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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소앙선생등 월·납북인사 6명 사망일자·묘소 첫 확인

    한국전쟁 중 월·납북된 임정요인 등 저명인사 중 그동안 생사가 알려지지않은 일부 인사들의 사망일자와 장소,최후의 모습 등이 새로 밝혀졌다.이같은 사실은 본지 신준영 기자가 이 달초 방북,조소앙 선생의 비서출신으로 조선생 등 남측인사들의 북행 당시 이들과 동행했던 김흥곤씨(76·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고문)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확인됐다.그동안 월·납북인사들의최후가 더러 알려지기는 했으나 북한현지에서 당시 관계자의 증언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에 따르면,조소앙 선생은 58년 9월 10일 평양시내 남포병원에서 학질로타계했으며, 김규식 선생은 50년 12월 10일 만포 적십자병원에서,조완구 선생은 54년 10월 27일 평양시내 자택에서 타계한 것으로 각각 확인됐다.이밖에 독립운동가 출신의 유동열·김의한·송호성 등의 최후도 확인됐다.이외에도 현상윤 전고려대 총장,백관수 전동아일보 사장을 비롯,제헌의원 강욱중씨(경남 함안)의 사망경위·장소,묘소 등도 확인됐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41) 편사연구사는 “현상윤,백관수,송호성,김의한 등의 사망일자·경위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러 마지막황제 ‘쉼터’ 어디냐

    ◎니콜라이2세 무덤연고권 싸고 2개주 7년째 논쟁/페테르부르그주­역대 왕족 묻힌 혁명도시에 매장해야/예카테린부르그주­유골 발견된 역사적 장소… 반출불가 “러시아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들이 묻힐 곳은 어디냐.” 올해로 7년째를 맞은 이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페테르부르그주와 예카테린부르그주가 각각 자신들의 ‘연고권’을 주장,무덤유치를 놓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러시아정부는 보리스 넴초프 제1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니콜라이2세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망경위,유골확인 등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중이다.또 내년 2월중 조사가 끝나는 대로니콜라이2세 및 가족들의 유골을 페테르부르그주로 가져가 봉분할 것을 결정해놓고 있다. 문제는 유골의 진위를 정밀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유골을 옮기라는 옐친 대통령의 포고령에 예카테린부르그주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예카테린부르그 지방법원은 최근 “유골의 소유권은 주에게 있으므로 다른 주로의 반출을 금한다”고 주정부의 ‘반출금지청원’을 받아들였다.이어 주정부는 유골이 안치돼 있는 ‘이파티예브가’에 경찰력을 동원,유골을 운송해 가져가려는 연방검찰측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물론 연방검찰도 주정부의 반출금지조치에 맞서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혁명도시’ 페테르부르그는 소위 로마노프왕가부터 니콜라이2세 이전까지 역대왕 일가들이 이곳 피터요새(페트로파블로브스크)에 묻혀 있음을 강조한다.반면 예카테린부르그주는 러시아혁명 1년후인 1918년 황제 일가족이 예카테린부르그로 끌려온 뒤 이곳에서 총살됐다는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연고권을 주장한다. 이들 두 주가 서로 ‘마지막 황제의 쉼터’가 되겠다고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러시아 전지역에서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러시아민족주의 물결 때문.소속 주 주민들은 ‘과거로의 회귀’는 ‘러시아의 영광’이며 무덤유치에 실패하면 이는 주지사가 정치를 잘못하는 것으로까지 생각하려 든다.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마지막 황제 논쟁’은 발굴된 시신이 진짜 니콜라이2세와 그가족의 것이냐였다.이 숙제는 거의 풀렸다.러시아 정부는 지난 91년 예카테린부르그주 이웃 한 무명묘에서 유골들을 발굴,이후 영국의 올더마스톤 과학수사연구소와 미국의 국방연구소에 DNA테스트와 유전자 검사를 의뢰해 똑같은 결과를 얻어냈다.발굴 유골들은 니콜라이2세 본인과 부인 알렉산드라,그리고 딸 3명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남4녀 가운데 아들과 막내딸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남총련 기획국장 등 이종권씨 폭행 시인/전남대 변사 수사

    전남대 구내에서 숨진 이종권씨 상해치사 사건을 수사중인 광주 북부경찰서는 18일 전날 밤 자수한 남총련 기획국장 전병모(24),정책위원 이승철씨(24)등을 상대로 ▲감금폭행과 사망경위 ▲가담자 숫자 ▲사건은폐 및 조작경위 등을 집중 조사중이다. 경찰은 전,이씨로부터 남총련 정책위원 장형욱(25),전남대 오월대장 최석주(22),남총련 투쟁국 고문 강재학씨(25)등과 함께 지난달 26일 하오 8시30분부터 다음날 상오 1시10분까지 이씨의 프락치 여부를 조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먹과 발로 폭행했다는 진술을 받아 냈다.
  • 한총련,민간인 린치… 치사/어제 한양대서

    ◎경찰정보원 오인… 손 묶고 집단구타/한총련측 “우리 책임… 관련자 경찰출두” 한총련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한양대 학생회관에서 4일 시민 이석씨(23·선반기계공·전남 해남읍 수석리 126)가 경찰 정보원으로 오인받아 한총련 소속 학생들에게 끌려가 집단 구타당한뒤 숨졌다. 한총련 이준구 조국통일위원장은 이날 하오 한양대 학생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3일 하오 5시쯤 학생회관 5층에서 서성거리던 이씨를 붙잡아 같은 층의 교지자료실로 데려갔다』면서 『이어 이씨의 두손을 묶고 「경찰의 사주를 받고 감시하러 온게 아니냐」고 추궁했으나 진술하지 않아 주먹 등으로 때렸다』고 밝혔다. 이 병원 응급의학과장 정파종 교수(46)는 『이씨의 사체는 앞부분 가슴을 제외하고 양측 엉덩이와 어깨·허벅지 등에 심한 멍이 있었으며,허벅지 뒷부분과 종아리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때 이씨는 삼각팬티와 감청색 티셔츠 차림이었으며 왼쪽 팔목에는 때묻은 헝겁이 묶여 있었다. 한총련은 『이씨가 4일 상오 2시쯤 프락치임을시인했으며,한양대에서 활동중인 나머지 12명의 정보원에 대한 명단과 인상착의 등을 진술했다』고 주장했으나 증거물로 제시한 A4용지 4장 분량의 이씨 진술서에는 날짜와 서명 등이 없었다. 한총련은 『이씨의 죽음에 도의적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공정한 수사가 보장되면 폭행에 가담한 당사자와 목격자 등 관련 학생들이 경찰에 출두,조사를 받겠다』고 밝혔다. 또 한총련 출범식을 무기 연기하고,경찰이 한양대에서 농성중인 학생들의 귀가를 보장하면 자체 해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폭행에 가담한 한총련 소속 학생 전원을 곧 소환,정확한 사망경위를 조사한 뒤 상해치사혐의로 사법처리키로 했다. 이와 함께 이씨의 가족과 주변인물을 상대로 이씨의 최근 행적과 한양대에 가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 김 대통령,오열하는 유가족 위로/유 상경 빈소방문 이모저모

    ◎영정앞서 잠시 묵념… 침통한 표정/부상전경 병실들러 일일이 격려 김영삼 대통령은 3일 하오 시위진압 도중 순직한 고 유지웅 상경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경찰병원 영안실을 방문,유가족을 위로했다. ○…김대통령은 하오 5시쯤 경찰병원에 도착해 황용하 경찰청장,이필우 서울경찰청장,강진국 경찰병원장의 안내로 유상경의 빈소에 조의를 표했다.영정앞에 잠시 묵념한 김대통령의 표정은 비통해보였다. 김대통령은 유상경의 아버지 유해규씨의 손을 잡고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다』고 위로했다.유상경의 어머니 김길자씨가 『너무나 억울하다』면서 김대통령의 손을 부여잡고 오열하자 한동안 달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시위진압 도중 부상당해 입원한 전경 16명의 병실을 돌아보며 『곧 나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일이 위로했다. ○…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심우영 행정수석으로부터 한총련 시위상황 등을 보고받은뒤 유상경 사망경위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 북서 인도한 시신 연대 제적생 확인/경찰,사망경위 조사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13일 북한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우리 정부에 인도된 시신의 신원을 연세대 제적생 강대희씨(31·서울 소초구 양재2동 299의 9)로 밝혀내고 정확한 사망경위와 가출동기 능을 조사중이다. 강씨는 지난 84년 서울고를 졸업,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뒤 92년 2월 전자공학과에 편입했으나 93년 8월 미등록제적됐다.지난해 10월16일 『친구 졸업식에 참석한다』며 집을 나간뒤 연락이 없어 가족들이 서울 서초경찰서에 가출신고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 우성호 선원 귀가/안기부 조사마쳐

    정부는 30일 지난 26일 귀환한 86우성호 선원 5명에 대해 북한 억류시 행적과 피랍경위,선원 3명의 사망경위등과 관련한 부처 합동조사반의 조사를 끝내고 선원전원을 일단 귀가시켰다고 밝혔다. 안기부 국방부 경찰청 수산청 관계자들로 구성된 정부 합동조사반은 이날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86우성호는 85우성호의 종선으로 단독 항해능력이 없이 배를 몰다,고장난 나침반과 항해 미숙으로 북한영해를 침범했다』고 발표했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보훈가족 출신 「유일한 별」 유보선 준장

    ◎휴전선 무너지는 날 빨리 왔으면…/「6·25 산화」 부친 뜻 새삼기려/어머니 모시고 금강·백두산 구경 가는게 꿈 『6·25때 전사한 부친의 뜻을 잇기위해 군인이 됐지만 아직도 통일의 날은 알 길 없어 안타깝습니다』 40여만명에 이르는 6·25 보훈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장군⊃이 된 유보선 육군준장(육사24기·49). 유장군은 광복 50주년이자 6·25 발발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합동참모본부 자신의 사무실에서 각별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남북통일의 선봉으로 탱크를 몰고 휴전선을 돌파할 날이 언제쯤일까』 『45년 반평생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김봉희·71)의 「한」은 언제쯤이나 풀어드릴 수 있을까』 어느덧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난 유장군은 귀밑이 새파랗던 시절,육사에 지원할 당시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64년 육사에 지원한 것은 오로지 부친의 유지를 이어 남북통일에 몸을 바치기 위해서였기 때문. 부친 유상재씨는 48년 7기로 육사에 입교해 대위로 근무중 6·25를 맞아 전사했다.그러나 유해를 찾지 못해 유장군등 유가족들은 해마다 현충일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위패에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고 있다. 사후 소령으로 추서된 유상재씨는 전쟁발발 5일전 육군헌병학교에 입교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학교에서 나와 전선투입을 자원했었다.그는 50년 8월26일 얼굴과 목등 3군데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던중 미처 완쾌되기도 전에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같은해 12월18일 2사단중대장으로 전투를 치르다 다음해 1월초 가평전투에서 전사했다. 유장군은 그동안 부친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지난해 비로소 부친의 실종처리서를 찾아내는데 성공,부친의 사망경위를 파악했다. 유장군은 『5살때 부친의 철모와 권총을 갖고 장난을 치다 넘어져 다친 기억이 있다』면서 『이런 기억 때문에 서울고를 졸업한뒤 곧바로 육사를 지원했고 군에서도 통일의 선봉장이 되기 위해 기갑병과를 택했다』고 말했다. 유장군이 당시 생도들에게 인기가 낮은 병과를 택한 것은 서독육사 재학중의 경험때문.우리나라는 65년 처음으로 육사생도 가운데 1∼2명을 뽑아 서독육사에서 수학시켰으며 이 때 유장군이 선발돼 서독육사 졸업 1호를 기록했다. 그는 68년 소위로 임관,소대장과 전차중대장·전차대대장·기갑여단장을 거쳤으며 91년7월 준장진급했다. 그는 『앞으로 남은 꿈은 금강산·백두산 구경하는 것』이라면서 『북한에게는 결코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는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주말 정오의 급보… 온국민 경악/김일성사망 알려지던 날

    ◎“고향방문 어떻게되나” 걱정/실향민들,“정상회담 앞서 이런 일이”/시장·역마다 발길 멈추고 TV앞에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9일 충격을 감추지 못하며 정확한 사망경위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서울역·영등포역·강남고속버스터미널등에 나온 시민들은 TV를 통해 김주석사망소식이 흘러나오자 갑작스러운 사망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급뉴스를 주시했다. 서울역에는 이날 하오1시쯤 김주석의 사망소식을 실은 신문호외가 뿌려지자 시민들은 호외를 들춰보며 주위사람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미칠 영향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하오2시쯤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TV를 보던 김봉환씨(60·충남 공주군 신풍면)는 『남북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사망해 안타깝다』고 했으며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라는 실향민 황옥순씨(59·여)는 『김일성이 죽기 전에 어떻게든 통일의 기반이 마련됐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정일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불안하다』고말했다. ○…김주석사망으로 전군에 외출·외박·휴가를 금한다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지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여행장병안내소에는 장병들이 수시로 찾아와 자신의 복귀여부를 확인하느라 부산한 모습. 장병들은 안내소에 설치된 군전화를 통해 부대에 복귀여부에 관한 연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산가족들은 이날 낮 김주석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알고 있는 실향민들에게 서로 전화를 해가며 『사실이냐』 『이산가족 고향방문은 무산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모습. 1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고재성이사(62)는 『충격적이다.앞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될 것같고 김정일체제가 어느정도 정리된 뒤라야 남북회담이 재개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러운 추측. ○…시민들은 김주석의 사망소식에 대해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TV와 라디오에서 잇따라 뉴스가 흘러나오자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 이날 낮12시10분쯤에 친구를 통해 김주석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기영씨(29·회사원·성동구 금호동)는 『처음에는 지난 86년의 오보사건처럼 한낱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앞으로 북한정국이 불안해지면 남한에 대한 돌발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어 불안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동대문시장 상인들도 이날 낮12시5분쯤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일손을 놓고 삼삼오오 TV앞에 모여 귀를 기울이는 모습. 상인 5∼6명과 방송을 지켜보던 이 시장 121호 상인 김숙호씨(58·여)는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김일성의 사망소식에 충격과 허탈감이 앞선다』면서 『남북관계가 갑작스럽게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되지만 이럴 때일수록 국민의 슬기를 모아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의도 증권거래소에는 사망소식이 전해진 하오부터 증시전망을 묻는 문의전화가 쇄도해 직원들이 하오 늦게까지 퇴근을 못하기도. 대신증권 여의도지점 영업부 양재규대리(35)는 『주가전망과 사망원인을 묻는 고객들의 전화를 받느라 하오 내내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각 대학 총학생회도 방학중이라 한산한 캠퍼스분위기와는 달리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속보를 지켜보며 앞으로 남북관계 등에 대해 분석을 하는 등 민감한 반응. 또 서울대 총학생회실에도 학생 10여명이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김주석사망후 남북관계와 한반도주변정세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등 분주한 모습. ○…김주석사망소식이 전해진 후 시내 및 국제전화와 이동통신·PC통신등 통신이용량이 평상시보다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에 따르면 김주석사망이 보도된 이날 낮12시쯤부터 하오5시까지 시내통화량은 1주전 토요일인 지난 2일에 비해 9%,국제통화량은 20% 증가했다. 이와 함께 「천리안」등 PC통신서비스의 전자게시판과 「청와대큰마당」등에는 김주석사망과 관련된 글이 많이 등록되고 관련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 꽃동네 화상 사고 은폐의도 없었다/조사반 발표

    【음성=김동진기자】 꽃동네 장애자 화상사고와 관련,진상조사에 나선 충북도와 보사부 사고조사반은 21일 조사결과 사고발생과정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의성과 사고은폐 의혹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지난 20일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꽂동네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한 조사반은 사고당시 현장에 있었던 수녀와 자원봉사자들을 불러 당시 사고상황과 사망경위,사체처리과정등에 대한 조사한 결과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투신자살 아니다” 굳어지는 심증/이교수 주변 새사실 속속 밝혀져

    ◎“미국 가서 집필” 변호사와 주변정리/“일행 방씨외 또 다른 사람 있다” 전화/호텔 베란다 높이 1.2m… 혼자 넘기 어려워 지난 3일 동해안 낙산비치 호텔에서 숨진채 발견된 상명여대 이진분교수(47)의 추락사망경위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함께 투숙했던 방영부씨의 관련여부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이교수가 최소한 투신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객관적 증거가 속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우선 이교수가 8년째 별거중인 남편과는 물론 방씨와의 불륜관계를 청산하고 미국으로 가 집필활동에 전념하려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교수가 지난달 29일 방씨와 1차 동해안 강제동행이전부터 별거중인 남편,불륜관계인 방씨등과의 관계를 청산하기위해 최근 평소 친분이 두터운 변호사와 법적인 주변정리 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해왔다는 것. 이교수의 한 친지는 『이교수가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미국 보스턴으로 가 여성학에 관련된 저서를 집필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절차를 밟고 있었다』고 경찰에 알려왔다. 이는 이교수의 운신을 옥죄어온대학교수라는 신분,명문가정의 가정주부등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의 단면으로 결코 스스로 투신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심증을 설득력있게 말해주고 있다. 반면 지난달 29일 이교수가 방씨에 의해 동해안 낙산비치호텔로 강제 동행했을 때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방씨와 단둘이 간게 아니라 40대 초반의 남자가 동행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지난달 29일 하오 3시30분쯤 낙산비치호텔에 도착했던 이교수는 방씨등과 점심식사하는 도중 서울의 한 친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 이때 이교수는 『방씨이외에 40대 남자가 동행해왔다』며 『불륜관계를 청산하고 헤어지자고 말하자 방씨가 「죽어도 헤어질 수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고 전했다는 것. 이교수가 투신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또다른 심증은 지난 3일 추락사고 현장이었던 낙산비치호텔에서도 찾아진다.이교수가 뛰어내린 호텔방의 창문 밖 베란다 높이는 무려 1.2m로 40대 여자로서는 단숨에 뛰어 넘을 수없는 높이라는 점이다.또 비록 이교수가 스스로 투신했다면 베란다를 뛰어 넘기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교수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베란다에는 이교수의 청바지 혹은 스웨터와 마찰한 흔적이 전혀 없다.누군가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교수가 베란다를 뛰어 넘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는 추론이 나온다.
  • 소년감별소서 「살인입소식」/선입자/“자세 나쁘다” 신참 때려 숨져

    【부산=이기철기자】 23일 상오11시20분쯤 부산시 강서구 대저1동 부산소년감별소(소장 송흔탁) 8호실에서 새로 입소,배치된 이상욱군(18·부산D공고2년)이 같은 방에 수용돼 있던 이모군(17·주거부정)으로부터 입소식기합을 받으면서 주먹과 발로 복부등을 얻어맞아 실신,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숨진 이군은 지난15일 절도혐의로 신입반에 수용돼오다 이날 상오10시50분쯤 초벌반인 이 방으로 옮겨와 이군으로부터 『앉은 자세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가슴등을 얻어 맞아 숨졌다. 이날 이군이 폭행을 당할때 8호실 복도에는 감별소 직원이 있었으나 반장인 이군이 입소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알고 그대로 방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날 상오9시10분쯤 이군을 면회하기 위해 감별소에 들렀던 이군의 삼촌 이태용씨(38·금정구 서동)는 『감별소측이 상욱이가 목욕을 가고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3시간 동안이나 면회를 시켜주지 않다가 정오가 지나서야 사망사실을 알려주면서 상오11시30분쯤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했다』며 『사망시간과 사망경위에 의혹이많다』고 주장했다.
  • 관계장관 대책회의

    정부는 18일 상오 서울대대학원생 총기 사망사건과 관련,정해창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내무 법무 교육부장관등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열고 한씨의 사망경위를 철저히 규명키로 하는등 사후대책을 논의했다.
  • 춘원 이광수 50년말 병사/북한군에 끌려가다 만포병원서

    ◎소련 망명 인사 밝혀 6·25때 납북돼 정확한 사망경위가 밝혀지지 않았던 한국근대문학의 개척자 춘원 이광수가 50년 12월 초순 평안북도 강계에서 15㎞ 떨어진 만포의 북한 인민군병원에서 지병인 폐결핵과 동상 등이 악화돼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당시 북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소련으로 망명한 정상진씨(73·재소고려인신문 고려일보 주필)와 당시 북한 외무성 부상이었던 박길용박사(71·소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가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을 통해 밝힌 것. 이들에 의하면 50년 7월12일 납북되어 평양구교화소 감옥에 갇혔던 춘원은 유엔군의 진격으로 평양을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에 끌려 평양에서 강계로 도보로 가던중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작가 홍명희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만포병원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 김양 사망경위 수사/검찰,부검 매듭따라/경찰 과잉진압여부 조사

    ◎중대장·목격자 소환… 주초 결과 발표 김귀정양의 사망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은 김양의 사체부검을 마침에 따라 8일 부검소견 결과를 토대로 구체적인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7일에 있었던 김양의 사체부검결과,직접사인이 흉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된다는 부검의들의 1차 소견결과를 놓고 김양이 시위 도중 넘어지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들에 대해 집중 조사하기로 했다. 검찰은 이를 위해 지난달 25일 대한극장 앞 시위의 진압을 맡았던 서울시경 최인섭 제4기동대장 등 경찰관계자를 불러 정확한 진압경위와 병력이동상황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들에 대한 조사에서 ▲사고가 난 골목 안에서 쓰러진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고 폭행을 했는지와 ▲학생들이 달아났던 사고현장에 이미 사복체포조가 배치돼 퇴로를 차단했는지 등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수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들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 김양의 부검결과와 함께 수사결과를 종합해 다음주초쯤 발표할 예정이다.
  • 김양 사체 부검 사인규명 방침/검찰/경찰의 과잉진압여부 수사나서

    ◎「대책회의」선 새달 1일 국민대회 계획 지난 25일 시위 도중 사망한 성균관대생 김귀정양(25·불문과3년)의 사망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형사3부(이광수 부장검사)는 26일 김양의 사인규명에 사체부검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이를 위해 서울대 이정빈·이윤성 교수 등을 부검의로 선정해 「범국민대책회의」측과 협의를 마치는 대로 부검키로 했다. 검찰은 김양 사망시 근처에 있던 경찰들이 김양을 에워싸고 있었다는 학생들의 주장에 따라 과잉진압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시위진압에 투입됐던 서울시경 제4기동대의 진압일지를 조사하는 한편 진압중대장 및 소대장을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또 김양의 부검을 위해 법원으로부터 사체압수 수색영장을 발부받았으며 형사3부 소속 임채진·김수남·한명관 검사를 시위 현장과 백병원 영안실로 보내 당직의사 등을 상대로 사망경위에 대해 조사했다. 한편 김양 사건 「임시대책위원회」는 26일 하오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갖고 『김양은 시위대에 깔려 숨진 것이 아니라 경찰의 무자비한 시위진압과 폭력에 의해 숨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김양의 장례문제는 사인이 명확히 가려진 뒤 유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결정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범국민대책회의」는 오는 28일 하오 6시 명동성당에서 「김양 사망 규탄대회」를 갖고 6월1일에는 전국적으로 「제4차 국민대회」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범국민대책회의」는 또 성균관대 학교당국과 총학생회 민주동문회 및 「대책회의」측 대표 등으로 「고 김귀정양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날 김양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 영안실에는 장을병 성균관대 총장과 불문학과 김상태 교수(48)와 재야인사들이 조문했다.
  • 「5월 정국」 대응 비상

    ◎여 「치사」 재발 방지책등 마련키로/야/소위불참… 「체포조」 해체등 요구 여권은 명지대생 상해치사사건 이후 급속히 냉각된 정국타개를 위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반면 야권은 정치공세를 계속하고 있어 정국경색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민자당은 정국 경색문제를 국회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방침 아래 각 상임위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야권과 대화와 협상을 계속하는 한편 1일 당무회의를 열어 시위진압 전경의 과잉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키로 했다. 민자당의 김종호 총무는 『신민당이 이번 사건을 국회 안에서 해결해 나가자는 데 합의해 놓고 태도를 번복한 것은 이번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저의를 국민 앞에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적인 위기를 국회 안에서 풀어 나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민당은 30일 상오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열고 강군 사건과 관련,▲노태우 대통령의 직접사과 ▲노재봉 내각사퇴와 공안통치 종식 ▲집회·시위 자유보장 ▲사복체포조해체 등을 요구키로 했다. 신민당은 이 같은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대규모 옥외군중집회를 열기로 검토하는 한편 재야와 연대,노재봉 내각사퇴와 사복체포조 해체를 요구하는 범국민 서명작업에 돌입키로 대체적인 의견을 모으고 이를 1일 주요 간부회의에서 최종 결정키로 했다. 신민당은 이 같은 장외투쟁 계획에 따라 지난 29일 국회 내무위에서 여야 간사합의로 구성한 내무위 진상규명 소위에도 불참키로 결정했다. 한편 국회는 30일 내무·법사·문교체육위 등 15개 상임위를 열어 ▲강경대군 상해치사사건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보상 및 대책 ▲쌀시장개방 발언 파문 ▲수질오염문제 등을 집중 추궁했다. 이날 내무위에서 여당 의원들은 강군 치사사건의 재발방지책을 중점적으로 질의한 반면 야당 의원들은 사복전투경찰제를 폐지토록 촉구했다. 이에 앞서 내무위 강군 사건 진상조사소위는 이날 상오 민자당 의원만으로 서울시경을 방문,김원환 시경국장으로부터 사견현장 및 향후대책을 보고받았다. 법사위에서 이종남 법무장관은 수서사건과관련해 구속중인 장병조 전 청와대비서관이 1심 공판에서 범죄혐의를 부인한 것과 관련,『공소사실이 인정될 경우 중형이 선고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장씨는 검찰조사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범행을 자백했고 법정에서도 조서의 임의성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강경대군의 부검문제에 언급,『부검이 이뤄지지 않으면 가해자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면서 사인을 추정할 수밖에 없고,사망사실만을 적시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사망경위와 원인을 기술하기가 불가능하게 돼 공소유지에 막대한 애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위에서 최병렬 노동부 장관은 『직업병을 근원적으로 예방하기 위한 장·단기 종합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정부·산업안전공단·산업보건전문가·노사대표 등이 공동 참여하는 연구팀을 구성하겠다』고 답변했다. 문공위에서 최창윤 공보처 장관은 『광고진흥과 광고윤리 및 질서의 확립을 위해 광고진흥법의 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 「강군부검 」싸고 유족·검찰 공방/강경대군 빈소 언저리

    ◎“진상규명·공소유지 위해 꼭 필요”/검찰/“타살 분명한데 왜 다시 칼 대려 하나”/유족 ○…강경대군 사체부검을 둘러싸고 검찰과 유족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29일에도 부검을 실시하지 못했다. 서울지검 서부지청 정현태·이학성 검사는 29일 이틀째 세브란스병원으로 찾아가 부검협조를 요청했으나 유족뿐만 아니라 대책회의측의 거절로 부검을 못했다. 검찰은 이날 『사체부검을 하지 않고는 명확한 사인을 규명하지 못할 뿐더러 공소유지 자체가 어렵다』며 부검에 응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유족측은 『강군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것이 분명하고 정부도 이미 관련 전경 5명을 구속시킨 마당에 강군 몸에 칼을 대게 할 수 없다』며 부검거부 이유를 밝혔다. 정 검사 등은 곧이어 상오 10시30분쯤 연세대 학생회관 3층에 마련된 「범국민 대책회의」 상황실에 찾아가 부검에 협조해 줄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대책회의측이 『유족의 반대 뿐 아니라 내각총사퇴와 내무부장관·치안본부장·시경국장 등 사건 책임자에 대한 구속처벌 요구가 전혀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에서 부검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결국 부검을 실시하지 못했다. 이같이 유족과 「대책회의」측의 부검반대가 완강하자 검찰은 수사상 부검의 불가피성을 알리는 내용의 4쪽짜리 유인물 50여 장을 「대책회의」의 취재진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 유인물에서 ▲부검은 사망경위나 원인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행위로서 부검이 실시되지 못한다면 결국 사인을 추정할 수밖에 없어 공소유지가 힘들고 ▲피의자에 대한 처벌죄명을 정할 수 없고 재판에서도 형량을 결정키 어려울 뿐 아니라 ▲피의자가 폭행에 사용한 도구·폭행방법·상처 정도 등을 가려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따라 부검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정빈 서울대교수 황적준 고려대교수·서재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을 부검의로 정했으며 유족들이 원하는 「인도주의 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이 참여해도 좋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정 검사 등은 28일 상오 10시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강군 사체에 대한 압수수색 검증영장을 들고 연세대에 찾아가 「대책회의」측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었다. ○대책위 「검안」 못 해 ○…유족 및 「대책회의」측은 28일 하오 7시 「인의협」 양길승 박사,「민주변호사협의회」 천정배 변호사,유족 및 보도진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강군 사체에 대한 검안을 실시하려 했으나 검찰이 이를 위법으로 간주,병원측에 협조를 요청해 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검찰측의 부검강행과 대책회의측의 자체검안이 서로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양측은 전날에 이어 29일 상오 11시에도 학생회관에서 협의를 벌였으나 검찰측은 「부검전제검안허용」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대책회의」측은 부검을 전제하지 않은 검안을 먼저 실시하자고 맞서 결국 실패했다. ○재야 등 1천명 조문 ○…연세대 세브란스에 마련된 강경대군 영안실에는 조문객이 줄을 이어 이날 하룻동안 1천명이 조문. 조문객들은 대부분이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조화를 손에 든 사람도 눈에 띄었다.
  • 사우디 미 기지 근무/한국인 심장마비 사

    외무부의 걸프사태 비상대책본부(본부장 이기주 제2차관보)는 25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기지에서 근무하던 이병락씨(60·경기도 의정부시)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숨진 이씨의 유족 및 현지 공관의 보고를 종합한 대책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21일 하오6시쯤 사우디의 다란지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미군당국이 이같은 사실을 22일 가족들에게 전화 및 전보로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이본부장은 이와관련,『숨진 이씨가 근무하던 지역은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리야드로부터 1천㎞나 떨어진 요르단 접경지역』이라며 『따라서 이씨가 이라크의 공격으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현지공관에 상세한 사망경위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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