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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 대통령, “항구적 평화 ·인권 향한 4 ·3 열망 잠들지 않을 것”

    문 대통령, “항구적 평화 ·인권 향한 4 ·3 열망 잠들지 않을 것”

    대통령으로는 현직 두 번째로 제주4 ·3 추념식 참석“국가권력 폭력·희생, 반드시 진상규명 ·명예회복” 약속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저는 오늘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며 “더는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에서 이같이 말한 뒤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4·3 추념식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참석 이후 12년 만이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제주도민께 사과했다”며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며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또 “유족과 생존·희생자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며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고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난다”며 “이제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한다”며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그러면서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가자”며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이라며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어 “70년 전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고,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거지·대문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며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 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 학생들이 일어섰고,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다”며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고(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등을 일일이 열거했다. 문 대통령은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줬다”며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다”며 “우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좌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와 제주도민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다”며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아내·부모·장모·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다”며 “제주도민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이라며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고,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이라며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문] 문재인 대통령의 4·3 70주년 추념사

    [전문] 문재인 대통령의 4·3 70주년 추념사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천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이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4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 빨갱이로 몰아 학살, 그 불명예… 제주의 봄은 여전히 시리다

    빨갱이로 몰아 학살, 그 불명예… 제주의 봄은 여전히 시리다

    1949년 1월 17일 제주 조천 북촌마을. 한 무리의 군인들이 마을을 덮쳤다. 집집이 총구를 겨누며 남녀노소 주민들을 끌어내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채근하던 군인들은 주민 수십명씩을 인근 너븐숭이로 차례로 끌고 가 400여명을 학살했다. 가옥은 모두 불태웠다. 이날 북촌마을을 지나던 군인들이 무장대의 기습 공격으로 2명이 사망하자 보복한 것이다. 북촌리 양민 집단학살 사건은 4·3 최대의 참극이었다.제주 4·3이 3일 70주년을 맞는다. 70년 전 해방정국의 좌우 이념 혼란기, 제주에서는 수만명의 주민이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당했다. 4·3은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눌려 오랜 세월 금기였으며 진실은 은폐되고 왜곡됐다. 발단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 사건이다.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쳤지만 경찰이 그냥 지나쳤다.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민들은 같은 달 10일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했고, 미군정은 파업 참여자를 잡아 가두는 등 탄압에 나섰다.급기야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외치며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총선거가 무산됐고, 11월 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토벌대와 무장대의 무력 충돌로 7년간 학살극이 벌어졌다. 토벌대는 무장대에 협조한다며 양민들을 학살했고, 무장대도 협조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살해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로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입산자 가족 등을 잡아들인 뒤 집단 수장하거나 총살, 암매장하는 일이 잇따랐다.4·3의 광기는 멈췄지만 연좌제가 도민들의 숨통을 조였다. 침묵의 금기는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북촌리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깨졌다. 4·3의 참혹함이 드러나자 제주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 1999년 12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3년 10월 4·3 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처음 사과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여간은 달랐다. 이명박 정부는 4·3 진상조사보고서 수정 등을 시도했고 2011년부터 국비 지원을 끊어 유해 발굴 사업을 중단시켰다. 박근혜 정부는 4·3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지만 보수단체 등의 반발에 2015년 희생자 재심사에 나서기도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은 추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희생자와 유족 추가 신고가 지난 1월 시작됐고, 유해 발굴 작업도 다음달부터 학살 현장이었던 제주공항 등에서 재개된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달 28일 대국민 담화에서 “4·3은 분단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라며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과거사 아픔을 치유하고, 제주가 세계 평화와 인권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4·3의 역사적 행보에 국민들이 함께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우선 과제는 4·3 특별법 개정이다. 유족과 제주도 등은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요구한다. 개정안에는 ▲공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에 대한 배상과 보상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군사재판의 무효화 ▲수형인에 대한 명예 회복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 등이 담겼다. 제주도는 3일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70주년 추념식에서 4·3의 고통을 노래한 ‘잠들지 않는 남도’를 합창한다고 2일 밝혔다. 2016년과 지난해 정부 측 요구로 추모 합창곡에서 제외됐었다. 오전 10시 도 전역에 1분간 추모 묵념 사이렌이 처음 울린다. 도는 추념일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했다. 현재 4·3 공식 희생자는 1만 4232명(사망자 1만 244명, 행방불명자 3576명, 후유장애자 164명, 수형자 248명)이며 유족은 5만 9426명이다. 2003년 발간된 정부의 4·3 진상보고서는 “인구 동향 등의 자료를 고려하면 4·3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총 2만 5000~3만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4·3은 7년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가량이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힐링 여행지’ 제주의 치유되지 못한 아픔 4·3

    ‘힐링 여행지’ 제주의 치유되지 못한 아픔 4·3

    연간 1500만명이 찾는 아름다운 섬 제주는 삶에 지친 내·외국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명실상부 ‘힐링 여행지’다.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는 관광도시 제주에는 깊은 생채기인 4·3 사건이 치유되지 못한 채 오래도록 그늘져 있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3’은 아직 진상 규명과 희생자 파악도 다 끝나지 않아 정식 명칭조차 없다. 국민의 3분의1은 이 사건을 모른다고 말했다. 제주도민들이 사회에 “대한민국의 역사인 제주 4·3을 기억해 달라”고 외치는 이유다.3일 서울·제주 등 전국 20개 도시에서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주제로 제주 4·3 70주년 추모 행사가 시작된다. 서울에서는 3일부터 7일까지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분향소 추모제가 진행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6월까지 특별전을 연다. 오는 7일 오후 6시 30분 광화문에서는 국민 문화제가 거행된다. 이 문화제에는 유가족 150여명을 비롯한 제주도민 500여명이 상경해 직접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행사 상징은 동백꽃이다. 제주에 붉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4월 무렵, 함께 스러진 수만명의 목숨을 기리는 의미를 담았다. 사건 발생 70년이 지났지만 ‘제주 4·3’은 아직 이름없는 역사다. ‘대량 학살’, ‘폭동’, ‘항쟁’ 등 다양한 가칭이 있지만 공식 명칭은 없다. 이 사건은 2000년에야 ‘제주 4·3 특별법’을 통해 진상조사 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가 정부에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를 제출한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에게 이 사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는 “이 보고서는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적혔다. 일각에서는 하루빨리 정식 명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명 운동’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이 당시 시대상과 얽혀 복잡한 까닭에 이를 포괄해 명명하기 쉽지 않다. 도민들도 자칫 자신의 가족을 잃은 이 비참한 사건이 이념 논리로 해석될까 조심스러워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박찬식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은 “제주 4·3은 하나의 시선, 한가지 프레임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복합적인 문제”라면서 “유가족 중에는 한 가족 안에 희생당한 민간인과 토벌한 무장대 사망자가 동시에 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역사적 문제와 맞닿아 있는 공동체적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제주 4·3은 우리 사회의 잊힌 이야기다. 제주 4·3평화재단이 지난해 진행한 전국민 제주 4.3 인식조사 결과, 제주 4·3이 일어난 시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9%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라고 답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이라고 제대로 응답한 사람은 28.3%에 불과했다. 나머지 22.7%는 “모른다”고 답했다. 제주4·3 특별법 제정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은 36.7%이었다. 제주 4·3 특별법이 정의한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행사를 구경나온 어린아이와 여성 등 6명이 경찰의 실수로 사망하자,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가 시대의 희생자가 됐다. 당시 이 움직임은 좌우 이념 논쟁과 5·10 단독선거 반대 등 사회적 이슈와 얽혀 정치적 싸움처럼 비쳐졌다. ‘빨갱이’를 솎아낸다는 명목 등으로 이뤄진 군·경의 민간인 학살과 방화로 당시 제주도민(약 25만명)의 10분의1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 4·3의 희생자 수는 아직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제주 4·3 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는 1만 4232명이며 위원회가 추정하는 사망 인원은 약 3만명이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흰 눈 위로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집니다. 피는 얼음 결정을 따라 빠르게 번져 갑니다. 그 모습이 모가지 꺾어 떨어진 동백꽃을 닮았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흰 눈 위에 떨어진 피에서 혹독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길어 올렸습니다. 동백꽃은 그렇게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지요. 한 설문조사에서 4·3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3분의1, 관심 없다는 이는 절반을 넘었다고 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더욱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 4·3 사건입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사과할 건 사과하고 청산할 건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사악하고 검은 아가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 여정은 4·3 사건을 따라가는 것으로 꾸렸습니다.모처럼 제주까지 갔는데 상처의 흔적만 보듬고 오라는 말이냐고 힐난할 수 있겠습니다. 한데 앞서 결론을 밝히자면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습니다. 단언컨대 처음 제주를 방문한 이라도 그렇습니다. 4·3의 무대는 아름다운 제주의 또 다른 면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심했을 뿐 명소라 알려진 곳에, 혹은 그 주변에 없는 듯 있었습니다. 제주의 4월을 두고 흔히 ‘침묵의 봄’이라고 합니다. 북촌리 ‘아이고 사건’에서 보듯 눈물마저 죄가 된 시절엔 누구나 말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피 끓는 포한과 바닥 모를 체념의 끝은 침묵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니 입은 있으되 말하지 못했고, 기억은 선연하되 한사코 떨어내려고만 했겠지요. 제주엔 진작 제비가 왔습니다. 반팔 옷차림으로 훌훌 싸돌아다닐 만큼 기온도 포근해졌습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시립니다. 물론 스스로 삭이겠지요. 그래도 주변의 위로가 더해지면 생각보다 빠르게 녹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본 한 장의 지도였다. 제주 전체를 행정 구역에 따라 나눈 뒤 색을 입혔다. 공통적인 건 붉은빛 일색이라는 것. 구역에 따라 빨강과 분홍 등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가 붉었다. 이는 ‘제주 4·3 사건’ 당시의 피해 정도를 표시한 지도다. 붉은빛일수록 더 많은 주민이 희생됐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4·3의 광풍에서 온전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게 지도에 담긴 의미다.●섬뜩한 진실과 마주한 ‘4·3 평화기념관’ 4·3 여정의 첫걸음은 제주 4·3 평화기념관이다. 4·3 사건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제주 사람들은 ‘4·3 사건’이란 이름 자체에 불만이다. 지나치게 ‘사실’(史實)에만 충실해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의미와 가치가 담긴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의 관람 동선 첫 코너에 ‘백비’(白碑)를 뉘어 놓은 건 그 때문이지 싶다. 백비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비석이다. 제주 사람들의 뜻은 간명하다. 언젠가 4·3 사건이 가치와 의미에 부합하는 이름을 얻게 될 때 이 비석에 새겨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기념관 안엔 4·3 사건과 관련된 각종 기록과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육지부’에서 ‘관광차’ 온 이들이라면 담기 버거울 정도의 섬뜩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기념관 밖은 평화공원이다. ‘비설’(飛雪)이란 이름의 모녀상과 제단, 1만 4000여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등이 조성돼 있다. 공원 가장 위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은 꼭 찾길 권한다. 4·3 희생자 중 행방불명인 3800여명의 이름을 새겨 표석으로 세웠다. ‘육지부’의 형무소로 끌려가 못 돌아온 이도 있고, 바다에 수장됐거나 여태 제주 땅 어딘가에 묻혀 있는 이도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살아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지는 못했지만, 이름이나마 한라산 아래 산담(무덤을 둘러친 돌담)에 안겼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이념으로 시작해 희생으로 끝난 섬의 눈물 이쯤에서 4·3 사건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살피자.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내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집회였다.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였다. 한데 기마경찰은 무심히 지나갔고, 이를 본 군중이 돌을 던지며 경찰을 쫓았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 군정에서 사태파악에 나섰다. 미 군정의 조사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적었다. 제주가 ‘레드 아일랜드’(빨갱이의 섬)라 규정되는 순간이다. 이어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서북청년회와 공권력의 탄압이 자행됐다. 이에 맞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에 나섰다. 이후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됐다. 물론 4·3 사건의 성격을 두고 여태 논란은 있다. 중요한 건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1에 달하는 희생자다. 최대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 가운데 목숨을 걸 만큼 정치적 신념을 가졌던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희생자 가운데 33%는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였다. 충돌의 배경은 이념이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었던 셈이다. 제주 4·3 사건을 이념보다 인권과 인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 여정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단어는 ‘예비검속’이다. 일종의 블랙리스트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이들의 목록을 작성한 뒤 전쟁 등 유사시에 잡아들이거나 상황에 따라 즉결처형했다.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인근의 섯알오름이 대표적이다. 1950년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이다. 군이 출입을 통제한 탓에 1956년에야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32구의 시신은 인근의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됐다. 묘역의 이름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백여명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날한시에 올려 한 자손이 된다는 뜻이다.●아이의 작은 묘탑에 놓인 애달픈 장난감 북촌리 너븐숭이를 찾으면 코끝이 찡해진다. 어린아이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작다. 면적도 작고, 봉분을 둘러싼 산담도 작다. 봉분은 모두 20여기 정도 되는데, 그중 최소 8기는 4·3 때 목숨을 잃은 아이의 묘라고 한다. 묘지 앞엔 검은 돌로 만든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돌과 돌 사이엔 동백꽃 등을 꽂아 뒀다. 미니어처 자동차도 눈에 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요 버스’다. 4·3 당시 비운의 별이 된 아이가 타요 버스를 알 리 없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일 것이다. 늦은 밤이면 봉분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꽂아 둔 사탕을 먹고 장난감도 갖고 놀 것 같다.●비행기 소리로 덮인 최대 학살터 ‘정뜨르’ 북촌은 이른바 ‘아이고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1954년 1월, 너븐숭이 주민 가운데 일부가 4·3 사건을 추모하며 설움에 북받쳐 울다가 경찰에 치도곤을 당했다. 이게 ‘아이고 사건’이다. 당시엔 이처럼 울음마저 죄가 됐다. 정뜨르는 어딜까. 4·3 당시 최대 학살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4·3 지도에도 틀림없이 나와 있다. 한데 도두항 주변을 오가는 주민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고개를 외로 꼬기 일쑤다. 정뜨르는 지금의 제주공항이다.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던 거다. 손바닥 선인장 군락(천연기념물 429호)으로 이름난 월령리엔 고 진아영 할머니 집이 있다. 진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4·3 당시 총탄에 턱을 다쳐 평생 무명천으로 턱 주변을 두르고 살았다. 작은 단칸방 한 켠에 진 할머니의 영정이 남아 있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4) →가는길:4·3 사건 70주기를 앞두고 제주 곳곳에서 동백 배지달기 등 다양한 추념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이번만은 올레길에서 벗어나 4·3길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6~7㎞에 이르는 코스를 2시간 정도 걸으며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추천한 코스는 모두 4개다. 제주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미리 신청하면 ‘4·3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걸을 수 있다. 4·3 콘텐츠 관련 내용은 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www.visitjeju.net)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4·3 길을 걷다’란 지도도 꼭 챙기는 게 좋다. 길잡이로 큰 도움이 된다.→맛집 : 도두 해녀의 집(743-1500)은 전복미역국 등을 잘한다. 주방의 손길보다 신선한 재료가 맛을 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음식에 별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정뜨르(제주공항) 인근에 있다. 커피 한 잔 마시겠다면 쉴만한 물가(796-3808)가 괜찮다.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집 앞에 있다. 커피 맛은 옅은 편이어도 업소 앞 풍경은 매우 짙다. 명진전복(782-9944)은 전복돌솥밥 등으로 소문난 집이다.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명소 반열에 올랐지만 맛은 여전히 예전처럼 좋은 편이다. 다랑쉬 오름과 가깝다.
  • [단독] “처음엔 무서웠는데 조폭도 사람이더라”

    [단독] “처음엔 무서웠는데 조폭도 사람이더라”

    학생운동으로 강력누범방 생활 택시강도·앵벌이·운동권 학생 같은 시대 산 다양한 군상 그려“산만 한 덩치에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사람들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요.” 20년 전 일이지만 김홍모(47) 만화가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범죄자들이나 가는 거라 생각했던 구치소, 그것도 강력 전과 3범 이상들만 모이는 ‘강력누범방’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 만화가가 8개월간의 옥살이 경험을 담아 펴낸 만화 ‘좁은방’(보리)은 그 생생한 기록이다.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공안수’가 되어 1997년 8월 영등포 구치소에 들어간 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1998년 3월 출소했다. 김 만화가는 삼수 끝에 1992년 꿈에 그리던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오기 전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다 늑대처럼 생기고, 운동권 학생은 죄다 빨갱이’인 줄 알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5·18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뒤 본격적으로 운동권의 길로 들어섰다. 홍익대 3학년에는 미대 학생회장, 4학년 때는 총학생회 부학생회장이 돼 격렬한 정부 반대 투쟁에 나섰다. 수배를 받고 도망다니다 1997년 8월 붙잡혀 구치소에 들어갔다.지난 6일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만난 김 만화가는 “당시 경험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신기하고 재밌다’는 반응이 많아 2009년부터 시나리오를 썼다”고 설명했다. 이 시나리오로 2010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창작 지원작에도 선정됐다. 이후 지식·교양만화 웹툰 플랫폼인 ‘어른’에 2015년 12월부터 1년여 동안 만화를 연재했는데, 어른이 적자로 문을 닫으며 마지막 회만 남겨둔 상태에서 연재가 종료됐다. 작품을 사랑하던 이들의 성원에 김 만화가가 마지막 회를 붙여 1년여 만에 한 권짜리 단행본으로 나왔다. 만화에서는 김씨가 수용됐던 ‘3동 상6방’을 비롯해 건달 상현과 춘삼, 택시 강도 춘길, 앵벌이 용식 등 감방 동기의 실명이 그대로 사용됐다. 다만 주인공 이름만 ‘홍모’가 아닌 ‘용민’으로 정했다. 김 만화가는 “단순히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동료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싶었다”면서 “주인공 이름과 시나리오를 매끄럽게 하기 위한 일부 설정을 빼면 95% 정도는 모두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엔 무섭고 겁났는데 적응되니까 조폭도 결국엔 모두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예컨대 상현은 틈만 나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춘삼은 용민에게 연애편지를 써 달라 조르기도 한다. 용민이 구치소에서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면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고, 용민이 구치소 생활에 적응해 나태하게 굴면 “학생운동 하다 들어온 놈이 왈왈이(개) 짓을 하느냐”고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김 만화가는 “구치소에서 나온 뒤 조폭이었던 상현 형이 홍익대 총학생회에 찾아오기도 했다. ‘또 수배되면 숨겨줄 테니 전화 달라’며 술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만화는 용민이 구치소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현실의 주인공인 김 만화가는 학사경고 누적으로 제적돼 졸업하지 못했다. 김 만화가는 이후 집회 걸개그림과 선전물을 그리는 집단인 ‘그림공장’에서 활동하다 2006년 단행본 ‘소년탐구생활’로 만화가가 됐다. 지난해 동료들과 남파간첩 이야기를 다룬 만화 ‘빨간약’을 그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3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살며 작업하다 가끔 서울에 올라온다. 그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만화가가 된 것에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다. 좁은방에 관해 “80년대 독재정권 타도에 맞춘 학생운동과 달리 90년대 학생운동은 ‘극렬좌익’이라는 딱지가 여전한 것 같다”며 “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싸웠는지 만화를 통해 독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단독] “각서·금품 약속 받은 사람들, MB 집권하자 靑 찾아가 압박”

    [단독] “각서·금품 약속 받은 사람들, MB 집권하자 靑 찾아가 압박”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김성곤 위원이 만났습니다 - ‘MB 저격수‘ 정두언 前의원 평창동계올림픽이 마무리되면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유용과 다스 실소유주 의혹을 받고 있는 이명박(MB) 전 대통령 소환이 초읽기에 돌입했다. 이미 MB의 형인 이상은 회장, 조카 이동형 부사장, 아들 이시형 전무(이상 다스), 사위 이상주 삼성전자 전무 등 친인척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다. 관심은 MB와 부인 김윤옥 여사로 모아지고 있다. 2007년 대선 때 MB의 가족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 세 가지가 있었다고 말해 화제가 된 정두언 전 의원을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에서 만났다. 뜻 맞는 전직 관료들이 모여서 일한다는 그 법인의 휴게실 벽엔 수십 병의 와인이 채워진 와인 냉장고가 있었고, 옆엔 드럼, 색소폰, 기타 등이 있는 연주실이 구비돼 있었다. 그때서야 정 전 의원이 음반을 낸 아마추어 가수라는 게 기억났다. 동료가 모여서 가끔 노래와 연주를 한단다. 궁금한 것은 경천동지였지만 바로 묻진 못했다. “그런 것은 말 못 해요”라고 하면 인터뷰가 싱겁게 끝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근황부터 물었다.→요즘 같으면 정치를 접은 것 같다. 방송인도 괜찮은 것 같은데. -종편과 라디오 몇 개, 자원봉사 겸해서 다문화TV에 나가서 진행도 하고 패널도 한다. 인터넷 강의로 상담도 하고 있다. 진짜 은퇴하면 자원봉사하려고 자격증도 땄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카운슬러라면 잘할 것 같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 않나. 허허허. →그래도 본업은 정치 아닌가. -정치는 그만뒀다. 접었다. 지구당 사무실도 정리했고 당 소속도 없다. 정치 접었다고 써도 된다. 어릴 적 꿈은 연기였다.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는데 연락이 안 온다. 이 나이에 주인공을 할 것도 아니고, 악역을 하고 싶다. 황정민이나 송강호도 악역으로 시작한 것 아닌가. 그래야 뜬다. 하하하. →‘MB 저격수’로 불려서 나중에 정치에 부담되는 것 아닌가 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하면서 하자고 다짐했다. 정치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정치를 하면서 무엇을 하는가가 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난 다섯 번 출마를 했는데 한 번도 공천 경합을 한 적이 없다. 우리 지역구(서대문을)가 구여권에 굉장히 불리한 곳이어서 공천 신청자가 없었다.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느 당에 가겠나. 정치를 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길이 있어야 정치를 하지. 당이 있어야 정치를 하지, 정치권이 천지개벽하듯이 변하면 몰라도 지금은 정치를 할 수 없다. 자의 반 타의 반 정치 그만두게 된 거다. →본래 고향은 어디인가. -광주다. 작고하신 백부가 광주에서 6선 하신 정성태 전 의원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어려워 어렸을 때 광주 외가 등에서 좀 살았다. 하지만 학교는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차별을 받아서인지 호남 사람이 서울에 살면서 호남 출신이라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되니까. 평생 안 그러다가 “내가 호남이다”라며 총리도 하고, 장관 한 사람도 많다. MB 정권 땐 장관을 시켜 놓고 원적을 찾아내 호남 사람 만들기도 했다. 오기 때문인지 차별받으니까 오히려 난 호남이라고 박박 우기며 살았다. 공무원 시절 청와대 파견 갔는데 신원 조회에서 세 번이나 걸렸다. ▶ [단독] “각서·금품 약속 받은 사람들, MB 집권하자 靑 찾아가 압박” →MB가 당선되고 인수위원회에서도 그런 게 있었나. -그때 내가 인사를 많이 주관했다. 요즘 실세라고 하나. 견제가 심했다. 세 번에 걸쳐 나를 음해했다. 엉뚱하게 서울의 한 사립대 총장도 하고, 대구에서 국회의원도 한 H씨가 MB를 만나 “물갈이를 해야 하는데 정두언을 그대로 두면 호남 출신만 중용할 것이다.” 이게 첫 번째다. MB가 수긍 안 하니까 “정두언이와 일하는 애들이 운동권인데 그대로 두면 빨갱이 세상 못 바꾼다.” 두 번째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세 번째로 들이댄 게 “정두언이가 부인 화랑을 하면서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했다더라. 결국은 내가 나오고 그 자리를 박영준(당선인 비서팀 총괄팀장)이 차지했다. 형님(이상득 전 의원) 뜻대로 된 것이다. 그 후 그들이 결국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 아닌가. →MB가 왜 그렇게 형님에게 의존했다고 보나. -형님한테 빚을 많이 진 셈이다. 특히 돈 관리는 위험한 것인데 형님이 다 했다. 그래서 이상득 전 의원이 한 번은 저축은행으로, 그다음은 포스코 관련으로, 이번에는 특수활동비로 조사를 받는 것 아닌가. 역할 분담을 한 것이다. MB는 우유부단해서 인사나 이런 것은 결정을 못 한다. 형님이 그런 것 나서서 많이 했다. 인사를 못 한다는 것은 사람을 못 믿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의심하는 줄 아는가. 잘 속이는 사람이 의심도 많다. 남들도 다 그러리라 생각한다. →MB와 틀어지게 된 계기는. -결정적인 게 한상률 전 국세청장 때문이다. 대선 후 국세청에 MB 파일을 내놓으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 때 한 전 청장이 만든 것들이다. 검찰에서 ‘도곡동 땅이 제삼자의 것으로 추정된다’며 애매하게 결론 내렸지만, MB를 많이 괴롭힌 파일이다.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최대 걸림돌이 도곡동 땅이었고 본선 때는 BBK였다. 그래서 MB에게 국정원과 국세청 파일을 받겠다고 보고까지 했다. 그런데 국정원 자료는 신문 스크랩 수준이었다. 국세청에도 파일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아무리 독촉해도 안 내놓았다. 이게 남아 있으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할 줄 모르니까 (방비 차원에서) 한 것인데…. 아마 그때가 한 전 청장과 이상득 전 의원이 거래를 했던 때였던 것 같다. 이 전 의원 아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있을 때니까. 그런데 한 전 청장이 “정두언이가 MB 파일 뒤지고 있다”고 모함을 한 것이다. MB에게 “쓸데없는 짓하고 다닌다”며 한 시간을 깨졌다. 당선자 신분이니까 롯데호텔에서 박영준 팀장, 김모 교수 등 셋이 있는 자리였다. 나는 그를 보호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파일이 진짜 문제가 있는 거였다. 지금 그게 드러나고 있다. 그때부터 틀어졌다. 자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날 배척한 것이다. →그런데도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인수위에서 나왔는데 나를 괴롭혔다. 뒷조사하다가 나에게 들켰다. 그때 내가 모 언론사 간부하고 술 먹다가 욱해서 MB 정권의 인사 등에 대해 하소연을 했는데 그게 ‘고소영 강부자’(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에 강남 부동산 자산가가 요직을 차지한다는 것을 빗댄 말) 내각 건이다. 그 이후에 박영준 등 청와대 참모 개편이 이뤄졌다. 원인은 이상득 전 의원이다. 한나라당 55인 서명 파동도 이재오 전 의원이 시작해 놓고 쏙 빠지면서 내가 총대를 멨다. 65세 이상을 커트라인으로 정해 박희태 전 의원 등은 공천에서 다 날리면서 형님만 준 것 아닌가. 결국은 내가 주동자를 자임했다. 내가 모든 게 옳진 않지만, 그래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박근혜 정부 때 유승민 의원 쫓아내려고 할 때도 나는 바른말을 했다. 그러다가 배신자로 덧칠해졌고, 권력과 투쟁만 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 →경천동지를 언급해 화제다. 욕도 많이 먹고. -경천동지를 꺼낸 배경을 생각했으면 한다. 김희중 전 청와대 부속실장이 착실하고 깨끗한 친군데 이혼했다가 재결합했다. 어려울 때 집이라도 하나 만들어 보려고 실수를 한 것인데 “너 돈 받은 놈 아니냐” 하고 내쳐 버렸다. 김희중은 MB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실수 한 번에 내쳐졌다. 부인이 기다리다가 출소 두 달 전에 자살했는데 문상도 없었다. 그런데 각종 의혹에 대해 최근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떳떳한 것처럼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어이가 없어서 그런 얘기를 했다. 사실 MB와 나만 아는 것이 있잖겠는가. 적어도 본인은 알 텐데, MB는 공사 구분이 안 된다. ‘권력의 사유화’란 말을 내가 처음 만들어 냈다.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이권을 잡은 것이라고 했잖나. 국민은 MB는 실제로 돈이 많은데,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그러냐고 욕한다. 병적이다. 돈이 신앙인 것이다. →MB 구속이 불가피해 보인다. -형량이 얼마냐만 남은 것 같다. 그에게는 선민의식이 있다. “하늘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자주했다. 자기 뜻대로 인생이 흘러왔고 돈, 명예, 권력을 다 가진 그에겐 지금이 괴로울 것이다. →경천동지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 보자. 가족과 돈 얘기라고 했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관련된다고 얘기했다. 돈 얘기 아닌 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돈이다. 이후에 돈이 들어갈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 밝히면 MB에게 큰 위해가 간다. 지금도 MB는 물려 있는 데 나까지…. →김윤옥 여사 얘긴가. -(한참 생각을 하더니) 엄청난 실수를 했다. 정신 나간 일을 한 것이다. 당락이 바뀔 수 있을 정도인데, 그 일을 막느라고 내가 무슨 짓까지 했냐면 ‘집권하면 모든 편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 줬다. 거기서 요구하는 돈도 다 주면서…. 사재를 털어 가면서 많이 줬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MB 정부 출범 후에 찾아왔더라. 그래서 내가 “권력하고 멀어져 있었는데 살아 있는 권력에 가서 얘기하라”고 했다. 자기네가 기획 일을 한다고 하더라. 인쇄 이런 것인데 당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에게 도와주라고 했더니 그냥 대충해서 보낸 모양이더라. 그래서인지 그 이후에도 자꾸 괴롭히기에 청와대 가족 담당하는 민정수석실 경찰 출신 김모 행정관에게 연결해 줬다. 그 후 보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이 건도 수사를 할 것으로 보나. -검찰에서 누군가 선을 대서 내게 한 번 연락이 왔다.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엮이긴 싫었다. 그리고 아마 MB가 구속되더라도 거기까진 안 갈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지간하면 가족을 같이 구속하지는 않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sunggone@seoul.co.kr■ 정두언 前의원 프로필 4집 음반을 낸 아마추어 가수다. 지금은 시사평론가이지만 꿈은 연기자였다. 악역을 원해 곳곳에 문을 두드리지만 아직 답을 못 받았다. 좀더 늙으면 어려운 이웃에게 상담을 해주는 카운슬러가 되려고 한다. 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상과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행정고시(24회)에 합격해 21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끝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17대 총선(서울 서대문을)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된 뒤 3선을 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이명박(MB) 후보를 도와 서울시장 당선에 기여했고,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본부장을 맡는 등 MB의 최측근이었다. 대선 뒤 당선자 비서실 보좌역으로 인수위원회에 참여했지만, MB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등 영포라인(경북 영일·포항)에 밀려 중도 하차한다. 이후 한나라당 최고위원, 여의도연구소장, 19대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뒤 우울증에 빠져 모진 맘을 먹기도 했었다. 지금은 방송에 출연하며, 행정서비스 자문 및 대행 법인인 ALPS의 고문직을 맡고 있다.
  • 빨갱이 가족 색출 이유… 좌도 우도 아닌 민간인… 300명 무차별 대학살

    빨갱이 가족 색출 이유… 좌도 우도 아닌 민간인… 300명 무차별 대학살

    1949년 1월 17일 제주 조천 북촌마을.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후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 충돌이 한창이었다. 이날 아침 세화리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다가 북촌마을 너븐숭이에서 무장대 기습 공격으로 2명이 사망했다.●무장대ㆍ토벌대 간 무력 충돌이 낳은 참극 마을 보초를 서던 원로들은 군인 시신을 군부대로 운구해 가라는 명령을 받고 들것에 실어 함덕리 주둔 부대에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주민 9명 가운데 경찰 가족 한 명을 빼고 모두 사살했다. 오전 11시 전후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무장 군인들은 1000여명의 주민들을 모두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마을에 불을 질러 400여채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다.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제주 출신 현기영 ‘순이삼촌 ’서 진상 드러나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는 게 여의치 않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십명씩 끌고 나가 인근 당팟과 너븐숭이, 탯질 밭에서 300여명을 집단 학살했다. 오후 4시쯤 대대장은 남은 주민들에게 다음날 함덕으로 소개 명령을 내리고 학살을 중단했다. 주민 일부는 산으로 피신했고 함덕으로 간 사람 중 100여명이 추가로 희생됐다. ●작년 너븐숭이 등 유적 순례 4ㆍ3길 개통 북촌마을은 4·3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서슬 퍼런 권력에 아무도 말 못 하는 시절 이 비극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1978년 발표되면서 세상 밖으로 다시 떠올랐다. 제주도는 2007년 너븐숭이에 희생자 위령비와 기념관을 건립하고 ‘순이삼촌’ 문학기념비를 설치해 유적지로 조성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북촌마을 4·3길’이 개통됐다. 지난 7일 열린 위령제에서 이승찬 4·3희생자 북촌리 유족회장은 “4·3의 현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평가가 달리 되고, 일부 극우 세력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4·3을 바라봐 유족들의 마음이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며 “70주년을 계기로 화해와 상생이 충만한 평화가 정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신연희 강남구청장, ‘문재인 대통령 허위글’ 1심 벌금 800만원

    신연희 강남구청장, ‘문재인 대통령 허위글’ 1심 벌금 800만원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 조의연)는 9일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공소 사실을 일부 유죄를 인정, 벌금 800만원을 선고했다. 신연희 구청장은 2016년 12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카카오톡을 통해 200여 차례에 걸쳐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허위 글을 유포해 부정 선거운동을 하고, 문재인 후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당시 신연희 구청장이 올린 글과 링크한 동영상에는 ‘문재인 후보가 1조원 비자금 수표를 돈세탁하려고 시도했다’, ‘문재인 후보의 부친이 북한 공산당 인민회의 흥남지부장이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재판부는 이 중에서 문재인 후보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친정부 언론에만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고 대통령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적시한 부분이 공직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문재인 후보를 가리켜 ‘양산의 빨갱이’라든지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게 아닌 주관적 평가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정인이 공산주의자인지는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인 측면이 있고, ‘공산주의자’에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미가 있다”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사실 적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라는 메시지를 전송한 것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이긴 하지만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문재인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의 19대 대선 경선 예비후보자로 등록하기 전 신연희 구청장이 보낸 메시지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양형에 대해 “피고인은 카카오톡에서 다수의 대화 상대에게 특정 정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이나 모욕적인 표현이 담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송했다”면서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의 범행은 여론을 왜곡해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훼손하고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켰다”며 “피고인의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죄질이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재판부는 “메시지 수신 상대방은 피고인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피고인의 범행이 19대 대선에 실질적으로 미친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검찰은 “여론을 왜곡해 선거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훼손하고 피해자 개인에 정신적인 피해를 줬다”면서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보수단체, 묵호항 찾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보수단체, 묵호항 찾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보수단체 회원들이 6일 만경봉92호 타고 내려온 북한 예술단 본대를 향해 시위에 나섰다. 이날 오후 4시 30분쯤 강원 동해시 묵호항에는 영하의 날씨에도 취재진과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 사이에는 만경봉호의 입항을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었다.목호항에는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뤘다. 또 국가정보원, 통일부 관계자 등이 만경봉호 맞이에 분주한 가운데 경찰병력 약 4개 중대가 투입돼 여객터미널 출입을 통제했다. 한국진보연대 등 북한 대표단을 환영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도 속속 도착했다. 오후 3시20분쯤에는 ‘평양올림픽 반대 기자회견’을 예고한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도 묵호항에 도착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김명대씨(83)는 “어제 저녁에 북한 배가 들어온다는 뉴스를 봤다. 육로로 온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켜서 나쁘게 생각한다”며 “태극기 집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석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집회가 끝난 후 태극기를 앞세워 만경봉호가 도착하는 부두 안으로 진입을 시도해 경찰이 막아서기도 했다. 이에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한미동맹 강화하라’ 등의 손팻말을 든 채로 부두 진입 직전 건물 옥상에 올라 시위를 이어갔다. “현송월의 귀에 들리도록 크게 부르자”는 선창 뒤 애국가를 제창한 이들은, 만경봉호가 묵호항에 입항한 4시30분쯤 “빨갱이 배가 들어온다”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묵호항 인근 주민인 이기종씨(65)는 “이따가 북한에서 배가 오면 구경오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고 전했다. 묵호항쪽으로 다가오는 만경봉호 함교에도 2명 정도가 고개를 내밀고 서서 한국 측을 바라봤다. 이들이 위치한 함교에는 영어로 ‘MAN GYONG BONG 92’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또 선수 부근에도 여러 명이 나와 바깥을 바라봤다. 선미에는 인공기도 함께 걸려 있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기고] 성평등 제대로 이야기하자/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고] 성평등 제대로 이야기하자/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양성평등과 성평등을 놓고 이상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성평등은 동성애 찬성, 양성평등은 동성애 반대’가 첫 번째 이상함이다. 두 번째 이상함은 일부 교회가 ‘성평등은 동성애 인정’이라는 등식을 앞세워 미움과 증오, 배제를 확산시키는 온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이상함은 이런 비이성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침묵만 하는 가운데 모든 증오의 화살이 양성평등기본법 주관 부처인 여성가족부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먼저 성평등 찬성이면 무조건 동성애 찬성인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학문적으로, 그리고 정책 용어로 성평등을 양성평등과 함께 썼다. ‘성평등’을 검색해 보면 성평등을 남녀평등이나 양성평등과 같은 의미로 쓴 말과 글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성평등 대통령’을 선언했을 때에도 남녀평등과 같은 의미를 생각했을 것이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에게 성평등은 양성평등이다. 독일처럼 동성이나 양성, 간성 등 다양한 성 주체·취향을 혼인이나 주민등록신고 등에서 인정하려면 아직 멀었다. 다만 양성평등이라 할 때에는 남녀 간 대립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기 때문에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왜 성평등을 ‘동성애 인정’으로 연결시키는 것일까? 성평등 용어를 쓴다고 어린 자녀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법원이 동성혼을 받아줄 상황도 아니다. ‘빨갱이’가 사라진 자리를 메꿔야 할 긴박감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발전과 개혁을 이루려는 움직임을 막아낸 가장 큰 무기가 ‘빨갱이, 종북몰이’였다. 그런데 그 약발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때 연대와 다양성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사회 비전 중 하나로 성평등이 제기되자 트집거리를 찾게 됐다. 성평등을 정책화한다 해서 동성애가 확산될 가능성은 없다. 지금까지 숨겨 왔던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뿐이다. 소수 동성·양성·간성 등을 인정한다고 내가 동성애자·이성애자가 되거나 제3의 성을 가진 자가 되진 않는다. “100조원 쓰고도 저출산 해결 못한 여성가족부 자폭하라”는 헛소리도 한다. 참고로 100조원 예산은 보건복지부와 교육부가 거의 다 썼다. 여가부는 4조원 정도 썼다. 결국 여가부를 디딤돌 삼아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대통령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성평등은 동성애 인정’이라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야당은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표가 무서워서인지 여당도 말을 못 한다. 정치가 방관하는 사이 갈등 해결 몫은 오로지 피해자 것이 된다. 고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동성애 반대론자’들 앞에 온몸으로 서 있어야 하는 공무원, 학자, 시민이 피해자다. 방관하는 정치권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성평등이 남녀 간 대립을 지양하는 개념으로서 필요함을 강조해야 한다. 성평등 용어의 사용이 소수자 인권 존중의 첫걸음이 분명하다는 사실도 숨겨서는 안 된다. 다만 성평등 정책화는 양성평등 맥락에서 지속될 것임을 적극 알려야 한다. 정책은 다수 사회 구성원의 지지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성평등 현실과 이상을 둘러싼 이성적·평화적 논쟁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한국은 비로소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문 대통령 성관계 합성사진·험담글 SNS에 올린 경찰관 벌금형

    문 대통령 성관계 합성사진·험담글 SNS에 올린 경찰관 벌금형

    현직 경찰관이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허위 글과 성관계 합성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인천지법 형사13부(권성수 부장판사)는 공직선거법 위반 및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인천 모 경찰서 소속 A(56) 경위에게 벌금 800만원을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A 경위는 올해 1∼3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 후보를 비방하는 허위 내용의 글을 6차례 올려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는 페이스북에 ‘문재인 적극적으로 개입해 행정기관 로비한 엘시티 3조 사업, 바다 이야기에 이어 최대 친북 간첩 정권비리가 또 터졌다’라는 허위 글을 올렸다. 또 문 후보가 인민 군복을 입은 합성사진과 함께 ‘간첩, 빨갱이, 아비는 인민군 상좌출신’이라는 근거 없는 거짓 내용의 글도 썼다. A 경위는 문 후보와 여성 정치인 2명이 성관계를 하는 듯한 합성사진도 페이스북에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경찰공무원으로 누구보다 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며 “후보자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도 크게 훼손해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초범이고 범행을 모두 자백하며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이계백 인터뷰 일시 1997년 6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이계백(인천상업중 5학년때 자원입대)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이규원 치과원장(6·25 편찬위원장)내가 겪은 6·25 사변(事變)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나는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생이었으며, 북한 인민군의 학정으로 인천송림국민학교 정문 앞 친구 유은성 집에서 몰래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 인민군이 그냥 구둣발로 막 들어와 대뜸 “너, 이계백이지!” 하면서 나를 인천상업중학교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인천상업중학교는 인민군 본부였고 그곳에는 좌익 빨갱이 학생들로 들끓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고, 방망이로 나를 쳤다. 이유는 아버지(우익 인사)와 형님(우익 학생)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 씩 고문을 하고, 몇 일이 지났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고문을 당하고 나니까 몸은 이미 말도 못하게 망가져 갔었다. 미국 남북전쟁과 한국 6·25 사변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죽음보다 더 혹독했던 빨갱이들의 고문 며칠 뒤 인민군 장교가 “이놈의 반동분자 즉결처분 해야겠구먼!” 하며 권총을 빼들고 나를 겨누는 것이었다. 친구 유은성이는 그 후 친구인 내가 걱정이 되어 면회를 와서 도시락을 넣어주고 그랬었는데 그날도 또 면회 왔다가 이 권총 장면을 보고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내 곁에 와서는 “친구를 살려 달라!”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장교는 “저놈부터 죽여야 하겠구먼!” 하면서 권총을 내 친구 유은성한테 겨누면서 막 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저 친구는 사상(思想)은 모르며 학업에만 열중하는 학생인데 저 친구가 나 때문에 죽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며 애원을 했더니 인민군 장교는 조금 수그러지면서 내 친구 은성이는 풀어 주고 나 또한 그 위기를 겨우 면하고 며칠 뒤 석방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 괴뢰군이 후퇴하여 인천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우익 활동을 하셨던 형님(이계송·고려대 2학년)은 인천학도의용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6·25 사변 때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바뀌는 세상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사람에 대한 조사, 피란민 안내, 요소요소 경비, 학생선도 등 중요한 일을 인천학도의용대가 했다. 6·25사변 때 인천에서 그때 중·고등학생들은 큰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있었기에 인천학도의용대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950년 12월 18일 내 생애 운명의 날 11월이 들어서자 중공군참전으로 UN군과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본부에서 남하할 준비를 하고 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또 남았다가 북한 괴뢰군(傀儡軍) 점령하에서의 그 몸서리 처지는 고통을 당하기 싫어서였다. 1950년 12월 18일날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도(先導)하여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열초등학교)를 목적지로 삼고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도원고개를 넘어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 행진곡에 발맞추어 구월동을 지나 계속 걸어가서 밤 늦게 안양에 도착하여 1박을 한 후에 계속 걸어가서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을 지나 대전, 대구, 청도를 거쳐서 삼랑진을 지나 마산역 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7일 만이었다. 나는 대구를 지나 경산, 청도, 밀양을 걸어가면서 논밭에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의 얼거나 굶어 죽은 시체를 많이 봤다. 내 친구 유은성과 나는 다른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처럼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3훈련소(통영충렬국민학교)로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역에 머물렀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해병 6기 신병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때마침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모집이 있었다. 친구 은성이가 해병 6기 신병모집에 같이 지원하자고 하기에 같이 지원했다. 해병 6기는 인천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인천출신 중학생(4~6학년, 현재의 고등학교 1~3학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합격 후 진해해병교육대에 가게 되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4일이었다. 이날부터 해병(海兵)교육을 받는데 교육은 빳다를 맞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때 빳다 맞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북한 공산 괴뢰군(傀儡軍)의 고문으로 악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때 20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 해병이 되는 것이어서 빳다를 못 견디고 도망가기도 했다. 참기 힘들고 모진 훈련이 다 끝나고 드디어 정식 입대 날짜가 다가왔고, 1951년 1월 24일 정식해병이 되었다. 5년 2개월 간의 해병대 군복무 나는 진해해병학교로 배치되었다. 아마 신상명세서에 인천상업중학교 출신이 참고된 것 같았으며, 해병학교에서 1년 3개월을 보냈다. 그때쯤 전후방 교류가 있어 전방을 지원했다. 해병여단이 창설되어 금촌에 있는 여단본부에 전속되어 1956년 3월 22일 만기 제대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6·25 사변이 발발하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북한 괴뢰군의 치하에서의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지옥(地獄)이었다.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의 긴 시간이었다. 우리들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발자취와 전사한 인천학생들과 전사(戰死)하신 스승님의 기록을 남겨서 후대에 전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경종·이규원 2부자(父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로 고마워하는 나의 마음을 전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6회를 마치며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현 인천고교 2학년) 학생 이계백은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지원입대하였다. 이계백처럼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학생은 2500명이고 그 중 208명이 전사하였다. 6년제 중학교 2~6학년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208명 인천학생들을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은 인천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에도 인천학생들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기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치과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데스크 시각] 파사현정, 그 시작은 올바른 민주주의다/이두걸 금융부 차장

    [데스크 시각] 파사현정, 그 시작은 올바른 민주주의다/이두걸 금융부 차장

    친·외가를 통틀어 가장 큰 어른이던 외숙부는 1970년 초부터 10여년 ‘영어’(囹圄)의 처지였다. 성직자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투옥과 가택연금 등이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에서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외에 머물렀다. 경찰은 우리 집까지 들이닥쳤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다 뒤집힌 서랍장과 장롱 등을 침묵 속에서 정리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코흘리개 초등학생이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영애’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생득적 거부감이 쌓인 이유다.지난 3월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언했을 때 뒷맛이 씁쓸했다.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품위를 찾아볼 수 없던 그의 모습이 곧 우리 사회의 민낯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하지만 서초동 검찰청사 밖과 서울광장에서 곧잘 마주치던 ‘태극기 부대’는 거짓뉴스를 반복했다. 여야 합의로 출범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물론 국가기관인 검찰이나 법원을 향해 ‘빨갱이’라고 부르짖었다. 언론사 안에도 직간접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던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상당수는 ‘침묵’으로 동조했다. 기계적 중립을 내세우며 의도적인 왜곡과 회피를 강요했다. 국가와 민족을 운운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부당한 권력행사와 사익추구를 부끄럼 없이 옹호했다. 그때마다 오장육부가 문드러지는 듯했다. 5월 10일 이후 세상은 바뀌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좌파 척결’이라는 서슬 퍼런 용어도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와 상식의 결핍을 느낀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방중 행사를 수행하던 사진기자 두 명이 중국 공안 출신 경비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근접 비표를 발부받은 기자들은 문 대통령의 동선을 따라가다가 제지당하고, 이후 밖으로 끌려나와 십수 명에게 발길질을 포함한 ‘집단 린치’를 당했다. 이를 두고 ‘취재 열의’ 운운하며 한국 언론에 책임을 돌린다. 청와대 풀 기자는 대통령의 동선을 뒤따른다는 ‘팩트’는 이들에게 중요치 않은 듯하다. ‘기자들이 프레스라인을 먼저 넘었다’는 잡설은 대응할 가치도 못 느낀다. ‘혼밥’이나 ‘홀대’ 운운하며 방중의 성과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린 보수 언론의 논조를 옹호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기레기는 맞아도 싸’라며 선동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잘못한 이들에겐 몽둥이가 답’이라고 제 자식에게도 가르칠까. 일부 인권 후진국의 태형을 도입하자는 뜻일까. ‘문빠’의 한 인사는 “비판이나 견제라는 언론의 기능은 촌스럽다”라고 주장한다. ‘문비어천가를 부르라’는 요구로 들린다. ‘감시 없는 권력은 부패한다’는 진리도 이들의 ‘맹목적 사랑’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고 구조와 얼마나 다를까. 상식과 민주주의 대신 대통령 개인을 절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면에서 문빠와 박사모는 놀랍도록 닮았다. 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꼽았다. ‘사악한 것을 부순다’는 ‘파사’보다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현정’에 더 눈길이 간다. ‘촛불의 정신’은 탄핵 이후의 실질적 민주화를 기획하고 정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다시 떠올릴 때다. douzirl@seoul.co.kr
  • 30년째 찾고 있는 딸, 그 날의 기록

    30년째 찾고 있는 딸, 그 날의 기록

    소설 6월10일/김형진 지음/씽크스마트/312쪽/1만 2200원한 노인이 1986년 미국대사관에 일하러 갔다가 실종된 딸을 30여년째 찾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희생자임에도 자신의 딸이 ‘빨갱이 운동’을 하다 사라졌을 리 없다고 믿는 노인의 모습은 지금도 아물지 못한 시대의 상흔을 보여 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6·10 항쟁이 있었던 1987년을 기억하는 이야기다. 표지에 소설이라는 단서를 달았을 뿐 허구적 상상력보다는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기록이다. 소설 속에서 사라진 김영철, 이정훈, 최지혜는 1980년대 학생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대신할 뿐이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귀순병, 의료진과 농담… 남한 국민 피 1만 2000cc 수혈했다”

    “귀순병, 의료진과 농담… 남한 국민 피 1만 2000cc 수혈했다”

    장폐색 등 후유증 가능성 커 합동심문 아직까지는 무리 안정 차원 걸그룹 노래 틀어줘 “환자 목숨 구하는 게 인권 지키는 일” “나를 두고 빨갱이·친미라더니 요즘엔 적폐라고 하더라” 격노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북한 군인이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군인은 지난 15일 2차 수술을 받고 3일 뒤인 18일 오전 9시쯤 자가호흡을 시작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커서 장폐색 등 후유증이 우려돼 한 달 정도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는 22일 2차 브리핑에서 “환자는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강골 체질이어서 일반 환자보다 회복 속도가 매우 빠르다”면서 “어제부터 의료진하고 농담을 나눌 정도로 의식이 명료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의식을 찾은 환자에게 소녀시대의 ‘지’(GEE)를 오리지널과 록, 인디밴드 버전 등 3가지로 들려줬더니 오리지널 버전이 가장 좋다고 했고 걸그룹을 되게 좋아한다”며 “미국 드라마와 미국 영화도 좋아하더라”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언론 보도와 같이 환자가 남측 노래를 틀어 달라고 한 적은 없으며 의료진이 정서 안정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환자는 총격으로 인한 부상, 2차례 대수술 등으로 심리적 스트레스가 심할 수 있어 자극적인 질문을 삼가고 뉴스를 보여 주지 않는 등 심리적 안정을 갖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북한군 청년은 2차례 걸친 수술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피 1만 2000㏄ 이상을 수혈받아 온몸의 피를 순환했다”며 심각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 “장폐색이나 바이러스 감염 등 후유증이 우려돼 수일 이상 중환자실 치료를 계속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회복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도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며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수술 과정에서 발견된 회충 등 기생충 문제는 약을 투여해 해결된 상태이며, 추가 검사에서 발견된 결핵과 B형 간염도 치료할 계획이다. 이 교수는 “관통상으로 좌측 상지(팔)에 혈류장애가 있어 절단을 고려했으나, 진행 상황이 좋아 절단은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우측 폐 상하엽에서 발견된 비활동성 결핵도 당장 치료가 필요한 사안은 아니어서 추가 조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환자가 합동신문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의학적으로 신문을 받으려면 한 달 정도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몸도 아픈데 (가족 얘기 등) 마음마저 그러면 얼마나 괴롭겠나. 이런 내용으로 합참의장에게 건의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 교수는 브리핑에 앞서 “중증외상센터에는 북한 군인 말고도 환자 150명이 더 있어 (의료진 모두) 다들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며 “북한군 환자에 대한 저희 의사 입장에서 봤을 때 환자의 인권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목숨을 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기생충 감염 등을 언급한 것에 대해 일부 의료계와 정치권에서 인권 침해라고 한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보호자에게 통상 환자 소견을 이야기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며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터지면 어찌 되겠느냐”고 해명했다. 이어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들어와 이제 대한민국 청년이 된 북한 병사가 한국 삶에 기대한 모습은 자신이 다쳤을 때 외상센터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나라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쪽은 저를 두고 ‘빨갱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친미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요즘에는 저보고 ‘적폐’라고 말한다”며 격노하기도 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채드 캐럴 유엔군사령부 대변인이 22일 국방부 브리핑실에서 지난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의 당시 총격 상황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을 공개하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오른쪽). 이날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공동경비구역으로 귀순하다 북한군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된 북한 병사의 회복 상태에 대해 이국종 교수가 취재진에게 그림을 보여 주며 설명하고 있다.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이호정 전문기자 hpjeong@seoul.co.kr
  • 탄생 100년 박정희 동상 설치 놓고 충돌…“친일파”, “공적 있다” 설전

    탄생 100년 박정희 동상 설치 놓고 충돌…“친일파”, “공적 있다” 설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째가 되는 날(14일)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 동상 설치에 찬성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민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등 서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하 기념재단)은 13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박정희 동상 기증식’을 열고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이하 추진모임)으로부터 이 추진모임이 만든 4.2m 높이의 박 전 대통령 동상 기증 증서를 받았다. 동상 실물 크기 사진이 실린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념관 앞 마당에서 열린 행사에는 고영주 전 MBC 이사장 등 동상 설치를 환영하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기념재단의 좌승희 이사장은 “원래 오늘 제막식까지 할 계획이었지만 서울시와의 협의 미흡으로 불가피하게 기증식으로 축소했다”면서 “법적 절차를 밟아 동상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기념재단은 이날 기증 증서를 전달받은 후 조만간 서울시에 동상 설치 승인을 정식으로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은 서울시 소유 부지에 국고보조금 200억원이 투입돼 만들어진 시설이다. 완공 후 기부채납 절차를 통해 소유권을 서울시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지어졌다. 현재 재단 측은 시유지인 이 땅을 무상으로 임차 중이다. 따라서 이 기념관에 동상을 세우려면 ‘서울특별시 동상·기념비·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기준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건립인가 신청을 하고, 이후 ‘서울특별시 동상·기념비·조형물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기념관 앞 마당에서 계단 15칸 아래에 있는 인도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와 ‘박정희 동상 설치 저지 마포비상행동’이 동상 설치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박정희는 민족을 배반한 친일 군인이자 임시정부의 반대편에서 교전을 수행한 명백한 적국 장교”라면서 “청산의 대상이 될지언정 절대 기념 대상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 마포구의회의 이봉수(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인 오는 14일까지 인도에 박 전 대통령 동상 설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천막을 쳐두려고 했으나 기증식 종료 후 동상 설치 찬성 시민 일부가 천막을 부수려 하자 이날 철거했다. 이날 오전 10시 시작된 행사에 앞서 시민들 간의 충돌도 있었다. 이들은 상대를 “친일파”, “빨갱이” 등으로 비난하며 설전과 몸싸움을 벌여 경찰이 갈라놓아야 했다. 경찰은 이날 의경 1개 중대 80여명을 동원해 기증식이 열린 마당과 반대 집회가 열린 인도 사이 계단을 두 겹으로 방어했다. 박 전 대통령 동상은 현재 경기도 고양의 모처에 추진모임이 보관 중이다. 추진모임 관계자는 “제막식이 열릴 때 정식으로 선보일 예정이고, 미리 공개하면 공격받을 우려가 있어 지금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정희 동상을 서울시 부지에? “원칙대로 심의” “독재자 기념 웬말”

    박정희 동상을 서울시 부지에? “원칙대로 심의” “독재자 기념 웬말”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높이 4m 규모의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건립이 일방적으로 추진되자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원칙대로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과 도서관은 서울시 소유 부지에 국고보조금 200억원이 투입돼 만들어진 시설이다. 완공 후 기부채납 절차를 통해 소유권을 서울시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지어졌다. 현재 재단 측은 시유지인 이 땅을 무상으로 임차 중이다. 따라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동상을 세우려면 ‘서울특별시 동상·기념비·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기준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건립인가 신청을 하고, 이후 ‘서울특별시 동상·기념비·조형물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현재의 규정은 6일 뒤인 19일부터는 조례 폐지로 효력을 잃기 때문에 새로 시행되는 ‘서울특별시 공공미술의 설치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 따라 ‘공공미술위원회’가 심의하게 된다. 새 조례는 “공공용지에 미술작품을 설치하려는 경우 ‘건설기술 진흥법 시행령’ 제71조에 따른 기본설계 또는 이에 준하는 기본계획 수립을 완료하기 전에 심의를 신청하여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심의 과정에서 역사학자를 자문관으로 초빙해 동상의 의미 등 여러 측면을 자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는 동상 설치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충돌했다.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 이동복 위원은 “세 대통령의 동상을 모실 자리가 서울시에 없다는 것이 엄혹한 현실”이라며 “원래 세종대로, 테헤란로, 전쟁기념관을 생각했는데 모두 여의치 않았다”고 밝혔다. 이 위원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6·25때 한국을 도와준 트루만 대통령, 대한민국 5천년 이래의 번영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같은 시간 민족문제연구소와 ‘박정희동상 설치 저지 마포비상행동’이 동상 설치 반대 집회를 열고 “박정희는 민족을 배반한 친일 군인이자 임시정부의 반대편에서 교전을 수행한 명백한 적국 장교”라며 “평가는 자유지만 친일과 독재는 사실이다. 청산의 대상이 될지언정 절대 기념 대상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조 적폐 박정희의 동상을 서울시민의 땅에 세우겠다는 준동을 용납할 수 없다”며 “동상 설치를 강행한다면 기필코 저지할 것이며 서울시는 적법 절차를 통해 동상 설치를 불허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김재규 열사 동상도 옆에 세워주세요.(ship****)”, “독재자 동상을 세운다는건 북한 김일성 동상 세운거랑 다른게 뭐냐(wonw****)”, “박정희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다른 사람에게 존경하라 강요하나?그렇게 좋으면 니들집 마당에 세워라.(elio****)”, “저런거 하면 빨갱이 아닌가요?(3dos****)”, “러시아도 소련해체 이후 레닌 동상 철거했는걸로 아는데 북한이나 하는짓을 하려고하는구나 정 세우고싶으면 사유지에 세워라 국유지는 안된다. 경제발전만 부각시켜서 친일 독재를 미화하려는건 있을수없지 국유지에 박정희 동상 세우려면 옆에 김재규 열사 동상도 세워라(jang****)” 등의 반응을 보였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추미애 ‘지대 개혁’ 공론화 가속

    추미애 ‘지대 개혁’ 공론화 가속

    與 “대표 개인 행사… 당내 논의 없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부동산 보유세 도입으로 연결되는 ‘지대 개혁론’을 본격적으로 띄우기 시작했다.추 대표는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헨리 조지 포럼’과 함께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 토론회를 열었다. 헨리 조지는 부동산 보유세의 이론적 바탕을 만든 미국의 정치경제학자다. 추 대표는 토론회에서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이 모은 돈으로 창업 도전장을 냈지만 결국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고 적자가 쌓여서 빚쟁이가 됐다”면서 “헨리 조지 책 중에는 지대추구를 방치하면 언젠가 땅 주인이 숭배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이어 “지대추구의 모순을 사회적 대타협으로 바꾸자는 여론이 일어날 때까지 치열한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헨리 조지의 이론에 ‘토지 국유화’, ‘공산주의’ 등의 반론이 나오는 것에 대해 추 대표는 “헨리 조지는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와 치열하게 맞선 이론가”라면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우기는 사람이 빨갱이”라고 말했다. 추 대표는 지난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도 헨리 조지를 인용하며 부동산 보유세 도입을 포함한 세제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가 토론회를 개최하며 지대 문제 공론화에 나선 것은 보유세 인상이나 임대소득세 개혁 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다만 민주당은 이번 토론회가 추 대표 개인 행사이며 당론 추진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선을 그었다. 당 핵심관계자는 “토론회는 개인적 관심사로 문제 제기와 환기를 위한 것으로 안다”면서 “보유세 등에 관해 현재 당에서 특별히 논의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추 대표는 이날 직접적으로 보유세 도입을 주장하진 않았지만 같은 당 김종민 의원은 토론문에서 공시지가 현실화와 함께 과세 방향을 거래·소득과세에서 보유과세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내놨다. 토론회 참석자도 보유세 도입을 주장했다. 김윤상 경북대 명예교수는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불로소득이고 부동산 불로소득은 건물이 아닌 토지에서 생긴다”면서 “토지 불로소득은 보유세로 환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트럼프 연설하던 국회 밖에선… 찬반시위대 욕설·몸싸움

    트럼프 연설하던 국회 밖에선… 찬반시위대 욕설·몸싸움

    진보 “환대한 文대통령에 실망” 보수 “트럼프 환영 文 지지 아냐”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찬반 시위대’가 8일 국회 앞으로 집결했다. 220여개 진보·반미 시민단체 연합체인 ‘노(NO) 트럼프 공동행동’은 트럼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강하게 규탄했다. 이들은 “노 트럼프, 노 워(War)” 등의 구호를 외쳤다.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에 소금을 뿌린 뒤 이를 찢어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보수·친미 단체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원들과 대한애국당 당원들도 국회 앞에 모여 “웰컴 트럼프”, “트럼프 사랑해”를 외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열띤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연신 흔들어댔다. 일부 보수 단체 회원들이 공동행동 측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며 “빨갱이”라고 비난하다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등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트럼프 반대 구호가 적힌 팻말과 성조기가 불에 타는 모습도 연출되는 등 집회·시위대는 다소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 방한 기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진보 진영이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 비난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 세력인 보수 진영이 트럼프 대통령을 환영하는 역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진보 진영이 문 대통령을 비난하고, 보수 진영이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공동행동 측 시위에 참여한 이모(59)씨는 “촛불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 대통령을 지지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면서 “미국 무기 수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에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아 굴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재향군인회 소속 허모(60)씨는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면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극진히 예우하며 잘하고 있는데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른 보수 단체 회원은 “트럼프 대통령을 환영하러 나왔지 문 대통령을 지지하러 나온 게 아니다”라며 선을 긋기도 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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