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사임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예산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10㎞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주부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진도 3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764
  • IOC 서울총회 이모저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는 14일 솔트레이크시티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아온 호주의 필 콜스가 IOC위원직은 유지하되 앞으로 2년 동안 IOC의 각종 위원회에 임명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호주 올림픽조직위원회 업무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고 발표.이번 조치로 콜스는 IOC위원직 사임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나 국제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됐다.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5일 앞둔 이날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시온(스위스)과 토리노(이탈리아)는 막판 세몰이에 총력.두 도시는 서울의 각호텔에 캠프를 차리는 한편 일부는 국내 관련인사와 관련기업까지 동원해 치열한 로비를 벌이기도. 시온은 자국 출신인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한때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마크 호들러 전 국제스키연맹(FIS) 회장이 개최지 선정위원회 위원이어서 유리하다는 평.반면 토리노는 사마란치 우산 아래 있는라틴계와 아시아·아프리카세의 지지 조짐에 고무된 분위기. 한편 일부에서는 ‘제3의 도시’가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14일 IOC 서울총회 본부인 신라호텔 입구에서 총회개최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려 사무국 직원들이 긴장.전국건설노조연맹과 전국해고투쟁사업장연석회의 소속 회원 50여명은 ‘한국노동자 다 죽는데 IOC총회가 웬말이냐’는 문구가 든 피켓과 깃발을 들고 경찰과 2시간여 동안 대치. 한 사무국 직원은 “총회가 IOC주최로 열려 국고보조가 없는데도 외화를 낭비한다는 오해를 사고 있다”고 하소연. 박해옥기자 hop@
  • 국민회의 ‘불모지’ 경남서 후원회

    국민회의가 11일‘불모지’ 경남에서 후원회를 열었다.대구시지부(지난해 11월),경북도지부(지난 4월),부산시지부(지난달)후원회 등에 이은 행사다.영남지역 후원회를 일단락하는 의미가 있다. 국민회의가 경남도지부 후원회를 영남권 마지막으로 택한 데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이 지역은 단 한명의 지역구 의원도 얻지 못할 정도로 국민회의의 기반이 취약하다.도지부장 자리는 정영모 산청지구당 위원장의 사임 이후 5개월간 공석이었다.지난 3월에야 노무현(盧武鉉)부총재가 취임,조직재건에나섰다.노부총재(김해),김태랑(金太郞)의원(전국구·창녕),차정인변호사(마산) 등 총선출마 후보자도 나서고 있다.이제야 후원회를 열 만한 여력이 생긴 것이다. 국민회의는 경남지역의 ‘착근(着根)’작업을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해나가기로 했다.‘옷로비 의혹’과 파업유도 발언 파문 등 악재가 겹친데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페인트 계란 사건’까지 터져 아직까지 민심이 좋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세(勢)’과시의 장이 되기 쉬운 후원회도 그래서 요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국민회의는 이날 행사에서 지역상공인700여명으로부터 5억원 이상을 모금,나름대로‘가능성’을 확인했다.창원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열린 후원회에는 김영배(金令培)대행과 노부총재,한화갑(韓和甲)총재특보단장,장영철(張永喆)정책위의장 등 당지도부가 대거 참석했다.노부총재는 “경남도민이 여당과의 대화통로가 없어 답답해하고 있다”며 “정치적 접근보다 당과 정부로 통하는 지역주민의 입이 되겠다”고 밝혔다.
  • LG그룹 데이콤지분 본격조사

    공정거래위원회는 LG그룹이 거래회사나 총수 친인척 소유의 회사에 은밀히자금을 지원,데이콤의 지분을 위장관리해왔다는 참여연대의 신고와 관련,다음주부터 본격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김병일(金炳日) 공정위 사무처장은 10일 “참여연대가 신고를 해옴에 따라위장계열사로 지목된 30여개 회사에 지난 8일 기초자료 제출을 요구해 놓았다”면서 “다음주부터 이들이 위장계열사인 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자금출처 조사가 시작된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참여연대의 요구처럼 계좌추적권 발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김처장은 “계좌추적권은 부당내부거래 혐의가 짙을경우에만 발동하는 것”이라며 “설령 이들이 위장계열사라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부당지원을 받았다는 혐의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계좌추적권을 발동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장계열사임이 밝혀지고 내부지원 혐의가 상당부분 인정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참여연대는 지난 4일 LG그룹이 그동안 친인척이나 관계회사를 통해 20% 이상의 데이콤 지분을 위장관리해왔다며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촉구한 바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 수입肉類 다이옥신 파문-벨기에 “오염원 규명능력 없다”

    - 벨기에 “오염원 규명능력 없다” 벨기에는 다이옥신 파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진상조사특위 설치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하고 있다.그러나 벨기에 내에는 다이옥신 분석기관이 한 곳밖에없는데다 그나마 시간이 많이 걸려 진상파악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장 뤼크 데하네 총리는 6일 “다이옥신이 벨기에 음식물 ‘사슬’에 들어온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의회 내에 조사특별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오는 일요일로 예정된 총선 운동도 뒤로 미룬 데하네 총리는 “다이옥신에오염된 사료를 공급받은 양계장에서 생산된 닭과 계란 등 두 가지만 다이옥신에 오염됐다”고 밝히고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현재 벨기에에는 한 곳의 다이옥신 분석기관이 있기는 하지만 한 차례 분석에 최소 4만 벨기에 프랑(120만원)의 비용이 드는데다 분석기간도 최대 3개월이나 걸려 정확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더욱이 분석대상도 우유에 한정되어 있다. 뤼크 반덴 보쉬 보건장관은 “동물사료 성분의 오염을 검사할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인정하고 있다. 오염된 사료를 공급받은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를 정확히 분류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먼저 진행되어야 하는데도 벨기에 정부는 자신이 없어 이를 미루고 있다. 벨기에 정부는 그간의 자체 조사결과를 토대로 지난 1일 닭고기와 계란을수거토록 한 데 이어 6일에는 소시지와 쇠고기 등의 수거와 함께 돼지 닭 등 가축 도살과 유통도 8일까지 전면 금지했다. 정부는 지난 5일 인터넷을 통해 베르케스트사의 동물성 지방이 벨기에 사료 회사 8곳과 프랑스 및 네덜란드 회사 각각 1곳 등 10개사에 공급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또한 오염된 사료는 4개 씨암탉 양계장과 6개 식용닭 양계장에 공급된 것으로 밝혀졌다. 벨기에 농무무는 지난 3월19일 동물성 지방 생산업체인 베르케스트의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네덜란드 시험기관에 의뢰, 다이옥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얻었으나 제때에 대처하지 못해 사태가 국제적으로 확산됐다.이에 따라 보건·농무장관이 사임했다. 박희준기자 pnb@
  • FRB 리블린부의장 돌연사임 발표

    워싱턴 연합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리스 리블린 부의장(68)이 내달 16일자로 사임한다고 FRB가 3일 발표했다. 지난 96년 6월부터 FRB 이사로 일해온 리블린 부의장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출한 사직원을 통해 “수도 워싱턴의 재건을 위한 재정보조위원회 의장직에 충실하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사임을 희망한다”고밝혔다. 리블린 부의장은 지난 94-96년에는 백악관 예산실장으로 일했으며 당초 2000년 6월24일까지 FRB 부의장 2010년 1월31일까지 FRB 이사를 각각 맡게 돼있었다. 금리인상 반대론자인 리블린 부의장의 사임으로 금명간 FRB의 금리인상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관측통들은 분석했다.
  • 유럽‘발암물질 닭고기’파동

    벨기에 농장에서 써온 닭 사료가 발암물질에 오염됐다는 ‘치킨 스캔들’로 유럽 전체가 출렁거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자국산 닭고기와 달걀을 전량 회수,폐기키로 한 벨기에 정부는 1일 마요네즈,케이크,파스타 등 낙농제품에까지 판매금지 조치를 확대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벨기에산 닭고기 와 달걀 회수에 돌입한 가운데 러시아 및그리스 당국도 황급히 이의 판금·수거에 들어갔다. 96년 영국 ‘광우병 소’에 이어 유럽최대 ‘식량파동’으로 꼽히는 이번사건은 벨기에 사료업체 베르케르트의 닭 등 가금용 사료에서 허용치 100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면서 터져나왔다.다이옥신은 소량만으로도 인체에 치명적인 발암물질로서 체내에서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닭의 섭취분만큼 인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벨기에 양계·가금 농장의 4분의1이 이 사료를 써온것은 물론,네델란드,프랑스,독일 등으로 사료가 수출돼온 사실이 지난주 공개되자 유럽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럽연합(EU)은 즉각 동물영양위원회를 소집,벨기에 닭고기 및 낙농제품 전체에 대해 2일 공식 수출금지 조치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EU 집행위원회는벨기에가 닭고기 오염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며 벨기에 정부의 유럽법정 소환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또 지난 2월 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쥐고도석달간 이를 은폐한 문제로 벨기에 농무장관과 보건장관이 1일 사임했다. 파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파만파 번질 태세다.13일의 벨기에 총선에서현 집권 좌파연합이 이 스캔들로 물러나고 야당인 자유당이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으리라는 전망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 [외언내언] 볼쇼이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의 인기는 팽이처럼 돌아가는 필루에트,한 다리로 서는 ‘쉬라 포엥트’의 모든 기교가 빈틈없이 완벽한데다 드라마틱한 작풍과 민족적인 색채 등이 볼거리인 디베르티스망이 눈부시기 때문이다. 지난 88올림픽때 볼쇼이 발레단이 처음 서울에 오자 발레팬들은 한동안 들떴으나 그것은 정단체가 아닌 타단체에 속한 15명의 혼성팀에 불과했다. 음악도 오케스트라의 생음악이 아니었고 공연은 단순한 맛보기 무대였으나 볼쇼이 발레단 내한자체만으로 우리는 세계와 맞닿은 듯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대한매일신보사는 오는 11월,창간 95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볼쇼이 발레단 230여명 전원을 초청하는 대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볼쇼이 발레단 전원이한국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러시아·몽골방문 성과에 대한 수행기자단 간담회에서 볼쇼이 발레단의 서울공연은 “러시아와 한국문화의 교류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볼쇼이’를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오랜 전통과 각고의 훈련으로정제된 발레리나·발레리노들을 얼마든지 배출해왔고 동작 하나하나를 살아움직이게 만드는 예술성 높은 음악 등은 ‘세계 최고’로 꼽는데 손색이 있을 수 없다. ‘볼쇼이 발레(Bolshoi Ballet)’란 본래 러시아어로 ‘큰 발레단’이란 뜻이다. 1780년 페트로프스키극장의 발레단으로 발족,2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도의 발레기교 만큼이나 영욕으로얼룩져 있다. 제정 러시아의 황제들과 옛소련 지도자들의 지배와 후원을 받았으며 소련붕괴 이후에는 정부 보조금이 끊기는 바람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고 세계의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는 얻었지만 공연의 기회는 잃을 것 같다’는 우려의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러시아정부의 ‘볼쇼이 되살리기’ 정책으로 지난 30여년간 발레단을 카리스마로 지배해왔던 유리 그리고로비치감독을 사임시키는가 하면 지난 96년에는 긴 침체에서 벗어나 비야체슬라프고르디에프 새 감독의 ‘마지막 탱고’로 대변신의 면모를 보였다. 지금도 볼쇼이 발레단만의 분방한 기교와 완벽주의는 ‘러시아문화의 자존심’을 상징하는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우스 페티바,알렉산더 고르스키 등 천재적 안무가들의 불후의 명작인 ‘백조의 호수’에서 ‘지젤’로 이어지는 수많은 주옥편은 세계의 발레광(狂)들을 경도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오는 가을(11월 2·3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올려질 화려한 볼쇼이 발레단 갈라공연은 과연 세계 최정상의 예술과 맞닿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한·러 문화교류 활성화와 함께 양국간 ‘문화협력의좋은 상징’이 되기를 기원한다.
  • 정동제일교회는 항일운동의 산실

    우리 근대사에서 교회는 기독교전파 이외에도 서구 근대문명 도입과 일제하애국계몽·항일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특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외교 중심가였던 정동(貞洞)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양대 선구세력이었던 기독교세력과 민족세력을 규합,근대 한국 지도자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지난달 30일 정동제일교회(담임 조영준 목사)는 제1회 아펜젤러 학술강좌를열고 정동제일교회 관계자들이 3·1의거와 상해 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운동에적극 가담한 사실에 대한 학술평가모임을 개최했다. 조영준 담임목사는 주제설교를 통해 이 교회의 최초 한인 담임목사를 역임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목사의 충군·애국사상을 소개하면서 “탁사 선생은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로 토착신학을 통해 한국 감리교의 기초를 닦은 주인공으로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이 땅에 기독교 문화의꽃을 피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배재학당 교사시절 선교사들과 교분을 쌓은 인연으로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 탁사는 이 교회 부담임목사로재직중아펜젤러가 순직하자 이 교회의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탁사는 특히 국권상실기에 교회내 엡윗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조약’반대운동을전개하였으며 협성회,독립협회,황성기독청년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또 애국강연과 언론활동으로 동포들의 애국혼을 일깨우기도 했으며 1922년 은퇴 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주로 강의하였다.이밖에 신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천주교와 기독교를 최초로 비교분석한 논문 ‘예수·천주 양교변론(兩敎辨論)’ 등을 저술하였다. 탁사에 이어 제5대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玄楯·1880∼1968)목사,6대 담임목사를 지낸 손정도(孫貞道·1872∼1931)목사 등이 모두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민족지사.현목사는 3·1의거 당시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에 밀파되어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다.임정 수립후 외무·내무차장을 역임한 현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에 추대돼 외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3·1의거 참가후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애국지사.2부 발표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현희(李炫熙) 성신여대 교수는 ‘손정도 목사와 상해임시정부’라는 논문을 통해 “손목사는평소 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주땅에 대한민국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이교수는 1918년 손목사가 신병을 이유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것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현목사,의친왕 이강공(李堈公)과 함께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고 밝혔다.최근 발굴된 ‘현순 자사(玄楯 自史)’에 따르면 당시 손목사는 입정(立丁),현목사는 석정(石丁),최창식(崔昌植)은 운정(雲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이강공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각자 역할분담을위해 사용했다는 것.즉 立丁(손정도)은 ‘丁’(고종의 밀명)을 立(세운다)한다는 뜻으로 그 바탕은 石丁(현순)이,심부름은 雲丁(최창식)의 몫이었다는것이 이교수의 해독법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 페리 건의…“美 對北협상 창구 단일화”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포괄적으로 감독,조정할 특사 신설을 제안할 방침이라고 요미우리(讀賣)가 미 정부 당국자를 인용,31일 보도했다. 미국에 북한 특사가 신설되면 분야별로 실무급 차원으로 병행해 진행되어온 북·미교섭이 사실상 격상돼 일원화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페리는 특사 신설을 6월에 정리할 이른바 ‘페리 보고서’에 담아 제안할예정이다. 특사 후보와 관련,미 행정부와 의회는 페리 조정관이 계속 대북 업무를 맡도록 희망하고 있으나 그가 보고서 제출 후 사임을 바라고 있어 그를 보좌해온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자문역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페리 조정관에 걸맞은 인물을 기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어 샘 넌전 상원군사위원장,리 해밀턴 전 하원의원도 거명되고 있다. 특사가 임명되더라도 미국이 북한과 진행시켜온 핵 개발동결 합의 이행에관한 협의,미사일 협의 등 개별협의는 특사의 감독하에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신문은 덧붙였다.
  • [제2공화국과 張勉](26) 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中)

    초대 주미대사로서 큰 공을 세운 장면(張勉)은 1951년 1월28일 귀국해 2월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다.이 무렵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국회는 상극이라할 만큼 알력이 심해 장면 총리는 양쪽을 융화·조정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아울러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학살 사건’ 해결에 앞장섰고,그해 11월에는 파리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장면이 이승만 아래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그렇지만 정치적 위상은 한층 높아져,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를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50년 6월19일 개원한 2대 국회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됐다.자유당 창당 전이라 공인된 여당이 없었고 친(親)이승만 계열 의원은 대한국민당 24명을 비롯해 57명에 불과했다.반면 야당의원은 27명,무소속은 의원 정수의 60%인 126명에 달했다. 2대 국회는 개원 엿새 만에 6·25를 맞아 사망·납치·행방불명된 의원이 35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의원 대다수가 이승만의 ‘서울 사수(死守)’ 발언을 믿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데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이 이미두드러져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고 이승만의 임기는 52년 7월23일까지였다.국회에서 재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이승만은 51년 말두 가지 방안을 추진한다.하나는 여당을 만드는 것이고,또 하나는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여당 창당작업은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눠졌다.무소속 의원 중심의 원내자유당과 5개 사회단체를 뼈대로 한 원외자유당이 별도의 정당으로 등록했다.이가운데 원내자유당은 이승만의 뜻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은밀히추진하면서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기로 야당과 합의한다. 당시 원내자유당을 이끈 오위영(吳緯泳)은 회고록에서 “일부 정치인들이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실정에서 재야의원들은 대부분강력한 야당을 조직해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적인 지도자를 추대하자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승만정부가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찬성 19,반대 14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했다.이어 개헌 정족수에 맞춰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4월 이 무렵 장면도 총리를 사임했다. 국회는 6월2일 제2대 대통령을 뽑기로 계획을 세웠다.그 날이 되면 장면은새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 것이다.이승만이 경남과 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25일 계엄군은 버스로 등원하는의원들을 연행했다.그리고는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이때 개정한 헌법이 ‘발췌개헌’이다. 부산정치파동후 장면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고문으로 들어앉아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그러다 55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오위영을 비롯해 김영선(金永善)·홍익표(洪翼杓)·이상철(李相喆) 등 신파의 핵심세력이 52년 그를 대통령으로추대하려던 원내자유당계였다. 장면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됐다.국민의 투표로 검증받은 권력서열 2위가 된 것이다.더구나 이승만이 81세의 고령이어서 유고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부통령이란 위치는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부통령 재직 4년은 장면이 회고록에서 ‘죄없는 죄인’이라고 표현할 만큼 험난한 세월이었다.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느라 상식 밖의 행동을 예사로 했다.가령 56년 8월15일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내외 귀빈을 전부 소개하면서 정작 그 자리의 공동 주인공인 장면을 무시했다.남산 국회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다른 초청객의 자리는 준비하고도 부통령 좌석은 마련하지 않아 장면이 그냥 돌아갈 정도였다. 이 시기 장면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그에대한 암살 기도와 외국 원수와의 만남을 방해한 사례다. 부통령 취임 한달여 만인 9월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金相鵬)이 쏜 총에왼손을 맞았다.이 저격사건의 배후는 김종원(金宗元)치안국장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훗날 장면정부 아래서 속개된 재판에서도 관련자는 김상붕,그에게 총을 준비해 준 이덕신(李德信·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준 최훈(崔勳) 등 세 사람으로 한정됐다.장면은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고 딘 디엠 베트남대통령이 공식 방한한 날은 57년 9월18일이었다.디엠의맏형은 가톨릭 사이공교구 대주교였고 본인도 독실한 신자였다.게다가 장면과는 미국에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디엠은 장면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승만정권은 그의 방한 사실조차 장면에게 알리지 않았다.디엠은 개인적으로 노기남(盧基南)대주교에게 전화해 일요일 첫 미사때 명동성당에 들르겠다며 장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장면과 디엠은 결국 주교관 2층 노대주교 방에서 몰래 만나 우정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외국원수에 대한 의전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 이승만의 폭거는 4월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됐다. 장면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던 그 무렵을 이철승(李哲承)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민주 염원의 상징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회상하면서 “장박사가 사실은 남달리 외유내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장면은 총리·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자 민심은 당연히 장면에게로쏠리게 됐다. 이용원기자 ywyi@**前비서관 李聖模·李泓烈씨가 본 장면 장면(張勉)에게는 10여년 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한 비서관이 두 사람 있다. 이제는 70대가 된 이성모(李聖模·72)씨와 이홍렬(李泓烈·77·미국 거주)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장면이 주미대사로 활동한 50년대 초부터 66년 타계하기까지 때로는 함께,때로는 엇갈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정계의 동료보다도 장면의 모든 것을 더 가깝게,더 오랫동안 지켜본 증인들이다.그들이 밝힌,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토막을 소개한다. 이성모씨는 1951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장총리를 만난다.경찰관으로 경호업무를 맡은 그는 인품에 감화해 곧 경찰복을 벗고 비서로 들어간다.그가 직접 본 부산 피난 시절 장면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다. “장총리는 꼭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모친(黃누시아)이 등 찢어진 삼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흉하니 갈아입으라고 말씀드렸다.그랬더니 모친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네가 이 나라 총리 맞는가. 지금 피난민이 곳곳에 우글거리는데 잘먹고 편히 있는 내 걱정할 땐가.’장총리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나 빌었다.모친 지시대로 범일동 고아원에 가아이들을 돌본 다음에야 용서받았다.장총리 부모도 매우 훌륭한 인격자였고,그는 부모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이홍렬씨는 50년 4월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부영사 때 장면 주미대사를 알게 된다.51년 총리로 내정된 장면의 부름으로 함께 귀국해 총리실 파견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비서관이 된다. “장총리를 10여년 모셨는데 화내는 모습을 딱 한번보았다.60년 12월이었다.청와대로 전화하라고 해서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비서실장인 이재항(李載沆)씨를 바꿔주었다.장총리가 통화를 몇분 하더니 화난 표정에 목소리가높아졌다.대통령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재항씨가 자꾸 핑계를 대며 안바꿔주는 모양이었다.전화를 끊은 장총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로군’하고혼잣말을 했다.그것이 그분이 할 줄 아는 가장 험한 욕이었다.” 이홍렬씨는 장면이 돈 문제에도 담백했다고 밝혔다. “51년 총리 시절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게돼 있었다.떠나기 열흘 전쯤 한국은행 총재가 나를 불렀다.‘외교활동을 하려면 가외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면서 돈가방을 주었다.얼핏 봐도 100달러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일단 거절하고 돌아와 말했더니 ‘잘했다’는 한마디뿐 더는 말이 없었다.돈을 챙기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 쿠데타후 명륜동자택으로 돌아가서는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다.” 이성모·이홍렬 두 비서관은 군사정권 아래서 고된 삶을 살았다.이성모씨는 장면 집안일을 돌보는한편 정치에도 뛰어들었다.민주당 재건에 참여,섭외부장·조사부장을 역임했고 경북 영주·봉화 지구당위원장으로서 6·7대 총선에 출마하지만 거듭 실패했다.이후 사업을 하면서 장면 추모모임인 ‘운석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홍렬씨도 5·16쿠데타후 장면을 곁에서 모시다가 그의 타계후 정치에는일절 발을 끊고 생활인으로 돌아갔다.지난 88년 도미해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그는 본지에 ‘제2공화국과 장면’ 연재가 시작되자 일부러 두 차례 귀국해 증언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용
  • [인터뷰] 제31회 신사임당상 수상 힐튼호텔 정희자회장

    힐튼호텔 정희자회장(59·대우그룹 김우중회장 부인,선재미술관·아트선재센터 관장)을 외국인 직원들은 ‘타이거우먼’,‘터프우먼’이라고 부른다. 공격적인 경영스타일과 사소한 빈틈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즉각적인 일처리방식 때문이다.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 할 수 없이 살가운 여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가 또한 정회장이다.정·재계 인사들과 골프라운딩 도중 마실 물을 떠다주고 공을 주워 주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면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인지 몰랐다면서 모두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선정 제31회 신사임당상(像) 수상을 계기로 이뤄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특유의 선굵으면서도 솔직 다감한 태도로 시원시원한 답변을 해 나갔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직접 예술을 해 온 사람도 아니고 500년전 여성상에 부합된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하지만 알고보니 사임당은 아내와 어머니로서,그리고 예술가로서 내면의 열기에 꽉 차 있던 당찬 사람이었어요.한번은 실수로 남의 치마에 술을 쏟자 즉석에서 치마폭에 포도그림을 그려 주면서 이를 팔아 옷값을 하도록 했다는데 이를 보면 상업적 감각도 뛰어났던것 같습니다” 결국 21세기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고의 사임당상을 그려보면서 아내와 어머니,기업을 통한 예술활동의 지원자로서 이번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다. “시상식때 나는 잘 못 들었는데 김회장이 ‘부군의 인사’를 하면서 울먹였다고 해요.셋방살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30년동안 내조자로서 묵묵히일해온 데 대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해 온 가슴속의 빚을 이 상이 대신해줬다면서….내 생각 보다는 요즘의 여러가지 감회가 뒤얽혀 그랬겠지만 어쨌든 우리부부는 외조와 내조를 많이 나눴습니다” 정회장이 살림을 하다 호텔 경영에 뛰어든 건 1주일이면 4∼5회씩 집에서김회장 손님 치르는 솜씨를 보고 주위에서 권유를 했기 때문이다.미술관 운영은 김회장의 출장을 따라다니며 현대미술을 눈여겨 보고 컬렉션하면서 구상한 것이므로 김회장의 외조를 받은 셈이라고 했다. 정회장은 호텔 경영도 야무지게 했다.16년 사이 힐튼호텔을 대우의 노른자위 기업으로 키워놓았고 해외에도 진출,하노이와 옌벤에도 대우호텔을 세웠다.요즘도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않는 그는 새벽 3시30분이면 일어나 호텔 음식계획에서부터 실내 장식 변경까지 하루 할 일을 메모하는데 그 분량이A4용지 두 장 씩이다. 호텔 일은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문화사업의 재원이 되기에 더욱 열심히 한다.선재미술관및 아트선재센터관장,예술의전당 오페라단 후원회장,각종 무용제 영화제 극단 유시어터 후원 등 문화사업과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흔히 돈이 많아 하는 줄 알지만 그건 전혀 틀린 것이다.“육신이 부서져라일해 얻은 수익금으로 사회환원을 하는 것인데 막무가내로 요구해 올 땐 서운하다”고 그는 말한다. 호텔과 미술관 운영에서 그는 크게 두 가지 자부심을 갖고 있다.첫째는 지방문화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선재미술관은 지방 최초의 현대미술관입니다.반대도 많았지만 경주에 현대미술관을 지으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되고 늘 새로운 멋을 풍기는 관광도시가 되겠다 생각해 밀어 붙였어요” 그 생각은 주효해 선재미술관은 그의 고향이기도 한 경주의 문화명소가 됐고 근래 4∼5년 사이 광주,부산등 지방 미술관 설립에 불을 당겼다. 둘째는 호텔건물에 미술 진품을 걸어 국제 호텔업계의 인테리어개념을 바꿔놓은 것이다.경주힐튼호텔 등엔 그가 좋아하는 콜롬비아의 페르난도 보텔로를 비롯해서 세계적인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다.“값비싼 걸작들을 관리 시설도 제대로 안된 호텔건물에 거는 데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도 많습니다.하지만 호텔처럼 미술품 보여주기 좋은 장소가 어디 있습니까.요즘은 외국 호텔들도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손주들과 쉬고 싶어도 나이를 초월해 일하는 여성의 모델이 돼 달라는 주위의 기대 때문에 은퇴도 못했다”는 그는 호텔사업이 대우의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심각한 위기감에 빠져있다.“이 문제를 김회장에게 직접 물어 본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문화사업을 못하게 될까봐 그게 더 안타깝다”는 심정은 숨기지 않는다. 모계 3대를 잇는 명문호텔 경영과 문화 후원자에의 꿈을 접고 따뜻한남쪽지역에 로즈가든을 가꾸겠다는 노후 계획을 앞당겨 실천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있는 정회장.그의 IMF위기는 허약한 토대의 국내 문화예술계에는 한층 어두운 그림자로 되돌아 올 공산이 크다.
  • 金太郞특보 29년만에 금배지

    국민회의 김태랑(金太郞)총재특보가 야당 입문 29년만에 금배지를 달았다. 전국구 예비후보 17번으로 천용택(千容宅)국가정보원장의 사임 덕택에 행운을 잡았다. 국립수산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특보는 정계입문 초기 잠깐 공화당에 몸을 담았다.공화당의 전국 기획유세요원 모집에 응시,부산·경남대표로 뽑혔기때문이다.그러나 지난 71년 대통령선거 때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는 줄곧 야당 외길만을 걸어왔다.80년 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장남 김홍일(金弘一)의원의 구속,이희호(李姬鎬)여사의 가택연금 등 동교동의 암흑기에박정훈(朴正勳)의원,문희상(文喜相국정원) 기조실장과 함께 김대통령 곁을지켰다.경남 창녕 출신의 김특보는 국민회의의 불모지인 영남에서 조직관리를 맡아왔다.97년 대선 때는 영남 조직책 선정에 기여했고 6·4지방선거때는 부산·경남 선대본부장으로 나섰다. 권노갑(權魯甲)고문과는 승용차를 물려받을 정도로 각별한 관계다.김특보는 “개혁과 지역감정 해소에 노력하겠다”며 창녕에서 출마할 뜻을 내비쳤다.
  • [오늘의 눈] 루빈과 李揆成

    올 5월 미국과 한국은 며칠 사이로 각각 재무(재경)장관을 바꿨다.관심을끄는 것은 자리를 떠난 두 사람 다 역대 가장 ‘빛나는’ 재무장관 가운데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지난 12일 사임한 로버트 루빈(61) 전 미 재무장관은 98개월째 이어지는 미국경제 장기호황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95년 그가 취임할 때 4,000포인트를 가리켰던 다우지수는 11,000대로 치솟았고,미국은 40년 만에 흑자 예산시대를 열었으며 실업률은 4.3%까지 내려갔다. 24일 물러난 이규성(李揆成·60) 전 재정경제부장관은 ‘환란(換亂)’의 수렁에 빠진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1년3개월 전 취임 당시 달러당 1,500원대였던 환율은 1,190원대로 떨어졌고,20%를 웃돌던 시중금리(회사채수익률)도 8%대로 끌어내렸다.570포인트대에서 허덕이던 주가는 한때 800선까지 뛰어올랐다. 두 사람은 적당한 때를 골라 스스로 명예롭게 물러나는 뒷모습도 닮았다.모두 튀지 않는(shy) 스타일이어서 개성이 강한 경제팀을 원만하게 리드했다는 평가도 받는다.루빈이 2,000여만달러의 월스트리트쪽 고액연봉을 포기하면서 국사(國事)를 택했다면 이 전장관은 환란수습에 따른 과중한 업무로 건강을 상했다. 그러나 이같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물러나면서 받는 대접에 있어서는 사뭇 차이가 있는 것 같다.루빈은 퇴임시 지나치다싶을 만큼 극찬을 받으며 떠났다.그에 비하면 이 전장관에 대한 배웅은 좀 초라해 보인다.이같은 예우가‘영웅 만들기’에 인색한 우리 사회 특유의 정서 때문은 아닌지 하는 상념에 잠긴다. 사실 미국정부와 여론이 그렇게 ‘띄웠던’ 루빈도 알고보면 과대포장됐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미국의 호황이 루빈 취임 훨씬 전인 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점만 보더라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이 전장관이 재임 중 ‘과(過)’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공(功)’이 그것보다 클 때는 칭송을 아끼지 않는 문화를 가꾸었으면한다.이제 우리도 ‘스타 장관’‘스타 대통령’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김 상 연 경제과학팀 기자
  • “윤봉길의사 체포사진 가짜 아니다”-노스차이나∼’지서 확인

    매헌 윤봉길(尹奉吉)의사가 거사후 체포되는 모습을 담은 일본신문 사진이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반박하는 당시 신문기사 자료제시와 유족·전문가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연합뉴스는 중국 베이징 특파원발로 ‘윤봉길의사 거사후 체포사진 가짜 의혹’을 첫보도 했다. 이어 이를 반박하는 유족 발언이 일부 신문에 보도되자 약 한달후인 23일 거듭 가짜임을 주장하는 기사를 내보냈다.이 주장은 상하이 주재 한국총영사관 강효백(姜孝伯) 영사의 제보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강 영사는 윤의사의거 이틀 뒤인 1932년 5월 1일자 오사카아사히심붕(大阪朝日新聞)의 ‘호외’ 1면 하단에 실린,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인물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윤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강 영사는 거사당시 윤의사는 25세였으나 사진속의 인물은 35∼50세로 보이며, 거사직후 일본군의 폭행으로 정신을 잃고 진흙탕에 쓰러졌던 사람치고는 옷차림이 너무 말쑥한데다 모자까지 든 점 등을 들어 이 사람은 당시현장에서 체포된 한인 8명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또한 23일 기사에는 상하이 의대 정형외과 전문가팀 등의 ‘골상학적 비교분석’ 결과를 근거자료로 추가했다. 그러나 유족및 학계에 따르면 문제의 ‘호외’ 2면에 실린 사진과 이보다 하루 앞선 4월 30일자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지 게재 사진은 모두 동일하며 바로 윤의사로 확인된다.‘노스 차이나…’지는 거사 직후 윤의사가 끌려가는 사진과 함께 “이날 한국인으로 보이는 회색 코트를 입은 한 청년이체포되었는데 이름은 ‘Im Fung Kee’,나이는 25세,불란서 조계(租界)에 있는 한 세탁소의 점원인 그를 군중들이 린치를 하자 일본 헌병이 그를 군중들로부터 구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또 ‘호외’ 2면에 실린 ‘끌려가는’ 사람의 모습은 헝클어진 머리에 우측뺨에 피를 흘리고 있어 ‘노스 차이나…’에 실린 기사내용·사진과 일치한다.결국 석 장의 사진의 주인공은 모두 동일인으로 그가 윤의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최서면 한국연구원 원장은 “당시 사진전송 기술이 좋지않아 오해의소지가있지만 윤의사가 분명하다”며 “이봉창 의사도 체포당시 사진은 실제보다훨씬 나이가 더 들어보인다”고 밝혔다. 또 윤의사의 동생 윤남의(84)씨도 “측면사진이긴 하나 형님의 모습이 분명하다”며 “한인 8명이 체포된 것은 윤의사 피체후의 일”이라고 반박했다.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퍼거슨 뉴질랜드 대사

    로이 퍼거슨 뉴질랜드 대사는 22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뉴질랜드 두나라간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을 강화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했다.지난 달29일 신임장을 받은 퍼거슨 대사는 “최근 발효된 양국의 워킹 홀리데이 비자협정 등은 민간교류활성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신임 대사로서 포부를 밝히신다면. 한국은 사실 첫 부임지입니다.뉴질랜드와 오래 전부터 성숙된 외교관계를맺고 있는 한국에서 첫 대사임무를 수행하게돼 무척 기쁩니다.한국전쟁 이후 양국은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등에서긴밀한 협력을 해오고 있습니다.양국 이해 증진을 위한 인적 교류가 더욱 왕성해지도록 힘쓰겠습니다. 우호관계 발전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있을까요. 지난 달 체결된 워킹 홀리데이 비자협정은 상당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아직 아이디어 수준이긴 하나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시티와 자매결연 도시인 송파구간 문화그룹 교환을 할 수도 있겠고 한국전쟁 50주년인 내년엔 뉴질랜드 문화 단체의 교류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럴드 맥기 전임 대사께서는 지하철 타기를 권유하는 공익광고에도 출연,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비슷한 활동을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맥기 대사 부부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광고에 출연하신 것으로 압니다.물론 지지합니다.그러나 제게 그같은 공익 광고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뉴질랜드는 올해 APEC 순번 의장국으로 9월 열릴 APEC정상회담 준비에 분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PEC은 뉴질랜드가 주최하는 행사 중 최대 규모의 국제행사입니다.정부는 APEC 태스크 포스를 구성,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뉴질랜드 제니 쉬플리 총리의 정상회담도 열린텐데요. 먼저 뉴질랜드가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한반도 상황이 논의될 것 같습니다.뉴질랜드는 한국 김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을 지지합니다.또 한·뉴질랜드 관계 발전도 회담의 포커스가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는 한국 학생들이 선호하는 유학지의 하나입니다.한국 학생들을유치하기 위한 장학금 제도 등 혜택은 없을까요. 뉴질랜드는 정부는 특정 국가 학생들에게,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혜택은 부여하지 않고 있지요.질높은 교육과 쾌적한 생활 환경,특히 미국 달러에 비해 싼 뉴질랜드 달러의 환율이 충분한 인세티브가 아닐까 합니다. 워킹홀리데이 교환 프로그램 협정이 지난 달 체결됐습니다.어떻게 발전될것이라고 보십니까. 아직은 걸음마 단계입니다.지난 10일 접수마감을 했는데 호응이 아주 좋았습니다.인원은 200명에 한정돼 있지만 이 제도 실시가 갖는 의미는 무한하다고 봅니다.뉴질랜드 학생들의 한국행 신청현황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최근 70여개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등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만큼 점점 더 많은 뉴질랜드 젊은이들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난 95년 이후 뉴질랜드 이민법 강화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의 이민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이민법이 변화될 여지는 없는지요. 지난해 이민법이 다시 완화됐습니다.이민자격영어 시험 ‘IELTS’때 내야하는 예치금 제도도 폐지됐고 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이민 후 어학연수를 받을것을 증명하는 서류만 갖추면 됩니다. 뉴질랜드는 정부 개혁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공무원들의 반발도 만만찮았을텐데요. 뉴질랜드의 정부개혁을 설명하는 것은 뿌듯한 일입니다.공공부문 개혁에 들어간 84년 당시는 경제위기 와중이었습니다.물론 공무원들의 감축으로 반발이 거셌지만 정부부처뿐 아니라 산업분야 등 다른 부문들도 함께 가혹한 구조개혁의 희생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그러나결국 ‘고효율의 작은 정부’는 국민들의 세금 감축,고품질의 공공 서비스로 돌아가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印 소니아 간디 大權행진 제동

    올 9월 총선거에서 인도의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던 소니아 간디의 대권 행진에 제동이 걸렸다. 소니아 여사 자신이 당수로 있는 국민회의당 내부에서 ‘태생’을 둘러싼자격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외국인이 어떻게 인도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는 당내 반대파의공격에 소니아는 17일 당수직 사임발표란 강수를 두었다. 당 지도부도 반대파에 사과 발표 등 압력을 넣으면서 사임결정 번복을 종용하고 있다.“소니아가 사임발표로 반대파의 당내 고립을 유도하며 위기를 넘기려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니아는 라지브 간디 전총리의 미망인이자 인디라 간디 전총리의 며느리. 이탈리아인으로 68년 라지브와 결혼후 84년 인도 국적을 얻었다. 남편과 시어머니 모두 총리를 지냈고 인디라가 84년,라지브가 91년 각각 암살당하자 그녀는 인도근대사를 주물러온 네루-간디가문의 후계자로 자연스레 부상했다.지난해 2월 국민회의당에 입당,대중적인 지지속에서 무난하게 제1야당을 이끌어왔다는 평을 얻었다. 그녀가 유례없이 외국태생으로 최고 정치지도자 자리에 오를수 있을지,올가을 선택을 앞두고 인도정가는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이스라엘 정권교체-야당 바락총리 당선

    ?施뭍瀯痍? 외신종합?? 17일 실시된 이스라엘 총리 선거에서 에후드 바락 노동당 당수가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에 압승을 거둬 새 총리로 당선됐다. 18일 개표 결과 바락 후보는 56.1%를 득표했으며 네타냐후 총리는 43.8%에그쳤다. 현 정부에 비해 온건 노선인 바락 당수는 당선이 확실시된 직후 수만명의당선축하 인파를 향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67년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역대정부의 전통적인 입장을 되풀이했다.그러나 이에앞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평화관계를 확고히 할 것이며 이스라엘 내부의 분열을 치유할 것”을 약속하고 “1년내에 레바논 남부에 주둔중인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네타냐후 총리는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패배를 인정하고 리쿠드당 당수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총리 선거와 함께 실시된 120명의 크네세트(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바락을공동후보로 내세운 ‘하나의 이스라엘’은 51석,네타냐후 총리의 리쿠드당연합은 53석을 얻은 것으로 잠정집계되고 있다.그러나 바락 후보의 노동당이 27석 가량을 확보한 데 비해 네타냐후의 리쿠드당은 32석에서 19석 정도로크게 감소했다. 바락 총리당선자는 45일 내에 10여 석의 중도파 정당과 제휴해 연정을 구성할 전망이다.국정통합을 위해 리쿠드당에도 연정 제휴를 제안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 ‘수하르토 가족 재산 150억달러’ 타임誌 최신호서 폭로

    홍콩 교도 연합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과 그 자녀 6명이 보유한재산은 현금,주식,부동산,기업자산,보석 및 예술품 등을 합해 150억달러 어치에 달한다고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가 밝혔다. 타임은 17일 발매의 최신호에서 수하르토가 통치기간중 본인과 가족 명의로 모은 재산이 730억달러가 넘지만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와 관리 소홀로 많이 축내고 현재 이 정도만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중 가장 덩치 큰 하나는 수하르토가 대통령직 사임 후 스위스 은행에서‘좀 더 안전한’ 오스트리아 은행으로 옮긴 현금 90억 달러.또 수하르토 가족이 관리하고 있는 부동산만도 360만㏊로 벨기에보다 더 넓은 면적이라고타임은 전했다. 이밖에 인도네시아 564개 기업 지분과 미국,우즈베키스탄,네덜란드,나이지리아 기업에 대한 투자지분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5월 대통령직 사임 당시 수하르토의 월급은 1,764달러에 불과했다. 타임의 이 보도는 취재진이 지난 4개월간 11개국에서 수백명을 인터뷰해 심층 취재한 결과를 기초로 한 것이다.인도네시아 정부도 지난해 수하르토 사임이후 32년 집권기간동안 그가 부패,공모,정실주의 수법으로 불법축적한 재산을 추적해왔으나 총 규모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
  • [오늘의 눈] 루빈의 사임 이유

    클린턴의 경제담당 보좌관으로,재무장관으로 미국 경제를 6년여 동안 움직여왔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60)이 12일 마침내 물러갔다. 월가를 비롯한 미국내 유수기업인들이 그의 사임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한말은 위대한 금융가·경제학자가 만인이 기뻐하는 풍요만을 남긴 채 역사의뒤안길로 떠나갔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 9년 연속 평균 4.5% 성장,69년 이래 30년 만에 재정흑자 700억달러란 기록만으로도 그는 미국사에 길이 남을 흔적을 남겼다. 그런 그는 95년 멕시코 금융위기와 97년 아시아 경제위기로 자칫 세계경제가 어려워질 뻔했던 위기를 몸소 체득한 놀라운 실물경제감각으로 이겨내도록 도와줌으로써 미국 이외의 나라들로부터도 칭송받고 있다. ‘잔인한 경제원칙론자’‘치밀한 계산론자’란 수식어도 있었지만 세계경제의 연관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세계경제 구원자’가 그에 대한 마지막 수식어가 됐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했던 그의 업무와는 달리 사임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가 전부다.성장한 두 아들을 내보내고 혼자 집을 지키는 부인 주디스와 떨어져 워싱턴호텔방에서 보낸 6년 시간이 고달프고 미안해서였는지 그는 지난해 4월부터사임을 요구해 왔었다. 어느 장관치고 한가로운 사람이 있으랴만 그는 그 한가로움을 위해 혼신을다해 일했던 공직을 그만뒀다. 혹자는 월가 출신으로 현금 보유액만 수백만 달러인 그가 이제 명예도 얻었으니 인기가 최고일 때 물러가겠다고 한 것 역시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빈처럼 문자 그대로 ‘일신상의 이유’로 물러가는 장관이 전세계에서 과연 몇명이나 될까를 고려해보면 그런 비난은 오히려 쑥스러워진다. 우리는 어느 나라 각료든 물러갈 땐 ‘일신상의 이유’를 들먹거리지만 뒤를 들여다보면 책임 사유가 있는 경우를 허다하게 봐왔다.이 때문에 루빈의사임 이면에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는 이가 많았다. 루빈의 사임을 보면서 ‘일신상의 이유’가 장관능력이 없다거나 혹은 부조리를 뿌리치지 못해서란 의미가 아니라 ‘할 일을 다해서’란 간단한 본래의의미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철호[워싱턴 특파원]hay@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