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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관의 ‘기억戰’ … 지킨다 vs 태운다

    도서관의 ‘기억戰’ … 지킨다 vs 태운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 진나라 시황 때 정치 비평을 금하고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생매장했던 사건을 일컫는다.그런데 이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불과 30년 전인 1992년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일어났다. 그해 8월 25일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가·대학 도서관에 포탄이 쏟아졌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도서관의 불을 끄고 책을 구하려는 이들의 노력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 전역에 걸쳐 도서관과 기록관 수십 곳을 파괴했고, 200만권의 인쇄본이 사라졌다. 그들은 왜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시설들을 공격하고 불태웠을까. 세계 최고의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 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 중인 리처드 오벤든은 저서 ‘책을 불태우다’에서 “도서관은 한 사회 지식의 집적체라는 상징성 때문에 숱하게 공격당했다”고 말한다. 이어 “도서관과 기록물을 파괴한다는 것은 특정 문화 말소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문화적 폭력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고대 알렉산드리아부터 현대의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책과 도서관이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 도서관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경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에서 시작됐다. 이후 지식을 수집하고 조직화하는 도서관과 기록관의 사명은 역사를 통해 이어졌다.중세시대에 들어서 도서관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저자가 일하고 있는 보들리 도서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종교혁명 시기에 수많은 수도원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이 신교도들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책과 함께 불태워졌는데, 당시 옥스포드대 도서관도 장서 96.4%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폐허를 딛고 토머스 보들리(1545~1613)는 사재를 털어 도서관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오늘날 도서관 체계의 초석을 마련했다. 근대 이후의 도서관 공격 사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한 사회·국가가 다른 사회·국가를 공격하면서 지식·문화의 집적체인 도서관을 파괴한 사건들이다. 예를 들어 1814년 영국은 미국을 침공하면서 미국 의회도서관을 불태웠고,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벨기에의 루뱅대 도서관을 두 번이나 공격했다. 두 번째는 저작자가 직접 혹은 지인을 통해 자신의 저작물을 없애려 한 사건들이다. 시인 바이런의 사망 이후 바이런의 아내와 친구는 고인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회고록 원고를 불 속에 내던졌고, 시인 필립 라킨의 일기도 사후에 그의 당부를 충실히 수행한 지인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반면 카프카는 자기 친구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지만, 친구가 유언과 반대로 작품을 정리해 발표하면서 사후에 큰 명성을 얻었다. 세 번째는 다른 사회의 도서관 등에 보관돼 있던 기록물을 빼돌리는 행위다. 제국주의 시기에는 식민지에 소장된 숱한 유물과 작품들을 약탈당했는데, 이 기록 문서들은 열강의 기록물로 간주되곤 했다. 이들 기록물은 식민지배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파기되기도 했고, 억압적 정부에 맞서 다른 나라로 ‘피신’되기도 했다. 저자는 수많은 기록과 자료가 디지털 및 온라인상에서 생성되는 디지털 사회에서 ‘사회의 기억’을 담당하는 책과 도서관이 존립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우리의 기억을 올리고 있지만, 거대 사기업의 소유이자 사업 수단인 SNS 플랫폼들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데이터 보존 작업을 함께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후대에 올바른 지식을 알리고 학자들이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디지털·온라인 데이터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도서관과 기록관이 필요한 이유는 교육 지원, 지식과 사상의 다양성, 개방 사회의 원칙, 진실과 거짓의 판단, 문화적·역사적 정체성 확보 등에 있다고 밝힌다. 저자는 지식의 확산을 한 양초가 다른 양초에서 불을 얻어 어둠을 밝히는 일에 비유한 미국 3대 대통령이자 교육자·철학자였던 토머스 제퍼슨의 유명한 편지를 소개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보존하는 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전한다.
  • 제1회 울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하얀 요새’

    제1회 울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하얀 요새’

    이고르 드랴차 감독의 ‘하얀 요새’가 제1회 울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울산시는 1일 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1회 울산국제영화제(청년의 시선, 그리고 그 첫걸음)의 공식 트레일러 영상과 개막작 등을 소개했다. 제1회 울산국제영화제는 오는 17∼21일 울산문화예술회관, 메가박스 울산점, 울산 블루마씨네 자동차극장에서 개최된다. 총 11개 섹션에 82편(20개국)의 작품이 상영된다. 개막작은 이고르 드랴차 감독의 ‘하얀 요새’(The White Fortress)로 선정됐다. 하얀 요새는 지난 3월 열린 제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으로 울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이 영화는 내전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는 사라예보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계층과 환경에서 살아온 소년과 소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준권 울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우리나라와 배경은 다르지만, 양극화 사회 속 분열과 갈등, 가족의 문제, 성차별 등 여러 측면에서 대한민국 사회의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고 개막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영화제 중심 섹션은 울산시가 국내 청년 영화인들을 지원해 완성한 작품 35편을 선보이는 ‘위프 파운데이션’이다. 이와 별도로 ‘위프 프리미어’ 섹션에서는 거장 자크 오디아르의 신작 ‘파리 13구’를 포함한 세계 최신작품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201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디판’을 비롯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이전 우수작들은 ‘자크 오디아르 특별전’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마스터스 뷰’ 섹션에서는 젊고 감각적인 연출로 대한민국 영화계 르네상스를 이끌어온 김지운 감독의 대표작들을 다시 상영한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제 기간 울산을 찾아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할 예정이다. 국내외 장·단편영화, 애니메이션, 울산 시민들이 직접 제작한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작품들도 관객과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 승부의 세계는 냉정… 스포츠도 정치도 이겨야 바뀌더라

    승부의 세계는 냉정… 스포츠도 정치도 이겨야 바뀌더라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전설이 탄생했다. 만 열아홉의 나이로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19전 전승, 대한민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 제패를 이룬 이에리사(67). 라디오로 결승 중계를 들었던 국민들은 서울 광화문으로 뛰쳐나와 스포츠 영웅의 카퍼레이드에 환호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여성 최초 국가대표팀 감독, 2005년 태릉선수촌 개촌 40년 만에 첫 여성 촌장,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첫 여성 선수 출신 국회의원. ‘최초’라는 타이틀과 끝없는 승부를 펼쳐 온 이에리사 전 의원.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이에리사 휴먼스포츠재단에서 만난 이 전 의원은 여전히 인생의 랠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모든 승부는 이겨야 한다는 승부사 이 전 의원이 지켜본 후배들의 도쿄올림픽 관전평도 남달랐다. -사라예보 우승 당시 광화문 카퍼레이드가 인상적이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외화가 충분하지 않아 선수도 임원도 딱 100달러만 들고 시합에 나갔다. 그렇게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다. 고된 삶에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마음뿐이었던 국민들이 카퍼레이드에 나와 환호하며 우리를 축하해 줬다. 그 따뜻한 마음에 늘 ‘잘해야 한다.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는 젊은 선수들의 즐기는 모습이 주목받았다. “선수들에게 과중한 국가관이나 책임감을 주지 말자는 시대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린 선수들이 승부를 초월해 즐기고, 자기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보며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승부는 이겨야 하는 것이다. 졌을 때와 이겼을 때는 전혀 다르다. 균형을 이뤄야 한다.” -스포츠 국가대항전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는데. “미국이 왜 중국에 지지 않으려 하나. 왜 영국이 아테네올림픽 이후 다시 성적을 올리고,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쇠락해 온 일본이 엘리트 체육을 왜 다시 끌어올렸는지도 주목해야 한다. 이번 도쿄올림픽 성적은 아쉬운 게 사실이다. 성적 부진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도쿄에서 12개 종목에서 4위를 했다. 이번의 금메달과 4위가 다음 파리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는 보장이 없다. 이기지 못한 게임에 대한 선수들의 피드백은 필요하다.”-생활체육 메달리스트에 대한 관심도 커졌는데. “생활체육에서 국가대표가 나와야 한다고 다들 앵무새처럼 하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재는 국가가 키우는 것이다. 클럽이 종목별, 연령별로 탄탄하게 구축된 국가들과 비교해 왜 우리는 그런 선수가 나오지 않느냐는 비판은 맞지 않는다. 서독 FTG 프랑크프루트에서 코치 겸 선수를 할 때 유아부터 연령별로 클럽이 구축된 시스템을 봤고, 그런 시스템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엘리트 체육 중심의 학교 시스템에 비판도 많다. “선수 육성 시스템을 논할 때마다 ‘공부하는 선수’를 강요한다. 엘리트 스포츠는 필요한 연습량을 채우지 못하면 올림피언이 될 수 없다. 운동과 공부의 필요한 균형을 고민해야지 모든 선수들을 일반화해 교실에 다 집어넣고 주중에는 수업에 들어가고, 주말에 시합을 나가라는 것은 어린 선수들에게 가혹한 일이다. 경기장 시설이 부족한 현실에서 일반 학생들과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없다. 신유빈 선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실업팀에 입단했다. 이런 현상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스포츠산업도 위기를 맞았다. “우리는 이제 건강한 운동을 즐기며 100세 시대를 사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스포츠가 건강과 여가를 책임지는 복지의 기능을 하는 시대가 됐다. 땀 흘리며 뛰는 운동을 못 하게 된 상황을 보며 유아부터 노인까지 스포츠 복지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19대 국회 정계 진출 과정은. “꾸준히 영입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 마음에는 없었다. 나는 뼛속까지 체육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릉선수촌장(2005~2008년)을 하며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예산을 따고 시스템을 개혁하면서 국회에 체육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수백명의 직원과 700~800명의 선수들을 책임지는 선수촌장으로서 만만치 않은 살림을 했다. 마침 새누리당에서 오라고 했을 때 두말하지 않고 갔다. 비례 몇 번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4년의 의정 활동을 총평한다면. “여의도에 가면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준비돼 있었다. 가자마자 김연아 선수 등 만 24세 이하 스포츠 스타 및 연예인의 주류 광고모델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증진법을 발의했다. 가장 보람 있는 일은 국민체육진흥법을 개정해 체육유공자 조항을 신설한 것이다. 86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망주로 꼽히던 체조선수 김소영이 개막 20일을 앞두고 연습 중 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사고 당시 겨우 열다섯이었다. 이후 자비로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온 힘을 다해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했으나 체육계에서도 꺼리는 존재로 지내는 게 안타까웠다. 다른 부상 선수들 형편도 비슷했다. 국가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장애라면 국가가 선수를 지켜줘야 한다. 2016년에는 골육종 투병 중 사망한 쇼트트랙의 노진규 선수가 유공자로 선정돼 유가족이 연금 혜택을 받게 됐다.” -국회의원 일상이 잘 맞았나. “당시 민주당은 체육인 국회의원이 없었는데 체육인 국회의원을 뽑지 않은 민주당이 후회하게 하고 싶었다. 국회 생활은 매우 흥미로웠다. 4년 내내 공부의 연속이었고, 용인대 기획처장을 했던 경험이 교육문화체육위 활동에 도움이 됐다. 솔직히 국회의원 생활은 선수나 지도자의 삶보다 힘들지 않았다. 왜 엘리트 체육에만 신경 쓰냐는 비판도 받았다. 체육인 출신 이에리사 1명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20대 총선 낙천 후 생활은. “나는 체육인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어디에 줄을 서지 않았다. 한 중진 의원이 ‘당신은 왜 줄을 서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 부분이 한편으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속했던 정당에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그 시대의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에게 죄송한 마음, 또 대통령이 여전히 저렇게 있는 데 대해서도 무거운 마음이 겹쳐 쥐죽은 듯 살았다. 뜻하지 않게 대한체육회장 선거도 도전해 봤다. 어떤 자리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늘 올바른 길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계 복귀 계획은 없나. “새누리당, 바른정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쳤고 현재는 당적이 없다. 대선을 앞두고 여러분이 연락을 주셨다. 최근 국민의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건강스포츠특위를 맡기로 했다. 라이벌이 있어야 선수가 더 발전하듯 정치도 견제 세력이 있어야 한다. 민주당이 앞으로 3년 더 180석을 갖고 가는데 대통령이라도 바뀌어서 견제 기능이 발휘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체육계 후배들의 정계 진출을 추천하나. “추천한다. 다만 국회는 준비해서 가야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의도의 삶은 가서 무작정 배우는 게 아니다. 모르면 허송세월이다. 조금 알 만하면 1, 2년이 지나고, 임기 말이 되면 부처에서도 소홀해지고, 마지막 1년은 선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 모든 걸 다 준비하고 임기 시작과 동시에 ‘요이땅’ 하고 출발해도 부족하다. 뜻이 있는 후배들이 있다면 나에게 많이 물었으면 좋겠다. 체육인 출신으로서 경험했던 의정 생활은 비밀이 아니다. 이것저것 모두 알려주고 싶다. 현재 국회에 있는 더불어민주당 임오경(전 핸드볼 국가대표) 의원, 국민의힘 이용(전 루지 국가대표) 의원의 의정 활동도 관심 있게 보고 있다.” -선수, 지도자, 스포츠행정가, 교육가, 국회의원 모든 선택에 후회가 없나. “어느 순간이나 결단할 때는 가장 안주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끊임없는 변신과 도전을 했다. 인생은 매 순간이 승부다. 그 순간의 선택에서 이겨야 한다.”
  • 유빈이를 대들보로… 칠순 노장의 마지막 꿈입니다

    유빈이를 대들보로… 칠순 노장의 마지막 꿈입니다

    온 나라를 무방비 상태에 빠뜨렸던 가마솥 더위가 잠시 발을 뺀 지난 13일 경기 김포의 대한항공 탁구단 체육관. 강문수(69) 감독은 눈에 익은 인물들이 표지를 장식한 공책을 쓱 내밀었다. 겉장과 모서리를 유리 테이프로 덧댄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족히 2~3년은 된 듯한 표지에는 흑백 물감으로 ‘공포의 외인구단’ 남자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었다.“노(老)감독의 품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도발’에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이 끝난 뒤 중학교 후배 이현세 화백이 선물한 노트”라고 껄껄 웃었다. 강 감독은 경북 경주 사람이다. 이 화백은 울진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를 경주에서 마쳤다. 강 감독의 경주중 2년 후배인 이 화백은 표지 다음장에 깍듯하게 ‘형님’이라 쓰고 뒤를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여섯 글자로 이었다.●이현세 화백·김석기 의원과 경주중 동문 강 감독은 “이 공책을 선물받은 이듬해 67세의 나이에 다시 녹색 테이블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하루하루 일기 쓰듯 팀의 이모저모를 깨알처럼 적었다”고 했다. 경상도 사내들은 출신지와 학교 등 아래위가 ‘브로맨스’로 엮이는 게 보통이지만 그중에서도 경주는 드센 억양만큼이나 수평수직 관계가 분명하다. ‘중학 동기’ 김석기 국민의힘 의원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 의원은 강 감독의 ‘탁구 인생’을 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함께 탁구 라켓을 잡은 건 중학교 시절 딱 한 달이고, 이후 둘은 길을 달리했지만 강 감독은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 그는 도쿄올림픽에서 ‘핫’했던 신유빈(17)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신수현(49) 수원시탁구협회 전무가 대물림한 ‘탁구 스승’이다.경주 황남초를 졸업한 강 감독은 “공부는 아주 잘하진 못했지만 욕심 많은 꼬맹이였다”고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경주중은 나름 명문이어서 어지간히 공부해선 못 들어갔다. 반경 80㎞ 떨어진 촌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입학 시험 응시자 400여명 중 147등으로 입학했다. 1학년 때 2인용 책상 바로 옆에 앉았던 짝꿍이 김 의원이다. 둘을 비롯해 1학년 까까머리 6명이 클럽을 만들었다. 모의고사 국·영·수 90점 이상을 받아 전교 조회 때 노트 3권을 받을 요량이었다. ‘대왕 클럽’으로 명명한 이 모임의 목적은 물론 공부만이 아니었다. 탁구부에 들어가자고 꼬드겼던 김 의원은 “공부가 먼저”라는 부모님 성화에 한 달 만에 라켓을 놓았지만 강 감독은 집에 거짓말을 하고는 탁구부에 남았고 3학년이 되자 등록금을 면제받고 탁구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경주고 탁구부 창단 멤버… 실업팀 스카우트 1순위 강 감독을 포함해 경주중 졸업생 4명이 경주고 탁구부 창단 멤버가 됐다. 고2 때 대구중앙상고로 학교를 옮기고 이듬해 한일교환경기에 출전했다. 강 감독은 “청소년대표팀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다”며 “그때도 키는 작았지만 대구와 경주를 잇는 완행열차 안에서 꼬박 2시간 반을 까치발로 버티며 기른 체력 덕”이었다고 돌이켰다. 이 경기로 당시 주간지 ‘선데이서울’의 유망주 칼럼 ‘이 선수가 탐난다’에 대기만성형 선수로 이름 석 자와 사진을 올린 강 감독은 실업팀 스카우트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첫 직장은 전매청. 그러나 1년 만에 스스로 발을 돌렸다. 신분이 기능직 공무원이어서 “장래를 보장받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교사 자격증을 목표로 경기대에 입학했다. 군 생활도 탁구부가 있던 공군에서 했다. 지금은 국군체육부대가 3군을 통합해 운영하지만 당시는 육해공별로 따로 있었고 종목도 서로 달랐다. 야구의 이종도, 축구의 차범근 등 또래들도 공군 체육부대 출신이다. 강 감독은 “고교 시절 교련 과목을 펑크 내는 바람에 2개월의 군 복구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한 탓에 먼저 전역하는 차범근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더라”며 껄껄 웃었다. 복학을 하니 그사이 탁구부는 해체돼 일반 학생으로 똑같이 등록금을 내야 했던 까닭에 용산 철도청에 입사한 큰형의 자취방 신세를 져야 했지만 강 감독은 1980년 꿈에도 그리던 교사 자격증을 따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경기대를 졸업했다.●이건희 회장 “키 작은데 코치 잘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에 태극마크를 처음 단 건 1975년이다. 난생처음 해외에 나간 것도 그로부터 1년 뒤다.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서독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첫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열네 시간을 날아가면서 강 감독은 23년 동안 살아온 것보다 훨씬 넓고 전혀 다른 세상을 접했지만 남자 탁구 선수의 비애도 동시에 맛봤다. 이는 후에 남자팀 ‘단골’ 지도자 생활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는 한국 여자 탁구의 부흥기였다. 1973년 정현숙과 이에리사, 박미라, 김순옥 등이 사라예보 세계선수권 단체전 우승으로 영웅 대접을 받을 때였다. 광부, 간호사 등 현지 교포들이 먹을 것을 잔뜩 싸 와도 정작 남자 선수들에게 돌아오는 건 없었다. 선수단 짐도 남자 선수들이 도맡아 날랐다. “여자 선수들 어깨 다친다”는 게 이유였다. ‘남자 선수는 대한통운(배달부)’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곱씹으며 강 감독은 이에리사 몫의 김밥 한 줄을 슬쩍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1979년 창단 1년 남짓의 제일합섬 탁구단(삼성생명 탁구단의 전신)에 코치로 발을 들이면서 강 감독은 34년의 ‘원팀 지도자’ 시대를 열었다. 1980년 1월 부임 인사차 서울 한남동을 찾았는데 당시 이건희 부회장은 “그렇게 작아서 코치 잘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인사를 받았다. 강 감독은 “그때 약이 올라 이후 죽기살기로 코칭에 매달려 그해 종합선수권대회에서 단체·개인·개인복식 등 3종목 석권했다. 내 기사와 사진이 삼성 계열 일간지 1면에 대서특필되자 그제서야 이 부회장은 ‘이번엔 남자가 참 잘했네요’라고 웃으며 말하더라”고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강 감독은 “30년 넘게 삼성생명 한 팀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여자팀을 맡은 기간이 2년에 불과한 걸 보면 아무래도 서독오픈 참가와 이건희 부회장 방문 때 자극받은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고”고 돌이켰다.강 감독은 2013년 삼성생명을 떠날 때까지 총감독으로 종합선수권 여자 9연패, 남자 7연패와 4연패, 승률 51% 등 숱한 기록들을 일궈 냈다.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을 맡으면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금메달과 유남규의 2관왕도 뒷받침했다. 2003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 지금까지 유일무이한 개인전 은메달리스트 주세혁(41)도 그가 만들었다. 훈련 당시 발바닥 물집을 13차례나 따 줄 만큼 ‘연습광’이었던 안재형이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확정하고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뒤로 벌러덩 자빠지자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이 “탁구 선수들은 전부 야당인가 보다”라고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신유빈 부녀의 대물림한 ‘탁구 스승’ 강 감독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서 유남규와 안재형, 김기택을, 2004년 아테네에서는 유승민을 만들었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 한 가지 욕심을 더 부리자면 신유빈을 한국 탁구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신유빈에게 강 감독은 대를 이어받은 스승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기’ 이철승 삼성생명 남자탁구단 감독과 한솥밥을 먹으며 1991년부터 4년 동안 강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강 감독은 “언젠가 ‘탁구 마녀’로 불렸던 중국의 덩야핑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신발 속 양말이 흠뻑 젖더라. 그 정도로 올인해야 탁구로 대성할 수 있다”며 “물은 절대로 99도에서 끊는 법이 없다. 나머지 1도를 더해 100도의 불로 물을 끓이려면 지금껏 일궈 냈던 99도보다 몇 갑절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스포츠”라고 조언했다.
  • ‘싱크홀’ 김성균 “재난 절박함 속 희망 잃지않는 유쾌함 보여주고파”

    ‘싱크홀’ 김성균 “재난 절박함 속 희망 잃지않는 유쾌함 보여주고파”

    “재난 상황에서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절박함 속에서도 유쾌함과 위트를 잊지 않는 여러 캐릭터의 앙상블이 올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함을 주는 것 아닐까요.” 김지훈 감독의 신작 ‘싱크홀’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인 김성균(41)은 영화 개봉을 앞둔 4일 기자들과의 화상 인터뷰에서 “재난 영화의 강점은 얼굴에 흙을 묻히면서도 강인한 인물들의 생존 본능을 보여주는 매력이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오는 11일 개봉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싱크홀’은 11년 만에 마련한 내 집이 지하 500m 초대형 싱크홀로 추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성균은 서울에 내 집 한 채 마련하려고 열심히 살아온 보통의 회사원이자 11년 만에 자가 취득에 성공한 현실 가장 동원으로 분했다. 빌라 5층에 입주한 동원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의 부푼 꿈도 잠시 순식간에 집과 함께 땅속으로 떨어진다. 사사건건 동원과 부딪치는 아랫집 이웃 만수(차승원 분)를 비롯해 동원의 집들이에 초대된 회사 동료 김 대리(이광수 분)와 인턴사원 은주(김혜준 분)도 예상치 못한 재난에 함께 휘말리게 된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신의 한 수: 귀수편’(2019) 등을 통해 한계 없는 스펙트럼을 입증해온 김성균은 평범한 가장의 면모부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까지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싱크홀’이 지금까지 했던 작품 가운데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라며 “몸이 제일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냈다’는 훈장 같은 작품이다. 내가 이걸 버텨냈다니 나도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물을 먹는 모든 장면이 힘들었다”며 “겨울이어서 추웠는데 따뜻한 물에서 쉬다가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옷이 젖어 있고 너무 추웠다. 추위가 가장 힘들었다”고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재난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고생하는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SF,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데 재난 속에 제가 들어가서 연기를 한다는 것에 대한 굉장히 큰 기대감과 만족감이 있었어요. 고생하면서 (위기를) 헤쳐나가는 역할을 제가 못 해 봤거든요. 이번 기회에 그 한을 풀었죠.”김성균은 극 중 동원의 특징을 ‘보통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동원이 아들을 구하려고 폭우로 차오른 물을 헤치고 부서진 건물 난간에 매달리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성애 때문이다. 실제 두 아들을 키우는 김성균은 “아역 배우를 계속 안고, 업고 있었다. 같이 붙어 있다 보니 남의 아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며 “보통 남의 애한테는 화를 잘 안 내는데 혹시나 안전사고가 날까 봐 옆에 아역의 어머님이 계시는데도 ‘아빠 똑바로 껴안아’라고 화를 냈다. 정말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저도 동원처럼 반지하에서 처음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공사한다고 장판, 벽지도 없는 텅 빈 집에 이불을 들고 가서 잔 적도 있어요. 동원은 11년 만에 마련한 집을 잃었으니 억울해서라도 못 죽는다는 마음이 있었겠죠. 하지만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게 더 컸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살아서 아내와 아기랑 다시 만나야겠다는 거요. 집은 잃었지만, 이것만큼은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죠.” 영화는 제74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제20회 뉴욕아시안영화제, 제27회 사라예보영화제에 초청됐다. 김성균은 “가족애가 중요한 부분인데 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재밌게 봐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명 시절이 길었다는 김성균은 ‘범죄와의 전쟁’(2011)에서 촌스러운 2 대 8 가르마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얼굴을 알렸다. 이후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4)에서는 시골서 상경한 순박한 대학생으로 ‘응답하라 1988’(2015)에서는 장성한 아들 둘을 둔 철없는 아버지를 연기했다. 다음에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재난영화를 해봤으니 이제 SF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면서 “SF에 등장하는 외계인 같은 악역을 맡으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다 그리지 못한 색채의 낙원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다 그리지 못한 색채의 낙원

    소는 2만년 전 동굴 벽화에도 나타날 만큼 인간과 친숙한 동물이다. 원시인들은 순조로운 사냥을 기원하며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동물과 사냥 장면을 묘사했다. 동물은 경배 또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은 동물 머리를 한 신들을 모셨고, 그리스 신화에는 미노타우로스나 페가수스 같은 신비한 동물이 등장한다. 동양의 십이지신도 동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인간의 운세와 연결 지은 것이다. 마르크에게 동물은 인간 사회가 진보와 이성을 추구하느라 잃어버린 순수한 본성을 의미했다. 1911년 그는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파를 결성했다. 칸딘스키를 만나면서 마르크는 원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분할된 면을 내적인 역동성에 따라 배열하는 고유의 스타일에 도달했다. 이 무렵 마르크는 의욕적으로 작업했다. 그중에서 ‘노란 암소’는 가장 밝고 명랑한 그림이다. 갓 결혼해 행복에 젖어 있는 마르크의 심리 상태가 반영돼 있다. 노랑은 대지의 어두운 빨강과 대조되며 즐거움과 감각을 나타낸다. 파랑은 완고하고 남성적이며 정신적인 색이다. 계곡을 훌쩍 뛰어넘는 노란 암소의 유연한 곡선이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의 각진 봉우리와 대조된다. 소의 얼굴은 웃는 것 같다. 마르크가 동물을 예찬하는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동물 학대와 대량살상이 행해지던 시기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유럽에 동물원이 우후죽순 세워져 이국적 동물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존을 위협받는 종이 늘어났다.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에서 백인들은 오락 삼아 사냥을 해댔고, 생리학 실험실에서는 동물을 산 채로 해부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사건이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악명 높은 사냥 애호가로 수없이 많은 동물을 죽였는데, 이제 엄청난 인명을 죽일 참이었다. 마르크는 군에 자원 입대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그것이 애국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은 비참했다. 1916년 3월 4일 마르크는 아내에게 기쁨 어린 편지를 썼다. “올해 안으로 집에 돌아가게 될 것 같소.” 그날 오후 포탄 파편이 서른여섯 살 예술가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술평론가
  • “정치보다 체육 관련 의정활동 열심히 했는데 4년 뒤 정책 평가 안되고 낮게 보는 경향 있어”

    “정치보다 체육 관련 의정활동 열심히 했는데 4년 뒤 정책 평가 안되고 낮게 보는 경향 있어”

    “체육인 대표로 나왔으니 정치보다는 체육 관련 정책에 매달려 정말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4년 뒤 지역구 공천을 받으려고 하니 그런 것들은 평가가 안 됐고, 비례대표를 좀 낮게 보는 경향도 있더라고요.” 2012년 체육계를 대표해 19대 국회에 입성한 이에리사(66) 전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의원은 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의정활동의 아쉬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탁구선수 출신인 이 전 의원은 1973년 ‘사라예보의 전설’로 불리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여자탁구대표팀 감독과 여성 최초 태릉선수촌장을 지내 총선 영입 때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전 의원은 국회에서 체육유공자 제도, 국립체육박물관 건립, 예체능계 대학생 국가장학금 등을 추진해 결실을 얻었다. 이어 20대 총선 때 고향인 대전 중구에 출마하려 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는 “지역구로 나서면 그때부터는 싸움꾼이 돼야 하는데 그러면 페어플레이하는 스포츠인 이미지는 사라지는 거다. 그래서 깨끗하게 접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의원은 이후 이에리사휴먼스포츠재단을 설립해 후원금 등으로 유소년 체육 장학금을 조성하고, 초중학생 방과후학습 체육대회, 은퇴후 일반 생활체육인 대회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국회 있을 때 체육인 복지재단을 설립해 생계가 어려운 체육인을 계속 지원하고 은퇴 후에도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체육인복지법을 만들려고 목숨 걸고 매달렸는데 당리적인 계산들 때문에 결국 통과시키지 못했다”면서 “그 아쉬움을 달리기 위해 재단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번 4·15 총선 영입인재 중 체육계 출신은 더불어민주당의 임오경 전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과 통합당의 김은희 테니스 코치가 있다. 둘 모두 비례대표 출마가 예상됐으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임 전 감독은 경기 광명갑 전략공천을 받았고, 김 코치는 경기 고양갑에 공천을 신청한 상태다. 이 전 의원은 “국회에 들어가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법안을 발의하기까지는 현장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대단한 집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치정살인이 부른 ‘나비효과’… 홍콩, 中 일국양제에 반기 들다

    치정살인이 부른 ‘나비효과’… 홍콩, 中 일국양제에 반기 들다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거대한 역사를 만들 때가 있다. 이른바 ‘나비효과’다. 1914년 6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찾아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에게 18세 청년이 총격을 가한 ‘사라예보 사건’으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시작됐다. 2011년 4월 미국 백악관 연례만찬 행사에서 당시 오바마 미 대통령이 청중으로 온 부동산업자 도널드 트럼프에게 공개망신을 주자 트럼프가 이에 앙심을 품고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 지금 소개하려는 ‘찬퉁카이 사건’도 중국의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 원칙을 흔들고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바꾼 ‘역사의 방아쇠’로 기억될 것 같다. 9일로 정확히 6개월이 된 홍콩 시위 사태의 원인을 설명하는 프리퀄(본편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과거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사법권 못 미치는 대만 사건 발생… 기소 불가 지난해 2월 8일 중국 광둥성 선전 출신의 홍콩인 찬퉁카이(21)가 동갑내기 여자친구 판샤오잉과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대만이었다. 판샤오잉은 열흘쯤 뒤인 17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왓츠앱을 통해 “홍콩으로 돌아간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전 세계를 소용돌이에 빠뜨린 거대한 태풍의 시작이었다. 홍콩 명보 등에 따르면 그때 두 사람은 타이베이의 한 호텔 방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판샤오잉은 임신 중이었는데, 뱃속 아이 아빠가 자신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을 찬퉁카이가 뒤늦게 안 것이다. 판샤오잉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동영상으로 새 남자친구의 존재를 확인해 준 뒤 “이 지경까지 왔으니 너와 헤어지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찬퉁카이가 순간적인 격분을 참지 못하고 판샤오잉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그는 여행용 가방에 시신을 담아 숙소를 빠져나왔다. 타이베이의 한 지하철역 부근 공원 풀밭에 암매장하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판샤오잉의 신용카드로 돈을 찾아 자신의 은행계좌로 입금했다. 판샤오잉의 부모는 딸과 연락이 되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찬퉁카이는 곧바로 체포됐고 범행 사실도 자백했다. 이 사건은 ‘단순 치정살인’으로 정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미법을 채택한 홍콩은 영역 내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하는 ‘속지주의’를 유지한다. 홍콩 당국 입장에서 찬퉁카이의 죄는 천인공노할 사안이지만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대만에서 벌어져 기소가 불가능했다. 다른 나라들과 그랬던 것처럼 미리 대만과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었다면 찬퉁카이를 송환하고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콩은 그러지 않았다. 대만과 정치·법률 분야에서 공조하면 대만을 보통국가처럼 보이게 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는 베이징 당국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서다. 찬퉁카이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였음을 안 대만 정부가 그에 대한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하지만 홍콩 당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돼 있지 않아 송환을 위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무리를 해 가며 반중 성향인 대만 정부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정치적 속내도 있었다. ●2047년 이후, 공포에 떨고 있는 홍콩 시민들 같은 해 4월 홍콩 사법당국은 찬퉁카이에 대한 살인 혐의 적용을 포기했다. 대신 여자친구의 카드로 돈을 인출한 것에 대해서만 절도죄 등을 적용해 29개월형을 선고했다. 그나마도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모범수로 복역했다는 점을 들어 18개월로 감형했다. 그는 올해 10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평생을 감옥에서 지낼 것 같던 찬퉁카이에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비난 여론이 커지자 홍콩 정부는 “제2의 찬퉁카이가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고는 1년 가까이 지난 올해 2월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 개정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 홍콩 주민이 상대국법으로 징역 3년 이상 실형이 예상되는 범죄를 저지르면 용의자 송환 여부를 판단하는데, 대만처럼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국가·지역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는 사법 절차 없이 홍콩 행정장관이 송환 여부를 결정하게 한 것이 골자다. 여기서 논란이 불거졌다. 행정장관이 용의자 송환 여부를 정할 수 있는 지역에 대만뿐 아니라 중국 본토가 포함된 것이다. 중국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법이 통과되면 중국은 홍콩의 반중 인사들에게 반분열국가법(우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 위반 혐의를 적용해 홍콩 정부에 송환을 요구할 수 있다. 친중 성향인 행정장관은 이를 승인할 가능성이 크다. 안 그래도 홍콩인들은 중국이 광범위한 자치를 약속한 시한인 2047년 뒤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두려움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 반체제 서점 관계자 실종(2015)과 샤오젠화 밍톈그룹 회장 실종(2017) 등 중국 공권력에 의한 납치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가 더 커졌다. 이 때문에 송환법은 홍콩인들에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중국으로 쉽게 보내려는 법’으로 여겨졌다. ●확산되는 반중 시위… 전 세계 정치지형 변화 홍콩 정부는 범민주 진영의 반발에도 입법을 강행했다. 3월 9일 이 법안이 입법회(우리의 국회 격)에 제출됐다. 여당인 민주건항협진연맹을 비롯한 친중파 의원들은 이 법안을 무조건 통과시키려고 나섰다. 민주당과 공민당 등 야당 의원들은 결사적으로 막았다. 70명으로 이뤄진 홍콩 입법회에서 친중파(41석)는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범민주 진영(29석)의 반대를 제압하고 5월 26일 이 법안을 법사위원회에 올려 가결했다. 해당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다. 형식적 통과 절차만 거치면 법이 발효될 순간이 코 앞에 왔다. 그러자 홍콩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들을 지켜야 할 정부가 되레 정상적인 사법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본토로 내보내려 한다는 배신감이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다.이후부터는 잘 알려진 그대로다. 6월 9일 홍콩 시민들이 첫 번째 거리 시위를 열었다. 100만명이 넘게 참석했다. 이후 주말 시위는 6개월째 이어지며 홍콩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놨다. 지난달 24일 범민주 진영은 홍콩특별행정구 구의회 선거에서 85%가 넘는 의석을 가져오며 사상 처음 과반의석을 차지했다. 친중 성향이 우세하던 홍콩의 시민들은 완전히 돌아섰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중국과의 전쟁’은 2047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만도 이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대놓고 말하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은 2016년 1월 당선 뒤 잇따른 정책 미숙으로 내년 1월 총통 선거 패배가 확실시돼 왔다. 하지만 홍콩 시위 사태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이변이 벌어졌다. 올해 8월부터 차이 총통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올라 대선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이제 대만에서 ‘반중’은 국시가 됐다.이런 분위기는 최소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물러날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홍콩인권법안)을 통과시켰다. 내친김에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신장 위구르 인권법과 티베트 인권법도 제정할 모양새다. 인권 문제를 고리 삼아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압박하려는 의도다. 한 20대 홍콩인 커플의 애정여행이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고 전 세계를 ‘친중 대 반중 구도’로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다.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전 세계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올 가장 빛난 여성 체육인에 수영 김서영… 신인상은 육상 양예빈

    여자수영 간판스타인 김서영(25·경북도청)이 올해 대한민국을 가장 빛낸 여성 체육인으로 뽑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6일 서울 중구 ‘노보텔 앰버서더 서울 동대문’에서 시상식을 열고 김서영에게 여성체육대상을 시상했다고 밝혔다. 김서영은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여자 개인혼영 200m 한국 신기록과 대회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올해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경영 월드컵에서 여자 개인혼영 200m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 여자수영을 대표하는 선수다. 여성체육지도자상은 전 여자테니스 국가대표 감독으로 테니스 스타 정현을 지도한 김일순(50) 감독이, 신인상은 29년 만에 여자중학교 400m 한국 신기록을 세운 육상 샛별 양예빈(15·계룡중)이 받았다. 공로상은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박미라(67·양천구체육회)가, 꿈나무상은 피겨 이해인(14·한강중), 야구 박민서(15·성동구리틀야구단), 탁구 유예린(11·청명초), 역도 박혜정(16·선부중), 배드민턴 김민선·김민지(13·남원주중)가 수상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보스니아 내전 생존자들 “한트케 노벨상 철회하라” 시위

    스웨덴 왕세녀 빅토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방문에 맞춰 그 지역 도시인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에서 생존한 여성들이 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페터 한트케(76)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였다. 1990년대 유고 내전에서 살아남은 이들 수십명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 있는 스웨던 대사관 앞에서 한트케에 대한 노벨상 수여 결정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시위에 참여한 일부 여성은 한트케가 1995년 7월 세르비아군에 의해 보스니아 무슬림 남성 8000여명이 집단학살당한 스레브레니차를 방문한 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한트케는 집단학살이 발생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96년 여름 마을 입구 간판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은 스웨덴 한림원에 “노벨상 사상 처음으로 수상 지명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알렉산데르 불린 세르비아 국방장관은 한트케를 “위대한 인물”로 치켜세웠다. 한트케는 2006년 전범으로 체포돼 재판을 앞두고 사망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한 인터뷰에서 “밀로셰비치는 영웅이 아닌 비극적인 인물이고 나는 작가이지 판사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이에 스웨덴 한림원은 “폭력을 미화하거나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코소보·보스니아·알바니아 노벨문학상 한트케 선정에 강력 반발 왜?

    코소보·보스니아·알바니아 노벨문학상 한트케 선정에 강력 반발 왜?

    코소보와 보스니아, 알바니아 등이 10일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페터 한트케(76)를 선정한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섰다. 1990년대 옛 유고 연방 해체를 틈타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한 코소보가 독립하려 하자 세르비아가 저지른 ‘인종 청소’를 부인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공습에 반대한 전력 때문이라고 AFP 통신이 전했다. 인종 청소로 악명 높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연방 대통령을 옹호했고 2006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수천 명의 참배객들 앞에서 연설하는 등 유럽 전체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줬다. 생전에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을 받던 밀로셰비치는 한트케가 증언대에 서 자신을 옹호해주길 바랄 정도였다. 한트케는 세르비아 민족을 나치에 내몰린 유대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엘프리에드 옐리네크도 한트케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수잔 손탁과 살만 루시디 등 많은 이들은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가 인류를 위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쪽에 섰다. 코소보의 블로라 치타쿠 미국 주재 대사는 트위터를 통해 “훌륭한 작가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노벨위원회(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선정하고 시상하는데 착각한 듯)는 하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옹호자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코소보에서 태어난 젠트 카카즈 알바니아 외무장관도 “인종청소를 부인하는 인물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다니 끔찍하다”며 “2019년에 우리가 목격하는 이 일은 얼마나 비열하고 부끄러운 행태인가“라고 꼬집었다. 1995년 스레브레니차 내전에 8000명 이상의 무슬림 남성들이 세르비아에 의해 학살됐는데 이 때 살아남은 사라예보의 국제관계 교수인 에미르 술자기치는 “밀로셰비치의 팬이었으며 악명 높은 학살 부인자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고 트위터에 개탄했다. 반면 30년 가까이 프랑스 파리 외곽 샤빌에서 살고 있는 한트케는 AFP 통신에 “깜짝 놀랐다”면서 “스웨덴 한림원이 그 같은 결정을 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APA 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이 이제 빛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독일 dpa 통신이 보도했다. 독일계 아버지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한림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4시간 동안 숲속을 거닐었다면서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해 수상 소감을 밝히겠다고 전했다. 이어 “오늘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했다”며 저녁은 부인과 함께 지역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먹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고 공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사라예보서 사상 첫 ‘게이 프라이드 행진’…보수단체 맞불집회

    사라예보서 사상 첫 ‘게이 프라이드 행진’…보수단체 맞불집회

    유럽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게이 프라이드 행진이 열린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행진인 만큼 폭력사태에 대한 위험도 제기되는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8일 AP통신은 전날 수도 사라예보에서 수백여명의 시민들이 ‘전통적인 가족 가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 반대하는 도심 행진을 벌였다고 전했다. 이날 시위는 조용히 마무리됐으나 이튿날인 8일 열리는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 맞불집회를 열 예정이라 충돌이 벌어질 위험도 있다. 경찰은 게이 프라이드 행진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경찰을 1000명까지 증원한다고 밝혔다. 게이 프라이드 행진 주최 측은 두려움 속에서도 ‘Ima Izac’이라는 제목의 행진을 진행할 계획이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는 것을 의미하는 ‘커밍아웃’을 뜻한다. 500여명의 시민들이 행진에 참석할 것으로 추정된다. 발칸반도 국가 중 게이 프라이드 행진을 열지 못한 곳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밖에 없다. 동성 간 성행위를 합법으로 규정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긴 했으나 여전히 정치 원로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주의 단체의 공격에 대한 우려도 크다. 보스니아계-크로아티아계 연방(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릅스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정치 체제가 매우 복잡하다.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51%)와 정교회(31%), 가톨릭(15%) 등으로 분화돼 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갑작스러운 난민 생활, ‘다른 사람’으로 사는 방법

    갑작스러운 난민 생활, ‘다른 사람’으로 사는 방법

    우연히 타국에 나와 있는데, 고국에선 내전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한사코 집에 돌아오지 말라고, 밖에 있으라고 충고했다. 이국의 낯선 거리를 배회하다 지쳐 결국엔 정치적 망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갑작스럽게 난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프린스턴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알렉산다르 헤몬의 에세이 ‘나의 삶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난민이 별 거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6월 한국 사회를 시끌시끌하게 했던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행위처럼 보였다. 그러나 헤몬처럼 개인의 삶으로 환원해서 보면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걷다 교통사고가 난 것처럼, 어느 날 우연히 나의 고국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 바람에 나는 집을 잃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문화 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헤몬은 27세가 되던 해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다가 발이 묶인다. 갑자기 난민이 된 그는 그린피스 운동원, 서점 판매원, 강사 등 생계를 위한 다양한 일을 하며 영어를 익힌다. 문학 전공자이자 평생을 말과 글을 무기로 살아온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련이었다. ‘시카고에 존재하는 법을 아직 몰랐기에 나는 형이상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했다.’(139쪽)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사라예보에서 이슬람교도 친구를 ‘터키인’이라는 말로 울렸던 헤몬은 그 자신이 영원한 이방인이 됨으로써 평생을 ‘다름’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그 결과 얻은 결론은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순간, 타자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21쪽)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망명, 캐나다 이민 등으로 헤몬 가족에게 “원래는 어디 출신이십니까?”라는 질문은 일상이다. 이에 헤몬은 말한다. “저는 작가 출신입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그게 아니라면 “아직 뭐라 말씀드리기엔 너무 이른 것 같네요”(35쪽) 정도로만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에게 이런 질문은 답할 수 없는 의문들이 얽히고설킨 다름의 결정체다. 그렇다면 타국에서의 사무치는 외로움 속, 그를 지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헤몬이 시카고에서 가장 열심히 몰입했던 것은 뜻밖에 이민자 축구 모임이었단다. 이탈리아, 나이지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여러 사연을 안고 모여든 이민자들과 패스에 성공했을 때 느껴지는 발끝의 얼얼함으로 외로움을 견딘다고 그는 말한다. 번역서 제목은 원제(The Book of My Lives)보다 다소 심심해 보이지만, ‘이 책=그의 삶’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서울광장] 남·북·미·중·일, ‘위기의 사다리 게임’/장세훈 논설위원

    [서울광장] 남·북·미·중·일, ‘위기의 사다리 게임’/장세훈 논설위원

    ‘남한과 북한,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 얽히고설킨 난맥상을 누가 언제 어떻게 풀 것인가.’ 한반도 주변 정세가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으로 바뀌고 있다. 실마리부터 찾자. ‘낙엽이 지기 전에’라는 제목의 책은 1차 세계대전 발발 과정을 조명하고 시사점을 얻으려 했다. 저자인 김정섭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1차 대전은 왜 일어났을까”다. 이를 위해 저자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터진 1914년 6월 28일부터 영국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8월 4일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흔히 연합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과 동맹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간 대결이었던 1차 대전의 원인을 독일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찾는다. 하지만 책을 보면 독일은 전쟁을 막으려 부단히 노력했고, 심지어 전쟁이 터진 뒤에도 ‘방어 전쟁’으로 간주한다. 공교롭게도 이는 주요 참전국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각국의 왕실은 혼인·혈연 관계로 얽혀 있고 상호의존적인 국제무역 체계를 갖췄음에도 어느 나라가 일으켰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불분명한 전쟁이 결국 터져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가 1차 대전을 ‘침략자 없는 전쟁’으로 규정한 이유다. 각국의 수많은 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억제 노력이 가져올 위기 증폭의 효과에는 정작 무지했기 때문이다. 8월에 전쟁을 시작하면서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 독일 빌헬름 황제의 판단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를 제압한 후 러시아를 공격하는 속도전을 자신했으나 현실은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전개되며 1000만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다. 계산되지 않은 위험,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가져온 결과다. 여기에는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다는 집단적 오류와 잘못된 믿음도 깔려 있었다. 결국 1차 대전은 누군가 의도하고 준비한 전쟁이 아닌 위기관리 실패로 인한 전쟁인 것이다. 현 우리나라 주변 정세가 물리적·군사적 충돌을 우려해야 할 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1차 대전 당시의 전개 과정과 역학 관계를 보면 경제적 갈등을 촉매로 다양한 대립 구도를 낳고 있는 현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심지어 북한까지 모두 ‘피해자 코스프레’ 중이다. ‘누가 먼저 칼을 뽑았나’의 문제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갈등을 유발하는 대책, 갈등에 대비하는 대책 간 차이도 불분명해지고 있다. 자국의 자위적 조치가 상대국에는 위협적 행위로 인식되는 억제 전략의 딜레마, 억제 전략의 실패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7월 관세전쟁으로 표면화한 미중 무역분쟁은 지난 5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을 계기로 환율전쟁으로 번졌다. 또 미국이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탈퇴 후 중거리 미사일에 대한 아시아 배치를 추진하는 이유로 중국을 콕 집으면서 미중 갈등은 군사 분야로도 확대됐다. 두 차례 휴전을 거쳤음에도 치고받기식 난타전으로 상대국은 물론 스스로도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안보와 경제 측면에서 비대칭적으로 기운 대미, 대중 관계는 우리의 생존 공간을 옥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을 안보 우방국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지웠다. 이에 우리 정부도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지속적인 비핵화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25일 이후 다섯 차례나 미사일 도발을 강행했다. 이 와중에 미국은 우리 정부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 호르무즈해협 파병, 중거리 미사일 배치 등을 요구한다. 남·북·미·중·일 각국이 상대국을 의식해 ‘위기의 사다리’를 한 발씩 오르는 형국이다. 경제적, 외교적, 전략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원하지 않는 분쟁, 의도하지 않은 갈등이 속출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희생이나 불이익은 감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멈출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답을 내놓기 어렵다. 위기관리의 실패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숙제다. 단호한 대응과 상응적 조치가 해결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럼 위기의 사다리에서 먼저 내려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shjang@seoul.co.kr
  • 보스니아 내전 대량학살 자행한 라도반 카라지치 종신형 선고

    보스니아 내전 대량학살 자행한 라도반 카라지치 종신형 선고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 당시 ‘인종 청소’를 자행한 혐의를 받는 스릅스카공화국 전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사진·74)가 유엔 산하 국제 구유고슬라비아 전범재판소(ICTY)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ICTY는 20일(현지시간) 카라지치에 대한 항소심에서 1995년 보스니아 동부 스레브레니차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8000명의 학살을 지시하고, 수도 사라예보에서 민간인 1만여명을 숨지게 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1심에서 받은 40년형은 혐의에 비해 가볍다고 판단했다. 정신과 의사이자 시인이었던 카라지치는 유고 연방이 유지되기를 원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의 지원으로 내전을 일으켜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주민 등 수십만명의 학살을 주도했다. 내전 이후 13년간 도피 생활 끝에 2008년 체포됐으며 대량학살과 전쟁범죄, 인권침해 등 11개 혐의로 기소돼 2014년 9월 검찰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016년 3월 ICTY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자 항소했다. 카라지치의 변호인은 “이번 판결은 정치적인 판결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는 보스니아의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카라지치는 당시 자행된 전쟁 범죄에 도덕적인 책임감은 느끼고 있으나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20세기 최악의 인종청소 전범 카라지치, 유엔 항소심 40년형→종신형

    20세기 최악의 인종청소 전범 카라지치, 유엔 항소심 40년형→종신형

    “전쟁 범죄의 심각성과 피고의 책임을 살폈을 때 1심에서 받은 징역 40년형은 너무 가볍다.” 1992∼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대규모 ‘인종 청소’를 지휘한 장본인인 세르비아계 정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73)가 유엔 산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CTY는 20일(현지시간) 카라지치가 2016년 1심의 40년형 선고에 불복해 제기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그의 항소를 기각하고 오히려 형량을 늘렸다. 카라지치는 유고 연방이 유지되길 원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일으켜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 주민 등 수십 만명의 학살을 지휘했다. 그는 내전 이후 13년의 도피 생활 끝에 지난 2008년 체포된 뒤 대량학살, 전쟁범죄, 인권침해 등 11개 혐의로 기소돼 2014년 9월 종신형을 구형받았지만 2016년 3월 ICTY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40년형을 선고받았다. 카라지치는 내전 막바지인 1995년 7월 동부 스레브레니차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보호하는 안전지대 안에서 8000명의 남성과 소년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고, 수도 사라예보에 40개월 이상 포격 공격을 가하고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 1만여명을 숨지게 했다. 짙은색 정장과 붉은색 타이 차림으로 경호원에 이끌려 법정에 나온 그는 이날 주심 판사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을 때 거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영국 BBC 등이 전했다. 그는 3심을 요구할 수 없어 확정됐다. 반면 이날 법정을 찾은 피해자들의 친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무니라 수바시치는 “그는 마땅히 그럴만하다”며 “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는데 (카라지치는) 평생 캄캄한 구멍 안에 머물러야 한다. 난 고통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세계와 전범들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돼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친구들이 오마르스카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사트코 무야지치는 달콤쌉싸래하다고 했다. “만족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살아 이 장면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래서 진짜로 기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24년 전 비극의 현장인 스레브레니차의 추모센터에 모여 TV를 통해 선고 장면을 지켜보던 희생자들의 친지들도 손뼉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편 카라지치의 변호인은 보스니아 N1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은 법에 기반하지 않은 순전히 정치적인 판결로 보스니아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카라지치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자행된 전쟁 범죄에 ‘도덕적인 책임감’은 느끼고 있으나, 형사적인 책임은 없으며 “이번 판결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체제인 ‘스르프스카 공화국’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라는 서방의 압력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비스코비치 총리 역시 현지 방송에 출연해 이번 판결을 정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아무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를 겨냥해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정식 국명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이 나라는 현재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로 구성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BiH), 세르비아계 위주의 스르프스카 공화국(RS) 두 체제로 나뉘어 있다. 이슬람 신자가 주류인 보스니아계 주민이 전체의 절반을 이루고,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31%, 가톨릭 신도들인 크로아티아계 15%, 유대인과 집시 등 기타 민족 4%로 이뤄져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눈 뜨고도 현실 못보는 전쟁 당사국 향한 경고

    눈 뜨고도 현실 못보는 전쟁 당사국 향한 경고

    몽유병자들/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1016쪽/4만 8000원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공했다. 지금은 세계사에서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 이 전쟁에서 공중폭격이 처음 선보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군용 탐조등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낸 당대의 첨단기술이었다. 케임브리지대 역사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저서 ‘몽유병자들’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있었던 유럽 각 국가의 상황에 주목하며 전쟁의 원인을 파헤친다. 1차 대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0세기를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한 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에 대해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개별 국가가 모두 책임이 있다는 집단책임론과 주요한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피셔 테제’ 간 공방이 이어졌다. 이 같은 논쟁에 대해 저자는 전쟁 이전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접근한다. 앞서 소개한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발칸반도 국가들의 연이은 충돌로 이어졌고, 이는 1차 대전의 빌미가 됐다. 1차 대전은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과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간 대결로 시작했다. 사실 독일에서는 러시아가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1914년 직전,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 편의 ‘난투극’이었던 1912~1913년 발칸의 상황, 발칸에 대한 통제가 약화됐던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정세 등을 보면 왜 이 같은 예상이 빗나갔는지 조금 이해하게 된다.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 사건에서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명분 없는 행동을 묵인했다. 결국 이들 동맹이 사실 내부적으로는 허술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저자는 이탈리아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이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연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 중 하나였다”(395쪽)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차 대전을 얘기하며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라예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조피는 대공비 칭호도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대부분 누가 죽었는지보다는 사건 장소인 ‘사라예보’를 기억할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죽음이 어떻게 당시 유럽의 여론을 바꿨는지를 설명한 저자의 서술도 흥미롭다. 1차 대전이 실제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이 같은 대규모 전쟁을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더라도 1년~1년 6개월의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저자는 결국 당사국 모두가 눈을 뜨고도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몽유병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원인이 아닌 과정을 집요하게 연구한 저자의 접근방식은 전쟁 발발 100주년을 맞은 2014년 1차 대전을 조명한 많은 신간 가운데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이 책은 2017년 12월 북한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이 리용호 북한 외무상을 면담하며 건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몽유병자와 같은 행동에 불과할 것이라는 경고였겠지만, 이 책을 본 독자라면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국가가 몽유병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설지도 모른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지소연, UEFA 챔스리그 시즌 첫 골

    지소연, UEFA 챔스리그 시즌 첫 골

    한국 여자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지소연(27·첼시FC 위민)이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본선 첫 경기에서 시즌 첫 골을 맛보며 도움도 하나 작성했다.지소연은 12일(이하 현지시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의 아심 페르하토비치 하세 슈타디온에서 열린 SFK 2000 사라예보와의 2018~19 대회 32강 1차전에 선발 출전해 전·후반 90분을 모두 뛰며 팀이 3-0으로 앞서던 후반 42분 골문을 갈라 5-0 대승에 힘을 보탰다. 밀리 브라이트가 킥오프 6분 만에 지소연의 도움을 받아 22m 중거리 슈팅으로 역시 시즌 첫 골을 뽑았다. 22분 드루 스펜스가 카렌 카니의 코너킥 크로스에 머리를 갖다대 2-0으로 달아났고, 36분 마리아 토리스도티르가 에린 커스버트의 패스를 파 포스트에 꽂아 넣어 간격을 벌렸다. 프랜 커비의 페널티킥이 상대 골키퍼 선방에 막힌 뒤 6분 만에 지소연이 역시 18m를 날아가는 슈팅으로 골문을 갈랐고 2분 뒤 아델리나 엥먼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대표팀을 이끌어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동메달을 합작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소속팀 복귀 후 지난 9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잉글랜드 여자슈퍼리그(WSL) 개막전에도 80분을 뛰었으나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고, 두 팀은 결국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014년부터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는 지소연은 2017~18시즌 28경기에 출전해 12골을 기록했다. 지난 5월 첼시 레이디스에서 이름을 바꾼 첼시FC 위민은 지난 시즌 WSL과 FA컵 더블을 달성해 클럽 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랐다. 사라예보를 킹스턴의 체리 레드 레코즈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이는 32강 2차전은 27일 이어진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케냐 눈표범 소녀 ’ 阿 역사 새로 쓰다

    ‘케냐 눈표범 소녀 ’ 阿 역사 새로 쓰다

    ‘눈표범’ 사브리나 시마더(20)가 케냐 선수 최초로 올림픽 알파인스키에 도전한다.미국 NBC스포츠 등 외신들은 26일 케냐 여자 알파인스키 대표 시마더가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마라톤 강국 케냐 선수가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98년부터 3회 연속 크로스컨트리 스키에 나선 필립 보이트에 이어 시마더가 두 번째다. 게다가 시마더는 동계올림픽에 나서는 케냐의 첫 번째 여자 선수이며 알파인스키 선수로도 처음이다. 평창에서 그가 남긴 기록은 모두 케냐의 역사가 된다. 시마더는 아프리카, 케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에 표범 무늬 유니폼을 입는다. 그래서 ‘눈표범’으로도 불린다. 시마더는 “케냐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케냐에 뿌리를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올림픽 출전은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다. 케냐를 대표해 나서는 게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들러리는 사양한다. 평창에서 아프리카의 표범이 되겠다. 목표는 당연히 금메달”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라톤 전설인 폴 터갓 케냐 올림픽위원장은 “평창올림픽 출전을 향한 시마더의 열정은 케냐인들이 육상이 아닌 다른 올림픽 종목으로도 시선을 돌리게 한다”면서 “케냐에서도 전통적인 강세 종목 외에도 경쟁력 있는 선수를 키워 내야 한다”고 말했다. 시마더는 눈을 접할 수 없는 태양의 대륙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이민 온 그는 오스트리아인 새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키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키 전문학교에 다닌 시마더는 재능을 보이며 선수의 길을 걸었다. 2012년 오스트리아 지역 대회에서 3관왕을 달성하며 이름을 알렸고 독일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하며 경험도 쌓았다. 이어 2016년 릴레함메르(노르웨이) 유스올림픽부터 케냐 국기를 달고 국제무대에 나섰다. 지난해에는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과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로는 유일하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시마더는 슈퍼대회전에서 39위에 올라 힘겹게 평창행 티켓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지난해 유럽아프리카여성재단이 뽑은 ‘올해의 아프리카 여성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국가가 동계올림픽에 처음 등장한 1984년 사라예보 대회 이래 아프리카 출신 메달리스트는 아직 없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이 계속되면서 평창에서 첫 메달 기대도 커지고 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평창 마이너리포트] 평창 썰매장에 부는 ‘아프리카 바람’

    [평창 마이너리포트] 평창 썰매장에 부는 ‘아프리카 바람’

    가나 스켈레톤 대표 프림퐁 육상·봅슬레이서 전향 출전 나이지리아 아데아그보도 확정 나이지리아 여자 봅슬레이 대표팀에 이어 스켈레톤에서도 가나 남자, 나이지리아 여자 대표가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확정했다. 강원 평창 슬라이딩센터를 찾는 이들은 아프리카 선수들이 썰매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대회 기간인 2월 11일 생일을 맞는 아콰시 프림퐁(32)은 가나 남자 대표로 동계올림픽에 첫발을 내딛는다. 가나 태생이지만 여덟 살에 네덜란드로 이주한 그는 육상 유망주로 2003년 네덜란드주니어선수권 200m를 우승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을 준비하다 부상을 당해 겨울 종목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봅슬레이를 택해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 네덜란드 대표로 뛰려 했으나 아깝게 탈락한 뒤 진공청소기 업체에서 일하다 스켈레톤으로 바꾸고 가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평창 출전권을 따려면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의 ‘대륙 배려’로 세계랭킹 60위 안에 들어야 했는데 지난 주말 레이크플래시드에서 열린 북아메리카컵을 14위와 15위로 마치면서 어렵게 따냈다. 그는 “2018 평창올림픽 스켈레톤에 가나 선수 최초로 출전할 준비를 마쳤다”고 각오를 밝혔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가장 먼저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1984년 사라예보대회 때 알파인스키 라민 게예(세네갈)였다. 소치대회에는 토고와 짐바브웨만 대표를 파견했다. 나이지리아의 여자 스켈레톤 대표 시미델레 아데아그보(36)는 4개월 전에야 스켈레톤을 타봤지만 북아메리카컵 두 차례 레이스를 모두 3위로 마쳐 평창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녀는 생후 2개월 만에 부모의 고국인 나이지리아로 이주해 여섯 살 때까지 산 뒤 미국으로 옮겨 켄터키대학교에서 육상 삼단뛰기와 멀리뛰기 선수로 활약했다. 2003년 스포츠용품사인 나이키 직원으로 취업한 뒤에도 올림픽 출전을 노렸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회사 일 때문에 나이지리아 여자 봅슬레이 대표팀과 인연을 맺어 봅슬레이에 입문했으나 뒤에 많은 권유를 받고 스켈레톤으로 전향했다. 프림퐁과 아데아그보는 2006년 토리노대회에 출전했던 타일러 보타(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올림픽 스켈레톤 선수로 역대 두 번째와 세 번째다. 세운 아디군, 응고지 온우메레, 아쿠오마 오메오가로 구성된 나이지리아 여자 봅슬레이 대표팀은 14일(현지시간)까지 IBSF 세계랭킹 44위를 지켜내 결국 평창 참가를 확정했다. 봅슬레이에 출전하는 최초의 아프리카 팀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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