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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대 민중미술이 본 2020년 대한민국

    80년대 민중미술이 본 2020년 대한민국

    동인 16인, 학고재 ‘그림과 말’ 기획 불평등과 차별·분단의 질곡 등 비판‘화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 군부독재 아래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던 1980년, 이런 질문에 고뇌하던 미술인들이 모임을 결성하고 첫 창립전을 열었다. 민중미술의 시초가 된 ‘현실과 발언’ 그룹이다. 이들은 예술이 천상의 고고한 날갯짓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투박한 발걸음이란 명제를 스스로 입증하고자 애썼다. 그룹은 10년 만에 해체됐지만 동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향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 창립 40년을 맞은 ‘현실과 발언’ 동인들이 다시 모였다. 강요배, 김건희,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박불똥, 박재동,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 등 16명이 참여하는 ‘그림과 말 2020’ 전시에서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 전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이들이 1982년 덕수미술관에서 개최한 ‘행복의 모습’전 당시 발간한 회지 ‘그림과 말’의 정신을 돌아보며 기획됐다. 전시는 작가들이 선택한 1980년대 작품과 2000년대 작품 등 106점을 펼쳐 보인다. 민정기는 ‘1939년’이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 두 점을 출품했다. 1983년에 제작한 석판화는 중일전쟁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고, 올해 완성한 작품은 인왕산 주봉 암벽을 그린 유화다. 암벽에는 일제가 새긴 ‘천황폐하 만세’, ‘소화 14년’ 등의 문구가 선명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민 작가는 “소화 14년이 1939년이어서 두 작품을 함께 걸었다”고 설명했다. 손장섭은 1980년대 민중미술 역작으로 꼽히는 ‘역사의 창’ 연작 가운데 광화문을 소재로 한 1981년 작품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나무를 그린 2012년 작 ‘울릉도 향나무’를 내놨다. 그는 2000년대 이후 민중의 삶의 터전인 자연 풍경과 신목(神木)을 주로 화폭에 담아 왔다.기와지붕 위 망자의 붉은 옷이 나부끼는 신경호의 1980년 작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불러 넋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5·18민주화운동 직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그려진 이 그림은 “붉은 치마가 빨갱이 단체의 상징 깃발 같다”는 이유로 국가에 압류됐다가 20년 뒤에 돌려받았다.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에 거침없는 칼날을 들이댔던 혈기 왕성한 청년 시절을 공유한 이들은 40년 세월을 건너오며 각자의 예술관과 표현 방식을 심화하거나 영역을 넓히는 변화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노원희, 성완경의 작품에서 보듯 불평등과 차별, 분단의 질곡이 엄존하는 2020년 상황에 대한 비판의 시각은 여전히 날카롭다. 박재동 작가의 말처럼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하고 있는 지금, 그림은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자문한다. 본관 전시장 안쪽 공간에 마련된 프로젝트룸에선 작가가 직접 기획한 현장 진행형 공동 작업이 매일 벌어진다. 박불똥은 화실을 꾸려 동료 작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임옥상은 흙 드로잉 작업에 관객을 초대한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김구 처단은 의거”… 서북청년회 후계자들 남북 신뢰를 깨다

    “김구 처단은 의거”… 서북청년회 후계자들 남북 신뢰를 깨다

    일부 ‘서북청년’들의 난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저지, 주민들의 호소에도 대북전단을 마구 살포하며 남북의 신뢰를 파탄 내고 있다. 결국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남북 관계의 이정표이자 신뢰의 상징이었으니 난동은 성공했다. ‘서북청년회’(서청)가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극우세력의 칼과 몽둥이가 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테러하고 린치했던 단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영화 ‘지슬’의 내용은 대부분 ‘서북청년’들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실제 만행이었다. 약탈하고 능욕하고 토끼몰이를 하고, 학살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대검으로 할머니를 난자하고, 며느리를 겁간한 뒤 찔러 죽이고, 시신 옆에서 피 묻은 대검으로 사과를 깎아 처먹었다. 육지에선 백색테러로 민족지도자와 양심적인 지식인을 암살하고 진보적 사회단체들을 파괴했다. 백범 김구 등이 희생됐고 학생과 교사들이 린치를 당했으며 노조나 언론사가 파괴됐다. 다음은 ‘만인보’(지은이 고은)의 ‘선우기성’(전 서북청년회 집행위원장) 내용 중 일부. “이승만의 두 주먹이 돼…, 38선 이남이 떨었다, 모든 도시 촌락들,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댔다.” ●“이승만의 두 주먹 돼… 38선 이남이 떨었다” 그러나 김구도 제거되고 군과 경찰이 정권의 폭력으로 자리잡자 이승만은 ‘서청’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들은 더러운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제거해야 했다. ‘서청’을 이끌던 김성주의 운명은 상징적이었다. 1954년 5월 29일 김성주 사형집행 소식이 일간지에 짧게 보도됐다. 5월 6일 고등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니,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간’ 그의 삶은 그것으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가족의 요청에도 군은 시신을 내주지 않았다. 5월 6일 선고 공판엔 김성주가 출정하지 않았다. 4월 7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의 구형은 징역 7년에 불과했다. 이듬해 1월 국회에 ‘김성주 살해 및 암장 사건 규명 청원’이 접수됐다. 국회는 진통 끝에 진상조사를 의결했다. 하지만 심증만 확인했지 실체적 진실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적법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등을 처벌하라는 내용의 보고서만 채택했다. 진실이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4·19혁명 이후였다. 다음은 동아일보 1960년 8월 5일자 관련 기사의 주요 내용. 1954년 4월 16일 오후 1시 헌병총사령부 소속 지프가 3군 육군형무소에서 빠져나왔다. 지프 뒷자리엔 한쪽 눈이 실명한 듯한 미결수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김성주였다. 지프는 아현동 한 민가에 머물다가 어둠이 깔린 뒤에야 신당동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관저로 이동했다. 관저 앞 공터엔 지휘관용 군용천막이 있었다. 그날 밤 천막 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시신은 천막 인근의 헌병총사령관 방공호로 옮겨져 암장됐다. 시신은 6월 10일께 화장됐다. 김성주. 평안북도 출신으로 1946년 초 월남했다. 5월 평안남도 출신인 문봉제와 함께 탈북한 뒤 부랑하는 서북청년들을 모아 ‘평안청년회’(평청)를 결성했다. 평청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평청은 출범 후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옥 파괴 및 점거 등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잇따라 탈북 청년단체가 등장했다. 11월 함북·함남청년회, 황해회 청년부 등이 서북청년회로 통합됐다. 이승만, 조병옥 등은 경찰이 내놓고 저지를 수 없는 린치, 암살 등 테러를 서청에 맡겼다. 서청은 1947년 3월 1일 중도 및 좌파의 삼일절 행사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 사건 등도 서청의 짓이었다. 사회단체나 신문사를 습격했고 노조에 침투해 노동운동을 파괴했다. 그런 활동에 비례해 친일기업과 우익 정치인의 후원이 쏟아졌다. 1947년 9월 귀국한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은 우익 청년조직을 대동청년단으로 흡수하려 했다. 김구와 이승만 모두를 지지했던 선우기성 서청 집행위원장 등 다수파는 찬성했다. 이승만의 단정노선만 지지하던 문봉제나 김성주 등 강경파는 통합을 거부하고 서청(‘재건 서청’)을 이어 갔다. 테러는 더 극렬해졌다. 선거를 방해하고 독립지사를 암살했다. 5·10총선 땐 이승만을 무투표 당선시키기 위해 민족지사 최능진의 출마를 막았다. 제주도에서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군정의 실정에 지쳤던 제주도민의 민심은 1947년 경찰의 삼일절 행사 발포사건으로 돌아섰다. 육지 출신의 유해진이 새 지사로 임명됐다. 그는 4월 20일 부임하면서 서청 출신 7명을 경호원으로 대동했다. ‘서청’이 제주도로 몰려가는 물꼬였다. 그해 11월 서청제주도단이 결성됐다. 이듬해 4·3사건 이전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서청 회원은 제주읍 300명, 면마다 40~50명 등 760여명에 이르렀다. ●서청제주도단 결성해 주민 학살·약탈 이들은 이승만의 사진이나 태극기를 강매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멀쩡한 주민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해 가족들로부터 금품을 뜯어냈다. 심지어 ‘보급이 시원찮다’는 이유로 제주도 총무국장을 두들겨 패 죽이기도 했다. 이런 만행은 이듬해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 봉기의 한 원인이 됐다. 당시 미군정청의 특별감사 결론은 이러했다. “(서청에 의존한 유해진 지사는)반복적으로 무능함을 드러냈고 폭력적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 했다.” “테러 행위를 수없이 자행했다.”(넬슨 특별감찰보고서)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더 많은 서청을 제주도로 보냈다. ‘14연대의 제주 파병’ 문제로 터진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서청 1000여명을 경찰이나 경찰보조원 혹은 국방경비대로 제주에 투입했다. 제주도는 피바다가 됐다. 1949년 6월 26일 김성주의 직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김성주는 자랑하고 다녔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내가 안두희를 시켜 백범을 죽였다.’ 안두희 공판일에는 회원들과 떼거리로 법원에 몰려가 ‘안두희는 민족의 영웅’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김성주가 함께 모의했다는 ‘88구락부’ 멤버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김태선 서울시경국장, 정치 브로커 김지웅이었다. 이승만은 김성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김성주는 미군에 줄을 댔다. 서청 회원들과 함께 미군 극동군사령부 직속의 북파공작대인 켈로부대에서 활약했다. 미군은 보답으로 그를 평안남도 도지사에 임명했다. 문봉제를 이미 평남 도지사로 발령했던 이승만은 분노했다. 전선이 교착되자, 이승만은 김성주 소령을 예편시켰다. 1952년 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성주는 무소속 조봉암 후보 편으로 돌아섰다.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이승만을 비난한 것이 빌미가 돼 헌병대에 체포됐다. 1954년 1월 김성주는 두 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국가변란이나 대통령 살해 음모. 하지만 군 검찰조차 혐의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김성주 살해·암장 진실 사망 5년 뒤 드러나 1960년 8월 군검합동조사단은 원용덕 자택 2층에서 한 장의 밀서를 발견했다. “김성주는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 그는 외국인이 임명한 평양지사였다. 이는 반역사건이기 때문에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지만, 당신에게도 명령한다. 신속하고 아주 조용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2014년 9월 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추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위원장 배성관은 일베에 이런 글을 올렸다. “서북청년단원 안두희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였다.” 앞서 2005년엔 자유개척청년단(단장 최대집 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란 ‘서북청년단의 정신 계승’을 표방한 단체가 결성됐다. 박상학, 박정오 형제는 자유북한운동연합, 큰샘이란 단체를 만들어 대북전단 살포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막아도 막무가내다. 이들 앞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벌벌 떤다’. 그러면 현대사의 저주, 서북청년단의 망령은 무엇으로 부활하는가. 4·15총선 때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태구민, 지성호 등 두 탈북자를 지역구(서울 강남갑)와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했다.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은 ‘국가적 망신’이라고 반발했다. 서북청년들을 괴물로 만든 이승만은 문봉제 서청 회장을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과 교통부 장관에 중용했다. 부회장 김성주는 ‘아스팔트 위의 김창룡’이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70년간 외면한 한국군 위안부 300여명…“아픈 과거사 직면할 때”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군 위안부라는 또 다른 아픈 과거사로 이어졌다. 일본군 장교 출신의 한국군 장교들은 동족과 싸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고스란히 심었다. 일본 우익에서는 한국군 위안부를 두고 피장파장의 오류로 왜곡시키기도 한다. 1996년부터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 교수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우리 정부가 한구군 위안부라는 아픈 과거사에 대해 진상조사하고 사과할 때”라며 “자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도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1951년 5, 6월부터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으로 교착되며 지난한 장기전이 시작됐다. 이에 한국군은 전선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공식적으로 ‘특수 위안대’를 만들었다. 군의 공식 문서에 확인된 곳만 서울, 강원 강릉, 춘천, 원주, 속초에 이른다. 때로는 최전선에서 교대휴식하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을 출동시켰고, 섬에 있는 부대에는 따로 위안부를 배치했다. 당시 서울은 행정 복구가 덜 된 데다가 일제시대부터 있던 군부대 시설에 떨어져 있었기에, 서울에서 군 위안부는 민간인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그러나 군이 마을을 빼앗아 주둔하던 속초는 달랐다. 속초 주민들과 주둔하던 미군 폴 팬처는 “시청 인근에 있던 군 위안부 앞에 육군이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이들은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낮에는 밥과 빨래 등 일을 노예처럼 하고, 밤에는 성착취를 당했다”고 증언한다. 위안부는 일반 병사들이 ‘총알받이’를 한다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제5 보급품’이었다. 고위 장교들은 북에서 데려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 포로를 ‘첩’으로 삼았는데, 병사들이 이를 좋게 볼리도 없었다. 납치된 이북 여성이나 북한군이 점령할 당시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됐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장교들은 일반 병사에게 너희들도 북에서 여성들을 데려와 같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 3, 4개를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5연대도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제는 모두 위안부대 건이었다.……우리 연대는 위안부대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티켓을 나눠줬고, 훈장을 받았다면 우선권을 줬다.”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육군과 장교들의 기록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군 공식 기록을 통해 추산할 수 있다. 1956년 육군본부가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기 위해 ‘후방전사(인사편)’를 펴내면서 특수 위안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서울 1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총 79명)라는 기록과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1개 소대(총 89명)를 적은 표를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와 강릉 3개 소대에 약 128명의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 김 교수는 “여기에 춘천, 원주, 속초 등의 위안부와 1953년 서울에 추가로 설치된 4개 소대를 합하면, 전국 위안부는 약 300명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또한 ‘후방전사’의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에 따르면 서울과 강릉의 4대 소대에서 위안부 89명이 1952년 한 해에만 20만명이 넘는 군인을 ‘위안’했다. 단순 계산하면 위안부 한 명이 하루 평균 6명 이상의 군인에게 성착취를 당한 것이다. 소대별로 들여다보면 서울 제2소대(중구 초동 105번지)가 그해 8월 1명의 위안부가 상대한 군인수가 한달 평균 269.6명(하루 8.7명)으로 가장 많았다. 1952년 4월과 8월 강릉 제1소대(강릉 성덕면 노암리)에서도 30명의 위안부가 1명당 한달 평균 266.7명(하루 8.6명)을 ‘위안’했다. 1954년 3월에야 특수 위안대는 없어졌다. 김 교수는 “이들은 직업 여성이 아니라 대부분 납치된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목격자들이 “치장하지 않은 매우 어린 여성으로 보였다”고 증언하고, 한 북파 공작원은 김 교수에게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여성을 납치해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 리영희 교수도 1988년 첫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역정’에서 “낙산사 주변 방공호에서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는데, 병사 한명이 자기 고향에서 흘러온 아가씨를 만나 눈물에 젖었다”고 적었다. 복수의 증언자의 소개로 김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들을 찾았다. 이들은 “나는 자식들을 키웠을 뿐”이라며 낯선 연구자에게 울음만 토해냈다. 다만 당시 의대생이던 정씨는 국군에게 부역자로 몰려 위안부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피난을 가지 못한 학생들과 인민군을 치료했다는 이유에서다. 정씨는 “○○여대다. ○○여중생이다 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국군들은 우리를 인민군에게 버림받은 찌꺼기로 여겼다. 친구 3명과 나는 부대 장교 4명에게 배정됐지만 한 군인(남편)의 부탁으로 빠져나왔다. (헤어진 친구 3명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못 다한 얘기는 가슴에 묻은 채 관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원류가 조선시대 기생제?”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특별 위안대의 설치·운영 책임자는 육군본부 후생감(휼병감)이다. 위안대가 만들어진 1951년 무렵 부임한 장석윤 후생감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0여년을 일본군,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뒤를 이은 김병길 후병감도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 출신이었다. 김희오 장군은 회고록 ‘인간의 향기’에서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됐다.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 앙양을 위한 발상을 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의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정면 반박한다. 조선시대에는 군 위안부가 없었고 일제시기부터 생겨났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조선시대 전통적 기생은 예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고 제물포(인천) 등지를 조차하면서 예인이 지워진 기생이 등장하고 러일전쟁 때 확산됐다. 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없었다면 한국군 위안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역사 왜곡도 경계한다.장군들의 회고록에는 위안부에 대한 반성이나 문제의식을 찾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공론화가 한국군 위안부의 ‘불편함’을 일깨웠다. 김 교수는 “상급 장교들은 ‘자신을 왜 일본군 취급을 하느냐’며 위안부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여성을 납치한 군인은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일본인과 달리 정이 통한다’고 변명했다. 또 다른 군인은 ‘위안소를 이용하면 빨리 죽는다는 소문이 돌아 나는 이야기만 나눴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고 리영희 교수는 “사실 내가 강릉 부대에 있을 때 위안부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인권 의식이 부족해서 전쟁 체험담으로 기록을 했는데, 부끄럽다”고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군 당국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김 교수가 2002년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외압도 이어졌다. 당시 재직하던 학교를 통해 청와대와 국방부는 ‘조용히 연구하라’고 전했다. 지금도 군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함구하며 외면하고 있다. 육군 관계자는 서울신문에 “한국군 위안부 관련 진상조사는 한 적이 없다”면서도 “후방전사 인사편에는 특수 위안대 관련 일부 내용이 기술돼 있으나 지금까지 기술된 내용 외에 구체적인 사료나 자료가 없어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또한 “관련 희생자 위령사업 등에 대해 현재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일부 한국군 간부들이 위안부를 설치·운영했다’는 “학계의 주장에 대해서는 육군에서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픈 과거사 진상조사해야…일본에도 더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김 교수는 공개되지 않은 군 자료 가운데 진상의 실마리가 숨어 있을 것으로 본다. ‘후방전사’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일본군 위안부처럼 한국군 위안부가 일주일 2회 군의관에게 성병 등을 검진받도록 했다. 기초 신상과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는 단서가 기록됐을 것으로 본다. 발굴 작업은 김 교수의 은퇴 이후 연구 목표이기도 하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지만 군 위안부는 다뤄지지 못했다. 전쟁 중 만연했던 성범죄도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여순 사건 등 직권조사한 사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피해자나 유가족이 신청한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만들어지기 전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김 교수는 성폭력 사건과 한국군 위안부를 다루자고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연말쯤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 교수는 “내년부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황룡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보리밭 갈다 끌려간 아버지… 유해안치소도 없이 ‘떠돌이 신세’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 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 두려워 금정굴 쪽은 쳐다도 안 봤어요”

    “어려서는 내가 금정굴을 하루이틀 걸러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거길(굴 위를) 건너뛰고 그랬지요. 그런데 아버지 죽고 나서 한 20여년 동안 한 번도 가지를 않았어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얼씬도 안 하고 싶더라고요.”(이병순 금정굴유족회 고문)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고봉산 자락에 있는 18m 깊이의 수직 폐광 ‘금정굴’. 한때 ‘금구뎅이’라고 불렸던 영광의 기억도, 동네 꼬마들이 폴짝폴짝 뛰놀던 추억도 온데간데없다. 금정굴은 이제 ‘무덤’이다. 1950년 10월 9일부터 25일까지 고양·파주 지역의 민간인 160여명이 ‘빨갱이’로 낙인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졌다. 7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은 한 몸 온전히 누일 곳 없이 떠돌이 신세다. 1995년 유족들이 발굴 작업을 벌여 153구 이상의 유해가 세상에 나왔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만 76명이다.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납골당만 세 차례 옮겼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로 결론 내렸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위로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했던 평화공원 설립도, 영구적인 유해 안치소 설치도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애가 끓는다. 부역 혐의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금정굴 쪽은 애써 외면했다.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다. 서울신문은 24일 채봉화(74) 금정굴유족회장과 이병순(87) 고문을 만났다. ●“묶여서 끌려가던 행렬 속 아버지, 금정굴 저승 가는 길이었네” 1950년 10월 9일. 당시 열일곱 소년이었던 이 고문의 뇌리에는 70년 전 모습이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다. 집 앞에서 두 사람씩 삐삐선(군용통신선)에 묶인 채 이동하는 행렬을 목격했다. 맨 뒤에 아버지 이봉린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무렵 이봉린은 능곡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엔군 환영대회에 나갔다가 치안대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한 시기 ‘농촌위원장’을 맡아 공출량을 계산하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산리 구장(區長)을 했었거든. 동네에서 추켜세우는 사람이잖아. 주변에서 ‘형님이 일 봐야지’ 하니까 맡게 된 건데….” 어머니와 7남매는 잡혀간 아비의 끼니 걱정에 매일 번갈아 수십 킬로 걸어 밥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에서 “(부역 혐의자들이)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서 오늘은 밥을 안 받는다”고 했다. 이 고문은 “문산을 가는 줄 알았지 금정굴로 가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행렬을 몰래 뒤따랐던 다른 희생자 유족을 통해 이 고문 가족은 진실을 알게 됐다. “아이고, 심사가 뭡니까. 그 구뎅이로 가서 다 쏴죽였어요!” 장남이었던 이 고문은 그 길로 작은아버지, 마을 어른들과 함께 사다리와 밧줄을 챙겨 금정굴로 향했다. 시신이라도 수습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지 못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금정굴에 떨어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사람을 구했다. 총알을 빗맞은 덕에 목숨을 건진 동네 주민 이경선이었다. 금정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금정굴에서 학살이 처음 벌어진 이날 이봉린을 포함해 46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혀 침묵해야 했다. 그날 밤 이 고문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시체 가져왔느냐”, “빨갱이 찾으려고 금정굴에 갔다 왔느냐”고 화를 내며 장작 더미며 아궁이 구멍이며 죄다 창으로 쑤셔 댔다. “그날 금정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자전거를 탄 태극단 놈들이 서넛 올라오고 있더라고. 길이 엇갈려서 망정이지 거기서 마주쳤다면 우리도 다 죽는 거야. 일곱 사람이 갔었는데…. 그래서 잠자코 살았던 거지.”●“유해 발굴’ 뉴스 보고 45년 만에야 금정굴을 찾았어.”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말이라도 하지, 예전에는 아버지가 ‘빨갱이’로 돌아가셨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채 회장은 45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 채기동은 보리밭을 갈다가 총을 멘 치안대 3명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때 고작 네 살이었던 채 회장은 아버지와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졸지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금쪽같은 외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넋두리로 부친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셨지. 봉화야, 네 아버지 금정구뎅이 가서 죽었다. 남들이 그런다.” 채 회장은 금정굴과 가까운 파주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4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처음으로 금정굴을 찾았다. 뉴스로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해 듣고 동생과 함께 갔다. 채기동은 6년 동안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다. 채 회장은 “9척 장신에 원체 기운이 장사라 인근에서 아버지를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더라”고 했다. “총을 멘 치안대가 당신을 찾으니 도망가라”는 말에도 채기동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당당했다. ‘부역자 가족’의 삶은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채 회장은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봇짐 장사를 하려면 도민증이 필요했는데 우리한테는 도민증 허가를 안 내줘서 어머니가 ‘꼼짝없이 죽겠다’며 우셨다”며 “핍박받으면서 세 딸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했다. 채 회장이 끝까지 파주를 떠나지 않은 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채 회장 가족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부역 혐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마을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다. 어머니는 “내가 죽어도 넌 반드시 이 동네에 살면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두고 보라”는 말을 남겼다.●아직 끝나지 않은 금정굴 사건 “신도시 주민들은/발 밑이 저승인 사실은 모른 채/오래전 이 마을을 휩쓸고 간/역병보다도 더 고약한 숙청은 모른 채/두개골 정강뼈 쇄골 잘근잘근 밟으며/황솥밭 샛길을 오갈 뿐이다”(손세실리아, ‘뼈무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온 유족들은 긴 싸움을 했다. 승리도 수차례 맛봤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결정하면서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고 희생자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 혐의자 가족이거나 이와 무관한 지역 주민이었다”고 했다. 2012년에는 국가 배상 소송에서 승소해 “희생자 2억원, 배우자 1억원, 부모·자식 각 5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확정됐다. 수차례 무산됐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안’도 2018년 고양시의회에서 통과됐다. 그럼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가 제대로 된 위령시설 없이 떠돌고 있고 유족이 겪는 고통도 여전하다. 일부 보훈단체 회원들은 아직도 희생자를 ‘토착 빨갱이’라고 부른다. 보수 정당 시의원은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희생자들은) 김일성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금정굴 현장에 조성될 계획인 평화공원은 “납골시설이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채 회장은 “지금 희생자들을 임시 안치한 세종추모공원은 너무 멀다.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모시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족들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죄도 없이 잡혀가 죽고, 설령 죄가 있다고 해도 재판 한 번 열지 않고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 동족상잔 70년, 기록으로 기억하다

    동족상잔 70년, 기록으로 기억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평화를 이야기할 무렵, 한반도는 치열한 전투 끝에 두 개로 쪼개졌다. 이후 70년, 누군가에겐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처지만 대다수에게 한국전쟁은 그저 빛바랜 역사일 것이다. 반짝 평화모드였다가 다시 강대강 대치를 이어 가는 오늘의 남과 북을 거슬러 70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책들이 눈에 띈다. 한국전쟁을 가장 오래 취재한 미국 사진기자의 생생한 컬러 사진집과 함께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집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면, 한국전쟁 70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한국전쟁: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이상호 지음/섬앤섬/328쪽/1만 9000원●가려졌던 진실, 생생한 증언들 ‘한국전쟁: 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은 냉전이라는 거대담론이나 미시적인 국내 기원론 대신 한국전쟁의 발발을 다른 시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우선 우리 시선을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이 아니라 1945년 2차대전 종전 직후로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미일 관계 등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관계 정립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의 갈등 결과가 바로 한국전쟁이라는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맥아더 전문가인 저자는 이를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 당시 맥아더 미국 연합국최고사령관이 일왕을 전범으로 기소하는 데에 왜 반대했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죄를 제대로 묻지 않은 까닭에 한국전쟁은 일본 재건을 위한 발판이 됐고, 한일 관계의 왜곡을 불렀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1948년 주한미군 철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첫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가 어떤 생각을 했고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설명한다. 한국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미8군 사령관 워커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흥미롭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신기철 지음/역사만들기/308쪽/1만 8000원‘전장의 기억과 목소리’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이 북한과 맞닿은 인천 옹진 주민의 목소리로 한국전쟁 전후를 다시 재구성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그 특성 때문에 해방과 분단의 중심에 있었다. 군인이 아닌데도 청장년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마저 전쟁에 동원됐다. “신도는 ‘대한민국’, 연결된 시도는 ‘인민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지역 주민은 말한다. “만약 덕적이 육지였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민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지역 민간인 학살은 섬이라서 더욱 잔혹했다. “빨갱이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며 두 손을 모아 “빨갱이님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했던 주민들의 기억과 증언이 한국전쟁을 좀더 생생하게 재현한다. 인민군과 국군의 교차 점령기에 벌어진 비극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1950/존 리치 지음/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320쪽/2만원●사진으로 보고, 소설로 생각하다 한국전쟁 관련 사진은 대개 전쟁의 참상만 부각하고 흑백사진이 대부분이라 다소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통신사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S) 도쿄특파원으로 일했던 존 리치의 사진집 ‘1950’은 당시 다양한 일상 풍경과 거리, 그리고 사람을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담았다. 리치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으로 급파한 미 해병대 상륙함에 동승해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3년 동안 한국전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책은 차 상자 안에 담긴 채 그의 고향 집에 보관됐다가 50년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사진 900장 가운데 150장을 추렸다. 한국군과 미군, 유엔군 장병의 현장감 넘치는 모습과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모습이다. 여기저기 총상을 입은 남대문, 절반이 날아가 버린 수원성, 여전히 모습을 보존한 서울역과 서울시청,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의 거리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이 썼던 코닥사의 전설적인 컬러필름 ‘코다크롬’으로 촬영했다. 고인이 된 리치는 책 서문에서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화가 온다/류재향, 한정영, 박미연, 강리오, 문상은 지음/서해문집/224쪽/1만 1900원‘평화가 온다’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작가 5명의 단편소설을 묶은 청소년 소설집이다. 단편 ‘한반도 특급열차 2050’은 한국전쟁 80년이 되는 2030년이 배경이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 그리고 북한과 만주를 거쳐 독일의 베를린까지 일주일간 달리는 열차 개통식에 초대받은 한아와 할머니 이야기다. 실향민의 후손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할머니와 손녀 한아의 속사정을 좇는다. 단편 ‘뼈’에서는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 해윤이 철원에 홀로 계시는 할머니 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마스코트 테디’에선 한국전쟁 당시 우연히 미군의 마스코트가 된 봉구처럼 독특한 인물의 서사를 그린다. 한국전쟁 당시 정찰 임무를 맡아 섬에 파병된 국군 범석과 북한군 병사 화수의 우정을 그린 ‘섬, 원추리´도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작가마다 여러 이야기를 펼치지만 소설의 지향점은 하나다. ‘전쟁은 잊지 말고, 평화를 생각하자.’
  • ‘추리닝 아저씨’와 백일장 키즈의 관촌 추억

    ‘추리닝 아저씨’와 백일장 키즈의 관촌 추억

    ●여고생 먼저 달랬던 피투성이 맨발의 이문구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20년쯤 됐을까. 다니던 고교의 문예반 선생님인 이정록 시인을 따라서 ‘백일장 키즈’로 살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날도 백일장 낙선을 차표처럼 쥐고, 친구 셋과 버스에 올랐다. 어디선가 위로 삼아 먹겠다고 산 치킨 두 마리를 들고. 버스가 청라저수지를 거쳐 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모두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갔다. 드넓은 저수지가에 여고생 넷이 모여 앉아 치킨을 뜯었다. 저수지 근처의 허름한 슈퍼에서 환타 두 병과 콜라 두 병을 사 온 것까지는 좋았다. 음료에 취해 급기야 ‘H.O.T냐 젝스키스냐’ 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나가 버려 결국 싸움이 났다. 격하게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콜라병이 깨졌고, 누군가 울었다. 백일장에 낙선한 설움까지 겹쳐 울음은 매우 길었는데 그 소리를 따라왔는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치킨 뺏으러? 해코지를 하려나? 별로 깨끗하지 못한 속옷 상의에 낡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 게다가 맨발이었다. 치킨과 유리병들을 치우지도 않고 도망치듯 벗어났다. 정류장에서 조용히 저수지가를 걷던 그 ‘추리닝 아저씨’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깨진 병 조각을 밟은 것이었다. 아저씨의 상처와 타야 할 버스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그러다 슈퍼로 뛰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연고와 두루마리 휴지를 얻었다. 상처가 꽤 깊어 보였는데 아저씨는 자꾸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했다. 그날 인사는 하고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아저씨가 계속 미안해하는 우리에게 “내가 못 보고 밟았다”고 말해 줬던 것만 또렷이 남아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가 문예반 숙제로 읽은 ‘관촌수필’의 이문구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생님은 문예반 문학기행을 그 청라저수지가에 있는 이문구 선생 작업실로 가겠다면서, ‘선생께서 몸을 치료하기 위해 맨발로 저수지를 걷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추리닝 아저씨는 출타 중이었고, 동시를 쓰는 금은방 아저씨가 동행해 이문구 소설가의 흔적을 소개해 줬다. 그로부터 1년 후 서울의 한 백일장에서 특별 강사로 초빙된 추리닝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눈이 몇 번 마주쳤지만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따라 웃고, 말씀을 경청하는 척했다. 행사가 끝나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후 돌아서려는데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는 아연한 우리에게 한쪽 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얘, 나 다 나았어.” 투병 중에 특별히 외출하신, 거의 마지막 강연이었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야 알았지만 자꾸만 선생의 발치로 눈이 갔던 터라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산업화 이후 농촌소설의 계보 이어 간 작품 순천문학관에서 만난 김승옥 선생<‘작가의 땅’ 2회>은 내 책 ‘유빙의 숲’의 책날개를 오래 쓰다듬더니 ‘충남 보령 출생’이라는 문장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이문구’라는 이름을 써 줬다. ‘그분의 고향 맞다’며 나 역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순천문학관에 전시된 문인들과의 단체 사진 속에서도 이이가 ‘이문구’라고 큰 손짓으로 알려 준 김승옥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뒤에나 쓰였을 것이다. 김승옥 선생이 써 주신 ‘이문구’라는 글자와 ‘친구’, ‘보고 싶다’는 단어와 오래된 저수지의 기억을 짊어진 채 보령으로 갔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문구 선생의 마지막 제자이자 한때 금은방을 운영했고 지금도 동시를 쓰는 안학수, 소설가 서순희 부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두 분은 문학기행 이후 20년 만에 그 여고생이 이렇게 장성해 왔다며 대견해했다. 이러저러한 옛이야기를 하며 함께 반나절 정도 이문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보령 시내와 청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명천 이문구 선생은 보령의 관촌에서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남로당이었던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집안은 몰락했고, 처참한 가족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안 해 본 막일이 없을 정도로 생계를 위해 애쓰던 선생은 소설가가 되면 빨갱이로 낙인찍힌 집안의 내력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서라벌예대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김동리 선생을 만났다. 그의 소설을 특별히 아꼈던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기에 이른다. ‘한국 문단의 특별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는 김동리 선생의 예언대로 그는 유장하고도 능청스러운 사투리가 일품인 문장을 지닌 소설가가 됐다. 그리고 고향 마을 관촌에 흐르는 개울의 명칭인 ‘명천’(여울물소리)을 호로 삼아 깊은 물소리의 울음을 이름 앞에 뒀다. 바다에 수장된 가족들과 고향을 에둘러 흐르는 물소리마저 모두 담아내어 문장으로 어우르겠다는 뜻이었을까. ‘우리동네’ 연작과 ‘관촌수필’ 등의 작품은 고향인 관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다.그는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산업화 이후 변화된 농촌의 모습과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 전후 산업화를 맞이한 농촌의 적나라한 변화와 고향 마을 사람들의 애잔한 삶을 소설로 쓰며 끝까지 그들을 향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농촌 소설의 계보는 몇 보 퇴보했으리라 여기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는 전후의 이념 대립과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농촌의 모습들을 소설로 쓰는 데 천착했다. ●분열된 한국문단 감쌌던 든든한 맏형 그러는 동시에 좌우로 갈라져 있던 문단을 두루 보듬어 ‘한국 문단의 맏형이자 듬직한 일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불의의 시대에 온몸으로 싸우고 있는 문인들을 앞장서 도운 일화는 너무도 유명한 일이어서 다시 열거하기도 벅차지만 분명히 기억돼야 할 그의 큰 발자취다. 선생의 사후에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등이 공동 주관해 문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일화는 그가 얼마나 ‘사람을 널리 살핀 이’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한 예다. 생전에 선생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문학상을 만들지 말 것을 여러 사람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그를 잊을 수 없었던, 그가 이렇게 잊혀져 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던 사람들이 그의 고향인 보령에 문학관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문구 선생 단독 문학관이 세워지기를 바랐던 수많은 사람과, 향토사료관, 갯벌체험관, 이곤순 서예관, 보령문화원을 한건물로 묶어 넣고 그 2층에 문학관을 세우려는 보령시의 뜻이 충돌했다. 그 사이에서 유족들은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보령시는 이문구 문학관 건립을 중단해 버렸다. 유족들이 기증했던 유품들을 되찾아 가기까지 긴 시간은 또 말해 무엇할까. 이것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이고 이문구 선생이 나고 돌아간, 김성동·이혜경·서순희 소설가를 비롯해 안학수 시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인들의 고장인 보령에서 일어난 일이라니.선생이 돌아가신 지 17년. 내가 다시 이문구 선생의 작업실이었던 청라저수지를 찾아갔을 때는 수풀이 무성하고 인적이 끊긴, 개 세 마리가 작업실 마당에 묶여 있는 곳이 돼 있었다. 선생이 직접 심고 기른 매실나무와 소나무, 은행나무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집을 에워싸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음대로 우거진 수풀 때문에 작업실 마당까지밖에 진입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지병이 있던 선생이 직접 심어 생즙을 내려 마셨던 돗나물도 여전했고, 작업실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의 위용과 그들 모두를 곳곳에서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군락도 변함없었다. 그곳으로 나를 안내해 준 안학수·서순희 작가 부부가 옛일을 추억하며 애통해하는 사이 나는 전에 이문구 선생을 만났던 청라저수지가로 향했다. 주인이 떠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업실에 더 머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보령 시내의 ‘관촌수필’ 안내석이 있는 장소는 더 참담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주유소 옆 공터에 안내석이 옮겨져 있었고,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뀐 채였다. 선생이 태어나고 소설을 써서 기렸으며 종내에는 화장된 뼛가루까지 뿌렸다는 왕소나무가 있던 자리와 부엉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도 서 있지 못하고 함부로 옮겨진 채 덩그러니 서 있는 안내석이라니. 보살피는 이 없이 맞은 시간의 흐름이려니 싶었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것을 이렇게 사라지게 놔둬도 되는 것일까. 선생이 없는 자리와 그를 추억하는 말소리만이 두런거리는 오후였다. ●희미해진 관촌의 흔적… 들리지 않는 ‘명천’ 나는 그렇게 반나절간의 ‘문학기행’을 마쳤다. 한 작가의 생의 흔적을 더듬는 데 반나절이면 충분했던 그 시간마저도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가 머무르고 썼던 곳의 기억과 흔적들이 사라진 장소에서 다시 그의 문학을 톺아보는 일이야말로 ‘작가의 땅’이 응당 짚어야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리고 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러나 이 마음은 농촌의 변화와 고향 상실을 꾸준히 그려 냈던 선생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가족을 처참하게 잃고 고향의 물소리를 이름 앞에 둔 선생이 감내했을 시간에 견준다면 더욱더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그가 홀연히 돌아간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옳은 일일까. 물론 문학관이니 관촌수필 안내석이 한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문호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는 관의 행정과 선생을 기리는 사업들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이었을까. 누군가를 기리는 일에 특별히 정해진 방법이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강으로 가서 바다로 흐르는 물소리에 대해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선생의 이름 앞에 있는 ‘명천’이라는 지명이자 호를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기며.소설가 이은선 ■ 매주 월요일자에 싣던 아파트 시세표는 지면 조정 관계로 없앱니다. ‘문화기획’은 매주 화요일자에서 월요일자로, ‘2020 미래문화유산’은 수요일자에서 화요일자로 각각 옮겨 담습니다.
  • “39년 전 고문 트라우마 극복… 민주주의 기념 공간 ‘문지기’ 꿈 이뤄”

    “39년 전 고문 트라우마 극복… 민주주의 기념 공간 ‘문지기’ 꿈 이뤄”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박록삼 논설위원이 만났습니다1976년 지어진 치안본부(현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졌던 공간이다.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의 죽음은 지독한 비극이었다. 그 비극으로 한국 현대사의 물꼬는 새로 트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1976년 작품이다. 김수근은 한국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꼽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을 둘러보면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시인 서정주(1915~2000)나,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연상된다. 지난 26일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남영역 바로 곁에 있어 전철을 타면 늘 무심히 지나치는 곳이다. 대공분실 건물 곳곳에서 실용적 목적과 예술적 감성이 접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육중한 철문을 지나면 무표정한 검은색 벽돌로 지어진 7층 건물(김수근 건축 당시에는 5층)이 나오고 그 뒤편에 부드러운 곡선을 활용해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만든 뒷문이 있다. 거기에서 시작된 나선형 계단은 2~4층을 거치지 않은 채 5층만을 연결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 작품 층수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이 규칙적으로 빙글빙글 돌며 오르게 했다. 중세의 원형 감옥을 떠올리게 한다. 유신 시절은 중세 못지않은 야만의 시대였다. 눈이 가려진 채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끌려온 이들에게 세상의 끝에 홀로 내몰린 듯한 극도의 공포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5층에 있는 15곳의 취조실(고문실) 역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지그재그로 만들어졌다. 5층의 창문 또한 나머지 층과 다르게 좁게 만들어졌다. 자살 방지 목적이었다. 취조실 문을 열어 놓아도 다른 방에서 고문받는 또 다른 동료와 눈빛조차 나눌 수 없도록 절묘히 만들어졌다. 또한 15개 모두 똑같은 고문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방들이지만 크기와 구조, 색깔을 각기 달리했다. 예술가로서 김수근은 개성 없음과 단조로움은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그 실용과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무고한 간첩’들이 만들어졌고, 누군가는 주검으로 실려 나가 의문사로 처리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수근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나기 한 해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속죄의 기회도, 변명의 시간도 갖지 못했으니 영원한 논란의 대상으로만 남게 됐다.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공간. 그곳에서 많은 이들은 세상에 신이 없음을 원망하며 비명을 내질렀고, 살이 찢기고 뼈가 비틀리며 피범벅이 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마저 포기한 채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야 했다. ●2022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정식 개관 유동우(71)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유씨는 이곳의 ‘보안관리소장’이다. 유 소장의 설명을 들으며 공간을 둘러봤다. 2018년 12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경찰청으로부터 남영동 대공분실 부지와 건물을 넘겨받았고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민주인권기념관은 2022년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그냥 직함이 그렇고, 그냥 문지기입니다. 백범 선생이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를 하고 싶다 하셨잖아요? 저는 한국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공간의 문지기가 됐으니 백범 선생의 꿈을 대신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네요.” 그는 1980년대 노동자 기록문학의 고전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의 작가다. 노동운동, 학생운동 하는 이들의 필독서였고, 금서 목록에 들어 있었다. 또한 그는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핵심 활동가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 현장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접하고 스스로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깨쳤다. 이른바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도움 없이 홀로 근로기준법 등 노동 관련 법을 공부했다. 이어 인천의 삼원섬유에서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당연히 해고됐고 구속됐다. 1980년 5월 결성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의 핵심 지도부인 중앙위원으로서 전국을 돌며 노동자를 교육하고 조직화시켰다. 그는 1981년 8월 예비군 훈련을 받다 남영동으로 끌려왔다. 전두환 신군부는 전민노련과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등 처음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진행된 노학연대 조직에 용공을 덮어 씌워 와해하고자 했다. 이른바 ‘학림사건’이다. 유 소장은 자신이 끌려왔던 5층 10호실로 데리고 들어가 39년 전 처참했던 기억을 생생히, 하지만 덤덤히 떠올렸다. “벽과 천장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칠해진 방이었는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기더라고요. 그리고 풍채 좋고 잘생긴 사람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너 공산주의자지?’라고 묻고 ‘아니다’라고 했더니 다시 ‘그럼 사회주의자야?’라고 묻더라고요. 역시 ‘아니다’라고 하자마자 주먹과 발이 마구 날아왔습니다.” 조사관들은 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유 소장은 한참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게 됐다. 일제 고등계 형사로 ‘고문왕’이었던 노덕술의 부하였으며,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상사였고, 훗날 김근태 고문, 박종철 고문치사까지 모두 깊숙이 개입한 박처원 전 치안감이었다. 그때부터 유 소장에게 시작된 집단구타, 물고문 등은 꼬박 37일 동안 이어졌다. 광주의 피 위에서 집권한 신군부에게는 ‘용공 반국가단체 사건’이 필요했다. 갈비뼈 세 대와 치아 네 개가 부러졌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온통 피멍이 들고 퉁퉁 부었다. 경찰병원 응급실로 세 번이나 이송돼야 할 정도였다. 유 소장은 “자살하기 위해 창에 머리를 밀어넣어 봤지만 15㎝쯤 되는 좁은 창폭으로 몸이 들어가지 않았다”면서 “욕조 옆 콘크리트에 머리를 두어 차례 찍어 피가 줄줄 흘렀지만 죽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두꺼운 철문 밑을 가리키며 “빨갱이가 되길 원하면 빨갱이가 돼야 했고, 국가 전복 음모를 원하면 그렇게 돼야만 이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아니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용공 조작을 시인하면 무조건 사형당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아내와 당시 갓 한 돌 지난 딸,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굴복하지 않았죠. 저들의 의도대로 자백하는 건 동료들에게도 또한 못할 짓이라 판단했죠. 물론 끝내는 항복했지만요.” 고문 후유증은 컸다. 전민노련 사건 구속 이후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노동계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87년 13대 대선 때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구로구청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몸과 가슴속에 깊숙하게 새겨진 폭력의 트라우마는 곪고 곪아 결국 터지고 말았다. “집에 혼자 있으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졌고, 자꾸 총 들고 누가 잡으러 올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집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노숙도 하고, 구걸도 하다 뒤늦게 연락받은 가족들이 찾아와서 데려가는 생활이 10년 가까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2012년 재심 전민노련사건 무죄 판결 국가가 개인에 남긴 폭력은 깊고 뚜렷했다.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소장 이화영)의 도움을 받아 집단심리상담을 받는 등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좀더 정확히 깨달았다. 허리, 머리, 다리 등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국가폭력의 흔적에 대한 치료는 물론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 공포의 정체 또한 분명히 알게 됐다. 2012년 재심을 통해 전민노련 사건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힘겨웠지만 고문 후유증 또한 극복해 냈다. 자신의 책 제목처럼 단단한 돌멩이처럼 옛 노동운동가로서의 정연한 논리와 기억력 또한 완전히 복원됐다. 당시 정치 조직 사이 운동 방향을 둘러싼 갈등 및 이론 논쟁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40여년 전 책이 이달 초 다시 복간됐다. 많이 팔릴 것 같으냐는 물음에 그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채 다시 책을 냈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부끄럽기만 하다. 누가 보겠느냐”고 짐짓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이후 활동을 통해 직접 겪고 느꼈던 부분을 다시 책으로 써내면 어떻겠냐고 묻자 이번에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저야 지금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지만, 당시 민주화운동 내부에서 있었던 미세하거나 분명한 차이가 지금도 현실 정치 등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주주의가 한 걸음이나마 진전하도록 하기 위해 조금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만, 민주화운동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복판을 살아온 유 소장의 ‘또 다른 외침’이 기대된다. youngtan@seoul.co.kr
  • [홍희경의 패스추리TV] 고용보험은 다를까

    [홍희경의 패스추리TV] 고용보험은 다를까

    “전 국민 고용보험 첫 적용 대상으로 ‘대리기사’가 적합하다고요? 고용보험료 공동 부담 사업주를 특정할 수 있다는 논리인데, 대체 대리기사 본인도 모르는 사업주를 정부는 어떻게 특정한다는 건가요. 근로 형태가 예전과 다르니 고용보험 체계를 바꾸자는 청원은 귓등으로, 정부 방식에 현장을 끼워 맞추네요.” 며칠 전 통화에서 김종용 전국대리기사협회장이 답답함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전 국민 고용보험, 보험료 공동 부담 사업주. 낯선 단어들에 담긴 얘기는 이랬습니다. 당정청이 ‘전 국민 고용보험’이란 이름으로 고용보험 제도에 손을 대는 중인데, 일을 하면서도 고용보험 가입 대상에 못 들던 노동자까지 가입할 수 있게 하겠단 겁니다. 일을 하는데 고용보험 가입을 못 하는 이유는 고용보험료 절반을 내야 할 사업자가 명확하지 않았던 특수고용직 노동자…. 보험·신용카드 모집인, 건설기계 운전원, 학습지 교사, 택배·퀵서비스·대리기사 등을 위한 정책입니다. 고용보험이라는 사회안전망을 확대시키는 일이니 ‘착한 정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책은 디테일이 중요한 법이고, 모든 디테일이란 악마가 숨기 딱 좋은 곳입니다. 정부에 지목당한 플랫폼 사업자는 고분고분 보험료 절반을 낼까요. 고용보험료를 내는 것은 보험금, 즉 실업급여를 기대해서인데 대리기사에게 실업이란 무엇일까요. 대리기사 전용 앱을 설치하면 취업이고 앱을 지우면 실업인가요. 낮에는 퀵서비스, 밤에는 대리기사를 겸업한다면 이때 사용자는 ‘낮퀵밤대’? 디테일 속 의문이 여럿 떠오릅니다. 더욱이 고용보험 적용 대상 확대는 새로운 정책이지만 유사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 된 9개 특고 직군에 산재보험 가입자격을 부여한 지 십여년이 됐지만, 지난해 7월 기준 가입률은 13%대라고 합니다. 이조차 대리기사와 같은 플랫폼 노동자의 수를 제대로 파악한 뒤 집계된 가입률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대리기사 업계가 전국 대리기사를 20만명으로 보는 반면 ‘전속 사업자’에 속해 산재·고용보험 대상에 속한다고 정부가 보는 대리기사 수는 훨씬 소수여서 가입률이 과장됐을 여지가 큽니다. 정부 계산법을 따르더라도 저조한 정책효과입니다. 그럼에도 ‘전속 사업자’ 여부 대신 노동자의 소득 발생 여부에 초점을 맞춰 고용보험 체계를 재설계하자는 근원적 개혁을 주장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응답을 받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아직까지는 ‘보수 정권(2008년) 때에는 산재보험, 지금 진보 정권에선 고용보험’으로 재료가 바뀐 변주 수준입니다. 캐나다 정치인 토미 더글러스가 ‘마우스랜드’라는 풍자를 인용해 연설한 게 1962년이라니 어쩌면 누가 정권을 쥐든 반복되는 게 정치·정책의 속성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우스랜드에서 쥐들은 흰고양이와 검은고양이를 번갈아 뽑았지만, 뽑힌 고양이들은 쥐들에게 도움 되지 않는 정책을 가동시켰다 합니다. 수탈당하던 끝에 한 쥐가 쥐의 직접 정치를 제안하자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요. 쥐들은 그 말을 한 쥐를 “빨갱이”라며 감옥에 가뒀답니다. 현장에 맞춰 정책의 틀을 바꾸는 게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이유를 알듯 말듯 합니다. saloo@seoul.co.kr
  • ‘택시운전사’ ‘1987’ 보고 왜곡 사례 찾고… 올해는 랜선 교육

    ‘택시운전사’ ‘1987’ 보고 왜곡 사례 찾고… 올해는 랜선 교육

    지난 16일 강원 원주시 북원중 교사 이희정씨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유튜브에 8분 길이의 영상을 올렸다.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통해 1980년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영상·자료 수집과 판단용 학습지 제공 코로나19 여파로 전국 초·중·고교 학생들이 여전히 등교 개학을 하지 못하면서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관련 수업도 예년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교사들은 현장 체험학습이나 대면 교육이 아닌 온라인 강의와 학습 자료로 수업을 하고 있다. 이씨는 영상에서 5·18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빨갱이’라고 하는 등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고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 전남 순천시 별량중 교사 박래훈씨는 지난 14일 ‘5·18 왜곡 사례 찾기’, ‘헬기 사격 진실은’, ‘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할까’ 등을 주제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극우 인사 지만원씨의 글과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에 나온 주장을 제시하고, 학생이 스스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료를 수집해 판단할 수 있는 학습지를 제공하는 식이다. ●계기수업 토론에 온·오프라인 80여명 참석 박씨는 전남 지역 교사들과 함께 수업을 점검하고,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온라인을 활용해 계기수업을 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박씨는 “5·18민주화운동 인정교과서 집필 작업을 같이한 동료 교사가 교과서 내용을 바탕으로 학습지를 만들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공개수업을 진행했다”며 “현장에 30명, 온라인으로 50여명의 교사가 참석했다”고 전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코로나가 바꾼 교실…5·18 수업도 유튜브로

    코로나가 바꾼 교실…5·18 수업도 유튜브로

    지난 16일 강원 원주시 북원중 교사 이희정(34)씨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유튜브에 8분 길이의 영상을 올렸다.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통해 1980년 광주의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전국 초·중·고교 학생들이 여전히 등교 개학을 하지 못하면서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관련 수업도 예년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교사들은 현장 체험학습이나 대면 교육이 아닌 온라인 강의와 학습 자료로 수업을 하고 있다. 이씨는 영상에서 5·18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빨갱이’라고 하는 등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고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 전남 순천시 별량중 교사 박래훈(42)씨는 지난 14일 ‘5·18 왜곡 사례 찾기’, ‘헬기 사격 진실은’, ‘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할까’ 등을 주제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극우 인사 지만원씨의 글과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에 나온 주장을 제시하고, 학생이 스스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료를 수집해 판단할 수 있는 학습지를 제공하는 식이다.박씨는 전남 지역 교사들과 함께 수업을 점검하고,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온라인을 활용해 계기수업을 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박씨는 “5·18민주화운동 인정교과서 집필 작업을 같이한 동료 교사가 교과서 내용을 바탕으로 학습지를 만들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공개수업을 진행했다”며 “현장에 30명, 온라인으로 50여명의 교사가 참석했다”고 전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극좌 빨갱이’ 진중권, 보수진영 섭외 1순위 되다

    ‘극좌 빨갱이’ 진중권, 보수진영 섭외 1순위 되다

    15일 통합당 ‘총선 참패 분석’ 토론회 참석지난 2월 국민의당 창당식 ‘조국 비판’ 강연 진영 논리 벗어난 촌철살인 논평으로 각광‘스타 논객’ 브랜드파워에 언론 주목도 높아진보 진영의 대표 논객으로 꼽히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최근 보수 진영 행사에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극좌 빨갱이’라고 칭하기도 하는 진 전 교수를 향한 보수 진영 ‘러브콜’이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 전 교수는 오는 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는 ‘길 잃은 보수정당’ 토론회에 1부 발제자로 나선다. 2부 발제는 이준석 미래통합당 최고위원이 맡는다. 이 토론회는 통합당 오신환 의원이 주최하는 행사로 지난 총선 수도권에 출마했던 3040 후보들이 참석해 총선 참패 원인 등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통합당 관계자들이 당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진 전 교수를 부르자는 아이디어는 오 의원이 먼저 제안했다. 오 의원은 통화에서 진 전 교수를 초청한 이유에 대해 “외부자적인 입장에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우리(통합당 구성원)가 신랄하게 토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모시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간 여러 토론회·방송 등에 진 전 교수와 함께 출연하는 등 친분이 있는 이 최고위원이 섭외를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진 전 교수에게 발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면서 “사실 이건 우리가 컨설팅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의료 드리는 만큼 좋은 비판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섭외 수락 소식을 들은 오 의원은 진 전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확답까지 받았다. 진 전 교수는 각종 정치·사회 현안에 누구보다 신속하고 예리한 논평을 쏟아내며 각광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 논객’이라는 이유로는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거리가 먼 보수진영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다. 지난해 우리 사회에 공정성 화두를 던진 ‘조국 사태’는 진 전 교수와 중도·보수층의 접점을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진 전 교수는 조국 전 장관과 그를 옹호하는 지지층, 넓게는 현 정권과 여권에 대한 날선 비판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진보 지지층 일부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양극단 모두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사람들은 그가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사이비 논객’이 아님을 확인하게 됐다. 진보 진영 내부인사인 진 전 교수의 냉철한 지적은 상대 진영에 대한 보수 인사들의 감정적인 공격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간 것으로 풀이된다.진 전 교수가 지난 2월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당시 가칭 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연사로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공정·원칙·정직이 키워드였던 강연에서 진 전 교수는 ‘조국 사태’를 언급하다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울컥하기도 했다.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이 문재인 정권과 관련 없다는 발언 지금도 유효하냐’고 묻는 한 참석자의 질문에 그는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때는 제가 조국(당시 민정수석)도 깨끗하다고 했었다”고 답했고 이날 행사에서 가장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행사 직후 온라인에서 많이 읽힌 정치 뉴스 역시 ‘안철수’가 아닌 ‘진중권’으로 도배됐을 정도다. 진 전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한 온라인 논객으로도 활발히 활동한다. 최근엔 ‘엄마는 위대하다 정경심은 위대하다’는 손팻말을 들고 나온 조 전 장관 지지자를 가리켜 ‘엄마는 위대하다 최순실도 위대하다’고 비꼬는 한편, 민경욱 통합당 의원의 ‘총선 조작’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그 난리 바가지를 치고 증거는 쥐새끼 한 마리”라며 “하여튼 저 동네(통합당)는 희망이 안 보인다”고 쏘아붙였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진 전 교수처럼 ‘퍼블릭 인텔렉처’(대중지식인)로서 배경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명성을 쌓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 극히 드물고, 실제로 그는 중요한 국면마다 용감한 발언을 하는 덕성을 갖추고 있다”며 대중과 언론이 그의 입에 주목하는 현상을 설명했다. 다만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말을 하는 몇몇 지식인들에 대해 언론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며 진 전 교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중계하는 보도 행태는 경계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 “제주 4·3 사건 치유 방안 함께 만들어 갈 것”

    “제주 4·3 사건 아픔 치유 방안 마련에 함께 노력할 것” 경기도의회더불어민주당 제56차 정례브리핑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대표의원 염종현·부천1)은 제주 4·3 사건 72주년을 맞아 불행한 역사에 희생되신 분들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더 이상 아픈 역사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진정으로 역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만들어 갈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간곡히 요청 드린다. 제주 4·3 사건은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것이며, 여순사건, 한국전쟁, 빨치산 토벌로 이어지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의 출발점이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민족독립과 새나라 건설의 기대가 드높았지만,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냉전체제의 형성을 틈탄 친일세력의 재등장으로 이러한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그 와중에서 터진 비극이 제주 4·3 사건이다. 좌익과 우익이 정치권력을 두고 싸우는 동안 3만∼8만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제주도 전역이 초상집이 되었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빨갱이로 몰려 숨 죽이며 살아왔다. 1960년 4·19혁명과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조금씩 얘기가 나오다가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인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처음으로 공식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2003년 조사결과를 보고받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 400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했고, 2006년에는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3 위령제에 참석했다. 그 후 보수정권 하에서 잊혀졌다가 현 정부 집권 후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위령제에 참석하여 공식적으로 국가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4·3 사건의 진상은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았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며, 국가의 책임에 따른 배·보상도 진척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이 2017년 12월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고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오히려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부세력에 의해 희생자와 유족들을 ‘빨갱이로 모는’ 색깔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4·3 사건이라는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서를 말하기 전에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한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의 본질이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임을 분명히 하고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에서 진정한 화해와 치유의 출발점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희생되신 분들을 추모하며, 유족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진실과 반성에 기초하여 피해자와 가해자가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분들의 희생에 대해 부족하나마 배·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만들 것을 정부와 정치권에 요청한다. 아울러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업에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노력할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리며,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은 1360만 경기도민을 대표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 일부 교회 예배 강행에 경찰과 충돌도…성당·절은 한산

    일부 교회 예배 강행에 경찰과 충돌도…성당·절은 한산

    사랑제일교회 ‘집회 금지’에도 신도 몰려 코로나19 확산 억제를 위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지만 29일에도 일부 교회는 현장 예배를 강행했다. 전광훈(64·구속)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목사가 이끄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는 이날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서 ‘주일 연합예배’를 열었다. 이 교회는 지난 22일 예배에서 ‘신도 간 거리 유지’ 등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아 서울시에서 다음 달 5일까지 집회를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받았다. 위반하는 신도는 1인당 300만원의 벌금을 부과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장 예배를 강행한 이 교회에는 이날도 오전 9시쯤부터 신도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서울시와 성북구청 직원 110여명, 경찰 400여명이 출동했지만 교회 출입을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일부 신도 “종교 탄압하는 빨갱이들” 폭언 신도들은 이들에게 “예배방해죄로 고발하겠다” 등의 항의를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는 공무원과 경찰들에게 “종교를 탄압하는 빨갱이들이다. 북한에서 왔냐” 등의 폭언과 욕설을 쏟기도 했다. 오전 9시쯤 교회 주차장에 임시로 마련된 예배석에 놓일 플라스틱 의자 500여개를 실은 5t 트럭 한 대가 도착했지만, 경찰 제지에 가로막혔다. 교회 측은 경찰과 30여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손으로 의자를 옮겼다. 한 신도는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체온을 재고, 손 소독도 해서 괜찮다. 경찰이랑 공무원들이나 서로 거리를 두라 해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시는 사랑제일교회에 이미 집회 금지 명령을 내렸기에 오늘 예배는 엄연한 위반 행위”라면서 “철저히 채증해서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말했다.교회 측 “오시는 분들 막을 순 없지 않나” 이날 서울 구로구 연세중앙교회도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현장 예배를 강행했다. 이 교회는 등록된 신도만 예배 참석을 허용하고,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 차량도 모두 소독을 받게 했다. 교회 관계자는 “정부에서 권고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방역을 철저히 한다. 물론 온라인 예배가 권장되지만, 오시는 분들을 막을 순 없지 않나”며 현장 예배를 고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정의당 구로구갑 이호성 후보는 이 교회 앞에서 ‘주민들이 불안해하니 예배당 예배를 중단하자’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4주째 시위에 나섰다는 이 후보는 “연세중앙교회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교회라 주민들이 더 불안해한다. 교회가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도 250여명이 모여 현장 예배를 진행했다. 이 교회는 입구에서 신도들에게 스스로 문진표를 작성하고, 방명록에 이름과 연락처 등을 적게 했다. 예배당 안에서는 길이 2m 정도 되는 장의자에 1~2명씩만 앉았다. 이 교회 관계자는 “교회의 본분은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해 현장 예배를 진행했다”면서 해외 입국자를 확인하는 등의 확산 예방 조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3월 22일부터 4월 5일까지 종교 시설과 일부 유형의 실내 체육시설(무도장·무도학원·체력단련장·체육도장), 유흥시설(콜라텍·클럽·유흥주점 등)은 운영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그동안 집단감염이 발생했거나, 사업장 특성상 감염 위험이 크다고 분류된 시설이다. 이날 서울지방경찰청은 종교시설 497곳에 경찰 906명을 배치해 시청과 구청의 현장 점검을 지원했다.명동성당·조계사는 한산한 모습 이날 부산지역에서도 교회 10곳 중 3곳은 종교행사를 연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시는 이날 부산지역 교회 1756곳 중 31.8%인 558곳이 예배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지난 일요일 538곳이 현장 예배를 강행한 것과 비슷한 수치다. 한편 코로나19 예방 조치로 다음 달 5일까지 미사를 중단한 서울 중구 명동성당은 이날 인적이 드물었다. 이날 오전 10시쯤 개인 기도를 하러 오는 교인들을 위해 개방된 대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성당 관계자는 “종교 방송으로 주일 미사를 대신하고 있어 성당을 찾는 이들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역시 다음 달 5일까지 법회를 취소한 서울 종로구 조계사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입구에서 체온을 재고 방명록을 작성한 뒤 손을 소독하고 들어온 일부만 대웅전에 앉아 예불했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여수 정치권, ‘여순사건’ 논란 점화된 이유는

    여수 정치권, ‘여순사건’ 논란 점화된 이유는

    21대 총선을 앞두고 여수 정치권에 ‘여순사건’의 정당성 시비가 불거지고 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 정부의 토벌군 진압 과정에서 주민 1만 1000여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지난 1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군사재판에서 희생당한 민간인에 대해 무죄 판결을 했다. 억울하게 희생된 지 72년 만에 국가가 잘못을 인정한 사건이다. 하지만 아직도 여수·순천 등지에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로 낙인찍힌 채 통한의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많을 만큼 여순사건은 쉽게 사그러지 지지 않는 아픔이다. 이런 와중에 여수을 선거구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은 김회재 후보가 공식 자리에서 ‘여순사건’을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왜곡 발언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정의당 김진수 후보는 지난 24일 여수 마래터널 인근에 위치한 여순사건 위령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순반란 운운한 김회재 후보는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포문을 열었다. 정 후보는 “김회재 후보가 2018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여순사건을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명명해 여수를 반란의 도시, 여수시민을 반란군의 후예로 낙인찍었다”고 분노했다. 그는 “제70주기 여순사건 추모사업 실행위원장을 맡아 화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하였던 당사자로서 결코 김회재를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후보는 “검사장 출신의 김회재 후보는 변호사 개업 후 여수산단 대기오염 배출수치 조작사건에서 대기업을 변호하고, 서민 생계를 차단한 여수수산물특화시장 대표이사의 변호사를 맡는 등 돈과 권력을 쫓는 행보를 보여왔다”며 변호사 수임료 공개를 촉구했다. 무소속 권세도 후보도 지난 25일 보도자료를 통해 “김회재 후보의 여순사건 역사 왜곡망언은 있을 수 없는 일로 큰 충격이다”며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석고대죄하라”고 촉구했다. 권 후보는 “김회재 후보의 문제 있는 역사인식과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한 공감능력 부재에 심히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대해 김회재 후보는 “그런 발언을 했는지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남북을 갈라놓는 일곱 가지 심리 분계선

    남북을 갈라놓는 일곱 가지 심리 분계선

    월북하는 심리학/김태형 지음/서해문집/304쪽/1만 6000원 당신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 질문을 받은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대개 이런 모습을 떠올릴 듯하다. 가난해서 불행한 나라, 일상화된 감시와 처벌, 강제노동, 폭압적 권력에 유린당하는 인권, 곧 닥칠 수도 있는 국가 붕괴…. 사회심리학자인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책 ‘월북하는 심리학’에서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북한을 말한다. 학교와 직장이 즐거운 사람들, 갑질과 혐오에서 자유롭고 불안과 우울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 윗사람 눈치보지 않고 할 말 하는 사람들, 승자독식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 책 제목만큼이나 엉뚱하게 들릴 만한 ‘북한 이미지의 전복’이다. 하지만 그 예사롭지 않은 북한 모습은 모두 탈북자 대면 인터뷰, 개성공단 핵심 관계자나 노동자 진술, 북한 장기체류자 증언에서 건져올린 장면들이다. 그러면서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 인식을 ‘70년 묵은 편견’이 초래한 장애라고 규정한다. 책에선 북한과 관련한 편견을 생산하고 유지하게 만든 으뜸 용의자로 미디어의 허위와 왜곡 보도, 공포, 대북 우월주의를 지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왕래나 서신이 막혀 제한된 정보 탓에 미디어의 허위·왜곡 보도가 잇따른다고 꼬집는다. 총살당했다고 전해진 모란봉악단 현송월 단장이 몇 년 뒤 멀쩡히 예술단을 이끌고 남쪽을 찾은 게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종북빨갱이 낙인=사회적 매장’이라는 등식은 진보적 지식인이나 북한 전문가들조차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진리가 아닌 안전한 허위를 추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의 99%는 ‘북맹’이다. 편견에 기초해 남북을 갈라놓는 일곱 가지 분계선(돈, 관계, 개인·집단, 일, 마음, 권력, 국가)을 설정해 하나하나 허물어 낸 저자는 “역사상 모든 혁명은 그 혁명이 성공하기 전날까지 망상에 불과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매듭짓는다. “심리분계선을 넘어 남북 공감으로 가는 길은 틀림을 다름으로, 그 다름의 미덕을 인정하고 배우는 데 달린 셈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세월호 유족들 해처먹는다” 차명진, 통합당 부천병 공천 확정

    “세월호 유족들 해처먹는다” 차명진, 통합당 부천병 공천 확정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징하게 해 처먹는다”는 막말로 당내 징계까지 받았던 차명진 전 의원이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공천 심사를 통과, 경기 부천병 지역구에 후보로 나서게 됐다. 16일 통합당 경기도 부천 지역 경선 결과, 부천병에서 차명진 후보가 50.8%를 얻어 최환식 후보(45.2%)를 5%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차명진 전 의원은 감점 4점 처리를 받았지만 경선에서 승리했다. 무슨 사유로 공천점수가 감점된 것인지 공천관리위원회에서 밝히진 않았지만 평소 여러 차례 막말 논란을 일으킨 이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차명진 전 의원은 지난해 세월호 5주기를 앞둔 4월 15일 세월호 유족들을 비하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공분을 일으켰다. 그는 “세월호 유가족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 쳐먹는다”며 “자식 시체 팔아 내 생계 챙기는 거까진 눈감아 줄 수 있지만 세월호 사건과 아무 연관 없는 박근혜, 황교안에게 자식들 죽음에 대한 자기들 책임과 죄의식을 전가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파장이 커지자 그는 논란이 된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지만, 삭제 전후로 유튜브와 언론 인터뷰 등에서 ‘비하한 게 아니다’는 식으로 해명해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같은 해 5월 29일 당시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은 차명진 전 의원에 대해 당원권 정지 3개월이라는 징계를 내렸다. 차명진 전 의원은 세월호 막말 논란 이후에도 황교안 대표 지지 선언을 철회하는 등 각종 방송과 장외집회를 통해 더욱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세월호 막말 이후 6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문제 삼고는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외쳐야 한다”고 해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같은 달 문 대통령의 스웨덴 연설을 놓고도 “지진아 문재인”이라고 비난했다.차명진 전 의원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현 자유공화당 대표)의 의원 시절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6년 김문수 전 지사의 지역구(부천 소사)를 이어받아 2008년 재선했다. 의원 시절 최저생계비 1일 체험을 하고 나서 “6300원짜리 황제의 삶을 살았다”는 후기를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대, 20대 총선에서는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일베’라며 테러당한 대한의사협회 “면마스크 권고 안해”

    ‘일베’라며 테러당한 대한의사협회 “면마스크 권고 안해”

    박근혜 석방 요구한 의협 회장, 진보 유튜버에 봉변대한의사협회(의협)는 12일 진보 성향 유튜브 방송 ‘서울의 소리’ 편집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했다며 강력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의협에 따르면 지난 9일 오후 3시쯤 유튜브 방송 ‘서울의 소리’ 편집인 백모씨를 비롯한 3명이 대한의사협회 8층 회장실에 무단 침입해 최대집 회장에게 비방과 욕설, 고성을 지르며 이를 영상으로 촬영했다. 의협 측은 백씨 등의 언행을 제지하며 건물 내에서 퇴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날 오후 4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던 7층 회의실에서도 최 회장에 대한 비방을 이어갔다. ‘서울의 소리’는 다음날 무단침입을 통해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의사협회 최대집 응징취재…“의사들까지 빨갱이로 몰아!”’란 제목으로 게시했다. 박종혁 의협 대변인은 “대한의사협회 13만 회원은 코로나19라는 국가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백주대낮에 대한의사협회 회장에 대한 테러행위가 발생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범죄 행위”라고 말했다. 박 대변인은 서울의 소리 편집인 백씨와 신원불상자 2명의 범죄행위에 대해 건물침입죄 고소 및 손해배상 청구를 비롯하여 법적 조치를 하고, 유튜브 영상에 대해서는 법원에 영상 삭제 가처분 신청을 낼 방침이라고 덧붙였다.‘서울의 소리’는 2009년 10월에 설립된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로서 대표 백씨가 보수성향의 인사를 찾아가 고성과 욕설을 하는 장면을 녹화하여 ‘응징취재’라는 제목으로 공개하고 있다. 백씨는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분신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협 마스크 재사용과 면마스크 권고 안해 한편 의협 코로나19 대책본부는 이날 마스크 사용 권고안을 발표했는데 손 씻기,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감염 전파 차단과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을 공식 권고했다. 특히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질병이 없는 건강한 일반인도 보건용 마스크 착용이 감염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건용 마스크는 일반인은 KF80 사용으로 충분하며 KF94는 방어력은 더 높지만 장시간 착용이 어려워 효율이 낮다고 설명했다. 또 보건용 마스크가 아닌 외과용(치과용) 마스크 역시 필터 기능이 있어 감염 예방과 전파 차단 효과가 있으나 면 마스크의 사용과 마스크 재사용은 권고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책본부 전문위원회 염호기 위원장(인제의대 호흡기내과)은 “구로 콜센터에서의 집단 확진 사례에서 보듯이 인구가 밀집한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본격화되고 있다”며 “비록 외국에서는 건강한 일반인에게 마스크가 불필요하다는 지침이 있지만 국내의 상황을 고려하여 지침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이빨 자국 나도록 물려” 경찰, 강제진압 논란에 해명

    “이빨 자국 나도록 물려” 경찰, 강제진압 논란에 해명

    ‘문재인 하야’ 전단지 돌리면서 원색적인 비난강제진압 논란에…경찰 “중년 여성이 먼저 물어 피멍까지” 한 중년 여성이 경찰에 강제진압 당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해당 여성이 먼저 경찰관에게 폭행을 행사했다”는 경찰 측의 입장이 나왔다. 강제진압 논란에 대해 경찰 측은 “강제체포에 앞서 이 여성이 먼저 경찰관을 휴대전화로 때리는 등 폭행했다”며 “한 경찰관은 이빨 자국이 나도록 팔을 물려 피멍이 들었다”고 5일 밝혔다. 앞서 경찰은 지난달 24일 오후 8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역 역사 내에서 한 중년 여성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6차례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이 중년 여성은 ‘문재인 하야 7가지 이유’ 등이 적힌 전단지를 돌리고 “문재인 빨갱이”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경찰 관계자는 “소란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에 불응하고, 자기 이름이나 주거지 등 신분을 일체 밝히지 않아 현행범 체포 요건에 해당됐다”고 밝혔다. 해당 체포 장면이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소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 송파경찰서 관할 신천파출소 소속의 한 경찰은 이 여성에게 “신분증을 주지 않으면 현행범 체포하겠다”며 “3회 경고했다, 체포하겠다”고 말한 뒤 여성에게 다가간다. 여성이 손에 쥔 휴대전화로 경찰 머리를 가격하자, 경찰 2명이 여성의 팔을 뒤로 꺾고 무릎을 꿇린 뒤 수갑을 채운다. 진압 과정에서 목덜미를 누르기도 해 일각에서는 ‘과잉대응’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 여성은 유치장으로 연행됐다가 다음날 풀려난 것으로 전해졌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그 벽 때문에… 너와 나는 달라졌다

    그 벽 때문에… 너와 나는 달라졌다

    벽이 만든 세계사/함규진 지음/을유문화사/308쪽/1만 5000원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북방 초원을 석권한 돌궐의 명장 아시테 투뉴쿠크(646~726)의 비문에 적힌 말이다. 벽을 세워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이 같은 가르침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한데 깨달음과 현실은 달랐던지 인류는 인류가 됐을 때부터 벽을 쌓기 시작했다. 목책에서 석축, 성벽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광대한 지역을 가르는 장벽에까지 이르렀다.새책 ‘벽이 만든 세계사’는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던 장벽 가운데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고 평가받는 열두 장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로마 하드리아누스 장벽부터 파리 코뮌의 벽, 베를린 장벽, 비무장지대(DMZ)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벽 이야기로 세계사를 풀어낸다. 벽은 ‘자신들’과 ‘저들’을 구분 지음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도출해 내는 데 꽤 유용한 도구다. 파리 코뮌이 그 예다. 사람 위에 사람 있는 현실을 혁파하기 위해 코뮌 전사들은 바리케이드에 의지해 서로를 격려하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다. 이후 벽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비슷한 경우다. 밀려드는 적을 맞아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 시민들 스스로가 성벽의 일부가 됐을 만큼 동로마제국의 신화를 수호하는 방패이자 희생과 저항의 버팀목이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벽은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가장 확실하고 폭력적인 장치로 기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 등 여러 게토에 갇혀 근근이 목숨을 이어 갔다. 그중 다수는 홀로코스트 열차에 올라타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이 세운 이스라엘은 21세기 들어 자신들이 몰아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리 장벽 속에 가두는 전철을 밟고 있다. 호주의 토끼 장벽도 비슷한 사례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토끼를 막기 위해 세운 장벽이 종국엔 원주민 차별의 상징적인 장치가 됐다. 벽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두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장막을 드리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DMZ다. 군사분계선은 우리에게 ‘냉전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피해를 안겼다. ‘열전’과 달리 ‘냉전’ 중에는 적과의 피 튀기는 싸움이 없다. 대신 불안과 공포가 일상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불안과 공포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자신과 ‘다르’면 ‘틀리’다며 빨갱이, 적폐라고 헐뜯는다. 저자는 “‘남남 갈등’, ‘보혁 대립’, ‘남혐 여혐’이 모두 군사분계선과 이를 둘러싼 비무장지대 248㎞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책은 12개의 주요 장벽 외에도 상류층과 하층민의 거주 공간을 가르는 페루 리마 장벽 등 전 세계의 크고 작은 장벽 이야기를 책 굽이굽이에 펼쳐 놓고 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터키가 시리아·이란과의 경계에, 중국이 북한과의 경계에 각각 장벽을 세우고 있다. 전 국민이 부자로 살아가는 보르네오섬의 작은 나라 브루나이에도 외지인을 막는 20㎞짜리 장벽이 세워졌다. 저자는 “벽은 우리를 영원히 이분법의 속박에 갇히게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벽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역사적 상황에서 널리 통용돼 오던 이분법을 넘어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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