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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내 마음의 안중근 外

    ◆ 내 마음의 안중근(사이토 타이켄 지음,이송은 옮김,집사재 펴냄) =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뤼순감옥에 수감됐을 때 간수인 지바 토시치와의 우정에 초점을 맞춰 썼다.안 의사의 인간적 면모에 감화한 지바는 안 의사에게서 받은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미야자기현 와카야나기초의 조동종 대림사에 모시는 등 안 의사를 평생 공양했다. 8000원. ◆ 달라이 라마의 마음공부(달라이 라마 지음,이현주 옮김,해냄 펴냄) = 지난 99년 미국 티베트 센터와 기어재단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의 강연 내용을 묶었다. 그는 끊임없는 마음 수련으로 공(空)과 같은 존재의 본질을 통찰할 때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8500원. ◆ 논리트레이닝(노야 시게키 지음,서혜영 옮김,일빛 펴냄) = 기호논리학의 규칙들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즉 자연언어로 응용하는 실천적 훈련법을 소개.말과 글을,접속관계와 지시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한다.1만원. ◆ 심리학자 예수(마크 베이커 지음,이창식 옮김,세종서적 펴냄) = 프로이트는종교를 인간이 무력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기대는 목발 정도로 인식했다.프로이트의 이러한 견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심리학과 종교간 논쟁의 출발점이다.일부 심리학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하나의 컬트로 본다.마찬가지로 일부 종교인들은 같은 이유에서 심리학을 컬트로 본다.이 책은 심리학과 종교의 화해를 모색한다.1만원.
  • 책꽂이/ 논술·면접 신문이 보약이다

    ◇논술·면접 신문이 보약이다(이태종 지음,김영사 펴냄)= 신문 정보를 활용한 주제중심의 통합학습 프로그램.폭넓은 사고를 통해 각종 정보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꾸몄다.저자는 중앙일보 NIE(신문활용교육)담당기자.전2권 각권 7900원. ◇거꾸로 서 있는 미술관(박정욱 지음,예담 펴냄)= 서구 모더니티의 종착점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현대 미술작가들의 예술사적 모험을 담았다.뉴욕화파를 이끌며 추상표현주의 평면예술을 선보인 윌렘 드 쿠닝,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데이비드 호크니,아르테 포베라 미술의 계보를 이어가는 아니시카푸르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세계를 다뤘다.9800원. ◇역사,그 지식의 즐거움(이상현 지음,일송미디어 펴냄)=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쓰는 목적이 “소멸될지 모르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기억의 전당에 안치시켜 두는 데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아테네 장군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자 암피폴리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스파르타군에 참패한 투키디데스는 그 패배를 변명하느라 역사를 썼다.이 책은 한 마디로 이처럼 상이한 역사관에 관한 에세이다.8700원. ◇나를 디자인 합니다(김정식 지음,아카데미북 펴냄)= 사노라면 막연한 그리움에 가슴 저릴 때가 있다.직업군인인 저자는 그것을 ‘원형적 그리움’이라 부른다.‘말 내음’‘삶의 빛깔’‘오미불(五味佛)’‘역락문(亦樂門)’등 60여편의 수필에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생명에 대한 예찬이 담겼다.8500원. ◇중국회화사(제임스 캐힐 지음,조선미 옮김,열화당 펴냄)= 유럽 회화를 제외하고는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회화는 세계 회화사에서 한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앙드레 말로는 저서 ‘상상미술관’에서 그이유를 이렇게 지적했다.“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에게 중국회화의 원본 빛 컬러 복제판은 충분히 제공될 수 없었으며,유럽에 영향을 끼친 ‘세기말의 일본취미(Japanism)’가 중국미술에 대한 온당한 이해를 방해했다.” 이책은 중국 회화의 미적 특질을 분명히 하고 제자리를 찾아준다.2000원. ◇세계문화기행-유럽편(임정의 지음,창해 펴냄)= 건축물을 통해유럽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핀 에세이.‘오스트리아의 베르사유’로 불리는 쇤브룬궁전,데 스틸 운동의 산실인 네덜란드의 슈뢰더 하우스,‘제2의 노아의 방주’로 불리는 영국의 아크 빌딩,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이 평생을 바쳐 설계한 노르웨이의 프로그네르 공원 등을 다룬다.1만 5000원. ◇내 마음의 안중근(사이토 타이켄 지음,이송은 옮김,집사재 펴냄)=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뤼순감옥에 수감됐을 때 간수인 치바 토시치와 나눈 우정에 초점을 맞췄다.안 의사의 인간적 면모에 감화한 치바는 안 의사에게서 받은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을 미야자기현 와카야나기초의 조동종 대림사에 모시는 등 안 의사를 한평생 공경했다.저자는 아사히신문 기자출신의 대림사 주지.8000원.
  • 뇌졸중 예방백신 美서 개발

    [워싱턴 UPI 연합] 혈관의 염증을 차단,뇌졸중 위험을 감소시키는 백신이 개발돼 동물실험에서 효과가 확인됐다. 미국 국립신경장애·뇌졸중연구소 뇌졸중 연구실장 존 홀렌벡 박사는 의학전문지 ‘뇌졸중’9월호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E-셀렉틴이란 단백질이 들어 있는 코 스프레이 형태의 혈관염증 차단 백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홀렌벡 박사는 E-셀렉틴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혈관내피 세포에 염증을 일으키지만 이를 쥐에 투여한 결과 림프세포를 발동시키고 결국은 림프세포가 이 단백질을 공격,혈관염증을 차단하고 나아가서는 뇌졸중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홀렌벡 박사는 혈압이 높아 뇌졸중 위험이 커지도록 유전조작한 쥐 113마리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엔 10일간 하루 걸러 E-셀렉틴 스프레이를 투여하는 치료법을 3주 간격으로 1년 동안 계속하고 나머지 그룹엔 다른 두 가지 치료법을 시행했다.그 결과 E-셀렉틴 그룹은 비교그룹에 비해 뇌혈관이 막혀 발생하는 허혈성 뇌졸중 발생률이 비교그룹에 비해 16분의1에그친 것으로 나타났다.E-셀렉틴 그룹 쥐들은 테스트 결과 사이토킨이라는 물질이 생성돼 혈관의 염증을 막는 것으로 밝혀졌다.
  • 이런 테마가 日 베스트셀러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어’‘영어’‘흉내내기’‘영화 원작’. 2002년 상반기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책들의 4대 키워드이다.불경기의 일본,책에서 멀어지고 있는 일본인들을 끌어당긴 이들 키워드는 베스트셀러를 낳고 출판 불황의 파도를 넘게 한 효자 노릇을 했다. ◇일본어- 이상 현상일 만큼 일본어 붐은 뜨겁다.기노쿠니야를 비롯,웬만한 서점 어디에든 ‘일본어’ 특설 코너가 있다.그만큼 일본어를 주제로 한 책이 잘 팔린다는 얘기다. ‘소리를 내서 읽고 싶은 일본어’가 불을 당겼다.사이토 다카시(齊藤孝)가 지난해 펴냈다.100만부를 넘는 스테디셀러 조짐을 보이자 ‘일본어’를 테마로 한 책들이 쏟아졌다. “왜 지금 일본어 붐인가.”하는 질문에는 여러 풀이가 있다. 이 중에서도 일본에 긍지를 갖지 못하는 불황의 시대에 전통과 문화에 대한 향수,자기정체성의 확인이 일본어 붐의 배경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영어회화책-전통적으로 ‘팔리는 책’이다.일본인들이 얼마나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가를 반증하기도한다.상반기에도 ‘술술 책 1권’이라든지 ‘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영어책’ 등이 베스트셀러 10위에 들었다. ‘술술 책 1권’은 인기 남성보컬 그룹 ‘SMAP’의 한 멤버가 맡고 있는 TV 프로그램의 영어회화 코너와 연동시킨 책이다. ◇편승본 -한 장르의 책이 팔리면 제목이나 장정,디자인을 비슷하게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흉내내기 출판’이 먹혔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었다면’(3위)이 히트를 치자 ‘일본마을 100명의 친구들’‘일본이 100명의 마을이었다면’‘세계가 만일 100년의 이야기였다면’등의 책이 나왔다.‘치즈는 어디로 사라졌는가’가 360만부의 대성공을 거두자 ‘버터는 어디로 녹았나’가 나왔다. ◇영화원작본- 영화화 직전 원작의 문고판 출판,인기 작품의 영화화도 베스트셀러의 키워드이다. 100만부를 넘은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宮倍みゆき)의 ‘모방범’은대표적인 사례로 3단계 물결을 탔다.책이 나오자 1단계 파도로 고정독자들이 15만부를 샀다.2단계로는 지난해 연말 이곳저곳의 미스터리 작품 순위 1위에오르면서 판매에 가속도가 붙더니 영화화 결정이 나고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결국 100만부를 돌파했다.
  • 김대중 대통령 全·盧씨에 전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최근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건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대통령은 지난 28일 전 전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해 달라.”면서 “일본에 잘 다녀오시라.”고 말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29일 전했다.이에 전 전대통령은 오는 31일 월드컵 개막식 참석을 흔쾌히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이어 전 전대통령은 최근 타계한 사이토 에이시로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전 회장의 문상을 위해 다음달 3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다. 김 대통령은 또 신병 치료차 이날 오전 미국으로 출국한 노 전대통령에게도 지난 27일 전화를 걸어 쾌유를 기원하는 뜻을 전했다.인천공항에는 조순용(趙淳容) 정무수석을 보내 환송토록 했다. 김 대통령은 그러나 외국방문 계획이 없는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들의 월드컵 개막식 참석과 관련,“월드컵 조직위 사무총장이 전직 대통령들을 직접 찾아뵙고 초청장을 드린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6)러와 淸,日 3국 국경분쟁

    한국과 러시아,중국 3국의 두만강쪽 국경은 1860년 당시러시아와 청 두 나라가 맺은 베이징조약에 의해 일방적으로 획정지어졌다.당시 청의 속국으로 여겨졌던 조선은 협정대상에서 아예 배제됐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은 유럽국가인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1861년 8월1일 청,러 양국이 동부국경 최남단을 뜻하는 국경표지인 토자비(土字碑·러시아측은 이 비석을 세운 러시아군 장교의 이름 첫자를 따 T자비라고 불렀다.)를 두만강 연안에 세울 때까지 조선은 이같은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베이징조약의 영토조항인 제1조에 의해 러시아는 서북쪽으로는 아무르강,동쪽으로는 타타르스키해협과 동해를,남서쪽으로는 두만강하류에 이르는 이른바 연해주땅을 통째로 집어삼켰다.이 지역에는 원나라때부터 여진으로 불려왔던 말갈족과 고구려인,돌궐인,위구르인,거란인 등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古土)였다.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1872년 러시아 극동함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극동노령의 최동남단이며 조선국경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 극동함대의 기항이 됐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한·러관계에 엄청난 파장을 예고한다. 러시아군이 마적단과 청국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대한제국의 북방 국경선 인접지까지 접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선은 세계 각국의 지도(독일판,영국판,대한제국판)에서 동북방면으로는 두만강,서북방면으로는 혜산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그러므로 두만강과 혜산산맥을 중립지대로 보는 의견이 있다.러시아군이 부지불식간에 대한제국 북방 국경선을 침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한·청 국경선이 정확히 어디인지 밝혀주길 바란다.(1901년 4월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이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보낸 통신문) 외무부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 경계는 항상 두만강으로 인정되어 왔다.현재 한인 스스로도 간도(間島)를 청국영토로 인정하고 있다.1894년까지 효력이있던 조·청조약에서도 두만강 좌안지대에서 혜산산맥까지는 중립지대로 인정되어 이곳에 조·청 양국인의 거주가 금지되었다.청·일전쟁이후 한인들이 이곳 두만강 좌안에 무단 이주,점거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국영토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1901년 10월4일 외무장관이 육군장관에게 보낸 회신) 이 회신은 조선과 청국의 국경선은 두만강이라는 러시아측의 공식입장을 담고 있다.러시아측 해석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해당사국의 해석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역사적으로 보면 간도에는 오래전부터 한인이 거주했던 사실은 확실하지만 한인들의두만강 도강을 금한 법을 제정한 1870년까지 간도지방에는극소수의 한인이 살았다.1870년 이후 한인 농민들의 이주가 시작됐고 얼마 뒤 산동지방에서 청국인들이 건너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청 국경은 두만강이며 간도는 청국의 땅이었을까.여기에서 우리는 두만강쪽 한·청 국경과 관련된 케케묵은 논란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 926년 발해의 멸망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 상태였던 2만1000㎢의 더넓은 간도들판(길림성 연변자치주지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1710년(숙종36년) 청국은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한인에 의한 청국인 살해사건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압록강의 서북은 중국,동남은 조선땅이다.그리고 토문강 서남은 조선,동북은 중국의 영토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1712년 양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가까운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후의 쟁점은 토문강(土們江)의 실체에 관한 문제에 모아졌다.토문강이 도문강(圖們江)이라고도 불린 두만강의 별칭이냐,아니면 전혀 별개의 강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맞섰다.대한제국이 개국선포(1897년)와 함께 청의 연호를 버리면서 청과 조선의 관계는 끊어졌다.이때부터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류(別流)의 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러시아도 남만주를 차지한 1895년 이전에는 간도를 한국땅으로 여기고 있었다.실제 러시아측 자료에도 ‘토문강은 압록강에서 송화강으로 흐르는 지류’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앗아간 일본은 간도에 임시파출소를 설치한 뒤 ‘간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한국의 영토’라고 인정했으나 1909년 태도를 돌변,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해버렸다.청·일협약의 결과 일본은 남만주철도부설권을얻는 대신 청에 간도의 소유권을 넘겼다. 청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유권을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조선은 일본의 만주진출이라는정치적 협상에 다시 한번 희생됐다.러시아와 청,일 3국은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의 나라 국경을 마음대로 긋고 바꾼 것이다. 대한제국과 만주 남방 국경선의 획정에 관해 러시아에서 지도를 다시 제작한다면 한·청 국경선의 중요성에 비춰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러시아 지도에는 국경선이 혜산산맥을 따라 표시돼 있다.실제적으로 한·청 두 나라의 경계는1710년에 형성됐었다.두만강하구에서 백두산까지이다.1897년 대한제국이 청국에서 독립하면서 두만강 좌안을 소유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한·청 국경선으로 다시 이전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말았다.(1901년 3월11일 서울주재군사무관스트렐비스키 대령이 참모본부에 올린 보고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파블로프도 1901년 “압록강과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한인과 청국인에 관해 합의한 한·청국경조약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 좌안에 거주하는 한인은 세금을 청국정부에 냈고 우안에 사는 청국인은 세금을 대한제국에 냈다.”라고 외무부에 보고하고 있다.실제 우안에 사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던 점으로 미뤄 이때부터 청의 간도에 대한 기득권이 인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 두만강 국경선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일본은 두만강 좌안(간도)은 이전에 조선영토였으며 현재 청국 영토라고 하더라도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두만강좌·우안 모두를 법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그런데 국방부는 두만강이 오래전부터 한·청 국경선이라는 통지를 1904년 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서 받은 바 있다.(1905년 10월6일 극동제1군 총사령관 리네비치가 참모총장에게 보낸 보고서) 또 1908년 3월 서울 총영사관에서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청국과 대한제국이 간도소유문제로 분쟁을 빚고 있다.일본군 사이토 대좌의 정보에 따르면 간도에는 한인촌 529곳이 형성돼 있으며 이곳에 7만2076명이 살고 있다.청국인은 209곳에 2만2983명이 살고 있다.한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간도의 영토는 넓이가 50마일,길이가 75마일이다.이곳은 형식적으로 청국영토에 속해 있으며 토지의 절반이상을 청국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은 임대를 한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청국,그리고 압록강변 및 간도로 이주하도록 부추기고 있다.일본은 이 지역 4곳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일본 국민으로서의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킨다.…일본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한 청국이 조선인들을추방하기에 이르렀다.일본측 통계에 의하면 1910년 한해동안 약 10만명의 조선인이 이주해왔고 전체 이주자는 20만명을 넘는다.청국이 조선인을 추방하려하자 일본은 조선에 사는 4만명의 화교를 추방하겠다고 맞대응했다.현재 이 문제로 청·일 양국이 협상중이다.(1910년 12월16일 소모프 총영사의 외무부 비밀 지급전보) 청,일두나라의 국경분쟁을 지켜보는 러시아측의 이해관계는 가능하면 간도가 청국영토로 남아있기를 희망했다.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귀속된다면 일본이 간도를 전략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더욱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가 점령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국경방위의 약화를 우려한 것이다. 두만강 국경선 분쟁은 당초 조선과 청국의 직접 분쟁에서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한 일본과 만주지역을 차지한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변질됐다.일본은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로의 접근로를확보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는 청국의 손을 들어줘 일본과직접 맞대지 않는 완충지대를 유지하려했다.정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 문제는 결국 1985년 구 소련의 외무장관 그로미코와 북한 김영남 외무상간에 조·소국경조약 체결로 일단락됐다. 100년전 살길을 찾아 두만강 건너편 간도땅으로 건너갔던한인들이 지금은 중국동포가 되어 한국으로 되찾아 오고 있지만 당시 러,청,일 3국의 이해득실에 의해 타율적으로 상실했던 ‘토문강 서남쪽’간도땅을 되찾을 기약은 없다. 노주석기자 joo@ ■용암포 개항사건의 진실 러,일,청 3국이 두만강변에서 끊임없이 국경분쟁을 벌인까닭이 간도(間島)의 소유권에 대한 다툼이었다면 1903년러시아가 압록강변의 벌목 목재 집산지 용암포를 독점점유하면서 불거진 용암포개항 사건은 압록강유역에 대한 3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또 다른 국경분쟁이었다. 용암포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압록강 산림이권 독점에 대한 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견제였지만 실제로는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의 압록강 국경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산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강했다.러시아는 한때 용암포를 기점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한·만국경1300㎞에 만리장성과 견줄 만한 방책선을 두른 뒤 요새를구축하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여순에서 개최된 특별회의의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대한제국 정부의 압록강 개항승낙이 일본과의 개전사유는 될 수 없다.한국과 일본정부에 각각 압록강 개항은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인 행위임을 경고해야 한다.개항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의 항의는 공격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된다.(1903년 7월18일 여순에서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이 외무부에보낸 통신문) 러시아 극동총독부가 옮겨와 있던 여순에서 열린 이 특별회의는 용암포문제에 대한 러시아측의 종합적인 입장정리란 측면에서 중요하다.용암포의 개항을 최대한 저지시키되 전쟁으로까지 발전되는 극단의 경우는 피하겠다는 것이다.이회의에는 쿠로파트킨 육군장관,레사르 북경주재 공사,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알렉세예프 극동총독,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회 회장,플란손 극동총독 외교담당관 등 러시아극동정책의 수뇌부가 총출동했다. 당시 압록강 산림벌목이권을 놓고 러시아 내부는 두갈래로 나눠져 있었다.비테 재무장관,쿠로파트킨 육군장관,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은 극동지역의 러시아군 전력의 열세를 들어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쪽이었다.하지만 베조브라조프,아바자 해군제독,플레베 내무장관,알렉세예프 극동총독,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 등은 양보는 양보를 낳아 결국 만주지역에서의 영향력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며 적극 정책을 주장했다.니콜라이2세도 이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개전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용암포사건은 영국 극동함대의 거문도점령 사건(1885년)과 함께 한반도에 열강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계적인 사건이었다.용암포의 개항은 곧 만주에 대한 개항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러시아는용암포를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으나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대한제국정부의 일방적인 한·러조약 및 이권취소로 인해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대리 퐁트네 자작의 서신에 의하면 고종은 서울주재 영국과 일본대표들로부터 조약의 폐기선언을 하도록 3개월동안 강요받았다.고종이 반대하면 폐위시키거나 시해할 수도 있는 강압적 상황이었다.고종은 강요에 못이겨 선언한 조약파기 칙령은 기회가 오는 대로 철회하겠다는 말을 러시아에 전해 달라고 말했다.(1904년 상하이주재부영사 클레이메노프가 외무부에보낸 비밀전문) 결과적으로 용암포사건은 일본과의 전쟁은 피하되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영향력은 유지하려 한 러시아의 유약한 전략이 노출된 사건이었으며 1년후 발발한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그동안 개척한 모든 성과는 물거품이 되었다. 노주석기자
  • ‘中경찰 日영사관 진입’양국대응

    [도쿄 황성기특파원·김수정기자]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22일 밤 탈북자 5명의 한국행과 관련,중국 경찰의 일본 총영사관 진입 문제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중국 정부와 협의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중국측이 총영사관 진입은 일본측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다는 입장에서 물러설 가능성이 거의 없어 사건 진상 규명이 유야무야된 채 두 나라간 교섭은 재발 방지책에 초점이 옮겨질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탈북자 5명이 한국에 도착한 후 이들에 대한 신원 확인 등 사정 청취 작업을 벌일 방침이라고 언론들은 전했다.데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 주한 일본 대사는이와 관련,23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한 탈북자 5명을 공항 내에서 잠시 면담했다고 NHK는 보도했다.데라다 대사의 탈북자 사정 청취는 일본의 요청을 한국 정부가 받아들여 이루어졌으며,데라다 대사는 5명의 건강 상태와 망명 경위 등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NHK는 덧붙였다. 앞서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의 사이토 영사부장은 마닐라로 향하는 중국민항기에 탈북자 5명과 함께 탑승,기내에서 이들에게 접근을 시도했으나 중국 공안당국자들에게 제지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탈북자 5명의 망명을 지원해온 한국의 비정부기구(NGO) 대표 문국환씨는 22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탈북자들은 미국 망명을 희망했으며 한국은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marry01@
  • 면역반응 조절 ‘NKT세포’ 첫 규명

    인체의 면역관련 T세포의 하나인 ‘NKT세포’의 면역반응 조절기능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처음으로 규명됐다. 고려대 생명공학원 박세호(38) 교수팀은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진과 공동으로 사람 몸 속의 면역반응을 조절하는 것으로 추정되어온 ‘NKT세포’의 면역반응 조절기능을 동물실험을 통해 규명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박 교수팀은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프린스턴대 연구팀은미 국립암센터와 국립보건원(NIH)로부터 연구비를 각각 지원받아 이뤄진 것으로 세계적 과학저널인 ‘네이처 면역학지(Nature Immunology)’ 1월호에 실렸다. 네이처지는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NKT 세포에 항원이작용하는 기능이 일부 밝혀짐으로써 앞으로 NKT 세포의 활성조절을 통한 면역치료요법의 개발에 한 발짝 다가서는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는 NKT세포가 면역조절물질인 사이토카인을 대량으로 신속하게 분비하기 때문에 면역반응 조절기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됐을 뿐,이 세포가 어떤 항원을 인식하고 그 항원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지 못해 NKT세포를 이용한 면역반응 조절에 한계가 있었다. 유상덕기자 youni@
  • 고이즈미 인사지시 거부 항명파동

    [도쿄 황성기특파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총리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놓고 갈등을 빚어온 다나카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이 외무성 고위급에 대한 총리의인사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다나카 외상에 대한 경질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2일 오전 다나카 외상에게 전화를 걸어최근 외무성 기밀비 유용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주미 대사,사이토 구니히코(齊藤邦彦) 국제협력사업단 총재,하야시 사다유키(林貞行) 주영 대사,가와시마 유타카(川島裕) 현 사무차관 등 4명을 경질,이날중인사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다나카 외상은 “외상으로 취임할 때 고이즈미 총리는 미·일관계에 역점을 두라고 지시했다”면서 “10월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있는 만큼 그때까지주미 대사는 유임시키는 게 바람직하다”며 총리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NHK 방송과 교도통신은 ‘항명파동’을일으켰던 다나카 외상이 결국 야나이 주미대사 등 4명의전·현직 외무성 관리를 경질키로 했다고 밝혔다.관측통들은 정부와 여당내에서 외상 경질론이 급속히 확산되자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고 있다.
  • 日젊은층 ‘한국바람’뜨겁다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으로 한국과 일본 관계가 초냉각기에들어섰으나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에서의 한국 붐은 식을 줄 모른다.젊은 세대들이 주도하는 이런 한국 붐은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가깝고도 가까운’ 미래의 기초를 다지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한국 붐이 가라 앉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기보다는 안정돼 가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겁니다” 한국에 정통한 일본 언론사의 한 기자(38)는 몇년 전부터일기 시작한 한국 열기가 식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진단했다.오히려 저변을 넓혀가는 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쉬리’로 절정에 달했던 뜨거운 바람은 재워졌으나한국을 알려고 하고 좋아하는 일본인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한·일 공동개최의 2002년 월드컵 대회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여행이든,김치나 떡볶이든,한국 음악이나 영화든 무엇이 됐든 한국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가지각색이다. 일본 전국 48곳에 지점을 두고 있는 최대의 레코드 판매점인 ‘타워 레코드’ 시부야(澁谷) 지점은 현재 1,000여종의한국 CD를직수입,판매하고 있다. 단일 국가로는 미국 다음으로 한국 코너가 크다.태사자,HOT 같은 10∼20대 취향에서부터 ‘이박사 시리즈’ 등 트롯트댄스까지 갖가지 취향의 한국 음악이 팔리고 있다.재일 한국인이나 한국 유학생도 있지만 수요자의 대다수는 일본인이다.한국에 발매되기 무섭게 바로 이곳 코너에 깔린다.‘K(Korea) 팝’으로 불리는 한국 음악 정보는 일본인 매니어들이 귀신처럼 잘 알고 있다. 이곳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동대문시장(東大門市場)’.한국 의류를 비행기로 실어내다 파는 판매점이다. 한국 여행을 통해 동대문 시장,밀리오레 등에 다녀 온 적이 있는 일본 젊은 층을 겨냥한 이 곳에는 2∼3평 크기의 의류,구두,가방,액세서리,가발,안경 등 50여개 점포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5층짜리 의류 백화점 중 3∼4층을 통째로 일본인 업자가 빌려 한국인 수입업자에게 재임대하는 방식인 이곳에서는 일본 20대 초반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잡고 새로운 트렌드에 맞춘 의류 등을 한국에서 전량 제작해 팔고 있다.한국식으로손님들이 원하면 조금씩 깍아주기도 한다. 지난 해 9월 문을 연 ‘동대문 시장’의 성공에 힘입어 올들어 요코하마(橫濱),후쿠오카(福岡) 등 전국 6곳에 지점을개설했다.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마케트 프로덕션’의 곤도 게이스케(近藤圭介) 기획개발부장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힘들었지만 언론에 많이 보도되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쉬리’에는 못미치지만 ‘JSA(공동경비구역’의 인기도꾸준하다. 지난 5월 26일 개봉한 이후 전국 100여개 극장에서 상영중인 JSA는 관람객 75만을 돌파했다.영화 흥행 순위에서도 두달 가까이 연속 10위 안에 들고 있다. 합기도나 가라테가 석권하고 있는 일본에서 ‘태권도 배우기’도 조용하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 88년 설립된 일본 태권도 연맹의 사이토 가즈히로(齊藤和廣)는 “선수를 포함해 태권도를 즐기는 사람은 3만명에 이른다”면서 “불과 몇년 전에 비교하면 두 배나 늘어난 숫자”라고 자랑했다. 태권도 도장에서는 초보자들에게 동작과 함께 ‘차렷,경례’나 ‘하나,둘,셋’ 등을 한글 발음으로 가르친다. 김치는 물론이고 한국 음식이 건강이나 피부미용에도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퍼마켓에는 한국 음식이 쫙 깔려 있다. 고추가루와 참기름으로 버무린 콩,시금치,무우 등의 나물을 비롯,누구나 손쉽게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반쯤 조리된 낚지볶음,파전,빈대떡도 팔고 있다.최근 출시된 매운 맛의 ’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이란 컵라면도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다.유흥가인 신주쿠(新宿)나 아카사카(赤坂) 등에는닭갈비,감자탕이 새롭게 도입돼 일본인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한국 알리기’도 일본인의 손으로 활발히이뤄지고 있다. 우연한 여행에서 풍부한 표정을 지닌 사람들,활기 넘치는‘한국’을 발견하고는 ‘매니어’가 됐다는 오쿠하라 스구루(奧原選·25·회사원·후쿠오카 거주)씨는 “일본인에는한국사람 같은 자신이나 정열,따뜻함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97년 인터넷 사이트(www.try-net.or.jp/~suu/)를 개설,한국과 한국인을 알리고 일본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있다. 지난 5월 16일자 뉴스위크 일본어판은 ‘한국이부럽다’는 5쪽짜리 특집기사를 통해 일본의 한국 붐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한국 문화의 새로운 물결도,새로운 ‘뭔가’를 찾는 일본 젊은이들의 욕구를 채우는 것의 하나일지도 모른다.일본인은 지금 한국을 통해 ‘개혁 후’의 일본을 보고 있는지도모른다”고.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한국 댄스음악 마니아’아오야기양. [도쿄 황성기특파원] 마치 한국 여대생의 방에 들어선 착각이 든다.2.5평짜리 그녀의 방은.자우림,HOT의 대형 브로마이드에 이들의 CD,비디오,한국 음악잡지,일한 사전으로 빼곡이 들어찼다.HOT의 멤버 장우혁의 초상화가 한 켠에 있고 장우혁과 가볍게 포옹하거나 자우림과 얼굴을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다. “작년 이들이 일본에 왔을 때 함께 찍었어요.특별한 관계는 아니에요.내가 일본 사람인 데다 워낙 극성 팬이라 얼굴을 기억해 줘서 같이 찍었을 뿐이에요” 이 방의 주인인 아오야기 하루카(靑柳春花·20·여자미술대학 3년·도쿄 거주)씨는 ‘한국 마니아’로 불러도 손색이없다.좁혀 말하자면 ‘한국 댄스음악 마니아’쯤 될까. 자우림이나 HOT의 CD는 없는 게 없다.그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도 비디오에 녹화해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다.박진영,태사자는 물론이고 기자도 잘 모르는 한국 댄스그룹의 CD가즐비하다.한국 CD는 110여장,비디오는 200장 정도 갖고 있다고 했다.침대 곁의 벽면은 포스터로 가득하다.한국 방송을위성으로 받아보는 TV도 설치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니까 4년 전이예요.심야 TV ‘아시아의 음악’이라는 프로그램에서 HOT를 소개했는데 그때부터 빠졌어요.한국 음악에…” 한국에는 5번 정도 갔다.HOT,자우림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다.일주일쯤 머물며 콘서트도 보고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국 녹화도 빠짐없이 찾는다.한국의 여느 열성 여중고생 팬과 꼭 닮았다.여행과 CD 구입을 위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하고 있다. “한국 음악에 푹 빠진 나를 두고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지만 이젠 아예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는 한국말은 아직은 서툴지만 한국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떡볶이,비빔밥 같은 매운 음식도 곧잘먹는다.한국 음악에 빠진 일본인 친구도 콘서트 현장에서 알게 됐다.이 정도의 열성이면 ‘한국 댄스 음악 동호회’라도 만들 법하다. “따로 무슨 모임 같은 건 없어요.제가 나서서 조직할 마음도 없구요.인터넷에 들어가면 같은 취향을 가진 친구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데 굳이 그런 건 생각 안해요” 그녀가 컴퓨터 없이는 못사는 20살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온라인에 들어가 보니 정말 그녀의 말대로 한국인 가수동호인 사이트가 잔뜩 있었다.그렇구나. 한국 가수 얘기에 신을 내는 그녀에게 역사 교과서 문제나한·일 관계를 물어보기로 했다.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활활 타는 장작불에 물을 끼얹는 ‘썰렁함’ 그 자체였다. “글쎄요.윗 세대는 서로 으르렁거렸는지는 몰라도 우리 세대는 그런 것 없어요.잘은 모르지만 그런 옛날 일에서 이젠벗어나야 하지 않나요” 그녀는 같은 또래들이 대부분 비슷한 생각이라고 했다.“학교에서 배운 역사 가운데 기억나는 한국 관련 부분은 조선전쟁(6·25전쟁)뿐”이라고 친절히 덧붙여 준다. 그녀의 꿈은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다.전공이 디자인이라 과연그게 무엇일까 그려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막연하다. 그녀는 올 여름 일본서 열리는 자우림의 콘서트에 갈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영락없이 발랄한 20살,한국에푹 빠진 일본 여대생이다.
  • 리스테리아균 검역 ‘누수’파동

    리스테리아균에 오염된 것으로 우려되는 미국산 햄·소시지가 국내에 대량 유입돼 상당량이 이미 소비됐지만,국내방역당국은 안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벨기에산 다이옥신 고기 파동,O­157파문에서 나타났듯 수입식품의 안전성 논란은 해를 거르지 않고 문제가 되고 있다.그러나 검역당국이 지나치게 안이한 자세를보이고 있어 국민들의 불안감만 증폭시킨다는 지적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미국 바-S푸드사에서 수입한 햄·소시지도 10t 가까이 식당이나 일반 가정에서 이미 소비됐을것으로 보이며 검역단계에서 원천적으로 걸러지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감염여부 검역 왜 어렵나=국내에 들어오는 유제품이나식육가공식품은 처음 수입될 때만 정밀검사(전량검사)를하고 이후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표본검사를 받는다. 표본검사는 전체의 평균 20% 선이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의 표본검사율이 5% 미만인 것에 비하면 훨씬 엄격하다.하지만 선진국은 수입 전 사전조사와수입 후에도 유통경로 점검 등 철저한 관리를 한다.반면우리나라는 수입업체에 대한 정보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사전·사후대책도 미흡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책마련에만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통된 10t은 문제없나=미회수된 10.5t의 미국 바-S사햄·소시지제품은 남대문 수입상점 6곳에서 주로 식당 등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이미 부대찌개용 등으로소비됐을 가능성이 높다.검역당국은 그러나 이들 제품은리스테리아균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 바-S푸드사에서 리스테리아균 오염이 우려된다는 제품을 발견한 것은 지난 3월19일이므로 그 이전인 지난해 11월에서 올 2월에 국내에 수입된 것은 안전하다는 설명이다.하지만 국민들의 불안감을 없애기에는 너무나 태평한답변이라는 지적이다. ◆리스테리아균이란=식중독을 일으키는 원인 세균.80년대초 미국에서 처음 발견됐다. 우유나 유제품,식육가공품,야채,아이스크림 등 저온보존식품에 많다.8가지 균종이 있으며 사람과 동물에 다같이질병을 일으키는 균종은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제니스뿐이다. 김성수기자 sskim@
  • 日각료 대부분 ‘황국사관파’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 일본 모리 내각 가운데 대부분은 ‘황국사관파’다.일본의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우익 교과서가 검정을 손쉽게 통과한 것도 ‘신의 대신’들이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문제의 황국사관파는 현 18명의 각료 가운데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를 비롯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경제재정 담당특명상,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행정개혁 담당 특명상,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경제산업상,가타야마 도라노스케(片山虎之助) 총무상, 야쓰 요시오(谷津義男) 농림수산상,사이토 도시쓰구(齊藤斗志二) 방위청 장관 등 7명. 이밖에 현 내각의 부대신(차관) 가운데 7명도 황국사관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일본유족회’,‘다함께 신사참배회’ 등 각종 우익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해 왔다.93년 발족된 자민당의‘역사검토 위원회’ 회원으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우파지식인들로부터 강의를 듣는 등 결속을 다지기도 햇다.그결과 95년 8월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책을 출간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자존과 자위를 위한 전쟁이며 아시아 해방전쟁이었다 ▲난징(南京) 대학살과 군 위안부 등의 가해는 날조이며 일본은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최근의 교과서는 있지도 않은 침략과 가해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교과서싸움’이 필요하다 ▲이같은 역사 인식을 국민이 갖기 위해서는 학자를 동원,국민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한 우익 진영의 위안부 기술 삭제 공격과 ‘새 교과서…모임’이전개한 자학사관 타파 및 교과서 검정 신청 등은 ‘대동아전쟁의 총괄’에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으로 본다. ‘새 교과서…모임’을 앞세워 일본 우익 진영의 역사 교과서 공격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현재 ‘새 교과서…모임’을 전면 지원하고 있는 자민당의‘일본의 전도(前途)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모임’은 역사 검토위의 후신격이다. 이진아기자 jlee@
  • 日 2차 모리내각 출범

    내년 1월 중앙 성·청 재편에 따른 제2차 모리내각이 5일 출범했다. 새 내각에는 행정개혁 담당 겸 오키나와·북방영토 대책 담당 특명상을 맡아달라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의 요청을 받아들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총리가 입각,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재무상과 함께 2명의 전총리가 참여했다. 기구 개편 뒤 재무상이 될 미야자와 대장상,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국토교통상이 될 오기 지카게(扇千景) 건설상,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환경상이 될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환경청장관 등은 유임됐다. 금융담당상에는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전 금융재생위원장이기용됐고 경제산업상에는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통산산업상이유임됐다.경제재정·IT 담당상으로 바뀌게 될 기획청장관에는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전 방위청장관이,문부과학상에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전 문부상,방위청장관에 사이토 도시쓰구(齋藤斗志二) 전 우정성 차관,종합과학기술회의 담당상에는 사사가와 다카시(笹川堯) 우정성 차관이각각 기용됐다. 초대 총무상에는 가타야마 도라노스케(片山虎之助) 참의원 의원이,후생노동상에는 공명당의 사카구치 지가라(坂口力) 부대표,농수산상에 야쓰 요시오(谷津義男) 전 농수산 차관이 각각 발탁됐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독립운동가 강우규의사 80주기 기념식

    평안남도 중앙도민회(회장 禹潤根)와 평안남도(지사 金麟善)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강당에서 일우(日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순국 8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강 의사의 우국충정을 기릴 예정인 이날 행사는 강 의사의 약력 소개,추모사 낭독,이북7도 부녀연합회 합창단의 추모가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강 의사는 평남 덕천군 태생으로 1919년 예순의 고령임에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일본 사이토 미노루(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남대문역 앞에서 폭탄을 투척,곧바로 일경에 붙잡힌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현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강 의사의 시비가 있으며 지난 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정기홍기자 hong@
  • 무국적 조선인서 日 최고지휘자로 ‘김홍재, 나는‘

    김홍재.지난 20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개막 축하 공연을 계기로 갑자기 주목받은 재일 동포 지휘자다.46세인 그가 일본에서 명성을 날린 지는 꽤 오래됐다.그런 그가 국내에서 뒤늦게 유명해진 이유는 국적 때문.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채 남과 북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그러나 결과적으로 북한계로 분류되는 조선적(籍).그래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홍재,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김영사)는 무국적 조선인이라는 한계와 좌절을 딛고 신념과 노력만으로 일본 최고의 지휘자가 되기까지 그가 일궈낸 인간 승리와 감동의 드라마다.여권조차 만들 수 없어해외여행은 꿈도 못꾸는 조선적 재일 동포들의 고통스런 현실과,두조국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했던 냉전시대 남북한간 갈등이 그들에 끼쳤던 피해,일본의 차별대우 등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취주악부에서 클라리넷을 배우며 음악과 접했다.조선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하는 대학이 드물었지만 사립 명문 도호음대에 간신히 합격했다.그러나 그때부터가 더 문제였다.동급생들과 수준 차이가 심했다.그는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했다.가능한 모든 강의를 청강하고 동급생들에게 악기를 배워가며 기초와 실력을 함께 다졌다.피아노는 커녕 오디오 조차도 없어 악보를 통째로 외웠다.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가난 때문에 4년내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리하다보니 천식을 얻고 영양실조로쓰러지기도 했다.그러나 피나는 노력은 곧 열매를 맺었다.2학년말 오디션에서 지휘과를 대표하는 3명에 뽑힌 것. 79년 도쿄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특별상인 사이토 히데오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된 뒤 98년에는 와타나베 아키오 상의 네 번째 수상자로 선정돼 일본 최고의 지휘자로 자리를 굳혔다.일본 클래식 음악계를뒤흔든 사건이었다.만화영화 음악의 거장인 히사이시 조는 김홍재에게만 안심하고 지휘를 맡겼다.98년 나가노 동계 장애인 올림픽의 개막 지휘는 그의 차지였다.조센진이란 멸시 속에서도 그는 민족 자긍심을 굽히지 않았다.78년 3월 도쿄시티 필의 특별연주회 지휘자로 데뷔무대에서면서 조선 관현악곡만을 택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80년 TV 클래식 프로 지휘자가 되면서 첫 곡으로 관현악곡 ‘아리랑’을 택해 전파에 띄웠다.상임지휘자로 활동하던 교토시 교향악단을 이끌고,유일하게 자유로이 갈 수 있는 해외이자 조국의 반쪽인 북한 순회공연을 했다. 서양의 악기를 이용해 동양의 정신을 웅장하게 표현한,한국이 낳은세계적인 현대음악가 윤이상(95년 작고)의 음악을 접하면서 충격을받았다.천신만고 끝에 89년 독일 유학 길에 올라 그를 사사한 지휘철학은 그의 음악세계를 한 차원 높였다. 그는 ‘재일 코리안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통일 조국의 국적으로 지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희망의 노래를 지휘한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작가 박성미씨가 김홍재씨의 구술을 토대로 썼다.우리들에게 치열한 삶의 자세와 조선적에 대한 시각 교정을 요구한다.부록 CD에는 윤이상의 ‘무악’ 등 그가 지휘한 노래들이 담겨 있다.9,900원. 김주혁기자 jhkm@
  • 한국화가 오명희 개인전 24일부터

    한국화가 오명희(44·수원대 미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는 바람속의스카프를 화폭에 담아 주목받는 작가다.그는 무성한 갈대숲이나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언덕,야생화가 만발한 들판 등을 배경으로 스카프를 끌어들인다.극채색을 이용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그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의 가공이 필요한 픽션이다.그 허구의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스카프다.배경을 무시하거나 지워버리는 사진 기법인 아웃 포커스를 활용하는 것도 스카프를 도드라지게하기 위한 방편이다.‘자연과 스카프의 예기치 않은 만남’, 그 가장된 우연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98,99년 일본 도쿄 아카네 화랑과 삿포로 사이토 화랑에서 잇따라전시를 하며 스카프 그림을 알린 그가 3년만에 국내전을 갖는다.24일부터 11월 2일까지 서울 청담동 박영덕화랑(02-544-8481)에서 열리는그의 개인전에는 ‘봄날은 간다’‘노스탤지어’‘가을숲에 부는 바람’ 등 전형적인 오명희류 그림들이 내걸린다. 오명희의 그림 한 구석에선 늘 관능의 연기가 피어오른다.신작 ‘봄날은 간다’를 보면 지천으로 핀 진달래 위로 스카프가 한 장 너울거린다.그 스카프에는 혜원의 풍속화속 여인을 빼닮은 여자가 그네를타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그것은 말을 하는 꽃,즉 기생이다.트로트곡 ‘봄날은 간다’의 가사를 읊조리며 그렸다는 이 그림에는 봄날 물오른 여인의 감성이 잘 녹아 있다.‘노스탤지어’나 ‘가을 숲에 부는 바람’ 같은 작품도 감각적인 정조는 마찬가지다.나부끼는스카프에는 샤갈의 유화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를 연상케 하는한 쌍의 남녀가 입을 맞춘 채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오명희의 그림에서 하늘을 나는 연인이란 주제를 즐겨 다뤘던 샤갈의 슬라브적 환상의 세계를 읽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김종면기자]
  • [데스크시각] ‘아리랑’필름찾기

    흔히 ‘국군의 날’로 우리에게 익숙한 10월1일은 일제강점기에는‘시정(始政) 기념일’이었다.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이 해 10월1일부터 총독정치를 시작하면서 이 날을 이렇게 불렀다.‘시정기념일’ 16주년인 1926년 10월1일 오전 10시30분. 지금은 헐리고 없는,조선총독부 청사(구 중앙청 청사) 낙성식이 청사 1층 중앙홀에서 열렸다.해방후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과 정부수립을선포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당시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를 비롯해일본 등 내외의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공사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완공한데다 조선총독부의 위용을 상징하는 청사의 준공식이어서 그들로서야 큰 잔치였다. 그런데 일제로서는 더없이 경사스런 이날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불경스런 ‘사건’ 하나가 터졌다.오후 5시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는 일단의 악대를 거느리고 안국동 로터리를 휘돌아 단성사에 이르러 자신의 대표작이자 ‘민족영화 제1호’로 꼽히는 ‘아리랑’을개봉했다.항일영화인 ‘아리랑’의 개봉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항거였다.아니나 다를까 일제는 개봉 당일로 주제가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음반 판매를 금지시키고 선전지를 압수했다.또 극장내에일경을 임석시켜 변사의 해설을 감시했으며,필름의 일부를 잘라내기도 했다.그러나 영화상영 이후 ‘아리랑’은 특유의 저항정신과 자생력으로 제2,제3의 ‘아리랑’을 낳았고 문학,연극,가요,창극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돼 일제하 한국인들의 민족혼에 불을 지폈다.나운규가 ‘아리랑’ 개봉일을 시정 기념일이자 총독부 청사 준공식이 열린‘10월1일’로 잡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제는 나운규의 바로 그 ‘아리랑’이 첫 상영된 지 74주년이 되는 날이다.그동안 국내에서는 ‘아리랑 필름 되찾기’ 운동이 몇 년째계속돼 오고 있으나 올해도 별 소득 없이 그냥 지나가는 모양이다.놀랍고도 부끄러운 것은 국내에는 ‘아리랑’은커녕 초창기 극영화 필름이 단 한편도 소장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영원히 입수가 불가능한가.꼭 그런 것만은아닌 것 같다.지난 80년대 초반 ‘아리랑’(제1편,1926년 제작) 필름이 일본에 소장돼 있다는 얘기가 돌다가 90년대초 한·일 양국의 언론에 대서특필돼 한국영화계를 흥분시킨 바 있다.소장자는 오사카에거주하는 올해 일흔다섯살의 아베씨로 알려졌다.그는 우리에게는 단한편도 없는 초창기 극영화 60여편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4년 국내에서는 ‘아리랑필름되찾기백인회’가 결성됐고,이듬해에는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측이 가세해 아베씨를 설득해 왔다.이들은 그동안 아베씨에게 읍소,애원은 물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가 수집한다는 우표·담배포갑 등을 사다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베씨는 반환은커녕 ‘아리랑’ 필름의 실물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아베씨는 자신이 소장한 필름들이 처음에는 조선총독부 경찰 의사로 근무한 부친이 수집한 것이라고 했다가 95년에는 “패전후 (정부기관으로부터) 불하받았다”고 실토한 적도 있다.한국측 관계자들은 그가 소장한 필름들은 일제가 패전직전 폭약제조용으로 대거 수거해간것 가운데 일부로 보고 ‘아리랑’ 필름 반환문제는 ‘민족문제’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베씨의 처분만 기다리다 지친 한국측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제“제2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아베씨의 소장여부도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설사 그가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에서다.그리고 또 하나는 중국에 대한기대 때문이다.또다른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항일 빨치산투쟁을 한 북한 김일성 주석이 중국땅에서 영화 ‘아리랑’을 봤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제2의 길’에서 조만간 반가운 소식을 기대해본다. 정 운 현 특집기획팀 차장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7)丹東 臨政 교통국과 쇼우의‘이륭양행’

    일제하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국내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구한말 항일 필봉을 드날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었고,영국인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3·1의거와 일제의 ‘제암리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국명 訖法·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지원한 주인공이다.베델과 헐버트 박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스코필드 박사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헐버트 박사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박사의 유언이 적혀 있다. 한편 한국독립을 도운 외국인 가운데 G.L 쇼우(1880∼1943·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이 있다.그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에 사망한데다 그의 후손도 한국과 왕래가별로 없었으며,또 그동안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부족했던 탓으로생각된다.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초 당시 국내 일간신문을 펼치면 그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그를 만나려면 지금은 중국땅이 된 남만주로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땅 건너편에는 단동(丹東,옛 지명은 安東)이라는 도시가있다.심양(沈陽)에서 아침 7시45분발 기차를 타면 점심때인 낮 12시10분에 도착하는 거리다.취재팀은 일행의 안내차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박문호(朴文鎬·65)선생과 먼저 점심식사를 한 뒤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취재팀이 첫 답사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었다.이 건물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70년 세월이 지났건만 놀랍게도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채 취재팀을 반겼다. 단동시내 육도구(六道口) 흥륭가(興隆街)25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단동시 건강교육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겪은낡은 모습이었다.겉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3층 건물로,현재 이 건물은 1층만 건축 당시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신축됐다고 한다.주민들에 따르면,인근에 헌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건물도 곧헐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건물의 주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방인 쇼우는 어떤 인물인가? 영국인들의 생몰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의 ‘제너럴 레지스터 오피스’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쇼우는 1880년 1월 25일 파고다 아일랜드에서 해양조사원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년 부친사망 당시 그는 중국 남동부의 항구도시 복주(福州)에 살고 있었다. 1912년 당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단동에서 일본여인 후미 사이토(당시 28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장남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었다.그가 한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쇼우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로 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첫째는 그의 출신과 가족구성.그는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태생으로 자신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을 잘이해하고 있었다.특히 모친과 부인이 모두 일본인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더욱이 그의 사무실(이륭양행)은 안동(현 단동)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영사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한국인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 2층에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安東)교통국사무국’이 들어있었다.교통국은 임정초기 정보수집과 재정모금,인물소개 등을 담당하였는데 국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교통부 산하 7개 교통국 가운데서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그는 단순히 장소만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하고,상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1920년 그가 소위 ‘이륭양행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그의 행적자료에 의하면,그는 봉천(奉天) 주재영국 총영사가 일본당국의 요청으로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사건 지원 ▲독립군 무기수송 ▲독립운동 근거지 제공 ▲임정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 7월 오학수(吳學洙) 등이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그가 소유한 계림환(桂林丸)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일경에 구속되었다.1924년 단동을 떠나는 조건으로 영국 측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그는 복주(福州)로 거주를 옮겼는데,그해 11월30일 63세로 타계하였다.그의 사후 57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그에게 건국훈장 추서한 것이 전부일 뿐 그의 묘소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다. 항일투쟁 끝에 단동에서 최후를 마쳤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쇼우처럼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독립투사 한 분이 있다.바로 편강렬(片康烈·1892∼1929) 의사다.17세때인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이듬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편 의사는 이후 1911년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1919년‘구월산주비단사건’으로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만주로 건너가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결성,단장에취임한 편 의사는 이듬해 3월 장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다시1개월 뒤에는 봉천(현 심양)에서 일경과 백주에 시가전을 벌여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1924년 길림과 하얼빈에서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편 의사는 국내로 압송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척추염이 발병,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불과 37세였다.구한말 의병전쟁에서 부터 독립군 투쟁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바쳤으나 이름을 아는 이가 적음은 물론 그의 묘소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생전에 편 의사는 ‘나라가 광복되기 전에는 내 유체를 고국에 이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지금도 단동 진강산(鎭江山) 기슭 공동묘지 어디엔가 누워있을 편 의사를 생각하면 후손된 자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단동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마지막 모습을 감추는 곳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민족에겐 ‘비원의 땅’이라고 할수 있다.또애국선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의탁하던 곳이자,살 길을 찾아 만주땅으로 향하던 유민들의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錦江山)공원(구 진강산공원) 옆에 있는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아직도 그 화려한 건축미를 간직한 채 지금은 단동 경비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두 철교 가운데 6·25때 끊어진 철교를 중국의 모 회사가 매입,관광용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단동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중국의 경제개방 열풍속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만주 독립군 전투지역 첫 확인

    국가보훈처는 8일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독립군 42명이 전사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꾸마닝(古馬嶺) 전투지역 등 4곳의 사적지를 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꾸마닝 전투지역은 1925년 3월 16일 독립군 최석순(崔碩淳) 참의장 등 42명이 일본경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원 전사한 곳으로,만주 독립군 역사상 최대 참변지로 기록돼 있다.현재 이 곳은 콩밭으로 변했고,당시 독립군 숙소는 터만 남아 있다고 보훈처는밝혔다. 보훈처는 또 1924년 5월 19일 참의부 소속 독립군이 사이토(齊藤實)총독을저격한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지역도 확인했으며,이 지역은 지린성지안시 압록강 맞은편 언덕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1917년 1월 이동휘(李東輝)선생이 지린성 훈춘(琿春)현에 설립한한인사립학교인 북일(北一)학교터도 이번 실태조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보훈처는 또 만주판 제암리로 불리는 지린성 룽징(龍井)시 장암동 유적지도 확인했으며,당시 한인촌 기독교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했던 교회는 과수원으로 변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국내 처음으로 올해 6∼7월말 박환(朴桓) 수원대 교수,유병호(劉秉虎) 옌볜(延邊)대학 교수 등 한·중 학자들로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적지실태조사단’을 구성,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를 실시한 바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번 실태조사를 토대로 만주지역의 항일유적지에 표지석 설치를 검토중이며,국내외 항일유적·사적지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현충시설물 설치 및 관리에 관한 규정’을 연내에 제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1)안중근의사 의거현장 하얼빈역

    90여년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국내외에서 피끓는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때로는 일제의 합방원흉들에게 단신으로폭탄을 던졌고 때론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며 독립의지를 해외만방에떨쳤다.대한매일은 이같은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과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연말까지 매주 1회씩 미·소·중·일 등 4개국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탐방한다. 중국에서는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을 비롯한 24곳을돌아보고 임정요인 및 독립군이 걸은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또 옛소련에서는 하바로프스크 독립군 전적지 등 5곳을 살펴본다.미국에서는 전명운의사의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저격현장인 샌프란시스코 등 5곳을,일본에서는 저항시인 윤동주 등이 숨진 후쿠오카형무소 등을 찾아본다.대한매일은 현장의 모습과 관련문서,생존자 증언 등을 통해 민족의 제단에 몸바친 애국선열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새롭게 정리한다. 중국의 동북3성(省)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성도(省都) 하얼빈.하얼빈은 우리 항일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의열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으로 우리에겐 낯익은 곳이다.일제당시 이곳은 만주와 러시아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으로 숱한 항일 애국지사들의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이곳은 또 아직도 일제의 가혹한 통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 곳곳에는 일제때 세워진 러시아풍의 관공서 건물들이 여전히 옛 영화를 자랑하듯 버티고 서 있다.안 의사 의거로부터 90년이 지났지만 안 의사의의거관련 유적 역시 고스란히 남아 그 날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시내 외곽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았던 일본 관동군 예하 731부대의 잔흔이참혹했던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하얼빈은 근대 동북아시아의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재팀이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을 찾은 것은 지난 7월 8일 오후 1시.취재팀은 안 의사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가 91년전 이곳을 향해 출발한 열차의 출발점이자 만주국의 옛 수도였던 창춘(長春)을 출발,세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취재팀을 맞은 것은 30도를 오르내리는 하얼빈의 무더위였다.열차는 3번 플랫폼에 정차했다.승객들을 따라 지하통로를 지나 취재팀이 나온 곳은 1번 플랫폼이었다.바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현장 근처였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안 의사는 출구쪽의 역사(驛舍)와 인접한 1번 플랫폼에서 이토를 처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의거현장에는 이곳이 안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의거현장을 정확하게 알고있는 역무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취재팀은 전문가의 고증을 받기로했다.숙소로 돌아와 이 지역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헤이룽장성 당사(黨史)연구소 김우종소장(71)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김 소장은 “1번 플랫폼 지하통로 옆,즉 2등 대합실 출구 앞”이라며 “당시 일제가 이토의 흉상을 세웠으나 8·15후 소련군이 철거했다”고 증언했다.현재 그 자리에는 작은 화단이조성돼 있다.구내에서 안 의사의 의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철마가 잠시 쉬었다 가는 1번 플랫폼 뿐이었다. 하얼빈 시내에는 안 의사 관련 유적이 이밖에도 몇 군데 더 있다.보존상태는 대부분 양호한 것으로 취재과정에서 확인됐다.우선 안 의사 의거와 인연을 맺고 있는 역으로 하얼빈역에서 15㎞ 떨어진 채가구역이 있다.이 역은 안의사의 동지인 우덕순 의사가 이토가 탄 기차가 이곳에 정차할 것에 대비,이토를 기다렸던 곳이다.하얼빈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채가구역은 러시아풍의 단층 건물 옛 모습을 그대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안 의사가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러시아 군헌(軍憲)에게 처음 신문을 받은 곳은 동청(東淸)철로국 공안국 건물이었다.하얼빈 역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대로변에서 위치한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현재는 하얼빈 철로국 공안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한편 안 의사가 이곳에서 간이신문을 마치고 이송된 곳은 하얼빈주재 일본영사관이었다.안 의사가 체포된 후 두 손이 뒤로 묶인채 쇠사슬을 두르고 찍은 사진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 일본영사관 지하감방에서 일제 관헌으로부터 가혹한 신문을 당한 항일투사가운데 남자현(南慈賢) 의사가 있다.1872년 경북 영양 출신인 남 의사는 남편이 의병전투에서 전사하자 1919년 만주로 망명,서로군정서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들과 사이토 총독 암살계획이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다시 돌아가 재만(在滿)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참여하였다.1931년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온갖 탈출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후 만주주재 일본대사를 처단하기 위해 걸인 노파차림으로 무기를 운반하다가 하얼빈시내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 체포돼 이곳 영사관 지하감방으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남 의사는 감옥에서 6개월동안 단식투쟁끝에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33년 8월 22일 이곳 이국땅 하얼빈에서 순국했다.남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시내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그후 문화공원으로 불려온 이곳은 현재 하얼빈 유락원(遊樂園)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취재팀이 방문한 현장은 각종 놀이기구와수영장 등이 들어선 놀이공원으로 바뀌어 있어 어디에서도 남 의사의 흔적은찾을수 없었다. 보훈처의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 답사팀과 함께 하얼빈을 찾은 박환 수원대교수(사학과)는 “해외 항일유적지 조사는 선열들의 업적을 현창하는 일 가운데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업”이라며 “그동안 현지 촌로들의 증언에만의존하는 학술차원의 조사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현지 연구자로 답사팀에합류한 유병호교수(옌볜대학 민족연구소)는 “93년 엔벤대학에서 조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을 당시 단군을 아는 조선족 학생이 5∼6명에 불과한 것을보고 놀랐다”며 “한중우호 차원에서라도 항일독립투쟁사를 제대로 교육할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하얼빈은 안 의사의 의거관련 유적은 물론 시내 외곽에는 일본 관동군예하 731부대의 구지(舊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시내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평방구(平房區)에는 지난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중국 당국이 건립한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진열관 앞 100m 지점,즉 731부대 북쪽 끝에는 당시 731부대에서 필요한 전기·에너지 등을 공급한 ‘동력반(動力班)’의 대형 굴뚝이 철거되다만채 흉한 모습으로 잡초 속에 방치돼 있었다.이 앞쪽에 위치한 부대 터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현재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이곳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중국 당국에서 이곳을 역사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철거중이라고 했다. 한편 그동안 731부대의 흔적은 동력반의 굴뚝 정도만 상징적으로 남아있고나머지는 대개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취재과정에서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주민은 취재팀에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모두 같은 피해자”라며 “731부대의 지하통로가 하얼빈 시내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증언했다. 하얼빈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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