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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창극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논란

    문창극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논란

    ’문창극 삭주’ ‘문남규 삭주’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24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문남규 삭주’를 검색해보라”면서 “조부가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검증팀이 보훈처에 확인한 결과 2010년 조부가 애국장에 추서된 것이 확인됐다”면서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를 검색해보라”고 말했다. 자신의 조부가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동일인임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는 2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자진사퇴 기자회견, 비난 언론 향해 ‘지적’…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

    문창극 자진사퇴 기자회견, 비난 언론 향해 ‘지적’…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

    문창극 자진사퇴 기자회견, 비난 언론에 ‘지적’… “문남규 삭주 검색해보라” ‘망언’ 논란에 휘말렸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총리지명 14일만에 결국 사퇴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24일 오전 정부 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시점에서 사퇴하는게 박근혜 대통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면서 사퇴를 선언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하지만 문 후보자는 자신이 독립운동가인 문남규 선생의 손자가 맞다면서 독립유공자 논란에 대해서는 강하게 항변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제 가족은 문남규 할아버지가 3·1운동 때 항일운동을 하셨다고 아버님(문기석)으로부터 듣고 자랐다”고 밝혔다. 이어 “저에 대한 공격이 너무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검증 과정에서 저의 가족 이야기를 했고, 검증팀이 보훈처에 자료를 가지고 알아봤다. 저의 자녀도 검색해봤다. 여러분도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 이렇게 검색해달라”고 전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제 가족은 이 사실을 밖으로는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절차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다고 어제 말씀드렸다. 이런 정치 싸움 때문에 나라에 목숨 바치신 할아버지의 명예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의 손자로서 보훈처가 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 절차에 따라 다른 분의 경우와 똑같이 처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고(故) 문남규 선생은 지난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한 대한독립단 소속 독립투사로 지난 23일 국가보훈처는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독립유공자인 문남규 선생이라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문창극 조부의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쉽게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유은호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 모씨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는 자신을 향해 각종 의혹을 쏟아낸 언론에 대해서도 “언론의 생명은 진실 보도”라고 강조한 뒤 “다른 몇 구절을 따내서 그것만 보도하면 그것은 문자적인 사실 보도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보도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KBS가 자신의 교회 특별강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하면서 친일사관 논란이 인 것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하다…조부라 해도 언행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하다…조부라 해도 언행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문창극 할아버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문창극 할아버지 확정할 자료 없어” 반박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로 밝혀졌다는 보도에 대해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면서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유 책임연구원은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날 조선일보는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 맞나…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문남규 선생 맞나…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혜경궁 홍씨 ‘한중록’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혜경궁 홍씨 ‘한중록’

    역사는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굽이를 만나면 방향을 바꾼다. 조선 후기 역시 이 굽이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중의 하나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기 전 영조에게 상소를 올린다. “승정원에 있는 그날의 기록을 없애소서.” 영조는 이 청을 받아들여 그날의 기록을 없앤다. 여기서 ‘그날’은 사도세자가 비운의 공간인 뒤주에 갇힌 날이다. 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그날의 기록을 지우도록 했을까. ‘한중록’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라 하고 있다. 그렇게 ‘그날’은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또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다. 그녀는 ‘한중록’이라는 기록으로 그날에 일어난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역사의 물줄기가 사정없이 바뀐 과정을 객관적인 공인으로서는 소상하게, 그리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증인으로서는 한탄 가득한 심정으로 모든 과정을 써 놓았다. 이 책은 혜경궁 홍씨의 일생으로 시작하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부분에서부터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애원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서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하니, 가슴을 두드려 아무리 한들 어찌하리오.” 그러나 처참하게 숨진 남편에 대한 한을 푸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아들 정조에 대한 고차원적 정치적 배려라는 솜씨 또한 잊지 않는다. 사건에 대한 결말을 사도세자의 죽음이 결국 지병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지병의 원인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결코 남편이 무능력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고 영조의 결정에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영조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인간적인 책임은 있지만 국가의 대의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설명으로 노론의 핵심 가문이었던 친정의 개입 의혹도 돌려놓는다. 더하여 그녀는 아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영조에게 아들을 맡긴다. 혜경궁 홍씨는 사건 이후 영조와의 첫 대면에서 “저희 모자 보전함이 성은이올소이다”라고 말해 영조의 시름을 덜어 주었을 뿐 아니라 아들을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데려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면서 “떠나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를 모셔 배우기는 큰일이니이다”는 말로 아들에게 대업을 잇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영조에게 내보인다. 게다가 가문을 위해 사이가 좋지 않은 화완옹주(사도세자의 누이동생)와의 연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책을 집필한 배경에도 적대적 관계였던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측에 대한 정치적 복수의 의미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 읽다 보면 의외로 그녀는 매우 영민한 인물로, 처세술이 뛰어났으며 정치적 판단 능력 또한 사도세자보다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인 정조가 어머니의 그런 점을 닮아 처절한 당파 싸움에서 때로는 화해와 포용으로, 때로는 위협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조선 후기의 부흥을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한중록’은 사도세자 사건뿐 아니라 영조와 정조, 순조 초반 70여년간 벌어진 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록 실권을 갖지 못한 한 여인이 쓴 글이지만 정치적 사료(史料)로 충분한 가치를 평가받는 작품이다. 정치사적 의미뿐 아니라 조선 후기 궁중의 생활상을 자세히 소개해 놓아 생활사적 의미도 크다. 궁중 용어와 풍속을 이야기 속에 잘 녹아 내어 조선 왕실의 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는데 특히 자신의 혼례 과정을 상세히 밝혀 조선이 얼마나 예법을 중시했는지 알게 한다. 또한 안정되고 유려한 문장, 세련되고 입체적인 표현은 궁중 문학의 진수를 보여 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국어의 변화 과정에서 근대 국어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어 국문학적, 국어학적 가치도 높다. 그래서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된 이유다. 혜경궁 홍씨는 이 책을 한 번에 쓴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나눠 썼으며 다양한 독자층을 겨냥한 출간물이 아니라 혜경궁 홍씨의 집안과 할아버지 일을 궁금해하는 순조에게 사건의 배경을 보이고자 썼다. 손으로 쓴 것이라 이본(異本)도 매우 많고 몇 차례로 쓰였는가에 대한 견해도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첫 부분은 수원 화성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환갑잔치 후 자신의 일생을 쓴 것으로, 비교적 평안한 시기에 쓴 만큼 담담하게 일생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는 60대 후반에 남편인 사도세자 사건을 중심으로 쓴 것이고 세 번째는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해 권력의 힘이 영조 계비인 정순왕후에게 쏠려 친정이 화를 입자 자신의 집안이 죄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 친정 식구들과 사건을 연결해 쓴 부분이다. 당시의 환갑은 지금의 80대라고 할 만큼 많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옛일들을 떠올려 써 내려간 혜경궁 홍씨의 기억력과 집중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친정과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것과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그럴 수 있겠지만 사건에 대한 정황 설명이 마치 일어난 때로 돌아간 듯 세밀하다. 10여년에 걸쳐 몇 차례 나눠 쓴 글인데도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어느 입장을 좀 더 대변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 명확하다. 그래서 ‘이게 진실이 아닐까’하는 믿음을 준다. 무엇보다 ‘한중록’은 한 편의 극적인 소설을 보듯 흡입력 있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어떤 사건은 매우 진중하고 깊이 있게, 어떤 사건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소개하여 지루할 틈이 없고 나타내려는 바가 분명해서 그런지 사건과 인물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고 잘 짜여 있다. 특히 친정에 대한 설명에서는 입궁할 때 데려온 종들까지 포함하고 있어 친정에 대한 애착과 긍지, 지키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수라고 할 수 있는 여든을 넘게 살았지만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딸 하나도 앞서 보낸 한 여인, 게다가 친정 식구들이 자신 때문에 죽어야 했던 여인의 삶은 어떠했을까. 혜경궁 홍씨는 자손들에게 사도세자와 정조,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개인적인 삶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 그 개인적 기록은 역사의 굽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역사로 읽힌다. ※‘임오화변’이라 불리는 사도세자 사건은 ‘승정원일기’에는 빠져 있지만 ‘영조실록’이나 ‘임오일기’(이광현) 등에는 기록돼 있다.
  •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논란…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논란…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선생, 문창극 조부와 동일인 증거 부족”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민족문제연구소 문남규’ 문창극 조부 독립유공자 여부를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한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가 확인했다는 보도 직후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 역시 “문 후보자가 친일파로 몰린 것에 억울해하며 명예회복을 원하자 오늘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보훈처 자체 발굴로 독립유공자 애국장 포상을 받은 문남규 씨와 문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총리실이 문 후보자 조부의 과거 행적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당국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문 후보자의 명예가 회복될 근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문창극 후보의 자진사퇴를 유도하기 위해 신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남규 선생이 문 후보자의 조부와 동일인이라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서둘러 확인해 준 것 같은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1989년 사망)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는 2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진사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설] 日 위안부 만행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사실상 한국 정부와의 정치적 타협의 소산인 양 주장하며 자기 부정을 서슴지 않은 일본 아베 정부의 행태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심각하고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고 할 것이다. 먼저, 일본 스스로의 역사 발전을 가로막았다. 아베 정부는 지난 20일 내놓은 고노 담화 검증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엄존하는 역사를 명백하게 훼손했다. 1993년 담화 발표 당시 고노 관방장관이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사실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한 발언을 ‘고노 장관의 임의적 발언’으로 깎아내렸다.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담화가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역사의 시계를 21년 전으로 돌린 것이자, 부끄러운 과거사에다 더욱 부끄러워해야 할 현대사를 이어 쓰기 시작한 셈이다. 지금도 유대인 학살 책임자들을 추적하고, 해마다 홀로코스트 추념일이면 총리부터 머리를 숙이는 독일과 너무나 대비된다. 과거사 차원을 넘어 외교적으로도 아베 정부는 정상 국가로 간주할 수 없는 도발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이 문안을 통보해 와 우리의 의견을 줬을 뿐”이라는 한승주 당시 외교부 장관의 증언에서 보듯 그들은 21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 자신들이 문안을 만들고, 우리에게 의견을 청하는 통상적 범주의 외교 행위를 해놓고는 이제 와서 양국이 긴밀히 조율한 것인 양 왜곡했다. 일본이란 나라는 결코 믿고 대화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저들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렸다. 정부가 오늘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항의할 예정이라고 하나 이는 그릇된 일본을 바로잡을 출발점일 뿐이어야 한다. 일본의 반인륜적 행태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지구촌이 이를 공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는 일이 그 하나일 것이다. 중국은 이미 지난 10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우리 정부도 기록유산 신청 시점을 저울질하며 외교적 카드로 활용할 생각을 접고 실제 기록유산이 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사료는 차고 넘친다. 정부만 해도 이미 4만 5000여건의 사료를 조사해 놓은 상태다. 중국과 북한, 필리핀, 네덜란드 등 일제 피해국들과의 민·관 공조도 적극 모색해야 한다. 한·일 관계 발전을 떠나 일본의 바람직한 내일을 위해서라도 이제 인류의 이름으로 ‘부끄러운 일본’을 깨우쳐야 한다.
  • [日 고노담화 검증 이후] 정부 “日,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 교묘하게 편집… 진정성 훼손”

    정부가 22일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에 대해 “한국 정부와 담화의 진정성을 훼손하기 위해 교묘하게 편집한 보고서”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23일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우리 측 항의 성명을 기술한 구술서(외교문서)를 전달할 방침이다. 또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 검증 보고서의 영문판을 제작해 국제 외교전에 활용할 것으로 전망돼 한·일 양국 간 ‘과거사 전쟁’이 촉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을 수행하고 전날 밤 귀국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오후 고노 담화 검증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우리 측 대응 카드를 2~개로 좁혀 집중 협의했다. 윤 장관은 일본 정부의 지난 20일 고노 담화 검증 발표에 대해 “매우 고약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는 검증 보고서에 대한 1차 분석을 통해 주요 내용이 왜곡되거나 편집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우리 당국자는 “1993년 일본 고위 관리가 우리에게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청취에 협조해 준 데 감사하다. 이 증언을 기초로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며 “이번 검증에서는 피해자 증언을 ‘요식적 행위로 (위안부들의) 기분을 달래 주기 위한 것’으로 폄하하고 증언 평가도 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일본 측이 주장한 양국 정부 간의 담화 내용 사전 조율도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으로 판단했다. 외교부는 이날 일본군의 위안소 법적 책임 인정을 권고한 유엔 특별보고관의 구마라스와미 보고서(1996년 4월)와 맥두걸 보고서(1998년 6월), 미 하원(2007년 7월) 및 유럽의회(2007년 12월)의 위안부 결의안 등을 공개하며 위안부 강제성을 적극 부각했다. 우리 측과 중국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들과의 국제 공조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한 중국에 이어 다음달 우리 측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했다. 정부는 2012~2013년 4만 5000여건의 국내외 위안부 사료를 조사했으며, 2016년 3월 등재신청서의 유네스코 제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한·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를 적극 활용해 아베 신조 정부의 고노 담화 계승에 대한 후속 조치를 압박한다는 방침이다.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한·미 차관급 전략대화에서도 고노 담화 검증에 대한 우리 측 평가를 의제화하기로 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日 위안부 또 부인… 정부 강력 대응하라”

    “日 위안부 또 부인… 정부 강력 대응하라”

    고노 담화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20일 ‘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 문안 조정이 있었다’는 내용을 발표해 국내 시민단체와 학계가 술렁이고 있다. 역사학자들과 위안부 관련 단체에서는 20여년 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하고 발표한 사안을 다시금 검증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우리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일본 정부가 20년이 지난 담화를 다시 검증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 정부는 고노 담화를 뛰어넘는 발전적 담화를 일본 정부에 촉구하며 일본 총리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역시 “일본 정부는 예전부터 공식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민간 차원의 운동만 전개하면서 ‘할 것 다 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해 왔다”며 “고노 담화에 대해 한국 정부와 절충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위안부 사실을 다시 한번 부정하고 책임을 한국 정부에 옮기려는 의도로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외교상 결례를 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 정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박선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노 담화의 핵심은 ‘군의 관여하에’라는 표현이 모호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표현들도 한국 정부와 사전 조율한 결과라면 당혹스럽다”며 “외교부에서 명확한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은 “체계적인 사료 발굴과 대내외적 홍보 등 정부 차원의 노력이 부족했다”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타이완, 필리핀, 네덜란드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연대를 강화해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독도 관련 日의 100대 거짓·왜곡 주장 낱낱이 반박

    독도 관련 日의 100대 거짓·왜곡 주장 낱낱이 반박

    경북도는 독도와 관련한 일본 주장의 허구성과 억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한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 문제 100문 100답에 대한 비판’을 발간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는 일본 시마네현이 지난 2월 ‘다케시마의 날’에 맞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다케시마 문제 100문 100답’을 펴낸 데 대한 대응 조치다. 총 380쪽인 이 책은 시마네현이 발간한 책을 번역 소개하며 여전히 모순되고 자국에만 유리한 자료를 선별해 교묘하게 논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국제법적으로 분명히 독도가 한국 땅임을 규명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17세기에 다케시마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에도(江戶) 막부가 1696년 1월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독도가 조선령으로 결말이 난 사항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메이지(明治) 정부가 1877년 태정관 지령을 통해 독도가 한국령임을 다시 한번 인정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러·일 전쟁 중이던 일본이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하려고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은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불법이어서 1905년 이후 시마네현이 취한 모든 행정적 조치는 불법이며 무효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책은 관계 기관에 무료 배포하고 있으며 원본 파일을 경북도 사이버 독도 홈페이지(www.dokdo.go.kr) 자료실에 게시했다. 경북도 독도사료연구회 김병렬(국방대 교수) 회장은 “시마네현 다케시마문제연구회가 발간한 다케시마 홍보 책자를 그대로 방관하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까지도 ‘100문 100답’에서 기술한 내용을 사실로 여길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그 책의 주장을 1대1로 반박, 우리 국민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어 “책자를 통해 일본의 논리가 허구임을 밝히고 우리 국민과 전 세계에 독도가 한국 땅임을 체계적으로 홍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경제학자의 영광과 패배(히가시타니 사토시 지음, 신현호 옮김, 부키 펴냄) 20세기의 운명을 바꾼 현대 경제학자 14명의 삶과 이론을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존 M 케인스를 중심으로 전개했다.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인 미국의 케인스주의자들과 케인스에 반발한 경제학자들로 나누어 독창적 주장과 이론을 소개한다. 하버드대 재학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로부터 받은 차별을 멋지게 극복한 폴 새뮤얼슨, 학생 시절 겪은 대공황의 충격을 계기로 빈곤 문제를 파헤치고 새로운 사회주의론을 펼친 존 갤브레이스, 무명의 학자로 살다가 금융위기 예측으로 극적으로 부활한 하이먼 민스키, 케인스 경제학의 허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밀턴 프리드먼, 아버지의 실명과 아내의 자살 등 연이은 불행을 새로운 경제학 연구로 확장한 게리 베커 등을 소개한다. 경제 사상과 이론의 발전 과정, 천재적 경제학자들의 눈부신 활약과 실수 속에 전개된 20세기 경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416쪽. 1만 6000원. 미학사3(타타르키비츠 지음, 손효주 옮김, 미술문화 펴냄) 폴란드 출신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브와디스와프 타타르키비츠(1886~1980)가 남긴 미학 분야의 명저 ‘미학사’ 중 마지막 권. 고대와 중세 미학을 각각 다룬 1권과 2권에 이어 15~17세기 근대 미학의 역사를 다뤘다. 총 9부로 구성돼 이 시기 유럽 미학에서 의미 있는 사건과 주요 인물, 특징을 정리했다. 책은 시, 시학, 음악, 건축, 회화 등 예술 장르 대부분을 아우르면서 근대 미학의 태동기로서의 15~17세기에 집중한다. 저자는 미학이 하나의 학문 분과로 자리잡는 데 이 시기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강조한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를 시작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로보르텔로, 스칼리체르, 뒤러, 몽테뉴, 카라바조, 루벤스, 코르네유 등 당대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의미와 이론 등을 풍부한 원문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다. 근대 미학을 이끈 주요 인물들의 희귀한 초상화를 각 장에 삽입했고, 역사적으로 사료 가치가 증명된 희귀 도판들도 고증 자료로 제시했다. 904쪽. 3만 8000원. 한반도 나비도감(백문기·신유항 지음, 자연과생태 펴냄) 한반도에 기록된 나비 전종(280종)을 분류학적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나비 연구의 시초가 된 석주명 박사의 ‘한반도 나비’(1939년) 이래의 한반도 나비 연구사를 집대성한 책이다. 오랜 세월 한반도 나비 연구에 대한 종합적 분류작업이 없었던 탓에 잘못된 정보를 반복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우리나라 곤충 연구사의 산증인인 80대의 신유항 박사와 열정 어린 40대의 중반의 곤충연구자 백문기 박사가 합심해 공동작업에 들어갔다. 6년에 걸쳐 참고 문헌 400여종을 꼼꼼히 살펴 한반도 나비의 분류학적 소속을 명확히 하고 옛 지명을 현재에 맞게 정리했으며 같은 종의 다른 이름도 추리고, 북한명도 밝혀내 기입했다. 수리팔랑나비, 모시나비, 호랑나비 등 무리별로 우리나라 이름의 유래와 분포, 출현 시기, 먹이식물 등을 정리한 그림 검색표를 수록해 찾기 쉽도록 했다. 생태 및 표본 사진 3200여 컷을 수록했으며 한반도 나비의 먹이식물도 정리했다. 600쪽. 5만 5000원.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조국 지음, 류재운 정리, 다산북스 펴냄) ‘강남 좌파’의 간판 스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펼쳐 보인 자화상. 화려한 스펙, 잘생긴 외모로 소위 ‘엄친아’로 알려진 그가 어떻게 만 16세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만 26세에 교수가 되고, 그리고 대표 진보 지식인으로 살게 됐는지 솔직하게 풀어 놓는다. 조 교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시간 대부분을 7평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보낸다. 책 제목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라는 화두 아래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이며, 자신의 꿈과 갈등을 직시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문이다. 좋은 대학, 직장에 전전긍긍하며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한국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난다. 류재운 작가가 조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조 교수가 다시 집필했다. 260쪽. 1만 5000원.
  •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임진왜란은 성전” 화려한 그림 속 추악한 제국주의

    그림이 된 임진왜란/김시덕 지음/학고재/360쪽/1만 7000원1592년(선조 25년)부터 7년간의 임진왜란을 우리는 ‘임진년에 왜구가 일으킨 난리’라고 간단히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북아 질서를 뒤흔든 근세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이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제국주의 국가 간 충돌을 예고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나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의 기록을 남겼다. 신간 ‘그림이 된 임진왜란’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입장에서 삽화로 담아낸 7년 전쟁의 기록이다.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는 김시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박사가 썼다. 앞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년·학고재)에서 일본 근세의 외전과 그들의 관점을 분석했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고문헌에 삽입된 17~19세기 일본의 목판화와 채색화 300여점을 통해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을 소개한다. 17세기 후기~18세기 초 ‘조선정벌기’와 ‘에이리 다이코기’, 18세기 후기의 ‘에혼 무용 다기코기’, 19세기 전기의 ‘에혼 조선군기’와 ‘에혼 다이코기’, 19세기 중기의 ‘에혼 조선정벌기’ 등 7개 문헌에 수록된 삽화를 주로 담았다. 임진왜란이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되고 문헌으로 정착한 것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막부 때였다. 당시 출판인들은 상품으로서의 서적에 대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목적으로 임진왜란을 적극 활용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다양한 계급의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면서 문자해독률이 높지 않은 중하급 무사 및 상인·농민들을 겨냥해 되도록 많은 삽화를 실었다. 우키요에(浮世繪)의 발달도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에도시대 집필된 임진왜란 문헌군에는 삽화가 많이 포함돼 있지만 삽화의 형태로 실린 그림 자료는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돼 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 그림자료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본인들이 조선과 대외 전쟁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훌륭한 자료들”이라며 “그림 자료에 보이는 일본인들의 인식은 근대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인식과 상통한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이들 목판 출판물에 수록된 삽화들은 17~19세기 일본인들이 임진왜란과 바깥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와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에혼 무용 다이코기’에는 히데요시가 원리주의 불교 종파인 일연종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근세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불교와 신토(神道)를 함께 믿는 일본의 위엄을 해외에 빛내는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기도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에혼 조선정벌기’에는 ‘조선왕 이연(선조)이 여색에 빠져 국정을 망치다’라는 제목의 기이한 삽화가 들어 있다. 전쟁 전 조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명나라가 구원해 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는 명나라의 ‘양조평양록’ 사관을 답습한 것으로 17세기 전기 이후 제작된 일본의 많은 문헌에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세운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무용담은 임진왜란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고 삽화로도 즐겨 그려졌다. 문헌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과장되게 해석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뒤를 따라 서둘러 북진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의 부하들이 조선의 부녀자를 겁탈하는 모습을 보고 화내며 조선인을 보호해 주자 구출된 부녀자의 가족이 가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앞다투어 가토군에 투항해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고 일본식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단편적인 정보와 상상력에 의존해 목판화를 제작한 삽화가들은 한국인지 중국인지 구분하지 않고 대충 이국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집의 실내 장식이 중국풍으로 묘사되고 중국풍 헤어스타일에 중국풍 옷을 입은 조선 여인이 등장하기 일쑤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에 명나라 군대를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기도 한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임진왜란 문헌들에는 전쟁 당시 활약상을 보인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일본인들이 남긴 임진왜란 문헌이 류성룡의 ‘징비록’을 적극 인용한 결과다.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경도에 진입한 가토 기요마사를 저지하려다 패한 거인 장군 한극함이 등장하고 특히 이순신은 불패의 장군이자 모함을 받았다가 복귀한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저자는 “근세 일본인의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그 어색한 느낌은 전근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기고] 논에 물 가두기, 도시민이 수혜자/채상헌 천안연암대 친환경원예과 교수

    [기고] 논에 물 가두기, 도시민이 수혜자/채상헌 천안연암대 친환경원예과 교수

    쌀이 무엇보다 귀하던 보릿고개는 까마득한 일이 됐다. 쌀은 이제 흔하다 못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실제 쌀은 대형마트의 미끼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67.2kg에 불과하니까 80만~90만원인 최신 스마트폰 한 대로 4인 가족이 2년 먹고도 남는 쌀을 살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같은 중량으로 환산한 애완견 사료가격보다 못한 것이 쌀값이다. 이런 와중에 올해 농업계의 최대 화두는 ‘쌀 관세화 유예 종료’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쌀 관세를 유예하는 조건으로 쌀의 의무수입물량을 늘려왔다. 올해 추가로 관세화 유예를 받을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고, 유예를 조건으로 어떤 부당한 요구를 할지 몰라 정부가 노심초사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의무수입량 확대보다는 전면 쌀 시장 개방이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주장도 제기돼 쌀을 둘러싸고 농업계는 지금 매우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한 현실 앞에 농업인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절규할 힘조차 없어 보인다. 고령화로 활력을 잃은 농촌의 현실은 우리가 말로는 농업농촌을 우리 사회의 기반이자, 생명산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산업화와 경제 논리로 우리 생활에서 밀어낸 결과다. 우리가 쌀을 홀대하고 농업인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이 농촌에서 벼를 심는 논이 소리 없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논 면적은 96만 4000㏊로 2005년 110만 4800㏊에 비해 12.7%나 감소했다. 여의도 면적의 485배에 달하는 논이 사라졌다. 통계청은 쌀값이 떨어져 과수 등 수익성이 높은 밭작물로 전환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논 면적 감소가 조만간 환경적 재앙으로 부메랑이 돼 우리 사회를 덮칠 수 있다는 데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수 부족이다. 일본 구마모토시의 경우 지하수 부족이 심각해 원인을 분석했더니 논 면적의 감소가 주원인으로 밝혀졌다. 논은 하루 감수심(減水深)이 3㎝로 댐이나 저수지와 달리 지표면의 물을 정화해서 지하수로 내려 보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구마모토시는 시민의 막대한 세금을 들여, 논에 물만 가둬도 농가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는 농업이 식량이 아닌 환경으로 도시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전체 시민이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에 공감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반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농업과 농촌, 농업인 이른바 ‘삼농’(三農)의 가치에 공감하고 있을까. 우리는 농촌과 도시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논이 사라지면 물 부족으로 도시에 살고 있는 바로 내가 고통을 겪는다. 정부가 농업에 투입하는 재원이 많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삼농의 가치에 우리는 얼마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삼농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시민이 함께 아픈 농촌의 현실을 공감하고 보듬어 주기를 기대한다.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감자는 세계적으로 벼,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재배된다. 아메리카나 유럽에서는 주식으로 이용된다. 2012년 기준으로 연간 재배면적은 약 1800만ha에 생산량은 3억 3000만t에 이른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감자가 식량뿐 아니라 돈이 되는 환금작물이어서 더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는 1824년 북간도를 통해 처음 도입됐다. 감자는 대부분 삶거나 쪄서 먹고 있다. 국산 감자를 가공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감자칩, 감자떡, 감자탕용 등에 불과하다. 전분, 프렌치프라이, 군감자용 등은 대부분 수입해서 먹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볼리비아 경계에 있는 티티카카호 근처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기원전 400년경 감자를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 페루인들은 감자를 ‘빠빠’(Papa)라고 부르는데, 어머니신(Pachamama)으로부터 유래된 ‘감자여신’(Papamama)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다산숭배에 대한 의식과 식량으로서 감자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유럽으로 감자를 처음 도입한 것은 1570년경이다. 미국에는 영국과 버뮤다를 거쳐 17세기 초에 도입됐다. 유럽인들은 감자를 처음 보았을 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악마의 선물, 만병의 원인이라고 여기고 사료나 죄수의 식사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척박한 독일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에 주목했다. 감자를 강제로 심게 해 기근을 극복하고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는 프러시아에서 포로생활 중에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설득해 프랑스에서 감자를 대중화시켰다. 괴테는 감자를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감자는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됐다. 조선말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24년이다. 북간도를 통해 개마고원으로 산삼을 캐러 다니던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암허스트호에 의해 충청도 해안으로 전래됐다는 설도 있어 감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감자는 즉시 식량작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쌀을 세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감자 재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음에도 1879년에 강원도와 한성부에서 널리 퍼질 정도였다. 감자는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서 잘 자란다. 특히 재배 중 필요로 하는 물이 벼농사의 37% 수준이어서 물이 부족한 준사막지대, 고산지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알래스카, 그린란드와 같이 추운 곳이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 등 열대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또 1㏊당 벼 4.7t, 보리 2.4t, 옥수수 9t을 생산할 수 있는데 비해 개발도상국에서도 감자는 10~15t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당 평균 25t을 생산한다. 감자는 재배기간도 짧다. 벼가 5개월, 콩·옥수수·고구마 등이 4개월인데 비해 감자는 3개월 정도면 수확할 수 있다. 밭이 빌 때 다른 작물들도 재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감자는 땅에서 캐서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밀이나 옥수수와는 다른 장점이다. 감자는 다양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거의 완전한 식품이다. 거의 모든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감자에 들어있는 비타민 B1은 쌀의 2∼3배, 비타민 B2와 B3는 쌀의 3배에 이른다. 또 비타민 C는 사과의 6배를 함유하고 있다. 채소류의 비타민 C 함량도 높긴 하지만 열로 가공하면 대부분이 파괴된다. 반면 감자의 비타민 C는 가열을 해도 전분입자들이 막을 형성해 손실이 많지 않다. 감자에 특히 많이 들어있는 성분이 칼륨(K)이다. 중간 크기의 감자 1개를 껍질째 먹을 경우 720mg을 섭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칼륨함유식품인 바나나(400mg)보다 많은 양이다. 칼륨은 고혈압 개선에 효과가 있다. 감자의 이런 영양적 특성에 주목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우주선 내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BLSS(Bio-regenerative Life Support System)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 1988년 수경재배를 이용한 우주 식량으로서 감자의 가능성을 시험한 적도 있다. 예전에는 속이 희거나 담황색인 감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붉은색, 자주색, 줄무늬 등도 개발됐다. 자주색이나 붉은색을 나타내는 성분은 항산화 기능성 물질로 잘 알려진 안토시아닌이다. 컬러감자는 항암작용을 하고 통풍을 개선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은 담황색이고 속은 흰색인 감자가 인기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는 노랑색을 황제의 색으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서 속이 노란색일수록 인기가 있다. 속이 노란 감자의 색소 구성성분은 카로티노이드다. 감자의 카로티노이드 중에는 루테인, 제아잔틴 등 망막의 구성성분으로 시력 감퇴나 실명의 위험을 낮추는 성분이 들어있다. 특히, 루테인은 동물 실험에서 단시간 내에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를 보였다.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이학박사 조지홍 문의 kdlrudwn@seoul.co.kr
  • 오늘 식탁 오른 새우 뒤 노예 노동자들의 눈물이

    오늘 식탁 오른 새우 뒤 노예 노동자들의 눈물이

    미얀마에서 온 마잉트 데잉의 이는 모두 부러져 있었다. ‘유령선’으로 불리는 새우 사료용 고기잡이 배의 선장은 탈출하려던 그를 붙잡아 이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팔뚝에는 전기고문 흔적이 있었고,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펴지지 않았다. 마잉트는 2년 동안 거친 바다에서 온종일 한 끼만 먹고 20시간씩 일했다. 캄보디아의 승려였던 부디는 유령선에서 동료 20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선장은 권총을 동료들의 머리에 대더니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일부는 뱃머리에 사지가 묶였다가 바다로 던져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6개월의 취재 끝에 10일(현지시간) 보도한 태국 어선의 ‘노예노동’은 끔찍했다. 미얀마, 캄보디아 등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태국으로 흘러온 이주노동자들은 브로커들에게 꾀이어 250파운드(약 42만원)에 선장들에게 팔려갔다. 이들은 마치 물건처럼 거래됐고, 정기적으로 구타당했다. 전기고문과 필로폰 투여도 예사롭게 이뤄졌다. 탈출하다 잡히면 대부분 즉결 처형됐다. 새우 양식을 위한 노예노동의 먹이사슬은 복잡했다. 노예노동자를 구매한 선장은 이들을 망망대해로 데려가 새우 양식에 필요한 사료의 원료가 되는 치어와 잡어를 저인망식으로 끌어올렸다. 사료용 물고기는 태국 해안가 곳곳에 있는 사료 공장으로 공급됐고, 물고기를 갈아 만든 사료는 태국 최대 새우 양식업체 CP푸즈로 공급됐다. ‘세계의 부엌’이라는 모토를 가진 CP푸즈는 연매출 33억 달러(약 3조 3000억원)에 이르는 다국적기업이다. CP푸즈는 월마트, 까르푸, 코스트코, 테스코 등 각국의 대형마트에 새우를 공급한다. 태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30만명이 고기잡이 배에서 일하고, 이 중 90%인 27만명이 이주노동자들이다. 적어도 27만명이 노예노동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태국을 대표적인 노예노동 방치국가로 꼽고 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다. 태국의 새우 수출액은 연간 73억 달러로 세계 1위다. 미국과 유럽의 새우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어 태국은 노예노동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태국 해산물 산업의 근간을 노예노동 브로커들이 떠받치고 있고, 관련 업체는 대부분 범죄조직이 장악했다. 관료들은 이들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 월마트와 같은 대형마트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노동을 통해 새우를 양식한 업체와 거래를 끊으면 되지만 “공급 과정을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말만 할 뿐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노예노동 먹이사슬의 정점에는 새우를 즐기는 소비자들이 있다. ‘국제노예노동반대운동’의 아이단 매퀘이드는 “태국산 새우를 사는 것은 죽음으로 점철된 노예노동의 생산물을 구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中, 일본군 위안부 자료 세계기록유산 신청

    중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했다. 중국 외교부는 10일 “중국이 이번에 신청한 위안부 관련 역사적 사료는 모두 중국에서 발굴해 정리한 것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신청기준에도 부합한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특히 “현재의 중·일 관계는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 측에 있다”면서 “일본은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미화를 시도하는 부정적 동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해 이번 신청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이뤄진 것임을 시사했다. 우리 정부도 여성가족부 주도로 국내와 중국, 동남아시아에 흩어진 위안부 관련 자료를 모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앞서 한국과 중국 학자들은 지난 2월 상하이 학술회의에서 위안부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공동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쌀 미래는 있다] 日 쌀값 1000% 수준 종량세… 국제가 오르면 종가세 유리

    일본과 타이완은 우리보다 먼저 쌀 관세화를 통해 시장을 개방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아직 수입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하지만 불안한 점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쌀 관세화 유예 종료 시점을 앞두고 이들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일본은 2000년까지 쌀 관세화를 유예했지만 종료 시점을 2년 앞둔 1999년 관세화로 전환했다. 관세화 유예기간 동안 해마다 늘려야 하는 의무수입 물량을 줄이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2000년에 연간 75만 8000t을 수입하도록 돼 있었지만 68만 2000t만 수입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일본은 쌀 관세화를 하면서 쌀의 관세를 종량세(341엔/㎏)로 설정했다. 가격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거의 1000%에 해당하는 관세다. 우리나라가 관세화를 할 경우 300% 이상의 고율 관세가 필요하다고 분석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3배 이상 높다. 하지만 15년간 국제쌀 값이 3배나 상승하면서 현재는 가격 기준으로 환산한 관세가 280% 수준으로 떨어졌다. 종량세에는 국제 쌀값에 따라 실질 관세율이 변하는 허점이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관세화를 했다고 가정하고 종량세 3000원과 종가세 300%를 비교해보자. 지난해 평균 미국 쌀값 ㎏당 781원에 300%의 관세를 적용하면 3124원이고, 종량세 3000원을 적용하면 3781원이 된다. 종량세를 매긴 경우 수입쌀의 국내 가격이 더 높다. 하지만 미국 쌀값이 두 배로 올라 ㎏당 1562원이 됐다면 300% 관세 적용 시 6284원이 되고, 종량세 3000원을 적용하면 4562원에 머물게 된다. 국제 쌀값이 오르면 수입을 덜하기 위해 종가세가 유리한 셈이다. 타이완은 2002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1년 후인 2003년 관세화로 전환했다. 타이완 역시 쌀 관세를 종량세로 높게 설정했고, 연간 500t 정도의 쌀만 수입하고 있다. 수입 쌀을 막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수입 쌀과 타이완 쌀을 섞은 혼합미가 불법 유통되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혼합미 유통은 타이완에서 불법이다. 수입 쌀은 가정보다 식당에서 주로 유통되고 있다. 일본과 타이완이 관세화로 전향한 반면 필리핀은 관세화를 세 번째 유예하기 위해 2012년 초부터 협의 중이다. UR협상 이후 2005년까지 관세화를 유예한 후 2012년까지 7년간 한 번 더 유예했고, 의무수입 물량은 1997년 5만 9730t에서 35만t으로 늘어났다. 필리핀은 5년간 다시 한번 유예하기 위해 의무수입 물량을 80만 5200t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지만 아직 협상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은 필리핀이 관세화를 또 유예하려면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리고, 다른 농산물도 개방해야 한다면서 압박하고 있다. WTO는 1986~88년 자료를 사용해 국내 가격과 국제 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쌀 관세를 산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내년부터 쌀 관세화에 나설 경우 수입 쌀에 대한 관세는 300~500% 정도 사이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도 미국산 쌀 가격의 40% 수준인 태국 쌀은 일부 수입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태국 쌀의 국내 소비는 매우 적어 우선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화를 할 경우 의무수입 물량을 대북 원조 등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00년부터 8년간 북한에 쌀 250만t을 지원하면서 국내산 쌀 저장량이 부족해 의무수입 물량을 두고도 수입 쌀을 구입해 보내야 했다. 일본은 의무수입 물량 중 일부를 해외 원조나 가축 사료용으로 쓰고 있다. 세종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YS·DJ 민추협 기록 민주화 사료로 보존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손잡고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회의 기록물이 민주화 사료로 남게 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9일 민추협 전문위원이던 김영춘(64·서울 강북구청 감사관)씨로부터 1984∼1987년 민추협 회의 및 활동 내용을 담은 ‘회무일지’를 기증받아 민주화 기록물로 보존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민추협은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가 하나로 뭉쳐 1984년 5월 18일 결성했으며 민주화 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씨가 기증한 민추협의 첫 기록은 1984년 9월 경찰로부터 압수당한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사무실 집기를 회수한 내용이다. 민추협은 그해 7월 관철동에 첫 사무실을 열었지만, 경찰이 방해하고 집기를 압수했는데 두 달 만에 집기를 돌려받았다는 내용이 자료에 담겼다. 회의록에는 1987년 민추협이 해체 절차를 밟을 때까지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과 활동 내역이 담겨 있다. YS와 DJ 공동의장이 수시로 가택연금을 당하고 간부들도 연행과 구금을 반복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판문점에 남북회담 역사 담은 갤러리 연다

    판문점에 남북회담의 역사와 각종 자료 등을 소개하는 ‘판문점 갤러리’가 들어선다. 통일부는 판문점 우리 측 지역 ‘자유의 집’에 분단 현실과 남북회담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판문점 갤러리를 9월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8일 밝혔다. 4억 5000만원가량의 예산으로 자유의 집 4층에 260여㎡ 규모로 설치되는 판문점 갤러리에는 사진 등 현재 설치된 전시물을 확대해 판문점의 역사를 보여 주는 각종 사진과 영상, 남북회담 사료, 남북 직통전화 장비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통일부는 현재 남북회담본부에서 보관하고 있는 7·4남북공동성명서와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10·4공동선언 등 4대 남북 합의서 원본을 이곳에 전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방문객들에게 분단의 현실을 알리고 통일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하자는 차원에서 판문점 갤러리를 만들게 됐다”면서 “가치 있는 자료를 가진 민간인의 기증도 받겠다”고 말했다. 판문점 방문객은 매년 내외국인 10만여명 수준이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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