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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파동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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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친일파 재산 비호 더 이상 없다

    우리나라 법정에선 친일 매국의 대가로 얻은 재산이 사유재산이란법리에 의해 보장돼 왔다.매국노 이완용의 재산도 사(私)소유권이라고 해서 자손만대에 걸쳐 법적으로 보장돼 왔다.항일투쟁을 통해 세운 나라라고 하면서 항일에 거역한 민족반역자들의 기득권이 보호되어 온 것이다.이러한 국적불명의 재조 법조계에서 그 사권(사유재산권)보장이란 형식적 허구의 법리를 깬 판결이 나왔다. 지난 16일 서울지방법원 14부(판사 이선희 오현규 서정)는 친일파매국노인 이재극의 상속인의 재산청구소송에서 기각판결을 내렸다.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이재극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협력하였으며,일제강점(합병)후에는 일제로부터 친일매국의 공로(?)로 거액의 합방 하사금과 남작 작위까지 받은 자이다.이러한 행적으로 미루어 봐이재극은 1948년 반민법의 처벌대상자임은 분명하다.그러나 그동안한국의 법원은 매국노 이완용 재산도 보호해 왔다.그러한 친일파 재산의 보장을 옹호하는 법리를 보면 개인의 사유재산권 보장이란 면에초점을 둔다. 가령 친일파 재산이라도 반민법은 한시법으로서 이미실효되었으니 그 재산은 누구의 것이며 어떻게 취득,조성됐는지는 따질 일이 아니라는 논법인 셈이다. 참으로 그럴까? 우리의 상식이나 민족적 양심에 비춰봐도 납득이 안될 일이다.우선 무엇보다 법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정의(正義)감정에 거슬린다.이번 판결은 이제까지의 그러한 법리의 허구를 깨버린것이다. 아무리 사권(私權)이라고 해도 정의를 무시 또는 초월해서존재할 수는 없으며,헌법 전문에 정한 항일구국·민족자주의 건국정신과 헌법 101조의 민족반역자 처벌과 그에 의거한 반민법 규정이 엄연히 국법으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위반하여 매국노의 재산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의 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계승’을 밝히고 있는데 1941년 제정한 임시정부 ‘건국강령’에는 부일반역자 처벌과 그 재산의 몰수를 명시하고 있다.헌법 101조와 그에 따른 반민법은 건국이념에 따른 것이다.그런데 이 법의 정신과 법규정을 통째로 배척한 채친일파의 재산을 옹호하는 것은 형식논리의 허구를 내세워 실질적 정의를 유린하고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반민법이 친일파의 훼방으로 말미암아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해서 매국노의 반민족행위가 합법화된 것은 아닐 뿐더러 반민족적 매국행위대가로 취득한 재산이 합법적 보호법익으로 둔갑한 것도 아니다.마치살인행위가 살인범의 방해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안되는,합법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미국 연방최고법원도 헌법규정에 위반한 계약약관을 법원이 집행하게 하는 것을 법원이 스스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사법적 집행이론’이란 법리를 일찍부터 판시해 왔다. 독일 헌법재판소도 나치의 반인륜 범죄 처벌의 경우와 같이 실질적정의를 따라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법적 안정성을 우선한다고했다.외국의 법리를 들 것도 없이 법원이 민족반역자의 재산을 감싸온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한편 그동안 법원의 ‘친일파재산 비호’판결은 우리 법조계의 친일잔재 온존현상과 무관치 않다.해방후 국내 사법부가 일제하의 사법관료를 주축으로 재편성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1960년 4·19혁명으로 사법부의 일제잔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이듬해 5·16쿠데타로 죄절되고 말았다.이후 사법부 관료는 그야말로 군정관료로서,또는 법(法)기술자로서 군사독재에 복무해 왔다. 일부 기개있는 법조인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나마도 1970년대의 ‘사법파동’이란 진통을 겪고 1972년 유신헌법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사법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사법부의 희미한 독립의 숨통마저 끊어 버렸다.결국 1993년 문민정부의 사법개혁 논의가 있기까지사법부 자체에 의한 민주화 개혁시도는 없었다. 이번 판결의 유지여부는 수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국민적 지지를 얻어낼 것인지,또 사법부의 민족적 민주적 법인식이 이루어지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우리가 이번 일을 강건너 불보듯 방관한다면 언젠가 또다시 친일파의 재산을 비호하는 형식논리의 도깨비 방망이가백주에 위세를 떨치게 될지도 모른다. [한상범 동국대교수·헌법]
  • [대한시론] 대법원장께 드리는 글

    대법원장님, 취임하신지 며칠 되지 않아 바쁘시리라 생각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법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사법의 속성은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사법은 합리성과 논리적설득력을 힘의 원천으로 한다는 점에서 ‘네편이냐 내편이냐’라는 동지와적의 관계를 속성으로 하는 정치를 본질적으로 피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그렇지 않을 경우 사법의 ‘분쟁판단’은 설득력이 없어져 표류하게 될 겁니다.과거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사건,박정희 정권의 1971년 제1차 사법파동,유신과 판사 재임명 탈락,고문사건에 대한 소신없는 판결 등은 이를 여실히 말해줍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선임된 법관만이 사법의 속성을 가장 잘 실현할수 있으며 바로 그것이 사법권 독립과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봅니다.사법권은 국민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실현하는 국가권력이므로 이를 담당하는 대법원장·대법관 그리고 법관의 인사는 ‘국민’에게 공개되고 국민을 설득하여 국민적 힘을 얻어야 하며, 이러한 국민적 공론화야말로 초대 대법원장인가인(街人) 김병로 이래 반법치(反法治)에 맞선 대법원장이 드물었던 우리사법부의 정치적 독립과 권위확립의 첫 걸음이 됩니다. 법원 인사가 고시 기수,출신지역,유력자와의 친분 등을 주된 고려의 대상으로 하는 법원 내부의 관점이 아니라 법조인으로서의 법률적 식견,인간으로서의 세계관적 품격 등이 총체화되어 이루어질 때 판결은 법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해석에 기초하고, 법 논리가 허용하는 한도에서의 사회 정향적 자세를유지할 수 있으며, 그때 법원은 정치의 법무참모에서 벗어나 국민의 사법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하여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합니다.이때 대법관으로 지명된 사람은 국회의 동의에 ‘앞서’ 국민에 의해 검증받는 단계가 마련되어야 하고,그 방식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 국회에서의인사청문회라 생각됩니다.국회의 인사동의권은 그 인물에 관하여 ‘알 권한’인 ‘청문회개최권’을 외연으로 하므로 법리상으로도 무리가 없습니다. 대법원의 새로운 밀레니엄의판을 구성하는 대법관이 내년까지 9명이 바뀐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21세기 사법의 형성을 대법원장께서는 국민이 함께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애쓰는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법관들이 정치권의 영향력에 휩쓸리는 주된 원인은 사법부의 수직적 구조를 가져오는 ‘관료법조제’에 있으며 이로 인한 법관의 관료화는 사법의 정치적 독립에 장애를 주고 있습니다.관료법조의 양대 기둥인 법관 직급제와 승진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하여야 합니다.전관예우를 위시한 많은 사법비리가이같은 풍토와 직접 관련돼 있다 합니다.대륙식의 ‘법조직업주의’를 하루아침에 영미식 법조일원주의로 바꾸기 어렵고 비현실적이겠지만 관료법조제로 흐르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재야와 재조(在朝)간 인사교류의 활성화,평생 법관제 등을 이제는 실천하여야 21세기 사법이 요구하는 전문화된 법관도 양성할 수 있으며,‘판결하는자가 법관’이라는 상식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70년대 이후 몇 차례 사법부 독립의지를 표출한 ‘사법파동’이 있었지만제자리걸음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대법원장이 ‘제몫’을 다해주지 못했기때문이라는 평입니다.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의 상징으로서 중요사건의 ‘외풍’을 막는 역할을 하려면, 대법원장 등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고려를 취임한 그날부터 버려야 합니다.이제부터는 대통령이 주관하는 정치와 분명히 구별되는 사법을 책임지는 수장이기 때문입니다.법원의 예산이 전체 국가예산의 1%도 안되는 현실이어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사법이 사회의 질서를 ‘개인적 정념’(pathos)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기풍’(ethos)에 입각하여 형성되도록 이끌어야 ‘유전무죄’식의 사법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습니다.법관으로 하여금 사법을 그와 같이 이끌 수 없게하는 제도와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1995년 ‘서소문시대’의 대법원을 마감하고 이어진 ‘서초동’ 법조를 살찌우는 ‘최대법원장 시대’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姜 京 根 숭실대교수·헌법학
  • 검찰위상 재정립 계기로

    대전 변호사 수임비리 사건에 연루돼 사표 제출을 종용받았던 沈在淪대구고검장이 검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와 검찰 안팎으로 큰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다.이번 ‘폭탄발언’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생명처럼 여기는 검찰 역사상 초유의 항명(抗命)사건이라는 점에서 과거 사법파동 이상의 검찰파동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우려된다. 이번 항명사건과 관련,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자 한다.첫째,대전 수임비리 사건은 이번 항명파문과는 별개로 엄정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검찰 수뇌부는 대전사건에 대한 빗발치는 여론과 내부 반발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좁겠으나 원칙대로 수사를 하고 조속히 마무리지어야 한다.이번폭탄발언으로 대전 수임비리사건 수사가 가려지거나 흐지부지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 둘째,대전수임비리 사건이나 이번 항명사건도 따지고 보면 변호사와 검사의 뿌리깊은 유착관계,이른바 떡값·전별금·수사비 등 관행화된 금품수수 비리와 전관예우(前官禮遇) 등이 원인이었다.따라서 차제에 법조비리를근원적으로 척결하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변호사법 등관계법 개정을 통해 갖가지 사건 알선 비리는 물론 전관예우 등 잘못된 관행도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동시에 대가성 여부가 입증돼야 뇌물죄가 성립되는 관계법을 보완해 떡값 명목의 뇌물이 더는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검찰의 정치적 독립성을 강화하고 총체적 개혁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받는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모든 문제를 공개해 국민의 참여 속에 개선책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치부를 감춘 채 미봉으로끝내면 이같은 파동이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검찰은 과거 ‘정치권력의시녀’로 전락했다고 지탄받았던 과오를 자성해야 한다.그리고 비록 沈고검장의 처신은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권력이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권력의시녀가 되기를 자처해 왔다”는 그의 언급은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거니와 이번 항명사건으로 검찰 내부가 동요해서는 안된다.검찰 스스로 흐트러진 조직 질서를 바로잡고국가형벌권 행사의 주체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그런 점에서 이번 항명사건의 장본인은 소정의 책임을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이번 사건과 관련해 일부 일선 검사들이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법 집행의 보루인 일선 검사들이 이러한돌출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바람직한 처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5·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거듭나야할 법조/“권력이익이 우선” 탈법 방조/악법운용에 직간접 연관 고문 등 양심수주장 외면/최근에 검은돈에도 연루 ‘최후의 인권보루’ 요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을 순진하게 잘 지키는 사람만 손해본다” 우리사회에 그동안 유행돼온 법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들이다.이는 법이 결코 대다수 국민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인식의 결과이다. 이런 법치문화의 위기는 법을 악용하고 조작한 독재권력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법조인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악법과 법 운용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법부와 검찰은 왜곡된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의 법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1987년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온 국민의 민주화열기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88년 6월15일 서울지역의 판사 59명이 발표한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서 내용의 일부다. 이 성명사태는 전국 법원으로 확산됐고,마침내 金容喆 대법원장의 퇴임과 李一珪 대법원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와 움직임은 없었다. 수많은 양심수를 양산해내고 고문 주장에 얼굴을 돌렸던 부당한 재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사죄 한마디도 없었다. 수색영장 남발,고문주장 사건의 증거 인용 등 탈법적인 수사활동을 조장·방조하는 일이 이어졌다. 검찰은 행정부에 소속된 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검사들은 업무의 특성상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준사법관으로서 법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성역없는 법 적용을 통해 추상같은 검찰권을 세워야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검찰은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88년 金淇春 검찰총장의 취임사는 국민들이 검찰의 변신에 대한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국민에 준법을 선도하고 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검찰부터 수사상의 적법절차를 엄히 지키고…,우리 검찰권이 중립성과 독립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국가공권력임을 잠시라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임사로 끝났다. 사법부와 검찰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아직도 씻겨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올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법조인들의 돈과 관련된 비리사건들은 우리 법과 법조인의 왜곡됨이 그 한계에 다다른 느낌마져 주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들이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법조인들을 신뢰하고 존경할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수백만달러의 연봉이 보장된 변호사를 포기하고,수십만달러를 받는 봉급장이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미국 국민들이 있고,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결정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 법조인들이 깊이 되새겨보아야할 점이다. ◎시국사건판결 50년명암/권력에 맞선 소신 판사 줄줄이 해임/반공법사범 석방하자 뇌물사건 엮어 보복/대법원장이 “현실을 직시하라” 훈시하기도 격동의 반세기 속에서 많은 판사들이 권력의 편에 섰다. 굴욕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권력에 맞선 법조인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감수하면 살아남고,이에 맞서면 옷을 벗어야 했다. 정의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법조계의 반세기도 이같이 굴절된 어두운 역사로 얼룩져 있다. 1958년 7월 서울지법 유병진(재판장)·이병용·배기호 판사는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된 조봉암 진보당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위반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적제거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 이승만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조용순 대법원장은 사법감독관회의를 열어 “법관이라 하여 국가목적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망각하고 주관적인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국가이념에 배치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라고 훈시했다. 사법부의 수장 스스로 정치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어 서울고법 김용진(재판장)·최보현·조규대 판사는 항소심에서 조봉암에 사형을 선고했고,다음해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7월 사형이 집행됐다.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판사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법관 연임이 거부됐다. 판사가 권력에 맞서 소신판결을 내리면 즉각 권력의 반격이 뒤따랐다. 대법원은 71년 국가재정 형편을 이유로 군인과 군속이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판사 9명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2년후 모두 의원면직됐다. 또 비슷한 시기에 신민당사에 들어간 서울대생들과 월간 ‘다리’지 사건에 연관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임중빈씨 등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보복을 불러,반공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이 제주도에 출장가면서 항공료 등 9만3,000원의 뇌물을 받았다며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기각과 재청구,재기각 사태가 벌어졌고,급기야 전체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이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유신시대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때이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 합헌이라고 판결,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의 저항권 자체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75년 법원장회의에서 “현실을 직시하라.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이고 사법부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생각하라”고 훈시했다. 이때 판사들은 대다수의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朴禹東 변호사 인터뷰/“법조인들 나약해 법치주의 위협받아”/통치권자 사면권도 남용되면 곤란/오판위험 줄이게 피고·원고 모두 연구를 “법조 50년에 대한 평가요? 법조인치고 우리 법과 법조인이 제역량을 해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朴禹東 변호사(64)의 우리 법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인색하다. 그 자신 33년간 판사생활을 했고 지금도 재야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정이 없다. 법치가 외면받고 위협받아온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법조인들의 나약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 싸운 법조인이 많았다면 독재정권이 오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만 있어도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요. 법치주의가 서려면 지금이라도 법조인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등에 임명될 때 마다 ‘학구파’,‘선비형’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朴변호사. 그는 후배 판사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몇 안되는 법조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판사시절을 돌이켜보며 “왜 좀더 깊이 검토하지 못했을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만큼,원고와 피고 양쪽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했던 것일까”라고 반문해보곤 한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에게 “50%가 아닌 100%의 연구와 검토를 양쪽 모두에게 쏟으라고 주문한다고. 그래야만 오판의 위험을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조가 일부 판사와 변호사들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에 대해 朴변호사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99.9%의 판사는 깨끗하고,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변호사들의 수임 관련 비리도 대한변협의 적극적인 자체정화 노력으로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내다 봤다.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들은 수임이 어려워 비리의 유혹을 받기 쉬운 만큼 개업보다는 법인에 취업하기를 권했다. 사법개혁 차원에서 사법시험 합격자를 양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법조인 수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과 사법시험 체제에서 합격자만 늘리는 것은 법조인의 질을 떨어뜨릴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전에 외국의 로스쿨 같은 폭넓은 시각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朴변호사는 법치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통치권자의 사면권 남용도 지양돼야 한다고 본다.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이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대법원에서 확정받고,해도 넘기기 전에 풀려나는것을 보면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했겠느냐고 했다. 그는 “앞으로 대통령은 과거와 같은 ‘고유권한적·자의적 사면권 행사’라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특집기획팀 ▲李昌淳 팀장 ▲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 판사와 변호사/이생직 변호사(서울광장)

    ○업무상 가깝고도 먼 사이 가깝고도 먼사이. 판사와 변호사는 한마디로 가깝고도 먼 사이이다. 판사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법정에서 재판하면서 수많은 변호사들을 마주 대한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판사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적어도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그런 변호사들을 상대하는 판사는 변호사들에 대해 같은 자격을 가진 법조인이라는 생각에서 일반인들 보다 그 의견을 존중해주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판사와 변호사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예의를 갖추고 서로 조심하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그 속마음이나 인간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게 되고 따라서 가깝지만 먼 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변호사로서는 엄격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판사,매끈하게 재판진행을 하면서도 공정성을 잃지 않은 판사에 대해 특히 호감을 갖게 되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판사로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사와 변호사는 서로의 직분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것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며 또한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판사와 변호사가 학교동창이었다든지 과거 같은 법원에서 판사로 같이 근무하였다든지 하는 경우 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일반적으로는 종래의 관계를 유지하여도 괜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일부 변호사중에는 오히려 이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친한 관계일수록 조심을 종전의 인간관계를 인위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쉽지 않고 또한 강제로 멀어지게 할 수는 없다.어떤 사람들은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더라도 재판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로 수양이 된 사람이 아니면 사적인 관계와 재판을 완전히 구분하기는 상당히 어렵다.그러므로 판사와 변호사는 가깝게 지내는 관계일수록 조심해야 하고 오해를 살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설령 본인들로서는 상당히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가깝게 지내다 보면 주위에서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의 의정부 법원의 판사와 변호사 유착의혹 관련기사를 보면서 새삼 생각나는 분이 이모 변호사이다. 이 변호사는 판사로 재직할 당시 지방으로 현장검증을 갔다가 동행한 변호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이를 검찰이 문제삼아 뇌물죄로 처벌하려고 하였고 이에 상당수의 판사들이 반발하게 되어 사법파동이라는 사상초유의 일이 발생하게 됐었다. ○고 이 변호사를 떠올리며 결국 이로인해 그분은 불명예퇴임을 하게 됐으며 그 일로 인해 평생을 쓰라린 가슴을 간직하게 되었다.그분은 이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지함으로 판사로서의 엄숙함을 강조하였고 그 자신은 사건에 임하는 변호사로서 절개와 지조를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 변호사는 판사와 변호사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는데 항시 조심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강조했다.특히 돌아가시기 수년전부터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차마 고백하기 어려운 부끄러웠던 경험들을 글로 남겨 후배판사와 후배변호사에세 귀감이 되게 했으니,지금에 와서 새삼 그분의 용기에 머리가 숙여지면서 존경할만한 법조인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램이 드는 것이다.
  • 사법파동 주역 김종훈 판사 사표

    ◎88­93년 법원독립 등 사법개혁 주장/“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묘한 여운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으나 제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봅니다』지난 26일 돌연 사표를 낸 서울지법 김종훈 판사(40·민사71단독)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김판사의 사직이 관심을 끄는 것은 사법부 개혁을 위해 애써온 이력 때문이다. 그는 임관 3년차이던 지난 88년 법원의 독립 등을 내세우며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의 퇴진 서명운동을 했던 2차 사법파동 때 적극적으로 활동,사법 개혁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또 지난 93년 4월 「법률신문」에 「개혁시대 사법의 과제」란 글을 통해 ▲사법부의 재산공개 ▲법관 계급제 폐지 등을 제기,3차 사법파동의 불씨를 댕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판사는 『나이가 40정도 되면 자신이 의사결정도 하고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라며 법원의 경직성을 꼬집고 『젊었을 때는 까탈이라도 부렸지만 이제 그러지도 못할 나이』라며 씁쓸해 했다.그는 『2천2백만원짜리 시영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한 아내와 신장병을 앓고 있는 아들(8세)에게 풍족한 삶을 주고 싶다』며 인간적인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전북 옥천 출생으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년 뒤인 81년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판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말로 법원에 대한 애증을 표시했다.
  • 대법원 「서소문 시대」 마감/어제 전원합의체 마지막 판결

    ◎28일까지 이사… 서초동 새 청사서 업무재개 숱한 명판결과 다소 부끄러운 판결도 내렸던 서소문 대법원 법정이 17일 전원합의체 재판을 끝으로 67년의 기나긴 역사를 마감했다. 이날 하오 1시30분 101호 대법정에서 열린 마지막 재판은 재판장인 윤관 대법원장이 『상고를 각하합니다』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5분여동안 판결문을 낭독함으로써 끝났다. 대법원은 이날 지난 80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내란사건 선고공판 이후 15년만에 법정의 사진촬영을 허용,아쉬움을 달랬다. 서소문 대법원청사는 1895년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된 뒤 1908년 서울 공평동 1636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법원종합청사가 1928년 10월 새로 건립돼 이전되면서 시작됐다. 아케이드식 창문과 아치형 출입구로 건축 당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청사는 일제 침략주의를 상징하는 「일」자형으로 설계돼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대표적인 「오욕」의 건물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임기를 다 채운 대법원장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비롯,3·4대 조진만,5·6대 민복기,8대 유태흥 대법원장 등 4명에 불과하며 정년(70세)으로 물러난 이일규 대법원장을 제외하고는 김용철 대법원장 등 4명이 정권교체기의 사법파동과 재산공개 파문 등으로 임기중 물러나는 아픔을 겪었다. 한편 대법원은 오는 21일부터 28일까지 서초동 신청사로 이사를 완료한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근대 사법제도 1백돌… 그 영욕의 세월

    ◎“정치권력서 독립” 외로운 투쟁사/조봉암 무죄선고 등 권력맞서 소신의 판결/50년대/민주화투쟁 점철… 제2차 사법파동 진통/80년대/국가배상법 위헌·김시훈 사건·생수시판 허용 등 명판결로 25일은 이 땅에 근대사법제도가 도입된지 꼭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우리나라 근대사법의 시원은 법률 제1호인 「재판소구성법」이 시행된 18 95년 4월2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재판소구성법의 시행 이후 그동안 「원님재판」에만 의지해 왔던 봉건적 법률문화의 구각을 벗어나 최초의 판결,최초의 판사,최초의 재판부 등 근대적 의미의 각종 사법제도가 착착 뿌리를 내리게 됐다.그로부터 1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사법제도의 골격을 바꾸는 법조개혁을 눈앞에 두고 있다.근대사법 1백년을 맞는 우리 사법계의 「영」과 「욕」의 발자취를 주요제도의 변천 및 사건과 판결,그리고 인물을 중심으로 되돌아 본다. ▷영욕의 근대사법 1백년사◁ 근대사법사의 뿌리는 1894년 갑오개혁에 두고 있다.그해 7월 「모든 죄인은 사법관에 의하지 않고는 형벌을 과할수 없다」는 법령의 선언은 재판과 행정의 분리원칙이 처음 이뤄졌다는 의미를 가진다.이어 1895년 4월25일 재판소구성법으로 각급 재판소가 설치되면서 근대사법은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 ○일제권력 시녀로 전락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사법제도 또한 일본의 근대적 사법제도를 그대로 이식받아 외형상 발전됐으나 내용적으로는 일제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질곡을 겪었다.이때 우리에게 이식된 대부분의 일본식 법률과 제도·관행의 기본틀은 지금까지 잔재로 남아있다. 48년7월17일 대한민국 헌법공포와 함께 사법부도 민주사법으로 재출발한다.이후 자유당 통치시대를 통틀어 정치권력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는 외로운 싸움이 계속됐다. ○시위대 법원청사 난입 특히 진보당 조봉암의 국가보안법위반사건에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법원을 비난하는가 하면 정권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가 법원청사와 판사집에 난입,2심에서 판결이 번복되는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이 시기에도 동백림사건·한일회담반대시위자 영장기각등 「소신판결」이 잇따라 사법부의 독립의지도 돋보인 시기로 평가된다. 5·16과 10월유신,10·26사건으로 이어진 60∼70년대는 사법부의 시련기였다.「대법관」이 「대법원판사」로 격하됐고 법관의 임명권과 인사권까지 대통령이 장악했다.그 와중에서도 71년6월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로 소신을 보였으나 같은해 7∼8월 2달동안 법관의 구속에 항의한 전국법관들이 일제히 사표로 맞서는 사태가 벌어졌다.이른바 「사법파동」으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지키기가 시도된 것이다. ○「대법관」 명칭 87년 부활 민주화투쟁으로 상징되는 80년대 초·중반에는 미국 문화원방화사건 법정소란,유태흥 대법원장탄핵소추안 국회발의,김영삼 신민당총재 직무집행가처분신청 인용 등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위협당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87년 25년만에 격하됐던 「대법관」의 명칭이 부활됐으나 88년6월 서울지역 법관 50여명의 개혁요구로 제9대 김용철 대법원장이 조기퇴임하는 「제2차 사법파동」의 진통이 이어졌다. 93년 문민정부출범후 사법부는 진정한 민주사법을 구현하기 위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지난해 7월 법원조직법 등 사법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했다.사법개혁은 지난 2월 김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제2장을 기다리고 있다. ▷명판결들◁ 최근 법관들을 대상으로 「근대사법사상 가장 의미있는 판결」을 물은 여론조사에서 법관들은 ▲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82년 김시훈 사건 무죄판결 ▲94년 생수시판금지 위헌판결 등을 대표적 판결로 꼽았다. ○강압에 의한 진술 방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은 국고손실을 이유로 군인·군속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제한한 국가배상법 제2조 단서조항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전원합의체의 판결로 당시 최고회의의 비상입법에 대한 유일한 위헌판결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했다. 김시훈 사건은 경찰수사단계에서 작성된 자술서를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할 때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강압에 의한 진술을 방지해 피의자의 인권을 지켜준 판결이었다. 생수의 국내시판을 불허한 보사부고시는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와행복추구권 및 환경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판결한 대법원의 생수시판금지 위헌판결도 오랜 행정편의주의를 법원이 준엄하게 꾸짖은 대표적 사례였다. ○처 능력제한 무효판결 이밖에 처의 능력제한을 규정한 구 민법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하므로 무효라는 판결(대법원 47·9·2)은 남녀평등 실현에의 「거보」를 내디딘 판결이었으며 검찰에서의 자백에 임의성이 인정되더라도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다면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판결(대법원 82·2·1)과 거짓말탐지기의 증거능력을 배제한 판결(대법원 83·9·13)도 명판결사의 대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들이 법원을 빛낸 영광의 판결이었던 반면 정치적 격변기에 내려진 일부 판결들은 법원이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한 사례들로 지적되고 있다. ◎법관들의 영원한 사표/가인 김병로/독재 맞서 사법부 독립 추석 마련/일제시대 항일사건 변호 전담 1백건 넘어/관용차 거부 청렴·대쪽법관… 반독재투쟁 일관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법관으로는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김홍섭 전서울고법원장,이회창 전대법관 등이 우선 꼽힌다. 특히 가인 김병로는 법관들의 영원한 「사표」로 불린다. 일제때는 항일운동 관련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고 해방 이후에는 독재에 맞서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을 앞서 실천해 우리나라 사법부 독립의 초석을 다져놓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가인은 1888년 1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7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2살때 결혼,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돌보면서 「소학」과 「중용」「대학」 등 한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1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경성전수학교 조교수를 거쳐 19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뒤 그가 맡은 독립운동관련 사건만도 안창호와 수양동우회사건,6·10만세운동사건,광주학생운동사건 등 자그마치 1백여건이 넘는다.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거세지자 32년 서울 근교 양주군 노해면 창동(지금의 서울 창동)으로 들어가 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보냈다. 가인의 진면목은 그가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48년 8월부터 58년 1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9년 남짓 재임기간 동안 더욱 빛을 낸다.50년 2월 골수염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그였지만 의족과 외지팡이에 기댄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먼저 사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서 비롯됐다.52년 봄 자유당정부가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해서 대통령에게 밉보인 사람들을 마구 얽어매자 법원은 그때마다 무죄를 선고했다.이대통령은 법원의 이같은 판결에 크게 진노했지만 가인은 이를 일축했다. 『판사가 내리는 판결은 대법원장인들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다.무죄판결이 불만이라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는 것이지…』,『나는 단언하노니 재판이나 사법운영에 있어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이 없으며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독립된 사법운영에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일이 없다』 가인은 정년퇴임한 뒤에도 자유당 말기의 반민주적 행태와 부정선거를 규탄했으며 5·16쿠데타 때에도 강력히 반대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벌이다 64년 1월 7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와 함께 김 전서울고법원장은 고위직 법관에게 제공되는 관용차마저 마다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걸어서 출퇴근하는 「청렴법관」으로,이 전대법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판사」로 후배법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 “사법부 개혁통해 독립성 확보”/윤관대법원장 취임 첫 기자회견

    ◎「정치판사」는 진퇴 스스로 판단을/성실성·개혁자세 인사 적극 반영/사시 사법부에 이관… 특별법원 설치 검토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 사법부개혁에 착수,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사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3차 사법파동으로 불리는 전임 대법원장의 사퇴의 진통끝에 12대대법원장직을 맡은 윤관 신임대법원장은 27일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의례적인 인사치레나 감회는 생략한채 강도높은 개혁의지를 천명했다 윤대법원장은 특히 재산공개와 관련한 문제법관이나 이른바 정치판사의 거취문제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법관 스스로가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취임사에서 사법부 개혁을 위해 범국민적 기구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개혁은 시대적 요청이다.특히 근대사법 도입 1백년과 21세기를 앞둔 시점에서의 개혁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우선 제도적 측면에서는 우리 대법관의 재판업무가 폭주해 거의 한계에 이르고 있다.상소남발에 따른 이런 문제와 법관을 선발하기 위한 사법시험제도의 이관문제,법관개인의 평가문제,특별법원 설치문제등 개혁의 대상이 되는 문제는 여러분야에 걸쳐 있다.앞으로 법조계는 물론 학계와 언론계등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각계가 총망라된 개혁기구를 설치할 생각이다. ­재산공개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법관의 인책문제와 관련한 견해는. ▲재산공개로 사법부는 충격과 교훈을 함께 얻었고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이와 관련한 법관의 문책은 달리 봐야 한다.법관은 헌법등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고 있는만큼 여론으로 법관을 문책하는 것이나 법관을 조사하는 것도 법관의 신분상 독립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듯 재산공개와 관련해 문제가 있는 법관은 자기양심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판사 개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그렇다. ­이른바 정치판사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인적청산은 어떤 방식으로 할 계획인가. ▲어느 법관이 판사의 길을 포기하고 정치권력에 영합해 출세하려 했다면 법관 스스로 그런 판결을 했는지 판단을 내려 용퇴해야 할 것이다. ­정치판사는 30여년의 법관경험으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얘기하기 곤란한 문제지만 특정 보직에 근무했다는 것만으로 정치판사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있는 법관의 인사조치는 고려하고 있는가. ▲재산공개등에 물의가 있었다면 빠른 시일안에 검토해서 인사에도 적절하게 반영할 것이다. ­사법부독립에 관한 평소의 소신은 어떤 것이며 외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사법부의 독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정치권력이 사법부를 시녀로 만들려면 굴종하든지 국민과 함께 독립을 쟁취하든지 둘중에 하나다.새정부는 사법부의 독립을 해치려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해치려해도 소신을 갖고 지킬 것이다.또한 사법부의 독립은 독선이 아니고 입법 행정부와 조화속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임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사법부가 권위주의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재판관의 권위는 존중돼야 한다.권위가 존중되지 않으면 재판이 불신받기 때문이다.국민들도 재판을 신뢰해야 하며 재판에서 최선을 다해도 진다면 법관을 이해하려 해야 할 것이다. ­법관의 인사원칙과 인사시기는. ▲사법부의 안정을 위해 후속인사는 최대한 빨리 단행할 생각이다.인사의 공정과 관련해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소장판사와 법관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들을 생각이다.인사에서 서열이나 능력만을 중시할 수는 없다.자세와 성실성도 중요하다.법관회의를 의결기구로 만들 계획도 갖고 있고 법관회의를 인사의 공정성보장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검토할 예정이다. ­재조와 재야의 갈등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변호사는 중요한 역할을 함에 틀림없지만 같은 차를 타고 간다 하더라도 사법부가 앞바퀴라 할수 있다.앞으로 변협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외풍 거세 9명중 5명 “도중하차”/역대 대법원장 뒷얘기

    ◎5·6대 민복기씨 10년2개월로 최장수/7대 이영섭씨 「오욕의 나날」 퇴임사 유명 23일 12대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윤 관대법관에 앞서 모두 9명이 대법원장자리를 거쳐갔다. 그러나 초대 가인 김병로대법원장등 4명만이 임기를 제대로 채웠을 뿐 절반이 넘는 5명은 정치상황과 맞물려 도중하차하는 불운을 겪여야 했다. 3권분립이 무색하리만큼 격변의 외풍에 밀려 중도에 교체되는 수난을 당한 것이다. 임기를 마친 대법원장은 초대 가인을 비롯 3·4대 조진만,5·6대 민복기,8대 유태흥씨등 4명.2대 조용순,7대 이영섭,9대 김용철,11대 김덕주씨등 4명은 임기도중 물러났고 10대 이일규씨는 임기중 연령정년(70세)을 맞아 2년5개월만에 퇴임했다. 법조인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가인 김병로초대대법원장은 9년3개월동안 사법부를 이끌며 사법부의 기초를 다지고 소신으로 사법권을 수호, 우리나라 사법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3·4대 조진만씨는 박정희대통령도 존경을 했던 인물로 7년3개월동안 재임하면서 사법부의 내실을 다지고 사법부 근대화에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6대 민복기씨는 박대통령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1차 사법파동」과 유신·긴급조치 발동등 암울한 시대상황속에서도 10년2개월을 재임,최장수를 기록했으나 5공출범과 함께 취임한 8대 유태흥씨는 임기는 채웠지만 정권에 예속된 모습으로 일관,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발의되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 말기에 취임한 2대 조용순씨는 4·19혁명을 맞아 23개월만에 물러나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최단임을 기록했고 7대 이영섭씨도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25개월만에 하차했다.이씨는 짧은 재임기간을 「회한과 오욕의 나날」로 표현한 유명한 퇴임사를 남기기도 했다. 9대 김용철씨는 88년 6월 민주화 열기속에 터진 대법원장의 퇴진과 사법부 개혁을 촉구한 법관들의 성명파동으로 물러났으며 11대 김덕주씨는 재산공개 파동에 휘말려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특히 6공출범과 함께 대법원장으로 내정됐던 정기승씨는 여소야대 정국아래 사상 처음으로 국회동의안이 부결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재야로 돌아간 불우한 인물로 남아있다.
  • 사법부 재산파동 조기수습 고육책/김덕주 대법원장 사퇴의 함축

    ◎“축재의혹 법률차원대응 한계” 판단/법원의 개혁청사진 내야 불신해소 김덕주대법원장이 10일 전격적으로 사퇴를 표명한 것은 사법부전반에 대한 불신을 몰고온 이번재산공개파동을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조기에 수습해나가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수있다. 김대법원장과 일부 법관들의 재산내역에대한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에서 더이상 여론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사법파동의 파고만 더높게 할것이 뻔한것이라는 상황판단이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재산공개직후 이번에 처음 재산을 공개한 사법부에대한 따가운 시선이 집중됐을때만해도 법원관계자들은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증식했거나 편법으로 투기를 한 흔적은 거의 없기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별문제없을 것으로 판단했다.일부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은 실사과정에서 정리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김대법원장이 대법원장취임전 2년여의 짧은 변호사시절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또 이 자금으로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있고 또 고법부장급 일부 법관들도 부동산투기등의 비도덕적 재산증식사례가 연일 보도되자 법률적차원의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것으로 볼수 있다. 김대법원장의 이번 사퇴표명은 지난 6월말 일부 소장판사들과 변호사단체등의 사법부 수뇌부 개편및 정치판사퇴진요구와도 무관하지 않은것으로 법조계주변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이때 이미 사법부수뇌부의 도덕성에대한 흠집이 크게 난 상황에서 이번재산공개파동에서도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자리를 지키려는 인상을 보일 경우 자신은 물론 사법부 전반에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법정주변에서는 벌써부터 판사들의 도덕성을 내세워 재판에대한 공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적지않게 일고 있는 분위기도 이번 결단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할수 있다. 6공중반기인 지난 90년말 대법원장에 취임한 김대법원장의 이번 중도 퇴진 파동은 지난 88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김용철당시 대법원장이 법관서명파동으로 물러난뒤 5년만에 재연된 것이다. 아무튼 이날 김대법원장의 사퇴는 그동안 문제가 제기된 일부 법관들의 연쇄퇴진으로 이어져 사법부의 재산공개파문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정의와 양심의 보루로 일컬어져온 사법부의 수장이 법조계내부의 사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재산내역의 도덕성에 의혹을 받아 물러났다는 점에서 그 후유증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이번 파동에 따른 사법부에대한 불신의 치유는 앞으로 사법부가 어느 정도 자기혁신과 개혁의 청사진을 내놓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기회에 인사제도 개편을 통한 과감한 자기반성과 재판제도등에대한 확실한 청사진을 내놓아야만 사회정의와 양심의 보루인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 법사·재무·국방·노동위 대정부 질의 답변

    ◎“사법부 철저한 자성으로 개혁하라”/“「실명제 실시」 정부의 구체구상 밝히라”/질문/“용산미군기지 이전계획 계속 추진”/답변 ▷법사위◁ ○…법사위에서 여야의원들은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소장 법관 및 재야법조계의 사법부 개혁건의에 대해 한결같이 공감을 표시,『문민시대를 맞아 사법부의 개혁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할 시점』이라는데 한 목소리. 함석재의원(민자)은 『사법부는 제2의 사법파동에 휘말릴 위기에 처해있다』고 전제,『법원은 검찰에 비해 서울과 지방의 교대근무제등 인사순환제도가 비교적 잘되어 있는데도 인사불만이 많은 것은 인사평가기준이 모호한 때문 아니냐』며 공정한 인사정책을 통한 재판부의 독립을 촉구. 강철선의원(민주)은 『사법부는 형식적인 개혁만을 서두르고 본질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라고 비난한뒤 『대한변협이 대법원장과 정치판사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 이원형의원(민주)은 서울지역 소장판사들의 사법부 개혁촉구 성명문을 인용한뒤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방안 ▲정치권력등 외부압력의 배격 ▲법관간의 개혁공감대 형성 ▲구속영장의 실질심사등을 추궁. 박헌기의원(민자)은 『사법부의 잇따른 내우외환으로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다』면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진정한 사법부로 거듭나기 위해 개혁시대에 맞게 법과 제도를 통한 개혁부터 선행되어야 실추된 사법부의 위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강수림의원(민주)은 『대법원이 최근 밝힌 사법제도 개선안에는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이 전혀 없다』면서 『법원행정처장은 정치판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지만 그 존재는 온 국민이 알고 있다』고 비판하고 사법부의 수뇌부 퇴진을 요구. 허경만의원(민주)은 『최근 사법부 사태로 법원지도부가 곤혹스럽겠지만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잃었던 존경을 되찾을 계기』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뒤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한 개혁을 주장. 정장현의원(무소속)은 『각급 법원의 91년도 및 92년1월부터 8월까지의 자체감사결과를 보면 인사조치 및 징계처분이 단 1건도없다』며 개혁의지의 불재를 비판. 안우만법원행정처장은 답변에서 『사법부는 스스로를 냉정히 반성하고 의식을 개혁,인권보장과 법치주의의 확립을 이뤄나가겠다』면서 『아울러 기존의 잘못된 제도와 운영을 개선하라는 사법부 구성원들의 제안과 요구를 허심탄회하게 수용할 것』이라고 언급. 안처장은 이어 사법부 개혁의 일환으로 ▲법관인사위원회의 개선 ▲법관회의의 제도적 확립 ▲전관예우및 변호사외 판사실출입금지 ▲법관직급의 합리적 조정 ▲관련 법률의 합리적 개정등을 방안으로 제시. ▷재무위◁ ○…전날 못마친 홍재형재무장관의 답변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 구상을 집중 추궁했으나 홍장관은 『신경제 5개년계획 기간내에 가능한 조기에 반드시 실시할 계획이며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겠다』는 기존입장에서 요지부동. 김원길의원(민주)은 이에 『실시시기는 그렇더라도 실시방법이 단지 실명화율을 1백%로 하겠다는 것인지 또는 금융자산소득에 대한종합합산과세까지 하겠다는 것인지라도 밝히라』고 요구. 홍장관은 『매우 민감한 대목으로 신경제 5개년계획에 나와있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만 언급. 김의원은 다시 『완전한 실명제의 실시를 위해서는 법령정비와 국세청의 전산망 강화등으로 적어도 3년의 시간이 걸린다』는등 장황한 설명으로 실시 범위와 방법에 대한 답변을 유도해 내기 위해 안간힘. ▷국방위◁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기종변경,방위비 분담금등에 관한 권영해국방장관의 답변을 청취한뒤 이에 대한 의원들의 보충질의순으로 진행. 권장관은 차세대 전투기 기종변경으로 인한 국고손실 액수에 관한 장준익의원(민주)의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총액수는 5년간 1백60억원으로 1백억원은 임금인상과 환율변동,자재비 상승에 기인한 것으로 기종변경과 관계가 없으며 나머지 60억원도 기술지원료등의 명목으로 지출,충분한 반대급부를 받았다』고 답변. 권장관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과중한 방위분담금을 물게 됐다는 권노갑의원(민주)의 지적에 대해 『한국의 방위비 분담수준이 세계1위라는 애스핀 미국방장관의 발언은 현금지원외에 부동산,인력지원 및 면세혜택까지 모두 현금으로 환산했을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정부예산에서 지출되는 액수는 91년 기준으로 2억달러로 일본의 20억달러,독일의 18억달러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고 해명. 권장관은 용산 주한미군기지 이전계획이 유보됐다는 일부의 보도에 대해 언급,『새 기지가 들어설 오산지역의 추가부지 매입계획취소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설명. ▷노동위◁ ○…노동위는 8일 이인제노동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울산 현대계열사 노사분규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질의를 벌였다. 이날 홍사덕의원(민주)은 『해고자 복직문제가 현대계열사 노사분규타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장관이 대통령과 담판해서라도 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용의가 없는가』라고 묻고 『과거 그룹조정실에서 근로자해고를 결정한만큼 계열사노조가 연합해 해결하려는 것은 당연하며 현총련은 「제3자」가 아니다』라고 주장. 민주당 이호정의원은 『현총련이 노사분규를 일으키는데는 노동계의 헤게모니쟁탈전 성격이 있지 않은가』라고 질의. 이인제장관은 답변에서 『해고무효소송에 승소한 근로자들을 즉각 복직시키도록 노동관계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히고 『현대그룹 해고자 65명은 해고무효소송에 승소한 사람이 없으며 이들의 복직문제는 협상대상이 아니다』라고 답변. 이장관은 이어 『현대계열사 분규현장에 폭력행위가 거의 없었다』면서 『긴급조정권 발동을 고려할 단계가 아니며 공권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
  • 「사법개혁」 제도심의위 발족/대법관 회의

    ◎직급구조·인사문제 전면 재검토/삽법행정 참여 「법관회의」 상설운영 사법제도의 개혁을 위해 변호사와 법학교수·지방법관등이 참여하는 사법제도심의위원회가 대법원에 설치됐다. 또 법관인사에 관한 사항은 반드시 법관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하며 일선법관들도 사법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법관회의가 상설기구로 운영된다. 대법원은 5일 김덕주 대법원장주재로 대법관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의 사법부 개혁안을 확정,발표했다. 법관회의는 그러나 대한변협등 재야법조계의 사법부수뇌부개편및 정치판사의 퇴진요구문제는 의제로 다루지않아 변협등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고 이에 반발,변협측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사퇴를 요구,사법파동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날 마련된 개혁안에 따르면 국민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내실화하고 사법민주화를 확대하기위해 대법관회의의 운영기구로 사법제도심의위원회가 구성돼 활동에 들어갔다.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이위원회는 지방판사·변호사·학계인사등 외부인사들이 참석해 공청회와 주제발표등을 통해 사법개혁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게 된다. 대법원은 이기구를 통해 앞으로 법관의 임용방법·임기·정년·지역법관제등 법관임용제도의 전면개선문제와 부장판사제도의 폐지등 법관 직급구조의 조정,법관인사위원회의 의결기구화등을 검토하기로 했다. 또 서울민사지법과 형사지법을 통합하고 대법원의 업무를 경감시키는 방안도 이위원회를 통해 논의하게 된다. 개혁안은 또 법관인사위원회의 규칙을 개정해 대법관 5명과 고법원장1명으로 구성되던 인사위원수를 지법원장까지 포함시켜 7∼9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인사위원회의 기능도 확대돼 대법원장의 자문에만 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법관수급계획등 법관인사에 관한 기본계획의 수립뿐 아니라 법관의 정기인사에 관한 내용까지 반드시 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했다. 개혁안은 이와함께 법관회의를 상설기구화해 법관들에게 사법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직급별 법관회의와 사건담당별 법관회의등 일부법관만이 참여하는 내부법관회의도 둘 수 있도록 했다. 법관정원 10명이상인 법원에 자문기관으로 설치되는 법관회의는 ▲각급법원의 운영에 관한 내규의 제정 ▲사법부운영에 관해 대법원에 건의할 사항 ▲법관의 사무분담에 관한 사항등은 반드시 심의하게 된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밖에 변호사와 검사의 판사실출입에 관한 지침이 마련돼 변호사나 검사가 판사를 면담할 때는 사전에 면담을 신청해 상대방의 입회아래 면담을 허용하도록했다.
  • 사법부 거듭나기 “몸부림”/소장판사 28인 「성명」왜 나왔나

    ◎“과거청산 통한 개혁이 급선무” 인식/「정치판사」 문제등 싸고 갈등증폭 우려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28명이 30일 사법부의 진정한 개혁을 촉구하는 강도높은 성명서를 발표,법조계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을 던져주고 있다. 일선에서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소장판사들의 이번 집단의사표시는 지난 71년 서울형사지법 이범렬부장판사 구속을 둘러싸고 검찰과의 미묘한 갈등에서 빚어졌던 「제1차 사법파동」과 88년 김용철대법원장의 사퇴를 몰고온 「제2차 사법파동」에 이어 「제3차 사법파동」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장법관들이 발표한 성명은 또 법원수뇌부를 비롯한 중견법관들과 자칫 감정대립을 살만한 대목들이 많아 앞으로 어떤 식으로 매듭이 지어질지 주목되고 있다. 소장법관들과 중견법관들의 이번 갈등은 「사법부의 개혁」에 대해 접근방법이 달라 빚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법원은 새정부 출범 이후 지난 5월 3일과 6월 7일 두차례에 걸쳐 전국법원장회의를 열고 법관인사제도개선,검사의 판사실 출입제한,법관회의신설등구체적인 개혁방안을 논의했다. 이같은 개혁논의에 대해 소장법관들은 궁국적으로는 찬성하면서도 그보다 앞서 사법부개혁의 근본원인에 대한 검토와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법원장회의에서 논의된 제도개혁은 사법부개혁의 일부이고 시작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은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법원수뇌부가 공식적인 반성을 보여야 하는데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법원수뇌부의 현실인식부재론을 지적하며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국민의 편에 서지 못한 부끄러운 판결들에 대해서는 법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그같은 판결을 내린 법관의 인책론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번 성명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라는 게 이들의 변이다.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은 이같은 뜻을 이원배민사지법원장에게 전달했으나 그동안의 법원장회의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아 개혁촉구성명을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원장은 『과거의 판결 몇개가 잘못됐다고 해서 사법부자체가 내부갈등를 겪고 있는 것처럼 비쳐질까봐 우려된다』면서『제도개선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고 있는 마당에 무턱대고 반성을 하라면 어떡하느냐』고 이들의 성명을 꼬집었다. 대법원도 이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면서 이를 진화시키는 방안을 찾기 위해 크게 고심하고 있다. 서성법원행정처기획조정실장은 『단독판사들이 발표한 개혁방안은 대부분 이미 최근 두차례에 걸쳐 가진 전국법원장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이라며『특히 성명서 내용중 판결이라는 방패뒤에 숨어 진실에 등돌리기도 했다는 등의 일부 표현은 수긍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대법원은 무엇보다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의 집단행동이 다른 지방법원등으로 번질지 우려하고 있다. 이 경우 사법부 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또 이날 성명을 발표한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의 대표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일부 판사들의 소수의견일 뿐 전체 법관의 의견은 아니라고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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