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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 스미스와 레녹스 루이스, 11일 알리 장례식 도중 운구한다

    윌 스미스와 레녹스 루이스, 11일 알리 장례식 도중 운구한다

    할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47)와 영국 출신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 레녹스 루이스(50)가 오는 10일(이하 미국 동부시간)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 도중 관을 운구하게 된다. 세 차례 세계 챔피언을 지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고인과 영원히 작별하는 장례식은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거행되며 장례 행진과 가족들만 참석하는 안장식에 이어 오후 2시부터 KFC 염! 센터에서 공개 추념식이 시작된다. 유족들은 추념식에 1만 5000명만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오전 10시 센터 매표소에서 예매를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전날 정오부터는 루이빌의 프리덤 홀 아레나에서 추모 예배가 열리는데 7일 오전 10시부터 예매가 시작되며 일인당 4장으로 티켓 발급이 제한된다. 루이스는 1999년 에반더 홀리필드를 물리친 뒤 BBC 스포츠 올해의 인물로 뽑혔는데 같은 해에 알리는 BBC 스포츠 세기의 인물에 선정된 인연이 있다. 세계 챔피언을 지냈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 전력까지 닮았다. 스미스는 2001년 마이클 만이 연출한 전기 영화 ‘알리’에서 고인을 열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골든글로브 후보로 이름을 올린 경력이 있다. 둘 외에 한때 스파링 파트너였으며 헤비급 세계 챔피언을 지내기도 한 지미 엘리스의 동생인 제리 엘리스, 고인의 사촌인 존 그래디와 얀 와델, 조카 이븐 알리, 사위였던 코마위 알리, 가족들과 막역한 존 램지 등이 관을 운구하게 된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과 정부 대표들이 참석하는 장례식 실황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커버스토리] 5선 정병국, 재선 이우현에게 “선배님” 경례 붙인대요

    [커버스토리] 5선 정병국, 재선 이우현에게 “선배님” 경례 붙인대요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300명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서로 촘촘하게 엮여 있다. 고교나 대학 동창부터 사제지간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정치권 인맥을 들여다봤다. ●경기고 72회 이종걸 “교안이는 각진 모범생이었고나랑 회찬이는 유신 반대 유인물 뿌렸죠” 정치권 학맥의 중심에는 여전히 전통의 명문 경기고가 자리잡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13명을 배출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전 원내대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와 황교안 국무총리는 비평준화 마지막 기수인 72회 졸업생이다. 고교 동창인 세 사람은 이후 인권변호사(이종걸)와 노동운동가(노회찬), 공안검사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 전 원내대표는 “고교 시절 황 총리는 전교 학생회장 격인 학도호국단 간부를 지냈다. 내 기억으로는 각진 모범생이었다”면서 “나와 노 원내대표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며 웃었다. 예원학교(중학교) 재학 시절 피아노를 전공했던 이 전 원내대표는 노 원내대표의 결혼식에서 축하 연주로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할 만큼 절친한 사이다. 반면 황 총리는 노 원내대표와 ‘악연’이다. 노 원내대표는 2005년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떡값 검사’ 명단을 폭로했다가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황 총리로부터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결국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지난해 황 총리를 대상으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는 노 원내대표가 증인으로 출석, “총리 부적격자”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서울대 82학번’은 최대 학맥으로 꼽힌다. 특히 ‘법대 82학번’은 각계각층에 고루 포진돼 있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과 더민주 송기헌 의원을 비롯해 원희룡 제주지사,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조해진 전 의원, 김상헌 네이버 대표,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등이 학과 동기다. ●서울대 82학번 조국 “법대 동기 원희룡과 지금도 친해”경제와 강석훈·이혜훈, 친박·비박 갈려 이들 중에서는 새누리당 소속인 원 지사와 대표적 야권 인사인 조 교수가 가까운 편이다. 조 교수는 “대학 시절부터 원 지사와 운동권 활동을 하며 서로 공감대를 갖고 친하게 지냈다”면서 “지금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는 9월 ‘졸업 3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어 소위 ‘시끄러운’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 교수와 함께 서울대 82학번이자 더민주 초선인 김한정(국제경제학과), 김현권(천문학과) 의원도 운동권에서 맺은 인연을 30년 넘게 이어 가고 있다. ‘경제학과 82학번’으로는 강석훈 청와대 경제수석과 새누리당 이혜훈 의원이 유명하다. 두 사람은 각각 친박(친박근혜)과 비박을 대표하지만, 여권 내 ‘경제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강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 경제교사’로 19대 국회에서 당 경제정책 수립에 역할을 했고, 이 의원은 원조 친박이었지만 현재 비박계로 분류된다. ●서울대 법대 70학번 이주영·이상돈, 삼수 박주선에게 “형님”이주영·이상돈·진영은 경기고 동창 서울대 82학번이 곳곳에 포진된 배경은 입시제도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 등으로 초유의 정원 미달 사태가 일어나자 서울대는 82학번 때 졸업정원의 130%를 신입생으로 받았다.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과 국민의당 최고위원으로 활동 중인 박주선, 이상돈 의원은 ‘서울대 법대 70학번’ 동기다. 박 최고위원이 삼수 끝에 입학을 한 까닭에 대학 시절에는 ‘주선 형님’으로 불렸다. 이주영, 이상돈 의원과 더민주 진영 의원은 경기고 동창이기도 하다. ●혈연과 개명 사촌지간 김한정·이한, 나란히 첫 등원이주영, 홍판표에게 홍준표로 개명 권유 20대 국회의원 중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도 있다. 더민주 김한정 의원과 이훈 의원은 사촌 관계다. 김 의원의 고모의 아들이 이 의원이다. 동교동계 막내로 분류되는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20대 국회 초선 의원으로 나란히 당선됐다. 김 의원은 “설훈 의원이 나를 동교동계로 끌어들였고, 내가 사촌동생인 이 의원을 동교동계에 소개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법조계 인맥’도 회자된다. 사법연수원 29기 동기인 더민주 이언주, 백혜련 의원은 당시 사법연수원 교수였던 황교안 총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제지간이다. 이 의원은 “황 총리는 당시 목소리가 좋아서 여성 연수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이 홍준표 경남지사의 개명을 권유했다는 것은 정치권에서 유명한 일화다. 홍 지사는 1985년 청주지검 검사 시절까지 ‘홍판표’(洪判杓)라는 본명을 쓰고 있었다. 당시 청주지법에서 판사로 근무하던 이 의원이 “검찰에서 출세하려면 다른 이름이 좋겠다”며 판(判)자와 뜻이 거의 같은 준(準)자를 권유했다. 당시에는 개명 절차가 지금과 달리 몹시 까다로웠지만 이 의원이 청주지법원장에게 직접 ‘청탁’을 넣어 개명을 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행정고시 출신 경제관료 인맥도 두드러진다.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인 김광림(행시 14회) 의원을 비롯해 같은 당 최경환(행시 22회) 의원, 노무현 정부 초대 재경부 장관을 지낸 더민주 김진표(행시 13회) 의원, 국민의당 장병완(행시 17회) 의원 등이 주축이다. ●행시 인맥과 진주 강씨 김정우 “사무관 때 장병완 차관 모셔”강석호·석진·창일·길부 “우리는 친척” 행시 40회로 이번에 국회에 입성한 더민주 김정우 의원은 “내가 기획예산처 공공혁신본부 사무관일 때 당시 장병완 의원을 차관으로 모셨다”면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감회가 새롭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행시 선배인 국민의당 김관영(행시 36회) 원내수석부대표와도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같이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김 원내수석부대표는 국민의당 창당 전부터 꾸준히 김 의원의 영입을 시도했지만, 김 의원은 결국 국민의당이 아닌 더민주를 선택했다. 다양한 국회 모임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국회에는 여야를 불문하는 종씨 모임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진주 강씨 모임이다. 새누리당 강석호·강석진, 더민주 강창일, 무소속 강길부 의원 등 무려 4명이 소속돼 있다. 강석호 의원은 “진주 강씨는 본이 하나로 모두 친척”이라며 “1년에 한 번 본관인 진주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해병대 전우회 선수보다 기수…293기 이우현이 회장유민봉·송석준 등 5명 ‘자진 신고’ 가입 가장 ‘군기’가 센 곳은 해병대 전우회다. 부사관 118기, 정기수 293기인 새누리당 이우현 의원이 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같은 당 정병국·강석호·홍철호, 국민의당 장병완 의원도 활동 중이다. 여기에 초선인 새누리당 유민봉·송석준, 더민주 신창현·오영훈·전재수 의원도 최근 ‘자진 신고’를 통해 전우회에 가입했다. 전우회에서는 국회의원 선수에 상관없이 해병대 기수 중심으로 서열이 매겨진다. 5선 중진 정병국 의원도 재선 이우현 의원에게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실과 바늘 홍철호·유의동·김명연·정미경 ‘생태계’30년 전 안희정의 함진아비는 우상호 ‘실과 바늘’ 같은 우정을 자랑하는 단짝도 많다. 새누리당 홍철호, 유의동, 김명연 의원, 정미경 전 의원은 ‘맛집 탐방’을 통해 친해졌다. 서울 영등포의 한 허름한 생태찌개 집에 자주 모인다고 해서 친목 모임의 이름을 ‘생태계’라고 붙였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안희정 충남지사가 결혼할 당시 함진아비 역할을 했을 만큼 가까운 ‘30년 지기’다. 우 원내대표는 “안 지사와는 1988년 서울구치소 수감 생활 중 쇠창살 너머 대화를 하면서 친구가 됐다”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했던 동지”라고 소개했다. 정계 입문 이후 끈끈해진 인연도 있다. 더민주의 초선 김병기·박주민·조응천 의원은 남다른 ‘동지애’로 뭉쳤다. 국정원 간부(김병기)와 공안검사(조응천), 인권변호사(박주민) 등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문재인 전 대표 퇴임 직전 영입된 인사들로 당 권력의 급격한 교체와 맞물려 공천 국면에서 동병상련을 겪으며 가까워졌다. 공천 막바지에 박 의원은 공천위원회로부터 동작갑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버텼다.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박 의원은 김 의원에게 동작갑을 양보하고 당 지도부에 항의한 끝에 은평갑에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유기견에 동화책 읽어주는 자폐증 소년의 작은 기적

    유기견에 동화책 읽어주는 자폐증 소년의 작은 기적

    동물보호소의 유기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폐증 소년의 사연이 소개돼 누리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미국 ABC뉴스에 따르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소년 제이콥 투마란(6)은 사촌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에 있는 카슨 동물보호소를 매주 방문해 유기견에 동화책을 읽어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이곳을 찾은 지도 어느덧 6개월째. 카슨 동물보호소가 지난 17일 유튜브에 공개한 영상에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제이콥과 철장에서 이를 조용히 듣는 유기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이 유기견은 제이콥이 책을 읽어주면 짖는 것을 멈추고 안정을 찾는다는 게 동물보호소 직원의 설명이다. 긍정적인 효과는 제이콥에게도 나타났다. 유기견에 책을 읽어주면서 읽기 능력이 부쩍 늘었을 뿐만 아니라 자폐증 증상 역시 호전되기 시작한 것. 제이콥의 엄마는 “내 아들은 항상 시끄러운 소음에 노출되면 큰 문제를 일으켜왔다”면서 “봉사를 시작하면서는 꽤 집중력도 좋아졌고 문제 또한 일으키지 않는다”고 놀라워했다. 사진·영상=Saving Carson Shelter Dogs/유튜브 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시대의 번역가 김석희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시대의 번역가 김석희

    번역을 할수록 내 글이 건강해졌다… 18년 만에 나의 소설을 쓰려 한다 충북 증평군 내성리에 자리한 ‘21세기 문학관’에 도착한 것은 지난 10일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서였다. 하늘색 점퍼에 청바지 차림을 한 그가 녹색 철문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18년 만에 재개한 소설 창작을 위해 얼마 전 제주도 집을 떠나온 그는 이곳을 ‘자발적 유배지’라고 불렀다. 점심 겸 해서 낮술 잔을 기울였다. 적당히 술기운이 올랐지만, 그의 유장한 말투는 빨라지지 않았고 간결한 문장들은 장황해지지 않았다. 중간에 말을 멈추는 때가 잦았는데 적확한 단어나 표현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가 말했다. “기자 양반이나 나나 즐겁게 술 마실 만큼만 건강하게 살면 되는 거요.” 김석희(64)는 ‘구름에 달 가듯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1979년 3월 어느 날 한참을 못 보고 지냈던 친구가 찾아왔다. 국사학과에 다니던 이종범이었다. ‘학생운동 하다가 제적됐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갑자기 어쩐 일일까.’ 전공은 달랐지만, 중간에 연결고리가 되는 친구들 덕에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학교에서 잘리고 나서 작은 출판사를 하나 차렸다고 했다. “내가 불문과 다른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김석희가 프랑스책 최고로 잘 읽는다고 하더라.” 다짜고짜 프랑스 고전을 하나 골라서 번역을 해 달라고 했다. “명색이 출판사이니 책을 좀 내야 하는데, 전문 번역가에게 맡기자니 번역료 줄 능력이 안 된다. 너한테는 술 한잔 사주면 되지?” 황당했지만, 학교에서 잘리고 뭐라도 해 보겠다는 그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안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곰곰 생각하다가 18세기 프랑스 심리소설의 효시로 평가되는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를 번역해 주었다. 나는 불어를 말하고 듣는 것에는 약했지만, 독해와 번역에 나름 강점이 있었다. 번역료는 정말 술 한잔이었다. 1980년 이종범이 학교에 다시 돌아오면서 출판사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그 책도 절판이 됐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게 내 인생의 이정표를 정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참, 이종범은 현재 조선대 사학과 교수로 박물관장을 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노동의 대가를 받고 번역한 작품은 1982년 6개월 동안 작업한 영국 작가 존 파울스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였다. 1981년 메릴 스트립과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동명 영화가 개봉되면서 갑자기 원작 소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책은 1997년과 2002년에 다시 번역을 했는데, 내가 전문 번역가의 길을 가게 된 첫 작품이 됐다. -1952년 제주시 무근성(삼도2동)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경제사정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섬 소년에게 사방에 둘러쳐진 바다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갑갑함이었다. 섬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이었다. 1970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재수를 위해 서울로 와서 육십을 바라보는 2009년 4월에 다시 고향에 정착했다. 40년의 타향살이 끝에 그 바다가 그리워 다시 돌아왔다. 나는 변덕을 부렸지만, 바다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보듬어준 것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초등학교 때 가르쳐 주신 서예로 초등학교 때 웬만한 상들은 휩쓸었는데, 나한테 약간의 글재주가 있다는 것은 중학교 졸업 무렵에 알게 됐다. 제주일고 입학을 앞두고 도내 한 신문사가 주최한 학생 문예작품 공모전에 산문을 출품했다. 아직 고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2, 3학년 형들을 제치고 장원을 차지했다. 이 일로 입학을 하자마자 3학년 형들에 의해 반강제로 ‘향원’이라는 문학서클에 들게 됐다. 2학년 때는 동국대 문예백일장에서 산문부 장원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제주도립도서관은 제2의 집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뮈의 ‘이방인’을 이곳에서 읽었다. 모두 살인자인 두 책의 주인공이 꿈속에 뒤바뀐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큰 바다를 누비며 글을 쓰는 ‘마도로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국립해양대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6·25 때 서울 영등포에서 납북된 숙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있어 입학이 불허됐다. ‘마도로스 소설가’의 꿈은 그냥 ‘소설가’로 수정됐다. -1972년 삼수를 해서 대학에 갔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했다. 어떤 친구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거리로 나갔고, 어떤 친구들은 술집으로 가 통음을 했다. 어떤 친구들은 캠퍼스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내 속의 울분을 터뜨리고 발산하기 위해 내가 택한 건 글쓰기였다. 일기를 쓰듯 글만 썼다. -수업에 들어간 기억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붕구(1922~1991) 교수님의 수업은 늘 감동 그 자체였다. 보들레르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 직접 한시를 써서 읊으시다가 그걸 서양의 역사와 철학으로 이끌고 가셨다. 그러다가는 동양 인문학의 심오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셨는데, 이야기에 빠져 한참을 넋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처음의 보들레르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넓고 깊은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울림 있는 강의를 하는 교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1979년 2월 졸업과 동시에 국문과에 학사편입을 했다. 소설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문학을 좀더 배우고 싶었다. 그때부터 등단을 향한 나의 긴 여정이 시작됐고, 그 과정은 1987년 12월 26일에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끝이 났다. 세상에 대한 풍자와 야유를 담은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이었다. 당선되고 나서 나를 인터뷰한 기자가 ‘칼의 노래’, ‘현의 노래’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이다. 당시 그는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1시간에 걸쳐 그와 나눴던 대화가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진탕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한겨울 골목길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고상한 책만 번역한 줄 안다. 하지만, 내 손을 거친 책들 중에는 일본 잡지의 부록과 같은 것들도 상당수 있다. 번역은 그 자체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시사영어사 출판부에 다니던 친구가 맡겨 준 연애소설 ‘할리퀸문고’ 시리즈는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한 달에 한 권씩 15개월을 번역했는데, 그 돈으로 쌀도 사고 아이들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외국말을 입으로 하는 재주는 없었지만 눈으로 읽는 능력은 남보다 뛰어났다. 불어야 전공이니까 자연히 접할 기회가 많았고 영어는 틈틈이 원서를 읽으면서 번역 실력을 키웠다. 일본어는 학사편입한 국문과에서 현대문학 연구를 위해 일본 문헌을 참고해야 했기 때문에 독학을 했다. -1979년 학사편입부터 신춘문예에 당선된 1987년까지의 시간들은 이제 와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는 시쳇말로 ‘장난이 아닌’ 고난의 시간들이었다. 계속되는 탈락에 마음엔 칼바람이 불었고,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제주의 어르신들은 나를 ‘백수’로 생각했다. “백날 써 봐야 안되는 소설, 그만 좀 하고 다른 일 찾아봐라. 서울대를, 그것도 과를 2개(불문과, 국문과)씩이나 나와서 이게 무슨 꼴이냐.” 명절에 고향 내려가는 건 아주 고역이었다. ‘아버지의 감귤밭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을까, 일본에서 사업하는 사촌형을 찾아갈까.’ 고민은 계속됐지만, 소설가에 대한 꿈은 결코 포기가 되지 않았다. 안되면 안될수록 갈증은 더 심해졌다. 그러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한 번역은 계속해야 했다. 번역한 책에는 ‘김한경’이라는 필명을 썼다. 나와 아내, 아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땄다. 내 본명은 내 최초의 소설의 표지를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1987년 재일교포 작가인 김석범의 ‘화산도’를 번역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5권짜리 대하소설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이호철 대표가 “6월 항쟁을 계기로 4·3 사건을 다룬 책도 나올 수 있는 시대가 올 테니 미리 준비를 하자”고 했다. 마지막 제5권은 이 대표가 번역을 했고 내게는 1권부터 4권까지 번역을 맡겼다. 일본어를 번역하며 곳곳에 제주 사투리를 넣어야 하기 때문에 제주 출신 번역가가 필요했다. 제주 출신인 내가 4·3 사건 관련 책을 번역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다. 처음으로 ‘김한경’이 아닌 ‘김석희’를 역자 이름으로 썼다. 이 일을 계기로 번역료가 크게 올라갔다. 그다음 맡은 일은 2년 6개월에 걸친 영국 브리태니커 사전 한국판 번역이었다. 매월 200자 원고지 1000장씩을 넘겼다. 아내의 가계부에 단비가 내렸다. -1994년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이 두꺼운 책 3권을 들고 번역가 정도영·오정환 선생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이 책들을 읽어보고 번역해 출판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책의 지은이는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였다. 정도영 선생이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오정환 선생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내가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 당시 ‘로마인 이야기’는 일본에서 제3권(나중에 총 15권으로 완결)까지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세 명 중 가장 젊은 내가 맡았다. 2주 정도의 검토 끝에 우리 모두 ‘OK’ 사인을 냈다. 그때부터 2009년까지 12년에 걸쳐 번역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로마인 이야기’의 내용은 상당히 진취적이었다. 대부분의 책이 귀납적 형식을 취하는데 이 책은 제1권 전체를 할애해 ‘국가 크기도, 문화도, 경제도 1위가 아닌 로마가 어떻게 패권(覇權)을 쥐었는지 궁금해 이 책을 쓴다’는 의문을 던지는 게 특별해 보였다. 투박하지만 힘 있는 문체도 흥미를 끌었다. 책은 번역 출간되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베스트셀러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고 사회적 신드롬으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내가 저들만큼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아무리 해도 거장들의 작품과는 차이가 많은데, 이걸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나.” 힘들게 소설가로 등단을 하고 10여년이 흐른 1998년, 내 인생의 방향을 가르는 큰 선택을 했다. 그해 가을 중편 소설을 하나 냈는데 불현듯 소설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안되는 걸 들고 끙끙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다. ‘나를 애먹이지 말자’고 했다. 소설을 중단했다. -2011년엔 ‘모비딕’을 출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번역이었다. 작가인 허먼 멜빌은 정규 대학교육 없이 선원으로 살다가 작가가 된 사람이었다. 단정하게 완성된 문장이 아니었고, 단축형 비문이 많았다. 간혹 셰익스피어를 따라하는 도치문은 번역으로 그 느낌을 살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번역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단어도 이유 없이 배열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대학 은사인 이휘영(1919~1986년) 교수님을 존경한다. 그는 1960년대에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홍수’를 번역했다. 독해가 번역의 초벌작업이라면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휘력과 문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신 분이다. -나는 ‘888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8시간 자고, 8시간 놀고, 8시간 번역한다. 일은 주로 밤에 한다. 아직 번역하고 싶은 책들이 많다. 특히 판타지의 고전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싶다. 국내에서는 ‘해리 포터’를 어린이들이 먼저 즐기게 됐지만, 사실 판타지 소설의 세계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심오하다.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다섯 살 손자를 위한 번역에도 욕심이 난다. 하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1998년 절필했던 소설 창작이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잡은 소설이다. 수많은 번역의 경험이 소설을 다시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많은 책을 번역하면서 내 글도 건강해졌다. 그저 예쁘게 다듬기만 한 미문, 추상적인 문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낼 수 있게 됐다고 할까. 젊은 날 나의 명함에는 ‘소설가·번역가’가 동시에 적혀 있었다. 소설가가 되고픈 열망이었다. 정작 등단한 후 소설을 접고는 ‘번역가·소설가’라고 썼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소설가라는 직업을 다시 앞에 두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번역가 김석희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번역가로 통한다. 영어와 불어, 일어로 된 해외 작가들의 소설을 한글로 재탄생시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 왔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재일작가 김석범의 ‘화산도’, 쥘 베른 걸작선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번역을 ‘장미 가시덤불에서 춤추는 것과 같은 고통 속의 쾌락’이라고 표현한다. 신춘문예 등단 작가이기도 한 그는 최근 18년 만에 자신의 소설 창작을 재개했다. ▲1952년 제주 제주시 출생 ▲제주제일중·고 ▲서울대 불문과·국문과 ,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 중퇴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 ‘이상의 날개’)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 수상(1997년) ●주요 작품 ‘화산도’(김석범) ‘아돌프’(뱅자맹 콩스탕) ‘여자란 무엇인가’(비올라 클라인)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에펠 탑의 검은 고양이’(아라이 만) ‘즉흥시인’(안데르센) ‘시간 박물관’(움베르토 에코 외) ‘인물 삼국지’(이나미 리쓰코) ‘빙벽’(이노우에 야스시) ‘칸의 제국’( 조너선 스펜스) ‘죽음을 삼킨 땅’(조르제 아마두) ‘프랑스 중위의 여자’(존 파울스) ‘지구에서 달까지’(쥘 베른) ‘문명 속의 불안’(지그문트 프로이트) ‘살아 있는 역사’(힐러리 로댐 클린턴) ‘모비 딕’(허먼 멜빌)
  • 도 넘은 감염자 신상 털기… ‘이웃 불신증후군’으로

    도 넘은 감염자 신상 털기… ‘이웃 불신증후군’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된 L(43)씨는 이 일로 온 가족이 크게 곤욕을 치렀다. 단지 운이 나빠 브라질 출장 중 모기에 물렸을 뿐인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무분별한 신상 털기가 이뤄졌고, 급기야 자녀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도 있었던 ‘신상 털기, 낙인찍기, 따돌리기’가 어김없이 재현된 것이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18일 “첫 번째 환자는 물론 그 부인까지 역학조사와 바이러스 검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줬고, 전파 가능성이 낮은데도 정부의 요청에 전남대병원 1인실에 입원까지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환자의 입원 소식이 전해진 날 전남 지역의 각종 ‘맘(mom) 카페’에는 지카바이러스 환자가 전남에서 발생했으니 모두 조심하라는 내용의 게시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지카바이러스는 사람 간에 전파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 ‘전남대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는데 취소해야 하는 거냐’는 문의글도 수십건 눈에 띄었다. 피해자인 환자에게 감염병 낙인을 찍는 도 넘은 이기주의는 지카바이러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의 다른 관계자는 “지카바이러스는 모기 매개 감염병인데도 사람 간 감염될 수 있다며 환자를 죄인 취급하니 환자의 협조를 얻어 방역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메르스 사태 이후 지카바이러스 환자가 거쳐간 1차 의료기관 명단까지 모두 공개하고 있지만 손해를 본 의원과 왕따를 당한 환자를 지켜 주지 못해 국민의 알권리와 개인의 보호받을 권리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다”고 밝혔다. 첫 번째 환자가 다녀간 동네 의원은 의심환자 신고를 사흘간 지연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카바이러스 환자가 오면 병원명이 공개되고 이 의원 사례처럼 자칫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는 데다 병원이 마치 ‘오염 지역’인 것처럼 인식되다 보니 동네 의원들은 점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만약 동네 의원들이 발열·발진 환자를 보지 않고 돌려보내면 신종감염병 대응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 당시 낙인찍기에 시달렸던 의료진도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송주영 강동경희대병원 인공신장실 간호사는 “메르스 당시 교대 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퇴근할 때는 방역 문제 때문에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구급차를 이용했는데 혹시 이웃이 우리 가족을 따돌리거나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걱정돼 집에서 좀 떨어진 한적하고 어두운 곳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고 말했다. 조영중 국립중앙의료원 당뇨내분비센터장은 메르스 대응 백서에서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어린 자녀를 둔 의료진은 유치원, 학교, 거주지, 주변 사람들이 감염원처럼 취급하는 시선에 힘들어했고, 심지어는 신원이 노출된다며 언론과의 인터뷰조차 사양했다. 참 참담한 현실이었다”면서 “나중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할 일”이라고 적었다. 메르스 낙인찍기는 이웃사촌 간에 ‘불신증후군’을 퍼뜨리며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반대로 환자를 감싸고 의료진을 격려하는 따뜻한 이웃도 적지 않았다. 강동구 주민들은 메르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을 위해 강동경희대병원에 응원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창문이 막힌 구급차로 병원과 집을 오가다 보니 바깥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어요. 어느 날 현수막이 붙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내다봤죠.” 송 간호사는 그때가 가장 뭉클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세종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아랍 최고의 부호’ 사우디 왕자 내한

    ‘아랍 최고의 부호’ 사우디 왕자 내한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가 16일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로 입국하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는 살만 사우디 국왕의 사촌으로 포브스지가 집계한 2015년 세계 부호 순위에서 아랍권 최대 부자에 올랐다. 디즈니, 뉴스코프, 애플, GM 등에 대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7월 개인 재산인 320억 달러(약 36조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 화제가 됐다. 연합뉴스
  • “도로 달리는 전기열차 ‘트램’ 슬로시티 가는 새로운 변화”

    “도로 달리는 전기열차 ‘트램’ 슬로시티 가는 새로운 변화”

    “대도시는 인구가 다 줄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현상이고, 슬로시티로 가야 합니다. 대전시가 트램으로 결정하니까 서울 위례 신도시를 포함해 수원, 성남 등 전국 10여개 도시가 하겠다고 해요. 정부도 오송에 트램 시험노선을 만들어 운행하고 있어요. 4·13 총선에서 ‘트램 공약’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5명입니다. 트램이 인기 폭발이죠. ” 권선택 대전시장은 지난 12일 대전시장실에서 서울신문과 단독 인터뷰한 자리에서 대전도시철도 2호선 건설 방식을 노면 전차인 트램으로 정한 덕분에 국가 산업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권 시장은 취임한 2014년 말 전임 시장의 고가 자기부상열차 운행 결정을 노면 전차 트램으로 정책을 변경하며 관련 사업자들이 반발하는 등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진짜 고된 일은 이제부터다. 권 시장은 “‘도로에 기차는 다니지 못하게 한 도로법’ 등 관련법 6개를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권 시장은 또한 “대전에 대기업이 별로 없어 조선 해운 구조조정과 같은 어려운 일이 비켜 가니 정말 다행”이라면서 “중소산업과 서비스산업 중심인 대전은 상대적으로 실업률과 청년실업률이 낮다”고 자랑했다. 지난 4월 19대 국회에서 폐기될 뻔한 ‘도청이전특별법’을 가까스로 통과시켰는데 대전시 발전의 임무를 여야 국회의원과 협력해 진행한 덕분이다. 성과를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 행정자치부 관료와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권 시장의 미덕이다. 권 시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지만, 광역단체 시장으로서 할 일은 소신 있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고가에서 왜 지상철 트램으로 바꿨나. -서울 따라서 대전·대구·광주 1호선은 다 지하철로 했다. 요즘 정부가 돈이 없으니까 지하철을 건설한다고 하면 국비 보조를 안 한다. 전직 시장이 고가로 결정해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내가 2014년 출마하면서 공약으로 트램을 내걸었고, 그해 말 지상철인 트램으로 바꿨다. 정책 변경으로 갈등이 심해 애를 먹었지만, 트램이 강점이 많다. 우선 건설 비용이 저렴하다. 고가의 3분의1이고, 지하철의 6분의1로 굉장히 싸다. 운영비도 전철의 40% 수준이다. 트램은 교통 약자에게도 매우 편리하다. 노상에서 쉽게 타고 쉽게 내릴 수 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하는 현대 대도시 환경에 잘 맞는다. 고가는 도시가 고속 성장할 때 대량 수송에 맞는 교통수단이다. →다른 나라에 트램이 많은가.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에 있다. 세계 150여개 도시에서 400여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경전철 대부분이 트램이다. 안전성이 검증됐다. 지난달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내가 트램을 직접 운전도 해 봤다. 파리는 교통사고가 40% 줄었고, 니스는 관광자원이 됐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 중심의 교통수단이다. →대전 트램의 특징은. -유럽은 다 유가선이다. 도로에 전기선을 설치해 열차를 달리게 한다. 우리는 무가선이다. 배터리로 움직인다. 그 무가선 트램을 대한민국 철도기술연구원에서 개발했다. 전기차를 한국에서 개발했으니 정부도 보급의 책임이 있지 않겠나. 정부가 충북 오송에 1.5㎞짜리 무가 트램 철도를 깔고 시험운행하고 있다. →트램의 안전성은 어떤가. -시민들은 기차가 도로 위로 다니니까 불안하고 무섭다고 생각한다. 시속 300㎞인 고속철도(KTX)를 연상하는데, 도심을 달리는 트램은 시속 30㎞다. 안전하다. →언제 개통되나. -지난달 시범노선 2개를 결정했다. 유성온천역과 원골네거리를 잇는 2.4㎞와 동부네거리와 동부여성가족원 사이 2.7㎞ 구간이다. 시범노선 개통이 2020년이니, 본노선은 2021년 착공해 2025년 개통한다. 트램이 달리려면 법을 바꿔야 한다. 현재 도로법에 도로 위에는 기차는 안 되고 ‘자동차만’ 다닌다고 돼 있다. 그래서 관련법 6~7개를 개정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처음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는데 요즘은 동의하고 있다. 4·13 총선에서 당선된 전국 국회의원 5명도 트램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전시장을 3번 해야 트램 개통을 보겠네요. -내가 시장으로 있을 때 기초를 만들어 두면 된다. →대전역 주변은 시골이고, 둔산 신도시는 서울 같다. 양극화 아닌가. -내 정치적 고향이 동구다. 동구에서 국회의원 2번이나 했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동구와 중구 도시재생사업을 한다. 옛 충남도청에 시장 제2집무실을 뒀고, 도시재생본부도 거기서 일한다. 19대 국회에서 폐기될 뻔했던 도청이전특별법이 지난 4월 이상민 법사위원장과 권영진 대구시장 등과 합쳐서 잘됐다. 대전역세권 개발에도 2020년까지 1조 7334억원을 투입한다. 다음달 공고하고 9월에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뒤 내년 상반기에 착공할 계획이다. 대전역사 증축, 국립철도박물관 유치, 철도관사촌 복원 등 철도산업의 메카로 만들겠다. →옛 충남도청은 무엇으로 활용할 예정인가. -대전시민은 근대문화문화재인 충남도청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릴 수 있는 문화예술창작복합단지를 요구하고 있다. 청년 창업공간, 예술인의 전시·판매공간에 호텔 등 상업지구가 융합된 복합시설이 필요하다. 도청 공무원이 1200명일 때처럼 은행동 주변 상인이 효과를 보려면 1000명은 상주해야 상권이 산다. →대전 도시 경쟁력은 뭔가. -대전이 생산 규모는 16위인데 소득 규모는 3위다. 78%가 서비스업이고, 연구개발(R&D)이 중심이다. 대기업은 별로 없는 덕분에 요즘은 구조조정을 안 해서 좋다. 조선 해운 이런 게 없지 않으냐. 대기업에 의존하면 다 망한다. 중견기업 중심의 강소도시가 목표다. 대만은 부강하지 않지만 잘사는 나라다. 국방산업을 연계시키려고 한다. 요즘 국방산업은 정보통신기술(ICT)이 전략의 핵심이다. 충남대 근처에 가 보면 많다. LIG넥스원도 기공을 했다. →대전산업단지가 도심에 있어 이미지가 나쁜 것 같은데. -1960~70년대 조성된 대전 최초 산업단지가 문제다. 도심에 걸맞지 않은 섬유산업 등 부적합 업종부터 솎아내고 있다.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5000억원이 드는데 돈을 끌어오려고 정부에 로비하고 있다. 국회의원도 동원한다. 이번 총선에 새누리당 3명, 더불어민주당 4명이 당선됐다. 시장은 여야를 떠나서 모두 친해야 한다. 이장우·정용기 새누리당 당선자하고도 친하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자유선진당을 함께해 친하다. 일이 잘되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협력하려고 한다. 공개석상에서 여야 국회의원에게 감사를 표한다. →대전시민과 소통을 어떻게 하나. -시민행복위원회를 지난해 3월 만들었다. 대전밖에 없는 기구다. 시민을 공모해 500명으로 구성했다. 경쟁률이 6대1이나 됐다. 범죄자 등 결격자만 빼고 남은 시민 중 무작위로 추첨했다. 연령대별로 구성했고, 여성은 40%다. 전체 모임은 1년에 한 번 하고, 분과모임으로 한다. 현장도 많이 다닌다. 시장이 가는 곳이 바로 현장 시장실 아닌가. →시민행복위원회에서 나온 것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 있나. -세 건을 했다. 옛 충남도청을 어떻게 활용할 거냐와 둘째 복지 기준에 대한 세부사업 우선순위를 선정했다. 소득과 거주지 등 환경과 관계없이 대전시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복지 기준선을 정했다. 이 기준에 따라 공립 어린이집을 확충하고 저소득 주민 난방비를 지원했다. 세 번째는 갑천친수구역 조성사업을 민관검토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했다. →관료·국회의원에 시장까지 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 인사비서관으로 공직을 미완으로 매듭지었고, 정치를 하면서 단체장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로드맵상에 단체장이 있었다. →재임 중에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대전은 10년에 한 번씩 발전의 계기가 있었다. 1980년대 대덕특구로 부흥했고, 90년대 엑스포가 열렸다. 그 후로 별다른 이슈와 먹거리가 없다. 그래도 시장 정책의 우선순위 1번이 청년취업·창업이었다. 청년인력관리센터도 대전이 제일 먼저 만들었다. 대학생을 취업시키는 것을 원스톱으로 하고 있다. 6개월 만에 1000명을 취업시켰다. 대전이 전국에서 청년실업률이 최고 낮다. 정리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독일 치하 덴마크 어른들 오명 씻은 소년들의 투쟁사

    독일 치하 덴마크 어른들 오명 씻은 소년들의 투쟁사

    소년은 침묵하지 않는다/필립 후즈 지음/박여영 옮김/돌베개/248쪽/1만 3000원 1940년 4월. 히틀러의 독일이 북유럽 침공을 개시한다. 타깃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이웃사촌이었지만 침입자에 대한 두 나라의 대응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덴마크 정부는 ‘늑대 같은 영국, 프랑스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독일의 우회적인 항복 메시지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다. 노르웨이는 달랐다. ‘전쟁기계’ 독일군에 맞서 치열한 항전을 벌였다. 뭍에서 밀리면 바다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덴마크인들 끓는 피가 없을까. 소심한 어른들의 나약한 결정에 반발한 젊은이 몇몇이 반기를 들었다. 새 책 ‘소년은 침묵하지 않는다’는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덴마크 점령에 맞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벌인 십대 소년들의 투쟁기를 담고 있다. 덴마크 여행 중 우연히 레지스탕스 박물관을 찾은 저자는 ‘처칠 클럽’ 특별전을 통해 덴마크 저항운동의 불꽃을 피운 용감한 소년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당시 생존했던 ‘처칠 클럽’의 리더 크누드 페데르센의 입을 통해 잊혀진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냈다. 덴마크는 작은 나라다. 자연자원도 적다. 그런데도 비싼 비용 들여 침공을 강행한 이유는 뭘까. 독일이 노린 건 세 가지였다. 먼저 덴마크 철도다. 이를 통해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막대한 양의 철광석을 실어올 수 있었다. 철광석은 무기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철광석 없이 전쟁을 치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한 독일군 장성의 말에서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병참이다. 덴마크의 비옥한 땅에서 나는 농축산물은 독일군을 먹여살리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은 히틀러의 친덴마크 성향이다. 히틀러는 덴마크 사람들을 완벽한 인간, ‘지배 인종’의 전형이라 생각했다. 금발에 파란 눈은 엘리트 종족의 표상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런 나라는 당연히 자신의 휘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다. 청소년들이 처음 벌인 저항운동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독일어로 된 표지판을 망가뜨리고 독일군의 전화선을 끊는 것이었다. 전략 요충지 올보르로 이사한 후에는 ‘처칠 클럽’이라는 덴마크 최초의 레지스탕스 단체를 결성해 본격적인 저항운동에 나섰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활동”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투쟁은 덴마크인 모두의 저항정신과 결속을 이끌어냈다. 2차 대전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일화 중 하나인 ‘덴마크 유대인 구출 작전’도 바로 이때 전개됐다. 덴마크 사람들 스스로 ‘히틀러의 애완 카나리아’라는 오명을 씻어 낸 셈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굴곡진 佛道 끝에 만나는 자비

    굴곡진 佛道 끝에 만나는 자비

    그리 너른 숲은 아닙니다. 작정하고 찾을 만큼 빼어나지도 않습니다. 외려 볼품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경북 의성의 법계도림 이야기입니다.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이 남긴 법계도를 토대로 만든 미로 숲입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좁은 미로가 말하려는 건 세상을 사는 이치입니다. 늘 되뇌면서도 번번이 실천하지 못했던 그런 이치들 말입니다. 미로 숲 위는 고운사입니다. 시대와 반목했던 ‘비운의 천재’ 최치원의 흔적이 여태 남아 있는 절집입니다. 와가들이 밀집한 사촌마을도 예서 멀지 않지요. 의성엔 이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기웃댈 만한 풍경들이 꽤 많습니다. 법계도림은 의상(625~702)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이하 법계도)를 토대로 만든 숲이다. 화엄사상의 요체를 210개의 글자를 이용해 간결한 시로 축약한 뒤 이를 54개 굽이(角)의 사각형 미로로 만들었다. 쉽게 말해 국내 화엄종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 의상의 화엄세계를 현실 속에 구현한 숲이 바로 법계도림이다. ●의상이 설계한 법계도… 여래의 一音 나타내 법계도는 ‘법’(法) 자에서 시작해 ‘불’(佛) 자에서 끝난다. 한데 의상은 왜 이 같은 미로 형태의 그림시를 그렸을까. 그는 자신이 남긴 몇 가지 책을 통해 자문자답했는데,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글이 하나의 길을 이룬 건 여래의 일음(一音)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굴곡진 까닭은 가르침을 받을 중생의 능력과 욕망이 같지 않기 때문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건 수행에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면사각의 형태를 띤 것은 자비를 발현하고 불도(佛道)에 드는 방법을 사섭사무량(四攝四無量)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계도림을 설계한 이는 고운사 주지인 호성 스님이다. 그는 법계도림을 활용해 살아 있는 목탑을 만들려 했다. 법계도림의 중심부에 큰 은행나무를 하나 세우고 주변에 키 작은 단풍나무들을 심어 놓으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레 탑 형태의 숲이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법계도림에 들어서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일이 잦다. 단풍나무가 옆으로 가지를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찾는 이 드문 탓에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붙는 일도 흔하다. 이처럼 걷기에 불편하다 보니 개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현재의 나무는 죄다 뽑고 내년쯤 다른 나무를 심을 예정이란다. 향나무처럼 위로 곧추 자라 길을 쉽게 낼 수 있는 수종이 대체재로 꼽힌다. 한데 불현듯 딴생각이 든다. 이처럼 좁고 불편한 길은 절집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잘 정돈된 미로는 놀이공원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길이 다소 불편한들 무엇이 문제일까. 이를 하심(下心)을 종용하는 심모원려라 볼 수는 없을까. 작은 티끌 안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고 했다. 좁고 불편한 길을 성찰의 자세로 돌아보는 게 외려 법계도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계획대로라면 붉고 푸른 단풍나무가 노란 민들레꽃과 어우러진 소박한 길은 내년 이후엔 볼 수 없다. ●신라 문장가 최치원의 흔적 남은 ‘고운사’ 법계도림 위는 고운사다. 신라의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를 딴 절집이다. 60여 말사를 거느린 큰 절집이지만 여느 곳과 달리 주차료나 입장료 한 푼 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진입로가 인상적이다. 금강송과 굴참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길이 1㎞쯤 이어진다. 이를 ‘천년숲길’이라 부른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족할 길은 그러나 심연으로 들어가는 소로처럼 깊다. 늙은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엔 천년간 봉인된 고운의 체취가 서린 듯하다. 천년숲길을 나와 일주문, 사천왕문 등을 거푸 지나면 가운루(駕雲樓)에 닿는다. 최치원이 건축에 힘을 보탰다는 건축물로, 고운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화재 중 하나다. 최치원이 원래 지었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다. 멍에를 쓰듯, 평생 불성(虛)을 짊어지고(駕) 가라는 뜻이란다. 이를 현재의 현판으로 바꿔 쓴 이는 고려 공민왕이다.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진 공민왕이 전국을 유람하다 고운사에 들러 어필을 남겼다고 한다. 고운사에는 유교와 도교의 색채가 많이 남아 있다. 우화루 뒤편의 ‘만세문’은 솟을대문 모양이다. 절집 건물치고는 독특한 형태다. 만세문 뒤는 연수전이다. 조선 왕실 계보를 적은 어첩을 봉안하던 건물이다. 안내판은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떠받들던 시대에 사찰 안에 이렇듯 왕실과 관련되는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채롭다’고 적고 있다. 식당 건물엔 호랑이 벽화가 보관돼 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 호랑이 눈과 마주하게 된다는 벽화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가르침을 담지 않았을까 싶다. ●‘경북팔승일경’… 빙계계곡의 웅숭깊은 풍경 고운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사촌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 있다. 1390년께 기와집들이 숲을 이루던 사촌마을 주변에 조성된 비보림(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가 약한 곳에 조성한 숲)이다. 현지 주민들은 흔히 ‘가리쑤’라 부른다. 바람을 가리는 ‘쑤’(숲)란 뜻이다. 한실천 제방을 따라 800m 정도 이어져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밀집돼 있어 찬찬히 둘러보기 좋다. 가로숲 안쪽의 사촌마을에선 1582년 지은 만취당(보물 1825호) 등의 고택과 만날 수 있다. 의성 남쪽의 빙계계곡은 오래전부터 의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계곡에 들면 ‘경북팔승일경’(慶北八勝一景)이라는 표지판을 흔히 본다. 경북의 여덟 가지 빼어난 경치 가운데 첫째가는 곳이란 뜻이다. 자신감과 도도함이 글자 곳곳에서 느껴진다. 누가 언제 어떤 근거로 이런 도저한 표현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거무튀튀한 절벽이 2㎞가량 돌아가며 만든 풍경만큼은 제법 웅숭깊다. 빙계계곡의 자랑거리는 대략 세 가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온다는 얼음 구멍 빙혈(氷穴, 천연기념물 제527호)과 풍혈(風穴), 그리고 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27호)이다. 셋 모두 계곡 왼쪽 마을에 몰려 있다. 얼음동굴에 들면 서늘한 기운이 뒷목을 스친다. 실제로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열린다고 한다. 빙혈 바로 위의 풍혈에서도 에어컨 같은 바람이 나온다. ‘삼복더위에 얼음이 얼고, 엄동설한에 따뜻한 김이 솟는다’더니, 그리 과장 섞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본뜬 것으로 알려졌는데, 빙계계곡 등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자태가 한결 돋보인다. 인근의 금성산 고분군도 둘러보는 게 좋겠다.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릉 등 고분 몇 기가 남아 있다. 조문국은 신라보다 앞선 기원전 1세기 무렵, 지금의 금성면을 중심으로 융성했던 고대 부족국가다. 왕릉 주변으로 산책로가 나 있다. 고분군 끝자락의 조문국 박물관에서 조문국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초여름의 명물로 꼽히는 금성산 고분군 앞 작약꽃밭은 5월 말~6월께 만개한다. 글 사진 의성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고운사는 안동과 경계인 의성 동북쪽에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와 의성 방면 5번 국도로 갈아탄 뒤 망호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점곡 방면 7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8㎞쯤 가면 된다. 사촌마을과 사촌가로숲, 의성 소계당 등 볼만한 풍경들이 지척에 널렸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길 권한다. 빙계계곡은 의성의 동남쪽 끝에 있다. 조문국의 흔적이 남은 금성산 고분군, 조문국 박물관, 산수유 마을 등을 묶어 돌아보는 게 좋다. 여느 여행지와 달리 고운사, 조문국 박물관 등 관광지들이 죄다 무료다. 입장료 걱정 없이 다녀도 좋겠다. →맛집:의성 하면 마늘 먹인 소가 대표 먹거리다. 군청 인근 의성마늘목장(830-6283)과 안계면의 마늘목장한우타운(862-8592) 등이 이름났다. 탑산약수온천이 있는 봉양면에도 의성마늘소먹거리타운이 조성돼 있다. 의성마늘이야기(834-8843)는 마늘로 맛을 낸 백반, 묵은지찜 등을 내는 집이다. 의성읍내에 있다. →잘 곳:군청에서 운영하는 금봉산 자연휴양림(833-0123)이 깨끗하다. 금성면 산운마을의 운초당, 의성소우당, 점곡면 사촌마을의 초해고택, 후산정사, 안동김씨 종택 등에서 한옥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의성군청 문화관광과 830-6549.
  • 유리, 티파니 지원 사격 “미영이 나가신다” 섹시 복근은 덤

    유리, 티파니 지원 사격 “미영이 나가신다” 섹시 복근은 덤

    소녀시대 유리가 솔로 활동에 나선 소녀시대 티파니 지원 사격에 나섰다. 11일 유리는 인스타그램에 “내 친구 화이팅. 미영이 나가신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 몇 장을 연이어 올렸다.   첫 번째 사진에는 티파니의 솔로 앨범 ’I Just Wanna Dance(아이 저스트 워너 댄스)’에 수록된 ‘What I Do’ 음원 재생 화면이 캡쳐돼 있다.   다음 사진에는 사촌 동생 비비안과 함께한 래시가드 화보가 담겼다. 특히 유리는 탄탄한 11자 복근과 구리빛 피부로 섹시한 매력을 한껏 드러내 시선을 끌었다.   이에 네티즌들은 “몸매 완전 대박”, “티파니도 유리도 화이팅”, “신입 미영 나가신다 다비켜”등 반응을 보였다.   한편 지난 10일 정오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한 소녀시대 티파니는 오는 12일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I Just Wanna Dance(아이 저스트 워너 댄스)’ 데뷔 무대를 갖는다. 이선목 인턴기자 tjsahr@seoul.co.kr
  • 모더니즘 가구, 인도를 만나다

    모더니즘 가구, 인도를 만나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와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피에르 잔느레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 2관에서 열리고 있다. 르코르뷔지에(1887~1965·본명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와 피에르 잔느레(1896~1967)는 사촌 간으로 50여년간 협업하며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르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인도 찬디가르 1951-66’전은 두 사람이 인도 펀자브주의 주도 찬디가르에서 진행한 공동 도시계획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인도 고유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진보적인 도시를 건설하는 20세기형 신도시를 세우는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찬디가르를 행정도시로 기획하고자 한 인도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51년부터 국회의사당, 고등법원, 간디도서관 등 주요 행정 건물의 건축 디자인과 실내건축, 가구 디자인을 총괄했다. 특히 잔느레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역량을 통해 미약한 산업여건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현지의 문화적 특성과 기후에 맞게 집무실 책상, 응접용 테이블, 도서관 책상과 의자를 디자인해 통일성을 추구했다. 가구들은 인도 현지의 토속적인 재료와 장인의 전통적인 공예기술을 접목해 만들었다. ‘X’ ‘U’ ‘V’ 형상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한 가구는 견고하며 정교하게 가공한 것이 특징이다.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티크, 장미나무와 대나무 줄기를 활용한 가구들이 이번 전시에서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 사람들이 관공서나 도서관에서 사용한 가구들이다. 잔느레는 찬디가르 건축사무소의 책임자로서 15년간 인도에 머무르며 프로젝트의 실행과 관리감독을 총괄했다. 이후 찬디가르 건축학교 교장을 지내고 현지인들에게 모더니즘적 건축 양식을 전파하는 등 인도 건축사에 크게 이바지했다. 전시는 29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건축거장 르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잔느레의 인도 찬디가르 프로젝트

    건축거장 르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잔느레의 인도 찬디가르 프로젝트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와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피에르 잔느레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 2관에서 열리고 있다. 르코르뷔지에(1887~1965·본명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와 피에르 잔느레(1896~1967)는 사촌 간으로 50여년간 협업하며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인도 찬디가르 1951-66’전은 두 사람이 인도 펀자브주의 주도 찬디가르에서 진행한 공동 도시계획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찬디가르 프로젝트는 인도 고유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진보적인 도시를 건설하는 20세기형 신도시를 세우는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찬디가르를 행정도시로 기획하고자 한 인도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51년부터 국회의사당, 고등법원, 간디도서관 등 주요 행정 건물의 건축 디자인과 실내건축, 가구 디자인을 총괄했다.  특히 잔느레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역량을 통해 미약한 산업여건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현지의 문화적 특성과 기후에 맞게 집무실 책상, 응접용 테이블, 도서관 책상과 의자를 디자인해 통일성을 추구했다. 가구들은 인도 현지의 토속적인 재료와 장인의 전통적인 공예기술을 접목해 만들었다. ‘X’ ‘U’ ‘V’ 형상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한 가구는 견고하며 정교하게 가공한 것이 특징이다.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티크, 장미나무와 대나무 줄기를 활용한 가구들이 이번 전시에서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 사람들이 관공서나 도서관에서 사용한 가구들이다. 잔느레는 찬디가르 건축사무소의 책임자로서 15년간 인도에 머무르며 프로젝트의 실행과 관리감독을 총괄했다. 이후 찬디가르 건축학교 교장을 지내고 현지인들에게 모더니즘적 건축 양식을 전파하는 등 인도 건축사에 크게 이바지했다. 전시는 29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윤기자의 20문답여행] 두꺼운 삶, 혹은 얇은 여행-담양(潭陽)

    [윤기자의 20문답여행] 두꺼운 삶, 혹은 얇은 여행-담양(潭陽)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우물과 같은 비밀스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자전적 수필인 ‘두꺼운 삶과 얇은 삶’에 나오는 글귀다. 김현은 ‘땅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코 일상으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비밀이 곳곳에 있는 곳, 두꺼운 삶의 역사가 담긴, 담양(潭陽)으로 봄여행을 떠난다. ●두꺼운 삶 : 사화(士禍)가 만든 이야기…가사문학관, 소쇄원담양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철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한국문학사에서 발자취가 독보적인 음유시인인 그는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의 중심에 있던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1536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출생한 정철. 그가 태어난 집안은 누대로 유복하고 명망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의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었고, 셋째 누이는 계림군과 혼인하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궁궐을 자유로이 드나들던 진정한 '금수저'였다. 후일 명종과는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 이유였다. 그러나 1545년, 그의 나이 10세 때 부친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었다. 매형인 계림군은 처형되고, 맏형은 유배지로 보내진다.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정철은 참혹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마음을 좀 추스리기 시작한 것은 1551년, 그의 나이 16세 때에 할아버지의 선영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으로 가족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면앙정가로 유명한 송순(宋純·1493~1582),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면서 과거 공부에 매진하여 드디어 1561년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뒤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는 등 수많은 관직을 거치면서 예전의 영광을 다시 누리기도 하였다. 1585년,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은 그는 나이 50세에 다시 담양으로 내려온다. 이 때 한국 가사문학의 가장 독보적인 서정성을 지니고 있는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이 탄생한다. 그 뒤 1589년 우의정으로 책봉되어 기축옥사를 통해 동인 세력들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이때 수많은 동인 세력 뿐만 아니라 호남을 기반을 둔 상당수의 선비들 역시 유명을 달리하였다. 기축옥사에서 정철의 역할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혹자는 그를 두고 "청렴하고 강직한 충신"(선조수정실록)이라고도 하며, 또 혹자는 "사독(邪毒)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라"(선조실록)고도 할 정도로 실록에서조차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러다보니 현대의 역사학자들조차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조선은 본격적인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이 시작되었고 결코 이 간극은 좁혀지지 않은 채 근대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역사학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77에 위치한 '한국가사문학관'에는 바로 이러한 정철 인생에서의 가장 아름다웠으나 치열했던 시기의 기록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또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뇌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이 곳은 담양군이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한 문학관이다. 본관과 부속 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이 있고,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정철의 송강집(松江集)과 송순의 면앙집.각종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은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됨은 물론이며 조선 시대 사림들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곳들을 방문하는 것도 여행에 깊은 의미를 담는 일이다. 가사문학관에서 차로 불과 2분만 이동하면, 소쇄원(瀟灑園)이 있다.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단연 첫손으로 꼽히는 별서정원(別墅庭園·사화나 당쟁을 피해 만든 휴양 정원)으로 현재 명승 제40호로 지정된 국유문화명승지이다. 11만 7051㎡에 달하는 보호구역 내에, 4399㎡의 지정구역 전체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쇄원 역시 조선의 피비린내 풍기는 두꺼운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다.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는 자신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1519)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담양으로 은거하여 자신의 호(號)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의 '소쇄(蘇灑)'를 이름으로 내세워 정원을 만들었다. 소쇄원은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나눌 수가 있는 데, 현재 관람객들에게 알려진 정원은 바로 내원이다. 이 곳에서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 학문, 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정원의 구성은 크게 제월당, 광풍각, 매대로 나눌 수가 있고,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소쇄원 정자의 모양새가 한 마디로 '신선'이 머무는 곳인듯 하다. 여기에 댓잎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맑다'라는 표현밖에는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소쇄(瀟灑)'의 뜻을 몸이 읽어낸다. 더구나 얕은 계곡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은 당연히 소쇄원의 가장 주요한 손님맞이인 듯하여 한 여름 뙤약볕에도 실눈을 뜨고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 대나무 숲과 영산강의 만남 - 죽녹원과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竹綠苑)은 2003년 5월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를 조성하여 만든 약 16만㎡의 울창한 대숲으로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인 담양천을 끼고 있는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보인다. 이 곳은 죽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총 2Km가 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관람객들이 대나무숲이 뿜어내는 시원한 대바람을 느끼면서 천천히 대나무 사이를 거닐게 만들었다. 또한 이 곳에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태전시관, 인공폭포, 생태연못, 야외공연장이 있다. 그리고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대숲에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 죽녹원은 대나무를 주제로 하여 얼핏 별난 장소, 별난 공간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야트막한 산자락에, 마땅히 대나무로 꾸며진 곳이다. 그러하니 주변 풍광과 다툼이 없고, 전경 또한 아늑하고 넉넉하게 담양 전체를 아우른다. 이 곳에서 담양천을 비롯하여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로 조성된 담양 관방제림과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죽녹원 입구 삽작길 바로 아래에는 관방제림(官防堤林)이라 하여 담양천 북쪽의 제방을 따라 2Km에 걸쳐 조성된 인공 둔덕이 있다. 관방제림이란, '관청에서 시내로 물이 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둑에 조성한 나무숲'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관방제림은 담양읍 남산리 동정(東亭) 마을부터 시작해서 담양읍 천변리(川邊里)까지 이어진다. 관방제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의 종류로는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어나무(1그루),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으로 약 4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역안에는 185그루의 오래되고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 관방제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인공둔덕을 조성한 이는 1648년(인조 26년)에 담양부사로 있던 성이성(成以性) 부사였다. 바로 '춘향전'의 이도령 모티프가 된 인물로 추정이 된다고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가 1607년(선조 40년)에 남원의 부사로 있을 때 성이성이 기생을 만났던 일화가 춘향전 이야기의 원류가 되었다는 주장은 현재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 성이성은 1647년(인조 25년)에 호남의 암행어사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 칭송을 얻을 만큼 선정을 베푼 한 마디로 '인기 정치인'이었고 그가 부사로 있던 마을마다 송덕비가 세워질 만큼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망이 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도령의 강직하고 올곧은 이미지가 나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관방제림의 풍광은 경치가 자극적이지 않고 평온하다. 굳이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세월과 더불어 담양천 주변의 경치와 어울려 잘 익었다. 죽녹원의 산세와 균형을 잘 맞추어주는 영산강의 제방길이다. 원래 담양의 옛 지명이 성산(城山)이었을 정도로 주변은 온통 산이건만 관방제림은 이런 주변의 풍광과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자기만의 특색있는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관방제림이 끝나는 지점에 '유명해져버린'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있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가 바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높이 늘어서 있다. 이 길이 유명해진 이유에는 분명, 발음이 독특한 '메타세쿼이아'라는 나무의 이름이 한 몫을 차지했다. 원래 세쿼이아(sequoia)라는 나무는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삼나무이다. 워낙 잘 자라서 높이는 기본 50m, 밑둥 둘레는 기본 20m이상 성장하는 데, 바로 이 세쿼이아 나무의 화석이 중국의 쓰촨성(四川省)과 후베이성(湖北省)에 남아 있으며 한국 포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화석이 1941년에 세쿼이아와 닮았다 하여 '새로운 혹은 원래의 모습'이라는 뜻인 '메타(meta)'의 이름을 붙여 '메타세쿼이아' 화석으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화석으로만 존재할 줄 알았던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1945년 중국 사천성에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 이후 품종 개량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 이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 때문에 주로 관상용이나 가로수용으로 많이 쓰인다.현재 담양에 들어온 메타세쿼이아 종은 약 10m 높이로 자라는 종이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입장료'가 있다. 안내판에는 입장료가 성인은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700원으로 적혀 있다. 이 길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리 큰 돈이 아님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이 곳 입구에서 아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입장료가 없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 발길을 돌리는 관람객들도 많다. 원래 '길'이란 들어가는 입구나 나오는 출구가 쓰임이 동일해서 시작과 끝이 뒤집으면 방향은 같아야 함에도 지금은 입구라는 것이 생겨버린 셈이다. 이 길이 원래는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연인들 사진도 대신 찍어주면서 쉬어가는 쉼표같은 공간이었는 데, 이제는 경치도 본전을 뽑아야만 되는 상품이 되었다. 또한 입장료를 받다보니 가로수길이 이상하리만큼 한갓진 길이 되어 버려서 오히려 아쉽기도 하다. <담양에 대한 여행 20문답> -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2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요?- 남도 여행을 계획하는 도중 하루 정도의 휴일 여유가 생긴다면. 2. 누구와 함께 가면 좋을까요?- 죽녹원, 관방제림은 연인들, 친구들끼리/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나 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3. 교통편은 어때요? - 가사문학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77(http://www.gasa.go.kr/WService/KorGasaMunhakwan/Road/Road.aspx?TopID=F&SubID=04&Etc=57) 소쇄원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http://www.soswaewon.co.kr/subFrame.html?menu_mcat=100009&menu_cat=100001&img_num=sub1) 죽녹원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119(http://juknokwon.go.kr/?url=sub01_sub0102) 관방제림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7길 37 (죽녹원 정문 앞이 관방제림이다) 메타세쿼이아길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 578-4 (관방제림 자전거 도로 마지막 우회지점) *죽녹원,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길은 걸어서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다. 죽녹원을 우선 찾아 가면 됨.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은 차로 불과 2분거리다. 4. 인근 편의시설, 주차장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요 ?- 가사문학관, 소쇄원은 주차 시설이 우수하고 넓다. 죽녹원,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길은 관방제림 옆 강변 주차시설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성수기에는 주차하기가 굉장히 힘들 수도 있다. 5. 유명세에 비하여 실제 모습은 어때요?- 한국가사문학관이 현재보다 많이 유명해져야 한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너무 유명해졌다. 6. 직원이나 주변 상인들의 여행객 응대 수준은 어떤가요?- 관방제림 노천의 상인들, 특히 메타세쿼이아 길 주변과 건너편 자전거 대여하시는 분들. 힘드시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관광지이니 조금은 부드럽게 관람객들을 대하면 담양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7. 여행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은 어떠한가요? 공부를 많이 하고 가야 하나요?- 가사문학관, 소쇄원은 공부가 아주 많이 필요한 곳이다. 방문 전 홈페이지라도 반드시 보고 들어가길. 죽녹원,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길은 그냥 가서 즐기면 된다. 8. 입장료의 가성비나 전체 여행 경비는 적절한가요?- 가사문학관 : http://www.gasa.go.kr/ 가성비 우수 소쇄원 : http://www.soswaewon.co.kr/ 가성비 적절 죽녹원 : http://juknokwon.go.kr/ 가성비 적절 관방제림 : 무료이며 그냥 영산강 제방둑이다. 메타세쿼이아길 : http://tour.damyang.go.kr/index.damyang?menuCd=DOM_000002705002000000 가성비 부족 9. 여행지에서 가장 감탄하는 점은 어떤 것인가요?- 크게 감탄할 만한 것은 없는 듯 하다. 굳이 찾는다면 가사문학관이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는 점. 10. 아쉬운 점이 있다면?- 메타세쿼이아길 입장료. 11. 윤기자님이 운영진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담양은 훌륭한 여행, 문화 체험 공간으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관람객들이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도시를 방문한 손님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 주시길. 관방제림 주변을 좀 신경써주시길. 12. 홈페이지 주소와 도움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담양 관광 공식 홈페이지 : http://tour.damyang.go.kr/index.damyang 13. 꼭 추천하고픈 공간이나 체험활동은?- 가사문학관 2층 정철 송강의 자료집과 가사 문학관의 앞뜰. 소쇄원의 문화 해설사 강의 듣기. 14. 여행을 비추하고픈 사람과 이유는?- 막연히 유명하다 해서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을 가면 온갖 불만이 나올 수도. 반드시 의미를 알고 가야한다. 15. 먹거리 정보와 식당 정보는?- 죽녹원 주변의 떡갈비와 관방제림의 국수. 특히 관방제림 옆 국수골목은 강추함. 특별히 유명한 식당을 찾을 필요는 없을 정도로 떡갈비나 국수 맛수준은 비슷하니 더 좋은 식당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16. 어떤 코스를 도는 것이 좋을까요? 추천코스는?- 죽녹원 → 관방제림 → 메타세쿼이아길 → 대나무박물관 → 한국가사문학관 → 소쇄원 17. 축제 정보와 행사는?- 5월 초의 담양 대나무 축제와 10월 초 한우축제(자세한 행사정보와 일정은 http://tour.damyang.go.kr/index.damyang 으로) 18. 주변에 더 볼거리가 있나요?- 창평슬로시티, 금성산성을 추천함. 19. 숙소정보는?- 담양호 주변의 작은 펜션들이 많다. 담양은 작은 도시여서 거리가 가까워서 광주 인근에서 숙소를 정하는 것도 좋음. 20. 총평 및 당부사항- 담양은 생각보다 역사적 깊이가 있는 여행지이다. 역사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의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특히 호남 사림들의 선비문화가 번성한 곳이었다. 다만, 기대를 너무 하지는 말길!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악마의 소행?…350명 ‘연쇄 자살’ 공포 빠진 마을

    악마의 소행?…350명 ‘연쇄 자살’ 공포 빠진 마을

    인도의 한 마을에서 한 가정에 1명 이상, 총 350여 명의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벌어져 온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타임즈 오브 인디아 등 현지 언론은 6일(현지시간) 인도 중부 마디야 프라데시 주 카르곤 지역 바디 마을에서 벌어지는 괴현상을 보도했다. 인구 약 2500명 규모의 이 작은 마을에서 지난 20년 간 자살한 인구는 도합 350명에 달한다. 특히 올해 초 단 3개월 동안에 80여 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등 그 빈도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바디 마을의 촌장 라젠드라 시소디야는 두 달 전 그의 사촌이었던 전임 촌장 지반이 집 앞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이래 새 촌장으로 선출됐다. 지반의 어머니와 형제 또한 자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우리 마을에는 총 320가구가 있으며, 각 가정마다 자살한 사람이 최소 한 사람 이상 있다”며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시소디야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은 이 상황이 악마의 소행인 것으로 믿고 있다. 바디 시가 포함된 카르곤 지역은 인도 내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250개 지역 중 하나로 미신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악마적 존재에 의해 참극이 벌어진 것이라고 믿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현지 정신과 의사 스리칸트 레디 박사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타임즈 오브 인디아와 한 인터뷰에서 박사는 “주민들에게 있어 우울증은 익숙하거나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종류의 질환이 아니다”며 “자살 사태의 원인을 명확하게 찾지 못하자 주민들은 민간의 미신대로 악마라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박사는 주민들이 과다 사용하는 농약이 우울증 및 정신분열증을 유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재정문제가 아니더라도 우울증을 촉발할 수 있는 원인은 많다. 일례로 중국에서도 몇 년 전 특정 지역에서 다수의 농민이 자살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며 “당시 주민들이 사용한 농약에 포함된 유기인산화합물(organophosphate)이 우울증을 유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해당 상황에 대해 카르곤 지역 행정관 아쇼크 버르마는 특별 위원회를 구성해 대처에 나섰다. 그는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며 “삶의 자신감과 의욕을 잃은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전했다.한편 주민들 또한 마을 안에서의 주류 판매를 금지하기로 합의하는 등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을 막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LG그룹 창업 1세대’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잠 들다

    ‘LG그룹 창업 1세대’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잠 들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이 7일 새벽 향년 93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1세대 6형제 중 넷째다.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동생이다. 경남 진양 출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자유당 시절인 1958년 정계에 입문해 제4대 민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6~10대 국회의원을 내리 지내며 6선 경력을 쌓았다. 정계 은퇴 후에는 럭키금성그룹 고문, LG그룹 창업고문 등을 지냈다. 구 명예회장은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과 함께 LG그룹에서 분리해 LS그룹을 세웠다. LS그룹은 전선, 비철금속, 산업기계, 에너지 중심의 기업으로 탄탄히 기반을 쌓아왔다. LS그룹 1세대 뜻을 따라 2세대 사촌형제 간에는 경영권 분쟁 없이 계열사를 나눠 운영 중이다. 유족으로는 장남 구자홍(전 LS그룹 회장) LS니꼬동제련 회장, 구자엽 LS 전선사업부문 회장, 구자철 예스코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1일 오전이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박원순 시장, 아내에게 첫눈에 반한 사연은?

    “예쁜 여대생이 독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미쳐있더라구고요. 총각이었고 가을에 객지에 있었으니 한눈에 반한거죠.” 박원순(60) 서울시장이 전한 부인 강난희(59)씨의 첫인상이다. 박 시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부인과 만난 지 3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한 사연을 공개했다.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박 시장은 1981년 대구에서 검찰 시보로 있던 당시 계명대 국문과 4학년생이던 강씨를 소개받았다. 연수원 동기인 이순동 판사의 이종사촌이었다. 박 시장은 철학을 부전공하며 독일에 가고 싶다는 이 여대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내는 ‘세상의 매듭을 푸는 사람이 되겠다’는 내 말에 꽂혔다더라”고 전했다. 박 시장은 “당시 아내와 주로 계명대 도서관에서 데이트했다”고 말했다. 또, 강씨 집안 어른들께 잘 보이려고 위스키를 들고가서 못 먹는 술을 몇 잔 마신 뒤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박 시장 커플은 만난 지 3개월 만인 1981년 크리스마스에 결혼했다. 박 시장은 스스로 “최악의 신랑”이라고 표현하면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털어놨다. 그는 “검사 생활을 하다가 (1년 만에) 때려치웠고 변호사 일도 그만뒀다”면서 “게다가 사람들이 절대 하지 말라는 정치까지 했으니 집사람에겐 최악의 신랑인 셈”이라고 말했다. 또, “(포스코 등) 기업 사외이사하면서 받은 월급, 퇴직금,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 등은 모두 기부했다”면서 “그걸 집에 갖다줬으면 지금처럼 빚더미에 있진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0년 넘게 산 박 시장 부부는 손발이 잘 맞지만 드라마를 볼 때는 ‘각방’을 쓴다. 그는 “집사람과 TV 드라마를 보는 취향이 다른 탓에 한명은 서재로, 한명은 마루로 향한다”고 설명했다. 박시장의 러브스토리 공개는 20대 총선 이후 광주 방문을 추진하는 등 대권행보에 시동을 건 상황에서 친근한 이미지를 띄우고 대구와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알리려는 뜻 아니겠느냐는 풀이가 나온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소녀시대 유리 - 비비안, 숨길 수 없는 S라인

    소녀시대 유리 - 비비안, 숨길 수 없는 S라인

    소녀시대 유리와 그녀의 사촌동생인 모델 비비안이 래쉬가드 화보를 공개했다. 공개 된 사진 속 두 사람은 닮은 듯 다른 느낌의 워터 시밀러룩을 선보여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비비안은 핑크컬러 래쉬가드로 러블리한 느낌을, 유리는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는 민트컬러 래쉬가드로 섹시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다른 컷에서 두 사람은 잘록한 허리라인이 돋보이는 탱크탑과 래쉬가드에 아찔한 각선미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레깅스와 핫팬츠를 매칭, 시크한 올 블랙 워터패션을 제안했다. 사진제공 : BARREL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청순 또는 발랄…모델 비비안 팔색조 매력 담은 화보

    청순 또는 발랄…모델 비비안 팔색조 매력 담은 화보

    모델 비비안의 팔색조 매력이 담긴 화보가 공개됐다. 최근 bnt와 함께한 화보에서 비비안은 자연스러운 헤어와 메이크업에 데님 원피스로 캐주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하면 줄무늬 슬립 톱에 와이드 데님 팬츠를 매치해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했다. 또 비비안은 남색 아우터에 파란색의 버튼다운 스커트를 매치해 청순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편 분홍색 니트와 시스루 스커트로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표현하며 모델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한편 모델 비비안은 소녀시대 유리의 사촌 동생으로, 10만명에 가까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를 보유하고 있다. 사진제공=레인보우미디어, 영상=officialbntnews/유튜브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사우디 왕자’는 애플 마니아…“일부일처 할 것” 선언도

    ‘사우디 왕자’는 애플 마니아…“일부일처 할 것” 선언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젊은 피, 모하메드 빈 살만 왕자의 파격 행보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31세의 이 젊은 왕자는 25일 석유에 의존적인 수입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입창출 방법을 모색한 ‘비전 2030’을 발표하고는 이날 최초로 방송 인터뷰에도 응했다. 지금의 사우디가 세워진 1932년 이후로 사우디는 줄곧 예순이 넘은 왕들이 통치해왔고 최근엔 그 나이가 80대로 진입했다. 이런 가운데 30대인 모하메드 왕자가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81)과 사촌 형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 왕세자(57) 보다 전면에 나서 ‘혈기왕성’하게 움직이고 있어 사우디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이다. 모하메드 왕자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고 불리며 왕위 계승 서열 2위임에도 명실공히 ‘실세’로 지목되고 있다. 사우디의 미래 청사진인 ‘비전 2030’은 그의 머릿속 그림이다. 앞으로 15년은 사우디는 그가 그려놓은 아웃라인을 따라 가게 되는 것이다. 사우디 소유 뉴스 채널 알 아라비야는 국방부장관이자 왕실의 수석경제개발이사회 의장인 모하메드 왕자와 독점 인터뷰했다. 앞서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지면으로 먼저 보도된 ‘비전 2030’의 경제개혁안들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수장인 그는 알려진 대로 아람코 일부 지분 매각 계획, 국부펀드 2조 달러 조성, 미국의 그린카드와 같은 영주권 제도 도입 등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 논란이 된 수도및 전기세 인상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도 개선할 것이라 밝혔고,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왕자이지만 사우디의 미래가 전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게 하는 이유는 그가 젊다는 데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비디오 게임을 하며 자란 신세대란 말이다. 그는 특히 애플사의 팬임이 드러났는데 그의 컴퓨터는 아이맥이었고, 블룸버그와의 인터뷰 내내 스티브 잡스를 여러 번 언급했다. 모하메드 왕자는 인터뷰에서 “우리(세대)는 (기성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꿈도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하는 방식만 다른 건 아니었다. 관료주의를 못 견뎌 하는 그가 십 년 전 처음 정부를 위해 일했을 때 두 달 걸리던 업무처리를 이틀 내에 처리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또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사우디에서 왕족들이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하메드 왕자는 “우리 세대는 일부다처제를 선호하지 않는다”며 과거와 비교해서 현대 삶은 너무 바빠 한 가정만 꾸리기도 벅차다고 했다. 아들 둘에 딸 둘을 둔 그는 두 번째 부인을 둘 생각이 없다고 못박았다. 왕족들은 그들의 ‘특권’이 아니라 ‘의무’로써 자신을 증명하길 바란다고 한 그의 말이 인상 깊다. 윤나래 중동통신원 ekfzhawodd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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