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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기폭제개발 집착…70차례 폭발실험/러시아정부의 북핵평가내용

    ◎핵관련시설 영변·길주·구성 등 20곳/기술 낙후… 「노동2호」 개발 어려울 것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본격 착수한 것은 80년대 후반.옛소련과 동구권에 민주화바람이 일면서부터이다.대내적으로는 체제수호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남한과의 경제·군사적 격차를 메우는 대안으로,대외적으로는 북한내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핵무기개발을 서둘렀다는 것이다.또 김일성과 김정일이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을 직접 관장했으며 다른 지배계층을 다스리는 방편으로도 활용해왔다는 평가다.따라서 『핵개발은 김부자의 최대업적이며 북한의 상징과도 같아 쉽게 포기하기는 힘들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최초 핵개발에 착수한 것은 56년 소련과 「핵연구에 관한 협정」을 맺으면서부터.소련이 일방적인 협력을 주는 방식이다.이 협정으로 북한은 영변에 핵연구센터를 설립했다.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내 핵물리학부등 핵관련학과도 설립했고 이어 박천지역에 일련의 핵시설들을 세웠다.이후 북한 핵과학자와 기술자가 소련의 두브나에서 훈련을 받았다.길주 이웃에는 방어개념에서의 핵훈련센터도 세워졌다.함흥지역 핵과학기술자 연구교육센터,코발트시설과 원자로 건설,방사화학실험실의 건설등이 80년 후반까지 소련의 지원하에 이루어졌다. 소련측은 60년대 중반 기술자를 파견,영변에 2㎿ IRT­2000연구용원자로를 처음으로 건설해주었고 67년에 이 원자로는 처음 가동을 시작했다.이후 연구용원자로는 8메가톤으로 개량됐으며 80년 중반까지 제약용·연구목적으로만 운용됐다.이어 소련은 이른바 원자로의 핵심부품을 공급,영변지역에 설치해주었으며 다시 80년 초반 영변 이웃에 30㎿ 원자로 건설에 도움을 줬다. 소련측은 북한이 해금강·운기·함흥·평산 등지의 상용우라늄광을 발견하는데도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평산우라늄생산센터는 60년후반 소련·중국·동유럽에 우라늄을 수출,북한이 핵연료부문에 상당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짐작케하고 있다.소련은 영변가까운 구성지역 우라늄처리시설도 건설해주었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와 당중앙위의 지휘아래 국방위원회·핵에너지부·공안부·광산위원회·북한과학아카데미·인민군등 6개조직이 직간접적으로 핵계획에 연계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소련의 협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북한은 84년에 스스로 50∼2백㎿ 원자로의 건설을 시작,94년부터 부분 가동에 들어갔는데 바로 여기서 플루토늄이 추출됐다.플루토늄은 30,0.1,50∼2백㎿ 원자로에서 모두 추출됐다.북한측이 87년 건설을 시작한 신포지역 원전(1천7백60메가)은 북한이 IAEA핵사찰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러시아측이 지원해줬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고 있다.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소련과 북한과의 핵협력은 강화됐으며 김일성은 핵협력을 위해 고르비의 대내·대외정책을 지지하고 크렘린의 요구에 순응했다고 한다. 94년 북한은 7∼22㎏의 플루토늄(1∼3개의 원자폭탄분)을 추출,영변의 특별구역에 저장시켰다.91∼94년 핵탄두에 쓰이는 고성능 기폭제 제작에 온 힘을 쏟아부은 북한은 영변교외지역에서 지금까지 70회의 폭발심험을 수행했으나 괄목할만한 성공은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70년대 미사일프로그램을 처음 중국과 함께 설계하려다 실패했고 소련의 스커드­B를 수입,84년 스커드 모드A를 설계·제작했으나 배치하지는 못했다.85년 북한은 개량된 스커드 모드B를 이란의 재정지원으로 제작,87년 1백기를 이란에 선적시키기도 했다.91년 이후에는 이를 개량한 사정거리 4백㎞의 스커드­C미사일을 이라크와 시리아에 수출했다. 북한이 핵·화확탄두적재가 가능한 미사일을 자체 개발한 것은 지난 93년 노동1호.북한은 같은해 5월 29,30일 일본해 쪽으로 5백㎞(실제사정거리 1천㎞)를 날렸다.그러나 『노동1호는 엔진설계와 수행능력·정확도·목표지향성·비행안전성등에 심각한 문제가 발견돼 군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다』는게 러시아측의 평가이다.또 북한이 노동1호의 사정거리를 1천3백㎞까지 올리고 사정거리가 2천㎞ 가까이 되는 노동2호를 계획한다는 설에 대해서는 『북한의 경제·과학수준으로 볼 때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동정과 관련,내부적으로 북한은 경제·사상·정치적으로 「갈때까지 간」상태이며 북한에 대한 국제 원조국도 중국 밖에 없고 조건마저도 이제는 까다롭다고 러시아측은 평가했다. 때문에 김정일과 개혁세력과의 「한판」가능성 때문에 북한지도층이 언제 「위험한 도박」을 벌일지 모른다고 러시아측은 보고 있다.
  • “무라야마 일 총리 4월 퇴진/일지/연정 3당합의

    ◎하시모토 자민총재에 이양”/무라야마 사임 부인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 연립 3당 당수들은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96년도예산 성립후인 오는 4월 퇴진,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자민당총재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등의 정국기본전략에 합의했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부·여당간부들의 말을 인용,무라야마,하시모토,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신당사키가케 대표가 지난 11월 오사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이후 가진 일련의 회담에서 이같이 합의했다고 전했다. 【도쿄 AFP 연합 특약】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는 지난주 미리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오는 4월 이후에도 여전히 총리직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무라야마총리는 자신이 4월 사임할 것이라는 언론들의 추측을 부인,『오는 6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1995년 지구촌/보스니아내전 종식·중동평화 “최대축복”

    ◎옴교 독가스 살포·불 연쇄폭탄테러로 “홍역”/각국의 부패권력자 「사정칼날」에 걸려 수난/일·사할린 대지진 등 천재지변 잦고 에볼라 등 전염병 창궐 인류 최악의 비극이라 할 2차대전이 끝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유엔이 창설된지 50년이 된 95년.이같은 의미를 되새기기라도 하듯 지구촌은 평화를 향한 두가지 중요한 걸음을 내디뎠다.오랜 분쟁의 대명사 중동에서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고 2차대전 이후 유럽 최악의 비극이라는 보스니아 내전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냉전종식 이후 불거지고 있는 민족간·종교간 갈등의 대표적 전형이라 할 보스니아내전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25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채 3년반만에 분쟁 종식의 돌파구를 찾았다.또 이츠하크 라빈 전총리가 암살되는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이 이행에 들어섬으로써 베들레헴이 팔레스타인에 넘겨지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해묵은 분쟁이 하나둘씩 타결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이와 함께 요르단과오만 등 주변 아랍국들과 이스라엘간의 분위기도 과거의 적대일변도에서 벗어나 공존을 모색하는 동반자의 길로 접어드는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북아일랜드에서의 해묵은 분쟁 역시 95년 한해를 통해 해결의 발판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등 95년 한해 동안 지구상의 해묵은 많은 분쟁들이 타결의 실마리를 찾아 인류는 평화진전을 위해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르완다 난민 대학살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인류의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95년도 전쟁과 평화가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보스니아와 체첸에서의 끝없는 유혈분쟁 소식이 1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르완다에선 정부군이 난민수용소를 공격,2천여명을 사살하는 학살극이 빚어졌다.또 중국이 핵실험을 실시한데 이어 프랑스마저 일련의 핵실험을 재개,타히티에서 반프랑스 유혈폭동이 며칠째 계속되는 등 핵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계속됐다. 95년에는 또 일본에서 발생한 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사건,미국 오클라호마에서 벌어진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와 프랑스에서의 연쇄 폭탄테러등 테러가 유난히 극성을 부려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안이 사라지지 않게 했다.게다가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일본 고베에서의 대지진과 2천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사할린 네프테고르스크에서의 지진,유럽지역을 휩쓴 폭우과 폭설 등 천재지변마저 잦아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졸이게 했다.그런가 하면 에볼라 바이러스,살 파먹는 괴질 등 낯선 전염병들은 물론 콜레라같은 오랜 전염병들이 다시 창궐해 인류를 긴장시켰다. ○핵문제로 긴장 계속 새해 벽두(2일) 요르단강 서안 점령지구에서의 유태인 정착촌 확대를 선언,평화에의 희망에 불을 지폈던 라빈 전이스라엘총리는 중동평화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극우 유태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짐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아픔을 주었다.또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도 이디오피아를 방문하던 중 무장괴한들로부터 암살 기도를 받아 황급히 이집트로 되돌아갔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아대통령 역시 간신히 암살을 모면하는 등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암살 기도도 끊이지 않았다. 한편 95년 1월1일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예고된 세계의 경제대전은 미·일 자동차분쟁을 둘러싸고 미국이 일본에 대해 1백%의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등 세계는 이제 치열한 경쟁과 경제전쟁의 시대로 바뀌었음을 실감나게 했다.WTO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 등은 WTO 제소라는 위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제몫 챙기기에 열중했고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많은 나라들은 제몫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됐다. 경제적 측면에선 95년 일본 엔화의 초강세와 달러화의 약세가 가져온 파장이 1년 내내 계속됐다.한때 1달러당 80엔대 선까지 올라가는 등 끝이 없어 보이던 엔화의 강세는 현재 1달러당 1백엔을 조금 넘는 선에서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상황에 따라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세계경제의 불발탄과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엔화강세 달러약세 95년 세계경제의 또다른 뚜렷한 추세는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했다는 점이다.아직 완전한 실현을 이루기까지는 극복해야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유럽 7개국간 국경통제를 해제하는 쉥겐조약이 발효되고 마드리드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단일통화의 이름이 유로로 결정되는 등 유럽통합은 발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이에 맞서 아세안의 지역경제화,남미 등지에서의 지역경제화 등이 활발히 거론되고 그 실현을 위한 발걸음을 착실히 내디딘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주의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와 폴란드 등 몇몇 과거 공산주의 나라들은 이같은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개혁의 성과가 미미한데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는 과거로의 회귀와 연결되면서 다시 공산당이 득세하는 풍조를 나타냈다.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영웅 레흐 바웬사 대통령은 공산당의 거센 바람에 밀려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예프스키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러시아에서는 주가노프의 공산당이 제1당으로 부상,좌경화의 바람을 더욱 거세게 했다. ○러·파 공산당 득세 95년 한국이 두 전직대통령의 비리 처단과 과거청산 문제로 떠들썩했던 것처럼 지구촌 곳곳에서도 부패한 권력자들이 법망의 그물에 걸려 수난을 당했다.이탈리아에서는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이탈리아총리가 마피아와 연루된 혐의로 법정에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외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총리 등 3명의 전직총리가 법정에 서게 됐다.한때 멕시코 경제개혁을 이끌어 칭송받았던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멕시코대통령은 자신과 가족들의 폭넓은 비리가 파헤쳐지면서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중국에선 최대의 부정·부패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왕보삼 전북경 부시장의 자살사건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숙정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빌리 클라스 나토 사무총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 압력을 받아오다 끝내 불명예퇴진하기도 했다. 한편 과거 군사독재 시절 수많은 실종자들을 낳는 등 어두운 기억의 상처 속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칠레 등 남미국가들에서는 참다운 과거청산 없이는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군사독재 시절의 어두운 과거를 씻기 위한 노력이 활발히 진행됐다.이같은 부패단절과 과거청산의 움직임은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못하도록 방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류를 위한 밝은 조짐으로 중동과 보스니아에서의 평화 회복 움직임 못지 않게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 사건)과 미국(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 폭파 사건)에서 벌어진 두가지 테러사건은 또다른 측면에서 인류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정치와 경제 두측면에서 모두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두나라에서 발생한 테러는 일본의 경우 신흥종교의 위험성을,미국의 경우 무정부적 극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일깨우면서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목표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어떤 위험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지에 대해 경각심을 부르게 한 사건이었다. 이등휘 대만총통의 미국방문으로 야기된 미·중국,중·대만간의 갈등은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동북아 정세에 긴장을 높여주었다.여기에 중국에 대한 반환이 1년 앞으로 다가옴으로써 야기되고 있는 홍콩의 불안,홍수피해에 따른 기근으로 식량폭동설까지 나도는 북한의 상황 악화 등이 겹쳐 동북아 정세는 극도로 혼미해졌다. 보스니아와 중동에서의 평화는 결국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 아래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내년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클린턴 미대통령이 업적을 쌓기 위해 적극 매달렸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그러나 95년에 이룩한 몇가지 평화진전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자신의 몫만을 늘리기 위해 열심일 뿐 진실로 평화만을 위해 전념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같다.정신적 지주를 잃은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의 참담한 예를 보면 인류는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한발한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96년 한해는 오직 평화와 축복만으로 가득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보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지…
  • 예산 조기집행과 물가안정(사설)

    정부가 내년도 일반회계의 60%와 특별회계자금등 모두 61조원의 예산을 내년 상반기안에 조기 집행,재정의 경기조절기능을 통한 경기연착륙을 유도키로 한 것은 체감경기가 급락하는 현실경제를 고려할 때 환영할만한 조치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용보증기금등 중소기업관련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출연금도 전액을 상반기에 앞당겨 배정할 계획이어서 이들 기업의 수혜범위가 넓어지고 경기양극화현상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이러한 정부 방침과 관련,우리는 정책의 효율성이 극대화할 수 있게끔 각 부처는 발주대상 공공사업 가운데 경기의 파급효과가 크고 중소기업들의 참여기회가 넓은 것을 엄선토록 당부하는 바이다. 특히 우리는 내년예산의 조기집행이 자칫 인플레를 불러오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한다.그렇지 않아도 내년 상반기중에는 총선과 노사임금협상등 경제교란요인들이 적잖이 도사리고 있으며 곡물을 비롯한 국제원자재가격도 오름세를 보임에 따라 전반적인 물가상승이 크게 우려된다. 때문에 예산집행이 물가를 자극하지 않도록 공공사업의 추진시기·대상등을 안배하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공공사업의 동시적인 집중발주는 건축자재나 노임단가가 급등하는 등의 물가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총선을 맞아 선거인력의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정부사업추진에 따른 노동인력의 원활한 공급방안도 다각적으로 강구돼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또 예산지출시점에 맞춰 사업추진을 서둔 나머지 부실공사를 낳지 않도록 감리·감독업무를 철저히 할 것도 강조하고 싶다.경기조절목적의 정부사업이 적잖이 부실화됐던 과거의 잘못이 결코 되풀이 되어선 안된다. 거듭 강조되는 것이지만 우리경제는 과거청산과 같은 경제외적인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속에서 경기의 안정적인 착륙을 이뤄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재정의 경기조절기능과 역할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큰 것이다.
  • 취재진 따돌리고 차내서 문답조사/검찰 광주현장조사 이모저모

    ◎광주 종교·법조계 원로 면담은 모두 무산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의 김상희 부장검사 등 수사팀은 28일 5·18당시 민간인이 살해된 광주교도소 등에 대해 이틀째 현장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날 상오 9시45분쯤 광주교도소 앞에 도착해서 10시 교도소 본관에 이를 때까지 15분동안 취재진을 따돌린채 허연식 5·18공대위간사(32)를 자신들의 차에 태우고 차안에서 문답식으로 현장조사를 실시. 주임검사인 김부장검사는 『차에서 내려 현장조사를 하는게 원칙이지만 15년이상이 지난 상황이라 도로와 건물의 모양 등이 너무 달라져 차안에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설명. ○…5·18당시 교도소부근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일가족 3명이 숨지거나 다친 김성수 5·18상이사망자유족회장(63)과 남편(당시 37세)을 잃은 이숙자씨(49)씨가 이날 상오 검찰에 출두,당시 상황을 증언. ○…검찰은 현장조사가 수박겉핥기식이라는 관련자 및 광주시민들의 비난을 의식한듯 이번 현지조사는 현장검증이 아닌 현장조사임을 강조.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와 광주지검등 합동수사팀은 이날 따로 광주지역의 종교계·법조계의 원로인사들을 면담할 계획이었으나 면담당사자의 사정으로 모두 취소. 특히 천주교신자인 김부장검사는 5·18당시 많은 활동을 했던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와의 면담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윤대주교가 워낙 고령인데다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어 무산됐으며 광주지검이 접촉키로 했던 홍남순 변호사도 고령이어서 역시 면담이 무산.
  • 미 의원 41명 불출마 선언

    ◎“정당­유권자에 실망”… 상원서만 13명 은퇴/연금 “두툼”… 사망때까지 평균 14억원선 11월 선거까지 무려 1년가까이 남아있는 미국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현직 상·하의원이 벌써 41명(불명예사직 2명제외)에 달해 새로운 기록이 세워지고 있다.특히 상원은 내년 선거대상인 33명 의원 가운데 이미 12명이 재출마 대신 은퇴를 선언(사직 1명제외),19 13년 상원직선제 이후 최대 불출마 러시를 이뤘다.이들 은퇴선언 의원의 대부분은 재선 전망이 낙관적인데도 「정당이나 선거구민들이 갈수록 절충을 모르고 양극화해서」,「의원생활이 너무 바쁘고 소모적이어서」 등 「정치에 질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이같은 은퇴의 변도 자못 인상적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들 은퇴선언 미 의원들의 「두툼한」 평생지급 연금봉투가 유달리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의원직을 내놓아도 이들은 은퇴 첫해(97년)에 평균 연6만9천달러의 퇴직연금을 받는데 이는 현 미 상·하원의원 평균연봉 13만3천달러(한화1억2백만원)의 52%에 해당한다.이 퇴직연금은 백인4인가계 평균수입의 2배에 가까우며 생명보험사 산출 평균수명과 연 4%에 달하는 물가연동 자동인상률을 감안할 때 은퇴의원은 평균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사망때까지 1백90만달러(14억6천만원)의 연금수입을 챙기게 된다.물가연동률도 보통 연금들보다 후할 뿐아니라 연금산출률도 일반인의 배나 되는 특혜를 받고 있다.물론 이같이 후한 법은 의원 스스로 만든 것이다. 평균이 그럴뿐 경력연수가 많기 마련인 유명 불출마의원들의 예상연금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5선(30년)상원의원인 마크 햇필드의원은 9만7천달러씩 받기 시작하며 4선으로 현재 57세인 샘 넌의원은 평균수명을 적용한 예상총액이 2백90만달러에 이른다.하원15선의 소니 몽고메리의원은 첫해에 10만7천달러를 받고 12선 의원으로 55세에 퇴직하는 팻 쉬뢰더의원은 평균수명이 긴 여성인 덕분에 앞으로 모두 4백20만달러를 받을 전망이다. 의원연금은 반역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형사범죄인으로 축출당하더라도 주어진다.대신 최소 9년간의 의원경력이 있어야 하고 50세부터 수령할수 있다.성적 부도덕행위로 상원윤리위에 제소돼 사임한 밥 팩우드의원은 내년부터 8만9천달러씩 모두 2백90만달러를 받게 되며 역시 돈관련 윤리문제로 6년전 사임한 짐 라이트 하원의장은 올해 13만7천달러를 수령했다.그러나 미성년자와의 성적관계로 4년형을 선고받아 사임한 멜 레이놀즈 하원의원은 경력이 5년밖에 안돼 연금을 한푼도 받을 수 없다. 퇴직의원들은 물론 이 연금 말고도 자격만 되면 사회보장,재향군인,공무원 등 다른 연금을 따로 함께 받는다.
  • 터키총선 이슬람 정당 승리/21% 득표

    ◎당수 “정교일치”국가로 만들겠다”/칠레르 총리 사임의사 밝혀 【앙카라 AFP 로이터 연합】 24일 실시된 터키 총선에서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RP)이 근소한 표차로 승리한 것으로 25일 밝혀졌으나 정교분리를 지키려는 친서방계 보수주의 정당들이 연합할 경우 집권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개표가 97% 진행된 가운데 복지당은 21.22%를 획득해 선두를 달리고 있고 제1야당인 조국당(ANAP)이 19.65%,탄수 칠라 총리가 이끄는 정도당(DYP)이 19.28%를 차지했다고 국영 TRT­1 TV가 발표했다. 그러나 복지당은 이번 선거에서 의석 5백50석중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석수 3분의 2는 물론 과반수도 확보하지 못해 터키의 정교분리체제를 위협하기는 힘들 전망이다.터키의 비례대표제에 따라 복지당은 전체 의석중 1백59석,조국당과 정도당은 각각 1백34석과 1백33석을 차지하게 된다. 【앙카라 로이터 연합】 탄수 칠레르 터키총리가 25일 지난 주말 총선에서 집권당이 패배한데 따른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터키 주가 폭락·환율 급등 【이스탄불 로이터 연합】 24일 실시된 총선에서 이슬람정당인 복지당(RP)이 제1당으로 부상,정정불안이 예상됨에 따라 25일 상오 터키 주식시장에서 1백대 주요주식가격 평균지수는 지난 22일에 비해 무려 9.74%나 폭락했다. 이밖에도 터키 리라화는 22일의 달러당 5만7천5백80리라에서 25일 5만9천3백리라로 크게 떨어졌으나 중앙은행 개입으로 5만8천7백리라선까지 회복했다.
  • 두환­노태우 군사반란죄 공소장 전문

    피고인 전두환은 1955.9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1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제1사단장등을 거쳐 1979.3부터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10·26 중앙정보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세칭 「10·26사건」(이하 「10·26사건」이라한다)이 발생함에 따라 10·27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소속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라한다)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1980.4.14부터 7.17까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고 5.31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근무하다가 8·6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9.1,취임하고 다시 1981.2.25 개정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3.3 취임한후 1988.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 자, 같은 노태우는 위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서 1955·9 육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9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거쳐 「10·26사건」당시에는 제9사단장으로 근무하였으며 그후 수도경비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7 육군대장으로 전역한후 정무제2장관,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등을 역임하고 1985.2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및 총재로 재직하다가 1987·12·16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2·25 취임한후 1993·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자로서 1995·12·5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으로 서울지방법원에 구속기소되어 현재 재판계속 중에 있는자 등인바, 「10·26 사건」이후 국내정치상황은 유신헌법을 개정하여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1979·11·8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개정을 통한 정치발전을 약속하고 11·21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질서의 창출이 모색되는 가운데 12·8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행위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해체되어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군 내부에서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비롯한 군수뇌부가 계엄의 성격과 목적을 「10·26사건」이후 발생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국한함으로써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등 정국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피고인 전두환이 계엄업무 수행과정에서 「10·26사건」과 관련하여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된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석방,청와대에서 발견된 금원의 처리,부정축재자의 처리 및 재산몰수,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출국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승화 총장과의 사이에 잦은 의견대립으로 인해 마찰을 빚어 오던중,11월 중순경에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육사 출신들이 군요직에 배치되고 정규육사 출신의 피고인등이 중심이 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12월 초순경 군 일각에 피고인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곧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인사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총장이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피고인 전두환의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피고인등은 위 전두환에 대한 인사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소속 장교들의 군내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정승화총장이 「10·26 사건」당시 박대통령 시해 현장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이하「육본」이라한다)로 동행한 사실로 인한 일부 군인들 사이에 정승화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을 기화로 이미 그동안의 수사과정에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정승화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압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12·7경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한다)에서 서로 만나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피고인 전두환이 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육군중령 이학봉에게 연행장소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여 그 검토결과를 토대로 12·8경 육군참모총장 공관(이하 「총장공관」이라 한다)을 연행장소로 결정한후 12·9경 위 이학봉,보안사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육군대령 허삼수,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합수부 수사2국장 육군대령 우경윤 등에게 구체적인 연행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정승화총장의 연행에 대응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특수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수도경비사령관 육군소장 장태완,육본 헌병감 육군준장 김진기 등을 12·12 당일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 차단키로 하고 피고인 노태우 등 소위 「하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은 그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라 한다)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필요시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국방부 군수차관보 육군중장 유학성,제1군단장 육군중장 황영시,수도군단장육군중장 차규헌,제20사단장 육군소장 박준병,제71훈련단장 육군준장 백운택,제1공수여단장 육군준장 박희도,제3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최세창,제5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장기오,수경사 제30경비단장 육군대령 장세동,수경사 제33경비단장 육군대령금진영,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대령 허화평,위 이학봉·허삼수,보안사 정보처장 육군대령 권정달,위 우경윤,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육군대령 성환옥,수경사 제33헌병대장 육군중령 최석립,육본 헌병대장 육군중령 이종민,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육군준장 정동호,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육군대령 고명승,수경사 헌병단장 육군대령 조홍,수경사 헌병단부단장 육군중령 신윤희,보안사 보안처장 육군대령 정도영,제30사단장 육군소장 박희모,제30사단 제90연대장 육군대령 송응섭,제2기갑여단장 육군준장 이상규,제9사단 참모장 육군대령 구창회,제9사단 제29연대장 육군대령 이필섭,제9사단 작전참모 육군중령 안병호,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 육군중령 서수열,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 육군중령 박덕화,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육군중령 박종규등과 순차로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는 사전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12 18·00경부터 19·00까지 사이에 위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하는 한편,위 허화평·권정달·정도영 등은 보안사 상황실을 거점으로 하여 각급부대 지휘관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대동향과 병력이동 상황을 파악,수시로 위 지휘부에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고, ○위 조홍은 미리 계획한대로 12·초경 계엄업무로 수고하는 수도권 주요지휘관들을 보안사령관이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위 장태완·정병주·김진기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12·12 18·30경 약속장소인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 상호불상 한정식집에 오게하여 유인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오전 국군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현직 육군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려면 그 중대성에 비추어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사전승인을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절차를 무시한채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여 강제적인 방법으로 연행하라고 위 허삼수등에게 지시하고 이에 따라 허삼수·우경윤·성환옥·최석립·이종민등은 같은날 18·00경 합수부수사관 7명,경복궁 구내 주둔 수경사 제33헌병대 3개 제대 병력 60여명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소재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집결시켜 총장공관 경비병등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권총과 엠(M)16 소총으로 무장케 한 다음 18·50경 정당한 이유없이 위 부대를 인솔하고 수소를 이탈하여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총장공관에 도착,각자 분담한 임무에 따라 무장한 합수부 수사관들을 총장공관 부관실,공관입구 헌병초소,공관현관등을 제압하고 제33헌병대 병력은 퇴로를 확보하고 19:10경 허삼수·우경윤이 총장공관 응접실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받아야 하겠으니 녹음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요구하였으나 정승화 총장이 이를거부하면서 수행부관 육군소령 이재천에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여 동인이 부관실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자 합수부 수사관 육군소령 김대균,육군소령 한길성,육군상사 박원철등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난사하여 상관인 이재천과 경호장교 육군대위 김인선등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머리와 허리 등에 총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 무렵 허삼수·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을 끌고 나오던 중 우경윤이 성명불상자로부터 총격을 받고 쓰러지자 부관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길성이 허삼수를 도와 정승화 총장의 양팔을 붙잡고 박원철은 엠(M)16소총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대형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정승화 총장을 위협하면서 함께 끌고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태워 19·30경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연행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18·20경 위 이학봉,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동소재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새로운 혐의 사실이 발견되어 연행.조사하여야 하겠으니 재가하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하였다가 현직 계엄사령관을 연행.조사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재가를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20:20경 위 정동호·고명승에게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여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하고 정동호·고명승 등은 그시경 대통령의 승인이나 대통령 비서실과의 협의 없이 청와대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제55경비대대 부대대장 육군소령 권중원 및 5분대기조 24명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출동하여 20·40경 대통령 특별경호대장 육군중령 구정길과 그 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후 그곳 막사에 억류하고 위 제55경비대대 2개 제대 병력 64명을 추가로 출동시켜 그 일대에 배치함으로써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1·30경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하고 그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정승화 총장의 원상복귀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피고인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피고인등은 계엄지역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거나 명시적인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선제공격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숨긴채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지시에 따라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제26사단,수도기계화사단등에 전화를 걸어 그 부대장이나 참모들에게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 달라고 회유하여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3·00경 위 박희도에게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고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오라고 지시하고 위 조홍에게는 수경사 헌병단 병력을 출동시켜 수경사에 있는 육본 지휘부와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위 최세창에게는 특전사령관을 체포한후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24·00경 위 장기오에게는 제5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피고인 노태우는 12·12 24·00경 위 구창회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황영시는 12·13 00·30경 위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01·10경 위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0·05경 서울 강서구 공항동소재 제1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 1,2,5,6대대 병력 1천5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행주대교·능곡·수색을 거쳐 01·3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후 제1,2대대 병력은 육본 정문에 근무중인 헌병등을 무력으로 제압한후 무장을 해제시키고 안으로 진입하여 육본 건물을 점령하고 제5,6대대 병력은 국방부정문에 근무중인 헌병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제5대대 제15지역대 소속 성명불상 장병들이 국방부 초소에 근무하는 초병 육군병장정선엽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고 02·40경 국방부장관실에 난입하여 합동참모의장육군대장 김종환등 장성 8명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국방부 청사를 수색한 끝에 03·50경 지하 1층 상황실 입구에서 국방부장관 노재현을 발견하여 보안사로 연행하고, ○위 최세창은 12·12 23·30경 특전사령부(이하 「특전사」라 한다)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박종규는 24·00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특전사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으로 하여금 사령부 외곽을 포위케 한 다음,육군대위 김흥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과 함께 안으로진입하여 위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이 이들에게 엠(M)16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제1수장골무지우부개방성분쇄골절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최세창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2·00경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 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03·00경 경복궁으로 진주하고, ○위 장기오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5공수여단 제23대대장육군중령 정낙준과 제26대대장 육군중령 장용주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정낙준·장용주 등은 12·13 02·00경 인천 북구 부평동 소재 제5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23대대 및 제26대대 병력 4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경인고속도로,제1한강교를 거쳐 03·2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하였으나 국방부와 육본이 제1공수여단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어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진주하고, ○위 조홍은 12·12 23·30경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에게 당시 서울 중구 필동 소재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위 장태완·윤성민,육본 작전 참모부장 육군소장 하소곤,합동참모본부장 육군중장 문홍구 등 육본측 장성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신윤희는 12·13 03·00경 헌병단 소속 육군대위 임대식·윤태이 등으로 하여금 헌병 55명을 지휘하여 사령부 외곽과 1,2층 복도를 포위케 한 후 03·40경 육군대위 한영수,육군대위 이재우,헌병단 정보과장 군무원 최순호,성명불상 헌병 5명과 함께 사령관실로 진입하여 장태완·윤성민·하소곤·문홍구 등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한영수가 엠(M)16 소총 1발을 발사하여 상관인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좌흉부관통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이필섭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구창회의 지시를 받아 12·13 02·20경 경기 고양군 벽제읍 소재 제29연대 연병장에서 제29,30연대 병력 1천3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구파발·홍은동을 거쳐 03·30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이상규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16전차대대 대대장 육군중령 김호영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김호영은 12·13 02·30경 경기 파주군 금촌읍 아동리 소재 제2기갑여단 연병장에서 제16전차대대 전차 35대와 병력 1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통일로·구파발·서대문 등을 거쳐 03·25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위 송응섭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송응섭은 12·13 03·30경 고양시 신도읍 삼송리에 집결한 제90연대 병력 1천1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홍은동·세검정을 거쳐 06·20경 고려대학교 운동장으로 진주함으로써 계엄지역에서 각 지휘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각 진퇴시키고 정당한 이유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각 수소를 이탈하고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이재천·김인선·정병주·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각 미수에 그치고 초병인 정선엽을 살해함과 동시에 피고인 전두환은 수괴로서,같은 노태우는 중요업무종사자로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것이다.
  • “실추 이미지 만회”/그룹별 비자금파문 씻기 전략을 보면

    ◎대기업 해외홍보 분주/삼성­세계일류기업 부각/대우­외국투자 확대 계획/동아­리비아당국에 해명/LG­홍보비 2∼3배 늘려 비자금 파문 관련 대그룹들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해외에서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떨어진 신뢰도를 방치할 경우 앞으로 해외자금 조달과 해외사업 추진에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해외활동이 왕성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거래선 및 금융기관,외국정부 등과 개별접촉을 통해,또 해외현지법인 직원들과의 대화 등으로 한국에서는 비자금이 과거의 관행이었고 이번 사건이 오히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란 점을 강조하며 설득작업을 벌이고 있다.새해에는 해외홍보예산과 기업 이미지 광고도 대폭 늘릴 방침이다. 삼성은 해외홍보에도 자율경영체제를 강화,해외홍보총예산을 올해의 1천7백억원보다 30% 이상 늘리고 5개 해외본사별 현지실정에 맞게 해당지역사회에 대한 삼성의 기여도를 부각시켜 친밀도를 높이고 세계일류기업을 향해 노력하는 인상을 심어줄 계획이다. 대우는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아래 이번 일이 경영에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해외투자를 더욱 확대하고 해외 유력매체를 통한 이미지 광고와 대우뉴스 제공으로 이미지 제고에 주력할 방침이다. 7개국에서 굵직한 해외공사를 진행중인 동아그룹은 최원석 회장 자신이 지난 16일 리비아 2단계 대수로 공사 수주계약시 리비아 관련장관에게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등 동아가 성실하고 기술력 있는 시공사임을 관련국에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보는 정태수 총회장의 구속으로 인해 해외건설현장 등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가운데 대외이미지 개선에 적극 나서 사정이 많이 호전됐다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현대그룹은 「경영이념 및 기업윤리강령 선포식」 자료를 소책자로 만들어 해외지점에 배포,임직원들에게 숙지시키고 대외관계에도 활용할 방침이다. LG도 해외 그룹 이미지광고를 내년에는 올해의 1천만달러보다 2∼3배 늘릴 방침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해외사업 타격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전 세계가 우리 국내사정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만큼 이미지 개선과 이해를 구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최종재판결과에 따라서는 사정이 달라질 여지도 없지 않다.
  •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 사임/가 현지법인회장 맡아

    ◎동생 현배씨에 경영 맡겨 삼미그룹은 김현철회장이 사임하고 김회장의 동생인 김현배 그룹부회장(38)이 신임회장에 취임한다고 19일 발표했다. 지난 80년 창업주인 부친 김두식회장의 타계로 회장에 취임,16년간 그룹을 이끌어온 김현철 회장은 내년 1월부터는 삼미의 캐나다 법인 회장으로 현지에 상주키로 했다.그룹측은 김 전임회장의 그룹회장직 사임에 대해 『캐나다 현지법인의 경영에 전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신임 김회장은 오는 2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삼미본사 강당에서 취임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에 따라 삼미그룹은 김 신임회장이 국내사업을,김현철 전임회장이 북미 현지법인 경영을 각각 나눠 맡게돼 그룹 경영이 사실상 2원화 됐다.삼미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두 회장이 현재의 지분율을 유지하면서 각각의 영역에서 독자성을 갖고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작년 말 현재 전임회장은 삼미특수강 5.48%,(주)삼미 9.78%,신임회장은 삼미특수강 2.36%,(주)삼미 1.83%의 지분을 각각 소유하고 있다. 김 전임회장은 지난89년에 인수한 캐나다의 삼미아틀라스와 알텍특수강의 경영에 각별한 정열을 기울여 왔다.삼미는 오는 20 00년대에 세계 최대의 특수강 업체로 부상한다는 경영전략에 따라 이들 회사를 인수했으나 인수직후 불어닥친 세계 특수강 경기의 침체로 그동안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다.김회장은 지난 수년간 월평균 1회 이상 캐나다 출장을 가는 등 현지법인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전력투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그 결과 지난 해 처음으로 6백만달러의 흑자를 냈으며 올해는 흑자폭이 4천5백만달러로 불어날 것으로 그룹측은 예상하고 있다. 삼미는 캐나다 현지법인의 경영이 본궤도에 오름에 따라 그동안 유보해온 설비 증설계획을 다시 추진키로 하는 등 다시 공격적인 경영으로 전환하고 있다.현재 연간 1백50만t(국내 1백만t,캐나다 현지법인 50만t)인 특수강 설비를 오는 20 00년까지 2백82만t으로 늘려 세계최대의 특수강 업체로 부상할 계획이다.이를 위해 내년에 현지법인을 캐나다 증시에 상장,투자재원을 마련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김 전임회장의 현지법인 전담경영은 이같은 특수강 세계화전략을 구체화 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김현배 회장은 누구/81년 입사… 90년이후 주력 「특수강」 이끌어 삼미그룹 회장에 취임한 김현배 그룹 부회장(38)은 그룹내에서 특수강 전문가로 통한다.서울태생으로 신일고와 고대 경영학과를 졸업한후 81년 삼미그룹의 모기업인 (주)삼미에 입사했다.이후 기획조정실과 목재담당 이사를 거쳐 85년 12월 (주)삼미 부사장을 역임했다. 이어 87년 8월부터 베어링 생산 계열사인 삼미정공(주) 대표이사로 1년 조금넘게 재직하다 89년 1월 삼미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복귀해 2년동안 기조실을 지휘했다.90년 12월 삼미종합특수강 부사장을 거쳐 4개월만에 대표이사에 오른뒤 지금까지 줄곧 삼미종합특수강을 이끌어왔다.92년부터 그룹 기획실 사장도 겸해왔다. 차분한 성격이어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리더십만큼은 남못지 않는다는 평가다.만능 스포츠 맨으로 못하는 운동이 없지만 독서량도 엄청나다는 후문이다.특수강 전문가로 자부할 만큼 이 분야에 대한 식견이 높다.현재 부인 정은미씨(30)와의 사이에 3녀를 두고 있다.
  • 유엔50돌 행사 총괄국장 구상열씨:4(세계속의 한국인)

    ◎10월 150국 정상회의·한국특볍공연 이뤄내/유엔본부 최고위직 한국인… 유니세프도 근무/“미국식사고 귿어질라” 19년 기자생활 AP통신사 사임 영원한 국제인을 지향하는 한국인 구삼열(54)씨.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한국땅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 그의 꿈을 실현하며 국제무대 중심인 유엔에서 세계의 일과 국제적 과제를 다루고 있다.그는 유엔본부 유엔50주년행사 총괄국장(차관보급)으로 창설 50주년을 맞은 올해 유엔내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이었다.세계 1백50여 정상 및 정부수반이 참석한 가운데 10월22일부터 24일까지 유엔본부에서 열린 특별정상회의를 위시해 나라별로 치러진 수많은 행사들은 모두 그의 머리와 손을 거치지않은 것이 없다. ○내년 런던총회 준비 한창 유엔의 반세기를 기념하는 많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한숨을 돌리며 여유를 갖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여유다.그는 유엔50주년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내년 1월 런던의 유엔1차총회 기념식을 준비해야 한다.그는 더욱이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역할과 기능을 모색하는 유엔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그러한 그에게 유엔의 또다른 중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는 다자외교무대인 유엔에서 수년동안 일해 온 만큼 한국인중에서는 가장 국제화된 인물이다.그는 한국의 「국제화와 세계화의 첨병」이기도 하다. 그는 세련됐으면서도 한국적 멋을 잃지 않고 있다.버터냄새속에서 된장냄새가 베어있는 사람이다.그는 행사준비관계로 지난 2년동안 변변한 점심한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책상위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관련서류를 뒤적이며 살아왔다.한국인을 대할 때는 25년의 외국생활에 젖은 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언행을 보이지만 서양여자라도 만나면 자연스럽게 포옹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서양사람이다. ○국제화는 교육개혁부터 구씨는 국제화된 인물답게 국제화와 세계화를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최근의 국제화 추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단순히 교역을 위해 외국을 알고 이해하는 협의의 차원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생활의 전영역에서 세계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인식이 확대돼가고 있고 이젠 그 실천에 들어선 단계입니다.한 나라의 환경문제만 하더라도 결국은 범세계적 문제이고 한반도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는 「세계는 하나」라는 관점에서 세계문제의 순환론을 폈다.그는 『우리나라 사람은 해외관광객에서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국제화에 노출은 많이 되고 있으나 국제화의식으로 전환되는 데는 아직 더딘 것 같다』면서 『한국은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세계속에 한데 어울리는 노력은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했다. 『나자신을 포함,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인종차별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뉴욕과 시카고에서 현지인보다 평균학력이 높은 우리 이민자가 보이는 행태는 폐쇄적이고 독선적입니다.아마 우리 교육이 그렇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그는 「국제사회에서의 일체감」을 거듭 강조했다. 구씨는 헌신과 비전을 보여주는 외교와 교육정책이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꼭 필요할 것이라고 유엔에서 본시각을 제시한다.『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등 스칸디나비아 국가가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인간개발 측면분야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을 보면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헌신적 자세가 큰 힘이 된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그는 내년부터 2년동안 우리나라가 유엔안보리 이사국으로 활동하는 만큼 유엔에서의 위상에 걸맞게 국제화 신장에도 노력해 줄 것을 주문했다. ○68년 국제부장으로 입사 68년 AP통신사에 입사한뒤 19년동안 기자로 활동한 구씨는 87년 UNICEF(유엔아동기금)의 의회담당조정관으로서 유엔과 첫 인연을 맺어 지금은 유엔본부에서 일하는 한국인중 최고위직에 있다.로마주재 유럽특파원으로 일하던 당시 UNICEF위원장으로 있던 제임스 그랜트씨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6년동안 유엔특파원으로 일한 경험이 유엔의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그뒤 UNICEF 공보처 부처장겸 대변인으로 있으면서 아동복지 세계정상회담 홍보책임자로도 일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 이후인 93년 「한국인직원 1호」로 유엔본부에 들어와공보부 진흥섭외국장을 맡았다.세계의 언론매체,비정부단체 및 일반대중을 위한 유엔홍보정책 총책임을 맡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현재의 자리에 온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유엔 50주년행사준비가 워낙 광범위하고 여간 벅찬 일이 아니어서 구씨가 제격이라는 주위의 추천에서였다.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도 유엔50주년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데 대해 그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구씨는 41년 서울에서 구홍남씨(작고·3·4대 국회의원)의 아들로 태어났다.고교졸업후 미국유학을 계획했으나 4·19이후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미국유학이 좌절된 그는 미8군의 메릴랜드대학에서 강의를 듣다 고려대 행정학과로 편입했다.졸업후 잠시 한국에서 영자지 기자생활을 하다 미국에 와 미국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8개월동안 일한뒤 콜럼비아대학원의 저널리즘학과에 들어갔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68년 AP통신사본부 국제뉴스부장으로 입사하여 미국의 소리(보이스 오브 아메리카)특집위원도 겸임했다. 구씨의 부인은 잘 알려진대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정명화씨다.70년 어느 크리스마스파티에서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고 한다.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는 처제고 피아니스트겸 지휘자인 정명훈씨는 처남이다.정명화씨는 현재 뉴욕의 마네스음악대학과 서울의 국립종합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서울과 뉴욕에서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지난 10월7일 저녁 유엔총회장에서 처음으로 「아리랑」감동이 울려퍼지게 한 유엔창설 50주년기념 음악회에도 정명화씨와 정명훈씨등 가족들을 동원했다.그가 아니었으면 한국의 세계적 음악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부인은 첼리스트 정명화씨 현재 유엔본부에는 4천8백명정도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 직원은 9명이다.올해 우리의 분담금순위가 전체 회원국 1백85개국중 18위이고 2∼3년내에 15위로 올라설 전망인점을 감안하면 한국인 직원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게 구씨의 지적이다.그는 『유엔에서 한국의 역할이 날로 증가하는 시점에서 한국이 70여개나 되는 유엔산하기구에서 책임자는 물론 제2인자로있는 기구도 하나 없는 실정』이라면서 「한국인의 많은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구씨는 한국의 위상과 관련지어 볼 때 한국인직원이 적어도 25∼30명정도는 돼야 하며 질적인 대우도 격상돼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구씨는 유엔기구내의 자리를 놓고 회원국끼리의 경쟁이 한마디로 치열하지만 『한국 젊은이의 유엔진출 길은 넓다』고 강조했다.그는 『우리의 우수한 젊은이가 유엔근무를 매력적인 직업으로 선호할 것이며 유엔에 관한한 앞으로 10년은 특히 여성인력의 황금기』라고 지적하고 『문제는 우리 정부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나서느냐에 있다』면서 정부의 보다 적극적 관심을 촉구했다. ○젊은 인재 진출확대 절실 그는 유엔에서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언제든지 국제인,세계인으로 자부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AP통신사를 떠난 것도 너무 미국적으로 사물을 봐 관점이 고착되지 않았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그는 한국인이면서 영원한 국제인이 되고 싶어했다.유엔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유엔에 들어오려는 한국 젊은이의 가교역할도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구삼열씨 시상 메모 ▲41년 12월23일 서울출생 ▲65년 고려대 행정학과 졸 ▲68년 콜롬비아대학 신문대학원졸업 ▲68년 6월∼72년 9월 AP통신사 국제뉴스부장,미국의 소리 특집위원겸인 ▲72년 10월∼78년 8월 AP통신사 유엔특파원 ▲78년 9월∼87년 8월 AP통신사 유럽특파원(로마주재) ▲87년 9월∼89년 6월 UNICEF의회담당조정관,인류생존을 위한 범세계 종교정치지도자기구 특별고문 겸임 ▲89년 9월∼93년 4월 UNICEF공보처 부처장겸 대변인,아동복지를 위한 세계정상회담 홍보책임자 ▲93년 5월∼94년 6월 유엔 공보부 진흥섭외국장 ▲94년 7월 유엔본부 유엔50주년 행사 총괄국장
  •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8)

    ◎과도정부­통치권 한계… 과거청산·개혁에 실패/제2공화국­시위 잇따라 사회 대혼란… 「5·16」 초래 1960년 봄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종말을 고한 제1공화국에 이어 과도정부가 탄생 했다.그러나 과도정부는 개헌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지만 국민들이 열망한 과거청산과 정치혁신을 실현하는데 실패 했다.그래서 약체 정권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군에 정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1960년 4월 21일 제1공화국의 운명이 황혼을 맞고 있을 때 이승만대통령은 자신이 평소 신뢰감을 갖고 있던 전 서울시장 허정을 만났다.이승만은 정부의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도록 부탁 했다.당시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한 상태였다.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자연스럽게 대통령직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자유당 세력들도 특별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허정이 수반을 맡아주기를 사실상 희망하고 있었다. ○허정 내각제 개헌 추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날인 4월27일 대통령서리에 취임한 허정 외무부장관은 우선 내각제 개헌을 떠올렸다.이 내각제 개헌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였고 민주당의 오랜 강령이기도 했다.허정은 취임초 첫 기자회견에서도 이 내각책임제 개헌실현의지를 밝혔다.허정은 이 회견에서 내각제 개헌을 다짐하면서 개헌을 이루어낸 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약 했다.국회는 4월29일 민주·자유 양당 4명씩과 무소속 1명으로 개헌특위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에 개헌특위가 구성되면서 공법학회는 개헌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오기도 하고 개헌특위 주최로 공청회를 열어 각계의 의견도 들었다.마침내 개헌특위는 5월9일 개헌요강 작성에 대체로 합의한 뒤 6월10일 본회의에 상정했다.전문 103조로 돼 있던 제1공화국의 헌법중 무려 52개 조항을 고친 이 개헌안은 재적 2백11명중 찬성 2백8표,반대 3표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앞서 허정 과도정부는 5월2일 첫 국무회의를 열고 혼란상태의 정국 수습과 경제위기 타개책을 내놓았다.부정선거 관련자 엄중처벌및 경제사범 엄단,경제적 민주화 지향,중소기업 육성의 재정적 뒷받침,악질 세무관리 엄단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조직적 권력을 갖고있지 못했던 과도정부의 통치권에는 한계가 뒤따랐다.특히 군부의 부패 척결과 관련해 허정은 미국과 주한미군사령부의 견제 탓에 끝까지 숙군작업에 손을 대지 못했다.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는 허정에게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돼야 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숙군에 제동을 걸었다. 4·19가 요구한 문제점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선거부정의 주요 음모자로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를 3·15선거에서의 불법행위로 구속하는 것으로 그쳤다.이어 자유당에 선거자금을 불법 제공한 은행장들도 구속하고 정치·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정치깡패의 두목들도 우선 잡아들이기는 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과 연결돼 있었던 이들의 처리문제는 다음 정권과 군사정권으로 넘어갔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방침도거듭 밝히고 개인 18명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 때까지 아무것도 매듭지은 것이 없다.결국 당시의 정치구도나 법적 기본구조를 깨뜨릴 의지도,능력도 없었던 과도정부는 다음 정권에도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부정축재 84명 처벌못해 제4대 국회는 내각제 개헌을 끝으로 해산 했다.그리고 나서 새 헌법의 절차에 따라 19 60년 7월29일 실시한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일단 권력을 잡았다.민주당은 민의원 2백33석중 1백75석,참의원 58석중 31석을 차지했다.나머지 의석은 민의원의 경우 무소속 46석,사회대중당 4석,자유당 2석,한국사회당 1석 및 기타 군소정당 5석 순이었다.참의원의 경우는 무소속 20석,자유당 4석,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민족진보연맹이 각각 1석등이었다. 그러나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당 공천 탈락자이고 이들 중 다수가 국회개원과 동시에 민주당에 재입당 했다.민주당은 명실공히 실세가 됐다.하지만 선거과정에서 분당론까지 제기됐던 민주당 계파는 여전히 복잡했다.당선자 1백75명 가운데 장면 중심의 신파 78명,그에 반대하는 구파 83명,중도파 14명등 팽팽한 구도를 보이자 신·구파가 각각 당선자대회를 갖는등 치열한 집권경쟁을 벌였다. ○장면내각 민주신파 일색 우여곡절 끝에 8월19일 민의원에서 장면총리 인준투표가 실시됐다.결국 찬성 1백17표,반대 1백7표,기권 1표로 신파일색의 장면내각이 출범했다.장면총리는 구파측에 대해 5명 정도의 인선을 제의했지만 구파의 거절에 부닥쳐 8월23일 신파측 일색의 불안정한 새 내각이 출범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은 이전의 과도정부와 마찬가지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선 자유당 시절 부정부패의 원흉들을 처벌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집중적인 지탄을 받고있던 경찰에 먼저 화살을 돌려 81명의 경찰서장을 포함한 2천2백13명의 경찰관을 파면시켰다.그 결과 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의 기능을 상당기간 약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미국은 설상가상으로 61년 1월 한국정부에 대해 환율인상을 요구해왔다.장면 내각은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61년 1월 달러당 6백50환이었던 환율이 1천환으로 평가절하 됐다.이어 2월에 1천3백환으로 다시 평가절하된 판에 미국은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고 나섰다.그 대가로 장면정권은 3천5백만달러의 원조를 받았지만 이 협정은 미국 원조자금이 전체예산의 52%를 차지하던 한국 정부예산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 행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한국주재 미국인 교육자와 기술자들도 모두 한국정부로부터 외교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미국은 이것 말고도 61년 1월 「외자도입촉진법」 제정을 채근했다.이 법은 국내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에 대해 연간 20%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이 투자회사들은 한국내의 보유자산에 대해 아무런 세금을 내지않도록 하는 것이었다.이에따라 미국자본의 한국진출이 러시를 이루었다. 장면 정권은 이무렵 「데모규제법」등의 제정을 추진했는데 1960년 7·29총선에서 참패한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대투쟁을 벌였다.이는 극도의 사회 혼란상을 초래 했다.그리고 국민의 기본적 의무보다 권리를 더 중시하는 각종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이와 맞물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5월13일 평화통일 구호를 내걸고 「남북학생회담 환영및 통일촉진대회」를 열었다. 1961년 시국위기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이 학생집회가 열린 것은 민주주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5월16일 군사 쿠데타 3일전의 일이었다.물론 제2공화국이 약세의 틈을 보여준 데서 비롯한 쿠데타로 평가되지만 국민들에게도 얼마간은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군사자문단 「국가팀 회의자료」/“미군철수땐 한반도 적화” 예측/북의 혼란책동 선전공세 면밀 분석/팸플릿 제작 등 심리전 대응책 제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장면정권 시절 주한미군의 대북 대응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회의자료를 미국 케네디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입수했다.이 자료는 19 60년 12월22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합동군사원조자문단(JMAAGK)의 국가반(Country Team)회의자료로 당시 혼란을 틈타 고조된 북한의 선전에 대처하기 위한 주한미군사령부의 대처방안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회의자료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는 일상적인 참석자 외에 주한미군 참모장인 에머리 워첼중장과 본드 장군등이 이례적으로 참석했다.회의주제는 「북한의 선전효과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가능한 대처방안 강구」.회의에서 주한미군측은 『북한측의 선전공세가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고 보고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정책 실패와 자신감 결여,혼란·판단불능 때문에 공산주의선전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판단했다.워첼장군은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이승만 정권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돼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남한의 군사적·경제적 소유물에 대해 통제를 해야한다』고까지 발언했다. 회의자료에는 미군이 철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전 한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한 대목도 들어있다.워첼장군은 『미군이 철수하면 전한반도를 공산주의자들이 석권할 수 있을 것인데 왜 북한인들이 자유선거 실시에 동의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도 말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결국 미국공보원(USIS)의 전문가 팀이 대한민국 정부와 공동으로 북한의 선전위협에 대응하는데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다.자료에 따르면 미국공보원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가 함께 북한선전에 대응하는 팸플릿을 만들고 양국 정부가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특히 주한미군사령부는 공산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원과 기구정비를 준비했는데 이는 한국군의 정치개입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함축했다.
  • 허주 민정계 끌어안기 한창/TK들과 잇단 접촉… 당내화합 모색

    ◎일부 의원들 “특별법 동참” 긍정 반응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은 허주(김윤환 신한국당 대표위원의 아호)의 「민정계 끌어안기」가 한창이다. 김대표는 대표직 사퇴의사 철회후 힘든 시간을 보냈다.그에게 다시 맡겨진 역할은 멀리는 총선준비이지만 가까이는 5·18특별법 처리,민정계 끌어안기,대구·경북출신(TK)의원 다독거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김대표는 구설수에 올랐다.민주계의 이영희 여의도연구소장을 사임시킨데 대해 당내 갈등이 노출됐다.몸이 아파서 하루 쉬었다고 했으나 개각관련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당무를 거부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게다가 민정계,특히 TK의원들은 계속해서 5·18특별법에 대해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민주계 일각에서는 『대표가 민정계대표냐,TK대표냐』는 소리도 나왔다.민정계도,민주계도 김대표를 공격하기에 바빴다.그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결국 김대표는 외로운 줄타기를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허주의 고민은 다소 줄어들고 있다.허주가 그동안 민정계 및 TK들과의 접촉 결과 「김대표를 중심으로 일단 뭉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아직 대구출신 의원들은 5·18특별법에 반대하고 있지만 경북지역의원들은 『특별법이 정치보복이 아닌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순수한 뜻이라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모았다. 11일 여의도 63빌딩 한 음식점에서 열린 대구·경북 출신의원 송년 오찬모임에 김대표가 참석했다.이 자리에서 당직사표를 냈던 김길홍 홍보위원장이 사퇴의사를 철회했다.한 참석자는 『대표 위상이 바로잡혀야 대구·경북선거에 그나마 유리하고 혼자 살려고 하면 다 죽는다』면서 『5·18특별법 처리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박정수 경북도지부위원장은 모임후 『김대표를 중심으로 단합하기로 함으로써 집단탈당과 같은 행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박위원장은 『참석자들이 김대표에게 여권 전체의 대표로서 국가장래와 이익을 중심으로 난국을 타개해 줄것을 부탁했다』면서 『어려운 정국을 조속히 타개하는데 노력하고 국민대화합의 정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이같은 요구는「조건부」일 수 있다.일단 김대표를 중심으로 뭉치되 좋지 않은 지역정서를 돌리는데 노력해 달라는 주문으로 여겨진다. 이제 민정계의 집단행동 움직임은 사그라들었지만 허주의 역할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이날 참석자들의 반응은 허주를 고민스럽게 하는 부분도 있다.이들이 5·18특별법에 동참하기로 밝혔지만 『지역구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많은 참석자들은 이날 모임이 끝난후 『기사에 내이름은 쓰지말라』고 언론에 요구하기도 했다. 김대표는 이날 저녁 자신이 명예이사장인 초·재선모임인 「21세기 정책연구원」의 부부동반 송년모임에도 참석했다.이 자리에서는 미묘한 정치적 얘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화합추진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그럼에도 여권의 민정계 끌어안기,허주의 역할은 아직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 「미완의 혁명」 4·19(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7)

    ◎「3·15마산시위」로 촉발… 한국현대사의 분기점/「혁명」·「의거」·「민중항쟁」 등 시각따라 평가 달라 1960년 4월19일 국민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연히 일어서 일주일만에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비록 1년여 뒤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로 그 꿈은 좌절되지만 「4·19」가 민주주의를 추구해 온 한국 현대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4·19」는 「3·15」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3·15 마산시위」로 직접 촉발됐다.그러나 이와 관련된 학생시위는 2월28일 대구에서 처음 발생했다.학생들이 반정부시위를 벌인 것은 광복이후 처음이었다.28일은 민주당 장면 부통령후보가 대구유세를 가진 날로 일요일이다.집권세력은 학생들의 유세장 참석을 막으려고 일요일인데도 고교생들을 모두 등교시키기로 했다.명목은 학교에 따라 달랐다.경북고교는 학기말시험 일정을 이날로 앞당겼고 대구고교는 전교생이 토끼사냥을 한다고 했다. ○대구서 첫 반정부 시위 학생들은 반발했다.28일 등교한 경북고생 8백여명은 하오 1시5분쯤 교문을 나서 시내 중심가를 돌며 1시간50분동안 시위를 벌였고 대구고·경북여고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이날 학생 2백50여명이 연행되지만 정부는 시위학생 처벌이 민심에 어긋날까 염려해 그날로 모두 석방했다. 학생시위는 3월5일 서울에서 다시 불붙었다.장면후보가 서울운동장에서 정견발표를 마친 뒤 종로4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자 학생이 대부분인 군중 1천여명이 뒤따랐다.퍼레이드를 끝낸 하오 5시10분쯤 시위가 시작됐다.경찰은 경찰봉을 휘두르는 한편 기마경찰을 동원,곧바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어 8일에는 대전에서,10일에는 수원과 충주,12일에는 부산·청주,13일 서울,14일에는 서울·부산·인천·포항에서 학생시위가 벌어지는등 자유당정권에 대한 저항은 전국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됐다.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된 3월15일 무장경찰이 거리거리를 지키는 가운데 동이 텄다.당시 인구 15만 정도인 남녘의 항구도시 마산은 어느곳보다 시끄러운 아침을 맞았다.상오 7시 투표가 시작됐지만 민주당참관인은 대부분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자유당원,경찰,반공청년단등 친정부세력이 야당 참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불만은 시민들 속에서도 터져나왔다.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해 선거를 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자연스레 오동동 민주당사무실로 모여들었다.상오 10시30분 민주당 마산시당은 스스로 「선거포기」를 선언했다.그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몰려 있을 때 반공청년단원 10여명이 차를 타고 몰려와 마구 몽둥이질을 하고는 달아났다.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시위대로 돌변했다.시위대가 남성동파출소 앞에 이르자 소방차에서 물벼락이 날아왔고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이윽고 총성이 터지면서 앞선 학생이 쓰러졌다.하오 8시쯤이었다.시위대는 일단 흩어졌지만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지면서 격분한 시위대와 총을 쏘는 경찰간에 유혈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다음날 마산시내에서는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경찰은 시위를 민주당 마산시당이 사전계획한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공산간첩이 개입됐다는 쪽으로 몰고갔다.이기붕 부통령당선자가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라고 말해 문제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산시위서 10명 희생 하지만 마산사건은 곧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민주당은 물론 국회와 대한변호사협회,심지어 자유당까지 자체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으며 검찰도 수사팀을 현지에 보냈다.경찰이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만들어 숨진 학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든지,북마산파출소 방화범을 조작한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 3월26일 발포·고문 경찰관 5명이 구속됐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잦아들던 4월11일 김주열(당시 17세)군의 시신이 마산시청 뒤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전북 남원 태생인 김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3월15일 밤 김군은 형과 함께 시위행렬에 가담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그 김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다시 전국에 분노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마산에서는 이날 저녁 시위대 3만여명이 시청·파출소·소방서등 공공기관을 습격했다.하오 9시30분쯤 마산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또다시 총을 쏘았다.1·2차 마산시위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다. 전국에서 시위가 잇따른 가운데 4월18일 서울에서 고대생들이 시위에 나섬으로써 「4·19」에 불을 지핀다.18일 낮 교문을 나선 고대생 3천여명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태평로 국회(현 서울시의회)앞까지 진출했다.학생들은 도로에 연좌해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며 농성을 벌였다.시청·광화문등 주변에는 시민·고교생등 1만여명이 모여 이들을 격려했다.고대생들이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4시간 반만에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동대문시장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일당이 이들을 습격했다.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당한 사실이 보도된 4월19일 아침 서울은 분노로 들끓었다.서울대를 비롯한 10여 대학 학생들이 상오중 시위에 들어갔고 고교생들이 뒤를 이었다.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만명을 넘어서 하오1시40분쯤 경무대(현 청와대)앞 저지선에 다다랐다.경찰의 일제 사격에 군중은 잠시 흩어졌지만 수는 더욱불어났다.정부는 바로 계엄을 선포했다. ○이승만 하야로 새 국면 이어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21일 국무위원 일괄 사퇴를 시작으로 23일 임기가 남은 장면부통령이 사임했다.24일에는 이기붕이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25일 하오 3백여 대학교수들이 「이승만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승만은 26일 드디어 하야성명을 냈다.제1공화국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4·19」전기간에 걸쳐 전국에서 1백86명이 숨지고 6천여명이 부상했다. 「4·19」는 혁명인가,의거인가,아니면 민중항쟁인가.발생 35년이 지났지만 「4·19」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명하게 내려지지 않았다.따라서 「4·19」를 부르는 이름도 「4월혁명」「학생의거」「4월민중항쟁」등 다양하다.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한쪽에선 학생들이 주도해 우연히 일어난데다 실제 이룬 것이 없다고 보아 의거라고 해석한다.또 「4·19」가 반독재투쟁을 거쳐 「반외세 민족통일」을 제기했다고 비중을 두는 쪽은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처럼시각이 엇갈리는 까닭은 「4·19」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당대의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결국 「4·19」는 어느 시점까지 미완의 혁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19」엿새 뒤인 25일 하오 서울시내에서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학교수들.이승만이 다음날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미 CIA 「한국정세 보고서」/미 “장면정권 2년이상 못 버틴다” 예측/군사쿠데타 발생가능성엔 회의적/“서방과의 연대는 지속할 것” 전망 우리의 현대사에서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독재를 거부한 국민의지가 열매를 맺는가 싶더니 1년여만에 군사쿠데타로 뒤집혔다.미국은 이 무렵 한국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 가운데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한국 정세에 관한 예상 보고서」를 발굴했다.1960년 11월22일자로 된 이 보고서는 이후 몇년동안 전개될 한국의 정치상황을 내다본 것이다. CIA는 먼저장면정권이 2년이상 버티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국회에서 다소 우위에 있긴 하지만 당면한 숱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리라고 보았다.또 60년 3∼4월에 활동을 개시한 「혁명세력」도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정치적 균형이 새로 정착되기 전에 지도력의 변화와 세력 재배치가 있을 것이며,이러한 변동은 보수정당 우위에서 얼마간 벗어나 사회주의 세력의 신장을 가져오리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는 이어 『서울정부가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불안한 상태가 유지돼 권위적,또는 혁명적 지도자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러나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국 내 상황이 두드러지게 악화돼야만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 들 것』이라고 분석한 뒤 『현재로선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방어와 경제력 유지를 위해 미국등 서방과 연대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어갈 것으로 자신했다.그러면서도 ▲민족주의 감정 대두 ▲통일에 대한 열망 ▲냉전체제 아래 한국의 허약한 위상에 대한 분개심등이 중립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밖에 장면정부가 일본과 적극적으로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으며,특히 『한국 대중의 새롭고 약간은 과민한 민족적 자존심이 이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간시점에서 작성된 미 CIA 보고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결정에 활용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뛰어난 자료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차장 ▲김성호 〃 기자 ▲김영중 조사부 〃
  • “일본의 조선지배 지적통찰 필요”/이리에 아키라(해외논단)

    ◎「망언→사죄 되풀이」 역사이해 부족탓/한·일학자 「일제 공동연구」 합의 환영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8일 일본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망언과 관련,「일본의 조선지배,지적인 천착을」이라는 제목의 이리에 아키라(입강소) 수(미 하버드대)의 글을 실었다.다음은 이 글의 내용이다. 「(영국이)가져다 준 은혜를 들라고 한다면 우선 인도의 전국토에 공통의 정치용어를 보급,법과 질서를 확립,각지를 연결하는 철도망 건설,몇몇 산업의 시동과 보호,고도교육의 발달,관료제와 군대의 설립,관개공사,기근의 억제,또 보건제도 및 난치병 대책을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상은 최근 출판된 존 그렌빌의 「20세기의 세계」(1994년)의 한 귀절이다.제국주의의 종언과 식민지의 해방을 기록한 장에서 영국의 인도지배의 역사를 이같은 점에서 플러스였다고 하고 그 외에 많은 마이너스점(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등 수많은 오점)을 열거하고 있다. 때마침 이 책을 읽는데 일본의 각료가 한반도지배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기자회견에서 실언해 벌써 몇명인가한 것처럼 똑같이 진사,발언취소,그리고 사임했다는 뉴스가 전해져 왔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발언의 내용 및 그 배경에 있는 사실 천착하지 않은채 말만 철회하든가 사죄해서 끝내고 마는 실정이다.이러한 패턴이 계속되는 한 역사의 이해가 이뤄질 수 없다.앞으로도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리라는 것이 눈에 선하다. 「좋은 일도 했다」라는 정서적 발언,그리고 이를 진사로 끝내고 마는 자세,여기에는 사실에 직면해 스스로의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적인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지배가 양국 관계의 역사상 일대 오점으로,오늘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친선을 방해하는 근본요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왜 그런가.구체적으로 일본지배의 어떤 점이 무슨 손해를 한국인에게 가져다준 것인가.앞서 이야기한 영국의 인도지배와 비교해서 일본의 한반도지배는 어떤 점에서 특히 잔인성이 높았던 것인가.영국의 제국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어떤 「은혜」도 갖다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왜 그런가.이러한 천착으로 문제를 따져 나가지 않는 한 일본의 과거에 대해서 표면적인 이해밖에 얻지 못한채 교리문답과 같은 일이 반복되고 말 것이다. 이번 사건의 수습책의 하나로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를 연구하기로 합의한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 말할 수 있다.정치적인 사정과 감정론만으로 과거를 보는 한 한일간의 상호이해도 화해도 있을 수 없다.이해와 화해도 근본적으로는 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최근 출판된 일본의 한반도지배를 취급한 저작에 피터 두스의 「주판과 칼,1895∼1910」이 있다.많은 사료와 균형잡힌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런 연구서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많이 읽히기를 기대한다.그 일부만이라도 정치인들이 읽어 주기를 바란다.
  • 새출발 신한국당 “이상기류”/연일 돌출사건 터져

    ◎특별법 서명불참 번복 등 어수선/김 대표의 「개각발언」도 악재로 신한국당에 출범 이틀 만에 미묘한 이상기류가 흐른다.이영희 여의도연구소장의 경질파동에 이어 5·18 특별법에 대한 민정계 의원 일부의 서명거부,김윤환대표의 개각관련 발언 등으로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다. 김대표는 8일 출근하지 않았다.어깨가 아파 집에서 쉬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몸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이날 병원에서 건강진단도 받았다.하지만 마음이 더 불편한 것 같다.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김대표를 중심으로 일하라」는 재신임을 받고도 그를 압박하는 일들이 계속 불거져 나오기 때문이다. 하주(김대표)는 하루전 「16일 개각설」을 언급했다.그러나 청와대측은 이를 바로 일축했다.김대표측은 즉각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하나의 가능성을 얘기한 것 뿐인데 기자들이 확대 해석했다는 것이다.이날 아침에는 자택 문을 걸어 잠그고 기자들과의 면담을 거절,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주가 불만을 표출한 대상은 언론만은 아닌 인상이다.직접 해명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측이정면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자존심이 깎이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영희 여의도연구소장의 발언도 하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이소장이 『5·6공 세력이 당을 이끌 수 없다』고 그를 직접 겨냥한 데 따른 것이다.그래서 강총장에게 『(이소장은)당의 화합을 해치는 사람으로 경고만으로 안된다』며 경질을 지시했다. 강총장은 이날 상오 당사로 찾아온 이소장을 설득,소장직을 사임케 하는 것으로 파문을 서둘러 진화했다.그러나 김대표의 「분노」강도로 미루어 사태는 그리 간단한 것같지 않다.이소장은 구여권을 공격하는 듯한 글을 여러차례 써왔다.하주는 『이번에는 묵과할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다.그러나 이소장은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나는 총재가 임명한 사람』이라고 반발했다는 후문이다. 김대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구여권 내몰기」 또는 「하주 흔들기」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그 뒤에는 민주계가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다.이소장 발언파문이 계파갈등의 재연조짐으로 비쳐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김대표와강총장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마저 나돈다.며칠전 김대표가 강총장에게 『네가 나를 사정대상이라고 했느냐』고 크게 나무랐다는 소문도 이와 무관치 않다.강총장은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펄쩍 뛰고 있다.손학규대변인도 즉각 부인하는 등 불끄기에 여념이 없다. 5·18특별법에 대한 일부 민정계 인사들의 반발 움직임도 곤혹스러운 일이다.당 지도부는 소속의원 1백11명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제출해 놓고도 이날 또다시 45명으로부터 추가 서명을 받았다.이는 이례적인 일로,마지막 카드인 법안 표결처리를 앞두고 「집안단속」의 뜻도 지닌다. 마지막까지 서명을 거부한 의원들은 10명.강재섭 금진호 김길홍 김상구 권익현 안무혁 정호용 최재욱 허삼수 허화평의원이다.따라서 여권내의 이탈표는 많지 않을 전망이다.하지만 이들이 표결때 「행동」으로 나서고,가세자가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은 형국이다.
  • 일 자민당 「종전 50주 의원연맹」/“침략 미화” 또 망언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자민당 국회의원 1백70여명으로 구성된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쿠노 세스케 전법무장관)은 8일 도쿄 자민당본부에서 회원 32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일본만 침략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를 발표,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이날 견해에서 『엄격한 점령정책과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의해 일본 혼자만이 침략·잔학행위를 행해온 것과 같은 착각을 받고 있으며 아직도 그 세뇌로부터 깨어나지 못한 자가 적지 않다』고 과거 침략사와 이에 대한 반성의 자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망언파동으로 사임한 에토 다카미 전총무청장관이 부회장으로 있으며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자민당총재,히라누마 다케오(평소규부)운수상,모리 요시로(삼희랑)건설상등 현직 각료도 회원으로 가담하고 있는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은 이날 채택한 견해에서 『오는 18일 열리는 정부 주최의 전후 50주년 집회가 앞선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등 일방적인 역사인식을 보이는 장이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 이영희 여의도연 소장 곧 경질

    ◎“5·6공세력 단절” 잇단 주장에 허주 발끈/“당화합위해 경고로는 미흡“ 강경론 대두 신한국당의 외곽 정책연구기관인 「여의도 연구소」의 이영희 소장이 「강경 개혁론」을 지나치게 자주 개진한 「죄」로 금명간 경질될 위기에 처했다.인사문제가 제기된 직접 계기는 이소장이 지난 달 28일 국민대 정치대학원 특강과 오는 14일자 주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5·6공을 주도했던 인물이 당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것.이소장의 발언은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울고싶던 민정계의 뺨을 때린 격」이 돼 김윤환 대표위원도 그대로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특히 김대표가 김영삼 대통령의 만류로 대표직 사임의사를 철회하고 당내화합에 나선 마당에 이소장이 찬물을 끼얹은 모양이 됐던 것이다.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인 강삼재 사무총장이 6일 이소장을 경고조치 했지만 김대표는 『경고 갖고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표는 지난 5일 청와대 주례보고에서 『당의 결속을 해치는 움직임이 있다』고 여의도연구소 문제를제기했고 김대통령도 이 문제 처리를 김대표에게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김대표는 『여의도연구소는 공기관이고 소장은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런식으로 얘기하면 안된다』면서 『그런 생각으로 당의 화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강총장도 『김대표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소장은 국민대 특강 및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민정부가 5·6공과 단절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6·3세대이며 인하대 법정대학장을 지낸 이소장은 민주계 후원으로 여의도연구소장직을 맡아 현 정부의 과거청산작업과 개혁의 정당성,세대교체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왔다.그의 다소 과한 개혁 입장으로 몇차례 당내 파문을 빚기도 했으나 원칙론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시각도 적지않다.
  • 포철,계열사 통합 조직 개편/임원 인사 단행

    ◎해외사업본부 신설… 회장비서실 폐지 포항제철은 6일 효율적인 해외사업을 위해 해외 사업본부를 신설하고 회장·사장 비서실의 폐지와 제철소 중심의 책임경영체제 구축을 골자로 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포철은 이번 개편에서 본사 임원을 출자회사의 비상임 임원으로 선임,연계경영을 강화하고 소장 중심으로 제철소 운영이 이뤄지도록 제철소 내 본부제를 폐지,제철소 조직편제를 9본부 31부에서 29부로 바꿨다. 판매회사인 포스틸과 포스트레이드를 통합,내수와 수출을 일원화하고 아시아지역 해외사업 담당조직을 홍콩현지에 배치하는 한편 동남아수출팀을 싱가포르 현지에 주재토록 했다. 비용절감과 조직경량화 방침에 따라 회장과 사장 비서실을 없애고 기획조정실의 일부 기능을 다른쪽으로 넘기는 등 본사 조직도 대폭 축소했다.출자회사와의 긴밀한 업무조정을 위해 포스코개발 등 8개 출자사에 포철의 본사임원을 비상임 이사 및 경영위원으로 선임,출자회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토록 해 통합경영을 유도키로 했다. 이번 개편으로 포철본사 및 제철소 조직은 16본부 33부에서 6본부 29부 체제로 바뀌게 됐다. 한편 포철은 이날 이춘호 부사장겸 현 경영위원회 위원을 해외사업본부장에 임명하고 이명섭 상무이사를 전무이사로 승진,포스코개발에 부사장 대우로 파견하는 등 본사임원 8명에 대한 인사도 단행했다.
  • 지중해 무역자유 합의때 수완/솔라나 나토 총장 내정자

    ◎「보」 평화군 배치·미­유럽 불화치유 과제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사무총장에 내정된 하비에르 솔라나(53)는 유럽연합(EU)의 스페인 대표직을 노련하게 수행해온 현직 스페인 외무장관. 그는 특히 이번주초 EU 15개국 및 북아프리카·중동 12개국과의 유대증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등 뛰어난 협상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미국과 유럽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솔라나장관은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과 밀접한 업무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일에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그와 만나 「EU­미국간의 보다 강화된 협력 및 관계개선에 대한 선언문」에 서명했다. 솔라나는 지난 70년대와 80년대초 스페인이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을 반대해왔다.그러나 3년전 외무장관이 된뒤 그는 보스니아 사태에 대한 나토의 강력한 자세를 촉구하는 등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 국내정치에서의 그의 비중은 지난 82년 곤잘레스 마르케스가 총리로 취임한 이래 사회당 정부의 요직에 연속적으로 기용된 유일한 정치인으로 곤잘레스 총리의 후계자 반열에 올라있다.그는 특히 10여년간 요직에 있으면서도 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킨 정치부패 추문에 휘말려 들지 않아 뇌물스캔들로 사임한 빌리 클라스 전임 사무총장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는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박사학위를 땄으며 미국의 버지니아대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다 국내로 돌아와 마드리드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솔라나는 지난 77년 마드리드 선거구에서 입후보해 처음으로 의원직에 선출된이래 지금까지 줄곧 당선됐으며 당내에서는 곤잘레스에 이어 최다득표 2위를 차지해 왔다. 정부에는 지난 82년 문화장관으로 입각한 뒤 85년에는 정부대변인을 지냈으며 88년부터 4년여간 교육과학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이제 신임 총장으로서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따라 평화유지 임무를 띤 6만명의 나토군을 배치하고 유럽국가들이 총장감으로 지지했던 네덜란드의 전총리 루드 루버스를 미국이 거부함으로써 빚어졌던 미국과 유럽연합간의 불화를 치유해야하는 과제를 안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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