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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의 호국인물 김종오 육군대장

    6.25전쟁의 영웅 김종오(金鐘五·1921.5.22∼1966.3.30) 예비역 육군대장이전쟁기념관이 뽑은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김 장군은 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50년 대령으로 제6사단장에 부임할 때까지 사직리전투에서 북한군 1개 대대를 유인,섬멸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에서 인제까지 90km에 이르는 지역의 방어작전을 펼쳐 6월29일까지 춘천∼홍천지역을 지켜냈다.덕분에 서부전선의 부대들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한 것은 물론,유엔군이 증원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후 음성 무극리 및 동락리전투에서 적 15사단을 기습,2,186명을 사살하는전과를 거뒀으며,초산의 압록강변에 가장 먼저 태극기를 꽂았다. 그는 특히9사단장으로 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백마고지전투에서 8,000여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 1만5,000여명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1만4,3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휴전 이후 1군단장,5군단장,육군참모총장을역임한 뒤 65년 육군 대장으로예편했다.현역시절 태극·을지·충무무공훈장과 미국 십자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3共통치일지’로 본 5·16](1)5·16이후 한달

    16일은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지 39년이 되는 날이다.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 치하의 18년은 아직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되고 있다.그러나 최근 발견된 ‘國家再建最高會議(국가재건최고회의) 議長室(의장실)’의 ‘日誌(일지)’는 당시 시대상황을 쿠데타 세력의 시각에서생생하게 기록한 데다 종래의 다른 자료와는 달리 윤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최초로 공개된 쿠데타 세력의 공식일지를 통해 쿠데타 직후부터 1968년까지의 상황을 4회에 걸쳐 정리한다. ‘未明(미명) 軍部(군부)에서 無血革命(무혈혁명).軍事革命(군사혁명)委員會(위원회) 設置(설치).政權引受(정권인수)를 宣言(선언).全國(전국)에 非常戒嚴令(비상계엄령)’-60년대 우리 현대사의 굴곡은 한줄의 검은색 펜글씨로시작되고 있었다. 지난 61년 5·16쿠데타 당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이 작성한 ‘日誌(일지)’ 첫페이지 첫째줄이다.오른쪽 상단에는 ‘4294.5.16.火’라고 적혀 있다.‘4294’는 단기로 1961년을 뜻한다.A3용지를 가로로 뉘어 한줄씩 국한(國漢)혼용으로 기록한 일지는 ‘혁명’‘중요업무’‘국내외뉴스’ 등의 항목별로 분류돼 있다. 특히 5·16 이후 한달 남짓 기간에는 입법·행정·사법 등 주요부문의 장악상황,정치·경제·사회 등에 걸친 사후조치,쿠데타를 긍정 평가한 국내외 언론의 기사제목 등을 주로 기록했다.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쿠데타 세력의 속내를 반영하고 있다. 16일치 일지는 ‘未明…非常戒嚴令’에 이어 ‘혁명위,각급 의회 해산.전국무위원 체포 명령’‘혁명군 전국 중요도시 장악.전기능 일시 완전 정지’‘UN군 사령관,질서회복과 휘하 장병 금족령(禁足令)’‘그린 대리대사 윤대통령과 회담’ 등으로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요약했다. ‘각급교 임시휴교 상태,관청 집무정지,시가 평온,상가 한산,전방 이상없음’이라는 대목에서는 당시 쿠데타 세력의 상황 판단을 읽을 수 있다.이들의자체 평가는 다음날 일지에 ‘군부무혈 쿠데타 완전 성공,혁명위 3권 완전장악’이라는 문구로 드러난다. 이때부터 최고회의는 쿠데타 정권의 권위를 세우고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해용공혐의자,반혁명세력,부정축재자,폭력배 등을 집중 단속한다.공직자 가운데 병역미필자,축첩자,무단 결근자 등도 철퇴를 맞았다. 17일에는 ‘용공분자 단속을 지시’했고,18일에는 ‘폭력배 1,500명을 검거’했다.‘용공분자 2,000여명을 검거’(22일)했고 ‘깡패를 탄광으로 보내근로정신을 체득토록 지시’(23일)했다.‘일간신문 76건,일간통신 305건,주간신문 453건의 등록을 취소’(27일)하고 ‘국민학교 과외수업을 엄금토록지시’(29일)한 점도 눈에 띈다. 또 일지에 적힌 국내외 동향은 대부분 친(親)쿠데타 성향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통치일지가 정사(正史)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쿠데타 세력이 역사적·국제적 정통성 확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18일 육사생에 이어 19일에는 공사생이 ‘혁명대열에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 시위’를 벌였다고 적었다. 때로는 남북 대치 상황이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 확보 논리로 동원됐다.‘공산세력 지구 남반부로 침투,미국 케네디 대통령 연설’(6월2일),‘재일동포에 반공이념 재교육 의결’(8일),‘국방장관 임전태세 완비 천명’(9일),‘월남 공산반도 100여명 사살’(11일),‘한국 군사혁명정권은 방공 강화,맥나마라 국방장관 상원 외교위서 증언’(15일) 등을 부각시킨 점이 이를 방증한다. 기동취재소팀. *JP와 5·16. 4·13 총선 이후 신중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자민련 김종필(金鍾泌·JP·)명예총재가 5·16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 측근은 JP가 16일 오전 서울 한 호텔에서 열리는 5·16 민족상 시상식에참석한 뒤 국립묘지에 들러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 내외 묘소를 참배한다고 밝혔다.18일에는 재단법인 ‘5·16 민족상’ 임원과 오찬도 함께한다. 5·16 39주년을 맞은 JP의 심정은 대단히 착잡한 듯하다.총선 참패로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데다 ‘보수본류’의 법통을 잇는다고 자처한 자민련도 창당 이래 최대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15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자민련 낙선자 권역별 간담회에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돌연 취소했다.측근은 “날마다참석하기 어려워아예 처음부터 불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이런 와중에 지난해 결별했던 한국신당 김용환(金龍煥)의장의 갑작스런 방문은 그에게 다소 힘이 된 것처럼 보인다.JP는 지난 13일 밤 청구동 자택을 찾은 김의장을 반갑게 맞아들이며 “선거때 고생이 많았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5·16때마다 ‘내각제’를 비롯한 정치적 화두를 던져온 JP가 과연 올해에는 어떤 속내를 비칠지 주목된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5)브란트 슈토프 회담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직접 회담을 통해 양쪽의 심각한 견해차를 확인했다.에르푸르트는 시작일뿐이며 2차회담을 갖는 것 이상의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접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진 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서독으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던진 첫마디다.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에 대한 환상없이 침착하게 긴장을 제거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겠다며 ‘거짓된 희망’을 경고했다. 1945년 종전이후 25년만에 열린 정상회담은 긴장완화를 위한 대외적 여건변화를 동서독이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969년은 2차대전 종전후지속돼온 동서간 냉전구조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해였다.미국과 소련간전략무기감축조약(SALT I) 협상이 시작됐고 나토도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상호균형감군협정을 제안했다.3월 동서화해를 추구해왔던 하이네만의 서독 대통령 취임,4월 서독의 ‘동독 국가승인’ 방침이 발표됐다.10월 ‘동방정책’을 제창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민당 연립정부가 출범했다.브란트 총리는취임연설에서 “서독 정부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은 고려될 수 없지만독일에는 두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뿐”이라고 밝혔다. ‘두개의 독일 인정 발언’은 동독을 소련의 위성국가로,‘비합법적’국가로 간주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 단절까지 불사하는 ‘할슈타인원칙’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야당은 즉각 반(反)통일노선,분단고착화,심지어 ‘매국행위’라며 비난했다.반면 동독은 두달 뒤인 12월 서독에 무력사용·위협 포기,외교관계 수립 등을 요구,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브란트는 동독이 국제법상 승인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직접 동독총리를 만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70년 1월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 앞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전달했다.슈토프도 이에 즉각 합의했다.양측은 곧바로 실무접촉에 들어갔고 4차례의 실무접촉과정에서의제가 아닌 회담장소가 최대의 난제로 떠올랐다.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가길 원했고 동독은 서독 정상의 베를린 장벽통과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결국 제3의 장소인 동독의 에르푸르트로합의했다. 3월19일 브란트가 탄 기차가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동독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숙소인 ‘에르푸르트 호프 호텔’까지 몰려와 환호하는 군중앞에 나서 이들을 진정시키던 브란트의 모습을 지켜보는수행원들 눈엔 눈물이 고였다. 회담장 밖의 분위기와는 달리 회담장안은 냉랭했다.동독은 군비감축, 유엔동시가입,국제법상 동등한 관계수립 등 7개항을 요구했다.서독은 동·서독은서로 외국이 아니며 양측의 선린우호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등 6개항을 제시했다.양쪽은 각자의 입장만 확인한 뒤 5월21일 서독의 카셀에서 2차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두달뒤 카셀 2차회담도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차때처럼공동성명도 발표하지 못했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쪽은 공존의 필요성을 공감했다.실무접촉은 계속 돼 기본조약이 체결된 72년 12월21일까지 70여차례나 열렸다.73년 9월 유엔동시가입,74년 3월 상호대표부개설로 이어졌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10월 통일때까지 양독은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조금씩 가까워짐으로써 변화를 촉발한다’는 브란트의 접근이 결실을 맺었다. 김균미기자 kmkim@. .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 인류평화·공존 철학속에 동방정책을 싹틔운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옛 동서독인을 막론하고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913년 12월18일 북부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소비조합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사회당원인 외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성장한 그는 17세때 독일사회민주당 당원이 돼 반나치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히틀러 집권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노르웨이로 망명,종전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49년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독일 정계에 입문한 뒤 15년만인 64년 당수로 선출된다.69년 자민당과 제휴,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창출하고 총리에 올라 ‘동방정책’을 밀고 나갔다.동서독 정상회담 개최등 공로로 71년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87년 사민당 당수직 사임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의장직을 6회 연임하면서 국제정의 실현과 인권신장에 앞장섰다.92년 10월8일 운명했다. *슈토프 당시 동독총리. 빌리 브란트의 상대였던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는 1989년 거세게 전개됐던반정부 시위에 밀려 사임할 때까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치하의 마지막 총리로 일했다. 1914년 7월9일 베를린 출생인 그는 벽돌공과 기술자,건축설계사 등으로 일했다.그는 동독의 내무·국방장관 등을 비롯해 공산당과 행정부에서 요직을두루 역임했다.70년 1차 정상회담직후 브란트 서독 총리로부터 ‘확고하고경직된 견해를 가진 정치가로 다루기 매우 어려운 회담 상대’로 불리웠다. 89년 10월18일 호네커 실각으로 함께 사임했다.사임하고 이틀 뒤 여행규제가 풀리면서 동독인들의 대탈출극이 벌어졌다.독일이 통일된지 1년만인 91년 60년대 베를린 장벽과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됐다.92년 이와 관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됐다. 독일 정부는 99년 4월19일 그의 사망소식을 발표했다.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다. 김균미기자
  • 살인·테러…요동치는 반군

    *필리핀. 서방 관광객 등을 볼모로 한 필리핀 회교반군들의 반정부 게릴라 투쟁이 3일정부 목표물에 대한 폭탄 공격과 인질 사살로 확대되는 등 필리핀 정부와 반군간의 대립 사태가 격화되는양상을 보이고 있다.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회교반군들은 이날 남부 민다나오 섬의 헤네랄산토스 시청사와 시장 등 세 곳에 동시다발적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군 정보보고에 따르면 이 폭탄 테러로 15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다. 반군들은 이와 함께 코타바토시 인근의 한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를 강제로세운 후 이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70명을 인간방패로 삼아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다.앞서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은 정부측과의 평화협상이 결렬된후 민다나오섬 전역의 정부·군사 시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1만5,000여명의휘하 반군들에게 하달했다.반군들의 이날 공격은 최근 수년만에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현재 필리핀내에서는 반군들의 대정부투쟁이 확산됨에 따라 민다나오섬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고 있다.필리핀 대통령궁은 그러나 정부가 현재 민다나오 섬의 치안을 잘 유지하고있다며 비상사태 선포 가능성을 일축했다.한편 서방인 등을 인질로 억류하고있는 회교반군단체 아부 사이야프는 3일 남부 바실란 섬에서 대대적인 인질구출 작전을 벌이고 있는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가톨릭 성직자 등 적어도 4명의 인질을 사살했다 말했다. 삼보앙가·코타바토(필리핀) AFP AP 연합. *시에라리온.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유엔평화유지군(UNAMSIL)과 반군 혁명연합전선(RUF)간에 충돌이 발생,유엔군 7명이 살해되고 3명이 부상했으며 유엔군과 옵서버 등 50명이 인질로 잡혔다고 유엔대변인이 3일 밝혔다. 반군들은 지난 1일부터 수도 프리타운 북동쪽 140㎞ 지점 마케니와 마그부라카 등 유엔군 기지 두 곳을 공격,3일까지 교전을 벌였다.인질 한 명은 3일석방됐으나 나머지 인질 21명은 마케니와 마그부라카에,28명은 카일라훈에분산 수용돼있다. 유엔 안보리는 2일 비상회의를 소집,사태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등 비상체제에 돌입했으며 반군 지도자 포다이 산코는 3일 저녁 유엔군 억류사태 해결을위해 ‘즉각적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또 ▲평화정착을 위한 대화 계속 ▲RUF점령지역에서의 유엔군과 인도주의적 업무 봉사자 및 민간인들의 자유활동 보장 ▲지난해 7월 체결된 평화협정에 따른 무장해제를 약속했다.그러나 산코는 그동안 식언을 거듭,서방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원인 유엔의 무장해제에 대한 반발.91년부터 내전을 벌여온 정부군과 RUF는 지난해 반군의 정부전복 시도가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반군 정부군이 1만3,000점의 무기를 유엔군에 반납,거의 무장해제한 반면반군은 4,000개만 반납한 채 여전히 시에라리온 동부·북부지역 등 다이아몬드광산 밀집지역을 장악하고 있다.국토의 절반.이중 마케니는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리는 반군의 요새.무장반군 수는 1만5,000명이며 지도자 산코는 지난해 11월 정당을 구성하고 정부의 광물전략위원회의장직을 맡고 있다.반군은다이아몬드를 인근 라이베리아 등에 판매,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이지역장악 유지를 위해 유엔군과 계속 충돌하고 있다. ●유엔 유엔의 시에라리온 평화정착 의지는 강력하다.소말리아,르완다,브룬디 내전에 개입하고서도 대학살을 방지하지 못한 유엔은 시에라리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필사적이다.현재까지 8,000명을 파견했다.94년 르완다 대학살시 평화유지군 책임자로 있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1만1,000명까지 증파할 계획.이번 사태로 증파 시기가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이 경우 분쟁지역에 파견된 유엔군 사상 최대 규모가 된다. 김수정기자 crystal@. *스리랑카.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타밀반군과 스리랑카 정부군간의 17년 내전에서 정부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무장반군단체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는 지난달말부터 자신들의 문화적 수도로 여기는 자프나에 대한 공세를 강화,정부군이 고립되면서 스리랑카 정부가 전시체제 돌입을 선언하고 공공안전법을 발효시킨 것.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스리랑카 대통령은 이날 반군과의 전쟁에 재원을 투입하기 위해 앞으로 3개월간 불요불급한 개발사업을 전면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스리랑카는 또 공공안전법 발효에 따라 특정재산을 몰수하고 신문 등 인쇄물의 발행을 중단시키는 한편 전쟁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시위를 금지시킬 수 있게 됐다. 스리랑카는 1,900만 인구 가운데 4분의3 정도가 불교를 믿는 싱할리족이고힌두교도인 타밀족은 6분의1 정도인 320만 정도.타밀족은 48년 스리랑카가영국으로부터의 독립한 직후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해 왔다.양 민족간 무장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83년 LTTE가 자프나에서 경찰관 13명을 살해한데 대한보복으로 타밀족 수천명이 피살되면서부터.다수민족인 싱할리족으로부터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타밀족들은 그 이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고 17년에 걸친 내전을 통해 약 6만여명이 희생됐다. 인도는 스리랑카에 인도적 지원은 제공할 수 있으나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지금의 정황으로는 자프나가 반군들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이며 자프나에 갇힌 정부군 4만명을 어떻게 대피시킬것인지가 큰 문제로 떠올랐다. 자프나는90년에도 반군들에 장악된 바 있다.반군들은 95년까지 약 5년간별도의 입법·사법·행정부는 물론 소규모 해군까지 거느려 사실상 독립국역할을 했었다.자프나의 함락은 오는 8월 총선을 앞둔데다 민족갈등 해결을공약으로 집권한 쿠마라퉁가 대통령으로서는 정치·군사적으로 큰 패배가 될것이다. 유세진기자 yujin@. *콜롬비아. 반군과의 오랜 내전에 지친 콜롬비아 국민이 요즘 단단히 화가 났다.아무리 납치사건이 극성이라지만 9살난 어린이까지 납치해 간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콜롬비아 국민들은 연일 시위를 벌여반군의 후안무치를 규탄하며 피납 어린이를 하루빨리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콜롬비아 내전 종식을 위한 어린이 평화단체의 대변인역을 맡고 있는 다고베르토 오스피나군이 납치된 것은 일주일 전 하교길에서 였다.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무장괴한 3명이 갑자기 버스를 세운 뒤 차 위로 올라와학생들의 가방과 노트를 뒤적이다 ‘다고베르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가방의주인공을 납치해달아났다.다고베르트군은 콜롬비아 어린이 130명으로 구성된 평화단체인 ‘평화의 건축가들’의 회원으로 얼마전 TV에 출연,“어른들은 이제 내전을 그만둬달라”며 간절히 호소해 유명인사가 됐다. 아들이 납치되자 어머니 글로리아 오스피나씨는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까봐 무척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콜롬비아에서는 지난해만도 3,000여건의 납치사건이 발생했으나 어린이 납치는 거의 드문 일이어서 국민들의 분노는 어느 사건때보다 더하다. 멕시코시티 연합
  • 쿠앙남에 베트남전 희생자 위령탑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다음 달 2일 베트남 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과 베트남 군인을 위한 위령탑 건립 착공식에 참석한다.또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는 30일 베트남을 방문,양민학살 진상조사에 나선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소속 참전 군인들은 20일 “다음 달 2일 베트남 인민위원회와 함께 쿠앙남 하미마을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과 군인들을 위한위령제를 가진 뒤 위령탑 기공식을 갖는다”면서 “오는 9월2일 베트남 해방의 날에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행사 참석자는 참전 군인 16명과 자원봉사자 18명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참여연대,국제민주연대 등 12개 단체가모여 지난해 12월 발족한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도이날 “정부는 시민단체와 공동조사단을 구성,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에대해 적극적으로 진상을 규명하는 한편,베트남 정부와 국민에게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회는 오는 30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베트남에 조사단 4명을 파견,양민학살 현장을 방문한다. 이에 앞서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씨(65·예비역 대령)는 지난 18일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66년 베트남 중부지역 베트콩 소탕작전 기간 중 양민 40여명을 집단으로 사살했다”고 진술했었다. 이랑기자 rangrang@
  • “한국군 베트남전 양민학살”첫 증언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 양민학살이 있었다는 당시 참전장교의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씨(65·예비역 대령)는 18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66년 11월 베트남중부지역 쿠앙응아이성(省) 선틴현(縣)에서 베트콩 탐색소탕작전중 비무장 청년 29명과 부녀자및 노인등 40∼50명을 집단 사살한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같은해 11월14일에는 산굴 수색과정에서 20∼35살 정도의 비무장청년 29명을 체포,모두 사살했다”면서 “이들을 남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넘길 계획이었으나 대대로부터 월맹군 매복조에게 포위당한 인접 6중대를 구출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져 더 이상 데려가지 않고 모두 사살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해사 14기 출신으로 66년 10월부터 67년 11월까지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며,그 뒤 해병 1사단 파월특수교육대교관,김포보안부대장,해군첩보부대장,국방부 대간첩본부정보과장 등을 지내고 지난 8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국방부고위관계자는 비공식 논평을 통해 “당시 작전상황일지 등의 자료를통해 김씨 주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면서 “그러나베트남참전장병들의 명예와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
  • 창군이래 첫 ‘해외파병 3형제’탄생

    창군 이래 처음으로 ‘해외파병 3형제’가 탄생했다. 특전사 7공수여단 임정섭(林正燮·40)상사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두 형님의뒤를 이어 18일 동티모르로 떠난다. 큰형 희선씨(熙善·74년 작고)는 67년 4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67년 암캐오 작전 당시 베트콩 5명을 사살,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작은 형 희만씨(熙萬·53)는 현재 3공수여단에서 원사로 근무중이다.70년맹호부대원으로 참전,용맹을 떨쳤다. 임원사는 32년째,임상사는 15년째 특전부대에 근무중이다.두 형제는 모두대통령경호실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강하횟수 1,000여회,무술합계 10단인 ‘무적’이다. 임상사는 “두 형님의 월남전 참전에 이어 동티모르에 파견되는 상록수부대원으로 선발된 것이 영광스럽다”면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 조국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파키스탄 마시가등 3명 세계아동상 첫 수상자

    [스톡홀름 AFP 연합]아동들의 노예노동에 항거하다 95년 12살의 나이로 살해된 파키스탄의 이크발 마시가 7일 ‘어린이 노벨상’으로 통하는 세계아동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15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는 또 나치의 유태인수용소 생활을 담은 일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안네 프랑크(13)와76년 남아프리아 공화국의 소웨토에서 사살된 헥터 피터슨(12)도 초대 수상자로 결정했다. 스웨덴이 새 밀레니엄 계획의 하나로 마련한 이 상의 시상식은 13일 있을예정인데 어린이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실비아 여왕이 직접 수상자들의 친족들에게 상을 수여한다.
  • [김삼웅 칼럼] 정치인관련 병역비리 근절하라

    ‘문민정부’ 시절 ‘아직도….’시리즈가 나돌았다. “아직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느냐”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일부 계층 자제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힘깨나 쓰는 집안치고 자제를 현역에 보낸 경우는 드물었다. 지금도 현역 국회의원 298명 가운데 28.2%인 81명이 병역을 면제받았고 국회의원 자제의 군복무 면제율이 22%에 이르고 있다.일반인들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특혜 아니면 비리의 소산이다. 병역비리를 수사중인 군·검합동수사반이 정치인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아들 66명을 총선 전에 소환·조사할 방침을 밝히자 야당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연루된 정치인 대부분이 야당 소속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사를 총선뒤로 미루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병역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수사는 끝장이다.정형근 의원 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1년 내내 방탄국회를 연 야당이 이번에도 소속 의원들을 ‘보호’하려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병역비리자를 투표 이전에 밝혀 유권자들의 선택에 착오가 없도록하는 것이 옳다.따라서 야당은 병역비리 수사를 ‘탄압’이라고 정치공세를펼 것이 아니라 협조해 털 것은 미리 털어내고 선거전에 임하는 것이 보다떳떳할 것이다.병역비리 연루자에 야당 인사가 많은 것은 그들이 집권 시절에 저지른 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표적사정이나 야당탄압으로 몰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입만 열면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정치인들이 본인은 물론 자제들까지 병역을기피시키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이런 못된 버릇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말해 준다. 6·25전쟁 당시 일선에서 전투하다 쓰러진 병사들이 ‘빽!빽!’하며 죽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오르내렸다.‘빽(Power)’이란 한자 조어가 나돌기도 했다. 배경을 뜻하는 실 사변에 돈을 의미하는 쌀 미(米)자와 쇠 금(金)자를 조합해 자를 만들었다.이름하여 ‘빽 빽’이란 조어다. 예나 이제나 든든한 배경과 돈만 있으면 ‘신성한’ 군대를 안가는 것이 정설처럼 돼 있다.시중의 ‘무전(無錢)입대’‘유전(有錢)면제’란말이나 “현역은 어둠의 자식들,보충역은 사람의 아들,면제는 신의 아들”이란 우스갯소리(?)도 이런 세태를 대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역은 지도층이 솔선수범했다.고대 로마에서는 군역을 마친 사람에게만 국정참여 자격을 주었다.근래에 이르러 각국 지도자들은 자식을 솔선해서 전장에 보냈다.한국전쟁때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은 장남을 참전시켰는데 그는 최전선에서 복무하다전사했다. 스탈린도 장남을 대독전쟁에 포병장교로 참전시켰다가 독일군에게사살됐다. 조지프 케네디는 해군장관에게 미국 대통령이 될 존 케네디를 최전방으로 배치해 주도록 ‘청탁’해 케네디는 PT-109호뢰정 정장(艇長)이 돼일본 수송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전쟁때 영국 앤드루 왕자는 자원해 해군장교로 임관,참전하고 왕실은 동의했다.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은 육군 소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고,벤플리트 장군 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며,아들이 없었던 존슨 대통령은 사위를 베트남 전쟁에 참전시켰다가 전사했다. 아들이나 사위 하나쯤 전선에 보내지 않을 만큼 실력을 갖고 있었던 권력자들인데도 그러지 않았다.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사회정의와 도덕성 담보의 준거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의무를 기피하고 권리만 누리려는 자들은 위선자다.남의 자식들만 일선에 보내고 제자식은 면제시키거나 해외로 빼돌리는것은 범죄다.높은 신분(노블리스)에는 책임과 도덕성(오블리제)이 따른다. 듀란트는 ‘역사의 교훈’에서 로마제국이 망한 원인을 “조국을 위해 싸울건강하고 애국적인 전사(戰士)를 로마군단에 공급했던 농업인구가 소수가 소유하는 농장의 농노(農奴)로 대체되면서 로마가 약화됨을 안 야만인들의 침입” 때문이라고 정의했다.국가를 이끄는 국회의원과 지도층 인사들이 군대도 못가는(안가는) 약골이고 그 아들들까지 그렇다면 국가의 운명이 어찌될까.군·검합동수사반은 정치권 눈치를 보지 말고 이 기회에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의 병역비리를 뿌리뽑아야 한다.
  • [사설] 난장판에 무력한 공권력

    국법질서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선거철만 되면 국가 공권력과 행정력이맥을 못쓰는 지난날 악습이 되살아 나는 듯한 작태를 우려한다. 공권력은국민의 생명과 개인 및 공공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이 국가기관에위임한 권력임에도 이해집단의 폭력 앞에 무시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잘못된 현상이다. 공권력 훼손은 민주제도의 위기로 사법당국의 철저한 대응책이 요구된다. 우리는 최근 민원인들이 제주도의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도지사를 폭행하는 사태로 이어진 공권력부재 풍조를 심히 우려한다.민원인들 주장의 옳고그름을 떠나 어찌 의회가 특정집단에 의해 점령당하고 자치단체장이 의회 안에서 폭행당할 수 있단 말인가.폭력은 가까이 있는데 공권력은 멀찌감치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공권력 무기력증상은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아도 심각한 정도다.얼마전 동두천시장실이 운수업체 농성원 방화로 불길에 휩싸여 사상자가 발생했고 범죄자가 공범을 구한다며 파출소에 찾아가 소동 끝에 사살되기도 했다.또 불법선거운동을 감시하고 단속해야할 선관위직원이 거센 저항에 부딪쳐 철수하는가 하면 탈법 정치인이 출석요구를 묵살하는등 법의 권위가 말이 아니다. 이같은 풍조는 선거를 앞두고 공권력이나 행정력을 우습게 보는 일부 사회집단·계층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다.때만난 듯 자신들의 억지와 이익을집단행동을 통한 협박과 폭력으로 관철하려는 분위기이다.이를 제때에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법보다는 목소리 크고 주먹 센 사람이 지배하는무법 탈법지대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단호하고 정당한 공권력 집행의지가 요구된다. 불법·탈법 집단행위에는 공권력이 즉시 개입해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정치·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공권력 집행기관의대응의지가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그동안 행정기관이 무리한 집단민원에도 우유부단한 자세를 보이는가 하면 사법기관은 가급적 개입을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공권력이 흔들리면 모든 사회규범이 무너지게 마련이다.탈법은 더 큰 탈법을 부른다.물리적인 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집단이기주의는 법적 대응이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이다.선거철 불법집회·농성·시위 등의 동향을 사전에 파악해 대응하고 탈법행위는 엄하게 다스려야만 법치의 질서를 세울 수있다. 검찰과 경찰은 선거를 빌미로 한 각종 탈법적인 집단 행동이 예상되는 만큼동향을 철저히 파악해 예방에 힘쓰는 동시에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즉각 대응하는 태세를 갖춰야 한다. 이익집단이나 단체 역시 과거와 많이 달라진 현실을 직시해 무리한 행동을 삼가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 泰경찰, 인질범 9명 사살

    22시간동안의 태국 병원 인질사건은 진압작전으로 끝을 맺었다. 태국 특수부대는 25일 새벽 미얀마 반군 ‘신의 군대’가 점거하고 있던 라차부리 병원을 급습,9명의 인질범들을 사살하고 450여명의 인질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했다. 태국 제1군구 사령관인 타비프 수완나싱 중장은 기자들에게 이날 “작전은성공적이었다”며 이같이 말하고 인질범 1명이 부상하고 다른 1명이 달아난것같다고 덧붙였다.작전에서 경찰 2명도 부상했다. 타비프 중장은 16명의 인질범들이 있었다는 언론보도를 부인했다. 언론들은 6대의 트럭에 분승해 병원에 도착한 특수부대가 자동소총과 지뢰탐지기로 무장한채 이날 새벽 5시40분쯤 병원에 진입할 당시 최소한 12번의폭발음과 소총소리가 들렸다고 전했다. 앞서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 반군중의 하나인 ‘신의 군대’ 소속 인질범들은 24일 새벽 미얀마와 태국 접경지역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오전 7시쯤 병원을 점거,인질극을 벌였다. 인질범들은 미얀마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부상한 게릴라의 치료허가,카렌족난민의 태국입국 허용,태국군의 박격포 공격중지 및 미얀마 정부의 공격중지 중재 등의 5개항을 요구했다. 신의 군대는 지난 97년 생겨난 신흥 반군으로 태국 국경에서 30마일(47㎞)서쪽의 미얀마내 정글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0여개 반군으로 구성된 카렌족민족연합(KNU)에서 떨어져 나온 소수 집단이다.200여명의 무장병력으로 구성된 신의 군대는 12살짜리 조니와 루터 쌍둥이가 이끌어왔다. 박희준기자 pnb@
  • 기아, 법정관리 벗어난다

    기아자동차가 17일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에 법정관리 해지신청을 냈다. 부도기업이 법정관리 1년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법정관리 해지신청을 내기는 처음이다.이는 사실상 경영정상화를 뜻한다.아울러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행에 빌미를 제공했던 기아의 회생은 한국경제가 확실히 되살아났음을 반증하는 의미가 있다. 기아의 성공요인에는 뼈를 깎는 자구노력 외에도 현대와 통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 및 정몽구(鄭夢九)회장의 적극적인 현장경영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얼마나 회복했나 연말결산 결과 8조6,000억원의 매출과 1,800억원이라는창사 이래 최대흑자를 냈다.법정관리 개시 당시(98년 4월15일) 5조2,000억원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 2조6,000억원의 순자산을 기록했고,810%를 웃돌았던 부채비율도 172%로 낮아졌다.지난해 경영실적은 98년보다 판매실적(85만대) 79.6%,매출액(8조6,000억) 67.8%의 신장세를 보였다. ●성공 요인 감원과 재무구조 개선 등 구조조정 노력이 정상화를 앞당겼다. 아시아자동차 등 완성차제조 및 판매담당 5개사를 1개사로 통합,연산 60만∼70만대 수준에서도 수익성을 낼 수 있도록 조직을 줄였다.국제입찰 과정에서 4조8,000억원의 부채탕감과 1조원대의 현대 주금납입액,대규모 출자전환으로 금융비용 부담을 대폭 낮췄다.경제성있는 카니발,카스타,카렌스 등 LPG용RV(레저)차량 중심의 판매전략을 폈다. 기아차 엄성룡(嚴成龍)이사는 “현대와의 통합후 노조원들이 ‘노사화합 선언’으로 회사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면서 “정몽구회장이 환난극복차원에서 불철주야 기아차에 쏟은 정성이 회생의 밑거름이었다”고 평가했다. ●과제는 현대의 기아차 인수당시 부채탕감액에 대한 세금 5,900억원 추징문제가 부담이다.국세청은 지난해말 기아가 제기한 법인세 심사청구를 기각했다.국세청이 법인세 추징을 강행한다면 완전 정상화까지 걸림돌로 작용할 수있다. 육철수기자 ycs@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사천 마곡리서도 美機에 13명 희생”

    6·25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에 의해 6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사살된 경남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부근 마곡리에서도 미군 전투기에 의해 주민 13명이사살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마곡리 양민학살피해대책위(위원장 姜英春)는 10일“인근 조장마을에서 폭격이 있던 다음날인 50년 7월30일 정오쯤 미군 전투기가 마을 앞 제방에 모여 있던 주민 150명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13명이 숨지고10여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미군기로 보이는 비행기 5대가 마을 주위를 순찰하고 간 직후 전투기 4대가 날아와 사격을 했다”며“당시 주민들은 흰 옷을 벗어 흔들며 사격 중지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피해 주민들은 이날 대통령과 국방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사천 이정규기자 jeong@
  • 러, 체첸에 “11일까지 항복하라”

    체첸공화국 수도 그로즈니 주변 전략요충지를 모두 포위한 러시아가 6일 그로즈니 주민들에게 피신하지 않을 경우 모두 사살할 것이라고 최후통첩,미국·유럽연합(EU)등 서방측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 연방군 사령부는 이날 그로즈니에 전단을 살포,체첸 반군과 주민들이 오는 11일까지 피신하거나 항복하지 않을 경우 그로즈니를 완전히 파괴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최종시한을 넘겨 그로즈니에 남는 주민들은 테러리스트나 비적(匪賊)으로 간주,전투기 공격과 포격 등으로 전원 사살할 것”이라고 말하고 더 이상 협상은 없다고 경고했다. 현재 그로즈니에는 4만∼5만명의 민간인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체첸 반군 지도자및 정치인들은 이미 그로즈니를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러시아 연방군은 주민들에게 페르보마이스카야 정착촌으로 가는 통로를안전하게 확보해 주고 난민들에게 집과 음식물, 의약품 등 생필품과 생명을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텐트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현재 4,0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없는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후통첩이 보도되자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러시아의 모든 민간인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협박과 군사행동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그는 “피란시한 설정은 노약자와 부상자 등 그로즈니를 떠날 수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협박”이라면서 “러시아의 국제사회내 위상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밝혔다.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도 6일 브뤼셀 회담에서 성명을 발표,“민간인에 대한 심각한 고통을 야기하는 어떠한 무력사용도 부적절하고 무분별하다”면서 최후통첩 철회를 요구했다.이란 등 50개 회교국으로 구성된회교회의기구(OIC)대표들도 6일 모스크바에서 “전투를 즉각 중단,외교적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이같은 서방의 경고를 일축,“체첸공격은 국가안보를 위한 내정문제”라면서 강력한 러시아 건설이 서방이 러시아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사설] 체첸사태 국제사회 나서야

    체첸사태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회교게릴라 소탕을 명분으로 3개월 이상 체첸공화국을 공격하고 있는 러시아군이 수도 그로즈니 주민들에게오는 11일까지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모두 사살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3개월 이상 계속된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미 수천명이 사망하고 3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체첸사태는 이제 더이상 러시아의 국내문제로외면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며 사태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불가피한 단계라고 본다. 전투기와 탱크를 앞세우고 체첸의 주요 도시들을 거의 장악한 러시아군은수도 그로즈니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나서고 있다.그로즈니의 2㎞ 외곽을 완전 포위한 채 봉쇄작전을 펴고 있는 러시아군은 최종시한을 넘겨 그로즈니에남는 주민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나 반군’으로 보아 무차별 공습이나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현재 그로즈니 시내에는 피난도 제대로 갈 수 없는 노약자들이 대부분인 4만∼5만명의 주민들이 식량부족으로 기아상태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격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누구나 쉽게짐작할 수 있다.체첸사태가 비록 러시아의 주장대로 국내문제라 할지라도 러시아의 그로즈니 공격을 그대로 묵인할 경우 국제사회는 또하나의 비인도적인 참극을 방관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저지하기 위해 나선 것은 당연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약자와 부상자 등 그로즈니를 떠날 수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협박’이며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고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도 최후 통첩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란 등 50개 회교국들로 구성된 회교회의기구(OIC)도 체첸사태의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단순한 경고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공격을즉각 중단시키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유엔 등 국제사회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체첸사태가 체첸의 오랜 독립운동에서 비롯됐든,러시아의 복잡한 정치상황때문이든,그 원인은 지금 단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코소보사태에버금가는 인류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은 막아야 하며 그것이 국제사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국제평화를 유지하고 러시아와 서방간의 재대결을 미리 막기 위해서도 체첸사태 해결에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 [의열 독립투쟁](12)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28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남대문로 2가)과 동양척식회사(을지로 2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공격 대상이 토지를 장악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집중되던 일제의 기관이었으니 조선인들로선 그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씻어주는 쾌거였다.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나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1세에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였다.15세에 고향 마을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해신학문을 배우고,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養山學校)를 다녔다.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 의사를‘제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나 의사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고자맹세하고 1913년 21세때 1차 망명길에 올랐다.만주로 건너간 그는 북간도를거쳐 이동휘(李東輝)가 개설한 나자구(羅子溝)의 무관학교에 입학,군 간부로 성장하였다.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사리원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한 그는 결국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말았다.훗날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게 된 것은 이 일이 한 계기가 됐다.3·1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겸이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미곡상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1920년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을 계획하였다.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한 후 일경에 쫓기던 그는 마침내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마련을 위해 중국으로 제2차 망명길에 올랐다.상해로 간 나 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백범 김구 밑에서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 드는 밀정을 찾아내 박멸하고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특히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의 경찰과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 의사가 소속된 경무국 경호원들은 정보수집과경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들어 김구·여운형(呂運亨) 등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이는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 양성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1922년 10월 조직한 것이 한국노병회다.정부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하니 한 사람이라도 군사훈련을받아 군사요원이 되고 또 노동자가 돼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 출전하는 계획이었다.즉 한 사람이‘노동자’요‘병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군간부 양성을 위해 요원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나 의사는 첫 요원으로 파견된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3년 초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교,사관훈련을 받고 이듬해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그는 국내 침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세가지구도 위에 전개되고 있었다.임시정부와 한국노병회를 대표해 김구,제2차 유림단의거를 진행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그리고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金元鳳)이라는 세 세력의 협조에 의해 나 의사를 비롯한 요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는 투쟁이었다.즉 김구가 키운 군사 간부로서,김창숙이 국내 유림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원으로서 국내로침투하는 것이다.목표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5년 중국인으로부터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국내로 잠입하고자 하였다.그 과정을 보여주는 나 의사의 서신(금년 6월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 4권에 실림)을 보면 그가 천진에서 이승춘(李承春) 한봉근(韓鳳根)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내 침투용 선박 구입자금을 준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계획이 연기되다가 끝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변경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고,실행은 1926년으로 연기되었다.마침 1926년(병인년) 1월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조직됐다.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가 정체현상을 보이자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나 의사는 여기에 가입한 후 국내 침투계획을 재추진,1926년 12월26일 단독으로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마중덕(馬中德)이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갖고 들어왔다. 이틀 뒤인 12월28일 오후 2시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불발이었다.곧바로 인근 동양척식회사로 이동한 나 의사는 일본 경찰과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 불발이었다.거사 준비과정이 너무길다보니 폭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나 의사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자 마침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나의사는 숨지기 전 본인의 이름과 의열단 소속이란 것만 밝혔을 뿐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순국하였다./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나석주 의사 후손과 추모사업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대치 끝에 권총으로 자결,순국한 후 장남 응섭(應燮)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순국 직후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당시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무런 표식이나 봉분도 만들 수 없었는데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수 없다.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나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다.장남은 일찍 사망하고 장녀 응서(應瑞·1918년생)는 9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현재 나 의사는 직계 후손이 절손된 상태다. 지난 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나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당시동양척식회사 본점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 터)에서 나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추모 단체로는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으며 동상 건립도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결과다. 나 의사는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 노·사·채권단 3위일체, 대우전자‘눈물의 自救’

    최근 워크아웃(기업개선계획)이 확정된 대우전자에서 노·사와 채권단 3자가 회사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장과 임원이 솔선수범하고 있다.장기형(張基亨) 대우전자 사장은 이달들어 매일 오전 6시30분에 출근,7시부터 ‘비상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한다.수출임원과 사업부서장,채권단이 참여하는 이 회의는 회사매출의 80%를 차지하는 해외 바이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장 사장은 다음날 가판신문 기사를 직접 점검하고서야 사무실을 나선다. 사원들도 이달부터 자발적으로 퇴근 시간을 오후 6시에서 10시 이후로 연장했다.신제품 개발기간을 단축하고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다.덕분에 내년 개발예정이던 살균세탁기 등 3개 신제품이 이달 출시됐다. 노조도 ‘회사제품 하나 더 팔기 운동’을 시작했다.김수도(金秀道)위원장은 “노조원과 사무직원이 회사제품을 공장도가에서 20% 할인된 가격에 팔고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화답하듯 채권단도 사기를 올려야 회사가 살 수있다며 지난달 말 100%의 특별보너스를 전 직원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추승호기자 chu@
  • [베를린 장벽 붕괴10돌] (하) 축하행사 이모저모

    [베를린 남정호 김규환특파원] 장벽붕괴 10주년을 맞은 9일, 베를린에서는장벽붕괴 및 독일 통일과 관련된 각종 기념행사와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려21세기 통일독일의 새비젼과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축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냉전 종식의 주역들인 콜 전 총리와 부시 전 미대통령,고르바초프 전 옛소련 대통령이 행한 기념 연설.베를린 장벽 붕괴 및독일 통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들 ‘3인방’이 차례로 연방하원에등장,‘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상황’의 회고 및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념 연설을 하자 연방하원 의원들은 물론 독일 시민들이 일제히 열렬한박수로 환영. ●장벽 붕괴 10주년 행사와 관련 최고의 인기는 고르바초프 전대통령.그가브란덴부르크문 인근 아들론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몰려가 ‘고르비’‘고르비’를 연호.이때 고르바초프가 딸 이리나와 손녀 아나스탸사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악수를 하려는 사람들로 운더텐린번대로의 교통이 한때 마비되기도.그는 또베를린의 유명 보석상 옌스 로렌츠씨로부터 독일 통일에 이바지한 공로로 ‘평화의 시계’로 명명된 최고급 시계를 선물 받았다. ●전날 베를린 명예시민증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합군 박물관에서 열린 ‘베를린의 해방-조지 부시와 독일 통일’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시회에 참석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행보. ●베를린 시청에서는 부대행사로 장벽 붕괴일인 지난 89년 11월9일 출생한어린이들을 초청,‘독일 통일의 꿈나무’ 행사를 열어 이들이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 통일의 정신을 이어가도록 격려. ●요시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과 게메르크 폴란드 외무장관은 베를린 시청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일조한 겐셔 전 서독 외무장관과 추쿠비스 츠브스키전 폴란드 외무장관에게 ‘독일·폴란드’상을 수여.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설치된 야외 특설 음악당에서는 3만명의 청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 대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에서 첼리스트 무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등 세계적 거장들의연주에 이어,팝그룹 스콜피온스우도 라덴베르크가 각각 ‘변화의 바람’‘베를린을 환영합니다’를 열창.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때 수십발의 기념폭죽이 터져 하늘을 수놓자 시민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 베를린 장벽 붕괴후의 동유럽 변화상 ‘동구 국가들의 새 세기 시작은 2000년 1월1일이 아니다.10년 전인 1989년11월9일 이미 시작됐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철의 장막 음지에 있다 지난10년간 숨가쁜 변화를 겪어온 동구(지리적으로는 발트해에서 발칸반도)국가들에게 베를린 장벽붕괴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 말이다. 지난 91년 구 공산권국가들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9일 연례보고서에서 중부 유럽국가들과 발트국가들이 내년에는 올해 경제성장 전망치인 1.6%의 두배에 해당하는 3.2%까지 성장할 것으로 추정했다. 동구 발전의 선두그룹은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과 접경,유로리전(Euro Region)등의 실험적인 경제및 환경협력 모델을 운영하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체크 등 ‘동구 3룡(龍)’.지난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한데 이어 정치·경제 안정의 척도라할 유럽연합(EU) 가입을 눈앞에 두고 유럽 옛공산권 국가들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89년 동독인들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철의 장막을 처음 깨뜨린 헝가리는 이 지역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10년전 2,000달러이던 1인당 GDP는 지난해 4,500달러가 됐다. 붕괴 이전부터 동구지역의 반공산혁명 선봉장 역할을 했던 폴란드는 지금도4,000만에 가까운 인구와 경제력으로 중부유럽 최대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10년전 3,200달러이던 1인당 GDP가 5,000달러로 증가했다. 지난 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결별했다.체코는 옛 반체제 인사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지도아래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그러나 슬로바키아는 90년대 내내 권위주의적 정부의 영향으로 유럽 최대 빈국으로 간주돼온 저성장국.그러나 지난해 친 EU성향 새정부 출범으로 장족의발전을 거듭하고 있다.옛 유고연방 국가들 가운데는 슬로베니아가 1인당 GDP1만달러를 넘기며성공, EU 가입 최우선 대상국 대열에 합류했으며 90∼91년각각 독립을 선언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도 이웃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도움으로 놀라운 경제변신을 이룩했다. 그러나 개혁이 오래 지체됐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그리고 계속된 분리 전쟁과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유고등은 불안정한 정치,절름발이 경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공산 종주국이었던러시아는 지난 97년 금융위기 이후 성장률이 0%에 머물고 절대 빈곤층이 7,400만명으로 증가하는 등 경제,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못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인터뷰] 구동독 마지막 국가원수 에곤 크렌츠 [베를린 남정호 특파원] “지난 89년 11월9일부터 11일까지의 사흘동안은 내 생애에 가장 길고도 어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8일 장벽붕괴 10주년을 맞아 베를린 개인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에곤 크렌츠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62)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현재 각종 강연과 집필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그해 10월18일 실각한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선출된 후,한달도 채 안된 11월9일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맞은 비운의 동독 마지막 국가원수이다. “브란덴부르크문 앞 장벽 위로 수천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기어올라와 장벽이 무너지고 국경이 뚫릴 상황이었습니다.이때 우리가 가장 우려한 것은유혈 이었습니다.소련이 어떻게든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9일밤 동독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동서독 국경선 개방 공표는 ‘피 대신 샴페인’을 터뜨리게한 결정이었습니다.” 동·서 베를린 국경개방은 당시 양측의 적대상황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것이었다는 그는 그때만 해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독일통일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89년 11월1일 고르바초프와 4시간동안 회담했을 때 독일통일은 의제에도없었습니다.당시 바르샤바조약기구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을 해체하고자한 정치가는 동서진영 어디에도 없었고 고르바초프 입장도 그랬습니다.” 그는 “그러나 장벽이 무너진뒤 12월2∼3일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부시 미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서 갑자기 통일이 결정됐다”며 “89년 당시 소련은 ‘이미 임종을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동독의 몰락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말했다. 80년대 초 호네커와 슈미트 서독 총리간의 회담 이후 호네커와 소련 공산당지도부 사이에는 상호불신이 팽배해 있었다는 크렌츠는 89년 11월9일밤 동서독 국경개방 결정도 소련의 군사적 개입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전 미리 내린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오후 내려진 연방대법원의 동서독 국경탈주자 사살명령 혐의에대한 상고기각 판결에 대해 “동서독 장벽은 옛소련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탈출자에 대한 발포 결정은 군사적 성격의 결정이었습니다.그러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고 강조하며 연방헌법재판소에 심판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크렌츠는 97년 8월 베를린 지방법원에서 6년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했었다. * 베를린장벽 붕괴 관련어록 [파리 AFP 연합] 유럽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붕괴는 기억할 만한 발언들을 많이 남겼다. ●미스터 고르바초프,이 장벽을 부숴 버리십시오.(로널드 레이건 전 미대통령,89년 6월12일 브란덴부르크문에서)●장벽은 그것이 세워진 여건들이 변하지 않는 한 남아 있을 것이다.장벽은앞으로도 50년,아니 100년 동안도 존재할 것이다.(에리히 호네커 구동독 공산당 서기장,89년 1월19일)●소련은 동유럽 이웃들의 문제에 개입할 도덕적,정치적 권리가 없다.그들은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대통령,89년 10월 핀란드 방문시)●동독인들은 가고자 하는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이 조치는즉각 발효된다.(귄터 샤보브스키 옛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89년 11월9일기자회견에서)●우리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매우 슬픈 일들을.(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89년 11월9일)●나는 방금 베를린으로부터 도착했다.엄청난 사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헬무트 콜 서독 총리,89년 11월10일)●베를린 장벽에 처음 금이 간 것은 80년 8월 폴란드 전역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파업사태 당시였다.(아담 미흐닉 폴란드 반체제 인사,99년 11월)●나는 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미하일 고르바초프,99년 11월)
  • [베를린 장벽 붕괴10돌] (중) 베를린市 축하행사 이모저모

    [베를린 남정호 김규환특파원] 베를린 장벽 28년.전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던 이데올로기적·정신적 분단의 벽을 육체의 벽으로까지 전이(轉移)시켰던 그 세기의 장벽은 마침내 허물어졌다.그리고 또 10년이 흘렀다.베를린시는 8일 그 제일의 주역중 한 사람인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시민증을수여했다. 에버하르트 디프켄 베를린시장은 이날 명예시민증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베를린시가 어렵던 시절 영국과 프랑스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서베를린시의 자유를 지켜줬으며,전후(戰後) 베를린 세대에게 민주화와 문화를 꽃피우게 했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줬다”며 “부시 전 미 대통령에 대한 베를린 명예시민증 수여는 전체 미국시민들의 영예”라고 밝혔다.그는 “독일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장벽 붕괴에 따른 동서베를린 통합에 공로가 큰 부시 전 미 대통령은 오늘부터 베를린 시민”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베를린 명예시민증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8명.지난 1826년 콘라드 리벡이 첫번째 명예시민이 된 이후,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콘라드아데나워·빌리 브란트·헬무트 콜 전 총리,리처드 폰 바이츠제커·로만 헤어초크 전 대통령 등도 포함됐다.부시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등 미국인으로서는 다섯번째이다. ●지난 89년 11월4일 100만명의 동베를린 시민이 모여 민주화와 서독으로의여행자유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던 알렉산더 광장에는 장벽 붕괴 10주년을맞아 시민들이 자신의 감회를 적어 붙이는 게시판이 등장,시민 및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게시판에는 ‘동독 인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정치적 변화를 일궈냈다.행운이 있기를’‘베를린 장벽 붕괴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과 콜 전 총리에게 감사한다’는 등 각양각색의 문구가나붙어 이채를 띠기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독일통일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옛 동독인들(90%)이 서독인들(83%)보다 통일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독일 은행협회가 최근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을 맞아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85%가 ‘옳은 결정’이라고 응답.한편 옛동독인들은통일 자체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와는 달리,그들중 70%가 아직까지 ‘2등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옛 서독인들에 대한 심리적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베를린 장벽붕괴 10주년을 맞아 옛동독 정권에 관련돼 유죄판결을 받은 동독 마지막 서기장 출신 에곤 크렌츠,동독의 비밀경찰 조직 슈타지 첩보실장출신의 마르쿠스 볼프 등의 사면을 놓고 베를린 정가에서 설왕설래. 로타르 드 메지에르 기민당 부당수는 이날 “새천년을 맞는 만큼 20세기의잘못은 묻어줘야 한다”며 이들의 사면을 건의.이에 대해 헬무트 콜 전 총리는 과거 잘못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사면은 시기상조”라고 일축. ●독일 언론은 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3인 주역들의 회고담을 게재해 눈길.콜 전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사건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다. 부시 전 미 대통령은 미국이 잘못 움직이면 소련의 군사개입을 유도할 수있어 자제했다고 회상.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동독 친구들이 국민들에게적대 조치를 취하지 않고 국민들의 의지를 수용한 것은 매우 올바른 결정이라고 격려했다고 반추. khkim@ *당시 駐서독美대사 회고기 1989년 서독주재 마지막 미국대사로 부임해 베를린 장벽 와해와 독일통일을 지켜본 버넌 월터스대사가 8일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 당시를 회고하는기고를 실었다.그의 기고문 ‘내가 목격한 혁명’을 요약한다. 89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주독일 대사로 임명받았을 때 나는 이미 72세였다.고령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부시대통령은 “독일에서 지금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당신같은 노련한 외교관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 예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소련과 동유럽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폴란드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소련은아프가니스탄에서 무조건 철수를 결정했다.그해 4월 22일 독일에 부임했을때 독일통일이 임박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는 부임 첫 회의때대사관 직원들에게 내가 대사로 있는 동안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공언했다.독일 정부관리들을 만나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아무도 내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다.헬무트 콜총리만 예외였다.콜총리는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그것이며 우리도 그걸 위해 노력중”이라고 화답했다. 헤럴드 트리뷴지는 나의 발언을 반박하며 머릿기사로 “지금은 무분별한 독일통일 논란을 벌일 때가 아니다”고 썼다.그러나 동유럽의 변화는 폭풍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했다.수천명의 동독 난민들이 폴란드,체코,헝가리,오스트리아로 밀려들어갔다.라이프치히 등 동독 도시들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숫자가 점점 더 불어났다. 그 무렵 어느날 나는 운터덴린덴가에 있는 동독주재 소련대사 관저에서 그대사와 오찬을 했다.그는 “베를린장벽은 앞으로 100년은 끄떡없이 그대로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나는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했다.소련은 당시 3,900억달러에 달하는 국방비 부담에 짓눌려 더이상 미국과 경쟁할 여력이 없었다.동독의 시위대는 점점 더 과격해졌다.서독 국기가 시위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마침내꼭 10년 전인 89년 11월9일 밤.본에 있던 나는 베를린 미국대표부로부터 전화보고를 받았다. 장벽 검문소 한곳이 열려 동독 주민들이 물밀듯이 밀려나온다는 보고였다.다른 검문소들에도 주민들이몰려들고 있다고 했다.나는 곧장 베를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소련의 반응이 어떨지 알수 없었다.소련이 무력진압에 나설 경우에 대비해 나는 독일정부가 있는 본에 남아있기로 했다. 24시간 뒤 나는 베를린으로 가 헬기로 도시를 한바퀴 돌아보았다.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도로마다 자동차와 인파로 가득찼다.동독국가의 한 구절인 “하나인 우리의 조국 독일”이라는 외침이 거리마다 울려퍼졌다.그날밤 베를린상점들은 문을 닫지 않았다.동베를린 주민들은 상점진열장에 쌓인 오렌지,바나나 같은 과일들을 신기한듯 바라보았다.소련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수천명의 주민들이 망치를 들고 장벽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독일통일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공산체제가 무너지리라고는 예상못했다.압제와 자유의 오랜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자유가 승리한 것이다. 정리 이기동기자 yeekd@ * 당시 東獨지도자들 근황[베를린 김규환특파원]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을 맞아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독 지도자들의 근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인 지난 89년 10월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 체제가 와해되면서 권좌에서 함께 물러난 20명의 옛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 통일당(SED) 정치국원중 11명은 아직 생존해 있다. 이들 생존자 대부분은 은퇴한 뒤 베를린에서 칩거하고 있으나,89년 호네커후임에 선출된 에곤 크렌츠 공산당서기장(62)과 귄터 샤보프스키 전 동베를린 SED 지구당위원장(70)만이 가끔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이 두 사람은 동서독 국경 탈출자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혐의로 지난달 27일부터 연방대법원에서의 상고심이 열린데 이어,8일 결심 공판이 열리기 때문이다. 89년 10월10일 실각한 호네커는 90년 1월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모스크바 도망중 베를린으로 송환돼 동서독 국경 탈출자에 대해 사살명령을 내린혐의로 구속됐다.이후 암투병을 이유로 93년 1월 석방돼 칠레로 망명했으나이듬해 5월 그곳에서 사망했다.옛 동독 총리를 역임한 한스 모드로프(71)는장벽 붕괴 뒤인 90년 실시된 총선에서 메클린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서 당선돼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그러나 거짓 증언 등을 이유로 연방하원 의원직을 박탈당한 뒤 칩거하고 있다. 동독의 비밀경찰조직인 슈타지(국가보위부) 첩보실장 출신인 마르쿠스 볼프(76)는 첩보활동을 한 죄로 재판에 회부됐으나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비공산당원 출신으로 90년 3월부터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그해 10월3일까지 동독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로타르 드 메지에르는 기민당부당수로 아직까지 정계와 연을 맺고 있다.호네커의 후계자로 선출된 크렌츠는 장벽 붕괴 이후 TV 토크쇼에 출연,생계를 이어왔다.특히 91년 ‘장벽이무너진다면’이라는 책을 펴내 2만마르크의 인세를 받은데 이어 신문에 장벽붕괴 당시의 상황을 시리즈로 게재,10만마르크를 벌기도 했다.91년부터 금융중개업에 뛰어들어 매달 5,000마르크를 벌고 있다. 97년 베를린지방법원에서 동서독 국경탈출자에 대한 사살명령 혐의로 6년6개월형을 받아 한때 구속되기도 했다.그는 상고심에서 ‘냉전체제의 희생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샤보프스키는 97년 크렌츠와 같은 혐의로 기소돼 베를린 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현재 상고심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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