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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장로로 사병 제일주의/김 연합사 부사령관(얼굴)

    육사 17기로 61년 소위에 임관된 초급장교시절부터 야전에서 전술을 익히고 사단장·군단장·수방사령관·교육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한국군 교리발전에 힘써왔다. 평소 사병제일주의자로 기독교 장로이기도 하다. 해박한 군사지식을 바탕으로 명쾌한 지휘·결심을 내리고 합리적이고 공평무사한 부대지휘에 힘쓰는 한편 부하들이 긍지와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왔다. 만능 스포츠맨이며 부인 배경자 여사(49)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국군합동군제 창설 산파역/송 합참제1차장(얼굴)

    60년 육사 16기로 소위에 임관된 뒤 사단장·군단장·합참본부장을 역임했다. 합참본부장 때에는 제2창군의 의미를 갖는 합동군제형 새로운 합참 창설의 산파역인 818기획단장으로 한반도 안보상황에 맞는 새로운 군제를 창설하는 데 전력했다. 선비풍의 외모에 기획력과 설득력이 뛰어나며 온화한 성품으로,앞으로 남북군사회담과 중·장기 국군의 전략수립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부인 김봉희 여사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취미는 독서와 골프.
  • 노대통령,전방부대 방문

    【서부전선=이경형 기자】 노태우 대통령은 22일 서부전선의 ○○사단 사령부와 미군부대 등을 순시하고 한미 장병들을 격려했다. 노 대통령은 ○○사단 사령부에서 사단장으로부터 부대현황 등을 보고받고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비,만반의 방어태세를 구축할 것을 훈시한 뒤 도라전망대에 들러 전방을 관측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미 ○○사단 ○○여단 ○○대대에 도착,리스카시 한미연합사령관과 나중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의 영접을 받고 응급처치훈련과 수색전 장비검사훈련을 참관한 후 TV와 VTR 등 위문품을 전달했다. 노 대통령은 한국군 ○○사단 ○○대대도 시찰,장병들과 오찬을 함께하고 격려했다. 이날 노 대통령의 전방시찰에는 이종구 국방장관과 이상연 보훈처장이 수행했다.
  • 수도방위사령관 김진선소장 임명

    정부는 8일 수방사령관에 육본 인사참모부장인 김진선 소장(육사 19기ㆍ충북출신)을 발령했다. 김 신임사령관은 국군체육부 대장ㆍ전방부대 사단장ㆍ육본인사운영감을 역임했다. 조남풍 전보안 사령관은 이날 육군본부에 대기 발령됐다.
  • “보안사를 「국방장관 장악체제」로”/신임 이종구 국방(인터뷰)

    ◎“기구 축소문제는 좀더 검토한 뒤 결정” 신임 이종구 국방부 장관은 8일 상오 취임식을 마친 뒤 접견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보안정치 사찰사건의 사후처리방침 등을 밝혔다. 취임 직후 이루어진 이날 회견에서 이 장관은 『보안사는 보안사만 갖는 고유임무와 기능이 있으며 이 임무와 기능이 약화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다만 법과 규정대로 진행되도록 잘 감독하겠으며 장관이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보안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도망간 이등병 하나가 기밀사항을 폭로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자식이 아버지를,부인이 남편을 고발하는 공산주의사회의 관행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해달라. 이등병 한사람 때문에 국가비밀이 들통나서야 되겠는가.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서울대 앞의 카페를 보안사에서 운영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고발에 의해서 국가조직이 모두 들통난다면 이것이 과연 좋은 것이냐. 이것도 하나의 민주화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의 기구나 인원감축계획은 없는지. 『필요하다면 기구 축소도 가능하지만 최소한의 임무수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은 유지되어야 한다. 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고 잘하는 점은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보안사가 잘못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많은 오해가 생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 수 있도록 하겠다. 보안사 개편문제는 조금 더 파악하고 나서 이야기하자』 ­보안사의 일부 기능을 안기부에 이관하는 문제를 검토할 용의는. 『어젯밤 늦게 임명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후임보안사령관 임명에 대해서도 장관으로서의 의견개진 기회도 없었다.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취임 소감은. 『남의 나라 군대가 아닌 우리 군대이니만큼 튼튼한 군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국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국가안전보장을 책임지는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영광에 앞서 무거운 짐을 지는 느낌이다. 국가 안보는 국민의 뒷받침 없이 군만으로는 안된다. 그런한 의미에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지난 6월11일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끝내고 예편한 뒤 만 4개월 만에 국방장관으로 발탁된 이 장관은 12ㆍ12사태 때 동경사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그후 20사단장ㆍ수방사령관ㆍ보안사령관ㆍ2군사령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중키에 마른 체격으로 첫 인상이 날카롭고 다부져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육참총장 때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위인설관」이 아니냐는 말이 돌자 예편원을 내 진퇴가 분명한 무관이라는 평을 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북고ㆍ육사 후배다. 육사 재학중 최고인기생도(MVP)였으며 독서를 즐기고 영어와 서예 실력은 수준급이다. 부인 유재숙 여사(50)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 국방장관ㆍ보안사령관 경질의 의미

    ◎「사찰파문」 조기수습… 「여진」 최소화/도덕성 쟁점화에 서둘러 결단/“통치권 훼손 불용” 의지도 담겨 노태우 대통령이 8일 국방부장관과 보안사령관을 전격 경질한 것은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조기에 진화하고 6공 정부의 도덕성 실추를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사건 성격의 밑바닥에는 집권후반기에 나타나기 쉬운 통치권 누수현상도 깔려 있다는 측면을 고려,정부 각 기관의 기강해 이를 다시 한번 죄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평민당 등 야당과 재야 세력은 물론 언론까지 국방장관 등의 인책을 일제히 요구해 노 대통령으로서도 더이상 머뭇거리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야권은 노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군의 정치적 중립 및 불개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취임 이후에도 이를 다짐해온 점을 들어 6공 정부의 도덕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대적인 정치 공세를 취했다. 이같이 「민간인 사찰」 문제가 정치 쟁점화 되면서 국민의 군에대한 신뢰성 실추,노 대통령 정부의 도덕성 실추로 이어지자 이의 파장이 더이상 증폭되면 6공의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인식에서 조기에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5ㆍ7 특별담화」를 통해 연말까지 정치ㆍ경제ㆍ사회를 안정시키겠다고 약속한 상황에서 터진 이 사건은 단순히 보안사 차원의 관리 소홀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후반기의 전반적인 통치권 누수현상으로도 비쳐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국방장관ㆍ보안사령관을 지체없이 경질한 것은 또 지난번 수해 직후 건설장관 등 3부 장관을 교체한 것처럼 『문제가 발생해 인사요인이 생기면 즉각 책임을 묻는다』(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의 말)는 것을 다시한번 실증해 보인 것으로 집권후반기의 국정집행에 있어 대통령으로서 인사고유 권한을 십분 발휘,통치권의 기반이 훼손되는 일은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도 해석된다.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이 전역 4개월 만에 국방장관에 기용된 것은 보안사령관을 역임해 보안사 지휘경력이 있다는 점과 군 장악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 대통령과 같은 경북출신이고 특히 경북고 3년 후배여서 『또 TK냐』는 일부의 비난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그를 발탁한 것은 보안사의 기능 및 조직을 효과적으로 개편하고 또 참모총장 재직시 합동군 제도의 군체제개편 등 국군조직법 개정을 직접 기획 추진,마무리해 군의 새로운 체제를 정립하는 데 가장 적격한 인사라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신임장관은 앞으로 보안사 개편과 함께 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6공내 실세로 등장할 것으로 보이나 평소의 강성 이미지 때문에 내부융화가 다소 우려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은 이날 이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민주화라는 새 시대의 상황과 여건에 맞게 사고를 전환하고 업무를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보안사의 기능과 조직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가령 민간인 사찰의 금지,안기부ㆍ경찰과의 업무 중복성회피,방첩 업무에로의 국한 등을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군 내부의 방첩ㆍ대공 업무를 수행하다보면 민간인과의 연계부분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통치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중요정보기관간의 정보 상호 검증이 필요한 데다 정보의 담합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보채널의 병존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인 사찰금지의 한계를 설정하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임 보안사령관에 구창회 수방사령관을 임명한 것은 과거 수방사령관→보안사령관으로 전임되는 관행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구 신임 사령관은 노 대통령이 9사단장으로 있을 12ㆍ12 당시 참모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으로 보안사의 위상이 외형적으로는 축소되겠지만 실질적인 면에서는 큰 변동이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노 대통령의 발빠른 인사조치로 이번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최대한 막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날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4가지 요구조건 가운데 하나로 보안사의 해체를들고나와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일단락 됐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어렵다. 또 재야에서 오는 10일 보안사 민간사찰 등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게획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그 여진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 강직한 성품… 군 요직 두루거쳐/구창회 신임 보안사령관(얼굴)

    신임 구창회 국군보안사령관은 육사 18기로 임관한 뒤 정보ㆍ작전ㆍ인사 분야를 고루 거친 야전 지휘관 스타일. 정호용 전 육군 참모총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30사단장과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89년 4월 중장 승진과 함께 수도방위사령관이 됐다. 듬직한 체구에 호남형이어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지난 9월 한강변 수해 때는 수방사가 앞장서 인명구조와 피해복구에 나서 「수도방재사령관」이라는 애칭도 받았다. 강직한 성격과는 달리 항상 미소를 띠고 있으며 인정이 많아 「사복을 입으면 군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평도 듣고 있다. 매일 자택인 아파트 12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릴 만큼 체력관리에 철저하다. 취미는 테니스. ◇약력 ▲경남 진주출신(50) ▲경남고ㆍ육사 18기 ▲육군총장 비서실장 ▲사단장 ▲육본 인사참모부장 ▲수방사령관
  • 「보안사 사찰」 문책인사 단행/이종구 국방ㆍ구창회 보안사령관 임명

    ◎“보안사 대민 사찰 절대 불용” 신임 이 국방 노태우 대통령은 8일 상오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에 대한 정치ㆍ도의적 책임을 물어 이상훈 국방부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이종구 전육군참모 총장을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또 이 사건에 대한 지휘책임을 물어 조남풍 국군보안 사령관을 경질,구창회 수도방위 사령관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 전 국방장관은 이보다 앞서 7일 하오 강영훈 국무총리에게 사표를 제출했으며 조 전 사령관은 이 날자로 보직해제돼 곧 전역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인사와 관련,『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때그때 책임을 묻고 인사조치를 단행한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전하고 『앞으로 보안사 활동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대상황에 맞는 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이번 기회에 제도적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상오 신임 이종구 국방장관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노 대통령은 임명장을 준 뒤 강 총리와 신임 이 장관에게 『민주화로 상황이 바뀐만큼 모든 것을 새시대의 여건에 맞게 사고를 전환하고 업무를 개선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문제가 있을 때는 국민의 의혹이 한치도 없도록 이를 보완하고 군의 보안은 연속성을 갖고 강화해나가되 안보문제는 국민과의 일체감 속에서 강화되도록 다져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국방장관 약력(55ㆍ경북 칠곡)=▲육사졸(14기) ▲사단장 ▲수도방위 사령관 ▲국군보안 사령관 ▲군 사령관 ▲육군 참모총장 ▲육군 대장 예편
  • 최평욱 산림청장(얼굴)

    ◎우람한 체격에 리더십 강해 경남 남해출신인 최평욱 신임 산림청장은 육사 16기로 60년에 임관,사단장과 군단장을 역임하고 5공말기인 87년 12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됐으며 89년 3월 교육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했다. 큰 키에 우람한 체격의 최청장은 리더십이 강해 부하들이 많이 따랐다. 취미는 테니스. 부인 김일선여사(48)와의 사이에 2남을 둔 최청장은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만학도.
  • 해병대 사령관 조기엽중장

    정부는 30일 신임 해병대사령관에 조기엽중장(54ㆍ해사15기)을 9월3일자로 임명했다. 전임 최갑진사령관은 이 날자로 임기만료 예편한다. ◇조사령관 약력 ▲황해도 연백출신 ▲연세대 행정대학원졸 ▲여단장 ▲사단장
  • 서울에 올 북한대표의 얼굴

    ◎기술관료 출신… 북한 권력서열 6위/연형묵 정무원총리 연형묵총리는 분단이후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하게 되는 북한의 최고위급인사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25년생으로 올해 65세인 그는 현재 북한내 권력서열 6위의 인물. 70대 고령의 혁명1세대인 오진우(73ㆍ3위ㆍ인민무력부장) 이종옥(79ㆍ4위ㆍ부주석) 박성철(76ㆍ5위ㆍ부주석)에 이어 김영남(65ㆍ7위ㆍ외교부장) 허담(65ㆍ11위ㆍ최고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 등과 함께 북한의 권력핵심을 이루고 있는 60대중반의 혁명 2세대이다. 연형묵은 김일성대학과 소련우랄공대에서 금속ㆍ전기ㆍ전자 등을 공부한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서 북한의 행정부인 정무원의 총책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당정치국원ㆍ당중앙위원 등을 겸직,노동당의 정책결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1985년 정무원 제1부총리 겸 금속기계공업위원장을 맡아 정무원에 첫 진술한후 88년 12월 이근모의 후임으로 총리에 선임됐다. 83년과 84년 김일성을 수행,중국ㆍ소련ㆍ동구권 등을 방문하는 등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우며 러시아어와 불어ㆍ일어에도 능통,국제감각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형묵은 지난 5월24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정무원총리에 재선됨으로써 김일성부자의 신임을 다시 확인했는데 경제실무에 밝으며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기술관료출신으로 고위급회담에서 어떠한 자세를 보일지 주목된다. ◎빨치산경력 군원로 비롯,경제엘리트도 연형묵총리와 함께 서울에 오게 될 북측 대표중 김광진 대장(77)은 오진우 김철만 김광 등과 함께 현직에 남아있는 김일성의 몇 안되는 빨치산동료의 한사람이다. 인민무력부 부부장 인민군 총참모 부부총참모장 등을 겸직하고 있는 그는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나 소련군에 입대,소련 포병학교를 나온 포병장교 출신이다. 인민군 창설에 직접 참여한 군원로로 특히 포병화력 증강과 현대화에 기여한 공로가 커 김일성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한다. 6ㆍ25당시 민족보위성 후방총국참모장직을 맡았던 김광진은 군을 대표해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또다른 대표인 최우진(외교부순회대사ㆍ군축및 평화연구소부소장) 김영철(소장) 등과 함께 이번 회의의 주요의제가 될 남북한 군축문제와 관련,북한측의 입장을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군대표 2인중 한사람인 김영철은 인민군 8사단장을 거쳐 인민무력부 부국장ㆍ구분대장을 맡고 있는 인물로 지난해 2월부터 남북 고위급회담예비접촉 북측 대표로 일해왔다. 가나주재대사를 역임한 최우진(57)은 군축문제와 관련,북한측 최고의 이론가이자 실무책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7월5일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있었던 「한반도 평화와 안보에 관한 학술회의」에 북한측 대표단장으로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남북 고위급회담준비관계로 불참하고 대신 이형철(평화군축연구소 연구실장)을 내보냈었다. 안병수(61)는 특히 조평통서기국장 명의로 종종 대남성명을 내놓고 있는데 지난 5월7일에는 홍성철통일원장관앞으로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제의한 남북 정치협상회담을 재삼 촉구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내기도 했다. 정무원 참사실장 백남준(61)은 지난 73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자격(당시 직업동맹부위원장)으로 서울에서 열렸던 남북적십자 제6차회의에 참석했던 낯익은 인물. 김정우(48)는 71년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80년부터 대외경제사업부부부장을 맡아오고 있는 신진 엘리트. 80년대 중반이후 북한의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소련ㆍ헝가리ㆍ이탈리아ㆍ스위스 등을 방문하는 등 북한경제의 현대화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광진공사장 최세창씨

    정부는 24일 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최세창 전합참의장(사진)을 임명,발령했다. ▲대구산(56세) ▲육사 13기 ▲육군 1·20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 ▲육참차장 ▲3군 사령관 ▲합참의장
  • 리스카시 유엔군사령관 취임

    로버트 리스카시 신임 유엔군사령관의 취임식 및 루이스 메네트리 전임사령관의 이임식이 26일 상오 용산유엔군사령부 체육관에서 거행됐다. 리스카시사령관은 취임사를 통해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나의 과업은 한반도 침략을 꿈꾸는 어리석은 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대비 태세를 지속적으로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북한이 다시 공격해올 경우 이를 분쇄,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날 이ㆍ취임식에는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국대사,정호근합참의장,나중배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진삼육군참모총장,김종호해군참모총장,정용후공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제21대 유엔군사령관에 취임한 리스카시대장(54)은 미 코네티컷대학에서 ROTC과정을 이수한 뒤 장교로 임관돼 59년에는 중위로 한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미 육군에서는 사단장,교육사령부부사령관 육군참모차장 등을 역임했다.
  • 전직대통령 「회고록」 나온다/최규하ㆍ전두환 전 대통령,출판 계획

    ◎「12ㆍ12」ㆍ「6ㆍ29」 등 주요사건 규명 기대/올해중 집필마무리… 95년쯤 출간할듯/최/하산이후 본격작업… 2∼3년뒤 탈고예상/전 국내에서도 오래지 않아 전직대통령들의 회고록이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씨가 회고록의 집필을 마무리한 상태에 있다. 백담사에 은둔중인 전두환 전대통령도 회고록 집필을 위한 자료정리를 끝내고 구성작업에 들어갔다. 두 전직대통령의 측근들은 『최 전대통령의 경우 워낙 잘 챙기는 성품이어서 전혀 외부의 도움없이 집필을 하고 있고 전 전대통령 역시 과거의 일들을 대부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알맹이 있는 회고록이 될 것으로 안다』고 전하고 있다. 회고록 집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에 비유된다. 특히 국정의 핵에 있었던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은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주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은 한국현대사의 격랑기이고 그같은 성격 때문에라도 역사적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규명된 부분보다 오히려 많다. 우리 헌정사에는 모두 5명의 전직대통령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회고록은 아직 나와있지 않다. 고 이승만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상당기간 미국 하와이에서 체류했으나 기억력 감퇴와 건강사정등으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었다. 3∼4 공화국의 주역이었던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재임중 비명에 갔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2공화국 당시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전대통령은 모일간지에 재임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술을 다른 사람이 문장화했고 권좌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넘은 뒤에야 이루어져 본격적인 회고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80년대 중반부터 회고록을 집필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경험때문에 직접 작성한 메모를 비교적 풍부하게 갖고 있는 편이다. 최 전대통령의 한 측근은 『치밀한 성격때문에 한가지 사건을 다루는 데 어떤 것은 1년이 걸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얼마전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읽고 『너무 치켜세운 부분이 많다』고 측근에게 밝힌 바 있다. 작가 천금성씨가 80년 당시 「개혁주도세력」의 자료협조를 얻어 집필한 「황강에서…」는 전 전대통령의 출생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홍보물」로 이용돼 널리 보급됐으나 정작 전 전대통령 자신은 백담사에 은둔한 이후에야 읽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전 전대통령은 『내가 쓸 회고록에는 절대 나를 미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육군사관학교 입교때 정식 합격생이 아닌 합격자 후보로 붙었다가 입교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모든 것을 있었던 대로 기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 본격집필은 하산과 함께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7년의 재임기간중에 대통령으로서 남긴 메모와 공보비서실에서 작성하는 「통치사료」를 모두 연희동사저에 옮겨 놓은 바 있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그의 약속대로 「사심없이」 회고록이 집필된다면 5공기간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여겨지고 있다. 전 전대통령은 풍부한 자료외에 수치에 매우 밝은 것으로 알려져 회고록에 거는 기대를 크게 하고 있다. 한 측근은 그의 기억력에 대해 『사단장시절에 30만원의 관공비 모두를 참모와 운전병에 이르기까지 20명이 넘는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것으로 말하는 데 언젠가 개개인에게 준 액수를 말씀하시길래 합해 보니까 정확하게 30만원이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이 출판될 경우 국회의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통해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80년대의 주요사건들의 실체와 배경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 전대통령이 정승화당시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뒤늦게나마 추인하게 된 배경,5ㆍ17 계엄확대조치의 경위,광주 5ㆍ18 발발배경과 발포문제,최 전대통령의 하야문제 등은 두사람의 회고록에서 공동으로 다루어질 사안들이다. 이밖에도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에서는 6ㆍ29선언의 주체,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과정과 갈등 일해재단설립과 정치자금조성의 전말이 다시금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전 전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국회 5공및 광주합동청문회장에서 『이 자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실들을 회고록에서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전직대통령의 회고록 출판경험이 없다시피한 나라에서는 회고록의 출판자체가 커다란 사건이 될 수 있다. 최 전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집필은 올해안에 마무리 하더라도 출판은 95년쯤에 가능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최 전대통령이 95년을 꼽고 있는 것은 국가기밀이 주내용이 되는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인 만큼 15년쯤은 지나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미국등에서는 통상 국가외교비밀등은 20년을 시한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전대통령이 계산한 15년은 우연찮게도 형법에 규정된 공소시효만기와 일치한다. 이 기한이 지나면 회고록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소추를 면할 수 있다. 전 전대통령의 경우 올 여름부터 본격 집필에 들어갈 경우 92∼93년쯤이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출판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망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 공개될 경우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만큼 여러가지 출판에 대한 견제를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은 90년대 후반기에나 출판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금품살포 증거있다”/여 대구선거 조사단

    평민당은 16일 대구서갑 보궐선거는 ▲후보강제사퇴로 자유로운 경쟁이 원천적으로 제한된 불법선거이며 ▲약 2백억원이라는 거액의 금품이 살포된 타락선거이고 ▲금품살포에 통반장등 일선행정조직이 동원된 행정선거임이 현지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조윤형부총재를 단장으로한 평민당 대구서갑 부정선거 진상조사단은 이날 진상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많은 선거구민들이 민자당 입당원서 날인의 대가로 1인당 3만∼5만원씩을 돈을 받거나 설탕ㆍ비누등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평민당은 이에따라 이날 소집된 국회상임위에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한편 다음 임시국회에서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민주당(가칭)도 이날 상오 운영위원회를 열고 대구선거 조사단장인 김광일의원으로부터 1차조사결과를 보고받고 앞으로 2차조사를 벌인뒤 상임위활동 결과에 따라 당선무효 또는 선거무효 소송제기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 성환옥 사무총장/헌병감 출신의 수사베테랑(얼굴)

    헌병감 출신의 수사베테랑. 지난85년말 예편후 이듬해초 대통령경호실차장으로 발령받아 4년4개월 근무.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일은 다부지게처리. 부인 신영숙씨(48)와 3남. 취미는 테니스. ▲경북영천ㆍ52 ▲육사18기 ▲육본헌병대장ㆍ수경사헌병단장ㆍ국방부범죄수사단장ㆍ헌병감 ▲경호실차장
  • 경호실차장 최석립씨

    정부는 2일 대통령경호실차장(차관급)에 최석립예비역육군소장을 임명했다. ◇최차장약력(경남고성ㆍ50)= ▲육사졸(19기) ▲수경사헌병단장 ▲육군범죄수사단장 ▲국방부조사대장 ▲육본헌병감
  • 새 내각 명단

    ●총리 강영훈 유 68 평북 창성 만주 건국대졸ㆍ미남가주대정박ㆍ육사교장ㆍ중장예편ㆍ외대대학원장ㆍ주영대사ㆍ13대 민정 전국구의원 ●부총리 이승윤 신 59 인천 서울대문리대졸ㆍ서강대경상대학장ㆍ재무장관ㆍ10ㆍ13대의원 ●외무 최호중 유 60 서울 서울대문리대졸ㆍ외무부기획관리실장ㆍ상공차관ㆍ주사우디대사 ●내무 안응모 신 60 황해 벽성 단국대졸ㆍ치안본부장ㆍ청와대정무2수석비서관ㆍ조달청장ㆍ안기부1차장 ●재무 정영의 신 53 경남 하동 서울대문리대졸ㆍ행정박ㆍ재무부차관ㆍ산은총재ㆍ증권감독원장 ●법무 이종남 신 54 서울 고대법대졸ㆍ대검중앙수사부장ㆍ서울지검검사장ㆍ법무부차관ㆍ검찰총장 ●국방 이상훈 유 57 충북 청원 육사11기ㆍ사단장ㆍ합참본부장ㆍ한미연합사부사령관ㆍ국가비상기획위원장 ●문교 정원식 유 62 황해 재령 서울대사대졸ㆍ서울사대학장ㆍ서울대교수ㆍ교육학회장ㆍ교육개혁심의위원 ●문화 이어령 유 56 충남 아산 서울대문리대졸ㆍ문박ㆍ서울신문ㆍ조선일보문학사상사주간ㆍ이대교수 ●체육 정동성 신 51 경기 여주 경희대졸ㆍ민정당총재비서실장ㆍ10ㆍ11ㆍ12ㆍ13대의원ㆍ민정당원내총무 ●농수산 강보성 신 60 제주 단국대학원졸ㆍ제주대교수ㆍ남제주고교장ㆍ11ㆍ13대의원 ●상공 박필수 신 58 서울 외대졸ㆍ한양대경박ㆍ상공부상역차관보ㆍ전매청장ㆍ외대총장 ●동자 이희일 신 59 함남 신흥 고려대졸ㆍ외무부경제차관보ㆍ농림수산부장관ㆍ13대의원ㆍ공화당종합기획실장 ●건설 권영각 유 59 경북 안동 육대졸ㆍ미참모대수료ㆍ군단장ㆍ국방부차관ㆍ주공사장 ●보사 김정수 신 53 경남 함안 부산대약대졸ㆍ약사회부회장ㆍ11ㆍ12ㆍ13대의원ㆍ민주당사무총장 ●노동 최영철 유 55 전남 목포 서울대정치학과졸ㆍ9ㆍ10ㆍ11ㆍ12대의원ㆍ국회부의장ㆍ체신부장관 ●교통 김창식 신 61 전남 강진 국민대졸ㆍ총무처차관ㆍ청와대정무수석비서관ㆍ내무부차관ㆍ평통사무총장 ●체신 이우재 유 56 서울 육사13기ㆍ국보위교체분과위원장ㆍ11대의원ㆍ전기통신공사사장 ●총무처 이연택 신 54 전북 고창 동국대법학과졸ㆍ국무총리비서실행정심의관ㆍ청와대행정수석비서관 ●과기처 정근모 신 51 서울 서울대문리대졸ㆍ미뉴욕대교수ㆍ한국전력기술사장ㆍ과학재단이사장 ●통일원 홍성철 신 64 황해 은율 서울대상대졸ㆍ내무부장관ㆍ보사부장관ㆍ대통령비서실장 ●환경처 조경식 유 54 경남 밀양 서울대상대졸ㆍ국방부차관보ㆍ해운항만청장ㆍ교통부차관 ●공보처 최병렬 유 52 경남 산청 서울대법대졸ㆍ조선일보편집국장ㆍ민정당국책연구부소장ㆍ정무수석비서관 ●정무1 박철언 유 48 대구 서울대법대졸ㆍ대통령정무비서관ㆍ대검검사ㆍ13대의원ㆍ대통령정책보좌관 ●정무2 이계순 신 63 대구 서울대사범대졸ㆍ서울대사범대교수ㆍ한국여성유권자연맹회장 ●법제처 최상엽 신 53 경북 영일 서울대법대졸ㆍ사법연수원부원장ㆍ대검공안부장ㆍ대검차장 ●보훈처 이상연 유 54 경북 성주 경북대졸ㆍ보안사정보과장ㆍ민정당중앙정치연수원장ㆍ서울부시장ㆍ대구시장
  • 박준병 사무총장(민정 신임 두 당직자 취임 일성)

    ◎“당내 결속ㆍ지자제선거에 최선 90년대 대처,종합계획 곧 수립” 『끈끈한 사랑과 협조가 바탕이 되는 당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준병 신임 민정당사무총장은 6일 지난해말 5공청산 과정에서 당이 겪은 「내우」를 의식한 듯 결속과 화합을 거듭 강조했다. 4ㆍ26 총선 직후에도 7개월여 동안 총장직을 맡아 여소야대 상황에서 비틀거리던 집권당을 「인화」로써 다독거렸던 박 신임총장이 다시 당 살림의 책임을 지고 그의 장기인 친화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 박 신임총장은 『내적으로 정치적 역량을 배양하면서 외부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놓는 입장을 견지하겠다』고 말해 집안단속을 넘어 최근 거세지고 있는 정계개편 바람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 내분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오해들이 많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소속의원ㆍ지구당위원장ㆍ사무처요원들과 당직자들이 화합과 유대를 다져나간다면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역점 추진사업은. 『먼저 당내 단결과 인화를 이룩하겠다. 그리고 지자제선거를 여야가 합의한 대로 금년 상반기중 실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가겠다. 중장기적으로는 90년대 정치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키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시행하겠다』 ―정계개편에 대한 생각은. 『내적으로 힘과 정치적 역량을 키우면서 외부를 향해 문을 열어놓는 입장을 견지하겠다. 1백28석을 가진 집권당으로서 문을 열어놓고 당내 의견을 수렴해가며 여건에 대응해나가겠다』 ―당내 후속인사는. 『당장 인사를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개각등 여건 변화가 있을 때까지 최소한의 인사만을 하겠다』 ―박태준 신임대표와의 관계는. 『인품ㆍ추진력과 함께 앞서 생각하는 박대표의 능력을 존경해왔으며 같이 일하는 데 부담이 없다』 육사 12기 선두주자중 한사람으로 일선 사단장ㆍ육본 인사참모부장ㆍ보안사령관 등 34년간의 군생활을 통해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제복보다는 학구적 냄새를 짙게 풍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육사 졸업 후 서울대 사학과에 학사편입,졸업했고 서울대 행정ㆍ경영대학원도 수료. 4성 장군으로군생활을 마감하고 12대에 지역구에 진출,재선됐다. 광주사태 때 20사단장을 역임했던 탓으로 국회 청문회 증언대에 섰으나 정치적 타격은 입지 않았다. 부인 김혜정여사(53)와 1남1녀.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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