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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스·동국대(東國大) 정수정(鄭秀貞)-5분 데이트(91)

    미스·동국대(東國大) 정수정(鄭秀貞)-5분 데이트(91)

    「미스·동국」 정수정양은 올해 18세의 풋나기 여대생. 연극영화과 1학년에 재학중. 사업을 하시는 정운달씨(鄭雲達·48)의 2남3녀중 맏딸. 처음으로 연극을 한 것은 서울사대부중(師大附中) 3학년때. 차범석(車凡錫)작 『불모지(不毛地)』에 주역으로 발탁된 이후부터란다. 고등학교때는 「아기별」극회 회원으로 KBS, CBS의 전속성우를 지내기도 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연극반원으로 활약, 얼마전에는 「카페·떼아뜨르」에서 상연한 『아무도 모른다』에서 주역을 맡았다. 집안식구들은 정양이 연극을 하는 것을 찬성하고 적극 도와준다고. 그는 연극을 하는 이유를 『막이 내리고 끝나면 허전해지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또 연극을 하고…』 이렇게 어른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물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연극을 할 생각이란다. 제일 하고 싶은 역은 「토머스·하디」의 작품 『테스』의 여주인공 역. 하루중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세수를 하고 난 뒤 거울을 통해 물방울이 맺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라고. 감명깊게 읽은 책은 『좁은문』. [선데이서울 70년 7월 19일호 제3권 29호 통권 제 94호]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1)신분의 벽 못 넘은 國手 유찬홍

    인왕산에 살면서 위항시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도와주던 임준원의 집에서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시인은 홍세태(洪世泰)와 유찬홍(庾纘洪)이다. 홍세태의 제자 정내교는 스승이 임준원의 집에 얹혀 살았던 이야기를 ‘임준원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유공(유찬홍)의 호는 춘곡(春谷)인데, 바둑을 잘 두었다. 홍공(홍세태)의 호는 창랑(滄浪)인데, 시를 잘 지었다. 이 두 사람의 명성이 모두 당시에 으뜸이었다. 유공은 술을 좋아했는데, 한꺼번에 몇말씩 마셨다. 홍공은 집이 가난해서 양식거리도 없었다. 준원은 유공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좋은 술을 마련해두고 양껏 마시게 했다. 또한 홍공에게는 여러 차례 재물을 주선해주어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었다. 유찬홍은 초기의 국수(國手)로 알려진 전문기사이다. 홍세태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까지 가서 이름을 널리 알렸던 역관(譯官) 시인이다. 유찬홍(1628∼1697)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가장 가깝게 지낸 홍세태(1653∼1725)가 전기를 지어 주었다.(홍세태가 일본에 가서 역관으로 활약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소개한다.) 유찬홍은 9세에 병자호란을 만나 강화도로 피란갔다가 포로가 되어 청나라까지 종으로 붙잡혀 갔다. 집안사람이 돈을 주고 사온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다. 홍세태는 전기 첫줄부터 유찬홍의 암기력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암기력 뛰어난 천재… 훈장에 매 맞으면서도 바둑 몰두 유술부(庾述夫)의 이름은 찬홍, 고려 태사 금필(黔弼)의 후손이다. 이웃에 서당 훈장이 있었는데, 학생 수십명이 모였다. 술부도 그곳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빼어나서 외우기를 잘했다. 여러 학생들이 반을 나누어 과업을 받고 상벌(賞罰)을 계획 세운 뒤, 훈장이 여러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이소경(離騷經)’을 외우는 학생이 있으면 상을 주겠다.” 술부는 집으로 돌아와 ‘초사(楚辭)’를 찾아 옆에다 끼고, 학사 정두경(鄭斗卿)의 집을 찾아가 문지기에게 말했다.“들어가서 공을 뵙고 ‘유찬홍이란 자가 ‘초사’를 배우고 싶어 왔다고 전하소.” 정공은 평소에 약속하지 않고 만나는 것을 몹시 꺼렸는데, 이때 만나서도 매우 간단히 가르쳐줬다. 술부는 곧 돌아와서 ‘이소경’을 읽었다. 날이 밝자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술부도 소매에서 ‘초사’를 꺼내들고 훈장 앞에 나아가 돌아앉아 외웠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훈장이 크게 놀랐다. 술부는 자기의 재주를 스스로 믿고 다시는 공부에 힘쓰지 않았다. ‘초사’는 글자 그대로 초나라 풍의 노래를 모은 책. 굴원(屈原)의 글 25편을 중심으로 제자 송옥(宋玉)의 글 등 몇편이 더 실려 있다. ‘이소경’은 그 첫번째 노래이다. 경(經)이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시인들에게 존중받으면서도 까다롭기로 이름난 글이다. 훈장은 어린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내준 셈. 유찬홍은 겁도 없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정두경을 찾아가 숙제를 풀어 달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뜻도 모르고 그저 외우려 애썼지만, 유찬홍은 뜻을 알아야 외우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찬홍은 그 이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자기 신분의 한계를 이미 알았던 것이다. 정내교는 유찬홍이 국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그 솜씨를 다 배웠다. 아침에 강할 때마다 훈장은 목찰로 그의 오른쪽 손가락을 치면서,“너에게 글 읽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둑 두기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은 더욱 심해져서, 바둑 잘 두는 사람들과 겨루더라도 감히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일시에 국수로 치켜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전문적인 기사라든가 교육기관이 없었다.‘이따금 바둑 두는 사람을 따라 노닐며’ 배웠다. 그가 공부하지 않는다고 훈장에게 매 맞으면서도 바둑 배우기에 힘쓴 것을 보면 1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수를 인정하는 제도가 따로 없어, 자타가 최고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이기면 하루아침에 역시 최고가 되었다. 정내교는 어떤 사람의 평을 빌려 “신기(神棋)로 이름난 덕원군(德源君)이 늙게 돼서야 윤홍임(尹弘任)이 겨우 이겼는데, 술부는 (소년 후배로서) 한창 강성한 때의 홍임을 압도했다. 술부야말로 덕원군의 맞수이다.”라고 했다. 바둑천재로 불렸던 이창호가 9세에 조훈현의 제자로 바둑계에 입문해 20세에 국수위를 스승으로부터 쟁취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유찬홍이 술을 잘 마시고 바둑까지 잘 두자 사대부와 고관들이 그를 불러 함께 놀았다.‘다투어 윗자리에 불러 바둑 두는 것을 보려고 해 그저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바둑돌을 하나 놓으면 사람들이 옆에 울타리같이 둘러서 구경했다. 인기가 높아지자 더욱 거만해지고 술만 취했다 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위항시인들의 모임에서만 그를 환영했다. 그럴수록 술을 더욱 즐겨, 집안사람과 살림도 돌보지 않았다. 술이 떨어지면 이따금 남의 집까지 들어가 술을 뒤져 마셨다. 술에 취하면 아무데나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하루는 술에 취해 이웃 여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소송당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귀양갔다. 홍세태는 ‘유찬홍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재주를 지녔지만 쓰일 곳이 없었으므로, 그 울적하고 불평스러운 기운을 모두 바둑과 술에 내맡겼다.(줄임)당세에 쓰였더라면 어찌 남들보다 못했으랴만, 가난하고 천한 생활로 괴로워하다가 끝내 떨치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슬프다.(줄임)술부로 하여금 자기가 전업했던 바둑을 바꾸어 원대한 사업에 힘쓰게 했더라면 볼 만했을 것이다. 어찌 이에서 그쳤을 뿐이겠는가?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사는 세상 오다 정내교는 천재 유찬홍이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지 못해 과거시험도 못보고 바둑이나 두며 살았던 것을 아쉬워했다.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은 생각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바둑을 하찮은 재주로 여기거나 심심풀이로 생각했다. 아무리 잘 두어도 ‘동네바둑’으로나 여겼다고 할까. 유찬홍 이후부터 국수로 인정받는 전문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둑은 병법이나 학문과도 관련돼 사대부들이 즐겼지만, 바둑을 소재로 쓴 글은 많지 않다. 기보(棋譜)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바둑을 소재로 한 글도 많지 않으며, 전문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도 몇편 되지 않는다. 김윤조 교수는 ‘조선후기 바둑의 유행과 그 문학적 형상’이라는 논문에서 순조(純祖)의 장인으로 대제학까지 지낸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예를 들어 바둑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소개했다. 수원유수(종2품)로 부임했던 그의 종숙부 김이도는 1813년 3월12일 공무를 처리하고 밤중까지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밀쳐두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김조순 자신은 1819년 동짓달 하순에 ‘기자(者) 김한흥(金漢興), 가자(歌者) 군빈(君賓), 금자(琴者) 익대(益大)’와 사냥꾼 한 사람을 데리고 봉원사로 놀러갔다. 그들을 ‘절기(絶技)’라고 불렀는데, 전문기사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동원되는 연예인이자 한시도 떨어져 있기 힘든 관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부터 6년 동안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던 심노숭은 ‘기장 고을에서 서울의 어느 귀인(貴人)에게 1년에 1000벌 이상의 바둑돌을 바친다.’고 기록했다. 심노숭은 그 부당성을 고발한 것이지만, 바둑 열기가 무척 뜨거웠음을 반증한 것이기도 하다. 유찬홍보다 선배였던 삭낭자(索囊子)는 상대가 고수건 하수건 한점만 이기는 삭낭자기법으로 손님을 끌어들여 먹고 살았다. 반면 유찬홍 이후의 국수들은 많은 상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았다. 보성 출신의 정운창(鄭運昌)은 국수 김종기를 꺾으러 평양까지 걸어가 사흘을 문밖에서 버티며 도전했다가 이겨, 순찰사에게 은 20냥을 상으로 받았다. 어느 정승은 그에게 상화지(霜華紙) 200장을 상금으로 걸기도 했다. 그러나 국수 유찬홍은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술을 마셨으며, 시를 지어 울분을 토했다. 한강 물로 술 못을 삼아 마음껏 고래같이 마셔봐야지. 그런 뒤에야 내 일이 끝나리니 죽어버리면 곧바로 달게 잠들 테지. 그대들도 보았겠지. 이 뜬 세상을 만사가 한바탕 꿈이란 것을. 그는 죽어야 신분 차별이 끝나는 중인이었기에, 술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부귀를 맘껏 누렸던 사대부들은 늘그막에 ‘만사는 일장춘몽’임을 느꼈지만, 그는 차별받는 이 세상이 차라리 ‘한바탕 꿈’이기를 바랬다. 국수가 돼서도 벽을 넘지 못했던 17세기 중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전기를 지으면서, 이 두 지역의 민속을 이렇게 구별하여 설명하였다.“서울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종로 남쪽부터 남산까지가 남부이다. 장사꾼과 부자들이 많이 산다. 이익을 좋아하고 인색하면서도, 수레와 집은 서로 사치를 다툰다. 백련봉 서쪽부터 필운대까지가 북부이다. 대체로 가난하고 얻어먹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의협스러운 무리들이 자주 있어, 의기로 사귀어 노닐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흔쾌히 허락하고 남의 어려움을 잘 도왔으며 근심을 함께 하였다. 시인 문장가들이 계절을 따라 노닐며 자연속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마음이 내키면 시를 읊었는데, 많이 짓는 것을 자랑하고 곱게 짓기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북촌은 고관들이 주로 사는 가회동, 안국동, 재동 일대를 가리키지만 북부는 중인과 경아전들이 주로 살던 인왕산과 백악이 이어진 산자락을 가리킨다. ●‘물좋은´ 내수사 경아전 자리 스스로 물러나 임준원은 대대로 서울 북부에 살았던 경아전이다. 신선 같은 모습에다 말솜씨까지 좋았는데, 젊었을 때 최기남(崔奇男·1586∼1669)의 서당에서 시를 배웠다. 최기남은 집이 너무 가난해 선조의 셋째 사위인 신익성(申翊聖)의 궁노(宮奴)가 되었다가 한문을 배워 서당 훈장으로 이름이 났던 위항시인이다. 임준원 역시 시를 잘 짓는다고 칭찬들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한데다 늙은 어버이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실용성 없는 한시만 계속 배울 수는 없었다. 정내교는 그가 큰 돈을 번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임준원은) 드디어 뜻을 굽히고 내수사(內需司)의 서리가 되었다. 임용되어 부(富)를 일으키니, 재산이 수천냥이나 모아졌다. 그러자 ‘내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탄식하더니,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 집에서 지냈다.” 내수사(內需司)는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개국 초에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한 태조 이성계 집안의 사유재산과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므로, 본궁(本宮)이라 불리기도 했던 관청이다. 본래 면세특권을 부여받은 내수사전(內需司田)과 각 지방에 흩어져 일하는 수많은 노비·염전 등을 보유한데다, 왕실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계속 확대했다. 그 폐단이 커지자 “군주는 사재(私財)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워 내수사를 없애자고 건의했지만,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어놓으려는 왕은 하나도 없었다.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申欽)은 영의정까지 지내 국가재정에 훤했는데,‘휘언(彙言)’이라는 글에서 “내수사는 수입이 국가의 일반재정과 맞먹었다. 그곳의 형세가 안전해 양민(良民)과 사천(私賤)이 많이 도망해 들어갔으며,(그 재정은 內需가 아니라) 태반이 내수(內竪)의 개인적 용도로 허비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방대한 재정을 왕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사에 관련된 개인들이 사취한다는 뜻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내수사 노비들이 나라 안에 돌아다니며 거둬들인 돈과 베를 내시들이 주관한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막연히 알지 못해, 임금의 사치심만 날로 더하게 한다.”고 폐단을 논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그곳의 관원 10명은 모두 왕의 심복인 내시였다. 그러다보니 서리 8명이 방대한 재정을 자기 집안의 살림처럼 운용하며 많은 재물을 빼어돌린 것이다. 내수사에 관련된 죄인을 잡아가두는 감옥인 내사옥(內司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리가 많았는데, 그나마 1711년에 폐지되었다. 서리도 전문직이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아야 했고, 선발시험도 보았다.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9월3일 기록에 “전에는 서리를 임명하기 위해 고강(考講)·제술(製述)·서산(書算)을 시험한 뒤에 후보자로 참여시켰는데, 지금은 해이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언제부턴가 읽기, 짓기, 쓰기, 셈하기 등을 시험 보아 적임자를 뽑지 않고, 청탁에 의해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아전 이윤선(李潤善·1826∼1869)이 26년 동안 호조에서 근무하며 기록한 ‘공사기고(公私記攷)’를 분석하여 ‘조선후기 경아전 서리 연구’라는 논문을 쓴 원재영 선생은 호조 아전들이 임용되기 위해서 보통 1500냥 내지 1900냥을 주었다고 했다.‘탁지지(度支志)’에 기록된 서리의 월급은 무명 3필, 쌀 1석5두, 보리 1두5되에 불과했다. 이윤선은 자신의 서리직을 정석찬에게 거금 1800냥에 팔았다가 6개월 뒤에 다시 1900냥을 주고 복직하였다.1847년부터 1855년까지 9년 동안에만도 부동산 투자에 1000냥을 들였으며, 아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주고 독선생을 모셨다.11살 난 아들 용석(容錫)이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고 대견해 한 것을 보면, 아들에게는 사대부 못지않은 교양까지 갖춰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호조 아전들은 다양한 명목의 화폐나 현물을 수시로 받았다고 했으니, 고관 못지 않은 요직이었다. 내수사가 있던 마을을 내수삿골이라 불렀는데, 인왕산 밑자락인 지금의 종로구 내수동이다. 종합청사 뒷길이 내자동길인데, 내수동에서 내자동을 거쳐 사직단으로 이어진다. 내자시(內資寺)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는 식품과 옷감을 조달하던 관청이어서 경복궁 앞에 있었다. 관원들은 승진하면 다른 관청으로 전근하지만 아전들은 평생 한 관청에 있었으며, 대를 이어서 그 일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경복궁 앞의 관청에 소속된 아전들은 출퇴근하기 좋은 인왕산에 많이 살았다. ●가난해 경조사 못 치르는 이들도 지원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어떻게 수천금을 벌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서리직을 팔았다는 기록도 없고,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남부의 중인들 같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인색하지도 않았다. 정내교는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큰 돈을 벌어들인 방법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설명하였다.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는 집에서 지냈다. 문학과 역사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날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찬홍·홍세태·최대립·최승태·김충렬·김부현 같은 시인들이 있었다.” 임준원은 좋은 날이나 경치가 아름다워질 때마다 여러 사람을 불러모았다. 시를 짓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흩어졌다. 정내교가 “서울에서 재주가 좀 있다고 이름난 사람들이 그 모임에 끼이지 못하게 되면 부끄럽게 여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름난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임준원의 집에 자주 모였던 시인들은 대부분 궁노(宮奴) 최기남의 제자들이다. 임준원은 물론 형조 아전 최승태는 그의 아들이고, 김부현은 그의 외손자이다. 홍세태는 역관, 김충렬은 홍문관 서리, 유찬홍은 역관이었다. 문학사에서는 이들의 모임을 낙사(洛社)라고 불렀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 가운데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찾아왔다. 평소에도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어버이처럼 모시는 자가 몇십명이나 되었다.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을 해대는데, 그 여자는 슬프게 울기만 했다. 그가 그 까닭을 묻고는 “그까짓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여자를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불량배를 꾸짖었다.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어버린 채 가버렸다. 여자가 쫓아가면서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가르쳐 주지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부모가 죽은 것 같이 곡을 했다. 더 이상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되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떠나셨소?” 하고 우는 자들도 많았다. 한 늙은 과부가 와서 상복을 만들어 놓고 갔는데, 육조거리에서 구해 준 그 여자였다. 정내교뿐만 아니라 성해응도 임준원의 전기를 짓고, 홍문관 대제학 남유용도 지었다. 남유용은 정내교의 전기를 읽어보고 ‘요즘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라면서 전기를 지었다. 첫 줄에서 ‘호(豪)’라고 표현했는데, 부호(富豪)라는 뜻도 되지만 호걸(豪傑)이라는 뜻도 된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도왔던 그의 이름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남유용의 ‘임준원전’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최기숙 지음

    한문 문체에 ‘전(傳)´이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독특한 행적을 기록하고, 거기에 교훈적인 내용이나 비판을 덧붙인 글을 가리킨다.‘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최기숙 지음, 서해문집 펴냄)는 조선 후기 문인들이 남긴 ‘전´ 중에서 중인·평민·천민이 주인공인 것들을 모아 ‘전´의 작가와 주인공들이 나눴을 법한 대화를 재구성한 책이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홍양호·김조순 등 권세 있는 집안 사람들이 남긴 ‘전´뿐만 아니라 성대중·이덕무 같은 서얼 출신의 저자, 조희룡·유재건 등 중인 출신과 정래교·김희령·김낙서 같은 평민 작가의 ‘전´까지 두루 살핀다. 타고난 지위와 명예가 없는 조선의 마이너리티는 사대부 문인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 중에는 학식이나 문장, 인품이 사대부 못지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풍류패를 이끈 이패두와 거지 두목의 이야기를 담은 성대중의 ‘개수전´, 미인을 돌처럼 본 미소년 이야기인 조희룡의 ‘천흥철전´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1만 1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원과 관직이 없는 자의 양첩 자손은 정5품까지의 관직에 한정한다.”고 규정했다. 양첩 자손은 그나마 한정된 벼슬에라도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천첩 자손은 벼슬할 기회가 없었다. 뛰어난 서얼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정조는 서얼금고법에 해당되지 않도록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잡직(雜織) 관원을 뽑았다. 규장각을 설치한 뒤에,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정무직이 아니어서 기득권층의 반대도 없었고,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서얼 학자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네사람이었다. 당대에 가장 명망있는 서얼 출신의 이 네학자를 4검서라고 불렀다. 유득공은 조선의 문물과 민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 2권1책을 지었으며, 대를 이어 검서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유본예가 부자편이라고 할 수 있는 2권2책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지었다. 바로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들 부자는 필운대 꽃구경을 서울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유득공은 ‘경도잡지’ 유상(遊賞)조에서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北屯)의 복사꽃, 동대문 밖의 버들,(무악산)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水石)을 찾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대부분이 인왕산 일대이다.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시인은 그렇게 새해를 시작하고, 또 한해를 보내며 늙어간다. ●정조도 필운풍류에 취하다 한세대 앞선 시인 신광수는 도화동에서 복사꽃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을 구경했다. “필운대 꽃구경이 장안의 으뜸이라.(雲臺花事壓城中)” 하고는,“삼십년 전 봄 구경하던 곳을/다시 찾은 오늘은 백발 노인일세.(三十年前春望處,再來今是白頭翁)”라고 끝을 맺었다. 반악은 진(晉)나라 때의 미남 시인인데, 그도 나이가 들자 흰머리가 생겼다. 자신은 서얼 출신이라 벼슬 한번 못하고 늙었지만, 반악 같이 잘 생기고 재주가 뛰어난 시인도 나이 들자 흰머리가 생기지 않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고전들은 모두 검색이 가능하다. 한글로 번역한 책에서 ‘필운대’ 제목을 찾으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시 2편과 이덕무가 지은 시 1편만 나온다. 제목은 아니지만 필운대를 노래한 시는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의 작품이 더 있다. 모두 유득공 부자가 필운대 꽃구경을 장안의 명승으로 소개한 정조-순조 시대 인물들이다. 이 당시에 필운대 꽃구경이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이름난 유흥지였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필운대 꽃구경 시를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백단령 차려 입은 사람은 모두 시 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 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에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필운화류(弼雲花柳)’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은 다른 시들과 같이 필운대의 번화한 꽃구경 인파를 노래했다. 뒷부분에선 그 가운데 시인과 독서인을 찾아내고, 장안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하는 속에서 글 읽는 젊은이에게 벼슬을 주어야겠다는 왕자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이 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왕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지 않아 원문 검색만 가능한 문집 가운데는 위항시인들이 지은 시도 많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지 못한 위항인들의 시까지 합쳐 60년마다 편집한 ‘소대풍요(昭代風謠)’나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엄청난 양의 필운대 시가 실려 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해마다 수천명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하며 시를 짓기에 분량은 많아졌지만, 해마다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운대풍월’이란 말 속에는 천박한 풍월, 판박이 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의정 채제공의 화원 구경기 이 시대에 필운대풍월뿐만 아니라, 꽃구경을 하고 산문으로 기록하는 유행도 있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도성 안팎의 화원에 노닐며 지은 글이 여러편 있다. 필운대 부근의 조씨 화원을 감상하고 ‘조원기(曹園記)’를 지었다. 주인 조씨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심경호 교수는 “조하망(曹夏望)의 후손이었던 듯하다.”고 추측하였다. 계묘년(1783) 3월10일, 목유선과 필운대에서 꽃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가마를 타고 갔더니 목유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필운대 앞 바위에 자리를 깔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얼마 있다가 목유선이 이정운과 심규를 이끌고, 종자에게 술병을 들게 하여 사직단 뒤쪽으로 솔숲을 뚫고 왔다. 처음에는 필운대 꽃구경을 하기로 약속하고 모였다. 그러나 인파가 몰려 산속이 마치 큰 길거리 같이 번잡해지자, 채제공은 곧 싫증이 났다. 동쪽을 내려다보자 서너곳 활터에 소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동산 안의 꽃나무 가지끝이 은은히 담장 밖으로 나와 있어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목유선에게 “저기는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야. 가보지 않겠나?”고 물었다.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널빤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점잖은 손님들이 꽃구경을 하겠다고 들어서자 주인이 집 뒷동산으로 인도하였다. 화원에는 돌층계가 여덟개쯤 깔려 있었는데, 붉은 꽃·자주 꽃·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항주·윤상동 같은 관원들도 꽃구경하러 왔다가 채제공이 조씨네 화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라와서 술잔을 돌리고 꽃을 평품하며 시를 지어 즐기느라고 달이 동쪽에 뜬 것도 몰랐다. 이듬해 윤3월13일에도 채제공은 친지들과 함께 가마를 타고 육각현 아래 조씨네 화원에 찾아가 꽃구경을 했다. 석은당에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눕히고 채발을 뽑아 서너 줄을 튕겨 보았다. 곡조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윽한 소리가 나서 정신이 상쾌해졌다. 얼마 뒤에 조카 채홍리가 퉁소 부는 악사를 데리고 와서 한두곡을 부르게 하자, 술맛이 절로 났다. 채제공은 소나무에 기대어 앉아,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하였다. “아양 떠는 자는 사랑받고, 정직한 자는 미움을 사는구나. 수레와 말이 달리는 것은 꽃 때문이지. 소나무야 소나무야. 누가 너를 돌아보랴?” 모두들 맘껏 흥겹게 놀다가 흩어졌다. 채제공은 북저동 명승에 노닐고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를 지었다. “도성의 인사들이 달관(達官·높은 벼슬아치)에서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노닐며 꽃구경을 했다.(줄임)국가의 백년 승평(昇平)의 기상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위항인들의 경제력이 사대부 같이 되자, 유흥문화도 함께 즐겼다는 뜻이다.(화원 이야기는 심경호 교수가 쓴 논문 ‘화원에서 얻은 단상-조선후기의 화원기’를 많이 참조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어린이책꽂이]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을까(박용기 지음, 길벗어린이 펴냄) 인류의 조상과 고인류학자(일명 화석사냥꾼)들의 이야기. 인류는 최소한 500만년 전부터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등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날 우리가 된 것.500만년을 살아온 인류는 앞으로도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류가 살아온 과거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는다.8500원. ●붉은 땅의 기억(장안거 지음, 홍연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66년 시작돼 1976년 막을 내리기까지 10년 동안 중국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문화대혁명을 다룬 그림책. 마오쩌둥은 ‘흑오류(문화대혁명 시기 청산 대상이었던 지주계급·부농·반혁명분자·범죄자·우파분자)’를 비판하며 새로운 사상은 ‘홍오류(빈농, 노동자, 혁명간부, 군인, 혁명유가족)’에 있다고 강조했다.1만 1000원. ●십이야(브루스 코빌 지음, 임후성 옮김, 미래M&B 펴냄)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에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읽고 공연하는 ‘십이야’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다시 썼다. 오시노 공작, 올리비아, 바이올라를 중심으로 한 사랑이야기와 술주정뱅이 토비경, 소심한 겁쟁이 앤드루경, 영악한 시녀 마리아, 똑똑한 척하지만 실제론 어리석은 말볼리오 집사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희극적인 이야기로 구성됐다. 십이야는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세어 12일째가 되는 1월6일 밤이다.1만 2000원. ●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김남일 지음, 창비 펴냄)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단재 신채호는 다층적인 인간이다. 단재는 중국사와 왕조사에 매몰된 사관을 폐기하고 한국사·민중사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또한 웅혼한 필치의 명문을 쏟아낸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이 책은 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때론 단재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망명지의 단칸방에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막막해하는 모습 등을 소개한다.1만 2000원. ●인현왕후전(한상남 지음, 어린이작가정신 펴냄) ‘한중록’‘계축일기’와 함께 조선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인현왕후전’을 알기 쉬운 현대어로 고쳐 썼다. 사대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왕후로서의 덕을 갖춘 인현왕후 민씨는 15세에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궁에 들어온다. 그러나 여러해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데다 희빈 장씨의 갖은 모략으로 중전의 자리를 위협받고 결국 폐위되고 만다.8500원.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그동안 한양 인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들의 이야기를 몇차례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관청의 아전들이 많았지만,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고, 서당 훈장도 있었으며,인쇄전문가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지식인 이라고 평가되는 중인은 과연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다. ●중인의 직업은 수십가지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지으면서,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우리나라 백성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부류를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았다.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농·공·상(農工商) 가운데 한 직업을 택해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혹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하여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그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직업은 네가지가 아니라 수십가지였다. 이 책의 총론에서 그 예를 들었다. “종실(宗室)과 사대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집안이 되고, 사대부보다 못한 계층은 시골의 품관(品官)·중정(中正)·공조(功曹) 따위가 되었다. 이보다 못한 계층은 사서(士庶) 및 장교·역관·산원(算員)·의관과 방외의 한산인(閑散人)이 되었다. 더 못한 계층은 아전·군호(軍戶)·양만 따위가 되었으며, 이보다 더 못한 계층은 공사천(公私賤)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노비에서 지방 아전까지가 하인(下人) 한 계층이고, 서얼과 잡색(雜色)이 중인 한 계층이며, 품관과 사대부를 양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대부가 혹 신분이 낮아져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이 오래 되면서 혹 신분이 높아져 차츰 사대부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인은 전문직업인 이중환이 말한 중인은 서얼과 장교·역관·산원·의관 등의 전문직업인이다. 서얼은 물론 양반이지만 진출에 제한받기 때문에 저절로 중인과 한 부류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위항문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정조시대였는데, 정조(正祖)는 중인과 시정배(市井輩)를 이렇게 구분하였다. “중인에는 편교(校)·계사(計士)·의원·역관·일관(日官)·율관(律官)·창재(唱才)·상기(賞技)·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녹사(錄事)의 칭호가 있다. 시정(市井)에는 액속(掖屬)·조리(曹吏)·전민(廛民)의 이름이 있다. 이것이 중인과 시정의 명분이다. 이들 밖에도 하천(下賤)의 복사역역자(服事力役者)들이 수만이나 되니, 군예(軍隸)·노복(奴僕)·공(工)·상(商)·용고(傭雇)같이 미천한 자들도 또한 낫고 못한 차이가 있다.” 정조가 말한 중인들의 직업을 요즘으로 치자면 장교, 공인회계사, 의사, 외교관 겸 동시통역사, 천문학자, 변호사와 법관, 서예가, 화가, 공무원 등이다. 정조는 중인 외에 시정(市井)과 하천(下賤)을 구분했는데, 이 세가지 계층을 아울러 당시에는 위항인(委巷人)이라고 했다.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인데, 넓은 의미의 중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숙영이 지은 서문에 “유희경은 본래 위항인이다.”고 했는데, 본래는 천한 종이었다.‘화곡집’ 서문에는 “아깝게도 황군은 위항인이다.”라고 했는데, 황택후는 금위영 서리였다.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만이 아니라, 훨씬 낮은 서리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 바로 위항인이다.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위(委)는 곡(曲)이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이다. 즉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 바로 위항이고,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위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로 내려가면서 양반보다 부유한 중인들이 많아졌으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열가지 복을 누린 역관 조수삼 송석원시사 동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호는 추재(秋齋)로 한양 조씨이다. 그의 후배 조희룡은 그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는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다. 문장력이 넓고도 깊었는데, 시에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사대부의 풍채와 문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이 화원이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직업적인 역관이 아니었는데,28세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처음 중국에 따라갔다고 한다.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다. 그 뒤론 북경 사람과 말할 때에도 필담(筆談)과 통역의 힘을 빌지 않았다.” 역관을 선택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몇년 동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그는 북경까지 가는 길에서 중국어를 다 배운 것이다. 여섯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뒤엔 역관의 신분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서울의 모습이 바뀌자, 전에는 듣고 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조수삼은 그러한 이야기를 71편 골라서 ‘기이(紀異)’라는 시를 쓰고 그 앞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군상의 소묘이면서도 사회변화를 보여준다. “내 나무(吾柴)는 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나무를 팔면서) ‘나무 사시오.’라 말하지 않고,‘내 나무’라고만 말하였다. 심하게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무’라고) 외치다가, 나무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틈이 나면 길가에 앉아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고본 경서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위에도 열두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쪽 거리 북쪽 거리에서 ‘내 나무’라고 외치네. 어리석은 아낙네야 비웃겠지만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다오.” 고본 경서를 읽는 것으로 보아 나무 장사꾼은 양반계층에서 몰락한 지식인인 듯하다. 그래서 차마 다른 장사꾼들처럼 “나무 사시오.”라는 존댓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내 나무”라고 반말을 씀으로써 양반 선비의 마지막 체면을 세웠던 듯하다.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 그러나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어도 쓸 데가 없는 것이 당시 사회였고, 그런데도 끝까지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서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에 비하면 조수삼은 행복한 중인이었는데, 조희룡은 그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가지란 첫째 풍도(風度), 둘째 시문(詩文), 셋째 공령(功令), 넷째 의학, 다섯째 바둑, 여섯째 서예, 일곱째 기억력, 여덟째 담론, 아홉째 복택, 열째 장수이다.” 8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여 남의 부러움을 샀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공령문인데, 과거시험 때에 쓰는 시나 문장이다. 양반들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답안지를 쓰기 위해 공령문을 배웠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 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문집에 공령시가 실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의 문집에는 공령시가 57편이나 실렸다. 그가 공령시를 잘 지었다고 소문났지만, 자기가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이 아니라 양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연습한 것이다. 그는 61세에 경상도 관찰사 조인영의 서기로 따라갔는데, 실제로는 가정교사이다. 그는 83세에야 진사에 합격했는데, 영의정 조인영이 시를 짓게 하자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를 지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합격자 명부인 방목에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표시했으니,83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진사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응시했는데, 그는 60년이나 뒤처졌다. 시의 제목은 “진사시 합격자를 발표한 날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입으로 읊은 시”이다. 조인영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기쁨을 시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한 것인데,“가까스로” 합격해 난삼을 걸친 기쁨과, 몇백 짐의 책을 외우고도 60년 늦게 합격한 중인의 한을 함께 표현했다. 그나마 영의정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전문직업을 지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면서도 신분적으로는 60년이나 양반에게 뒤진 것이 바로 중인의 한계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단 한명도 학원 다니지 않는 학교 만들렵니다”

    “단 한명도 학원 다니지 않는 학교 만들렵니다”

    “단 한 명의 학생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올 3월 서울 묵동에 첫 개방형 자율고로 문을 여는 원묵고 공모교장으로 부임하는 박평순(56) 교장은 22일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지역사회가 원하는 학교를 만들어 보이겠다.”며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개방형 자율고는 학생선발권과 교원 인사권, 교육과정 편성·운영권에서 교장에게 자율권을 주는 형태의 학교다. 지난해 말 전국에서 선정된 자율고 4곳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 지역 학교다. ●철저한 맞춤식 수업… 과목별 강사 활용 박 교장이 밝힌 학교 운영구상은 단 하나. 학생과 학부모,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전인교육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가 인성교육을 시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다양한 인성교육을 통해 학습동기가 올라가면서 오히려 입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되, 이를 바탕으로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원하는 실력까지 갖추게 하겠다는 복안이다. 그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학교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 우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부터 개선할 생각이다. 학생 개개인 맞춤식 수업을 위해 영어와 수학 교과에는 상·중·하의 수준별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기초가 부족한 ‘하’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10명 안팎으로 구성해 철저한 맞춤형 개별지도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주요 교과는 수준별 보조교재를 만들어 활용하고, 학생들의 교과 선택권을 최대한 늘려주기 위해 과목별 강사도 대거 채용할 방침이다. ●전인교육 활성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인재로 전인교육도 활성화한다. 서울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축제와 체육대회 등 교내외 행사를 부활하고, 지방 농촌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어 농촌체험 및 봉사활동도 적극 펼칠 생각이다.‘공부벌레’가 아닌 실력도 갖추면서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취지다. 그는 학교 운영과 관련해 “다행히 지역사회의 관심이 커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그의 의욕을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공모교장으로 결정된 직후에는 중랑구 지역 주민들 모임인 ‘원묵고 좋은학교 만들기 추진위원회’의 요구로 비공식 ‘인사 청문회’까지 받았다. 당시 주민들은 “중학교 교장이 와서 뭘 하겠느냐.”며 부정적이었지만 “부모들이 원하는 학교로 만들어 주겠다. 단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 믿어달라.”는 박 교장의 말에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새로운 학교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박 교장에게도 고민은 있다. 바로 돈이다. 개방형 자율고로 지정돼 학교 운영비 외에 별도로 1억원을 지원받지만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에도 추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중복 지원은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랑구청에서도 적극 지원을 약속했지만 재정자립도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전폭적인 지원은 어려운 실정이다. 박 교장은 지난해 11월 1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모교장으로 뽑혔다. 서울대 사범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사대부고 교사,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상계고 교감 등을 거쳐 2005년 9월부터 용마중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다양한 인성교육을 강조하면서도 5·6차 교육과정 당시 수학교과서를 집필하고,10년 이상 진학지도를 맡아온 입시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글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 김홍도 그림으로 시첩 만들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 김홍도 그림으로 시첩 만들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를 짓고 서문과 발문을 붙여 시첩을 엮었는데,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하지는 않고 저마다 필사하여 간직했다. 팔기 위해서 만든 책이 아니라, 동인들이 돌려가며 읽고 즐기기 위해 만든 책이다. 사대부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계회도(契會圖)를 참석자 숫자만큼 제작한 것처럼, 송석원시사의 시첩도 한번 모일 때마다 여러권 만들어졌다. ●송석원시사 시첩에 그림까지 그날 지은 시와 산문만을 보통 편집했다. 하지만 규장각 서리 임득명(林得明·1767∼?)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날의 모습을 자신이 직접 그려 시첩을 만들었다. 재산이 넉넉한 시인들은 이름난 화원에게 그림을 부탁해 앞에 싣기도 했다. 비점과 도서를 붉은 색으로 찍고 비평을 붉은 글씨로 덧붙여, 시첩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풍조가 생겼다. 김의현의 시에는 “비록 적지만 또한 넉넉하다(雖少亦足).”라는 평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표지를 명필의 글씨로 꾸며 호화로운 서화첩(書畵帖)을 만들었다. 자연히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시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글씨에도 공을 들였다. 1791년 6월15일에는 송석원시사 9명이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다. 이날 지은 글들을 김의현(金義鉉)이 모아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라는 시첩을 만들었다. 이 시첩 앞에는 도화서의 동갑내기 화원인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이 실려 있다. 첫 장에 실린 이인문의 그림 오른쪽 위에 “단원 집에서 그렸다(寫於檀園所).”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인문이나 김홍도 같은 화원들이 시인들의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을 받고 두 사람이 김홍도의 집에 모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원로 위항시인 마성린이 1797년에 김의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상 위에 놓인 ‘옥계청유첩’을 보고 발문을 덧붙여 써주었는데, 그때 이미 두 사람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김홍도 그림 한점은 900만원 이인문은 송석원에 중인들이 낮에 모인 모습을 그렸고, 김홍도는 밤에 모인 모습을 그렸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가 두 사람의 그림을 같은 주제로 부탁해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유홍준(현 문화재청장) 교수는 “이인문이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고 평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의현은 평생 인왕산에서 서화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던 위항시인 시한재(是閒齋) 김순간(金順侃)의 아들로 자는 사정(士貞), 호는 용재(庸齋)이다. 대대로 경아전 생활을 하며 집안이 넉넉했기에 당대 최고의 화원 두 사람에게 그림을 부탁해 시첩을 장식했다. 강명관(부산대·한문학)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김홍도는 그림값으로 쌀 60섬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송석원시사의 후배격인 직하시사(稷下詩社)의 동인 조희룡(趙熙龍·1789∼1859년)이 위항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엮었다. 여기 실린 ‘김홍도전’에 의하면 3000전을 주면서 그림을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상평통보 하나가 1푼, 열푼이 1전,10전이 1냥이다.3000전은 300냥인데,18세기 쌀 한 섬의 평균시세가 5냥이었으니, 김홍도는 쌀 60섬을 받고 그림 한폭을 그려준 셈이다.2006년 평균 산지 쌀값이 한가마에 15만원이었다고 하니, 요즘 시세로 치자면 900만원쯤 받았던 셈이다. 이 그림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그림들은 얼마를 받고 그렸는지 알 수 없다. 하지 강세황(姜世晃·1713∼1791년)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 의하면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비단이 무더기로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여, 미처 잠자고 밥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홍도의 그림값 자체가 당시 위항문화의 수준을 보여 주지만, 그러한 그림값을 지불해 가며 시첩을 장식했던 김의현의 태도에서도 송석원시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조의 은혜 기려 시첩 제작 그림을 부탁한 김의현은 규장각 서리이다. 문예부흥을 꿈꾸었던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檢書)는 물론 서리까지도 우대하여 대대로 문장을 하는 집안에서 뽑았다. 또한 이들에게 쌀이나 돈도 자주 내리며 격려했다. 규장각 서리들을 다른 서리와 구분하여 사호(司戶)라 부르고, 그들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사호헌(司戶軒)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조는 무예에도 관심이 많고 활쏘기를 즐겼다. 정조가 1792년 10월30일 창덕궁 내원(內苑)에서 활을 쏘고 고풍(古風)으로 쌀 한섬과 돈 10냥을 사호헌에 하사했다. 고풍이란 예에 따라 상관이 하관에게 돈이나 물건을 내려주는 것이다. 규장각 서리들은 이 일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당시 규장각 직각이었던 서영보에게 그 사연을 기문(記文)으로 받아 판각하여 사호헌에 걸었다. 이 현판 끝부분에 규장각 사호와 서사관(書寫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덕구, 김의현, 박윤묵, 임득명, 김낙서 등이 모두 송석원시사 동인들이다. 규장각 서리 가운데 송석원시사 동인들이 많으며, 임금이 이들의 글재주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 사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시첩을 만들었다. 서영보의 기문을 판각하게 된 경위를 박윤묵이 쓰고, 유상우·김의현 등이 시를 지었다. 이 글들을 모은 시첩이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이다. 즉 “임금께서 활을 쏘시고 고풍을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지은 글들을 모은 첩”이란 뜻이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첩을 엮었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호화스러운 ‘옥계청유첩’을 만들고,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어사고풍첩’을 만들었다. 일년 사이에 인왕산과 창덕궁에서 만들어진 이 두 권의 시첩은 송석원시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 어우야담/유몽인 지음

    조선 중기의 문장가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은 야담문학의 효시를 이루는 한국학의 고전이다. 민간의 비루한 일들을 기록한 책인 만큼 작품성이 폄하됐지만, 민중적인 소재는 일부 사대부 계층의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어우야담’의 초고는 유몽인이 인조반정 당시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면서 분산 전승돼 왔다. 현재 전해지는 ‘어우야담’의 이본(異本)은 30여종. 야담집으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다. 이번에 출간된 ‘어우야담’(신익철 등 옮김, 돌베개 펴냄)은 이런 이본들을 모조리 대조해 펴낸 완역 정본(定本)이다. ‘어우야담’이 지닌 필기적 성격과 야담적 성격을 온전히 복원해 냈다.‘만종재본’을 포함한 이본대비표를 부록으로 실어 야담 텍스트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전 2권 6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74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儒林(743)-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4) 꺼져가던 불길은 두향이가 저고리 깃을 집어넣자 한순간 다시 불꽃이 일고 이내 모든 것이 타올라 한줌의 재가 되었다. 두향은 타고 남은 재를 남한강의 푸른 물속에 집어넣었다. 노을이 비낀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고 한줌의 재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강물 속으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 두향은 궤연 옆에 놓여있던 치마를 펼쳐 입었다. 그 치마에는 퇴계가 생전에 써주었던 전별시가 적혀 있음이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하는구나.” 20여 년 만에야 완성된 나으리의 전별시. 두향은 강선대 위에서 잠시 서편 하늘에서 타오르는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으리의 시를 소리내어 읊어보았다. 오래지 않아 두향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굴러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흩날리는 낙화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두향의 몸이 강물 속으로 내리꽂혔다.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틀 후에야 두향의 시신이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나룻배를 젓는 뱃사공이 두향의 시신을 발견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초당으로 달려가 보았는데, 방안에는 짧은 유서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주십시오.” 다음날인 3월21일. 마침내 퇴계의 유해는 건지산( 芝山)에 묻혔다. 이때의 기록이 퇴계선생연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21일. 예안현(禮安縣) 건지산( 芝山) 남쪽 줄기 자좌(子坐)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례에는 원근의 사대부와 유생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국장의 감역관(監役官)으로는 귀후서(歸厚署) 별좌(別坐) 김호수(金虎秀)가, 그리고 가정관(加定官)으로는 빙고(氷庫) 별좌 김취려(金就礪)와 예빈사(禮賓寺) 별좌 최덕수(崔德秀)가 명령을 받고 내려와서 장례의 제반사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퇴계의 장례를 치르던 날. 퇴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매형에서 눈부신 매화가 피어났다. 원래 매화꽃은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째에 해당되는 대충 3월12일 무렵에 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퇴계의 장례가 끝나는, 그보다 열흘이 지난 계춘(季春)에야 뒤늦게 꽃이 피어난 것이었다. 그것도 어느 순간 한꺼번에 극채색의 아름다움을 폭발하여 단숨에 피어난 것이었다. 흰 매화꽃에서는 천진한 옥설의 방향(芳香)이 뿜어 나와 주인이 사라진 도산서당 안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 [차이야기] 역사에 기록된 차인茶人

    [차이야기] 역사에 기록된 차인茶人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그 의미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근간을 말할 때는 보통 선비정신이라고 말한다. 수기치인이 바탕이 된 선비. 즉, 사대부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힘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아닌 명분과 의리를 밝혀 국민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수기(修己: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닦음)를 바탕으로 치인(治人:남을 다스림)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선비는 문장과 역사와 철학의 이치를 깨우쳐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시·서·화(詩·書·畵)를 통한 예술적인 감성을 갖춘 완전한 인간형을 지향한다. 그들 중에서도 차생활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은 역사에 기록된 차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라 경덕왕 때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를 만든 충담 스님을 들 수 있는데 왕의 요청으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리자 스님을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라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 안민가 이때 스님은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올리고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주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이 시기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차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차인 중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토황소격문 등으로 중국에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은 귀국 후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난세를 절망하여 각지를 유랑하던 그가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할 때 지은 것으로 현실과 뜻이 맞지 않아 고뇌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잘 나타내고 있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제가야산독서당 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의 《계원필경》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차를 보내드렸다는 부분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상류층에서는 차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어, 잡념이나 번민을 없애는 수양의 방편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글 문정희 인천예절원 부원장 겸 인천차인회 회장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 언어 듣기평가에 잡음… 재방송 소동

    입시제도 변경 전 마지막인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6일 어김없이 찾아온 ‘수능 한파’ 속에 전국 971개 시험장에서 치러졌다. 낮은 기온에 바람까지 강하게 불면서 가뜩이나 긴장한 수험생과 학부모의 체감온도는 더욱 떨어졌다. 시험은 전국에서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고사장 잘못 찾아간 수험생도 많아 하마터면 시험을 보지 못할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올해에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구 수성구에서는 임모(18)양이 고장난 아파트 승강기에 갇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까스로 구조돼 시험장으로 갔다. 경기도 고양시에서는 임신 8개월의 늦깎이 수험생 박모(36)씨가 119구급차를 타고 능곡중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경찰은 입실에 늦을 우려가 있거나 고사장을 잘못 찾아간 수험생 826명을 시험장에 데려다 주고 수험생 53명에게 수험표를 전달해 줬다. 경북 영주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전국 최고령 수험생 권춘식(78·농업·영주시 이산면)씨가 손자뻘되는 학생들과 함께 시험을 봤다. 권씨는 지난해 8월 고입 검정고시와 지난 5월 고졸 검정고시에서도 전국 최고령으로 합격해 화제를 모았다.4년 전 부인과 사별해 혼자 끼니를 해결하면서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최연소 응시자는 전북 전주시 양지초등학교를 졸업한 최은혜(12)양이었다. 지난 4월 고입에 이어 8월 고졸 검정고시까지 최연소 합격했다. 서울 강남구 구정고등학교와 마포구 숭문고등학교, 성북구 석관고등학교 등 시험장에서는 1교시 언어영역 듣기평가 방송 중 잡음이 나거나 방송이 끊기는 사고가 났다. 구정고의 경우 전체 32개 시험실 중 18개 시험실에서 문제가 생겼고 숭문고, 석관고에서는 방송테이프 불량으로 전체 시험실에서 방송이 끊겼다. ●수능 고사장에 응원 나오면 봉사점수 각 학교에서는 1교시 시험이 끝난 뒤 휴식시간을 이용해 문제를 재방송했다. 이로 인해 2교시 수리영역이 늦게 시작됐고 그 만큼 점심시간이 줄었다. 구정고에서 시험을 본 중대사대부고 노정현(18)양은 “문제가 갑자기 나오지 않아 깜짝 놀라는 바람에 다음 문제를 푸는 데 지장을 받았다.”며 속상해 했다. 올해 수능에서도 시험장에 지참할 수 없는 물건을 갖고 있다가 부정행위로 간주돼 시험이 무효처리된 학생이 속출했다. 이날 오후 7시30분 현재 전국적으로 부정행위로 간주된 수험생은 모두 36명. 휴대전화 소지가 26명으로 가장 많았고,MP3 소지 4명, 기타 전자기기 소지 1명,4교시 탐구 영역 시간에 응시 규정을 어긴 경우 5명 등이었다. 상당수 고등학교들이 아침에 시험장에 나가 선배들을 응원하면 봉사 점수를 주기로 해 이를 바라고 나온 고 1∼2학년 학생들이 많았다. 풍문여고에서는 수험생들이 오전 8시20분쯤 입실을 완료하자, 응원하던 1∼2학년 학생들이 출석 확인을 받으러 몰려들기도 했다. 이 학교 2학년 김은이양은 “수능 고사장에 응원을 나오면 봉사시간을 4시간이나 쳐주기 때문에 1∼2학년생 50명 정도가 나왔다.”고 말했다. 교문에 엿이나 떡을 붙이며 긴장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전보다 줄었고 비교적 여유있는 모습들이 많았다. 황인자(49·여)씨는 아들이 서울 경기고 시험장에서 자리를 확인하는 장면을 ‘폰카’로 찍는 여유를 보였다. 황씨는 “평생 한 번뿐인 아들의 수능시험 당일 모습을 남겨 두고 싶었다. 실력 이상의 성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크게 긴장은 안 된다.”고 말했다. ●출제요원 652명 33일만에 합숙서 해방 수능시험 출제본부 요원 652명은 이날 오후 6시15분 5교시가 끝나면서 33일간의 합숙생활에서 풀려났다. 교사·교수 등 출제위원단 294명, 검토위원단 183명, 경찰·보안요원 등 관리요원단 175명이다. 이와 별도로 경기도 성남시 대한교과서㈜에 마련된 인쇄본부의 요원 170여명도 보름간의 ‘감금생활’에서 해방됐다. 경찰청은 오는 22일까지 1주일간을 청소년 선도·보호활동 기간으로 정하고 수험생들의 음주 등 탈선행위 예방활동에 나선다. 김기용 이재훈 서재희 윤설영기자 kiyong@seoul.co.kr
  • [토요영화]

    [토요영화]

    ●음란서생(캐치온 오후 2시10분) 화면 위에 생생한 색채감과 질감을 구현해 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의 또 다른 성취를 보여줬던 영화. 사대부 명문가의 자식인데다 글솜씨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윤서(한석규)는 사헌부 고위직에까지 앉아 있지만, 정치 생각은 없다. 당파싸움에 멀쩡한 사람조차 병신되는 그 놈의 판에 무슨 미련 있으랴. 그러다 왕이 총애하는 후궁 정빈(김민정)의 명을 받아 어떤 사건 수사에 나서게 되고 이 와중에 도성 내에 음란서적을 유통시키는 황가(오달수)를 알게 된다. 이 때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 윤서는 스스로 음란소설을 쓰게 되고, 반대 당파의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도 끌어들여 삽화까지 그려넣는다. 이로써 가을에다 달까지 겹쳐 음란요상한 기운이 마구 샘솟는 ‘추월색(秋月色)’이라는 의문의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가 썼다는 검은 계곡의 은밀한 이야기 ‘흑곡비사(黑谷秘事)’라는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가 탄생한다.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흑곡비사의 명성은 정빈의 귀에까지 들어가는데…. 완벽에 가까운 의상·미술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촬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즐겁게 해주고, 혀 짧은 소리 내는 배우가 득시글하는 판국에 한석규와 이범수의 풍성한 성량은 귀를 즐겁게 해주고,‘댓글’·‘동영상’·‘폐인’ 같은 요즘 인터넷 문화를 유머스럽게 녹여낸 재치는 머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1000만명 시대를 연 사극영화 ‘왕의 남자’에 비해 드라마의 힘이 다소 모자란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는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정빈과 윤서의 금지된 사랑이나, 왕(안내상)과 내시(김뢰하)와 정빈간에 성립하는 또 다른 물고 물리는 관계에 집중하는데 왠지 뜬금없이 겉도는 느낌이 강하다. 결정적인 대목은, 정말 음란하겠지 기대하는 시청자는 그 기대를 한참 낮춰야 한다는 점이다.2006년작,139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오르페브르36번가(KBS2 밤 12시25분) 지난 주 ‘늑대의 제국’에서부터 주말 안방을 찾고 있는 ‘KBS프리미어페스티벌’ 영화의 두번째 작품. 지난해 프랑스에서 흥행 1위를 차지했고, 베를린영화제에서도 호평받았다. 제랄르 드파르디유가 경찰서장이 될 욕심에 친구를 배신하는 악질 경찰 ‘클랑’을, 다니엘 오테유가 클랑 때문에 아내를 잃고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는 형사 ‘레오’를 연기했다. 같은 사건을 수사하던 동지에서 점차 적으로 바뀌어가고, 또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일품으로 꼽힌다.2004년작 110분.
  • [seoul in] 어린이보호구역 4곳 개선 계획

    종로구(구청장 김충용) 올해 말까지 어린이보호구역 개선사업에 6억 5000만원을 지원한다. 올해는 서울사대부속·상명대부속·교동·운현초등학교 앞 등 4곳이다. 어린이 통학로 확보는 선진국형 ‘교통평온화기법’을 도입해 시공하고 있다. 구는 2003년 혜화초 등 2개교,2004년 매동초 등 2개교에 이어 지난해 재동초 등 5개교에 대한 어린이보호구역 개선사업을 마쳤다. 교통행정과 731-1520.
  • [우리구 구청장 궁금하시죠] 취임 100일 맞은 김영순 송파구청장

    [우리구 구청장 궁금하시죠] 취임 100일 맞은 김영순 송파구청장

    “사무실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현장 활동을 더 늘릴 생각입니다. 취임전보다 일 욕심을 더 내도 될 것 같습니다.” 서울의 첫 여성구청장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영순(57) 송파구청장의 취임 100일 소감에는 강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는 정무 2차관, 대학교수, 국내외 NGO 대표 등 다양한 경험을 한 주목받는 ‘여성 리더’이다. 그는 “여러 경험을 지방행정에 접목시켜 ‘품격있는 명품 도시’,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열린 구청장으로 주민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말했다. ●“송파구와는 찰떡 궁합” “송파 구청장이어서 정말 행복합니다.(내가 할 일이 많아) 송파구는 저와 궁합이 맞는 것 같아요.” 그는 취임초기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그동안 송파의 인적·물적 인프라 등을 살펴본 결과, 목표를 더 높게 세워도 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붙는다며 의욕을 내비쳤다.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높은 관심과 공무원들의 열정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추석 다음날인 지난 7일 새벽 3시 장지동 화훼마을 비닐하우스촌에 불이 났어요. 연락을 받고 현장에 나가 보니 직원들이 새벽부터 나와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고요. 정말 공직자로서 책임감이 있고, 훈련이 잘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이야기는 주민들에 대한 자랑으로 옮겨 갔다.“주민들의 높은 관심을 보며 힘을 얻었어요. 얼마전 구민 체육대회를 했는데 구민들이 역할을 분담해 자발적으로 행사를 끌어 나가더라고요. 자원봉사자 수도 인구의 10%인 6만명에 달합니다.” 김 구청장은 지난 100일 동안 구정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정책을 만드는데 진력했다. 소외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하위직 공무원들과는 ‘계급장을 떼고’ 기탄없이 대회도 나눴다. ●“구민의 행복지수 높이겠다.” 그가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문화·환경·복지다. “송파구에는 현재 제 2롯데월드 건설과 잠실저밀도 재건축, 문정·장지지구 개발, 거여·마천 뉴타운, 송파신도시 등의 개발이 한창 진행중입니다. 구 전체 면적의 35%(359만 2000평)나 되는 넓은 지역에서 개발이 추진중이어서 내가 더이상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환경·복지 분야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품격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송파문화예술센터’의 건립이다. 콘서트홀과 지역 컨벤션센터 기능을 겸할 수 있는 1500석 규모의 지하 2층, 지상 3층 4500여평 규모의 문화예술센터를 만들어 수준높은 문화도시를 만드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했지만 이 가운데 백미는 ‘아토피 어린이집’. 내년 3월 문을 여는 아토피어린이집은 송파동 여성문화회관 2층에 130여평 규모로 100여명을 돌볼 수 있다. ●자족기능 갖춘 명품도시 건설 도시 밑그림도 다시 짜고 있다. 곳곳에서 개발이 진행중인 송파구가 향후 10년 뒤에는 현재 인구 62만명에서 인구 100만명이 넘는 거대 자치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중된 주거중심의 도시기능 체계와 인프라 등을 구축해 자족도시로서 체질 개선에 나설 계획이다. 그는 송파대로변 일대를 비즈니스거리(상업지역)로 만든다는 복안이다.16일 구를 방문한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송파대로 일대를 일반 주거·준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상향조정해 달라고 적극 건의했다. 송파의 매력인 ‘쾌적한 주거환경’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올림픽로에 올림픽 상징벨트를 조성해 ‘축제·화합의 거리’로, 남부순환로에 실개천과 쉼터를 만들어 ‘사계 추억의 거리’로, 위례성길을 ‘역사·문화의 거리’로 각각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또 성내천을 서울시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와 연결해 생태를 복원할 방침이다. 그러나 자치를 가로막는 구조적인 문제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지방자치의 본질은 예산과 인사인데 중앙정부에서 틀어 쥐고 있어 자치단체장에게는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다.”면서 “지방자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자치권한이 부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구청장은 끝으로 “이제 100일 지나 걸음마를 시작했다.”면서 “송파구가 명품도시, 행복도시로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도록 항상 주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김영순 구청장은 ▲출생 1949년 7월15일 충북 음성 ▲학력 서울사대부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한양대대학원 정치외교학과(석·박사) ▲경력 한나라당 부대변인, 정무2차관,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연구교수,(사)21세기 한중교류협회 부회장,(사)전문직여성(BPW)한국연맹 회장, 국제인구보건복지연맹(IPPF) 아·태지역 이사, 국제인구개발위원회 초대회장, 여성채널 GTV회장 ▲가족관계 남편 정태조(62)씨와 1남 2녀 ▲취미 영화감상, 명상 ▲종교 기독교 ▲애창곡 최은옥의 빗물 ▲기호음식 청국장, 두부, 산채비빔밥 ▲존경하는 인물 어머니 ▲좌우명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라
  • [부고]

    ●강병산(예임 회장)시영(대경CRE 사장)씨 모친상 정우택(삼성물산 사장·상담역)박정환(삼보지질 부사장)씨 빙모상 9일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792-1656●오재관(파주YMCA 사무총장)대성(외교통상부 본부 대사·고려대 정외과 겸임교수)정자(덕성여대 동양학과 교수)씨 부친상 김문언(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씨 빙부상 최옥자(금화초등학교 교사)강신영씨 시부상 1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92-0299●이재실(서울사대부고 교사)재정(형제실업 이사)재면(프레임아웃 팀장)씨 부친상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신경철(서울도시가스 팀장)이진백(유신코퍼레이션 차장)씨 빙부상 10일 한양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40분 (02)2290-9458●임행자(순천왕지초등학교 교사)규석(스타덴트 대표)규현(자영업)규준(매일경제신문사 부동산부장)씨 모친상 10일 서울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30분 (02)2072-2022●장영진(리바트 홍보과장)씨 부친상 김용호(우리은행 IB사업단 부부장)박상규(대신증권 안중지점장)김태우(트랜스코스모스 부장)씨 빙부상 10일 평촌 한림대성심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31)386-2345●김종발 종도(수원대 교수)씨 모친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3410-6919●홍병진(중소기업진흥공단 부장)성철(부산대 교직원)성언(노벨리스코리아)씨 모친상 한기석(자영업)씨 빙모상 10일 경북 영주시 상줄동 추모의 집, 발인 12일 오전 7시 (054)633-4441●박지현(대한생명 대구영업지원단장)홍석 형기 종필(IBM코리아 이사)씨 부친상 이미옥(광민초등학교 교사)씨 시부상 윤영근씨 빙부상 10일 경북 청도군 대남병원, 발인 14일 오전 8시 (054)371-5792●송치호(LG상사 상무)치영(국민대 교수)치윤(LS전선 부장)씨 부친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14●조원제(세무사)씨 모친상 정민(액센츄어 부장)윤구(리앤목특허법률사무소 변리사)씨 조모상 박영호(사업)씨 빙모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410-6912●정준기(유베이스 연구원)은희(동인천여중 교사)씨 부친상 정태영(대우증권 부장)정용익(실리콘웍스 주임연구원)씨 빙부상 10일 인천 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32)472-0871●이철환(한주전자 대표)철성(우지하이텍 〃)씨 모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3010-2291●윤병무(비엠월드 대표)병돈(〃 대전지사장)씨 부친상 배인환(우리은행 논현지점장)씨 빙부상 9일 대전성모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30분 (042)220-9971●김광섭(사업)규섭(현대KT 대표)씨 부친상 조규화(익산 남성여중 교사)씨 빙부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3010-2294●김희중(서울경제 논설위원)태중(사업)씨 부친상 양회관(사업)씨 빙부상 9일 강북삼성병원, 발인 11일 오전 9시 (02)2001-1093●박준천(한국신에츠실리콘 부장)미경(동일여자전산디자인고 교사)씨 부친상 신용원(성재의원 원장)씨 빙부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1일 오전 8시 (02)3010-2293●오수환(신용보증기금 부장)병환(좋은유치원 이사장)정환(드래곤정기 이사)씨 부친상 10일 대전 건양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42)544-4634●이팔성(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영길(사업)씨 모친상 이정룡(GE바이오사이언스 이사)씨 빙모상 10일 부산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51)240-7848●이진호(전 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씨 별세 상(삼성SDS)씨 부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3010-2261●이우명(전 KPGA 프로골퍼)씨 별세 상구(소니 컴퓨터엔터테인먼트코리아)씨 부친상 김태연(CJ홈쇼핑)씨 시부상 10일 건국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2030-7903
  • [씨줄날줄] 조령모개/진경호 논설위원

    조령모개(朝令暮改)의 역사는 유구하다.‘사기(史記)’는 전한(前漢)시대, 즉 기원전 2세기 문제(文帝)의 어사대부 조조가 이 말을 썼다고 전한다. 관청의 잦은 부역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며 아침에 내린 영(令)을 저녁에 거두는 식의 나라 운영을 바꿀 것을 상소했다고 한다. 정부의 잦은 정책변화가 민중을 고달프게 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 정치에서 정치인의 말바꾸기는 따로 사례를 정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상화돼 있는 게 현실이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라지만 정치인의 말바꾸기도 무죄라는 판결도 있다.2001년 DJP연합과 관련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지법 민사합의10부는 “유동적 정치현실에 따른 공약 파기가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으나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인과관계는 없다.”라고 판결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참여정부 들어 정치권의 말바꾸기 논란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름깨나 알려진 여야 정치인들 상당수가 말바꾸기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노무현 대통령만 해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반대를 엊그제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말로 뒤집었다. 열린우리당이 엊그제 조령모개의 백미를 선보였다. 대선후보 선출 방식으로 이른바 ‘오픈 프라이머리’라는 국민경선제 도입을 선언한 것이다. 인물을 좇는 과거 정치를 끝내자며 민주당을 뛰쳐 나와서는 결국 인물을 좇는 제도를 뽑아든 꼴이다. 이는 사실상 열린우리당이 창당 근거이자 개혁의 상징으로 내세웠던 기간당원제의 용도 폐기를 뜻한다. 정당의 존립이유인 정권 창출 과정에서 기간당원의 권리를 배제-비당원과 동등하게-하고 기간당원 정당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당의 오픈 프라이머리 TF팀 간사 백원우 의원은 “(국민경선제를 도입해도)당원의 참여가 가장 높을 것”이라고 했다.‘당직은 당원에게, 공직은 국민에게’라는 기치 아래 지지율 높은 후보를 뽑겠다고 택한 국민경선제의 취지와 부닥치는 발언이다. DJ에 따르면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고, 찰스 다윈은 “강한 생물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생물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터득한(?) 열린우리당의 변신은 그래서 무죄인가?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딸자랑] 梨大 金用濟씨 막내 따님 金東惠양

    [딸자랑] 梨大 金用濟씨 막내 따님 金東惠양

    이대(梨大) 법정대(法政大) 교수 김용제(金用濟)씨는 여성전유(女性專有)의 「캠퍼스」에서 뿐만 아니라 자택에서도 소녀들 틈에서 시간을 보내는 행복한 신사(紳士)다. 여러방면으로 서로 다른 재능을 보여 흐뭇하게 해 주는 딸만 4공주를 둔 아버지다. 모두 아버지를 숭배하지만 막내따님 동혜(東惠)양은 제일 대단한 숭배자란다. 『딸만 넷이니까 누구를 내 후계자로 삼겠다 하고 기르질 않아서인지 성격들이 같질 않고 취미나 좋아 하는 것들도 다 달라요』 막내인 동혜양은 식품영양학이 전공. 새 봄에 2학년이 되지만 아직은 「프레시맨」. 그위로 셋째따님 동윤(東允)양은 생활미술과 전공. 원래가 조소(彫塑)방면에 취미가 있는 금년 졸업의 학사. 둘째따님 동실(東實)양은 졸업한 독문학사(獨文學士). 시집가서 미국에 살고 있는 맏따님 동진(東眞)양은 가정과(家政科) 전공. 『전공도 이렇게 다른 아이들이 취미도 가지 가지예요. 동혜 이 녀석은 음악을 좋아하고 소질도 있어 보여요. 「피아노」도 곧잘 치고 「기타」를 잘 탑니다. 학교에서 「채플」시간에 「기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이 방면으로 꽤 파고 들어가 보고싶은 의욕을 느끼고 있는가봐요. 그런가 하면 무용에도 소질과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공부는 물리 화학 수학에 재미를 붙였거든요. 이공과(理工科) 계통을 전공하겠다는 막연한 결심은 그때 벌써 하고 있었어요. 졸업 임시해서 어른이 되더라도 영양(營養)사같은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면서 식품영양학과를 택하더군요』 그런데 세째는 음악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고 다른 자매(姉妹)들이 악기를 만지는 일을 부러워 하지도 않은채 손으로 만드는 것에만 몰두를 해 왔다는 것. 둘째는 서도(書道)를 하는 독문학사다. 따님들의 다채로운 재능과 취미를 소개하는 아버지를 동혜양은 정말 숭배자답게 자랑스러운 말투로 가로 막는다. 『저희들의 취미가 그렇게 다채로운 것도 아버지 덕택이에요. 아버진 굉장히 하시는게 많으세요. 승마도 하셨죠. 「펜싱」도 하셨고 권투도 하셨대요. 미술, 서도, 음악, 전부 하세요. 셋째 언니가 아마 제일 아버지 닮았나봐요. 재주가 제일 있거든요. 큰 언니들은 아버지 따라서 승마도 하고요』 무척 양순한 표정으로 언니와 아버지 자랑이 끝없다. 딸 넷 모두가 한결같이 이화가족(梨花家族) 『같은 것은 모두 이화(梨花)가족이라는 거에요. 첫째는 이대(梨大)사대부속중고등학교가 생기기 전이어서 이화여고(梨花女高)를 나왔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화부속」에 대학도 이대니까요』 『시중도 곧잘들 들어 주는데 해 주고는 꼭 손을 내밀거든요. 구두 닦았다고, 유리 닦았다고…』 여름이면 아름다운 녹지대(綠地帶)가 되는 넓은 정원을 가꾸는 어머니 李여사를 따님들은 또 열심히 돕는다. 『아버지는 여행도 좋아 하세요』 『68년에는 아버지 어머니 단 두분만의 세계1주 여행을 3개월이나 했어요』 3개월 세계일주끝에는 미국에 있는 맏이 동실씨 집에 엄마만 2개월 더묵었다. 『그동안에 이녀석들 셋이 살림하고 있었죠. 둘째는 은행에 다니는 중이었기 때문에 셋째 넷째가 살림을 맡아 주었습니다』 『셋째 언니는 워낙 살림을 잘 해요. 전 그때 별로 한 일도 없는 걸요』 [선데이서울 70년 2월 1일호 제3권 5호 통권 제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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