년에는 일본에서 ‘여행가이드가 없는 아시아를 걷다. 한국 서울, 강화도, 제암리, 독립기념관’을 펴내기도 했다.‘한일통사’가 한국인들의 한·일관계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면 ‘여행가이드’는 일본인들에게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토는 흔히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불린다.794년 간무덴노(桓武天皇)가 수도로 정한 뒤 메이지덴노(明治天皇)가 1869년 도쿄로 옮겨갈 때까지 수도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문화도시로 존재했다. 지은이는 9개의 키워드를 제시하며 한·일관계에서 교토의 역사를 해부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창신교토(創新京都)이다. 이 도시가 고색창연한 역사도시가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첨단을 지향하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교토는 조선을 빈사상태로 몰아넣은 침략의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의 똬리를 틀고 있던 왜란참화(倭亂慘禍)와 대한제국을 폐멸시킨 병탄애련(倂呑哀憐)의 본거지였다. 그런가 하면 교토는 식민지시대 많은 한국인이 유학생이나 노동자로 건너가 짙은 체취를 남긴 고투모색(苦鬪摸索)의 현장이자, 일본제국의 패전 이후 한국인과 일본인이 갈등하고 대립하면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해하고 연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난 상생공영(相生共榮)의 터전이라고 강조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과 일본은 예부터 넓고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엄숙한 운명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교토를 여행하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에게 한·일관계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공존번영의 역사인식을 모색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중국문명대시야/베이징대학 중국전통문화중심 엮음

    베이징대학의 국가연구기관인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은 1994년 중국 문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도출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필진은 문학, 역사, 철학, 고학, 종교, 예술, 지리, 민속, 과학기술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 112명이다. 우안싱페이 베이징대학 국학연구원장을 책임편집자로 철학과, 중문과, 역사학과, 고고문화인류학과, 도시환경학과, 신문방송학과 등의 교수가 망라됐다. 중국 국영 CCTV는 이 원고를 바탕으로 1995년 150부작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제작하여 방영했다.1997년 중국21세기출판사는 이 원고를 일반 독자를 위한 역사문화서로 펴내자는 제안을 했고,2000여장의 도판을 추가하는 작업을 거쳐 5년 뒤인 2002년 모두 8권으로 중국역사의 지상(紙上)박물관이 세상에 나왔다. ‘중국문명대시야’(베이징대학 중국전통문화중심 엮음, 장연·김호림 옮김, 김영사 펴냄)는 이렇게 나온 ‘중화문명대시야(中華文明大視野)’를 우리말로 번역한 뒤 두 권 분량을 한 권으로 묶어 4권으로 출간한 것이다. 중국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른 편년체로 서술한 이 책은 ‘용과 중국민족’에서 시작하여 ‘쑨원(孫文)’과 ‘5·4운동’으로 끝난다. 이 책을 살펴보노라면 우리 문화가 중국의 역사와 얼마나 철저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갑골문’과 ‘주역’,‘시경’,‘제자와 백가쟁명’, 노자’,‘공자’,‘손자병법’,‘묵자’,‘장자’,‘맹자’,‘한비자’ 같은 제1부의 작은 제목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빙과 두장엔’ 정도에 불과할 지경이다. 진나라 사람인 이빙(李氷)은 서기전 2509년 무렵 촉나라의 군수로 부임해 쓰촨성 청두평원의 서쪽 민장(岷江)중류에 고대 수리공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두장옌(都江堰)을 건설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유명하다고 한다. 제2부에 나오는 ‘열두띠 이야기’나 ‘청명과 한식’,‘설날 풍속’에서는 세시명절의 기원과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피게 해준다. 예를 들어 설날을 중국에서는 춘절(春節)이라고 하는데, 음력으로 새해 첫날을 새해 첫날로 정한 사람은 한나라 무제였다. 사마천이 참여해서 제정한 태초력(太初曆)을 받아들여 반포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각권 3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과거사 존안자료 다시 어둠 속으로?

    인권침해, 간첩조작 의혹 등 과거 국가기관에 의한 피해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렵게 확보한 존안자료들이 ‘역사적 증거’로 활용되지 못한 채 해당 기관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국정원의 경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자료 제출 요청에도 불응하고 있어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0월과 이달 초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와 국방부 및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했다. 이들 위원회는 각 기관이 자기반성 차원에서 법률이 아닌 내부 규정에 근거해 만든 것으로, 위원회엔 진상규명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의 사후 관리·처리 규정이 없다. 자연히 의혹을 밝히는 데 기여했던 핵심 자료들이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 검찰, 기무사 등 해당 기관의 자료보관소로 되돌아가 자물쇠로 채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던 민간 출신 위원과 조사관들은 “언제 다시 자료 접근 기회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료 확보 없이 문서고가 닫히고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청와대가 각 위원회 자료를 진실화해위로 이관토록 권고하고 있지만, 강제성이 없는데다 이관 범위 또한 진실화해위 조사에 필요한 자료로 국한돼 있다. 이기욱 전 국방부 과거사위 부위원장은 “위원회에서 확보한 자료는 기본적으로 국방부에서 보관하다가 진실화해위에서 요청할 경우 자료 협조를 해주는 방식”이라면서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관에 되돌리지 않고 통합관리하는 법을 처음부터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의 자료 요청에 가장 비협조적인 기관은 국정원이다. 진실화해위는 현재 국방부 기록물 521권(481권 수집 완료)과 경찰청 기록물 151권을 수집 중인 반면, 국정원 기록물은 자료 보유목록만 입수했다. 국정원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진실화해위로의 자료 이관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에 제출한 보유목록에도 국정원 발전위가 외부에서 수집한 자료만 기재돼 있을 뿐, 국정원 내부 자료는 아예 빠져 있다. 전 국정원 발전위 조사관이었던 한 관계자는 “위원회 활동을 끝마칠 때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자료만이라도 국가기록원 등으로 넘겨 영구보존하라고 요구했지만 국정원은 거부했다.”고 전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법 제·개정 등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기욱 부위원장은 “자료 일체를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토록 강제하고, 이후 자료 공개 여부를 제3의 기관에서 심사하는 방향으로 관련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 내에 과거사연구재단을 만들어 통합사료관을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으나, 근거법이 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40조는 강제조항이 아니다. 조항에 따르면 “과거사연구재단을 설립하기 위하여 기금을 출연할 수 있다.”고 돼 있어 재단 설립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갑배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통합사료관 설치 논의는 전혀 없다.”면서 “특별법을 별도로 만들지 않는 이상 현 기본법으로 예산과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위원회 해산 과정에서 그동안 수집·생산한 자료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거사정리의 목적을 생각할 때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과거사 기록들을 집중 수집·관리하는 전담 통합기구 설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후금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모문룡을 비롯한 한인(漢人)들의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금 사자에 대한 접대나 그들과의 무역에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후금과의 우호 관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는 한 ‘내키지 않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파열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후금, 병력 철수하고 조선과 사신교환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도 의주 등지에 병력을 주둔시켰던 후금은 1627년 9월경부터 병력을 철수시켰다.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당시 조선과 후금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교환했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호차(胡差·후금 사신에 대한 멸칭)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후금 또한 호란 직후에는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 때문에 심양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의 후금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었다.1627년 5월 심양에서 돌아온 원창군(原昌君) 일행은 인조를 만난 자리에서 ‘후금 사람들이 매우 친절했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와 후금 신료들의 인물됨을 묻자,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등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라고 칭찬했다. 인조의 우호적인 태도는 후금 사신들을 접견할 때 잘 나타났다.1627년 5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는 인조를 만났을 때 ‘전하께서는 극진하게 대우하시는데 관리들이 삼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조선 관리들이 그를 인조에게 인도하면서, 대궐 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게 하고 인도자도 없이 한참 걷도록 만든 것이 불만이었다. 인조는 즉각 사과하고 용골대 등이 나갈 때 어로(御路)에서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봉산(鳳山)에 살던 백성 박응립(朴應立)과 황하수(黃河水)가 서울로 올라가던 용골대 일행을 가리키며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 사건이 있었다. 용골대 일행이 불만을 터뜨리자 조정은 봉산에 이문(移文)하여 곧바로 그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후금 사신 일행의 경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호인들과 기미(羈)하기로 작정한 이상 원하는 물품을 많이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와 신료들을 막론하고 정묘호란 직후 후금을 대하는 조선의 자세는 유연했다. 그런데 병자호란 무렵이 되면 이 같은 유연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開市에 대한 후금의 열망 정묘호란 직후 후금이 조선에 가장 강하게 바라던 것은 무역이었다. 그들은 시장을 열어 쌀을 공급해 달라고 간청했다. 쌀뿐만이 아니었다. 생필품과 사치품을 막론하고 후금이 요구하는 물품은 참으로 다양했다.1628년 1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들은 홍시와 대추, 알밤 등 과일과 약재 등을 요구했다. 중국산 비단과 청포(靑布), 일본에서 들여오는 후추를 비롯하여 단목(丹木), 칼과 창 등도 그들의 관심 품목이었다. 명과 적대 관계가 지속되면서 과거와 달리 만주 지역으로 몰려오던 중국 상인들이 끊겨 버린 상황에서 후금이 원하는 물품을 공급해 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일단 교역의 문을 열어줄 경우, 후금 측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상헌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특히 중국산 물화를 후금 상인들에게 파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하찮은 오랑캐에게 천조(天朝)의 물품을 넘겨주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1627년 12월 심양에 갔던 회답사(回答使) 박난영(朴蘭英) 일행은, 중강(中江)에서 속히 시장을 열어 교역하자는 후금 측의 재촉에 시달려야 했다. 박난영은 ‘전쟁 때문에 평안도와 황해도가 극히 피폐해졌다.’는 것,‘명나라 산 물자는 조선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지만 후금 측은 집요했다. 후금 측은 ‘조선과 후금이 이미 한집안이 되었으니 어려움을 서로 구제해야 한다.’며 ‘모문룡은 값도 치르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쌀을 공짜로 빼앗았지만 우리들은 정당하게 값을 치르고 사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라며 회답사 일행을 압박했다. 조선 측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이후 쌀과 과일, 약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산 물품 등도 후금 측에 공급했다. 중국산 물품은 가도를 통해, 일본산 물품은 왜관을 통해 입수되었다. 당시 가도에는 명의 강남 등지로부터 수많은 상선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상인들은 은이나 인삼을 갖고 가도로 가서 비단과 청포 등을 구입하여 그것을 다시 후금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사실상 후금에 중국과 일본산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셈이다. 조선은 또한 후금과의 개시를 통해 피로인(被擄人)들을 속환(贖還)하려고 시도했다. 피로인이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 사로잡혀 끌려갔던 포로들을 말한다. 호란 당시 무방비 상태였던 서북 지방에서는 엄청난 수의 포로가 생겨났다.1627년 5월 평안도 평양, 강동(江東), 삼등(三登), 순안(順安), 숙천(肅川), 함종(咸從) 등 여섯 고을에서 파악된 포로 숫자만 4986명이었다. 같은 해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심양에서 도망쳐 오는 포로의 숫자가 매일 40명에서 5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을 토대로 계산하면 당시 후금군에 끌려간 피로인의 수는 최소 수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개시에서 후금 측에 쌀을 공급하는 대가로 피로인들을 넘겨받고자 했던 것이다. ●피로인 송환 등 둘러싸고 분열양상 1628년 2월 후금 측은 개시가 열린 중강에 200여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왔다. 그들 가운데 조선에서 우선적으로 속환하려 했던 사람들은 귀의할 수 있는 부모나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포로들의 몸값을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개시 장소에 왔던 200여명 가운데 70명 정도만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얻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후금 상인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데려온 피로인들을 모두 구입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고국 귀환을 애타게 고대하고 왔다가 후금 병사들에게 이끌려 도로 심양으로 돌아가는 피로인들은 조선 국경 쪽을 쳐다보며 통곡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후금과의 개시는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파열음을 냈다. 우선 개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사뭇 달랐다. 조선은 봄가을 두 차례 개시할 것을 원했다. 후금 측은 봄, 여름, 가을 세 번을 정기적으로 하되 필요하면 제한을 두지 말자고 맞섰다. 그들은 중강 이외에 함경도의 회령에서도 개시하자고 요구했다. 개시할 때 후금 측이 데리고 오는 인원의 숫자도 문제였다. 1628년 2월 중강에서 개시할 때 용골대 일행은 자그마치 1300명의 인원을 데리고 왔다.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마초는 전부 조선 측의 몫이었다. 조선은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측이 문제를 제기하자 후금 측은 조선과 명의 전례를 들고 나왔다.‘과거 조선이 명과 개시할 때는 소와 돼지까지 증여했는데 우리에게는 식량과 마초만 주는데 무엇이 부담스러우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선이 계속 식량 공급을 거부하면 서울로 올라가서 소 몇 백 마리와 군사들이 한 달 먹을 식량을 얻어 내고야 말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은 결국 용골대 일행에게 쌀 2000섬을 그냥 주기로 약속했다. 후금에서 도망쳐 온 피로인들을 송환하는 문제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후금은 수시로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이 고의로 피로인들을 숨겨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피로인들을 ‘피 흘려 얻은 대가’로 여겨 송환을 요구하는 후금과 ‘살겠다고 도망 온 혈육’을 송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조선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양국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과 상의하지 않을 경우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며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자리는 반역자 토벌을 논의하는 자리지 군대 해산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귀의 주장을 일축했다. 유흥치의 반란을 응징하겠다는 인조의 결의는 확고해 보였다. ●인조의 토벌 강박증 이귀는 다시 ‘훈련도 안 된 병력을 하루아침에 멀리 보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인조는 ‘병조판서가 그렇게 말하면 병사들의 맥이 풀린다.’며 계속 반대할 경우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군법으로 처벌하려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며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충고를 받아달라고 촉구했다. 이귀가 ‘죽음’ 운운하자 인조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를 파해버렸다. 1630년 4월27일에도 인조와 신료들 사이의 갑론을박은 지속되었다. 이정구(李廷龜)는 먼저 황제에게 주문(奏聞)한 뒤 성지(聖旨)를 받들어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배반한 적은 누구나 토벌할 수 있는 것이라며 명 조정에서 회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인조가 워낙 강하게 나오자 신료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끼리 비변사(備邊司)에 모여 회의할 때는 출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던 신료들도 인조 면전에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최명길은 ‘비변사에 있을 때는 반대하다가 주상 앞에서는 순종하기에만 급급하니 신하의 도리가 어디로 갔냐.’며 이서와 정충신의 태도를 비판했다. 인조는 토벌에 관한 한 강박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맹세코 이 적을 섬멸하여 황은에 보답하고 싶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나라고 좋아서 하겠는가?”라며 신료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김류는, 출정 날짜가 다가오는데 논의가 계속 분분하면 장수들이 동요할 것이라며 성사를 기약하려면 군법을 엄격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류가 자신에게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자 인조 또한 “의심을 품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4월28일, 이귀는 인조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혹시라도 불리할 경우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할 것이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이어 홍문관과 양사(兩司)의 신료들이 나서 출정 명령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향후 망령되이 반대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곧 이어 출정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갑주(甲胄)와 궁시(弓矢)를 하사했다. 그럼에도 병조판서 이귀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인조는 그를 파직시켰다. ●토벌군의 출정과 상황의 변화 비변사는 병선 열 다섯 척을 징발하여 격졸(格卒)과 군량 등을 싣고 5월15일 이전까지 강화도 교동(喬桐) 앞 바다에 대기하도록 조처했다.4월29일에는 정벌에 즈음하여 가도의 중국인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이 만들어졌다. “지금 역신(逆臣) 유흥치는 스스로 사사로운 불화를 조성하여 가슴에 음모를 품고 승냥이나 이리 같은 흉악한 세력을 끼고 벌이나 전갈처럼 독기를 뿜어대었다. 붙잡혀 온 달족( 族-후금 투항자)들을 불러모아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을 멋대로 해쳤는가 하면 통판(通判) 등과 각부(各部)에서 파견한 관리도 아울러 죽여 반역의 기운이 하늘에 닿았다.(중략) 이에 우리 전하가 한 번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본관이 나라의 명을 삼가 받들어 삼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서에서 동시에 포위하려 하는데, 의기에 격동되어 사기가 저절로 배나 치솟고 있으니, 탄환(彈丸)만 한 너희 일개 섬이 어떻게 빠져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반역의 변고가 호로(胡虜)보다 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유흥치를 묶어 군문 앞으로 끌고 오라.” 반란을 일으킨 유흥치 일당에 대한 토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선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4일 인조는 도승지를 서쪽 교외로 보내, 가도를 향해 출정하는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의 장도(壯途)를 축원하는 송별식을 열어 주도록 했다. 이서는 어영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감사 이여황(李如璜), 병사(兵使) 신경인(申景)과 함께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나아가 주둔했다. 부원수 정충신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수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은율(殷栗)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이렇게 가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유흥치가 전함 49척을 이끌고 가도를 떠나 등주(登州)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평안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당황했다. 토벌의 1차 대상인 유흥치가 섬을 비웠기 때문이다. 김시양은, 유흥치가 없는 이상 가도로 진격하여 그의 심복들을 사로잡고 창고를 봉한 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자고 했다. 총융사 이서는, 소굴이 비었으니 가도 공격이 무익해졌다며 아군의 대선(大船)을 숨기고 선봉을 접근시켜 유흥치를 유인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했다. 유흥치가 섬을 비우는 바람에 조선의 정벌은 자칫하면 ‘싸움을 위한 싸움’,‘공격을 위한 공격’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먼저 가도 사정을 철저히 정탐하라고 촉구했다. 유흥치가 병력을 이끌고 섬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명 본토를 공격할 것인지, 후금에 투항할 것인지, 요동 반도 연안의 여러 섬들을 노략질할 것인지, 명의 아문으로 가서 귀순할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류 또한 공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토벌 분위기가 바뀔 조짐을 보이자 인조가 다시 선을 그었다. 그는 ‘유흥치가 우리의 공격 기미를 눈치채고 일단 섬들 사이로 피했다가 우리의 자세가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가도로 들어가 그 심복들을 죽인 뒤 병력을 선천과 철산 사이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또 이서에게도 밀서를 보내 섬을 반드시 토벌하고 항복한 달족들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가도에 대한 공격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던 6월, 후금 사신 일행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이 여전히 가도에 쌀을 공급하고 있다고 힐책하고, 과거 자신들이 무역했던 청포(靑布)를 유흥치에게 빼앗겼다며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실제 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에서는 후금군 3000명이 청포를 내놓으라고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가도 정벌에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가도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벌을 그만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졌다. 토벌군 병력들은 한창 더운 여름철에 무작정 해상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원성이 터져나왔다. 1630년 6월28일, 부원수 정충신은 조정에 보낸 장계에서 군사를 파하라고 촉구했다. 일선 지휘관으로부터 파병(罷兵) 의견이 제시되자 비변사 신료들은 속히 정벌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오직 김류만이 토벌을 중지하는 데 반대했다. 인조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을 때 최명길이 나섰다. 그는 ‘해상에서 노숙하느라 지쳐 쓰러진 병사들이 많은데 장수들은 그들이 도망갈까 염려하여 상륙을 금지하고 있다.’며 현지 상황을 전했다. 놀란 인조는 결국 수군만 남기고 육군은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가도 정벌 시도가 결국 유야무야 되는 순간이었다. 나라 안팎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전후의 맥락을 제대로 헤아려 보지 않고 내렸던 인조의 ‘결단’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고충처리위원장 신철영, 과거사정리위원장 안병욱, 중소기업특위원장 노준형

    고충처리위원장 신철영, 과거사정리위원장 안병욱, 중소기업특위원장 노준형

    노무현 대통령은 29일 장관급인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에 신철영(사진 왼쪽·57) 고충처리위 사무처장 겸 상임위원을 승진, 내정했다. 사무처장 겸 상임위원 후임에는 남영주(50)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내정됐다. 노 대통령은 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에 안병욱(가운데·59)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를,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노준형(오른쪽·53) 서울산업대 총장을 각각 내정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6)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6)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내가 왕궁리 오층석탑이 백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이 탑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토로한 사람은 어느 서정시인이 아니라,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입니다. 그는 지난해 이화여대 초빙교수를 정년퇴직하기에 앞서 미술사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백제 지역을 답사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백제 무왕이 새로운 도읍으로 점찍어 두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던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는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고 합니다.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차창 밖으로 스치는 조형에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는 것이지요. 그 박수소리는 미(美)에 대한 찬사였고, 이 탑이 백제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은 건립 시기를 두고 이론이 적지 않았습니다. 백제시대설과 통일신라 초기설, 그리고 고려시대 초기설이 엇갈렸지요. 그동안에는 ‘옛 백제 영토 안에서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대세였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 현장의 안내판에도 ‘이 탑은 전형적인 백제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높이는 8.5m이다.…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 전 관장은 초지일관 백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탑을 처음 본 것이 1986년, 두 번째가 1989년, 세 번째가 1989년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발표한 글에서 그는 “처음 보았을 때 백제 것임을 의심치 않았고, 두 번째 백제 것임을 재확인하였으며, 세 번째 나의 감각적 파악을 실증하고 싶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이후 ‘감각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에 접근해 조목조목 백제석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를 제시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 탑은 나름대로 백제석탑의 완성으로, 통일신라의 감은사탑에 직접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지요. 그의 주장에 결정적으로 신빙성을 높여준 것은 왕궁리 탑에 모셔져 있던 사리장엄이었습니다.1965년 탑을 해체해 수리하는 과정에서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돼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었지요. 그런데 2003년 송일기 전남대 교수는 지붕돌에서 나온 금강경판을 중국과 일본에 있는 모든 금강경사경과 비교검토해 “백제 무왕 때 제작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듬해에는 한정호 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가 금제사리합의 내합에 새겨진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이 결합된 연화서운문(蓮花瑞雲紋)이 부여 능산리 고분의 금동산형투각장식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들어 6세기 중반∼7세기 전반 백제시대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무엇보다 왕궁리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올해 왕궁리 공방터에서 나온 도가니와 다량으로 출토된 금세공품의 성분과 제작 기법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은 백제의 장인집단이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왕궁리 탑의 사리함과 금강경판은 각각 동판과 은판에 금으로 도금한 것인데, 금과 수은을 2대8로 섞은 아말감을 쓴 기법이 바로 공방터의 그것과 똑같았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우리는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터 서탑 말고도 백제시대 석탑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1400년이 지나, 그것도 젊은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낼 만큼 아름다운 석탑이 제 나이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dcsu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모문룡을 제거한 이후 원숭환은 가도( 島)에 대한 정비 작업에 나섰다.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임시로 가도의 군병들을 지휘토록 하는 한편, 유해(劉海)를 시켜 진계성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가도로 보내 주민들을 위무(慰撫)하고 군병을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모문룡과 결탁했던 인물들을 제거하고, 노약자들을 찾아내어 등주(登州) 등지로 이주시켰다. 바야흐로 가도는 후금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개편되고 있었다. ●변화하는 가도 상황과 조선 가도의 노약자들을 명 내지로 옮긴 원숭환의 조처는 조선의 숙원이었다. 그들이 먹는 식량의 대부분을 조선이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미 광해군 시절부터 ‘전투 병력만 남기고 노약자들을 색출하여 등래(登萊) 지역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지만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을 무시해 왔었다. 원숭환은 또한 가도 군병들이 조선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으로서는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숭환의 이 같은 조처들은 일견 조선에 대한 ‘배려’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조선을 통제하려는 조처도 빼놓지 않았다. 원숭환은 조선 사신들이 북경으로 갈 때 이용하는 해로를 바꾸었다. 가도에 들렀다가 여순(旅順) 근처의 섬들을 지나 산동반도의 등주로 상륙하는 기존의 길을 폐지하고, 각화도(覺華島)를 거쳐 자신이 머물던 영원에 들러 가도록 했다.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였다. 조선이 모문룡의 작폐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모문룡에게 길들여져 후금과 싸울 의지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은 조선을 철저히 견제하여 후금과의 결전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이 가도를 장악한 이후, 조선이 운신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후금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던 원숭환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1629년(인조 7) 8월,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 일행이 후금에서 돌아올 때, 아지호(阿之好)와 중남(仲男) 등 후금의 사절단도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당시 가도에 와 있던 원숭환의 부하 서부주는 후금 사절단 일행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시도했다. 진계성 등이 적극적으로 뜯어말려 미수에 그쳤지만, 서울을 왕래하는 후금 사신들은 청북(淸北) 지역을 지날 때마다 명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자연히 그들도 자위(自衛)를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대동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명군과의 충돌 가능성도 높아져 갔다. 조선은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명과 후금 모두로부터 ‘은혜를 저버렸다.’,‘맹약을 어겼다.’는 등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親明,主戰의 분위기가 높아가다 조선은 ‘후금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원숭환의 압박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을 생각하면 원숭환의 종용에 당장 따르고 싶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후금에 적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유지되고 있는 후금과의 화친이 깨질 경우 평화는 물론, 모든 것이 결딴날 판국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1629년 10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심양을 출발하여 명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는 원숭환이 절벽처럼 버티고 있는 영원성으로 향하지 않고 몽골족들이 살고 있는 만리장성의 외곽으로 우회하는 길을 잡았다. 홍타이지는 장성 동북쪽의 희봉구(喜峰口)라는 곳을 통해 북경 부근으로 진입하여 황성(皇城)을 기습했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거치지 않고도 북경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명 조정은 경악했고 북경 주변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뒤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당시 영원성에 있으면서 홍타이지의 장성 돌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원숭환은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1630년(인조 8) 1월, 평안병사의 장계를 통해 황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선 또한 경악했다. 인조는 번국(藩國)의 신하로서 숭정(崇禎)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정전(正殿)에 머물지 않고 월랑(月廊)에 거처하면서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신료들은 가도에 사람을 보내 정확한 정보부터 탐지하자고 했다. 인조는 “장계를 보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에 약간의 병력만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오랑캐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뒤엎어 버릴 적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료들도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스스로 느끼는 자괴감을 계속 쏟아냈다.2월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이귀는 “우리와 중국의 관계는 의리로 보면 군신(君臣)이고 은혜로 보면 부자(父子)”라며 “군부(君父)가 환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수수방관할 수 있냐?”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는 아예 병력을 이끌고 오랑캐의 소굴을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광현(金光炫)은 “오랑캐가 황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의리를 보여주기는커녕 조정은 풍정(豊呈, 잔치)의 명목으로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있다.”고 통탄했다.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은 엉뚱한 방향으로도 불똥이 튀었다.‘후금군의 배후에 있으면서 황성이 포위되었음에도 팔짱만 끼고 있다.’는 명 조정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가도의 서부주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1630년 3월, 오랑캐의 사자를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명군 병력을 이끌고 의주에 잠입했다. 명군은 의부부윤 이시영(李時英) 등을 마구 구타하고 물건을 약탈했다. 이시영은 당시 의주에 머물던 호차(胡差) 중남 등을 탈출시켜 창성(昌城)으로 안내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강 건너에서는 후금 장수 용골대 일행이 군대를 이끌고 건너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가도의 반란 가도를 ‘요동 수복의 전진기지’로 재정비하려던 원숭환이 하옥되자 가도의 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섬 전체를 장악할 만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숭환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진계성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사람이 본래 무른데다,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부하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유해는 민완하고 눈치가 빨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도의 모든 권한은 유해와 그 형제들에게 집중되어 갔다. 1630년 4월, 유해의 동생 도사(都司) 유흥치(劉興治)는 반란을 일으켜 진계성을 살해하고 가도의 권력을 장악했다. 원숭환이 사라진 여파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가도에서 일어난 변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인조와 조선 조정은 격앙되었다. 인조는 4월 21일 비변사 신료들을 소집했다. 인조는 이 자리에서 유흥치를 ‘명 조정의 반적(叛賊)’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좌의정 김류(金 )도 유흥치가 분명 오랑캐에게 투항할 것이라며 속히 토벌하자고 동조했다.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은, 수군 3천명을 동원하여 유흥치 일당의 배를 불태우면 역도들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김류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의 동조 속에 인조는 토벌대의 대장에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를, 수군 사령관에 정충신을 지명했다. 반대하는 신료들이 의견을 채 제시하기도 전에 원정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인조는 고무되었다. 그는 ‘유흥치는 항우보다 나쁜 자’라며 ‘토벌은 명분이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묘호란을 맞아 오랑캐와 화친하고, 황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자괴감을 유흥치 토벌을 통해 한꺼번에 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바야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도 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 병력을 뽑아 조련시키고,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확보하며, 군량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는 자강(自强)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후금에 복수” 군비 강화론 급부상 1627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인조는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내가 좋아서 오랑캐와 화친했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친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춰 설욕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은 빨리 장수를 선발하여 병사들을 조련시켜라.” 화친한 것 때문에 척화파 신료들로부터 ‘항복한 임금’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인조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군대를 길러 적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 정묘호란 직후 인조는 과거와 달리 부쩍 상무(尙武)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우리 장사들이 갑옷 착용을 기피한다.’고 비판하고 갑주(甲胄)를 제대로 마련하라고 유시했는가 하면,1628년 10월에는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사들을 시험하고 기예가 뛰어난 자들을 시상하기도 했다. 인조의 지시를 계기로 호란 직후부터 후금에 복수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책들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1627년 4월, 병조판서 이정구는 전국의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지휘관을 파견하여 정예롭고 건장한 장정들을 뽑으면 최소 5만∼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지방의 병사(兵使)나 수령들에게 능력 있는 무신을 수시로 천거토록 하여 지휘관을 양성하고, 서울에 도체부군문(都體府軍門)을 설치하여 지휘관들을 집결시켰다가 유사시 지방으로 파견하여 현지의 병력을 지휘토록 하자는 방책을 제시했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기동력이 탁월한 후금군의 돌격을 막으려면 조총수(鳥銃手)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1만의 장정을 뽑아 조총을 교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습이 끝난 뒤에는 사격 시험을 치러 3발을 쏘아 2발 이상을 명중시킨 자를 선발하자고 했다. 또 성능이 뛰어난 일본산 조총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을 왜관(倭館)이나 대마도로 보내 수입해 오자고 건의했다. 비변사 또한 각 도에 비축된 군기(軍器)들을 점검하여 병사들의 수와 일치하는지를 조사하고, 감사와 병사들을 채근하여 수시로 점검토록 하자고 강조했다. 정경세 등은 군량과 군수 확보를 위한 방책도 제시했다. 그는 먼저 군량 마련과 관련하여 인조와 비변사가 제시한 대책들을 비판했다. 그는, 몇몇 하급 관리와 서리의 숫자를 줄이고 왕실의 제수(祭需)와 어공(御供)을 감축하여 절약된 비용으로 군량에 보태자는 논의는 명분만 그럴 듯 할 뿐 아무런 효용이 없다고 일축했다. ●군포 징수등 근본 대책 싸고 논란 정경세는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들을 아예 혁파하고, 왕자나 공주 등 궁가(宮家)에서 독점하고 있는 토지와 어장(漁場), 염전(鹽田) 등의 면세 특권을 없애고, 인조의 사금고나 마찬가지인 내수사(內需司)를 없애라고 요구했다. 정경세 등은 더 나아가 군사 재정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거두자는 주장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여염의 품관(品官)이나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들에게서 포를 징수하면 1년에 수십만 필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법제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군사 재정이 어느 정도 확보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실시하자고 촉구했다. 정경세 등은 그러면서 ‘전하께서 애절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외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 요구되는 주문이었다. 인조는 물론, 궁가들과 반정공신, 그리고 일반 양반들까지 지배층 전체가 기득권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인조는 궁가의 특권을 폐지하고 내수사를 없애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신료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은 ‘조종(祖宗)의 옛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경세 등은 ‘군사와 군량이 없어 나라가 보존되지 못하면 궁가의 재산도 결국 적의 소유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광해군 때 궁가들이 점유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국가로 소유권을 넘긴 토지와 어장을 본래의 궁가들에게 반환하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전쟁 때문에 빚어진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려면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막상 무엇부터 손을 대고, 어떤 특권부터 혁파해야 할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현실이었다. ●개혁 부진속 흔들리는 민심 1628년 8월,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는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현실을 진단했다. 그는 당시를 ‘기강이 무너지고 탐풍(貪風)이 치성하여 염치가 사라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역모가 빈발하고, 오랑캐의 공갈 속에 인심이 흉흉한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호패법(號牌法) 폐지 이후 도망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정들을 군적(軍籍)에 올리기 위해 친족과 이웃까지 닦달하면서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적이 물러간 지 1년이 지나자마자 비변사 신료들은 끽연과 우스갯소리나 일삼고, 지방의 지휘관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술타령을 벌이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상황이 정돈되지 않고 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서 역모 사건이 빈발했다. 이인거(李仁居)가 일으키려 했던 반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1628년 1월,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을 기도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제천에 유배되어 있던 북인 잔당 유효립 등은 “반정공신들이 포학하여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는 등의 명분을 내걸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들은 광해군을 복위시켜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宣祖 7子)을 추대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환관을 시켜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진술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 50여 명이 자복(自服) 후에 처형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1628년 3월에는 유학(幼學) 임지후(任之後)의 고변(告變)이 이어졌다.“공신들을 모두 죽이고 광해군을 복위시킨 뒤 인성군에게 전위토록 한다.”는 내용으로 ‘유효립 사건’과 거의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관련자 심길원(沈吉元)은 심지어 “반정 당시에도 200명으로 성공했는데 지금 무슨 어려움이 있을쏘냐?”고 진술하여 인조정권을 경악케 했다. 정묘호란 이후 인조정권은 분명 기로에 섰다. 전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집권 이후 줄곧 내세웠던 명분을 실천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군비를 강화하여 후금에 복수하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근본 대책은 마련하기 어려웠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내수사를 움켜쥐고 궁가들의 특권을 비호하는 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실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논의(戶布論)는 이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가서야 실현된다. 정묘호란 이후, 자강의 방책을 둘러싼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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