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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류명창 김명하씨(이세기의 인물탐구:28)

    ◎청류의 음색·유창한 성조… “타고난 소리꾼”/12가사·시조 등 정가 두루 통달… 명인 경지에/장려한 성색·거침없는 음역엔 감탄사 절로/“한의 세월 노래로 용해”… 사재로 문화재단 설립,후학 길러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신이로다.연화는 군자요 행화소인이라,국화는 은일화요 매화한사로다­/ 두 손을 무릎위에 가지런히 얹고 단정하게 노래부르는 월하의 편수대엽은 세파에 시달린 흔적없이 계류처럼 맑고 청아하게 흘러내린다. 특히나 그의 세청은 비단실을 뽑아내는듯한 명가의 격조와 경제특유의 화려하고 힘있는 성색을 지닌것이 특징이다. 처음을 높이 질러부르는 언롱은 쉽사리 달아오르거나 쉽사리 자지러들지 않는다.넘어가고 이어지고 휘어지고 늘어지는 가락마다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굽이굽이 드리우면서도 풍류를 생략하거나 정가특유의 기품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명주 명주 명주 비유 원로국악인 성경린씨는 일찍이 월하의 노래를 일컬어 「무늬없이 짠 치렁치렁한 비단」이란 의미의 명주,또 현란한 구슬을 끝없이 꿴듯한 명주,그 깊고 유창한 성조에 취하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명주에 비유했고 「월하의 정가를 들을수 있는것은 우리로서는 얼마나 경행스러운 일인가」를 찬탄해 마지않았다. 관현악반주에 맞춘 가곡12가사를 비롯,시조·한시·칠언절구에 뛰어나고 양금·거문고 연주솜씨도 수준급이다. 평시조 엇시조·사설시조·지름시조,가곡의 우락·계락등 어느 대목에 이르러도 구구절절 막힘이 없고 중간에서 곡조를 잠깐 변조시켜 질러부르는 계면조(중거)는 시의 참맛을 살려 시절가다운 흥취를 능란하게 펼쳐나간다. 아련한 피리소리 전주에 실린 피리소리 못지않은 그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재능은 과연 타고나는 것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수밖에 없다.만약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청추의 음조를 끝없이 울릴수 있을 것인가. 집안대대로 소리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어릴때부터 유랑극단을 쫓아 일찍이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다른 국악인들과는 달리 월하의 국악계 입신은 참으로 극적이고 의외의 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의 본명 김덕순대신 여창 김월하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마치 백락천의 비파타는 여인을 연상케하는 참담하고 기구한 사연이 오뇌의 흐느낌처럼 얼룩져있다. 그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지금의 이태원부근에서 평범한 가정의 2남3녀중 막내로 태어 났다.그러나 나이 세살때 전국에 창궐하던 호열자에 걸려 어머니와 두 오빠가 죽고 부친 김희문씨가 실성하다시피 집을 뛰쳐나가자 세자매는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양녀로 키워지게 되었다. 그가 양녀로 간집은 종로구 사간동 모녀이대가 사는 전통있는 가문으로 그는 조모와 양모밑에서 절도있는 여성이 갖춰야할 모든 덕목과 예절을 배우며 자라났다. 재동보통학교에 다녔으나 15살때부터 혼인말이 나오더니 16살되던해 경기도 양주출신으로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던 김용복씨와 결혼,부군은 부인을 끔찍히 사랑하여 묘동학원 속성고등과에 보내주는등 자녀는 없었지만 부부의 금실은 유난히 좋았던 추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6·25때 부군이 납북되자 그는 손재봉틀 하나를 들고 부산 피란길에 나섰고 그때부터 이루 말할수 없는 가난과 고초를 겪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낮에는 낙동강 하구 하단에서 푸성귀를 받아다가 동대신동 시장에 나가 팔고 밤에는 삯바느질,착실하게 돈을 모아 집한채를 마련했으나 먹고 자는것 잊어 버린채 건밤샘으로 일거리에 쫓기다보니 영양실조에 걸려 덜컥 몸져 눕게 되었다. ○시조 동호모임 가입 그때 동네노인의 권유로 지금은 없어진 구덕수원지쪽에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고 새벽마다 그곳에서 시조연습을 하던 시조동호인들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멀찌감치 비켜앉아 그들의 연습을 구경이나 하는 입장이었으나 입속에서 조금씩 따라부른것이 차츰 시조에 빠져들어 그 모임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고 어디서 노래부른적도 없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부를수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느리고 길게 뽑는 호흡도 그렇지만 노래의 맛을 깊이 알아 우조를 부르고 계면우를 부르는 툭 터진 소리는 「마치 통나무를 끌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화미하면서도 시원하다」하여 당장에 시조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마침 동호인의 한사람이던 두봉 이병성이 두세번씩 그의 노래를 따로 청해 듣고는 「성색의 단아함과 장려함」에 무릎을 치며 기뻐해 마지 않았다.두봉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하규일의 지도를 받은 성악의 큰 봉우리로 그는 모처럼 만난 이 재능있는 여성에게 시조와 12가사 완창지도를 자청하고 나섰다.그때 얻은 아호가 달을 지고 있다는 뜻의 월하였다. 그는 장사를 때려치우고 낮에는 두봉 밑에서 배우고 또는 동네유지들을 모아 가르치거나 여기저기 불려나가 가곡을 부르게 되었다. ○소남 이주환에 사사 또 절색의 미모탓에 그를 바라보는 뭇시선이 많았으나 깔끔하고 쌀쌀한 성품은 한눈파는법 없이 오로지 시조에만 매달렸고 밤에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해냈다. 『어릴때 친부모 형제를 잃고 양녀로 키워지던 소년시절과 남편과 행복했던 결혼생활,피란지에서의 가난과 슬픔』을 마감하고 시조수업 3년만 59년 서울 중앙방송국이 주최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명창대회에서시조부문 1등 수상,당대최고 율객으로 손꼽히던 소남 이주환역시 「정려하나 격발이 없는,이처럼 가곡을 위해 태어난 청류의 음색」은 결코 흔치않음을 심사평에서 지적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피란길 10년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국립국악원에서 본격적인 소남의 가곡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그때 나이가 43세. 일장월취로 시존의 모든 갈래를 꿰뚫었고 한시도 세갈래로 섭렵하여 그의 이름은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고 정부행사나 모든 축하모임에서 당당히 가곡독창자로 출연하는 화려한 월하시대를 개막했다. ○검약실천,저축상받아 국악원과 국악예술고를 비롯,서울대 한양대 추계예술대 정신문화원 강사로 하루 5∼6시간 강의가 있을때도 그는 바느질만은 손에서 놓지 않는다.마포와 낙원동에 각 5층짜리 빌딩 주인에다 저축상을 받기도 한 재산가지만 단칸방에서 손수 밥을 지어먹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다닌다.아무리 배가 고파도 국수한그릇 사먹기위해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본일도 없다.화투짝 한번 만져 본적도 없고 술잔한 담배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그는 찬밥에 물을 말아 내손으로 담근 김치로 식사를 때우고 새벽에 일어나면 그가 사는 낙원동 골목길을 일일이 청소한다. 수없이 길러낸 자녀들의 미국유학도 하고 박사나 교수가 되기도 했지만 공부를 시키고 나면 독립시킬뿐 은혜에 보답받기 위해 그들을 공부시킨 것은 아니다. 지난 90년 50억 재산을 몽땅 털어 월하문화재단을 설립,마포에 있는 연구소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금도 집에는 대학 국악과에 보내고 있는 서너명의 양녀를 데리고 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아녀자에 불과할뿐,다행히 시조를 좋아하여 이 세계에 빠질수 있었고 나의 모든 시름과 외로움을 덮어준것을 늘 감사하고 있다』그래서 특별한 사명감이나 포부때문은 아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속요와는 달리 김천택의 청구영언 박효관·안치영의 가곡원류 김수장의 해동가요등 바둑판처럼 또렷한 정간보에 의해 비교적 체계있게 전수된 우리의 가곡을 후대까지 잇게하기 위해 국악에 뜻을 둔 젊은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가르치고 싶다는 일념이다. 시조강의할때가가장 행복한 그는 그의 소리를 원하는 곳은 부산이든 대전이든 마다않고 달려간다.그리고 어떤 무대에서도 「어전에서 부르던 정갈하고 깔끔한 노래답게 소리에 한도 싣지않고 흥도 치우치지 않게」몸가짐·마음가짐을 흐트리지 않는다.두성과 비음을 다 쓰면서도 잡소리가 섞이지않은 그의 노래가 곧잘 범패에 비유되는 것은 불교신자로서의 그만의 독특한 득도의 경지때문일 것이다./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궂은비는 붓듯이 온다.눈 정에 거른 님은 오늘밤 서로 만나자고 판접쳐서 맹서 받았더니 이 풍우중에 제 어이오리,진실로 오기 곳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이 짧은 우락이 10여분.그는 부군을 잃은대신 「가곡」으로 꽃피운 그의 세월속에서 도무지 오지않을 님을 한시도 기다리지 않은적이 없는듯,그 높고 긴 가락속에 임그리운 여운을 절절히 끌고있다. 웅려 정대한 스케일과 함께 옥쟁반에 쏟아붓는 은구슬 금구슬의 그 현란한 사연은 아마도 「나이나 세월은 사랑을 멈추게 하지않는다」는 단 한마디,그래서 그 끝없는 마음속의 계류는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른다. □연보 ▲1917년(양력 19 18년2월8일)경기도 고양군 한진면 보광리 출생(본명 김덕순) ▲1932년 서울재동보통학교졸업 ▲1936년 서울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고등과 졸업 ▲6·25 부산피란시절 부산 시조동호인 국립국악원 부산지원 두봉 이병성선생(이왕직아악부출신)사사 ▲1958년 서울중앙방송국주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 명창대회 시조부문 1등 수상,소남 이주환선생(초대국립국악원장)사사를 비롯,전라도 임석윤·이창배·정운산 선생 사사 ▲1959년 「월하시조」(오아시스레코드 출반) ▲1961년 서울귀환(종로구 낙원동 정착) ▲1968년부터 국악고교 졸업식장서 장학생선발(장학생육성시작) ▲1969년 국악협 시조분과위원장 ▲1970년 전국시우단체 총연합회 발족 초대 회장취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지정 ▲1974∼92년 국립국악원·국악예술고강사 ▲1975∼92년 서울대·한양대·추계예술대강사 ▲1981년부터 해마다 조선일보사주최 국락대공연 참가 ▲1983년 「김월하시조(1집·2집)」(아시아레코드출반) ▲1984년9월 문예진흥원주최 가곡발표회(문예회관대극장) 10월 가곡보존협회주최 가곡발표회(세종문화회관대강당) ▲1986년 「김월하가곡집」(LP3장,문화재보호협서출반) ▲1987년 국립국악원주최 중요무형문화재 발표 해마다 참가 ▲1990년 월하예술단및 월하어린이 예술단창단(KBS­TV출연및 해마다 지방공연) ▲1991년 뮤지컬 「콩쥐팥쥐」(월하 어린이 예술단공연) ▲1991년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 발족(월하국악상 제정및 국악경연대회 국악연구발표및 관련단체지원,장학생 선발 등의 사업) ▲1992년 월하문화재단설립1주년기념 전통음악발표회(예술의전당)주한외국인초청 공연(워커힐서)월하예술단공연(세종문화회관대강당)수십차례의 국내공연및 해외공연등 ▲1976년∼현재 법원연수원·서울교육원·정신문화연구원·한국표준공업학회 국립국악원 출강(현재)월하문화재단이사장,월하예술단및 월하어린이예술단대표,국악협회고문 84’국악대상·세종문화대상·88’저축의날 국민목련장
  • 북경·서울서 이색전 2건/「한국현대미술전」 「한국미술2천년대」

    ◎새해 화단에 신선한 바람/북경전/행위미술의 한·중 교감무대/서울전/300명 참여… 다양한 경향 제시/젊은작가 중심… 한국미술의 미래 전망 새해를 여는 1월화단에 대규모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는 이색기획전 2건이 중국과 서울에서 각각 펼쳐져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지난9일부터 15일까지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현대미술전」과 오는 27일부터 서울시내 16개화랑에서 개막되는 「한국미술2000년대의 도전」이 그 전시회들이다. 두 전시는 행사내용상 국내미술사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며 평론가 주도하에 결실을 맺게된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북경「한국현대미술전」은 우리 미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작가들이 사상 최초로 대거 중국화단에 진출했다는 사실이 높이 평가됐다. 그리고 한국미술의 현주소를 진단하기 위한 테마전 「한국미술20 00년대의 도전」에는 3백여명의 작가가 일제히 참여한다는 점에서 두 전시는 매우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미술관에 진출한 한국현대미술전에는 그동안 수원을 중심으로 교감미술제와 컴아트쇼등 전위적이고 범장르적인 행사를 가져온 컴아트그룹의 대표작가 26명이 출품했다.한·중수교후 처음으로 이뤄진 현대미술전으로 평면 입체 설치 포토아트 컴퓨터그래픽 사진 비디오 행위미술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40여점의 작품을 걸었다.출품작가 전원은 현지에 참가하여 중국미술인들과 교감의 자리를 갖고 지역성이 곧 세계성이라는 명제에 대해 국가를 초월하여 진지하게 논의하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이번 북경전은 지난5일 수원 장안문에서 출문표를 낭독하고 제의식을 가진후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중국 천안문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새로운 소통체계를 찾기위한 공동의 행위예술로 마련된 북경전에는 참여작가의 자문작가이며 이 그룹의 지도자격인 이승택씨와 행사커미셔너인 미술평론가 윤진섭씨가 동행했다. 한편 16개화랑과 3백여명의 작가가대거 참여하는 「한국미술 20 00년대의 도전」전은 장르를 초월한 다채로운 작업경향을 제시하는 가운데 젊은 미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단일주제의 테마전으로는 최대규모를 기록할 이 전시는 27일 개막,2월4일까지 계속된다.의욕적으로 활동하는 30∼40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통해 젊은 한국미술의 고민과 열망 그리고 과제를 찾아보고 미래상을 전망한다.이 전시에는 현실적으로 이름을 얻고있는 작가만큼 무명의 작가들도 그 수에 못지않게 동원돼 의미를 더해준다.특히 뚜렷한 비전없이 외래사조를 무분별하게 수용해온 현상을 반성하며 한동안 침체됐던 미술계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혼돈에 빠졌던 9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극복한다는 의지까지 담고있다. 이 테마전은 미술평론가 임두빈씨(단국대교수)가 기획했으며,한국화 서양화 조각 설치미술 판화등 전장르의 작가들이 출품한다. 화랑은 인사동지역의 가람 동산방 선 상문당 백송 현,강남의 서미 미건 박여숙 유나 이목 무역센터 현대미술관, 동숭동의 예향 사각,사간동의 갤러리2000 그로리치가 동참한다.
  • 화가 장우성씨(이세기의 인물탐구:8)

    ◎시·서·화 도양화삼절의 노인가/인위·조작없는 「무위사상」바탕,독창적 화풍/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 은은하게 표출/정많은 성품.부정엔 단호… 「친일논란」때 미술계풍토 비판도 대나무처럼 곧고 차가운 죽색청한과 물빛처럼 영롱하고 푸르른 수광징벽의 한벽원.이는 월전 장우성화백의 개인미술관 이름이다. 경복궁뒤 사간동 화랑가에서 삼청공원으로 이르는 초입에 위치한 한벽원은 서울 한복판(종로구 팔판동 35)이건만 인적없는 산간에 묻힌 선비의 서숙인양 적요속에 묵향이 감도는 분위기다. 눈부시게 흰 화강암건물과 「한벽원」이란 이름만으로도 주인의 기상과 풍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대나무·백매와 계수나무 사이사이로 진귀한 옛 석물·석등이 배치되고 뜰한가운데는 일중 김충현의 「한벽원용」,내부벽면은 12지신·광개토대왕 비문·석굴암 관음상에서 탁본해온 석고부조로 장식되어 미술관다운 품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바로 이곳이 월전의 모든 예술생애가 집약되고 또 앞으로 우리 한국전통미술의 올바른 맥을 보존·육성해나갈 본산이기도 하다. 아다시피 화단의 거봉인 월전은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의 삼절로 동양화 전영역에서 유창탁발의 화업을 이뤄낸 노대가다. 그의 작품은 공자가 그림을 두고 말한 「회사후소」,즉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마음을 깨끗하게 가다듬는다는 후소정신과 인위와 조작이 없는 무위사싱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월전의 이런 선비기질은 그의 그림에서 보듯 한점의 허세나 과장이 없이 잔잔한 운율이 유운문처럼 번지고 안으로는 응축된 깊은 사유가 은은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가 즐겨 그리는 학과 백로,화훼와 산수는 모든 기교가 배제된 간결 산뜻한 선묘와 담백한 설채,특히 그만의 묵의 묘취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막힌 환희를 안겨준다. ○담백한 선조 일품 월광을 배경으로한 백매가지에는 방금 물오른 새싹을 틔울듯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고 흰 눈속을 헤쳐서 꺼낸듯한 꽃의 화관은 보석처럼 눈부신 진주빛을 발한다. 마치 신운이 움직이는듯한 절제의 필치로써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장인기질보다는 원로의 정신미를 정밀하게 누리고 펼치는 시기라 할수있다. 1912년 임자생.80의 나이에도 그에게는 「노인」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바르고 건강한 모습에 단정하고 깎듯한 움직임,사물을 꿰뚫는듯한 예지의 눈길은 『글씨나 그림등 예술은 가장 천진한것이 극치』라는 완당의 말대로 그 청정의 눈빛을 지니고 있다.그에게선 어떤 흐트러짐이나 허술한 곳도,만모의 기색도 찾아볼수 없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선 다감하고 정이 깊고 상대방을 포용한다.단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추호의 용서나 양해가 없다.늘 옳은자의 편을 들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한다. 주말에는 골프,커피와 담배,두주불사의 애주가로 몇년전까지만해도 양주 한병을 비운 술실력이나 요즘은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순한 청주나 곡주를 즐긴다. 집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그러나 작업실이 있는 한벽원까지 아침 9시반에 출근해서 하오2시부터 작업대 앞에 선채로 3시간에서 4시간씩 작업에 몰두한다. 내년 가을 호암아트홀이 기획한 그의 화력 60년을 총정리하는 신작준비 때문이다.이는88년 일본 세이브미술관 초대 「한국·국화의 거장 장우성전」이후 5년만의 대작전시회여서 그는 모든 정열을 이곳에 쏟고있다. 그의 화적을 새삼 더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월전은 18세되던 해인 30년 스승인 이당의 낙청헌에 입문,초기에서 10여년은 사실적 시각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형태의 극세극채색의 치밀한 묘사에 밀착해왔다.그러다가 해방후 서울대미대에 재직하면서 스승의 회화권에서 벗어나 전통동양화인 수묵화에 정진하여 추상이 곁들여진 힘차고 분방한 용필로 활달한 화면을 추구해나갔다. ○18세때 이당에 사사 그는 경기도 여주의 전통적 유교가문에서 2남5녀중 다섯째,부친(장수영씨)의 나이 30세에 얻은 만득자여서 부모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월전」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달을 좋아한 아들을 위해 부친이 손수 지어내린 아호다. 할아버지에게 「동몽선습」「소학」「명심보감」과 「사서삼경」을 배우고 붓글씨를 공부하면서 그림을 시작,그림공부를 위해 상경할 무렵에는 평소 위당 정인보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부친의 배려로 위당댁에 드나들면서 조선역사를 익혔다. 이당문하에서 운보 김기창,현초 이유태와 나란히 수학한지 2년만인 32년 제11회 선전에서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를 그린 「해병소견」으로 화단에 등단,41년에 「푸른 전복」으로 총독상,그리고 연이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두차례 수상하고 44년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그린 「푸른 전복」은 열정적으로 부채춤을 추고난후 호흡을 가다듬는 무녀의 휴식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우리미술사를 말할때마다 거론되어지는 대표작중의 하나다. 범접하기 힘든 깨끗한 눈매며 전립의 영모,패영의 구슬은 이슬이 방울진듯,푸르른 구군복과 치마단까지 흘러내린 붉은 끈의 선과 색의 대비,공간을 여백으로 설정한 것등은 훗날 월전 문인화와도 일맥 상통한다. 싸늘한 겨울 날씨와 화면을 가득 채운 만월,한천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떼를 문인화의 무기교와 자연스럽게 절제된 묵선으로 관조한 조형어법은 「종교와도 같은 높은 이념이 함축」되어있다는 평이 뒤따르고 있다. 한치의 흔들림없이 지금도 여전히 화단의 정상을 지키는 월전으로서도 80성상을 돌아보면 흑색반점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44년 최고상을 받았을때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하여 「답사」한것을 스승과 의논없이 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이당의 미움을 받아 소원했던 일,서울대 미대교수시절 「교수자리」를 탐내는 후배의 이간으로 미대 창설동지이며 당시 학장이던 장발씨와의 긴 오해등,어지러운 세속에 휘말려야했던 곤혹과 환멸이 잊을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있다.물론 시간이 흘러 밝은 대낮처럼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곤 하지만 꼿꼿하게 앞만보고 살아온 그에겐 자존심에 먹칠당한 슬픈 추억의 장면장면들이다. 문인사대부의 학문과 역량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그의 그림속에 실린 아름다운 시구외에도 그는 「화맥인맥」등 신문에 자주 글을 발표한 미문으로도 유명하다. ○문장력도 뛰어나 그 한예로 83년봄 한 미술계간지가 다룬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란 특집기사로 인한 「친일 화가파동」때 그는 대단한 문장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해 4월21일자 모 두 일간지 광고를 통해 발표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는 이 성명서는 잡지에 게재한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일제36년과 해방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며 모든 미술작품은 일본의 식민지 잔재인양 매도하고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기사내용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설」임을 전제,「작고작가와 현역 미술인 대부분을 부관참시식으로 난도질」하면서 과거 민족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채 「민족예술창조라는 허구에찬 궤변」으로 사회여론을 오도,「이 방약무인한 오만을 나무라기전에 그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으며 소위미술평론가의 자격은 어디에서 취득했고 누가 인정했던가 묻고싶다」는 실랄한 항변과 규탄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글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월전으로 이 사건은 화단의 경종이 되어 서로 자숙하고 침착하게 자기 성찰하는 기회로 마무리 되었다. 월전은 이처럼 깐깐하다.굳이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화단의 누」라는 차원에서 가차없이 솔선하고 나섰다.그의 작업실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하고 청결하여 난초의 홍자색은 싱그럽고 고고하기만 하다.호불호를 선명하게 가려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사불란하게 실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번 미술관도 88년 구상·계획하여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미대와 홍대미대의 제자·화우들을 주축으로 즉시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89년 미술관 착공,91년 3월개관 2주일전 부설 동양미술연구소 제1회 수강생 20명을 배출했다. 까다로운 성품과는 달리 각계각층과의 다양한 교분은 수화 김환기,영운 김용진,의재 허백련,소전 손재형과 친형제같은 우의를 다졌고 대한교육보험의 신용호회장과 황수영 유경채 이대원 김원용 특히 일중과의 우정은 난향과도 같다. 가족은 부인 유리정여사(73)와 1남3녀.장녀인 정란씨가 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그의 만년의 예술은 「붓가는대로 그린다」는 명경지수의 염과 자연에 돌아가 자유하는 마음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구사하고 있다. 이제 월전화는 그의 생을 황홀하게 장식하기 위한 무르익은 화경에 접어들어 그 마지막 붓끝까지도 불후의 명작을 그리게 될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아산 현충사·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 영정,세종대왕 기념관 벽화 「집현전학사도」 낙성대봉안 강한찬장군·김경신장군·윤봉길의사·정포은선생·문익참선생·김종직선생·조식선생·정기용박사·유관순열사등 영정 제작.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1천호)」,고려대벽화 「군려도」크리스트상화(63빌딩)제작. □연보 ▲1912년6월 경기도 이주출생 ▲30년 이당 김은호 「낙청헌」입문 ▲32’ 제11회 선전 「해병소견」입선이후 계속 출품 ▲33’ 육교 한어학원 졸업 ▲41∼44’ 「푸른 전복」등 연4회 특선·추천작가 ▲46∼61’ 서울대 미대 교수 ▲49’ 로마 국제미전 「성모와 순교복자」3부작 출품(바티칸시 수장) ▲50’ 제1회 개인전(동화백화점 미술관) ▲63’ 도미,미국무성 화랑 개인전 ▲64’ 워싱턴 스퀘어 화랑주최 국제미술제 한국대표초대출품 ▲65’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 설립 ▲71’ 홍대 미대 교수 ▲75’ 유럽7개국 미술계시찰 ▲80’ 현대화랑서 도불 기념전 ▲〃 프랑스 정부초대 파리세루뉘시 미술관 개인전 「홍매」「석」등 프랑스문화성소장 ▲81’ 월전화집(지식산업사간) ▲82’ 독일 쾰른 시립미술관 초대 개인전 ▲85’ 국립 현대미술관 원로작가 초대전 ▲88’ 도쿄 아트포럼에서 「한국 국화의 거장 장우성전」개최 ▲〃 동산방화랑서 개인전 ▲92’ 오늘의 작가 11인전(진화랑)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역임 현 예술원회원 서울특별시 문화상·예술원상·5·16민주상 수상.
  • 지방대찰/대도시 포교당 개원바람

    ◎3보사찰중심 최근 2∼3년새 잇따라/“신도에 더 가까이” 포교효과 극대화/서울구룡사가 가장 성공적… “산에선 수행 전념” 3보사찰을 비롯한 지방의 불교 산중대찰들이 서울과 대도시등에 포교당을 설치하는 등 도심속으로 파고드는 포교바람이 거세다. 산속으로 찾아오는 신도들만 맞는 소극적 포교자세를 지켜오던 지방대찰들이 최근 2∼3년 사이 중생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도심으로 포교영역을 확대하는 경향이 부쩍 늘고 있는 것. 특히 이같은 경향은 지방대찰의 서울진출 뿐 아니라 지방 인근 대도시에서의 포교당 운영 혹은 각 교구보사와 도시사찰 연계형태까지 보여 신도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급증하고 있다. 해인사는 지난달 26일 영등포에 서울포교당 반야선원을,지난 2일 강남 역삼동에 해인선원을 각각 개원해 이미 지난 79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해온 송광사의 법련사(종로구 사간동) 통도사의 구룡사(서초구 양재동)와 함께 3보사찰의 서울포교당시대가 열리게 됐다. 이들 3보사찰과 함께 지방 각 교구본사들의 서울지역 포교당 개설도 늘고있는 추세. 신흥사가 지난 90년 사당동에 무혜사를 개원한 것을 비롯,선운사도 강남에 참회선원을 냈으며 봉선사도 지난2월 방배동에 포교당 광명선원을 개원,이달초부터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각 교구본사들의 인근지방 대도시 포교당 운영은 지난87년 신흥사가 속초시에 포교당 원각사를 세운 이후 월정사(강릉시 관음사·삼척시 삼장사·홍천 호국사) 마곡사(공주시 봉불사 포교당) 직지사(김천시 관음사 포교당)등도 나서고 있어 커다란 포교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밖에도 해인사의 대구포교당 각황사,통도사의 마산·창녕·양산포교당,범어사의 부산 금정포교당,고운사의 영주포교당,백양사의 광주포교당 관음사,대승사 대구포교당 관음사,봉선사의 의정부시 포교당 봉화정사등이 각 지방대도시에선 포교거점으로 정착,차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같은 지방대찰들의 대도시중심 포교당 설치운영 증가현상은 지방명찰과의 연대감을 통한 포교당의 대외적 신뢰감 확보와 이에 따른 포교효과 상승등의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불교계의일반적인 분석이다. 조계종 포교원장 무진장스님은 최근 나타나고 있는 이같은 지방대찰의 대도시포교당 개원경향과 관련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반가운 현상』이라며 『어떤 형태로든 포교당이 많이 생겨 불교를 알려야 하는 만큼 많은 사찰들이 이같은 추세에 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진장스님은 또 『어차피 불교수행은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지 않고 양쪽을 모두 병행해야 하는 만큼 도시에서는 포교,산중에서는 수행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같은 지방대찰들의 도심포교 가속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인 움직임』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성공적인 대도시 포교당으로 손꼽히는 통도사 서울포교당,구룡사주지 정우스님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어우러지는 것이 종교』임을 전제,대찰의 도심포교당은 ▲신도들에게 신뢰및 자부심을 주고 ▲역사성이 없는 도시포교당의 공통적인 운영상의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극복하게 하며 ▲본사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큰 스님 초청법회·성지순례·지방본사행사 참석등 독특한 프로그램을 통한 신도들의 불교이해와신행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 장점을 들었다.
  • 개인전 2∼3개 화랑 동시개최 유행

    ◎의욕의 다작 비해 전시공간은 비좁아/“강남북 나눠 선보이겠다” 작가요구도 한 작가의 개인전을 2∼3개 화랑에서 동시에 여는 전시형태가 화랑가의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번 봄시즌만 해도 중견한국화가 이철주씨의 개인전(3월20∼30일)이 인사동의 금호미술관과 가람화랑에서 함께 열린바 있으며,외국작가 장 크리스토전(3월21일∼4월4일)도 사간동의 갤러리현대와 청담동의 갤러리서미에서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호남의 정서가 짙게 밴 작가 송필용씨의 경우도 31일부터 금호미술관과 조형갤러리에서 서울전이 열리며 한국화가 김병종씨 역시 4월중에 조선일보미술관과 강남의 예화랑에서 대규모의 동시 개인전을 마련한다. 김씨는 특히 지난89년 불의의 사고를 당한이후 처음 갖는 이 개인전에 대작을 대거 선보인다. 그뒤를 이어 대전에서 활발한 작업을 펼치고 있는 한국화가 정명희씨는 강남의 서초갤러리와 청작미술관에서 모처럼의 서울전을 4월중 개최할 계획이다. 한 화랑에서 여러명의 작가를 초대하는 것과는 정반대 현상인 이같은 동시전은 지난해 한국화가 황창배씨가 교직을 떠나 전업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갤러리상문당과 두손갤러리에서 대규모개인전(91년5월30일∼6월14일)을 열면서부터 화랑가의 새 형태로 눈길을 받기 시작했다. 또 서양화가 이두식씨도 미국의 브루스터갤러리전속기념으로 서울의 시공화랑과 묵화랑·한국미술관 세곳에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내건 개인전(91년10월22일∼11월20일)을 열어 화제를 모았고,국전대상작가인 한국화가 전래식씨가 지난해말 인사동의 조형갤러리와 강남의 최갤러리에서 동시개인전(91년11월20 ∼ 26일)을 개최,좋은 성과를 보았다. 화랑가에서 친분이 남다른 갤러리상문당과 두손갤러리는 지난해 황창배씨의 동시전 경우와 마찬가지로 올봄 서양화가 한만영씨의 개인전(2월28일∼3월20일)도 함께열어 동시전 유행에 앞장서고 있다. 화랑가의 동시전기획은 작가가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많은 양의 작품을 의욕적으로 내보이려는데 비해 화랑전시공간들이 이를 한꺼번에 수용할만한 여건이 못된다는데 첫번째 이유가 있다.거기에다 최근 미술문화구역이 인사동권과 강남권·동숭동권등으로 분산되면서 미술문화의 메카인 인사동등 강북지역과 상업성이 강한 강남지역에서 작품을 동시에 나눠 전시하려는 작가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서양화가 이두식씨의 동시전이 그랬듯이 한 화랑에 전속돼 다른 화랑에서의 개인전 개최가 불가능한 작가를 화랑들간의 상호 협조아래 다른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열수있도록 기회를 나누는 이점도 동시전을 부채질하는 한 요인이다. 시공화랑 전속의 이두식씨를 동시에 초대했던 묵화랑대표 김미혜씨는 『동시전을 열면서 화랑간의 고충을 서로 털어놓는등 대화의 기회도 가질수 있으며,화랑들이 비용을 똑같이 분담해 작가의 대형화집을 발간하기도 하는등 동시전 개최에 대한 이점이 많다』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최병식씨는 『화랑가의 동시개최를 재미있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면서 『한 작가의 예술철학을 이해하고 그의 방법론을 한눈에 파악하려면 대작부터 소품까지 많은 작품을 봐야하므로 비록 공간은 달리 떨어져 있어도 대작은 대작대로,소품은 소품대로 모두 살필수있는 동시개최야말로 권장할만한 전시형태』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외국에서도 한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이나 회고전등은 2∼3개 화랑에서 동시에 열리는 경우가 통례인데,이 역시 상업화랑의 전시장규모가 20∼30평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화가 이철주씨는 『10년만의 개인전을 열면서 작품40∼50점은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일반화랑은 규모가 작고 1백평정도의 큰 대관전시장 대부분은 대관이 이미 끝나있는 상태여서 애를 태우고 있던중 동시개최를 갖게됐다』면서 『막상 전시를 끝내고보니 관객을 대하는 느낌도 다양하고 좋다』고 밝히고 있다.
  • 금의환향의 계절/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그날 우리 애국가는 참 아름다웠다. 흡사 자석처럼 우리를 앉은 자리서 일으켜 세우고 발부리부터 적셔와 가슴에 이르러 눈물이 되게 한 그 감동의 물결에 대한 기억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머리에 희끗희끗하게 권위가 얹힌 그 도도한 바스티유 오케스트라가 황색 피부의 젊은 한국인 지휘자 정명훈의 은빛 지휘봉을 따라 그토록 아름다운 「애국가」를 연주한다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경이로운 일인지를 우리는 만끽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기립한채 두팔에 쥐가 나도록 박수쳤다. 이 위대한 「금의환향」이 고마워서,박수밖에 해줄 수 없는 일이 미안해서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이렇게 빛나는 젊은이를 갖게 된 대한민국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가 어린 나이에 객지에 나가 온갖 역경딛고 성공을 이룩하는 동안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던 조국이라지만 그래도 영광을 한아름 조국의 품에 안겨주는 이 효성스런 아들이 고맙고 대견해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정명훈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여 당대에 우뚝선 봉우리들과 키겨루기를 해야 하는 그에게 초라한 극동의 작은나라에 지나지 않는 조국은 부담스럽고,애물이기만 한 것이었을까. 바스티유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던 같은 무렵,서울 사간동의 갤러리 현대 뒤뜰에서는 백남준의 서울 퍼포먼스가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며 세계적인 행위예술의 대가로 백남준과 비견될 수 있었던 고 조셉 보이스를 위한 「오귀굿」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였다. 이날도 그랬듯이 백남준의 행위예술에서는 「무당굿」이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어린날 그의 집에서 섣달그믐이면 펼쳐지던 재수굿과 그것을 관장하던 「애꾸무당」은 그의 예술혼을 관류해오는 중요한 정서의 서서였다. 전쟁중에 공중추락하여 시베리아의 한 촌락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조셉 보이스는 타르타르족의 샤만에 의한 신비한 능력으로 회생했다. 그로부터 거듭난 보이스가 그의 눈빛에 담고 있던 그 귀기서린 안광을 백남준이 알아보았고 그렇게 우정은 출발했다고 그는 피력하고 있다. 백남준도,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되어 세계속에 명성을 굳히기까지 조국은 그를 지원하지도 않았고 알아주지도 못했다. 알아주기는 커녕,행위예술이 지닌 「실험성」을 「해괴한 짓」으로 보는 시각이 아직도 농후하다. 그래도 그의 예술정신속을 흐르는 지하수는 무당굿이다. 그 백남준에게서 나라와 관계된 일화 한가지를 들은 적이 있다. 가난한 고학생으로 미국에 있던 때였다. 카네기재단에서 선발하는 음악 장학생에 그가 응모를 한 일이 있었다. 그 선발권을 가진 책임자는 백남준의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신청자가 일본인이면 불합격이고 한국인이면 합격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그 책임자는 줄리어드 음대와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중에도 한국의 음악유학생이 줄리어드에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전쟁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녀에게 음악공부를 시키는 열성이 그토록 높은 나라』이므로,한국출신의 음악도에게는 특별배려를 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더 거슬러 오르면 이런 일도 있다. 해방이 되고,건국이 되었을때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너무도 미미한 존재였다. 이 무명한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조금이라도 빠르게 좋은 명성을 높이는 첩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분이 있었다. 「배재」「이화」로 꽃피워 온 사립명문의 선생님이던 S씨다. 그 분은 그 「첩경」이 청소년의 예술적 재능을 집중 발굴하여 세계무대에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분을 찾아다니며 서둘러 예술계통의 중고교를 창설했다. 그렇게 설립된 예술학교가 오늘날 예술인력양성에 끼치고 있는 공훈은 그분이 당초에 예상했던 결과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음악한국」을 인정하게 된 원천이 그 학교에 있다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해준 것도 없는 조국이라고 자책하지만 그래도 하느라고 해온 노고가 우리나라에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것이 아니라도 조국은 조국이다. 일부러 찾아가서 외국공연을 후원할만한 동포는 아직 못 두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치는,너무 두들기다가 팔에 쥐가 날 지경인 동포관객들 앞에서 아름다운 국가를 연주할 수 있는 조국이라면 예술가에게 훌륭한 조국일 수 있다. 아무리 화려하고 공들인 성공이라도 금의환향할 수 있는 곳이 없으면 그 성공은 빛이 충분히 발휘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대한민국은 충분히 자격이 있는 조국이다. 어린 시절 분홍빛 이데올로기를 쫓아 먼길을 헤매다가 초로의 명예로운 석학이 된 재소과학자 장학수씨의 귀국도 금의환향이다. 이념과 인생의 방황을 고국청년에게 알리고 싶어 모국어로 자서전을 펴내기 위해 일시 귀국한 그는 『가능하다면 가족을 데리고 영구귀국해서 여생을 조국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도 대한민국은 훌륭한 조국이다. 사랑하고 싶고,봉사하고 싶은 조국이 없다면 천재들에게 무엇이 성공을 자극하겠는가. 걸핏하면 자학하고 스스로 업신여기는 우리나라지만,그 나라가 없으면 어떤 「금의환향」도 의미가 없다. 이 나라가 더이상은 자해의 상처를 입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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