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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적 서경보 스님 사리 1백과 수습

    【의령=강원식 기자】 지난달 25일 입적한 일붕 서경보스님의 법구에서 1백여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장의위원회는 이 날 수습된 사리를 정밀 분류한 뒤 일붕사내에 사리탑을 건립하여 신도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 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의미

    ◎한국문화재 3점 인류 문화유산으로/고대·중세·근세 것 1개씩 채택… 더욱 값져/세계 100국 440개 등재… 기술·재정지원 받아 한국의 문화재들이 4일부터 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산하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되었다.세계유산위원회 21개 이사국은 이번 총회 기간중 지난 7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 회의를 거쳐 권고된 각국 문화재의 세계유산등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어서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집행이사회에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토록 권고된 우리 문화재는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사적,명승 제1호)와 판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및 판고(국보 제52호)·해인사(사적,명승 제5호),그리고 종묘(사적제125호)등 3건.우리나라의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문화재는 고대에서 중세,근세를 망라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세계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제도는 지난 72년 유네스코 제17차 총회에서 체결된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75년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 가입국의 유산중 오늘의 인류들이 뚜렷하게 보존할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는 유산을 유네스코 세게유산일람표에 등재하는 제도다.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고 세계유산협약국이 매 5년마다 그 보전상태를 모니터해 보고하도록 돼있다.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보전 관리가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국내외 대상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에는 관광객이 증가돼 고용기회와 수입이 늘어날 수 있다.특히 유산에 대한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켜 국가적 책임감도 형성시키는 이점이 반드시 뒤따른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일 것이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3백26개를 비롯해 자연유산 98개,복합유산 16개등 모두 1백개국에서 4백40개가 등록돼있다.문화유산에는 미국의 독립기념관,자유의 여신상,차코 문화국립공원이 북미에 분포되었다.이밖에 유라시아의 그리이스의 아폴로신전,델피 고고유적,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데스 중세도시,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유적도시,피사의 사탑등을 망라했다.아시아만 하더라도 중국이 만리장성,진시황릉,명청대궁전,라사폰텔라궁등 14건이 등록을 마쳤다.일본의 경우 5건,인도 21건,인도네시아 4건,필리핀 2건,태국 4건,베트남 2건등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8년12월 세계 1백2번째로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했다.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과 인연을 맺은지 7년째지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문화·자연 유산도 등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번 문화유산 등록은 국가적으로 매우 뜻이 깊다.따라서 이번 세계유산 등록은 우리 문화재가 유수한 세계의 문화유산과 동등하게 평가되고 비교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보고/우리 문화유산 사랑 계기되길/최몽룡 서울대 박물관장 우리나라의 불국사­석굴암,해인사 대장경판­장경판고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민족의 얼과 솜씨가 밴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서기 710년(경덕왕 10년)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여기에는 다보탑(국보 20호),삼층석탑(국보 21호),연화칠보교(국보 22호),청운백운교(국보 23호),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과 사리탑(보물 61호)이 있다.또 19 66년 10월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수리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동경,옥류와 은제사리함 등은 국보 126호로 일괄 지정받았다.그중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은 8세기경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석굴(국보 24호)은 751년(경덕왕 15년)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후원전방의 석실이다.그안에 본존불을 비롯해 십일면관음보살,십대사천왕상,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상들이 조각되어 있다.종교성과 예술성을 공유한 이들 조각은 세계적 예술품이거니와 우리조상이 남긴 걸작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1233년∼1248년에 걸쳐 판각하였는데 매수가 8만여판에 이른다.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다.장경판고(국보 52호)는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홍치원년명의 기와(1488년)가 나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시설로 통풍시설 등 선조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이들 이외에도 해인사에는 고려각판(보물 206호),대장경 판본(보물 972호),목조희랑대사상(보물 999호),석조여래입상(보물 264호)과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호)이 있어 해인사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킨다. 종묘(사적 125호)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태조의 묘인 태묘의 정전(국보 227호)과 조묘인 영녕전(보물 821호)으로 이루어진다.이 건물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에 둔것으로 1394년(태조3)터를 보아 1546년(명종 1)에 완공되었다.그후 임진왜란때 불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증건되어 오늘에 이르른다.이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격식과 장엄함을 건축공간에 잘 표현한 조선조의 뛰어난 건축물이다. 이들 세곳은 국보와 보물의 창고로 여겨질 만큼 많은 중요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이와같이 우리나라에는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직까지 없었다.이미 등록된 중국의 14건과 일본의 5건에 비하면 우리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이 빈곤했던 것도 사실이다.이들 외에도 앞으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누더기 한벌(외언내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긴 성철대종사는 일생을 「무소유」로 일관한 당대의 큰스님.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을 때의 별명은 「가야산 호랑이」였다.대쪽같은 성품과 구도자로서의 몸가짐이 워낙 엄격해 붙여진 별명이다.그가 몸담고 있었던 4평남짓 방에 가구라곤 고색창연한 서안 하나뿐이었고 93년11월4일(음력 9월21일) 세수 82세로 열반할 때 남긴 유품도 누더기 한벌뿐이었다. 30∼40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이 낡아빠진 가사는 성철스님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높고 청정했는가를 보여준 징표다.물질만능과 배금주의에 젖어 있는 세태속에서 이 한벌의 누더기는 청빈한 삶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스님이 열반했을 때 수습된 사리는 1백10과나 되었다.스님은 생전에 제자들을 향해 『내몸에서 사리가 나오거든 모두 허공에 뿌려버려라』고 당부했지만 아직 보존되고 있다.이런 당부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자신의 법력을 달고 재는 것이 싫었기 때문.그러나 열반직후 해인사에는 스님의 사리를 보기 위해 불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만일 물질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가르쳤다.지금 우리사회는 노태우씨의 부정축재와 비리로 진흙탕속에 빠져 있다.또 국민은 실의와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이런 때일수록 너나할 것 없이 세속의 욕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13일은 음력으로 따져 성철스님이 열반한 지 2주기가 되는날.이날을 맞아 스님의 제자들은 사리탑 기공,불교학술상 제정,이웃돕기 자비운동 전개등 다채로운 추모행사를 펼치고 있다.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추모행사보다는 큰 스님이 남긴 「누더기 한벌」의 교훈을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마음닦기에 힘써야 한다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이 새삼 뜻깊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 성철스님 열반 2주기/해인사서 대규모 추모법회

    ◎문도회 주최로 새달 5일부터 1주일간/사리탑·기념관 추진… 학술상도 제정 불교 신도들에게 큰 깨달음을 남긴 성철스님의 열반 2주기를 맞아 회향법회와 추모제가 열린다.성철스님 문도회(회장 법전스님)는 스님이 입적한 음력 9월 21일에 해당하는 오는 11월12일 성철스님의 영정을 모신 해인사 백련암의 고심원에서 열반 2주기 회향법회를 갖고 대웅전으로 자리를 옮겨 추모제를 연다. 5일부터 11일까지 1주일간 열리는 「성철대선사 추모 칠일칠야 참회법회」는 스님의 가르침을 실천적 깨달음으로 만드는 수행의 자리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보관할 사리탑 건립도 추진된다.재일동포 미술가인 최재은씨를 사리탑 설계자로,주남철 교수(고려대),정영호 교수(교원대),홍원식 교수(동국대),김동현 문화재연구소 보존실장 등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현대적인 사리탑을 세울 계획이다.사리탑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1백m 떨어진 동쪽 산기슭에 조성할 계획이며 내년 4월 착공,98년 11월 완공할 계획이다. 이와함께 성철스님 불교학술상 및 논문상을 제정,올해중으로 모집 공고하며 성철스님 제자들이 운영하는 사찰과 포교당을 중심으로 올바른 참선법 보급을 위한 선방 개설과 함께 「남모르게 남을 돕자」는 스님의 뜻을 받들어 이웃돕기 자비운동도 펼칠 계획이다. 또 불교서적중 가장 어려운 선서의 대중화를 위한 보급활동과 불전 원전의 연구자 및 번역자 양성등 역경사업도 집중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성철 스님의 영각 고심원은 스님이 남긴 5천여권의 서적과 유품을 모아 기념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20여년동안 성철스님을 모셔온 원택스님은 『성철스님이 참선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이웃의 불행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서 『큰 스님의 뜻을 신도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것이 문도들의 도리』라고 말했다. 참회법회는 『나를 만나려면 1천배를 먼저 하라』는 스님의 생전 가르침에 따라 1주일간 1천배를 올린다.「참여 희망자는 해인사 백련암 (0599)32­7399,해인사 청량사 (0599)32­7987,서울 정안정사 (02)523­8088,서울 연등국제불교회관 (02)735­53 47,부산 해인선원 (051)628­7200,부산 해월정사 (051)742­4762,대구 정혜사 (053)624­9852,마산 정인사 (0551)56­5450,하남시 정심사(0347)791­7732.
  • 성철 큰스님 생애 비디오로 출시/출가·열반·육성법문·유물 등 담아

    지난 93년 11월 입적한 성철스님의 생전 모습을 비디오로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성철스님의 제자와 문도로 구성된 「백련문도회」(맞상좌 천제스님)가 최근 다양한 특수촬영기법을 동원,스님의 생애와 사상,육성법문,유물 등을 담은 5부작 비디오 「우리곁에 다시 오신 성철 큰 스님」을 제작,출시했다. 성철스님 입적 직후에 착수,1년 4개월만에 완성된 이 비디오는 총 8시간 25분 분량에 제작비 2억원이 투입됐다. 비디오는 출가에서 열반까지 스님의 수행발자취를 담은 1편 「해탈의 걸음따라」를 시작으로 수도자세를 밝힌 「가야산 호랑이」,한국불교계에 남긴 업적을 소개한 「붉은 한 수레바퀴」,스님의 가르침을 설명한 「사바세계가 극락이니」,육성법문을 담은 「내말에 속지 마라」 등으로 구성돼 있다. 스님의 유일한 혈육으로 해인사에서 수도·정진하고 있는 불필스님과 막내동생 이옥선씨를 최초 인터뷰하기도 했다. 10여년전 종정 취임식 장면,산책모습,국민학교 생활기록부,도서목록,스님이 탐독했던 각종 사회과학 서적,20대에 작성한 좌우명인 십이명 등 스님의 일상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도 선보인다. 입적 때까지 성철스님을 곁에서 모신 원택스님은 『청정한 수도적 삶을 사신 스님의 일생을 재조명하기 위해 비디오를 제작했다』면서 『불교용어를 풀어서 사용하는등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비디오는 장경각 미디어(02­733­4277)에서 주문 판매하며 가격은 한세트에 10만원으로 수익금 전액은 성철스님 사리탑 건립에 사용될 예정이다.백련문도회는 이 비디오를 영어와 일어로 제작,해외에도 판매할 계획이다.
  • 투루판분지의 교하고성(서역 문화기행:3)

    ◎절벽위 토성… 2200년전 차사국때 건립/불탑 등 유적… 인불교 중국전파 중간지점 입증/성밖에는 끝없는 청포도밭… 2천년전 지중해서 품종 옮겨와 우루무치에서 제일 가까운 고도는 우루무치 동남쪽 1백87㎞지점의 투루판(토로번).그곳은 「서유기」의 무대인 화염산이 있고 세계에서 두번째 낮은 분지라는 지리적인 특성도 있었다. 투루판 버스터미널에서 투루판호텔로 가는 1.5㎞의 청년로는 환상의 거리였다.4차선도로가 온통 포도덩굴에 덮인 녹색의 터널이었다.주렁주렁 파란 포도를,그것들은 「개혁개방」의 선물이 아니었다.벌써 2천년전,지중해로부터 이식된 서양의 품종으로 그것은 신강이라는 열사의 땅에 이룩한 기적이었다. 투루판의 옛이름은 차사·고창·서주·화주·투루판 등으로 불렸다.그만큼 긴 역사에 다난한 역사를 지녔다는 뜻이다.사기의 대원전이나 한서의 서역전같은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450년대까지 7백년동안,이곳에는 이란계의 서역사람이 차사라는 왕국을 세우고 그 수도를 교하에 두었었다.그뒤 서한은 투루판서북쪽에 세워진 오손왕국과 인척관계를 맺고 차사와 연맹관계에 있는 흉노를 치기 위해 BC108년부터 BC60년까지 50년동안 다섯번이나 전쟁을 겪었던 소위 오쟁차사가 있었다. ○이란계 서역인이 건국 그뒤 서한은 교하에 무기교위를 두어 둔병을 주재함으로써 군사와 농사를 다스렸지만 멀지 않아 북량이 기원450년,차사를 공멸하고 고창왕국을 세웠다.그러나 국씨 왕국인 고창은 멀지않아 당태종에게 망하고,당나라는 고창에다 서주를 설치했다. 원대에 들어 몽골의 판도에 들면서 원은 「화주」를 건립했다가 청대에 들어서야 확실히 한족의 지배에 들면서 그 지명도 투루판으로 고쳤고 거기다 현청을 두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투루판의 역사는 기원전250년,차사국의 수도였던 교하로부터 시작되었다.그 교하가 바로 오늘의 투루판에서 서쪽 13㎞지점인 아르나이즈계곡위 30m의 절벽위에 버들잎새나 배모양의 토성 교하고성이었다.남북 길이 1.6㎞에 동서의 폭은 넓게 3백30m 좁게 1백여m,그러한 작은 섬이었다. 필자가 막상 이 역사의 토성,전쟁이 여러번 쟁기질했던 곳,여러번 정권을 바꾸면서 14세기중엽까지 1천7백년동안 정치의 요충이었던 교하에 오기까지 낯 익었던 시도 적지 않았다. 그중 당나라의 변새시인이었던 이기(690∼751)의 「고종군행」과 잠참(715∼770)의 「봉대부」에게 주는 시,그것들에 비친 1천2백여년전의 교하를 읽고 싶다. 「백일등산망봉화, 황혼음마방교하. 행인도두풍사암, 공주비파류원다.」(하략) (고종군행) (한낮엔 산에 올라 봉화를 보고 황혼엔 말을 먹이려 교하에 맨다. 전사의 구리솥은 풍사에 깜깜한데 공주의 비파에선 원한이 서렸어라) 교하의 지세와 전란속의 한을 피상적으로 그렸지만 「황혼음마방교하」(황혼음마방교하)의 이미지는 명구로 칭송되었다. 「봉사안호속,평명발륜대. 모투교하성,화산적최외. 구월상류한,염풍취사준. 하사음양공,불유우운래.」(후략) (봉대부에게 주는 시) 「오랑캐 예속 따라 명령을 받고 새벽에 윤대를 떠났다. 저녁에 교하성 닿을 때, 화염산은 뻘겋게 치솟고. 구월에도 땀이 뻘 뻘열풍은 모래를 날린다.무슨 음양의 조화이기로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가?」 ○길다란 배처럼 지어 잠참이 비록 봉상청이란 대부의 공적을 치하하는 시지만 당시 교하의 자연환경을 생생하게 그렸다.곧 중추 9월임에도 땀이 나는 폭염에 모래 바람,그리고 화염산의 불길과 타질듯한 가뭄을 기록했다. 잠참은 749년부터 757년까지 서주와 북정을 오가면서 많은 변새시를 써서 중국 최고의 전쟁시인으로 알려졌다.특히 최근 고창폐허에서 출토된 당시 역사의 장부에선 잠참이 긁어 놓은 외상의 기록이 나왔다하는데 가슴을 뭉클케 했었다. 1994년 9월28일 하오,필자는 오랫동안 듣고 읽었던 교하성 전망대에 올랐을 때,듣던바처럼 길쭉한 배모양의 섬.비록 밤새도록 마시다 날이 샌 낭자한 술상처럼 쓸쓸한 폐허지만 그 규모와 기풍은 상상밖으로 광대하고 장엄했다. 소위 「교하」는 지금 그 거의가 말라빠진 하상으로 드러나 있었고 겨우 실내가 졸졸거렸다.그 실내위로 30m의 언덕.언덕위로 지금도 4백m의 중앙대로가 10m의 너비로 남북을 관통하고 있었다. 중앙대로를 축으로 동·서·남등의 세개 성문과 북부의 사원구,중부의 사원및 관청가·주택가등 종합구,남부의 일반 주택구등 세개 구역으로 나뉘었다.동문밖엔 벼랑이요,벼랑아래로 바닥이 드러났고,서문은 교하성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바로 고비사막으로 통하였고,북문은 없지만 멀지않은 곳에 모여둔 1백여개의 사리탑림과 연결되었고 남문은 오늘날 「교하고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서 우로 토성의 절벽이요 좌로 교하를 낀 언덕.그 위용이 당당하고 지세 또한 험난했다. 남문을 지나 약간의 비탈길을 오르면 왼쪽에 전망대가 정사각의 튼튼한 토성위에 축조되었다.그 동쪽엔 옹기종기 나지막한 유허들이 널려 있었다.그것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자연의 지층을 뚫어놓은 땅굴로서 큰 것은 2∼3m의 높이에 10여m의 너비였고 작은 것은 1m의 높이에 2m쯤의 너비였었다.그런가 하면 움푹 팬곳은 옛날의 우물이요,뻘겋게 탄 흙돌을 보면 옛날의 굴뚝이나 부엌이었을 가능성도 보였다.그보다 그러한 땅굴옆으로 참치하게 늘어선 토담들,토담밖에는 이리 꼬불 저리 꼬불한 골목길,여기가 틀림없는 백성들의 다운타운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술래잡기라도 한바탕 벌이면서 퉁탕탕 잰걸음치고 싶었다. ○큰길 사방으로 연결 남부의 중앙쯤에는 7∼8m쯤 팬 광장이 있었고,그 광장옆으로 10m정도의 터널 하나와 절반쯤 무너진 벽들이 꼭 그만한 높이로 줄을 섰거늘 혹자는 옛날 감옥의 흔적이 아닐까고 말했다. 중부의 가도는 확실히 넓었다.적어도 6∼8m 너비의 길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정연한 구획정리를 보였다.군데군데 넓고 높은 제단의 모습은 무너진 사원의 어느 기초일터요,때로 높은 계단에 훤칠한 기둥들은 어느 관아의 잔해일거라는 생각에 잠겼다. 중부와 북부 사이에 우뚝 선 불탑이 시선을 모았다.그 중앙은 10m의 돌출에 그 기단의 네 구석엔 4m 높이의 장방형 건축이 그를 에워싸서 한눈에 인도풍의 불탑,곧 스토파임을 알 수 있다.아무리 늦어도 당대의 축조물로 보이는 그 불탑에서 한때 교하성은 인도와 장안의 중간지점에서 불교를 전파 수도하는 중간역임을 말해주었다. 그런가하면 교하성은 당대문하의 전진기지였음이 70년대의 발굴로 증명되었다.거기서 출토된 연꽃무늬의 기와가 장안의 당대 왕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데다 심심치 않게 무더기로 나오는 동전이 또한 그랬다. 불교의 성황은 북부의 대불사유적이 이를 확증해 준다.중앙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남북의 길이 88m에 동서 너비 58m의 사원이 높이 5m의 담에 둘러싸인 유적이다.남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광장이 있고,광장 양쪽으로 고루와 종루,다시 뒤편에 3단계의 단상으로 철자형의 대웅전,그 탄탄한 기초와 웅혼한 기둥이 완연하다.그리고 사원의 둘레는 평균 3m 네모의 방들,곧 승방들이 빙 둘러 있었다.서울 근교 어느 불사에서도 볼수 있는 대승적인 구도라서 한결 다정했다. 필자는 사원의 담에 올라 남쪽으로 즐비한 폐허를 굽어보면서 차사왕국 당시 이 언덕에 살았던 7백호구에 6천50명의 인구와 1천8백65명의 군대(한서의 통계),그 번영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토성으로,그것도 폐허로 남았다는 사실이 성채와 먼지사이,그리고 영원과 순간사이,그것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보였다.
  • 원각사지 10층석탑 훼손/국보 2호/2층 부처·보살상 떨어져 나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내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심하게 훼손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원각사복원추진위원회소속 청청스님(49·종로구 대각사)은 25일 상오 『원각사지 10층 부처님사리탑이 관리소홀로 탑신의 불상조각이 심하게 파손된 사실을 지난 22일 발견했다』며 당국의 조속한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청청스님은 『21일까지 양호했던 탑의 2층면 화엄회부처님상과 보살상이 예리하게 떨어져 나갔으며 북면 1층 사천왕상도 심하게 훼손돼있다』면서 『그동안 문화재관리국에 관리강화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이에 대해 서로 관할만 떠넘기는 답변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청청스님은 또 이같은 문화재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탑골공원서쪽과 정문 왼쪽 담장을 동쪽과 같이 쌓고 이전처럼 입장료를 받고 탑보호집을 설치해 관계당국에서 엄격히 관리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문화재관리국측은 『2년에 걸쳐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산성비나 공해등으로 인한 자연적인 훼손은 있었으나 인위적으로 탑을 훼손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높이 12m의 원각사지 10층석탑은 세조13년(서기 1467년)원각사가 창건될 당시 함께 세워진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 사리 최종 1백10과/작은것 너무 많아 더 수습 않기로

    【해인사=남윤호기자】 성철큰스님의 법골에서 수습된 사리는 모두 1백10과로 최종 집계됐다. 조계종 종단장 장의위원회 집행위원장 일타스님은 15일 상오10시 해인사 청화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공식 발표했다. 일타스님은 『큰스님의 사리가 작은 사리까지 합치면 너무 많아 일일이 셀수가 없어 좁쌀알 정도까지만 세어 1백10과만 공식적인 사리수로 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뼈속에 박혀있는 작은 사리등은 수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대로 쇄골해 사리탑에 함께 안치키로 했다』고 밝혔다.그는 또 『수습된 사리 중에는 국내에서 지금까지 수습된 것중 가장 큰 자주색 콩알 크기 3과를 비롯,녹두알·좁쌀알 크기의 다양한 사리들이 정골(머리뼈) 치아 상반신 하반신등 전신에서 나왔다』고 덧붙였다.
  • 오색의 사리 사파 밝히고…/성철종정

    ◎1차38과 수습… 1백여과 더 나올듯/12월22일까지 해인사안치 일반에 공개 【해인사=나윤도·남윤호기자】 한국 불교의 태고봉 성철스님이 남긴 사리는 12일 하오 1차 수습한 결과 38과로 밝혀졌다. 조계종종단장장의위원회측은 이날 이같이 발표하고 앞으로 뼈에 박힌 사리와 재에 묻힌 사리들을 모두 분류하면 1백여과이상이 더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장의위원회측은 사리의 수에 대한 최종발표는 분류가 완전히 끝나는 14일 상오에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사리 수는 지난 83년 12월 입적한 구산스님(전 송광사 방장)의 53과보다 훨신 많은 것으로 국내 최고의 기록이다. 장의위원회는 또『큰스님의 사리가 자주색·검정색·흰색·갈색등 5색 영롱한 색상을 띠고 있었으며 크기도 녹두알에서 좁쌀알 크기까지 다양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수습된 사리 38과는 보경당에서 볼록렌즈로 덮인 유기그릇에 담겨져 대기중인 스님들과 법당 앞에 장사진을 이룬 1천여명의 불자들에게 공개됐다. 장의위원회는 큰스님의 사리를 49재가 끝나는 오는 12월22일까지 보경당 불좌대 아래에 깐 빨간 융단위에 안치,매일 상오8시부터 하오6시까지 불자들에게 참배를 허용키로 했다. 49재이후에는 특별 제작한 사리장치에 정식으로 봉안한 뒤 사리탑인 부도를 세워 영구보존할 계획이다. 사리분류를 지휘한 장의집행위원장 일타스님은 『사리가 머리와 상체·하체부분서 골고루 나왔으며 녹두알만한 것 3∼4개를 비롯해 다양한 크기의 것들이 뼈속에 알록달록 점점이 박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초 오늘중으로 뼈를 갈(쇄골)예정이었으나 뼈속에 박혀 있는 사리의 수가 많아 사리를 모두 수습한 뒤 쇄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한국불교의…」(화제의 책)

    ◎사리용기의 변천·개념 폭넓게 연구 사리는 석가를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가리키는 신사리와 경전을 의미하는 법사리의 두가지가 있다.일반적으로 사리라면 신사리를 가리킨다.이러한 사리는 일반 대중에게는 불가사의한 신앙대상으로 승단에서는 지양해야 할 대중신앙의 요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미술사가이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지은이는 그러나 사리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도 보지않고 불탑과 불상,불경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연결하는 핵심기재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사리에 대한 연구는 사리용기에 국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이 책은 사리용기를 중심으로 사리의 개념,불경에 나타난 사리탑관,인도와 중국의 사리장엄,그리고 우리나라 사리용기의 변천과 그 특성까지 다루었다.강우방 지음 열화당 4천5백원.
  • 금속공예품 전시 「일본의 속셈」/서동철기자(객석에서)

    국립중앙박물관 4층 일본실에는 지난 27일부터 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일본의 금속공예품 1백59점이 전시되고 있다. 국립박물관에 따르면 이 금속공예품들은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리고 가려 뽑은 것으로 이 가운데는 일본의 국가지정문화재도 6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국립박물관은 또 일본이 이처럼 수준높은 작품들을 대량으로 장기대여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뿌듯해 했다. 전시장을 둘러본 관람객들의 반응은 거의가 일치한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시회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두가지이다.하나는 일본의 금속공예가 한국과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금속공예가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일본실에 들어서면 먼저 13세기에 만들어진 수정으로 된 탑모양의 사리탑에서 벌써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일본의 불교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한다. 이어지는 금동제 걸개장식은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우리에게는생소하다.밀교법구와 공양구에서는 그 연원이 한반도가 아닌 인도나 중국임을 확연히 느끼게 한다.경쇠와 운판,석장,여의도 우리의 불교와 크게 관계가 없다.12세기 경상에서 13세기 현불로 이어지는 불상의 형태도 일본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실의 전시품은 2년마다 바뀐다.금속공예품 이전에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한 일본의 문화재 관계자는 당시 전시실을 둘러보고는 『전시를 안하느니만도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당시 도자기도 도쿄와 교토·나라 등 3곳의 국립박물관과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정선」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관계자는 우리에게는 「일본적인 것」으로 보이던 그 도자기들의 연원이 한국임을 밝힐 수 밖에 없는 것이 분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결과는 이번 전시로 나타났다.전시를 앞두고 일본측에서는 지정문화재급의 대량 반출에 대한 반발도 상당했었다고 전해진다. 길고 긴 한일교섭사에서 일본이 한번도 아끼는 물건을 거저 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전시회도 일본의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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