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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한하운 문화 빨치산사건(3회)

    이 무슨 야바우인가.당국이 본격 수사에 착수하겠다던 바로 이튿날인 1953년 11월21일,이성주(李成株)내무부 치안국장은 한하운이 좌익이 아니라고 언명한다.그 사흘 뒤(11.24) 치안국은 한하운사건 조사경위를 밝혔는데 당시거의 모든 신문들이 그 발표요지를 기사화했으나 ‘서울신문’은 침묵하고있다.두 간부의 사직사유가 관계당국에 의하여 부당했음이 밝혀진 찰나였던지라 차마 그 기사를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 냉정했던 ‘동아일보’(53.11.25)는 수사발표를 두가지로 요약 정리해준다.그 첫째는 한하운의 가공인물론으로 이 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하운 시초’를 낸 장본인으로 밝혀졌다고 해명하며,참고로 본명이 한태영(韓泰永)인 그의 간략한 생애와 시 창작의 계기를 밝힌다.두번째는 수사의 초점이 바로 시 ‘데모’에 모아졌음을 밝힌다.원작에 있던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뒤에 뒤를 줄대어/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는 연과 4련 둘째줄에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이란 구절이 말썽이었다.특히 ‘핏빛깃발’은 바로‘적기가’를 연상하는 대목으로 수사의 초점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이 대목에서 한하운은 자신의 원작엔 그런 구절이 없었는데 편자(이병철)가 임의로 고친 것이라 발뺌했다고 전한다.수사당국은 이 시인의 진술을 믿지도 부인하지도 않은 채 계속 조사하겠다고만 밝혔으나 이제 한하운이 가고 없는 터라 그 진위는 가릴 길이 없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데모’의 원작이 이미 1949년 월간 ‘신천지’에 실렸었고 그게 다시 첫 시집 ‘한하운 시초’에 게재되었으며,그로부터 4년 뒤에 재판이 나왔다는 사실이다.아무리 자신의 작품에 무관심했다 해도 만약 그게원작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었을 터이다. 다만 이 문제의 시 한편이 매카시즘의 세례를 받은 뒤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그는 1955년 시인 박거영이 경영하던 인간사에서 두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낸 이듬해 6월15일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한하운 시전집’을 냈는데 여기서 시 ‘데모’는 원작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즉 위의 원작에 있던 구절을 삭제해버린 한편 끝 구절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를 ‘지나가고’로 고친다.이어 맨끝에다‘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를 첨부했는데 이 구절이야말로 당시 그가 겪었던 설움을 한마디로 토해낸 아픔의 부피를 전해준다.이것만으로도 그는‘자유대한’에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을 느꼈던지 시 말미에다 ‘註 ooo(1946.3.13일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고 조심스럽게 사족을 달고 있다. 그렇다고 한하운의 불안의식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1960년 8월15일 신흥출판사 간행 자작시 해설 ‘황토길’에서 그는 ‘데모’의 배경이었던 함흥 시절을 조목조목 풀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매카시즘의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이후 시집부터 시 뒤에 붙었던 [주]항목이 부제로 승진하여 앞머리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시 ‘데모’는 원상복구가 필요하다.그래서 한하운의 문둥이의 서러움이 단순한 그 자신만의 아픔이 아니라 모든 나환자의 고통임을,아니 문둥이처럼버림받은 국민대중의 아픔임을 밝혀주는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그를‘빨갱이’로 몰아세웠던 언론은 관계당국의 수사발표 뒤 어떻게 했을까.‘평화신문’은 한하운이 방문하여 ‘병신인 나를 더 괴롭게 하는 의도를 알고 싶다고 전제하며’ 그 자신이 이병철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말했다고 쓰면서도 시종 이런 변명이 자기가 쓰고도 월북하고 없는 이병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를 조사중이라고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바로한하운으로 하여금 ‘데모’의 원작을 훼손시키게 한 요인이다.누군들 1953년 휴전 직후의 매카시즘 체제 아래서 이보다 더 말끔한 양심을 유지할 수있었을까.양심의 문둥이들이 육체의 문둥이에게 내린 린치에 다름아니었다.任軒永 문학평론가
  • 새 생명주고 이웃사랑 베푸는‘천사 공무원’

    한 여성공무원이 얼굴도 모르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에게 자신의 신장을 제공해 새 삶을 안겨주는등 수년째 주변 사람들 몰래 선행을 실천해 귀감이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경북 경산시보건소 민원실에서 의료기술서기로 근무하고있는 丁海元씨(35). 丁씨는 지난 97년 12월 만성 신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매는 한 40대 남성에게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자신의 신장을 선뜻 기증해 새 생명을 안겨주었다. 장기기증을 위해 입원할 당시 丁씨는 자신의 지병 치료를 이유로 휴가를 내는 등 1년 가까이 이같은 사실을 숨겨오다 최근에서야 우연히 주위에 알려지게 됐다. 丁씨는 또 지난 90년부터 최근까지 매년 5∼6회씩 모두 50여차례에 걸친 헌혈로 모은 헌혈증서 모두를 동료와 불우이웃에게 나눠주는 등 헌신적인 이웃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해 오고 있다. 대구보건전문대 치위생과를 졸업한 후 88년부터 공무원생활을 시작한 丁씨는 자신이 맡은 업무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여 지난 95년부터 3년여동안 보건소의 구강업무를 혼자 도맡아 초등학교 및 유치원 등지역 어린이 3만3,000여명에게 출장 구강보건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丁씨는 지난해 구강보건교육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연구결과를 모은 ‘구강보건교육이 아동들의 구강관리 능력향상에 미치는 효과’라는 논문을 중앙학술대회에서 발표,대한치과위생사협회로부터 공로패와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丁씨는 소년소녀가장 및 불우시설 등에 정기적으로 성금을 전달해 오면서도 그 사실을 극구 숨기고 있다. 丁씨는 “내가 한 작은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돼 부끄럽다”며 “하지만 나보다 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웃들을 위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동대문상권 쇼핑·관광명소로 뜬다

    7일 밤 9시 동대문운동장 맞은 편 의류대형상가인 밀리오레 건물 앞.일본인 관광객 3명이 패션잡지 ‘논노’를 들고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다.밀리오레 상가 안에서는 일본인들이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인다. 밀리오레가 지난 8월 문을 연 뒤 매달 2,600만원을 들여 일본 인기패션잡지 ‘논노’에 광고를 내면서 이곳은 일본 관광객의 쇼핑장소가 됐다.저녁식사를 마친 관광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가 길 한편에 3∼4대씩 주차해 있다.일본인뿐아니라 중국이나 대만 관광객들도 이 곳을 즐겨찾는다. 머리를 5가지 색으로 염색하고 귀고리도 3개나 한 힙합패션의 젊은이,배낭을 멘 여학생들,에스컬레이터에서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입을 맞추는 한쌍의 젊은 남녀를 동대문 의류상가 근처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상품 구색도 이들 개성에 맞게 ‘톡톡’ 튄다.물론 값도 싸다. 값과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시장 전체가 젊어지고 있다.젊은이들이 모이는 종로와 대학로가 인근에 있는 것도 젊은이들의 유입속도를 빠르게 하고 있다.겨울방학이 되자 저녁이면 더욱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든다.“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을 때도 있다”는 게 상인들의 얘기다. 그릇의 물이 차면 넘치는 법.젊은이들의 발길은 밀리오레를 벗어나 주변 상가로 넘쳐난다.96년 지어진 거평프레야와 밀리오레 맞은 편,동대문운동장 뒤편에 들어선 팀204,디자이너클럽,아트프라자,우노꼬레,혜양엘리시움 등에도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졌다.이곳은 밤 9시30분에 문을 여는 도매시장인데최근에는 도매상인과 삼삼오오 짝을 이룬 학생층들이 섞여 있다. “비슷비슷한 옷은 손님들에게 큰 인기가 없다”는 것이 디자이너클럽 블라우스매장 상인의 설명.디자이너클럽,팀204,혜양엘리시움은 중고생과 대학생등 신세대를 겨냥한 옷이 많다.우노꼬레 아트프라자 등은 20대 후반의 직장여성이나 젊은 주부층이 즐겨 찾는다.패션잡화는 밀리오레 팀204 혜양엘리시움이 1,2위를 다툰다. 다음달이면 두산타워도 문을 열 계획이어서 젊은이들은 더욱 동대문시장으로 몰릴 것이다.두산타워도 젊은 유동인구를 고려,입점상인을 기존 장사경험보다는 기발한 상품과 전략을 개발할 수 있는 ‘톡톡 튀는’ 젊은 상인으로채우기로 방침을 바꿨다. 젊은이들이 찾는 매장은 은행 등 금융기관은 물론 식당 커피숍 사우나에 전시공간까지 갖춘 백화점 형태의 도매상가.동대문운동장 옆 1,300대가 동시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지만 대부분 자체 주차시설도 갖고 있다.서비스나시설은 백화점 수준으로,가격은 도매시장 수준으로 맞춘 영업전략이 동대문에 ‘영파워’의 새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대형 상가간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상인연합회측에서 매장을 늦게 연 상인에게 5,000원∼1만원의 ‘지각료’를 물리는 현상도 생겼다. 全京夏 lark3@
  • IMF시대 인기 직종 경찰공무원(1회)-올해 얼마나 뽑나

    영등포경찰서 중앙파출소에 근무하는 姜俊求순경(29·건국대 졸)은 1년 전만 해도 국내 굴지의 K생명보험회사 직원이었다.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경찰시험공부를 시작한 지 다섯달만에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시험에 붙었다.경찰이 되려는 꿈을 이룬 것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청량리 C경찰학원에는 張晧盛씨(25)가 경찰준비반에 등록하고 있었다.동양공전을 졸업한 그는 일반회사에 취직이 됐는데도 경찰이 되고 싶어 회사를 포기하고 학원을 찾았다. 이 학원 南모실장은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수강생의 3분의 1정도는 직장인”이라며 “직장인이 합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姜순경도 “동기생은 800명이었는데,주변에는 직장다니다 온 사람이 20∼30% 정도였다”고 말했다.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는 물론이고,직장인들마저 전직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경찰은 인기다.IMF시대 최고의 인기직종은 단연 경찰이다. 제복의 매력,월등한 처우 등도 인기의 까닭으로 꼽히겠지만 대량선발은 경찰직만이 갖고 있는 최대의 매력이다.경찰은 우선 올해 3,800명을뽑는다는잠정계획을 세워두고 있으며,오는 8일쯤 대한매일에 공고할 예정이다.경찰채용규모는 새해 전체 채용 공무원 1만2,000여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이다.게다가 지난해 명퇴하지 않은 경찰관들이 올해 명퇴할 경우 경찰 선발인원은 2,000명 가량이 추가로 늘어나 5,8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경찰청 李尙奎교육과장은 “올해 치안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예퇴직자가 생기는 만큼 신규채용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정년퇴직자는 4,400여명이고 명예퇴직 신청자 가운데 1,402명은 받아들여졌으나 1,800여명은 예산상의 이유 등으로 거부됐다.까닭에 잠정 계획 이외에도 2,000여명을 추가 선발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경찰 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올해 경찰 선발계획 가운데 눈여겨 볼 만한 분야는 학사경장.경찰이 취업난 시대에 우수한 대학졸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지난 93년 이후 6년만에 재개하는 시험이다.합격되면 경장으로 임용되는 학사경장 시험은 법학사나 경찰행정학사 학위를 갖고 있으면 자격이 되며시험에 합격되면 조사과 등에서근무하게 된다.청와대 내곽 경호경비를 맡는 101경비단도 주목할 만한 분야이다.특별승진제도가 있어 일반 경찰에 비해 승진기회가 많은 편이고 기혼자 및 미혼자 아파트도 제공된다.朴政賢 jhpark@
  • 5대 그룹 개혁 본격화­정부 어떻게 하나

    ◎‘빅딜 순항’의 조타수 역할/재벌 무조건 반대에 강력 비판/총수가 계열사경영 제대로 봐야/경제회생 우선 강제퇴출 불사 “재벌 총수들이 자기 계열사의 재무상태나 경영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조건 빅딜을 반대하고 있다” 尹源培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22일 힐튼호텔에서 열린 매경인력개발원 주최의 조찬세미나에서 재벌 총수들을 강도높게 질타했다.고위 당국자가 재벌총수들을 직접 거론해가며 비판하기는 처음이다. 尹부위원장은 “대기업 회장들은 자기 계열사의 재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장부를 보면 부실기업들이 상당히 많다”며 “5대 그룹은 재무상태를 사실대로 밝히고 빅딜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빅딜과 관련,“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생산면에서 과잉일 뿐 아니라 기술개발을 위한 재투자 여력을 감안할 때 독자회생이 어렵다”면서 “모그룹 회장을 만났지만 관련 기업의 재무상태를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5대 그룹들은 빅딜 기업의 재무상태를 숨기고 정부 지원이나 상대기업의 손실 분담만을 요구하고 있다”며 “다른 그룹에 넘기면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자기들만의 이익을 고집,국민경제를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尹부위원장은 “회장들이 회계처리 방식이나 이연자산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겠다”며 “빅딜은 생존의 수단임에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정부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감위는 구조조정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지만 빅딜의 환경조성에는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李憲宰 금감위원장은 “약속한 일정에 맞춰 빅딜이 이뤄지지 않으면 원칙에 따라 여신을 중단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설마 강제퇴출시키겠냐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다면 큰 오산이라는 얘기다. 尹부위원장도 “기업이 막강해도 정부는 여전히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면서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받지만 정부가 나설 수 없기 때문에 국민경제 차원에서 반도체를 포함한 빅딜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융당국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 분리를 위해 이사회 구성의 25%인 사외이사의 수를 50%까지 늘리고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정보를 요구하면 경영진이 의무적으로 보고토록 할 방침이다.대신 사외이사가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했을 경우엔 책임을 묻기로 했다. ◎남은 난제들/삼성­대우 빅딜 ‘가시밭길’/실사­평가결과 수용/삼성차 계속 생산 여부 ‘패키지 딜’ 등 재론해야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을 위한 실사기관이 22일 선정됐지만 양측의 대립 양상은 더욱 심화될 것 같다.평가의 전제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사가 시작될 판이기 때문이다.1차 실사결과는 앞으로 4주 안에 나오게 되지만 한쪽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태도 우려된다. 양측은 실사방법인 ‘현금흐름 할인’ 방식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맞대응 전략에 부심하고 있다.구체적인 평가항목은 삼성­대우 당사자들의 협의로 결정하게 돼 있기 때문.현금흐름 할인방식은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계속 경영할 경우의 수익을 따져 기업의 미래가치를 계산하는 방법.결국 삼성차 SM5 생산 여부가 여전히 빅딜논의의 핵심으로 작용하게 됐다. 대우는 “삼성차가 계속 생산되더라도 향후 자동차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는 힘들어 미래가치가 높지 않을 것”이라며 일단 안도하는 모습이다.아울러 SM5 생산과 관련,‘더 두고 보자’는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삼성차의 미래가치를 높이는 구실을 줄 수 없다는 계산이다. 반면 부산공장의 생산능력을 오는 2001년까지 현재의 2배인 50만대로 늘리고 일본 닛산에 연간 10만대의 수출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삼성은 이 부분을 반드시 실사항목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방침이다. 이른바 ‘패키지 딜’의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점도 실사의 걸림돌이다.당초 양측은 삼성차­삼성상용차­삼성전기의 자동차 부품 부문과 대우전자­대우통신 등을 한데 묶는 맞교환을 추진했다.대우측이 SM5보다는 삼성상용차의 1t 트럭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을 정도다.그러나 현재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상태.이 부분이 명확히 가려져야 시너지효과,업종 전문화 측면까지 포괄하는 정확한 실사가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車­전자’ 협상서 난처해진 산자부/합의발표뒤 업체서 부인/적극중재 노력도 안먹혀/재계선 “강요” 볼멘소리 삼성과 대우의 빅딜협상이 지루한 샅바싸움으로 변질되면서 중재에 나선 산업자원부의 처지가 궁색해졌다.“양측이 기본원칙에 합의했다”는 산자부 발표가 해당업체로 부터 즉각 부인되는가 하면 재계 일각에선 “정부 개입으로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는 불만의 소리마저 터져나오고 있다. 당초 산자부는 삼성­대우간 빅딜계획이 발표되자 “당사자들간에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며 협상에 일정 거리를 뒀었다.그러나 삼성자동차 SM5의 계속생산 문제가 빅딜의 걸림돌로 등장하자 산자부는 자세를 바꿔 崔弘健 차관 등이 적극 중재에 나섰다. 이같은 방향 선회는 朴泰榮 장관의 정치적 색채가 적잖이 작용했다.산업정책의 주무장관일 뿐 아니라 집권여당의 정치인으로서 부산지역의 민심동요로까지 발전한 사태를 조기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이다. 산자부의 중재노력은 그러나 SM5 생산문제에 대해 양측이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모양새를 구기게 됐다.崔차관이 지난 16일과 19일 2차례에 걸쳐 삼성 李鶴洙·대우 金泰球 구조조정본부장간 회동을 주선해 대타협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삼성측의 부인으로 무산됐다.특히 21일에는 두 구조조정본부장이 각각 서명한 중재안을 팩스로 전달받아 언론에 ‘합의사항’이라며 발표했으나 직후 삼성이 이를 부인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이에 대해 산자부는 “정부가 빅딜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자기들이 하겠다고 해놓고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만 일으켜 부득이 중재에 나선 것”이라며 ‘섣부른 개입’이라는 비난을 반박했다.그러나 재계에선 “당사자간에 엄청난 이해가 걸린 문제를 정부가 지나치게 몰아붙이고 있다”며 볼멘 표정이다.
  • 세종로 청사 후문은 ‘시위 명소’

    ◎교원 정년 단축 등 교육부 관련 집회가 70%/점심시간 공무원 잦은 출입/전시효과 노리기에 알맞아 새 정부 출범 이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이 시위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민원인들의 집회 단골장소는 청사 후문 건너편.최근에는 유명 영화배우들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구경꾼이 꾀기도 했다. 10평 남짓한 이곳에는 단골손님이 있다.바로 교육부 관련 민원인들.청사경비대측은 “거의 매일 번갈아가면서 시위대들이 청사후문 앞을 찾지만 70% 이상이 교육부 민원인들”이라고 귀띔한다. 올해는 이 가운데에서도 서원대 재단 비리 관련,과학고 학부모들의 특수목적고 내신제 폐지등의 시위가 가장 많았다.교사 정년 단축,입시제도 변화 등 굵직한 교육정책의 변화가 잇따르자 시위층도 학생으로부터 학부모,교사 등으로 다양해졌다. 세종로 청사에 입주해 있는 한 부처가 총리실 통일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교육부 법제처 등이지만 민원사항이 많은 교육부에 관련 시위도 집중돼 있다. 노동부 건설교통부 등 경제부처가 몰려있는 과천청사가 거리상으로 먼 것도 시위대가 세종로 청사로 몰리는 한 요인이다. 주변에선 행정을 관할하는 총리실이 세종로 청사에 있어 과천 청사에 입주한 부처사항이 세종로로 오는 경우도 많다고 진단한다.환경운동 단체나 양심수 석방 요구 시위,체불임금,재개발 관련 시위 등이 그것이다. 청사 정문이 바로 세종로로 통해 여유공간이 없는 데 반해 후문쪽 옛동화은행건물 앞에는 수십명이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다.또 공무원들이 대부분 점심시간에 후문으로 드나들어 전시효과도 노릴 수 있다. 이곳이 시위명소로 등장하면서 청사경비대도 종로경찰서에 신고된 집회일 경우 제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공무원이나 인근 회사원들도 시위대의 구호소리에 익숙해 있다.다만 일부 공무원들은 “시위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공무원들의 근무시간에 확성기로 상소리를 하는 것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시일야방성대곡 전재(대한매일 秘史:8)

    ◎‘시일야…’ 영문 번역 호외 발행/을사조약 전말도 폭로… 日 침략 서방에 알려/황성·제국신문 정간 횡포/일제 언론 탄압 날로 기승/장지연 구속·신문과정 보도/대한매일 항일 강도 더해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가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1904년 7월20일에 공포된 이 ‘훈령’은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함은 물론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하도록”(제2항) 하였다.8월20일에는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의 대표를 불러 검열을 통보하였고,10월9일에는 ‘군정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을 시달하여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했다.바로 이튿날인 10월10일 헌병사령부는 뎨국신문에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이는 한국언론사상 처음 내려진 강제 정간이었고,일본군이 한국 신문에 정간을 명령한 첫 탄압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는 한국주둔 사령관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고시군령(告示軍令)’19개항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집회 결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에 관한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도록 돼있었다.또한 군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 구금 추방 과료(過料) 또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격한 벌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지연은 이와같이 엄중한 일본의 군령을 어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검열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시(巡視)와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11월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했다.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에 실린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을사조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정부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병사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했다.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가 2천만인데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이날부터 대한매일은 정간 당한 황성신문에 실렸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다시 전재했다. 23일자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한 내용을 게재하였다.일인 경무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니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대저 나라가 있은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내가 붓을 잡은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이에 경무고문이 할 말을 잃었다고 보도했다.(1905.11.23,‘사장항변’) 대한매일은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정간 당한 황성신문을 속간시키라고 촉구하였고,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같이 여러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905.11.26,‘시하율법(是何法律)’,또 1906.1.12,‘탄(歎 ),황성구폐(皇城久閉)’에서도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11월27일자에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이 호외는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고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말도 실었다. 이렇게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사람들과 서방 여러나라에 알렸다.
  • 배설과 장지연(대한매일 秘史:7)

    ◎배설 출옥 기념 상해파티서 조우/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구속/대한매일 용기 찬양·석방 요구 인연 배설이 출옥하자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그의 출옥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우연하게도 이 자리에는 황성신문 사장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참석했다.장지연과 배설은 3년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때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장지연은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음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가 구속되자,대한매일신보는 그 용기를 크게 찬양하면서 석방을 요구하였고,문제가 된 논설을 영역하여 호외로 발행하여 국내외에 이를 알린 일도 있었다.이같은 인연의 배설과 장지연은 멀고 먼 이국땅 상해에서 우연히 만나 밤새 통음(痛飮)하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던 것이다. ○두사람 나라 걱정하며 통음 장지연은 1909년 5월1일 배설이 서울에서 사망한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묘비의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 이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할 적에 비분강개 하야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 지로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들은 장지연은 20일자 황성신문에 우리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유명한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를 실어서 그 통분함을 천하에 토로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보호조약의 체결로 동양 3국의 평화가 깨어지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또한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였다.그 일부를 현대문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배설 사망후 묘비문 작성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 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 자(字)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김청음(金淸陰)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鄭桐溪)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단군 기자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루 밤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인용문 가운데 고딕체는 본문(4호) 보다 한 호가 더 큰 활자인 2호 활자를 사용하여 강조하는 편집기법을 활용하였다.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여 강조한 것이다.장지연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五件條約)청체전말(請締顚末)’이라는 기사를 실었다.역시 4호 본문에 2호 활자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 편집이었다.이등박문이 11월10일 경부철도편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한 전말을 소상히 폭로한 내용이었다.이날짜 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 체결에 관한 기사는 검열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면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장지연은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이 신문을 배포하였다. 주한 일본헌병사령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한국 언론에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일본은 이해 7월 군사경찰 실시를 한국에 통고하였다. 작전상 한국의 치안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의 군과 경찰이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한국은 이를 거절했으나,일본은 군사경찰 실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 종업원들 회사살리기에 감사/사주가 주식 10만주 무상배분

    광동제약 崔秀夫 회장(64)이 9일 자신이 소유한 주식 10만주를 종업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줘 제약업계의 부러움을 사고있다. 崔회장은 이날 본인의 주식 83만주 가운데 12%인 10만주(시가 총액 9억원)를 종업원 640명에게 1인당 평균 156주(140만원)씩 나눠줬다. 崔회장은 지난 4월 1차 부도설에 휘말리면서 주가가 폭락하는 등 회사경영이 어려워지자 종업원들이 보너스를 자진 반납하는 등 회사 살리기에 적극 나선 데 대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주식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 고독한 사령관 경찰서장:2(공직 탐험)

    ◎‘한달 평균 5일 귀가’ 격무의 연속/목욕탕·화장실에도 무전기 휴대/서장 되기까지 최소 10여회 이사/옷가지 직접 세탁할때 가장 불편 세탁기는 경찰서장의 필수품이라는 말이 있다. 경찰서장 부인은 과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서장의 어려운 근무여건을 강조하는 경찰 내부의 자조섞인 표현이다. 경찰서장은 일반 공무원들처럼 정시에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치안수요가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지역 경찰서장은 더욱 그렇다. 5∼6일에 1번 정도 집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집에 들어간다기보다 잠시 들르는 수준이다. 일반 직장인처럼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다음날 아침 식사까지 하고 나오는 ‘여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자정넘어 들어갔다가 새벽녘엔 경찰서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들어왔다 간줄 모르는 자녀들도 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경찰관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장들은 가족이 아프거나 제사 등 특별한 때가 아니고는 귀가하지 않는다. 이나마도 상황이 생기면 당연히 못들어간다. 지난 3월 중순 서울 외곽 경찰서 서장으로 전보발령을 받은 L모씨는 지난 21일까지 ‘정위치’한 날짜를 꼽아봤다. 정위치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경찰서에 있는 것을 말한다. 211일의 근무일수 가운데 집에 들어간 날짜는 53일. 나머지 158일은 경찰서에서 지냈다. 특히 탈주범 申昌源이 출현한 다음날인 지난 7월17일부터 집중호우로 침수피해가 우려됐던 8월22일까지 38일 동안은 하루도 못들어갔다. 대부분의 서장은 잠을 잘 때도 무전기를 켜놓는다. 목욕을 할 때도 마찬가지며 화장실에 갈 때도 무전기를 들고 간다. L모 서장은 “지휘관으로서 무전기 휴대는 필수적”이라며 “중요 사안이 발생하면 잠결에도 귀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집에 못들어가다 보니 가장 불편한 것은 옷가지의 세탁. 속옷이나 양말을 직접 세탁하는가 하면 모아놓았다가 집에 가져 가기도 한다. C모 서장처럼 아예 소형 세탁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서장은 이사경험이 많다. 승진하면 대부분 인사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간부 후보생이나 순경에서 경찰서장의 자리까지 오르는 동안 최소한 10여차례 이상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는 곧 가족과의 이별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함께 데려 가기도 하지만 학교갈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홀아비’생활을 하게된다. 경찰생활 36년째인 C모 서장은 지금까지 모두 36번의 이사를 했다. 관사가 없는 지방에 부임하면 여관이나 셋방을 전전한다. 그는 “워낙 옮겨다니다 보니 가장이 어디에 근무하는지 모르는 가족도 있다”고 소개했다. 경찰서장이 가장으로서 하는 가족에 대한 최대의 서비스는 안부전화. 그나마 자녀교육 상담이 대부분이다. 전화는 대부분 먼저 건다. 집에 경비전화가 있어 가족들이 걸 수도 있으나 개인적인 용무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 통감부와 대결(다시 태어난 ‘대한매일’:8)

    ◎침탈·탄압에 맞대응/매국노·침략자 규탄/신문지법 등 공포 맞서 논설 통해 간담 서늘케/민족혼 고취·항일 주도 1906년 1월3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가 발족되면서 국내 언론은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각국 공·영사관의 철수를 강행,열강의 모든 권익을 빼앗은 통감부는 매국내각을 구성한 뒤 본격적인 한국침탈에 걸림돌이 되는 언론에 대한 탄압에 돌입했다.1906년 4월부터 통감부령 제10호로 언론활동의 통제조항을 둔 보안규칙 시행에 들어간 것을 필두로 1907년 7월24일 李完用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토록 해 본격적인 항일 민족지 죽이기에 들어간 것이다.대한매일신보도 1908년 4월 개정된 이 신문지법에 따라 결국 철퇴를 맞고 말았다. 이 시기 통감부는 대한매일에 대해 유달리 집중적인 압력을 가해왔다.대한매일이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 필치를 높여간 만큼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매일은 ‘영국인 사주’(裵說)덕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날카로운필봉을 어김없이 휘둘렀고 매국자들을 예외없이 고발했다.그러나 결국 신문지법을 대동한 일제의 탄압에 한껏 타오르던 항일 민족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의 보안규칙 시행이나 1907년의 신문지법은 처음엔 국내에서 발행되는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통감부는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명의의 대한매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따라서 1908년 4월29일 신문지법을 개정,대한매일의 기세를 꺾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신문지법은 일본의 통감정책에 저해되는 일체의 언론에 대해 발행정지권을 비롯해 벌금형과 체형,신문 인쇄기기 몰수 등 강력한 처벌조항을 담았다.더욱이 1907년 7월24일 신문지법을 발포한지 닷새만에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 한국군대까지 해산된 것을 보면 대한매일을 비롯한 항일 민족지에 대한 통감부의 탄압이 얼마나 치밀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이 법은 1910년 한일합병이 강행된 뒤에도 계속 발효됐고 해방후 1952년까지 존속한 식민지 악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논봉을 들고 나선 것은 역시 대한매일이었다.정부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마당에 숱한 애국지사들은 자유로운 필치를 유지하는 대한매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통감부와 관련한 일련의 논설들은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통감부 설치 직후인 1906년 2월9일자 1면 논설 ‘통감(統監)’과 3월9일자 1면 논설 ‘이등후(伊藤侯)’는 통감부 설치의 불법성을 비난한 대표적인 예다.“일본이 이웃나라 안에 자기나라 대표를 파견해 권력을 장악함은 옳지 못한 일”(統監),“한국의 내정은 일인이 지휘하고 외무는 동경에서 관할하니 한국의 독립이란 어디 있느냐”(伊藤侯). 또 8월15일자 논설 ‘한국과 일본’에선 “이등박문은 현존 한국의 노예같은 정부 대신을 지휘해 모든 일을 자기가 집행함이 한국을 일본에 정복된 국민의 지위에 떨어뜨리는 제반 악계를 꾸몄다”고 폭로했다.1907년 1월16일자에는 “을사5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며 열국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칙서를 발표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친일정부가 발행하는 관보 게재를 중단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법령공포와 정부시책 홍보가 내용인 관보는 한일합병 때까지 발간된 대부분의 신문들이 중요 내용을 전재할만큼 큰 뉴스원이었고 신문보급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그러나 일본이 득세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을 잃게 됐고 관보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익어갔다.대한매일은 마침내 1908년 3월6일자 1면 논설 ‘관보정게(官報停揭)’에서 “관보의 내용이 과연 한국사람의 관보인가”라고 쓰고 이날부터 관보란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거듭되는 배일 논조에 격분한 통감부는 마침내 裵說 타도를 결의하고 나섰고 대한매일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 강하게 맞선 裵說과 논진(論陣)이 추방 혹은 구속되면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신문사들의 수난/주요 재원 신문대금 체납 ‘눈덩이’… 경영난/社告로 납부 독촉… 日帝 탄압에 곡필 보도도 통감부의 언론탄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 사전검열에 따른 기사삭제,반포금지 및 정간이횡행하자 자연 독자들의 신뢰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따라서 당시의 신문,특히 민족지들은 광고수입이 적은데다 주요 재원인 신문대금의 체납이 많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논조를 펴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실제로 내부 경무국이 펴낸 ‘고문경찰소지’(1910년 간)에 따르면 통감정치 첫해인 1906년 한 해만 하더라도 황성신문은 7건,만세보는 6건,제국신문은 13건이나 기사를 삭제당했다.또 1909년 ‘경찰사무개요’와 ‘조선통감부 시정연감’은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처분의 경우 1908년 64건,1909년은 137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한매일만 하더라도 1909년 한 해 동안 발매반포금지 14건에 모두 1만6,314부를 압수당했다. 이같은 탄압이 전개되자 신문 운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민족지들은 대중적인 호소에 적극 나섰다.사고와 잡보를 통해 독지가의 성원과 신문대금 납부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인데 그 사정이 매우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신문은 “신문대금을 빨리 지불하는 사람은 문명인이라”는 이례적인 사고를 냈고 어떤 대신이 체납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기사로 보도하기까지 했다.사설에서도 “독자가 신문대금을 지불치 않으므로 신문을 발행 못한다”고 쓰고 있다. 대한매일도 사고에 “본사가 이전하겠는데 수리 정돈에 경비가 매우 모자라니 대금을 송치해주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심지어는 “각 지점에서 본사 대금 체납이 많은데 평양지점은 미납급이 300여원에 달했으니 본사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는가”라며 재촉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한 잡보에는 “재정난으로 휴간한 제국신문의 복간을 위해 각 부인회에서 보조금을 모집하기로 했다”는 글까지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언론이 얼마만큼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인터넷 ‘청장과의 대화’ 24시가 짧은 金 청장

    ◎생생한 국민의 소리 하루평균 4∼5건 접속 金청장은 요즘 업무 외의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지난 1일 경찰청이 인터넷 홈페이지(www.npa.go.kr)에 개설한 ‘청장과의 대화’ 코너 때문이다. 대화 코너는 생생한 국민의 소리를 치안행정에 여과없이 반영키 위해 마련됐다. 그런 만큼 金청장이 대화코너에 거는 기대도 크다. 홈페이지에 접속된 질문에는 ‘24시간 내에 답해주겠다’는 안내문이 자동적으로 게재되며 실무자들의 검토를 거친 뒤 반드시 답을 띄운다. 실무자들이 만들어 온 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좀더 상세한 답변이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다시 수정한 뒤 내보낸다. 건수는 하루 평균 4∼5건이며 질문은 고소·고발·문의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학사경장공채 모집대상에서 법학과는 지원이 가능한데 행정학과는 왜 제외되느냐’,‘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는데 국내운전면허증으로 바꿔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도 있다.
  • 英,칠레 前 독재자 피노체트 체포/칠레 “면책특권 무시” 항의

    ◎런던서 신병 치료중/스폐인 국민 살해 혐의 【런던·산티아고 AP AFP DPA 연합】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2)가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영국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런던 경찰 대변인은 17일 런던 한 병원에서 탈장 디스크 치료를 받던 피노체트를 체포했다고 확인했다. 스페인 국민 살해 혐의로 스페인 사법 당국의 특별 요청에 따른 것이다. 칠레는 즉각 영국이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무시했다며 체포에 항의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스페인은 그동안 피노체트 군사정부가 칠레의 스페인 국민을 살해,고문했다며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을 통해 영국에 피노체트 체포를 요청해왔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부동산 강좌 인기/투자지역·시기 무료 안내

    ◎주택·컨설팅社도 잇단 개최 최근 신규 아파트의 분양열기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주택업체나 컨설팅업체가 개최하는 각종 부동산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주택업체들이 아파트나 오 피스텔 판촉행사의 일환으로 하는 이들 강좌는 무료여서 투자자들이 투자시기와 안전한 투자처를 찾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오는 17일 오후 2시 서울 역삼동 현대오피스텔 R&B 모델하우스에서 시사경제평론가 嚴吉靑씨 등 외부강사를 초빙,‘IMF체제하의 경제동향 및 전망’ ‘부동산동향 및 전망’ ‘IMF체제하의 투자원칙과대상’등을 주제로 강연회를 연다. (02)563­6556.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2시간동안 대구시민회관에서,27일 오후 2시 수원 권선지구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무료투자설명회’를 개최한다. (053)585­3303,(0331)222­3305. ◇대우건설도 오는 17일과 24일 두차례에 걸쳐 오전 11시에는 성수동 대우 프레시아 상가분양사무소에서,오후 4시에는 당산동 대우 메종리브르 상가분양사무소에서 한국 창업컨설팅 협회장 朴주관씨를 초빙해 ‘창업설명회’를 개최한다. (02)463­2841,(02)679­5445.
  • 법사위 자료로 본 銃風 쟁점

    ◎고문­출퇴근 시키며 조사했다.반죽음 상태서 허위자백/총격요청­한씨 북측에 준 명함 확인.단지 희망사항… 논의안해 ‘판문점 총격요청사건’과 관련,안기부의 수사 내용과 구속된 吳靜恩씨(전 청와대 행정관)·張錫重씨(대호차이나 대표) 등 세사람의 주장은 총격 요청에서부터 고문 여부에 이르기까지 상당 부분 엇갈리고 있다. 안기부는 吳씨 등이 지난 9일 구속적부심에서 혐의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나서자 10일 수사경위 등을 담은 자료를 국회 법사위원들에게 발송했다. 양측의 주장을 간추린다. ▷수사착수 배경◁ 안기부는 지난해 12월10일 ‘진로그룹 고문’이라고 자처하는 韓成基씨가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요원을 만나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특보라고 소개하면서 판문점 총격전을 요청했다는 첩보를 입수,이틀 뒤 공항에서 韓씨를 연행해 조사했다.韓씨가 극구 부인함에 따라 조사를 중지했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당시 서류 등을 정밀 검토한 결과 韓씨 등이 李후보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 11건과 韓씨가 북측 요원에게 건네준 명함 등을 확인했다.이에 따라 ‘韓씨가 지난해 12월 李후보의 당선을 위해 북측에 총격도발을 요청하려고 베이징에 갔다’는 지난 8월의 韓씨 친구 제보가 사실임을 확신하게 됐다. 吳씨 등의 주장은 다르다.吳씨는 韓씨가 ‘李후보의 지지율이 답보인 상황에서 병역시비 등을 잠재우려면 북한이 무력시위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라며 희망사항을 말한 적은 있지만 총격요청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張씨도 ‘총격사건 모의’는 안기부의 고문에 못이겨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말했다.베이징에서 북측 요원인 이철운 등을 만난 것도 북한 동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고문◁ 안기부는 가혹행위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안기부 공작원인 張씨는 세차례에 걸쳐 출퇴근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지난 달 5∼7일 동안 韓씨의 진술을 토대로 반증자료를 제시하자 “그동안 속여와 미안하다”며 오히려 사과까지 했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또 ‘재소자 건강진단부’ 등을 증거로 제시하며 韓씨 등은 조사 당시 아픈 곳을 호소한 적도 없었고 신체상태도 정상이었다고 고문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반면 吳씨는 지난 달 8일 체포된 이래 2∼3일 동안 수사관 9∼10명에게 가슴과 뺨 등을 수차례 맞아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 허위자백했다고 주장했다.
  • 한국관광공사 부임 6개월 洪斗杓 사장

    ◎공기업 사장 4번째… 또 ‘흑자혁명’/관광한국 아이디어 만들기 밤낮 없어/15% 감원… 작지만 강한 조직 이끌어 金大中 대통령이 출연하는 국가광고를 앞세워 한국관광공사가 관광한국의 새혁명을 시도중이다. 공항면세점 운영회사정도로나 인식돼던 한국관광공사를 전략경영주체로 바꿔가고 있는 洪斗杓 사장(63). 그는 부임 6개월만에 ‘공사(公社)경영의 귀재’라는 별칭을 확인시키고 있다. 방송광고공사(81년),담배인삼공사(87년),한국방송공사(KBS·93년)에 이어 관광공사는 그가 맡은 4번째의 공사다. 중간에 전매청장과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것을 빼면 도합 16년 동안 바람 거칠기로 유명한 공사운영에서 탁월한 성과를 과시하고 있다. 그의 명예로운 별칭은 가는 곳마다 주인없는 회사들을 새 모습으로 일궈낸데서 나왔다. 공기업하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무사안일을 떨궈내고 생동감있는 조직으로 바꿨다. 당연히 실적이 뒷받침하고 있다. KBS를 한국의 확실한 기간방송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洪사장이다. 사상 처음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고,뉴스·드라마 등 모든 부분의 시청률에서 상대 방송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과시했었다. 담배인삼공사에서 고임금근로자들을 ‘아들 딸 대신 입사보장’조건으로 젊은 저임금 근로자로 대거교체했던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그가 갖고 있는 공사경영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60대 중반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동안(童顔)을 가진 洪사장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것을 정리해 얘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 특이한 습관도 없지 않다.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4시쯤 절로 눈이 떠집니다. 한시간쯤 이것 저것 생각하다 다시 잠을 잔 다음 아침에 그 생각들을 깊이 검토합니다. 젊을 때부터 습관화 돼있습니다” 洪사장이 지난 4월 KBS에서 관광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온 뒤 관광분야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공사 직원을 15% 감축,‘작지만 강한 조직’으로 체제를 갖췄다. 또 사상 최초로 외국인관광객 친절맞이 캠페인을 벌였다. 金 대통령 CF제작 및 홍보,지자체와의 긴밀한 협조관계 구축 등도 그의 경영전략 일환이다. 그 결과 지난 7월 일본인관광객 수가 월별로 사상 최대인 18만명을 기록했다. 이에 힘입어 연초 100만명이던 유치목표를 200만명으로 늘려잡았다. 공사의 이같은 맹활약은 洪사장의 카리스마에 가까운 리더쉽에 기인하고 있다. 그의 리더쉽은 △철저한 현장 확인 △광범위한 외부인사 접촉으로 뒷받침된다. 조직의 존재 목표를 정확히 설정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격려와 질책을 거듭한다. 아울러 학계 관계 등 각 분야 인사들과 쉴새 없이 만나 아이디어를 얻고 공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洪사장의 부지런함은 아침마다 갖는 간부회의 석상에서 지시형태로 나타난다.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 ‘해외파견 공무원들에게 관광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자’ ‘지자체별로 깨끗한 화장실과 음식점,더러운 곳을 선정해 발표하라’ ‘친절 청결 캠페인,관광기획상품,예약체계 개선 등에 힘을 쏟자’ ‘중국인 관광객이 좋아하는 값싸고 맛있는 곳을 찾아내자’ 등등 세밀한 업무 지시도 끝없이 내린다.그의 이같은 경영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실적에 매달린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이를 일축한다. “가시적이면서 쉬운 일부터,결과가 금방 나타나는 일부터,돈없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하나하나 바꾸다보면 장기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
  • 성과급 40억 받은 증권사 간부/“자사주 100만주 매입” 화제

    ◎회사경영에 도움 목적/“1년간 안팔것” 각서도/금감위선 ‘예외적 허용’ 대신증권 목포지점 張氣哲 차장(34)이 회사로부터 받은 성과급 40억여원으로 자사주 100만주를 매입하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 張차장은 지난 1일 금융감독위원회에 대신증권 주식 100만주(지분률 3%)를 사겠다는 주식매수 신고서를 냈고 금감위는 시세차익의 목적이나 공정거래를 해칠 혐의가 없다고 판단,이를 승인했다. 張차장은 회사경영에 도움을 주기위해 회사로부터 받은 성과급 40억여원으로 2개월 이내에 대신증권 주식 100만주를 사겠다고 밝혔다. 대신증권 주가는 2,800∼2,900원이다. 시세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향후 1년간 주식을 팔지 않는다는 각서도 냈다.
  • 검사장 관사 너무 커 예산낭비/감사원 개선조치 요구

    ◎국회사무처 감리비 과다지급 감사원은 5일 전국 13개 고검 및 지방검찰청 검사장용 단독주택 관사 건물면적이 법무시설 기준규칙의 건물 기준면적 60평을 초과하고,부지도 필요이상 넓어 1년 평균 보수유지비만도 1,2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부산고검 검사장 관사의 경우 건평이 125평에 달하는 등 검사장용 단독주택 관사의 건평이 69∼125평에 이르고,부지면적도 283∼1,297평에 달했다. 감사원은 이에 따라 광주고검 관사의 경우 지난해 건물 유지보수비용만도 5,500만원이나 되고 관사경비를 위해 청원경찰을 채용하는 등 인력 및 예산낭비가 초래되고 있다고 보고 법무부에 관사 규모를 축소하라고 통보했다. 감사원은 또 법무부 소속 의무직 공무원(의사면허소지자) 24명 중 16명이 상오에만 교도소 등 소속기관에서 근무한 뒤 하오에는 자신들의 병·의원을 운영해온 사실을 적발,이들을 계약직 공무원으로 변경하거나 상근의사로 교체토록 했다. 한편 감사원은 국회사무처가 헌정기념관 신축공사 감리용역비를 지급하면서 실제로 근무하지 않은 32명분의 감리용역비 1,411만2,000원을 내준 사실을 적발,과다지급된 돈을 회수토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 10,000일 동안 ‘나무아미타불’ 염송

    ◎염불만일회 성지결사대회 시작 앞으로 1만일(27년5개월)동안 계속될 역사적인 염불만일회 성지결사대회가 오는 5∼7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에서 봉행된다. ‘힘차게 멋있게 신나게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합시다’란 표어아래 펼쳐질 이번 대회는 염불을 통해 IMF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마련된 것이다. 각 2차례의 염불법회와 아미타춤 공양,염불수기식,촛불의식,다짐대회,부처님 진신치아사리 친견 등으로 진행된다. 이 대회에는 정토학회 정태혁회장,보광 정토사 주지스님(동국대 교수),녹원·보성·설산·오현·해장스님 등을 비롯 500여명의 신도들이 직접 참여하며 전국에서는 2천여명이 염불에 동참한다. ‘염불만일회’는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발징화상이 신도 정신·양순과 함께 건봉사에서 개설한 것이 효시. 그뒤 조선조 들어 순조 2년(1802년)과 철종 2년(1851년),고종 18년(1881년),구한말인 1908년에 열렸다가 이번에 6번째로 맥을 잇는 것이다. 염불만일회는 1만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부처님의 높은 뜻을 새기고 마음을 청정하게 가꾸자는 것. 승려를 제외한 일반인들은 매일 상오에 10∼15분씩 ‘나무아미타불’을 1천번 정도 외는 방식으로 참여한다. 사실상 평생동안의 염불에 돌입하는 셈이다. 염불만일회 회원 자격에는 제한이 없으며 1년 회비 1만원을 내면 우편으로 기도방법 등이 담긴 안내문을 보내주며 상담서비스도 해준다. 염불만일회 공동대표인 김재일 동산반야 회장은 염불과 함께 불명호를 써보는 사불(寫佛)이나 불경을 베끼는 사경(寫經)을 곁들이면 더욱 좋다고 권한다. 염불만일회는 건봉사 성지대회를 시작으로 경북 영천 은해사,전남 해남 미황사,강진 백련사등 아미타도량으로 이름난 절을 돌며 성지대회를 열고 2026년초에 회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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