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사랑 전쟁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김우중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다단계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석굴암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양비론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737
  • 전시상황을 전시하다… 우크라 사진 작가의 ‘어느 하루의 기록’

    전시상황을 전시하다… 우크라 사진 작가의 ‘어느 하루의 기록’

    “우크라이나 격전지 키이우에서 일어난 어느 하루의 기록을 덤덤하게 카메라에 담겨 있습니다. 과하지도 않게, 덜하지도 않게, 그저 렌즈를 통해 바라본 그날 하루 키이우의 보고서여서 더 슬펐습니다.”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받은 제주도가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하루를 기록한 사진전 ‘어느 하루의 기록’을 지난 4일부터 17일까지 제주국제평화센터에서 열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사진전을 전시 기획을 담당한 이승연 김택환미술관 관장은 지난 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시상황을 전시하는데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나 덤덤한 사진들이어서 가슴이 미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진작가연맹회원 올레나 쇼브코플리아스(Olena Shovkoplias·61)가 3월 8일 하루 동안 수도 키이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날의 기록 44점. 특히 폭격에 벌집 쑤신 듯 폐허가 돼버린 건물을 보여주는 사진은 다른 사진들과 달리 제목을 달기 조차 힘겨워 ‘무제’라고 단 것을 알 수 있어 먹먹해진다. 지난 2월 24일 오전 4시 그날 키이우가 폭격받았다는 전시표지판 앞을 지나가는 탱크, “아빠, 엄마 당신은 위대합니다”, “러시아 군인들은 멈추세요, 당신의 가족을 기억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담은 전시상황판, 고양이를 안고 대피하는 모습, 무방비한 키이우 철도역의 적십자 구호소에서 찍힌 노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 그리고 맨 마지막에 튤립을 안고 웃는 연인을 담은 마지막 사진 ‘전쟁, 봄, 사랑’은 전쟁 속에서 핀 희망의 꽃이었다. 참혹한 도시보다는 봄을 기다리는 우크라이나가 담겨 있어 울림은 더 강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6월 제주와 프랑스 베르뎅이 글로벌 평화도시 연대를 선언한 이후 이루어지는 첫 공동사업이다. 해외 전시장 선정 및 원본 데이터 지원은 프랑스 베르뎅 세계평화자유인권센터가 도맡았다. 도 문화체육대외협력국 평화대외협력과의 한 관계자는 “사진 작가는 얼마전까지 키이우시에 있다가 현재는 불가리아로 이동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이메일로 받았다”고 전했다. 전쟁 시작 한달 만에 2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CNN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보도했을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키이우. ‘복싱 영웅’으로 잘 알려진 비탈리 클리치코(Vitaliy Klitschko) 키이우 시장은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설 것입니다”며 이번 전시회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44점 전시 왼편에는 임영호 제주 사진작가가 제주4·3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제주 모습을 촬영한 11점도 전시하고 있다. 3월 18일 하루에 찍은 사진들이다. 평화를 염원하며 그 역시 어느 하루의 기록을 담은 것이다. 알뜨르비행장, 송악산 진지동굴 등 전쟁의 상흔을 포착했다. 제주국제평화센터는 이번 전시회는 당초 17일로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일주일 정도 더 연장 전시할 예정이다. 향후 제주도청 등 전시도 계획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전쟁·시위 다 잘못됐다” ‘중간 미국인’ 목소리 분출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4>]

    “전쟁·시위 다 잘못됐다” ‘중간 미국인’ 목소리 분출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4>]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임기 첫해인 1969년 한 해 동안 베트남에서 미군 1만 1780명이 사망했다. 1965~68년 베트남에서 사망한 3만 6540명에 비해 적지 않은 숫자였다. 1970년 2월, 파리 근교에서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과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1911~1990)가 비밀리에 만났으나 평화협상에 진전은 없었다. 3월 18일, 캄보디아 총리이던 론 놀(1913~1985)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2) 국가원수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론 놀은 캄보디아 영토에서 북베트남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베트콩으로 가는 군수물자 창구이던 시아누크 항구를 봉쇄했다. 닉슨은 캄보디아에 친미 정권이 들어선 것을 반겼다. ●닉슨, 캄보디아에 지상군 작전 명령 4월 20일, 닉슨은 미군 15만명을 추가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쟁이 끝나가고 있으며, 평화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디. 하지만 그 순간에도 B52 폭격기 편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영토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4월 30일, 닉슨은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캄보디아로 진입해서 작전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상군을 캄보디아로 투입하는 작전에 대해 로저스 국무장관과 레어드 국방장관은 반대했지만 닉슨은 강행했다. 닉슨은 혼자 결정을 하면서 당시 개봉된 영화 ‘패튼’을 여러 번 보았다. 닉슨은 자신이 2차 대전 막바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패튼 장군처럼 기억되기를 원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각각 5만, 3만 병력을 동원해 사이공에서 80㎞와 50㎞ 떨어져 있는 캄보디아 영토 내 북베트남 기지 2개 지역을 향해 진군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공습과 지상군을 피해 캄보디아 내륙으로 후퇴했다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철수한 뒤에 접경지대로 다시 돌아왔다. 지상군을 투입한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캄보디아에 대한 지상군 투입은 1969년 가을 미국의 모라토리엄 시위 후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반전 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 대학 캠퍼스에선 시위가 불같이 일어났다.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에선 학생들이 ROTC 건물에 불을 지르고 도심 상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상황이 심각함을 느낀 시장이 주지사에게 방위군 출동을 요청했다. 5월 4일, M1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캠퍼스에 진입한 방위군은 최루탄을 투척해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다.●켄트주립대학에서 울린 총성 학생들은 최루탄을 받아서 방위군 쪽으로 다시 던지는 등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때 별안간 방위군이 실탄 사격을 했고 이로 인해 학생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했다. 사망한 남학생 한 명은 시위를 구경하면서 지나가던 중이었다. 미국에서 학생이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나 군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5월 한 달 동안 일어났다. 미시시피 잭슨주립대에서 경찰이 시위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해 흑인 학생 두 명이 사망하는 등 캠퍼스는 혼돈 그 자체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다. 경찰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친 백악관은 고립된 진지처럼 보였다. 5월 8일 저녁, 닉슨은 기자회견을 열고 베트남에서 추가로 15만명을 철수시키는 약속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날 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닉슨은 새벽 4시에 수행원만 대동하고 워싱턴몰에 있는 링컨기념관을 방문했다. 닉슨은 마주친 학생들과 간단한 대화를 했고 뒤늦게 달려온 당직 비서와 함께 의사당을 둘러보고 시내 호텔에서 조식을 한 뒤 백악관으로 귀환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이 소식을 들은 참모들은 놀라고 걱정했다. 켄트주립대에서 사망한 학생 중 한 명이 뉴욕시 출신이었다. 그의 시신이 뉴욕의 부모 곁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했다. 당시 뉴욕시장은 존 린지(1921~2000)였다. 진보적 공화당원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1965년 선거에서 뉴욕시장으로 당선된 린지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었다. 린지는 5월 8일을 켄트주립대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로 선포했다. 학교를 휴업하고 시청 청사에 반기(半旗)를 게양하도록 했다. 5월 8일 아침, 대학생들이 맨해튼 증권거래소와 유서 깊은 페더럴홀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1시가 돼 갈 무렵 시위대는 1000명을 넘어서 제법 큰 집회를 형성했다. 11시 30분, 갑자기 근처의 세계무역센터(9·11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건물) 등 고층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수백 명이 안전모를 쓴 채로 대학생 시위대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USA, USA”를 외치면서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향해 거칠게 다가갔다. 이들은 “America, Love It or Leave It”(미국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떠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대학생 시위대와 충돌했고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폭행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학생들을 폭행하는 노동자들을 제어하지 않았다. 그날 뉴욕 경찰은 노동자 편이었다.●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반란 500명 이상으로 늘어난 노동자 집단은 “린지를 잡아와라”(Get Lindsay!)를 외치면서 시청 청사로 몰려가서 반기로 게양한 성조기를 완전히 올려 버렸다. 경찰관들은 이 모습을 즐기듯 보았다.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장발 학생들의 머리채를 끌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등 마구 다루었고 그로 인해 학생 100여명이 부상했다. 노동자들이 대학생 시위를 힘으로 제압한 이 사건은 ‘하드햇 폭동’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며칠 동안 시위를 벌였고 5월 20일에는 항만 노동자들이 합세해 15만~20만명이 맨해튼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존 린지 퇴진’, ‘붉은 시장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었다.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은 창문에서 색종이를 뿌려 이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건설토목 및 항만 노동자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블루칼라인데 이탈리아, 그리스, 폴란드 등 동남부 유럽 이민 후손이 많았다. 앵글로 백인과 달리 가톨릭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이들은 본인이나 가족이 2차 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많았다. 뉴욕시 경찰관들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1970년 1월 5일자 타임지는 ‘중간 미국인’(The Middle Americans)을 ‘그해의 인물’로 선정해 커버로 다루었다. 베트남전쟁은 잘못이지만 반전 시위도 잘못이며, 인종 차별은 부당하지만 범죄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을 타임지는 ‘중간 미국인’으로 지칭했다. 타임지는 이들이 소외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바로 이들이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닉슨은 자기가 말한 ‘조용한 다수’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고 생각했다. 5월 26일, 닉슨은 피터 브레넌(1918~1996) 토목건설노조 대표 등 뉴욕 시위를 이끈 노조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환담을 나누었다. 브레넌은 ‘Nixon’이라고 쓰인 안전모를 닉슨에게 기증했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브레넌은 닉슨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68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던 강력한 노조가 4년 만에 공화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브레넌을 노동장관으로 임명했다, 대기업을 대표하는 정당이던 공화당이 백인 블루칼라 계층과 손을 잡은 것이다. 복지 지출을 확대하고 경찰력을 약화시켜 뉴욕시를 재정적자와 범죄의 수렁에 빠뜨린 존 린지 뉴욕시장은 1973년 12월 임기가 끝나자 시청 건물에서 혼자 걸어 나왔다. 중앙대 명예교수
  • 상경한 시골 누이들 응어리 치유… 왜색 누명 쓰고 퇴출 ‘비운의 명곡’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상경한 시골 누이들 응어리 치유… 왜색 누명 쓰고 퇴출 ‘비운의 명곡’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김기 감독의 동명 영화 주제가 대학생과 사랑한 섬처녀 애환 이미자 만삭의 몸 취입 ‘대히트‘ 향토 냄새 풀풀 구슬픈 민요조 1965년 객관적 준거 없이 금지 ‘트로트 비하’ 엘리트 의식 소산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또 한 번 세상이 떠들썩하다.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조선인 강제동원’과 ‘종군 위안부’, ‘독도 영유권’에 관한 왜곡을 보면서 불현듯 ‘왜색 가요’라는 죄명을 뒤집어쓴 채 대중과 격리됐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한산도 작사·백영호 작곡)를 떠올리게 된다.●여공·식모·호스티스 설움 대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 아가씨’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 아가씨’(1963)를 각색해 이듬해 김기 감독이 메가폰을 든 동명 영화의 주제가다. 영화는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았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과 사랑에 빠진 섬처녀가 임신을 하게 돼 서울로 찾아가지만, 대학생은 유학을 떠나고 없다. 섬처녀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술집 호스티스가 된다. 술집 바의 이름이 동백(冬柏)이다. 당시에는 서울이라 해도 공장이 많지 않아 도시로 유입된 농촌과 도서 지역 출신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여성들의 일자리는 더욱 귀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여성들은 1964년 서울 구로에 조성된 수출산업공단에 봉제공 또는 가발 제작공으로 취직했지만, 이런 자리마저 얻을 수 없었던 젊은 여성들은 ‘식모’라고 불렸던 가사 도우미나 ‘레지’라고 불리는 다방 아가씨로 전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모진 수모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던 소위 직업여성들은 ‘동백 아가씨’의 노래 가사를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를 토해 내며 함께 울었다. 너무도 슬프고 분할 때 차라리 펑펑 울고 나면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 없다. 눈물은 패배가 아니라 마음속 응어리진 찌꺼기를 걸러 내는 정화수다. 그리고 눈물이 씻어 내린 그 상처에서 새살이 돋는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동백 아가씨’와 같은 트로트를 “절망감과 패배감, 주체의 무력함과 자학의 태도를 드러낸다”며 평가 절하한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힘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용기를 북돋는지 고찰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평가다. 이런 차디찬 마음에서 소위 ‘왜색 논쟁’이 만들어지고 전파된다.●이미자 1959년 ‘열아홉 순정’ 데뷔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1964년 만삭의 몸으로 취입한 ‘동백 아가씨’가 크게 히트하자 이를 기폭제로 ‘여자의 일생’,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을 히트시키면서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호칭이 붙을 만큼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KBS 자료실에 따르면 1991년까지 이미자가 취입한 노래는 2064곡으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 국민적인 애창곡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전후 일본인의 정신적 양식이 가수 미소라 히바리였다면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당시 한국인의 정신적 양식은 이미자였다. 이런 이미자의 노래들이 1965년부터 갑자기 차례차례 ‘왜색 가요’ 또는 일본곡의 ‘표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방송에서 퇴출되는 수난을 겪는다. 방송윤리위원회와 예술윤리위원회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국민들이 애창하던 노래를 금지시킨 것이다. 왜색이란 무엇인가. 대체로 ‘일본풍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느낌’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일본풍은 무엇이다’라는 객관적인 기준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인 판단 준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청와대에서도 불렸던 금지곡 ‘동백 아가씨’는 당시 서울대 의대 공연장에서, 베트남 전장에서, 산업 현장에서,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직업·계층·지위·성별에 관계없이 폭넓게 불렸던 가요였다. 1964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동백 아가씨’를 “향토 냄새 풍기는 구슬픈 민요조”라며 “외래 팝송의 물결을 헤치고 오랜만에 민요가 히트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즉 이 기사가 나올 때만 해도 우리 민요조의 노래라고 국민들이 느끼고 있던 것이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한국일보(1964년 12월 3일자), 주간한국(1965년 8월 15일자) 등에서도 ‘동백 아가씨’를 우리 민요풍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듬해 느닷없이 왜색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당시 정치권에서 ‘동백 아가씨’를 퇴출함으로써 특정 정치 세력의 민족성을 선명하게 강조하려는 일종의 여론몰이용이었다는 설도 있고, 일본의 음계로 만들어졌으므로 단속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음악사학자 장유정 단국대 교수는 저서 ‘트로트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에서 서양 음악에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던 몇몇 방송제작자가 트로트를 저급한 천민 문화로 인식한 편견에서 이런 단속이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항간에 떠돌 듯이 정치권에서 강압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히려 ‘동백 아가씨’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트로트는 1918년경 미국 서부에서 터키 트로트 또는 폭스 트로트라는 이름의 춤곡에서 탄생했다. 이 리듬이 일본과 우리나라로 수입돼 일본에서는 안단테 트로트로, 한국에서는 트로트로 불렸다. 미국 리듬 위에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각자의 정서를 담아 부르는 노래가 트로트이고 엔카인 것이다. 한국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비하해 부르는 것 또한 다분히 대중문화를 멸시하는 엘리트 의식의 소산이다. ‘뽕’이라는 말은 향정신성 물질 ‘필로폰’의 일본식 발음인 ‘히로뽕’을 연상시키며, 일본 국호의 일본식 발음 ‘닛폰’을 떠오르게 하는 음성학적 유도장치기도 하다. 이것 역시 우리 가요를 일본의 것으로 포장하기 위한 왜곡이다. ●가수마다 다른 ‘천의 얼굴’ 트로트 중요한 것은 정서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기법이다. 발성과 기교 및 감정의 처리는 각 민족마다, 역사적 현실에 따라 다르다. 나훈아의 ‘울긴 왜 울어’를 마이클 잭슨이 부른다고 트로트의 맛이 날까. 마이클 잭슨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트로트의 역사적 전통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나훈아처럼 노래하기 어려운 것이다. 같은 ‘동백 아가씨’를 노래해도 이미자, 조용필, 주현미, 임영웅, 이찬원 등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것이 ‘천(千)의 얼굴’ 트로트의 매력인 것이다. “한국은 삼국악(三國樂) 등 고대 한반도가 일본에 음악을 전파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트로트에 대해서는 원래 한국의 것이 아니라며 그 원산지가 일본임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야마우치 후미타카 국립대만대 음악학연구소 교수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작곡가·문학박사
  • 반도체 분야 세계 석학… 尹당선인 ‘반도체 사랑’에 1순위 낙점

    반도체 분야 세계 석학… 尹당선인 ‘반도체 사랑’에 1순위 낙점

    세계 첫  3차원 ‘벌크 핀펫’ 개발산업 전 분야의 현장 소통 ‘포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로 10일 지명된 이종호(56) 서울대 공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반도체 사랑’이 인선 배경으로 보인다. 반도체 전문가가 과기정통부 장관에 지명된 건 최기영 전 장관에 이어 두 번째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 후보자는 2016년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석학회원이 됐고, 2018년부터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이 후보자는 미국 인텔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3차원(3D) ‘벌크 핀펫’(Bulk FinFET·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3차원 트랜지스터 기술)을 개발해 반도체 소자기술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 당선인도 이 후보자를 “반도체 기술 권위자”라고 소개한 뒤 “문제해결 과제형 연구개발(R&D) 개편은 물론 역동적 혁신성장의 토대가 되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윤 당선인의 반도체에 대한 관심은 익히 알려져 있다.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나 잠행을 하던 지난해 5월 “반도체를 배우고 싶다”며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견학했다. 이때 윤 당선인을 안내한 사람이 이 후보자다. 윤 당선인은 지난 7일 헬기에서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내려다보며 “반도체 산업 등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인 첨단 산업을 더 발굴하고 세계 일류로 키워 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달 21일 경제6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선 “요즘 전쟁이란 총이 아닌 반도체가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이 후보자는 기자회견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이 크다고 보고, 이 분야를 발전시키도록 하겠다”면서도 “우리나라는 반도체만 있는 게 아니다. 산업 전 분야의 현장을 살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소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후보자가 원광대 재직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공동개발한 ‘벌크 핀펫’ 기술은 삼성전자 등이 무단으로 도용했다는 이유로 미국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돼 수억 달러 규모의 배상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이 후보자는 KAIST에 소송 권한을 위임했고 2020년 합의가 이뤄지면서 종결됐다. 이를 계기로 공공연구기관 등이 특허권 등을 포기할 때 발명자에게 알리도록 하는 일명 ‘이종호법’(발명진흥법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경남 합천 ▲마산중앙고, 경북대 전자공학과, 서울대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박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장
  • 이상민 녹화 중단 요청, 자리 박차고 나가버려…왜?

    이상민 녹화 중단 요청, 자리 박차고 나가버려…왜?

    ‘장미의 전쟁’ 이상민이 제작진에 녹화 중단을 요청한다. 11일 방송되는 MBC에브리원 예능 프로그램 ‘리얼 커플 스토리-장미의 전쟁’(이하 ‘장미의 전쟁’)에서는 우크라이나 커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최근 진행된 ‘장미의 전쟁’ 녹화에서 조던은 38살 차이 엘레나와 세르게이 커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조던은 “두 사람의 사랑은 엘레나의 구애로부터 시작됐다”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지 7개월째 되던 날, 세르게이가 엘레나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조던은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며 ‘그녀는 미치광이와 결혼했다’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전했다. 이에 이은지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족이었나? 미치광이면 유명한 범죄자였나?”라며 세르게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양재웅 역시 “정신질환자를 언론이 미치광이로 표현하지 않는다”며 “나쁜 죄질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세르게이가 범죄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이날 녹화에서 이상민은 조던의 이야기를 듣던 중 “어우, 나는 갑니다, 이거 더 이상 우리 듣지 맙시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녹화 중단을 요청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이상민이 녹화 중단을 요청하게 된 이유는 11일 방송하는 ‘장미의 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미의 전쟁’은 피 튀기는 잔혹한 커플부터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나는 애절한 남녀의 이야기까지, 실제로 벌어진 영화 같은 커플들의 스토리를 소개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다.
  • “스타킹도 사고…” 이효리, 부부관계 고민

    “스타킹도 사고…” 이효리, 부부관계 고민

    가수 이효리가 절친한 비에게 부부 관계 상담을 받았다. 이효리는 8일 티빙 ‘서울체크인’에서 비를 만나 이상순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비는 이효리를 만나자마자 “상순이 형한테 전화 받았다. 얘 뭐하는지 가서 체크해보라더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효리는 “너희는 (부부 사이) 아직 좋냐”고 물었다. 비는 “우리는 사귄 거 시작해서 10년 째다”라며 “밥 먹을 때 그렇게 예쁘더라. 양볼에 가득 밥이 채워진 거 보면 표정이 예쁘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이효리는 “정말 사랑하나보다”라더니 “부럽다. 넌 정말 다 가졌다. 아이들도 너무 예쁘게 잘 크고”라며 “나도 감사하고 행복한데 오빠가 너무 엄마 같다. 정말 잘 챙겨주지 않나. 다정하고 베스트 프렌드 같다. 모르겠다, 우리만 그런 건지. 남들도 다 그런 건지”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비는 좀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고 조언했다. 이에 이효리는 “시도 했다. 스타킹도 사고 다 해봤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여러 시도를 해봤다는 말에 비는 방을 따로 써보는 것도 주변에서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도 감사하고 행복한데 오빠가 너무 엄마 같다. 정말 잘 챙겨주지 않나. 다정하고 베스트 프렌드 같다. 모르겠다, 우리만 그런 건지. 남들도 다 그런 건지”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효리는 “근데 오빠랑 단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 오빠도 그렇다. 우리 뽀뽀하고 손 잡고 난리 난다”라고 말했다. 비는 진지하게 걱정해주다가 문제 없어 보이는 부부애(?)에 당황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짜증나. 오늘 콘셉트 무슨 사랑과 전쟁 부부 뭐 이런 거야?”라며 투덜거려 웃음을 자아냈다.
  • ‘♥이상순’ 이효리, 부부관계 고민 털어놨다

    ‘♥이상순’ 이효리, 부부관계 고민 털어놨다

    이효리가 부부관계 및 임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했다. 8일 공개된 티빙 ‘서울체크인’에서는 이효리가 비, 박나래, 홍현희와 부부 고민부터 2세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이날 이태원의 바를 찾은 이효리는 바를 구경하던 중 디제잉 장비를 발견하곤 곧바로 남편 이상순을 떠올렸다. 이효리는 바텐더에게 “우리 남편도 디제잉한다”라며, 어떤 음악을 하냐는 질문에 “딥한 테크노”라고 답했다. 이효리는 바텐더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은 제주도 살지만 서울 한남동에 살았다고 밝히며 “(제주도에 간) 8년 동안 서울이 많이 바뀌었다”며 “서울 살 때는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서울을 잘 즐기지 못했다. 지금은 서울을 잘 몰라서...”라며 그동안 서울을 즐기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이후 홀로 칵테일과 음악을 즐기던 이효리에게 가수 겸 배우 비(정지훈)가 다가 왔다. 비는 “상순이 형한테 전화받았다. 얘 뭐하는지 가서 체크해보라더라”며 너스레 떨었다. 비와 이야기하던 중, 이효리는 “너희는 아직 좋냐”라며 비와 김태희의 사이를 질문했다.비, 김태희와의 애정 드러네…“밥 먹을 때 그렇게 예쁘더라” 비는 “우리는 사귄 거 시작해서 10년 됐다”라며 “밥 먹을 때 그렇게 예쁘더라. 밥 먹을 때 양볼에 가득 채워져 있는 표정을 보면 (예쁘더라)”며 변함없는 애정을 자랑했다. 이에 이효리는 “정말 사랑하나 보다. 부럽다. 정말 다 가진 것 같다”라며 “아기들도 너무 예쁘게 잘 크고 있지 않나”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나도 감사하고 행복한데 오빠가 엄마 같다. 너무 잘 챙겨주지 않나. 다정하고 너무 베스트 프렌드 같다. 모르겠다. 우리만 그런건지, 남들 다 그런 건지...”라며 부부사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무 24시간 붙어있다는 말에 비는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느낌을 시도해보라며 각방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효리는 “근데 오빠랑 단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 오빠도 그렇다. 서로 그렇다”라며 “우리 뽀뽀하고 손잡고 난리난다”라며 거절했다. 좀 전에 부부사이를 고민하던 것과 달리 눈꼴시린 부부애 자랑에 비는 “아이 짜증나”라며 “오늘 콘셉트 무슨 사랑과 전쟁 부부 뭐 이런 거냐”라며 투덜거려 웃음을 자아냈다.뒤이어 박나래 집으로 이동한 이효리는 합류한 홍현희와 셋이 모여 대화를 이어갔다. 박나래는 “언니가 결혼했을 때 나이를 물어봤다. 36살이라더라. 언니가 일 다하고 한참 뒤에 갔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나이에 갔더라. 그래서 좀 놀랐다”라고 입을 열었다. 38살인 박나래는 아직도 결혼이 이른 것 같다며 일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 중이었다. “일을 좇는 게 맞는지, 그냥 좋은 남자 만나는 게 맞는 건지 싶다”라는 박나래는 “지금 나이에 어떤 남자를 만나도 결혼으로 다가와서 부담스러워하더라”고 고민을 털어놨다. 이에 이효리는 “결혼하면 일 못하는 거냐”라며 “결혼해도 일할 수 있다”라며 박나래를 응원했다. 또 이효리는 조심스럽게 홍현희에게 배를 만져봐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다. 홍현희는 최근 임신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효리는 “부부사이가 좋은가보다. 임신도 바로 됐다”라고 신기해했다. 그러자 홍현희는 “언니도 임신 계획이 있으신 것이냐”라고 물었고, 이효리는 그렇다면서도 “그런데 확 불타오르지 않는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에 홍현희는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라며 이효리에게 석류 영양제를 선물했다.
  • 푸틴이 숨긴 두 딸, 31살 연하 애인과 또래…제재 대상

    푸틴이 숨긴 두 딸, 31살 연하 애인과 또래…제재 대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70)이 ‘31살 연하 애인’과 자녀들을 스위스 비밀 장소로 대피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장녀 마리아(37)와 차녀 카테리나(36)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백악관은 6일(현지시간) 푸틴의 자산 상당 부분이 가족들에게 은닉돼 있다면서 두 딸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두 딸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2015년 “딸이 자랑스럽지만 절대 공개적으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고, 관영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선 딸들이 3개 국어를 한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딸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할 뿐이었다. 자신의 딸이 외국에서 유학했다는 소문을 의식한 듯 “러시아에서만 교육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두 딸은 모두 결혼했고, 자녀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녀 마리아는 의학 연구에 종사했고, 의료서비스 분야 전문 러시아 투자회사인 노멘코의 공동 소유주다. 차녀 카테리나는 모스크바대학의 과학연구진흥재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사회는 푸틴 대통령의 자산 중 일부를 이들이 관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의 한 사회운동가는 푸틴의 차녀 카테리나 티호노바의 호화 별장에 들어가 자물쇠를 교체한 뒤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시설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피에르 아프너가 공개한 푸틴의 둘째 딸 호화 별장에는 총 8개의 침실과 3개의 욕실이 있었다. 그는 “푸틴과 러시아 마피아가 훔친 돈으로 구입한 은닉 재산이다”라며 별장 시설 곳곳을 촬영한 영상을 트위터에 공유했다.전처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이후 카바예바와 4명 자녀 푸틴 대통령은 전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외에도 리듬체조선수 출신인 알리나 카바예바(38)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자녀들도 모두 미성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카바예바는 어린 자녀 4명과 스위스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은 카바예바와 자녀들 모두 스위스 여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페이지식스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해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동안 푸틴 가족은 스위스의 안전한 별장에 숨어 있다”라며 그의 지독한 가족 사랑은 비난을 받고 있다. 러시아 정치 분석가인 발레리 솔로베이는 역시 “푸틴이 최첨단 지하 도시에 가족을 피신시켰다.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첨단 벙커는 핵전쟁 시 보호를 위해 설계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푸틴이 가족들을 모두 외국으로 피신시키면서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가 부인과 자녀들에게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 [신간] OTT 생존 전략을 분석한 ‘플랫폼 전쟁 OTT 스토리텔링 생존공식’

    [신간] OTT 생존 전략을 분석한 ‘플랫폼 전쟁 OTT 스토리텔링 생존공식’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한 이래 디즈니와 애플 등이 가세하면서 한국은 글로벌 OTT 각축장이 됐다. OTT 춘추전국시대를 맞아 콘텐츠 제작 실무와 이론에 익숙한 전문가들이 OTT 스토리텔링 생존 공식을 다룬 ‘플랫폼 전쟁 OTT 스토리텔링 생존공식’을 발간했다. 이 책은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등을 강의하는 윤복실, 김공숙, 박선민, 이승희, 이현민, 장은진 등 6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OTT 전쟁에서 살아남는 스토리텔링의 공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이 책은 OTT 드라마 <킹덤> 서사 전략(윤복실), <별에서 온 그대>와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의 아주 특별한 해피엔딩(김공숙), 중국 OTT 드라마 <겨우, 서른>은 어떻게 한국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나?(이현민), OTT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일본 내 4차 한류 열풍(이승희), OTT 시대 AR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재현된 신화적 모티프(장은진), OTT 시대 오디션 프로그램의 재탄생, ‘스핀오프 예능’(박선민) 등으로 구성됐다. 윤복실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드라마 <킹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OTT 매체의 특징에 적합한 스토리텔링 전략 구사에 있다”면서 “이야기 차원에서는 기존 TV드라마의 몰입성과 연속성을 재현하지만, 담화차원에서는 일상성을 벗어난 서사 전략이 성공에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김공숙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별에서 온 그대>와 <쓸쓸하고찬란하神도깨비>의 특별한 해피엔딩에주목했다. 그는 “이들 드라마는 초월적 남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로맨틱 코미디의 상투적인 해피엔딩을 참신하게 변형한다”면서 “이로써 로맨틱 코미디의 낭만적 사랑의 애틋함과 행복감을 동시에 전달해 국내와 해외 시청자 모두를 즐겁게 했다”고 소개했다. 이승희는 한동안 주춤했던 일본의 4차 한류를 재부팅한 <사랑의불시착>의 엄청난 인기 배경을 추적했다. 그는 “<사랑의불시착>은남녀간의 사랑, 질투, 가족, 의리, 배신 등 보편적 정서를 담은 익숙한 형식에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적 현실이라는 차별화된 배경으로 일본의 중년남성까지 넷플릭스를 끌어안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북코리아, 192쪽, 1만5000원.
  • 대극장엔 역작, 소극장엔 축제… 봄바람 타고 온 4월의 오페라

    대극장엔 역작, 소극장엔 축제… 봄바람 타고 온 4월의 오페라

    봄꽃이 만발하는 4월을 맞아 다양한 오페라 무대가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나 모차르트의 역작 등이 장기화된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달래 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창단 60주년을 맞은 국립오페라단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를 7일부터 오는 1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인다. ‘아틸라’는 로마 사극의 엄숙함과 전쟁의 잔혹함이 담긴 대작이다. 5세기 중반 유럽을 침략했던 훈족의 왕인 아틸라와 그의 침략에 대한 복수를 그린다. 연출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테너 마리오 델모나코의 아들로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해 온 잔카를로 델모나코가, 지휘는 오페라 전문인 발레리오 갈리가 맡는다. 주인공인 아틸라 역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 캄머쟁어(궁정가수)인 정상급 베이스 전승현과 박준혁이 맡고, 에치오 역에는 바리톤 유동직·이승왕, 오다벨라 역에는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 준 소프라노 임세경과 이윤정이 캐스팅됐다. 아틸라와 에치오 간 저음 이중창과 진취적인 여성상이 돋보이는 아리아 ‘오, 구름 속으로 도망가리’가 눈길을 끈다.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운영위원회는 23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제20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를 개최한다. 오페라의 대중화에 기여한 이 행사에서는 창작 오페라 ‘텃밭킬러’, ‘로미오 vs 줄리엣’ 2편과 번안 오페라 ‘리타’, ‘비밀결혼’ 2편 등 총 4편이 번갈아 5회씩 무대에 오른다. 모두 코믹 오페라다. ‘텃밭킬러’는 구둣방에 사는 가족을 통해 사회로부터 단절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로미오 vs 줄리엣’에선 죽고 못 살던 커플이 결혼 후 이제는 죽어도 같이 못 살겠다며 이혼 위기의 순간을 노래한다. ‘리타’는 1941년 이탈리아 작품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매 맞는 데 트라우마를 가진 리타가 남편의 죽음 이후 새 결혼 생활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비밀결혼’은 가족 사이의 사랑과 비밀, 분노 등을 코믹하게 묘사했다.이 밖에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인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무대에 올린다. 8일부터 30일까지 4주간에 걸쳐 매주 금·토요일 공연하는 방식으로 총 8회 무대를 마련했다. ‘마술피리’는 왕자 타미노가 밤의 여왕의 딸 파미나를 구하기 위해 새 장수 파파게노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동화 같은 내용이다. 연극처럼 중간에 대사가 들어 있고 가곡·민요·종교음악 등이 고루 섞여 있어 오페라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마에스트로 임헌정이 지휘봉을 잡고, 독일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이수은이 연출을 맡았다.
  • ‘사내맞선 안경남’ 김민규 “팔로워 2배 늘었다…앞으로 더 섹시한 모습을”

    ‘사내맞선 안경남’ 김민규 “팔로워 2배 늘었다…앞으로 더 섹시한 모습을”

    “주위에서 드라마 잘 봤다고 연락이 정말 많이 왔어요. ‘안경캐(캐릭터)’ 계보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반응이 제일 기분 좋았죠.” 5일 종영한 SBS 드라마 ‘사내맞선’에서 비서실장 차성훈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민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사내맞선’의 내용은 뻔하다. 한 식품회사의 평범한 직원 신하리(김세정)가 정체를 속이고 친구 대신 맞선에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외모며 능력이며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회사 사장 강태무(안효섭)와 맞닥뜨리는 걸로 시작한다. 동명의 웹툰, 웹소설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재벌 로맨틱코미디의 정석을 따르는데, 특유의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매력으로 진부함을 벗어던졌다. 메인 커플인 강태무·신하리 외에 하리의 단짝이자 재벌 2세인 진영서(설인아)와 차성훈 커플까지 사랑받으면서 마지막 회차까지 큰 호응을 얻았다. 김민규는 “작품이 주는 편안함과 유쾌함이 인기 비결인 것 같다”며 “다른 배우들과 감독님, 스태프가 함께한 모든 노력이 의미 있는 시간이 돼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작품은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데, 3월 3~4주차 비영어권 드라마 부문에서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드라마를 찍은 후 SNS 팔로워 수가 2배가 늘었다”며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다. 실감이 안난다”고 전했다. 특히 7회에 나온 진영서와의 ‘안경 키스’ 장면은 온라인에서 큰 화제를 낳았다. 김민규는 “키스신 촬영 때 안경이 거추장스러워 애드리브로 벗는 걸로 정했다”며 “이상하지 않을까 걱정만 했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강태무·신하리 커플이 풋풋하고 귀여운 연애라면 ‘영차 커플’은 처음부터 섹시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자고 생각했다”며 “연애하면서 실제 겪을 수 있는 싸움, 상대에 대한 생각 차이 등 현실적인 부분이 반영돼 더 공감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극 중 차성훈은 강태무의 곁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비서실장이자 형제 같은 의리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다른 캐릭터가 모두 코믹한 모습을 보이며 ‘개그캐’로 활약하는 데 비해 차성훈은 많이 웃지도, 속마음을 시원스레 표현하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 김민규는 “한명쯤은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는 “평소에 목석같던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더 크게 와닿지 않느냐”며 “그게 차성훈이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캐릭터이지만 굉장히 진중하고,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그간 ‘이번 생은 처음이라’, ‘간택 - 여인들의 전쟁’, ‘설강화’ 등 여러 드라마에 출연한 그에게 ‘사내맞선’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기회였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그는 “아무래도 그전까지는 연하남 이미지가 강했는데, 차성훈이라는 완벽한 캐릭터를 통해 좀 더 어른스럽고 남성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며 “섹시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15㎏ 정도 체중을 늘리는 등 벌크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품들이 쌓이고 나이를 먹으면서 언제까지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느와르, 사극, 공포, 현대물 등 여러 작품에서 색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다. 배우로서 내가 가진 무기를 늘리고 싶다”고 밝혔다.
  • “나는 울지 않으려 노력한다” 홀로 우크라 탈출한 10대 소녀 알라

    “나는 울지 않으려 노력한다” 홀로 우크라 탈출한 10대 소녀 알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코로시 침례 고등학교에는 긴 금발 머리에 키가 크고 잘 웃는 17세 소녀 알라 렌스카가 있다. 불과 몇달 전만 해도 렌스카는 우크라이나에서 영어, 터키어 번역가를 꿈꾸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렌스카의 삶을 한번에 바꿔놨다. 렌스카는 CNN에 4일(현지시간) “갑자기 폭발 소리가 들리고 집이 흔들렸다”며 러시아가 공격을 퍼부었던 그날을 회상했다. 렌스카의 부모는 딸을 안전한 곳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장기간 여행에 동행하기에 너무 쇠약한 모친 때문에 그들만 고향에 남기로 결했다. 렌스카는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렌스카가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몰렸고 렌스카는 결국 배웅 나온 아버지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기차에 올랐다. 그는 “아마 밤새도록 울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렌스카는 기차를 타고 가며 헝가리 명문 중 하나인 코르시 침례 학교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학교 측에 우크라이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면서 “역사, 우크라이나어, 외국어 문학 대회에서 우승했던 것과 3개의 과학 논문을 작성했던 것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렌스카는 이어 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입학을 허가한 학교 관계자들은 렌스카를 위해 학부모들을 통해 9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돈으로 학교 측은 컨테이너를 침실, 욕실, 샤워 시설 및 작은 주방이 있는 기숙사 방으로 개조해 렌스카에게 제공했다. 이제 렌스카는 수업 시간에 새로운 언어인 헝가리어를 배우며 시간을 보낸다. 최근엔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다른 십대 소녀들과 함께 지낸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나는 훌륭한 수업과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다”며 “여기에도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 가족이 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학교 교장은 “앞으로 12명을 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며 학생들이 끔찍한 전쟁 후유증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심리학자도 소개했다. 렌스카는 “나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부모님이 내가 울 때 슬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렌스카는 부모와 통화할 때, 학교에 있을 때 자주 미소짓는다. 렌스카의 어머니 인디라는 딸과의 통화에서 “말하는 것조차 너무 고통스럽다”면서 “하지만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고, 네가 안전하다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렌스카는 가족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내가 여기 있고, 부모님이 (위험한)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울먹였다.하지만 렌스카는 부모님이 그에게 보내준, 고향집 근처에서 찍은 눈을 뚫고 핀 첫 번째 봄 꽃 사진을 보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언젠가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친구들과 바보 같은 비디오를 만들고 셀카를 찍고 싶어요.”
  • 남쪽 에메랄드 해안에 띄운 편지… 소리 없는 노스탤지어의 아우성 [작가의 땅]

    남쪽 에메랄드 해안에 띄운 편지… 소리 없는 노스탤지어의 아우성 [작가의 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 유치환 시, ‘깃발’ 전문그리운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삶에 우물 하나를 두는 일이다. 시원(始原) 혹은 해원(海原)의 장소이자 대상은 어쩌면 오롯이 누군가가 그것을 그리워할 적에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청마 유치환의 시다. 대부분의 사람이 국어영역(옛 언어영역)의 시험 지문이나 교과서에서 봤던 그 ‘노스탤지어 시’. 시간이 지나 다시 그의 시를 읽으니 예전에는 미처 볼 수 없던 마음의 우물 하나가 눈을 뜬다. 그네가 공중에 짚어 준 그 이정표대로 따라가다 보니 나의 시원과 고향이 한꺼번에 뒤섞인 우물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그 우물은 땅에 없다. 공중에 떠 있다. 그 무엇도 아닌 ‘노스탤지어’인 까닭이다.유치환은 1908년 7월 경남 거제군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통영공립보통학교(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로 유학을 갔다. 1926년 귀국을 한 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정지용의 시에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1년 ‘문예 월간’에 첫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을 했고 스물아홉이 되던 1937년에 통영으로 돌아왔다.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계속해서 시를 썼고 동인지 ‘생리’(生理)를 창간했다. 1939년에는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출간했다. 1940년에는 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에 귀국했다. 충무와 부산, 경주 등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안의중학교의 교장이 됐다. 이후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장을 지냈다.1946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이 됐으며, 19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시를 썼고 시집을 출간했다. ‘깃발’과 ‘생명의 서’, ‘행복’ 등이 이때 쓰였다. 대한민국 예술원의 회원이 됐다. 제1회 시인상과 서울시문화상, 예술원공로상과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도 불렸다. 1967년 2월 13일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부산대학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에 사망했으며, 2월 17일 부산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에 묻혔지만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됐다.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산록에 잠들어 있다.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과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시를 썼고 끊임없이 후학 양성에 힘을 쏟다가 사후에 다시 거제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그토록 그리던 노스탤지어에 도착한 것일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전문청마에게는 서른 후반부터 시작된 사랑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 혼인을 해 일가를 꾸린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때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제의 검속 대상에 올랐던 까닭에 만주에 사는 형의 집으로 피신했다. 해방이 돼 부인과 함께 통영으로 돌아와 부인은 유치원을 운영했고, 청마는 통영여중의 국어 교사로 부임하게 됐다. 그곳에서 가사과 교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시인 이영도다. 그때 이영도는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키우며 살아가던 처지였다.시조 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인 이영도 역시 시조로 등단해 주목을 받던 시인이었다. 1947년부터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영도에게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시와 산문을 써서 우편으로 부치기 시작한 지 이십여 년. 그동안 주변에서는 이미 그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딱히 서로의 공간이나 사람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도 수천 통이 넘는 편지를 썼던 청마.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의 마음을 편지로 썼던 이십여 년의 시간에도 그들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어떤 마음이면 한 사람을 향해 강산이 두 번이 더 바뀌도록 편지만을 써 대는가. 훗날 이영도는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책으로 청마의 편지 200편을 남겨 뒀다.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인세는 사회에 기부했다고 한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유치환, ‘그리움’ 전문청마를 회고하는 데 있어 빠짐없이 끼어드는 논쟁이 있다. 바로 친일 논쟁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청마의 시 ‘수’(首)와 ‘전야’(前夜)의 내용들 때문이다. 또 1942년 2월 ‘만선일보’에 발표한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글 역시도 친일의 행각으로 보고 있다. 한때 통영에서 유치환이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부친 통영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그에 따른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중앙우체국 앞에 ‘행복’의 시비가 세워졌으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개명이 유보되기도 했다. 문학적인 업적과 시인의 삶의 거리를 어디에서 어느 만큼까지 떼어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일화다. 그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앞으로도 분분할 테지만 우리가 익히 알아 온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그의 시와 삶을 읽는 후대의 몫이 될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네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이 한쪽만이 아니듯이, 그리하여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늘어나듯이 말이다. 그 해석과 영탄, 지탄의 몫마저도 시인의 이름이다.청마문학관은 2000년 2월 통영 망일봉 기슭에 세워졌다. 문학관은 청마의 생애, 청마의 작품 세계, 청마의 발자취 편으로 구성돼 있다.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바로 올려다볼 수 있는 지척에 생가도 복원돼 있다. 생가는 원래 통영시 태평동에 있었으나 생가 부지의 복원이 어려워진 까닭에 문학관 위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전, 복원됐다. 생가와 아래채로 구성돼 있다. 본채는 4칸으로 이뤄져 있으며 맨 오른쪽이 안방이고, 왼쪽이 부엌, 가운데 방 두 개는 약방으로 돼 있다. 태평동에서 청마의 아버지가 약방을 운영했던 까닭이다. 방문 위에 ‘유약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청마의 생애와 후대의 해석은 어쩌면 극명하게, 또 다르게는 이렇게나 여여하게 흐른다. 남쪽의 봄에는 에메랄드빛 해안을 거니는 노스탤지어와 사랑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사람의 자리가 거기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소설가 이은선
  • “과거 행동 후회한다”...러 소프라노, 푸틴 지지했다 쫓겨나자 결국

    “과거 행동 후회한다”...러 소프라노, 푸틴 지지했다 쫓겨나자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달 초 세계 최고 수준 오페라단에서 퇴출됐던 러시아 유명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51)가 30일(현지시간) 자국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네트렙코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분명하게 규탄하며, 전쟁의 희생자 및 그 가족들을 동정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도 않았고 러시아 지도자와 연결돼 있지도 않다”며 “과거 나의 행동이나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며 이를 후회한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올림픽 개막식이나 시상식 등에서 몇번 만난 것 밖에 없다”며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떠한 재정적 지원도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네트렙코는 세금도 현지에서 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나는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며 예술을 통해 평화와 화합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힌 뒤 5월부터 유럽에서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네트렙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후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크게 비난받았다. 이 때문에 그가 몸담고 있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메트) 오페라는 지난 3일 “네트렙코가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철회하라는 우리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향후 예정된 공연에서 물러나게 됐다”며 퇴출을 발표했다. 네트렙코는 그동안 푸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왔다. 2008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인민예술가’(PAR) 상을 받았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한 도네츠크 지역의 오페라 하우스에 거액을 기부했다. 친러 독립세력 깃발을 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 이것이 치열했던 대일 심리전의 증거

    이것이 치열했던 대일 심리전의 증거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정부에 전달한 대일 심리전단인 ‘종이폭탄’(사진)이 29일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한국독립당 소장파 인사들로 구성된 한국혁명통일촉진회가 1942년 작성한 ‘한국인은 추축국과 싸우는 연합군에 종이폭탄을 제공합니다’라는 제목의 문건을 이날 공개했다. ‘종이폭탄’(Paper Bombs)은 적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단을 의미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혁명통일촉진회는 미 연방정부에 대한 제안사항을 담은 문건을 당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던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 단체는 1942년 6월 중국 쿤밍(昆明)에서 강창제, 조중철, 김우경 등 한국독립당 소장파 인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태평양전쟁 이후 독립운동 단체 간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직이다. 총 5쪽 분량의 이 문건은 한국어·일본어·베트남어·미얀마어로 각각 작성된 선전물과 이 선전물의 제작 이유 및 살포 시 예상 효과 등을 설명하며 연합국이 효과적으로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 형식의 자료로 구성돼 있다. 촉진회는 선전물에서 ▲한국 동포에겐 3·1혁명정신을 부활시켜 조직적 대혁명을 일으킬 것 ▲일본군 병사에겐 일본 군벌을 타도하고 진실로 일본 민중을 사랑할 것 ▲베트남·미얀마인에겐 인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연합 항일 전선을 구축할 것 등을 촉구했다. 이 문건은 지난해 12월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수집한 조지 맥아피 매큔 문서군에서 보훈처가 발굴했다.
  • [STOP PUTIN] “조국 버리면 스스로 용서 안될 것 같아” 총 든 우크라 여인들

    [STOP PUTIN] “조국 버리면 스스로 용서 안될 것 같아” 총 든 우크라 여인들

    조국을 버리면 스스로 용서가 안될 것 같아 무기를 들었다는 우크라이나 여인들의 사연을 미국 일간 USA 투데이가 27일(이하 현지시간) 소개해 눈길을 끈다.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약혼한 뒤 지난달 수도 키이우에 첫 아파트를 장만한 올가 코발렌코가 대표적인 사례. 신부 수업 대신 그는 매일 아침 소총을 닦고 폭탄에 짓이겨진 집 밖으로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러시아 군이 지난달 24일 침공한 뒤 우크라이나 정부는 계엄령을 발령해 징집 연령(18~60세)의 남성들은 나라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반면 여성과 어린이들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데 올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무기를 들기로 결심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부모 역시 우크라이나 군에 자원 입대했다. “남자들에게 구해달라거나 지켜달라고 하지 않겠다. 난 자녀도 없고 싸울 준비가 돼 있다. 내 조국이다. 안 떠난다.” 그 외에도 수천명의 우크라이나 여성이 피난하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과 영토를 지키겠다고 결심해 재빨리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을 꺾고 있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병사들의 15%정도가 여성이다. 올가는 매일 러시아의 무자비한 공격에 짓이겨진 다른 도시들을 찾아간다고 했다. 피해 정도를 평가하고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며 러시아군을 저지할 방해물들을 설치한다고 했다. 아직 운 좋게도 러시아 병사와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전쟁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밑에서 이곳 키이우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아버지 역시 침공에 실망해 우크라이나 편에서 싸우고 있어 그는 부모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난 다른 병사와 다르다. 이 전쟁에 반반씩 걸쳐 있지만 옳은 쪽에 서기로 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 혈통이 그렇게 하게 했다.” 남부 오데사 출신 알로나 부쉰스카는 시민의용군에 가담해 민간인 보호와 의약품 보급 일을 맡고 있다. 17년 동안 미용 일을 해왔던 그는 이제 빗 대신 의약품과 총기를 들고 있다. 몇달 전만 해도 가장 큰 걱정이 고객과의 일정 맞추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부대원 보호가 최우선이라고 했다. 알로나 역시 키이우 외곽의 극심한 피해 상황을 본 뒤 참전을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매일 아침 폭탄음에 잠을 깨고,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약품을 전달한다. 기자, 응급요원, 교사 출신 등 여자 병사 수십명이 함께 일한다고 했다. “우리는 프로 전투요원이 아니다. 우리 집들을 보호하기 위해 머무르는 민간인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집과 건물들에 사람들이 돌아와 살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죽으면 죽는 거다. 하지만 난 머무르길 원한다.”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2차 대전 때 적군((赤軍)에도 비슷하게 몇천명의 여자 병사들이 참전했다고 참전용사 카테리나 프리이막이 전했다. 그는 8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략했을 때도 자원 입대했는데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약품 공급과 자원병 관련 업무를 본다고 했다. “총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음식과 의료진의 보살핌, 심지어 미소 하나도 필요하다. 여성들이 이곳에 남아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제공할 것들이다.” 그는 수천명의 우크라이나 여성이 조국을 떠나지 않고 지키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것에 대해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이미 8년 전에 이 나라 여성들이 남성 못잖게 용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올가의 말이다. “남자들만 늘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도 항상 집안에 들어앉아 남편을 기다려선 안된다. 우리는 돕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필요하면 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여기 머무를 것이다.”한편 우크라이나 성인 남성 10명 중 7명은 전쟁에 참여해 러시아에 맞서 싸울 의지가 있으며 여성 가운데 30%가 같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전날 나왔다. AFP 통신 등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오슬로국제평화연구소’(PRIO)가 우크라이나 지역 여론조사 기관인 인포 사피엔스의 도움을 받아 지난 9~12일 온라인으로 18∼55세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쟁이 계속될 경우 러시아군이나 친러 반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해 우크라이나군을 돕겠다’는 문항에는 전체 응답자의 49%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또 ‘우크라이나군의 요새화된 방어 거점에서 전투에 참여해 저항군을 돕겠다’는 문항에는 47%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식량이나 정보, 탄약 수송과 같은 비군사적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군을 돕겠다’는 문항에는 80%가 준비돼 있다고 답했다. ‘다친 시민이나 군인을 돌보는 등의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희생자를 돕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겠다’는 문항에는 75%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 “휠체어는 필수 코스예요”… 폐교, 아이들 삶의 전진 기지가 되다[건축 오디세이]

    “휠체어는 필수 코스예요”… 폐교, 아이들 삶의 전진 기지가 되다[건축 오디세이]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만든 흔적은 역사로 기록된다. 그것을 이어 가는 것 역시 사람이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좋은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소임을 받은 건축가의 몫이다. 건축가 우대성(건축사사무소 오퍼스 대표)이 작업한 ‘알로이시오 기지 1968’을 보면 이런 선순환의 연결 고리가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힘이고, 건축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부산 서구 암남동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알로이시오 기지 1968’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조금은 특이한 명칭을 뜯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6·25전쟁 후인 1957년 부산 송도본당 신부로 부임한 이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다 떠난 소 알로이시오(1930~1992) 신부가 기적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가톨릭 교회가 2015년 가경자(성인 후보자)로 선포했을 정도로 겸손과 사랑, 봉사의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분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4년 마리아 수녀회를 창립했다. 수녀들과 함께 부모 없는 아이들을 거두고,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교육받도록 1968년 학교를 세웠다. 부산 소년의집에서 출발해 보살핌이 필요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회인으로 성장시킨 학교는 순차적으로 폐교됐다. 알로이시오중학교가 2016년 2월,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가 2018년 2월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왜 ‘기지’(基地)일까? ‘알로이시오 기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우대성 대표는 “망망대해에서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전진 기지처럼 빠른 세상의 변화에도 늘 버팀목 같은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지(베이스캠프)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공간이 바뀌면 행동도 그걸 담는 프로그램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기지는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기본기를 배우고, 잃어버린 몸의 감각을 일깨워 자신을 알아 가는 곳이지요.” 지금은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공간의 쓰임과 방향을 찾기 위해 우 대표는 마리아 수녀회와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댔다. 생각에서 완성까지 자그마치 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다. 그중 6년은 방향성을 잡고 협의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었다. “학교를 닫고 나면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왜 하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 알로이시오 정신을 계승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수녀회의 미션에 맞으며 이 시대에 필요한 공간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건물 디자인에 들어간 시간은 전체 기간의 10% 정도밖에 안 됩니다.”20여년 전 소년의집 학생의 첫 영성체 때 대부 역할을 맡으면서 마리아 수녀회와 인연을 맺은 우 대표는 아이들의 거처인 수국마을(2012~13)을 비롯해 알로이시오 가족센터(2013~14), 소년의집 생활실(2015), 체육관(2016~17) 등의 리노베이션 작업을 진행했다. 그에게 ‘사회적 건축가’란 타이틀이 자연스레 붙었다. 그만큼 책임감도 컸을 것이다. 2013년부터 시작해 2021년 마무리된 알로이시오 기지는 사람들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 가운데 국가나 다른 곳이 못 하는 것, 달리 말하면 ‘스스로의 생각을 키우고, 삶의 기본기를 익히고, 잃어버린 감각을 열고,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기점’이 되는 곳으로 문을 열었다. 부산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방과후교실과 자율학기제 수업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마리아 수녀회의 미션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교육사업도 수행하고 있다. 기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안승주 부기지장은 “방과후교실이나 자율학기제라는 정책은 있지만 체험학습할 시설이 부족한 현실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 학생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전했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지난해 1만 6000명의 학생이 이곳을 다녀갔고, 3000여명이 건물을 참관했다. 올해 이용을 신청한 학생들도 2만명이 넘는다. 50년간 학교로서의 쓰임을 다한 학교는 어떻게 삶의 기본기를 익히고 감각을 깨우고 자기를 알아 가는 곳으로 바뀌었을까. 우 대표는 “기지는 기존의 종합실습동을 완전히 고친 집(기지#1)과 4층이었던 고등학교 건물 중 1개 층만 남기고 누마루를 올린 집(기지#2), 그리고 그대로 둔 집(기지#3)으로 이루어졌다”며 “예산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래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학교 건물은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고 말했다.기지#1과 기지#2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었다. 기지#1은 전자기계고등학교 종합실습실로 쓰던 건물을 완전히 뜯어 고쳤다. 복도에 교실이 양쪽으로 붙은 전형적인 학교건축에서 중앙의 복도를 걷어 내고 지그재그 형태의 경사로를 넣었다. 밀링 선반과 공작기계가 가득했고, 지게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넓고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구조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중앙의 경사로는 이 공간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기지의 기본 프로그램을 위한 장소로 활용됩니다. 기지에 도착하면 휠체어를 타고 경사로를 따라 건물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이곳 프로그램의 필수 코스입니다. ‘더불어, 함께’라는 알로이시오 기지의 미션과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도록 했습니다.”‘빵굽는수녀님’들의 향긋한 커피와 빵 냄새가 반기는 기지#1에는 다양한 활동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들이 층층이 자리잡고 있다. 천장을 뚫어 만든 공연장 ‘알로이시오홀’에는 피아노와 드럼이 놓여 있다. 계단의자는 아이들이 쓰던 실내체육관의 목재 바닥재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기지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봤다. 코흘리개 아이들 손을 잡고 활짝 웃는 젊은 알로이시오 신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층 창 쪽으로는 편하게 등을 기대고 쉴 수 있는 캠핑 의자들이 놓였다.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며 멍때리기 좋겠다.생활 공방, 뷰티활동실, 음악활동실 등을 지나 3층엔 도서실이 있다. 그 옆으로 넓은 방에 낮은 소파들이 놓여 있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문을 활짝 열어 안과 밖이 통하도록 했다. 고치는 동안 비워 낸 곳의 여러 곳을 여백으로 남겼다. 여백은 그대로 여백으로 남은 덕분에 아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도 한가로이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활동과 휴식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침묵의 방’이 있다. 우 대표는 “함께 떠들고 나누는 것만큼 빈둥거리고 침묵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가능한 한 혼자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침묵의 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기지의 모든 공간은 다르게 만들어졌고 서로 연결된다. 개개인이 다르고 세상이 연결된 것처럼 공간도 그랬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4층까지 올라왔다. 특수조명이 설치된 수직농장에서는 싱싱한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수직농장에서 키운 채소와 옥상 텃밭에서 일군 야채로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도 있다. 집에서처럼 씻고 볶고 요리해 ‘모두의 식탁’에서 함께 나눠 먹는다. 장애인을 위한 낮은 요리테이블도 있다. 부엌은 잔디가 깔린 ‘달빛 옥상’으로 연결된다. 바비큐 파티나 간이 캠핑도 가능한 공간이다. 우 대표는 “현대의 도시 주거는 대부분 아파트이기 때문에 집에서 자연을 경험할 기회가 사라졌다”면서 “기지는 아이들의 감각을 깨우고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콘크리트를 걷어 텃밭을, 건물 공간을 비워 발코니를 만들었고 옥상에 흙을 채우고 잔디를 깔아 자연과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기지#2에는 4층 건물의 1층만 목공실로 남기고 나머지를 걷어 낸 자리에 현대식 누마루 ‘풍경마루’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떠올리며 작업했다고 한다. 양쪽의 큰 건물과 뒤편의 옹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만들어진 누마루는 바닥에 온돌을 깔았고, 접이식 통유리 문을 달아 사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대청마루 앞은 주차장으로 쓰이던 아스팔트를 걷어 내고 텃밭을 만들었다. “만대루는 서원의 강학과 환대의 장소이며 비움과 쉼의 복합 장소였습니다. 기지의 누마루도 무엇으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굳이 쓰임새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쓰임은 이용하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풍경마루에 앉아 본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신나게 뛰어놀다 느긋하게 앉아 멀리 바다를 바라볼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마음이 따뜻해졌다.함혜리 칼럼니스트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우크라 국민 위해 힘 모은 K팝 스타들…“건강하기를”

    우크라 국민 위해 힘 모은 K팝 스타들…“건강하기를”

    국내 거주 우크라이나인으로 이뤄진 ‘우크라이나 국민 응원단’이 굳은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가가 울려 퍼졌고 참가자들은 오른팔을 가슴에 올려 예를 갖췄다. 26일 오후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를 돕고자 열린 온라인 자선 콘서트 ‘위 올 아 원(WE ALL ARE ONE) 전쟁피해자돕기 K팝 콘서트’에서다. 이날 공연은 구세군 주최로 공연 플랫폼 쿠션라이브를 통해 진행됐다. 관람료 수익과 공연 중 진행된 모금액은 국제 구세군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를 돕는데 쓰인다. 이날 1·2부로 나눠 열린 공연에는 라붐·비아이·원호 등 K팝 스타들이 무대에 올랐다. 걸그룹 라붐은 ‘키스 키스’·‘아로 아로’ 등 밝은 노래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어 히트곡 ‘상상더하기’로 흥겨움을 더했다. 라붐은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다”며 “모두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란다”고 응원했다. 이어 “전쟁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다는 것은 정말 아픈 일이다. 오늘 무대가 많은 분에게 사랑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에는 우크라이나 대표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솔(Kate Soul)도 화상으로 온라인 출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대피하고 있고 현재 음식과 뜨거운 차를 가지고 기차역으로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며 “우리는 서로 피난민을 돕고 있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이어 “K팝 팬 여러분, 우크라이나와 함께 우리 도시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 [STOP PUTIN] 76세 러시아 화가 “푸틴 위해 죽으면 안돼” 반전 상징으로

    [STOP PUTIN] 76세 러시아 화가 “푸틴 위해 죽으면 안돼” 반전 상징으로

    76세의 러시아 화가 엘레나 오시포바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서 반전 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영국 BBC가 24일(현지시간) 전했다. 엘레나는 최근 BBC 기자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작은 아파트로 초대해 자신이 직접 만든 반전 플래카드를 보여줬다. “푸틴이 전쟁이다. 우리는 푸틴을 위해 죽고 싶지 않다.” 푸틴 대통령을 뿔 달린 사탄으로 묘사한 그림도 아틀리에나 다름없는 아파트 안에 있었다. 엘레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너무 충격을 받아 사흘 동안 먹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 뒤 분노에 차 거리로 나가 항의했다. 얼마 안되는 군중이 박수를 보내며 “전쟁 반대!”를 외쳤다.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엘레나는 경관 두 명에 팔을 붙잡혀 연행되기도 했다. 경찰은 여전히 그녀의 플래카드 중 하나를 돌려주지 않고 있다. “난 붉은 튤립 몇 송이를, 아름답고 어린 꽃들을 받았는데 아주 빨리 죽고 시들어 버렸다. 그 꽃들은 무덤 속으로 스러지는 청년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 할머니는 포스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죽음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적었다. 다른 플래카드에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총을 내려놓으면 영웅이 될 것이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병사 어머니회가 시 전역에서 핫라인을 운영하고 있는데 징집병, 특히 이미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의 부모들이 합류하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아들을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수많은 전화가 걸려오는데 상부로부터 압력을 넣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고 했다. 이 모임의 올가는 입 다물고 있으란 얘기까지 들었다고 털어놨다. “당국은 은폐하려고만 해요. 군에서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는 거짓 그림만 보여준다. 그들은 병사들의 어머니들이 무조건 인내하고 조용히 있기만을 바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물론 러시아 전역에서 당국은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행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려고 애를 쓴다. 상트 경찰서 공보실은 바쁘게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작전을 지지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있다. 한 동영상을 보면 폭동진압 경찰관들이 사람들과 어깨를 결고 거리에 서 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글자 Z 모양으로 서 있다. 이 글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용 차량들에 페인트로 칠해져 러시아의 공격을 지지하는 상징이 됐다. 물론 국영 매체들이 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고 러시아가 잘하고 있다고 믿으며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앞에서 산책을 즐기던 나데즈다도 “조국을 사랑하고 대통령을 믿는다. 서구가 물자 공급을 끊어 우리를 겁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러시아인들은 추위와 배고픔 같은 것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지금 일어나는 일은 수치스럽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당국은 대중들에게 애국적인 감정만 부추기고 있다. 모두 사기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몇년 동안 계속된 선전에 속고 변해 버렸다. 끔찍하다”고 개탄했다. 최근에 러시아인들은 많은 전쟁을 알게 됐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두 차례 체첸 전쟁을 치렀으며, 시리아 전쟁에도 러시아군이 개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크라이나다. 크렘린궁은 그곳에서 특별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가 러시아의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