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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일선생

    ◎독립군 양성…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어/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자녀들 가르쳐/항일투쟁단체 규합,대한군정서 총재로/「김좌진전투부대」의 최고지도자… 흑하사변으로 동지 잃자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포 서일선생이 선정됐다.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교육자·종교인·언론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백포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선생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강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 있다. 혁명가 서일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채 산악과 벌판에서 풍손로숙한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도 서일선생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81년(고종18년)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호는 백포. ○월북 경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로 바꿨다(대종교·보훈처 기록).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와 기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등에는 사립학교 설립이 급증했다.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망명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31세때(1911년)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계통의 명동학교(왕청 덕원리소재)에서 물밀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이 명동학교를 서일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된다.선생이 단순한 무장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과 규합,중광단을 조직했다.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 그는 대종교 입교후 포교에도 나서 3년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의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서일선생은 교우들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케한 탓으로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이 사이 선생은 「오대종지강연」「도해」「신화강의」「진이도설」「삼문일답」「회삼경」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신국보」등 신문을 발간,『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듬해 1919년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정규병력 1천5백여명을 청산리전투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그들은 「북간도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정규군 3천3백여명이 사살 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일군 3천명 사살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총재는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부사령관 김성,참모장 나중소등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리전투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영 밀산으로 이동한다.여기에서 북로군정서(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등 10개 부대는 전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일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여기에 토비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으로 자결순국했다.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역사적 평가/독립운동가·교육가로 큰 발자취/신재홍 국사편편찬위 부장 백포 서일선생은 그가 민족운동사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몸소 이를 실천한 교육자이며 또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한 대종교의 간부일뿐아니라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지도자였다. 그의 학력은 함북 경성군에 위치한 성일학교 사범과를 나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음을 인식하여 향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북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 명동 동일 학성 동신 동화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강인한 민족혼의 배양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국조단군을 숭상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깨우치는데 있다 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 하였다.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민주운동이요 독립운동임을 믿어 교리연구과 포교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긴 민족종교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무엇보다 무장항일운동에 있었다.선생은 일제를 우리 국토에서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로지 일제와의 혈전에 있다하여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중광단 대한정의단을 조직,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여러 무장단체를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이 단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대종교 신자가 중심이 된 단체로서 재만 독립군중 최강의 부대였다.따라서 1920년 이 부대가 이룩한 청산리전투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 한다.이것은 선생이 배양한 투철한 민족혼과 강인한 항일의식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교육가이며 민족종교가로서 또한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선생이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다.
  • 일본의 윤리적 불감증/이창순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종군위안부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가장 부끄러운 반문명적 전쟁범죄다.그러나 일본사회 저변에는 이를 부끄러워할줄 모르고 반성하지 않는 윤리적 불감증이 흐르고 있다. 종군위안부에 관한 산케이(산경)신문보도는 일본의 이같은 섬뜩한 윤리적 불감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산케이신문은 1일 『한국정부가 31일 발표한 종군위안실태조사 중간발표는 독자적인 조사는 거의없이 대부분 일본자료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또 종군위안부들이 『노예와 같이 강제연행되었다는 증거로 전야마구치현 노국보국회 동원부장 요시다씨(길전)의 증언을 독자적인 검증도 없이 소개했다고 보도했다.산케이신문은 그러나 전종군위안부들의 비극적인 삶과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일본의 보수 우익을 대변하는 산케이신문의 이같은 보도태도는 종군위안부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의도를 느끼게 한다.종군위안부문제는 어느나라에서 자료가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반인륜적 범죄라는 점에서 일본이 비판받고있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은 『요시다씨의 강제연행 증언에 대해 일본에서 최근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강제연행을 간접적으로 부인하고 있다.이는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일본정부는 지난 7월6일 일본군이 종군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이같은 태도는 그들의 전형적인 역사인식의 2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한국인 전종군위안부들이 강제연행되었음은 요시다씨뿐만 아니라 생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다.일본은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실에 대해서는 왜곡하거나 눈을 돌려왔다. 종군위안부문제는 강제연행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반인륜적 전쟁범죄다.일본은 이같은 범죄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러나 산케이신문이나 일본잡지 문예춘추,제군등의 종군위안부문제 보도는 그들이 사죄할 의도가 없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사회의 이같은 윤리적 불감증은 과거 침략사에 대한 일본의 객관적 접근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음을 반증하는것이다.일본이 침략자로서의 과거를 왜곡하려해도 역사적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될수는 없다.어느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과거에 눈을 감는자는 미래에도 맹목이 된다.자위대 해외파견등 일본의 「국제공헌」강화움직임을 우려하는 것도 과거에 눈을 감으려는 그들의 역사인식 때문이다.
  • 일 정부 「발뺌」→「제소」→「사죄」 과정 상술

    ◎외무부 「정신대보고서」 내용/“일 장병 성적 위안” 정신대 사실적 정의 31일 정부가 발표한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는 그 내용이 5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2백11페이지에 이른다. 제1부 「정신대 문제의 현황」에서는 정신대 문제가 한일양국간의 현안으로 부각되게 된 경위,우리 정부및 일본정부의 진상규명 노력,그리고 우리 정부의 앞으로의 대책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또 지난 90년 6월 일본정부관계자들이 『군대위안부는 일본군대나 정부와는 관계가 없고 민간업자들이 한 일』이라고 강변했던 사실에서부터 91년 11월 와타나베(도변)당시 외무성보도관과 같은해 12월 가토(가등)관방장관의 「군대및 정부관여사실 시인」을 거쳐 92년 1월 방한했던 미야자와(궁택)총리가 국회에서 「사죄연설」을 했던 대목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2부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결과」에서는 일본군의 문서자료,미군이 위안부와 일본군 포로를 상대로 작성한 심문조서,오키나와 미군정당국의 활동보고서,피해자 증언및 관련자들의증언을 토대로 위안부의 모집,수송방법,배치및 관리,전쟁말기의 상황,연합군에 의한 현지 점령이후 현황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제2부는 위안부를 「전지의 부대를 수행하여 장병을 성적으로 위안한 여자」라고 보다 사실적으로 정의하고,1918년 8월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과 19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1937년 12월 남경대학살등 위안부라는 세계전사에 전무후무한 명칭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적고 있다. 또 초기의 대표적 위안소인 상해의 육군오락소의 위치와 규모,관리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상해외에 삼수구강 관요 증성 석용등에도 위안소가 설치돼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함께 43년 6월2일 대일본로무보국회의 창립부터 6월25일 각료회의의 학도전시동원체제확립요강 결정,7월30일 여자학도 동원 결정,9월23일 17직종(판매원,매점원,출개찰계,차장,이발사등)에의 남자 취업금지및 25세미만 여자의 근로정신대 동원 결정,44년 8월23일 공포된 학도근로령,여자정신근로령등 위안부 동원을 가능케한 당시 일본정부의 관련법률등을소개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지난 2월25일부터 5개월간 내무부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접수한 3백90건 가운데 대표적 사례를 발췌,정리한 제3부 「군대위안부 증언 사례」는 영문도 모른채 또는 일본군의 총칼이 무서워 강제로 끌려간 한국의 순진무구한 여성들의 기막힌 사연을 수록하고 있다. 제4부는 91년 12월12일 일본정부가 총리부 외정심의실 주관아래 외무성,방위청,노동성,경찰청,후생성,문부성등 6개 관련부처를 통해 조사한 총 1백27건의 문서목록을 싣고 있다. 제5부는 인도·버마전선 미군심리전팀의 한국 위안부및 위안업자에 대한 심문조서에서부터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에 한때 세워졌던 민간정부 제2복원반원의 복원에 관한 건 보고에 이르기까지 18건의 참고자료를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우리 정부내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은 철저한 진상규명에 계속 중점을 두고 일본의 성의있는 조사를 촉구해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 내주 임시국회 개회 전망/야에 조건없는 정상화 촉구/민자의총

    ◎야거부땐 단독등원… 당위구성/민주도 대표회담 통해 교착 타개시사 30일간의 공전끝에 제14대 개원국회를 자동폐회토록 한 여야는 28일 각각 의원총회를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한편 8월 임시국회 소집에 의견이 접근,빠르면 내주중으로 임시국회가 열릴 전망이다. 민자당은 이날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8월 임시국회 소집을 결의하고 야당측이 거부할 경우 단독으로라도 상임위 구성을 마치기로 했다. 김영삼대표는 이날 의총에서 『국회가 사실상 7개월동안 제대로 열리지 못한데 대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밝혔다.김대표는 이어 『국회정상화는 국회의원의 책임이요 의무이자 권리』라고 못박고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해 가까운 시일안에 임시국회를 소집할 방침』이라고 밝혀 민자당 단독으로라도 임시국회를 운영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김대표는 특히 『민주주의의 기본은 3권분립의 활성화인데도 정부와 법원은 있으되 국회가 없는 현재와 같은 공전상태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국민들은 지금 무조건 김대중대표와 내가 만나기를 바라고 있으며 70%이상의 국민들도 국회정상화를 원하고 있는 만큼 양당대표가 만나서 당면한 현안은 물론 나라의 미래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표는 또 『국정의 책임은 1차적으로 집권여당이 져야하지만 90석이상의 의석을 가진 제1야당도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의총에 참석한 민자당 의원들은 자유토론에서 『민주당은 국회개원문제를 대선전초전으로 생각,대세확보에 주력하고 있으며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야당의 정치공세를 일축하고 국회를 정상화시켜 민생문제·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정국을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의 김대중대표도 이날 의총에서 『앞으로 정국을 건설적으로 풀어나가는데 노력을 다하겠으며 민자당도 이에 상응하는 태도로 나와야 할것』이라고 말해 대표회담을 통해 정국경색 해소및 8월 임시국회 소집문제를 논의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따라 빠르면 다음달 1일쯤 김영삼대표와 김대중대표 회담이 열리는데 이어 김영삼·정주영대표회담이 성사된뒤 내주중 임시국회가 열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국민당도 이날 의총결의문을 통해 국회공전사태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국회정상화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민자당의 박희태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국정을 이끌고 있는 집권당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다하지 못한데 대해 깊은 자성과 함께 높은 관심속에 지켜보신 국민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산적한 민생현안을 앞에 두고 국회정상화를 외면할 명분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야당의 조건없는 국회정상화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 “정신대 공식사과하면서 배상 왜 미루나”

    ◎미 언론들,일 책임회피태도 일제 비난 【뉴욕·로스앤젤레스 연합】 일본정부가 한국등 주변 당사국들의 압력에 굴복,태평양전쟁 당시의 강제 모집 종군위안부,즉 정신대문제에 6일 공식 사죄하면서도 배상책임에 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아시아 여러나라들로부터 널리 비난받고 있다고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가 7일 도쿄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정부 관리들이 한국의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배상이라는 용어사용을 거부했고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 각국의 정신대 피해 여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에 관해선 구체적 언급도 없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데 대해 의아심을 표시했다.
  • “정신대 발표내용 미흡”/일국내서 거센 비판

    ◎시민단체등서 진상규명 촉구 【도쿄=이창순특파원】 일본정부의 종군위안부 실태조사 발표에 대해 일본의 여성단체등 시민단체들과 일부 지식인들은 「불완전한 조사」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사죄및 보상을 촉구했다. 일본부인회등 1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종군위안부문제행동 네트워크」는 6일 저녁 기자회견을 갖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성명은 정부자료가 일본군의 종군위안부 직접연행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점을 지적,『실태조사단의 각국 파견,보상실시,역사교육의 철저』등을 요구했다. 「일본의 전후책임을 분명히 하는회」의 우스키대표는 『우리들이 직접 증언을 청취한 13명의 한국인 전종군위안부들중 스스로 종군위안부가 된 사람은 한명도 없고 반정도는 경찰에 강제연행됐었다』고 지적하고 『경찰로부터 강제연행 자료가 없다는 것은 관계 자료를 소각시켰거나 숨기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일본의 양심은 어디에/문호영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이며 전쟁의 잿더미속에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독일과 비교된다. 독일은 전후 나치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했던 주변국가들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응분의 책임을 기꺼이 떠맡았다. 그 결과 독일은 유럽통합을 위한 마스트리히트조약의 핵심국으로 떠오를 만큼 떳떳해질 수 있었고,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던 프랑스와 연합군창설에 합의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에비해 일본은 어떤가.2차대전이 끝난지 반세기가까이 흐른 현재까지도 일본은 그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아시아국가들로부터 경원 당하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대외개발원조자금(ODA)의 70%를 아세안국가에 제공하고도 정치적으로는 전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자기나라 사람 아가시 야스시(명석강)가 유엔산하 잠정통치기구의 의장으로 있는 캄보디아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데도 캄보디아국민들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엄청난 로비자금을 들여야만 했다. 베트남은 극도의 경제난 때문에 일본의 협력을 고대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일본의 점령기간동안 쌀농사를 짓지 못하게 해 2백만명의 국민이 굶어죽었던 쓰라린 과거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이에대해 일본은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오히려 중국에 전후 배상의 형식으로 막대한 무상원조를 갖다주고도 한번도 「고맙다」라는 인사치레를 듣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약올라하고 있을 뿐이다. 6일 일본정부가 발표한 정신대문제,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종군위안부문제 조사결과 역시 이같은 그들의 뻔뻔스런 태도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65년 한국의 대일청구권 행사로 이미 끝난 문제를 한국이 다시 거론하고 있다며 눈을 흘기고 있다. 고령종군위안부들의 생활지원을 위해 기금 출연을 검토하겠다는 그들의 발표는 돈 몇푼으로 자신들의 저지른 역사의 과오를 무마해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강권으로 점령한 한반도의 부녀자들을 제국주의 침략전쟁터에 끌고가 유린한 세계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일본은 이제 역사의 죄악을 진실로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특히 일본이 경제부국임을 뽐내며 세계속의 국가로 성장하려면 먼저 양심과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 일정부 정신대조사/진상규명 미흡 유감/민주당 성명

    민주당의 장석화대변인은 7일 일본정부의 종군위안부문제 자체조사결과 발표와 관련,성명을 통해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해 유감스럽다』며 일본정부에 대해 피해당사자에 대한 직접증언청취등 철저한 진상규명및 만행에 대한 공식사죄와 피해보상등을 촉구했다.
  • 정신대 일조사 미흡/성의있는 조치 기대/외무부 논평

    조원일외무부대변인은 6일 일본정부의 정신대문제 조사결과 발표와 관련,논평을 통해 『일본정부의 조사결과가 정신대문제의 전모를 밝히는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일본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대변인은 『일본정부가 종군위안부문제에 관여했음을 재삼 확인하면서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면서 『이러한 취지에 비추어 일본정부의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외무부 논평 요지

    1·일본정부는 7월6일 정신대문제와 관련한 그간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는 바,우리는 일본정부가 정신대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하여 그간 총리부 주관하에 관계부처들이 성의를 갖고 관련문서를 발굴하여 조사를 해 온 노력에 대하여 이를 평가한다. 2·일본정부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문서를 전달받는대로 면밀히 검토할 것이나,우선 일본측의 발표내용을 검토한 바에 의하면,일본정부의 조사결과가 정신대문제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바,앞으로도 일본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3·일본정부는 이번의 조사결과 발표에 즈음하여 군대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일본정부의 관여를 재삼 확인하면서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 바,우리는 이러한 취지에 비추어 앞으로 일본정부의 구체적이고 성의있는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4·우리 정부는 일본정부로부터 통보받게 될 자료와 우리 정부가 그간 자체적으로 조사해 온 자료를 종합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발표할 예정이다.
  • 일정부 발표 내용

    한반도 출신의 종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작년 12월부터 관계자료가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성·청에서 정부가 동문제에 관여했는지 여부에 관해 조사해 왔는 바,금번 동 조사결과가 정리되어 발표하게 되었다. 조사결과의 요점을 말하자면 위안소 설치,위안부 모집 관계자의 단속,위안시설의 설치·증축,위안소의 경영·감독,위안소·위안부의 위생관리,위안소 관계자의 신분증 발급 등에 관해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국적·출신지 여하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모든 분들에게 다시한번 충심의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하고자 하며,이러한 잘못을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깊은 반성과 결의에 입각,평화국가로서의 입장을 견지함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한일관계 및 기타 아시아제국과의 관계를 구축하도록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후속조치는 마음의 문제로서 금후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각 방면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성의를 갖고 임해 가겠다.총 1백27건의 발견자료 주요기술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안소 설치(4건)=당시 전선에 있어서 군점령지역내 일본군에 의한 강간등 불법행위에 의해 반일감정이 조장되고 치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군인 개인의 행위를 엄중단속함과 동시에 신속히 위안설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통첩의 배포가 있었음. 위안시설은 사기진작,군기강유지,범죄 및 성병예방 등에 대한 영향이 컸으므로 위안에 관한 제시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교육지도 참고자료의 송부가 군부내부에서 이루어졌음. ▲위안부 모집 관계자 단속(4건)=군의 위신을 지키고 사회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위안부 모집 관계자의 인선을 적절히 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통첩의 배포가 군내부에서 이루어졌음. ▲위안시설의 설치·증축(9건)=위안시설의 설치·증축을 위해 병력을 차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명령의 통달이 있었음. ▲위안소의 경영·감독(35건)=각부대 위안소의 이용일시 지정,이용요금,이용에 있어서의 주의사항을 규정한 「위안소규정」이 작성되었음. ▲위안소·위안부의 위생관리(24건)=「위안소규정」에 위안소 이용시 피임기구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위안부의 성병검사를 군의관등이 정기적으로 행하여 불건전한 위안부는 취업을 금지시키는 등의 조치가 있었음. ▲위안소 관계자의 신분증명서 발급(28건)=위안소 개설을 위해 도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군의 증명서에 의해 도항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문서의 배포가 있었음. ▲기타(33건)=업자가 내륙에서 조달한 여자가 선박으로 이송될 예정임을 통지하는 전보의 발송이 있었음.
  • 일 정신대 징용/대만,사죄요구

    【대북 AFP 연합】 대만의 프레드릭 치엔 외교부장은 6일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간 대만여성들에 대해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대만측이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돼온 위안부문제에 대해 공식 언급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치엔 외교부장은 이날 『일본당국이 사실에 대한 왜곡없이 문제를 직시, 대만의 「위안부」들이 겪은 불행에 대해 사죄와 함께 우려를 표명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체엔부장은 이날 전시 위안부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해 대북을 방문한 일본의 이토 히레코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편 대만의 여성지원재단에 따르면 2차대전 당시 약 2백25명의 대만여성들이 일본군국주의 정부에 속아서 또는 강제적으로 일본군의 위안부생활을 한것으로 드러났다.
  • 새「김일성자서전」이념이 퇴색했다/미지,평양출간 「92년판」내용보도

    ◎“생모에 불효” 사죄… 이간적 면모 부각/대일경협등 겨냥,김옥균옹호 눈길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지난 2일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지난 4월15일 80회 생일을 기해 펴낸 그의 자서전을 간단한 논평과 더불어 게재했다.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의 이 회고록은 김일성생애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1912년부터 1935년까지의 성장기록을 담고 있는데 현재까지 2권이 출판됐다. 이 회고록은 지금까지 출간된 김일성에 관한 어느 출판물 보다도 인간적이고 덜 우상숭배적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김일성의 우상화로 유지돼온 북한사회에서 이같은 출판물이 이 시점에서 왜 발행됐느냐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이 의문에 대한 몇몇 전문가들의 논평을 곁들여 김일성회고록을 소개하고 있다.다음은 이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가 결코 남달리 특별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겸손은 자신을 신과같은 존재로 선전해온 종전의 북한역사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해 북한문제 전문가인 일본 게이오대의 오코노기 마사오교수는 『김일성도 그가 죽은후 그에 관한 역사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는 것같다』고 논평했다.때문에 『그는 보다 현실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였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보아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생애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색다른 것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예로 그는 그의 생모에게 사죄하고 있는데 『나는 혁명에 뛰어든 이후 나의 어머님에게 특별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쓰고 있다. ▲김은 또 구한말 친일개혁파 거두인 김옥균을 두둔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인정과 경제지원이 필요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 코멘트도 항일·민족주의자임을 자처해온 김일성으로선 새로운 일면이다. ▲중국말을 썩 잘하는 김일성도 이책에서 항일투쟁 당시 항일게릴라들을 지원해준 중국공산당을 「선도자」라고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인민들에게 영웅적이고 불멸의 인간으로 신격화돼 있는 그의 생애에 하나의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이든 아니든 북한에서 김일성의 생애는 모든 인민의 표상이다.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국내 정보와 다른 외부소식을 접할 수 있다.오코노기교수는 『김은 이책에서 보다 방어적이고 보다 솔직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책이 그의 마지막 기록일 것』이라고 단언했다.그 이유로 오코노기교수는 『김일성이 만약 더이상의 개인적 진실을 밝혔다간 47년간이상 북한을 통치해온 기틀이 기본적으로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김일성 정통성의 핵심은 그가 항일게릴라 투쟁의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통해 1945년 해방을 이끌어냈다는 것인데 그의 이 정통성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돼온 것은 철저한 세뇌교육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의 사후 소련의 스탈린처럼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북한문제 전문가인 하와이대의 서대숙교수는 설명했다.김일성에 대한 북한의 과거 각종 간행물들에 비교하면 이번 책은 훨씬 덜 이념적이고 북한사람들이 읽기에 퍽 생소한 느낌까지 줄 정도로 사적내용이다. 이런 점은 김일성이 이미 황혼기에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역사가들은 그의 사후 그가 거짓말쟁이가 되길 바라지 않은 나머지 그의 마지막 자서전을 보다 합리적으로 엮었을 가능성이 크다로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이고 있다. 한결 자유로워진 소련사람들이나 이웃 중국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 북한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통해 김일성을 비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북한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자서전 제3권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 나올 책에서는 해방 전후사를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 부분에선 소련군의 진주와 김일성이 괴뢰로 등장하는 과정이 취급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부분에서 김은 과거 보다 소련의 도움이 더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오코노기교수는 지적했다.
  • “국민앞에 사죄를”/33개단체,정씨발언 비난성명

    정주영 국민당대표의 공산당 결성 허용및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과 관련,9일 이를 비난하는 사회 단체들의 성명이 빗발쳤다. 자유민주총연맹(총재 이철승)을 비롯한 실향민청년운동협의회,건국청년운동협의회,한국노동협회,대한반공청년회등 반공애국단체연합회 소속 33개 단체는 공동 성명을 발표,『정씨의 발언은 국가안위와 직결된 문제이며 계획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하고 『정씨는 지난 89년 1월 방북때 북한TV에 출연해 김일성부자세습을 찬양한 사실,국민당 창당때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전대협강령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일,지난 3월 갑자기 미국의 핵저장시설건설을 폭로한 저의,그리고 이번 공산당 합법화 주장의 저의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도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도발적인 행태를 계속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모독하는 망언』이라고 지적하고 『정씨는 온 국민과 전몰호국영령앞에 정중히 공개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주먹대부 조창조씨/징역 20년 선고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재판장 양삼승부장판사)는 27일 대구·경북지역 폭력계의 거물 조창조피고인(52)에게 살인교사죄 등을 적용,징역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선량한 기업인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뒤 단순살해사건으로 꾸민 피고인의 파렴치한 행위는 엄벌에 처해 마땅하다』고 밝혔다.
  • 남북교류­핵 분리협상이 바람직

    ○「통일문제 세미나」 주제논문 지상중계 「북한이 과연 통일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이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해본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 김창식)주최·서울신문사후원 통일문제학술세미나가 지난 21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이 자리에서 발표된 김태우박사(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와 허동찬소장(사단법인 외교국방연구소)의 주제발표 논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북한의 대일·미 수교전망과 통일/북한과 미·일 수교땐 통일 뒷걸음/김부자체제 지속… 남북간 갈등 증폭 우려/허동찬 외교국방연 소장 북한과 미국·일본간에 국교가 수립될 경우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통일에 기여를 하게될 것이란 시각이 있다. 그러나 북­미·북­일간 국교수립은 「경제적 연명책」으로 작용,오히려 김일성·김정일체제를 지속시킴으로써 한반도 통일은 더 지연될 것이란게 발표자의 생각이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교섭에서 과거 일본이 끼친 피해와 손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보상의 형식으로 「교전국간의 배상형태와 청구권적용」을 일관되게 주장해 오고 있다. 북한측의 「교전상태」주장은 지난 1930년대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련군소속으로 벌였다는 항일전에 근거한 것이다.그러나 일본은 교전상태를 주권국가간의 무력분쟁으로 해석,북한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교섭의 장애로 지적돼왔던 남북대화,유엔동시가입,핵사찰등 대부분의 현안을 해결했거나 해결하려는 제스처를 쓰고 있으며 「보상·배상」문제도 뒤로 젖혀두고 선국교수립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 북한경제가 그만큼 어렵고 외국으로부터의 자본과 기술의 유입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과의 국교가 수립되면 북한은 정치·경제·외교면에서 다소 숨통이 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 한반도통일은 더 지연될 게 틀림없다. 즉 수교후 북한은 일본의 주요도시에 조총련의 방대한 자금으로 대사관·영사관등의 사무소를 확보하고 이렇게 얻어진 외교무대를 통해 「북체제선전,남체제교란·파괴」라는 그들의 통일전략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것으로 관측된다.이같은 북한의 통일전략은 필시 남한의 자유와 민주주의체제를 위협할 것이기때문에 통일은 그만큼 더뎌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조총련을 나와 「중립」으로 남아 있던 북한 국적의 재일교포들이 다시 자동적으로 북한국적을 취득,김부자 체제속으로 들어갈수 밖에 없게된다.이럴경우 북한은 이들의 재산을 포함,다른 교포들의 개인재산 10조엔과 조총련의 공동재산 10조엔등 모두 20조엔,미화 1천5백억달러 상당의 자금을 움켜쥐려 들것으로 보이는바 이역시 재일동포의 권리문제를 둘러싸고 한국과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될것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은 「배상·보상」문제가 수교교섭에서 뒤로 미루어짐에 따라 「혁명전통」이라는 대의명분이 훼손될 것을 우려,오히려 미국과의 수교를 더 중시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는 일본에 요구한것과 같은,교전국으로서의 「배상」과 전후 45년간의 보상등을 제시할수 없기 때문에 오는 6월중 핵사찰만 예정대로 실시되면 미국과의 수교교섭은 본 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북한의 대미수교협상은 일본과의 교섭보다 그 진전속도가 빠를 수 있다.그러나 이 경우도 남북한통일에는 부담이 될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정치적 힘을 가진 미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일본의 조총련과 같은 조직을 형성,재미교포의 자금을 이용해 북한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대외선전의 총본산으로 삼으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핵협상과 새로운 남북한관계/비핵화는 「핵무기 비보유」로 한정/「통일이후」대비,핵능력 완전거세는 위험/김태우 국방연 선임연구원 걸프전에서 보았듯이 동서구조의 소멸이후 국제정치의 흐름은 동서대립에서 남북갈등으로 그 성격이 변모하고 있다. 핵문제 또한 핵보유국들이 기득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비핵국들의 접근을 억제하는 「핵의 남북문제화」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대한반도 핵정책은 바로 이러한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패권적 핵금정책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미국의 「녕변폭격론」과 우리 정부에 대한 「핵사찰­교류협력」연계정책압력이 바로 그것이며 특히 지난해 「11·8」농축·재처리 비보유선언 역시 한미간 「핵의 남북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농축·재처리시설은 핵무기 제조기술이기 이전에 원자력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기술이자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금지하는 기술도 아니다.이는 보유 그 자체로 막대한 정치·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시에 에너지 안보의 관건이 되는 부분이다. 비록 제7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핵문제와 관련된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하더라도 최근 핵사찰과 관련,북한이 취해보이고 있는 제스처는 한마디로 「때늦은 기염」으로 표현할만 하다. 현재 북한이 밟아가고 있는 수순을 감안하면 더 이상 국제핵사찰을 지연시킬 것 같지는 않으며 안전조치협정 발효후 3개월내에 맺도록 돼 있는 보조약정도 시한인 7월9일 이전에 체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국제핵사찰을 받더라도 북한의 핵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이 위험은 상호사찰이 실시돼도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1987년부터 가동돼온 문제의녕변제2원자로에서 배출된 핵연료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에 대한 핵사찰은 이미 「실기」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지난달 15일 중앙TV를 통해 핵재처리시설의 핵심부분인 HotCell을 슬쩍 보여준 것은 한반도 핵참화와 관련,엄청난 의미가 있는 대목이다. 적어도 북한이 쉽게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또 미국이 자신의 패권이익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미국의 대북한 군사행동임박→북한의 대남한 핵보복경고」라는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해석은 북한이 HotCell의 존재를 과시한 이상,실험용시설의 보유는 허용되는 것으로 우기면서 제3조의 「농축·재처리상호포기」를 규정한 「비핵화 공동선언」의 사문화를 들고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면 「11·8」농축·재처리 비보유천명,「12·18」핵부재 선언 등으로 「모든 것」을 내버린채 북한의 상응조치만을 기대했던 우리 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며 북한만이 핵을 가지는 안보공백 상태가 불가피할것이다. 북한이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데 성공하거나 「북한판 NCND」를 구사할 수 있는 상황,즉 북한의 핵위협에 우리가 자주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면 그것은 한미간 핵문제에 있어서의 「압박­피압박」관계에서 연유한다는 지적은 경청할만한 것이다. 핵강국인 미국이 남북한 모두를 견제대상으로 보고 핵능력의 제거를 시도하는 가운데 한국이 미국의 압력을 대부분 수용하는 핵정책을 취하고 있는 반면,북한은 저항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볼수 있다. 한국은 지금 핵다극화,준핵국일본의 부상,중국의 군사현대화등 새로운 국제질서에 어떻게 대처하고 나아가 「동북아 균형자」역할이라는 통일후의 국가목표를 어떻게 비핵화정책과 접목시키느냐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재의 국제정세나 우리의 입장을 고려할 때 이러한 딜레마에서 일거에 벗어날 방법은 없다.따라서 「가능할 때 가능한 만큼씩」해결해야 한다. 첫째 우리의 과학력을 저해하지 않는 방향에서 「핵무기 비보유」에 우리의 비핵화를 국한해야 한다.이는 북한의 「핵흉계」가 소멸되지 않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소한의 대비책이다. 둘째 한미간의 「핵의 남북관계」는 수평적으로 재조정돼야 한다. 세계 각국이 다극화나 「핵의 남북구조」에 대처하기 위해 최소한의 지렛대라도 보유하기 위해 과학발전에 힘쓰고 있고 또 선진기술획득에 필요한 동위원소의 이용이 절실한 상황에서 농축·재처리 시설포기는 아쉽다는 생각을 지워버리기 어렵다. 셋째 우리 정부는 핵정책과 관련,건전한 여론을 형성하고 형성된 여론을 「핵의 남북구조」에서 국익을 보호하는 지렛대로 활용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비핵화 정책은 북한만이 핵을 갖는 안보공백상태를 초래해서도 안되며,무작정 남북한이 「마구 벗고 발가벗기」만 계속해서도 안되는 대명제를 따라가야 한다. 즉 북한이 현재는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적국이지만 언젠가는 통일을 이루어 민족자긍을 보지해야 하는 상대임을 인식,남북한 핵에 있어서 「필요한 옷입기」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핵통제공동위원회에 거는 기대는 크다. 핵통위의 당면목표는 「사찰」자체이다.이 사찰은 「상대를 확인함으로써 상대를 믿는다」는 군사검증의 일반수칙을 지키는 일이며 이로써 신뢰가 구축되면 상호의 평화적 동기를 확인해가면서 남북한이 미래를 위한 협력,즉 「질적 잠재력보호」를 추구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핵통위는 남북합의서에 따른 다른 기구들과 분리 운영해 핵문제와 여타문제를 연계시킴 없이 운영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핵사찰은 기술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핵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남북간의 평화공존을 이룩하는 동기를 상호 확인하는 길 뿐이고 따라서 평화공존을 앞당기는데 필수적인 교류를 핵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명분은 미미하다 할 것이다.
  • 녹화내용 축소 왜곡/KBS에 「사과」 선고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1부(재판장 송기홍부장판사)는 14일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교수가 한국방송공사를 상대로 낸 사죄광고 청구소송선고공판에서 『한국방송공사는 한교수의 60분짜리 TV강좌녹화테이프를 40분분량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내용을 축소,한교수의 강의내용을 왜곡전달한 점이 인정된다』고 지적하고 『방송공사는 원고측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 「공무원 노동운동 금지」는 합헌/헌재 결정

    ◎“노무직과 달라 평등권위배 안돼”/“교원 노조활동 불법” 재확인/“뺑소니 사체유기범 10년이상형 위헌/살인죄보다 무거운 형량 형평 어긋나”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제외한 공무원의 노동운동을 금지한 국가 공무원법 제66조 1항은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 전원 재판부(주심 김문희재판관)는 28일 해직교사 차상철씨(37)가 낸 이조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에서 『공무원은 직무의 성질이 공공성·공정성·중립성이 요구되므로 일반공무원을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과 달리 취급,노동 3권을 제한 하는 것은 평등권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날 결정은 지난해 사립학교교원의 노동 운동을 금지한 사립학교 규정에 대한 합헌결정에 이어 내려진 것으로 공립학교 교원등 공무원은 노조활동등 노동운동을 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근로 3권의 주체가 될수 있는 공무원의 범위를 정할때는 공무원의 직위와 직급,직무의 성질등을 고려해 결정해야한다』고 전제,『국·공립학교 교육 공무원은 고도의 전문성·자주성·사회적책임성이 존중돼야 하므로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과 달리 근로 3권을 제한하는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전 전북 완주 고산고 교사인 차씨는 지난 89년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자 해임 처분등 취소 청구소송을 내는 한편 이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제청을 냈으나 기각당하자 헌법소원을 냈었다. 이날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한병채재판관)는 이와함께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뒤 다른 곳으로 옮겨 유기하고 달아난 운전자에게 사형·무기 또는 10년이상의 징역형을 내릴 수 있게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5조의 관련규정에 대해서는 위헌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법 제5조의 3 2항 1호의 위헌여부에 관한 헌법소원심판에서 『이 조항은 과실범 처벌조항인데도 형량이 지나치게 무겁고 형벌체계상 정당성과 균형을 잃었다』고 위헌이유를 밝혔다. 이에따라 이날 위헌결정 이전에 이 조항이 적용돼 처벌을 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형사보상을 받을수 있게 됐다. 그러나 사체를 유기한 뺑소니운전자는 이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단순 뺑소니운전자 처벌조항인 이 법 제5조의 3 1항 1호와 형법의 유기치사죄를 함께 적용해 처벌할 수 있으므로 처벌 근거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이 조항의 해당범죄는 과실범인데도 과실범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게하고 5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는 살인죄보다도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은 너무 가혹하고 정당성과 균형을 상실한 것』이라면서 『이는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제11조 평등의 원칙및 과잉입법금지의 원칙에 어긋나 위헌』이라고 밝혔다. 청구인 최영기씨(50·서울 성북구 돈암1동)는 지난 89년 이 조항 위반혐의로 징역5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뒤 서울고법에 위헌제청 신청을 냈으나 기각당하자 헌법소원을 냈었다.
  • 「공무원 근로3권 제한은 합헌」 결정의 뜻

    ◎완전히 막힌 전교조합법화의 길/“국민이 임용주체… 근로자와 지위 달라/근로조건 향상 결정은 국회의결 거쳐야” 헌법재판소가 28일 공무원의 노동운동을 제한한 국가공무원법 제66조의 규정은 합헌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은 공무원의 직무의 공공성과 자주성,책임성에 비춰볼때 공무원의 근로3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해 준 것이다. 이 판결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사람들은 「교원노조」측이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해 사립학교법 제55조의 합헌결정에 이어 이날 국가공무원법 제66조도 합헌결정이 내려짐으로써 「교원노조」가 합법화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완전히 봉쇄된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원노조」는 계속 「불법단체」로 재야쪽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거나 일대 전환을 모색해야할 입장에 놓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 제33조 2항은 공무원은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해 노동3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국가공무원법 제66조는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만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해 노무공무원이 아닌 공무원의노동운동을 제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교원노조」에 가입한 해직 교사들이 이 조항과 사립학교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잇따라 제기,이들 규정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모호하다는 주장을 해 온 실정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사립학교교원의 복무에 관한 규정을 국·공립학교교원에 관한 규정을 준용할 수 있도록 한 사립학교법 제55조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었으며 이번에 그 준용규정인 국가공무원법 제66조에 대해 다시 합헌결정을 내렸다. 이날 합헌결정은 공무원은 다른 근로자와 달리 임용주체가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전체에 대해 봉사하고 책임을 져야할 지위에 있고 따라서 공무원의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결정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이뤄지는 것이 바림직스럽다는 게 결정이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직무의 공공성과 국가·사회의 현실을 고려할때 근로3권의 향유주체를 노무공무원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헌법 제33조가 입법권자에게 부여하고 있는 재량권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취지이다. 한편 헌재가 사체를 유기한 뺑소니 운전자의처벌 규정인 특가법 제5조의 3,2항 1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과실범이라 할 수 있는 뺑소니 운전자의 법정형이 너무 무겁고 다른 법조항과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제4공화국 때인 지난 73년에 마련된 이 조항의 입법취지는 뺑소니 운전자를 엄중하게 처벌해 뺑소니 사고를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뺑소니 사고가 근본적으로 업무상과실치사죄에서 비롯되는 과실범죄인 데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한 것은 세계적인 입법추세에도 맞지 않고 10년이상의 징역이라는 유기형 또한 지나치게 과중하다는 지적을 받아온게 사실이다. 과실치사죄 보다 훨씬 형량이 무거워야 마땅할 고의에 의한 살인죄도 법정형의 하한이 5년이며 유기치사죄 또한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법정형이 10년이상의 징역일 때는 정상을 참작,형을 감경하더라도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도록 돼있어 이 조항을 위반한 뺑소니 운전자는 반드시 실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형량이 너무 가혹하다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 백범암살/엇갈리는 증언… 진상규명 본격화해야

    ◎일제청산·단정반대로 이박사와 갈등/극우·친일파 조직적음모 여부가 초점/안 1년복역후 출감… “암시”발언 의무투성이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암살지령을 내린 배후는…? 사건발생 43년이 지나도록 줄곧 단독범행을 주장해온 암살범 안두희씨(75)의 최근 증언으로 이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안씨는 최근 두차례에 걸쳐 『김창용육군특무대장·장택상초대 수도경찰청장,노덕술수도경찰청수사과장,최운하수도경찰청정보과장 등이 나와 반공이념·인생철학이 같았으며 이들 모두 백범을 미워했다.누구로부터 암살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증언해 갖가지 추측만 무성하게 낳고 있다.백범암살사건의 전말과 관계자들의 증언,앞으로의 사건전개 전망등을 짚어본다. ○안두희발언 계기 사건전말·관계자주장 재조명 백범은 1919년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이봉창·윤봉길의사등의 의거를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바쳐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올랐다.그는 8·15해방을 맞아 45년11월 26년만에 광복 조국에 돌아왔다. ◎반탁운동에 앞장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 숙소를 정한 뒤 28년 이시영 이동령 등과 함께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을 이끌며 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결의하고 48년초 총선거감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러나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은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킨다』면서 5·10선거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등과 4자협상등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백범은 8월15일 이박사를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경교장에 머물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통일정부수립 등의 노선을 견지,갈수록 이박사등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같은 상황아래서 49년 6월26일 정오 경교장 2층 집무실에 있던 백범은 육군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소위가 쏜 4발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범행직후 『단독범행』이라고 밝힌뒤 헌병사령부 김병삼대위 등 헌병들에게 연행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재판장 원용덕소장)에서 「살인및 군인의 정치관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이태원 형무소에 수감됐다.한달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곧이어 징역15년으로 감형됐으며 백범 1주기를 하루 앞둔 50년 6월25일 6·25의 발발과 함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7월10일 육군소위로 복직됐으며 51년 국회질의에서 이같은 사실이 문제가 되자 소령으로 예편,강원도에서 식품군납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단독범행」주장에 대해 49년8월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대통령에게 ▲백범이 안을 응대한 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고 안과 같은 청년과 정치언쟁을 벌였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범인의 심리로 일시적 흥분에 의한 것이면 1발로 족할 것이며 저격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당한 것은 안의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범인을 데려간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진상규명 요청서를 보내 의문을 제기했다.백범의 장례는 그해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엄수됐다. ◎새로운 내용은 없어 백범암살에 대한 안두희씨의 최근 증언이후 안씨의 배후문제에 대한 또다른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으나 그동안의 증언들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며 안씨 역시 최근 두차례의 증언에서 일부 대목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안두희씨(범인)=당시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김창용육군특무대장 초대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씨와 친일경찰관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던 노덕술,정보과장 최운하씨 등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해야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받고 공감해 범행했다. ▲김신씨(70·백범아들·전교통부장관)=김창용육군특무대장 등이 지시했다는 안씨의 증언은 빙산의 일각이다.이승만정권하에 있던 친일세력과 해방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을 중심으로 당시 군부와 경찰·정계 고위층을 망라한 정권차원의 배후세력이 선친살해에 관련되었다는 일부 증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을 밝히지 못해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최대교씨(91·변호사·당시 서울지검장)=사건직후 최초지휘때 김병삼헌병대위가 한때 경교장출입을 막기도 했다.권승렬법무부장관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이범석국무총리 집에 갔으나 꿩사냥을 갔다고 해 신성모국방장관 집으로 가 아프다는 신장관을 겨우 만나 『경무대에 빨리 백범피살 사실을 알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됐다』고 말했다.또 검사장인 나도 모르게 범인 안씨에게 비밀당원증을 발급해준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 등 민간인 7명의 살인교사죄 구속영장을 김익진 당시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격만서울지법원장에 의해 발부됐다.이를 김총장에게 항의하자 『저 영감(이대통령 지칭)이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해 백범암살 수사가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얼마뒤 사표를 냈다. ◎“동족에 죽을일 없다” ▲선우진씨(71·당시 백범비서실장)=백범피격 하루전 대광고교 교감 박동엽씨가 찾아와 『옛 제자인 김정진소령을 만났더니 역시 제자인 오병순소위가 암살조에 가담,괴로운 나머지 털어 놓았다』고 밝혀 『몸조심 하십시오』라고 백범선생께 말했다.백범은 『동족에게 맞아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박씨로부터 들었다. ◎인천에서 사격 훈련 ▲정관일씨(71·안씨와 육사특8기 동기생으로 포병사령부에 함께 근무)=안씨는 당시 장은산포병사령관의 지시로 인천앞바다 비밀사격훈련장에서 주5회 극비사격훈련을 받았다. ▲홍영기씨(74·국회의윈·당시 육군법무감실검찰과장)=안씨를 기소한뒤 채병덕육참총장이 부르더니 『안두희에게 몇년을 구형할 생각인가』고 물어 『살인범이니 마땅히 사형』이라고 대답했더니 『사형은 너무 심하니 징역10년만 구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후 은폐위한 사기 ▲한필동씨(72·사건당시 김창용특무대장과 같은 부대에 근무·미국거주)=김창용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는 안두희씨의 증언은 진짜 배후인물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다.내가 알기로는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참총장,김태선내무장관 등의 비호아래 장은산포병사령관이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전봉덕헌병사 부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등 백범암살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김교식씨(56·현대역사자료연구소장)=안씨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않으며 직접 명령을 내렸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뒤 수사과정에서 처음 만난 김창용을 끌어들였을 뿐이다.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씨 등도 암살사건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김태선씨 또한 김지웅을 지원하며 경찰쪽에서 별도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포병장교인 안씨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암살계획의 시나리오는 포병사령부쪽에서 실행을 맡고 헌병사령부쪽에서 현장을 감시하며 육군정보국제3과에서 수사종결처리를 맡는 것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는게 옳다. ○서거43년… 「백범암살 재조명」을 보며/박성수 정문연교수 ◎민족정기 바로잡는 계기로/「통일민족주의」의 큰뜻 되새겨야 할때 최근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범행 40여년만에 드디어 일부 배후 인물을 밝혔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증언 내용이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 바다속의 엄청난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겨 있다. 안두희의 증언 자체가 이처럼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에 대해서도 거의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는게 세론이다.아직도 안두희는 자신을 애국지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그의 증언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큰 인물이다.그의 이름 두자를 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를 쓸 수 없음은 물론 광복이후 47연사도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백범이 살아 있었어야 한다』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일 것이다.백범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받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었다.「아름다운 나라」란 더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아름드리 거목이듯이 이 나라도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의 불가능에 도전한 사실을 안두희와 같은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단순한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울수 있었을지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생의 혈적을 모르는데서 온 무지의 소치였다.흔히 임정을 상해시대 14년(1919∼32년),이동시대 8년(1932∼40년),중경시대 5년(1940∼45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27년을 단순한 독립운동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된다.그것은 동시에 통일운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경시대에 이르러 모든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산하에 통일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 만은 연안으로 도주하여 중공산하에 들어갔으며 1950년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는 김무정의 소위 조선의용군이 되었다.김구선생은 귀국후 임정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통일운동을 광복된 조국에서 실현하려고 했다.그것이 군정반대로 나타난 것뿐이다.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다름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연속이요 완성이었던 것이다. 좌우익투쟁의 피비린내나는 해방정국에서 그것은 부당하게도 김구로선으로 명명되어 그 실질이 왜곡되고 말았으나 그것은 김구자신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이다. 만일 김구선생이 그때 없었어도 될 안두희라는 인간,아니 짐승에게 쓰러지지 않고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모두들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른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북의 분단상태를 악용한 이른바 사이비 통일민주주의만은 이땅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실된 통일민주주의가 자라나서 통일의 날을 앞당겼을 것이다. 오늘처럼 김구선생의 독립정신,통일정신이 절실한 때가 또 있었을까.또 오늘처럼 우리나라가 아름드리 나라로 커야 한다고 바라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다시한번 경교장의 비극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앞날을 생각할 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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