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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인간, 인간세상에 ‘토’를 달다

    토끼인간, 인간세상에 ‘토’를 달다

    토끼 인간이 나타났다. 그것도 IQ 200이 넘는 천재 토끼 인간이다. 이 토끼 인간은 인류가 겪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에 원천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토끼 인간은 또 물리적인 폭력은 물론,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집단으로 길러지는 닭과 도살되는 오리들, 분재 안의 소나무 등 타 생물체와 사물들에게 가해지는 또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해서도 몸서리를 친다. 결국 현대 문명의 발달을 만끽하고 있는 인간에게 “제발, 무엇이든 하려고 하지 마라!”고 요구하다가 스스로 토굴 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풍자와 해학… 또다른 김남일 모습 김남일이 돌아왔다. 대하소설 ‘국경’ 이후 15년 만에 자신의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 펴냄)을 들고 모처럼 세상으로 나왔다. 한데 자세히 보니 그동안 알고 있던, 정색하고 변혁과 민중의 삶을 얘기하던 ‘거리의 소설가’ 김남일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김남일의 페르소나인 ‘토끼 인간 차상문’이 그의 한쪽 손을 잡은 채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고, 또다른 손에는 걸쭉한 해학과 풍자의 도구들이 넘치게 들려 있다. 소설은 천재 토끼 차상문의 일대기를 표방한다. 한국 전쟁 직후 빨갱이 척결을 소명으로 삼은 차준수가 좌익 지식인 유진명을 조사하러 왔다가 그의 여동생 유진숙을 강제로 범해서 토끼의 형상을 띤 ‘토끼 영장류’ 차상문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아버지는 원천적 폭력과 야만의 상징이며, 어머니는 순수의 원형으로 기억 속에 남는다. 차상문은 미국 버클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최연소 교수가 된다. 하지만 산업 문명과의 전쟁을 선포한 몬태나 숲의 은둔자 ‘쿠나바머’를 만나 그의 철학에 공감한다. ●존재 이유와 방식 유쾌하게 비틀어 소설 속에는 허위허위 헤쳐온 1960년대 베트남전쟁, 미국의 반전운동, 1980년 광주의 오월, 1987년 6월 항쟁, 2000년 9·11 테러 등 한국 현대사 50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음은 물론, 인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라 바깥의 역사적 사건들도 촘촘하게 배치돼 있다. 과거의 김남일이었다면 날 선 언어와 선명한 메시지의 도구였을 것들이, 달라진 김남일 안에서 한판 마당극을 풀어내듯 구성진 가락을 타고 능청스럽고 유쾌하게 비틀고 풍자하며 몸을 뒤틀었다. 이 작품은 서사(敍事)의 무게감을 뚜렷이 확인시켜준다. 인류의 존재 이유와 인류의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와 사유의 결과물을 근래에 보기 드물게 힘있고 강렬한, 그리고 유쾌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또한 인간 영장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들의 오만과 독선을 안타까워하는 토끼 영장류의 존재는 수준 높은 사실주의를 획득하면서도 ‘한국판 마술적 사실주의’의 맹아를 짐작하게 한다. 지치고 지친 차상문은 생태 근본주의로 회귀된다. 인간들에게 걸을 때 제발 쿵쿵거리지 말라고 부르짖는다. 땅이 놀라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스스로 준비한 생의 마감을 앞두고 그마저도 회의(懷疑)한다. 인간이 진화의 종착은 아니지만, 인간 역시 거대한 섭리의 일부가 아닐까 의문을 남기며 끝낸다. 차상문이 남긴 마지막 말은? 할(喝)! 혹은 잘(검은 담비의 털가죽).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용산·칸쿤… 자본·권력에 맞선 거리의 詩

    용산·칸쿤… 자본·권력에 맞선 거리의 詩

    여기 노동자 시인들이 있다. 백무산, 박노해, 박영근,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 엄혹했던 1980년대는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함’ 안에만 머물 수 없도록 했다. 시대는 노동자가 시(詩)를 쓰게 했고, 그 시를 가지고 시대와 맞서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노동자 출신 시인이 있을지언정 노동운동하는 시인은 더 이상 없는 시대가 됐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 송경동이다. 앞선 선배들과 달리 그는 자본과 권력, 분단과 반민주에 맞서 끈질기게 싸우고 있다. 한순간도 멈춤이 없었다.  꼬박 345일 동안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을 지켜 왔던 그가 최근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펴냄)을 내놓았다. 비록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까지는 아니지만 국무총리의 사과를 이끌어 냈으니 절반의 승리에 대한 자축이자 남은 절반 승리를 위한 새로운 싸움의 선전포고라고 볼 수 있겠다.  뭇 시선처럼 그는 호전적이거나 천상 ‘빨갱이’는 아니다.  놀이터에 아이 손잡고 놀러 갔다가 근처 식당에서 중늙은이 둘이 쩔쩔매며 장독대 울타리 치는 모습을 보다가 ‘…배운 거라곤/ 손이 하나 필요할 때 손 하나를 보태는 일’(‘겨울, 안양유원지의 오후’)이라며 선뜻 일손 거드는 모습이 송경동의 모습이다. 그 마음이 그를 용산참사 현장으로,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멕시코 칸쿤 집회장으로, 경기 평택 대추리 황새울 들판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농성장, 광화문 촛불집회로 내몰았다.(‘촛불 연대기’)  그가 내뱉는 투박함과 단선 논리, 직설의 시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문단의 시선이 있음을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시 창작이 아닌 투쟁의 공간만을 좇아다니는 그의 행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잘 듣고 있다. 아무도 살아 펄떡거리는 노동시를 쓰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남아 전선을 지키고, 시를 부르짖고 있으니 외로움이 클 터. 학습하고, 노동하고, 투쟁하던 서울 가리봉 2동 청춘의 시기를 돌아보는 시인은 그 곳과 구로공단을 이어줬던, 지금은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고가를 바라보며 “불우하고 불온했던 삶의 고가에서 잊혀질까 두렵다.”고 토로한다.  한데 다행스러움인지 공교로움인지. 비슷한 시기 시집을 낸 시인 김수열은 시편을 통해 후배 시인 송경동을 가리키며 ‘내 마음의 지도부’라고 칭했다. ‘시를 버릴 줄도 아는’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란다. 외롭기는커녕 든든하겠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우익청년 탄생기… 새 성장소설 시도

    우익청년 탄생기… 새 성장소설 시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장정일은 대단한 독서광이다. ‘장정일의 공부’, ‘독서일기’ 등을 보면 그의 넓고 방대한 독서 편력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렵다. 또한 정력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1987년 내놓은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기존 문단의 나른한 모더니즘 혹은 리얼리즘 경향을 찌릿하게 감전시켰다. 그는 첫 시집으로 대뜸 김수영문학상을 안았다. 소재, 주제, 기법, 시적 장르 문법 등 모든 측면에서 기존 경향을 비웃는 실험적인 시를 한참 써대던 장정일은 어느날 문득 소설가로 ‘전업’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통해 대중의 화제와 문단의 외면을 함께 얻은 그는 작품의 외설성 등으로 호되게 곤혹을 겪었다. 그러나 ‘아담이 눈뜰 때’,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내놓은 작품마다 영화화되는 등 대중성과 비대중성의 애매한 경계를 자유롭게 오갔다. 희곡작가와 자유기고가, 에세이스트 등 신분을 바꿔가던 장정일은 1999년 11월 경장편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를 마지막으로 남들 앞에서 소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네 모습 담은 배경 설정… 이념적 좌표 문제 등장 그리고 꼬박 10년이 흘렀다. 장정일의 새 장편소설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펴냄)은 시인 류시화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 작품은 장정일의 기존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구체적 현실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했고, 이념적인 좌표의 문제를 등장시켰다. 그는 ‘구월의 이틀’ 소설 바깥에서, 그리고 소설 안에서 연신 강조하듯 ‘우익청년 탄생기’로서의 새로운 성장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적이고 건강한 청년이 아닌 우익적 이념을 가진 청년이란 설정도, 동성애를 통한 성에 대한 눈뜸도, 최소한의 교훈의 가치(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아라!) 등도 모두 성장소설적 코드들이다. 소설은 바로 엊그제 우리네 모습을 담았다.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한다. 광주에서 활동해온 시민운동가의 아들인 ‘금’과 경제적·사회적 기득권을 누리며 부산에서 자랐던 ‘은’은 서울에 있는 같은 대학에 입학하며 만난다. ●개연성 없는 서사·설익은 인물 아쉬워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대립항에 가깝다. 금의 아버지는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이고, 은의 아버지는 밥먹듯 부도를 내지만 부유한 형제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다. 외향적인 금은 만인이 올려다보는 정치인을 꿈꾸지만 삶의 본질과 인생의 비의를 어렴풋이 깨닫고 작가를 꿈꾼다. 내성적이고 유약한 은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오며 시인의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우익 청년정치에 발을 디딘다. 절대 다른 색깔의 금과 은은 자신들의 만남을 ‘이종교배를 통해 우성을 낳는 자연선택’이라고 부르며 아슬아슬한 동성애적 만남을 이어간다. 그렇다고 장정일의 이념적 가치가 투영됐다고 읽는 것은 오독(誤讀)에 가깝다. ‘5%의 논리로 절대 95%의 논리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우파들’이 ‘다짜고짜 빨갱이라고 인장부터 찍고 보는’ 행태나 또다른 형식의 인간애인 동성애를 애써 감추며 보수연(然)하는 우파들의 위선에 우회적인 야유를 잊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그가 새롭게 창조한 인물의 전형성은 부족하다. ‘우익 청년 탄생기’라고 스스로 밝혔듯 새로운 인물상의 제시를 기대했건만 살아 꿈틀대는 모습보다는 좌충우돌의 설익은 인물들만 소설 속을 배회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서 금의 아버지의 난데없는 자살, 은의 아버지의 가정부와 바람 등 개연성없는 서사(敍事)의 연속은 허탈감마저 들게 한다. 불과 몇 년 전의 당대와 그 인물들을 다뤘기에 배반감은 더욱 크다. 우리가 삶 속에서 스무살의 청춘에게 보내곤하는 관대함이 갓 태어난 ‘퓨어 라이트 은’ 혹은 장정일의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 부호를 남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열린세상] ‘변듣보’와 국가의 품격/금태섭 변호사

    [열린세상] ‘변듣보’와 국가의 품격/금태섭 변호사

    최근 검찰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했다는 혐의로 진중권씨를 기소했다. 보도에 의하면 공소사실 중 모욕죄에 해당하는 내용은 진씨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변듣보’ ‘듣보잡’ ‘비욘 드보르잡’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모욕죄에 관한 법조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법에 위반되는 표현이라고 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표현을 문제 삼아 국가의 형벌권을 발동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판례는 모욕죄를 ‘사실을 적시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추상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이 그동안 모욕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예를 보면 ‘늙은 화냥년의 간나(1987년 판결)’, ‘망할 년(1990년 판결)’, ‘개 같은 잡년, 시집을 열두 번을 간 년, 자식도 못 낳는 창녀 같은 년(1985년 판결)’, ‘빨갱이 무당년, 첩년(1981년 판결)’ 등이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격한 논쟁을 주고받는 중에 상대를 조롱하는 의미를 가진 지칭을 사용했다고 해서 ‘개 같은 잡년’이라는 말을 한 것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히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모욕죄에 해당한다고 하면 우리 사회에서 풍자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용모를 동물에 빗대서 표현하는 것은 어떤가. 대통령을 쥐처럼 묘사한 만화를 그리면 처벌을 받아야 할까. 만일 5공화국 치하에서 당시 대통령을 대머리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처벌 받은 사례가 있었다면, 형법상 모욕죄를 철저히 적용한 사례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대법원은 “모욕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판단 또는 의견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경우에도 그 시대의 건전한 통념에 비추어 그 표현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 볼 수 있는 때에는 … 위법성이 조각된다.”라고 하여 표현의 자유가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었다. 인터넷이나 언론 매체에 스스로 글을 올리면서 논쟁을 주고받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조롱이나 풍자는 참아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글자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모욕죄를 들이대려 한다면 아마도 지금 인터넷에 올라 있는 댓글의 상당부분이 처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사안에 대하여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나 공공의 신뢰를 해친다는 이유로 형벌권을 발동하고 있다. 방송 보도의 진위를 문제 삼아서 TV 프로그램 제작진을 체포하기도 했고, 인터넷에 올린 경제예측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일부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네티즌을 구속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가정보원을 비판한 인사에 대해서 대한민국을 원고로 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이번 사건은 인터넷에서 벌어진 논쟁의 와중에 상대방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을 떼어내서 모욕죄로 기소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개인이나 공공기관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우리 정부의 이러한 노력이 우리나라 전체의 명예를 높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뉴욕타임스에 상당한 정도의 허위사실이 포함된 전면광고가 실렸을 때 미국 연방대법원은 “잘못된 발언도 자유로운 논쟁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고 표현의 자유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시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했다. 요즘 유행하는 ‘국가의 품격’은 이런 결정을 통해서 높아지는 것이다. 정부의 형벌권이 두려워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표현이나 풍자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격’ 운운한다면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는 조롱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금태섭 변호사
  • 한국 현대사의 증인… 만화로 만나는 DJ

    한국 현대사의 증인… 만화로 만나는 DJ

    정치인의 생애를 만화로 다룬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특히 전·현직 대통령의 경우 더욱 그렇다. 살아 있건, 고인이 됐건 잘못하다간 명예를 건드릴 수 있는 데다가, 또 자칫 찬양 일변도일 경우 작가 자신에 쏟아지는 눈총과 ‘찍힘’을 감내하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하여 웬만한 작가적 통찰력과 냉정한 용기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선뜻 펜을 들기가 쉽지 않다.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 가장 즐겨 서울신문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시사만평’의 작가 백무현(46) 화백. 그는 2005년 전직 대통령을 정면으로 다룬 ‘만화 박정희’(전2권)를 펴내 주목을 끌었다. 뒤이어 2007년에는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을 다룬 ‘만화 전두환’(전2권)을 발간,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1979년 12·12 하극상 반란부터 구속되기까지 굴곡의 15년 현대사를 거침없이 다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이번에는 ‘만화 김대중’(시대와 창 펴냄)을 펴냈다. 3년여의 작업끝에 한국현대사의 증인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만화로 엮은 것. 앞의 두 저서에도 그렇지만 작가 특유의 치밀한 자료조사와 고증을 거쳐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곳곳에 베어난다. ‘만화 김대중’에서 저자는 ‘인간 김대중’ ‘경천애인’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등 크게 네가지 분야로 접근하고 있다. 정치적 거물이었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이 ‘동물의 왕국’이었다는 사실과, 귀여운 강아지를 혼낸 것에 단단히 화가나 국회에서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따졌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휴머니스트로서의 인본주의적 성정을 부각시켰다. ●‘선생님’ ‘빨갱이’ 호칭 동시에 얻어 그는 ‘행동하는 양심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서문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빨갱이’와 ‘선생님’이란 호칭을 동시에 얻은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고 정치와 경제·사회·문화 등 한국의 현대사를 말할 수 없다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또 집필 내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치와 정신 만큼은 빠뜨리지 않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인간 김대중·정치인 김대중 등 4분야로 원래 5권으로 계획된 ‘만화 김대중’은 이번에 우선 2권이 출간됐다. 1권 ‘하의도에 핀 인동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의 풍경을 펼치면서 하의도에서 겁쟁이었던 어린 시절과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사업으로 성공하고, 6·25 전란 속에서 첫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정계에 입문하기까지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권 ‘행동하는 양심’에는 첫 부인 차용애씨의 죽음과 새로운 정치적 후원자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악연으로 만난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을 담았다. 이후 1971년 대선, 김대중 납치사건 등도 만화적 기법으로 흥미롭게 접근했다. 나머지 3, 4, 5권도 이달 안으로 모두 출간될 예정이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열린세상] ‘트랜스 DJ’의 시대를 열어야/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해 국민이 비통에 잠겼다. 운명적으로 비슷한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떠나보내게 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빨갱이’ ‘좌익 용공분자’ ‘후광’(後廣) ‘인동초’(忍冬草) ‘토머스 모어’ ‘동교동’ ‘행동하는 양심’ ‘아시아의 만델라’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햇볕정책’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등은 김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수사(修辭)들이다. ‘빨갱이’와 ‘좌익 용공분자’는 여운형 선생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일시 몸담았던 인연으로 평생의 꼬리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오히려 그는 우파 반동세력으로 몰려 복역한 바 있다. 1957년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15세기말 영국의 대법관과 하원의장으로 활약했고, ‘유토피아’(1516)의 저자이기도 한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데 불응,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는 193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諡聖)됐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우리 역시 김 전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기를 희망한다. ‘빨갱이’에서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 1971년 선거 지원유세서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1973년 유신독재 치하 정보요원들에게 납치되어 두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군사정권이 사형선고를 내릴 때마다 그는 불굴의 투지로 일어섰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인동초’(忍冬草)였고, ‘행동하는 양심’과 ‘아시아의 만델라’가 덧붙여졌다. 그리고 5·18 내란 음모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또 한 번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7년 ‘서울의 봄’과 6월 민중항쟁으로 얻어낸 민주정권의 수립 기회를 야권의 단일화 실패로 지연시킨 책임은 작다고 할 수 없다. 5년 후 노태우 정권 후계자로 지명된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를 영국으로 떠나보내면서 지지자들 역시 오열하고 세상을 등졌다. 우여곡절 끝,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후락과 전두환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리에 사무친 정적(政敵)의 이름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 같은 용서와 화해의 노력은 서거 직전 병상에까지 계속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1998년의 외환 위기사태를 3년 만에 극복했으며, 우리나라를 인터넷 강국으로 육성하고 각종 인권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2000년 6월, 분단 55년만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햇볕정책으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빛나게 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으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은 실책에 속한다. 자신의 햇볕정책을 전방위로 수행했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을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도 실책이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이념적으로만 해석하여 민주당을 거리투쟁으로 내몰았던 것도 구시대의 이념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독도문제를 지나치게 양보하고, 오는 9월3일로 100년이 만료되는 청·일 간도협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도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트랜스 DJ’, 그것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를 통하여 그의 유지를 존중하되 그의 실책과 한계를 지양하면서, 내일의 삶에 필수적인 새로운 지혜를 창조하는 ‘희망의 변증법’을 펼치는 일이다. 김진 울산대 철학과 교수
  • [김 전대통령 서거]정치권 한목소리

    “거목은 쓰러졌지만 그 분의 유지(遺志)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정치권에서는 ‘화해와 용서’라는 고인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고인과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각각 상징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도 “남은 우리가 지역주의 해소에 매진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상도동계 출신인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는 19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두 분이 인간적인 면에서 화해를 했고, 이제 정치적인 화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특보는 “두 분을 모시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후배들이 지역주의를 고치는 일에, 민주화 운동의 초심으로 함께 손 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우리 국민이 새로운 결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원로 정치인들도 지역갈등과 이념·계층 간 갈등을 극복해 고인의 뜻을 받들자고 한 목소리를 냈다. 정치적으로 같은 편에 섰든, 반대편에 섰든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어 내는 일에 힘을 쏟자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고인이 지역감정으로 피해를 본 것도, 그것을 활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된 뒤 화합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면서 “그분의 뜻을 받들어 한층 더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전 의장은 “정치권도 격돌과 대립에서 벗어나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중·대 선거구제 개편 등을 대승적 견지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도동계 출신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까지 듣고 모진 고초와 모욕을 당했지만 고인은 자신에게 모질게 했던 사람들을 다 용서했다.”면서 “그분의 말과 행동을 10분의 1만 닮았더라면 지금 우리 사회처럼 꽉 막힌 상황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김 전 의장은 “서로를 껴안고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동교동계 출신인 박상천 민주당 상임고문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남북화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던 그 뜻을 이어받아 고인의 중도·개혁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고인은 남북 및 이념 간 화해와 화합을 위해 헌신하고 국민과 함께 고락을 함께 한 분으로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라면서 “고인이 남긴 높은 뜻을 계승하는 데 모든 국민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회 부의장 출신의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은 “지역문제뿐 아니라 계층 간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한다.”면서 “지역갈등 해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 양극화를 치유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홍 의원은 “고인이 재임시절 사회안전망 구축을 서두른 것도 그런 차원이라고 생각한다.”고 상기시켰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김 전대통령 서거]홍일씨 파킨슨씨 병 앓아 수척

    [김 전대통령 서거]홍일씨 파킨슨씨 병 앓아 수척

    풍채 좋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61) 전 의원의 초췌한 모습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홍일씨는 부친 임종 직전 “아·버·지”란 세음절을 힘들게 토해낸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에서 아버지의 영전에 꽃을 바치려고 했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홍일씨 고문 후유증으로 병 얻어 최경환 비서관은 19일 브리핑에서 “5·18 내란음모사건 때 중앙정보부가 ‘(DJ는) 빨갱이’라고 불라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몸을 던져 허리 등을 많이 다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을 잃은 이희호 여사도 이날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탈진해 링거를 맞았다. 이 여사를 곁에서 지키고 있는 성인숙(61)씨는 “강단있고 의연한 여장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씨는 2000년 청와대 제2부속실장으로 재임한 뒤부터 이 여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성씨가 이 여사의 눈물을 본 것은 지금까지 딱 세번이다. 성씨는 김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 후유증으로 2005년 입원했을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김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을 당하고 심지어 도쿄에 피랍됐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 여사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이 여사의 첫 번째 눈물이었다. 이 여사는 지난 12일 김 전 대통령의 도쿄피랍 생환 36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열렸던 기도회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두 번째 눈물이었다.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강한믿음 보였던 의연한 여장부가…” 성씨는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보좌진들이 불안해하자 이 여사는 ‘걱정마라. 반드시 쾌유하실 거다.’며 강한 믿음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런 이 여사였기에 성씨는 이 여사의 약한 모습이 낯설지만 그간 인고의 세월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씨는 “이번이 이 여사의 마지막 눈물이었으면 좋겠다.”며 이 여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이재연 오달란기자 oscal@seoul.co.kr
  • 지독하게 웃기지만 씁쓸한 뒷맛이…

    우리 사회의 현실은 코미디보다 더 웃긴 경우가 많다.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열외인종 잔혹사’(주원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는 지독하게 웃기지만 웃음 속에 쓴맛이 배어나는, 이 사회의 현실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사건은 11월24일 하루 동안에 일어난다. 작가는 극우 노인 장영달, 비정규직 여성 윤마리아, 중년 노숙자 김중혁, 백수 게임폐인 기무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열외인간’들의 하루 생활을 시간대별로 추적해 간다. 네 명의 주인공은 서로 스치고 얽히다 결국 대형쇼핑몰인 코엑스몰에 모인다. 그리고 오후 4시, 갑자기 코엑스몰의 불이 꺼지고 양의 탈을 쓴 정체 모를 무리가 총을 들고 나타나 인질극을 벌인다. 하지만 열외인간들의 반응은 제각각. 극우 노인은 이를 ‘빨갱이들의 쿠데타’라 여기고, 게임폐인은 게임회사의 이벤트라고 여기는 식이다. 이런 능글맞은 유머를 들이대는 작가는 이력부터가 특이하다. 공대를 중퇴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아 현재는 대안 교회를 꾸려가고 있다. 그러면서 꾸준히 신학과 창작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이번 작품에도 종말론적 설정 등 종교적 색채가 다분히 묻어난다. “천민자본주의의 노예로 착취당하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코엑스몰을 점령한 양떼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심판’한다. 이들은 60세 이상 노인들과 70㎏이 넘는 여자들을 처단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유머러스하지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빗댄 뼈가 있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양떼들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는 등 시종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공분을 표출하고도 이를 시스템으로 연결시킬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이들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양’의 속성과 닮았다. 결국 양떼들도 네 명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은 비주류일 뿐이다. 비주류들의 위협이 주류세력이 아닌, 같은 열외인간들에게 향한다는 데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있다. 작가는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결국 이 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열외인간들의 삶을 날카롭게 제시한 것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당했을 때 작품을 구상했었고,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면서 작품의 결말을 생각했다.”면서 “그 역시 비주류이자 크게 보면 ‘열외인간’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창작의도를 밝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씨줄날줄] 네이밍 vs 라벨링/진경호 논설위원

    이미지로 먹고 사는 정치에서 상대를 누를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라벨링(labeling), 딱지 붙이기다. 한 번 가슴에 주홍글씨가 찍히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지워지지 않는다. 주차위반 스티커처럼 갖다 붙이긴 쉽지만, 이걸 떼려면 수십배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등장한 ‘차떼기당’은 ‘보수세력=부패집단’이라는 공식을 낳은 대표적 낙인이다. 지하주차장에서 불법 대선자금을 차로 실어나른 한나라당을 향해 열린우리당이 붙인 ‘차떼기당’이라는 이 오명은 전시(戰時)도 아니건만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천막당사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광복 직후의 ‘친일파’나 ‘빨갱이’에서 보듯 사실 우리 정치는 차떼기당 말고도 오랜 낙인정치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좌파 진영이 ‘좌익’ 대신에 ‘진보’라는 모자를 쓰고 있는 것도 남북 분단의 대치 구도에서 ‘좌익=친북=척결대상’이라는 낙인으로부터 비켜서려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낙인의 저주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가 단적인 예다. 소비자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기피하면서 한때 100여개에 이르던 수입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해외로 덤핑 역수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검찰이 MBC PD수첩의 보도가 과장·왜곡됐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으나 한 번 각인된 ‘미 쇠고기=광우병’이라는 일반의 부정적 인식까지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라벨정치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강부자 내각’ ‘고소영 내각’으로 시작해 ‘MB 5대 악법’ 등 갖가지 딱지들이 난무한다. 대부분 집권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야권이 동원한 라벨들이다. 한나라당도 이에 질세라 비정규직 해고사태를 ‘추미애 실업’으로 명명하며 딱지 붙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 같은 정치판의 라벨링은 언뜻 마케팅의 네이밍(naming)과 비슷해 보인다. 하나 정반대다. 네이밍은 자기 제품의 핵심을 내보이려는 노력, 즉 자기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인 반면 정치판의 라벨링은 거짓과 왜곡으로 상대를 죽이려는 노력이다. 상대 얼굴에 침 뱉는 라벨링 정치 말고, 좀 짙더라도 제 얼굴에 화장하는 네이밍 정치를 보고 싶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법관 꿈꾸던 소년 59년째 가슴앓이

    법관 꿈꾸던 소년 59년째 가슴앓이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도맡아 하며 법관을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이제 70대 노인이 된 그 소년은 서울의 20만원짜리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59년 전 전쟁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그의 부모와 세 동생은 빨갱이로 몰려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전쟁고아라는 상처를 안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59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만난 김장성(73·서울 녹번동)씨는 “내 인생은 한국전쟁 때문에 송두리째 망가졌다.”며 한숨을 토해 냈다. 한국전 당시 경찰이나 국군에 의해 처형당한 보도연맹이나 부역자 출신의 자녀들은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사상범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했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김씨도 이런 전쟁고아 중 한 명이다. 김씨의 아버지 김석남(작고 당시 30세)씨는 마을의 이장으로 일하다 빨갱이로 몰렸다. 3개월간 피신생활을 하다 1950년 12월 아산경찰서로 가서 자수했지만 1·4후퇴 즈음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 최일순(작고 당시 38세)씨와 김씨의 12살, 5살, 2살짜리 동생들은 도민증을 준다며 면사무소로 오라는 소리를 듣고 갔다가 인근 성재산 방공호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희생됐다. 김씨는 온양에 심부름을 간 덕에 화를 면했다. 김씨의 둘째 동생 무일(당시 9세)씨도 경찰이 풀어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후 난리통에 동생과 오롯이 남게 된 김씨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야간고등학교를 나와 대입 시험을 봤지만 등록금 마련을 위해 부어 놓은 곗돈을 떼여 입학을 포기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군 간부후보생에 지원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4주 만에 나와야 했다. 공사판과 노점상을 전전한 김씨는 47살부터 20년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며 부어 놓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7년 김씨 마을의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아산 부역혐의사건은 인민군 점령시기인 50년 9월~51년 1월 부역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77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이라는 결정문을 발표한 뒤 정부 차원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공권력이 처형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씨는 “보상은커녕 정부의 공식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과거사 정리는 공권력의 잘못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피해자 입장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에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진실규명 신청이 들어온 것은 총 7820건이다. 그 중 절반도 안 되는 3190건만 규명됐을 뿐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상흔인 전쟁고아들에 대한 통계나 연구는 전무한 상황이다. 글 사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여순사건이 반공국가로 만들었다”

    “여순사건이 반공국가로 만들었다”

    발발 61년이 됐지만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아픈 역사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남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서술돼 왔다.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진압 작전은 반란을 바로잡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여겨졌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사는 최근 출간한 ‘빨갱이의 탄생’(선인 펴냄)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이같은 냉전 반공주의식 해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국민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국가폭력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라면서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억압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 빨갱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키고, 반공 체제를 형성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실제 지난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순사건 때 전남 순천지역에서 민간인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해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진압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서 국가에 사과와 위령사업을 권고했다. 김 연구사에 따르면 일제 시기와 해방 직후까지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급속히 유포된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좌익 세력에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의 이미지를 덧씌워 극단적인 적대의식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김 연구사는 빨갱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에 군대, 경찰 같은 국가 기구뿐만 아니라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도 가세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사는 이어 이승만 정부가 여순 지역을 진압한 후 남한 사회 전체를 반공체제로 재편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군대는 대대적인 숙군을 통해 반공군대로 무장했고, 다수의 우익청년단은 대한청년단으로 재편됐으며, 교육계에선 좌익 혐의를 받은 교사와 학생들이 축출됐다. 1949년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제정은 반공 체제를 확고히 하는 법적인 토대가 됐다.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는 반공체제를 유지시키는 주요 원천이었다. 김 연구사는 “보수 진영이 그동안 억압된 여순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일부 진보진영이 여순사건의 진실에 대해 보이는 불편함과 침묵 역시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순사건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문제, 국민 형성의 논리, 반공주의 문제는 지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여순사건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더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39시간 연속 500개홀 돈 68세 골퍼

    39시간 연속 500개홀 돈 68세 골퍼

    68세 골퍼가 39시간 연속으로 500개 홀을 돌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방송인으로 은퇴해 지금은 목사로 활동하는 밥 커츠가 화제의 주인공이라고 야후! 스포츠의 골프 전문 데빌 볼 블로그의 제이 버스비가 15일(이하 현지시간) 소개했다.500홀을 돌려면 18홀 코스를 27차례 돈 다음 14홀을 한 번 더 돌아야 하는 엄청난 거리.  골프계의 철인 커츠는 지난해에도 405홀을 연속해서 돈 바 있다.  그는 앨라배마주 페어뷰에 있는 체슬리 오크스 골프장에서 지난 10일 오전 5시1분에 출발,다음날 오후 7시48분 500홀째를 채웠다.  커츠가 이런 도전에 나선 동기는 기부 때문이다.그는 500개 홀을 돌면서 4만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았다.그는 이전에도 두 차례나 마라톤 골프로 10만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마지막 500홀의 그린에 올라섰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는 “뚜껑이 열릴 뻔 했어.”라며 말을 꺼낸 뒤 “6피트짜리 버디 퍼트를 남겨뒀는데 툭 밀었지.근데 그 순간에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가 생각난 거야.갤러리에게 알렸더니 모두 박수를 보내대.”라고 말을 맺었다.  커츠는 요즘도 4시간씩 매일 350~500개의 볼을 친다.하지만 누구나 바스켓에 공을 잔뜩 담아 그렇게 칠 수 있는 일.  하지만 커츠는 꾸준한 성적을 올리는 골퍼다.낮에 플레이하면 평균 72.6타를 치고 해가 진 다음에는 76.7타를 기록한다.그는 어두움이 내린 뒤에 볼의 반짝거림만 보여도 볼을 쳐내곤 한다.한 라운드 도는 데 53분 정도가 걸린다.  이렇게 그를 철인으로 만든 힘은 무엇일까.다른 골퍼들과 다를 게 없다.다음 홀에서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다.커츠는 “한 라운드에 보기를 14~15번 저지를 때도 있다.”며 “그때는 1등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해본다.그러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다음 목표는 무얼까.일주일 내내 낮시간에만 골프해 2000개 홀을 누비는 것이다.  그런데 대기록 도전에는 함께 플레이할 동반자가 필요하다.당신이 그걸 하겠는가.그렇다면 회사에 휴가를 내야 하고 가족들에게 지청구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다른기사 보러가기] ☞[여의도 블로그]봉하마을 저작권 속앓이 ☞北 “美여기자 2명, 범죄행위 인정” ☞“김정운 후진타오 만났다” ☞온라인 고스톱·포커 하루 10시간만 허용 ☞해외유학 과장광고 ‘경보’ ☞100m상공 인천공항 관제소 올라가보니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이 반공국가로…” ☞“위험하단 말 한마디 안한 속깊은 아이였는데…”
  • ‘시베리아 삭풍회’ 아물지 않는 상처

    ‘시베리아 삭풍회’ 아물지 않는 상처

    “일본으로, 소련으로 끌려다니며 죽도록 고생만 하다 5년 만에 돌아왔는데…. 양친이 다 돌아가셨더라고.” 백발이 성성한 황희성(85)옹은 65년 전 1944년 1월을 잊지 못한다.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출신인 황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던 열여덟살 청년이었다. 그해 강제징집 대상이 됐다는 통지를 받은 황옹은 “이듬해까지 만주와 쿠릴열도에서 철도관리와 섬 경비업무를 하면서 보냈제. 그러다 8월15일 일왕이 항복했다면서 우리를 배에 태우더라고. 귀향길이라 철석같이 믿고 올라탔건만….” 그러나 그를 비롯한 전쟁포로들이 도착한 곳은 고향이 아닌 차디찬 바람이 부는 소련 하바롭스크항이었다. 그후 4년간 시베리아 밀공장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49년 옛 소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고국 땅을 밟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떴고 고향 사람들은 “일본군에 협력한 친일파”, “소련에 머물렀던 빨갱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결국 고향을 떠나 전국을 전전하며 평생을 연탄장수로 보냈다. 황옹은 “일생이 끔찍혀. 그렇다고 국가가 변변하게 보상해 준 것도 없어.”라며 눈물을 삼켰다. 황옹처럼 일본과 옛 소련으로부터 강제징용과 강제노역 등 이중 착취에 시달린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은 1만여명. 60여년이 지난 지금 남한 내 생존자는 고작 18명뿐이다. 당초 남한 생존자 56명은 91년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2003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미지불 임금반환 및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보상이 이뤄졌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일본은 삭풍회 회원들과 동일한 피해를 당한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자 지원을 위한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 조치법안’을 마련해 국회에 상정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같은 전범국인 독일이 2007년 강제노역자 167만명에게 모두 43억 7000만유로(약 5조 4250억원)의 보상을 완료한 것과 대비된다. 우리 정부 역시 냉대로 일관했다. 문민정부 이후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보상은 없었다. 지난해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생존자들에게 각각 80만원을 지급한 것이 전부다. 삭풍회 이병주(84) 회장은 “보상은커녕 숨진 원혼을 달랠 위령탑 하나 세우지 못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현재 미지불 임금반환 항소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힘이 부친다. 모두 80세를 넘긴 생존자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회장은 “피해자들이 한을 풀고 눈감는 게 간절한 소원”이라고 하소연했다. 삭풍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27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 전시회를 국회도서관 2층에서 연다. 이번 전시회에는 시베리아 억류 당시의 상황을 담은 자료 75여점이 전시된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용어클릭 ●시베리아 삭풍회 일제의 조선인 징병 방침에 따라 1944~45년 강제동원돼 만주(중국의 동북 3성) 북부나 쿠릴열도에 배치됐다가 소련군에 일본군 포로로 잡혀 3~4년씩 억류됐던 사람들의 모임. 1990년 12월 노태우-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거쳐 그해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수교를 하자 6명이 모임을 결성했다.
  • 강호순 팬카페 개설자 “잘못했다 그러나…”

    연쇄살인범 강호순(38)을 위한 인터넷 팬카페를 만들어 비난을 받은 네티즌이 5일 “논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며 “카페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GreatKiller’는 지난 2일 포털 네이버에 “‘연쇄살인범 강호순님의 인권을 위한 팬카페(cafe.naver.com/ilovehosun)’를 만들어 “흉악범도 인권이 있다.”고 주장해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운영자는 5일 새벽 공지를 통해 “범죄자에 대한 ‘인권’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권이란 뜻은 ‘타인의 인권을 유린한 자에게서 박탈되는 것으로 짐승과 같은 범죄자에게는 없어도 되는 것’을 배웠다.”며 “1600건의 쪽지와 50여 통의 메일,수백 개의 게시물과 수천 개의 댓글들은 ‘인권’의 의미를 예습, 복습하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인권’을 알고 있다.”는 말로 여지를 남겨뒀다. 그는 또 하나의 인권을 천부적인 권리라 말한 뒤 “보편적이며 절대적이고,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영원히 가져야할 진정한 의미의 권리”라고 정의했다. 이어 “강호순씨가 7명의 부녀를 연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그러한 사실조차 천부된 권리를 박탈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강의 신상정보 유포로 인한 피해로부터 그 누가 강의 범죄와 전혀 관련 없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보호,보상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운영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옛 독재정권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다 나온 이가 그 소문이 동네에 번져 자신의 아들이 친구들로부터 빨갱이의 아들이라고 놀림 받고 “빨갱이 잡았다.”며 끌려 다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슬퍼하였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강의 아들이 단지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이유로 형태는 달라도 어떤 부당한 대우나 사회적 차별 받게 될지 모른다면 이것은 분명 현대적인 관점에서 명백히 부조리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함께 강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일부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며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며 바람직한 여론을 제시해야할 언론이 앞장서서 나서며 얼굴과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등 오히려 대중적 분위기에 영합해 마치 진화(鎭火) 커녕 부채질하고 기름을 붓고 있는 것만 같은 것도 진심으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해당 카페는 존치되어야 한다며 “강을 비롯한 범죄인들의 인권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여지를 두어 편향된 여론이 균형을 이루는 데 미약하게나마 기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 운영자는 후임 매니저에게 카페 운영권을 이양하고 일선에서 물러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 [진보에 길을 묻다](4) 이상이 교수 “복지 외면하는 정치세력 미래 없다”

    [진보에 길을 묻다](4) 이상이 교수 “복지 외면하는 정치세력 미래 없다”

    ”복지국가에 대한 전국민의 욕구가 커지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앞으로 선택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이(45) 제주대 의대 교수는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출범의 주역으로 1998년 전문위원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가 의료보험 통폐합,의약분업,노령연금 등을 설계하고 오늘의 토대 를 만들었다.2007년 출범한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 교수는 현재 정당과 학교 강연 등을 통해 ‘역동적 복지국가’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지난해 이명박 정부와 김태환 제주도지사가 추진했던 영리병원 도입을 저지시킨 ‘제주대첩’의 주역인 이 교수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났다.  ●토착 의료·복지 시스템 정착에 큰 자부심  이 교수는 건강보험 시스템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에 소속된,전국민의 8.8%만을 대상으로 시작된 의료보험이 12년 만인 1989년에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확대됐고 또 수백개로 나뉘었던 조합을 2000년에 건강보험공단으로 통합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국내총생산(GDP)의 6%를 의료비로 지출하면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성과평가에서 5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제적 인정까지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미국은 GDP의 12%를 지출하면서도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가계 파산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해 들어 제주도가 영리병원 도입에 다시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다 이명박 정부도 계속 의료민영화 정책을 밀어붙일 것으로 보여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이 교수의 판단이다.따라서 진보진영은 삼성생명 등 보험자본이 앞장선 공략으로부터 기존 성과를 지켜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 붕괴로 인해 파탄난 국가발전모델,예를 들어 ‘토건(土建)국가’를 대체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널리 알려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아울러 의료비의 85%를 공적 제도에 의해 보장받는 스웨덴 등을 따라잡기 위해 현재 64%에 불과한 우리의 보장성을 더 높이기 위해 정부가 재정과 조세 지출을 과감하게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현재 25조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10조원 더 추가하기 위해 정부가 재정 지출로 절반을 책임지고 그 가운데 절반을 기업이,나머지 절반을 보험료 인상으로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서비스 확충으로 복지국가 정치연합 형성  하지만 이런 주장이 이명박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질리 없다.이 교수는 “스스로 복지국가 정치세력으로서 독자성을 갖지 않고선 더 이상 복지국가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정치세력화의 텃밭을 삼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주창한 복지국가 정치연합을 위한 전술은 사회적 서비스의 확충에 있다.사회적 서비스란 삶의 생애주기 내내 주어져야할 공적 서비스를 의미하는 것으로 출생수당이나 육아와 교육 지원,취업,나아가 실업자에게 재교육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건강보험 보장,국민연금으로 노후소득 보장,노인장기요양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수는 스웨덴은 전액 정부 예산으로 사회적 서비스 일자리를 제공하고 독일은 이들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영리단체에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며 이런 일자리가 충분히 제공되면 수많은 이들이 복지국가 건설에 우군,정치적 동맹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다음은 이상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공동대표와의 인터뷰 전문.  ->살아온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이 특이해서 검색 잘 안 된다.늘 나서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지연 학연 절대 밝히지 않는다.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출신인데 의료정책 보건정책 사회정책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이라고만 늘 소개한다.  의과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 뒤에서 묵묵히 챙겨주고 열심히 뒤따라가는 일꾼이었다.의대 학생운동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역할을 쭉 했다.총학생회 간부를 한 적도 없고 민주당에 새 피로 수혈돼 입신양명하신 386 세대와도 많이 달랐다.그분들이 앞에서 주도할 때 전 선진 학생대중의 한 사람으로 성실하게 운동했다.강의를 거의 듣지 못했고 희한하게 대학은 졸업했다.의사고시 준비할 즈음 보건의료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해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아래 인의협) 만드는 데 참여했다.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 주도로 한국 의료의 미래상,조합주의적 방식이었던 의료조합을 지금의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으로 만들고 공공 의료를 사회적 통제 아래 두는,한국적 특색을 지닌 의료제도를 만들자는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그 분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민주화 운동의 요구에 따라 노동현장과 연대하는 작업을 했다.파업 현장에 나가 장기파업으로 건강이 훼손된 노동자들을 돌보고 진료하는 조직을 꾸려 예방과 계몽을 했다.1990년대를 그렇게 활동해왔다.  의료 등 부문운동도 사회의 진보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반성 속에 노동운동,사회 변혁운동와의 연계를 모색했다.1990년대 초중반 들어서면서 전체 사회운동은 몰락했다.1987년 민주화운동의 핵심 세력은 제도권으로 흡수됐고 노동운동은 대기업 중심으로 가면서 한계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양대 운동이 서서히 소멸되거나 퇴조하거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는 힘겨운 과정에 등장한 것이 시민운동이었다.  보건의료운동은 김용익 교수의 걸출한 리더십에 의해 상당히 조직화돼 있었다.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되면서 1998년 초에 김용익 교수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전문위원으로 들어가라고 권했다.’김대중 정부가 권력을 잡았는데 50년 야당만 하던 세력이라 전문성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김대중 당에 들어가야 하겠다.이성재 의원을 지렛대로 삼아 복지 확대를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김 교수가 말했다.  난 “교수 하려는데 신세 망치라는 것 아닙니까.운동권 출신인 제 온 몸에 이물질을 바르는 건데.”라고 얘기를 했으나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 뜻에 따랐다.  집권 초기에 당 전문위원이고 제왕적 권한을 지닌 김대중 정부 시절이라 당에 엄청난 힘이 실렸고 당론 정치가 가능했다.보건의료 분야에서 제 책임이 중요해졌다.이성재 의원과 호흡을 맞춰 당론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의원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제 뒤에는 시민단체인 의료연대회의가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의료보험 통합은 세계 각국 학자들이 신기해하는 대목이다.종전 이후 신생독립국 가운데 한국과 같은 산업화 성공 국가가 유례를 찾기 힘든 데다 전국민 의료 보장을 성공시킨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그것도 아주 특별한 모델이었다.처음 출범한 1977년에는 8.8%만 포괄하던 의료보험이 12년 뒤인 1989년 전국민에 의료보험증을 나눠주게 됐다.그리고 2000년에 수백개 조합을 단일 보험자 모델로 만든 것은 세계사적 연구과제다.  경제위기와 전제적 권력의 집중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일반민주주의자 면모가 있는 데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시민사회,노동계와 연대해왔기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 복지를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사회적 요구도 있었다.사실상 완전 고용 ,3저 호황으로 매년 10%씩 폭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니까 복지에 대한 필요가 절박하지 않았다.그런데 외환위기 때 서민과 중산층이 하강 분해되니까 복지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환경이 있었다.  민주화세력의 과제는 달성됐고 노동운동세력은 딜레마에 갇혀 있어 사회경제 대안 세력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민주당은 약체이고 대안세력으로 부실한 상태에 빠져있고 한나라당은 독주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국가 세력이 등장하고 있고 등장이 요구받고 있다.복지국가 세력이 어느날 솟구치게 아니고 1980년대 학생운동부터 25년 동안 면면하게 존재해왔다.보조적 축으로 존재해온 것이 이제 서서히 주축으로 등장한 것이다.잘 훈련돼 있다고 생각한다.  국정을 일부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시민사회적 연대를 통해 일정하게 따낸 게 있다.국민건강보험,전국민 연금(1998년),고용보험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되면서 안착됐다.산재보험까지 4대 사회보험이 완성된 것이다.유럽 선진국,케인즈주의 복지국가를 빼고 우리만큼 갖춘 나라가 없다.  ->실질적으로 여기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 말기에 입법화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노선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이아니라 호남 중심의 취약한 정치세력이 시민 사회세력의 운동성과 전문성을 등에 업은 것이다.사회정책 분야는 시민단체가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국민기초생활법은 생활보호법을 대체한 개혁입법이었다.경제관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내외의 저항을 뚫었다.모든 국민의 기초생활을,사회적 기본권을 기초한 것이었다.김대중 대통령이 이제는 4인가족 기준 월 100만원의 수입을 보장하겠다라고 약속한 적이 있다.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복지권 수급권을 인정한 것이다.생활보호법은 국가의 시혜를 규정하는 구빈법인 반면,기초생활보장법은 국민들이 정부나 국가에 요구하는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다.시민사회가 주도해 이룬 것이다.  의약분업도 반발 엄청났다.의사들인 저희로서는 사실상 의료계로부터 파문당한 것이나 다름없다.지금도 우리를 정상적인 눈으로 보지 않는다.’의료사회주의자’로 비난하곤 한다.   점잖게 말해 그렇고 ‘의료 빨갱이’란 얘기죠.  그럼에도 했던 것은 의료질서가 진짜로 무질서한 나라가 없었다.경쟁적으로 약을 퍼먹이니까 이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도 모르고 쌓여있었다.이렇게 해선 의료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무질서와 야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의약분업이었다.그 난관을 뚫고 의약분업을 정착시켰는데 유럽을 빼고 일본과 대만도 못한 일이었다.  그 세가지는 시민사회 세력이 연대하고 압박해 정치적 연대의 지분으로 따낸 것이다.이 제도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노무현 정권 5년 중 4년을 건강보험 관련 일을 했다.건강보험연구원장을 하면서 참여정부를 이용하려 했다.참여정부가 시작해 어느 정도 성과를 본 유일한 정책이 보육정책인데 전국민의 50% 가정에서 시작해 80% 정도까지 보육비를 지원한 게 고작이었다.  우리(의료운동세력)가 제도권 바깥에서 주의주장이 선명한 세력도 아니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나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노무현 대통령 당선 때 자문교수단 일원이었는데 우리쪽은 배제됐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엄청난 공부를 했다.건강보험이란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정책을 집행하고 간여했다.감히 자랑하건대 수권능력을 갖고 있다.행정능력을 갖고 있다.주대환 선생도 그걸 높이 평가하더라.공명심이 없고 특정 분야에서 영역을 확대하면서 실력을 쌓아왔고 그건 우리도 자랑하고 싶다.민주정부 10년을 외곽에서 도우면서 줄다리기 하면서 일면 긴장,일면 협력하면서 해왔다.  권력의 변방에서 시민사회세력으로 얻을 건 다 얻었다.이제는 복지국가 세력이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그래서 만든 것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다.텃밭 역할을 하려고 한다.온갖 야채와 채소가 자라도록 텃밭 역할을 하겠다.이 텃밭을 토대로 복지국가를 앞당겨놓으면,집권하면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겠다,노무현 정부때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조세 재정체계를 안 바꾸는 거다.  노 대통령은 뭐라고 했나.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고 세금을 늘리면 국민이 반대한다 했고 적자재정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면 균형재정이 목표라고 했는데 이게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얘기지만 기실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과 관료들의 얘기가 그대로 나온 것이다.  민주정권 아래 얻을 수 있는 제도화는 다 얻었다.우리의 콘텐츠를 정책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주체세력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다.  주대환 선생이 쓴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에 보면 토종좌파란 말을 썼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다.잘 생각해보니 내가,우리(보건운동세력)가 정말 토종이더라.보건운동세력은 건강연대,건강세상 네트워크,인의협,보건의료단체연합 등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토종인 거다.  한국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왔다.누가 이식한 게 아니란 의미에서 토종이고 1987년을 통해 우리가 부문운동의 길을 찾았고 북유럽이나 사회주의권,영국에서 이식해오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한국의 토양에 맞아 한국에 토착화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자 해서 만든 것이었다.스웨덴 모델도 아니고 독일형 모델도 미국형 모델도 아닌,굳이 표현하자면 독일이나 스웨덴 모델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전후 케인즈주의 국가들의 복지국가 모델이 3가지 중 어느 하나에 수렴되지 않는,우리 만의 모델을 만든 것이다.  이게 토종이다.진보개혁세력의 새로운 토종이 맞구나.지난 20년 이러한 노력의 성과를 국가모델 자체로 발전시킬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스웨덴처럼 의료제도 발전의 목표,예를 들어 모든 국민에게 의료헤택을 주어야 겠다(보편적 접근성),양질의 의료서비스로 만족을 높여야 겠다.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목표를 우리 모델이 달성한다면 똑같은 거다.모델은 다르지만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국제적으로도 개도국,후발산업국가의 모범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한국형 복지국가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진짜 토종 진보주의자들이 만들고자 하는 복지국가는 외국의 것을 베껴오는 것이 아니고 한국적 상황에 가장 맞는,원칙을 지키는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번도 해외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나.  완전 토종이다.예방의학 전문의를 하니까 인천 남동공단 이런데 굴러다니느라 해외 나갈 기회가 없었다.  2007년 초부터 정치세력으로 자리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설립했다.  ->이명박 정부와 연은 없었나.  노무현 정부의 사회정책과 연대를 했지만 노 정부는 경제정책에선 신자유주의자였고 의료 서비스를 산업화하고 영리병원을 설립하겠다고 나섰고 난 최전선에서 싸워왔다.이성재 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제가 건강보험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노무현 정부와 하루도 안 싸운 날이 없다.정말 안 쫓겨난 게 신기할 정도다.  건강보험제도를 이만큼 발전시켜온 건 기적이다.보장성이란 개념이 있는데 1997년 48% 였는데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8년에는 64 %로 됐다.이걸 선진국 수준인 80%로 높이기 위해 돈을 좀 쏟아붓자는 거다.  지난해 말 건강보험 재정이 25조원 되는데 여기에 10조원만 재정을 더 늘리면 보장성을 80%로 늘릴 수 있다.그러려면 중앙정부에서 5조원만 부담하고 나머지 5조원은 보험료 올리면 된다.그 가운데 절반은 회사가 부담하고 국민들은 반을 부담하면 된다.그걸 지금까지 안 한거다.  노무현 정부 때는 매년 보험료가 10~15 %씩 올라 결국 보장성도 그만큼 꾸준히 높아졌다.  하지만 이 정도 성과로는 안 되겠다.대폭적인 조세와 재정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홀로 계신 친척 어르신을 찾아 뵜는데 시골에 혼자 계시는 노인들을 순회하면서 돌보는 서비스가 있던데.  노인 장기요양보험제도인데 노무현 정부때 시작해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됐다.잘한 일이다.문제는 65세 이상의 노인 가운데 4%만 대상이다.너무 중증인 사람만 해당하도록 소극적으로 설계돼 있다.일본이나 유럽은 13% 수준이다.갈 길이 멀다.제도 자체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설계돼 있어 확대하면 된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 때문에 타격 받지는 않겠나.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함부로 없애지 못한다.복지제도는 의존성이 강해 혜택 빼앗아버리면 지방자치단체들이 하고 있는 출산수당,육아수당,경로연금들이 끊어질 것이다.   *12일자에 게재될 5회에선 장진호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으로부터 글로벌 금융질서의 대안에 대해 들어본다.
  • 입 연 미네르바 “공익 해칠 의도 없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로 지목된 박모씨는 9일 자신이 실제 미네르바가 맞지만 허위사실을 유포한 적이 없고 공익을 해칠 의도도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9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을 찾은 민주당 법률지원단 소속 인사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자신이 포털 다음의 토론 게시판 ‘아고라’에 글을 올린 이유에 대해 “소파상,가구상,원자재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분들이 환율,주가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느냐.”며 “되도록 정확한 사실과 의견을 알려줘 손해를 줄이려고 했다.”고 말했다고 접견한 이종걸 의원이 전했다.  이 의원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에 따르면 박씨는 검찰이 지난달 29일 자신이 쓴 글 ‘정부가 금융기관의 달러 매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를 영장 청구의 사유로 삼은 데 대해 “아고라 등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기획재정부가 협조공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부가 사기업에 막대한 힘을 미치는데 정부의 협조요청은 금지 아니냐.”고 되물었다고 이 의원은 말했다.  다른 접견인은 박씨가 “오히려 내 글을 둘러싼 논란이 생기면서 글도 덜 올리고 자제해 왔는데 구속하겠다는 것이 황당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박씨는 ‘민유성 산업은행장을 낙하산 인사로 표현한 글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허위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또 정부를 향해 “이 정부에서는 정부를 비판만 하면 다 ‘좌빨(좌익 빨갱이)’이 되는 것 아니냐.”,“나치 때를 봐라.국민 입부터 막는 것 아니냐.이명박 정부가 미디어를 잡는 것은 예상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박씨는 자신이 실제로 주식을 매매하거나 외환을 거래한 적은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작성했고 주변 사람에게 한번도 자신이 미네르바인 사실을 말한 적이 없어 부모도 이 사실을 모를 정도라고 밝혔으며,함께 살던 동생은 인도에 선교활동을 나가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또 인터넷에서 ‘경제대통령’이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데 대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전문대 졸업 후 직장에 두 차례 근무했었고,검찰에 체포되기전 물류·마케팅 쪽의 한 중소업체에 출근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이 의원은 “박씨는 검찰이 자신을 무직으로 밝힌 데 대해 불쾌해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유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이것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며 “이젠 조용하게 내 사업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박씨가 기사를 뒤지는데는 전문가 같았지만 본인의 경력이나 학력 등을 종합하고 박씨가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부정하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박씨가 글을 게재한 본인인가 하는 의심이 있다.”며 “박씨가 글 전부를 쓴 것 같지는 않고 공동저작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법률지원단은 박씨의 법률지원에 나서기로 했고,박씨는 “억울하다.많은 분들이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박씨는 이날 오후 검찰 조사를 받고 휴식을 취하던 중 SBS와의 전화 통화에서 “경제위기로 인한 가정파괴를 막기 위해 글을 썼다.”며 “의도하지 않게 혼란을 줘 죄송하다.”고 심경을 밝혔다.그의 육성이 공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박씨는 “개인적 차원에서 피해를 줄이고, (경제적 위기에서) 가정을 보호하고자, 전통 가족주의 파괴를 막고자 했는데, 의도하지 않게 혼란을 줘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정부가 환율시장에 개입했다는 문제의 지난달 29일 글에 대해선 자신이 쓴 것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굳이 말하자면, (12월29일 글은 확대했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죠.”라고 인정했다.수사로까지 이어진 것은 지나치다는 억울한 감정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는 “(검찰에서) 확대한 측면이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이해 관계 대립이 있으니까 생긴 차이죠.”라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다른기사 보러가기] [사설]미네르바 사법처리 지나치다 ’미네르바’ 박씨를 소개합니다 노인들의 성…“죽어도 좋아, 아직 설렌다” 김형오 의장 “강경파 득세정치 희망 없어 국회 폭력고발 취하 않을 것” “행정인턴요? 차라리 ‘알바’가…”
  • [대한민국 극&극] 96세 안금림 할머니 vs 12세 양선희양, 소띠들의 ‘세대 소통’

    [대한민국 극&극] 96세 안금림 할머니 vs 12세 양선희양, 소띠들의 ‘세대 소통’

    서울신문은 이달부터 ‘대한민국 극(極)과 극(極)’이라는 기획을 매주 월요일자에 연재합니다.대척점에 선 인물이나 사건 등을 넓은 스펙트럼에서 접근해 독자 여러분에게 균형잡히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드리기 위함입니다.상위는 잘났고 하위는 못났다는 것도,‘없는 자’가 떳떳하고 ‘있는 자’가 구린내난다는 식의 극단적인 측면을 부각해 미화하거나 위화감을 조성하려는 뜻도 물론 아닙니다.우리사회의 여러 분야에 상존하는 꼭대기와 밑바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시 한번 재조명해보자는 것입니다.때로는 엉뚱하거나 재미있는 우리 사회 현상들을 비교함으로써 여러분의 지적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해소해드리려 합니다.기축년을 맞아 시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장수촌으로 소문난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서 함께사는 ‘최고령 소띠와 최연소 소띠’를 선정했습니다.1913년 태어나 올해 아홉번째로 소의 해를 맞이하는 안금림(96) 할머니와 1997년 태어나 두번째로 소의 해를 맞이하는 최연소 소띠 양선희(12)양을 만났습니다.안 할머니보다 12세 많은 1901년생도 79명이 있었지만 인터뷰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찾다보니 안 할머니를 만나게 됐습니다.같은 이유로 새해벽두에 태어난 ‘진짜 최연소 소띠’들도 배제됐습니다.띠가 같다는 것 말고는 할머니와 소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일제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던 한일합병 3년째 태어나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안 할머니와,IMF 위기 중에 태어났지만 ‘오 필승 코리아’를 들으며 세계 속의 당당한 한국을 경험한 신세대 양양의 세대차는 84년 나이차 그 이상이었습니다.이들간의 세대차는 우리의 어제이자 오늘이고,또 미래입니다. 글 사진 순창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새해 첫날 아침.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는 흰 눈이 소담하게 내렸다.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산 꼭대기에도 설탕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다. 남도의 산은 높고 가파르지 않다. 대신 나지막하면서도 단단하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붉은 흙을 일궈 평생을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민 같은 인상이다. 산 허리에 난 길을 달리다 보면 순창군 최고령 소띠인 안금림 할머니가 살고 있는 구미리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니 차가운 겨울 바람이 얼굴에 확 들어온다. 힘껏 청명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머리속이 맑아진다. 이곳이 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수마을인지 이해되는 순간이다. 안 할머니와 최연소 소띠인 양선희(동계초등학교 5학년)양은 같은 동계면에 산다. 새해 인사도 드릴 겸 선희 양은 엄마 정은경(36)씨,동생 윤선(5)양과 함께 안 할머니 댁을 찾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분홍색 퀼트 재킷을 단정하게 입은 안 할머니가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기억력은 어릴 때 그대로다. 기력도 왕성해서 혼자 산책도 하고 목욕도 할 정도다. 선희 양은 처음 뵙는 할머니가 낯선지 쭈뼛거린다. 지척에 살지만 만난 적은 없다. 그래도 엄마가 “너와 같은 소띠”라고 말하자 배시시 웃는다.때마침 안 할머니의 맏며느리 이이순(71)씨가 집에서 직접 만든 엿을 내왔다. 순창은 고추장뿐 아니라 엿으로도 유명하다. 쌉싸래한 콩가루에 묻힌 엿이 다디달다. 선희와 윤선 자매는 엿을 오물오물 먹으며 안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안 할머니는 1913년 2월23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0대 때 구미리로 시집왔다. 시집온 이후 쭉 이곳에서 살았다.1913년은 한일합병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로, 일제의 식민통치가 가혹해지기 시작한 때였다.할머니는 5살 많은 할아버지(1977년 작고)와 벼농사를 지었다.그나마 할아버지 소유의 논 2마지기(200평·661㎡)가 있어 소작농 신세는 면했다.소띠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소처럼 밥먹고 일만 할 팔자를 타고 난다.’는 속설이 있다.안 할머니도 소띠의 운명을 타고 났는지 궁금했다.며느리 이씨는 “아버님의 천성이 부지런해 어머님이 그렇게 고생하시진 않았다.논일은 거의 안 하셨고,길쌈을 주로 하셨다.”고 말했다. 2남3녀를 낳고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던 안 할머니 가족은 1942년쯤 함경북도 은덕군 아오지로 이주를 했다. 돈 벌어 식구들 먹여 살리겠다는 할아버지의 결단이었다. 맏아들 양금섭(74)씨는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간 기억이 난다.”고 했다. 3년쯤 그곳에서 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가족은 구미리로 돌아왔다. 이후 ‘빨갱이’와 ‘반동분자’ 사이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던 서민들에게 북쪽에서 살고 왔다는 경험은 지워 버리고 싶은 흔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때 얘기는 별로 들은 적이 없다. 그 다음에 불이익을 당했는지도 잘 모르겠다.”며 며느리 이씨는 말꼬리를 흐렸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구미리 같은 심심산골에도 참화를 몰고 왔다. 빨치산이 내려와 동계면 전체에 불을 질렀다. 안 할머니 가족은 이웃 마을인 적성면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돌아와 보니 집이고 학교고 죄다 재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우두커니 강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굶주리고 또 굶주렸다. 안 할머니는 “나락으로 죽을 쒀 먹곤 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얘기를 듣는 선희 양의 눈썹도 덩달아 꿈틀거린다. 1980년엔 이웃 광주에서 변이 났다. “대통령이 광주 사람들을 다 때려 죽인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당시 67세이던 안 할머니는 가족 중에 광주에 사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했다. 불똥이 이곳 구미리에까지 튈까봐 할머니는 노심초사했다고 한다.세상이 뒤집어질까 싶어 무섭기도 했단다. 아들 양씨는 지금도 술 한 잔을 할 때마다 그때의 울분을 토한다. 안 할머니의 인생은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사연도 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주어진 삶을 게을리하지 않아 90 평생 사는 동안 2마지기 남짓 했던 땅은 10마지기로 늘어났다. 슬하의 5남매가 각각 자손도 여럿 낳았고 자신을 극진히 모시는 아들과 며느리 내외는 주위로부터 효자효부라는 칭찬도 듣는다. 안 할머니는 “자식들이 나에게 아주 잘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얘기를 전부 들은 선희 양은 폭 하고 한숨을 쉰다. 할머니가 겪어온 세월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선희 양은 “내가 1913년에 태어났으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그도 그럴 것이, 1997년생인 선희는 별로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다.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긴 하지만 안 할머니가 겪었던 것 같은 ‘국민적 고통’을 선희 양은 치러본 적이 없다. 1961년 20억달러였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는 2007년 8000억달러로 400배 늘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들었던 ‘오 필승 코리아’의 추억은 선희 양에게 세계 속에서 당당한 한국의 이미지를 체화시켰다. 선희 양에게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10대 강국’으로 각인돼 있다. 선희 양은 “할머니가 사셨던 때보다 지금 우리나라가 훨씬 강해진 것 같다.얼마 전 이소연 언니가 우주선을 탔을 때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선희 엄마 정은경씨에게 맏딸 선희는 ‘복덩어리’다. 정씨는 1997년 대학을 갓 졸업한 선희양 아빠와 결혼을 하고 곧바로 선희를 낳았다. “모은 돈은 없어도 둘이서 벌면 생활이 빨리 안정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결혼을 하고 정씨 부부는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IMF환란 때문에 한 마리에 200만원 가까이 하던 소값이 50만원으로 떨어진 적도 있다. 20마리로 시작해 지금은 50마리를 키우는데, 돈벌이가 쏠쏠해 살림이 많이 불었다. 정씨는 “소띠 해에 선희를 낳고 소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많이 안정을 찾았어요. 선희가 우리 집에 복을 갖고 왔어요. 저희는 여러 모로 소하고 인연이 깊은 집이에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엔 순창군에서 열린 영어말하기 대회에 동계면 대표로 나가 2등을 차지했다는 선희 양의 장래 희망은 변호사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고 싶어서”가 이유일 정도로 속이 깊다. 선희 양은 “2009년이 나의 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우 기대돼요. 6학년 올라가면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할 거예요.”라며 싱긋 웃는다. 굶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생을 살아온 안 할머니는 10대 때 시집온 일과 하루 종일 길쌈질을 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어린 시절 추억이 없다. 학교는커녕 서당 근처도 가본 적이 없다. 글을 모르지만 집안의 제삿날과 손자·손녀 생일까지 기억해 내고, 여전히 된장찌개와 숙주나물을 제일 좋은 음식으로 친다. 할머니의 가장 큰 시련이 6·25전쟁이었다면 피자와 햄버거를 좋아하는 선희 양의 시련은 앞으로 치를 대학입시였다. 독서와 인터넷 서핑이 취미인 선희 양의 올해 목표는 시험 성적을 평균 90점에서 95점으로 올리는 것이다. 안 할머니는 건강하게 살다 남편 곁으로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서로의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84년 나이차를 뛰어 넘은 안 할머니와 선희양은 툇마루로 나와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지나온 세월만큼 한 가닥씩 파인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주름살과 이제 여드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한 선희 양의 밝은 얼굴은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뤘다. 대한민국의 20세기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했다.할머니의 검버섯이 늘어난 만큼 우리나라는 진화해 왔고, 선희 양의 해맑은 웃음이 계속될수록 우리나라는 더욱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소의 해를 맞아 만난 할머니와 어린 소녀는 그렇게 서로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 “李대통령 ‘월급 기부’? 재산헌납은 언제?”

    이명박 대통령의 ‘월급 기부’ 소식이 11일 전해지면서 네티즌들의 재산 환원 닥달이 더 심해지고 있다.  연합뉴스는 이 대통령이 다달이 월급을 불우이웃돕기 등에 써 온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고 이날 보도했다.이 대통령은 평균 140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지금까지 1억 2000여만원을 결식아동,독거노인 등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같은 ‘선행’에도 대다수 네티즌은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기부 소식이 청와대 관계자에 의해 알려졌기 때문에 그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식이다.  포털 야후코리아의 ‘agcXX’란 누리꾼은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선행을 하는 것은 찬성이지만,조용한 기부도 아니고 무언가 목적이 있는 듯 느껴진다.”고 말했다.이어 “차라리 기부가 필요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네티즌 ‘jskimXXX’는 “너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조용히 하는 것이니라. “라고 성경 문구를 인용했다.   기부 사실을 언론에 흘린 것이 ‘재산 사회 헌납’을 대신하려는 ‘꼼수’라는 지적도 있었다. ‘pluspoXXX’는 “재산 기부 약속 지키라고 하니까 그건 아깝고 월급 들고 나온 모양이다.그거도 엄청나게 생색내면서….”라고 비꼬았다.‘aks7XXX’는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순서가 맞다.”며 “지금쯤이면 재산 사회 환원에 대한 1단계 조치는 나왔어야 하는데 논란이 된 시점에서 이런 기사나 흘리는 저의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야후코리아 뿐만 아니라 포털 다음의 네티즌들도 ‘이 대통령 월급 기부’ 소식에 큰 관심을 보이며 해당 기사에 수천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  ‘겨울X’라는 필명을 쓰는 이는 임기중 기부를 알리는 것은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이라며 “차라리 정책으로 승부를 봐라.”고 지적했다.  ‘바람XX’는 6년간 8억여원을 기부한 문근영과 비교하며 “최소한 몇 년은 지난 뒤 언론에 알리세요.”라고 말했다.  한편 다른 네티즌들은 “무조건 욕만 하지 말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 더 좋은 세상이 된다.”며 악플을 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와함께 또다른 네티즌은 문근영의 기부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했던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를 상기하며 “이 대통령도 빨갱이인 것이냐.”,“문근영양이 몸값 올리려고 쇼한거면 이 대통령은 영구 집권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는 댓글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가기]  “대통령 각하, 재산 헌납 약속 이젠 지키셔야죠?”  ‘괴로운 천사’ 문근영 선행 공개뒤 악플 고통        
  • [최태환칼럼] 이근안, 밀양, 문근영

    [최태환칼럼] 이근안, 밀양, 문근영

    얼마전이다.신문 사회면에 나란히 실린 기사가 눈길을 잡았다.‘고문 기술자 이근안 목사됐다’,‘납북어부 24년만에 간첩 굴레 벗다’ 잠시 혼란스러웠다.고문,용공조작,신원,회개,하나님….아스팔트위의 뒤틀린 낙엽처럼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뒹군다.  이근안씨는 경찰 출신이다.대공수사 전문가였다.군사정권 시절 악명 높았다.물고문,전기고문은 기본이었다.숱한 민주인사가 그의 모진 잡도리에 무너졌다.무고한 시민이 간첩이 됐고,빨갱이가 됐다.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피해자였다.1985년,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필자는 당시 법원·검찰 출입기자였다.김근태 법정을 드나들었다.그는 어느날 상처 딱지 한움큼을 챙겨 나왔다.구치소에서 몰래 모았다고 했다.고문·가혹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문 혐의의 이씨는 1999년 자수했다.수배 10여년 만이었다.그는 7년 복역생활 중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신앙인으로 거듭났다.이제 마음의 평화를 넘어,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납북어부 서창덕씨 사연은 가슴 아리다.그는 연평도 부근서 조기잡이를 하다 북한경비정에 피랍됐다.1967년이었다.124일만에 풀려났다.시련의 연속이었다.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최근에야 간첩누명을 벗었다.24년 만의 무죄선고였다.그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린다.‘간첩’이 된 뒤 옥중 이혼당했다.몸은 망가졌고,가족은 해체됐다.지금까지 자식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이제 60대 초반의 그다.만감의 표정이었다.법정을 나서는 그의 애달픈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고문 피해자들은 이씨를 용서했을까.많은 사람들은 그의 목회자 변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인간적 잣대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살인자는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교도소에서 만난 하나님께 세상과의 화해를 간구하고 있다.하지만 아들을 잃은 주인공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무너진 삶의 축을 견디지 못하며 방황한다.살인자는 교도소가 천국이고,피해자는 지금의 삶이 지옥인 현실.하나님이 만든 기막힌 상황에 피해자는 절망한다.하나님의 ‘밀양’(secret sunshine)은 누구에게 먼저 내리는 게 옳은 것일까.적어도 피해자를 통해 가해자에게 용서와 화해가 닿아야 한다는 인간적 절규가 가슴에 닿는다.  어떤 이들은 이근안씨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고 안타까워한다.‘공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라고 주장한다.용서와 화해의 주문이다.인터넷에서 이씨를 향한 비난과 동정론이 각축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문·가혹행위는 지난 시절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것일까.국가권력이나 기관에 의한 폭력은 크게 줄었다.하지만 권력에 의한 폭력추방이 곧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또 다른 집단·개인으로부터의 유형·무형의 폭력이 유령처럼 우리사회를 떠돌고 있다.사이버에 의한 폭력도 그 하나다.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최근 배우 문근영의 기부행위가 빨치산 선전용으로 덧칠됐다.군사정권 시절을 회상케 하는 이념공세가 섬뜩하다.  인터넷을 통해 표출되는 내 안의 악마성 때문에 이웃이,타인이 인격살인을 당할 수 있다.고문이나 가혹행위에 의한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당신도 고문 기술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신문 사회면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최태환 논설실장 yunja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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