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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민속자료 3종 지정

    ◎산천 전주최씨 상여/홍성 엄찬 고택/해남 윤두서 고택 문화체육부는 10일 「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를 중요민속자료 제230호,「홍성엄찬고택」을 중요민속자료 제231호,「해남윤두서고택」을 중요민속자료 제232호로 각각 지정했다. 경남 산청군의 만석꾼 필주공의 상여인 「산청전주최씨고령댁상여」는 제작연대(1856년)가 분명하고 지금까지 지정되거나 발견된 상여와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있다.조선시대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은 뒤주간과 다락구성,대청나락뒤주등 당시 전통가옥의 독특한 구조양식을 보여준다.또 정선,심사정과 함께 조선 3재의 한 사람인 윤두서가 살던 집은 1670년 건립된 전통가옥으로 안채의 평면구성과 견실한 결구방식 등이 전통주거생활의 옛 모습을 그대로 찾아볼 수 있게 한다.
  • 지자체 병력 요청 경찰서 거부/청주동부서

    ◎“무소신행정 방패막이 될수없다”/정춘수목사 동상철거 집회 마찰 【청주=한만교기자】 경찰이 소신없는 일반행정에 방패막이가 될 수 없다며 자치단체의 병력동원 요청을 거절했다.경찰이 행정기관의 무소신을 이유로 공식적인 병력동원을 거부하기는 사상 처음이다. 청주 동부경찰서(서장 오명배)는 7일 충북 역사정의 실천연합(회장 이관복)이 8일 청주 3·1공원에서 정춘수 목사의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 갖기로 한 집회를 막아 달라는 청주시의 요청을 거부하기로 했다. 청주시는 지난 5일 동부경찰서에 정춘수 목사의 동상철거 집회를 막아 달라는 공문을 보내었다. 경찰은 이 날 청주시에 보낸 공문에서 『충북도와 청주시가 정춘수씨 동상의 철거방침을 세우고 시행절차만 남긴 상태에서 경찰이 철거를 막을 명분이 없다』고 밝혔다. 충북도와 청주시는 지난해 12월8일 충북 사회민주단체 연대회의(대표 정진동목사)를 비롯한 청주지역 재야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춘수목사의 동상를 철거키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최근 정목사 후손들이 동상철거에 크게 반발하자 청주시와 충북도는 「철거지시를 내려달라」,「시가 알아서 조치하라」는 등 서로 책임을 미뤄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왔다. 경찰은 『행정기관의 무소신으로 빚어진 집단민원에 경찰이 무조건 방패막이가 될 수 없어 병력동원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상 철거시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철거현장 주변에 형사기동대 2개 중대를 배치할 방침이다. 한편 경찰은 이에 앞서 지난해 3월1일과 12월28일에 청주지역 재야단체들이 친일행각을 이유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가운데 한 사람인 정춘수목사의 동상 철거를 시도하자 병력을 동원해 이를 막았었다.
  • 철령의 성주 이씨들(압록강 2천리:24)

    ◎임란때 출병한 이여송은 성주 이씨 후손/부친 이성량은 요동일대 최고 군수권자/15세손 이영 홍무때 망명,철령에 터잡아/1994년 한국종친회서 소둔촌에 비석 세워 우리는 이여송(?∼1598년)이라는 역사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명나라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무장이다.그런데 왜 이여송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려는지 더러 의문을 가질 것이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조선의 성씨인 성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주 이씨들은 지금 요령성 철령시소둔촌에 많이 몰려 살고 있다.그리고 해마다 조상의 묘역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추모 대상은 이여송과 그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5년)등이다.한반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주 이씨의 한 갈래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온 것은 명나라 연호로 홍무(1368∼1398년)연간이었다.성주 이씨 15대손 이영이 죄를 짓고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철령으로 피신해왔다는 것이다. ○소둔촌 주민 거의 이씨 이영의 망명 이후 제5대손이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이다.이성량은 집안이 가난하여 선조들이 세운 군공을 계승하지 못한 채 한 시절을 백면서생으로 살았다.그러다 입신의 기회를 얻어 요동 험산참장이 되었다.또 융경원년(1567년)에는 한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요동부총병의 자리에 올랐다.그 후에 몽골과 여진족을 쳐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만력2년(1574년)에는 요동 최고 군사지휘자인 요동총병 지위를 차지했다. 이성량 사후에는 여송,여백,여정,여장,여매등 네 아들이 총병관을 지냈고 다른 네 아들은 참장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여백과 여매는 임진왜란 때 여송과 함게 조선에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렇듯 이씨 가문이 거머쥔 병권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함하는 글발이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그들은 실제 도읍의 한 변방을 호령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틀림 없었다. 이씨 가문의 권세가 당시 어떠했는가는 요령성 철령시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에서 확인되었다.소둔촌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그의 묘소 입구에는 돌조각 사자상이며 석인상이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섰다.규모는 비록 작아도 북경 팔달령에서 정릉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한 선도를 연상케 했다.선도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석이 있다. 이성량을 기린 대리석 비석은 지난 1994년 한국의 이씨종친회가 세운 것이다.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오늘날 같이 높지 않았더라면 과연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했을까.여기 사는 이씨들도 한국이 보잘것 없는 나라였다면 조상에 대해 별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백여 가구 1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70∼80%가 이씨라는 이 소둔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성주 이씨를 자청했다.그러면서 비록 한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령현 당시 부현장 자리에 있다가 퇴직한 이유한(67)노인도 성주 이씨라고 했다.그래서 철령 이씨종친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떳떳하게 성주 이씨를 내세울 수 있게 된 오늘의 처지를 고맙게 여겼다. ○누루하치와 사돈지간 『나 자신도 그동안 뿌리를 숨기고 살았습네다.그저 한족으로 행세한 거디요.집안 노인들이 가끔 이성량을 이야기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떠들면 핀잔을 줬지 뭡네까.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부터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절로 한국과 성주란 말이 튀어나옵데다.그 전엔 창피스럽던 것이 자랑스러워지더란 말입네다.그래서리 퇴직하고 나서 좌상들과 상의해서 종친회를 꾸몃디요』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는 어엿했다.봉분도 제법 커서 이성량이 묻혀있는 무덤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쳤다.이씨들이 조상에 관심을 둔 것도 근간의 일이고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가 이성량의 무덤을 파엎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량은 살아 생전에 누루하치와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이성량이 요동총병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누루하치는 15세 소년이었다.그런데 이성량은 자신의 수하장군이었던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창안과 아버지 타거를 부하의 밀고로 죽여버렸던 것이다.그 해가만력11년(1583년),누루하치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천명3년(1618년)반기를 들고 마침내 명나라를 뒤엎은 누루하치는 「7대 원한」을 갚겠노라 선언했다.이성량이 첫째로 꼽힌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씨 가문과 누루하치는 사돈간이었다.이성량의 둘째아들 여백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카딸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그러나 원한이 사무친 누루하치는 천명4년 철령성을 함락하고 이성량 일가를 붙잡아들였다.당시 해를 당한 이씨들 가운데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도 24명에 이른다.누루하치 복수의 그물에 든 사람들은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그래서 산동성 임저지구와 광동성 번우지구,사천성,북경 등지에도 성주 이씨들이 지금 살고있다. ○상당수 요직에도 진출 누루하치는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 쪽을 우선 통일하고 나서 수단을 바꾸었다.성주 이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그 결과 강희(1662∼1722년)말년 청나라 왕조에서 7품 이상 벼슬을 한 성주 이씨는 자그마치 1백여명이나 되었다.요동시단의 삼노의 한 사람인 이개는 많은 시를 썼고 「상서」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그의 저서들은 강희말년에 나온 거서「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그리고 태원지사를 지낸 이청서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그의 「고보현당법서」네권은 지금도 중국 서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성주 이씨들은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철령지구의 경우 현급 간부 14명,국급 간부 13명,과급 간부 18명이 성주 이씨로 되어있다.이들은 지난 1991년에 성주이씨 종친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성주이씨 대종회와 정상적인 교류를 해왔다.그리고 「철령성주이씨보계」,「이성량종족역사기년」,「한국성주이씨중국파굴기」등을 펴냈다. 그래서인지 요령성 북령시에는 중국에서 성주 이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이성량의 흔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이성량과 같은 봉건 착취계급의 유산이 문화혁명과 같은 난세를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그 하나가 명나라 신종이 명하여 만력8년(1580년)에 세운 공적비 석방이다.높이 9m,너비 13m의 누각형인데 「진수요동총병겸 태자태보령원백 이성량」이라는 글발 등이 들어있다.그리고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여의주를 굴리는 용,사슴과 꽃 등을 새겨 석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명나라 때 중국대륙 동북방에는 분명히 「이성령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이기도 했다.
  • “총리할아버지 오셨다”…난지도어린이 환호/이총리,상암초등학교방문

    ◎점심 같이하며 김구선생 일화 들려주고 “선생님이 가장 존경받을 분” 교사도 격려 이수성국무총리가 6일 상암초등학교를 찾아 교사·어린이들과 점심을 함께 들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할 수만 있다면 어린이가 잘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지론에 따른 어려운 발걸음이었다. 이 학교는 과거 서울시의 쓰레기매립장이던 난지도와 이웃해 있다.재학생 7백63명 가운데 4백29명이 하루벌어 하루사는 맞벌이 영세민 부부의 자녀다.63명은 홀어머니·홀아버지 슬하,60명은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닌다. 이총리가 이날 학교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출신 국회의원의 모습이 보였다.이총리는 그러나 교장과 교감·교무주임을 비롯,마중나온 선생님들과 모두 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야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이총리는 나중 그 이유를 묻는 한 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분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진면목은 수업중인 5학년 학급을 방문했을 때 드러났다.자칭 「총리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총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고,한 아이로부터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총리는 고개를 가로저은뒤 『정말 존경해야 할 높은 사람은 교장·교감선생님과 여러분의 담임선생님같은 학교선생님들』이라고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사들에게 최상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그러고는 아이들에게 『나중에 여러분들이 대통령도 되고 장군도 되겠지만 선생님이 많이 되어 존경을 받으라』고 충고했다. 이총리는 이어 아이들에게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주문했다.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돈이 많고적음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귀하게 생각하고 다른사람을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부자』라고 설득하면서 『다음부터 누가 이렇게 묻거든 당당히 손을 높이 들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총리는 점심식사를 마친뒤 사진을 찍겠다는 어린이기자의 요청에 포즈를 취하며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간 경교장에서 김구선생으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들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 또 “전동차 폭파” 위협/경찰,검문 강화

    ◎경인선/이틀째 괴전화… 동일인 추정 경인선 전동차를 폭파하겠다는 괴전화가 3일에 이어 4일에도 2차례나 철도청으로 걸려와 철도청과 경찰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나섰다. 4일 철도청에 따르면 이날 상오 9시15분쯤 전날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40대 남자가 철도청 본청 운수국장실에 전화를 걸어와 『어제 전화했던 사람인데 오늘도 부평역에 나가 보았더니 개선된 징후가 전혀 없다』면서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니 5일 상오 8시27분 부평역을 출발하는 전동차에 폭발물을 설치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남자는 10여분 뒤인 상오 9시27분쯤 다시 전화를 걸어 『회사에서 회의가 있는 날에는 부평역에서 출발하는 전동차를 이용한다』면서 『부평역 3번과 1번 승강장에 사과문이 붙어 있어야 한다.오늘 하오 4시에 확인해 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이에 앞서 전날에도 전화를 걸어 『전동차가 자주 연착하는 바람에 회사에 사표를 낼 뻔 했다』면서 사과문 게시를 요구했었다.
  • “1910년까지 제주에 왜구 출몰”

    ◎소설가 오성찬씨 9일 와세다대서 특강/20여년전 입수한 「추자도명」 인용 주장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1910년까지도 제주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소설가 오성찬씨(제주역사연구회 회장)가 일본에서 번역출판하는 일어판 「제주문학선집」출판기념을 겸해 오는 9일 일본 와세다(조도전)대학 국제회의장에서 가질 강연 「제주와 일본의 역사적 관계와 문학작품」의 내용을 통해 밝혀졌다. 와세다 대학 조선문화연구회 주최로 열릴 강연에서 오씨는 『20여년전 제주의 추자도를 취재하던중 이 섬사람인 추대엽이 철필로 쓴 「추자도명」이라는 책을 구했으며 이 책속에서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까지 왜구가 제주도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하고 『기록에 따르면 남정네들이 고기잡이를 나간 한낮에 제주도 대서리에서 약탈을 하고 돌아가던 왜구 12명이 일본인 잠수기선의 어부들에게 붙잡혀 대서리 앞바다의 속칭 「소만여캐」에 며칠동안 내버려진 채 굶어 죽은 것으로 돼있다』고 밝혔다. 또한 현길언·문충성·현기영 등 제주출신 문인들의 작품소개와 함께 일제하 제주를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면서 오씨는 이른바 「잠녀투쟁」에 대해서도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즉 1930년대 초반 약 3개월에 걸쳐 1만7천여명의 해녀들이 참여해 일제에 항거했던 「잠녀투쟁」은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 한편 강연제목에서 보듯 오씨는 제주도 출신 문인들의 작품성향을 제주와 일본과의 특수관계에서 찾고 있다. 우선 그는 제주와 일본의 관계를 서로 돕는 이웃으로서가 아니라 뺏고 뺏기는 적대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전제한다.어쩌면 천형적으로 맺어진 관계이면서도 서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간 역사,그러나 오늘날까지 이런 역사를 극복하고 승화시킨 작품은 빚어지지 않았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과제로 남아있다고 오씨는 주장한다.
  • 북은 사회주의 버려야(박화진 칼럼)

    북한주민들의 탈북사태가 확대·가속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시베리아 벌목장과 한·만 국경에서 해외공관으로 그리고 헐벗고 굶주리는 서민들에서 혜택받는 상류사회의 이른바 노멘클라투라(붉은 귀족들)로 확산되고 있다.탈출동기도 식량난·생활고 뿐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공산주의체제 고수의 절망적 북한현실로부터의 도피와 탈출로 발전하고 있다.붕괴직전의 동독사태같은 북한주민 대탈출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아닌가 주목된다. 지난 1월16일과 30일 서울에 도착한 잠비아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 현성일·최수봉씨부부 및 태권도교관 차성근씨와 30일 제3국경유 서울에 온 북한주민 4명등의 탈북귀순은 북한체제가 중상층부까지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해도 좋을 것이다.현·최씨부부는 김정일최측근중 한사람인 함경남도 도당책임비서겸 인민위원장인 현철규의 아들·며느리이며 차씨는 태권도사범을 위장한 김일성대학출신 북한공작원인 것으로 밝혀졌다.현씨와함께 30일 서울에 도착한 4명의 북한주민은 그들의 직업등으로 미루어 북한사회의 중류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북한의 폐쇄적 이념에 대한 혐오와 자유세계에 대한 동경등이 망명의 동기임을 강조하고있다.별도의 개인적 특별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 망명의 배경에는 북한사회와 체제자체에 대한 실망과 동요 그리고 사회기강 해이가 근본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충격적인 것은 북고위층이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현상의 노출이다.현씨부부와 차씨가 잠비아에 근무한 것은 북한지도층이 그들의 체제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에 자녀들을 안전한 해외로 빼돌리고 있음을 보여준 경우라지 않는가.말하자면 북고위층의 자녀탈북귀순 방조인 셈이다. 94년의 북한인민회의 대의원 정기해씨를 비롯한 사회안전부 대위 여만철씨,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씨,조철준전건설부장 아들이자 김일성종합대학 상급교수 조명철씨 그리고 95년의 북한군상좌 최주활씨,재정경리부장 최희벽의 아들이자 북한최대 무역상사인 대성총국 유럽지사장 최세응씨 일가등에 이은 최수봉·차성근씨등이 대부분 고위층 자녀들이란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할수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일단 해외로 나온 북한인들은 북의 주체사상과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한국 그리고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듣고 비교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실망과 유혹이 얼마나 크겠는가.해외의 다른 많은 북한외교관 공작원들도 기회만 있으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있는 「탈북예비군들」이 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조기붕괴와 대량난민사태를 원치않는다.북경제난·식량난은 홍수때문이 아니라 체제결함 때문이다.인도적 식량 구걸이나 원조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릴리 전주한 미국대사도 지적한 북한의 추락아닌 소프트·랜딩(연착륙)을 우리도 원한다.그러기 위해선 50년간의 공산당통치에도 불구하고 주민에게 헐벗음과 굶주림 그리고 영양실조의 질병과 죽음밖에 줄수없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유민주화가 싫으면 중국식 개방개혁에라도 북한은 서둘러 나서야 할것이다.누구와 무엇을 위한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란말인가.북한당국의 거부는 루마니아 사태같은 보다 큰 파멸을 예비하는 행동일 뿐이다.연이어지며 중상류층으로 확산·가속되고 있는 탈북사태는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되는 북한체제가 갑작스런 추락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지 모른다. 우리는 원하지않는 북한의 붕괴와 추락을 재촉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 방지를 위해 애써야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북한동포들의 고생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불가피하며 북한공산체제의 붕괴는 누구도 막을수없는 필연이기 때문이다.붕괴방지의 헛수고보다는 붕괴를 전제로 가능한한 충격파가 작고 희생도 적은 통일이 되도록 하기위한 대비나 착실히 해나가는 것만이 바람직하고 현명한 태도일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 유권자가 나설때(선거풍토 개혁 내 손으로:1)

    ◎「표대가」 기대심리가 타락 부채질/21세기 눈앞… 「큰정치」 씨 뿌려야 제15대 총선이 70일 앞으로 다가왔다.이번 총선은 작게는 정치권의 판도,크게는 국가의 앞날을 좌우할 중대한 정치행사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국내외적인 상황을 고려할때 특히 이번 총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중요하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치도 21세기 선진국진입을 앞두고 큰 전환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과거 우리정치에서 흔히 보아왔던 후진적 선거양태가 재연된다면 정치선진국 진입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유권자들의 「바른 한표」의 행사는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유권자 한사람 한사람의 올바른 투표행태가 진정한 선거혁명의 촉매제구실을 하고 공명선거가 새로운 정치문화를 뿌리내리는 밑거름으로 활용될때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공명선거를 위한 특집을 몇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15대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하는 신한국당 백남치의원(서울 노원갑)은 요즘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이 닳도록 의정보고회에 다닌다.과거에는 대규모의정보고회를 열었으나 지난해 전직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후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다.그래서 이제는 소규모 의정보고회라도 자주 열어 당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갖는다. 야당인 민주당의 강수림의원(서울 성동병)도 예외는 아니다.지난 연말부터 한개 동을 몇 개 지역으로 나눠 의정보고회를 잇따라 열고 있다.또 국민회의 신계륜의원(서울 성북을)도 대학생 중심의 자원봉사대를 결성,비용을 줄이는 선거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금품요구나 향응제공,매표행위 관행은 우리 정치사를 어둡게 만든 고질적인 병폐들이다.그러나 통합선거법의 출현으로 돈안드는 선거를 치를 수 있는 길이 열렸다.실제로 지난 해 6·27 지방선거에서 여야후보자들은 「입은 풀고,돈은 묶는」 통합선거법의 위력을 여실히 체험했다. 오는 4월의 총선에서 여야후보자들은 불과 4년 전과는 달리 돈안드는 선거를 치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 짜내기에 여념이 없다.역대선거 때마다 단골메뉴로 떠올랐던 금품이나 향응제공 등이 최근 눈에 띄게 줄어든게 사실이다.신한국당의 박범진의원(서울 양천갑)은 『국민의식 수준의 향상과 엄격한 통합선거법,그리고 비자금파문 등으로 정치권 전반이 과거와 같은 자금동원은 어려울 것』이라면서 『이제 돈봉투를 돌려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것은 확실히 큰 수확』이라고 달라진 선거분위기를 소개했다. 그러나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청산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지난 해 6·27선거에서 전국에 휘몰아쳤던 「지역할거주의」 바람이 15대 총선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것이란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여야 4당은 그래서 한석이라도 더 얻기 위해 사활을 건 공천싸움에 들어갔다.일부에서는 지역감정을 업고서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기세이다. 부산·경남권을 기반으로 한 신한국당에 맞서 호남의 국민회의,충청권의 자민련,대구·경북의 무소속 분위기 등 여야와 무소속이 지역패권을 위해 또 다시 지역감정에 불을 지피는 셈이다.반지역주의와 「3김구도 타파」를 외치는 통합민주당도 「비호남」「친영남」의 체취가 강해 지역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김호진고려대교수(정치학)는 『지역감정의 뿌리가 워낙 강하지만 15대 총선을 통해 변화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면서 『정치지도자들이 지역구도의 프리미엄을 청산하는 대국적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권자들이 정치적 무관심도 공명선거를 위해 극복해야 할 당면과제 중의 하나로 꼽힌다.지난 연초 한 연구기관이 유권자 1천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지당이 없다』는 무당파층이 모두 49.1%로 가장 많았다.유권자들의 정당불신 및 정치적 무관심의 정도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심한 경우 선거때 후보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투표하기도 한다.지방선거 때는 광역·기초 단체장과 의원 등 모두 4사람에게 투표하면서 누군지도 모르고 한가지 번호에 계속해서 투표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통계도 나왔다. 15대 총선은 역사적인 과거청산작업을 마무리하고,지난 한세기를 정리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이제 성큼 다가왔다.이용필서울대교수(정치학)는 『공명선거 캠페인을 종합관리하는데 있어 이제 소득 1만달러시대에 걸맞게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부단한 계몽과 계도활동을 통해 유권자,특히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타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총선은 또 여야가 바로 97년 대통령선거의 전초전으로 인식,치열한 과열현상이 우려된다.통합선거법상 엄격한 제약으로 돈과 조직을 동원한 공공연한 선거운동은 줄어들 것이다.하지만 민선지방자치단체장과 특정당의 교묘한 협조,예컨대 선거기획 자료제공,정책·예산의 특정당 편중 운용 및 홍보등에 따른 시비와 여야간 치열한 고발 및 성명전,이 과정에서의 흑색비방 등이 예상된다.중앙선관위 임좌순선거관리실장은 『선관위 등 정부당국을 통한 단속 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시민단체 및 후보자 상호 간의 감시·고발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뤄져야만 공명선거가 정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중,홍콩특구주비위 발족/내년 7월 출범 3부기구 구성 준비

    【북경=이석우특파원】 97년 7월1일부로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 출범하는 중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제1기 행정부와 입법기관,사법기구 등의 구성준비 임무를 맡게 될 홍콩특별행정구주비위원회가 26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족됐다. 홍콩측 94명과 중국측 56명 등 모두 1백50명으로 구성된 주비위원회는 이날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교석상무위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제1차 회의를 가진데 이어 27일까지 이틀동안 조별회의에 들어갔다. 중국측 주비위원회 부주임중 한사람인 왕영범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홍콩의 정권 인수인계와 관련한 각종 준비업무를 잘 처리하는 것은 중국과 영국의 공통적인 역사적 책임이자 홍콩의 장기적 번영과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 전제』라고 말했다. 주비위원회의 발족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지 1백55년여만에 중국으로 반환돼 특별행정구로서 새로 탄생하기 위한 끝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과 이른바 일국양제(1개 국가,2개 체제)의 시행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홍콩 주비위」 임무와 구성/초대 행정장관 뽑을 선거인단 선출/전기침이 주임… 반중세력 완전 배제 26일 북경에서 「홍콩특별행정구 주비위원회」가 정식 발족됨에 따라 홍콩반환이 실질적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으며 중국은 홍콩문제처리에 보다 직접적인 발언권을 행사하게 됐다. 이 주비위원회가 맡을 포괄적 임무는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회복을 준비하는 인수위원회로서 「일국양제(1개국가 2체제)」,「항인항치(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고도의 자치」라는 중국의 대홍콩정책 시행과 홍콩의 번영 및 안정을 위한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다.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홍콩자치정부 및 임시 입법회구성,초대 행정장관 결정을 위한 선거인단 선출등을 맡게된다.또 각종 법률개폐를 비롯,토지·건물 등 각종 재산의 정리도 담당한다.주비위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첫 홍콩자치정부의 초대행정장관을 뽑을 선거인단 4백명을 올해 1·4분기안에 선출하는 일이다.이 선거인단은 곧이어 3·4분기중에 행정장관을 선출하게 될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주요 관리들은 이 행정장관의 제청으로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이와 함께 올해안으로 임시입법회를 구성,내년 7월1일 주권이양과 동시에 홍콩의 기존 입법국(의회)을 해산하고 임시입법회로 대체하게 된다.기존 입법국의 해산과 효력정지 등은 지금도 중·영간의 쟁점사항이며 홍콩인에 대한 자치권 부여라는 측면에서 계속적인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모두 1백50명의 위원으로 발족된 주비위원회의 최고책임자인 주임자리는 전기침 부총리겸 외교부장이 차지했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국무원 홍콩·마카오담당관실 책임자인 노평 등 9명이 부주임을 맡았다. 전원 중국정부에 의해 선임된 이들 주비위위원 가운데는 홍콩내 반중국세력인 민주당계 입법국위원이 완전배제돼 편파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위원회 부주임중 5명은 홍콩시민이며 이가운데 동건화,양진영,나덕승 등은 벌써부터 홍콩특별행정구 최고책임자인 행정장관직을 차지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26일 주비위성립행사는 인민대회당에서 교석 전인대위원장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교석 위원장은 1백50명의 위원들에게 일일이 위원증서를 나누어 주었다.
  • “체첸사태 무력으론 해결못한다”/파벨 펠겐하우어 주장(해외논단)

    ◎체첸인 결사적… 국제 테러 확산을 초래/옐친 평화안 못찾으면 국가위기 봉착 체첸사태는 무력만으로는 종식시킬수 없으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한다고 러시아 시보드냐지의 국방안보담당편집장 파벨 펠겐하우어씨가 최근 그의 칼럼에서 주장했다.그 칼럼을 요약한다. 체첸사태와 관련하여 95년 6월 정전협정이후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시기는 끝이 났다.평화적인 과정은 끝장났고 러시아와 체첸간에 극도의 갈등의 골만 남았다. 체첸사람들은 이제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떠나는 것뿐만아니라 코카서스 전지역에서의 철군을 요구하고 있다.분리주의자 지도자중의 한 사람인 조하르 두다예프는 회견에서 러시아군의 철수없이 전쟁은 결코 끝날 수 없다고 선언해놓고 있다.옐친대통령도 그들이 무조건 무기를 버리고 백기를 들지않으면 「초토화」작전을 계속 수행할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아마 당분간은 조용할지 모른다.체첸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기는 하다.하지만 무력만으로 체첸사태를 종식시킬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난해 6월 부됴노프스크에 대한 체첸반군의 공격이 「평화과정」을 낳긴 했지만 이번 키즐랴르 인질사건은 유례없는 무차별 진압,엄청난 인명손실만을 남겼다.전자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전사들이 참가,체첸에 별다른 피해없이 「승리」를 안겨주었다.후자의 사건에는 체첸의 엘리트 테러리스트들이 참가,목숨까지 잃으며 무차별 진압됐다. 부됴노프스크와 키즐랴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잘하기만 했으면)「피의 전쟁」에 전환점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하지만 양측 모두 이러한 기회를 잃었고 모두 물거품이 됐다.95년 3월과 4월 러시아군이 체첸반군의 진지들을 하나씩 접수하며 성공적으로 공격을 이끌었을때 사회일각에서는 평화협정을 빨리 맺어야 한다는 욕구가 팽배해졌다.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 뿐만아니라 정부 관리들도,심지어 잘 알려진 군장성들도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하고 있었다.95년 5월 아나톨리 쿨리코프 내무장관(당시 내무보안군사령관)은 『진지마다 그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는 『규모있는 체첸의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체첸인들과의 협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많은 러시아관리들도 95년 중반 체첸인들이 군사적 패배를 감수하고 적당한 선에서 독립할 준비가 돼 있다고 믿었다.당시 「매파」들은 크렘린내에서 소수였다.그래서 부됴노프스크대치는 평화협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례로 판단됐다.반군측도 상처만 깊어가는 오랜 적대관계의 청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양측 모두 결코 적대관계를 영원히 청산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러시아군의 무차별진압이 있긴 했지만 반군 역시 그동안의 휴전상태를 비인간적인 테러를 감행하는 준비기간으로 이용했다.지난해 12월 체첸인들은 체첸공화국 제2의 도시인 구데르메스를 포위공격하다 러시아군에게 패퇴했다.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다. 체첸반군들은 지난해처럼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이끌 처지는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테러리즘으로 전환했고 터기에서의 유람선인질사건처럼 국제테러리즘의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러시아 당국은 오랫동안 체첸에서 외국의용병들이 두다예프 특수군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해왔다.현재 연방보안국(KGB후신)측은 페르보마이스카야에서 전투하는 동안 외국군인들이 포로로 잡혔다고 주장하고 있다.혹시 사실일지라도 외국군이 체첸테러리즘을 지원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지난 15일 반군측은 트라브존에서 러시아인들이 탄 유람선을 납치했다.이 사건은 터키가 체첸 테러리스트들의 거점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준 사건이다.터키는 세계적인 경찰력과 엄격한 반테러법이 확립돼 있는 나라다.몇명의 무장테러리스트들이 수백명이 탄 유람선을 납치하도록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적어도 지방관리들이 흘려주는 정보없이는 말이다. 체첸군은 주변 회교국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무모한 사건을 벌일 가능성도 높다.러시아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국가적인 위기가 아닐수 없다.옐친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을 계속할수 있는 기회가 있다.단 테러리즘의 확산에 대처하고 체첸사태를 어디까지나 인내심을 갖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한다.이에 앞서 선행될 것이 있다.얼마나 많은 인질들이 체첸반군에 잡혀있었나.러시아군은 정확히 몇명의 인질을 석방시켰나.이번 내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쳤는가.러시아군의 손실은? 얼마나 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누구였나.러시아와 체첸반군은 각각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이러한 질문에 정부당국의 성실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기구한 삶 오학증씨(압록강 2천리:21)

    ◎북한으로 피신… 강제송환돼 감옥생활 11년/79년 출옥후 개가한 아내 수소문해 재결합/독립군 출신 부친도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요령성 단동시 조선족소학교 아파트에서 신경질환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오학증(64)선생은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다.그 격변의 대륙에서 조선족 누구인들 정치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모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만,그의 인생역정은 남달리 불행했다.그의 일생은 대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극의 드라마 그것이었다. 『제 아내와는 두 번을 장가 든 셈이디요.그래서리 아이들도 제대로 못 키우고….이자 나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없도록 평안한 세상이 돼야 합네다.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다가 악몽이야요』 한 아내에게 두 번을 장가갔다는 말이 의아스러웠다.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는데,자신이 반우파로 몰려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내가 살길이 없어서 한족 홀아비한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가 1979년 1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남이 되어 있었다.개가한 아내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한족영감에게 애걸복걸했다.그렇게 찾아온 아내다.그는 우파누명이 벗겨져 본래의 자리인 소학교로 돌아와 정년을 넘기고 지금은 학교가 내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살고 있다. 그는 요령성 환인현 사전자 태생이다.부친은 평북 구성 사람인 오성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0년대 독립군 해산과 더불어 관전현 보달원에서 교편을 잡았다.해방이 되자 부친은 교장 자격으로 손수 학교를 꾸리면서 일본 메이지대 출신 전봉천을 초빙해와 같이 일했다.그무렵 팔로군이 보달원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나서 이내 미국식 현대무장을 갖춘 국민당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부친이 교사로 초빙한 전봉천은 국민당 편에 서서 한국교민회를 조직했다. 『제 부친께서는 장래의 시국을 예견하신 것 같았습네다.국민당에 붙어서 보달원에 출장온 전봉천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디요.이 사람아 자중하게.국민당이 기세당당하게 왔디만 조만간 팔로군이 또 올 것이라고….아니나 다를까 1947년이 되면서 국민당이 꺾이고서리 농촌 전체가 공산당 일색이 되고 토지개혁을 착수했디요.나도 당시 아동단에 참가하지 않았겠습네까.팔에 빨간천을 두르고 목창 개지고 보초도 서고…』 ○통화사범학교 진학 오씨네 일가의 비극은 이 때에 닥쳐왔다.공산당은 국민당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친의 독립군 경력과 반동 전봉천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다.『아무개가 반동이다.죽이는 것을 동의하는?』라고 물으면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슬 시퍼런 시대였다.부친은 공산당에 체포되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마을사람 김희묵은 빈농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었다.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온 통에 그를 부농으로 착각한 공산당이 조리질을 돌려 죽여버렸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오학증선생의 어린시절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중학교 입학자격마저 잃었다.철저하게 계급을 따진 공산주의사회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빈농의 자식들 위주로 신입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러니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공산당도 할 수 없이 중학교 시험제를 채택하게 되어 어린 오학증에게도 중학입학의 길이 열렸다.밭에서 가을일을 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러 홍광중학에 들어갔다.한국전쟁이 터져 거의가 지원군으로 나갔지만 나이가 어려 면제를 받고 통화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 졸업이후 첫 부임지는 지금의 단동인 안동시 북광소학교.학교 당조직에서 자신이 중점 육성대상자가 될만큼 열심히 일했다.그러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교육정책을 바꾸어 한족과 조선족의 연합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육의 질이 형편없게 떨어졌다.곧은 성질을 가진 오학증선생은 이를 시정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그 건의가 화근이 되어 우파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 부친의 청산을 암암리에 보복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모략까지 따라 붙었다. ○당국에서 이혼 강요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형벌은 혹사를 통해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노동개조.월급은 취소되고 하루 1원57전을 받는 건축공사장에 끌려다녔다.1957년 1월에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다섯달이 안되어서 일이다.비단공장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아내의 일자리도 취소되고 말았다.죽지못해 살기를 4년여 성상,1961년 우파 너울이 벗겨져 교사로 다시 복직되었다.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고 1966년 문화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그해가 중반에 접어든 6월22일 출근길에 자신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보았다.그러지 않아도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터라 병원진단서를 붙이고 학교를 쉬었다.그런 어느날 학교에 들어온 군대표로부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음날 학교에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아무래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날 관전현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북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도망친 것을 눈치챈 학교는 이를 당국에 고발했다.곧 북한당국에 연락되어 1주일간 신의주에서 구류를 살았다.그리고나서 중국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15년형을 받았다. 『아내가 감옥으로 면회를 왔습데다.아들 둘 하고 세 돌이 난 딸애를 업고 왔디요.철딱서니없는 어린 딸이 제가 먹던 싸구려 과자를 쥐고 쇠창살 사이로 넣어주는데 고만 눈물이 쏟아집데다.두번째 면회때는 아내가 혼자와서 이혼을 제기하길래 거절했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애들의 앞날을 봐서리 이혼해달라는 것이었디요.그후에 감옥소 소장이 저를 대신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강제 이혼하고 말았수다』 아내 김성란(61)씨도 평북 벽동 사람이다.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에서 귀신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터라 도리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아이가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따돌리고 당국에서도 이혼을 강요해 별 도리가 없었다.막상 이혼을 하고 났더니 문화혁명 이후의 관행대로 산골로 내몰았다. 열세살과 일곱살짜리 아들.세살짜리 딸과 함께 내팽개쳐진 곳은 한족들만이 우글거리는 봉성현 백기공사산하 지리대대.살길이 아득했다. 그의 아내는 고생으로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남편옆에 앉아 훌쩍훌쩍 울기를 여러차례하고 나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그 표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신경질환으로 고생 『제가 못된 여편네디요.아이들 하고 죽지 못해 한 일이디만….기래도 두 해를 버티다 한족 홀애비 백국영을 만나 재혼했습네다.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참씩 울다가는 한족 영감옆에 누어잤디요.그런데 11년만에 무죄석방된 저 양반이 그 산골을 찾아왔디 뭡네까.저는 간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터디였디요.저 양반이 하루를 살더라도 복혼하자고 그럽데다.저도 한 마음이었수다.한족 영감도 인생들이 가여웠던지 저를 놔 주었디요』 그들이 재결합한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이산부부의 후유증은 아물지 않아 자신은 신경질환을 앓고 큰아들은 뇌종양으로 병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대륙의 몇차례 큰 바람은 이들 가족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 문학의 해,무얼할까/임영숙문화부장(서울논단)

    독특한 문체로 문인사회에서 존경받는 드문 작가중 한 사람인 소설가 ㅇ씨는 유별난 글쓰기 습관을 갖고 있다.초고를 워드프로세서로 먼저 쓴 다음,원고지에 그 초고를 다시 옮겨 적으면서 손질하는 것이다.워드프로세서(컴퓨터)로 원고를 작성하면 파지가 줄어들고 쉽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글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중진 작가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원고지에 초고를 작성한 다음 컴퓨터로 정서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데 ㅇ씨의 글쓰기 방식에 처음엔 놀라다가 곧 수긍한다. 그러나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백남준씨는 20여년전 이렇게 선언했다.『모든 종이는 죽었다.클리넥스를 제외하고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화두를 빌린 이 선언은 파피루스 이후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이의 효용성을 화장지로만 국한시킴으로써 기존의 문명체계를 전면 부정한 것이다. 그의 「예언」은 이제 현실화하고 있다.문화의 주축이었던 인쇄매체는 영상매체에 밀리는 형편이다.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컴퓨터의 황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종이 추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인쇄매체 시대 문화의 꽃이자 우리 문화의 중심장르였던 문학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대한출판문화협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한햇동안 문학도서의 출판종수가 21.1%나 감소(전체평균 감소율은 7.2%)했다.작가 ㅇ씨가 원고지를 고수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문학의 진정성도 소비사회의 상업주의 물결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7일 「문학의 해」 선포식이 열린다.「미술의 해」「춤의 해」「국악의 해」등 기왕의 다른 예술의 해가 그랬듯이 「문학의 해」로 정해진 올 한해도 각종 관련 행사가 펼쳐질 것이다.「문학의 해」조직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미 ▲우리 문학의 세계화 ▲문학창작의 활성화 ▲지역문학의 활성화등 3가지 기본방향을 내세운 거창한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위기의 문학을 살려내는데 「문학의 해」행사들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행사만으로 문학을 살려낼 수는 없다.작가와 독자의 개인적 소통을 바탕으로 하는문학의 특성때문이다. 「문학의 해」조직위가 내세운 우리 문학의 세계화나 창작의 활성화 작업도 중요하지만 문학작품을 읽는 분위기 조성이 더 시급한 일인듯 싶다.따라서 문학교육,더 나아가 전반적인 교육제도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시가 교과서에 실린 한 시인은 그 시에 대한 시험문제를 자신도 풀 수 없더라고 말하며 웃었다.좋은 시를 읽히고 외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문학교육일 터인데 우리 문학교육은 시인도 이해할 수 없게 시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식이다. 또한 우리 교육제도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문학작품을 접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중·고교생의 문학독서는 공부에 방해되는 것으로 이해될뿐이다.대학입시에 논술시험이 채택된 이후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시험에 대비한 다이제스트 문학교재들이 오히려 문학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육제도 탓에 아동문학은 있어도 청소년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아동문학에서 성인문학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없는 상황에서상업주의와 결탁한 중간문학에 순수문학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가져온 한국적인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한편 전세계적인 문명변화의 흐름을 읽고 그에 대처하는 지혜를 모으는 일이 올 「문학의 해」가 이루어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사족같지만 예술의 해 사무국 설립을 제안한다.91년 「연극·영화의 해」로 시작한 문화체육부 지정 예술의 해를 올해로 여섯번째 맞이하는데 아직도 기념사업의 내용 결정과 사업추진이 주먹구구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문화행정 전문가들로 구성된 상설 사무국이 있다면 보다 효율적으로 예술의 해를 진행시킬수 있을 것이고 해마다 되풀이되다시피 하는 각 분야의 파벌싸움도 줄일수 있을 것이다.
  • 노씨,일부대목선 큰 소리로 부인/비자금 2차공판 이모저모

    ◎재판장­변호인 노씨 호칭싸고 신경전/이건희회장 가훈 내세우며 뇌물 부인 15일 열린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 관련피고인 15명에 대한 2차 공판은 노씨측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포기함에 따라 느슨한 분위기속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반대신문에 이은 검찰측 보충신문 과정에서 노씨가 신문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활기를 띠기도 했다. 법무부 지침에 따라 올해부터 재소자들에게 새로 지급된 청회색 상하의 수의 차림으로 법정에 나온 노씨는 지난달 18일 1차 공판 때처럼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이날 공판은 1차 공판 때 검찰의 직접신문 내용에 대한 재판부의 확인절차에 이어 변호인측 반대신문,검찰측 보충신문의 순으로 하오 7시30분까지 계속됐다. ○…이날 상오 10시 재판장이 「피고인 노태우」를 호명하자 노씨가 피고인출입구를 통해 나타난 데 이어 나머지 피고인 14명이 1차 공판때와 같은 순서로 입정. 이날 공판의 하이라이트로 주목받았던 노씨에 대한 반대신문은 변호인인 김유후변호사가 「반대신문을 하지 않는 사유」라는 유인물을 낭독하는 것으로 대체,취재진과 방청객들의 「기대」를 빗나가게 했다. 그러나 재벌총수측은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기업의 위치와 역할,기업의 이미지 실추와 해외공사수주 등에서의 불이익,3공 때부터 내려온 상납관행 등을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자기변호에 나섰다. 이건희삼성회장은 가훈까지 소개하며 특혜를 위해 뇌물을 상납하지 않았다고 강변한 뒤 상용차진출과 차세대전투기 기종변경 때문에 재산상의 피해만 입었다고 검찰의 공소사실을 강력 부인. 김우중대우그룹회장은 『어려운 기업여건을 해외시장개척을 통해 이겨낸 불굴의 경영정신』을,최원석동아그룹회장은 리비아대수로공사 등 해외대형공사수주에 이 사건 기소가 끼친 악영향을 거론하며 변론을 전개. ○…이날 공판에서는 노씨의 호칭을 둘러싸고 재판장과 변호인이 한때 날카로운 신경전. 재판장인 김영일부장판사가 이날 공판에 앞서 피고인을 부를 때 별도의 호칭을 삼가도록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노씨및 이현우전경호실장의 변호를 맡은 김유후변호사가이피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노태우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빈번히 사용한 것. 김부장판사는 이에 『호칭도 재판진행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1차공판 때부터 여러차례 지적한 주의사항을 계속 어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책. 잠시 주춤하는 듯하던 김변호사는 그러나 「노대통령께서」 「노대통령께」 등의 표현을 다시 사용해 두번째 지적을 받았다. 김변호사가 태도를 바꾸지 않고 「노태우대통령」으로 호칭하며 이피고인에 대한 변론이라기보다는 노씨의 치적을 내세우는 듯한 신문을 계속하자 재판장은 이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제일 마지막으로 돌리고 다음 차례인 금진호피고인을 호명. 그러나 김변호사는 이태진전경호실경리과장에 대한 반대신문 도중 『대통령으로 직접 곁에서 모셨던 분에게 피고인이라는 호칭을 쓰기 어려운 점을 이해해 달라』고 다시 도전장을 던졌다. 이에 김부장판사가 『이곳은 법정이니 원칙을 따르라』고 충고하자 김변호사는 직접 노씨의 의향을 타진하기에 이르렀으나 노씨는 『그렇게(피고인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대답,법정이 웃음바다로 변하는 해프닝을 연출. 이후 김변호사는 꼬박꼬박 「노태우피고인」이라는 호칭을 사용. ○…노씨는 이날 하오 검찰의 보충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대목에서는 큰 소리로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때로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일관하던 1차공판때와는 크게 대조. 노씨는 특히 홍만표검사가 동아그룹 최원석회장에 대한 보충신문에서 대통령의 공사수주 내락을 받은 업체는 속칭 「신랑」으로 불리고 나머지는 「들러리」로 불리는 관행 등을 묻자 갑자기 왼손을 번쩍 치켜들어 진술을 자청. 김영일부장판사가 검찰신문을 그대로 진행시키자 조바심이 난 듯 세번씩이나 계속 손을 치켜들어 반론기회를 얻은 노씨는 『대통령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사람인 이상 관심은 가질 수 있지만 전적인 결정은 발주처에서 하는 것』이라고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
  • 박통산과 장미희/임태순경제부기자(오늘의 눈)

    박재윤통상산업부장관이 지난 3일 시무식에서 『이번 달 부내 연찬회에 인기여배우 장미희씨를 강사로 초빙해 영화감상법에 대한 강연을 듣겠다』고 말한 것이 과천청사 주변에 화제가 되고 있다.이 얘기를 전해 들은 경제부처의 공무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서울대교수 출신에 청와대경제수석을 지낸 박장관과 지난 80년대 애정물에 자주 등장한 여우 트로이카 중의 한사람인 장미희씨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그가 강연할 영화감상법과 경기의 연착륙이나 수출 또는 중소기업지원 강화 사이에 연관성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박장관은 이에 대해 『수출 1천억달러 시대에는 사고와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우리문화가 살아 숨쉬는」「우리만의 기술이 담겨진」 상품이 아니고서는 더이상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없다고 덧붙였다.그는 변화를 가로막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도록 하기 위해 「장미희씨 초빙강연」이라는 파격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박장관은 하루에 4시간정도 잔다.일과가 끝난뒤 외부 행사에 참석하고 집에돌아가면 서류가방 2개가 기다린다.새벽 1시30분,2시까지 결제서류에 매달리다 잠이 든뒤 새벽 5시30분 또는 6시에 일어난다. 일도 열심히 하고 청와대의 신임도 높지만 통산부 내부에서는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직원들이 마음껏 일할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기 보다는 강의실의 교수와 학생처럼 모든 것을 손에 틀어쥐고 챙기는 업무스타일 때문일 것이다.장관의 결제가 끝난 서류에는 보완사항을 적은 메모쪽지가 붙어 되돌아 오고 이행사항을 일일이 점검하는 것이 박장관이다.장관 스스로 북치고 장구치고 강가까지 말을 끌고 가 물을 먹이는 것이다.이같은 그의 업무처리 스타일은 청와대 경제수석때도 그랬고,일을 확실히 처리하는 대신 조직의 활력을 죽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정부와 민간경제의 관계도 박장관과 통산부직원의 관계와 비슷했다. 통산부의 1월 연찬회는 신년사 식장에서의 반향으로 보아 근래 보기 드문 성황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박장관의 교수법이 새해를 맞아 자율적인 참여와 창의로 전환하는 징조로 보인다.그것이 우리 정부 전체의 의식전환을 예고하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싶다.
  • 전씨 돈/수도권부동산 유입 확인/검찰/친인척 등기부등본 정밀검토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검사)는 25일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중 상당액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9 대지와 연립주택등 서울 강남 및 수도권일대 부동산에 집중유입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이날까지 전씨의 처남 이창석씨를 비롯,동서 홍순두씨,전씨의 사돈 윤광순 전대한투자신탁사장,이희상 한국제분사장 등을 비밀리에 소환조사한 결과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특히 서초구 방배동 부동산의 실소유주가 전씨의 친인척중 한 사람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법원측에 협조를 요청,이날 이 부동산의 등기부 등본등 관련서류를 넘겨받아 정밀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그러나 전씨의 계좌추적등과 관련,『계좌 추적작업에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걸려 비자금 수사발표는 내년 1월쯤 이뤄질것』이라고 말해 올연말 예상됐던 비자금 추가기소는 내년 1월 5·18사건 기소와 일괄처리될 전망이다. 최검사장은 이와함께 『비자금 수사는 본인을 상대로 하는것이 원칙인 만큼 친·인척 수사는 필요한 범위내에서 최소한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번 주초까지 친·인척에 대한 소환조사를 추가로 벌여 전씨가 퇴임한 뒤 보유하고 있던 자금을 실명전환하거나 이 자금으로 부동산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명의를 빌려주었는지 여부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최검사장은 비자금규모와 관련,『전씨와 노씨의 경우는 재임당시 기업의 재정상태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자금 규모에서도 비교하기 힘들다』고 말해 검찰이 확인한 전씨 비자금 규모가 노씨의 경우보다 많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검찰은 개인비리 혐의가 있는 전씨 측근 4∼5명도 1월중 일괄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 「벼농사의 대부」 황용세(압록강 2천리:17)

    ◎황무지 수십만평 논으로 개간/중국 장작림 군벌 정부의 수리국장 설득/수로공사 지원받아 혼하물길 끌어들여/장작림 위기때 군량미 500가마 보내 보답 「만주땅 넓은 들에/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우리 가는 곳에 벼가 있고/벼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호미 바가지 더 있는가/호미로 파고 바가지로 담아/만주벌 거친 땅에 볍씨 뿌려/우리네 살림 이룩해 보세」 중국 조선족에게 유전되던 1920년대 민요다.이 노랫말처럼 중국 동북땅 어디를 가나 논이 있는 마을을 들어서면 조선족이 살았다.그러니까 중국의 동북지역인 만주의 벼농사 효시는 조선족인 것이다.방죽 만들어놓으면 물고기 생긴다고 물이 있는 황무지에는 으레 조선족이 몰려들어 벼농사를 지었다. 압록강유역의 벼농사도 역사가 꽤 오래되어 거의 한 세기에 이르고 있다.18 95년 요령성 집안 팔왕조촌에서 처음 시작했다.이어 무순일대에서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포가둔에 자리잡은 송병주·김만리가 처음 논에 볍씨를 뿌렸다.19 06년에는 평안북도 벽동사람인 김시정이 시작한 이래 19 23년에는 심양일대로 벼농사가 번져 5천ha의 개간답에서 해마다 15만섬의 벼를 거두었다. ○연간 순수익 6∼7만원 오늘날 요령성에서도 벼농사 하면 조선족이 꼽힌다.요령성 안산시의 삼대자조선족진 형양기조선족진에 사는 박행관(37)씨는 소문난 벼농사꾼이다.자그마치 5백무(약 1만5천평)나 되는 논을 빌려 광작을 하고 있는 그는 요령성의 우수한 청년농민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해마다 비료값과 품삯이 뛰어오르고 국가의 수매가격이 보잘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연간 6만∼7만원의 순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령성의 조선족 농촌을 도는 동안 새로운 인물 한분을 주목하게 되었다.벼농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황용세라는 인물이다.해방 이태전에 작고했는데,그의 아들인 수복(수복·63)노인이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의 영수촌에 살고 있다.수복노인은 황용세의 넷째아들이다.맏이와 둘째는 중국에 살다가 고인이 되었고 서울에 살던 셋째는 영수촌을 다녀간 이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수복노인은 유일하게 남은 황용세의 아들인 셈이다.영수촌에서 처음 만난 수복노인은 거두절미하고 아버지 황용세의 마지막 죽음부터 장황하게 털어놓았다.아버지의 죽음이 원통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전자마을에 수레거(차)자를 쓰는 차씨네가 살았다.그런데 논물을 가지고서리 우리집과 그집이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네다.마침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일군 헌병대에 근무하는 차씨네 아들이 있어서리 우리를 걸고 넘어졌습네다.우리 아버지가 팔로군이었다는 것이었디요.그래서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가 숱한 매를 맞고 석달만에 나왔디만 곧 돌아가셨지 뭡네까.차씨네는 광복이 나자 한국으로 들어갔디요.헌병대에 있던 아들은 한국에서 장관을 지냈다고 기래요』 황용세는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다.1990년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한일합병 이듬해 부친을 따라 요령성 홍경헌 홍묘자로 이주했다.이후 봉천(오늘의 심양)교외로 이사했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아주 눌러앉은 지역이 조화향 영수촌.개간할 황무지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주위 늪지대 물을 끌어올릴 재간은 없었다.그래서 수십리 밖 훈하(혼하)의 물을 끌어오기로 결심했다.그러나 수로를 내는 데 필요한 자금은 막상 한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중국 동북지방을 장악한 봉천의 군벌인 장작림(18 73∼1928년)정부 수리국에 「수전개발에 관한 청구서」를 냈다.수리국장은 성공이 불투명한지라 깔아뭉갰다.황용세는 수리국장을 직접 찾아나섰다.보잘 것 없는 조선족 농사꾼을 만나줄 리 만무했다.황용세는 생각다 못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집에서 나서는 수리국장의 출근길을 네활개를 펴고 누워서 막았다. ○수리국장 출근길 막아 그의 생떼질은 주효했다.수리국장은 황용세를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준 것이다.수전개발의 타당성을 인정한 수리국장은 그 자리에서 서류를 작성했다.자금은 수리국에서 대고 공사를 실패할 경우 황용세가 죽음까지도 감수한다는 서약서를 붙였다.공사를 착공했을 때 한족지주들이 봇도랑을 낼 땅을 내주지 않는등 방해했으나 장작림 군벌정부에서 군대를 풀어 결국 완공했다.깊이 2m,너비 10m의 봇도랑으로 물이 흘러들어 영수촌일대 황무지는 옥토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24년 북경의 군벌 오패부(오패부·1872∼1939년)가 3개군단을 풀어 장작림을 치는 사건이 일어났다.황용세는 조선족이 만주에서 살려면 장작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량미 5백가마를 장작림군벌에 보냈다.중국인 지주와 자본가가 두 군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여서 황용세의 군량미 기부는 장작림의 환심을 샀다.감동한 장작림은 『그 고려인 대표를 만나야겠다』고 해서 황용세를 불러들였다. 황용세는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차림으로 장작림을 만났다.훤칠한 체구의 황용세는 당당했다.그가 황씨라는 것과 요령성 홍경현 산골에 살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장작림은 더욱 감격하고 말았다.왜냐하면 장작림이 비적 두목시절 다른 패거리에 쫓겨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밭에서 들일을 하던 황용세 부자가 감춰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이후 중국 동북3성 도독이 된 장작림은 홍경현을 참빗질하듯 황씨 부자를 찾았지만 찾아내지 못했다.그런 판에 황용세를 만났으니 장작림의 기쁨이 컸다. 장작림은 황용세에게 소원을 물었다.황용세는 의형제를 맺는 것이라고 했더니 장작림은 껄껄 웃었다. 『내,자네 나이 보다 열여덟이 많으니 아버지뻘이 아니겠는가.내 큰아들 학량과 의형제를 맺도록 하세』 장작림이 아들 학량과 황용세의 결의형제의식은 대단했다.당시 「성경일보」도 이를 크게 실었다.황용세의 세력도 막강해져 동북3성 실력자가 되었다.1928년 장작림이 일본군 소행으로 폭사하고 나서 학량이 동북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그리고 1936년 장개석을 서안에서 감금하는 서안사변을 일으킨 학량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붙잡혔다.그런 와중에 몰락한 황용세는 친일파 차씨네와의 불화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새옹지마라고나 할까.황용세의 몰락은 공산당이 심양을 해방한 1948년 이전에 가문을 알거지로 만들었다.그래서 성분을 해방전 3년까지 본다는 공산당도 황용세의 아들들을 빈농으로 분류했다.
  • 조선 백자발 4점 국보 지정/12세기초 청자 등 7점은 보물로

    문화체육부는 5일 조선 전기의 백자대접(4점)인 「백자발」을 국보 제286호로 지정했다. 문체부는 이와 함께 12세기 전반 비색청자의 완성단계에 제작된 병모양 청자인 「청자음각반룡문주자」를 보물 제1228호,15세기 분청사기인 「분청사기조화절지문편병」을 보물 제1229호,연질계통의 조선시대 백자병인 「백자상감연·당초문병」을 보물 제1230호,달항아리로 불리는 조선중기 철화백자항아리 「백자철화운죽문호」를 보물 제1231호로 지정했다. 문체부는 또 사천왕상과 함께 불교의 대표적인 호법선신인 18세기 조각상 「진주청곡사목조제석천·대범천의상」을 보물 제1232호,조선 태종때 양내요동이란 장인이 만든 「현자총통」을 보물 제1233호로 각각 지정하고 여말 삼은중 한 사람인 목은 이색(1308∼1396)의 영정은 보물 제1215호로 추가지정했다.
  • 특별법 “공감”…특검제 “이견”/국회 본회의 긴급 현안질의·답변

    ◎국회 청문회·국정조사 요구­야권/위법문제 우선 해결이 중요­이 총리 3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는 긴급 현안질문을 통해 5·18특별법 제정에 대한 각당의 견해를 밝히고 정부의 방침을 물었다.강신옥(민자)·안동선(국민회의)·장기욱(민주)·김동길(자민련)의원 등 여야 4당의 대표질문자로 나선 의원들은 특별법의 당위성에는 모두 공감하면서도 특별검사제 도입과 대선자금문제등의 쟁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김동길 의원(자민련)◁ 최근의 12·12나 5·18,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파문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자세를 보면 마치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앞서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김대통령은 3당통합을 했기에 대통령이 되지 않았는가.호랑이 잡기 위해 들어갔다고 하는데 들어가서(통합해서) 정말 호랑이 잡으러 왔다고 했다면 민정계가 그를 도와주었겠는가.도와달라고 했으니 도와준 것 아니냐.이제와서 그들을 칠 수 있는가. ▷안동선 의원(국민회의)◁ 김대통령이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것은 비자금정국에서 탈출하려는 「깜짝쇼」가 아닌가.12·12와 5·18주범들에게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린 검찰이 어떻게 동일인들을 동일한 사실로 기소할 수 있는가.검찰이 재수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검찰이 독립성을 유지하기 힘든 최고권력층 비리나 헌정파괴,집단학살 등의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 노태우씨의 비자금은 국회청문회와 국정조사권,특별검사제를 도입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 ▷장기욱 의원(민주당)◁ 새로운 질서는 잘못된 과거를 완전히 파기할 때 만이 창조될 수 있다.일부 5·6공 세력들이 보수를 자임하면서 마치 5·18특별법 제정을 우익대 좌익의 대결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탄압하던 과거 독재정권들의 못된 버릇을 못버린 것이다. 김대통령은 모든 것을 정치로 풀지 않고 검찰로 풀려고 한다.정치검찰에 의한 검찰정치가 계속되는 것이다. ▷강신옥 의원(민자당)◁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12·12 불기소처분 이유는 수단이 부정해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늦은 감이 있지만 5·18특별법을 제정하려는 김대통령의 용단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일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사전 유출돼 헌재의 권위와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진상과 대책을 밝혀달라.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볼 때 5·18에 대해 공소권없음 결정을 한 검찰이 다시 수사를 맡을 수는 없다고 보는데 법무부장관의 견해는.아울러 불기소결정을 한 검찰관계자들을 문책할 용의는. ▷이홍구 국무총리◁ 대통령의 5·18특별법 제정지시는 관련 당사자들을 의법처리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서 결코 사과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지금 우선 중요한 것은 입법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특별검사제 도입등 법집행을 둘러싼 방법문제가 아니다.법체계가 다른 미국의 특검제를 무조건 도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그러나 법제정 과정에서 논의된다면 3권분립의 토대 위에서 논의가 진행돼야 할 것이다. 이번 특별법 제정은 특정 정치세력이 아닌 사건 관련 당사자를 법적 처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지난 40여년 헌정사에서 자주 정치가 법보다 우위에 섰다.따라서 오늘의 과제는 어떻게 법에 입각한 정치를 만드느냐에 있다.비자금정국과 특별법정국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법에 따라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처리하겠다.특별법이 제정되면 시행에 필요한 후속조치를 마련하는데 만전을 기하겠다. 검찰이 노태우씨 비자금의 사용처를 철저히 조사하고 있으므로 여권의 대선자금 부분도 밝혀질 것이다.청문회개최와 국정조사권 발동 등에 대해서도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조사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를 거둔 검찰 책임자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문책할 수는 없다. ◎허화평 의원 본회의 발언 안팎/“「민주」 위장 좌파,군·보수세력 공격”/“보수우익 국민이 최후심판 내릴것” 주장/구시대 청산 국민여망·당론 정면 도전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잇따라 고함이 터지는등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다.5공「신군부」 핵심중 한사람인 민자당 허화평의원이 신상발언을 통해 5·18특별법제정에 정치적 좌파의음모가 개재된양 꼬집는 「망언」에 가까운 소신피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허의원은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인 헌법재판소가 이른바 민주투사들에 의하여 조종을 울리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로 시작되는 두쪽짜리 유인물을 비장한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구시대의 청산을 갈망하는 국민의 여망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당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내용이었다.야당의석은 물론 민자당의석에서도 그의 4분간 신상발언 도중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허의원은 『역사에 있어 책임은 일방적일 수 없고 같은 시대,같은 무대에서 서로 다투었던 세력들에겐 책임이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다』며 『80년 당시 민주화세력들이 분열하지 않고 과격한 민중전술을 동원하지 않았던들,5공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서두를 꺼냈다.그러자 이때부터 국민회의 의석쪽에서 『무슨 말이야』라는 고함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의원은 목청을 높여 『민주화투쟁 그것만으로 모든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민주라는 미명하에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된 점 역시 허다했다』고 주장하면서 『진실규명이 문제라면 여소야대 정국하에서 1노3김에 의한 5공청산이 있었고,12·12에 관한 국정조사와 12·12와 5·18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있었다』고 강변했다. 다시 의석에서 『먼저 반성해야지』(국민회의 김영진 의원),『어렵다』(민자당 변정일 의원),『무슨 소리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허의원은 특히 정치권의 5·18특별법 제정 추진에 대해 『나라 요소요소에 자리하고 있는 좌파들이 이른바 민주세력·양심세력·진보세력·통일세력으로 위장하면서 12·12와 5·18을 투쟁의 고리로 삼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계기로 군을 무력화시키고 보수우익세력에게 일대 타격을 가해 국면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극적 분석」을 해 여야의원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허의원은 『작금의 현실은 국민의 다수인 보수우익이 침묵하는 가운데 좌파가 주도하는 소수세력이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듯 소란하고,일부 전파매체들은 당대의 역사를 정치드라마 형식으로 왜곡 날조해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고 최근 시청률을 높이고 있는 「제4공화국」「코리아게이트」등 TV드라마를 겨냥하기도 했다. 허의원은 또 『4·19직후 민주당이,또 5·16군사정부가 소급입법을 했으나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정치발전이 있었느냐』고 반문한 뒤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보면서 좌우투쟁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고 「엄포성」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수백명을 죽이고도 뻔뻔스럽다』(국민회의 김옥두 의원),『내버려 둬』(민주당 장기욱 의원)등의 고성이 의사당을 다시 어지럽혔다. ○…허의원은 야유에 개의치 않고 비감한 어조로 『나는 정치보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진실은 영원하고 최후심판은 국민의 다수인 보수우익이 내려줄 것』이라고 끝을 맺었다.그의 발언에 대해 민자당 강삼재사무총장은 『이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느냐』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그러나 현재로선 당차원의 대책은 세우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 「문화개방」 일 태도에 달렸다/강석진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가운데 한사람인 가메이 시즈카(구정정향) 전운수상이 22일 당본부 강연에서 『한국에서는 일본의 노래나 연극·영화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면서 『일본문화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해 놓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어떻게 일본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한국의 문화정책을 비판했다. 과연 한국은 일본 문화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가.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일본문화가 많이 들어와 있고 자유롭게 흘러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또 일본 노래와 영화가 들어온다고 한국인의 대일본관이 크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일본에 오래 거주해 일본 대중문화에 접한 한국인들도 국내거주 한국인과 대일본관은 거의 차이가 없다. 서울의 대형서점에서는 일본 서적과 잡지들이 자유롭게 팔리고 있다.전세계에서 한국만큼 일본 신문을 그날그날 대량으로 공수해다가 보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위성방송도 안방까지 자유롭게 들어와 있다.방송을 통해 영화도 노래도 다 듣고 보고 있다.한국인들 가운데 일본 가요를 부를 줄 아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주한일본인 유학생은 2백80여명(94교육통계연보)밖에 안되지만 주일한국인 유학생은 1만2천9백65명(94문부성통계)이나 된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국고등학교는 60%를 넘고있지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본고등학교는 전체 5천여교 가운데 42개교(92년 문부성집계)뿐이다.상대방에 대한 국민 전체의 평균적 이해는 한국쪽이 훨씬 앞선 상태는 아닌가라는 것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갖게 되는 느낌이다.오히려 한국은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대중문화의 저질적 요소로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노래·연극·영화등 다중을 상대로 하는 일부 공연문화의 공연행위만 제한되고 있다.「문화개방」이 아니라 일부 제한의 마지막 철폐가 남았을 뿐이다.왜 그런 제한이 가해졌는가.일본이 한국인을 동화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었고 망언등으로 제한의 완화가 방해받고 있기 때문이다.마지막 빗장을 푸는 것은 한국이 주체적으로 하겠지만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고,합당한 과거청산을 서두르고,망언을 하지 않는 것이 대일본관을 호전시키고 문화유입을 완전자유화하는 첩경일 것이다.
  • 우리 기업은 이런 인재를 원합니다

    ◎삼성 박영준 이사/「열린 마음·열린 머리」 갖춘 「열린 사람」 21세기 경쟁의 시대에 「인류와 사회에 공헌하는 세계속의 초일류기업」을 지향하는 삼성은 모든 규제와 장벽이 없어지는 무한경쟁시대에 대비,학력과 성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열린 채용을 실현함으로써 열린 사회를 열어가고자 한다. 열린 시대,열린 사회에서 삼성이 지향하는 인재는 「열린 마음,열린 머리,열린 행동」을 갖춘 「열린 사람」이다.구체적으로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서로간에,고객에게,사회·국가·인류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창조형의 열린 머리를 가진 사람,국제화되고 에티켓을 갖춘 열린 행동을 통해 세계무대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려는 사람이다. ◎현대 홍성원 이사/미래를 예측하고 변화 주도해 나갈자 현대그룹이 희망하는 바람직한 인재상은 첫째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를 주도하며,둘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며,셋째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책임지는 젊은이다. 우리 그룹은 미래사회를 선도할 세계일등기업을 지향하며,사원의 자기실현 지원 등을 경영이념으로 삼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며 세계적인 21세기형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올 하반기부터 필기시험을 폐지하고 종합 인성평가 위주의 서류전형과 다단계 면접 방식을 골자로 한 신채용제도를 실시한다. ◎LG 장재화 상무/우직할 정도로 기본에 충실함이 우선 LG그룹을 21세기 초우량 기업으로 이끌어갈 인재의 기본요건으로는 첫째 기본에 충실한 젊은이다.우직할 정도로 기본에 충실해 그속에서 사물의 본질과 진리를 발견해내는 순수한 젊음이 필요하다.둘째,단순한 지식보다는 지식을 활용하고 응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창의적인 젊은이다.셋째,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젊은이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기의 능력을 높여가는 자기계발 의지를 갖춰야 한다.넷째,세계 최고를 목표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젊은이다. 이밖에도 외국어는 물론,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호기심과 도전의욕을 가지고 세계최고를 목표로 시야의 깊이와 폭을 더해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우 권오택 이사/단순지식 보다 잠재적 능력 더 중요시 대우는 기업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대우의 경영 이념인 「창조·도전·희생」을 실천적으로 구현코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만한 자질을 갖춘 젊은이를 원한다.그래서 단순지식 측정보다 지원자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능력이나 전인적인 면모를 더 중요시한다. 올해는 보다 다각적이고 전인적인 평가가 가능하도록 면접에 있어서는 인성면접을 중요시 할 계획이다.임원 면접,블라인드 인터뷰,그룹 토의 등 다양한 방식을 도입한다. 또 공채시기가 집중되면서 인재가 다른기업으로 분산되는 문제점을 해소하고 해외유학생등 우수인력의 취업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상시 채용제도도 대폭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선경 김대기 이사/패기·경영지식·건강·사교력 겸비해야 선경은 지속적인 기업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인간 위주의 경영,합리적인 경영,현실을 인식한 경영이라는 세가지 경영원칙과 「기업은 국가경영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영구히 존속,발전해가는 유기체」라는 기업관을 갖고 있다. 선경이 원하는 인재는 이런 기업관에 뜻을 같이 하면서 선경인의 자세를 기를 수 있는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선경인의 자세란 모든 선경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격요건으로 패기,경영지식,경영에 부수된 지식,사교자세,가정및 건강관리를 높은 수준으로 함양하는 것을 말한다. 선경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따라서 선경은 인재들이 평생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터가 되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쌍용그룹 박창훈 이사/신뢰·혁신·인화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 학교성적이나 어학성적은 참고로 하고 평소 본인이 활동한 사항중 앞으로 회사의 직무수행과 연관성을 갖는 사항들을 우선하여 평가할 계획이다. 입사희망자의 관심사항이 회사의 업무추진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그리고 쌍용의 경영이념인 신뢰·혁신·인화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볼 생각이다. 지원자 중심의 채용제도를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룹차원에서 홍보와 접수등을 맡아 시행하나 입사지원자가 희망하는 회사별로 응시와 경쟁이 이루어지게 된다.기업의 이익보다 개인의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해주는 쌍용을 선택하여 흔들림 없는 미래를 설계해보기 바란다. ◎포철 김응규 상무/무한경쟁 헤쳐나갈 도전의식 갖춰야 오늘날 급변하는 경영환경은 경영의 패러다임은 물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 즉 바람직한 인간상마저 바꿔놓고 있다.포스코를 세계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갈 인재는 첫째 무한경쟁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도전의식과 창의력을 갖춰야 한다.둘째 자기일에 긍지를 갖고 남과 더불어 일하려는 자세를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대규모 조직의 일원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희생정신을 지닌 인물이 필요하다.셋째 국민기업의 종사자로서 사명의식과 함께 건전한 윤리의식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공기업으로서 이익과 사회공헌을 동시에 추구하는 기업이어서 사명감과 건전한 윤리관은 시대변화에 상관없이 포스코인이 되려면 누구에게나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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