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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옛집 이야기/박영순 등 지음(화제의 책)

    ◎전통 주거문화 진수 깊이있게 소개 한국 전통 주거문화의 진수를 풍부한 시각자료를 곁들여 소개한 연구서.우리 전통주택의 ‘살창문’은 쇼지 패널(shoji panel)로,‘온돌’은 누크 시스템(nook system)으로 외국에 알려져 있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그동안 전통주택에 관한 연구는 전통가구,문양,색채 등 각각 별개로 이뤄졌다.이에 비해 이 책은 우리 옛집의 형성에서부터 공간 배치,조형성에 이르기까지 전통주택의 실내공간문화를 하나의 일관된 틀로 살피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국 전통주택의 공간배치는 그 사상적 배경과 생활윤리에 따라 커다란 변천을 겪었다.한국의 전통주택은 규모와 장식에 있어 신분에 따른 제한이 있었다.조선시대 세종은 가사제한법을 만들었다.이러한 규제는 성종조에 이르러 종종 무시되곤 했지만 칸수의 제한 만큼은 그대로 지켜졌다.대군은 60칸,군과 옹주는 50칸,종친과 2품 이상은 40칸,3품 이하는 30칸,서인은 10칸으로 국한되었던 것이다.나아가 주택에 사용한 칠과 돌의다듬기,기둥의 높이,기둥 위의 장식,기둥의 모양 등 주택의 장식 또한 신분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다.한 예로 ‘경국대전’에는 사찰 외에 단청을 하는 자는 곤장 80대로 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조선시대의 가족은 강력한 부권이 존재하는 부권가족이자 부자 중심의 부계가족이었다.이러한 가부장권의 상징은 사랑의 형태로 나타났다.이 사랑은 조선 전기만 해도 사랑이라고 불렸다.그것은 집 곁에 지은 작은 문간방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의 구실을 했다.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가부장권 강화 등의 영향으로 사랑채가 별개 건물로 위용을 갖추면서 한자표기도 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열화당 1만8천원.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테마 탐방)

    ◎조선 서민의 정취 담긴 포근한 보금자리/전통가옥 70여호… 예안이씨 집성촌/기와집 10여채 충청도 양반집 전형/영암군수댁 전통정원 조형미 뛰어나/무형문화재 11호 지정 연엽주 유명 【아산=임태순 기자】 산자락에 초가와 기와집이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있다.그 앞으로 작은 시냇물이 마을을 휘감고 흘러 간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한눈에 봐도 풍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이다.조선 명종(1545∼1567)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정이 낙향한뒤 예안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 큰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많다.그래서 지난 88년에는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외암리에는 전통가옥이 70호 남짓 된다.이 가운데 10여채의 기와집은 충청도 양반가의 전통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영암댁,참판댁,송화댁,병사댁,감찰댁 등으로 불리는 이 집들은 대개 지은지 100∼200년 정도 된다.살기에 편하도록손질이 가긴 했지만 초가집들도 옛맛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외암리의 제1경은 아마 전통 가옥보다는 돌담길일 것이다. 도로를 따라 외암리로 다가서면 멀리 송림숲 사이로 초가와 기와집이 보인다.마을앞 내를 건너면 소로를 따라 돌담길이 나타난다. 담장은 본래 외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해주고 이쪽과 저쪽을 막아서 공간을 구분해주는 것이 바로 담장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외암리의 돌담길은 폐쇄적이고 답답하기 보다는 친근함과 정겨움으로 다가온다.보는 이로 하여금 소박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느낌은 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담장은 까치발을 해야지만 집안을 들여다 볼수 있을 정도로 왠만한 어른들의 키와 나란히 간다.안을 살짝 가리긴 했지만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것은 아니다.안과 밖을 동시에 배려한 은근함이 배어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마을 한가운데에 다다르고 마음은 고향에 온듯 푸근해진다.이런 곳에 느티나무를 빼놓을수 없다.5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가지를 늘어 뜨리고 기품있게 서 방문객을 맞아준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이 모여 있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흡인력이 있다. 집구경으로 눈을 돌려보자. 마을 동쪽에 있는 참판댁은 충청도 양반가의 전형을 보여준다.민속자료 195호로 지정된 이 집은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중문간 및 곶간채가 모여,터진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집앞 대문채 앞으로 돌담을 쌓아 고샅 역할을 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중문간 앞에는 아담한 마당을 만들고 장독대 주위에는 나즈막한 돌담을 둘러 아름다운 공간의 연속을 연출한다.특히 이 집에서는 연잎,솔잎,찹쌀로 만든 연엽주가 제조돼 애주가들의 입맛을 다신다.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이 술은 임금이 궁핍한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며 호의호식을 거절하자 진상된 약주라고 한다.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영암댁은 전통정원이 자랑이다.전체적으로 깍고 다듬은 흔적이 많아 조경학자들중에는 일본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돌과 나무의 절묘한 배치는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가집으로는 100여년전에 지어진 오병석씨 댁을 꼽힌다.초가집으로는 상당히 위풍이 당당한데 밤나무로 기둥을 세웠다.정면 6칸,측면은 몸채 1칸에 안팎으로 반칸퇴를 둬 한채에 모든 기능을 갖추었는데 초가집이 주는 푸근함과 아늑함이 물씬 풍긴다. 마을 중심부에서 동향해 있는 장영주씨 초가는 넓게 둘려진 돌담과 옛 모습의 사립문이 어울려 순박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안겨준다. ◎개방/보존의 갈림길에 선 ‘영암군수댁’/작은폭포 연못·돌다리·정원수 환상의 조화/관광객 등쌀에 훼손 심각… 일반공개 안해 【아산=임태순 기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아무리 값지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라도 장롱속에 숨어 있으면 그림의 떡이다.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의 영암군수댁은 잘 짜여진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작은 폭포와 연못,올망졸망한 돌다리와 징검다리,침엽수와 활엽수의 조화로운 배치 등은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외암리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정문은 물론 돌담을 끼며 돌아 있는 곁문도 굳게 닫혀 있다.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너머를 힐끔힐끔 훔쳐보다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아쉽기는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들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이 집주인은 사생활 침해보다는 다른 이유로 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며 다소 뜻밖의 얘기를 했다. 안주인에 따르면 관광객이 한번 왔다가면 정원이 조금씩 훼손된다고 했다.나무 또는 바위틈새에 담배꽁초,휴지조각,필름통 등을 꾸겨 넣는가 하면 형상석이 부서지거나 없어진다.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고이 가꾼 나무등걸 또는 수석에 올라가 뛰어놀기도 한다.젊은 부부들이 자녀들을 놓아 기르는 탓이다. 안주인은 “손으로 만지는 ‘촉수문화’ 때문인지 눈으로 감상하기 보다는 손으로 만지려 든다”며 “조상들이 정성 들여 가꾼 것을 보존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 개방와 보존의 갈림길에서 보존을 택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롱속의 보물이 다시 모습을 보이려면 우리들의 주의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외암리 민속마을 가는길/아산 송악면 소재지서 1㎞ 거리 위치/아산·온양서 시외버스 하루 7회 운행 아산시 송악사거리에서 공주로 가는 39번국도로 6㎞쯤 가면 송악면 소재지가 나온다.면 소재지 입구 외곽도로로 들어가 이정표대로 1㎞쯤 가면 외암리민속마을이다. 아산버스터미널 또는 온양역앞에서 외암리 강당골행 시내버스가 아침 8시부터 하오 4시10분까지 하루 7번 다닌다.40분 걸린다.외암리에 숙박시설은 없으며 아산시내에 온양관광호텔,그랜드호텔,제일호텔,도고 로얄호텔 등이 있다.
  • 남산골 공원/도심속에 재현된 600년전 서울

    ◎2만4천평 규모의 시민공원 조성/타임캡슐광장­생활문물 600점 매장… 2394년 공개/전통정원 조성­향토수중 식재… 옛남산 정취가 물씬/한옥마을 복원­민속적 가치 높은 한옥 5채 재건립 서울은 도읍지가 된지 600년이 넘었지만 ‘역사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경복궁,비원 등 일부 고궁과 남대문,동대문 등의 유적이있지만 전체적으로 유구한 역사에 비해서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다.보존보다는 허물고 새로 짓는데 길들여진 탓이다. 내년 봄이 되면 서울 남산에 서울의 과거,현재,미래를 볼수 있는 곳이 들어선다. 중구 필동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 2만4천여평에 조성되고 있는 남산골 공원이 바로 그 곳.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한옥마을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공원은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은 이미 조성이 끝났고 한옥마을은 거의 마무리단계에 와있다. 남산골 공원의 상층부에 위치한 타임캡슐광장은 서울의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문물 600점이 지하 15m에 매장돼 있다.서울 정도 600주년인 지난 94년 11월29일의 일로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타임캡슐은 정도 천년이 되는 2천394년에 공개될 예정이다.그래서 분화구모양으로 된 광장의 회랑을 거닐면 600년전과 400년뒤가 함께 느껴져 상념에젖게 한다. 타임캡슐광장에서 내려오면 전통정원과 마주친다. 남산의 산세를 살리기 위해 구릉지와 계곡을 완만하게 조성한 이 정원에는 소나무 등 향토수종이 주로 배치돼 있으며 느티나무,수양버들 등이 뒤를 바치고 있다.옛 남산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골짜기도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았다.하류의 연못에서 물을 끌어올려 계곡으로 방류하는데 내년 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골짜기 중턱에는 수필집을 통해 청렴,결백으로 상징되는 남산골선비의 모습을 일깨워준 일석 이희승 선생의 추모비가 서 있다. 또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면 꿩과 까치가 양지바른 곳 잔디밭에서는 한가롭게 뛰노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곳곳에 정자가 있어 발걸음을 쉬게 한다.전체적으로 번잡하지 않고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도심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이 전통한옥 복원지역.2천400여평에 형태가 독특하고 원형을 잃지 않아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정규엽가옥 등 5채가 복원되고 있는데 11월1일 현재 92%의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올 연말까지면 벽지,천정,장판,창호지 마감작업 및 마을 공동광장 마사토 포장이 모두 끝나게 된다. 이와 함께 내년 3월까지 가옥 내부에 장롱,문갑,뒤주 등 전문가의 고증을거쳐 제작한 가재도구를 배치할 예정인데 현재 75%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한옥촌이 문을 열면 침선,공예,민화교실과 서당 등 다양한 취미강좌가 개설돼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한편 한옥촌 초입에 있는 공예전시관은 이미 공사가 끝났다. 이곳에서는 나전칠기 전통매듭 등을 만드는 방법이재현되고 각종 공예품도 판매된다. 공예전시관 앞 빈터는 소극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소극장은 누각과 연못을 마주보고 있어 널뛰기 그네뛰기,윷놀이 등 민속놀이와 전통혼례식을 개최하기에 적격이다. ◎남산골 공원지역 유래/조선시대 벌칭 청학동… 시인 묵객 많이 살아/1730년경 군대첫 주둔… 이후 군사용 활용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는 곳은 옛부터 시인 묵객이 많이 살아 조선시대에는 청학동이라고 불려져 왔던 곳이다. 도교에서 청학은 영생하는 학을 말하는데 경치가 절경인 곳에서 산다.이곳이 청학동이라고 불린 것은 청학이살만큼 산수가 좋았기 때문이다. 빼어난 산수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을 끌어 모운다. 조선조 초기 좌의정을 지낸 용재 이행은 이곳에 천우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여름철 더위를 피했다.그는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찾았을 정도로 시에 능했다.또 그의 증손자인 이안눌도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은 수도 서울의 중앙에 있는 산이다.시민들의 쉼터도 될수 있지만 군사목적으로 이용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조선초 태조가 인왕산,남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축조한 것이라거나 봉수대로 활용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남산골 공원이 군사용으로 활용된 것은 한참뒤의 일이다.영조때인 1천730년대 조정은 이곳에 139칸의 집을 짓고 수도 서울을 지키는 남별영이라는 군대를 주둔시켰다.얼마전까지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묘한 인연이다. 일제시대에는 헌병대사령부가,해방후에는 수경사가 들어서 지난 94년까지 주둔했다. 남산골 공원에 가는 방법은 지하철 4호선 충무로 역에서 내려 ‘한국의 집’쪽으로 가면 된다.공원내에 주차장이 없기 때문이다.전통 한옥촌은 공사가 한창이지만 이미 완공된 타임캡슐광장과 전통정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여유있게 구경할 수 있다. ◎복원예정 한옥 5채의 특징/정규업 가옥­순종때 지은 왕제사 행차용 집/이진승 가옥­철종때 부마 박영효의 개인집/서용택 가옥­정문 계단 난간석은 미의 극치/김홍기 가옥­안채∼사랑채 연결한 사대부집/조흥은 가옥­유리문 등 개량한옥 양식 도입 서울시내에 산재해 있다 남산골로 이전 복원되는 5채의 한옥은 모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동대문구 제기동 정규업 가옥은 조선 순종의 처삼촌인 윤덕영이 왕의 제사행차때 편의를 돕기 위해 지은 제사가옥이다.위에서 내려봤을때 사당을 정점으로 가옥구조가 으뜸 원꼴을 하고 있으며 목재는 경운궁을 헐면서 나온 홍송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경인미술관에 있던 이진승가옥은 조선말 철종때 영혜공주의 사위 박영효의 집으로 서울 8대가 중의 하나다.부엌과 안방이 일자로 남향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보기 힘든 개성지방의 주택양식이다. 종로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은 조선말 순종 윤비의 저택이었다고 전해진다.이 가옥은 정문 계단 양쪽의 난간석이 매우 아름다운 구한말 최상류층의 가옥이다. 종로구 삼청동 김홍기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연결돼 있다.사대부의 가옥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선말기 서민주택의 양식을 볼수 있다. 중구 삼각동 조흥은행 관리가옥은 전통적인 안채와 별당채를 갖추면서도 유리문 등 개량한옥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지붕의 한쪽이 길고 한쪽은 짧은 특이한 양식을 띠고 있다. 서울시는 당초 이들 한옥을 뜯어 남산으로 옮겨 복원하려 했으나 70% 정도는 새 것으로 교체했다.대부분 지은지 100∼200년이 지나 목재의 상당부분이 썩거나 안전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그러나 외국산 소나무를 전혀쓰지 않고 강원도 강릉과 설악산에서 소나무를 벌채,6개월간 건조시켜 사용했다.
  • 한국범죄방지재단 세미나 이순형 교수 주제발표

    ◎전통 가정교육서 절제하는 인간 육성/현대아동 욕구·감정 제어능력 약하고 공격적 한국범죄방지재단(이사장 정해창)은 2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전통가족 교육과 범죄예방」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전통적인 가정 교육법이 범죄욕구 절제에 기여하는 효과에 대해 토론했다.이날 세미나에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이순형 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전통교육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독창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범죄의 유혹과 공격성을 절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급변하는 시대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가져 봄직한 질문이다.특히 한국 사회는 전통 사회상이 왜곡된 부분이 있어 더욱 그렇다. 조선사회는 유학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지향했다.유학이 지향하는 인간상은 바로 선비이다.학문을 통해 맹자가 말한 인의를 지향하는 것이다.의는 인륜이고 인륜은 삼강오륜이다.군자상은 곧 선비상으로 동일시됐다.선비는 조선사회가 지향한 인물상이다. 전통가정에서 아동은 3∼4세쯤 기저귀를 뗀 후에야 어머니의 방에서 조부의 방으로 옮겨진다.안채에서 사랑채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비로소 가정교육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이 시기는 아동의 발달적 특성에 적합한 때로 선조들의 전통적 가정교육의 예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교육사상과 목적을 제시했다.아동을 어떻게 선비상으로 가꿔 나갈 것인가가 이들의 관심사였다.이이는 격몽요결을 비롯한 저서에서 입지와 정성을 주된 교육의 목적이자 내용으로 제시했다. 교육 내용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구나 본능을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그러한 극복은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단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주로 옛 습관을 없애고,의관을 바르게 차리고,학습자세를 바르게 하고,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나날이 새롭게 공부하라는 등 극기를 행동규범으로 가르쳤다.한마디로 분수를 지키며 공부에 힘쓰는 군자를 만들기 위한 절제와 극기 훈련을 의미하는 내용들이다. 절제력은 욕구와 감정을 스스로의 의지로 제어하는 능력이다. 전통가정에서는 반복 훈련을 통해서 아동의 절제력을 길렀다.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통해 내재화 시키는 방법으로 절제력 있는 인성을 형성했던 것이다.현대의 아동들은 일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일관성이 부족하고 유혹에 약하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공격적 성향을 갖기도 한다. 자기통제력은 우선 아동이 자기를 통제해야 하는 이유나 그 가치를 인식하는데서 길러진다.그리고 아동이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범을 따를수 있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사회적 기술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요인은 보상과 처벌,모델 동일시이다.모델 동일시는 그 모델과 신뢰가 있고 원만한 관계가 쌓인뒤 아동이 그 모델의 언어와 행동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전통적 가정교육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바로 「사람은 형성되는 것이다.환경을 통해서」이다.
  • 조선전기 「절매삽병도」 동자(한국인의 얼굴:100)

    ◎매화뜰 쌍뿔머리 두 소년 마음은 꽃보다 딴곳에…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고려사회와 차별화한 다른 모습으로 출발했다.정치의 중심도 고려처럼 귀족이 아니었다.과거와 같은 시험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엘리트집단이 정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그리하여 문·무과를 합한 양반정치가 15세기에 이미 뿌리를 내렸다.「경국대전」헌법 비슷한 기준법을 만들어 통치의 기초로 삼은 것도 이 때였다. 조선왕조의 문화 역시 정치 마찬가지로 유교사상을 바탕에 깔았기 때문에 불교사회였던 고려와는 성격이 달랐다.그림의 경우도 불화는 회화과목 중심축에서 멀리 벗어나고 말았다.이 시대가 요구한 그림은 종교화가 아니고,감상적 작품이었다.임금도 그림을 말하게 되었고,그림을 잘 그리는 선비도 나왔다.심지어는 상민계층에서도 화가가 배출되었다.그러니까 예술전반에 유교의 합리적 사고가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배경속에서 활동한 화가중에는 강희안(1417∼1464년)이 있다.그의 그림에는 인물이 꽤 등장하는데,그 대표적 그림이 「고사관수도」다.그리고낙관을 하지 않았으나,그의 그림이 분명한 몇개의 작품에도 인물을 그렸다.그 하나가 화가 이름앞에 그렇게 전해온다는 의미에서 전자를 붙여놓은 「절매삽병도」다.매화를 꺾어 병에 꽂는 그림이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은 화제대로 봄을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어려있다.담장 안쪽 화단에서 자란 매화나무는 제법 나이가 들어 고목이 되었다.사랑채 주인이 부러 모양을 내어서인가,매화나무 등결이 울룩불룩 모질게 자랐다.그래도 가지가 돋고 때가 되어 꽃이 피었다.「청구영언」에 실린 「매화가」의 무대로 다가왔다. 「매화야/옛 등걸에/봄철이 돌아온다」라고 한 노래는 누가 이 그림속에 들어가서 지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은 어린 동자가 둘.한 아이는 화단에 들어가 매화를 꺾고 다른 아이는 화단 바깥에서 꽃을 꽂아둘 병을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꽃을 꺾는 아이는 어인 일인지 딴전을 부리고 있다.꽃가지에서 눈길을 뗀채 뜰을 내려다 보면서 슬쩍 웃음을 지었다.뜰에 떨어진 매화 한송이가바람결을 따라 맴도는 것이 우스워서일까….병을 받쳐들고 선 동자도 부동자세를 했지만 눈길은 뜰에 가 있다. 동자 둘은 한창 개구쟁이로 놀만한 나이다.쌍뿔머리를 했으나 더벅머리기는 마찬가지다.화단에 들어간 아이는 갸름한 얼굴을 했다.슬쩍 머금은 웃음에도 장난기가 가득 들었다.그러나 붓을 들어 단번에 찍고 그어 그린 얼굴속의 이목구비만큼은 뚜렷했다.집에서 부리는 아래것들 아이인듯 한데,살만 좀 붙었더라면 잘 생긴 얼굴이다.
  • 한울타리가족 사례발표회/김태현 교수 기조강연

    ◎“세대간 벽 허문 솔직한 대화 절실”/아들·딸에 사회·가정 일 경험 시키도록 가정의 행복을 만드는 모임인 「한울타리 가족」은 23일 하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제3회 행복한 가정 사례 발표회를 가졌다.「한국의 좋은 가정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주제로 기조강연한 성신여대 가정관리학과 김태현 교수의 글을 요약한다. 가족은 소수로 구성된 집단이지만,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많다.전통사회에서는 가족의 대를 이어가는 부자관계가 가장 중요하였고,그 관계는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져 불평등한 가족 관계의 근원이 되었다.명령과 복종관계는 다른 가족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성별과 연령에 의한 서열을 만들었다. 부부관계는 사랑보다 질서와 규범을 강조했기 때문에 정서적 교류와 소통은 단절됐다.이는 한옥의 가옥구조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어 남녀가 각자의 생활공간을 가진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관계면에서 볼 때 여성의 지위는 불평등했으나 가정주부 역할에서의 권한은 컸다. 남성은 가정생활에서 비켜있는 존재인 반면 여성은대를 이을 아들의 교육을 비롯,자녀 양육과 살림살이를 전적으로 맡았다.부부관계에서 열등한 지위를 가졌던 여성이 며느리를 맞게 되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연령에 의한 위계질서가 새로 만들어졌다.시어머니는 명령적 위치,며느리는 복종적 위치에 놓이는 불평등한 가족관계가 재생산됐던 것이다. 민주와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 들어 가족내의 관계도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부부관계의 의사소통 방법이 개선되고 의사결정 유형도 달라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우애적,민주적 관계로 바뀌고 있는데 그 부작용도 크다.직업계승을 통한 자녀의 통제가 약화된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자녀교육이 학교에 일임됐기 때문에 가정교육의 부재현상이 나타난다. 부모 자녀간의 유대관계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정간의 끈이 약해져 외부의 자극으로 쉽게 끊어짐으로써 자녀들은 가출,약물복용,자살 등 각종 비행의 길을 걷게 된다.이를 치유하려면 부모 자녀가 솔직히 대화,세대간의 벽을 허물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서로 깨달아야 한다. 또한 한 사회가 성공적으로 민주화되려면 가정의 민주화가 밑받침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부부가 평등하고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자녀를 그 방향으로 사회화시켜야 한다. 아들과 딸 모두가 사회적 일과 가정적 일을 함께 하는 양성적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한다.그래야만 자녀들이 평등한 사회에 잘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다. 부모 자녀 관계에서 특히 노부모와 성인 자녀관계는 한층 더 애정적 유대관계가 약화되어 노인들이 가족관계에서 소외되고 있다.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인에게는 사회변화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젊은 세대들에게는 노인의 신체적,정서적,경제적 변화를 이해시키는 각종 프로그램을 마련해줘야 한다. 아울러 약화되어가는 관계를 사실로 받아들여 선가정보호,후사회복지라는 정책틀에서 벗어나 정부나 국가 차원에서 노인 가족을 도와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북경 역사적 명소 존폐위기

    ◎시내곳곳 흩어진 노신·모택동 옛 거처 등 무분별 도시계획·관리소홀로 철거·훼손 북경의 유서깊은 전통고옥들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특히 중국 근대사의 명인들이 살았던 옛 고옥과 역사적 명소들마저 도시계획과 보수 미비때문에 기억속으로 사라져갈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중앙TV는 동성구등 시내 몇곳에 흩어져 있는 노신의 옛 집들이 가옥신축공사등으로 모두 철거될 위기에 있다고 보도했다.새로 땅을 매입한 건축업자들이 아파트건설을 위해 「아Q정전」의 저자 노신의 집을 철거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자금성북쪽 경산공원부근 한곳에는 북경특유의 입구자 모양의 주택구조인 사합원 양식으로 북향집 3칸,좌우 양쪽에 사랑채 1칸,동향집 2칸이 마주보고 있다.이 가운데 3칸의 북향집은 1918년 9월부터 모택동이 호남성에서 최초로 상경,근공검학단을 조직하며 살았던 집.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이 새,지붕에다 비닐등을 대고 벽돌을 눌러 놓은 상태다.모가 살았던 다른 집들도 비슷한 처지다. 「낙타몰이꾼 시앙쯔」(낙타상자),「다방」(다관)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날려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 노신과 비견되는 소설가겸 극작가인 로사의 옛 집은 이미 붕괴단계.북경시 동성구에 자리한 로사의 집은 그가 직접 심은 나무들이 사합원의 뜰을 차지하고 있다.하지만 남향집 두칸의 3층 계단가운데 1층은 이미 함몰되는등 위험건물로 판정받은 상태다. 지난달 북경시에서 공포한 「도시발전 총체계획」에 따라 숭문문지역과 선무구에 집중돼 있는 1백80여개의 「회관」들 가운데 최소한 수십개가 수년내로 사라지게 됐다.「회관」이란 중국 각 지역 정부의 「북경 대표처」나 또는 각 지역 상인및 지주들이 북경서 지내던 사무실겸 호텔격.선무문내에 있는 청나라때의 관음사 부속망루등의 철거계획을 놓고 문화계의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문화계에선 최근 북경의 상징이던 사합원과 호동(골목길)이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소멸위기에 놓였고 주요 문물보호 건물마저 보호소홀로 붕괴돼 가고 있다면서 적극적인 보호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당국에선 위험판결을 받은 선무구에 있는 정치가 강유위의 옛집을 보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 문화계에선 이를 당국의 관리소홀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한편에선 작가 곽말야과 모순의 고가들이 관리소홀로 훼손되고 있고 중요 문물보호지정을 받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고가는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려,원래의 구조를 변경,휴게실과 상품판매소를 냈다는 비난마저 받고 있다.북경시의 한 관계자는 이미 상당부분의 사합원등 고가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앞으로 활발한 도시계획에 밀려 4∼5년내로 옛 북경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이것이 「21세기 주택」/대우 주택문화관 개관

    ◎방구조 「원터치 변화」… 공기로 바이러스 청소 바이러스를 공기로 씻고 스위치 하나로 방의 구조를 바꾸는 미래형 주택이 선보였다. (주)대우는 30일 서울 중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1층에 미래의 첨단주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주택문화관 「휴먼스페이스」를 개관했다.연면적 7백30평에 기업홍보관,유아놀이방·상담실 등의 고객참여관,미래주택 전시관으로 꾸몄다. 미래관은 시대별로 구분,「주택 2000년형」에는 맑은 물과 공기정화에 역점을 준 대우의 40평형 그린 홈 아파트를 전시했으며 「2005년형」에는 침대가 책상·책장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는 14평형 원 룸 아파트를 선보였다. 「2010년형」에는 한국적 특성과 첨단 기술을 접목,안채·사랑채·별채·대청 등을 수용한 60평형 3세대 주택을 전시했다. 「2030년형」에는 영상으로 대화할 수 있고 바이러스를 공기로 살균하는 에어 샤워실 등이 갖춰진 무공해 첨단주택으로 꾸몄다. 「캡슐 하우스」로 이름붙인 먼 미래형에는 공간이용을 극대화,방이 회전됨에 따라 사무실과 침실·욕실 등으로 구조가 바뀌고 3차원 입체 영상을 볼 수 있는 주택을 전시했다.31일부터 상오 9시∼하오 5시 일반에게 공개되고 월요일은 휴관한다.
  • 정자:하(서울 6백년 만상:58)

    ◎창덕궁 후원엔 아직도 15개 정자 그대로/부용정·관람정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존/부암동 석파정,대원군 별장으로 유명 정자의 보고인 창덕궁 후원에는 지금도 관람정·애련정·승재정·능허정·청심정등 무려 15개의 정자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자리잡고 있다.방형·육각형·다각형·부채 모양의 다양한 정자는 연못,그리고 누각등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전체면적이 약 9만여평에 이르는 창덕궁 후원은 북악에서 내려뻗은 완만한 언덕과 여기저기에 맑은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어 연못과 정자를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태종때 창건됐다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창덕궁에 이처럼 많은 정자가 지어진 것은 후원의 대규모 조성공사가 벌어진 광해군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원 중심에 있는 연못인 부용지 남쪽에는 사방에 창살문까지 꾸며진 부용정이 마치 물위에 뜬 형상으로 있고 북쪽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주합루가 자리잡고 있다.또 한반도 모양의 연못 반도지 동쪽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부채꼴형 정자인 관람정이,남쪽에는 육모지붕의 존덕정이,연못 반대편 언덕위엔 마치 절간같은 승재정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임금들이 산책을 하는 도중 들러 정사로 복잡해진 심신을 식히거나 대소신료와 외부 손님을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기에 정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였다.또한 조정 중신들이 한가한 시간을 틈내 독서를 하거나 강론을 펴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등박문등 일본의 대신들을 접견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가는 길목인 부암동동사무소에 인접한 종로구 부암동 316의1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이 있었다.석파정은 본래 철종때의 권신인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대원군이 이 별장을 빼앗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철종이 승하한 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등극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그동안 수모를 주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골몰했으며 특히 그 권문의 한 사람인 김흥근을 미워했다.대원군은 주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의 물이 맑아 그야말로 별천지인 석파정을 김흥근으로부터 빼앗기로 하고 꾀를 냈다. 일단 자신의 부인 병요양을 핑계로 임시로 석파정을 빌려쓰던 대원군은 어느날 『대궐에만 갇혀 계시니 좀 갑갑하시겠냐』며 고종을 석파정으로 초청했다.고종이 도착한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원군은 대전 내시를 통해 상감께서 오늘밤 이곳에서 유숙하기로 했다는 담화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국왕이 한번 유숙한 곳은 민간인의 소유를 금하는 국법을 이용해 김흥근으로 하여금 석파정을 포기케 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사연을 지닌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에도 계속 왕실에 세습돼 오다 일제때는 총독부 소유로 변했으며 6·25 직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터를 잡기도 했다. 지금 석파정에서 세검정쪽으로 2백m 내려간 홍지동 125에는 옛날 석파정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대원군별장」으로 불리는 사랑채 하나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석파정은 서울시 지정문화재 26호로,대원군별장은 23호로 지정돼 개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 “대원군 호칭은 합하”/운현궁 복원중 상량문 2장 발견

    ◎지위는 만조백관의 으뜸/운현궁 건축연대 밝혀져 흥선대원군 지위는 「백료들의 열위 위에 으뜸이다」라고 밝힌 운현궁 상량문이 발견됐다. 서울시는 지난 6월초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의 복원공사중 사랑채인 노안당과 안채인 이로당에서 각각 발견된 상량문을 20일 공개했다. 이 상량문은 운현궁의 건축연대는 물론 대원군의 구체적인 지위와 대원군시대의 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공개된 노안당 상량문은 가로 1백50㎝ 세로 97㎝의 중국산 붉은색 비단위에 김이해서체로 29행 6백61글자가,이로당의 상량문은 가로 1백65㎝ 세로39.5㎝의 고급 닥나무 종이위에 예서체로 6백63글자가 쓰여져 있다. 노안당과 이로당의 상량문을 해석한 서울대 이태진교수(국사학)는 『노안당의 상량문에서 대원군의 지위를 「관백료열위지상」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 고종초 10년간 정치를 주도했지만 왕조실록등 정사의 기록은 대부분 국왕의 이름으로 행해져 그동안 파악하기 어려웠던 대원군의 실제지위에 대한 문제점이 해결됐다』고 밝혔다.또 이들 상량문은 지금까지 추정으로만 알려진 운현궁의 건축연대를 「노안당의 상량일은 고종즉위 4개월째인 원년(1864) 3월23일로,이로당의 상량일은 고종6년(1869)」이라고 정확히 밝혀 운현궁이 그동안 「고종이 출생해 12세까지 성장한 곳」이라고 전해진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종이 즉위하기전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함께 이날 공개된 상량문에는 대원군의 집안내력과 인품·중국 고대 고사등을 인용,고종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배경을 서술하는등 즉위당위성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이밖에도 운현궁 상량문은 재위중인 왕의 생가이자 정사의 주체인 대원군의 거처를 위해 특별제작,크기와 재료는 물론 글자수·필서등이 보통 사대부집 상량문과는 크게 달라 문화재적 가치로서도 귀중한 재료가 될 것으로 이교수는 밝혔다. 지난해 12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한 운현궁은 사적 제257호로 현재 지붕및 벽체 해체작업이 한창이며 95년 12월 복원공사를 마무리한 뒤 대원군의 유품전시등 생활상 재현·전통예절 교육장등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 궁궐/서울정도 6백년 기념 문화재 재건사업

    ◎헐렸던 경복궁복원… 숭정전부터 “우뚝”/숭정문·회랑등과 함께 마무리공사 한창/자정전·태녕전등 「2단계 공사」 9월부터/운현궁은 고증없이 증축한 회랑 보수작업 착수 서울 옛 도성안에는 아직도 여러 궁궐이 남아있다.경복궁을 비롯,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이다.역사교육장으로 때로는 휴식의 장소로 사랑받는 전통공간이 되어왔다.이들이 모두 조선의 궁궐임을 쉽사리 안다. 그러나 잃어버린 조선의 궁궐들을 아는 이들은 흔치 않다.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까맣게 모르는 조선의 궁궐,그것은 바로 경희궁(사적271호)과 운현궁이다.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모두가 헐리고 2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궁궐터마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 경희궁이 제모습을 찾기시작했다.1907년 일제통감부가 중학교를 세우면서 헐린 조선의 궁궐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서울시가 정도6백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경희궁 복원이 실현되어 정전인 숭정전부터 우뚝세워졌다.그리고 숭정문이 들어서고 회랑이 둘러쳐졌다.오는 9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궁궐터마저 파괴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왕기가 서린 경희궁을 해체하고 긴 식민통치를 펴는 동안 자취없이 사라진 경희궁.조국광복을 맞고도 한동안 염두에 두지 못한 경희궁복원이야기가 나오더니,지난 87년부터 궁터발굴이 진행되었다.그리고 착공 6년만에 잃어버린 궁궐모습을 떠올렸다.서울시가 이번 1단계 복원사업에 쏟은 예산만도 58억1천3백만원에 이른다. 서울시는 경희궁정비 2단계사업으로 오는 96년까지 편전인 자정전,임금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태령전,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한 흥정당 등을 복원한다.숭정권 뒤편에 터를 잡았던 자정전 자리는 명지대건축문화연구소가 확인한 바 있다.자정전은 기단지의 호석및 바닥전돌이 발굴됨으로써 이미 복원되고 있는 숭정전축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궁궐지」에 의하면 경희궁은 본래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있는 것으로 되어있다.정궁인 경북궁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다는 점과 다른 것이다.또 경희궁은 정문을 바른쪽 모퉁이에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이같은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었던 창덕궁에서도 찾아진다.결국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렸다는 이야기가 된다.각 건물의 배치는 우선 외전의 경우 숭정전을 서쪽에 앉혀 동향을 바라보게 하면서 주위는 행각을 돌린 가운데 사방에 문을 냈다.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이 있고 주변에 태령전이 위치했다.숭정전 오른편 즉 북쪽에 흥정당,그 주변에 왕이 책을 읽는 장소인 존현각과 석음각을 두었다는 것이다. ○58억들여 6년 공사 오른쪽 내전으로는 정침인 회상전,융복전,장락전이 있었다.그 주위에는 용비·봉상이라는 누각과 연못,연회장인 광명전을 배치했다.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5군데로 되어 있으며,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이 정문이다.경희궁은 흥화문을 거쳐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에 도달하는 특수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희궁의 전각들은 거의 모두 헐려 없어졌으나 정전인수정전과 정문인 흥화문,후원의 정자 황학정이 남아있다.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동국대 캠퍼스에 다시 세워졌다.정면 5칸,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 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1686년 처음 지은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흥화문 역시 1686년에 세워졌다.지난 1932년 일본인들의 절 박문사로 옮겼다가 지난 88년 제자리에 복원되었다.지난 1923년 민간인에게 팔렸던 황학정은 서울 사직공원 사직단 뒤편으로 옮겨 복원했다. 경희궁은 야주현대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에서 광채가 나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는데서 유래한다.흥화문의 현판글씨는 경복궁 동무광에 보관되어 있다. ○교육장으로 활용 서울시는 경희궁을 현재 건립중인 시립박문관과 연계,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경희궁 경내를 야외문화전시공간으로 조성하는 한편 궁중가례를 재현시켜 국내외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수시로 전통문화행사를 유치키로 했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 이외에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사적257호)복원계획도 정도6벡년 기념사업에 포함시켰다.시는 83억2천8백만원을 들여 지난해 토지(2천1백48평)와 건물을 매입,현재 보수작업을 펴고있다.40억3천7백만원을 들여 회랑을 신축하는 등의 보수공사를 오는 95년12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 역사전통공간은 대원군유품을 비롯한 고미술품전시장,전통예절교육장,고건축 연구학습장,전통혼례식장,민속놀이마당으로 활용된다.이를 위해 72평의 회랑을 새로 짓고 마당 3백40평을 확장키로 했다.그리고 고증없이 최근에 증축한 부분을 제거,옛 모습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운현궁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사저다.조선 후기의 주택건축물로,고종이 임금자리에 오른 뒤 대폭확장하면서 궁으로 부르게 되었다.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1863∼1873년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담에는 4곳의 대문을 설치했다.그 안에는 아재당을 비롯 사랑채인 노안당,안채인 이로당,노안당,선조들을 모신 사당 등을 두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음산한 겨울날 숨을 거두는것으로 시작되는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무대이기도 하다.파락호 시절에 겪었던 수모와 시련,이를 극복하고 섭정의 권좌에 도달한 대원군의 체취가 서린 역사현장이다.그래서 운현궁은 풍운의 근세사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 ▷경희궁 약사◁ ▲1620년(광해군12년)이궁으로서의 경덕궁을 지어 궁궐 모습을 갖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정사를 보기 시작함 ▲1654년(문종8년)숙종이 이 궁의 회상전에서 태어남 ▲1688년(숙종14년)경종이 이 궁의 융복전에서 태어남 ▲1760년(영조30년)궁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함 ▲1777년 정조가 이 궁의 숭정문에서 즉위함 ▲1835년 헌종이 숭정문에서 즉위함 ▲1907년 일제 통감부가 궁 서쪽에 중학교를 세움 ▲1915년 경성중학교(서울고 전신)가 궁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파괴 ▲1922년 전매국 관사용지로 궁터를 파는 등 4만1천여평으로 축소됨 ▲1923∼32년 황학정,숭정전,회상전 뿔뿔이 이축됨 ▲1974년 서울고 이전과 더불어 부지를 현대에 매각 ▲1984년 서울시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교환형식을 빌려 부지를 확보함 ▲1985∼87년 경희궁 복원계획에 따라 궁지발굴(단국대) ▲1987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 ▲1989년 숭정전 발굴(명지대) ▲1990∼94년 숭정전,숭정문,회랑공사
  • 고향마을/권문용 한국고속철도공단 부이사장(굄돌)

    천안에서 국도를 따라 10여분간 내려가다보면 구름이 머물고 간다는 운치있는 이름을 가진 운주산 기슭을 돌아가게 된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배일이라는 이름의 아주 고요한 마을이 놓여 있다.어느 시인의 글처럼 황금빛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가 들리고 늙으신 아버님이 엷은 졸음에 겨워 볏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한 마을.이곳이 세종 이래 5백여년간 20대가 대대손손 이어 살아온 나의 고향마을이다. 이 조용하던 곳에 상전벽해보다 더 큰 변화가 몰려왔다.고속철도가 이곳을 지나가게 되어 10리가 넘는 긴 터널이 뚫리고 마을 앞뜰은 교량이 가로질러 가게 된 것이다. 얼마전 이곳의 공사현장을 둘러보기 위하여 지프를 몰고 갔었다.아주 어렸을때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 주시던 할머니손의 따뜻한 체온이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바로 이 마을 뒷동산에 높이가 20m가 넘는 대형 터널이 뚫리고 있었다.『아 바로 여기로구나』하고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각종 중장비가 동원된 것이 마치 기계화 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것 같았다. 산길을 내려오다 동양화 한폭같은 운주산을 몇번인가 되돌아 보면서 문득 할아버지,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분의 할아버지까지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 이곳,바로 그 밑에 터널을 뚫고 철마를 달리게 하다니 조용하게 주무시는 조상님들께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소주와 북어를 들고 아무도 살지 않고 2백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소슬대문이 우뚝한 고색창연한 고향집 사랑채로 들어섰다.그리고는 큰 절을 올렸다. 『할아버님들께 죄송스럽습니다.그러나 이 길은 후손들이 앞으로 신의주를 거쳐 북경을 지나고 타슈켄트와 우크라이나 평원을 지나 모스크바,파리,런던까지 우리 민족의 기상을 전세계에 뻗치고자 하는 길이오니 부디 이 일을 도와 주소서』 이끼낀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강릉 선교장에 도둑/희귀유물 6점 도난

    【강릉=조성호기자】 19일 상오 5시쯤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5호인 선교장에 도둑이 들어 청동등잔 3개등 유물 6점을 훔쳐 달아난 것을 성기희관장(70·여)이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성관장에 따르면 이날 새벽 전시실을 돌아보던중 사랑채 전시실의 자물쇠가 파손된채 방안에 있던 청동등잔 3개와 약장,백자퇴침등 유물 6점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도난당한 전시물은 조선조때 유물로 시가 5천만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 전 동양챔피언 황충재씨 한밤 포장마차서 “난동”(조약돌)

    ○…서울 강동경찰서는 14일 프로복싱 전 웰터급동양챔피언 황충재씨(사진·33·KBS권투해설위원·서울 서초1동 신동아아파트 1동1111호)를 공무집행방해및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황씨는 이날 상오2시40분쯤 강동구 천호4동 423 앞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노모씨(22)를 주먹으로 때려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히고 이웃 「사랑채」술집 유리창을 깨는등 소란을 피우다 출동한 천호4동 파출소 김철경장(35)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마구 때린 혐의를 받고 있다.
  • 외언내언

    『아아! 지붕에 걸리련다. 옳다! 넘어섰다. 겨울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재욱 소년은 사랑뜰에서 연을 올리고 있었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22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하라』는 교지를 받든 영의정 김좌근 등이 운현궁에 들어섰을 때 임금될 소년은 이렇게 연을 날리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의 「사랑뜰」이 다른 기록에는 「무너진 울타리 안마당」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천하의 건달 행세를 하던 흥선군이었으니 집안 건사가 제대로 되었을리 없다. 「쓰러져 가는 아래채」 「거미줄 친 추녀」 같은 표현은 「운현궁의 봄」에도 보인다. ◆운현궁은 명복소년이 익성군­고종으로 되면서부터 궁궐같은 엄청난 규모로 늘려 지어진다.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다. 담장 안에는 아재당,사랑채 노안당,안채 이노당·노락당이 있고 영화루도 있었으며 조상을 모시는 사당도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철종때부터왕기가 서렸다는 말이 나온 운현궁터. 여기서 흥선대원군이 천하를 호령했다. ◆사적 257호. 그러나 물론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일부는 덕성여대의 교사로 쓰이고 있고 일부는 전 TBC(동양방송)의 스튜디오로 개조되었으며 대원군이 주로 쓰던 아재당도 헐려버렸다. 그런 중에도 안뜰에는 고종임금이 소년시절에 그 그늘 아래서 놀았다는 노송이 남아 있다. 고종이 임금이 된 다음 이 소나무에 금관자를 달아주었기에 대부송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서울시에서는 내년 10월 운현궁 정비·복원작업을 시작하여 94년에 무료 개방한다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전통 생활문화전시관으로 활용할 방침이라는 것. 그 동안 일반인에게는 소원했던 운현궁이다. 가감없이 복원되어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현장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 청와대 새 관저 준공

    ◎“대통령 일가 살림집”… 팔작지붕 전통미 살린 단층/내년 집무실 완공되면 일제의 잔재 씻는 셈/노 대통령,“옛 중앙청 이전,경복궁 복원해야” 전통 한옥형태에 청기와를 올린 새 대통령 관저가 청와대내에 마련됐다. 청와대는 25일 상오 노태우 대통령 내외,비서실 직원,공사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관저 준공식을 가졌다. 노 대통령은 금명간 새로 마련된 관저에 입주,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지금까지 1,2층 계단을 오르내리던 출퇴근에서 차량으로 출퇴근하는 맛을 느끼게 됐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건물은 1층이 집무실이고 2층이 살림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 동쪽 약간 뒤편 계곡에 자리잡은 새 관저는 본채(2백44평),접대시설이 마련된 별채(1백50평)와 사랑채 부속건물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지면적은 1천2백60평이다. 전통 한옥형태로 4면에 추녀를 달아낸 팔작지붕(까치박공이 달린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전통미를 살린 단층인 이 관저는 얕은 담장을 둘러 별도의 살림공간 분위기를 내고 있고 솟을 대문에는 「인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해 8월28일 착공,4백25일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이날 준공된 신축 관저는 총 공사비 60억원에 연인원 8만1천명과 연 2천3백대의 장비가 동원됐다. ○…노 대통령은 이날 준공테이프를 끊은 뒤 별채에서 참석자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과거 같았으면 대통령이 새 집을 짓는다면 장기집권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을지 모르나 나는 그럴 염려가 없는 사람 아니냐』고 반문한 뒤 『처음 신축 건의를 받았을 때는 임기만료 6개월 전쯤 완공하면 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빨라졌다』고 피력.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항간에 대통령 관저가 훌륭하게 건축되고 있는 점을 들어 앞으로 내각제를 하기는 어렵다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자 『말레이시아에 가보니 국왕과 수상이 있는데 수상은 국정의 온갖 일을 다하느라 위세를 부릴 시간도 없다고 하더라』고만 말해 청와대 관저 및 집무실(내년 7월 완공) 신축과 내각제문제는 연관이 없음을 시사. 노 대통령은 또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한국식으로 새로 짓고 경복궁도 옛 모습대로 복원하면 일제 침략의 역사로부터 나라의 위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일제 총독 부청사였던 옛 중앙청(현 국립박물관) 건물도 다른 곳으로 옳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청와대 본관건물은 1937년 3월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남차랑)가 일본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이곳에 총독 관저용으로 착공,2년 만에 완공했던 것. 독립한 지 40여년이 된 국가의 대통령이 식민통치하의 총독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를 신축하게 된 배경이라고 한 관계자는 설명.
  • 정ㆍ재계 4백여 조문객 줄이어/윤 전대통령 빈소 이모저모

    ◎99칸 전통 한옥 곳곳엔 조등도 서울 안국동 자택에 차려진 윤보선전대통령의 빈소에는 노태우대통령과 박준규국회의장,강영훈국문총리,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평민당의 김대중총재 등이 보낸 대형 조화 1백50여개가 놓여있는 가운데 19일 정ㆍ재계인사와 친인척 등 4백여명이 조문을 다녀갔다. 유족들은 이날 상오 자택 정문 앞마당과 사랑채 앞마당에 각각 안내대와 대형천막 2개를 세우고 하오부터 줄을 이은 조문객들을 맞았다. 고인의 병실을 지켰던 조종호비서실장(70)은 『3개월전부터 전혀 말을 하지못해 특별한 유언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가끔씩 고통을 견디지 못해 소리를 지르곤 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고인이 생전에 큰아들 상구씨(43) 등 가족들 『내가 죽거던 사회와 국민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단히 치러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밝혔다. 빈소가 마련된 고인의 안국동 자택은 서울시 지방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99칸 한옥으로 고인의 두 아들내외와 비서진 등 20여명이 함께 살아왔다. 윤전대통령의 집안은 장수집안으로 사촌인 윤일선 전 서울대총장이 현재 95세,삼촌인 윤치영 전 공화당의장이 93세이며 어머니 이범숙여사도 92세까지 수를 누렸었다. 고인은 생전에 술과 담배를 일체 삼갔고 규칙적인 식사에 짜거나 맵지않은 식단으로 식사를 하는 등 절제있는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빈소에는 이재형전국회의장,김재광국회부의장,이강훈광복회회장,고건서울시장,강원용방송위원장,민관식전문교부장관,서정화의원 등이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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