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사학과
    2026-08-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26
  • 김용근 민족교육상에 김삼웅 前관장

    김용근 민족교육상에 김삼웅 前관장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는 제25회 김용근 민족 교육상 수상자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을 선정했다고 14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근현대사 학술작업에 매진하고 저술 등을 통해 올바른 역사 인식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서울신문 주필 등을 지냈다. 시상식은 스승의 날인 15일 오전 11시 30분 광주 학생교육문화관 김용근 선생 흉상 앞에서 열린다. 시상식에 앞서 기념사업회는 김용근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단법인 창립총회도 연다. 김용근(1917~1985) 선생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해방 후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주고, 광주고, 광주일고, 전남고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5·18과 관련돼 찾아온 제자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일제강점기 총독암살단 조직 혐의 등으로 2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조선 교육기관’ 서원 9곳 유네스코 세계유산 된다

    ‘조선 교육기관’ 서원 9곳 유네스코 세계유산 된다

    “보편적 가치의 성리학 탁월한 증거 부합” 불교 이어 유교도 인류 유산으로 인정 이변 없는 한 최종 등재… 한국 14건 보유조선시대 성리학을 전파하던 교육기관인 서원 9곳을 묶은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전망이다. 지난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이어 14번째 등재가 확실시된다. 문화재청은 ‘한국의 서원’에 대한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의 세계유산 목록 ‘등재 권고’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로부터 통지받았다고 14일 밝혔다. ‘한국의 서원’은 아르제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6월 30일 개막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이변이 없는 한 최종 등재될 전망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지역에 은거하던 사대부가 후학을 양성한 사설학교로 강학(학문을 갈고 연구함)과 제사의 기능을 가진다. 설립 주체가 중앙정부가 아닌 유림이라는 점에서 관학(官學)과 차별화된다. ‘한국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중종 37년(1542) 경북 영주에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 사묘를 건립하면서 유례한 소수서원을 비롯해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총 9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앞서 문화재청은 2016년 4월 이코모스의 반려 조치에 따라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뒤 재도전해 3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당시 이코모스는 한국의 서원이 지난 독창성과 연속유산으로서의 연계성 등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서원의 보편적 가치를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하고 건축적 정형성을 갖춘 점 등으로 설명하고 연속유산으로서의 논리를 강조한 등재신청서를 다시 작성해 지난해 1월 이코모스에 제출해 재심사를 받았다. 재심사 과정에서 이코모스는 특히 심사 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 가운데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에 ‘한국의 서원’이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석굴암·불국사’ 등 불교 관련 유산에 이어 유교 유산도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크다. 이수환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건축적인 측면과 함께 역사성을 더욱 부각해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고,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며 “서원은 현재 우리 한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유교적 가치의 원형을 이루고 있고, 성리학을 각 지역마다 전파시킨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코모스는 심사평가서에서 등재 이후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전 관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추가적 과제 이행을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들과 협의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경동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사무국 간사는 “이들 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보존 상태도 다른 문화재 가운데서도 우수한 편”이라며 “유네스코 권고안에 따라 통합적 관리 및 조직 체계화 방안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해인사 장경판전·종묘(1995년), 창덕궁·수원 화성(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을 포함해 세계유산 14건을 보유하게 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경북대,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 선정

    경북대학교(총장 김상동)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2019년 상반기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인 ‘인문한국플러스(HK+1유형) 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이번선정으로 경북대 인문학술원은 ‘동아시아 기록문화의 원류와 지적 네트워크 연구’ 사업을 추진하게 되며, 연간 12억5000만원 최대 7년간 총 87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된다. 경북대 사학과 윤재석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은 이번 사업은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 동아시아 지역의 기록자료인 죽간 또는 목간 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총 40여명의 연구인력이 참여하며, 역사학, 한국어문학, 고고인류학, 철학, 고문자학, 서지학, 사전학 등 분과학문 전문연구자 간 경계를 넘는 학제적 연구로 진행될 예정이다. 또 인문학 연구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환원하기 위해 ‘지역인문학센터’를 설치하고, 대구·경북 지역민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비롯한 다양한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실시할 계획이다. 윤재석 교수는 “사업의 주된 연구대상인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의 죽·목간은 현재까지 중국 40~50만매, 일본 약 40만매, 한국 약 900매 정도 발굴되어 동아시아 각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동아시아 죽·목간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 연구가 시도된 점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는 학술사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번 ‘인문한국플러스사업’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진행되는 최초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인문학 연구 사업이라는 점에서 영남지역 인문학맥의 불씨를 일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퇴근 후 자정 넘겨도 좋아” 한지공예에 빠진 청년

    “퇴근 후 자정 넘겨도 좋아” 한지공예에 빠진 청년

    여성 주류 분야서 섬세한 작품세계 구축 휴일에도 작업에 모든 시간 쏟으며 집중 전통공예 원형 오래 유지하는 데 힘쓸 것“처음 시작은 태극삼합상자, 반짇고리, 팔각상 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에 푹 빠졌어요.”남성, 그것도 청년으로 지난달 제25회 전국한지공예대전에서 대상을 꿰찬 조호익(27) 작가는 8일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번엔 전통색지로 만든 ‘색실함과 색실첩’을 출품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작가들을 눌렀다. 20대 청년의 대상 수상은 공예대전 사상 처음이다. 그의 작품은 높은 완성도와 섬세한 모양으로 한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합지로 만든 색실함의 양 날개가 곧게 서 있고 천연 염색한 한지 문양을 잘 살려 전통한지공예의 진수로 꼽힌다. 특히, 여성이 주류인 한지공예 분야에서 20대 청년이 갖추기 힘든 섬세함과 지구력으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극찬을 받는다. “골격부터 모든 재료를 전통한지만 고집해 제작했습니다. 요철자 색실함은 바탕에 괴하나무염색지, 문양지에 황토지를 사용했고 왕자 색실함은 바탕에 소목염색지, 문양지에 선인장벌레염색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겉 문양에는 자수문양, 속 문양에는 창살문양을 바탕에 깔고 복판에 조각보 문양을 오려 여러 색지로 배접해 조화로움을 표현했다”며 “여성이 사용하는 기물이었던 만큼 화사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한지공예에 뛰어든 것은 대학 역사학과 1학년이던 2011년 여름방학부터다. 한지업계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부모는 아들의 고집스러운 성품과 꼼꼼한 재능이 전통공예에 잘 맞는 것을 알아보고 적극 후원했다. 조씨는 전북무형문화재 김혜미자 색지장을 사사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대학 졸업 후 낮에는 회사에 나가 근무를 하고 밤에는 작업을 하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전통공예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불태웠다. 평일에는 퇴근 후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휴일엔 모든 시간을 작품활동에 쏟았다. 손이 다소 느린 게 흠이지만 섬세함으로 단점을 이겨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어지간한 작가들이 수십년을 갈고 닦아도 오르기 힘든 수준에 도달한 비결이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전국한지공예대전과 대한민국한지공예대전 등에서 수상하며 가능성을 예고했다. 그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전통공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한지 기법을 다양화 하는 작품활동을 해볼 계획이라며 청년작가로서 야심 찬 미래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자만하지 않고 작품활동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전통한지공예의 원형을 오래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스승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금요칼럼] 국회의원의 대표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국회의원의 대표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지역구 국회의원의 대표성은 선거 결과이다. 특정 지역 유권자로부터 최다득표를 얻음으로써 그 지역의 대표가 되고, 바로 그 자격으로 국회에 들어간다. 현재는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주민소환제가 없으므로, 투표 결과는 임기 4년 동안 국회의원 자격을 무조건 보장한다. 그러다 보니, 일단 당선만 되면 유권자는 안중에 없다. 마치 선거구 지역의 중세 봉건영주인 양 득의양양하여 정치적 이합집산을 자기 마음대로 자행한다. 지역구 유권자를 농노 보듯이 한다. 최소한의 양심이나 상식조차 안중에 없다.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애초 정당으로 입당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해 줄 만하다. 그러나 특정 정당 공천을 받아 지역구에서 당선된 후 임기 중에 다른 정당으로 갈아탄다거나, 집단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 간판을 내거는 행위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유권자의 동의를 확실하게 받아야 가능하도록 국회의원 선거법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를 뽑아 준 유권자의 동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정당을 바꾼다면, 국회의원의 대표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면 선거구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서 국가대표가 된 자다. 유권자는 숱한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다. 예전에는 정당보다 인물이 더 중요한 투표 요인이었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인물이 정당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정당의 수명이 특정 인물보다도 짧았다. 예전의 ‘3김’이라거나, 최근의 친노, 친이, 친박, 비박, 친문 등의 용어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야말로, 정당보다는 인물이 우위를 점하는 우리 정치풍토를 잘 보여 준다. 그래도 최근에는 갈수록 정당이 중요한 선택요인으로 부상한다. 2004년 탄핵역풍으로 당시 여당 후보가 초선으로 대거 국회에 진출한 것은 정당 배경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주요인도 후보자 개개인보다는 어떤 정당 소속인지가 유권자의 선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요즘엔 국회의원 후보라 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유권자가 드물다. 사회생활이 워낙 다양해지다 보니, 신문의 정치면 기사를 매일 확인하는 유권자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후보자 면면을 다 알 수 없다 보니, 유권자의 관심은 더더욱 정당 배경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당 배경을 고려해 투표하는 경향은 갈수록 뚜렷하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이런 상황임에도,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자기 마음대로 정당을 바꾼다면, 그것은 지역구 유권자에 대한 위약이자 일종의 사기에 다름 아니다. 투표행위는 일종의 구매와도 같다. 물건을 고를 때 구매자는 온갖 조건을 따지는데, 메이커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택배로 받은 물품의 메이커가 다른 회사라면, 당장 전화하여 반품처리하고 구매후기에 불만을 쏟아 낼 것이다. 국회의원이 상품은 아니지만, 선택받는 기본원리는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임기 중에 어떤 이유로든 정당배경을 바꾼다면, 그 유효성 여부를 객관적인 수치로 공인받아야 한다. 선거구 유권자를 상대로 국민투표식의 정당변경 찬반투표라도 하여, 공식절차에 따른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선거비용은 국민 세금이 아니라, 정당을 바꾸려는 국회의원 본인이 전액 부담해야 할 것이다. 이번 주 뉴스에 부쩍 많이 나오는 이언주 국회의원을 보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들 지경으로 갈아타기의 달인이다. 그래서 그의 행보는 ‘정치’가 아니라 차라리 ‘국민모독’에 가깝다. 이언주 뒤에 숨어 있는 국회의원·정치인도 그 본질은 같다. 정당을 연례행사처럼 바꿔치는 저런 갈아타기 명수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국회의원으로 대우할 것인가?
  • “행정도 ‘실사구시’로… 광산 경제 활성화·생활 안전 힘 쏟을 것”

    “행정도 ‘실사구시’로… 광산 경제 활성화·생활 안전 힘 쏟을 것”

    광주 광산구는 1988년 ‘광산군’에서 광주광역시로 편입됐다. 면적은 223㎢로 광주시 전체의 45%를 차지한다. 송정(리)권·수완·첨단 등 도시권역과 본량·임곡 등 농촌 지역이 혼재한다. 도시의 공간 구조상 개발 잠재력이 크고 여건도 좋다. 광주의 관문인 호남고속도로 광주톨게이트, 광주송정역, 광주공항 등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어등산·영산강·황룡강 등 관광 자원도 풍부하다. 무엇보다 산업단지가 밀집한 ‘경제 중심구’이다. 하남·평동·첨단 등 5개 산업단지에 2400여개 기업체가 입주했다. 이는 광주 중소 제조업체의 80%에 해당한다. 인구 41만 7000여명의 평균 나이가 37.0세로 전국 2위, 유소년 인구비율 17.6%로 전국 3위이다. 젊고 역동적인 경제활동 인구가 많다는 의미이다. 초선인 김삼호(55) 광산구청장은 18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런 여건을 지역 활력으로 살려내는 ‘경제구청장’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첨단’과 ‘전통’이 공존하는 광산구의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지역경제 활성화’와 ‘생활 안전’이다. 대부분 기초자치단체는 민선 5~6기 동안 시민참여·복지·공동체·자치분권 등을 주요 가치로 삼았다. 어느 정도 성과도 냈다. 그러나 이제는 행정도 ‘실사구시’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래서 민선 7기엔 ‘일자리와 안전’에 초점을 뒀다.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그 어느 복지 프로그램보다 낫고 ‘지속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시민참여형 안전진단 프로젝트를 취임 1호로 결재할 만큼 안전을 강조했다. 동별로 시민안전점검단이 생기고, 이들이 제기한 관련 민원 등 2460여건을 처리했다. 경제적 여유와 생활 안전이 확보된다면 주민의 행복수준은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골목상권 등 실물경제는 아직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광산구는 외형적으로는 ‘경제 중심구’이지만 실물경제로 눈을 돌리면 그렇지만은 않다. 광주 지역내총생산(GRDP)의 6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금호타이어, 기아자동차 협력업체 등이 밑바닥 경제를 움직여왔다. 그러나 10년 후에도 똑같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미 삼성전자의 일부 백색가전 생산라인 해외 이전이 이뤄졌고, 수소차·전기차 시대를 앞두고 기아차 협력업체의 혁신도 필요한 시점이다. 금호타이어도 중국 기업으로 넘어갔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제적 변화의 시대에 자구적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여건이다.”-기초자치단체로서 대처할 방안은. “대규모 개발이나 투자 유치 등 거창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골목상권 부활 등 지역경제의 기초체력을 튼튼히 다질 방법은 많다. 민선 7기 구청장으로 취임해 보니 기업지원팀 1개가 지역 산업과 경제를 전담하는 정도였다. 두루 살펴봤더니 예산이 많이 투입된 사회적기업 등은 양적으로 팽창해 있으나 경쟁력은 갖추지 못했다. 중소기업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해결책을 고민하던 끝에 광주과기원, 광주테크노파크, 금융기관 등과 업무지원협약을 체결한 뒤 지난해 12월 평동산업단지에 ‘기업주치의센터’를 출범했다. 민간 위탁 방식으로 경영·기술·금융·마케팅 주치의(전문 컨설턴트) 4명을 채용했다. 이들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경영 전반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 제시, 정책 연계, 학습프로그램 지원, 인식 개선을 통한 우수 인력 유치 등을 꾀하고 있다. 현장맞춤형 기동반 운영, ‘올 케어 멘토링’ 지원 등도 맡는다. 조만간 실질적인 성과가 기대된다.” -광산구가 최근 국가균형발전위의 지역발전투자협약 시범사업에 선정됐다. “지난 9일 ‘공기산업’이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시범사업에 선정되면서 180억원을 지원받는다. 5개 산업단지가 있고, KT의 관제시스템과 빅데이터를 사용키로 사전 협약한 게 주효했다. 이번 사업 선정으로 광주시가 추진 중인 3500억원 규모의 ‘친환경 공기산업 육성 프로젝트’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우리구는 ▲실외 실시간 미세먼지 최적 관측망 및 버스정류장 기계 환기 시스템 개발(70억원) ▲시범 실증단지 구축과 미세먼지 예·경보 시스템 운용(10억원) ▲공기산업 중심 중소기업복합지원센터 설립(100억원) 등을 추진한다. 공기산업 기업 2개를 유치하고, 15개 지역업체를 공기산업 기업으로 전환해 직·간접 일자리 110여개를 창출한다. 이 같은 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위기를 맞은 백색가전과 자동차 부품산업에 돌파구를 마련할 계획이다.” -광주 송정역 일대 역세권 개발이 가시화하고 있다. “광주시와 모 건설업체가 맺은 송정역복합환승센터 개발이 사실상 물 건너가면서 향후 개발 방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어등산 개발과 공군부대 이전, 금호타이어 공장 이전 등 굵직한 사업과도 맞물려 있다. 그런 만큼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난 1월 광주시와 미래에셋대우, 금호타이어가 송정역과 이웃한 광주공장 이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개발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기초자치단체로서 도시계획 변경을 주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송정역권이 충장로권, 상무지구권과 함께 광주 3대 도심축으로 발전할 공산이 크다. 보다 구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개발 방안이 마련되도록 주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토록 노력하겠다.” -도시 내 농촌지역은 역차별을 받고 있다. 구 전체의 60%가 농촌이다. 농업인은 9000여명으로 인근 전남 장성군의 1만 2000여명과 별 차이 없다, 농업 생산량 역시 장성군의 70%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높다. 그럼에도 일반 시군과 광역시 자치구의 농촌에 대한 국가지원은 너무 차이가 크다. 자치구 농촌이 농어촌지원사업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탓이다. 국가균형발전법 등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통일열차 편성과 운행이 관심을 끈다. “광주송정역을 널리 알리는 취지도 담겨 있다. 지난해의 남북정상회담 1주년인 오는 26일 광주송정역~도라산역 사이 무궁화호 특별열차를 운행한다. 이를 위해 지난 2월 코레일과 ‘투게더광산나눔문화재단’이 업무협약했다. 이날 오전 7시 송정역을 출발해 오후 11시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이미 300여명의 탑승객 모집은 끝났다. 이들은 도라산역으로 가는 도중 열차 안에서 다양한 문화 공연과 통일 강연을 즐길 수 있다. 도라산역에 도착해서는 통일토크와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행사, DMZ 현장 탐방도 준비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문화·의료·보건 분야의 남북교류사업도 구상 중이다. ‘광산통일열차’ 운행은 그 첫 단추를 채우는 행사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김삼호 광산구청장은 고향서 농민운동 하다 정치 입문…노무현 정부 청와대 행정관 역임 전남 곡성 출신인 김삼호(55) 광산구청장은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고,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가 대통령선거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하다 1998년 당시 고현석 곡성군수 비서실장으로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 후보 의전비서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 한국광해관리공단 호남지역본부장, 민간컨설팅회사 임원 등을 거쳐 광산구시설관리공단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처음 선출직인 구청장에 당선됐고, 현재 노무현재단 광주지역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글로벌 In&Out] 나선 정벌과 한러 관계의 기원/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나선 정벌과 한러 관계의 기원/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국제 정세의 긴장이 아직 완화되지 않았음에도 한국과 러시아는 관계 개선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소식만 보면 러시아 정교회 한국 선교 재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트루트네프 러시아 부총리 겸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가 서울에서 진행한 9개 다리 행동계획 서명식, 광양시와 아스트라한시 간의 우호도시 협약 체결 등이 대표적인 실례이다. 지난 4일 러시아 정교회가 정교 역사상 최초로 대한교구 관할 주교로 러시아 한인인 김 테오파니스를 임명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현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현재를 바꾸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났고 그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인과 한국인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시기에 대한 의견은 많으나 오늘날 러시아 한국학계에서는 이것이 13세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주교 프란치스코회 수사 지오반니 카르피니가 13세기에 편찬한 ‘몽골인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였다. “우리는 몽골 황제의 궁정에서, 귀족 출신으로 러시아의 대공인 야로슬라프, 그루지야 왕과 왕비, 그리고 많은 위대한 술탄들, 또한 솔랑기(고려인)의 수장을 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그들(몽골인들)로부터 격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았다.” 17세기 후반, 러시아의 특수 병농 일치 신분인 카자크(cossack)들이 동유럽에서 시베리아를 비롯한 동남쪽으로 진출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고 “고려의 섬(한반도) 주변 바다에서 항해가 가능하다”는 보고까지 보냈다. 이 카자크들은 아무르강의 흐름을 따라 남하하면서 작은 마을과 요새(오스트로그)를 세워 나갔다. 이러한 곳에서 러시아와 조선의 상인들이 물품 교환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네르친스크라는 요새에서 조선인 상인들이 러시아 상인들과 만나 생사(生絲), 종이 등을 모피로 교환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진출이 러시아와 청나라 간 국경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카자크들과 싸우기 위해서 청나라는 조선으로부터 지원을 요구하였고 효종5년(1654년) 2월 2일 청차(淸差) 한거원(韓巨源)이 귀경해서 효종에게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는 “조선에서 조창(鳥槍※조총)을 잘 쏘는 사람 100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邦章)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 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라고 하였다. 효종은 “나선은 어떤 나라요”라고까지 물어 나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나 청나라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함경북도 병마우후인 변급(邊?) 휘하의 포수 100명을 포함한 150여명 규모의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조선 지원군은 청나라의 부대들과 함께 카자크 부대들을 공격했으며 승리를 거둔 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카자크들은 만주에서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곧 돌아왔다. 이때 청나라가 다시 카자크를 정벌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조선은 함경북도 병마우후인 신유(申瀏)를 지휘관으로 하는 260여명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약 2500명 규모의 조청연합군은 스테파노프를 대장으로 하는 500명의 카자크 부대를 공격했다. 열세에서 카자크 부대들은 방어전을 폈으나 보급선이 끊겨 식량과 화약이 떨어져 큰 피해를 입으며 패배했고 스테파노프는 전사하였다. 카자크들은 아무르강에서 진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는 국경협상을 시작하였고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인과 한국인이 처음 만난 시대적 배경이다.
  • “국가의 주인, 왕 아닌 나”… 5000년 역사 첫 개인 주권시대 열어

    “국가의 주인, 왕 아닌 나”… 5000년 역사 첫 개인 주권시대 열어

    세계 최초로 헌법에 ‘민주공화정’ 명기 세계 대공황 후 진보 색채… 파업권 도입 상하이 활동가 중심 파벌주의 반면교사로 민족·세계시민 사이 정체성 공존도 과제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국가와 국민주권국가 수립 욕구를 처음으로 구체화했고 국내외 여러 정부를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 대표체로 거듭났다. 이것만으로도 임정은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11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에 준 영향과 과제, 의미를 들여다봤다. 임정은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한 동시에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닌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 움직임을 완전히 단절시켰다.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국가에서 살게 된 것은 임정의 수립이 결정적이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1일 “임정 설립과 이후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는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정으로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소개했다.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정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공화제 국가로 태어난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왔다. 이에 여운형(1886~1947)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답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국호가 정해졌다. 다음날인 11일 이들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뒤 임시헌장(1차 헌법)을 반포했다. 새 헌법은 내용이 너무 간략해 선언적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방향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임정은 민주공화제와 대의제를 채택하고 평등권과 자유권, 참정권을 인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했다. ‘소유의 자유’를 명시해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생명형(사형)과 신체형(태형)을 폐지해 인도주의 원칙도 명시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헌법에 ‘민주공화정’을 명기한 것은 임정이 세계 최초였다”고 설명했다. 세계 대공황(1929~1933)을 통해 제어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하고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1898~1958) 등이 임정에 가담하면서 임정은 민주공화정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진보적 색채를 대거 가미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파업권 등이 이때 도입됐다. 학계에서는 3·1운동으로 임정이 수립된 것을 두고 ‘5000년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한반도에 민주공화정을 세우는 토대가 됐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임정은 우리에게 숙제도 남겼다. 1919년 9월 11일 임정은 여러 정치세력을 한데 모아 통합정부로 태어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권을 쥐고자 다른 세력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해 갈등을 빚었다. 만약 이때 모든 세력을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달라졌을 수 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TV에서 흔히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아직 1919년 4월에 입주한 첫 번째 청사를 찾지 못했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기에 김구의 혈통적 민족 개념에 대한 발전적 계승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까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민족과 세계 시민 사이의 상반된 정체성을 어떻게 공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에 불을 붙인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학계에서는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 1순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을 복권할 수 없다’, ‘김일성도 반일투쟁을 했다는데 그에게도 훈장을 줘야 하느냐’며 극단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 항일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을 평가하는 지금 우리는 분단의 결과물인 ‘이념’을 잣대로 들이댄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늘 배제돼 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김원봉, 항일투쟁 업적에도 월북해 논란 “공산당 활동을 하고 월북한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겠다고 한다. ‘뼛속까지 빨갱이’였던 이를 서훈하겠다는 이 정부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나.” 지난달 26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보인 반응이다. 피 처장은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인가’라는 정태옥 한국당 의원의 질문에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이어 “지금 기준으로는 (서훈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북한과)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고 해서 (서훈 수여를) 검토하지 말라고 하는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과 6·25전쟁을 치렀지만 그런 부분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한국당은 피 처장의 발언을 문제삼아 해임결의안을 추진 중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의열단장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일제는 김원봉을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방 뒤 월북 행적 때문이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숙청될 때까지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했다. 사회주의자인 이동휘(1873~1935)와 한위건(1896~1937), 김두봉(1889~?)도 업적에 비해 저평가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분단 특수성 이유 사회주의자 대부분 저평가 한위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을 지냈다. 1920년 일본 유학 당시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연루돼 검거됐고 이듬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 시위 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2005년 좌파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규식 중앙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 초기 학생 조직을 만드는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1907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됐고, 안창호(1878~1938)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운동 전면에 나섰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1913년 시베리아·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무관 양성에 앞장섰고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박한용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이동휘는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며 “그의 활동에 비해 우리 교과서에서도 언급이 적다보니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을 진행한 한글학자 김두봉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40년대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조직했고 북한 정권에서 최고인민회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 초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1958년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중노동을 하다가 1960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옥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김구나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 분단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사회주의계열 인물들이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분단 상황 때문에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 주의 택한 것은 독립운동 위한 한 방법” 사회주의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제에 맞섰지만 지금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과 김두봉은 현행법에선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단순히 사회주의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한반도를 소위 ‘붉은 국가’로 만들고자 치밀한 계획을 갖고 항일투쟁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조국 독립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동휘조차도 “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고백했다.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는 “일제 침략 시기에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제국주의 폭압에 맞서는 대안 이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에는 이런 사정이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연안파는 6·25전쟁 뒤 김일성이 중심인 빨치산파에 의해 북한 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돼 남북한 양측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연안파는 중국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 세력을 뜻한다. 조선의용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 치열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조직이다. 일부는 임정과 손잡고 한국광복군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중국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방 뒤 남쪽에선 좌파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쪽에선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사라졌다. 우리부터라도 ‘비운의 독립군’으로 불리는 이들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광복 이전 독립운동 했다면 유공자로 봐야” 역사학계에서는 1948년 이후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니라 1945년 8월 광복 당시 행위를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로 활동한 보훈혁신위원회가 “1945년 8월 15일 이전 독립운동을 했다면 독립유공자로 봐야 한다”는 권고도 같은 맥락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념이라는 기준보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맞춰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념이나 사상에 관계없이 1945년을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임정 바로 보기’로 새로운 100년 연다

    ①남북서 외면 김원봉·김두봉 재평가 ②사초부터 확보, 숱한 논란 종식해야 ③분당·송도 등 일제 용어 잔재 청산을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역사학계에서는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의 재평가, ‘임정 수립일’이 논란이 될 정도로 부실한 임정 사초 찾기, 여전히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 청산 등을 꼽았다. 그동안 건국절 논란을 비롯해 이념적 대결 갈등에서 벗어나 ‘임정 바로 보기’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민감한 사안이라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임정 관련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판결문을 보면 ‘김일성 장군의 활약에 감동받아 항일투쟁에 나섰다’는 구절이 나와요. 생각지도 않은 내용이어서 저희도 놀랐죠.” ‘판결문에 담긴 임정의 국내 활동’을 출간한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10일 이렇게 털어놨다. 당시 임정의 활동에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한 영향을 줬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우파 위주로 진행된 독립운동사 연구의 범위를 민족 전체로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남과 북으로부터 버림받은 김원봉과 김두봉 등 ‘연안파’에 대한 재평가 주문이 많다. 연안파는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뒤 입북한 조선의용대 출신을 말한다. 독립운동연구 전문 이원규 작가는 “이들은 일제와 무력으로 맞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해방 뒤 남한에서는 ‘빨갱이’로 몰려 박해당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숙청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1990년부터 임정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기념해 오다가 올해 4월 11일로 바꿨다. 최근 발굴된 증거를 볼 때 실질적으로 내각을 구성한 날짜가 11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임정 수립 기념일을 다시 정한다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과 각원을 선출한 9월 6일이나 이동휘 등 주요 각원이 취임한 11월 3일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임정 관련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임정 자료가 거의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부는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사라진 임정 자료부터 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이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르고 쓰는 용어를 정리해 임정 수립을 통한 독립의 참뜻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경기 성남시 분당은 조선총독부가 ‘장터’(盆店·분점)와 ‘당모루’(堂隅里·당우리) 지역을 억지로 합친 뒤 앞글자만 따 만들었다. 인천 송도 신도시도 러일 전쟁 때 침몰한 일본군함 마쓰시마(松島·송도)호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3·1독립선언서 ‘신문관 판’은 가짜다”

    “3·1독립선언서 ‘신문관 판’은 가짜다”

    “최남선 신문관 판엔 현대적인 단어 써 ‘보성사 판’과 비교해 활자도 전혀 달라 33인의 명단은 27일 오후 확정했는데 신문관 판에 명단 적힌 건 정황상 안 맞아 선언서 공약 3장 최남선이 쓴 것 확실 임정 ‘민주공화제’ 표현은 세계서 처음”국가기록물로 지정된 독립선언서 2종 가운데 하나가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만해 한용운이 썼다고도 알려진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 작성자가 최남선이 확실하다는 주장도 함께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자신의 책 ‘1919’(다산초당)의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독립선언서는 현재 ‘신문관 판’과 ‘보성사 판’ 등 2종이 남아 있다. 둘 다 국가지정기록물이다. 이번에 박 교수가 가짜라고 주장한 것은 최남선이 자신의 출판사 ‘신문관’에서 제작했다고 알려진 ‘신문관 판’이다. 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밤 인쇄됐다. 최남선이 신문관에서 활판을 짠 뒤 발각을 우려해 이를 최린에게 맡겨 두고, 보성사 대표 이종일에게 “최린의 집에 있는 활판을 가져다 대신 인쇄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종일이 이를 보성사로 가져와 인쇄하려 했지만, 활판 위아래가 길어 인쇄할 수 없었다. 이종일은 활판을 다시 짜 인쇄한다. 그런데 이날 저녁 민족대표 명단을 두고 기독교계의 회의가 길어지며 민족대표 2명이 빠지고 4명이 추가되면서 민족대표도 31인에서 33인으로 부랴부랴 바뀐다. 박 교수는 “신문관 판을 보성사에서 인쇄했다면 활자가 같아야 하는데 전혀 다르다. 또 신문관 판에 현대적인 단어가 들어 있고 맞춤법이 수정된 점, 33인의 명단이 27일 오후에 확정됐는데 이보다 앞서 만든 신문관 판에 명단이 적힌 것도 정황상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관련, “해방 이후 다시 조판한 것을 한 행사에서 나눠 준 것이 신문관 판으로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만해 한용운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된 독립선언서 공약 3장 부분에 대해서도 최린의 경성지방법원 예심 진술을 들어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박 교수는 “한용운이 선언서를 자신이 짓겠다고 주장했지만, 선언서만은 육당(최남선)이 짓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이 당시 최린의 진술 내용”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또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에 관해 “‘민주공화제´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세계 최초”라고 덧붙였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美원폭에 日 항복했지만… 광복 직전 ‘독립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일본은 오늘 정오를 기해 미국에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떨리는 목소리로 종전을 선언했다. 광복을 기뻐하는 국민의 만세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중국군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1876~1949)는 크게 낙담했다. 그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일본 항복 받아낸 미국의 ‘리틀보이’ 이날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은 “짐은 제국정부(일본)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해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했다”로 시작한다. 히로히토가 말한 ‘공동선언’이란 1945년 7월 26일 발표한 독일 포츠담 선언을 가리킨다.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이 선언에는 전후 일본 처리 문제 등이 담겼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항복했다. 포츠담 선언 당시 일본은 혼자서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사실상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미국은 일본 도심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코드명 ‘리틀보이’가,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됐다. 10일 일본은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일본이 항복한 직접적 이유는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히로히토가 발표한 종전 방송에도 “적국은 잔학한 원자폭탄을 사용해 수많은 국민들을 살상하고 있다. 그 참상의 범위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더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하고 인류의 문명까지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짐작할 만한 구절이다. 민중운동가 함석헌(1901~1989)은 원자폭탄 투하 뒤 찾아온 광복에 대해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는 “우리의 광복은 미국의 원자탄 두 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미국의 폭탄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지 못했을까. ●독립단체 “광복 위한 결정적 시기 온다” 확신 1930년대 후반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하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이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상대로 국외 무장운동 세력과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격하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폭동과 무장봉기에 나서면 충분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1908~ 1932)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뒤 중국 각지를 떠돌다가 1940년 충칭에 터를 잡았다. 김구는 이때부터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며 국내에 진입할 준비를 했다. 광복군은 지청천(1888~1957)을 총사령관으로 1940년 9월 결성된 임정 최초의 정규군이다. 초기에는 장교 30여명으로 이뤄진 ‘사병 없는 부대’였다. 1942년 김원봉(1898~1958)이 조선의용대 300여명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광복군은 1945년 4월쯤 340여명, 같은 해 8월 700여명 정도였다. 아무리 많아도 1000명을 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은 군속을 포함해 최대 750만명으로 추산된다. 임정이 일대일로 맞붙어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에서 “원자탄이 없었어도 김원봉 등 걸출한 혁명가들이 일본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은 “광복군의 규모와 전투 능력을 아무리 높게 쳐도 일본을 몰아내기는 어려웠다. 광복군은 그저 항일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일본군 750만… “광복군이 몰아내긴 힘들어” 그렇다고 임정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체념에만 빠져 있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해 우리 스스로 독립을 얻어내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에는 버마(현 미얀마) 임팔전투에 참가해 1945년 7월 일본군이 패배해 철수할 때까지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8월 중국에 있던 미국 정보기구 육군정보전략본부(OSS)에서 광복군 38명이 특수요원 훈련을 마치고 국내 잠입을 기다렸다.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역사소설 전문 이원규(72) 작가는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두고 국제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장제스(1887~1975) 중국 국민당정부 총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김구 등 임정 수뇌부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 한국은 카이로 회담의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우리를 도왔다.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장 연구위원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소련의 참전 등으로 결국은 패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당시 한반도는 (임정의 다각적 노력 등이 맞물려) 광복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연합국 덕에 해방? 독립노력 폄하해선 안돼” 일부 학자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길 힘이 없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 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항복한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우리를 기다린 것은 ‘한반도 분단’이었다. 당시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뒤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했다. 당시 미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어 한반도로 바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은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나눠 들어오자”고 제안했다. 당시 임시로 친 철조망이 지금까지도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놨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리가 좀더 주도적으로 독립을 얻어냈다면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과 전쟁, 이념 갈등 등은 없었을 수도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안창호에 내란음모죄 씌운 日…궐석재판 시도했다가 여론 뭇매

    안창호에 내란음모죄 씌운 日…궐석재판 시도했다가 여론 뭇매

    1919년 3·1운동의 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동하자 일제는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김규식 등 임시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핵심 요인 16명을 재판에 넘겼다. 일제의 형법은 내란 및 내란 예비음모죄의 경우 3심 법원인 고등법원이 단심제로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등법원 검사장이었던 나카무라 다케조는 1924년 3월 공소를 취소했다. 재판부는 공소 기각 판결을 내리면서 이와 같이 적었다. “(피고인들은) 1919년 3월 이후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에 호응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기관을 조직해 각기 요직에 취임하여 (중략) 1920년 1월경 단연 독립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뜻을 관철하기로 결정하고 계책했다.”(1924년 3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오카모토 시토쿠의 판결문 일부) 검사장이 공소 취소 이유를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들 중 보석으로 풀려난 영국인 조지 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체포되지 않아 재판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상황에서 궐석재판이라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잡히지를 않으니 궐석재판을 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효력이 없어 공소를 취소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붙잡혔던 쇼는 1920년 단둥에서 신의주로 들어갔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표면상 이유는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일제는 이륭양행이라는 무역선박회사를 소유한 쇼가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가 국내와 소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피고인은 임시정부와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성질, 목적, 수단 등을 알고도 그 목적 달성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임시정부원 및 연합회원에게 자기 소유의 주택과 기타 건조물을 빌려주고 관리에게 선박을 제공해 상해와 안동 간의 왕래에 사용하게 해 군수품, 문서 등을 운반하고 금품의 발저(송금 등)에는 자기 명의를 사용하게 하고 제국 관헌의 행동을 통보하는 등 내란 예비행위를 방조했다.”(같은 판결문) 하지만 서구 언론을 통해 쇼 체포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일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법원은 쇼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쇼는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광복을 2년가량 남겨둔 1943년 11월 생을 마감했다. 3·1 운동이 만들어 낸 임시정부는 상하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 그것도 일제의 경비가 가장 삼엄한 서울 한복판에도 ‘한성정부’가 있었다. 한성정부는 13개 도와 각계 대표자가 모여 대표성과 정통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일제는 일찌감치 진압에 나섰다. “피고인 한남수, 김사국은 변호사 홍면희, 이규갑 등의 권유로 조선국민대회를 조직해 통일적으로 각소에서 봉기하는 독립운동단을 망라해 조선임시정부를 설립함으로써 계통적 독립시위운동을 하도록 기도했다. (중략) 김유인, 김사국 등은 (중략) 경성부 서린동 ‘봉춘관’에 조선 13도의 대표자를 모이게 함과 동시에 학생과 3000명의 노동자를 종로에 모아 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하며 인쇄물을 배부하는 등 실행계획을 만들었다.”(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쓰카하라의 판결문 일부) 이들 중 가장 중한 형을 받은 장채극은 징역 2년, 다른 5명은 징역 1년~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성정부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면서 민주정을 채택함을 분명히 했고 이는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로도 이어졌다. 이들이 작성한 국민대회 취지서는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중략) 민족일치의 동작으로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약법(約法) 제1조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함’ 등으로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성정부는 당시 연합통신(AP)에도 보도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고,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됐다는 점 등에서 훗날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 사건 피고인 중 한 명이었던 이규갑은 훗날 상하이로 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을 이어 나갔고 해방 후에는 제2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운영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만든 연통제와 교통국은 3년여간 운영되다가 일제의 철저한 색출 작업에 무너졌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밀조직이 임시정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1920년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연통제 운영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47명에 대한 2심 판결이 선고됐다. 이 중 가장 무거운 형인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윤태선이 받은 혐의가 당시 판결문에 자세히 기재돼 있다. “윤태선 및 박상목은 경성부 제동 취운정에서 강대호, 박시목, 송범조라는 자와 회합해 경성에 임시정부 13도 총간부를, 각 도에 그 지부를 설치해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 것을 협의했다. (중략) 일동이 이에 찬동해 지부 조직을 완성했다.”(1920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판결문 일부) 이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연통제 조직이 1919년 7월 즈음 활동을 시작해 1921년 후반 거의 소멸됐다. 국경 인접 지역인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하고는 활발할 활동이 어려웠던 탓이 컸다. 또 면 단위까지 조직된 연통제는 일제에 큰 위협이 됐기 때문에 일제가 짧은 기간 내에 색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연통제 요원들 중 사립학교 교사·학생·전도사·승려 등 지식인이 많았다는 점, 이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가 국내외를 연결하는 민주공화국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5120억원에 경매된 다빈치 ‘구세주’ 누가 갖고 있나 새 미스터리

    5120억원에 경매된 다빈치 ‘구세주’ 누가 갖고 있나 새 미스터리

    인류 최고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된다. 2017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치자 무함마드 빈살만(33)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익명의 대리인을 앞세워 4억 5030만 달러(약 5120억원)에 다빈치의 유화 ‘구세주(Salvator Mundi)’를 손에 넣은 것으로 보도돼 큰 화제가 됐다. 경매 한달 뒤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문화관광부는 이 작품을 손에 넣었다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로열티를 주고 문을 여는 아부다비 루브르에서 공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없었던 일로 했다. 파리 루브르 측도 그림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고, 아부다비 루브르의 한 관계자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털어놓아 이 그림의 소재는 경매 이후 1년 4개월 남짓 만에 다빈치를 둘러싼 새로운 미스터리가 됐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 관리들은 오는 가을 다빈치 서거 500주년 전시회에 구세주가 포함되길 갈망하고 있으며 이 그림이 시기에 맞춰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게 바라보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하지만 몇몇 다빈치 전문가들은 그림의 소재와 미래를 둘러싼 의문점들을 진작부터 제기했고 특히 루브르 아부다비가 대중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힌 직후에도 의문점을 제기했다.이 그림의 복원에 참여했으며 뉴욕 대학의 예술연구소 교수인 다이앤 모데스티니는 “예술 애호가들과 감명 받은 많은 다른 이들이 이 그림을 빼앗긴 것은 심하게 불공평한 처사라 비극적”이라고 개탄했다. 옥스퍼드 예술사학과 교수인 마틴 켐프는 “‘모나리자’의 종교화 버전”이라며 “레오나르도는 신성한 것들을 모호하게 언급하곤 했다. 나도 그게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선물받은 건지, 빌린 건지, 아니면 사인(私人)끼리 거래한 것인지는 둘째 치고 아부다비가 구입한 것부터가 맞는지 의문이다. 무함마드가 그냥 계속 소장하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워싱턴 주재 사우디 대사관도 답변을 회피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1500년쯤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의 원래 주인은 무함마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켐프 교수에 따르면 비슷한 두 작품 가운데 하나는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1649년 처형당한 뒤 소유했던 사실이 확인됐지만 18세기 말 갑자기 사라졌다. 19세기 산업혁명 때 느닷없이 경매 컬렉션에 나타났는데 “약에 쩐 히피가 한 것처럼” 심하게 덧칠이 돼 있었다. 1958년에 요즘 가치로 환산해 단돈 1350달러에 팔린 이유다.그런데 이 작품이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2005년 뉴올리언스 경매에 들고 나온 이도 있었고, 직접 학교에 있던 모데스티니 교수를 찾아온 이도 있었다. 모데스티니 교수는 덧칠된 부분을 걷어내는 등 세세하게 복원했다. 예수의 한쪽 손 손가락이 겹쳐진 것처럼 덧칠돼 있어서 그건 다빈치가 의도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손가락끼리 구분할 수 있도록 손질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빈치의 다른 작품처럼 예수의 손가락을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복원한 덕분에 진품이란 주장에 힘이 실렸다. 2011년 런던 국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된 지 2년 뒤 러시아 억만장자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1억 2750만 달러에 사들였다. 진품 논란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방영되자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2017년 세 배나 더 높은 가격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새 주인을 맞았다. 루브르 아부다비가 이 작품을 전시하지 못하자 소재 못지 않게 새로운 주인이 대중의 눈초리가 두려워 이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이미 다빈치 전문가 자크 프랑크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실에 편지들을 보내 모데스티니 교수의 복원 과정에 의심을 제기했고, 프랑스와사비에르 라우크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매우 골몰하며 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모데스티니의 작품이지, 어떻게 다빈치의 작품이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다. 그녀는 한 인터뷰를 통해 “넌센스이며 황당한 주장”이라고 말했다.뉴욕 경매에서 사들인 대리인은 사우디 왕자 바데르 빈압둘라 빈무함마드 빈파르한 알사우드로 널리 알려진 왕실 일원도 아니며 엄청난 재력을 소유한 것도, 열렬한 예술 애호가도 아니다. 무함마드와 막역하며 신뢰하는 이로만 알려져 있다. 경매 몇달 뒤 바데르는 초대 문화장관으로 임명됐다. 나중에 미국 관리들은 바데르가 무함마드의 대리인이 맞다고 확인했다. 익히 알겠지만 무함마드는 자말 카쇼끄지의 암살을 배후 조종하는 등 통치권 강화를 위해 부심하고 있다. 동시에 경매에 나설 무렵 트로피 수집하듯 5억 달러짜리 요트, 프랑스의 3억 달러짜리 와인농장을 매입하는 등 개인 취향을 충족하는 데 열심이었다. 아부다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자예드가 무함마드의 든든한 동맹이다. 아부다비 문화관광부 책임자 무함마드 칼리파 알무바라크가 아부다비 왕세자의 오른팔임은 물론이다. 이 그림의 거래 과정을 잘 아는 한 사람은 유럽으로 보내졌다고 전했다. 모데스티니 교수도 지난해 가을 스위스 취리히의 보험회사로부터 진품 여부를 감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는 복원 전문가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은 취소됐다. 그 취리히 전문가로 지목된 다니엘 파비안은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모데스티니 교수는 “그 일이 있은 뒤 행적이 아주 묘연해졌다”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남북 모두 임정 실체 정치적 활용·왜곡… 시기·인물별로 평가해야

    남북 모두 임정 실체 정치적 활용·왜곡… 시기·인물별로 평가해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대한민국 헌법 전문) “(1919년 3·1 봉기로) 인민이 피흘리고 싸울 때 (일부 민족 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나라가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타산(계산)하고 그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북한 조선전사)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 민족말살 정책에 항거한 전국 단위의 민중 시위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겨났고 임정 요인들의 희생 덕분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정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임시정부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건 아니다. ‘나약한 부르주아 혁명가들의 집합소’,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숟가락만 얹은 조직’이라며 싸늘한 냉소를 보내는 국내 연구자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임정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北·국제사회 “임정 제 역할 못 해…정부 아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임정이 정말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이자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정이 엄연한 정부였고 국내 독립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천명한다.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임정을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상 첫 민주공화국 정부로 소개한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임정을 독립운동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체제에서 일제에 고통받으며 목숨 걸고 저항한 이들은 당시 한반도에 살던 노동자와 농민들이었지 임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외에서 “힘 없이 외교청원 놀음이나 펼친” 망명가 집단에게 정부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최근 우리 정부가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데에는 이런 역사 인식 차가 깔려 있다. 북한이 자신의 정통성을 김일성 일가에서만 찾다 보니 임정을 더욱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내막이 있기도 하다. 여운형(1886~1947)을 비롯해 주요 독립운동가들도 임정의 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외국에서 지리멸렬하게 파벌 싸움만 하다가 국내에 별다른 지지 기반을 만들지 못했고 시베리아와 만주 등에 임정보다 훨씬 크고 실력 있는 단체가 존재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사회 역시 임정을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국민이 없던 탓이다. 오직 중화민국(대만)이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고자 미국과 영국 등을 설득했지만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1945년 해방 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은 임정 승인을 요청한 장제스(1887~1975)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있어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친중 세력인)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 텐데 이렇게 되면 갈등이 커질 수 있다.”●‘1919년 건국론’ ‘1948년 건국론’ 대립 임정의 위상에 대한 시각차는 건국절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가장 큰 쟁점은 대한민국 수립 시점이다. ‘1919년 건국론’과 ‘1948년 건국론’이 대립하고 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1919년 건국론을 주장하지만, ‘뉴라이트’를 포함한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1948년 건국론을 지지한다. 1919년 건국론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헌장을 통해 국민·주권·영토 등 국가의 3요소를 규정했기 때문에 국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48년 건국론자들은 임정이 한국 독립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기에 1919년은 진정한 건국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명실상부한 주권을 되찾고 국제사회에서도 합법적으로 승인한 1948년이 진짜 건국이라는 것이다. 1919년 건국론자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면 1948년 건국론자들은 국제법적 형식 논리를 더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27일 “임정 지도자들이 1919년 건국론자 주장처럼 1919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뒤부터 국가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과정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1948년 건국론자 생각처럼 그저 독립운동을 한다고 인식했는지는 좀더 정교한 사실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임정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조직” 임정은 3·1운동으로 드러난 민족국가·국민주권국가 수립 욕구를 맨 처음 구체화한 조직이다. 3·1운동으로 생겨난 여러 정부를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 대표체로 거듭났다. 이것만으로도 임정은 대한민국의 시원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독점한 건 아니었다. 수립 초기부터 분열과 무능, 파벌 싸움 등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개 독립운동 단체보다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시기도 보냈다. 임정은 분명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조직이다. 그래서 시기와 인물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과거 냉전 구도 속에서 정권에 따라 임정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다보니 지금의 논란이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김희곤(65)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광복 이후 임정의 위상을 두고 정치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하고자 임시정부를 치켜세우려고 애썼다. 이들은 임정이 독립운동의 최고봉이자 한반도를 장악한 대표 조직으로 과장해 선전했다. 상당수 학계 인사도 이런 분위기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며 곡학아세에 나섰다. 하지만 남한과 체제 경쟁을 펼친 북한에 임정은 ‘실패한 망명가 집단’에 불과했다. 1980년대 남한의 운동권 세력도 군사정부에 대한 반발로 북한의 ‘민중사관’을 흡수해 3·1운동 민족대표나 임정 요인을 무시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뉴라이트’가 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부터 대놓고 임정을 부정한다. 언론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임정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정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하기보다는 매체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권 성향에 맞춰 임정을 평가 절상 혹은 절하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지금부터라도 정치적 유불리에 휘둘리지 말고 임정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야 정확한 사실 전달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남북 시각차 인정… 꾸준한 교류로 극복해야” 지금의 한반도 현실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쪽에만 정통성을 부여하기 어려워진 만큼 지금부터라도 남북이 함께 임정의 정확한 위상을 재평가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스위안화 중국 푸단대 한국북한연구센터 교수는 최근 열린 임정 관련 토론회에서 “(일제강점기 핵심 독립운동단체였던) 김구의 임정 세력, 김일성의 항일무장 세력, 중국 내 조선의용군 세력에 대한 정확한 연구와 평가야말로 남북통일 실현의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임정을 법통으로 적시했지만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하이 임정 청사를 방문하는 것조차 꺼린다. 학계의 교류와 충분한 인내로 이런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금요칼럼] 정치란 무엇일까/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정치란 무엇일까/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5년 가까이 광화문에 자리잡고 있던 세월호 분향소의 철거 작업이 이번 주 초에 마무리됐다. 가방에 노란색 리본을 단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빈도가 나날이 줄어드는 요즘, 세월호 분향소의 철거를 계기로 지난 시간을 다시금 반추해 본다. 구조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진상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당시의 국가권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고 나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쥐게 된다. 냉전시대 반독재민주화 투쟁 때에도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민주화 경험을 쌓았다고 믿던 21세기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또 다른 층위에서 정치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작 답하기는 쉽지 않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주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문적으로 설명하려면 단행본 여러 권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묵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월호를 마음에 묻으며, 나는 거창한 질문이 아니라 매일 내 피부에 닿으며 나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가벼운 의미로 정치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비유하자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간략하면서도 설득력 강한 답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누군가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억울한 사람들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억울한 사람이 전혀 없게 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국가권력이라면 억울함을 최대한 풀어 주는 정치행위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것을 나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강하게 체감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 후 두 달 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닷새 동안 머물렀는데, 나는 그때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교황에게 읍소했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교황에게 호소했다. 왜 그랬을까.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 지경의 피맺힌 억울함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당시 국가권력은 그들을 의도적으로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는 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권력이 상식적으로만 움직였어도, 그들이 굳이 교황까지 만날 필요는 없었다. 한국 내에서는 말(상식)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더 상위의 ‘보편적 존재’에게 호소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어떤 억울함을 당했다면 그나마 덜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권력구조 때문에 당한 절대적 억울함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 많다. 1980년 5월 광주학살의 억울한 피해들을 조롱하고 왜곡하는 자들이 여전히 여의도에서 큰소리치며 2차, 3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 현실. 재판을 조직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왜곡해 억울한 사람을 오히려 양산한 일그러진 검경과 사법부. 허다한 군 의문사는 이를 나위도 없고, 전쟁도 안 하는 현재조차 군 내부에서 매년 100명가량이 생을 마감하는 현실. 조직적 성폭력을 당하고도 사악한 권력의 벽에 막혀 차라리 자신을 소멸시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 피해자들. 진상조사조차 저인망식으로 촘촘하게 방해하는 권력 카르텔. 요즘 한국사회의 억울한 사례들은 몇 밤을 꼬박 새우고도 열거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곧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이라는 의미다. 국민청원에 답해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악의 근원을 밝히라는 취지의 대통령 지시가 이번 주에 나왔다. 늦었지만 환영하며, 진상조사를 방해하는 세력도 함께 백일하에 드러내고 척결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후대 사람들은 2019년 이 땅에 ‘정치가 있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변절 3명 뿐… ‘3·1운동 리더’ 인정받아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정춘수(1873~1953)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일본인 검사의 취조에 이렇게 말했다.“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910년 합병 당시 기대했던 ‘내선 융화’(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정책)가 잘되지 않았던 것이 유감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두 달 뒤 열린 재판에서도 “자치권을 달라고 청원하는 것에 찬성한 것이지 (일본에 대한) 독립 선언은 내 의사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정춘수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1921년 5월 출옥했다. 이후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며 갖가지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했다. 지금도 정춘수는 우리 역사에서 ‘변절한 민족대표’로 거론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난무한다. 바로 정춘수 같은 이들 때문일 것이다.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33인은 3·1운동 시위에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가 아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유명 역사강사 설민석씨가 “민족대표들이 룸살롱에서 술판을 벌였다”고 발언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과연 사실일까. ●33인은 왜 모두 종교인 뿐일까?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이 물음에 국민 대다수는 유관순을 꼽는다. 일부는 김구나 이승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을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당시 이들의 인지도를 감안할 때 33인을 진정한 의미의 민족대표로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종교인이었고, 자신의 종교 밖에서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계는 “당시 우리 사회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일제의 강압통치가 심해지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모여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분야는 종교계가 거의 유일했다는 설명이다. 한국사학자인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20일 “3·1운동 준비 당시에는 고관대작을 지낸 유명인사를 민족대표로 섭외하려고 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으로 명성이 높았던 박영효(1861~1939)와 구한말 대신 출신 한규설(1856~1930), 당대 최고의 개화지식인 윤치호(1865~1945) 등이었다”며 “하지만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민족대표 자리를 수락한 이가 없었다. 결국 종교인들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직접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당시 이들은 지체가 높지도 않았고 특별한 명성도 없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평민 출신이었다”고 강조했다. 기득권 계층이 자신의 안녕을 챙기느라 민족대표 맡기를 거부하자 보통 사람들이 조선 독립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이는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3·1운동의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민족대표 33인은 진짜로 친일파가 됐나? 민족대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은 최린(1878~1958)과 박희도(1889~1952), 정춘수 등 세 사람이다. 김창준(1890~1959)은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이는 해방 뒤 월북한 탓이지 친일 행각 때문은 아니다. 33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세간의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민석 강사와 민족대표33인유족회 간 소송을 담당한 재판부도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대표들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적어도 친일 반민족 행위로 평가받을 일은 하지 않고 지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민족대표들이 친일행각에 나섰다는 인식이 퍼진 데에는 훗날 친일파가 된 최남선(1890~1957)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는 33인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3·1 독립선언서를 직접 썼기에 존재감이 남달랐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최남선이 ‘나는 평생 학자로 살고 싶다’며 독립선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천도교 측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윤 전 총장은 “33인 가운데 훗날 두세 명 정도가 변절했다. 이것만으로 민족대표 전체를 싸잡아 폄하·매도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3·1정신을 흐리게 하는 자해행위”라고 지적했다. ●태화관은 정말로 ‘룸살롱’이었나? 3월 1일 독립선언식은 서울 종로의 음식점인 태화관에서 열렸다. 하필 기생이 나오는 요릿집에 모인 걸까.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사의 시계를 3·1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애초 독립선언 장소는 종로의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민족대표들은 선언식 장소를 돌연 태화관으로 바꿨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이 연행될 경우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일본 경찰을 제지하려다가 유혈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민족대표 33인의 비폭력 투쟁 노선이 거사 장소 선택에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2월 28일 사전 제작돼 3월 1일 뿌려진 ‘조선독립신문’ 1호에는 “오후 2시 경성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대표들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다”고 적혀 있다. 이미 거사 전날부터 민족대표들이 폭력 시위를 피하고자 자수할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탑골공원 인근에서 30명이 넘는 인원이 비밀리에 모일 수 있는 곳을 급히 찾다 보니 자연스레 태화관으로 정해진 것”이라며 “태화관은 요즘으로 치면 호텔과 같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도 “무사히 선언식을 마치려면 실내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따른 것일 뿐 (기생집을 선언 장소로 택한 것에 대해)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였다. ●만세 운동 주도 못한 이들이 진짜 민족대표? 민족대표 33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이들은 “3월 1일 독립선언 직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민족대표 가운데 일부는 조선의 독립보다는 자치권 확대와 총독부의 지배방식 개선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면서 “이처럼 일제와 타협하려는 듯한 어설픈 리더십으로는 당시 조선인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33인의 재판 내용을 살펴보면 “소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독립선언과 폭동은 관계가 없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즘 말로 ‘유체이탈 화법’에 해당하는 실망스러운 태도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3·1운동 대표로 나서면 곧바로 체포돼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고,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는 데 이들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설명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일본의 엄혹한 통치가 이뤄지던 때 33인은 3·1운동의 기획자이자 기폭제로서 큰 역할을 했다”면서 “3·1운동 첫날 서른 곳 가까운 도시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이것만 봐도 민족대표들은 시위의 전국 확산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민족대표는 3·1운동의 리더로서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로벌 In&Out] 코민테른 창립 100주년과 한국독립운동/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코민테른 창립 100주년과 한국독립운동/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3월 1일, 한국이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1919년 3월 1일 발생한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인 임시정부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1919년 3월에는 한민족독립운동과 일제 멍에로부터의 해방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 한 가지 더 있다. 3·1운동이 발생한 바로 다음날인 1919년 3월 2일 서울로부터 약 6600㎞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 창립회의가 열렸다. 1920년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세계 최초의 노농국가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하였다. 10월 혁명을 주도한 레닌과 러시아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봤으며 유럽 여러 공산단체와 함께 세계 혁명의 확산과 투쟁 중인 각 민족의 노동계급 지원 등을 목적으로 국제기관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1919년 코민테른 창립회의에는 조선에서 국민회 대표로 강상주가 참여하였으며 한국인들의 반제·반식민지 투쟁에 관해 이야기했고,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으며 1부를 코민테른에 전달했다. 4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노령한인노동단체대회에서 강상주가 코민테른 창립회의에 대해 연설했으며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 동방부장 보즈네센스키가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설했다.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실감한 보즈네센스키는 같은 해 7월 26일 ‘한국의 혁명적인 단체인 국민회와 온 한국인들에게’라는 소비에트 정부의 선언을 발표했다. 많은 한국 혁명가가 이미 붉은군대에 입대하고 극동지역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에게 국내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대표단이 문전박대 당하고 열강과의 외교로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무장투쟁론이 강화되어 갔다. 많은 무장투쟁론자는 세계 혁명을 추구하고 1918년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연해주 지역의 일부를 점령한 일제와 싸우는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을 당연한 동반자로 간주해 러시아로 건너와 무장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은 이들을 지원했다. 좌익 민족운동은 문제도 많았는데 분파투쟁이 치명적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려는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돼 서로 권력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1920년대 초 코민테른이 독립운동과 ‘상하이에서의 혁명사업’을 위해 제공한 거액의 자금을 둘러싼 분쟁(이른바 ‘모스크바 자금사건’)이 일어났고, 모스크바 자금을 상하이로 가져온 김립이 살해되었다. 또한 분파투쟁, 통수권 다툼, 국제정세 변화, 극동공화국과 코민테른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발생해 많은 운동가가 살상당하고 부대들은 무장해제되었다. 코민테른은 조선 내 반일·혁명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통일조직으로 공산당 설립을 수차례나 시도했으나 분파투쟁과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도·지원하려고 노력했다. 그 집행위원회는 조선인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하고 한국, 중국, 베트남 등의 젊은이들에게 민족해방과 혁명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다. 그 대학 동문 중에 중국의 덩샤오핑과 류사오치, 베트남의 호찌민, 일본의 가타야마 센, 한국의 조봉암과 박헌영 등 유명한 정치가가 있다. 또한 코민테른은 1922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극동민족대회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 한국인이 제일 많았으며 그 의장단에 김규식과 여운형 등이 선출되었다.
  • “독립 향한 무한 도전… 임정, 계란으로 바위 깼다”

    “독립 향한 무한 도전… 임정, 계란으로 바위 깼다”

    세계 초강대국 일제 맞서 나라 되찾아 한반도 최초 국민이 국가 주인 된 사건 저평가된 독립운동가들 전수조사 필요 사라진 임정 문서 반드시 원본 찾아야“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깬 기적을 일궜습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며 세를 넓히던 강대국 일본에게서 나라를 되찾았으니까요.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도 선언했어요. 문재인 정부가 임정의 참뜻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커요.” 임정 연구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9일 경기 용인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1919년 4월 11일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음달로 100주년을 맞는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인 임정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추진 중이다. 한 교수가 지적한 대표적 사례는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서훈 등급 상향이다. 정부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 열사의 서훈을 독립장(3등급)에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높였다. 한 교수는 “이는 철저히 지금 사람들의 잣대로만 판단한 것”이라며 “유공자 전수조사를 통해 저평가된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재평가했어야 했다. 유 열사 한 사람만 서훈을 높이는 바람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 교수는 임정이 생산한 문서 원본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정 문서들은 모두 두 차례 사라졌다. 1932년 4월 일본 경찰은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감행하자 임정 사무실에서 자료를 압수했다. 이후 만들어진 문서들은 임정 총무과장을 지낸 조남직이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보관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6·25 전쟁 중 유실됐다. 한 교수는 “올해 정부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임정 관련) 기념식과 전시회를 열고 있다. 하지만 임정 문서를 찾는 일처럼 정말 중요하고 기본적인 업무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선 임정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국가의 기본 요소(국민, 주권, 영토)를 갖추지 못했고 활동 기간 내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카이로회담(1943)이야말로 임정의 대표적 성과”라고 반박했다. 김구(1876~1949) 등 임정 요인들은 중국의 장제스(1887~1975)가 이 회담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중국 정부가 나서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장제스는 다른 열강의 반대에도 이를 관철시켜 한국 독립의 기틀을 다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임정 100주년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계란으로 바위가 깨질 것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조국의 독립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냥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쉬운 길이었죠. 임정이 추구한 독립정신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대의를 믿고 도전한 것이었어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그런 노력 끝에 결국 거대한 바위가 무너졌죠. 임정 100주년을 맞는 우리는 이런 정신을 새겨야 합니다.” 글 사진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코민테른 창립 100주년과 한국독립운동 100주년

    코민테른 창립 100주년과 한국독립운동 100주년

    지난 3월 1일, 한국이 3·1 독립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은 오늘 한국 민족해방 투쟁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고,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원이다. 1919년 3월에는 한민족독립운동과 일제 멍에로부터의 해방 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 한가지 더 있었다. 1919년 3월 2일 서울로부터 약 6600㎞ 정도로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이라는 조직의 창립회의가 열렸다. 물론,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코민테른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소위 ‘색깔론’ 등의 영향이 남아 있는 오늘에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으며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에는 연구가 아직 부족하다.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는 바로 색깔론이며, 이를 위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1920년대의 한국의 민족해방운동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났으며 세계 최초의 노농국가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하였다. 10월 혁명을 주도한 레닌과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봤으며 유럽 여러 공산단체와 함께 세계혁명의 확산하고 투쟁 중인 각 민족의 노동계급 지원할 목적으로 국제기관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코민테른 창립회의에는 국민회의 대표로서 강상주가 참여하였으며 한국인들의 반제·반식민지 투쟁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했고 1부를 코민테른에 전달했다. 4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노령한인노동단체대회에서 강상주가 코민테른 창립회의에 대해 연설했으며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 동방부장 보즈네센스키가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연설했다.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실감한 보즈네센스키는 1919년 7월 26일 ‘한국의 혁명적인 단체인 국민회와 온 한국인들에게’라는 소비에트 정부의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한국 혁명가들이 이미 붉은군대에 입대하고 극동지역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에게 국내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또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한국대표단이 문전박대당하고 열강과의 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무장투쟁론이 강화되어 갔다. 많은 무장투쟁론자들은 세계 혁명을 추구하고 1918년 러시아내전에 개입하여 연해주 지역의 일부를 점령한 일제와 싸우는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을 당연한 동반자로 간주하여 러시아에 넘어오고 무장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은 그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좌익민족운동은 문제도 많았으며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분파투쟁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려는 독립운동가들은 통일조직을 결성하지 못하였으며 서로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 1920년대 초 코민테른이 독립운동과 ‘상해에서의 혁명 사업’을 위해 제공한 거액의 자금을 둘러싼 분쟁(이른바 ‘모스크바 자금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모스크바자금을 상해로 가져온 김립이 살해되었다. 또한 분파투쟁, 통수권 다툼, 국제 정세 변화, 극동공화국과 코민테른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발행하였으며 많은 운동가가 살상당하였고 그 부대들은 무장해제되었다. 코민테른은 한국 국내 반일·혁명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통일조직으로 공산당을 수차례나 설립 시도했으나 분파투쟁과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지도·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 집행위원회는 한국인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하고 한국, 중국, 베트남 등 국가의 학생들에게 민족해방과 혁명 사업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다. 그 대학 동문 중에 중국의 덩 샤오핑과 류 사오치, 베트남의 호찌민, 일본의 가타야마 센, 한국의 조봉암과 박헌영 등 유명한 정치가가 있다. 또한 코민테른은 1922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주도로 극동민족대회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 한국인이 제일 많았으며 그 의장단에 김규식, 여운형 등이 선출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 환경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에 고조되었던 세계 혁명정세가 1920년대 후반에 완전히 퇴조하였다. 이 상황에서 세계혁명을 강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코민테른의 힘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에 시작한 소련 대숙청 과정에서 한국인 간부들을 포함한 많은 좌익운동가가 희생당하였고, 1943년 코민테른은 공식 해산되었다.글. 사진: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