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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인 황진이 “사내들은 물렀거라”

    자유인 황진이 “사내들은 물렀거라”

    열다섯의 나이에 자신을 연모하던 사내가 상사병으로 죽자 집을 떠나 기적에 이름을 올린 황진이. 빼어난 미색에 한시와 시조, 노래에도 뛰어난 명기(名妓)로 석학·예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했던 예인이자 자유인으로 통한다. 이 황진이가 무대 위에서 되살아난다. 경기도립무용단이 2007년 기획공연으로 18∼2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 무대에 올리는 무용극 ‘황진이’. 이 무용단 예술감독 조흥동이 2001년 선보였던 것을 전혀 다른 감각의 레퍼토리로 꾸며 6년만에 다시 내놓는 역작이다. 무대의 포커스는, 기녀이지만 결코 천하지 않은 안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꿰뚫어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진이의 인물상 살려내기. 봉건적 윤리의 껍데기를 떨치고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꿈꾸며 살았던 드라마와도 같은 삶이 무용만이 아닌 노래, 연극적 대사, 영상으로 풀어진다. 자신을 사랑하다 죽은 젊은 영혼을 달래는 몸짓으로 시작해 집 떠나는 여인의 심경, 벽계수·서화담과의 만남, 지족선사와의 일화가 다양한 볼거리들에 얹혀 차례로 이어진다. 무용수가 춤은 물론 창과 대사까지 맡아 종전의 전통무용극과는 아주 다른 무대. 전통무용을 토대로 30여개의 장면으로 처리한 극적인 에피소드가 빠른 템포로 전개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출신 작곡가 3명이 호흡을 맞춰 만든 창작곡이 작품 내내 흐르며, 음악도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섞어 현대적 분위기를 살렸다. 황진이 인물에 대한 전문가 고증을 거쳐 경기도립무용단원들의 기량에 한국 고유의 장단·음악을 실은 문화콘텐츠로 다듬어 세계 무대를 향한다는 제작진의 만만찮은 욕심이 담겼다.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 김효경이 연출을 맡았으며, 타이틀롤 황진이 역에 경기도립무용단원 박정미와 김주연이 더블캐스팅. 오후 7시30분.(031)230-3440.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학벌을 깬 사람들] (3) ‘중학중퇴’ 세계적 위폐감식전문가 서태석씨

    [학벌을 깬 사람들] (3) ‘중학중퇴’ 세계적 위폐감식전문가 서태석씨

    “내세울 만한 학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학력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믿을 건 실력뿐이라는 마음으로 37년 동안 위폐 감식 외길을 걸어왔죠.” 한국외환은행 서태석(64) 부장은 위폐 감식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지만 미 연방수사국(FBI) 등이 인정한 세계 최고 수준의 위폐 감식 능력을 지녔다. 그는 2001년 정년 퇴임했지만 독보적인 능력 때문에 곧바로 부장급으로 재채용돼 현장에서 뛰고 있다.2003년에는 ‘이건 가짜야!’로 유명한 외환은행 이미지 광고에 등장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하다. ●정년퇴임후에도 재채용된 독보 기술 그의 이력서 학력란은 경북 영천중학교 중퇴가 전부다. 그는 공부를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철부지 어린시절 놀러다니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공부를 못한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묵묵히 위폐 감식이라는 외길을 걸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1964년 논산훈련소에서 ‘줄을 잘 서는 바람에(?)’ 위폐 감식의 길을 걷게 됐다. 영어 한마디 못한 채 카투사(미국 육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로 입대해 경기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에서 경리사병을 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상관이었던 미군 경리장교로부터 위조 달러 감별하는 법을 배웠어요. 하루는 새로 전입한 미군 신병이 20달러짜리 지폐를 환전하려고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수상한 거예요. 방첩대가 조사를 했는데 결국 위조지폐로 드러났죠. 그게 제 위폐 감별 인생의 첫걸음이 됐죠.” ●40만弗 다섯뭉치 보지도 않고 “이거 가짜” 1966년에 군대를 제대했지만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자리를 찾던 그는 이듬해 1월 외환은행 창설 소식에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당시는 외화를 취급해본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무작정 외환은행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채용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솔직히 무모했죠. 당시 외환은행 직원 태반이 고시 합격한 사람들이었어요. 인사과 직원이 학교장 추천서와 성적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퇴짜 맞고도 계속 전화했어요. 결국 1969년 경비실 소속 일용직으로 영업부 외환계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외국 동전과 지폐를 정리하고 감별하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묵묵히 일한 끝에 실력을 인정받아 1973년 4월에 서무직 직원이 됐다.1983년에는 일반 행원 5급 계장으로 채용됐다. 한국 금융계에서 전무후무하게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일용직에서 시작해 일반직 간부까지 올라선 것이다. 그는 지금도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30분 정도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8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곧 산더미처럼 쌓이는 외국 돈이 그의 손길을 기다린다.1분에 외환 200장을 감별하는 서 부장은 1년에 적발하는 위조 지폐가 평균 10만달러라고 한다. ●“자꾸 학교만 따지니 학력위조 병폐 키워” 그는 지금도 1981년 200만달러 위조지폐를 적발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김포공항 세관에서 40만달러 뭉치 5개를 인수받던 서 부장은 뭉치를 들어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FBI 직원까지 입회하고 뭉치를 개봉해 보니 모조리 위조지폐였다. 처음엔 200만달러나 되는 위조 지폐를 보지도 않고 찾아냈다는 말을 믿지 못하던 미국 직원들도 혀를 내두른 실력이었다. 그는 학력 때문에 차별은 없었지만 섭섭했던 적은 많았다.“누구를 만나든지 사람들은 대뜸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물어봅니다. 중학교 중퇴라고 대답하면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죠.” 2004년에는 유명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요청을 받았다가 이력서를 보내주자마자 취소 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정부기관 강연을 했을 때 어떤 국장은 처음엔 강연 끝나고 직접 인사하겠다고 했다가 이력서를 보고는 자기 부하를 보내서 대신 인사를 시킨 적도 있다. “세상에 제일 더러운 게 돈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이 분야 최고가 된 건 일류 대학 나온 사람들이 하루종일 ‘세균 덩어리’ 만지는 일을 자존심 상한다며 안 맡으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막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도 최고는 있습니다. 자꾸 학교만 따지고 간판만 강조하니까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출세하려는 사람이 나오는 거잖아요. 어느 분야든지 자기 노력으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 하나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글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임채정 국회의장 입원

    임채정 국회의장이 뇌경색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23일 “임 의장이 지난 21일 어지럼 증세로 입원했다.”고 밝히고 “진단 결과 뇌경색으로 판명됐다.”고 덧붙였다.임 의장은 지난 20일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귀경한 뒤 어지럼증과 일사병 증세를 보여 이튿날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병원측은 “현재 약물 투여를 통한 치료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구체적 경과는 일주일 정도 치료한 뒤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20&30] “조건에 얽매이는 결혼은 반대”

    소개팅과 ‘무도회’ 등으로 정신없이 바쁠 스물여덟살 나이에 오성산씨는 이미 결혼 8년차 베테랑 주부다. 친구들 상당수가 결혼을 고민할 나이지만 오씨는 이미 ‘야구광’인 7살짜리 아들과 함께 ‘산전수전’ 다 겪으며 힘들지만 보람있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99년 지금의 남편 장형우(28·현직 기자)씨를 소개팅으로 만나 정확히 1년 만에 결혼한 오씨.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 부모님을 설득해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은 ‘어린 커플’에 결코 관대하지마는 않았다고. “당시에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결혼이 무섭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남들보다 먼저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장 제가 다니던 학교(이화여대)에서도 금혼학칙 규정이 발목을 잡았어요. 결국 교수님들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학칙이 개정될 때까지 ‘휴학’을 하기도 했지요. 이 때문에 한동안 혼인 신고도 못 했고요. 장교로 군복무를 하며 집안 일을 꾸리려던 남편이 갑자기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면서 2년 넘게 가장 노릇을 도맡아야 했어요. 그때 가야금과 피아노 교습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했죠. 그땐 먹고 산다는 괴로움과 남편이 곁에 없다는 서운함에 참 많이 울기도 했는데….” 오씨는 현재 경남 김해시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하다 주말이면 바쁜 남편 장씨를 만나러 서울로 온다.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주말부부 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씨는 지금의 결혼 생활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음. 뭐랄까. 둘 다 모두 순수한 때 결혼해서 그런지 다른 외적인 조건을 기대하지 않아요. 그저 남편이 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요. 저나 남편 모두 ‘첫사랑’이어서인지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거든요. 남편이 몸 건강히 늘 제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요.” 결혼으로 고민하는 또래 친구들을 볼 때마다 오씨는 결혼의 순수한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볼 것을 말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친구들을 보면 이른바 ‘조건’에 얽매어 결혼에 힘들어 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런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이 맘에 들면 결혼하라.’고 말해요. 외적 조건이 사람 됨됨이를 압박해서는 안 되는 게 참된 결혼이니까요.” 끝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묻자 오씨는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전 대학에서도 국악을 전공했고 앞으로도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20대는 결혼이 제 인생을 결정했다면 30대부터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며 살았으면 해요. 전 20대에 또래 친구들이 누렸던 것들을 못 누렸지만 30대에는 반대로 또래 친구들이 못 누리는 것들을 누려 보고 싶어요. 남편이 늘 제게 많은 힘이 돼 줄 거라 믿어요.”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20&30] “조건에 얽매이는 결혼은 반대”

    소개팅과 ‘무도회’ 등으로 정신없이 바쁠 스물여덟살 나이에 오성산씨는 이미 결혼 8년차 베테랑 주부다. 친구들 상당수가 결혼을 고민할 나이지만 오씨는 이미 ‘야구광’인 7살짜리 아들과 함께 ‘산전수전’ 다 겪으며 힘들지만 보람있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99년 지금의 남편 장형우(28·현직 기자)씨를 소개팅으로 만나 정확히 1년 만에 결혼한 오씨.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 부모님을 설득해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은 ‘어린 커플’에 결코 관대하지마는 않았다고. “당시에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결혼이 무섭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남들보다 먼저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장 제가 다니던 학교(이화여대)에서도 금혼학칙 규정이 발목을 잡았어요. 결국 교수님들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학칙이 개정될 때까지 ‘휴학’을 하기도 했지요. 이 때문에 한동안 혼인 신고도 못 했고요. 장교로 군복무를 하며 집안 일을 꾸리려던 남편이 갑자기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면서 2년 넘게 가장 노릇을 도맡아야 했어요. 그때 가야금과 피아노 교습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했죠. 그땐 먹고 산다는 괴로움과 남편이 곁에 없다는 서운함에 참 많이 울기도 했는데….” 오씨는 현재 경남 김해시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하다 주말이면 바쁜 남편 장씨를 만나러 서울로 온다.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주말부부 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씨는 지금의 결혼 생활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음. 뭐랄까. 둘 다 모두 순수한 때 결혼해서 그런지 다른 외적인 조건을 기대하지 않아요. 그저 남편이 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요. 저나 남편 모두 ‘첫사랑’이어서인지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거든요. 남편이 몸 건강히 늘 제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요.” 결혼으로 고민하는 또래 친구들을 볼 때마다 오씨는 결혼의 순수한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볼 것을 말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친구들을 보면 이른바 ‘조건’에 얽매어 결혼에 힘들어 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런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이 맘에 들면 결혼하라.’고 말해요. 외적 조건이 사람 됨됨이를 압박해서는 안 되는 게 참된 결혼이니까요.” 끝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묻자 오씨는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전 대학에서도 국악을 전공했고 앞으로도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20대는 결혼이 제 인생을 결정했다면 30대부터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며 살았으면 해요. 전 20대에 또래 친구들이 누렸던 것들을 못 누렸지만 30대에는 반대로 또래 친구들이 못 누리는 것들을 누려 보고 싶어요. 남편이 늘 제게 많은 힘이 돼 줄 거라 믿어요.”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殺人 폭염

    폭염이 이어지면서 일사병으로 인한 노약자 사망이 잇따르고 있다. 17일 오후 2시50분 전남 나주시 세지면 대산리에서 정모(85)씨가 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부인 나모(75)씨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나씨는 “남편이 아침에 일을 나가 점심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가보니 밭에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특별한 외상이 없는 점으로 보아 일사병으로 숨졌을 가능성 등 사인을 조사 중이다. 이날 오후 4시10분쯤에는 경남 김해시 불암동의 한 고구마밭에 천모(84)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마을 주민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검안소견 등을 토대로 천씨가 열사병으로 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오후 나주 지역은 낮 최고 기온이 34.9도를 웃도는 무더위를 기록해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상태였다. 한편 기상청은 이 같은 ‘푹푹’찌는 무더위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기상청은 “18일 중부·경북지방은 10∼60㎜, 전북·경남지방은 5∼50㎜ 가량의 비가 내리겠지만 낮 최고기온은 27∼34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17일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상청은 또 “19일도 전국이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대체로 맑은 가운데 남부지방에는 소나기 오는 곳이 있을 전망이지만 낮 최고기온이 30∼35도로 무더운 날씨를 보이겠고, 남부지방은 25도를 웃도는 열대야 현상이 나타나는 곳이 많겠다.”면서 “건강 관리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충남도교육청은 이날 기상청의 폭염경보 발령에 따라 각급 학교에 긴급 공문을 보내 임시휴업 또는 단축수업을 하도록 지시해 도내에서 개학 중인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8개교 등 9개교가 오후부터 단축수업에 들어갔다. 또 18일에 개학하는 중학교 7개교, 고교 4개교 등 11개교와 20일 개학 예정인 초등학교 9개교 등 126개교도 폭염경보가 계속되면 개학을 일단 연기한다. 도내 초등학교 대부분은 오는 27일 개학한다.대전 이천열·서울 이경원기자leekw@seoul.co.kr
  • 고든 감독 다큐물 ‘푸른 눈의 평양시민’

    고든 감독 다큐물 ‘푸른 눈의 평양시민’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위험한 나라로 여겨지는 북한.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이들에겐 도저히 사람 살 곳으로 취급되지 못하는 그곳에서 평안과 안식을 찾은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 있다. 그는 푸른 눈에 금발을 지녔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 육군 사병이었다. 한반도가 전쟁으로 갈라진 뒤 냉전이 한창이던 1962년, 그 살벌한 시기에 그는 휴전선을 넘어 제 발로 북한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나이 23살, 이름은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영국의 대니얼 고든 감독이 세 번째로 들고 온 북한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의 주인공이다.2004년 5월 촬영을 시작한 이 영화는 그가 왜 북으로 갔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드레스녹과 그를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다. 고든 감독은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월드컵 8강에 오른 북한 축구선수들을 다룬 ‘천리마 축구단’, 매스게임에 참가하는 소녀들의 일화를 담은 ‘어떤 나라’ 등을 통해 북한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 호평을 받아왔다. 그는 전작에서처럼 어떤 입장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드레스녹의 삶을 추적한다. 드레스녹과 비슷한 시기에 망명한 미군은 세 명이 더 있었다. 두 명은 병사했고, 가장 계급이 높았던 찰스 젠킨스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부인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 현재 평양에는 드레스녹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월북 미군 네 명 모두가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이들의 삶은 성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지옥 같은 유년생활´을 보낸 드레스녹은 첫 결혼에 실패했고 도피하듯 군에 들어간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는 ‘그때(어린시절) 배운 게 어딜 가든 똑같다.´고 고백한다.‘삶이 대수롭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벌건 대낮에 다들 점심 먹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었다. 영화는 이들의 존재를 알려줄 뿐 아니라 편견도 깼다. 이들의 월북에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이들이 북한에서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으며 안정된 삶을 영위했다는 점은 놀랍다. 물론 ‘선전 가치’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적국에서 온 외국인으로서 특혜를 톡톡히 누렸다. 월북 미군들은 영화에 미제국주의 악당으로 출연하며 한때 은막의 스타로 대접받기까지 했다. 북한이 극심한 기아와 가뭄으로 허덕이던 때도 드레스녹은 “북한에 온 뒤 한번도 내 삶은 바뀌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40여년간을 북에서 보낸 그는 이제 고희를 바라본다. 못 배운 자신과 달리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외교관이 되겠다고 하자 감격해한다. 그에게 북한은 정권의 선전문구처럼 ‘지상낙원’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드레스녹이 김일성 광장에 서서 말한다.“죽는 날까지 나라에서 지켜줄 거야.” 주체할 수 없었던 자유를 포기하고 일정량의 행복을 얻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혼란스러웠다.23일 개봉.15세 관람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日 40.9도

    日 40.9도

    일본 열도에서 관측 사상 최고기온이 기록됐다. 일본 기상청에 따르면 16일 오후 2시30분을 전후해 기후현 다지미시와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 기온이 섭씨 40.9도를 기록했다. 종전 최고 기온은 1933년 야마가타에서 관측된 40.8도로 74년만에 기록이 깨졌다. 이 밖에 사이타마, 기후, 군마현의 3개 지역도 40도 이상까지 치솟았다. 일본 열도를 감싼 이번 폭염으로 15일부터 16일 오후까지 모두 6명이 일사병으로 숨졌다. 15일 하루 동안에만 530명 이상의 일사병 환자가 보고됐고 16일에도 수백명이 일사병 증세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일본기상청은 남미 페루 연안 바다수면 온도가 내려가는 라니냐 현상으로 태평양 고기압이 세력을 키운 데다 푄 현상이 겹쳐 폭서가 계속된 것으로 분석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별난 일 별난 사람들] (2) 쿠쿠홈시스 김성민 과장

    [별난 일 별난 사람들] (2) 쿠쿠홈시스 김성민 과장

    “그동안 밥 지은 쌀이 200t(20㎏들이 1만부대)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네요.”국내 전기밥솥 시장 1위 쿠쿠홈시스의 김성민(37) 과장은 ‘밥 짓는 남자’로 통한다. 팔거나 먹기 위한 밥짓기가 아니다. 새로 나올 밥솥제품에 대한 성능검증과 시판 중인 제품의 성능개선을 위한 치열한 연구개발 과정이다. 밥알 표면에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지, 상층-중층-하층이 고르게 익는지, 씹었을 때 얼마나 찰기가 느껴지고 구수한 맛이 나는지 등이 점검포인트다. ●하루 평균 350인분 밥 지어 경남 양산시 교동의 본사 연구실에서 혀와 눈과 코로 밥맛과 씨름해 온 지 햇수로 15년. 직원 4명과 주방에서 쌀을 씻는 것으로 그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모델별로 30여개의 밥솥에서 하루 평균 350인분의 밥이 지어진다.20㎏들이 쌀 부대 2개 반이 들어간다. “6인용,10인용,35인용 등 여러 규격의 제품에서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밥을 지어 봅니다. 이를테면 10인용 밥솥에서 최대량으로 지은 밥의 맛과 1인분 쌀만 넣어 지은 밥의 맛이 어떻게 차이가 나나 비교하는 거죠. 물이 많은 밥, 물이 적은 밥도 만들어 봅니다. 백미, 현미, 잡곡 등 다양한 곡류에 따라 누룽지, 숭늉까지 시험하지요. 전압을 정격보다 높이거나 낮춰보기도 하고요.” 이제는 쌀과 물을 맞추는 순간 어떤 밥맛이 나올지 혀끝과 코끝에 그려질 정도다. 수시로 밥을 먹다 보면 점심이나 저녁 식사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실험용 밥을 많이 먹지는 않는다. 숟가락으로 밥의 상층부와 중간부, 하층부를 한두 숟갈씩 떠 먹어보고 눈으로 윤기와 색깔 등을 점검하는 걸로 끝이다. 실제로 김 과장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갖고 있다. ●신제품 밥솥 한개당 평균 쌀 1.5t 소요 김 과장으로부터 ‘퇴짜’ 판정을 받아 개발실로 되돌아간 밥솥이 부지기수다. 신제품 밥솥 하나를 테스트하는 데 평균 1.5t의 쌀이 소요된다. 원래 밥에 조예가 있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군대에서 취사병을 했느냐.”는 물음도 숱하게 받지만 이 또한 아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1993년 입사해 처음 맡았던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을 ‘밥통’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요즘 밥솥·밥통은 인공 퍼지 기능을 지닌 컴퓨터 제품이지요. 그래서 제 일은 밥을 짓는다기보다 취사 로봇을 가동시키고 그 로봇의 성능을 살펴본다고 하는 편이 적합하지요.” 돌솥 압력밥솥을 만들 때에는 전국의 유명 돌솥집을 두루 돌며 주방을 견학하기도 했다. 쌀은 농협에서 나온 중급품을 쓴다. 너무 좋거나 나쁜 걸 쓰면 보편성에서 문제가 생긴다. 맛을 보고 난 밥은 전량 인근 가축농가에 제공한다. 회사에서 밥 짓고 맛 보는 데 이골이 나서인지 집에서 청소는 해도 부엌일은 절대 사절이란다. 아내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고 한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기온차 커 열사병 가능성”

    “전쟁포로나 다름없지요. 피랍자들의 건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내 의료진을 이끌고 의료 봉사를 주도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심호식(64) 교수. 수소문 끝에 3일 오전 몽골로 봉사활동을 떠난 그와 국제 전화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현지 사정을 염두에 둔 듯 첫마디를 “피랍자들의 생명을 담보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을 것”이라고 여러번 강조했다. 다음은 심 교수와의 일문 일답. ▶현지 기온 격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을 수 있나.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더운 전형적인 중동 날씨다. 낮에는 섭씨 40도로 올라가고, 밤에는 20도까지 내려간다. 피랍자들처럼 미리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열사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현지민들은 주로 토담집에 사는데 낮 실내 온도가 50도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서 쉰다. 하지만 실내에 구금된 피랍자들은 이런 날씨를 그대로 견뎌야 하기 때문에 탈진 상태가 심각할 것으로 생각된다. ▶피랍자가 위치한 지역이 고지대여서 고산병 위험은. -기압이 낮아지면 고산병뿐만 아니라 호흡기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폐에 울혈이 생기거나 몸에 필요한 산소가 부족할 경우 저산소증에 빠질 수도 있다. 스트레스나 열악한 음식 때문에 면역력이 낮아지고 체온 조절도 잘 안되기 때문에 감기 바이러스에도 취약해진다. 고산병에 걸리면 발생하는 두통도 문제다. ▶물이 부족한 지역이어서 피랍자의 탈진이 우려되는데 피랍 3주차인 현재 상황을 예상한다면. -물이 역시 가장 큰 문제다. 물이 귀해서 마실 물조차 부족하다. 피랍 상태에서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을 것이다. 더운 날씨에 감금된 상태에서는 탈수가 심하기 때문에 열사병 직전까지 갔을 가능성도 있다. 탈수가 심해지면 몸에 마비가 올 수도 있고 몸을 평상시처럼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물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수질이 안좋아 위험하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현지민들은 대부분 정제되지 않은 물을 마신다. 우물물이라고 하지만 길가 도랑물에 가까운 ‘지표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외국인들은 이 물을 마시지 않는데 현지민은 대부분 난민과 극빈자들이라 그냥 먹는다. 끓여 먹기만 해도 문제가 적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냥 마시기 때문에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질환이 많다. 피랍자들도 이런 질환에 노출될 수 있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 중에서 ‘장 질환’이 거론됐다. -수술을 받은 경우나 장에 유착이 온 경우, 장의 경련이나 마비증상이 온다. 몸을 가누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장 질환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섭취하는 음식도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음식을 주로 먹게 되나. -주로 빵이나 양고기를 먹는데 양고기라도 줘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으면 되겠지만 그것조차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특히 여성 피랍자들이 많은데 역한 양고기를 기피해 먹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채소류를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타민 부족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지 환경에 비춰볼 때 의약품이 전해지지 못하면 피랍자의 생명이 위독할 만한 상황도 올 수 있어 안타깝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품이 되었다. 흔들리고 있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우선 땅에 떨어진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추된 권위, 동요하는 민심 인조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무신 김응창(金應昌)과 임박(任)을 처형했다. 당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괄이 입성했을 때 각각 좌우변 순장(巡將)이 되어 이괄을 경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문신들 가운데도 이괄의 난을 맞아 심각하게 동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이안눌(李安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 공조참의 김덕함(金德)과 함께 가도( 島)에 파견되어 있었다. 김덕함이 모문룡에게 원군을 청해다가 이괄을 토벌하자고 했을 때 이안눌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인조가 저자도(楮子島)로 피난 가고 이괄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이안눌은 거침없이 인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자전(慈殿-인목대비를 지칭)을 모셨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아들일 것이다.’,‘저자도에서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등등 인조는 이미 끝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안눌은 그 밖에도 ‘반정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공신들의 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동요했던 것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현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도성 문을 닫아걸어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이괄이 입성했을 때 도성 백성 대부분이 이괄에게 붙었기 때문에 법으로 논하면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은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다. 그는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는 조정에 문제가 있어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때에는 한 가지 잘못만 있어도 원망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당시를,‘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고 했다. 정경세(鄭經世)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반정 직후부터 조정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심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된 지 한달 여가 지난 1624년 3월 중순,“장차 큰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지는 와중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밤에 여염을 돌아다니며 피란하라고 소리치며 선동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정이 민심 수습을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이괄 치하에서 부역(附逆)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좀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 안보´에 올인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우선 인조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1624년 3월, 비변사(備邊司)는 ‘숙위(宿衛)하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며 외방의 출신들 가운데 재주 있고 용맹한 자들을 뽑아 경호 병력의 숫자를 늘리자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반정공신 네 사람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의 숫자를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군관의 수를 늘리면 정권의 안보가 확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료를 국고에서 지급 받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사병(私兵)이었다. 언필칭 ‘인조 호위’를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공신들의 집안 일을 건사하는 집사였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도 공신 집안을 호위하고 재물을 운반하는 등 사사로이 부려졌다. 실제로 반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대가를 호위했던 군관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또 군관을 거느리고 있던 신경진은, 나아가서 적을 막으라는 인조의 명령도 무시했다. 이제 그런 군관의 숫자를 더 늘리자고 하는 판이었다. 이괄의 반란으로 혼쭐이 난 인조는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더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령을 어긴 신경진을 불문에 부치고, 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반정공신들의 권세는 더 높아졌고, 이런 저런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연히 ‘광해군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겠다.’는 구호는 힘을 잃어 갔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과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재생청(裁省廳)이란 기구를 설치하고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정권 안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조정권의 실세였던 김류와 이귀가 박승종 부자의 저택을 불하(拂下)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1625년(인조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반란의 대외적 여파 이괄의 반란은 나라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압박해오자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보고를 접한 뒤, 유격(游擊) 왕보(王輔)에게 선사포(宣沙浦)에서 군사를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왕보는 자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진격한다.’고 큰소리쳤다. 조정은 다급한 마음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였던 윤의립(尹毅立)은 신중했다. 그는 모문룡의 군대가 육지로 나온 이후의 상황을 우려했다. 왕보의 말대로 1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올 경우, 그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윤의립은 왕보를 만나 ‘이 적은 얼마 안 가서 주벌될 것이니 천병(天兵)을 역적 토벌에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원병 요청을 취소했다. 결과적으로 윤의립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란이 곧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의 병력이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 대한 접대와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을 것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후금을 군사적으로 자극하여 또 다른 사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반란 종식 이후 모문룡과 그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행태를 보면 윤의립의 ‘결단‘이 얼마나 빛나는 ‘혜안’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란의 여파는 후금에도 미쳤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던 것이다. 한윤은, 당시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姜弘立)을 만나 “강씨 일족이 다 죽었다.”고 무고했다. 강홍립은 격앙되었다.‘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정보도 후금 측으로 건네졌다. 한윤의 투항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괄의 반란을 계기로 조선은 명과 후금의 대결 구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폭염특보 어떻게 발효되나

    폭염특보 어떻게 발효되나

    전국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남부 지방에 연일 폭염특보가 발효되고 있다. 여름철 무더위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야외 활동 및 산업현장에서의 작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 올 7월부터 시범 운영 중인 폭염특보는 지난 25일 전남 나주·순천시, 구례군에 첫 발효된 이후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벌써 10차례나 발효됐다. 아직 우리에게 낯선 폭염특보는 어떤 상황에서 발효되는 것일까. 낮 기온이 무조건 높다고 폭염특보가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폭염주의보는 낮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이고 ‘열지수(Heat Index)’가 최고 32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폭염경보는 낮 최고기온이 35도 이상, 열지수가 최고 41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계속될 것으로 예측될 경우 각각 발효된다. 열지수란 여름철 무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를 지수화한 것으로 온도와 습도 등을 토대로 산출된다. 열지수가 54도를 넘으면 열사·일사병 위험이 매우 높고,41∼54도일 때 신체활동을 하면 일사병·열경련·열피폐 현상이 생긴다. 열지수 27∼32도일 때는 피로 위험이 높고,27도 이하일 때야 비로소 피로 위험이 낮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내 개 죽게했다” 애견센터에 4100만원 소송

    최근 중국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개를 숨지게 했다며 고액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한 사연이 눈길을 끌고 있다. 허난성 정저우시 일간지 정저우완바오(郑州晚报)는 23일 “한 애견센터가 중국 황실개로 유명한 ‘차우차우’를 목욕시키다 숨지게 한 댓가로 33만 8천위안(한화 약 41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 당했다.” 고 보도했다. 사고사를 당한 차우차우는 올해 1살인 ‘라오후(老虎)’. 주인 노씨는 작년 겨울 33만 8천위안(한화 약 4100만원)을 주고 생후 6개월 된 라오후를 데려왔다. 최근 노씨는 라오후를 목욕시키기 위해 근처 애견센터에 맡겼고 2시간 후에 데리러 간 노씨는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노씨는 “라오후가 머리가 늘어진 채 철장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며 “황급히 의사를 불러 응급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노씨가 동물병원에 부검을 의뢰한 결과 사인은 ‘열사병’인 것으로 드러났다. 애견센터는 노씨에게 동종의 개로 배상할 것을 제안했으나 노씨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크다.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며 24일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관련기사] ‘사자개’ 차우차우는 어떤개?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피랍 한국인 1명 피살] 현지 위생·보건 열악… 인질에 ‘제2의 적’

    한국인 인질 1명이 부상이 심해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탈레반이 사살했다는 CNN의 보도가 나온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현지 위생과 보건·의료 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남아있는 나머지 인질들의 안전에 걱정을 더하고 있다. 현지의 열악한 보건, 위생 상태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23명의 한국인 인질들은 가즈니 주 카라바그 서쪽 산악지대에 2∼4명씩 무리지어 7군데에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특히 대기층에 동물들이 배설한 오물 부스러기가 다량으로 섞여 있어 호흡기 질환과 눈 점막 염증 및 알레르기 관련 질병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또한 세균성 설사병, 장염과 위염 등의 발생이 많아 현지인들도 바람이 많이 불 때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지하수 역시 다량의 석회석과 각종 세균에 오염돼 있어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모기, 전염병과 독성을 지닌 해충들도 많아 풍토병에 걸릴 확률도 높다. 현재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도 사실상 진료가 불가능하다. 현지 약국에서 처방하는 의약품 또한 대부분 저급 품질이고 유효기간이 지난 경우가 많아 부작용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전문가들은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리는 험준한 열대 산악지역의 밀폐된 은신처에서 인질들이 탈진 상태일 것으로 보고 있다.구동회 이재연 기자 kugija@seoul.co.kr
  • [데스크시각] 1987→1997→2007/손성진 경제부장

    10년 전,20년 전을 반추하고 있는 올해다.6·10항쟁이 20년 전이었고 외환위기가 10년 전이었다. 현대사의 큰 획을 그은 두 정치적, 경제적 사건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군부독재기와 비교해 볼 때 괄목할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정당한 방법이라면 용인되는 요즘이다. 의사표현을 무력으로 억압하고 사병들의 투표권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던 20년 전을 젊은이들은 도리어 생소하게 느낀다. 6·10항쟁의 주체였던 386세대들은 이제 집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항쟁 이후에도 한동안 재야의 그늘에 있었던 그들 또한 권력의 안마당으로 들어가자 그 달콤함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정치의 쓴맛을 경험하는 중이다. 경험 부족이 부르는 정치와 정책의 실패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부르고 보수세력의 거센 공격에 직면해 있다. 공격을 받아 마땅할 만큼 현재의 정책들은 너무나 공허하다. 비현실적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기자실 개혁이 그렇다. 언론이라고 개혁에서 피해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점의 우선 순위는 아니다. 집권층은 아직도 20년 전의 생각에 매몰돼 있다. 그 사이 많이 변했다.1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고서도 경제적으로는 적어도 몇년을 후퇴하는 일을 겪었는가. 실질을 추구하지 못한 권력 때문이다. 개혁의 자기도취와 희열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탓이다. 10년 전 쓰라린 경험을 겪고 우리는 다시 발아래 땅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을 것을 잃었다. 돌이키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외환위기는 외견상으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잘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른바 양극화다. 한편에서는 외제차가 넘쳐나는데 다른 쪽에서는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저소득 가정이 늘어난다. 집권층이 관심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문제다. 시간이 부족하다. 공허한 곳에 동력을 낭비해선 안 된다. 1987년이나 1997년에 비해 지금의 서민생활이 얼마나 나아졌을까. 민주화가 진전된 만큼 좋아졌을까.1인당 국민소득(GNI)은 1987년에 3321달러였다. 올해에는 2만달러를 돌파한다고 한다.6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PPP GNI)은 87년 1만 8372달러에서 올해는 2만 8000달러쯤 된다.20년만에 1배반 정도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체감 경제는 그보다 더 못하다. 주식 값이 치솟는다고 서민경제가 좋아질 것은 없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계층간의 괴리감만 키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될 개발독재를 떠올리고 있다. 정치적 억압은 알 바 없다며 피부로 느낄 정도로 경제발전을 구가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그 사이 6·10항쟁은 퇴색되고 잊혀지고 있다. 정치적 선진화는 경제로까지는 연결되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의 책임이다. 하나는 이루었으되 둘은 못했다. 국민들은 민생고를 걱정하고 있는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있었던 지난 몇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향해 가려면 할 일들은 너무나 많다. 양극화를 해소해서 국민들의 일체감을 높여야 한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서 미래 발전의 기틀을 잡아야 한다. 금융의 시대에 대비해 규제를 풀고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이런 일들을 민간부문의 힘만으로는 해내기 어렵다. 정부와 민간이 하나가 되어야 해낼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저성장 시대에 들어갔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제2의 성장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기반은 국민들이 자신할 만큼 갖추어져 있다. 좇아야 할 것은 허황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이다. 손성진 경제부장 sonsj@seoul.co.kr
  • “아~ 졸려” 지구온난화에 지구촌동물 시름시름

    전세계의 동물들이 시름시름 졸고있다. 날로 심각해지는 지구온난화로 동물들이 일사병에 걸려 무력감에 빠져든 것. 특히 이상 고온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유럽에서는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수면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와 같은 남부유럽권은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7~46도까지 치솟아 지친 표정이 역력한 동물들이 동물원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럽의 각 동물원들은 동물들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물을 뿌리는 등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급기야 물부족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동물은 주로 고지대에서 서식하는 토끼과의 ‘쥐토끼’이다. 서늘한 고지대에 서식하는 쥐토끼들이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멸종위기에 처했기 때문. 동물학자 크리스 레이(Chris Ray)는 “날로 더워지는 공기가 고지대까지 올라와 고온에 약한 쥐토끼들이 죽어가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어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향후 100년 안에 쥐토끼들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日연구팀 “‘육식’이 지구 온난화를 앞당긴다”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20년간 의식구조 어떻게 변했나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20년간 의식구조 어떻게 변했나

    20년 전에는 맑은 공기 등 쾌적한 환경을 주거지 선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사람이 5명 중 2명꼴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요새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직장과의 거리, 교통 편리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흡연남성의 비율이 20년 새 84%에서 56%로 줄었다. 20년간의 의식구조 변화를 추적해 보기 위해 1987년 서울신문이 당시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설문을 현재의 직장인 823명(남성 526명, 여성 297명)에게 똑같이 물었다. 상당수 문항에서 뚜렷한 변화가 확인됐다. ●생활수준에 대한 만족도 20년 전보다 하락 전체적인 생활수준은 눈부시게 높아졌지만 스스로의 만족도는 87년보다 나빠졌다.‘나는 어느 계층에 속한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87년에는 상류 2%, 중상류 18% 등 자기 생활이 평균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20%였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15%(상류 1%·중상류 14%)로 줄었다. 중류라는 답도 58%에서 54%로 축소됐다. 반면 중하류·하류 등 중간 수준도 안 된다는 사람은 22%에서 31%로 확대됐다. ●집은 크고 직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주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87년 조사에서는 전체의 40%가 맑은 공기 등 쾌적한 환경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직장과의 거리 26%, 교통편리성 23%, 투자가치와 주변시설 각각 19% 순으로 나타났다.20년 전 1위였던 맑은 공기는 6%에 그쳤다. 집의 투자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20년 새 6%에서 19%로 3배가 됐다. 큰 집을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했다.40평 이상 되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응답이 87년 5%에서 올해에는 20%로 늘었다. 서울에 대한 선호현상도 심해졌다.87년엔 44%가 서울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올해에는 69%가 이렇게 답했다. 자기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공간으로 87년에는 거실 55%, 안방 15% 순으로 답이 나왔다. 그러나 올해에는 거실(53%)에 이어 나만의 공간이 30%를 차지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재테크 수단으로는 주식·수익증권이 87년과 올해 각각 39%와 37%로 가장 선호됐다. 하지만 87년 26%로 3위였던 부동산이 올해 2위(35%)로 치고 올라온 반면 과거 2위였던 은행 예·적금(28%)은 24%로 비중이 축소됐다. 계(契)는 4%에서 0.4%로 줄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 건강관리 방법은 87년의 충분한 휴식 27%, 운동 26%, 건강식품 18%에서 올해에는 운동 31%, 충분한 휴식 19%, 건강식품 11%로 바뀌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1%에서 25%로 늘어난 것은 흥미로운 결과였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은 87년 27%에서 올해 47%로 뛰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남성의 경우 87년 84%에서 올해 56%로 크게 줄었다. 여성 중 담배를 피운다는 응답은 6%였다. 여가생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87년에는 쉬는 날 집안일을 한다는 응답이 25%로 가장 많고 이어 음악·스포츠 관람 19%, 가족과 나들이 18%, 운동과 휴식 각각 14%였으나 올해에는 가족 나들이와 휴식이 각각 28%로 가장 많고 운동(14%)과 음악·스포츠 관람(13%)이 뒤를 이었다.20년 전 가장 많았던 집안일은 4%로 급감했다. 휴가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 인식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87년 54%에 이어 올해에도 53%가 ‘휴가는 매년 가족과 함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축구·야구 등 좋아하는 스포츠의 종류는 대체로 비슷했으나 스키·스노보드가 87년 2%에서 올해 12%로, 골프가 4%에서 10%로 각각 늘어 스포츠·레저의 고급화 현상을 보여줬다. ●아침밥 안 먹거나 빵 먹는 사람 늘어 아침에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는다는 사람은 87년 65%에서 올해 40%로 줄었다. 커피·우유·빵 등 서구식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13%에서 23%로 늘었고 아예 아침을 거른다는 응답도 19%에서 26%로 증가했다. 옷에 대한 관점도 예쁜 옷에 가장 무게를 두는 쪽으로 변했다.87년엔 옷을 고를 때 디자인과 실용성을 가장 중시한다는 응답이 각각 38%로 공동 1위였지만 올해에는 디자인이 56%로 가장 많고 실용성은 21%로 축소됐다. 색상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응답은 14%에서 2%로 줄었다. 브랜드를 최우선으로 본다는 응답은 87년에는 거의 없었지만 올해에는 7%를 차지했다. 김효섭 강주리기자 newworld@seoul.co.kr ■당시 사회면 장식했던 뉴스들 신문은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정보가 되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역사가 된다.1967년 서울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던 뉴스들을 통해 당시 모습을 들여다보자.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67년, 물가에 대한 사회적 감시의 눈초리는 지금보다 매서웠다.‘악덕상혼(商魂)’에 대한 비난의 강도도 거셌다. 연말연시를 틈탄 서비스료 인상이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70∼80원짜리 설렁탕을 100원으로,120원짜리 불고기백반을 150원으로,30원짜리 커피를 45원으로 각각 올려받는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그해 초 당국은 업주들의 ‘기습인상’을 엄벌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뒤 서울 중구 다동 H다방 주인이 커피를 35원으로 5원 비싸게 팔았다가 즉심에 넘겨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 발길은 예나 지금이나 들뜨고 붐볐다. 그해 설 서울역은 귀성객 5만명이 몰리는 북새통을 이뤘다.13건의 소매치기가 신고됐고 암표상이 기승을 부렸다. 한 시민은 ‘귀성객이 많아 정신없다.’는 이유로 거스름돈 10원을 주지 않은 서울역 매표원을 고발하기도 했다. ‘밤손님’들이 활개치던 그때, 도둑들의 최고 인기품목은 TV였다.TV는 당시 근로자의 반년치 봉급인 10만원을 줘야 살 수 있었다. 선풍기, 미싱 등도 도둑들이 눈독 들이는 물건이었다. 졸업·입학 시즌이면 사진사들이 대목을 잡던 시절, 한 여고 졸업식장에서 좋은 목을 차지하겠다며 사진사들끼리 싸움이 벌여져 한 명이 숨지는 사고가 났다. 과속차량 감지기가 ‘레이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경찰은 앞으로 음주운전 측정기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국내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이 대한극장에서 개봉됐다.‘7인의 여포로’와 ‘춘몽’을 만들었던 유현목 감독은 각각 반공법 위반과 음화(淫畵) 제작 혐의로 기소됐다. 반공법에선 무죄를 받았지만, 여배우를 나체로 출연시킨 데 대해서는 벌금 3만원을 선고받았다. 남북한 극한대치로 군대 생활이 말할 수 없이 살벌했던 당시, 휴가를 나왔던 사병이 목숨을 끊었다. 부대 빙상대회에 쓸 스케이트와 운동복을 자비로 마련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휴가를 나왔다가 이를 구하지 못하자 부대 인사장교에게 “앞으로 사병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6살 여자아이가 군에 ‘입대(?)’하는 사건도 있었다. 서울 마포의 강변 판잣집에 살던 신모씨가 군대에 간 사이 어머니가 병으로 숨졌다. 부대에선 신씨가 제대할 때까지 동생을 부대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문보도 이후 이들에 대한 독지가들의 지원약속이 이어졌다. 그해 무려 6304명의 공무원이 징계를 받았다. 사유는 근무태만이 가장 많았고 뇌물죄나 공금유용 및 횡령, 직권남용, 공문서 위·변조 등도 있었다. 허위진단서 발급도 기승을 부렸다. 일부 의사들이 교통사고 피해자들에게 허위진단서를 끊어주고 있다는 고발기사가 나가자 경찰이 이에 대한 집중단속을 펴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산자부, 비수도권 지방기업 지방대출신 채용때 1인당 2년동안 월 50만원 보조

    ‘폭력피해 여성을 위한 보금자리를 지원하고, 전국 국립공원에 지킴이를 배치하고, 사병들에게 외출용 배낭을 지급하겠다.’ 12일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2008년도 예산·기금 운용계획안’에 포함된 정부부처들이 요구한 색다른 예산들이다. ●체력은 국력, 국민 건강을 지켜라 각 부처가 제시한 내년도 신규사업 가운데는 국민 건강과 밀접한 내용이 상당수다. 보건복지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모든 임산부를 대상으로 체조·태교·분만교실 등 산전·산후 관리프로그램을 도입·운영하기 위해 35억원을 요구했다. 또 천식·아토피 질환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천식·아토피 친화학교, 천식환자 응급콜센터 등을 신설하기 위해 22억원을 신청했다. 환경부는 전국 18개 국립공원에서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공원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산악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지킴이’ 600여명을 배치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94억원을 요구했다. 환경부는 또 인체에 치명적인 발암물질을 다량 포함하고 있는 석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위해 기획예산처에 34억원을 신청했다. 소방방재청은 119 구조·구급서비스에 유비쿼터스 기술을 접목한 ‘U-119’ 시스템 구축을 위해 20억원을 편성했다.U-119는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생체신호나 영상정보를 병원에 미리 보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원격화상응급조치 시스템이다. ●양극화 해소, 균형발전 양극화 해소와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도 쏟아졌다. 여성가족부는 다가구주택 50채를 매입해 가정·성폭력 등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공동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여성가족부는 기획예산처에 3억 9000만원을 신청했다. 농림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어려움이 예상되는 농가의 경영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 124만 농가를 대상으로 ‘농업 경영체 등록제’를 도입한다. 이를 통해 농가별 맞춤형 지원을 이끈다는 계획이며, 예산 요구액은 147억원이다. 또 산업자원부는 지방대생의 취업 확대 등을 목적으로 신규투자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는 비수도권 지방기업에 고용보조금을 지급한다. 고용보조금은 1인당 최대 2년 동안 월 50만원이다. 교육부도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지방대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250억원을 요구했다. ●높아진 국가 위상 반영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높아진 국가 위상에 걸맞은 사업도 눈에 띈다. 과학기술부는 내년 말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 우주센터에서 사상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인프라 구축 등 1222억원을, 미국·유럽연합(EU) 등과 공동 참여하고 있는 국제 핵융합실험로 건설사업에 590억원을 편성했다. 국방부는 사병들이 외출·외박·휴가를 나갈 때 개인 물품을 비닐·종이 가방을 이용, 품위가 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배낭용 가방’을 지급한다. 전체 사병 수의 3분의1에 해당하는 16만개를 부대 단위로 보급하기 위해 5억원을 요구했다. 농림부는 198억원을 확보, 한식의 우수성을 해외에 홍보하고 외국인의 한식 체험기회를 확대한다. ●내년 공무원 임금 2.5% 오를 듯, 노조측 4.6% 요구… 진통 예상 내년도 공무원 임금 인상률이 2.5% 안팎으로 전망됐다. 이는 정부측과 협상을 앞두고 공무원노조가 제시한 ‘4.6% 인상안’과 격차가 커 향후 단체교섭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12일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2008년도 예산·기금 운용계획안’에 따르면 내년도 공무원 전체 인건비 증가율은 7%이다. 인건비 총액이 7% 증가하면 실제 임금 상승률은 올해와 비슷한 2.5%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마저도 국회 심의과정에서 삭감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는 정부가 임금 인상률을 3.0%로 제시했지만, 국회에서 1.0%포인트 삭감한 2.0%로 확정됐다. 이에 따라 이달 초부터 정부와 단체교섭을 벌이고 있는 공무원노조의 대응 여부가 관심이다. 앞서 노조측은 올해 예상경제성장률인 4.6%만큼 기본급을 인상해 주도록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7)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27)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Ⅰ

    반정 직후 인조정권이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했던 것과 맞물려 후금에 대한 적개심도 높아져 갔다. 인조와 신료들은 후금과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가상하고 작전과 승패 향방을 자주 논의하곤 했다. 하지만 후금과의 군사적 대결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우선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정권 교체 이후 극히 불안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문제였다. ●불안한 민심 예나 지금이나 정권이 바뀌면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더욱이 반정처럼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니라 무력을 동원한 쿠데타일 경우, 그 후유증은 결코 만만할 수 없었다. 인조정권은 대북파(大北派)를 비롯한 북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진입했던 직후부터 ‘살생부’에 올라 있던 인물들을 줄줄이 처형했다. 입궐하라는 명패(命牌)를 받고 가장 먼저 달려 왔던 병조참판 박정길(朴鼎吉)이 최초로 참수되었다. 이윽고 광해군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32명의 관인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죽음을 겨우 면한 인사들도 대부분 멀리 유배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쫓겨났다. 복주된 자들의 ‘적산(賊産)’은 몰수되었다. 북인들은 이제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도성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죽음을 당하거나 관직을 잃은 자들뿐 아니라 하루아침에 실직하게 된 모리배들도 적지 않았다.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높아갔다. 살벌하고 뒤숭숭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날뛰는 자들이 출현했다. 무뢰배들 가운데 ‘인조 호위’를 핑계로 몰려 다니면서 재물 약탈에 재미를 붙이는 자들이 횡행했다. 유생들 가운데는 반정공신들의 종사관(從事官)이란 직함을 갖고 설치는 자들이 있었다. 바뀐 현실 속에서 상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은 민심 수습을 꾀하는 한편 인조에 대한 호위를 강화했다. 특히 이귀의 노심초사가 컸다. 그는 무엇보다 ‘반혁명(反革命)’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종실(宗室)들의 동향을 주시했다. 인조에게 흥안군(興安君)을 잘 감시하라고 강조하고, 능원군(綾原君)의 동향도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흥안군은 인조의 숙부이고, 능원군은 동생이었다.1623년 7월29일, 우려했던 ‘반혁명’의 움직임이 현실로 나타났다. 전 현령 유응형(柳應泂)이 역모가 일어났다고 고변(告變)했다. 관련자의 진술 가운데 ‘지금 반정한 사람들은 천명(天命)이 돌아간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런데 금상(今上)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은 옳지 않으며, 조정의 사대부들이 하는 행위도 지난날과 다름이 없다. 우리들이 다시 거사하려 하는데, 성공하지 못해도 사육신(死六臣)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란 내용이 나왔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되돌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8월25일에도,10월1일에도 고변이 터졌다.10월1일의 공초에서는 ‘지금 하는 짓은 광해군 때보다 더 심하고, 인사가 불공평하고 부역이 무거워 원망이 자자하다.’라는 진술이 나왔다. ●‘정권 안보’를 위한 노심초사 불과 석 달 사이에 세 번이나 고변이 발생하자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경악했다.‘정권 안보’에 비상이 걸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기찰(譏察)을 강화했다. 기찰이란 ‘반혁명 세력’을 색출하려는 목적으로 감시와 사찰을 벌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사찰 리스트’에 올랐다. 광해군때 벼슬에 있었다가 쫓겨난 인물들이 일차적인 대상이었다. 반정에 동조했던 남인(南人)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찰의 방식이 문제였다. 반정공신들은, 의심되는 인물에게 자기 휘하나 심복을 접근시켰다. 심복들은 ‘사찰 대상자’에게 반정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거나 스스로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먼저 고백한다.‘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대상자가 동조하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그를 잡아다가 족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기찰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불신 풍조가 심해졌다.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무장들은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을 사렸다. 훈련을 목적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려 해도 반정공신들이 보낸 밀정들의 감시를 의식해야만 했다. 자연히 군사 훈련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반정공신들은 휘하에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반정이 성공한 뒤에도 사병을 해산시키지 않았다. 민심이 불안하기 때문에 인조에 대한 호위(護衛)를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런데 사병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군관(軍官)들의 폐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개인적인 집사(執事)나 마찬가지였다. 호위를 명분으로, 반정공신들의 위세를 빌려 백성들에 대한 침학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는 국고에서 충당되고 있었다. 남인들은, 횡행하는 기찰과 군관들의 폐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당장 기찰을 중지하고, 군관들을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반정공신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발하는 신료들에게 ‘반혁명 분자’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어렵게 잡은 정권이 또 다른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괄이란 인물 잘 알려진 것처럼 인조정권은 1624년 이괄의 반란 때문에 전복될 뻔했다. 겨우 진압되긴 했지만 이괄의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인조는 공주(公州)까지 쫓겨가는 수모를 겪었다. 반정에 참가하여 광해군 정권을 뒤엎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공신’ 이괄이 ‘반란군의 수괴(首魁)’로 변신하게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반정을 성공시키던 당일뿐 아니라 성공했던 직후, 이괄은 인조에게 가장 믿음직한 무장이었다. 이괄 또한 인조에게 후금군을 방어하는 대책을 아뢰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정권 보위에 나섰다. 인조는 이괄을 서북 변방으로 보내 후금 방어를 맡기려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반대했다. 그는 ‘이괄을 서울에 남겨 의지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괄에게 호위를 맡기자는 것이었다. 이괄은 1623년 5월,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포도대장 이괄은 5월27일, 군관들을 이끌고 전 부사(府使) 박진장(朴晋章)의 집에 난입했다. 박진장을 ‘반혁명 분자’로 의심하여 기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괄의 군관들은 박진장을 끌고 나오면서 그의 노모까지 구타하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했다. 적어도 1623년 5월까지 이괄은 인조 정권을 지키기 위한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변방의 정세가 수상해지자 인조는 8월16일, 이괄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서변(西邊)으로 내려가게 했다. 인조가 송별을 위해 그를 접견했을 때, 이괄의 태도는 태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인조에게 ‘신의 재주가 없는 것을 아시면서 변방의 중임을 맡기시니 은혜를 갚으려고 할 따름’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쳐들어 올 경우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의 휘하에는 1만 5000의 병력이 주어졌다. 녹훈(錄勳)이 문제였다. 이괄이 임지로 떠난 지 세 달 여가 지난 윤 10월18일, 인조는 김류와 이귀를 불러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논의했다. 정사공신(靖社功臣) 53명을 선정했다. 1등 공신이 10명,2등이 15명,3등이 28명이었다. 김류와 이귀 등은 1등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공신 가운데 첫머리에 놓여졌다. 임지에서 소식을 접한 이괄은 불만스러웠다. 더욱이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옹호했던 이귀가 ‘이괄을 속히 잡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이윽고 1624년 1월17일, 이괄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금부도사 일행을 살해하고 병력을 일으켰다. 인조정권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新라이벌전] (4) 전자업계의 ‘경영 맞수’

    [新라이벌전] (4) 전자업계의 ‘경영 맞수’

    닮았다. 그러나 다르다. 윤종용(63) 삼성전자 부회장과 남용(59) LG전자 부회장의 얘기다. 삼성은 두 사람의 무게가 달라 맞수로 볼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LG의 돌아오는 반격이 매섭다. 뜨는 해와 떠 있는 해의 파워가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젊어서 나란히 해외 경험…서울대 동문 경상도 사나이 윤 부회장은 경북 영천, 남 부회장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A형이다. 대학도 같다. 윤 부회장은 서울대 공대(전자공학과), 남 부회장은 서울대 상대(경제학과)를 나왔다.30대 때 일찌감치 해외근무를 한 것도 공통점이다. 윤 부회장은 70년대 말에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 일본 도쿄 지점장을 지냈다. 남 부회장은 80년대 초에 LG전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사에서 일했다. 두 사람의 ‘글로벌 마인드’ 뿌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너(이건희·구본무)의 신임도 두텁다. 나이는 윤 부회장이 네 살 위다. 하지만 입사는 10년 차이 진다. 군대 때문이다. 남 부회장은 일반 사병보다 복무 기간이 더 긴 육군 하사(보병)로 제대했다. 윤 부회장은 1966년, 남 부회장은 1976년 각각 입사했다. 입사가 빨랐던 만큼 사장 직함도 윤 부회장이 먼저 달았다. 윤 부회장은 1992년 처음 사장(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이사)이 됐다. 물론 2년 앞서 대표이사가 됐지만 그 때는 사장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8년 뒤, 웬만한 중견그룹보다 덩치가 더 큰 삼성전자의 최고 수장(대표이사 부회장)이 됐다. 최고경영자(CEO)만 18년째다.‘직업이 CEO’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도하다. 남 부회장은 2002년 처음 사장(LG텔레콤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윤 부회장보다 딱 10년 늦다. 재계를 놀래키며 LG전자 부회장으로 파격 중용된 것은 올 1월. 사장에서 부회장까지는 5년 걸렸다. 윤 부회장(8년)보다 3년 빠르다. 주변의 신경전과 달리 정작 두 사람은 관계가 좋다. 남 부회장은 올 초 취임하자마자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으로 윤 부회장을 찾아와 인사했다. 골프도 함께 쳤다. 골프는 남 부회장이 한 수 위다. 싱글 수준이다. ●혁신 전도사 vs 전략가 윤 부회장은 일본의 혁신 사례를 배워와 90년대 말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전환(턴어라운드)한 것은 이 때다. 그에게 ‘혁신 전도사’ ‘턴어라운드 아티스트’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래서다. 사내 별명은 ‘옆집 아저씨’다. 그만큼 소탈하고 뒤끝이 없다. 삼성의 한 임원은 그의 장수 비결을 이렇게 분석했다.“윤 부회장은 TV, 전기, 반도체 등을 두루 했다. 반도체나 휴대전화 하나밖에 모르는 다른 CEO들과는 다르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어쩌면 포스트 윤(윤 부회장의 후임자)을 향한 피말리는 내부경쟁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반도체 부진 탓에 삼성전자의 경쟁력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의 고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외국의 다른 경쟁사에 비하면 선방하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남 부회장은 거꾸로 ‘위기의 LG전자’에 긴급 투입된 구원투수다.LG텔레콤을 단숨에 국내 ‘빅3’로 키워낸 저력을 인정받아서다. 곧바로 TV사업 분리 등 조직을 뜯어 고쳤다. 외부 인재도 과감히 수혈했다. 올 1분기 영업 장부를 지난해 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 놓았다. 운(시황)도 따라주었다. ●“어젠다 없는 2인자 한계” 지적도 그러나 그에게도 과제는 있다. 잇단 외부인재 영입으로 조직이 술렁거리는 조짐이다. 실무 경험도 다소 부족한 편이다. 그는 그룹 회장실(구조조정본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최측근이라는 평도 부담스럽다. 두 사람을 잘 아는 경제부처 한 차관의 얘기.“윤 부회장은 매우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좋은 일에 사재를 몇억원씩 내놓을 줄 아는 인간적인 면모도 지녔다. 남 부회장은 전략가다. 이론에 아주 밝다.” 부정적 평가도 있다. 메리츠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두 사람 모두 2인자에 만족했을 뿐, 뚜렷한 자기 색깔을 낸 게 없다.”고 평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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