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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리랑카 교회, 테러 공격 3주만에 철통 보안 속 예배 재개

    스리랑카 교회, 테러 공격 3주만에 철통 보안 속 예배 재개

    스리랑카 교회와 성당에서 폭탄테러 공격이 일어난 지 3주 만에 예배가 재개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스리랑카 콜롬보와 네곰보의 교회들이 지난달 21일 폭탄테러 이후 처음으로 경찰들의 보안 속에 일요 예배를 열었다고 전했다. 당시 폭탄테러로 사망한 사람들은 250명 이상으로 스리랑카 내전 이후 최대 참사로 기록됐다. 이날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성당 중 한 곳인 콜롬보의 성 루시아 성당은 신도들로 가득 찼다. 입구마다 경찰들이 서 있었으며 성당 앞 도로에는 바리케이드와 군인들이 신도 이외에 수상한 사람들의 출입이나 공격에 대비했다. 신도들은 가방을 들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입장 전에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8살 난 조슈아 버니와 그의 어머니 비제이도 이날 성당을 찾았다. 버니의 삼촌과 숙모, 그리고 세 명의 사촌 형제들도 지난 테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중 한 명은 아직 주검조차 찾지 못했다. 비제이는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조카를 아직 찾지 못했다”면서 “아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러가 발생했던 성 안토니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돌로로사 성당도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예배를 진행한 페르난도 마르셀리아르 신부는 “지난 2주간 예배를 하지 못한 신도들이 몹시 화가 났다”면서 “지난주 일요일에 50여명의 신도만 참석한 비공개 예배를 진행했는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나머지 신도들이 황당해하며 나를 꾸짖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열 명 이상의 아이들이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면서 “한 어머니는 8살 난 아들이 아주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며 걱정했다”고 말했다. 성 안토니 성당에서 폭탄이 터질 당시 사제를 돕고 있었던 스테판 페르난도(16)도 이날 성당을 찾았다. 당시 함께 테러 현장에 있었던 형 유진은 아직 공공장소에 가기 힘들어 집에 있기로 했다. 형제의 어머니 샤르밀라는 “내 아들들은 괜찮지만 피해자들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사랑받고 보살핌 받는 존재였다”고 눈물지었다. 스리랑카는 타밀 반군과 치른 27년간의 내전 종식 10년 만에 자살 폭탄 테러 공격의 여파로 신음하고 있다. 국립학교는 지난주 수업을 재개했고 학내에 경찰들이 배치됐다. 그러나 출석률은 높지 않은 상황이다. 가톨릭 사립학교들은 아직 휴교 중이며 오는 20일 재개교할 예정이다. 스리랑카 대통령은 이번 테러사건과 관련된 150여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56명은 이번 테러에 직접 가담했으며 12명은 강경파 테러범이라고 밝혔다.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패망했다던 IS 건재 과시… 군부대 공격·첫 해외영토 확보 주장

    지난 3월 최후의 저항지 시리아에서 패퇴하면서 궤멸되는 듯했던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인도에 첫 거점을 확보하고 나이지리아의 한 마을을 습격해 정규군 11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과거 ‘칼리프국’(칼리프가 다스리는 이슬람 신정일치 국가)의 점령지였던 시리아·이라크에서 국제동맹군에 패망한 이후 오히려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다시 악명을 떨치는 형국이다. IS는 11일(현지시간) 선전매체 아마크를 통해 나이지리아 북동부 보르노주의 한 마을을 습격해 나이지리아군 11명을 살해했다고 밝히면서 그 증거로 불에 탄 병영과 병사들의 시신 사진을 게재했다. 보르노주는 2002년 결성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의 근거지다. 보코하람은 2015년 IS에 충성을 맹세하고 ‘IS 서아프리카 지부’(ISWAP)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보코하람의 공격으로 나이지리아에서는 3만명이 사망했고 200만명 이상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IS는 전날에도 아마크를 통해 인도에 ‘힌드 윌라야트’를 세웠으며 카슈미르 남부 쇼피안 지역의 한 마을에서 인도 병사를 사살했다고 밝혔다. 윌라야트는 IS의 주(州) 또는 지부에 해당하는 단위다. 로이터는 “IS가 새 윌라야트 설립을 주장한 것은 시리아·이라크의 점령지를 상실한 이후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면서 지난달 스리랑카에서 발생해 최소 253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활절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했다. 극단주의 감시 매체 ‘시테’의 리타 카츠 대표는 “실질적인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주를 건립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면서도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에게는 칼리프국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의미 있는 제스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프랑스 군인 2명 희생시킨 ‘위험한 여행’

    프랑스 군인 2명 희생시킨 ‘위험한 여행’

    한국 여성·美·프랑스인 29일 만에 구출 사망 부른 작전에 파리 환영 행사 썰렁아프리카 서부 부르키나파소에서 납치됐다가 프랑스군의 구출작전으로 풀려난 한국인 여성 1명과 프랑스인 2명 등 3명이 프랑스에 건강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40대 한국인 여성은 프랑스인 2명이 납치되기 이전에 억류돼 28일간 붙잡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11일(현지시간) 프랑스24 등에 따르면 한국인 여성 1명과 프랑스인 남성 로랑 라시무일라스(46), 파트리크 피크(51) 등 3명은 이날 프랑스 정부의 소형 전용기편으로 파리 남서쪽 인근 빌라쿠블레 군비행장에 도착했다. 함께 구출된 미국인 여성 1명은 부르키나파소에서 미 당국에 인계됐다. 한국인 여성 등 풀려난 인질들은 프랑스 정부에 감사를 표하면서 구출작전 중 전사한 군인 2명에 대해 애도를 표시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외무·국방장관과 군 합참의장,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대동하고 활주로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두 명의 자국 국민 및 한국인 여성과 일일이 악수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은 시종일관 굳은 얼굴이었으며, 화환 증정식이나 환영 인파 없는 간단한 환영 행사만 치러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프랑스 최정예 특수부대 ‘위베르 특공대’ 부대원 2명이 구출작전에서 전사한 데다 피랍자들이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여행금지 지역에 들어갔다가 납치된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 탓이었다. 한 네티즌은 프랑스 해군 페이스북에 “무모한 관광객들을 위해 영웅들이 희생됐다”고 올렸다. 프랑스24 등은 프랑스 소셜미디어에 “구출작전 중 전사한 군인 2명에 대한 애도와 인질들에 대한 비판적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구출된 프랑스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 “벌금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랍자들이 전사한 대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는 보도에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등의 격앙된 댓글도 있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피랍자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두 군인들의 희생 앞에서 엄숙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고 말했다. 그는 두 특수부대원을 기리는 추모식을 오는 14일 파리 시내 복합군사문화시설인 앵발리드에서 직접 주재하기로 했다.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도 이날 간단한 환영식 후 “정부의 여행 관련 권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여행사들도 이 권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피랍자 중 한 명인 로랑 라시무일라스는 환영 행사 직후 “희생된 장병과 유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고, 정부와 군의 투철한 정신과 휴머니즘에 감사드린다”면서 “위험한 지역에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반성의 뜻을 밝혔다. 그의 발언 직후 한국인 여성도 그 옆에서 프랑스어로 짧게 “메르시”(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앞서 프랑스군 특수부대는 미군의 정보 협조를 얻어 지난 9일 밤과 10일 새벽 사이 프랑스인 2명이 억류된 무장단체 캠프를 급습하는 등 구출작전에 나서 한국인 및 미국인 여성이 각각 1명씩 추가로 억류된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함께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부르키나파소 북쪽 국경을 넘어 말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번 구출작전이 프랑스 시민들과 함께 억류된 한국인과 미국인 인질의 발견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 ‘매우 희귀한 어려운 작전’이었다”고 밝혔다. 프랑스 당국은 구출작전에 돌입할 때에도 한국인 및 미국인 인질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구출작전으로 인한 교전으로 무장조직원 4명이 사살됐으며 2명은 도주했다. 구출작전에서 사망한 위베르 특공대의 알랭 베르통셀로(28) 상사와 세드리크 드 피에르퐁(33) 상사는 작전 중 인질이 있는 곳으로부터 10m 떨어진 지점에서 발각됐으나 인질 안전을 우려해 발포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달려들다가 근접사격을 받아 숨졌다. 한편 베르통셀로 상사의 아버지인 장뤼크 베르통셀로는 이날 프랑스 RTL라디오 인터뷰에서 “알랭은 해야 할 일을 했다. 특수부대원은 아들의 천직이었다. 아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었다”며 아들을 애도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프랑스 “한국 여성 등 인질들, 무법천지 말리로 끌려가기 직전 구출”

    프랑스 “한국 여성 등 인질들, 무법천지 말리로 끌려가기 직전 구출”

    아프리카 무장 세력에 납치됐던 한국인 여성 등 인질 4명이 무법천지인 말리로 끌려가기 직전에 구출됐다고 프랑스 당국이 밝혔다. 프랑스군은 자국민 2명이 지난 1일(현지시간) 서아프리카 베냉 공화국 북쪽에 있는 펜드자리 국립공원에서 실종된 이후 작전에 돌입,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며 구출 기회를 엿봤다고 밝혔다. 한국인 추정 여성과 미국인 여성의 구체적인 피랍 경위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인질범들이 코끼리와 사자 등 야생동물 서식지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펜드자리 국립공원에서 프랑스인 관광객 2명을 납치했다는 것이 프랑스 당국의 설명이다. ●“인질범 말리로 가면 구출 어려워”…미군, 무장세력 정보 제공 10일 AFP통신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인질들이 무장세력들이 판치는 말리로 넘겨질 것을 우려해 구출 작전을 승인했다. 당시 무장괴한들은 인질들을 끌고 말리로 가기 위해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숙영지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게 프랑스 당국의 설명이다. 프랑스군과 미군이 운용하는 드론은 베냉에서 부르키나파소로 이동하는 무장괴한들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했고, 프랑스군 특수부대는 인질 구출 기회를 잡기 위해 이들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프랑스의 특수전 의료팀도 파리에서 작전 지역으로 급파됐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9일 밤 무장괴한이 말리와 인접한 부르키나파소 북쪽 지역에 멈춘 시점을 마지막 기회로 판단했다. 인질들이 말리에 있는 이슬람 무장단체로 넘겨지면 사실상 구출 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은 “부르키나파소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면서 “인질들이 말리로 옮겨졌다면 구출 작전은 너무나 위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수부대원, 한밤 중 숙영지 침투…예상치 못한 인질 2명 추가 발견 프랑스군 특수부대원 20여명은 한밤중 헬기로 무장세력과 인질들의 숙영지 근처에 급파됐다.특수부대원들은 숙영지에서 인질들을 확인하고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진행된 작전 끝에 인질들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원 2명이 인질범들이 쏜 총탄에 맞아 희생됐다. 인질범 6명 중 4명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2명은 도주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말리에 근거지를 둔 무장세력 ‘카티바 마시나’(Katiba Macina)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작전을 수행한 특수부대는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질들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애초 피랍된 것으로 확인된 프랑스인 2명 외에 여성 인질 2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한국과 미국 국적으로 파악된 이들은 무장세력에 의해 무려 28일간 억류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여성 등 2명 피랍 경위 확인되지 않아 아직 한국인과 미국인 여성이 피랍된 경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프랑스 당국은 자국민 2명이 납치된 곳이 펜드자리 국립공원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은 베넹 공화국 북서쪽에 위치한 2755㎢에 달하는 국립공원으로, 프랑스군 특수부대가 구출 작전을 수행한 부르키나파소와도 인접해 있다. 열대우림의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코끼리, 사자, 하마, 버펄로, 영양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서아프리카의 유명 관광지다. 2009년 3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지로 지명됐고, 2017년 7월에 공식적으로 세계유산이 됐다. 펜드자리 국립공원을 관광하던 중 피랍된 프랑스인들은 지난 1일 저녁 숙소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들을 안내했던 여행가이드는 며칠 뒤 펜드자리 국립공원에서 여러 발의 총탄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외교부 “구출된 한국인 인질은 40대 여성…신원 파악” 외교부는 이날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 작전으로 구출된 인질 4명 중 1명이 40대 한국 국적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교부와 주프랑스대사관은 구출된 우리 국민의 국내 연고자를 파악해 구출 사실 및 건강상태 등에 대해 알리는 등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출된 인질 4명은 11일 오후 5시(현지시각·한국시각 11일 자정)쯤 파리 소재 군 공항에 도착한 뒤 군 병원으로 이송돼 건강상태를 점검받을 예정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구출된 2명의 자국인과 1명의 한국인을 직접 공항에서 맞이한다고 엘리제궁이 10일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정부는 이번 구출 작전으로 희생된 프랑스 군과 그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우리 국민을 구출해 준 데 대해 프랑스 정부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주프랑스대사는 구출된 우리 국민이 탑승한 군용기가 파리에 도착할 때 공항에 출영하여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적극적으로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전 미군 방첩 정보요원 김용장씨 13일 이후 광주방문,증언 예정

    ‘1980년 5월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를 다녀간 직후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한 김용장 전 미군 501여단 방첩 정보요원이 국내에서 5·18 관련 증언을 이어간다. 11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최근 피지에서 입국한 김용장 전 미군 501여단 방첩 정보요원이 서울에서 언론을 상대로 관련 증언과 인터뷰를 한 뒤 13일~18일 사이 광주 북구 운정동 5·18 국립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할 예정이다. 이번 증언에는 5·18 당시 광주에서 정보를 수집·보고했던 사례, 신군부와 미국의 관계, 신군부의 집단 발포·무력 진압 경위 등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미 정찰위성 2대가 2~3시간 간격으로 회전하면서 광주 전역에 대한 통신감청을 진행하는 등 미국이 당시 광주 상황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내용도 증언할 예정이다. 만약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5.18 북한군 침투설’ 등은 사실상 근거를 잃게 된다. 김 전 요원은 미 국방성이 한국에 파견한 요원으로 25년간 근무했으며,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광주에 머물면서 40건의 보고서를 직접 작성해 미 국방성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전두환씨가 5월21일 광주비행장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505보안부대 이재우 대령 등과 회의를 했고, 헬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 직후 (옛 전남도청에서) 발포·사살행위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다만 이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첩보’ 차원에서 수집한 ‘정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이런 증언들을 조사해 그동안 밝히지 못한 5·18민주화운동의 실체를 밝힐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로켓 공격 vs 전투기 공습… 이-팔 또 무력 충돌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가자지구에서 지난 3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무력 충돌이 격화되며 임신부와 어린이를 포함해 10여명이 사망했다. 5일 AP통신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지난 4일부터 이틀간 450발의 로켓포가 이스라엘로 발사됐으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슬라믹 지하드’와 관련된 목표물 260여곳을 타격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에서 발사된 로켓포 중 250발 이상을 요격했다”고 밝혔다. 이틀간 양측의 충돌로 팔레스타인인 8명과 이스라엘인 3명이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지난 4일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임신 중이던 37세 여성과 14개월이던 그의 딸을 비롯해 4명이 사망한 데 이어 5일에는 4명이 추가로 숨졌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로켓포 공격으로 58세 남성 모쉐 아가디 등 3명이 사망했다. 이번 공습에 터키 통신사 아나돌루가 입주해 있던 건물도 공격당했다. 터키 외무부는 “이스라엘의 비대칭적 행동으로 고조된 이 지역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행동을 긴급히 촉구한다”고 규탄했다. 양측의 이번 충돌은 앞서 3일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접경 지역에서 시작됐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저격수의 총격으로 이스라엘군 2명이 다쳤다며 보복으로 하마스 대원 2명을 사살했다. 같은 날 장벽 부근에서 가자지구 봉쇄에 항의하는 시위대 2명이 이스라엘 저격수의 총격에 사망했다. 이에 지난 사흘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에 따른 사망자는 최소 15명으로 늘었다. 니콜라이 믈라데노프 유엔 중동특사는 “양측 간 갈등의 해법을 찾고자 오랜 시간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끝없는 폭력의 굴레는 끝나야 한다”며 양국 간 긴장을 완화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최근 친(親)이스라엘 행보를 가속화한 미국 국무부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이-팔 무력 충돌에 네타냐후 “대규모 공습” 명령...사망자 30명 넘어

    이-팔 무력 충돌에 네타냐후 “대규모 공습” 명령...사망자 30명 넘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무력 충돌이 사흘째 지속되자 사망자가 30명을 넘어서며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외신들은 이번 충돌은 50일간 이어지며 2000여명의 사망자를 냈던 2014년 가자 전쟁 이후 최악이라고 전했다. 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지난 4~5일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날아온 로켓포가 650발 이상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이에 탱크와 전투기 등을 동원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와 ‘이슬라믹 지하드’의 군사시설 목표물 260여곳으로 대대적으로 타격하며 보복했다고 말했다. 가자당국은 이스라엘의 공습과 포격으로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측 민간인 14명을 비롯해 27명이 숨졌으며 150여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4일 숨진 민간인 중에는 37세 임신부와 이 여성의 14개월 된 조카도 포함됐다. 이스라엘 측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오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자당국은 교전 이틀째를 맞은 5일에도 임신 9개월 차의 만삭인 임신부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측은 이에 대해 추가적인 답변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또 공습으로 차에 타고 있던 하마스의 야전사령관인 아흐메드 코다리를 사살했다. 이스라엘군은 코다리가 이란에서 가자지구의 군대로 현금을 수송한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마스의 군 고위 인사가 이스라엘 공격으로 사망한 것도 2014년 가자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로이터는 전했다.이스라엘에서는 현재까지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팔레스타인의 로켓포 공격으로 이스라엘인이 숨진 것도 가자전쟁 이후 처음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가자지구의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하마스 등 주요 군사 거점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지속하라고 군에 명령했다.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상자가 더 늘 것으로 우려되는 가운데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5일 늦게 성명을 내며 이스라엘 측과의 휴전 협상 가능성을 시사?다. 그는 이스라엘이 공격을 멈춘다고 약속하면 새로운 휴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슬람의 성월인 라마단과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무력충돌은 지난 3일 이슬라믹 지하드의 한 저격수가 총격을 가해 이스라엘군 2명이 다치면서 촉발됐다고 이스라엘 측은 주장했다. 하마스와 협력관계인 이슬라믹 지하드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정책 등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지난 3월 말에도 이번과 비슷한 양상으로 로켓포와 보복 공습·포격 등을 주고받으며 다수 사상자를 낳았다. 양측은 이후 이집트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중재로 휴전에 잠정 합의하고 장기적 휴전 협정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이번에 또다시 격렬한 무력 분쟁이 일어남에 따라 휴전 노력이 좌초할 위기에 놓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자지구는 2007년 하마스가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이스라엘과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며 ‘중동의 화약고’로도 불린다. 200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이곳은 10여년간 지속된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실업률이 52%, 청년 실업률은 70%에 이르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테러 참사 스리랑카 “얼굴 가리지 마시오” 부르카 등 금지하는 이유

    테러 참사 스리랑카 “얼굴 가리지 마시오” 부르카 등 금지하는 이유

    지난 21일 부활절 연쇄 폭발 참사 이후 비상사태에 돌입한 스리랑카 정부가 추가 테러 예방책의 하나로 얼굴을 가리는 의상 착용을 전면 금지했다.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대통령은 지난 28일 성명을 통해 29일부터 어떤 형태로든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밝혔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 23일부터 비상사태에 돌입했으며 시리세나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비상사태 관련 권한에 따라 이뤄졌다. 시리세나 대통령은 “이번 금지 조치는 국가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누구도 얼굴을 가려서 신원을 알아보기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날 발표를 통해 얼굴만 가리는 부르카, 얼굴과 몸을 한번에 가리는 니캅 중 어느 쪽이 금지되거나 허용되는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표에 앞서 스리랑카 무슬림 성직자 모임인 올 실론 자미야툴 우야마는 이슬람 보복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여성 신도들에게 얼굴을 가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스리랑카 인구는 2100만명으로 이 가운데 무슬림은 10%가량이다. 부활절인 지난 21일 스리랑카에서는 수도 콜롬보의 고급 호텔과 주요 교회 등 8곳을 덮친 연쇄 자살폭탄 공격으로 모두 253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스리랑카 정부는 현지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내셔널 타우히트 자마트(NTJ)와 잠미야툴 밀라투 이브라힘(JMI)를 테러와 직접 연관된 조직으로 지목했고, 이슬람국가(IS)는 테러의 배후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해 스리랑카 경찰은 지난 26일 스리랑카 동부 카탄쿠디에 있는 NTJ 본부를 급습해 테러 공격의 핵심으로 지목된 NTJ 창설자인 자드란 하심의 아버지와 두 형제를 사살하고 본부 곳곳을 압수수색했다. 정부는 앞서 두 단체를 단체를 불법 단체로 공식 규정하고 관련 자산을 몰수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테러 용의자 140명을 체포한 데 이어 140여명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 군경 1만여명을 동원해 길거리나 교회, 모스크 등에서의 추가 테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1980년 옛 전남도청 계엄군 사살명령 담긴 상황일지 공개

    5·18 당시 첫 집단 발포가 이뤄진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 사살을 명령을 하고, 실제 사살 시범을 보였다는 내용의 군 상황일지가 공개됐다. 이는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는 신군부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26일 공개한 11공수특전여단 상황일지에는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사격 과정이 기록돼 있다. 일지를 보면 ‘오후 1시: 폭도(시민) 1명이 버스를 몰고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00(판독 불가)을 지시 그 자리에서 사살,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폭도들은 감히 도청을 향해 돌진해오지 못했다. 500m 이격된 가운데 APC(장갑차)를 이용, 강습돌파작전을 감행할 의도임을 인지하고 폭도 APC가 움직일 때마다 계엄군 APC의 CAL50(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실시했음’이라고 기록했다. ’35대대가 동시에 공포를 사격, 주춤한 폭도들 앞에서 61·62·63대대는 즉각 전열 재정비, 기관총 사격토록 지시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그러나 군이 ‘5공 청문회’ 등을 앞두고 1985년과 1988년 새로 작성한 11공수 상황일지엔 계엄군 사격 내용이 모두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새롭게 확인된 11공수 상황일지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는 물론 위협 사격과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는 특정 시기 군 기록이 체계적으로 은폐·조작된 정황으로 확인된 만큼 철저한 진상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사우디, 테러 음모 가담했다며 남자 참수 후 머리 장대에 효수

    사우디, 테러 음모 가담했다며 남자 참수 후 머리 장대에 효수

    사우디아라비아가 23일(이하 현지시간) 37명의 목을 자르는 참수로 사형을 무더기 집행한 뒤 한 남성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놓는 효수(梟首)까지 했다고 국영 매체 사우디 프레스 에이전시(SPA)가 전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149명의 사형을 집행했고 올해 들어 벌써 104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 나라는 이날 수도 리야드를 비롯해 메카와 메디나에서 모두 37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이들은 국가 보안 사령부를 공격해 병사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이들과 적어도 14명의 반정부 시위에 과격하게 참여한 이들이었다. SPA는 성명을 통해 “극단주의 테러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고 테러 조직을 형성해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해치려 했다”고 처형 배경을 설명했다. 처형된 이들 가운데는 체포됐을 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남자도 포함됐다.  사우디는 보통 참수로 사형을 집행하는데 효수까지 한 것은 당국이 훨씬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를 본보기 삼은 것이라고 영국 BBC는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여성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하고, 다른 여성을 강간하려 하고, 다른 남성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한 남성이 처형 후 효수됐다. 사우디 정부는 사형 집행 숫자를 공표하지 않지만 국영 매체들은 자주 처형 소식을 전하고 있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를 근거로 집계하고 있다.  사우디 보안 당국은 21일에도 리야드 북쪽의 알줄피의 보안국 지부를 공격하려 했던 음모를 적발했다며 4명의 가담자를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AP통신은 2016년 1월 47명을 집단 처형한 뒤 사우디에서 하루에 이뤄진 사형 집행 건수로는 가장 많은 것으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번에 처형된 사람 대부분이 시아파 남성이라며 고문으로 끌어낸 자백을 근거로 한 “가짜 재판” 뒤 유죄를 선고받았다면서 “충격적”이라고 밝혔다. 통신은 이번 처형이 시아파 맹주이며 숙적인 이란과 수니파 맹주 사우디의 지역, 종파 긴장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3년 전 무더기 처형 때는 저명 시아파 종교 지도자 한 명이 포함되면서 파키스탄과 이란 등에서 시위를 촉발했고,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은 약탈당해 현재까지 문을 닫은 상태다.  두 차례 무더기 처형 모두 살만 사우디 국왕이 재가한 것으로, 그는 2015년 왕위에 오른 이래 이전 국왕들보다 더 대담하고 단호한 리더십을 드러내고 있다고 AP는 설명했다.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이란을 상대로 한 경제 제재를 복원하는 등 이란을 계속 압박하면서 사우디와 수니파 아랍 동맹국들이 더욱 대담해졌다고 분석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싱크탱크 ‘걸프협회’를 운영하는 사우디의 반체제 인사 알리 알아흐메드는 이번 처형이 미국의 반(反) 이란 물결에 편승해 이란을 겨냥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의왕 모락산에 잠든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 착수

    의왕 모락산에 잠든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 착수

    경기도 의왕시는 6.25전쟁(한국전쟁) 당시 아군 70여명이 전사한 모락산전투 국군전사자 유해 발굴작업에 착수했다고 20일 밝혔다. 6개월간 진행되는 이번 발굴사업은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육군 51사단 장병 160여명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참여한다. 유해발굴 시작을 의미하는 개토식이 지난 18일 갈미한글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참전용사와 군경 유가족, 김상돈 의왕시장, 김인건 51사단장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본격적인 전사자 유해 발굴작업은 오는 29일부터 시작한다. 발굴 유해는 11월 영결식과 신원 확인절차를 거쳐 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발굴 유해는 1.3%에 불과하다. 신원확인을 위해서는 유가족 DNA 시료채취가 꼭 필요하지만 채취율은 26% 정도다. 앞서 시와 51사단은 2009년에도 국군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을 벌였다. 1년간 진행한 작업에서 국군전사자 유해 21구, 사진·수첩 등 1472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유해발굴팀은 수리산, 모락산 등 전투가 벌어졌던 8개 지역을 선정해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다. 2011년에 시와 육군 51사단은 모락산 터널 위에 ‘평화의 쉼터’를 조성,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모락산전투’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백운산, 수리산 등 안양일대 산악지역에서 중공군과 에서 벌인 전투다. 수원 북쪽 지지대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출하려는 유엔군과 이를 막기 위해 모락산 정상부근에 1개 대대를 배치한 중공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1년 1월 31일부터 나흘간 모락산(385m) 정상고지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 국군 1사단과 미 25사단, 터키군은 합동작전을 벌여 중공군 물리쳤다. 중공군 663명을 사살하고 90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군도 70명이 전사하고 200여명이 부상했다. 유엔군이 모락산 등 이 일대 전투에서 이겨 군사적으로 중요한 1번, 47번 국도를 장악함으로써 안양을 거쳐 인천과 서울 영등포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이로써 한강 이남에 주 저항선을 구축, 한강 이북을 사수하려 했던 중국군을 물리치고 수도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국방부는 6.25전쟁 전사자 400여구 발굴을 목표로 오는 11월까지 전국 55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한다. 8개월에 걸친 유해발굴사업은 경기도 파주와 양평, 강원도 화천 등 5곳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씨줄날줄] 어산지는 어디로/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어산지는 어디로/박록삼 논설위원

    미국 정부의 각종 기밀을 공개해 7년째 런던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망명생활을 해 온 줄리언 어산지(48)가 지난 11일 영국 경찰에 붙잡히자 스웨덴과 미국 정부가 각각 그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어산지의 망명 생활은 그가 운영한 폭로전문매체인 ‘위키리크스’에 미국 정부로서는 감추고 싶었던 외교전문 등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호주 기자로 아이슬란드에 본부를 둔 위키리크스에 그는 해킹으로 확보한 각종 정보를 폭로했다. 2010년 4월 미군 아파치 헬기가 이라크 민간인을 사살하는 영상을 비롯해 같은 해 7월에는 7만여 건의 아프가니스탄전쟁 기밀을 공개했고 10월에는 이라크전 비밀 자료 등을 무더기로 폭로했는데,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하는 동안 살인, 강간, 고문 등 가혹행위를 일상적으로 했는데 정부가 방관했다는 것이다. 12월에는 수십만 건의 미 국무부 외교문건을 추가로 공개했다. 물론 은행, 사이비 종교, 제약회사 등도 그의 고발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 국무부, CIA 등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됐지만, 어산지는 ‘글로벌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적 이해관계 및 법제도를 적절히 이용해 어산지는 미국을 비웃어 가며 도피 생활을 했다. 호주에서 태어난 뒤 유랑극단을 운영하는 부모와 함께 곳곳을 떠돌았던 그는 위키리크스로 각종 기밀을 폭로할 때는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스웨덴에서 주로 활동했으나 거기서 성폭행 혐의로 피소되자 2010년 영국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보석된 상태에서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 망명 신청을 했다. 2년 전 에콰도르에 친미 성향의 모레노 정권이 들어서고, 전ㆍ현직 대통령의 호화생활에 대한 비리가 폭로되자 에콰도르는 어산지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게 됐다. 미국은 그를 기밀 누설 혐의에 간첩(반역) 혐의로 수배했던만큼 신병 인도를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최대 사형까지 가능한 혐의다. 스웨덴에서는 그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상태인 만큼 그를 데려오려 하고 있다. 반면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상대적으로 우호적 여론이 많은 호주에서 재판받길 원한다. 어산지에게 간첩죄를 적용해야 할지 아니면 각국에 공익적 내용을 폭로한 만큼 내부폭로자로 봐야 할지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르다. 세계 지배질서가 이미 국경을 뛰어넘은 만큼 언론인의 역할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평가도 있다. 아직 영국정부가 어산지에게 최종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법적 판단을 받도록 할지는 알 수 없다. 망명생활 7년 만에 ‘꽃중년’ 어산지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노인이 다 됐던데, 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 손들고 항복하는 北 소년들…한국전쟁 흑백사진, 컬러로 부활

    손들고 항복하는 北 소년들…한국전쟁 흑백사진, 컬러로 부활

    한국전쟁(1950~1953)의 참상이 담긴 흑백사진이 색을 머금고 컬러로 재탄생됐다. 사진은 영국에서 전기기사로 일하는 로이스턴 레너드(55)가 한 장당 4~5시간가량 작업한 끝에 완성됐다. 남동생을 등에 업은 어린 소녀와 탱크, 적군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미군의 모습 등 전쟁의 잔혹함이 컬러로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권총을 든 미군 앞에서 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북한 소년들의 사진. 1950년 9월 20일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에는 매복 중이던 미군에게 붙잡힌 북한 소년들이 담겨 있다. 권총을 겨눈 미군 뒤로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탱크가 보인다. 1951년 6월 고양시 행주산성 부근에서 남동생을 등에 업은 남한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M-26 탱크 앞에 서 있는 모습 역시 인상 깊다.1950년 8월 부산 방어선 전투에서 다친 군인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 미군 사진도 컬러로 복원됐다. 부산 교두보 전투로도 불리는 이 싸움은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동안으로 모든 병력을 후퇴시켜 방어선을 재편한 작전이다. 이를 통해 부산항으로 병력과 물자를 안정적으로 보급받은 유엔군은 9월 18일 반격 전환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1950년 9월 미 해병대가 널브러져 있는 적군의 시체를 지나치는 모습도 보인다. 반자동 소총을 메고 가슴까지 흠뻑 젖은 미군이 논두렁을 달려가고 있다. 죽음이 일상인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1950년 11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2주간의 혈투 끝에 중국군에게 패해 퇴각하던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제7연대의 사진도 볼 수 있다.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의 사진도 제 색깔을 찾았다. 총을 들고 탱크에 올라 있는 사진 속 8명의 영국 군인은 중국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임진강을 건넌 600명의 영국군은 중국군 1만 명을 사살하고 59명의 사상자를 냈다.이번 복원작업을 이끈 레너드는 “이번 작업은 그저 오래된 흑백사진이 아닌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이 그대로 담긴 사진이라 의미가 남달랐다”면서 “역사를 잊지 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음 세대를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야만 했던 가족들의 아픔을 상기시키는데 일조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美 시카고 첫 ‘동성애 흑인 여성’ 시장 탄생

    美 시카고 첫 ‘동성애 흑인 여성’ 시장 탄생

    흑인 여성이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며 정치 신인인 로리 라이트풋(가운데) 전 연방검사가 2일(현지시간) ‘거물급 정치인’ 토니 프렉윈클 쿡카운티 의장을 누르고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56대 시장 당선을 확정한 후 지지자들 앞에서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미국 3대 도시인 시카고에서 흑인 여성이 시장이 된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힌 시장도 시카고 역사상 없었다. 시카고는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도시로 분류된다. 이런 시카고에서 3가지 조건을 갖춘 정치 무경험자 시장이 탄생한 데 대해 현지 언론은 “부패한 시카고 정치에 신물 난 유권자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선거사에 새로운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라이트풋은 민주당 소속으로 2014년 흑인 소년 총격 사살 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경찰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돼 이름을 알렸다. 다음달 20일 취임식을 열고 임기를 시작한다. 시카고 AFP 연합뉴스
  • 5·18 가해자와 피해자 ‘치유의 악수’ 나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발생한 ‘주남마을 학살사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처음으로 만나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상처를 다독인다. 5·18기념재단은 오는 12일 오후 2시 30분 서구 치평동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제주와 광주, 베트남을 기억하다’를 주제로 한 ‘2019 광주 평화기행 워크숍’을 연다고 2일 밝혔다. 5·18 당시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 학살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홍금숙(여·54·당시 춘태여상 1년)씨와 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계엄군의 양민학살을 증언한 7공수여단 출신 A씨가 참여한다. 1980년 5월 23일 7·11공수여단이 화순 쪽으로 가던 25인승 버스를 총격해 승객 18명 중 15명을 숨지게 했다. 부상자 2명은 11공수 부대원에 의해 확인사살을 당했다는 게 당시 33대대 중사였던 A씨 증언이다. 이후 A씨는 극우인사들의 협박과 행패에 시달렸다. 홍씨와 A씨의 만남을 주선한 기념재단은 이들의 5·18 트라우마 해소 과정을 보여주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제주4·3 및 여순사건 유족에게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계기를 만들 생각이다. 길게는 5·18항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민중을 미 군정과 극우단체들이 무력 진압하면서 집단항쟁을 불렀고, 6·25 종전 뒤인 1954년 9월까지 계속됐다. 여순사건도 같은 해 10월 19~27일 이승만 정권이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에게 제주4·3사건 진압을 명령했으나 거부하고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숱한 사상자를 냈다. 이기봉 기념재단 사무처장은 “사건 당사자 등 사전 선발된 25명만 참여한 가운데 비공개로 예정됐지만 참석자 동의를 전제로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집 잘못 찾은 19세 청년에 집 주인 “제대로 찾아왔다”며 사살

    집 잘못 찾은 19세 청년에 집 주인 “제대로 찾아왔다”며 사살

    미국에서 집을 잘못 찾은 19세 흑인 청년이 집주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뉴욕타임스와 CBS 등 현지 언론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애틀랜타의 한 아파트에서 여자친구 집을 찾으려다 다른 집 문을 두드린 19세 청년이 그 집에 살던 30대 남성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8일 밤 12시 30분 일을 마친 오마리안 뱅크스(19)는 여자친구인 자케리아 마티스(23)의 집으로 향했다. 뱅크스는 8개월 전부터 마티스의 아파트에서 동거 중이었다. 그러나 늘 여자친구가 마중을 나왔고 뱅크스는 근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일도 마티스는 뱅크스와 영상통화를 하며 그의 귀갓길을 함께 했고 그가 집앞에 도착하자 문을 열어주었다. 분명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마티스의 집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남자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수화기 너머로 뱅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티스는 “남자친구가 집 앞에 도착했다고 해 나가봤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면서 “그 사이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에게 집을 잘못 찾았다고 사과하는 뱅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설명했다. 잠시 후 낯선 목소리의 한 남자가 뱅크스를 향해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부었고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마티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목에 총을 맞은 채 쓰러진 뱅크스를 발견했다. 경찰은 뱅크스가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뱅크스는 여자친구의 집과 매우 비슷한 다른 집 문을 잘못 두드렸고 그 집에 살던 대리 L. 바인스(32)가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바인스는 경찰 조사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바인스의 사촌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바인스는 다섯명의 아이를 둔 무고한 아버지일 뿐이다. 지난주 트럭을 도난당해 예민해져있는 상태였고 그저 아이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바인스가 사과하는 뱅크스에게 “제대로 찾아왔다”고 비아냥거리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부은 점과 도망가는 뱅크스를 향해 세 발의 총을 난사한 점 등을 고려해 인정하지 않았다. 매티스는 “뱅크스는 귀갓길에 항상 전화를 걸어온다. 나는 그가 집 앞에 도착하면 늘 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날따라 엉뚱한 출입구로 들어섰다 변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뱅크스의 모친 리사 존슨은 “아들은 이제 막 독립을 한 사회초년생이다. 내 품을 떠난지 1년 도 채 되지 않아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존슨 여사는 “아들은 분명 실수를 사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목숨을 구걸하며 도망가는 사람을 향해 세 발이나 총을 쏠 수 있느냐”며 “한눈에 봐도 어린 아이를 향해 악랄하게 총을 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오열했다. 경찰은 바인스를 살인혐의로 기소하고 보석 없이 구금한 상태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팔 ‘위대한 귀환 행진’ 1주년 4만명...이스라엘 실탄에 4명 사망

    팔 ‘위대한 귀환 행진’ 1주년 4만명...이스라엘 실탄에 4명 사망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위대한 귀환 행진’ 시작 1주년을 맞은 30일(현지시간) 4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사르엘 분리장벽 인근에서 반(反)이스라엘 집회를 열었다. 이스라엘군은 돌과 불붙은 타이어 등으로 저항하는 시위대를 총격했다. 이날 알자지라 등은 “이스라엘군이 실탄을 쏴 4명이 숨지고 207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사망자 4명 가운데 3명이 17세 소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마일 하니야 최고지도자도 시위 현장을 방문했다.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장벽으로 간다. 우리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위에 나선 또 다른 시민은 “이 잔인한 포위 공격을 멈춰달라. 우리는 우리의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3월 30일 위대한 귀환 행진이 시작된 뒤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군에 사살된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258명이다. 사망자 대부분은 가자지구 분리장벽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7000명에 이른다. 특히 지난해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주재 미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을 때에는 가자지구 일대에서 시위가 격화됐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62명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당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엔테베 작전 때 인질들과 끝까지 남았던 ‘영웅’ 바코 기장 별세

    엔테베 작전 때 인질들과 끝까지 남았던 ‘영웅’ 바코 기장 별세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엿새 동안 인질극을 벌인 테러범들이 이스라엘 핏줄이 아닌 승객들을 풀어줄 때 이를 마다하고 인질로 붙잡힌 승객들과 끝까지 함께 했던 프랑스인 기장 미셸 바코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받았던 바코 전 기장은 프랑스 니스에서 숨을 거뒀는데 크리스티안 에스트로시 니스 시장은 “고인은 영웅이었다. 반유대주의와 야만에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프랑스에도 영예를 안겨줬던 인물”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영국 BBC가 27일(현지시간) 전했다. 엔테베 구출 작전은 20세기 가장 극적인 여객기 공중납치 드라마 가운데 하나였다. 고인이 몰던 에어프랑스 AF-139 편은 1976년 6월 27일 승무원 12명과 26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리스 아테네를 경유했는데 이 때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조직원 둘과 연인 사이인 독일인 둘이 탑승해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다. 인질범들은 바코 기장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기수를 돌릴 것을 요구해 리비아 벵가지에 착륙했다. 그곳에서 연료를 주입한 뒤 다시 이륙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적어도 세 명의 팔레스타인 무장 전사와 우간다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간다 통치자 이디 아민이 기체 바로 앞까지 마중 나와 환대한 일은 세계인의 공분을 샀다. 인질범들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54명의 수감된 무장조직원 석방과 5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인질범들은 열악한 터미널 안에서 인질들을 지내게 했고, 화장실이나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핏줄이 아닌 사람들은 먼저 풀어줘 파리로 떠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바코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풀려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 12명은 94명의 이스라엘 승객과 끝까지 남았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7월 3일 공항 터미널을 습격해 인질범 둘을 사살하며 납치극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바코 기장은 인질범 중 한 명이 다른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발사해 세 번째 인질범이 숨졌다고 밝혔다. 고인은 2016년 BBC 인터뷰를 통해 기장으로서 “승객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며 “팀원들에게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우리는 풀려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모든 팀원들이 예외없이 따라줬다”고 돌아봤다. 당시 생존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베니 데이비슨은 바코 기장이 롤모델로서 전체 인질들을 대표해 인질범들이나 우간다 당국자들과 얘기하며 이끌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바코가 최후 통첩을 하듯 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며 “우리와 남겠다고 용감히 얘기하고는 승무원들에게 ‘난 결정을 내렸으니 여러분은 각자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하더라. 그러자 모두가 그와 함께 끝까지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일간 ‘Yedioth Ahronoth’ 인터뷰를 통해선 “프랑스가 우리를 구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보다 더 가까운 아프리카에 프랑스 군대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누군가 우리를 구하려고 달려와줄 것이란 건 알았다”고 말했다. 또 바코 기장의 용감한 태도는 인질로 붙잡힌 모든 어린이들에게 강한 영감을 불어넣어 지옥의 모든 문이 열리더라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본보기로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이 얘기는 ‘로보캅’을 연출한 호세 파딜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영화 ‘엔테베 작전’으로 제작돼 지난해 6월 국내 개봉했는데 갖가지 혹평 속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大田’ 노잼 도시? 상상 이상~ 꿀잼 도시!

    ‘大田’ 노잼 도시? 상상 이상~ 꿀잼 도시!

    ‘노잼 도시!’ 대전 안팎에서 대전을 ‘재미없는 도시’라고 말한다. 관광자원이 부족한 게 아니라 홍보 부족 등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이 적잖다. 대전세종연구원은 지난해 9월 대전 관광 이미지에 대한 평가 연구보고서에서 2017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가장 많이 노출된 단어가 지역의 유명 빵집 ‘성심당’이라고 분석했다. 한밭수목원, 유성, 장태산휴양림이 뒤를 이었다. 외지에 가게를 내지 않아 성심당 빵을 맛보려면 대전까지 와야 해 외지인이 ‘빵투어’를 온다는 소문까지 있지만 관광지들을 제치고 앞서 있는 것은 분명 의외다. ●2021년까지 ‘방문의 해’… 지속적 사업 이 보고서를 작성한 윤설민(39) 연구위원은 19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전 관광의 문제는 자원 부족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 투자 및 관광지 연계 시내 교통망 등 부족이 원인이다”며 “올해 시가 ‘대전 방문의 해’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사업과 홍보에 나선 것은 적절하고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대전은 올해 시 출범 70주년, 광역시 30주년을 맞았다. 이에 따라 대전시는 올해부터 2021년까지 3년을 방문의 해로 정하고 지속적으로 사업을 벌여 대전 관광의 초석을 놓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2022년 ‘대전 여행 1000만 시대’를 연다는 것이다. 대전은 1993년 ‘대전엑스포’가 개최된 뒤 대규모 행사가 없었고, 관광객도 줄었다. 2017년 대전을 찾은 여행객은 329만명으로 전국 8개 특별시·광역시 중 5위에 그쳤다.●문화예술·과학·힐링·재미 등 4대 인프라 구축 시는 ‘대전 방문의 해’ 컨셉트로 문화예술, 과학, 힐링, 재미를 내세웠다. 새로운 여행 콘텐츠를 개발하고 관광 인프라를 구축한다. 우선 대청호 주변 대덕구 이현동 두메마을을 ‘할로윈 마을’로 만들어 오는 10월 핼러윈 페스티벌을 연다. 마을에는 호박 터널도 만들어진다. 대청댐과 가까운 이곳에는 대청호오백리길이 닦여져 있고 억새가 수북한 생태공원이 있어 가을 정취까지 만끽할 수 있다. 내년 4월부터는 국내 최대 도시 정원인 둔산신도시 한밭수목원에서 ‘디지털 정글’이 연출된다. 홀로그램 영상으로 사자와 코끼리 등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한밭수목원 옆 이응노미술관에서는 그의 예술혼을 한껏 되살린다. 이응노거리가 조성되고 그의 작품이 설치된다. 이응노(1904~1989)는 충남 홍성 출신이지만 초창기 대전에서 활동했고, 프랑스 화단을 풍미한 세계적 거장이다. 대전역에서 가까운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에서 다음달부터 매주 토요일 밤 EDM(먹고 춤추고 음악 듣고)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인근에는 중앙시장과 성심당도 있다.●224개 성씨 유래비 ‘뿌리공원’ 등 이색지 인기 대전의 문화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이응노미술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구 선화동 옛 충남도청과 관사촌,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강학하려고 지은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효종 때 송준길의 별당으로 보물 209호인 동춘당(대덕구 송촌동), 중구 중촌동 대전형무소 등 문화재가 널려 있다.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옛 충남도청은 영화 ‘변호인’, 드라마 ‘미스티’ 등을 찍은 촬영의 명소이다. 독특한 장소도 꽤 있다. 중구 침산동 보문산 자락에 있는 뿌리공원은 전국 유일의 효와 성씨(姓氏) 테마공원이다. 전국 244개 문중의 성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부지 12만 5000㎡가 공원처럼 꾸며져 주말이면 3500여명이 찾는다. 대덕구와 동구에 걸쳐 대청호가 보이는 계족산 황톳길도 이색적이다. 길이가 14.5㎞에 이른다. 지역 소주업체를 인수한 조웅래 맥키스컴퍼니(옛 선양소주) 회장이 2006년 산길에 황토를 깔아 만들었다. 보문산 자락에 다양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수족관을 갖춘 아쿠아리움이 있고, 동물원과 꽃동산과 놀이시설을 갖춘 오월드도 흥미롭다. 이곳 동물원은 지난해 9월 퓨마 사살 사건으로 논란을 낳았지만 충청권은 물론 호남지역 주민들도 많이 찾을 정도로 인기다.●6개 정부출연硏 연구성과 오픈랩 운영 대전은 또 첨단 과학과 순수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도시다. 대덕연구단지 중심의 대덕특구가 있어 ‘과학도시’로 불린다. 시는 항공우주연구원 등 6개 정부출연 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전시하는 오픈랩을 조성한다. 국내 최고 과학 대학인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과 연계해 과학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추진한다. 이를 통해 정부출연 연구소 26개 등이 있는 이곳으로 초중고 학생 수학여행을 유치한다는 전략이다. 충청권의 식수원인 대청호는 생태 여행 코스다. 예술가와 대청호오백리길을 산책하며 자연을 감상하고 얘기를 나눈다. 도자기 굽기 등 체험도 한다. ●성심당·칼국수 인기… 보문 체류형 단지 눈길 맛집도 널리 알린다. ‘전국구’인 성심당 말고도 대전은 칼국수로 유명하다. 10월에 칼국수축제까지 열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중구 대흥동 스마일칼국수집에서 지역 경제인들과 점심을 먹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대전이 왜 칼국수로 유명하냐’고 묻자 허태정 대전시장은 “한국전쟁 직후 대전역에 전국에 보낼 원조 밀 보관소가 있었고 제분공장이 많았다”고 답했다. 대전시는 방문의 해 범시민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허 시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아 대전 홍보의 첨병으로 나선다. 시민과 전문가, 지역 기관 등이 홍보단으로 활동한다. 이미 부산, 광주, 인천 등을 돌며 “대전으로 관광 오세요”를 외치고 있다. 다음달부터 주당 한 차례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무궁화호 ‘대전방문열차’를 운행한다. 시는 대전 출신 종합격투기대회 UFC 김동현 선수 등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이들은 유투브와 SNS 등을 통해 대전의 맛집, 관광지 등을 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시는 이 기간 관광 인프라도 적극 건설한다. 보문산 체류형 여행단지 조성이 눈에 띈다. 전망대에서 오월드까지 3.4㎞에 곤돌라를 설치하고 오월드 인근에 중부권 최대 워터파크와 500실짜리 유스호스텔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전망대 부지에 높이 170m 타워도 세운다. 올해 짚라인, 번지점프 등을 즐길 수 있는 4곳을 시내에 만들고 내년까지 모두 10곳으로 늘릴 계획도 있다. 이제창 관광정책팀장은 “소소하지만 관광객에게 추억이 될 수 있는 역동적인 체험시설을 만들려는 것”이라고 했다. 엑스포과학공원 내 첨단 과학관을 활용해 300명 이상이 즐길 수 있는 이스포츠 상설 경기장을 만들고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체험센터도 조성한다. 한선희 문화체육관광국장은 “기존 테마형 시티투어 버스를 매일 운행하는 것으로 확대하고 주말에 뿌리공원 등 남부권, 한밭수목원 등 북부권, 대청호권 등 3개 코스의 순환형 시티투어를 추가해 관광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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