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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현궁/27일부터 일반공개/대원군 사저… 4년 걸쳐 보수·복원

    ◎26일엔 고종황제 궁중혼례 재연 조선조 26대 왕인 고종과 흥선대원군 이시응이 기거했던 역사의 산실 운현궁이 오는 27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이와 함께 26일 하오 2시30분 운현궁 공개를 기념,고종과 명성황후의 궁중혼례를 재연한다.1866년 운현궁에서 거행된지 130년만에 재연될 궁중혼례는 연말까지 매월 한차례,내년중 다섯차례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서울시는 93년부터 4년간에 걸쳐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운현궁을 보수·복원했다.대원군의 유품 등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실도 마련했다.
  • 공관서 두문불출… 부인·두딸만 이사 준비/이 전 장관 주변 표정

    ◎소환대비 변호사 선임… “모든 의혹 씻겠다” 검찰의 소환조사가 임박한 가운데 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서울 한남동 공관은 헌병들이 공관을 지키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일체 금지시키는 등 평소 휴일과 다름없는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신자로 매주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국방부 구내 국군중앙교회를 다녔던 이 전 장관은 이날 교회에도 가지 않고 바깥출입도 전혀 하지 않았다.또 가까운 친지말고는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을 받지 않았으며 빗발치는 언론사 취재기자들의 인터뷰요구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다. 평소 이 전 장관의 공관에는 당번병 1명과 운전병 3∼4명말고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두지 않아 이전장관의 부인과 두딸(29·28)만이 침통한 분위기속에 이사짐을 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이 전 장관은 내주안으로 김동진 장관에게 공관을 비워주고 사저인 강남구 압구정동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다. 이 전 장관은 측근과 함께 소환조사에 대비,법적 자문을 해줄 변호사를 선임하는 한편 검찰조사에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씻기위해 모든 것을 밝힌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이 전 장관은 19일 밤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소환이 임박해오자 극도의 초조감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 전 장관은 전날 기자들과의 전화를 통해 무기중개상 권병호씨에게 4천만원을 건네준 것과 관련,『사업자금으로 빌려준 것』이라고 해명했다.이장관은 『권씨 소개로 대우중공업 석모사장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권씨가 나쁜 사람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또 재산증식의혹에 대해서는 『92년에는 가볍게 생각했지만 93년 법적으로 공개할때는 모두 신고했기 때문에 차이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황성기 기자〉
  • 아라파트,이스라엘 첫 공식방문/와이즈만 대통령과 평화회담

    【카에사레아(이스라엘) AFP 로이터 연합】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수반이 8일 이스라엘 중부 해변마을 카에사레아의 대통령 사저에 도착,에레즈 와이즈만 이스라엘 대통령과 중동평화 정착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이날 이스라엘 방문에 앞서 가자지구에서 가진 회견에서 『기존 합의사항들이 이행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도 이뤄진게 없다』면서 『이번 회담에서는 기존협정의 이행방안과 향후 평화협정상의 추진 및 보호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대통령실은 『와이즈만 대통령이 아라파트 수반에게 최근의 유혈충돌사태 등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경찰간의 충동을 막기 우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할것』이라고 밝혔다.
  • 김 대통령 사저 이달부터 개축공사/지은지 30년 넘어 심한 훼손

    ◎건평 90평 2층… 사비 충당 김영삼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서울 상도1동 7의6)가 9월부터 개축공사에 들어간다고 청와대가 31일 발표했다. 청와대는 『김대통령의 사저는 지은지 30년이 넘는 건물로서,현재 벽체의 균열 등 골조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으며 배관시설 등 각종 설비도 대부분 노후되어 건물의 안전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됐다』고 개축이유를 밝혔다. 김대통령은 당초 내년 봄쯤부터 사저를 손질하려 했으나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올 겨울 폭설시 붕괴의 위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 시기를 앞당겼다고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집이 낡은데다 관리인 2명외에 사는 사람이 없어 더욱 훼손정도가 심해졌다는 것이다.1차 종합진단결과 천장과 벽틈에 물이 새고 보일러 파이프도 물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으로 드러나 신축에 가까운 전면개축이 필요한 실정이다. 개축될 사저는 원래의 대지 102.1평 위에 건평 90여평의 2층 건물(현 85.6평)로 지어질 예정.시공자는 중앙산업.사저 개축비용은 전액 김대통령의 사비로 충당된다. 김대통령은 지난 69년 봄부터 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시까지 24년간 상도동 사저에서 거주했었다.
  • 신문 강제구독 「협박형」 등 “5개유형”

    ◎「바른언론」 접수 1백14건 분석/경품 앞세운 「회유형」에서 「막무가내형」까지/해당 신문사 시정 거부땐 공정위 고발키로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바른 언론·공동대표 이상희 서울대 명예교수)은 지난 18일 설치한 「신문강제구독 신고센터」에 22일까지 모두 1백14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됐다고 25일 밝혔다. 언론사별로는 중앙일보 40건,동아일보 17건,조선일보 16건,경향신문 15건,한국일보 11건,세계일보 5건 등이다.한겨레신문,문화일보,서울경제신문,매일경제신문,영남일보,시사저널 등에 대해서도 1건씩 신고됐다.3건은 신고자가 신문이름을 밝히지 않았다.서울신문은 한건도 없었다. 구독회유경품도 40여점이 신고센터에 접수됐다. 유형은 대략 다섯가지.끈질기게 마구 투입하는 「막무가내형」,무료로 보게 해주기로 약속하고 구독료를 요구하거나 판촉활동수당을 소비자에게 요구하는 「부당요금청구형」,욕설 등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공갈협박형」,경품이나 1년이상 장기구독서비스를 앞세운 「회유형」,항의하려해도 전화통화도 할수 없는 「술래잡기형」 등이다. 「바른 언론」은 일단 해당신문사 지국에 시정을 요구하고 고쳐지지 않으면 해당신문사에 정식공문을 보내 시정을 요구키로 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신문사별 시정거부 건수및 거부내용을 공개한뒤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거나 피해배상청구소송을 내는 등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강구할 방침이다.〈김태균 기자〉
  • 전씨 비자금 31억 추가압수/검찰,11일 재산추징보전 신청키로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특수3부(김성호 부장검사)는 7일 전씨가 숨겨둔 비자금 31억3천만원을 추가로 찾아내 압수했다. 전씨는 지난해 9월 5년 만기의 10억원짜리,올 1월 20억원짜리 장기신용채권을 개인비서 이택수씨를 통해 43억7천만원으로 현금화해 이 가운데 31억3천만원을 모은행에 예치해뒀다가 적발됐다.나머지 12억4천만원은 전씨가 사용했다. 한편 검찰은 전씨가 재임중 받은 뇌물 2천2백89억원을 환수하기 위해 오는 11일 전씨의 연희동 사저 일부와 골동품·벤츠승용차·압수채권 등의 재산에 대한 추징보전을 서울지법에 청구키로 했다.〈박선화 기자〉
  • 긍지잃은 외교관(귀순 고영환·현성일씨가 말하는 북외교 실상:2)

    ◎주재국의 푸대접이 가장 큰 고통/각종지원 약속 펑크내자 외무관리 면담거절 일쑤/김부자 찬양 기사게재 등 청탁에 현지언론도 “신물” 아프리카지역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북한 외교관들은 너나 없이 3중고에 시달린다.그 첫째는 지난 95년 8월부터 평양으로부터 끊긴 공관 유지비의 자체 조달이고 둘째가 주재국 외교부로부터 받는 괄시,셋째가 주재국 정부와 친선협회 및 언론으로부터 북한지지 성명 내지 찬양보도를 얻어내는 일이다.지난 93년 11월부터 지난 1월 귀순 전까지 잠비아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근무했던 현성일씨(37)도 예외없이 3중고를 겪어야 했다.3중고 가운데서도 북한 외교관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주재국으로부터 받는 푸대접이라고 한다. 일찍부터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으로 자주·친선·평화를 표방은 했지만 대서방외교에 한계를 느꼈던 북한은 비동맹국가 및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북한이 추구해온 비동맹외교의 기본목표는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과의 친선유대강화 ▲반제국주의투쟁의 연대성공고 ▲북한의 통일정책에 대한 지지획득이었다.이같은 평양당국의 비동맹외교노력에 힘입어 북한은 지난 75년 비동맹회원국이 됐으며 유엔에서의 북한 지지국 확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그러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한 북한의 비동맹외교는 처음부터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경제적으로 북한이나 제3세계 국가들이 다같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가 긴밀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즉 제3세계 국가들은 한결같이 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했으나 북한은 이들 제3세계 국가들에 자본과 기술을 제공할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게다가 북한이 이들 국가들에 대한 경제및 군사지원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제3국가들의 대북 불신은 자연 깊어졌다.설상가상으로 70년대 후반들어서부터 비동맹운동이 종전 민족주의와 이념중시에서 경제적 실리에 초점이 맞춰져 전개되면서 북한의 비동맹외교는 내리막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80년대 후반들어 경제력을 앞세운 한국외교가 아프리카공략에 나서자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기다렸다는 듯 친한으로 방향을 바꿔 잡았다.북한 외교관들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현성일씨는 지금도 잠비아에서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고 한다.그리고 국제사회로부터 받는 불신과 업신여김도 모른채 우리식 사회주의를 외쳐대며 섣부른 짓을 마다않고 있는 북한체제에 더없는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씨는 『아프리카에서의 북한외교는 없다』고 말한다.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은 거의가 절대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같은 비동맹국 회원임을 앞세워,특히 「사회주의의 성공사례」를 자처하며 접근전을 펴온 북한에 대해 이들 국가들이 경제원조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제 코가 석자나 빠진 북한이 도와주는 것 하나 없이 국제무대서의 대북지지만을 요구하다보니 이들 국가의 외무관리들은 북한이라고 하면 진절머리를 낸다는 것. 현성일씨가 잠비아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한국 외교관들이 장관 등 고위 잠비아 외무관리들을 쉽게만나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도 그럴 것이 북한 외교관들이 그들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잠비아 외무관리들은 한국 외교관들은 수시로 사저에 불러 파티를 하기도 하고 한국 외교관들의 방문은 언제고 환영하지만 북한 외교관들에겐 아예 집주소 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북한 외교관들의 사기를 꺾는 건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어렵사리 면회신청이 받아들여져 외무부를 찾아갈 경우 외무부 청사에 들어서기도 전에 북한 외교관들은 기가 콱 죽는다.청사 밖에 주차된 외교관들의 승용차가 현대 아니면 대우차인 것도 그렇지만 사무실의 컴퓨터·전화기·팩스 등 사무기기가 거의 한국제품인 까닭이다. 북한 외교관의 무기는 입이 전부다.그러나 주재국 외무관리들이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를 훤히 꿰뚫고 있어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봤자 먹히질 않는다고 한다.『도와줄 처지도 아니면서 무슨 헛소리냐』는게 그들의 노골적인 반응이란 것. 잠비아에 주재하는 동안 주재 외교관 3명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줄 알았던 현성일씨는 2·16김정일,4·15 김일성 생일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잠비아 정부나 잠비아·조선친선협회가 축하전문을 보내도록 하라는 평양의 지령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어렵기는 북한의 핵확산금지협정(NPT)탈퇴지지를 위한 연대성집회소집 등도 마찬가지였다.콜라 한병 나오지 않는 연대성집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을 건 당연한 일.그래서 현성일씨는 집회는 열지도 못한채 자신이 지지문을 작성한 뒤 현지 회장을 찾아가 통사정,겨우 수표를 받아 평양에 보냈다고 한다. 주재국 언론에 보도되는 북한관련 기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기자들이 직접 취재해서 게재하는 북한관련 기사는 거의 없고 외교관들의 로비에 의해 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자국 정부와의 관계도 관계이지만 외교관들이 찾아가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처음 몇번은 별 군소리 없이 기사를 실어준다고 한다.그러나 매번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내용의 김부자 찬양문과 대북지지문,북한발전 PR기사 게재청탁을 쏟아놓다 보니 신물이 난 언론들이 이젠 드러내놓고 냉대를 한다는 것.심지어 『북한관련 기사 한건에 라디오 카세트 한개씩 가져오라』는 면박을 주기도 하며 실제로 북한관련 기사와 라디오 카세트를 맞바꾸기도 한다고 한다.이렇게 어렵사리 기사를 「날리거나」 전문 또는 보고서를 「만들어」 보내면 평양에선 당기관지 노동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마치 주재국에서 대규모 북한지지대회나 요란한 김일성부자생일 축하모임이 열린 것처럼 법석을 떤다는 것.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의 긍지는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이고 체면은 체면대로 구기고 있는게 북한 외교관들의 현주소라고 현씨는 말한다.
  • 구약의 신학적 원리·주제 알기쉽게 설명

    ◎정규남 박사저 「구약신학의 맥」 출간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39권의 책들을 통해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한 「구약신학의 맥」이라는 책이 도서출판 두란노에서 출판됐다. 저자는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교수인 정규남 박사.연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미국 드루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목회자겸 신학자이다. 이책은 지금까지 분별없이 사용해온 「구약신학」이라는 개념을 세계적으로 저명한 구약신학자들의 주장과 논문을 분석,검토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구약에 등장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을 분석해서 그 속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신학적인 원리와 주제,교훈들을 알기 쉽게 풀이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을 설명하면서 구약시대의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신약의 구원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논한다. 또 구약시대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가 다른점은 무엇이며 구약의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장점은 구약의 신학적 가르침을 논할 때 히브리원문 성경에 근거해서 이에 충실하도록 새로운 번역을 제시해서 종래 교계의 지배적인 해석을 수정토록 제안한 것이다.
  • 극점 치닫는 북한체제의 모순/사토 가쓰미(해외논단)

    ◎엘리트층 망명 속출­지도부 대립 표면화/천문학적 군비지출로 경제난 타개 난망 김정일의 전처를 시작으로 북한엘리트층의 망명사건이 이어지고 있다.또 평양중심가,그것도 노동당 중앙위 건물을 마주보는 러시아대사관 내에서 총격전이 일어나는 등 주변국가의 긴장된 눈길이 이 나라에 쏠리고 있다. 북한이 식량·에너지 부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식량부족 소식이 처음 들린 것은 85년.그 이유는 84년의 수해 때문이라는 것이다.그 뒤 주의해서 보면 매년 수해의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매년 수해가 발생하는 것은 76년 김일성의 명령에 따른 경지 확대운동으로 전국에 대규모 계단식 경작지를 조성한 때문이다.계단식 경작지에 토사저류지를 만들지 않아 비가 내리면 토사가 하천으로 흘러들어 하상을 서서히 상승시켰고 84년부터 하천의 범람이 시작됐다.지난해에는 강우량이 많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천재라기보다는 김일성 농업정책 실패에 따른 인재인 것이다. 게다가 김정일은 서울올림픽에 대항해 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거행했다.그들의 발표에 따르면 체육관,경기장,도로등 제반 시설 건설에 47억달러가 들었다고 한다.이 해 북한의 무역수출액은 15억6천만달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생산을 저하시킨 것은 재생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천문학적 군사비다.한국 통일원 등의 시산에 따르면 군사비가 북한의 GNP(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0년부터 오늘까지 가장 적었을 때가 20%,최고가 25%에 이른다.김일성부자정권은 한·미가 침략해올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적화통일하려는 군사력이다.그것은 노동당 공식문헌으로부터 쉽게 입증된다.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한국에 대한 게릴라와 테러행위다. 이밖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개선문과 주체사상탑 등 재생산과 관계가 없는 분야에 거액을 낭비해 왔다.구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눈밖에 난 것은 십수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련에의 차관을 갚지 않고 중국에도 때때로 무역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추악한 콘크리트 대형건물을 잇따라 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그 결과 농업,공장,철도,도로,통신,발전소,송전선,광산,항만 등의 시설이 노후화돼 대부분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에 구조적 문제가 있어 이것이 식량문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구조적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권력자 김일성의 언동에 오류가 없어 2천만 국민이 김일성의 지시대로 움직이면 공산주의국가가 실현된다고 하는 전근대적인 개인신격화의 정치체제에 있다. 토사저류지가 없는 계단식 경작지를 만들면 토사가 하천에 유입된다는 것은 농업토목의 전문가는 물론 농민은 전부 알고 있다.하지만 이같은 의견을 말하면 「반혁명분자」로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어지거나 살해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수 없게 된다.이런 공포상황이 전분야에 걸쳐 반세기동안 계속된 것이다.이같은 개인신격화 체제의 타파없이는 경제의 재건도 인간의 해방도 있을 수 없다. 엘리트층의 망명 및 지도부간의 대립도 공공연화하고 있다.이는 북한체제의 모순이 정점에 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독재국가가 붕괴할 때 폭력은 피하기 어렵다.문제는 폭력이 안으로 향하는가 밖으로 향하는가에 있다. 어느쪽이더라도 위기관리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북한군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 전씨 굳은표정 묵상…긴장 역력/공판하루앞둔 병원·검찰·연희동표정

    ◎병원 “만약사태 대비 법정에 의료진 파견”/방청권 얻기 위해 하오부터 줄서기 경쟁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첫 공판을 하루 앞둔 25일 전씨가 입원 중인 경찰병원을 비롯,법원·검찰·전씨의 연희동 사저는 겉으론 평온해 보였으나 긴장감이 감돌았다. ○…담당 재판부인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는 24일 밤늦게까지 재판 준비상황을 최종 마무리지은 탓에 이날 출근을 하지 않았으나 당직 근무자들은 재판이 열릴 417호 대법정과 법정으로 통하는 통로에 금속탐지기 등 설치물을 점검하느라 분주한 모습. ○…공판에 투입되는 서울지검 특수3부 김성호 부장검사를 비롯,검사 4명은 하오 1시30분쯤 김부장검사 주재로 1시간 동안 회의를 갖고 신문사항과 증거목록 등을 최종점검한 뒤 곧바로 귀가. 검찰은 전씨의 경우 신문항목을 1백60여개,나머지 피고인들은 각각 40∼50여개 정도로 압축했으며 전씨는 김부장검사,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최찬영검사,정호용 의원과 사공일 전 경제수석은 홍만표검사,성용욱 전 국세청장과 안무혁 전 안기부장은 임상길검사가 각각 맡아 신문하기로 결정. ○…26일 상오 9시에 배포하는 방청권 80장을 얻기 위해 법원 정문에는 이날 상오 6시부터 시민과 용역회사원 등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하오 3시40분쯤에는 80명이 줄을 서 대기하는 바람에 나머지 시민들은 발길을 돌리기도. 이들은 서로 대기표를 만들어 도착 순서대로 배포하고 2시간마다 확인도장을 찍는 등 새치기를 막아 눈길. ○…경찰병원 입원 67일째를 맞은 전씨는 이날 아침 병원에서 제공한 밥과 죽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재판 관련서류도 제쳐두고 굳은 표정으로 묵상하는 등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병원 관계자가 설명. 담당 의사인 이권전진료1부장은 『전씨의 현기증이 오랜 시간 재판을 받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링거주사 등을 준비한 의료진 한명을 법정에 보낼 계획』이라고 소개. ○…평소 전씨를 면회하며 아침 나절을 보냈던 부인 이순자씨는 연희동집에서 불경을 읽으며 착잡한 심경을 달랬고 재국·재용·재만씨 등 아들 삼형제도 집에 모여 공판 문제를 논의. 전씨의 한 측근은 『공판에는 재국씨등 아들 삼형제만 출석하고 이씨 등 다른 가족들은 연희동집에 머물거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계획』이라고 귀띔. ○…경찰은 전씨가 법정에 출두하는 26일 상오 경찰병원 주변에 모두 5개 중대 6백여명의 병력을 배치,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할 계획.
  • “장애아학교 건립 방해말라”/사법부,「지역이기」 강력 제동

    ◎“공사저지 정당화 명분없다”/서울 일원동 주민에 첫 「방해중지」 결정/서울지법 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사법부가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자기 동네에 자폐인 등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을 방해하는 주민들에게 「원천봉쇄」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방자치제 이후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님비현상」(자기 동네에 혐오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현상)에 대한 사법부의 최초의 제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지역및 집단 이기주의 불식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재판장 권광중 부장판사)는 23일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이 박모씨 등 서울 강남구 일원동 S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낸 「공사방해 중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주민들은 공사 방해는 물론 공사장에 출입해서도 안된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아파트 입주민의 목적만 위해 아무 권리가 없는데도,물리력을 동원해 공사진행을 막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수 없다』며 『이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처사』라고 강도높게 질책했다. 재판부는 아파트의 어린이들이 2부제 또는 과밀학급 수업을 받는 열악한 상황에서 장애인들의 특수학교를 짓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교육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민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소 불편한 점은 인정되지만 장애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받는 불편함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밀알재단은 지난 1월초 자폐인 등 2백20명의 정서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 공사에 착수했으나 아파트의 주민들이 「건축저지 대책위원회」를 결성,공사장비를 부수거나 공사장 출입구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공사장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방식으로 공사를 중단시켰다. 일부 강경파 주민들은 감시조를 편성,공사를 방해했으며 집단행동에 가담하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한번에 몇만원의 벌금을 매기며 동참을 강요해 왔다. 재단측은 주민들의 이같은 범법행위를 조사해 달라고 관할 강남경찰서에 여러차례 요청했으나 현장에서의 충돌만 막는 「요식적 처방」으로 일관,범법행위를 사실상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 일재 식민사관 맞선 애국계몽 사상가/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채호선생

    ◎자주적 한국 고대사 재구성,민족사관 확립/연해주서 광복활동… 「조선혁명선언」도 집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정언을 지낸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살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살때 행시를 지었으며 12살때 사서삼경을 독파,신동으로 불렸다.18살때 한말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천원군 목천 사저를 출입하면서 신·구서적을 섭렵,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키워간다. 26살때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위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당시의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던 상황에서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방법이었다.그러나 같은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됨에따라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자 황성신문은 압수조치와 함께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1906년 영국인 베델이 사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참가,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조선사」등을 저술,조선이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의 초기식민주의사관을 퍼뜨리면서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에 광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같은 일제의 거짓학설에 대한 학문적 투쟁을 전개,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재구성에 노력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한 뒤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생은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생은 연해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하고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는 박은식 등과 박달학원을 세우는 등 국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임시정부 발기회의 참가했으나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그가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고 퇴장했다.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를 묶어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역시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반 임시정부의 노선을 걸었다.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한 선생은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이 선언은 일제의 요인과 기관을 암살·파괴할 폭탄·단총과 함께 의열단원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을 정도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일제당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1924년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를 집필,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들 역사서를 통해 제시된 선생의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사관은 당시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대응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대만에서 화폐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순국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선거구 협상 여야 “양보 불가”… 벼랑끝 대치

    ◎일주일 넘게 합의 못한채 표류/「36만4천∼9만1천안」­여/「30만∼7만5천안」 마지노선­야/“극한대결땐 공멸”… 극적 타결 가능성 선거구 조정을 위한 여야 협상이 타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 제1백78회 임시국회가 「문만 연 채」 7일째 공전하고 있다. 여야는 지난 10일 개회식만 가졌을뿐 당초 합의한 8일간 일정을 하루남긴 16일까지 의사일정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다.극한대립속에 여당의 표결처리와 야 3당의 결사저지라는 최악의 대결구도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정치일정상 촉박 물론 본회의에서 「회기결정의 건」이 통과되지 않아 「8일간」이라는 정치적 합의는 구속력이 없다.헌법 47조2항은 「임시국회의 회기는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도중에 회기결정 절차를 밟지 않으면 다음달 8일까지 국회는 그대로 열려 있게 된다.산술적으로는 여야 합의 시한이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지역구 공천작업이나 2월6일로 잡은 전당대회 등 총선을 앞둔 빡빡한 정치일정을 고려할 때 회기를 무작정 끌고갈 수만 없다는데 여야 정치권의 현실적인 고민이 있다. 특히 여권으로서는 5·17 쿠데타 관련 의원들을 사법처리하는데도 절차상 부담이 따른다.회기중 현역의원을 구속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때문에 지난 번 5·18 특별법을 처리하면서도 표단속에 부심한 여권지도부로서는 구속동의안을 처리할 경우 낙천의원들의 불만을 달래면서 또다시 이탈표 방지를 위해 골치를 썩여야 한다. 신한국당의 서정화원내총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번 주 안으로 협상을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털어놨다.그러나 기존 당론에 변함이 없음을 거듭 확인했다.당지도부에는 인구상하한 「36만4천∼9만1천명」안을 관철하기 위해 표결처리도 불사한다는 강경 기류가 흐른다. 이에 대해 「30만∼7만5천명」의 단일안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야 3당은 일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결처리를 강력 저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여당이 강경일변도로만 치달아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불만도 터뜨렸다. ○게리맨더링 양산 신한국당은 그러나 야 3당의 선거구 조정안대로라면 현행 30만명이상 선거구를 쪼갤 수 밖에 없고,이는 「인위적·정략적인 선거구 획정(게리맨더링)」을 양산할 것이라고 반박했다.「행정구역의 일부를 다른 선거구에 합쳐 선거구를 만들 수 없다」는 선거법 25조에 30만명 이상 선거구에 대한 예외규정을 두자는 야당측 주장도 합리적인 선거구 획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략극복이 과제 여야의 선거구 협상이 일부 의원들의 「지역구 지키기」 차원은 물론 총선을 앞둔 각당의 특정 지역별 이해득실과도 맞물려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그러나 정치전반에 대한 국민여론을 감안,여야가 극적인 「묘수」를 찾아내 벼랑끝의 막판 절충에 성공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14대 마지막 국회가 「몸싸움」으로 얼룩진다면 여야 모두 총선에 유익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 노씨,“비자금 장부 4권 폐기”

    ◎“돈 받은건 사실… 뇌물아닌 성금”/대선 지원 내용 진술 계속 거부 노태우 전대통령은 18일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심리로 열린 비자금사건 첫 공판에서 민주당 박계동의원의 폭로 다음날인 지난 10월20일 재벌총수 등으로부터 받은 뇌물의 입출금 내역이 기록된 비자금 장부 4권을 폐기했다고 밝혔다. 노피고인은 이날 검찰의 직접신문에서 『장부를 이현우 전경호실장과 함께 폐기했다』고 진술했다. 이현우 피고인도 뒤이은 검찰신문에서 『청와대가 비자금을 운용한 상세한 내역이 담긴 비자금 장부는 4권이었으며 노피고인이 퇴임한 뒤 가방에 넣어 잠금장치를 해 노피고인이 자택에서 관리해 왔다』고 말했다. 이피고인은 이어 『박의원이 폭로한 다음날 노피고인 자택을 방문,장부파기를 협의했으며 노피고인이 사저 2층에 있는 세절기로 파기하겠다면서 장부를 갖고 2층으로 올라갔다가 오랜시간이 지난 뒤 빈손으로 내려왔다』고 진술했다. 안강민 대검중수부장은 이와 관련,『노씨를 1차로 소환·조사했을 때 노씨가 10월20일쯤 자택에 있던 파쇄기로 비자금장부를 없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이 장부는 노씨 재임중 이현우씨가 작성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노피고인은 이어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뒤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기업체들로부터 받은 약속어음을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 파기했다』고 진술했다. 노피고인은 또 기업체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한 액수와 뇌물성 자금으로 밝혀진 금액이 5백억원 가량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선 등 선거자금은 장부에 올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비자금 가운데 상당액이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갔음을 시사했다. 노피고인은 『대선자금 등 정치권 유입부분을 밝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추궁에 『대통령 재임 당시 한 일을 밝힌다면 국가를 위해 불행한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강변한 뒤 『해외에 비밀계좌가 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날 공판에서 노피고인이 35개 업체로부터 2천8백38억9천6백만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2백여개 문항으로 나눠 신문했다. 노피고인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시기와 경위가 기억나지 않지만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특정사업의 이권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관례에 따른 성금명목이었다』고 뇌물이라는 점은 부인했다. 한편 삼성의 이건희 회장 등 재벌총수들은 노피고인에게 건넨 돈의 성격에 대해 「관행화된 통치자금」「불우이웃 돕기 성금」「전별금」등으로 설명하면서 『특혜나 이권에 대한 대가성 자금은 아니다』라고 뇌물공여 혐의를 부인했다.
  • “국민마음 편하게 성심행정 펼터”/이수성 총리 취임 첫 기자간담

    ◎「어려운 일 회피」 도리 아니어서 “응낙”/출신지역 사랑 좋지만 이기심은 금물 이수성 국무총리는 18일 『대단히 큰 중압감을 느낀다』면서 『오직 성심으로 응하겠다는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고 취임소감을 밝혔다. 이총리는 이날 이·취임식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맞아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할 행정적 묘안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총리는 이날 기자들의 질문에 시종 소신에 가득찬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피력했다. ­내각 제청권이 있는데. ▲솔직히 그 문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국회의 임명동의가 있기 전에는 내정자에 불과하지 않았나.오늘·내일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훌륭한 분을 뽑자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취임사에서 개혁에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 개혁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행정의 신뢰성·일관성의 개선이라고 생각한다.공직자 스스로 개선·봉사할 것이 많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대통령의 역사바로잡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권력을 이용한 축재는 공직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청빈이 자랑스러워야 국민의 면모가 바로선다.그런 점에서 역사바로잡기는 올바르다. ­덕망과 학식을 내세운 민심수습용·얼굴마담용 총리라는 비판도 있다. ▲솔직히 덕망도 그리 높다고 생각지 않는다.나같은 사람이 국면을 수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다행이 없겠다. ­경북 출신인데. ▲출생은 함남 함흥이다.그곳에서 우리 어른(부친)을 따라 광주로 갔다.다시 평양에서 살다 5살 때 서울로 올라와 유치원부터 학교를 다녔다.칠곡은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으로 대단히 자랑스러운 나의 고향이다.고향을 단순히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이기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총리직을 5번 고사한 것을 두고)왜 6번째 고사하지 않았나. ▲자부심과 존경심으로 따지면 서울대총장만한 자리가 없다.어렵다고 생각해 회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작은 힘이나마 필요하다면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5·6공 인사들에 대한 생각은. ▲3공이든 4공이든 5공이든 6공이든 구별하지 않는다.다만 이익만을 쫓아다니던 사람은 좀 삼가야 하지 않겠는가.잘못이 있었으면 좀 부끄러워할줄도 아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재벌에 대한 생각은. ▲재벌은 과거 권력이 돈달라면 주고,때리면 맞았다.존중해주어야 한다.대기업 뿐 아니라 모든 기업을 배척하기보다는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5·18정국을 수습하려면. ▲궁극적으로 대통령이 판단할 일이다.어떤 생각이 있다면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것이 도리다.나도 80년5월에 고생을 좀 했다.그뒤 수사하던 사람의 아들 주례를 두번 섰다.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원수처럼 지냈을 지도 모른다. ◎이 총리 취임식 이모저모/김 대통령 임명장 수여뒤 20여분 밀담/“대통령에 기 꺾였습니다” 좌중 웃음꽃 이수성 국무총리는 18일 하오 4시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뒤 하오 5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이홍구 전임 국무총리와 이·취임식을 가졌다. 신·구총리는 이·취임식에 앞서 9층 총리 집무실에서 5분 환담을 나눈데 이어,이·취임사에서도 전·후임자에 대한 덕담을 아끼지 않는 등 친밀감을 과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하오 국회 임명동의를 받은 이신임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배석자를 물리친채 이총리와 20여분간 밀담을 나눠 각별한 신임을 나타냈다. 윤여전 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준뒤 배석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담소하는게 관례이나 오늘은 두분이 따로 하실 말씀이 있었던것 같다』면서 『개각 인선협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두분외에는 알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이총리에게 임명장을 준뒤 『(이총리 임명을) 국민들도 다 좋아하고 국회 동의에서도 표가 많이 나왔더라』면서 『서울대 총장으로 모교 발전에 열심히 노력하다 도중에 그만두게된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 시점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분명하지 않느냐』고 이총리 기용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이에 이총리는 『제가 대통령의 기에 꺾였습니다』라고 답변,좌중에 웃음이 터졌다고 윤대변인이 전했다. ○…이홍구 전총리는 이날 삼청동공관에 머무르다 하오 3시쯤 청사에 나온뒤 총리실 직원들과 시종 미소띤 얼굴로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등 이임인사를 했다.이전총리는 『앞으로 총리실의 역할이 중요해진 만큼 직원숫자는 적더라도 열심히 일해달라』는 당부로 인사를 마쳤다.이전총리는 일요일인 17일 삼청동공관에서 역삼동사저로 이사를 끝냈었다.
  • 「12·12전 최 전대통령 조사」 자료 내용

    ◎“김재규에 「계엄」 알려줘 내란방조” 추궁/“시해범 체포지시 왜 안했나” 압박­신군부/약점잡혀 정 총장 연행 재가→하야­최씨 최규하 전대통령이 12·12사건이 일어나기 12일전인 79년12월1일 신군부측에 의해 내란방조혐의로 처음 조사받았다는 사실은 최근 최전대통령의 「진술거부」와 관련,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6월과 8월 2차례 검찰에서 소환조사를 받은 이학봉 전의원의 피의자 신문조서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측의 정권탈취음모가 이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유례가 없는 피의자조사는 그 이후의 12·12 정승화 육참총장연행 재가강요,80년 4월14일 전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발령 실현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12·12사건의 실체와 그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검찰은 전씨를 비롯한 핵심측근들의 내란죄 성립을 지난해 파악하고도 군사반란죄부분만 혐의를 인정한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문조서에서 신군부측은 최전대통령에게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날 새벽 4시부로 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김재규에게 알려 주는 등 내란을 방조한데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따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최전대통령이 이후 12월12일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재가와 5·17비상계엄확대 등 신군부측의 계속된 강압적 요구에 이끌려다니다 결국 하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신군부측이 최전대통령을 피의자신분으로 조사한 사실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검찰의 12·12 및 5·18사건발표에도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2·12사건 재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 14일 민주당 강창성의원이 『최전대통령은 80년3월12일 전 당시보안사령관·이 당시보안사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에 의해 대통령집무실에서 박대통령시해사건의 방조혐의로 4시간동안 조사받았다』고 폭로했으나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따라서 최전대통령의 조사를 직접 담당한 이학봉전의원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공개로 강의원이 주장한 것보다 무려 석달전에 신군부가 최전대통령을 직접조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지난해 12·12사건조사당시 밝혀 놓고도 공개하지 않고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엇갈린다.우선 당시 「조사의 한계」를 안고 있던 검찰이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기 위해서는 신군부측의 내란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최대통령조사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같은 질문을 이학봉·장세동·유학성·허삼수·허화평씨 등 전씨의 핵심측근 5명에게 모두 던졌으나 이씨만 구체적으로 답변했을뿐 나머지 4명은 『모른다』고 잡아뗀 것으로 피의자신문조서에는 기록돼 있다. ◎최규하 전대통령 성명서 요지 친애하는 국민여려분.작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민앞에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88년 국회광주특위 이래 지난 7월 검찰에서의 12·12와 5·18고소·고발에 이르기까지 국회와 검찰에서는 본인에 대한 증인 또는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본인은 그때마다 당국요구에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온 바 있습니다.보도를 통해 다 아시겠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 재임중의 공적인 행위,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은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남기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많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 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바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후임 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택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소신 때문에 본인이 검찰에 직접 진술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규명의 협조차원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도록 노력한 바 있습니다.12·12사건 조사에 있어서도 그날 밤을 같이 지새며 공관접견실에서 사태에 대처한 국무총리와 재임시 보좌하던 분들이 이미 참고인 자격으로 대통령에 관한 사항까지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17사태의 조사 경우에도 그동안 검찰은 본건과 관련하여 80년 당시 국무총리·관계장관·측근보좌관·각군 사령관·관계 공무원 및 기타 장병들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당시 상황이 파악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0·26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비극과 비상사태에서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격동기는 첨예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 속에서의 안보문제의 심각성 뿐만 아니라 제2차 석유파동의 엄습에 의한 경제적 난국,극심한 사회혼란 등 참으로 예측불허의 국가적 위기였으며 본인과 정부는 이 일련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검찰 2차방문 조사 시도 안팎/최씨 평소 생각 전달한 듯/최씨측근 전언/“금품수수설엔 진노” ○…서울 서교동 최규하씨의 사저에는 이날 하오 3시 28분쯤 김상희부장과 이문호검사 등 수사팀 3명이 도착,대기중이던 최흥순비서실장 등의 안내로 최씨를 2차 방문. 김부장과 이검사는 질문자료가 담긴 파란색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비서실장과 악수를 나눈 뒤 『오랜만입니다』라고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부속실로 직행. ○…최비서실장은 『최씨가 전두환씨로부터 1백75억원을 받았다는 민주당 강창성의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수사가 끝나면 밝혀질 것인데 왜 미리 지레 짐작등을 하느냐』고 반문. 한 측근은 『이기창 변호사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강의원이 서교동측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금품수수설을 제기해 어르신이 몹시 분노했다』면서 『명예훼손혐의로 소송을 제기키로 하는 등 법적대응을 신중히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전언. ○…검찰수사팀이 2차 방문한지 1시간여만인 이날 4시30분쯤 최비서실장과 이검사가 최씨 집을 나와 검찰수사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팽배.그러나 검찰조사가 이루어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비서실장이 『아니야』라고 답해 검찰수사가 순조롭지 못함을 간접 시사. ○…최전대통령에 대한 2차 방문조사를 마친 검찰수사팀은 하오 4시50분쯤 최씨 집을 나서면서 『수사가 잘 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씨는 검찰의 수사에 응했다.다만 질문내용에 대해서는 종전 입장과 같이 국민과 국익을 위해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면서 답변을 회피. 최씨 측근들은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최 전대통령이 검찰의 2차방문 조사에서는 나름대로 평소생각을 전달한 것 같다』고 전언,1차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조사가 진행됐음을 시사.
  • 「검찰 방문」 최규하씨집 이모저모

    ◎최시 방문조사 성과 없자 착잡/검찰/측근들 “호의적 분위기속 대화 진행”/최씨 “방송차 소음으로 잠 못자” 불평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방문조사가 실시된 12일 하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최씨의 사저 주변은 한때 『이번조사를 통해 뭔가 새로운 사실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기대섞인 전망이 나돌았다.하지만 끝내 검찰조사는 이뤄지지못한 것으로 알려지자 검찰수뇌부도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하오 5시 45분쯤 1시간여동안의 방문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상희 부장검사는 『최씨와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이나 대화내용을 일체 얘기할 수 없다』고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 최씨의 법률고문인 이기창 변호사는 이와 관련,『최전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직위는 이야기를 삼가는 것이 원칙이라는 요지의 뜻을 수사검사들에게 전달했을 것』이라며 『검찰이 통치행위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전례를 만들 수 없다는 최전대통령의 원칙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해 최씨가 검찰의 방문조사에 응하지 않았음을 시사. ○…이날검찰의 방문은 지난 93년 12·12사건 수사이후 첫 시도된 직접조사인 만큼 「호의적」이고 부드러운 분위기속에 대화가 진행됐다는 것이 최씨 측근들의 설명. 이날 하오 4시25분쯤 최씨의 자택에 도착한 김부장검사와 이문호 검사는 안채응접실로 안내된 뒤 『건강은 어떠시냐.몸이 많이 불편하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라며 안부인사를 건넨 뒤 검찰의 입장을 설명. 김부장은 미리 준비해간 대화자료를 봐가며 최씨의 건강을 비롯한 최근 신상을 묻는 등 최대한 예우를 갖췄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는 최씨와 2명의 수사검사 외에 최흥순 비서관과 이기창 변호사 등 모두 5명이 참석했고 대화중간에 수사검사들에게 차가 대접되기도. 방문이유를 간략히 설명한 김부장검사는 『불행했던 과거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명감을 갖고 조사에 응해달라』며 설득작업을 시작. 수사검사의 간곡한 설명을 줄곧 듣고만 있던 최씨는 그러나 『내 외교관 시절 얘기를 들어보라』면서 본론을 회피한 채 과거 화려했던 외교관 시절을 하나하나회상해 나가기 시작. 수사진은 12·12사건의 중대성과 국민의 여망 등을 들며 조사에 협조해줄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최씨는 『1,2년간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다』라며 일언지하에 조사에 응하길 거부했다. 최씨는 『지금까지 십수년간 생각해봤고 내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닌지 곰곰히 반성했으나 국민과 국익을 고려해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 재직시의 일로 조사를 받는 것은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 최씨는 또 『연일 집밖에 취재진들이 있는데다 방송차량의 발전기 소음까지 겹쳐 외출은커녕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면서 과열관심에 간접적으로 불만을 토로. 이처럼 최씨의 확고한 입장에 수사팀은 사건과 관련해 한마디 질문도 던져보지 못하고 1시간10분여만에 방문조사를 종료.
  • 이영희 여의도연 소장 곧 경질

    ◎“5·6공세력 단절” 잇단 주장에 허주 발끈/“당화합위해 경고로는 미흡“ 강경론 대두 신한국당의 외곽 정책연구기관인 「여의도 연구소」의 이영희 소장이 「강경 개혁론」을 지나치게 자주 개진한 「죄」로 금명간 경질될 위기에 처했다.인사문제가 제기된 직접 계기는 이소장이 지난 달 28일 국민대 정치대학원 특강과 오는 14일자 주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5·6공을 주도했던 인물이 당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것.이소장의 발언은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울고싶던 민정계의 뺨을 때린 격」이 돼 김윤환 대표위원도 그대로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특히 김대표가 김영삼 대통령의 만류로 대표직 사임의사를 철회하고 당내화합에 나선 마당에 이소장이 찬물을 끼얹은 모양이 됐던 것이다.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인 강삼재 사무총장이 6일 이소장을 경고조치 했지만 김대표는 『경고 갖고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표는 지난 5일 청와대 주례보고에서 『당의 결속을 해치는 움직임이 있다』고 여의도연구소 문제를제기했고 김대통령도 이 문제 처리를 김대표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김대표는 『여의도연구소는 공기관이고 소장은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런식으로 얘기하면 안된다』면서 『그런 생각으로 당의 화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강총장도 『김대표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소장은 국민대 특강 및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민정부가 5·6공과 단절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6·3세대이며 인하대 법정대학장을 지낸 이소장은 민주계 후원으로 여의도연구소장직을 맡아 현 정부의 과거청산작업과 개혁의 정당성,세대교체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왔다.그의 다소 과한 개혁 입장으로 몇차례 당내 파문을 빚기도 했으나 원칙론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시각도 적지않다.
  • 전씨에 법률적 대응요령 “진언”/연희동·서교동측 움직임

    ◎최씨 지병으로 검찰출두에 난색 전두환 전대통령의 측근인 이양우 변호사와 안현태 전청와대경호실장은 4일 상오 서울 서대문구 연희2동 전씨 자택을 찾아 전씨의 구속수감 이후 앓아 누운 부인 이순자씨를 1시간 남짓 위로했다.이어 안양구치소로 직행,전씨를 면회했다. 이들은 전씨에게 전날 검찰수사 내용을 들은 뒤 향후 법률적 대응요령 등을 「진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은 『12·12를 사전모의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광주사태는 사회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고 발포명령을 한 적도 없다』는 바탕위에서 법률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날 연희동 전씨집에는 친지들이 간혹 찾아와 이씨와 막내아들 재만씨 부부를 위로했다.한 비서진은 이씨가 식사를 잘 못하고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연희동 전씨집 주변에는 경찰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출입자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는 등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기소를 하루 앞둔 노태우 전대통령의 연희1동 자택 분위기도 비슷하다. 한편 최규하 전대통령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사저는 이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방객 한 사람 없이 적막감속에 잠겨 있었다. 한 비서관은 최씨가 지난달 5·18 특별법 제정방침이 발표된 이후 외부인사와의 접촉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으며 간혹 외부와 전화통화만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검찰의 소환조사를 검토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지병인 허리신경통과 무릎관절통 때문에 출두에 난색을 표하고 계신다』고 전했다. 전·노 두 전직대통령의 구속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은 「개인에 대한 단죄는 있을 수 있으나 대통령직에 대한 권위는 세워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최씨가 워낙 고령인데다 기억력이 흐려져 검찰조사에 응한다 해도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 비서관은 『최근 언론보도와 TV드라마 등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비자금 수사 이모저모

    ◎수사기록 종합검토… 향후 일정 논의­검찰/김유후·한영석씨 변호인단 구성­연희동 지난달 20일 노태우씨의 비자금사건 수사에 착수,19일로 꼭 한달째 수사를 벌여온 대검중수부 관계자들은 이날 휴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출근해 그동안의 수사기록을 종합검토하며 향후 수사방향등을 가다듬느라 바쁜 모습이었다.그러나 노씨의 연희동 사저에는 발길이 거의 끊겨 삭막함이 감돌았다. ▷검찰주변◁ ○…노씨의 영장을 발부한 서울지법 김정호판사가 이원조전의원이 비자금 조성에 개입한 사실을 기자들에게 확인해 주는 등 수사기록 내용을 공표한 직후 법원에 항의전화를 하는등 불편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표출해 온 검찰은 이러한 과정이 언론에 보도되자 뒤늦게 이를 진화하느라 애쓰는 모습. 안강민 중수부장이 지난 18일 브리핑에서 『김판사 본인이 실수를 시인하고 있고 법원내부에서 처리할 문제이니 더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한발짝 물러선데 이어 이정수수사기획관도 이날 상오 기자들과 만나 『법원과 검찰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식의 보도는 사태를 과대해석한 것』이라고 안부장을 두둔. ○…검찰은 이전의원의 범죄혐의를 잡아놓고도 수사착수를 망설이다 김판사의 공개로 마지못해 이전의원에 대해 전격 출국금지 조치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극구 부인. 검찰관계자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넘겨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하던 공부를 멈추고 다른 공부를 하겠느냐』며 검찰의 당초 수사일정에 이전의원이 올라있었음을 넌지시 시사. ○…이번 사건들어 5번째 휴일을 맞은 검찰은 이정수 수사기획관이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와 조간신문의 보도내용을 검토하고 수사팀과 향후 수사일정을 논의하는 등 물밑 움직임. 이수사기획관은 『오늘은 기업체 총수를 비롯,중간간부들 조차 소환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별일 없을테니 하루쯤 푹 쉬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설명. 그는 그러나 『노전대통령의 구속으로 검찰수사가 사실상 「산마루」를 넘었는데도 보도량은 여전히 줄지않고 있다』고 다소 불만섞인 지적. ▷연희동◁○‥구속이후 첫 휴일을 맞은 연희동 노씨의 집은 여전히 침통한 적막감에 싸여있는 모습. 이날 상오 10시 20분쯤 박영훈 비서실장이 노씨의 집에 들어왔고 정오쯤 며느리 신정화씨가 어디론가 외출했다가 돌아왔으며 하오 4시쯤에는 노씨의 아들 재헌씨의 대학 후배 2명이 찾아와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그러나 이날 노씨의 집을 찾은 유력한 외부인사는 아무도 없어 권력의 무상함을 그대로 반영. ○…연희동측은 노씨의 변호사 선임과 관련,김유후 전사정수석과 한영석 전법제처장을 중심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키로 했다는 후문. 최석립 전경호실장은 『김전수석과 한전처장이 변호인으로 선임될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선임시기는 기소이전에 할것인지 또는 기소후에 할것인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전언. 한편 노씨의 한 측근은 『구치소로 면회를 간 측근들을 기자들이 죄인시하는 경향을 보여 곤혹스러우며 언론의 과열경쟁으로 불상사가 발생할까 걱정된다』고 언론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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