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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제이슨 머코스키 지음, 김유미 옮김, 흐름출판 펴냄) 세계 최대의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전자책 단말기 ‘킨들’(Kindle)을 직접 개발한 제이슨 머코스키가 책의 미래를 전망했다. 전자책 혁명이 일어난 이후 종이책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 종이책이 어떻게 전자책으로 이동할지 그 현상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미래에는 책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류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도 디지털로 이동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래의 전자책 단말기는 USB 메모리 장치 정도의 크기에 클라우드 기능과 초소형 프로젝터가 내장돼 음성으로 모든 기능을 제어할 수 있다. 또 인류의 모든 책은 디지털 작업을 거쳐 한 권으로 압축돼 모든 항목이 링크됨에 따라 본문, 주석, 비평, 댓글을 자유자재로 탐색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시대를 저자는 ‘리딩 2.0’이라고 명명했다. 360쪽. 1만 7000원. 엔지니어의 인문학 수업(새뮤얼 플러먼 지음, 김명남 옮김, 유유 펴냄) 현대사회의 주요 화두는 ‘통섭’과 ‘융합’이다. 제목에서부터 그 상황을 그대로 웅변해 주는 책이다. 공학자이면서 문학(영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오늘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를 입체적으로 귀띔해 준다. 사회발전의 큰 역할을 차지하는 엔지니어들은 직업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하느라 균형잡힌 인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삶에 대한 만족도는 높지 않다. 저자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5개 항목으로 압축했다. 인문학은 개인의 지적 역량과 상상력을 향상시키고, 리더십과 경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며,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게 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는 것. 책 제목과 달리 엔지니어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인문학 안내서가 필요한 모든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라잡이 책이다. 482쪽. 1만 6000원.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서동욱 엮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시대를 막론하고 철학자들이 문학과 회화 등 예술 전반에 기울인 애정은 각별하다. 그들은 예술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세계관을 펼치고 확장시켜 왔다. 심지어 미술을 통해 추상적 철학의 논제에 색깔을 입히기도 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들의 미술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그들과 짝을 맺은 화가를 등장시켜 묵직하고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하이데거의 진리와 유희공간, 사르트르의 절대와 실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리오타르의 숭고, 레비나스의 얼굴과 우상, 데리다의 파레르곤과 시뮬라르크, 마리옹의 아이콘 등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념과 미학적 시각들이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엄밀하고 세밀하게 드러난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8년이 소요된 책은 미술에 관한 그리고 미술을 통한 철학적 탐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다. 532쪽. 3만원. 미술관에 간 붓다(명법 지음, 나무를 심는 사람들 펴냄) 수행자이자 미학자인 명법 스님의 불교미학산책. 고담시의 수호자 배트맨과 불교를 지키는 호위무사 사천왕의 공통점부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불교의 ‘반가사유상’의 차이까지 새롭게 해석한 불교예술과 미학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폭넓은 인물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불교미학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미지와 실제, 가상과 진상이 교차되는 이야기들을 예술작품에 녹아든 상상력을 통해 풀어나간다. 화려하면서 숭고한 고려불화의 ‘수월관음도’, 우리민족의 따뜻한 심성과 해학적 기질이 돋보이는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의겸이 그린 ‘선암사 서부도전 감로도’ 등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책 곳곳에 들어 있다. 296쪽. 1만 7000원.
  • “신라로 넘어온 헤라클레스 금강역사·사천왕으로 변신”

    “신라로 넘어온 헤라클레스 금강역사·사천왕으로 변신”

    수천 년 전 동양과 서양이 교류했는지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가장 빠르게 흔적을 찾는 방법은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특히 문화재에는 정복이나 경제적 교류의 증거들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랫동안 문화재 담당기자를 했던 서동철 서울신문 경영기획실장이 펴낸 ‘오래된 지금’(생각처럼 펴냄)은 동서 문화의 교류현장이 문화재에 어떻게 기록됐는지를 잘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인도문화, 신라불교에 스며들어 동양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그 기원은 1~2세기경에 제작된 간다라 불상 조각이다. 런던 영국박물관의 아시아미술관에는 부처님의 수행원인 금강역사로 ‘제우스의 벼락을 든 헤라클레스’가 나타난 조각이 전시돼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금강역사도 곱슬머리의 그리스 귀족의 모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BC 327년에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일대를 정복했다. 독자적인 예술전통이 없었던 인도 북부의 유목민은 간다라에 도시를 이루고 살던 그리스인들의 전통을 쉽게 수용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헤라클레스를 집안의 시조로 떠받들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을 벌일 때 사자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습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계곡에서 30일 밤낮으로 사자의 목을 졸라 죽인 뒤 그 사자의 가죽을 쓰고 다녔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받은 것이다. 쿠샨 왕조의 간다라 불상 조각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 문화가 합쳐져 알렉산더 대왕 또는 헤라클레스가 간다라 미술에서 부처를 호위하는 금강역사가 된다. 금강역사가 된 헤라클레스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헤라클레스는 한반도로 오면서, 금강역사가 되기도 하고 사천왕으로도 변신한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석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났다. 1203년 지어진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금강역사는 올리브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이미지가 강하다. 사자로 대표되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는 통일신라 이후에 줄곧 사천왕상에 흔적을 남겼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의 서방광목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의 사천왕상은 배에 사자머리가 장식됐고, 어깨 장식에도 사자가 나온다. ●수로왕릉 ‘쌍어문’은 메소포타미아 영향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릉 묘역에 들어가는 삼문 문설주에는 물고기 한 쌍이 마주 보게 그려진 ‘쌍어문’이 있다. 이 쌍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신어(神魚)사상의 표현으로 신라가 인도와 교류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다. 수로 왕비가 된 허황옥은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돛단배로 가락국 해안에 도착해 “가락 국왕 수로는 하늘이 보낸 왕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고 말하고, 가락국의 왕비가 됐다. ‘삼국유사’에 허황옥 공주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국으로 나오는데, 1977년 아동문학가 이종기가 인도 아요디아의 수많은 건물에서 쌍어문이 새겨진 것을 보고, 수로왕릉과 연결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다. 인도의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였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어는 인도-중국-한반도-일본으로 연결된다. 이 연결을 따라가다 보면 아프리카 동쪽 해변의 인류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확산됐는지 그 경로를 찾을 수 있다고 서 실장은 말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범어사 방화범 ‘1000만원’…CCTV에 찍힌 용의자 공개수배

    지난 15일 밤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발생한 부산 범어사 천왕문 화재 사건을 수사 중인 부산 금정경찰서는 16일 사찰 폐쇄회로(CC)TV에 찍힌 남자를 유력한 방화 용의자로 보고 현상금 1000만원에 공개 수배했다. 금정경찰서는 범어사 천왕문 화재와 관련해 방화범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신고 포상금 1000만원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사찰 CCTV에 포착된 용의자는 대머리에 감색 계통의 상의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50∼70대 남자다. 경찰은 범인 검거를 위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CCTV에 희미하게 포착된 이 남자의 모습이 담긴 수배전단 5000여부를 전국에 배포했다. 경찰은 CCTV상 화재 당시 천왕문에 들어온 한 남자가 검은색 비닐봉지를 사천왕상 쪽으로 던지고 나서 불이 난 점으로 미뤄 용의자의 얼굴 또는 손등에 화상을 입었거나 체모가 그을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또 지난 9일과 10일 밤 범어사 뒷산인 금정산에서 잇따라 방화로 추정되는 산불이 발생한 점 등을 미뤄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범어사와 등산로 주변의 인화물질 판매업소 등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에 앞서 15일 오후 9시 59분쯤 범어사 경내에서 불이나 목조건물인 천왕문 등이 불에 타 1억여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문화재 절도범이 가장 겁내는 공무원은?

    ‘문화재 절도범들이 가장 경계하는 공무원은?’ 행정안전부는 25일 공무원들이 각 분야에서 보유한 기록 1548건을 접수해 심사를 거쳐 83건의 예비 최고기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사범단속계 강신태 반장은 문화재 절도범 단속업무를 23년 7개월간 수행하면서 강원 고성 건봉사에서 도난당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 경북 용연사 사천왕상(보물 539호) 등 7300여점의 문화재를 회수했다. 예비 기록들은 26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홈페이지(www.mopas.go.kr)를 통해 이의신청을 받아 공개 검증한 뒤 11월25일 최종 확정된다. 행안부는 최고 기록자에게 인증서를 수여하고 그 기록을 ‘대한민국 공무원 기네스북’이라는 책자로 제작·배포할 계획이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도시와 산] (29) 전주 고덕산

    [도시와 산] (29) 전주 고덕산

    고덕산(高德山·603.2m)은 ‘천년고도’ 전북 전주시를 지켜온 산이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과 대성동,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 등에 걸쳐 있다. 전주시가지의 높은 건물이나 막힘이 없는 곳에서 보면 남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정상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시내에서 가깝지만 교통이 약간 불편해 가까우면서 먼 산처럼 느껴진다. 사람 발길이 뜸한 만큼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고 남고산성, 관성묘, 남고사 등 문화유적과 명승지가 많아 전주시민들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있다. 가을이면 활엽수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단풍이 빼어나고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고덕산은 덕이 높은 산이란 뜻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대산(孤大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高德山) 또는 고달산(高達山)으로 기록돼 시대마다 달랐다. 고달이란 최고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높다리기’라고도 불렸다. 산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기품이 있어 “덕이 높다.”라는 고덕이 어울리지만 유래는 알 수 없다. 높다라기산에서 차음됐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비롯해 전란이 닥칠 때마다 고덕산과 그 줄기에 있는 남고산성은 전주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고덕산 줄기에는 둘러볼 만한 유적들이 많다. 관성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을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관성묘는 고종 32년(1865)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이 제안해 각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양쪽 벽에 ‘삼국지연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다. 남고진 사적비에는 남고산성의 내력이 담겨 있다.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각 봉우리에서는 한옥마을을 비롯한 전주시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만경대에는 고려 말기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1337~1392년)가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돌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몽주는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년)가 전승 기념으로 전주 오목대에서 큰 잔치를 베풀면서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하자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 올라 기울어가는 고려를 걱정해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전해내려온다. ●문화유적의 보고 남고산성 고덕산에 오르다 보면 남고산성(사적 제294호)을 거치게 된다.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고덕산 줄기인 남고산(220m) 정상을 중심으로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 쌓았다. 남고산성은 문화유적의 보고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867~935년)이 쌓았다. 이 때문에 견훤산성 또는 고덕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견훤은 전주의 동서남북을 제압하기 위해 산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각각 사찰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고산성은 폭 3.4m 높이 1.2m, 길이 5.3㎞로 축성됐으나 현재 3㎞ 구간만 밝혀졌다. 전주에서 남원, 순창으로 통하는 교통상 요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곳에서 끝까지 대항했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당시 전주 부윤 이정란이 왜군을 막을 때 쌓았다. 1811년(순조 11년) 관찰사 이상황이 증축, 이듬해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해 완공했다. 전주시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108억원을 들여 성곽길이 2950m 가운데 1546m를 복원했다. 이 산성은 조선 순조 때 수축해 남고진을 두었고 효종 때 설치한 중진영, 숙종 때 쌓은 위봉산성과 함께 전주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산성 안의 남고사 앞쪽에 남장대, 뒤편에 북장대를 두었다. 남장대 아래 계곡에 군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고 산성별장 1명이 22명의 지휘관과 1400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주둔했다. ●사방 탁 트인 조망권 장관 고덕산은 전주시내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산코스로 유명하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3~4시간이면 정상을 밟는다. 남고산성 성벽 위를 걷기도 하지만 정상에 이르는 길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코스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동서학동 좁은목 약수터 방향, 평화동 흑석골 방향, 전주교육대학 뒤쪽 등이다. 예전에는 약수터를 경유하는 코스를 많이 선택했지만 평화동에 아파트 밀집지역이 형성되면서 학산 쪽에서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아졌다. 문화유적탐방을 나서는 등산객들은 아직도 전주교대 뒤쪽길을 선택한다. 어느 코스든 비교적 길이 평탄하고 볼거리가 많아 지루하지 않다. 초입부터 중턱까지 구간은 소나무숲이 우거져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여성 등산객들이 선호한다. 비교적 경사가 급하지 않던 산행길은 남고산성 북동쪽 성곽 뒤로 올라서면서 급격하게 고도를 높인다. 성곽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는 전주시가지가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고덕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지막 정상부근 오름은 만만치 않다. 아마추어 등산가들은 10여분 정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짝 힘을 써야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압권이다. 북서쪽으로는 발 아래 전주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지고 익산시까지 내려다보인다. 동쪽으로는 기린봉, 치명자산 너머 진안 마이산이 가물거린다. 남동쪽으로는 아득히 지리산 연봉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모악산의 자태를 살펴볼 수 있다. 고덕산은 최근 들어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등산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적한 산행을 즐기려는 등산객과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아졌다. 남쪽 기슭에는 전원생활을 추구하는 동호인들의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남고사도 가보세요 남고사(南固寺)는 전주시민들에게 친근한 사찰이다. 역사적 의미가 큰 남고산성 안에 있는 절로 전주 사람들은 초·중·고 시절 한두 번쯤은 소풍을 간 경험이 있다. 예로부터 해질녘에 들리는 남고사의 종소리를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전주시내 남쪽에 위치한 작은 사찰로 접근성이 좋아 주민들이 산행할 때 자주 찾는다. 산 아래 주차를 하고 20분 정도 걸어 오르면 도달한다 남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보덕의 제자 명덕화상이 668년 창건했다. 보덕이 고덕산 남쪽에 경복사를 창건해 열반종의 근본 도량으로 정했는데, 명덕화상이 남고사를 창건해 그 말사의 자격으로 열반종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때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라고 불렸다. 남고연국사가 남고사로 표기된 것은 견훤이 산성을 쌓고 사고(四固) 사찰을 지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까지는 교종 계통의 사찰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선·교 양종을 통합하면서 정한 48개 사찰에 들어가지 못해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임진왜란 이후 선종이 크게 신장되면서 선종계 사찰이 됐다. 1680년(숙종 6년)에 관음전이 들어서고 1881년(고종 18년)에 중건했다. 1981년 대웅전, 1984년 삼성각, 1985년 관음전을 중건했다. 1992년 관음전과 요사가 불에 탔고 1995년 관음전을 인법당으로 복원하고 1996년 목조관음보살상을 모셨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삼성각, 사천왕문 등이 있다. 관음전은 1680년 창건돼 1992년 10월7일 불에 탄 것을 1995년 복원했다. 사천왕문에는 다른 절에서처럼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고 사천왕을 그린 탱화만 둔 점이 특이하다. 옛 절터 남고사지는 현재 대웅전 오른쪽 앞 건물자리다. 도 기념물 제72호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 개편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 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시아관 중국실이 훨씬 재미있고 흥미로워진다. 21일 새롭게 문을 여는 중국실의 전시품 100여점 중 70점 이상이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것들로 채워진다. 목재로 만든 사천대왕, 신석기시대 토기, 명대의 화려한 도자기와 회화 등등. 이번 전시는 ‘권력의 상징-중국 예기’, ‘고대 중국인의 생활-명기와 도용’, ‘중국인의 고대종교-불교’, ‘흙의 신비-중국도자’ 및 ‘선의 예술-중국회화’ 등 모두 5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특히 우리나라 비슷한 시기의 문화 예술과 비교 설명하면서 관람의 재미를 한층 더했다. 예컨대 농사의 고단함과 수고로움을 표현한 작자미상의 청나라 시대에 제작된 ‘빈(주나라의 옛이름)풍칠월도’는 모두 24폭의 두루마리 그림으로서, 한 해 농사를 짓는 동안 겪는 즐거움과 수고로움을 표현한 조선시대 농가월령가의 모체가 된다. 또한 실제 성인 남성의 키에 가까운 165㎝ 높이의 ‘증장천왕’(사천왕상 중 남쪽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은 국내 사천왕상에서 보기 드물게 목재로 만든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화재와 전쟁 등으로 대부분 토기로 만들어져 있는 것들만 남았다. 이밖에 네 번째 마당 ‘흙의 신비’에서는 중국의 대표적 문화재인 도자기를 생산지역 가마터 별로 분류해서 시대적, 지역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를테면 월주요, 요주요, 정요 등이다. 아울러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도자기도 함께 전시해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 문화관계에 있어 통시적, 공시적 이해를 높였다. 박물관 아시아부 관계자는 “2005년 처음 문을 연 뒤 두 번째로 개편한 중국실 전시를 통해 중국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및 한국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녹유 사천왕상전 90년만에 원형 복원

    신라시대 저명한 사찰 중 한 곳인 사천왕사(四天王寺·679년 완성) 터에서 출토된 ‘녹유 사천왕상전’(釉四天王像塼)이 발굴이 시작된 지 90년 만에 하나로 합쳐졌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동국대 서울캠퍼스 박물관, 경주캠퍼스 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 5개 기관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26일부터 오는 8월23일까지 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한다. (054)740-7518.
  • 사천왕사에서 또 녹유전 나왔다

    사천왕사에서 또 녹유전 나왔다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세워진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동탑 터에서도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인 양지(良志)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녹유전(釉塼·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이 나왔다.앞서 사천왕사 터에서는 1920년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 표현된 3종류의 녹유전이 수습됐고,2006년 서탑 터 조사에서도 녹유전의 존재가 확인됐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양지석장’조에는 ‘양지는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전탑의 기와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술사학자인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는 1973년 ‘양지와 그의 작품론’이라는 논문에서 사천왕사의 녹유전을 양지가 70세 무렵 만들었다고 추정했다.2006년부터 사천왕사 터에 대한 연차 발굴을 벌이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기단만 남아 있는 쌍목탑터의 동탑이 있던 자리를 발굴조사한 결과 두 탑 모두 같은 방식으로 녹유사천왕상전(釉四天王像塼)을 기단의 네 면에 둘렀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10일 밝혔다. 조사 결과 동탑터의 녹유전은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면석(面石)으로 사용했다.그것들을 기단 계단을 중심으로 한 면에 6개씩,모두 24개를 배치함으로써 사천왕이 탑의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편 경주문화재연구소는 3년 동안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사천왕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를 확인했다.남회랑 중앙에 사찰의 대문에 해당하는 중문(中門)을 배치하고,이 중문과 남북 일직선상에 금당과 강당(미발굴)을 세웠으며,금당 남쪽의 동서 양쪽에 목탑을 만들었다. 연구소는 “올해 조사에서는 강당 오른쪽에서 감은사 터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장방형 건물지가 드러났으나 그 기능이 무엇인지는 현재로는 짐작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그리스·로마 신화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작업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 이윤기는 런던에 있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록 몇권을 사가지고 나와 입구의 계단에 앉아 펼쳐보다가 ‘바즈라파니(Vajrapani)’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에 눈길이 갔습니다. 곧 금강역사인데, 뜻밖에도 ‘헤라클레스 차림으로 제우스의 벼락을 든 부처님의 수행원’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지요. 그는 다시 박물관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 일행을 돋을새김한 이 간다라 조각을 찾았습니다.‘수행원’은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왼손에는 제석천이 아수라를 쳐부술 때 썼다는 금강저, 오른손에는 굵직한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지요. 올리브 나무를 뿌리째 뽑아 만든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가 성미가 고약한 네메아 골짜기의 사자를 30일 밤낮으로 목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그리스 신화 그대로였습니다. 최근 발간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인 간다라는 서기전 327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 슬그머니 부처님의 호위무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대대적인 문화융합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사자는 그리스 시대에 이미 무사의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어깨(肩甲·견갑) 장식으로 정착된 듯합니다.‘영웅 따라 하기’를 좋아했던 로마 황제들은 사자가 입을 벌린 채 마치 어깨를 무는 듯한 견갑 장식을 즐긴 것으로 알려지지요. 간다라에서 불교에 편입된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습니다. 미술사학자 권영필은 중국에서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사자가 어깨 장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657년 시안(西安)의 무덤에서 나온 무인상이 그렇습니다. 베이징 교외의 명 13릉에 도열한 무인석의 어깨 장식도 로마 황제의 그것과 매우 닮았지요. 간다라에서 금강역사가 된 헤라클레스는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다시 사천왕으로 변신합니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서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지요. 금강역사나 사천왕 모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니 역할은 달라지지 않은 셈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은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불법을 수호케 하는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사천왕은 일주문에 해당하는 진여문(眞如門)에 버티고 있습니다. 조선 영조 22년(1746년) 당시 능창군 이숙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발원문이 2002년 발견되었지요. 사자 모양의 어깨 장식을 하고 있는 사천왕은 정면에서 보아 진여문의 왼쪽 바깥쪽에 서 계시는 서방광목천(추정)입니다. 어깨뿐 아니라 배에도 사자 머리가 장식되었는데, 무섭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광목천의 표정에 걸맞게 귀여운 아기 사자의 모습입니다. 사자 머리 아래에는 한 마리 분의 사자 가죽이 고리로 매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죽을 벗겼다는 네메아의 사자일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유서깊은 절이 지금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화보다 더 신화적이지 않습니까. dcsuh@seoul.co.kr
  • 24개 교구 문화재 한눈에

    한국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3월26일 마침내 문을 연다.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1∼3층에 들어설 이 불교중앙박물관은 전시시설과 수장시설, 학예연구실, 보존처리실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가운데 주요 공간은 약 360평 규모의 전시장으로 운영되는 지하 1층. 세 개의 상설전시실과 시청각실이 들어서며 전시실에는 성보(聖寶)와 함께 미디어 시설들을 갖춰 관람객들에게 불교문화재는 물론 관련 정보를 편리하게 제공한다. 조계종 24개 교구가 소장한 문화재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설비와 함께 대형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부처님 생애나 산사와 관련된 영상도 볼 수 있다. 지하 3층은 150평 규모의 수장고와 보존처리실로 꾸며진다. 수장고는 금속류와 회화·지류·목조류 및 석조·기와류를 나누어 보관하도록 3개 시설로 나눠져 있다. 이 보존처리실에서는 불화며 지류에 대한 보존처리 작업도 이루어진다. 박물관은 불교 삼귀의에 바탕한 개관특별전 ‘한국불교 1700년 삼보특별전’개막식 다음날인 3월27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박물관 개관에 맞춰 부처님오신날인 5월24일까지 계속되는 시리즈 기획 ‘한국불교 1700년 삼보특별전’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상을 비롯한 불상 100여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박물관측은 2008년과 2009년 각각 법(法)과 승(僧)을 주제로 특별전을 연달아 마련할 계획이다. 한편 개관에 앞서 지난달 18일 박물관 초입에는 철을 두드려서 부조형태로 만든 사천왕상이 봉안됐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전남 영광 불갑산~모악산

    [산이 좋아 산으로] 전남 영광 불갑산~모악산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 경계에 곧게 누운 불갑산(516m)∼모악산(347.8m)은 ‘사회과부도’식 산맥 개념에 의하면 ‘추풍령 부근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와 전라북도 남동부의 무주·진안을 거쳐 전라남도 함평만까지 뻗었다.’는, 우리나라에서 평균 높이가 가장 낮은 노령산맥에 속한다. 최근에는 호남의 심장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영산강을 주축으로 내장산에서부터 영광∼함평까지 이어진 이 산줄기를 ‘영산기맥’이라 하여 별도로 종주산행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불갑산과 모악산은 서해의 가장 끝쪽에 엎드렸지만 그 핏줄을 가만히 짚어보면 결국 영산기맥을 타고 호남정맥에 닿아, 호남정맥에서 백두대간까지 이어지니, 우리나라 내륙 산줄기 중 백두산의 자식이 아닌 산은 극히 드물다 하겠다. 대륙성기후로 한랭건조하고 겨울이면 폭설로 몸살을 앓는 전남 영광. 법성포 구수한 굴비 냄새에 밀려 걸음은 자꾸 산을 떠나 바다로, 혹은 바다를 등에 지고 산으로만 향한다. 불갑산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가 될 만큼 작은 체구에 비해 수림이 울창한 산이기도 하다.1949년 여름, 트럭 2대 병력이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끝내고 귀대 길에 함평 양림마을 주민 31명을 무고하게 학살, 위령비를 건립했을 정도. 반면 불갑사(www.bulgapsa.org) 옆 동백골은 천연기념물 제112호 참식나무 자생지이자 북방한계선이 된다. 탁 트인 정상은 ‘연꽃의 열매를 닮았다’ 해서 연실봉이라 불리는데, 그 위에 서면 영광과 함평 일대, 가야 할 모악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진다. 모악산은 불갑산에서 약 2.5㎞ 떨어진 봉우리로, 연실봉에 비하면 전망도 높이도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차라리 자식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흡족하게 돌아서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후덕하다. 영광의 불갑산이 불갑사 중심으로 다양한 등산로를 선보인다면, 서쪽으로 다소 물러선 모악산은 함평군 용천사와 용문사를 통해 오르는 길이 발달돼 있다. 두 산을 연결하는 산행은 더디 걸어도 5시간쯤 걸리며, 각 산을 하나씩 따로 떼어 하는 산행은 3시간을 넘지 않는다. 불갑사에서 출발해 정상인 연실봉으로 오르는 대중적인 코스는 6개 정도인데, 동백골과 해불암(불갑사 5대 암자 중 하나로 주변 경치가 뛰어나 예부터 호남지역 참선 도량의 4대 성지로 꼽히던 곳)을 거쳐 정상을 오가는 코스가 약 4.5㎞로 1시간30분 걸리고, 수도암에서 도솔봉을 통해 불갑사로 내려서는 코스는 3.5㎞이며 역시 1시간30분 걸린다. 불갑사에서 동백골∼구수재를 찍고 연실봉∼해불암∼불갑사로 내려서는 길은 대략 2시간 잡으면 넉넉하고,4.2㎞의 불갑사∼구수재∼도솔봉∼수도암은 3시간 잡는 것이 여유 있다. 거리를 조금 늘려 불갑사∼구수재∼연실봉∼노루목을 거쳐 불갑사로 돌아오는 길이 6㎞로 3시간 걸리고, 수도암에서 연실봉과 덫고개(덕고개)를 지나 불갑사로 하산하는 길은 6.4㎞로 3시간 걸린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다소 넉넉히 잡아야 하지만 어디를 거치든 불갑사 원점 회귀 산행은 부담이 적다. # 여행 정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내를 거쳐 함평 방면으로 8㎞ 진행하면 불갑면에 닿는다. 호남고속도로는 정읍IC로 들어선 다음 고창을 거쳐 영광으로 진입할 수 있고, 광주·목포·전주를 통해서도 영광 이동이 가능하다. 서울 기준 4시간이 조금 덜 걸린다. 대중교통의 경우 출발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겠지만 광주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영광읍내에는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불갑사 경내에선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 소슬 빗살문의 섬세한 조각과 색감이 제일 도드라진다. 그 외 사천왕상이 지방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돼 있고,1644년 중건된 만세루는 문화재자료 제166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글 사진 황소영(월간 MOUNTAIN 기자)
  •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인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사적 312호)는 말 그대로 ‘신비의 땅’이다. 무등산 자락인 영귀산 아래 대초리·용강리 일대 길 옆이며 산자락에 수많은 불상과 불탑이 늘어서 있어 ‘천불천탑’사찰로 불리는 명소. 창건 시기나 가람과 관련된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 숱한 설화들이 전해지며 지금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횡행하고 있다. 번듯한 전각은커녕 사찰에선 반드시 갖춰야 할 천왕문·사천왕상조차 없는 파격의 절집. 전통의 양식에선 한참 비켜 선 채 불탑·불상의 야외전시장쯤으로 비쳐지지만 사찰 곳곳에 서린 민중의 소박한 염원이며 도공들의 애틋한 정성 때문에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찰의 이름대로라면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 먼 옛날부터 運舟,運柱,雲柱,雲住 등 다양하게 불려왔지만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雲住寺’라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확인되면서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이란 ‘雲住寺’가 일반화됐다. 여러 이름만큼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에 얽힌 이야기도 가지가지다. 인근 마을에 중국설화에 전하는 선녀 마고할미의 이름을 딴 폭포와 손가락자국, 지팡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고할머니 전설’, 신라 고승 운주화상이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는 이야기, 미래불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과 노비들이 모여 세웠다는 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선국사 창건설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한반도를 배의 형국으로 보고 동쪽엔 산이 많지만 서쪽엔 산이 없어 나라의 운세가 일본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명치 부분인 운주사를 조성해 균형을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한낱 ‘설’일 뿐 역사적 근거가 없다. 중종25년(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홍언필 편찬) ‘능성현조’의 “사찰 좌우 산등성이에 천불천탑과 석조 불감이 있는 운주사가 있다.”는 기록과 전남대박물관이 발굴한 암막새 기와와 ‘옴마니반메훔-밀교사원’이라 새겨진 수막새기와 등에 ‘운주사´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 말고도 ‘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 사찰지 ‘범우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이름이 들어있지만 모두 “천불천탑이 있다.”“폐사되었다.”는 정도의 단순한 내용이 고작이다. 학계에선 불상과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대체로 11세기에 창건,12세기에 천불천탑이 조성됐고 13세기에 백제탑 등 다른 석탑이 추가 제작됐으며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본다.1942년까지 사찰 안팎에 석불 213기와 석탑 30기가 있었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가 전부. 하지만 최근까지도 곳곳에서 불상과 불탑의 조각과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는 만큼 실제로 천불천탑이 있었을 것이란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평지와 야산 측면의 암벽 위아래에 무리지어 서있는 석불들은 대부분 큰 돌의 앞면만 조각한 평판상인데 기법이 아주 치졸하다. 정통적인 양식에선 한참 동떨어진 채 한결같이 못생겼다. 불상의 이목구비 생김새나 비례, 조형미가 엉성해 부처의 위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할머니 부처, 아빠엄마 부처, 아들딸 부처, 아기부처처럼 친숙한 우리 이웃들의 애환과, 구원을 바라는 민중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다듬어내려 애쓴 석공들의 토속적인 심성엔 깊은 정이 절로 느껴진다. 고은 시인은 그래서인지 “지지리도 못나 말 한마디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56억 7000만년 후에 올 후천개벽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죽어버린 운주 천탑”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운주사는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땅”으로 그려진다. 다른 고찰들에서 보이는 번듯한 전각도 찾아볼 수 없다. 도선국사가 사찰을 지을 당시 공사를 총지휘했다고 전해지는 공사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웅전이며 지장전, 산신각, 일주문은 모두 1990년대 이후 만들어진 것. 허술한 가람과는 달리 사찰 중심의 석조불감(보물 797호)과 원형다층석탑(보물 798호), 일주문 안쪽의 구층석탑(보물 796호)은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은 판석으로 만든 감실 안에 두 개의 불상을 꽉 차게 봉안한 게 인상적이다. 불상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형식인데 사찰 한가운데 본존을 모신 것으로 보아 바로 이곳이 야외법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석조불감 바로 북편의 원형다층석탑도 이색적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을 모두 원반형으로 꾸민 이 석탑은 6층이 남아있지만 전통적으로 홀수 탑을 세웠던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층석탑은 운주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 큰 자연석 기단 위에 9층을 올렸는데 탑신의 각 면에 새긴 마름모꼴이나 그 안의 꽃문양은 이곳에서만 보여지는 특이한 것이다. kimus@seoul.co.kr ■ 무게 250t 자연석에 새긴 세계유일의 석조 ‘부부와불’ 운주사의 석불·석탑들을 만드는 데 썼던 응회암 채석장이 있는 서쪽 야산 정상엔 세계 유일의 거대한 돌(石) 와불이 있다. 신도들이 탑돌이하듯 이 와불 주위를 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운주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적이다. 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형태의 일반적인 열반상과는 달리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길이 12.7m, 무게 150t 추정)과 선 모습의 석가모니불 입상(길이 10.26m, 무게 100t 추정)이 자연석에 나란히 조각된 형태. 두 불상이 나란히 누웠다 해서 ‘부부와불’로 통한다. 도선국사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천불 천탑을 하루 낮밤에 세운 뒤 맨 마지막에 두 부처를 세우려 했으나 공사 말미에 일을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꼬끼오” 닭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와불로 남게 됐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와불 바로 아래엔 그 동자승이 벌을 받아 시위불(머슴미륵)로 변했다는 석불입상이 서있어 전설에 흥미를 더한다. 와불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으며 일제강점기에 이 속설을 믿은 일본인들이 불상을 훼손했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석불의 북쪽 다리 부분이 남향의 머리 부분에 비해 5도가량 경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상·입상 다리 부분과 좌상·입상 사이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처럼 보이는 틈도 있다. 결국 산 꼭대기에 있던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긴 했지만 떼어내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보여진다. 전문가들은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리 없고,250t은 충분히 됨 직한 거대한 석불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작정으로 암반에 조각했는 지를 고려할 때 설계 잘못으로 인한 공사중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주지 도공 스님). 신라 진흥왕조인 553년 의신 스님이 창건했고 혜공왕조인 776년 진표 율사가 중창한 ‘호서제일가람’이다.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졌지만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1624년에 복원된 사찰.‘법이 머문다.’란 뜻의 법주(法住)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했던 창건주 의신 스님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후학을 양성할 절터를 찾기위해 머물렀다는 연기설화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법상종 종찰의 면모를 유지해 왔으며 지금은 국내 대표적인 미륵도량이자 화엄사찰이기도 하다. 산내암자 11개, 말사 80개를 거느린 주요 본사답게 이런저런 사연이 많지만 아무래도 법주사의 핵심은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다. 흔히 사찰의 탑이라면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을 떠올릴 만큼 나무로 세운 목탑은 생소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원시불교 이래 탑전은 목조의 전통을 유지해 왔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탑의 시원이 목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도 목탑이 세워진 사실이 만복사지 탑지에서 밝혀졌고 조선시대까지 전해져왔음이 각종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법주사 팔상전으로, 이 팔상전은 현재 목조 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1984년까지만 해도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탑의 쌍벽을 이뤘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법주사 경내의 중심에 선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석조 기단위에 5층으로 올린 5층 목탑이지만 내부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한 통간 건물로 되어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사찰 전각 기단은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특히 동서남북에 배치된 계단은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한다. 기단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벽면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했고 불상 앞에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 5층 가운데 1·2층은 5칸,3·4층은 3칸,5층은 1칸으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팔상전이란 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신 전각. 쌍계사.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등의 팔상전에서도 이같은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사찰의 팔상전에 모셔진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한꺼번에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한가운데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각 벽면에 두 폭씩을 배치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팔상도의 8폭을 전부 보기 위해선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팔상도를 따라 돌다보면 결국 가운데 벽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게 되는 셈이다.(지난 1968년 팔상전을 해체수리할 때 심주(心柱) 밑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어 이곳이 불사리를 봉안한 장소임이 확인되었다. 목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처음이다.) 팔상도를 따라 탑돌이를 한 뒤 문을 나서서 지붕을 올려다보면 2층 처마 아래 모서리에 새겨진 난쟁이 모습의 인물과 용 형상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려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친 모습의 난쟁이상이 흥미롭다. 왕방울 눈에 나선형 눈썹과 짙은 수염을 갖고 있는데 부처님을 공양하고 불전을 수호하는 불교 외호신 중 하나라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불사리를 봉안한 탑에 더해 예배 공간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의 내부를 예배공간으로 썼던 기록은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의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이라는 구절에 처음 나타나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사람이 탑 안으로 숨어든다는 것은 탑 내부에 큰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법주사 팔상전이 바로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 형식의 목탑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팔상전은 지난 1968년 해체 보수공사 이후 내부 통풍이 안되고 벽면에 습기가 심하게 차오르는 등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법주사 주지 도공 스님은 “미륵신앙과 화엄사상을 함께 담은 법주사의 중심건물인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 성격과 예배장소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유일한 탑전인데 예산과 보존 처리의 어려움 때문에 훼손되어 가는 문화재를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법주사의 명물들 법주사 경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명물들이 들어서 있다. 팔상전을 비롯해 석련지, 쌍사자석등이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도 12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보물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과 사천왕상, 석련지, 대웅보전, 금동미륵대불은 신도와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문화재들이다. 우선 일주문을 지나 팔상전과 대웅보전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국내 사찰중 가장 큰 규모. 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인데 중앙 통로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 크기의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해 천왕문을 통과하는 이들의 시선을 제압한다. 사리각 옆 암벽에 조각된 전체 높이 6.18m 크기의 마애여래의상도 독특한 불상. 둥근 얼굴과 감은 듯 뜬 눈에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인 추상이 인상적이다. 연꽃 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싼 연봉이 불상을 둘러싸고 발 아래엔 반쯤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석련지는 원래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의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 신라 성덕왕조때 화강석으로 조성됐는데 8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굄을 만들고 다시 굄돌을 올려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무량수의 감로천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 진흥왕때 창건된 대웅보전 안의 불상 3구는 국내 사찰 법당에 봉안된 소조불 좌상중 가장 큰 것.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측에 노사나불(아미타불),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각각 마음, 덕, 육신을 뜻한다고 한다. 최근 개금불사를 마치고 점안식을 가졌다. 팔상전 왼편, 미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금동미륵대불은 국내 최대의 규모.8m 높이의 기단 위에 25m높이로 조성됐는데 소요된 청동만도 160t이나 된다고 한다.
  • 대전에 불교미술관 개관

    불교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여진미술관(관장 이진형)이 14일 대전 유성구 탑립동에서 문을 열었다.이 미술관은 연건평 5097평에 2층 규모로 전시실, 수장고, 연구실, 공방 등을 갖추고 있다. 이 곳에는 삼천석가모니좌상, 석가모니고행상,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 사천왕상, 나반존자 등 이진형 관장이 만든 불교 조각품 130여점이 전시돼 있다.이 가운데에는 청양 장곡사 약사여래상, 경주 기림사 건칠관음상,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 등 국가지정문화재 모작(模作)과 아기 모습의 천진불, 동자상도 있다. 이 관장은 대전무형문화재 불상조각장 기능보유자로 여진은 그의 법명이다.이 관장은 “무형문화재 전수와 가족단위의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무료로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042)934-8466.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아수라·극락의 경계’ 사천왕상 한눈에

    ‘아수라·극락의 경계’ 사천왕상 한눈에

    엄청난 규모에 강렬한 색채, 심상찮은 제스처, 온갖 잡귀를 밟고 선 엽기적이기까지 한 자태…. 우리는 으레 평정과 안식을 꿈꾸며 절문에 들지만, 이런 기대는 이내 섬뜩한 형상에 압도당하고 만다. 산문 어귀에 사천왕상이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아수라와 극락의 경계, 죽음과 삶의 경계를 수호한다는 사천왕상(四天王像). 그러나 부처와 보살 등의 위계에 눌려서일까. 불교미술 전문가들조차도 사천왕상에는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왔다. ‘사천왕’(한길아트 펴냄)은 이런 문제적 상황에서 출간된 국내 ‘첫’ 사천왕 화보집이자 연구서란 점에서 주목된다. 부산 범어사에서 수행중인 관조 스님이 사진을 찍고 건축가 이대암씨가 글을 썼다. 책은 전남 장흥 보림사, 고흥 능가사, 영광 불갑사, 전북 완주 송광사, 강원도 홍천 수타사, 경북 청도 적천사, 경남 양산 통도사, 경기 안성 칠장사 등 8곳의 사천왕상들을 살핀다. 동쪽의 지국천왕과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으로 이뤄진 사천왕상의 전모를 화려한 도판을 곁들여 소개한다. 사천왕상은 힌두교의 호방신에서 출발해 석가의 신변호위, 나아가 불국호위로 역할을 넓히며 신앙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천왕각 순례는 곧 이미지의 난타다. 그 다양한 표정과 형색은 신명나게 변주된 한바탕 시나위 가락 같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목조이면서도 목조답지 않은 섬세함과 율동감 넘치는 표현기법이 돋보인다. 서방광목천왕이 용과 여의주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무시무시한 형상의 사천왕상들과 달리 적천사의 사천왕상은 표정이 온화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특징. 칠장사 북방다문천왕은 빈 주먹을 허리에 대고 있으며 사천왕의 발밑에 깔린 악귀상을 인간적으로 표현, 당시 우리를 침범한 청나라군을 응징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다.6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산 오르記]홍천 팔봉산

    [산 오르記]홍천 팔봉산

    팔봉산 제 1봉은 들머리부터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쉬운길’과 ‘험한길’이라고 적힌 안내판 앞에서 선뜻 ‘험한길’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각자 능력과 체력에 따라서 길을 고르도록 한다.대체로 걸어서 오르는 ‘쉬운길’에 비해 ‘험한길’은 바위 사이로 매어놓은 로프를 잡고 오르는 곳도 나온다. 제2봉 오르는 길 역시 가파르고 험하다.로프와 쇠난간을 잡고 암릉을 지나면 바위 봉우리 꼭대기에 작은 사당이 하나 보인다.삼부인당(三婦人堂)이다.400여년 전 조선 선조 때부터 어유포리에 살던 이씨,김씨,홍씨 등 세 며느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마을의 평온과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는 당굿을 올린다. 팔봉산 최고봉인 제3봉은 수직 철계단을 오른 후 암릉에서 거대한 바위를 만난다.이 바위를 돌아서 오르면 표지석이 있는 정상이다.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의 연륜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북서쪽으로 줄지어 선 다섯 봉우리는 마치 설악산 용아장성릉의 축소판 같다.철계단을 내려가면 3봉과 4봉 사이의 안부다. 제4봉은 팔봉산 등산로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곳이다.특히 철계단을 올라선 4봉 마지막 부분은 비스듬하게 수직으로 뻗은 굴이라서 침니등반 기술을 써먹기에 좋다.그러나 몸이 뚱뚱한 사람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잘 살펴보면 돌아서 오르는 길도 있으니 절대로 무리하면 안 된다. 이 굴은 ‘산파바위’라고도 하는데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겪는 것만큼이나 통과하기 어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밑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면 그만큼 빠져나가기가 쉽다.어려움 끝에 정상에 서면 기쁨도 그만큼 크다.팔봉산을 에돌아 흐르는 푸른 강물이 백사장과 어우러져 발 아래 한 폭 그림으로 펼쳐진다. 가장 어려운 4봉을 올랐으면 5,6,7봉은 문제없다.암릉길이 이어지며 가파르거나 위험한 구간에는 로프와 철계단이 있다.7봉에서 내려서는 길이 가장 길며 우뚝 솟은 8봉이 잘 보인다.팔봉산 등산로는 봉우리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다시 안부에 내려선 후 다시 봉우리로 오르는 길의 연속이다. 오르기 위해서 내려가는 몸짓을 되풀이하다 보면 우리네 인생길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야만 산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7봉과 8봉 안부에서 하산길을 잡는 게 보통이지만 암벽 등반 경험과 장비가 있으면 8봉에 도전해 본다.그러나 체력이 약하거나 노약자,부녀자는 등반을 삼가달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제8봉은 로프에 의지해서 수직 암벽을 오르기 때문이다. 8봉 꼭대기에 서면 널찍한 암반이 펼쳐져 있으며 산들바람이 시원한 그늘 드리운 노송과 더불어 반긴다. 8봉에서 하산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급경사 구간인데다 미끄럽기 때문이다.그러나 로프가 설치돼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마지막 철계단에 이어 수직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강변이다.암벽 밑으로 길이 나있는데 좁은 철판을 딛고 로프에 의지해서 강물 위를 건너는 곳도 있다.발판이 없어서 쇠줄을 디딘 채 로프를 잡고 건너기도 한다. 8봉까지는 총 4㎞에 3시간이 걸린다.경우에 따라서는 30년 같은 3시간 산행이 끝나면 팔봉산 여덟 봉우리가 오랜 벗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볼거리·먹을거리 홍천읍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무궁화동산을 들러본다.남궁억 선생의 동상이 있으며 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이 된 유래를 알 수 있다.희망리 읍사무소 앞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보물 79호)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원래는 홍천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동면 덕치리 공작산 수타사 역시 홍천에서는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대적광전,소조사천왕상,영산회상도 등이 강원도 유형문화재다. 홍천강을 따라서 모곡유원지 밤벌유원지 등은 가족이 함께 물놀이를 즐기기에 적합한 곳이다. 홍천강에는 견지낚시 명소도 즐비하다.팔봉산과 홍천강 일대에서는 잡고기매운탕 잘 하는 집이 여럿 있다.모래무지,꺽지,빠가사리 등 잡고기와 버섯,깻잎 등 야채를 넣고 펄펄 끓인 다음 수제비를 곁들인 매운탕을 뚝배기에 담아서 먹는 맛이란 정말 그만이다.4인분 3만원.홍천강 잡고기 매운탕은 팔봉산 산행과 더불어 오래도록 홍천강의 추억으로 남길 만한 별미로 꼽힌다. 윤정이네식당(033-434-3315),팔봉산시골집민박식당(434-0267),팔봉산민박호남식당(434-0678). ●가는 길 구리시 교문동 사거리에서 가평,강촌,광판삼거리와 남동진 거쳐 팔봉산까지 2시간 걸린다.홍천읍 거쳐 부사원검문소에서 좌회전,구만리 지나 팔봉산으로 가는 길은 40분 걸린다. 버스로는 상봉터미널(02-435-2129)에서 홍천을 거쳐 반곡리 팔봉산 입구까지 2시간50분 걸린다. 서울에서는 하루 40회,홍천(033-432-7893)에서는 하루 네 번 있다.팔봉산국민관광지 입장료 어른 1500원,어린이 500원.주차료 소형 3000원,중형 4000원. 산악문학인 안재홍
  • 보물 400호 선암사 승선교 복원

    300년 가까이 된 전남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보물 400호)가 12일 해체 복원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치(활) 모양의 승선교는 기초 자연암반 균열로 붕괴위험이 있어 2002년 11월 문화재청과 순천시가 4억 7000여만원을 들여 기초 암반을 화강석으로 보완하고 홍예석 147개 가운데 깨지거나 강도가 약한 32개를 새로 교체해 이달말 복원이 마무리된다. 둥그런 형태의 홍예석은 계곡물이 지나는 곳으로 길이 8.76m,최대 높이 6.34m,너비 3.62m다. 홍예석은 직육면체로 밑면이 좁고 윗면이 넓은 쐐기형으로 깎인 돌이다.한개 길이는 0.6∼1m인데 밑변의 폭과 높이가 30∼36㎝,60∼70㎝ 등으로 다양하다.복원에 쓰인 돌은 원래 재질과 흡사한 화강암으로 전북 익산의 함열면에서 가져왔다. 선암사 정문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승선교는 다리 양측 밑부분이 세월의 무게를 못이겨 차츰 내려 앉으면서 반원 형태가 뒤틀려 1년 8개월 만에 복원됐다. 승선교는 조선 숙종 39년(1713년) 이 사찰 스님인 호암화상이 6년 동안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선암사 종무소 관계자는 “선암사는 사찰의 터 기운이 세서 다른 절에 있는 사천왕상이 없고,승선교를 건너기만 해도 세속의 잡념과 묵은 때를 털어버린다는 속설이 있다.”고 말했다. 순천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교통체증 없고 여유로움도 즐기고 / 기차여행 묘미 아시나요

    한여름 더위만큼이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피서지를 오가며 겪는 교통체증.잘못 걸리면 계곡이나 해변에 닿기도 전에 제풀에 지쳐 휴가를 망치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승용차 대신 기차를 타고 여행에 나서는 것이 쾌적하고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요령이다.최근 출간된 ‘기차 타고 떠나는 여행’(중앙 M&B)은 차창 밖을 보며 오순도순 모여 앉아 떠나는 운치 있는 기차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이다.9000원. 영동선이 통과하는 강릉역,동해역을 비롯해 중앙선의 원주역,단양역,안동역 등 11개 기차노선의 31개 역을 중심으로 숨겨진 비경과 문화유적지,데이트코스,먹거리,놀거리 등을 소개했다. 먼저 강릉역 주변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기는 실속여행을 하기에 알맞은 곳.수심이 얕고 물이 맑아 아이와 함께 해수욕을 즐기기에 알맞은 경포해수욕장이 지척에 있고,소금강계곡을 품고 있는 오대산국립공원이 가까이 있다.강릉역 못미쳐 나오는 간이역인 정동진역은 전국에서 가장 바다와 가까운 역.시원하게 트인 바다에서 솟는 해돋이가 장관이다. 경부선옥천역에 내리면 시인 정지용이 ‘향수’에서 그려낸 정겨운 풍경이 손님을 맞는다.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정지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가 있고,남서쪽으로 10여분만 가면 쭉쭉 뻗은 대나무숲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용암사 마애불의 온화한 미소가 방문객을 편안히 맞는다. 경부선 동대구역을 지나 좀더 내려가면 청도역이다.청도의 매력은 소박함.역에서 나오는 길목에 전시된 맷돌,다듬잇돌,베틀 등 옛 생활용품들이 정겨움을 풍긴다.청도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은 여인의 화사한 미소가 감도는 듯한 분위기의 운문사.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알려진 이 사찰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처진 소나무’와 비로전 앞의 석탑,사천왕상 등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모은다. 전주∼남원∼여수로 이어지는 전라선은 남도의 멋과 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코스.전주역에서 남쪽으로 10분만 가면 선비의 풍류가 살아숨쉬는 듯한 한벽당이 있다.이곳은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월당 최당의 별장으로 전국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들던 명소.옥빛처럼 물이 흘러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이 ‘벽옥한류’ 같다고 해서 한벽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남원역에 내리면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영글던 광한루가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다.이곳은 조선시대 신선사상을 가장 잘 부각시킨 정원으로,전라감사 정아지가 ‘달나라에 있는 궁전’이라고 감탄했을 만큼 운치가 뛰어나다. 광한루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오작교,춘향의 영정을 모셔놓은 광한루원,춘향과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월매집,춘향기념관 등이 있다.남원역에서 동쪽으로 20분 정도 가면 수려한 산세와 기암절벽이 펼쳐진 구룡계곡과 남원의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다던 육모정이 선경을 이룬다. 각 명소에 대해서는 기차역에서 가는 길 및 대중교통편과 시간표,인근 맛집과 숙소,가는 길 안내 및 약도 등을 상세히 수록해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임창용기자 sdargon@
  • 전시 리뷰 / 중앙박물관 ‘통일신라’ 특별전

    ‘부처님의 나라’는 영화관처럼 어두컴컴했다.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란다.그러나 빛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희미함조차 다라니경에는 치명적이다.31일까지만 선을 보이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다라니경을 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통일신라’특별전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을 한 자리에 모은 최초의 종합적인 전시회다.이런 의미를 뒷받침하듯 국보·보물 10건을 포함하여 통일신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유물 500여점이 출품됐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사진)가 관람객을 압도한다.신라는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진흥왕은 555년 북한산을 순행했는데,이 비는 이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특별전은 6개 부분으로 나눠져있다.북한산 순수비는 제1부 ‘통일로 가는 길’의 도입부에 해당한다.통일 이전 신라의 영역이 가야지역과 한강유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2부 ‘중앙과 지방’은 최근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진 발굴조사의 성과가 반영됐다.당나라식 허리띠의 분포는 통일신라가 도입한 중국의 복식이,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하여 관료제를 정비함에 따라 어떻게 지방으로 퍼져나갔는지를 보여준다.제3부 ‘생활문화’는 ‘술 석 잔을 한번에 마시기’ 등의 벌칙이 새겨진 주사위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남근 등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제4부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은 양지(良志)가 만든 녹유사천왕상전돌이 장식하고 있다.이곳에는 숙수사지 금동보살좌상을 비롯한 10여점의 소형 금동불이 전시됐다. 제5부 ‘국제감각과 대외교류’는 서역인을 닮은 문관상(文官像)과 중국도자기의 분포를 통하여 통일신라가 새로운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6부 ‘호족의 성장과 후삼국’은 새로운 호족세력의 등장과 이들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선종으로 대표되는 사상계의 변화를 다루었다.지난 27일 중앙박물관에서 개막된 ‘통일신라’전은 새달 29일까지 계속된다.이후 경주박물관에서 7월29일부터 9월14일까지 열린다.(02)398-5120. 서동철 자 dcsuh@
  • 책/ 차윤정의 우리 숲 산책 - 인간의 무지에 상처받는 자연

    남도의 서정을 간직한 완도 갈문리 숲,불타오르는 태백산맥 자락의 계방산,동백의 붉은 비가 어지럽게 내리는 고창 선운산….우리 자연은 처절하리만치 아름답고 역동적이다.그러나 우리의 무관심 혹은 정보의 부족은 자연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방해한다.자연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림학자 차윤정씨가 지은 ‘차윤정의 우리 숲 산책’(웅진닷컴 펴냄)은 친근한 언어로 자연과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무언의 교감을 나누게 한다. 양평의 유명산과 중미산 일대는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그런데 이 일본이깔나무 숲은 일본에서 건너 온 조림수종이란 이유로 무시당해 왔다.말라깽이 모습으로 자란 일본이깔나무 숲을 보며 사람들은 그것이 없었더라면 보다 다양한 수종의 아름다운 숲이 조성됐을 것이라고 원망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의 소치다.1970년대 일본이깔나무를 심을 당시,산림의 지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가뭄이나 홍수에 취약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일본이 깔나무 숲이야말로 생명의 숲이다. 전나무 숲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오대산 월정사다.우악스러운 사천왕상처럼 솟아 있는 월정사 전나무는 어떻게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저자는 그 쓰임새에서 해답을 찾는다.월정사에서는 목재자원이 풍족했기 때문에 비교적 재질이 무른 전나무는 사람들의 손길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저자는 우리의 잘난 자연들이 그 잘남으로 인해 수난을 겪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자연파괴에 대한 보고서로도 읽힌다.1996년 산불로 검은 유령의 숲으로 변한 고성의 자연,산불로 날려버린 토양을 유지하기 위해 억새를 이고 살아가는 아픔을 간직한 유명산 억새밭.저자는 이처럼 끊임없이 제자리를 위협받는 자연의 현장을 자연과학도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잡아낸다.그리고 그 폐허의 현장에서 자연의 지혜를 발견한다. 예컨대 잎의 길이가 20∼30㎝쯤 되는 대왕송은 발아한 뒤 얼마간은 풀과 같은 생장기를 갖는데 이 때 긴 잎들은 뿌리 속에 탄수화물을 저장해 산불에 대비한다.몇년을 산불 없이 지내면 곧 나무와 같은 생장 형태로 바꿔 뿌리에 저장한 탄수화물을 이용해 하늘 높이 자라 산불이 났을 경우에도 피해를 덜 받게 된다. 저자의 숲 탐방은 민족의 원형을 간직한 장백산 원시림으로 끝을 맺는다.1960년 유엔에 의해 자연보존지역으로 설정된 장백산 지역은 1980년 다시 유네스코 산하 인간과 생물권(MAB) 계획에 의해 생물권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유네스코 장백산 생태계조사단 연구원으로 활동한 저자는 “장백산의 나무와 물은 너무 곧고 깨끗해서 사람을 품어주는 맛이 없다.”고 말한다. 모든 걸 감싸주는 게 자연이지만 때로는 이처럼 배타적인 것이 또한 자연이다.1만원. ▶ 차윤정 지음 / 웅진닷컴 펴냄 김종면기자 j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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